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마음 속에 있는 이집트 by Gary Wilkerson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목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왕이자, 목사, 지도자 그리고 중건자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가서 무너진 성벽의 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바사의 왕을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느헤미야 13:15).

느헤미야가 성으로 돌아왔을 때, 애초에 이스라엘의 열조들을 포로로 만들고 노예생활을 시작하게 만든 그런 풍습들을 그 자손들이 똑같이 번복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그들의 고향에 가서 성벽을 중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들은 그 벽들이 무너지게 만들었던 그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그들은 벽을 세우고 있으면서 막상 그 벽이 허물어지도록 한 그 똑 같은 죄를 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손으로는 성을 재건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성을 허물고 있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그들의 삶을 일궈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제단으로 나아와 예수님께 부르짖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예전의 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교회에 가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술집에 가고 클럽에 가며 컴퓨터로 음란물을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직도 타협을 합니다.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상의 것들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옛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세우고 있었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오래된 옛 것이 남아있었습니다. 모세의 지도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나왔지만 그들 안에는 애굽이 남아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39 참조). 우리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유해지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 안에는 세상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한 자리로 내려가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대적을 이겨가는 삶, 승리의 삶을 계속하기를 원합니다. 항상 말입니다!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눈깜짝할 사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날 만큼 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지요! 우리의 뜻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순간 우리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악에 우리의 마음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한후 첫번째로 바뀐것이 그들의 말투였읍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 자, 그를 죽이자. 아니, 그를 구덩이에 던지자. 그보다,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푼돈이라도 챙기자!” 그들의 마음은 경멸과 배신으로 가득찼고 그들의 타락한 마음으로부터 세속적인 사악한 말들이 용솟음치듯 뿜어져 나왔습니다.

불경건한 언어는 굳어진 마음의 확실한 증표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죄에 대해 둔감해지고 그들의 불순한 대화는 범행을 저지르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사악한자들처럼 말했고 그들은 사악한 자들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읍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냉랭한 타산적인 범죄자들이 되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범죄를 저지른것뿐 아니라 그들의 범행을 덮고서 아무일없는 듯이 양치는 본업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면 얼마나 내리막길로 치닫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얼마나 타락하고 둔하여지는지 말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굳은 마음에 대해 경고했었읍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심의 희생물로 전락했고 그들은 죄에 대해 둔감해졌습니다. 말라기서의 시작은 “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주의 말씀의 엄중한 부담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떤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1:1-2) 이럴수가!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 대들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살피는지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다루기로 결심한 기독교인들을 저에게 예를 드신다면 저는 그들이 불순한 언어로 가득 찬 기독교인임을 보여드리지요. 거의 하룻밤새에 그들은 눈에 띄게 변할것입니다. 그가 더 의심할 수록, 그의 언어는 더욱 불경건해질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충격 그 자체입니다. 한때, 그들은 경건히 경외감과 경배가 가득 찬 믿음의 감탄사와 기쁨으로 말했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영적인 언어로 부드럽게 말했지요. 하지만 지금 그들은 퉁명하게 경외함도 없이 말합니다. 그들의 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공포, 불신, 절망을 애써 감추고 있는것입니다.

모든 악인 불신의 생각들을 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계속 의심하지마십시오!

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용서하는 사랑

구약의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신약의 기독교인들에게 강한 메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고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택한 백성들의 한 모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창세기 35장 11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다룬 방법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죄지은 형제들을 향해 용서하는 한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는 곧 죄지은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아름다운 한 장면입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성경 말씀을 통털어 가장 슬프고 비극적입니다. 이 선택된 자의 자손들은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심에 의해 야기된 파괴적인 죄의 물결과 비애는 우리들 모두에게 엄숙한 경고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그가 노년에 얻은 아이 요셉에 대해 유난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살피는데 있어 특별한 대우를 했습니다. 야곱의 큰 아들들은 이러한 요셉이 받는 특별한 관심이 그들의 아버지가 요셉을 그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4)

야곱이 요셉을 매우 소중히여기고 사랑하였다고해서 그의 다른 아들들을 덜 사랑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모든 자식들을 신실하게 보살피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사랑의 인도와 훈련을 받았읍니다. 그럼에도 큰 아들들은 한 형제의 총애 받는 자리를 질투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근사한 채색옷을 포함하여 그가 마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셉은 더욱 축복받고, 총애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았고 이것이 그들을 화나게 하고 질투나게 했읍니다.

당신은 주안에 있는 형제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듯 보일 때 시기라는 죄의식을 가져 본적이 있습니까? 그의 기도는 항상 빨리 응답을 받는것 같아 보입니다. 당신이 버림받고 외로울때도 그는 결코 고독하거나, 사랑받지 못하거나 불필요한 존재로 보이지 않습니다. 쓴뿌리들과 질투가 자라기 시작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위기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덜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에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을 모든 악에 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환경에 대해 큰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평할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곧 요셉의 형제들을 온갖 혼란 속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 태도 입니다.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하나님을 울게 만드는 죄

제가 이것을 직선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둘러서 얘기하거나 부드럽게 말하지 않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울게 만드는 죄는 일상에서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교도의 행악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크리스천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그분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죄입니다.

당신은 그 분께서 우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너무 인간 같고 약하게 비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백성들이 그 분의 바로 그 사랑의 본성을 의심할 때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 지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의하면 그분은 그의 가장 가까운 자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의심했을 때 우셨습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친구들로 인해 우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했던 자들이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폭풍에 휩쓸려 물에 갈아 앉고 있는 배 안에서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배 뒤쪽에서 곤한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마가 4:38). 그들의 비난이 얼마나 주님을 슬프게 했을 까요! 그들의 배 안에 있었던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들을 개의치 않았겠습니까? 인간이 자신들의 눈을 주님으로부터 떼고 대신 그들의 환경에 집중할 때마다 의심이 생겨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몹시 놀라셨습니다! “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 어떻게 너희가 두려워할 수가 있지? 나의 사랑과 돌봄을 어찌 의심 할 수가 있느냐?”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이 일에 있어서 더욱 더 주님을 슬프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신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의 불신보다 더 큰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대한 빛에 대항하여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산에 서서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 보다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뢰성을 완전하고 자세히 기록해 놓은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20세기 동안 내려온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변하는 증거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크리스천들과 경건한 조상들의 자자손손들의 간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온유하신 사랑과 애정을 증거하는 셀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의 불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분이 누구이신지 인정합시다!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치유의 말씀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병약한 사람에게 이끌렸읍니다. “거기에 38년동안 병약함을 지닌 어떤 사람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그가 누운 것을 보실 때에 그가 이제 그런 상태로 오랫동안 있은 줄 아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 (요한복음5: 5-6). 이 이름 모를 불구자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수많은 무기력한 기독교인들을 여러 면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무기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 즉, 육체적, 영적, 정신적 혹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가오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쩌면 정신적, 그리고 영적으로 그 사람처럼 연못가에 누워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희망이 없어 보이고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속에 있을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깊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즉 유일한 친구, 혹은 연인일지라도 당신 안의 상처를 진정으로 만져줄 시간과 사랑, 열정이 없어 보입니다.

유심히 그 무기력한 사람을 보면서 수많은 갈등의 세월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상처들은 무관심하고 무정한 사람들에 의해 그 사람 위에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자주 그의 마른 손을 들고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어야 했을까요, “ 누구 도와주시겠읍니까? 제발! 저는 혼자서 할 수가 없읍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허약해져 있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적 생명과 활력소를 도둑질하는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들과의 질질 끄는 씨름 때문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낙담이라는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서 항상 기적을 바라며, 다른 사람이 뭔가를 일으키어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위대한 인생 역전이란 기적을 바라면서 자신들을 이 모임 저 모임, 상담, 세미나들로 끌고 다닙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가슴으로 통곡하는 자에게 보여주십니다. 또 제가 믿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그 사람의 깊은 고통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시러 그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마음으로부터의 울부짖음에 대해 많이 쓰여있읍니다. “ 내가 고통중에 주를 부르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고 내 부르짖음이 그 분 앞에 이르되 그 분의 귀에까지 이르렀도다” (시편 18:6). 하나님을 향한 심령으로부터의 울부짖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자비와 치유의 말씀으로 항상 응답받게 될것입니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분열된 교회 by Gary Wilkerson

고린도 교회엔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분열, 수군거림, 험담, 질투, 다툼 그리고 성적인 죄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타협과 허용 그리고, “ 글쎄, 우리 모두는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지.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나쁘지 않아” 라고 하는 듯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절에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은 그들에게 격려의 말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강한 말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굳어진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코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 합니다, “ 내가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성장과 안정을 향해 자라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영혼을 채우고 양육해 줄 수 있는 단단한 말들을 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미성숙으로 인해 바울은 그들에게 계속 젖만 주어야 했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3절). 성경은 “ 이 세대의 영을 가진”이란 의미인 “육신의”(육적인)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육신의 영은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묘사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당신 자신의 힘으로 일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3절) 바울은 이 인간적이며 육신적인 영이 일하고 있는 몇 가지 방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시기합니다. 그것은 항상 질투합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집 안에 다툼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육신의 영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 내가 더 낳지” 라고 하는 그런 태도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회개토록 하며 “ 하나님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저는 원합니다” 라고 말하게 하기 위해 바울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둘만의 기도 시간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기꺼히 드린다면, 우리는 옛 선조들과 같은 기도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참조: 다음의 증거들은 당신이 모든 악을 떨쳐 버리고 영원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을 어두움으로부터 그분의 빛의 나라로 옮기도록 하며 죄를 회개했느냐 하는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1. 당신이 계속 새로워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한번의 회심경험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을 통해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끊임없이 간구 합니다. 그들의 매일의 기도는, “주님 저로부터 당신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은 다 제거해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린도 후서 5:17). “ 우리의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느니라” (디도서 3:5-6)

2. 만일 당신의 삶이 성경말씀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두려워합니까?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해지니,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아느니라” (요한 일서 2:5). 성경은,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확실히 말씀합니다

3. 만일 당신의 믿음이 구제와 함께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성경은 만일 당신이 박애정신 혹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네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 전서 13:2). 히랍어로 ‘아무것도”라는 뜻은 “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아니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모두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도 아니며 또 항상 아무도 아닐 것이다”인 것입니다.

당신은 위대한 믿음 안에서 은사가 넘치는 설교가, 능력 있는 전도자, 혹은 기름 부으심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 일수도 있겠지만 만일 당신에게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집중적인 믿음

예수께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 나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오며 또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옵니다 내가 그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었나이다” (요한복음 17: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시고 또 내가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6절).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히 하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것과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자신의 아들을 기뻐하시는 것 같이 우리를 기뻐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신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증명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또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라” (요한복음 20:17)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얼마나 힘들게 고분분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속상하게 하고 있다고 느끼는 “침체기”을 지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느낌 보다 사실을 인지하십시오. 사실인즉슨, 하나님의 기쁨은 당신의 애씀, 열심, 선한 의도 혹은 선행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절대 아니고 말고요, 그것은 모두 당신의 믿음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른바 “집중된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고 믿는데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모든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와야 한다는 원칙에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2절에 보면 저자는 “믿음 없는 악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근본적인 교리를 떠난다면 우리는 율법, 즉 육적, 영적 속박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 감이라……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에서 쉬신 것같이 그도 자기 일에서 쉬었느니라” (히브리서 4:3, 10).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즉 믿음의 증거는 안식인 것입니다.

당신의 분투, 수고함, 괴로운 영혼이 평강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내가 기복이 있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내가 어떻게 느끼던 간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그분과 같이 앉아 있는 것이다!”라고 확신 시키는 일입니다.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기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이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가서 6:6-7).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어떻게 해야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어떤 종류의 희생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실까? 우리의 피, 우리의 몸, 우리의 자녀?”

하나님의 대답은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 나는 너의 희생들, 너의 선행들, 너의 약속들, 너의 도덕적 행동들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육신적인 것들은 내 눈에 차지 않는다. 오직 나의 아들과 그 아들 안에 모인 모든 자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를 기쁘게 할 수가 없노라.”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도덕적이며 올바른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자도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선행, 친절한 성품 그리고 베푸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누더기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까요?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시어” (에베소서 1:6). 우리의 선행들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께 온전히 당신의 마음을 드렸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물었던 똑 같은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 오 하나님, 어떻게 하면 당신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의 기쁨이 될 수 있나요? 저는 약속을 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제가 잘 되어 가는 지를 생각 할 때마다 정작 뒤쳐져 있음을 봅니다. 성경을 더 읽어야 할까요? 기도시간을 더 늘려야 할지요? 간증을 더해야 할까요? 주님 저게 더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스라엘에게도 그리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어떠한 희생도 선행도 원하지 않는다. 나의 기쁨인 나의 아들의 일만을 나는 인정할 뿐이다. 나는 이 세계의 기초가 생기기도 전에 너를 택해서 나의 아들에게 혼인 하도록 했단다. 내가 너에게 구애했고, 죄를 깨닫게 했으며 나의 영을 통해서 너를 예수 안으로 데리고 왔단다. 나는 나 자신의 몸을 미워할 수가 없다!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한 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이사야 42:1). 하나님께서 붙드시며 그의 모든 발걸음을 지켜주시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선택 되고 뽑혔으며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하는 이 자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마태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 3:16-17)

여기에서“내가 진실로 기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 나의 영이 나의 아들, 예수를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를 통틀어 실로 엄청나게 많은 양과 소들이 희생으로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짐승들의 피가 수세기 동안 강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희생들의 어떤 것도 주님께 기쁨을 가져다 드리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주께서 죄로 인한 번제들과 희생제들은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니” (히브리서 10; 4, 6).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읽습니다. “그때 내가 말씀 드리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 (7절). 그리스도는 어떤 짐승의 제사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 (5절). 하나님은 최종적이며 완전한 희생을 제공할 수 있는 한 육신을 가진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자신을 인간의 자궁 속에 넣으시므로 우리의 모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되기 위해 하늘의 부요함을 포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예수님, 나의 전부를 받으소서 by Gary Wilkerson

1800년대, 한 젊은 여인이 여덟 명의 자녀를 둔 어떤 부부를 방문한 후에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한 찬송 시를 썼습니다. 그 가족들 모두가 교회에 다녔지만 닷새 동안을 같이 지내는 동안 그 여인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것에 대해 냉담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열정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도 없는 듯했습니다.

마음에 짐을 느낀 이 젊은 여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을 만져주시리라 믿으며 그들과 같이 지냈던 전 시간 동안에 그 집 주인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사랑 가운데 진리를 전했고 담대하게 그들에게 충고도 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 이 열명의 식구들에게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삶 가운데에 행하신 일들을 감격해 하며 수 시간을 울었습니다!

이 찬송 시를 지은 프렌시스 하버갈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전 너무 행복해서 잠을 잘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온 밤을 찬양과 재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이 짧은 시는 자연스레 이어졌고”영원토록, 오직,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의 마지막 시행으로 맺어질 때까지 제 가슴 속에서 계속 울려 나왔답니다!”

헌신의 찬송

나의 생명 받으시어 주님, 당신께 드려지게 하소서.

나의 순간들과 날들을 받으시고 그것들이 끊임없는 찬양 안에 흘러가게 하소서.

나의 손을 받으시어 당신의 사랑에 따라 움직이게 하소서.

나의 발을 드리니 당신을 위해 민첩하고 아름답게 쓰여지게 하소서.

나의 음성 드리니 항상 오직 당신 만을 위해 찬송하게 하소서.

나의 입술을 드리니 당신으로부터의 메시지로 가득 차게 하고서

나의 은과 금을 드리니 제가 조금도 움켜쥐지 않게 하소서.

나의 생각 드리니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써 주소서.

나의 뜻을 드리니 그것이 당신의 뜻이 되게 하시고 더 이상 저의 생각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의 마음을 드리니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보좌에 있게 하소서

나의 사랑 드리니, 나의 주님, 사랑의 보물 창고인 당신의 발아래 붓습니다

저 자신을 받으소서, 영원토록 모든 것을 다해 오직 당신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을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해달라고 구하시겠습니까? 당신을 이 기도에 초청합니다, “ 예수님 저를 받으소서, 저의 삶이 당신께 온전히 헌신되어 지기를 원합니다!”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승리의 함성을 되찾기

다윗 왕은 간음 죄를 저지른 후 충실한 부하를 살해되도록 일을 꾸몄으므로 이제 젊은 아내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그의 하늘 아버지 이름 앞에 부끄러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일년 내내 자신의 끔찍한 어두움을 숨겼었고 이제 완전 파멸 일보직전에 와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후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 내 마음에 합한 자”( 사도행전 13:22)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다윗이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자신을 낮추고 회개한 데 있습니다.

“나는 내 죄악을 선언할 것이요, 내 죄로 인하여 괴로워 하리이다” (시편 38:18). “주, 주만을 거역하여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리이다’(시편 51:4).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11).

당신은 당신을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 죄의 무거운 짐들 아래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임을 느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치유함과 구원의 길의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다윗이 회개했을 때 그는 마침내 터널의 끝에서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을 언뜻 볼 수 있었답니다.

“내가 내 죄를 주께 시인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내 죄과들을 주께 자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주는 나의 은신처시니 주께서 고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며 구원의 노래들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시펀 32:5, 7)

참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당신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죄를 완전히 고백하시고 떨어 버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목에 입맞추고 의의 옷을 입히시며 그리고 당신 앞에 잔치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다윗과 함께 이렇게 증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자비가 그를 두르리라. 너희 의인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이 정직한 너희는 모두 기쁨으로 소리칠지어다. (시편 32:10-11)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죄를 경히 여기는 것

에스겔 선지자는 우리에게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보여 줍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유다의 칠십 명의 장로들이 주님으로부터의 말씀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성전의 예배를 섬기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선지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을 때 에스겔은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집에 앉아 있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하나님의 손이 거기서 내게 임하시더라. 그 때 내가 보았더니 보라 불의 모양같이 생긴 형상이라, 광채 모양 같으며, 황갈색 같은데, 그가 손의 형체를 내밀어 내 머리 한 타래를 잡고 그 영이 땅과 하늘 사이로 나를 들어올리어 하나님의 환상들 안에서 예루살렘으로 나를 이끌어” (에스겔서 8:1-3)

이어서 4절에는 “보라, 거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데” 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이 모임에 임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빛으로 그 곳에 가득 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의 임재가 모임 가운데 임 할 때면 죄는 항상 드러나게 됩니다. 갑자기 선지자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 기어 다니는 것들과 가증스런 짐승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0절). 그는 그것을 마귀의 아성들, 악한 것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집에 침투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칠십 명의 노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도하심을 구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하고 조용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은 숨겨진 죄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사역의 외적 예배 절차만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재로는 태양을 경배하는 은밀한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말이지요. 그들은 성전에 고용된 매춘부였으며 예배의식의 일부로 이 소위 경건한 장로들은 간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나빴던 것은, 이 사람들은 그들의 끔찍한 우상숭배에 대한 죄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우상숭배를 눈감아 주시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죄로 인해 무거운 짐에 눌려 있었지만 이 칩십 명의 장로들은 어떠한 죄책의 화살도, 육체적 힘의 소진함도, 감정적인 아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모세가 “가짜 평안”이라고 불렀던 그러한 것에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 저주의 말을 들을 때에 그가 자신의 마음 속에 스스로를 축복하여 말하기를, 내가 비록 내 마음의 상상대로 행하여 죄악을 물같이 마실지라도 내게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신명기 29:19).

다른 말로 하자면, “스스로 속아 있는 사람은 술 취한 자와도 같다는 말입니다. 즉 그는 분별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그는 목마름과 술 취함의 차이조차 분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숨겨진 죄의 짐

다윗 왕이 일년 내내 지녔던 숨겨진 죄의 짐이 그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건강을 망가뜨렸고 그의 마음을 괴롭게 했으며 그의 영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것은 그의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환멸을,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이 울부짖었습니다, “이는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내 슬픔은 계속해서 내 앞에 있음이니이다” (시편 38:17). 히브리어로 ‘halt’ 는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 저는 이 무거운 슬픔의 짐 때문에 넘어지려고 합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혼란에 빠져있는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 사탄이 다윗에게 가져온 이 얼마나 처참한 비극인가? 이 부드러운 심령을 가졌었던 시편 기자가 어떻게 이토록 실족하는 지경에 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마 어마하게 화가 나셨음에 틀림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죄를 그토록 무겁게 만든 것은 사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지극하신 긍휼가운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깊은 곳까지 가라앉게 허락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중대성을 알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고백하지 않은 죄를 그처럼 무겁게 함으로써 다윗이 더 이상 그 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끝내는 회개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다윗처럼 의로운 자만이 자신의 죄로 인해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의 양심은 아직도 살아 있어서 그의 마음을 찌르는 하나님의 정죄의 모든 화살로 부터 날카로운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나의 슬픔이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전체 이야기의 비밀입니다. 즉 다윗은 거룩한 슬픔, 하나님에 대한 깊고도 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시인합니다, “ 저는 이 일 가운데 저의 무릎을 누르고 있는 주님의 경책의 손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주의 진노의 막대기로 인하여 고난을 본 사람이로다. 그가 나를 인도하시어 어둠 속으로 데려 오셨으나 빛으로는 데려오지 아니하셨도다. 그가 나의 뼈를 꺾었다. 그가 나를 치러 일어나서……늙어 죽은 자들처럼 어두운 곳에 두셨도다. 그는 내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 나로 나갈 수 없게 하셨으며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도다……그가 다듬어진 돌로 내 길을 막으셨도다” (예레미야 애가 3:1-9)

저자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즉 우리가 숨겨진 죄를 지니고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란스럽고 무섭게 하시며 우리의 족쇄를 무겁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토해내며 깊은 회개를 하도록 몰고 가십니다.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에베소의 교회

에베소의 교인들은 주님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읽으며 저는 이 사람들이 듣고 또 살았던 그 복음에 놀라게 됩니다. 사실 바울은 그들을 소상하게 칭찬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으로…택하신…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신” (에베소서 1:1-5)이라고 하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그 얼마나 축복받은 거룩한 백성에 대한 묘사인지요! 예수님은 또한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인들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너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계시록 2:2). 다른 말로 하자면, “ 나는 너희들의 삶 가운데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선한 일들을 알고 있다. 너희는 불평 없이 나를 위해 인내하며 수고를 했고 또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너희가 선한 일을 하는 데 부지런한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하구나.”

예수님은 이러한 에베소 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다른 무엇, 무언가 깊이 잘못되어있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모든 행위, 즉 죄를 미워하고, 진리를 향한 너의 사랑, 의로운 용기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수고함 가운데에 너는 너의 첫사랑이 시들어 가는 것을 허락했구나. 나를 향한 너의 애정이 죽어가고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사랑을 져버린 것 때문이다” (4절).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것의 심각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다소’라는 낱말은 무엇인가 가볍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말은 희랍어 원본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에 원어로는 말 그대로 “ 나는 너에게 거슬리는 것이 있다!”라고 번역됩니다.

저는 제가 에베소인 타입의 크리스천, 신실한 일꾼이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고난이 예수님을 위한 것, 즉 그 분을 영화롭게 하고, 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늘에서 제가 그분과 같이 앉아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에베소인들처럼 그렇게 제대로 배운 신자들 가운데를 다니시면서 “ 나는 너에게 거슬리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때 그 말씀은 저의 영을 휘어잡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이렇게 여쭤 볼 수 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 저에 대해서도 거슬리는 것이 있으십니까? 저 또한 당신에 대한 애정을 잃었는지요?”

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당신은 원하는 만큼의 예수를 가질 수 있다 by Gary Wilkerson

저의 아버지 데이빗 윌커슨은 제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제가 배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게리, 너는 네가 원하는 만큼의 예수를 가질 수가 있단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은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의 예수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작위로, “나는 너를 고를 것이고 그리고 너는 아니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채워질) 것 임이요”(마태 5:6). 이 구절은 “저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모두 원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저는 영적인 주림에 있어서 간절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남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어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남녀들을 하나님은 찾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가 구별 된,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10퍼센트 또는 75퍼센트 성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 분의 몸인 그의 신자들이 100퍼센트 전심으로 주님께 매진 하기를 원합니다.

그 분의 영의 기름 부으심을 저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분이 부어주는 것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 오셔서 이 마지막 때에 그 분의 성령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주시고자 하는 것에 반응하는 남녀들이 일어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나는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기를 선택했다. 나는 성화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나는 이것으로부터 단념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즉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지고, 성령의 불로 지펴지길 예비하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로부터 그 어떤 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당신의 사랑은 살아 있습니까?

만일 모든 종류의 방해와 요구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그런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는 십 분도 보내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어떤 누구보다도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무의미해지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연애 시절에 당신의 배우자를 처음 사랑했던 것과 같지 않나요? 만일 그녀가 당신이 바쁜 중에 전화를 했다면 당신은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중단 했지요.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단둘이 만의 시간을 끼어 들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당신 둘만의 사랑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차 순위로 밀려났고요.

오늘 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과의 질적인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몇 주, 혹은 몇 달을 지냅니다.

그들이 여러 날 동안을 주님을 등한시 하면서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서에 보면, 신부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물러나 가버렸다….” (아가서 5:6)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 밤 중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 내 혼은 낙망하였도다……내가 그를 찾았으나 발견 할 수 없었고, 내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내게 응답하지 않았도다’ (6절).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급히 거리로 달려 나아가 외칩니다, “ 내 사랑하는 자를 보았습니까?”

어째서 이 일이 그녀에게 그토록 심각한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이며 이는 나의 친구라” (16절).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다” (8절) 라고 말했듯이 그녀는 그 사랑하는 자 없이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들, 즉 친구들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우리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실까요? 성경은 우리를 그의 신부, 그의 사랑하는 자, 그의 최고의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보다 다른 것들을 중히 여긴다면 주님께서는 어떠한 거절 감을 느끼시겠습니까?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붙잡고 있나요?

바로 이 순간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습니까? 당신의 영혼이 예수를 갈망하고 있나요,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인가요?

우리 우편 수신자 명단에 있는 한 여자 분이 이러한 우울한 글을 썼습니다,” 저의 남편은 한 때 하나님을 향해 불타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을 그는 주님의 일에 신실하게 자신을 드렸었는데 지금은 그는 어떤 새로운 추구하는 것으로 온통 미쳐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주님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아요. 그가 점점 냉담해 져가서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정당한 추구함에 관한 비유를 말씀 해 주었습니다. 한 부자가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모든 친구들을 초청하고자 그의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람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변명하기 시작했다”(누가복음 14:18)고 말씀합니다.

한 친구는 종에게”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네. 그러니 너의 주인에게 가서 내가 갈 수 없다고 말해 주게.” 그 다음 친구는 말하기를, “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해 볼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 갈 수 없다고 주인에게 말하라, 왜냐하면 소를 데리고 밭에 가야 하거든. “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 나는 장가를 들어서 신혼 여행을 가려는 참이야 그러니 잔치에 갈 시간이 없네.”

이 사람은 자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모든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그 친구들의 안락함과 편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식탁은 차려졌고 모든 것들이 준비가 되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저 너무 바쁘거나 다른데 정신이 몰두되어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오지 못한 데에는 선한, 합법적이 이유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친구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파티에 가거나 술집을 여기 저기 기웃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대로 이 사람들이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추천합니다. 즉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은 사람들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 해줄 수 있고 대량 구입한 것을 시험하는 것은 정상적인 비즈니스 관행입니다. 마지막으로 결혼은 성경이 격려하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대로와 산간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 하노니, 전에 초대되었던 그 사람들은 아무도 내 저녁을 맛보지 못하리라” (누가 복음 14:23-24).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논지를 아주 분명히 하십니다. 즉 이러한 좋고 정당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주님보다 우선권을 차지 할 때에는 악한 것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예수님과 에베소 교회

요한 계시록의 처음 세 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도 요한의 놀라운 환상 중에, 그는 예수님이 신약에 나와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걷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눈은 불꽃이며, 그 분은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러한 교회들을 의로 심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장 17절에서 “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한다” 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일곱 교회 가운데 나타나시므로, 그 분은 그가 보시는 선과 악에 따라 교회들을 심판 하시기 시작합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심판은 붉은 색의 글자들로 써 있는데, 이것은 모든 말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 일곱 교회들은 실제로 현재의 에베소, 서머나, 라오디게아, 등등 에 있었던 실제 회중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은 단지 이 특정한 교회들만을 향해서가 아니라 저 세계의 교회들을 향한, 즉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바라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듣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찬양하는 교회들에 대해 많은 좋은 것들을 열거 하시면서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좋은 일들로 각 교회들을 칭찬하시지만 또한 자신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여러가지 들을 보시고 각 교회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 째 메시지는 사도 바울의 경건한 가르침 위에 세워진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은, “ 너희가 첫 사랑을 져 버렸다” (계시록 2”4)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첫 사랑’ 이라는 단어를 사용 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덜 성숙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독점적인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 내가 한 때 너의 마음의 제일 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 그러나 지금 너는 나를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잃어버렸다. 너는 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허락했다”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예수께서 이 일곱 교회들에게 지적했던 모든 죄들, 즉 간음, 탐욕, 미지근함, 가짜 가르침, 이세벨적인 권위, 죽은 예배, 영적 소경의 죄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첫 번째 죄가 그 분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투하는 연인이시며 그 분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 앞에 그 어떤 것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너의 첫사랑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제가 너의 첫사랑을 져버린 것 때문이라” (계시록 2:4)

저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이 경고가 이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모든 크리스천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네가 죄로 인해 슬퍼하고 진리를 설교하는 그런 헌신적이고 구제하는 부지런한 종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단다. 도덕적 기준을 붙잡고, 나를 위해 고난을 견디며, 혹은 너의 믿음을 위해 화형을 당한다 해도 그것 또한 충분치 않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의 일환이란다.”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일들을 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나를 향한 너의 애정이 증가 되지 않는 다면, 만일 내가 너의 심령에 점점 더 큰 기쁨이 되고 있지 않다면, 너는 너의 첫사랑을 져버린 것이지. 만일 나에 대한 너의 애정이 더 이상 너에게 큰 관심거리가 안 되고 있다면, 나는 네게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다윗이 시편 73편 25절에서 “ 하늘에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 위에도 주 외에는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라고 말한 것을 상고해 보십시오,” 강한 어조의 말들이지요, 하지만 다윗은 “ 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 내가 나의 주만 을 사랑하는 것만큼 내 마음을 독차지 하는 이가 없다. 나는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주님을 갈망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한 시편 63편 1절에서,”오 하나님이여, …내 혼이 주를 갈망하오며 내 육신이 건조하고 메마른 물 없는 땅에서 주를 사모하오니.” 라고 말하고 있고 시편 42편 1-2절에서는 “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는 것같이, 오 하나님이여, 내 혼도 그처럼 주를 갈망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사슴이 쫓김을 당한 후에 목말라 하는 것처럼 간절히 주님을 갈망합니다. 사슴은 물을 찾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견뎌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셨지요, “너는 더 이상 사슴이 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나를 구하고 있지 않다. 나는 더 이상 너의 갈망의 주 대상이 아니구나. 너는 나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하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내가 너의 마음의 중심에 있지를 않는구나!

오늘 당신의 첫사랑으로 돌아 가십시오. 예수님께 그 분을 향한 당신의 애정을 지킬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은혜와 힘을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