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9일 금요일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갈망 by Gary Wilkerson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29세에 돌아가신 한 젊은 스코트랜드 목사님이셨읍니다. 그는 돌아가시기 전에그의 교회에 영적 대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이번 주간에 그 하나님의 사람의 인용문을 하나 읽었는데그는 '저의 교인들의 가장 큰 필요는 제 자신의 거룩함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언변력이 유창한 설교자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물들 그리고 명성이 뛰어난 지도자들을 너무나 많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들로부터 사역의 기술 이상의 것을 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마음을 보아야합니다.

목회자는 그 자신이 직접 들어가 본 것보다 더 깊숙한 그리스도의 깊이로 교인들을 인도 할 수 없습니다.

괄목할만한 프로그램과 탁월한 리더쉽, 관중을 사로잡는 표출력, 초현대식 건물을 갖춘 교회라도 그 핵심에 거룩한 백성이 되려는 비젼이 없다면 그 교회의 결말이 어떻게 지어질까요? 한 강사가 청중의 관심을 끄는 오락적인 행사를 치른다고 해도, 만약 그 지도자가 깨어져서 엎드러지기를 구하지 않고 그 자신과 교인들이 거룩하고 경외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다는것을 겸허히 분별치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교회들은 종종 천박함으로 가득하고 우리는그것을 인식하지만, 지도자들이 그것으로 인해 애통해 하기 보다는 묵인해 버리기 때문에 바뀌어 지지않습니다. 그러한 교회 안의 상황은 단순히 목회자의 마음안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릇인 한 사람이 깨어져서 발하는 빛이 수천여명의종교 엔터테이너들의 제작물보다 더 밝은것입니다.사도 바울은 선생은 많으나, 아비는 적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에 그는 아마도 너희에게 교회 전문가는많지만 거룩한 사람은 적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머레이 맥체인의 말은 그가 타협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유명론적인 스코트랜드의 교회에 말한 처음때보다 현재에 더욱 필요로 합니다.

그의 말 자체보다 그의 본보기, 곧 그의 설교단상과사역의 영향력은 그의 말에 능력을 더했습니다. 그의 말은 그이면의 순결한 삶 때문에 더욱 능력을 지녔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남자와 여자가 되기를 갈망합니까? 그렇게 되기 위한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 의로 분투하려는 인간적인 노력들을 모두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의복으로 온전히 덧입혀서단순하게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일을 받아 드리십시오.

이러한 거룩함은 스스로의 의지로 죄를 무력화하는것을 훨씬 초월합니다. 그것은 거룩함에 대한 크고영화로운 열정을 허락하여 주신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옛사람과 씨름하며삶을 허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그분이 새롭게 창조하신 새 사람의 충만함, 곧 내 안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기 원합니다.

2011년 7월 28일 목요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로마서 14:23).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물위를 걸으셨나요?
나병환자를 고치셨나요?
죽은 자를 살리셨나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나요?
바람과 물결을 복종시키셨나요?
귀신을 쫓아내셨나요?
미치광이를 고치셨나요?
그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나요?
이것을 모두 믿으려면
기적을 믿어야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혀 믿을 수 없지요
기적을 믿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분의 부활과
그리고 승천.
그분은 죽으셨거나 살아계시겠지요.
그리고 만약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기적이지요!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은 기적적인 일이지요.
그것을 모두 믿으세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2011년 7월 27일 수요일

당신은 보혜사가 있습니다

나는 성령에 대해 매우 놀라운 것을 배우는 중입니다. 그분은 독특한 성품을 갖고 계십니다.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우리가 주목하는 주요 대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나는 존경받는 저자들이 성령에 대해 저술한 책들을 파고들며 열심히 그분에 대해 연구했었습니다. 그분의 성품과 인격에 대한 책들인데 어떤 책들은 매우 심오하고 때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모든 책들이 아주 흥미로웠으나 항상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성령이 자신을 계시하는 것만을 이해할 수 있고 성령은 자신에 대해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이 책들은 교훈적일 수 없던 것입니다!

나는 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해 식견을 가져보려고 성령의 이름들- 위로자, 변호자, 옹호자, 중보자-의 의미를 파고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이 자신에 대해 감추어진 것들을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령의 인품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분이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며 영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실제 영이시며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시고자 이 지상으로 보냄 받으셨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언제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에 대해 우리가 알기 원치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그분의 임무에 대해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임무란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고 순결과 거룩함 가운데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 가운데에 그리스도를 알리시며 항상 일하시고 그분이 왜 오셨는가에 대해 우리가 알고자 애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한복음 16:13-14).

2011년 7월 26일 화요일

힘을 주는 떡

언젠가 우리 사역에 편지를 보내오는 고통 중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달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앞에서 일주일 동안 울며 지냈습니다. 뉴욕 시에서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노숙자들을 위해 일하며 나는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디를 바라봐도 고통과 고난과 슬픔과 문제들을 봅니다. 이처럼 극심한 곤궁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무슨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주시는 당신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분명히 당신은 이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분명히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말씀을 주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그분이 자신의 모든 자녀들이 원수를 대항하도록 강해지는 길을 마련해주셨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음으로써만 옵니다. 우리의 영적 건강은 이 떡을 우리 안으로 섭취해 들이는데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한복음 6:57). 예수님은 아버지와 이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오직 그분의 뜻만을 행하는데 헌신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이 실로 그분의 양식과 음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과 많은 시간을 홀로 계셨던 결과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듣고 봄으로써 하루하루 지탱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2, 34). 또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한복음 6:27). 우리는 이 힘의 비결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또한 우리의 생명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그들을 지탱해 주었던 만나도 매일 주어졌습니다. 이 일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어제 먹었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 신선한 천상의 떡을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굶주려 약해지고 무력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자주 와야만 합니다.

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승리는 어디에?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두려움, 죄의식, 분노, 우울증 등 우리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우리에게서 영적 용기와 활력을 빼앗아가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얽매이기 쉬운 죄”(히브리서 12:1 참조)를 이기는 방법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든 원수를 이기는 승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능력을 그분의 포도나무로부터 우리의 보잘것없이 작은 가지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요?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항상 사랑했고, 그분이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도 압니다. 또한 그분이 내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승리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나는 이제 막 이 경건의 신비를 비추는 작은 빛을 보기 시작하는 중입니다. 나를 얽매는 모든 죄에 대해 전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1. 나는 거룩에 대해 굶주리고 나의 죄를 미워하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죄는 나를 오 염시키고 하나님은 죄를 바라보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죄를 묵인할 수 없습니다. 하 나님을 경외함이 모든 자유의 기초입니다. 면제 받거나 특별한 특권을 받기를 기대하 지 마십시오. 내 죄는 고백되어져야하고 용서받아야만 합니다.
  2. 나는 내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내 죄를 철저하게 증오하시지만 동시에 무한한 연민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절대로 죄와 타협하지 않지만 그분은 의중에 그를 되찾기 위한 한 가 지 목적을 가지고 죄를 범하는 자신의 자녀에게 매진하십니다.
  3. 나는 죄에 저항하고 극복하는 데 있어 사랑으로 도우시는 나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들여야만 합니다. 죄는 내 인생을 부숴버리려고 하는 빨판이 여러 개 달린 문어와 같 습니다. 이 빨판들이 모두 한꺼번에 느슨해져 나를 놓아주지는 않습니다. 한 번에 빨 판 하나씩, 한 번에 작은 승리 하나씩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싸울 것인지, 언제 도망 칠 것인지, 다음엔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지시를 지참한 성령을 나에 게 파견하십니다. 정사와 권세에 대한 싸움은 그분의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나 는 단지 그분의 전쟁에서 싸우는 군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전적으로 그분을 믿기 원하십니다. 이 전쟁에서 나의 역할은 하나님이 나를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나 오도록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2011년 7월 22일 금요일

당신의 위기속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것

다니엘 3장에 느부갓네살 왕은 높이가 90피트나 되는 금으로된 신상을 세우고 그의 광활한 제국에서부터 온갓 지도자들을 불러 낙성 예식에 참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자 느부갓네살은 그들에게 그 우상 앞에 절하라하였고 그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다니엘과 함께 그들은 예루살렘에서부터 포로로 잡혀 왔었읍니다. 그 당시에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를 형벌로 불타는 난로에 던져버리는 것이 드문일이 아니였습니다. (예레미야 29:22 참고)

경비원들이 이 세명의 히브리인을 왕 앞으로 데리고 왔을때 왕은 그들에게 이렇게 고함쳤습니다. “너희는 이 우상앞에 절하기를 거부하였다는 것이냐? 너희에게 한번더 기회를 주겠다. 이번에도 절하지 않거든 너희를 불타는 풀무 가운에 던져버릴것이다.”(다니엘 3:14-15 참고)

이 세 히브리인은 결국 풀무불 안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왕은 당혹해 하였습니다. 갑자기 타오르는 신체도 보이지 않고, 살이 타는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불안으로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본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세 히브리 남자는 석탄위를 걷고 있는 것이 였읍니다. 불은 그들이 묶여있던 밧줄만 태우고 그들은 이제 두손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은 자기의 모사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몇 사람을 불에 던지었느냐?”

“세명입니다 왕이여,” 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네명을 보고있다! 또한 그중에 불에 타고있는이가 아무도 없다. 상처가난 자도 없다. 그리고 그중에 한명은 신의 아들을 닮았다!” (다니엘 3:24-25 참고)

예수께서 이들의 위기에 오신것은 하나의 이유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을 위한것 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위로해주고 구해주시기 위해 오신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은 그들의 위기가운데 자신을헌신하시기로 작정하신것은 그들이 주님께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2011년 7월 21일 목요일

우리가 신뢰할수있는 조언자

저는 재정 관련 조언을 하지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서 단 한분뿐인 신뢰할수있는 조언자와 연락을 맺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어느 질문이 있을때 저의 신뢰하는 조언자는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역 초기때부터 계셨습니다. 우리가 사무실을 다시 뉴욕시로 옮겼을때 저희와 같이 오셨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했던 우리의 모든 부동산 거래를 지시하셨습니다. 지금 타음스퀘어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브로드 웨이에 마크 헬링어 극장 (Mark Hellinger Theater) 을 살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재정과 부동산 조언자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변호사, 가족 조언자, 상담 전문자와 여행 안내원이 되십니다. 진실로, 그는 말 그대로 우리가 하고 마주치는 모든것을 인도하십니다. 제가 그분과 마지막으로 대화했을때 (즉 오늘 아침에), 저에게 앞으로도 다가오는 어려움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변함없는 인도를 하시리라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할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좋은것은, 저의 조언자는 제가 매일하루 어느때에 연락을 하여도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저의 조언자가 저에게 격려해주십니다.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것이없다. 나는 이러한 많은 일들을 전에도 겪었다.” 성경에서 놀랍게도 몇 번이고 모든 위기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과 친밀하게 관여하시는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시편 기자인 다윗이 어려움에서 빠졌을때 관여 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 군사와 더불어 시글락으로 돌아왔었을때 도적떼의 손에 성이 잿더미로 불사름 당한것을 보았읍니다 (사무엘상 30장 참고). 다윗의 집은 파괴되고 가족은 사로잡혀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수고로 얻은 가축, 가구, 재산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다윗이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군사는 가족을 무방비하게 놓아둔채로 자기들을 전쟁으로 이끌고간 다윗을 돌로 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성경에 다윗은 그의 또한 나의 조언가께로 돌이켰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 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사무엘상30:8) 다윗은 그의 조언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모든것을 되찾았습니다!

2011년 7월 20일 수요일

생명의 강

에스겔 선지자는 굉장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손이 그를 높은 산으로 데려가 “모양이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에스겔40:3)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에스겔을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에 대한 놀라운 환상을 주신 하나님의 성전 문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것은 말기가 가까울때에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계시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에스겔 47:1)

성경에 있는 물의 이미지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의 영을 상징합니다. 이 환상은 마지막날에 강력한 성령의 부으심에 대하여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너무나도 광범하였기에 에스겔은 이해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환상의 의미에 대하여 논평을 하지도 못하고 단지 전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환상이 마감하기전에 주님께서 멈추시고 에스겔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나님께서는 물으신것 입니다. “너는 지금 보는것의 광도를 상상할수 있느냐? 깊어지는 물의 의미를 아느냐? 이 계시가 얼마나 엄청나며 너에게는 이해도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나 이것의 참된 의미를 놓치지 않기 원하노라. 물은 모든 것이 결국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에스겔 환상에 나타난 똑같은 강을 언뜻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것보다 더한것을 보았습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마지막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단의 모든 공격에서 큰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이사야 33:21)

이사야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노예가 모는 군함을 말합니다. 그는 적, 곧 마귀가 강에서 수영하는 모두를 공격하려는것를 묘사한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혼란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의 강은 사단이 침입할수없는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편에서 증거하듯이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시편 35:4-6)

2011년 7월 19일 화요일

지속적으로 찬양하십시요

모세는 오늘 우리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승리하는 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에게는 주님과 꾸준한 사귐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애굽기 33:11) 제 생각에 거룩함의 비밀은 아주 간단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십시요. 당신이 바라보는 형상을 닮을 때까지.

어느날 저녁, 어떤 흥분한 여자분이 저를 길에 멈추고 절박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 분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윌커슨씨, 저는 제 삶에 가장 어려운때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쪽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남편은 저를 떠났고 이 모든것이 제 잘못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제 가족을 실망시켰습니다.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친구여, 지금 이 길거리 모퉁이에서 당신의 손을 들고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십시요. 당신은 실패자라는것을 알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요. 그리고 집에 가서 무릎을 꿇으싶시오. 하나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단지 손과 마음을 들고 주님을 찬양 하십시요.”

길거리에서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벌써 그녀의 삶으로 물 밀듯 돌아오는 승리를 느끼며 찬양하는 그녀를 저는 뒤로 하고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시편 22:3) 주님은 찬양하는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주님이 계신곳에는 승리가 따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실패를 두려하지 마십시요. 그것에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십시요. 승리가 올때까지 경배하십시요. 지금 이말은 지나치게 단순화한것 같지만 실패후에 나갈길은 오히려 간단합니다.

2011년 7월 18일 월요일

그의 부활의 권능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는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립보서3:10-11)

제가 지금 하려는 말에 놀라실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두가 권능에 관한 것이라는것입니다. 제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나신 신성의 능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권능은 분명히 기적이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자연적인 그 사건외에 또 다른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권능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권능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합니다. 죄의 지배함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며 인간이 겪는 모든 습관과 정욕을 이기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가운데 믿음으로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권능을 얻는 것이 곧 부활의 권능 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부활의 권능에 대하여 말하고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내면의 심오한 갈망을 갖고 있었는데 그 것은 거룩함을 향한 자신의 깊은 소망 때문이었읍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계시를 받았고 그 계시는 권능에 관한것이였습니다. 그가 기록하기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3-4)

바울은 부활 안에서 무언가 놀라운 것을 보았고, 그것이 그를 기쁨으로 사로잡은 가운데 일평생의 거룩함의 갈망에 대한 응답도 받았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울은 예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하늘의 능력이 그 분과 함께 하셨음을 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신동안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시고 포로된자를 자유롭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영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의 부활은 신성한 선포를 동반하였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4)

2011년 7월 15일 금요일

하나님 말씀과 일치된 사랑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될때, 즉 우리를 향한 주님의사랑을 받아드리고 서로를 조건적없이 사랑하면 우리는 두려움없이 살수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있는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것같이 살수있고 심판날때에 그앞에 담대함으로 설수있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질때 우리는 온전한 사랑에 거합니다. 다윗이 찬양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요.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 (역대상16:27) 구약에 “즐거움”이란 말에 기초어는 “즐거움으로 뛰다”라는 뜻이며 온전한 사랑의 충만함을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두려움으로 잠겨있습니다. 인간은 지구 온난화, 테러리즘, 핵전쟁, 흔들리는 경제, 에이즈, 다중 살인, 이슬람교의 상승, 정치적 혼란, 광범위한 마약, 알콜, 포르노의 중독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께 묻겠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같은 두려워하는 영으로 시달리고 있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에 영향을 줄수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소망을 줄수있습니까? 우리가 변화받지못하고 두려움에서 구조받지 못하면 과연 어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교회에 그의 사랑과 완전한 죄의 용서함을 확신시켜 주시기위해 새언약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그의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시켜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고 두려움 없이 살수있도록 하셨습니다. 생각해보싶시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사야35:10)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시편 27:1,3)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께 모든것을 드려야 하는 때가 이미 지났읍니다. 이제 어려움으로 부터 여러분의 생각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는 멈추십시요. 대신에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안식하십시요. 오늘, 바로 지금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쁨을 주게 하십시요. 기뻐하는 당신의 마음이 주위에 두려워하는 모든자들을 놀라게 하며 경외하게 할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신명기 28:12)

2011년 7월 14일 목요일

전투 가운데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목사님을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의 죄로 끊임없이 괴롭힙을 당한다고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데이빗 형제님, 당신은 제가 과거에 어떤일을 했었는지, 어떤죄를 지었는지 알았더라면 제가 왜 이렇게 우울한지 이해하실거예요. 죄가 제 머리위에 맴돌고 저는 계속되는 죄책감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주신것을 믿고 그의 보혈이 저의 허물을 덥기에 족하다는것을 알지만 저는 그 것을 앎으로 인한 평안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는 제가 용서 받았다고 믿지만 제 마음은 항상 지옥같은 생각으로 가득찹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든, 하물며 교회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제 자신이 참 더럽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가 정결하다고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 신자들은 예수님도 광야에서 끔찍하고 더러운 생각으로 사단에게 유혹을 당했다는것을 망각합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리 삶에 작은 여우를 보내어 우리는 소망이 없는 자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가나셨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 여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누리는 믿음을 파괴하려는 생각들을 우리 마음에 집어 넣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 정신적의 침입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것을 절단해버리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성령님, 저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도와주세요!”

십자가를 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모든사람은 끊임없는 전투를 치릅니다. 우리 모두는 악한 생각과 대면하게됩니다. 우리의 과거로 인해, 혹은 거절당함으로, 아니면 그저 우리가 악하고 관능적인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심의 뿌리에 예수의 피를 바르면 그것이 우리존재의 모든 세포에 와닿고 우리의 마음도 포함해서 완전히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유함과 참된 기쁨을 줍니다.

당신은 이 씨름가운데 혼자가 아닙니다.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께서는 어떻게 적을 다루어야 하는지 또 우리를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실수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모든 싸움가운데에 세미하고 자그마한 음성으로 인도하시고 능력주시는 분이십니다.

저와 같이 기도하십시오. “성령님, 저는 영적으로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성장하기 원합니다. 모든 위선을 버리고 온유함과 인내심과 사랑을 원합니다. 이런것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계시고 도와주세요. 아멘.”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성령이 여기 계십니다

타임스퀘어 교회 (Times Square Church) 에서는 손뼉을 치며 이렇게 부르는 노래가있습니다.

그분을 보내주소서. 주여, 그분을 보내소서.

주여, 성령이 임하게 하소서.

그분이 필요합니다. 주여, 그분을 보내소서

사실은, 성령은 이미 여기 계십니다. 그는 오순절때에 임하셨고 그 이후로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희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14:16-17)

여기에서 예수께서 사용하시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최근에 이 구절을 읽었을때 저는 그 말씀들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성령에 대하여 잘 알지못하고 있다는것을 깨닫았습니다.

교회는 성령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에 대해 말하고 성령으로 인도받으며 성령안에 거하는 삶, 성령의 은사를 갖는것, 성령의 위로를 받는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대한 모든 교리를 알고도 아직도 그가 누구신지 모를수가 있습니다. 제가 만약 당신에게 “성령을 받으셨읍니까?” 라고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 하시겠습니까?

어떤자들은 “저는 예수님이 저를 구원하셨을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인도한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할것입니다. 다른이들은 “네, 저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가 제 삶으로 들어오셨을때 방언을 했기때문입니다. 저는 영으로 기도하고 방언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라고 할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것은 한번의 경험뿐만이 아닙니다. “받다” 라는 뜻은 “주워진것을 붙잡다” 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받는것”은 성령이 누구신지 또한 그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더욱 알수있는 지식의 더 큰 용량을 바라는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사람의 성전을 완전히 지배하시록 허락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을 수가 없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어떻게 받았느냐? 믿음으로 받았느냐?” 그리고 나서 그가 선포하기를 “너희가 믿음으로 말하기를 너희가 알고있는 성령을 믿음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또한 믿음으로 지속되는 성령의 역사가 너희에게 일어나고 있느냐? 더 깊이 성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믿음을 행사하고 있느냐?”

2011년 7월 12일 화요일

아버지의 큰 기쁨

탕자의 이야기는 많은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에 자세한 줄거리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말하고 싶은것은 이 이야기는 주로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큰 기쁨에 대한것입니다.

물론 탕자에 대한 비유는 돌아옴에 대해 말하고 (누가복음 15:11-31) 있지만 단지 아들이 집으로 결국 돌아오는것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이 그 아들을 집에 머무르게 하는 가에 대한것입니다.은혜, 용서, 또 회복에 대한것입니다. 다시 읽어 보면 이야기가 아들이 돌아올때 끝나지 않는다는것을 볼수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점입니다.

아들을 집에 머물게 하는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기뻐한다는 것을 아는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풍류와 춤으로) 즐거워하더라.” (15장 24-25)

탕자의 아버지는 그를 절대 꾸짖지 않고 정죄하지 않으며 그의 가출에 대해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대신 큰 잔치를 벌리고 가족의 모든친구과 이웃을 초대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갈망 하였었고 이제 그날이 온것입니다.

탕자는 처음에 항의하며 아버지께 “저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무시하고 그의 어깨에 옷을 입히라고 하며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소유한 모든것을 아들이 이용할수 있게된것입니다. 그곳에는 큰 기쁨, 풍류, 춤과 잔치가 있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랑이 이 젊은이를 집으로 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쁨이 아들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탕자는 매일 일어나서 단지 자기의 아버지가 그가 집에 있음을 기뻐한다는 사실때문에 아버지와 계속 지낼수있을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그와 함께 한다는 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또한 이 젊은이의 삶에서 자벌레들이 먹어 소산되었던 모든것이 회복이 되고 있었습니다. (요엘 2:25)

저는 탕자와 같은 예전에 중독자였던 많은 사람들을 알아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중독때문에 잃은것들에만 집착합니다. 잃어버린 배우자, 자녀, 사역. 그들은 주님의 훈계하심을 느낍니다. 그것이 고통스러울수 있지만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나라에서 손실되는 것은 없다. 너는 이것을 통해 더욱 강해질것이다. 이제 너는 집에 돌아왔고 나의 은혜가 너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리라.”

2011년 7월 11일 월요일

두려움 없이 사는것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두려움없이 살수있는지 보여주십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요한일서 4:18)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면 온전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대한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쫓는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자들이 해석하듯 흔들림 없는 사랑이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정히 믿는자에게 시작되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전 구절에 온전한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희 이루느니라.” (4장 12절). 요한에 의하면 온전한 사랑에서 제일 중요한것은 우리가 주님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고 주님의 나라의 위해 충실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가 찬양하는자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님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있거나 남에 대해 욕되는 말을 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느누구라도 배제하는 자라면 그는 어두움속을 걷는자며 사망의 영이 따르는 자입니다. 그 사람에 있는 모든 생명, 선행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이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빛 가운에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요한일서 2:9)

두려움 없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면 요한이 그렇게 할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두려움을 쫓는 온전한 사랑이 반드시 있고 이것이 우리가 딛을 첫 걸음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일서 4:11)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관계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요한에 의하면 사랑이 온전해 지려면 우리는 다른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것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런 사랑이 어떤것입니까? 그것은 용서하는것보다 훨씬 더 큰것입니다. 모든 죄를 용서한후 우리와의 친교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하여 죄진자를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인 자를 존중하듯 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는 온전케 하도록 허락할때 모든 두려움을 떠날것입니다.

2011년 7월 8일 금요일

예수님처럼 살고 사랑하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한1서 4:16-17)

이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주목하십시오. 요한은 현재 우리가 주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 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정죄할 어떤 것도 -복수심, 원한, 인종 차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1서 4:10).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고, 온전한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도 의미합니다.

더구나, 더구나 요한이 말하기를, 이런 사랑에는 어떤 두려움도 어떤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왜? 이는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한다면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4:18).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우리의 실패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계심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든 눈물은 병에 담아주시며 우리의 마음의 고뇌를 느끼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을 측은하게 느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러한 단면은, 출애굽기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사람들에게 드러내고자 하신 부분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이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출애굽기 2:23-2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3:7-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셨듯이 당신의 필요와 상황을 보고 계신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종종 쉽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전부”라고 말하지만, 정작 위기가 닥치면 – 연이어 일이 잘못되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고 계속 희망이 꺽여버리면 – 우리는 두려움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실로, 우리는 두려움에 항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시기에, 심지어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절망적으로 보일 때도, 당신의 자녀를 버리는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뢰해도 되는 분입니다!

2011년 7월 7일 목요일

보혜사께서 오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혜사”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우리의 보혜사로 알아야 하기도 하지만,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시는지를 꼭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에서 오는 위로인지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인지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에 짓눌린 형제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기도로 성령의 위로를 구하였고 그 위로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형태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실로, 그는 성령의 위로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영적 마취제 같은, 천국에서 갑작스럽게 불어드는 숨결 같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런 평화로운 느낌이 실제로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이는 다음날 아침이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성령께서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셨다고 믿게 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분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위로하시며, 이는 성경에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 시험 또는 필요가 어떤 것이든, 성령의 위로하심은 진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한복음 16:13)

사실, 우리의 위로는 우리가 느끼는 바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바에서 옵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의 기분을 넘어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위로하심은 이 근본적인 진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화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여기서 사용된 그리스어의 의미는 번역된 언어가 제시한 의미보다 더 강한 의미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으로 “퍼부어”지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공포, 수치심, 슬픔, 고통, 유혹 또는 낙심함으로 인해 견딜 수 없는 부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위로가 필요합니다.

갑자기 한 목소리가 영혼의 모든 통로를 통해 울려퍼집니다 – 그리고 영혼에 선포합니다. “그 무엇도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단절시킬 수 없습니다.”

이 진리는 – 당신이 믿는다면- 신속하게 생명수와 같이 흐르며 모든 장애물을 무너뜨립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이탤릭체 저자 임의 사용)

2011년 7월 6일 수요일

기도하는 삶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도하는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6)

바울이 우리의 기도하는 삶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너무나 혼동을 하고 이를 너무나 복잡한 것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어느 크리스찬 서점에 가서 봐도 기도에 대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방식을 제시하는, 수많은 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론들은 기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경우 기도가 중보 기도가 되는가?
  • 중보기도는 열정, 목소리 크기 또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에 의해 평가 되는가?
  •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라고 배웠는데, 내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아는가?
  • 그리고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마음 속으로 하는 기도도 기도에 포함되는가?
  • 정확히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이런 혼란은 너무나 버거워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게끔 만듭니다.

현재보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가 더 절실히 필요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점점 더 안 좋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평안을 갈취하려는 음모가 일어나고 있으며 모든 사회는 위로의 근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정신과 치료, 생명력 없는 종교, 대의, 심지어 자선 행위에서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습니다.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요한복음 14:17)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기도하는 삶을 유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등한시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근심케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에베소서 4:30)고 한 것을 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불신과 기도하지 않음을 하나님과 함께 슬퍼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강력한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 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나타내십니다.
  • 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언약을 인치십니다.
  • 기도를 통하여 보혜사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 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그의 위로, 평안 및 안식의 강물을 우리의 영혼으로 흘려 보내주십니다.

2011년 7월 5일 화요일

승리하는 교회

승리하는 교회는 지금도 극심한 믿음의 시험을 극복하고 일어서고 있습니다. 종말의 교회는 오랜 기간의 고통과 혹독한 시련을 지나오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완전히 깨진 상태로 이끌어내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육체의 연약함을 볼 수 있는 상태로 이끄시고 이를 통해 당신을 강력하게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이르며, 그들의 굳센 의지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리라”는 자세를 갖게 될 때까지 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이 모든 과정을 거쳐서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위와 같은 상황에 계십니까? 당신이 예수님과 여러 해 동안 같이 걸어왔지만 현재 직면한 시험과 같은 시험을 경험한 적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닥쳐오는 일들이 버거워 보이고 하나님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는 것들로 보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해주실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현재, 이슬람 교도들은 알라를 위해 “세상을 정복”하기 위한 최후의 지하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교 훈련 캠프들은 증오의 메시지를 담고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계시며, 이들을 사용하셔서 이 세상의 분노를 제압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주님의 자비와 평화로 훈련 및 무장시키고 계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폭탄, 총 또는 결사대가 아니라, 자비로우신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전세계에서 고통, 핍박 및 고문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이 된 자들이 견디고 있는 이런 극한의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전투에 신령하고 영원한 목적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시편 145:9)

우리 주님께서는 내내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내려오셔서 인간의 형상과 신분을 취하시고 죄인들 사이에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증오를 견디셨고 거부 당하셨으며 상상하기 어려운 비난을 감당하셨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전혀 맞서 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복수심과 증오에 찬 지하드주의자의 군대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의 능하신 자비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직 한가지 전투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실로, 사랑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진행하시는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린도후서 1:3)

2011년 7월 4일 월요일

승리를 향한 길을 가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산의 정상에 이르는 듯한 절정의 축복 또는 승리를 경험한 후에 엄청난 영적인 침체를 겪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정체기를 의미하는 “건기”(“dry spell”)라고 부르는데, 이는 영적 어둠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손길을 경험한 이후에 찾아오는 크나큰 시험과 같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생이 이런 정체기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인 침체기는 대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닥칩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로 더 깊이 그리고 더 멀리 가도록 훈련시키시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런 경험을 합니다.

당신이 몸소 겪은 정체기를 돌이켜보고 그 시기가 당신의 인생에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 이후에 찾아온 침체기가 아니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이 새로운 깨달음, 신실한 기도를 통해 주님께, “예수님, 저를 만져 주십시오. 제가 낙담한 상태에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저의 예배에 있어야 할 진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지금까지 알아온 것보다 당신을 더욱 더 경험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하려는 – 아픈 자를 위해 기도하고, 잃어버린 자를 구하고,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는 – 열정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여 저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왕국을 위해 더 크게 사용되고 싶습니다. “

당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지해졌기 때문에, 당신의 기도는 응답을 받기 시작했고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놀랍게 경험했고, 당신의 열정은 증가했으며, 당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이 일어나보니 하늘이 놋쇠같이 보입니다. 당신은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이 느껴졌고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는 고뇌가 되었고 한 때 잘 들렸던 하나님의 목소리가 더 이상 그렇게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감정은 다 죽은 것 같고, 당신의 영혼은 메마르고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신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났다면,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저는 한순간에 산꼭대기에서 가장 낮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듯한 추락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고, 우리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베드로 전서 4:12-13)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정체기를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원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찬양하십시오. 우리가 그럴 기분이 아닐 때도 말입니다!

2011년 7월 1일 금요일

준비하라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준비할 것을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4:44-51).

예수님이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해 보십시오. 한 종은 충성되다 하시고 다른 종은 악하다고 부르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그 다른 종을 악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은 그가 마음에 생각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종은 그러한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주님이 더디 오신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팔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가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한 것에 유의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갑자기 또는 예기치 않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 세대에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악한 종”은 명백하게 믿는 자의 한 부류입니다. 아마도 사역자 중에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는 “깨어” “준비하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고 명령을 받은 자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느슨하게 풀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만약에 종이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확신하게 되면, 그는 바르게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동료 종들과 화평하게 지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집이나 직장, 교회에서 일치감을 유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도리어 동료 종들을 때리고, 비난하고, 불만을 품고, 그들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이런 종은 자신의 정욕가운데 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으며 두 개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