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30일 목요일

원수의 거짓말

우리가 시련과 유혹을 당할 때, 사탄은 이러한 거짓말을 들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너는 지금 포위당했고 빠져 나갈 길이 없다. 너보다 위대한 종들도 이보다 열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포기해버렸다. 이제 네가 무너질 차례다. 너는 실패자다 아니면 이런 일을 겪고 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뭔가 잘 못 되었고 하나님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히스기야는 시련가운데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사납게 대어드는 목소리, 용기를 꺾고 협박과 거짓말을 퍼부어 대는 음성을 멈출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선지자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이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주님이 네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자, 이제 네 문에서 사탄에게 말하여라, ‘너야 말로 멸망할 자 이다. 네가 여기로 왔던 그 길로 네가 또한 나갈 것이다.’”

히스기야는 원수의 계략에 거의 넘어질 뻔 했습니다. 실상인즉, 만일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에 맞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위기에 빠진 순간에 믿음과 기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힘을 길어내지 않는다면, 마귀는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에 조준하여 공격을 일층 강화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산헤립에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마왕아, 네가 나를 모독한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 그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의 주님은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분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히스기야와 유다를 바로 그 밤에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셨다고 말해줍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

오늘날 믿는 자들은 언약위에 서있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위에 서 있습니다. 그 피안에서 우리는 모든 죄, 시험, 그리고 우리가 직면하는 전투에 대해 승리합니다. 당신은 최근 마귀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당신께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련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당신의 모든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서도? 당신의 모든 의심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만일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앞서 모범을 보였던 다윗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이 가련한 자가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당신도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2011년 6월 29일 수요일

평안과 성령

예수님은 누구에게 그분의 평안을 주셨습니까? 당신은 아마 “나는 주님의 평안 가운데 살아갈 자격이 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은 것들과 힘든 싸움을 해왔다. 나의 믿음은 너무 연약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제일 먼저 그분의 평안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중 아무도 평안을 받을 자격이 없었고 권리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래지 않아 저주를 내 뱉을 복음 사역자에게 그의 평안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의 열정이 있었으나 또한 그분을 부인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쟁심이 강하였고 항상 인정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분이 영광 중에 그의 보좌로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좌우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 보다 더 의로웠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진노하였습니다. 도마의 경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의심에 빠졌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였고 그로 인해 예수님은 놀라시고 곤비하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가장 고통당하던 순간에 그들은 모두 그분을 저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조차도 제자들은 그것을 더디 믿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한 혼동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그들은 혼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그들은 이제껏 그들이 갖고 있던 일체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두려움, 불신, 분열, 슬픔, 혼동, 경쟁심,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문제투성이 종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나의 평안을 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선하거나 의로웠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재주가 있거나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부와 품꾼들이었고 순박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심중에서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그들 각자가 성령께 순종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약속은 그분의 평안이 전부였습니다. 그 평안의 충만함은 오순절이 되어야 그들에게 부어질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들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안을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 이 평안은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할 때 우리에게 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원하면 할수록 성령이 당신에게 그분을 더욱 더 보여주실 것이며,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평안을 더욱 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11년 6월 28일 화요일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

전 세계적으로 만물이 흔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중동사태에 집중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각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집중되어있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33:18).

우리 주님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모든 동작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시선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자녀들의 안녕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눈은 자신의 영적 몸인 각 지체의 고통과 필요를 응시하고 계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엇이든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그분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세상의 큰 전쟁들의 와중에서 조차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폭군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초점은 자신의 자녀들의 삶의 모든 상황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던 당시에 참새는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었고 두 마리에 한 페니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 미미한 생물들 중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떨어지다”라는 말은 새의 죽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람어로 이 말은 “땅위에 내리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떨어지다”라는 말은 작은 새가 미세하게 폴짝거리는 모든 동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눈은 참새가 죽을 때 그것을 주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 내려앉을 때에도 보고 계신다. 참새가 나는 것을 배울 때 그 새는 둥지에서 떨어져 땅위에서 폴짝거리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 새가 겪는 모든 미세한 어려움을 보고 계신다. 그분은 새의 삶의 모든 세밀한 부분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1). 진실로 그분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온 우주의 별들을 만드시고 세어놓으시고, 로마 제국의 모든 활동을 지켜보고 계시고, 은하계가 각각의 궤도를 유지하도록 하시는 그분이 시선을 당신에게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묻습니다. “그분께 너희는 더욱 더 귀하지 않느냐?”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놀라운 평안!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평안이 필요한 이유가 하나뿐이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14:30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방금 그분은 열두 제자들에게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요14: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바로 그 시각에 일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귀는 이미 유다를 자기 편으로 편입시켜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지옥의 권세로부터 능력을 받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마귀의 충동을 받은 군중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곧 다가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한 자, 사탄이 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투쟁에 대비하여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악한 자들의 손에 곧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탄이 자신의 평안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귀는 그분을 괴롭히고 낙심하게 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믿음을 붕괴시켜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피하도록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혼란 속에서 “모든 게 끝났다. 나는 끝까지 견딜 수 없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네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다. 와서 나의 평안을 마셔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직면하여 헤쳐 나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삶은 불안정하고 앞날은 소망이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이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는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어느 길로 돌아서도 당신은 더욱 스트레스와 혼동과 곤고로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겪고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삶은 마치 돌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마치 현대판 욥을 보듯 많은 시련을 견뎌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난 가운데에서 성령께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당신을 세례주시기를 구하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파탄에 빠졌다. 그런데도 그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로 결단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 오래 전에 포기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믿는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았다. 얼마나 놀라운 평안인가! 그것은 이해의 범주를 넘는 것이다.”

2011년 6월 24일 금요일

기적의 한 가운데에서

당신은 지금 기적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저 못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기적을 기다리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 없이 잠잠한 것 같아 당신은 낙심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증거를 하나도 보지 못합니다.

다윗이 시편 18편에서 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시편 18:6-9, 13-14).

이것들 중 아무 일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모두 다윗이 그의 영적인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믿을 때입니다. 그분이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을 때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간구를 무시하지 않고 계시다는 것을 믿을 때입니다. 오히려 당신이 기도했을 때 그분은 조용히 당신의 기적을 시작하셨고 지금까지도 당신을 위해 초자연적인 역사를 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기적, 우리 삶에 있어서 그분의 놀라운 점진적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저변에 깔린 기초적인 진리를 이해했습니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 하셨도다”(시편 18;19). 다윗은 선언했습니다. “나는 주님이 왜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지 안다. 그분이 나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즉각적인 기적들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즉각적인 이적들을 베푸십니다. 마태복음 16:9-11과 마가복음 8:19-2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천 명과 사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신 일을 상기시키면서 그들과 우리에게 오늘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서 그분의 점진적인 기적들과 그 역할을 주목하라고 요구하고 계십니다.

2011년 6월 23일 목요일

주님의 자비하심

고대 이스라엘에서 언약궤는 그리스도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날 강력한 진리인 주님의 자비를 상징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자비로운 구원의 피를 신뢰하고 영원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비웃고 거룩함을 조롱하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찢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조롱하거나 비웃는다면 심판이, 그것도 신속히, 옵니다. 당신이 그분의 자비로운 피를 짓밟는다면, 그분의 진노를 직면할 것입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궤를 훔쳤을 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이 일은 단순히 우연이나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분명히 우리를 치신 것이다,”라고 인정했을 때 까지 죽음의 파멸이 그들에게 닥쳤습니다. 한 밤중에 궤의 시은 좌는 심판의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다곤 우상은 법궤 앞에서 머리와 두 손이 끊어진 채 얼굴을 땅에 대고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사무엘 상 5:2-5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날 미국이 당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심판을 받았어야만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비웃고 그에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속주의나 영지주의의 권세 아래로 끌어오기 위해 원하는 대로 모두 해 보십시오. 하지만 당신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조롱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능력과 권위를 땅에 던지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예레미야 애가 3:22). 그러나 인간들이 그리스도이신 그 위대한 자비를 조롱거리로 만들 때 심판이 확실히 옵니다.

오직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그 자비의 혜택을 입고 있는 중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나라는 사회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제거하는 일에 있어 세상의 나머지 나라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조롱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고 그분은 이 나라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그분이 여전히 우리에게 복을 부어주시고 있는 이유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선함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로마서 2:4 참조).

우리는 미국의 현 상황에 대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끔찍한 부패와 조롱과 죄에 대해 슬퍼하지만 하나님이 온전히 통제하심을 알므로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하다는 것을 압니다.

2011년 6월 22일 수요일

예수님은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요한복음 6:5-6). 예수님을 빌립을 곁으로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여기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굶주려 있다.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을 먹일 만큼 충분한 떡을 사겠느냐?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의 사랑은 얼마나 엄청난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을 하실지 알고 계셨습니다. 위 구절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빌립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빌립에게 주시려는 교훈은 오늘날 우리 각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아니지....저렇게 하면 해결 되지 않을까. 아냐...”

빌립과 사도들은 단지 떡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떡집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돈 문제도 있었습니다....분배의 문제가 있었습니다....운송의 문제가 있었습니다....그리고 시간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모두 합해보면 그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황은 절대적으로 불가능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무엇을 하실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오늘 당신의 문제와 어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에게 오셔서 물으십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할까?”

빌립이 이렇게 말했어야 정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당신에게 맡겨드립니다. 이제 더 이상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우리의 위기상황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 말씀드려야할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당신에게 내려놓을 것입니다. 이 전체 상황과 내 전체의 삶을 당신의 보호아래 맡깁니다. 나는 당신이 내가 쓰러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실줄 압니다. 나는 당신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아버지의 입맞춤

우리가 천상의 자리에 앉혀 질 때 하나의 큰 축복이 우리 것이 됩니다. 이 축복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받아들여지는 특권을 말합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He hath made us accepted in the beloved[Christ], KJV)”(에베소서 1:6). 헬라어로 "받아 들여졌다(accepted)"는 말은 극히 총애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영어의 용법상으로는 “적합하다고 여겨졌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와는 다릅니다. 영어로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다”는 태도를 암시하면서, 참아줄 만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와 전혀 다른 경우입니다. 그가 사용한 “accepted”는 이렇게 번역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극히 총애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매우 각별하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 들이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묶인 사람들과 그리스도를 그분은 이제 오직 하나의 공동 인물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육은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성품을 처리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만 보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할 차례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쟁취한 승리에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안에 있는 천상의 지위가 주어졌을 때 오는 받아들여짐에 대해 생생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유산을 챙겨 방탕한 생활을 하며 탕진해버렸습니다. 이 아들이 도덕적으로, 정서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완전히 파산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모든 호의를 잃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분노에 차고 그를 혐오할 것이라고 두려워했습니다.

성경은 이 상한 젊은이가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 차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하늘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고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건한 슬픔을 통해 회개에 이른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탕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누가복음 15:18). 그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복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탕자는 자신의 죄로부터 돌이켜 세상을 뒤로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그에게 약속했던 열린 문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회개하며, 또한 나아가는 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탕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누가복음 15:20).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입니까! 죄 많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용서받았고 품에 안겼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무런 진노나 정죄도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입맞춤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11년 6월 20일 월요일

염려라는 이교주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족의 미래나 직장이나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 등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생활 방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들을 돌보시고 필요를 채워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알지 못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 이 단순한 말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일 무슨일이 일어날는지, 일어나지 않을는지 생각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염려한다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너희가 염려한다면 너희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을 할 따름이다”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든 염려를 그분께 던져버리고 계속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계속 그분의 신실하심 가운데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너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 받을 수 있도록 확실히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걱정과 불안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당황스러워 하지나 않을까 궁금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마치 하늘에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염려하는 것이 주님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모욕적인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천사들은 그들 끼리 얼마나 곤혹스러운 질문을 주고받겠습니까? “저희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없는가? 저희들은 그분이 자신들은 사랑하시는 것은 믿지 않는가? 그분은 저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두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저희들은 새들과 모든 짐승을 먹이시는 그분이 자신들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을 믿지 않는가? 저희들이 만약 그분이 모든 능력과 부를 소유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초조해하고 염려할 수 있을까? 저희들은 마치 그분이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지 않은 듯이 저희의 천부가 태만하시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당신에게는 천부가 계십니다. 그분을 신뢰 하십시오!

2011년 6월 17일 금요일

우리는 가족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을 청구하는 것은 복잡하고 숨겨진 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내 서재에는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해 쓴 책들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깊이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심오하여 독자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고 말 뿐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리는 아주 간단하여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그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온전히 납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것이 사실일수 있을까 물으시겠지요?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과 말씀하시고 그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구했던 모든 간구를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그분은 항상 내말을 들으셨습니다,” 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는 그분의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를 마치 그분 자신의 아들처럼 친밀하게 받아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어”(요17:21-23).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가족입니다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들과 하나 된. 우리는 자녀로서 갖는 유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지닌 채 입양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능력과 자원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공식이 아닙니다. 단순히 입 밖에 냄으로 능력이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이 우리의 간구를 지시고 자신의 공로로 인해 아버지 앞에 들고 가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분은 변호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아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우리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완벽한 신실하심의 수혜자들입니다.

2011년 6월 16일 목요일

상세한 지시와 명확한 결정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성령의 왕권과 통치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면, 그분이 당신을 지시하도록 하라!”

나는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이 영광스러운 경지에 완전히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발짝씩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이 말을 들었습니다. “성령으로 행하라.” 그런데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나는 사도행전 16장이 바로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그분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이고 명백하게 상세한 지시를 내리십니다. 당신이 성령 안에서 행하면 당신은 혼동 속에서 행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린 결정들은 구름에 가린 듯 흐릿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혼동 속에서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결정, 모든 움직임, 모든 행동에 성령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령은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이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그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분과 상의하지 않고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약 전체를 통하여 교회의 모토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아주 분명하게 “뉴욕 시로 가서 교회를 세워라” 고 말씀하셨기에 뉴욕 시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언제 가야하는 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마귀나 귀신도 나를 이곳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상세한 지시를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브로드웨이와 7번가 사이에 서서 울며 손을 높이 들고 서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곳에 나는 교회를 세울 것이다. 데이빗, 나에게 순종해라. 뉴욕 시에서 교회를 시작하라!” 타임 스퀘어 처치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명확하고 상세한 성령님의 지시에 따른 결과입니다.

2011년 6월 15일 수요일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바울은 “진노하심에 맡기라” (롬 12:19)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라. 그 일을 내려놓고 지나쳐 가라. 성령 안에서 살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한 상처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대하게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보다 더 죄의식에 빠질 것입니다.
  2.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닫혀 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 삶이 어긋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입니다.
  3. 우리를 거슬러 성가시게 참소하는 자가 계속 우리의 평강을 앗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데 성공하며 그가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4.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생각에 사로잡히도록 하여 우리를 더욱더 악한 죄 가운데로 몰고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한 것 보다 훨씬 더 나쁜 죄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 19:11)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분노가 가라앉을 때 까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분에 차있을 동안에는 결코 어떤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되며 어떤 행동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괘념치 않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성품이 지어져갑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듯이 우리가 용서할 때, 그분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은혜와 복의 계시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다음의 세 가지를 행함으로써 우리와 원수 된 자를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

1. 우리는 그들을 축복할 것이다.
2. 우리는 그들에게 선을 행할 것이다.
3.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4절 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011년 6월 14일 화요일

최고의 위험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최고의 위험은 우리의 환난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귀신을 봅니다. 가장 캄캄한 밤, 폭풍이 극도로 몰아치는 공포의 절정에 예수님은 자신이 홍수의 주인이요, 폭풍가운데 구원자이심을 계시하기 위하여 항상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를 타라고 명하셨고 그 배는 폭풍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배에 타라고 재촉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배는 흉흉한 파도를 향해 가고 있었고 물 위에 떠 있는 코르크 마냥 마구 흔들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분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산위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곳에서 그들이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에 실패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계셨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제자 중 한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아채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이 임무에 우리를 보내셨다. 우리는 그분의 뜻의 중심에 있다. 그분은 의인의 발자국은 그분 자신이 명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보라. 저것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분이 바로 여기 계시다. 우리는 결코 그분의 시야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하지만 제자 중 한 사람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폭풍 속에 그분이 계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결코 그들은 그분이 폭풍 가운데에 자신들과 함께, 또는 그들 가까이에 계시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실제로 물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배워야할 교훈이 단 하나 있습니다. 단 하나입니다. 심오하고 신비하고 지구를 뒤흔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인생의 모든 폭풍 가운데에서 그들의 주님으로 신뢰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저 그들이 가장 어두운 시련의 시기에도 자신들의 활기와 자신감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뿐입니다.

2011년 6월 13일 월요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는 그분을 대면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서 전도하기를 거부했을 때 두려움이 그를 주님의 임재에서 도망치도록 바다로 내몰았습니다.

실패보다 더욱 더 나쁜 것은 그에 수반되는 두려움입니다. 아담, 요나, 베드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났던 것은 그들이 그분에 대한 사랑을 잃어 버려서가 아니라 그분이 그들로 인해 너무도 분노하여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는 솔개처럼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실패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 후에 그는 지옥의 모든 거짓말을 동원하여 당신이 포기하도록 만들고 하나님이 지나치게 거룩하다거나 당신이 돌아오기에는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고 확신하게 만듭니다. 또는 당신이 충분히 완벽하지 못하다고 두려워하게 하거나 당신의 실패를 결코 만회하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모세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만약 모세나 야곱 또는 다윗이 실패에 체념하고 말았다면 우리는 결코 이들에 대해 다시 듣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하나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자기가 속였던 형과 다시 만났으며 새로운 승리의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으로 달려가 용서와 평강을 발견했고 자신의 전성기로 돌아왔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발자국을 되돌아가 처음 자신이 거부했었던 일을 행하고 도시 전체가 회개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베드로는 부인하였던 잿더미에서 일어나 교회를 오순절로 인도하였습니다.

1958년 내 작은 자동차안에서 나는 울며 앉아있었습니다. 나는 처참하게 실패한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곱 명의 십대 살인자들에게 증거 하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는데 법정에서 볼품없이 쫓겨났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어린 불량배들을 도우려했던 나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암흑의 시간에 내가 만일 포기해 버렸더라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가 잃어버릴 뻔 했는지 생각하면 몸이 오싹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내 실패를 직면하고 나를 위해 그분이 인도하시는 다음 단계로 계속 진행하도록 가르쳐 주셨던 것이 오늘날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2011년 6월 10일 금요일

우리의 평강이신 주님

그분의 이름들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믿는 것은 대적의 공격에 대항하여 훌륭하게 보호해 줍니다. 하나니은 호세아를 통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이것이 함축하는 의미는 강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들을 통하여 계시된 그분의 성품과 특성에 대한 친밀한 지식이 사탄의 거짓말에 대응하는 강력한 방패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있는데 곧, 여호와 샬롬 입니다. 이 이름은 사사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기드온에게 천사의 형체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사사기 6:22-24 참조). 이 여호와 샬롬은 정확히 무슨 의미입니까? 명사로서 히브리어 샬롬은 “완전함, 건강,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건강한 관계를 맺고 조화를 이루며 온전한 것을 함축합니다. 또한 초조하지 않고 내부적, 외부적으로 모두 평화로우며, 영적으로 또한 감정적으로 안식하고 있는 편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샬롬은 삶이나 사역에서 완벽함을 의미합니다. 동사로서 샬롬은 완전해지다, 끝내다 또는 화평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나는 이렇게 질문하라는 강권을 받습니다. “이 하나님의 특정한 이름이 나와 오늘날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샬롬은 노력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다. 나는 지금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을 대하고 있다. 어떻게 그분을 지속적으로 당연하게 여길 수 있을까? 왜 나는 마치 그분이 나의 은밀한 행위들에 대해 귀먹고 눈먼 것처럼 이 정욕과 함께 살면서 아직도 그분의 은혜를 시험하는가?”라고 우리가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주님의 샬롬을 절대로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떱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여호와 샬롬의 계시를 받을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대적에 대항하여 당신의 영을 초자연적인 힘으로 채우시면서 당신에게 인격적으로 “주님, 당신의 평강”으로 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평강은 획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2011년 6월 9일 목요일

오셔서 당신의 일을 내 안에 행 하소서

크리스천이 거룩한 삶에 대한 열심이 있다면-주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기 원한다면-내재하시는 성령이 약속하신 복과 자유를 누리는데 그가 실패하는 원인은 오직 하나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 이유는 불신입니다. 예수님이 불신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일을 행할 수 없으셨던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분의 영도 우리가 불신을 품고 있을 때 우리의 삶속에서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약속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모든 예수님의 추종자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전 존재로 그분의 약속을 믿으며, 그분이 믿음을 공급해 주실 것을 신뢰하며, 그분 자신의 말씀 그대로 성령을 붙들며 자신을 온전히 그분의 약속에 던진다면 그때 그 결과들은 전부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됩니다.

내 인생에서 나의 영원한 미래를 하나님의 약속들에 던져야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내 영혼에 닥칠 위험을 무릎 쓰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나는 이 도전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이 나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셨다고 믿을 것입니다. 나는 그분만이 나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쇠사슬로부터 나를 구원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찔림을 주시고, 인도하며 극복할 능력을 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그분이 나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며 또한 내가 당신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를 내안에 있는 당신의 영을 제한하지 않을 것ㅇ빈다. 나는 그분을 기다리고, 부르며 그분을 신뢰할 것입니다-살든지, 죽든지.“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4). 우리는 주님이 에스겔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일들을 해야 할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성령께 상기시켜드려야 합니다. “성령님, 천부께서 당신을 나의 마음속에 넣어주시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약속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나는 거룩하기 원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협조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로 하여금 그분의 길들에 행하며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행하실 계획이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맹세하셨고 당신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두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 그러므로 오셔서 내안에 당신의 일을 행하소서. 나는 이 약속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

2011년 6월 8일 수요일

주님의 비밀들

마태는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13:34-35)

오늘날 다수의 크리스천들에게 비유는 너무 단순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의하면 각 비유는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비유에는 감추어진 천국의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이 진리는 오직 부지런히 구하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비유들을 빨리 대강 훑어봅니다. 그들은 자명한 교훈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곧 지나쳐 다른 데로 갑니다. 또는 본인들한테 적용되지 않는다고 비유의 의미를 기각해 버립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비밀들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His secret is with the righteous” 그의 비밀이 의로운 자에게 있다 말합니다. (King James 영어 성경 잠언 3:32). {한글 성경에는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로 되어있음} 이 비밀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마태는 이것들이 예수님의 비유 속에 묻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숨겨진 진리는 크리스천들을 진정으로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발견하기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님의 비유를 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마 13:45-46) 이 비유에서 장사는 누구입니까? 장사라는 말의 희랍어 어근을 살펴보면 이 장사는 이곳저곳 여행하며 다니는 도매상입니다. 이 장사는 또한 감정사나 검사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말하면 값진 진주의 품질과 가치를 평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장사가 발견한 값진 진주임을 압니다. 그분은 매우 귀합니다. 그 가치를 계산할 수 없습니다. 장사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살 정도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이 진주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분명히 이 진주는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분은 다른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소유하듯이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아버지의 가장 귀하고 소중한 소유였습니다. 유일하게 한 가지만이 아버지로 하여금 이 귀한 진주를 포기하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 때문에 그리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밭에 묻힌 보물 상자입니다. 그분 안에서 나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이상 사역 안에서 목적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가족이나 친구 속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쌓아올려야 한다거나, 성공을 해야 한다거나 유용하게 쓰임을 받는지 느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무리들을 따라하려 하지도 않고 뭔가 증명해 보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기쁘게 할 방법을 찾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내 나름의 생각과 이론을 짜내지도 않습니다.

나는 내가 찾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보물, 나의 진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진주의 주인은 내게 다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데이빗,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입양하게 해다오. 나는 이미 내 아들의 피로 서류에 서명을 했다. 너는 이제 그와 함께 내 모든 소유를 물려받을 공동 상속인이 되었다.”

이런 거래가 어디 있을까요! 나는 자기 의뢰와 선행이라는 남루한 옷을 버렸습니다. 애씀이란 이름의 낡은 구두도 치워버렸습니다. 의심과 두려움의 거리에서 잠 못 이루던 밤도 뒤로 했습니다. 그 대가로 나는 왕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이 진주, 이 보물을 구하되 주님을 발견하기 까지 찾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그분 자신 전부를 내어 놓습니다. 그분은 기쁨, 평강, 목적, 거룩을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됩니다. -당신의 깨어남, 당신의 잠듦, 당신의 아침, 오후 그리고 저녁.

2011년 6월 7일 화요일

믿음의 회복

불가능한 일들에 직면한 모든 분들에게 드릴 특별한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의 회복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천부의 사랑에 대한 더욱 충만한 계시에 달려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호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he will rest in his love, KJV)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17). 여기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확고부동한 사랑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우리에 대한 사랑 안에서 안식하시고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rest"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일말의 의문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정하시고, 또는 확립하시고 결코 제거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에 아주 만족하셔서 그에 대해 노래를 부르신다고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이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천상의 표현입니다. 존 오웬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하나님이 기쁨에 넘쳐 뛰신다.”

나아가, 바울은 천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모든 것, 즉, 불신과 혼동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때 변화한다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디도서 3:4).

바로 앞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3:3)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우리의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났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말할 때 그는 “겹쳐 올려놓다”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어근에서 나온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요약하면, 주님은 두려움과 의문에 가득 찬 불쌍하고 고생하는 우리 영혼들을 내려다보시고 다음과 같은 계시를 겹쳐 올려놓으셨습니다. “나의 사랑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고 기뻐하라.”

나는 그분의 사랑이 나에게 나타났던 날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것-모든 문제 꺼리, 모든 시련들을 우리 아버지의 사랑스런 보호아래 내려놓지 않는 한 어떤 믿음도 불가능한 일들에 대항하여 설 수 없습니다. 내 상황이 최악일 때 나는 단순한 믿음 안에서 안식해야만 합니다.

2011년 6월 6일 월요일

온전히 설복됨

아브라함의 믿음은 휘청거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로마서 4:21)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이루어내실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주님은 공허에서 창조해내셨습니다. 창세기의 설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단 한 말씀으로 그분은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위해 무에서 기적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을 때-당신의 모든 계획과 궁리가 동났을 때- 이 때가 바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할 때입니다. 이 때가 바로 당신이 다른 어느 곳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모두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믿을 준비가 되기만 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진흙이 필요한 토기장이가 아니라 무에서 역사하시는 창조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의 물질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결코 생각해낼 수 없었던 방법과 수단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불가능한 일들에 직면하여 주님을 믿는 일을 그분은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실까요?
이 답을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이야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가랴에게 천사가 찾아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특별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처럼 나이가 많았던 사가랴는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는 불충분 했던 것입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누가복은 1:18). 간단히 말해서, 사가랴는 불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나에게 증명해 보여야만 한다.” 이성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가랴의 의심은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1:20).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믿기를 기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 할지어다”(베드로전서 4:19 강조부분 저자임의 사용).

2011년 6월 3일 금요일

불가능한 일들을 대면하여

"그가(아브라함)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즉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로마서 4:19).

진정한 믿음의 진수를 이 한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방금 약속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훨씬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에 대해 주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러한 불가능성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 족장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어떻게 이행하실 것인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 나는 뿌릴 씨앗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라의 태는 잉태를 못합니다. 내 아내는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기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일을 이루실 것입니까, 주님?” 이런 질문들을 품기보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연단되고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실 때, 그분은 우선 모든 인간적인 공급원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십니다. 이성적인 구원의 모든 방법을 무시하시며 모든 인간의 논리에 대해 문을 닫아버리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죽음의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사람이 만든 계획이 처음에는 번성하다가 죽어버리는 곳입니다. 그곳은 인간적인 희망들이 잠시 위안을 주다가 곧 산산이 부서져 무력감만 더해주는 곳입니다.

당신은 이 죽음의 자리에 있습니까? 당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까? 당신은 충고를 듣기 위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당신의 간구는 땅에 떨어져 하늘이 마치 놋쇠와 같습니다.

당신께 선언하건데,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이 불가능에 대해 생각하는 것,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바라보는 것, 당신의 상황을 빠져나오는 길을 찾으려고 고민하는 것을 멈추게 하기위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촉구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도움을 찾으려는 것을 그쳐라. 네 상황이 얼마나 소망이 없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그쳐라. 이러한 것들은 네 믿음에 거침돌이니라.”

2011년 6월 2일 목요일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 당신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나는 믿음을 합한 기도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일”이라고 말합니다. 즉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하라. 그리고 너의 요청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에 대해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모든 다른 것을 시도해 보고 그것들이 수포로 돌아간 후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우리의 첫 번째 선택으로 삼으라고 우리는 들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마6:33).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사탄에게 노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정은 혼란에 빠지고 그들은 공포와 죄의식에 전염되었으며 모든 면에서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우리 사역에 보내오는 편지들에서 읽게 되는 문제들은 압도당할 만 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면, 어려움에 직면한 신자들 중 열심을 다한 기도로 주님께로 향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과 따로 지속적으로 매일 양질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요즈음 거의 없습니다. 은밀한 장소로 나아가 그들의 영혼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께 슬픔을 부르짖지 않기 때문에 너무도 빈번히 절망에 빠집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친구들이나 목사님들, 상담자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들과 따로 있기 위해 기다리시는 주님을 방관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수단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러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대에 대해서도 비통해 하실까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렘 2:32).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먼저 달려갈 때, 우리의 가장 깊은 감정을 쏟아 붓고 그분께 우리의 간구들을 내려놓으며 그분과 따로 있기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낼 때 기뻐하십니다. 정기적으로 그분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 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에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당신과 따로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십니다.

내가 매일 주님의 거룩한 임재로 나아갈 때에 나의 가장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것은 내가 그분의 진실한 신탁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나의 메시지가 믿는 자들을 교화하고 심령을 찌르고 자극하여 결국에는 의를 이룰 것이라고 나는 그분을 신뢰합니다.

당신의 간구들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을 위해 양질의 시간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2011년 6월 1일 수요일

우리 주 예수님의 귀한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성령께서 다음의 말씀들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기도에 대해 응답이 필요한 분들, 환난의 시기에 도움이 필요한 분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고 또 기꺼이 원하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1. 시편 46:1 의 언약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KJV)” 여기서 “very present"라는 말은 항상 열려있고 즉시 접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밤낮가릴 것 없이 항상, 지속적으로 거하신다는 확신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분이 당신 안에 거처를 정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의 모든 묵상기도와 부르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들으시면 우리의 간구를 응낙 하실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누구든지 그분의 존전에서 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하늘과 땅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2. 시편 62:5-7을 읽고 믿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다윗의 기도입니다. 요약하면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만 기다리라. 다른 어떤 원천으로부터든지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 그분만이 당신의 공급처이며, 유일한 소망이며 방어수단 이어야만 한다. 오직 그분만이 당신의 기도 응답이 올 때 까지 당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실 수 있다.”

당신이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게 될 때,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멈추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때, 아무것도 당신을 요동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당신을 절망에 빠뜨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선언했습니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62:6).

3. 이 모든 것의 중점, 즉 역사를 통틀어 모든 성도들이 배웠던 탁월한 기도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 앞에 마음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한나가 우리의 표본입니다. 자녀를 갖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그녀는 자신의 혼을 주님께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고나서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8)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꺼이 잠시 동안 모든 세상의 소리들을 닫아버리는 것을 보실 때 당신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당신의 심중에 있는 것을 부르짖고 그분 앞에 당신의 혼을 쏟아 부으며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신뢰하십시오. 회개의 간구로부터 태어난 믿음을 위해 주님 앞에 깨어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길을 따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