2011년 3월 31일 목요일

대한 하나님의 크신 의도

십자가 사건 이후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 대해 단 하나, 크신 의도를 갖고 계시고 그것은 그리스도가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때까지 변치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맨 처음 사도 바울에게 계시되었던 복음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이제.....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하심이라”(에베소서 3:3-9).

드러난 비밀은 간단히 말해서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여전히 이 땅에 있습니다! 머리는 하늘에 있지만 나머지 그분의 몸은 바로 이 땅에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가, 눈에 보이고 사람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그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에베소서 5:30).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골로새서 1:18).

이 말세에 하나님의 전적인 의도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하나님의 의도는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진정으로 나타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충만을 나타내어 어떤 죄인이라도 우리 안에서 다시 한 번 육신을 입고 이 땅을 걷고 계신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충만, 그분의 영광, 그분의 완전함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세상이 우리 안에서 소망과 그들의 필요에 대한 해답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분이 누구이신지 온전히 나타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점검하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인가? 나를 통해서 죄인들이 주님을 보도록 하려는 모습이 이것인가?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계시다면 성인 영화 상영관으로 들어가실까? 그분이 음란물 판매대를 서성댈 것인가? 그리스도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할 것인가? 그분이 간음이나 음행, 음주에 빠지실까? 속이고, 뒷말하고 더러운 이야기나 거짓말을 하실까? 그리스도가 바르지 못한 생활을 하고는 진리를 설교하려 하실까? 자신의 마음속에 흑암 주머니가 있는 데 빛을 전파하려고 하실까? 다른 사람에게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자신은 은밀히 간음하실까?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 단하나 하나님의 크신 의도를 우리 눈앞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분의 몸인 우리가 정직하게, 순전하게 그분이 누구이신지 비추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진정으로 나타내기로 마음을 정하십시오.

2011년 3월 30일 수요일

혼합하는 죄

구약성경에는 세상과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경고만한 강력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같이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린도후서 6:14-16).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사악한 애굽인들 앞에서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고자 하실 때 고센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나머지 애굽을 나누는 분리선을 그으셨습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애굽.....을 구별하리니....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출애굽기 9:4, 14).
하 나님은 세상이 그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나머지 불신세상과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강하신 팔이 우리를 모든 해와 악에서 구해주실 것을 믿으며 구원받고 승리하는 백성의 표본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세상(애굽)으로부터 분리하시는 이유는 오늘이나 고대 시대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다시금 자신의 백성과 이 사악한 시대 사이에 선을 긋고 계십니다. 온 천하에 그분과 같이 구원하시는 분이 없다는 것을 이 세대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대의 악한 자들은 더욱 더 강한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들의 주의를 끌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들을 죄에 대한 가책으로 강타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육체가 그리스도의 임재의 권능아래 나아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찔림을 받도록 하기 위해 성령이 퍼부어졌습니다.

진정한 제자에 대해 주님은 연이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요한복음 17:16).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한복음 15:19).

세상은 자기에게 속한 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분리되고 다르다는 특성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시옵소서. 그리스도께로 분리되어 세상과 진정으로 혼합되지 않은 자들만이 세상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한일서 2:15).

2011년 3월 29일 화요일

예수님의 재림

나는 예수님이 곧 오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열국을 모으시는 것을 봅니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신속하게 아마겟돈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태복음 24:3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절)

모든 징조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중동 전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랍 국가들의 혼란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파멸하자는 통일된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설교해왔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성령의 내적 감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그럴지라도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 이니라” (42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절).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6절).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말세의 마지막인 것을 느끼고, 감지하고 있습니까? 당신도 그분의 나타나심을 같이 고대하고 있습니까?

고개를 드십시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습니다!

2011년 3월 28일 월요일

경험 vs. 성경

나는 150여 년 전 죠오지 보웬 선교사가 기록한 말을 읽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의 모든 인간적인 경험은 성경의 시험을 거쳐야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우리의 깊어가는 두려움이 성경의 시험을 견딜 것 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이 성경의 시험을 견뎌낼까요? 그 동일한 시험을 견디어 낼 의심의 형태가 하나라도 있을까요?

상황에 압도되고 우리 마음에 의심이 들 때 우리는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모든 종류의 시련과 짓부수는 시험을 경험합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응이 성경의 시험을 견디어 낼까요?

오늘 당신이 삶에서 직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경제적 문제입니까? 실직입니까? 좋지 못한 건강이 문제 입니까? 불안이 엄습합니까? 이것을 어떻게 처리합니까? 현재 당신의 대응은 성경에 부합됩니까?

예를 들어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동하는 자는 물결에 흔들리는 배와 같다.” 당신은 이 성경말씀을 지나쳐 버리고 끔찍한 경험 때문에 계속 요동하시렵니까?

내가 소망이 없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 나는 여러 번 요동했지만 나의 경험이 성경의 시험을 충족시키도록 더욱 더 성령을 신뢰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경험보다 윗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감정들을 시험하도록 우리 모두를 도우시옵소서.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이 반응이 성경적인 것인가? 나의 감정들이 말씀에 부합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인정하도록 힘을 구하고 고치십시오.

믿음을 지키십시오!

2011년 3월 25일 금요일

방주로 들어가십시오

위대한 청교도 설교자 존 오웬은 1680년 4월9일, 회중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수년간 어김없이 나는 당신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재난의 시기에 대해 계속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된 죄에 대해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 같다고, 그리고 그분의 진노의 강력이 어떠할 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위험하고 괴로운 재난의 시기에 대해 내가 당신들에게 예고한 이 모든 것들.....이것들이 지금 모두 문앞에 놓여있으며 우리에게 엄습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 사회에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존 오웬은 런던을 삼켜버린 화재의 참화를 울며 지켜보았습니다.

오웬은 이러한 재난이 한 번도 일어나기 이전부터 그의 강단에서 신실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는, 어쩌면 우리 목에 까지 차오른 고통스러운 재난 하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만 하는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웬의 때와 마찬가지인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때 닥쳐오는 폭풍에 대한 대응은 오직 하나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웬은 눈물로 그의 회중에게 권고했습니다. “방주를 마련하십시오. 당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방주를 예비하십시오.” 그리고 이어 말했습니다. “이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길이 없고, 다른 방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이사야가 우리 주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그리스도) 바람으로부터 피난처가 될 것이며 폭풍으로부터 은신처가 되며 마른 땅에서 흐르는 강물일 것이며 황폐한 땅에서 커다란 바위의 그림자가 될 것이라.’ 이분이 우리의 방주입니다! 오직 그를 신뢰하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로 믿는 것 외에는 세상에 닥쳐오는 시험이나 고난으로부터의 안전이나 구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의심가운데로 빠지게 하려는 마귀와 그의 권세들을 포함하여 사방에서 위험을 감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의 화염 경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가 직면할지 모르는 모든 재난을 무사히 통과하게 하겠다고 맹세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다가오는 폭풍을 고요한 확신과 마음의 평강으로 대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당신 스스로의 방식과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들에 대해 죽고 당신의 생명 보존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아래 맡기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목자이시며 당신이 모든 것을 통과하도록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2011년 3월 24일 목요일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면 기도하는 목적이 별로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스스로의 선함을 나타내는 증표를 주시기를 기뻐한다고 납득했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하나님이 부요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자비가 크시므로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어떤 자에게나 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분은 죄를 사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언제나 호의를 베푸십니다.

시편 31:19-20은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믿음의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시편기자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말합니다.

어마어마한 은혜의 창고-은혜가 그분의 백성을 위해 쌓여 있습니다. 영광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속에 쌓여 있습니다!

나는 매일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은 내가 인생들 앞에서 당신을 신뢰하면 내 믿음에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당신이 약속하신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신선한 힘, 새로운 소망,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강이 더욱 필요합니다. 주님, 나는 오직 당신이 약속하신 것만 구합니다. 당신의 다정한 임재를 새롭게 느끼는 것이 가장 지고한 은혜입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나의 상입니다.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의인의 눈물

성경은 주님의 자녀들의 눈물이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여 선언합니다. 다윗이 말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편 56:8). 의인의 눈물은 그분께 너무도 소중하기에 보존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의 눈물들을 보존하신다면 나를 보존하시지 않겠습니까?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환상적인 듯합니다. 이런 말씀가운데서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만일 그분이 나의 모든 눈물을 계수하신다면 나의 피는, 나의 생계는, 나의 필요는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우리가 견디고 있는 모든 시련을 특별히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지 않는 한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그분의 병에 담으리라고 믿고 확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머리카락을 모두 세고 계시며 모든 눈물을 병에 담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을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영으로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과거 죄들에 대해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 시련당하고 스트레스 받던 때 흘린 모든 눈물, 길 잃은 영혼에 대해 흘린 모든 눈물이 그분의 책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울지 않아요. 거의 눈물을 흘리지 않아요.” 나는 영혼의 눈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보시는, 고통과 곤궁한 시기에 흘리는 내적인, 침묵의 눈물입니다.

당신의 눈물은 한 방울도 허비되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 놀라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2011년 3월 21일 월요일

종신 종의 표시

시편 기자 다윗은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Mine ear hast thou digged[pierced] KJV: 주께서 내 귀를 뚫으시고”(시편40:6 참조)}. 이 말은 자유가 주어졌으나 그것을 거절한 종에게 주인이 귀를 뚫는 관습(출애굽기 21:6 참조)에 빗댄 말로서 “주께서 나를 당신의 노예로 받으시고”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귀에는 내가 평생, 영원히 주님의 것이라는 표시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성령이 당신의 귀를 뚫도록 허용했습니까?

그가 자신의 시간을 전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데 드린다고 서약하였기에 이 종신 종에게 표시를 한 것입니다. 이 삶의 방식에 신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 나의 최고의 시간을 드리는 헌신으로 시작하여 거의 매일의 삶에서도 잘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장이나 직업을 모두 사임하고 전임 사역자가 되어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즈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족 부양의 책임을 저버리고 “믿음으로 나간다,”며 정착지를 떠나는 등, 속단하여 앞서나가므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훌륭한 일은 있는 자리에서 꿋꿋이 서서 주님께 더 양질의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 중심에 그리스도를 놓음으로 가족, 직장, 그리고 모든 것들이 그분을 중심으로 회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사고의 초점이 되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종신 종은 받기보다는 주는 사람입니다. 바울과 같이 그도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우리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종은 보상이나 개인적인 소득을 위한 섬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급료는 그의 주인에게 드리는 영광과 명예입니다. 전 생애를 섬김에 헌신한 진정한 종신 종은 주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표시를 합니다. 그는 주인의 이 표시를 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종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종신 종의 표시는 무엇일까요? 그의 주님을 거슬러 행한 가증한 일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우는 상하고 뉘우치는 심령이 그 표시라고 말씀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인은 송곳으로 귀를 뚫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망치로 마음을 깨뜨리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에스겔 9:3-4).

이 종신 종에게 있는 또 다른 표시는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세운 모든 계획, 계책들, 꿈들이 포기되고 주님의 염려와 짐들이 최상의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1년 3월 18일 금요일

선택에 의한 종신 종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출애굽기 21:5). 이 종에게는 딜레마도 없고 선택도 없습니다. 그의 결정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습니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는 세상 전부이고 그는 주인과 영원한 사랑의 멍에로 매어져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이나 주인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종의 삶은 자신의 주인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며 바울처럼 주인을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그의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종은 다른 어떤 세상적인 축복보다 자기 주인과의 친밀함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주인과 끝없이 교제와 친교를 누릴 수 있는데 누가 양이나 옥수수 또는 포도주나 기름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그의 가슴은 주인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흘러 이렇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내가 상전을 사랑하니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이 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간단히 말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로 충분하다! 그분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만큼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다. 온 세상에 있는 모든 부와 번영도 그분과 지내는 하루에 비교할 수 없다. 그분의 오른 손에 있는 즐거움은 인간이 아는 어떤 황홀경도 초월한다. 그분을 아는 것, 그분이 계신 곳에 있는 것, 하늘의 자리에 그분과 같이 앉아있는 것은 생명보다 나은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 것, 그분의 인도를 받는 것, 오직 그분이 명하시는 대로 오고 가는 것이 가장 수준 높은 삶이다.

당신은 아들이지 종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려 하십니까?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이 아들이었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립보서 2:6-7)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적을 짓밟으며 전능자의 막강한 왕자로서 오셨을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아버지의 관심에 온전히 헌신한 종신 종으로 오시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읽은 이 헌신된 종신 종은 그의 인생에 한 가지 임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곧 그의 주인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잠언 17:2)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유산을 염두에 두고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였기에 쉽게 순종하였고 아침부터 밤까지 깨어있는 모든 시간 동안 그는 주인께 자원하여 노예로 살았습니다. 죄의식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 그를 그렇게 몰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에게 순종하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2011년 3월 17일 목요일

종신 종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그분은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만 한다. 생명을 얻으려면 잃어버려야 한다. 강해지려면 먼저 약해져야만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역설적인 것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진정으로 자유하기 위해서는 매여야만 한다.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평생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신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지고한 형태의 자유와 해방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사랑의 노예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애정에서 나온 자발적인 항복으로서 사람이 아들의 지위보다도 노예상태를 더욱 위대하게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이 베푸시는 축복과 혜택에 마음을 뺏겨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 사로잡혀 있는 때에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이제까지 발견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곳을 향해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열도록 허용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는 것은 온전한 하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주님의 자녀는 누구도 자신에게 퍼부어진 축복과 혜택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축복과 번영보다 더욱 나은 것, 그분이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다양한 혜택들 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종신 종이란 자기의 주인에게 섬김의 맹세를 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출애굽기 21:2-6).

이것은 단순히 노예나 종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신 종을 유형과 그림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에서 그리스도는 주인이고 우리는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팔린 종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안식일이며 모든 죄수와 포로들과, 노예들과 종들이 풀려난 해입니다. 그리고 율법아래에서 팔렸던 우리는 은혜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으나 우리 선택에 의해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신 종입니다.

2011년 3월 16일 수요일

그분의 임재 안에 사십시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우리는 우리가 주목해 본 것으로 변해 갑니다. 우리 관심의 초점이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그 영향력을 펼쳐갑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본 것이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차지해 버립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것을 택했습니다. 구주가 그의 사고와 그의 설교와 그의 교리의 유일한 목적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그는 몸 가운데 있는 문제가 아니라 몸의 머리에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임재로 옷 입혀지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원수의 모든 권세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임재가 나타나기를 부지런히 기도하십시오. 당신이 진지하다면 그분의 사랑스런 눈길이 당신을 녹이고 당신이 깨어지고 참회하는 자리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 동일하게 부드러운 주님의 임재가 실로 당신 영혼의 심장과 생명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그분의 임재를 떠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의 팔에 기대고 모든 두려움이 떠나고 완전한 평강과 안식이 대신할 것입니다. 그분의 영화로운 권능을 옷 입고 죄와 사탄을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 하리라”(요한계시록 3:5).

교회는 “해를 옷 입은 한 여자....”(요한계시록 12:1)로서 말세에 들어갑니다. 이는 우리의 흰옷,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모든 정사와 권세를 넘어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복잡하지 않습니다. 실은 몇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분의 임재 안에 살고 믿음으로 하늘에서 그분 옆자리에 앉으십시오. 당신을 위해 아버지의 우편에 서 계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어느 것도 당신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고 스데반처럼 하늘에 계신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7:56 참조)

2011년 3월 15일 화요일

하나님의 강하신 손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부수시니이다”(출애굽기 15:6).

어떤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이 용서받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육에 대항하는 능력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한 본성으로부터의 “온전한 구원”에 대한 지식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크리스천 여러분,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고 그분의 강하신 손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죄는 아직 거하고 있으나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의 손의 힘으로 노예에서 해방되었다.”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려는 각성과 초인적인 노력의 시기에 얼마나 놀라운 격려의 말씀인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을 매우 꺼려합니다. 죄의 통치에서 구원받는 것이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의 자존심, 우리의 정의감, 우리의 신학이 허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의 예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무장을 하고 전쟁터에 나갔으나 모든 전투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사무엘상 17:47). 출애굽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14:8)그리고 홍해를 안전하게 건넌 후에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피가 이스라엘을 하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켰지만 하나님의 높으신 손이 육의 권세로부터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들은 안전을 체험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단번에 옛 원수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 닥쳐올 모든 새로운 적들에 대항해 그들을 무장시켜 줄 능력. 그 능력이 주님의 높고 강한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약속들을 능가하는 위대하고 귀한 약속들이 주어져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죄의 통치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천상의 자리에 우리를 앉히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죄를 미워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동의해서도 안 되고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당신의 죄를 감싸고 즐기며, 발붙이도록 놔두고 분쇄해 버리기를 거부한다면 언젠가 그것은 당신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죄를 미워하는 것을 연마할 때 까지는 육의 죄들에 대해 승리하기를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변명이나 유화적인 태도에 대해 일체 상관치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혼란과 고민을 야기하는 비밀스런 죄의 노예가 되어있습니까? 그것을 열렬히 미워하고 있습니까? 그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느낍니까?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심판으로부터 안전함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를 씻어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속죄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 앞서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그것은 온전히 구원받을 준비가 된 백성을 그분 자신에게로 확보하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유월절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했었으나 아직 구원받지는 않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아직도 홍해, 광야, 거인들과의 전투, 위압적인 성벽들과 적의 견고한 진들을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기 전에, 정욕과 유혹을(우리 현대의 거인들인) 물리칠 수 있기 전에 내가 그 피 아래에서 안전하다는 지식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육적인 적들이 앞에 도사리고 있으나 그 피는 나를 안전한 군병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 피아래서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확신이 없는 한 당신은 거인과 싸울 수도,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도, 압도적인 상황에 대항하여 꿋꿋하게 설 수 도 없습니다. 내 마음이 무어라하든지, 얼마나 죄의식과 정죄 감을 느끼든지, 무어라 속삭이는 음성을 듣든지 상관없이, 일점의 의혹도 없이 나는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나는 심판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의 문설주에 바른 그 피가 그분 보시기에 안전하게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안전에 의문을 갖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안전을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나 또는 각자의 선함에 기초해 정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어긴 자들 보다 더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더 높은 수준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전에 관한 한 그것이 오로지 그분의 순전한 자비와 은혜위에 서도록 하기 위해 우리 손에서 떠나도록 하셔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선함도 아니고 오직 그분의 자비위에 서도록 하기위해. 순종과 헌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것은 무교병이 아니라 그 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한사람도 개인의 어떤 잘못으로 인해 안전을 넘나들지는 않았습니다. 심판이 지나갈 때 까지 그들은 모두 안전했습니다. 순종은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를 고백하고 신뢰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자녀들이 두려움이나 불안, 죄의식에 잡혀 살도록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피로 완벽하고 절대적인 안전, 즉 안식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안전하게 지키고 네게서 심판의 두려움을 제거한 것을 보았으니 이제 나로 하여금 너를 육체적으로 구원하게 하라. 나는 너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안전케 했노라.”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안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에 단 하나도 덧붙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피는 완벽하게 우리를 보호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게 하며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로마서 5:9).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다방면에 걸친 그분의 자비와 인애를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닫힌 문을 여시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에게 쓰라고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십니다. 어떤 분은 이 메시지를 읽으며 자신이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닫힌 문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즉시 자신과 연관 지을 것입니다. 당신 얼굴 정면에 계속해서 잠겨있는 듯 보이는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금전문제일 수도 있고 당신은 어떤 기회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시도한 모든 것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 문들은 전혀 열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닫힌 문이 어떤 것인지 나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마치 하늘의 창문들과 문들이 모두 닫힌 듯이 보입니다. 하늘은 놋쇠 같아 통과할 수 없는 듯 합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닫힌 문은 당신이 많이 기도해 오고 있는 어떤 문제꺼리, 상황, 필요입니다.
어쩌면 오직 기적을 요하는 위기일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당신이 드린 간절한 기도와 간구에 대해 아직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계시록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문들을 열고 닫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3:7). 이것은 주님이 그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이름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칭찬했던 교회인 고대 빌라델비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가장 지극한 시련의 시기에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서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방치했다거나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님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명백히 사탄은 그들에 대항하여 거짓말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신의 흑암의 권세와 세력들, 지옥의 창자로부터 쏟아 붓는 거짓말하는 영들이 하나님이 모든 문을 닫으셨고 그분은 예배와 믿음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작은 능력을 가졌다고 말씀하신 이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이 문에 열쇠를 꽂고 여시기를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분이 닫혀있는 모든 문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며 그분만이 열린 문을 우리 앞에 놓으십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3:10).

이 시험의 때는 현재도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크고 불같은 엄청난 믿음의 시험이라서 많은 사람이 치명적인 불신에 빠질 것입니다. 진실로, 현재 온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이 견디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분의 약속들을 신뢰하고 그 약속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해도 믿음 안에서 기꺼이 죽으려고 하기에, 불신으로 떨어지는 전 세계적인 유혹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모든 문들을 여실 때, 바로 그 시간을 알고계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약속들 위에 서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2011년 3월 10일 목요일

그분의 온유하신 자비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고통스럽고 압도적인 상황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한 짧은 메시지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안식의 시간을 누리고 있거나 아무런 고통이나 슬픔에 처해있지 않은 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한 안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귀한 분들로서, 이혼, 마약에 빠지거나 감옥에 있는 자녀들, 배우자의 죽음과 같은 엄청난 내적 슬픔과 위기상황가운데 사는 분들에게서 수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그토록 사랑하는 한 여인은 화재가 나서 질식해 죽은 세 자녀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동성애 연인을 쫓아 남편과 자식을 떠난 아내로 인해 슬퍼합니다. 이런 사연이 줄줄이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슬픔과 고통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슬픔으로 고통당하고, 애통하고 고통가운데 사는 분들을 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시편 40편에서 다윗은 부르짖었습니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40:12-13).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40:16-17).

나는 17절에 있는 다음 한 줄로 인해 큰 복을 받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 하나님, 이 우주의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신다는 것을.

지금도, 바로 이 시간에도, 그분은 당신이 곤궁할 때에 당신을 생각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잃어버린 집과 가족으로 인해 슬퍼하며 비애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악몽은 끝날 것이다. 나는 오직 너희에 대하여 선하고 사랑하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다”(렘29:11:13 참조).

하나님은 당신에게 화가 나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괴로움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중압감을 느끼고 고독하거나 회한의 감정이 들 때, 기도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부으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생각하고 계시며 당신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2011년 3월 9일 수요일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시편 13편을 읽으며 이 복된 장에서 거둬들인 격려의 말씀을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편에 들어있는 말씀은 다윗이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주님,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잊고 계시겠습니까? 영원히 잊으시겠습니까? 얼마나 더 나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겠습니까? 얼마나 오래 내가 매일 마음에 슬픔이 있어야 합니까? 얼마나 더 오랫동안 원수가 나보다 높임을 받겠습니까?”

이는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고통당하도록 내버려두셔서 매일 아침 먹구름이 자기 위에 드리워진 채 일어나는 것같이 다윗이 느끼는 것처럼 들립니다. 잠시 동안 다윗은 절망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고립된 느낌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까? 나의 기도는 언제 응답될까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문제꺼리들이 우리를 엄습할 때, 구원이 멀고 소망이 없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중압감으로 인해 가라앉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읽는 어떤 사람은 해결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상황의 엄청난 중압감아래서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련가운데 잠깐만이라도 고요가 찾아오기를 소망하면서 완전히 절망에 빠지기 직전입니다.

자기 자신의 시련가운데에서 다윗은 물었습니다. “어느 때까지 내 영혼이 번민해야 합니까?” 그는 자신의 문제를 벗어나는 길을 궁리하며 계속 계획을 세웠지만 그의 전 계획과 모든 수습책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생각해 낼 것이나 실행 가능한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의 막바지에 처했습니다.

한 줄기 소망의 빛, 한 줌의 햇살을 보았으나 다시금 절망이 깃드는 것은 얼마나 마음이 동요되는 일인지요. 기억 하십시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사람, 경건한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주님에 대해 크나큰 신뢰를 갖고 있음을 증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윗도 이 시편에 묘사했듯이 어려운 시기들을 겪었습니다.

다윗은 이 절망의 구덩이에서 어떻게 빠져나왔습니까? “나는 당신의 긍휼을 의지하겠습니다...나는 찬송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의 시련을 통과하면서 계속해서 신뢰해야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폭풍이 심해도 우리의 귀하신 주님은 여전히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판의 백합화를 입히시며 바다에 가득한 물고기들의 매일 매일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먹이시나니...” 아버지의 눈은 땅에 떨어지는 단 한 마리의 새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먹이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를 방치해 두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일의 필요와 문제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훈계하셨습니다. “그분이 너를 돌보신다.”

진실로,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부르짖음에 귀를 돌려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믿음으로 계속 나아가십시오. 인내하며 그분을 기다리십시오. 그분은 결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2011년 3월 8일 화요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입니다!

이 글을 읽는 어떤 분은 예수님의 만지심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괴로움 당하는 사람들을 단지 손을 대기만 하심으로 고치고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에게 손을 얹으셨을 때 “열병이 떠났”습니다. 그분이 죽은 아이의 관에 손을 대셨을 때 소년이 살아났습니다. 소경의 눈에 손을 대셨을 때 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귀머거리의 귀를 만지셨을 때 갑자기 그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들이 예수님께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만져주심을 바”라였습니다. 그분의 부드러운 손길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그들의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데리고 왔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모두를 만지시기 위해 시간을 내시고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당신이 만약 주님을 진정으로 친밀하게 안다면 예수님의 손길을 알고있고 느꼈을 것입니다. 고독할 때, 낙심했을 때, 혼돈스러울 때, 몹시 고통스럽고 불확실할 때, 당신은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만져주심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 오셔서 나의 갈급한 영혼을 만져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그들 마음에 주님의 만지심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자신의 사악한 권세들과 함께 와서 불신의 생각들, 그리스도답지 않은 생각들, 두려운 생각들, 하찮은 생각들, 하나님이 불쾌하시다는 생각들 등등, 지옥에서 나온 생각들로 마음을 괴롭히고 부담을 줍니다. 정직한 신자들은 그들도 이렇듯 마음에 대한 공격을 경험했다고 당신에게 말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과 주님에 대한 의지를 부수려고 작정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의 만지심은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왔습니다. 그분이 한 번이라도 그러한 부르짖음을 무시했다거나 거절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당신의 부르짖음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당신의 필요에 자비롭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우리는 나병환자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하며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미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오늘 예수님과 따로 있을 장소를 찾아 나병환자가 말했듯이 그분께 말하십시오. “주님,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를 정결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당신을 만지시고 마음, 육체, 영과 혼을 고쳐주실 것을 기대하십시오. 주님의 손은 당신을 향해 뻗어있습니다만 그분은 필요를 구하는 부르짖음, 도움을 청하는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또한 기대하는 부르짖음이기도 합니다.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26:6-9).

2011년 3월 7일 월요일

파기 불가한 약속

하나님은 이 지상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파기 불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짓밟고자 할 때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사52:6)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네가 극심한 시련가운데 있을 때 내가 와서 너에게 말할 것이다. 너는 내가 ‘나는 예수, 네 구원자니라. 두려워 말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은 심한 폭풍이 부는 가운데 배 안에서 격한 바람과 파도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들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자기들에게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14:26). 이 두려운 순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14:27).

나는 예수님이 왜 “안심하라(Be of good cheer (KJV)”는 이 특정한 말을 쓰셨는지 궁금했었습니다.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왜 이 말을 쓰셨을까요?

Cheer 라는 말은 “안도하다, 행복하다, 두려움에서 놓여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 제자들이 곤경에 놓여있을 때 예수님은 이 말을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이 자신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네가 폭풍가운데 있을 때 내가 너에게 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기록되었으되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라 내가 여기 있느니라’(사52:6). 이제 내가 너의 폭풍가운데 너에게 왔다. 나니 예수라. 이 모든 와중에 여기 너와 함께 있다. 그러므로 안심하라.”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의 곤경의 때에 동일한 믿음의 반응을 우리에게서 기대하십니다.

2011년 3월 4일 금요일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함

하나님은 세상이 보기에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여 사는 사람을 항상 원하십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분은 보잘것없이 작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광야에 고립시켰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분을 신뢰하는 백성을 조성하기 위하여 그분은 그들을 시험학교에 입학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증언하기 바라셨습니다. “나는 어떤 시험이든지, 어떤 역경이든지, 내 능력을 초월하는 것들조차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냐고요? 하나님이 모든 시험에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분이 항상 나를 이끌고 나오실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를 주리게 하시며”(신8:3).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너의 시련을 연출했다. 마귀가 한 일이 아니다. 네가 필요로 했던 모든 빵과 고기를 내가 내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시라도 하늘에서 내려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네가 받기를 기다리며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잠시 보류하였다. 잠시 동안 그렇게 하였다. 나는 네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멈추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너를 구원할 수 있는 위기의 정점으로 너를 이끌어 가기 원했다. 네 지혜가 동이 나는, 인간의 무력이 드러나는 지점을 네가 경험하도록 허락했다. 그곳은 나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기적이 요구된다.”

오늘도 주님은 여전히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전능하신 것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교회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구원받지 못한 세상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원하십니다.

욥은 선언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이것은 엄청난 선언입니다. 특히 그가 이 말을 했던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욥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시험 중의 하나를 겪었습니다. 비극적인 사고로 자녀를 모두 잃었고 그 후 자신의 부와 소유물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건강도 잃어버렸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너무도 짧은 시간에 일어났기에 완전히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을 이 길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이 길이 결국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 계획은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실 만큼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연출되었습니다. 욥이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8-10).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가 견디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안다. 그분은 그 모든 것을 통과하는 길을 아신다. 지금 나의 주님이 나를 시험하고 계신다. 그분이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된 나를 이끌고 나오실 것임을 확신한다. 나는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지고 제련되고 정결케 되어 나올 것이다.”

2011년 3월 3일 목요일

여정을 위한 힘

지구상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사역을 맡길 수 없습니다. 당신은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거나 주교에게서 안수를 받거나 교단에서 위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사역에 대한 진정한 부르심의 유일한 원천을 드러내 줍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바울이 여기서 예수님이 그를 능하게 하시고 충성 되이 여기셨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사도의 개종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건이 있은 지 삼 일 후에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특별히 고통의 사역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6).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고후4:1)라고 말할 때의 그 사역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덧붙입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는 고통의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갖는 사역이라고 명백히 밝힙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이 사역에 대해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시험가운데 그에게 신실하실 것과 그를 능하게 하실 것을 보증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능하게하다 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힘을 공급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여정을 위해 충분한 힘, 그 이상의 것을 나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이 사역에 끝까지 신실하게 임할 수 있도록 나를 능하게 하신다. 그분으로 인해 나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간증거리를 갖고 나올 것이다.”

변화는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일어납니다. 사실은 우리를 집착하게 만드는 것에 의해 우리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은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있는 것에 의해 감화되고 영향을 받습니다.

나는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영적인 것들로 채우는 모든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종들은 그들의 눈을 순전하고 거룩한 것에 고정시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을 예배하고 믿음 안에서 자신을 세워나가는 일을 위해 양질의 시간을 보냅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서 그들의 성품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키시며 이러한 성도들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신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어렵고 폭발적인 고통에 대해 준비가 될 것입니다. 나태하고 게으르며 기도하지 않는 신자들은 마음이 낙담하고 붕괴하는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들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그들 안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공포로 인해 부서질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가 닥쳐올 때 그들은 전혀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안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3-5, 10). 우리는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까? 우리의 고통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더욱 빛을 발하게 함으로써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저 사람의 비결은 무엇일까? 어디서 저런 평강을 찾았을까?”라고 묻게 만들 때 우리는 진정한 부요를 제시해 줍니다.

2011년 3월 2일 수요일

자족

자족은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크나큰 시험이었습니다. 어찌 됐든 하나님은 그를 크게 사용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바울이 이 임무를 처음 받았을 때 그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9:20)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려고 조급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파기 불가한 약속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매달렸습니다. 현재로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사역하는 것, 즉 감옥에 갇힌 죄수, 선원, 강둑에 있던 여인들 몇 명에게 간증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이 사람은 전 세계에 걸친 임무를 받았으나 일대일로 증거 하는 일을 성실하게 행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능가하는 듯 보이는 젊은이들에 대해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세계를 다니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동안 바울은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은혜의 복음에 관하여 다투었던 사람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개종했다는 보고를 들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람들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 포기한 사람은 풍부에도 처할 줄 알지만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오늘날 세상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이제 너는 생의 종말에 이르렀다. 그런데 너는 저축도 없고 투자해놓은 것도 없다. 네 재산은 갈아입을 옷이 전부이다.” 나는 바울이 어떻게 대답했을 지 압니다. “아,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얻었다. 내가 말하건대 나는 승자이다. 나는 아주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들어 올리는 권세를 허락해 주셨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이제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생애에 오직 한 가지 목표만 있다. 우리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이다. 이 현재의 모든 고통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기쁨에 비교할 수 없다.”

2011년 3월 1일 화요일

포기로 가는 길

하나님은 우리가 타고 가는 높은 말에서 우리를 떨어뜨림으로써 포기의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바울에게 문자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그가 다메섹을 향해 말을 타고 자기 확신의 길을 가고 있었을 때 하늘로부터 눈부신 빛이 내려왔습니다. 바울은 땅에 굴러 떨어졌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한 목소리가 말하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바울은 자기 삶에서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으나 직접 체험하여 얻은 계시가 없었습니다. 그가 이제 무릎을 꿇었을 때 하늘로 부터 이런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5). 이 말씀들은 바울의 세상을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두려워 떨며 놀라, [바울이] 말했습니다. 주여 나로 무엇을 하게 하시려나이까?(Trembling and astonished, [Paul] said, Lord, what wilt thou have me to do? KJV)(9:6) {개역 개정 성경에는 없음}. 바울의 개종은 성령의 극적인 역사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해 포기의 삶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는 물었습니다. “주님, 나로 무엇을 하게 하시렵니까?” 그리고 그의 마음은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어떻게 당신을 섬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당신을 알고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육 안에서 한 일은 모두 배설물입니다. 이제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바울은 이것, 즉 “그리스도를 얻”(빌3:8)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야망도 없었고 그의 인생을 추진하는 다른 원동력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성공의 척도에 비긴다면 바울은 철저히 실패한 자입니다. 그는 아무런 건물도 건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방식은 다른 지도자들의 경멸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바울이 전파한 메시지는 다수의 청중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때로 그 말씀을 전파함으로 인해 돌을 맞았습니다. 그의 주제가 무엇 이었냐고요?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사역이나 성취한 일 또는 몇 사람을 개종시켰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에는 성공에 대해 단 하나의 척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바쳐졌는가? 우리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내려놓고 그분의 것을 받아들였는가? 동료의 압박에 굴하여 무리를 따라갔는가 아니면 오직 주님의 지시를 구했는가? 인생의 목적을 찾기 위해 이 세미나, 저 세미나를 찾아 다녔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충족을 찾았는가?

나는 한 가지 야망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들만을 더욱 더 말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말하고 행하는 아무 것도 가치가 없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기 원합니다. “내가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하므로 나는 내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