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오늘 날 크리스천들은 빛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놀라우신 일의 의미와 그분의 희생으로 얻어진 엄청난 축복들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때 암흑시대로 알려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놀라운 일이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있었습니다.

암흑기 동안의 대부분의 설교들은 지옥과 하나님의 진노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교황과 사제들은 행위의 복음을 설교했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잘 보이고자 여러 종류의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지에 절 하러 가기 위해 수십 마일을 여행했으며 돌로 만든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묵주를 만지면서 긴 기도를 되풀이 했었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단지 그들의 속박을 증가시켰을 뿐이었고 그들의 영혼에 더 깊은 어두움만을 가져 왔습니다.

그 때의 사람들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축복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그 주제에 관한 많은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 많은 중요한 점들,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 떼들을 돌보는 한 목자로써 저는 때때로 지옥,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승리의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의 축복과 유익함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만이 그 위에 진정한 거룩함과 의로움이 세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초가 없이는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경건의 모양을 만들어 내려고 우리의 육신을 의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거룩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알 때에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서, 우리를 가르치시되, 불경건과 세상 정욕들을 거부하고, 우리로 신중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이 현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며” (디도서 2:11-12).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에게 그 어떠한 행위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그러한 경건으로 이르게 하는 신학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즐거운 소리를 알기

오늘날 그리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두려움과 혼란가운데 살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희년의 즐거운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분의 보혈에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들이 자유가운데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제공하신 모든 것들의 즐거운 소리를 이해 하지 못했습니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89:15). 오늘날 우리가 듣는 즐거운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우리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입니다.

희년의 즐거운 소리에 대한 또 다른 축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1.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오 주여, 그들이 주의 얼굴빛 가운데 행하리이다” (시편 89:15). 여기에서 히브리어로는 “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안전하고 그분의 임재 하심 안에서 평온한 가운데 기뻐하며 살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이나 혼란 가운데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얼굴의 빛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주의 이름 안에서 그들이 종일 즐거워할 것이요, 주의 의 안에서 그들이 높아지리니” (16절). 우리는 우리의 의가 누더기 조각 같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의를 우리 것 삼아 기뻐하며 용기를 내야 합니다.

3. “이는 주께서 그들의 힘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니이다. 주의 은총 가운데서 우리의 뿔이 높아지리이다” (17절). 그리스도 홀로 우리의 모든 힘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손아귀 아래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구주가 대적 마귀를 짓밟아버린 모습만을 바라보아야 할 뿐인 것입니다!

4. “주는 우리의 방패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우리의 왕 이시니이다” (18절). 우리는 육신으로는 완전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대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그리스도는 중보 하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대 제사장이 속죄의 날에 성소의 계단을 올랐던 것처럼, 우리의 대 제사장은 하늘의 장막 안으로 오르셨습니다, “...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러한 건물이 아닌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을 통하여” (히브리서 9:11). 예수님은 단지 그 분이 받기에 합당한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대신해서 일하시기 위해 승천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일은 모두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살아 계셔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심이라”(7:25). 그리스도의 하시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 그 분께서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심이라” 는 말씀이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세가지 방법으로 중보 하신다고 믿습니다.

첫째,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서서 우리가 잘못할 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는 우리에 대한 사탄의 참소와 관계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마귀는 우리의 모든 잘못과 범죄함을 하나님께 참소하기 위해 옵니다. 마귀는 이렇게 외칩니다, “ 나는 공의를 원합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이 사람을 처벌하여 멸망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 분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간단히 그 분의 십자가의 승리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느냐? 너는 나의 자녀 위에 어떤 소송의 권한이 없다. 나의 것으로부터 너의 손을 거두어라!”

둘째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는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희년에 의해 제공된 모든 혜택을 취해서 누리기를 확실히 하신다는 뜻입니다. 레위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제공하던 법을 시행하던 것과 꼭 같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희년의 특권을 시행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법적으로 자유하다는 것을 알기를 확실시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화목케 하시며 우리 자신의 심령 안에서 중보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에 계속 응답하시면서 우리에게 우리는 용서받았노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과 힘을 제공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철장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겨 내어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15 ).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승리의 행렬 뒤에서 비틀거리는 것은 바로 쇠사슬에 묶여있는 사탄 자신이었습니다. 천군들의 병거바퀴 아래에는, 패배한 마귀와 결박 받고 완패한 어두움의 모든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를 품고 죽은 믿음의 조상들 앞에서, 공개적 수욕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이 질그릇같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지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요한 계시록 2:27). 예수께서는 그의 손에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철장” 인 의의 홀을 을 잡으시고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승리의 입성 후에 예수께서는 모든 능력, 권세, 그리고 지배권을 전적으로 차지하는 합법적인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면인지요! 사탄은 힘을 잃었습니다. 공산주의도, 무신론도 힘을 잃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은 오로지 그분의 허락 하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들은 그들의 죄의 잔을 채우는 것을 계속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며, 그 어느 날 그분이 준비가 되시면, 그 분은 “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릴 것이며, 토기장이의 질그릇같이 산산이 부술 것입니다” (시편 2:9).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과 죄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애매모호하거나 혼란스러운 신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탄이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또 이해 해야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감옥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그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과 희락, 그리고 자유를 주고 계십니다.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다른 영 by Gary Wilkerson

“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에게 다른 영이 있어…” (민수기 14:24). 갈렙의 어떤 점으로 말미암아 그가 다른 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였을까요?

당신은 주리고 목말라하며 하나님에게 “ 저를 다른 영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라고 부르짖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광야를 그저 헤매면서 기꺼이 삶을 소모하는 중도의 길에 있는 우유부단한 크리스천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안에 있던 그 무엇이 그들을 구별시켰을까요? 왜 그들은 다른 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다른 영을 가진 남녀로 구별 짖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그들은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다른 이들은 그것을 왜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일까요? 어떻게하여 이러한 남녀들은 이 다른 영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내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요?

저희 교회의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그의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혔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 있을 때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예수님, 저도 이 젊은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간절한 영을 원합니다. 저는 그 불과, 그 열정, 그 순결함과 그 경건함을 더 원합니다.”

이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저는, 내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저는 깨끗한 손과 정결한 마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그는 이 타협의 시대에 그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자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주위의 다른 이들은 큰 군중을 끌고자 교묘한 방법으로 화려한 이벤트로 다가갈 때, 그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 주님,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 저 역시 수많은 자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당신을 더 갈망합니다.”

이 다른 영을 가진 젊은이 곁에 있을 때 저에게 부러움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더 소유한 사람을 향한 질투와 부러워함을 허락하십니다!

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예수님은 우리의 희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사야 61장 1-3절).

우리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죄와 죽음에 대한 정복을 선포한 것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여기서 희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팔을 불어라! 구세주가 우리에게 주신 즐겁고 기쁜 자유의 해가 도래한 것을 알려라!”

이 구절은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복된 아들의 엄청난 고통을 보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천국입성을 위해 만군 천사들에다가 병거까지 갖춰 장엄하게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시 68편 17-18절).

유한한 우리 생각으로 이 영광스러운 위용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향해 백마타시고 전진하는 그리스도의 호위 행열의 장관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천국문을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 가시도다”(시 47편 5절).

이것이 그 기쁜 소리입니다. 나팔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믿는자들의 희년이 도래했음을 알렸습니다! 그 소리는 만민을 향한 선포였습니다. “내가 너희로 감옥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또 충족된 삶을 즐기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마련했다. 원수들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이제 자유다. 내 기쁨 안으로 어서 들어와 거하라!”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자유의 환호성

희년이 오면 온갖 부채를 탕감했습니다. 모든 임대차 계약과 소유권상의 변동이 본주인에게로 환원되었습니다. 농부가 본래 자기 땅과 가족을 되찾는 때였습니다. 레위기 25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때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이스라엘과 유대땅 전역에 펴져나간 환희가 쉽게 상상이 될 줄 압니다. 7번째 달 제 10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순간 종으로 팔렸던 모든 동족 히브리인들이 다 해방되었습니다. 재산을 잃었던 사람도 다시 다 되찾았습니다. 가족들이 재결합되었고 집을 다시 찾았고, 그야말로 구출과 자유와 해방의 날이 온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들리면 넘어가려고 빈곤한 농부들이 자기네 옛날 토지 경계선을 따라 서서기다리는 모습을 나는 상상합니다. 10년을 , 5년을, 1년을 기다렸다가 이제 마지막 그 기쁨의 소리를 듣기 몇분전 까지 그들은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그들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잃었던 것들을 이제 모두 되찾을 때가 왔다. 내 것이 다시 되는 것이야. 이제 희년이 왔으니까!”

희년에는 심음과 거둠이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기뻐하면서 보내라는 것이었지요. 희년은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과 자유를 찬양하면서 일년내내 성탄절인 것 같았습니다.

희년에 선포된 이 자유가 어떤 불투명한 개념 같은데 믿음으로 받아야지 하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 땅의 토지법이었습니다. 채무자가 할 일은 법대로 아는 것을 실천하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모두에게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지를 감시하는 보안관이나 지도원 으로 레위인들이 활약했습니다.

때로는 종에게, “떠나긴 어딜 떠나. 내 종 주제에. 가서 일이나 해”라고 말하는 주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종은 주인의 면전에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우리 모두 알고있쟎아요. 그것은 내가 자유라는 반가운 소리란 말예요. 당신은 법적으로 내게 아무 권리가 없어요. 나는 자유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그 소리 듣기를 고대했을까요. 마음놓고 이렇게 말할 자유 말입니다. “과거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이젠 그걸로 나를 원망하지 말라. 나는 구제 받았고 내 분깃을 누구도 박탈할 수 없다.” 자유를 되찾고, 잃었던 재산을 돌려받고 싶은 사람은 나름대로 행동 개시를 해야 했습니다. 춤을 추든지 외치면서 회당 같은 데서 “나는 자유다! 모든 것이 다 네게 회복되었다”고 선언해야 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분명하게 선포하기 전에는 자기 권리를 하나도 즐길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지 보이십니까? 대부분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이 주신 희년을 주장할 줄 모릅니다. “즐거운 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찬양할 때 흥이 돋아 손벽치거나 춤을 추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훨씬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통해 마련해주신 자유와 평화와 영광을 실제로 찾아 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으로 나가 확실하게 내 것을 주장해야합니다!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하나님이 “나를 의뢰하라”하실 때에는 정말 그리 해야함

잠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필요한 것들을 통해 어떻게 만나주셨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봅시다.

광야시절 이스라엘에게는 물론 슈퍼마켓도 식료품점도 없었습니다. 풀 잎 하나 눈에 띄지 않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만나를 하늘로부터 부어주셨기에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먹을 수가 있었고 때로는 보내 주신 새들을 말로 거둬들여 고기도 먹게했습니다. 암반에서조차 물이 솟구치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신발과 옷이 40년동안이나 닳거나 헤어지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어느 배고픈 선지자가 까마귀 때문에 먹고 산 이야기, 한통의 가루와 한병의 기름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여러사람들이 배불렀던 이야기, 또 (포위망을 조이던) 적군이 이상한 소리를 듣고 갑자기 철수한 덕분에 굶주리던 성읍 전체 거민들이 다 흡족하게 먹을만한 양식이 생겼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약에는 물을 변화시켜포도주를 얻은 이야기, 세금 낼 돈을 물고기 입에서 건지기도 했던 이야기, 고작 5덩이 떡과 두어마리 물고기를 가지고 5천명이 먹고남았던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이처럼 초자연적으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들이 웅변으로 전달하시는 메세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분은 우리가 신뢰할만한 분이시다.” 그리고 또 다른 초자연연적인 현상을 레위기 25장에서 우리가 보는데 안식년 바로 전해에 그 땅에 허락하시는 가득한 풍년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7번 연속해서 안식년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8절). 다시 말해 “너희는 안식년을 7번째 해에 지키되 7년씩 7번 즉 모두 49년간 그렇게 할지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적으로 49년은 한세대 전체를 망라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만 의뢰해보았더니 한세대 전체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간증할 자료가 쌓이고도 남을만한 기간이었습니다. 그정도 기간이면 부모와 조부모가 자기생애에 경험한 믿음의 역사를 자손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래. 하나님이 6년동안 잘 공급해주셨지만 막상 제7년이 되자 많이들 두려워했었지. 그런데 웬걸 제8년, 제9년까지도 염려없었어. 어떤 때는 물론 혼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부족하지 않았어. 아무도 굶지 않았고, 남에게 구걸할 필요도 없었어. 그동안에 우리 믿음은 시험대 위에 올랐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공급하셨고 끝까지 신실하였어!”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뢰하여라” 하실 때에는 정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희년의 절기

레위기 25장을 보면 유대인의 절기 희년의 유래가 나옵니다. 7년째 해가 돌아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쉬는 것부터 시작하여 희년을 지키게 했습니다. 제7년 안식년으로 규정된 그해에는 모든 토지가 휴경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농작물을 심지도, 거두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3-4절).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일년내내 모든 농업활동을 차단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 입장에선 지원책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살아야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손에 삶을 의탁한 채 그분이 모든 것들을 공급하시리라 전적으로 믿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년을 통털어 거둬들이는 농작물이 전혀 없습니다. 사료용 작물도 거두면 안됩니다. 농부가 일을 하면 안됩니다. 포도원을 가꿀 일손도 구하면 안됩니다. 요즘 크리스챤더러 이렇게 살라고 하면 일년은 고사하고 일주일도 못가 공황장애를 겪을 만 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이상하고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7년째 해에는 어디서 양식을 구한다는 말인가? 가족과 가축떼가 무얼 먹고 산담? 안식년 바로 전 제6년까지 우리가 남김 없이 다 먹어치우고나면 우리 아이들이 굶을 텐데 그래도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정말로 포도가 나무에 달린 채 썩도록 하나님은 우리더러 보고만 있으란 말씀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년을 명령하실 때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신실하심을 친백성에게 계시하는 것이있습니다.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20-21절)

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나님은 22절에서 3년치의 추수를 보증하셨습니다. “만약 너희가 눈 감고 나만 푹 믿는다면 내가 제 6년에 가서는 너희가 3년간 먹을 양식을 추수하도록 해주련다.”

주님이 여기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의뢰하며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항상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하나님이 대신 일하시네 by Gary Wilkerson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고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보기에 사람들 마음이 죄와 예속됨과 실망감에 사로잡히가 시작했습니다.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느헤미야 13장 19절).

이 구절에서 느헤미야는 성령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 성향과 어디로 끌리는지를 잘 안다. 안식일을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빠져서…결국 나를 잊을 것이다.” 그래서 어두워지기도 전에 느헤미야가 문을 닫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문제가 뭔지 아직 모르고 있을 때에도 이미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고 계십니다. 죄악이 자리잡기 시작하여 당신을 장악하기 전에 하나님은 미리 움직이십니다. 청교도들은 이를 선행적 은총이라고 불렀습니다. 유혹이 들어오기 전에 마련된 은총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쫒겨나기 전에, 죄가 선악과를 장악하기 전에 하나님은 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자손이 네 머리를 상할 것이다”(창세기 3장 15절). 아담과 하와가 속아넘어가고 만국을 형성할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을 뱀이 미혹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빠져나가기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였습니다. “내 계획이 벌써 가동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결코 곁으로 물러나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만약 죄를 범하게 되거든 내게로 와서 회개하거라. 내가 또 용서해주마.” 물론 그분은 그리하실 분이십니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혹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당신의 삶에 방벽을 쌓기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은혜와 성장으로 말씀위에 말씀으로 계명위에 계명으로 차근차근그것을 쌓아 영적으로 성숙하여지는 과정속에서 보강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벌써 당신의 승리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2012년 11월 16일 금요일

소돔으로부터의 구출

우리들 대부분은 소돔을 샌프란시스코나 뉴욕, 혹은 뉴 올리안즈 같은 사악한 현대도시들의 모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자신의 심령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소돔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극도로 악한 것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졌던 소돔 사람들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 정녕 너희가 마음으로는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폭력을 측정하는도다” (시편 58:2)

저는 다음 구절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소돔으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가를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신성의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에 따라 그에 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부르셨으니, 이로써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들을 주심은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통해서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 후서 1:3-4)

하나님은 속아서 매여 있는 우리들에게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에 대한 능력의 약속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분은 “ 나는 너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 지켜 줄 것을 맹세한다. 나는 너에게 나를 순종하는 심령을 주리니 나의 약속들이 너를 붙잡아 주게 하여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우며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는 진리인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잡을 때 우리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는 이 서신에서 그가 말하고 있던 신자들은 “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절). 어떻게 이 크리스천들은 죄를 피했을까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들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경건의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기쁨에 대해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기쁨은 당신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될 때에만이 터져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당신의 욕정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제거시키시도록 하십시오. 바로 지금 그렇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 오 하늘의 아버지, 저의 죄에 대해 당신께 동의 합니다. 저의 타협의 악취가 하늘에 닿았고 저는 그것이 즉각 없어져야 함을 압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에 찬, 하늘의 최후 통첩을 받아들이며 당신 앞에 모든 것을 내려 놓습니다. 제 안의 사악한 모든 것을 다 태워주시고 당신의 약속이 저의 심령을 붙들게 해 주시옵소서. 저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2012년 11월 15일 목요일

하나님 안에서 충만함을 향해 전진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의 손으로 일하시지 않았었더라면 롯은 소돔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 그대로 롯과 그의 가족들을 그 도시에서 끄집어 내셨습니다, “롯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이 그의 손과 그의 아내의 손과 그의 두 딸의 손을 잡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인도하여 성읍 밖에 두시니라” (창세기 19:16)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은혜의 그림인지요! 롯이 파멸을 눈앞에 두고도 힘이 없어, 아니면 자신을 구원할 의지가 없어 꾸무럭거릴 때, 하나님께선 이 혼란 속에서 죄에 묶여 속고 있는 사람들을 안전함으로 구해 내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은 롯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 롯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네가 이 대 참사가운데서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단다. 너는 의로운 자란다. 하지만 내가 경고하노니, 이제 그 곳에서 나오너라!”

로마서 5장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 연약하였을 때”라는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기꺼이 우리를 위해 대신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롯에게 또 하나의 지시를 하셨습니다, “ 네 목숨을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그래야 소멸되지 않으리라” (창세기 19:17) 여기에서 산은 하나님의 임재, 즉 그 분과 홀로 있는 장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들이 성경 전체를 통해 되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곳도,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 앞에서 변형하셨던 곳도,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로 그 분의 아버지를 찾았던 곳도 산에서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 주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도성과 그의 거룩한 산에서 크게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편 48:1). “우리가 주의 산에,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자. 그리하면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길에서 행하리니” (이사야 2:3). 여기에서의 메시지는 “ 그 분의 약속들을 믿는 당신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 하실 때, 그 분의 거룩함의 산을 향해 똑바로 달리라!”는 말씀입니다.

롯은 아직도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기꺼이 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소알 성읍으로 우회할 것을 구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내가 산으로 도피할 수 없나이다. 혹 어떤 재앙이 나를 붙들면 내가 죽을까 함이니이다” (창세기 19:19).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고 롯이 결국은 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는 거기에 있었을 때에 소돔에서 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롯이 술에 취했었고 자신의 두 딸에 의해 동침함으로 근친 상간의 아들들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지요!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롯이, 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충만함 가운데로 전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죄와의 평화협정을 멈추십시오

“그들이 롯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 밤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려오라. 우리가 그들을 알고자 함이라” (창세기 19:5). 롯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소돔성의 미쳐 날뛰는 군중들이 롯의 집을 에워 싸고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음담패설을 떠들어 댔습니다. 그들은 롯의 집에 머물고 있는 두 천사들을 겁탈하겠으니 내놓으라고 소동을 부렸습니다.

그 얼마나 끔찍한 장면입니까! 하지만 이에 대한 롯의 반응은 그 군중들과 거래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롯은 성문에 앉아 있던 것으로 보아 소돔의 재판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롯의 명성은 보호하는 자로 평판이 나있었기에 폭도들을 설득하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을 “형제들”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소돔의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탁 하노니, 형제들아, 그처럼 악하게 행하지 말라. 보라, 내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도다. 내가 간청하노니, 내 딸들을 너희에게고 데려가서,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자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7-8절).

한 신학자는 롯은 그 남자들이 동성연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딸들은 위험하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아마 롯은 자신에게 이렇게 합리화 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 이 사람들은 소돔 식의 파티를 하려 하겠지, 자신들의 변태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말이야. 여자들에겐 위협적이지 않으니 만일 내 딸들을 내 보내도 내일 아침이면 아무 일 없이 돌아 올 거야.”

그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롯은 하나의 죄를 다른 죄로 대치시키려고 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탐욕을 가지고 흥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에게 속고 있는 롯은, 숨겨진 죄가 의인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예입니다. 그의 죄는 자신의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그러한 위험한 지경을 자신 안에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사람은 현실을 마주 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부적절한 타협을 맺어 가면서 대가를 받는 순간을 최대한 지연시켜 그의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늦추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오늘 날 많은 크리스천들의 태도 입니다. 그들은 “나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지, 그분은 이전에 나의 죄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또 다시 그렇게 해 주실 거야.” 하면 자신들을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절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더 이상의 흥정은 없다. 경한 죄로 중한 죄를 대신 바꾸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모든 죄는 다 버려야 한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들의 죄가 매우 중하므로” (창세기 18:20).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 은혜, 그리고 오래 참으심에 대해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아 그분께서 소돔의 것들과 같은 모든 것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분의 성품을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 주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시기를, 주로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출애굽기 34:6-7 ).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계속하십니다,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7절).

주님은 “ 나는 죄를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자비롭고 오래 참지만 너희들의 죄에 대한 나의 인내가 끝나는 때가 오고 있노라. 그리고 그 때는 소돔이 불 타버릴 때인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명의 천사가 롯에게 와서 경고하기를, “ 일어나서, 네 아내와 여기에 있는 네 두 딸을 데리고 가라. 그래야 네가 성읍의 죄악 속에서 소멸되지 않게 되리라” (창세기 19:15 ).

롯은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다음날 아침 천사가 와서 깨울 때까지 잠을 잤었으니까요. 그의 사위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 만일 그가 그 경고를 정말 믿었다면 그는 지금쯤 은 여기에서 도망 나가고 있었을 거야. 롯은 그 것을 믿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왜 우리가 그걸 믿어야 하지? “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임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이들이 우리의 증언을 들을 것입니다.

저는 소위 “신의 최후통첩”이라는 것을 믿는뎨, 그것은 당신의 죄가 당신을 멸망 시켜버리려 하는 때를 성령께서 아시 는 때입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고 있다. 자, 너의 죄로부터 돌이키거라. 나의 말에 순종하거라!”

이러한 최후 통첩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 됩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은 우리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함으로써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며 거짓을 말했고 그 즉시로 죽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 참조).

당신이 하는 많은 기도와 금식,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얼마나 신실한지는 결코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심각하게 대처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by Gary Wilkerson

저는 속박과 사로잡힘으로부터 계속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승리를 유지 할 수 있을까요? 한때 우리를 괴롭혔던 것들에게로 되돌아 가지 않고 어떻게 하면 끊임 없는 승리가운데 살수 있을 까요? 그리고 저는 그저 죄에 대해서만 얘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자라면서 지니게 되는 감정적인 응어리들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삶의 유형을 가지고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이들은 계속 극복해가야 만 했던 연쇄적인 실망감들을 경험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속박을 떨쳐 버릴 뿐 아니라 계속 그 자유함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걸까요? 승리를 얻을 뿐 아니라 그 승리를 계속 지킬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우며, 넉넉히 이기고, 지속적이면서도, 능력 있는 승리를 전 생애를 걸쳐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당신은 아마도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십 여 년의 상담이 필요할 것이며, 혹은 그것을 당신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려면 이십 여 년의 성숙해 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한 순간에 당신을 자유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그 자유 함 속에서 계속 거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느혜미야가 성벽 재건을 감독하려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은 장기간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느혜미야와 같이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노예이거나 종들이었으며,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지만 그들은 일을 하려고 마음을 정했었지요. 그들은 그들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것들을 위한 열정들이 있었고 단 오십 이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종류의 열정, 즉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 가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목적, 계획 그리고 야망을 위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당신의 눈을 예수께 고정 시키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세우시고 당신을 번성케 하실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당신을 일으켜 세우시고 자유케 하시며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자유함을 누릴 수 있으실 것입니다.

“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는 자들보다 더 나으니라” (로마서 8:37).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구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한번은 어떤 사역자가 청중을 향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구약은 현대와 동떨어진 것이기에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는 책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요! 구약 읽기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신약의 내용을 너무나 명료하고도 간단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신약교회의 모형이고 애급은 세상을 대표합니다. 광야길을 걸었던 그들의 여정은 크리스챤들의 영적인 순례길입니다. 또한 마라에서 쓴 물을 고쳤던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물이 터져나온 사막의 반석은 장차 오실 구세주를 각각 나타내는 한 모형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육신으로 싸웠던 모든 전쟁을 거울삼아 오늘 날 영적인 전쟁을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1절). 장막과 기물들조차도 하늘에 있는 것들의 일례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8장 5절).

이모든 구약의 예들은 옛적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우리가 불신으로 떨어지지 말라는 뜻으로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브리서 4장 11절). 다른 말로, “구약을 공부하여 이스라엘에게서 배우라. 그들이 범했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라”입니다.

신약의 진리가 이해가 안될 때면 나는 구약을 찾아서 어디 예화가 없을까 뒤적입니다. 예를 들어 사탄 마귀가 내 삶에 쌓아놓은 영적인 벽에 같혀있다는 느낌이 들어 이걸 어떻게 무너뜨리나 내가 알고 싶어집니다. 이때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 성벽이 어떻게 무너져내렸나를 보게됩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몸으로 싸웠던 전투장면은 하나의 그림과 유형을 보여줍니다. 나로 하여금 현재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있다면 그것을 허물 방도를 거기서 보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그들은 전혀 순종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에스겔의 능력있는 설교를 즐겨 들었지만 그 말씀대로 한번도 순종한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에스겔서 33장 31-32절).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면 내게 다가와 껴안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그러고 그들이 물러갈 때면 성령께서 내게 속삭이듯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들은 네가 한 말을 한마디도 듣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브리서 3장 7-8절). ”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16절) 이 구절들은 명백하게 증거합니다. 무신론자, 공산주의, 등등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강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행하지 않는 것이 강퍅한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능력있는 설교 역시 달게 들었던 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자기네 죄를 합리화나 하면서 죄악을 선이라 선을 죄악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지시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사야6장 9-1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질적인 죄를 내려놓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쾌락과 경건치 못한 벗들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자들이 절대로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 대신 네가 더욱 그들을 강퍅케 하도록 하기를 원한다, 이사야야. 그렇게 하면 그중에 몇은 너무 늦기 전에 돌아올지 모르니까!”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전적으로 헌신하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진리를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바르게 시작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육신의 길을 버렸을 때 그들은 주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런 그들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테스트 한번 합시다

강퍅한 마음으로 가는 첫걸음을 이미 뗀 것인지 아닌지 다음 테스트로 한번 알아봅시다.

     1. 매일 기도와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집에서 골방기도를 하지 않고 교회에서 한두번 기도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만일 믿으신다면 이 세상의 험한 나날 속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에도 우리의 심신을 고치고 강화시킬 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려 한다면 장차 다가올 어려운 때에 극복할 힘을 어떻게 찾겠다는 것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장차 닥칠 날들을 대비하는 유일한 길을 안 것입니다!

     2. 얼마나 여러번 뒷공론에 따른 심각한 결과에 대해 경고를 들었습니까?

뒷공론에 관한 주제로 내가 설교할 때 때론 부드러운 비처럼, 또 때로는 천둥같이 요란한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죄악의 위험성에 대해 거듭거듭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주님께 불순종했고 그것이 바로 뱀이 많이 사는 사막에서의 지긋지긋한 삶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뒷공론과 끝없는 불평의 댓가를 이스라엘은 삶의 모든 것들로 톡톡히 치르고 말았습니다.

지난 주간 혹시 어느형제나 자매를 놓고 공연히 상관도 없는 일에 뒤에서 험담을 한 일은 없었나요? 아니면 그런 한담에 귀를 기울였었나요? 만약 그랬다면, 혹시 그(녀)를 의심하는 씨앗이 그대의 영혼에 떨어져 심어지도록 허락했는지요? 뒷공론 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채 그러고도 뒷공론을 계속했다면 당신은 강퍅한 마음을 향해 내리막 길로 접어들어습니다.

     3. 얼마나 많이 은밀한 죄를 품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나요?

그 은밀한 죄, 계속 하나님의 성령께서 책망하신 그죄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 작은 죄와 놀아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의 글을 나는 지난 수년간 여러번 썼습니다. 죄를 대항하자는 설교 뿐만 아니라 부활의 능력에 관해 기르치는 것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자기 성령을 통해 이길 힘을 주시며 오래 참아주시는 동시에 선한 일을 행할 의지까지 우리마음 속에 심어주셨다고 설교로 강조해왔습니다.

매주 앉아서 책망을 거듭 듣기만 하고도 계속 죄를 짓는 사람은 강퍅한 마음이 되는 길로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발 되지 마십시오!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강퍅한 마음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언 29장 1절).

여기서 “책망을 받는다”는 뜻의 히브리말은 교정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또한 “피하지 못한다”는 “치료방법이 없는, 구제불능의 상태”입니다. 이 구절은 첫째,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 거듭 경고를 묵살하거나 진리가 손짓하는데도 계속 한쪽 옆으로 제껴놓는데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둘째로, 이같이 굳어진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 말씀을 가장 많이 들어야 할까요? 그건 의당 크리스챤들입니다. 매주 하나님의 집에 책망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강퍅한 마음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굳게 결심한 마음이기에 요동을 일으킬수 없고 또 성령의 책망이나 경고에 대해서도 면역이 되다시피 되어 반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비극적이지만 실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같은 메세지를 들었어도 수많은 크리스챤들은 들은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일정구역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고 청종하지 않으면서도 듣기는 계속하기에 강퍅한 증세가 시작됩니다.

대조적으로 강퍅한 마음을 고친 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향해 성난 주먹을 들었고 저주하기까지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성령의 순수하고도 사랑스러운 책망을 감지하자 그들이 마음이 녹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예수께로 돌이켰던 것입니다.

매덜린 머리 오헤어의 아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는 아마도 미국서 가장 무신론적인 집안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도와 하나님과 종교를 말살하자는 십자군의 기치를 들고 일했습니다. 그런 그가 복음을 듣자 영광스럽게 구원을 받아들였고 주의 사역자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기는 커녕 전파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설교를 마냥 듣기만 하고 계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강퍅한 상태를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경험으로는, 항상 성령의 기름부은 설교를 듣지만 귀를 막아버린 청중들 가운데 구제불능의 강퍅한 마음이 있습니다. 냉냉하고 죽어버린 것 같은 형식적인 교회나 몇세대째 복음이 변질되어 내려온 그런 교회에 강퍅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만에요. 강퍅한 마음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으로부터 항상 선포되는데도 불구하고 신도석에서는 듣기를 거절할 때 생깁니다.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좋으신 하나님인줄 알라!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은 당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좋으신 분입니다. 당신이 삶에서 직면하고 있는 어떤 것 , 습관, 죄, 힘든 감정, 그 어느 하나라도 예수님이 다스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처참하게 파괴된 그곳 상황을 본 느헤미야는 곧장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독려하여 성벽재건에 착수함으로서 영적인 돌파구를 열었습니다(느헤미야서 참조). 느헤미야처럼 저도 여러분들께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푹 믿고 온 마음과 힘과 생명을 다해 한번 맡겨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대적 사탄과 그의 세력을 분쇄, 정복하고 완패시킬 수 있습니다. 아군의 성벽 안에 깊숙히 같혀 고립된 적들이라면 보호받을 데도 없고 제거될 처지이기에 도망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해묵은 악습, 두려움, 중독증 같은 것들이 우리들 곁에 다시 접근하면 고생을 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 나만 쳐다보아라! 만약 나를 너의 승리로 삼는다면 그것들이 끝장난 꼴을 함께 보게해주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승리로여긴다면 대적 원수의 최후를 본 것과 다름없습니다. 원수마귀는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을 해보았다가 일단 자리를 떳지만 그 후에도 계속 예수님을 흔들어보려했던 것처럼 물론 우리를 여전히 시달리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분을 당신의 삶과 마음의 중심에 모신다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서적인 어려움들을 그분이 다 근절하실 것입니다.

습관적인 죄의 행태로 인한 두려움 속에서 당신이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발을 씻고 깨끗해진 줄 알지만 워낙 가까운데 그것이 있으니까 언제 또다시 죄의 노예가 될지 몰라 그것이 두려운 당신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전심으로 의뢰할 때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안정과 안전지대로 바로 인도하기 위해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57절).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심령을 소생시키심

당신은 처음에그 분으로부터 오직 무엇인가를 원하기 때문에 주님께 나왔습니까? 마약 중독을 버리기 위해, 결혼이 회복되기 위해, 재정 문제로부터 놓여나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까?

사실인즉,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의 삶 가운데 불가능한 일을 행하여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만을 위해 왔다면, 즉 당신의 문제들로부터 놓여나기만을 위해서 왔다면 당신은 결코 성숙함을 향해서는 한 자도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은 오직 마음이 굳어져 갈뿐일 것입니다

당신이 회심했을 때를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메뚜기들이 모든 것을 다 먹어 치운 후에 회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신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였나요 ? 당신 자녀들 중에 누군가가 문제 가운데 있었나요? 당신 위를 맴도는 죽음과 파멸로 인해 당신은 황폐함 가운데 있었나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패망한 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그 분은 항상 가까이에 계시고 구원 하심에 있어서 신실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오직 놓여남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올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 분이 당신의 하나님이며 그 분께서는 당신의 삶, 당신의 경배, 당신의 순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므로 그 분께 와야 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 맞아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 해 왔었고 아직도 습관적인 죄에 얽매어 있습니다. 주님의 치유의 만지심을 받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겠지요?”

아니요,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 당신의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을 찾는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새로운 안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그 분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드릴 때마다 그 분은 당신의 심판자가 아니라 당신의 중재자요 중보기도 자로써 일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원합니까?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 안에서 경책하시며 거룩함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오늘 그 분을 부르십시오. 그 어떤 것도,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부르짖는 당신을 하나님의 예비하신 길로부터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거하시는 높고 우뚝 솟은 분, 그의 이름이 거룩이신 분이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라” (이사야 57:15 ).

2012년 11월 1일 목요일

불가능한 임무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 그리스도는“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한가지 이유, 즉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함이니라” 라 말씀하셨습니다 “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임무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임무이기도 합니다. “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세상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예수님은 여기에서 적은 무리의 믿는 자들, 다락방에 모여 있는 백이십 명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얼마나 불가능한 과제를 분부하셨는지요!

“이방 나라들로 가서 그들과 살면서 그들의 언어도 배워라.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마귀도 쫓아내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거라. 사탄이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곳에 가서 부활하신 구주의 능력과 승리를 설교하여라.”

우리는 예수님이 평범하고, 하찮으며 배우지고 못한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말씀 하시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 분의 교회의 미래를 그들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황 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주인께서 하늘로 올려 가셨을 때 틀림없이 말해졌을 그들의 대화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들은 건가? 어떻게 우리가 전세계적인 개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지? 우리는 단 한 푼도 가진 게 없고 로마 사람들은 우리를 때리고 죽이려고 하는데. 만일 우리가 이곳 예루살렘에서 이런 식으로 취급을 받는다면 로마에서 증언하고 설교할 때는 어떠할까?”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 어떻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여리고로 갈 돈도 제대로 없는데 복음을 가지고 우리가 전 세계로 가기를 기대 하실까? 우리는 무식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언어들을 배우라는 것일까? 이건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그것은 참으로 불가능한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사명들 또한 벅차긴 마찬가지이고 말고요!

만일 이 메시지를 읽는 모든 분들이 성령님이 이 말들을 그들에게 실제가 되게 하시기를 허락 한다면, 즉 그 분의 마음의 부담과 인도하심을 구한다면, 어떤 류의 추수를 성령님이 거두실 것일까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영생을 위한 가장 위대한 일은 거대한 전도 집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 다가가는 한 성도와 함께 일어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