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8일 목요일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믿음

의롭다 함과 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보존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기초입니다. 그러나 모든 믿음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믿음은 아닙니다. 성경은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롭다 여김을 받는 믿음, 또 다른 하나는 마귀도 믿는 가치 없는 믿음입니다.

사도행전 8장 13절은 점쟁이 시몬에 대해 “ 믿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몬도 믿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다” 라고 했지만 그의 믿음은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시몬은 사도 베드로에게서 성령의 능력을 얻으려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3절). 베드로는 이렇게 말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의 마음은 아직도 죄에 잡혀 있도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돈이 함께 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시몬은 믿었으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의롭게 하는 믿음, 즉 심령을 깨끗게 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불러오는 그러한 종류의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 예수께서 행한 기적을 보았을 때 [예수를] 믿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아니 하셨는데…이는 주께서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2:23-25)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어떤 믿음이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그러한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요한1:12)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동의하는 믿음이상을 의미합니다. 즉 그 믿음은 하나님을 그저 인정하는 그 이상의 믿음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서 야고보는 이같이 주장합니다, “ 네가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니 잘하는 것이라.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는 죽은, 잠시적이며 영원하지 않은 믿음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종류의 믿음에 대해, “ 어떤 이들은 “잠시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면 떨어져 나간다”(누가 8:13) 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얻는 한 믿음, “심령을 깨끗해 하는” (사도행전 15:9 참조) 믿음, 그리고 “의에 이르는 믿음”(로마서 10:10) 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께 신실하고자 하는 이에 수반하는 갈망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살아 움직이는 힘,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순종과 사랑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고집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네가 가야 할 길을 내가 네게 지시하고 가르치리니 내가 너를 내 눈으로 인도하리라. 너는 지각 없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 그들의 입은 재갈이나 굴레로 꼭 물려져야 하나니 그렇지 안으면 그들이 네게 가까이 올까 함이라” (시편 32:8-9).

이 짧은 두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도하심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에 있어서 기꺼이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의 기초 위에 엄청난 믿음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모든 영적인 은택을 누리는 신자일 수가 있지만 그분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에 순종해야 할 때에는 여전히 고집스러운 노새로 남아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편 95편 10절에서 이스라엘에 대해 “사십 년 동안 내가 이 세대를 슬퍼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기에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0년 동안의 나의 애정 어린 인도와 기적적인 구출을 받은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내가 일하는 방법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나의 인도함의 원리를 이해해보려고 전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의 인도함은 단지 계속 문들을 열어주고 위기로부터 구해 내주는 것에 불과한, 진정한 축복과는 관계없는 것들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고집스러운 크리스천이 되려고 애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그래 데이빗은 용서 받았다. 그는 기도했고 나는 그를 문제들로부터 매번 구해줬지. 사실 나는 그를 놀라운 길들로 인도했고 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고 있지. 그러나 그의 심령 안에는 나의 방법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자리 잡고 있지 않아.”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인도하심에 있어서 주님이 엄해지지 않게 하십시오. 지각이 없는 노새같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인도하시며 소리소리 지르거나 그분의 명령을 강요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소한 충고에도 충분히 전진할 수있을 만큼 그분을 잘 아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2013년 2월 26일 화요일

자격이 없다는 느낌

별안간, 우리는 자격 없다는 느낌으로 인해 괴롭게 됩니다. 우리는 “ 내가 또 되풀이 했네! 나는 전혀 안 바뀌었구나. 난 그리스도처럼 결코 안 될 거야. 아직도 난 성숙한 크리스천이 아닌 갓난아이처럼 행동하고 있어. 난 왜 안 변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서 안으로 움츠려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는 당신이 경주는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당신의 부족함과 성숙되지 못함에 대해 계속 걱정하다가 낙담한 나머지 중도하차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경주는 계속될 것이므로 우리가 때때로 넘어진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다시 일어나 계속 전진 해야 합니다.

극복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대저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한 일서 5:4).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시록 21:7)

이긴다는 것은 “모든 유혹과 장애들을 정복해서 그것들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얻어낸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장애물들일까요? 그것들은 육신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새로운 반응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의 실패, 화가 나며 쓰라림 또는 불안이 치솟는 것들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3절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 다윗은 간음 자와 살인자로써 온 세상에 폭로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 위로 넘치나니 무거운 짐처럼 내게 너무 무겁나이다… 내가 번민하며 내가 온 종일 애통하며 다니나이다” (시편 38:4-6).

만일 다윗이 그의 실수에 대해 걱정하며 안달만 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는 전심으로 회개하였고 그랬기에 이렇게 말 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나의 슬픔이 춤이 되게 하셨으며 주께서 나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를 둘러 주셨나이다” (시편 30:11).

“자격 없음을 느끼는 것”을 떨쳐버리는 가장 빠른 길은 그리스도의 용서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해 주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자비가 풍성하시나이다” (시편 86:5)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예수님을 바라보기 by Gary Wilkerson

여러분들 중 현재 시련, 영적 싸움이나 혹은 혼란을 겪고 있는 분들로 인하여 저의 마음이 무거워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보고 계시며 그분은 당신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사실 주님은 당신의 상황가운데서 당신 옆에서 같이 걸어 오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알기를 원하시며 바로 그것을 아는 것이 당신의 심령을 움켜잡고 있는 그 어떤 두려움도 쫓아 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골짜기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반석이며 강한 성이며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그분 안에만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실패하지만 그분께서는 영원토록 확실하십니다.

최근에 루이지애나에 있는 한 감옥소에서 브룩클린 테버너클 (Brooklyn Tabernacle)교회의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과 같이 사역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죄수들은 안 좋은 환경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의 삶이 구원되었다는 간증에 간증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구속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소망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를 감옥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그 얼마나 승리롭고 믿음으로 충만한 삶을 말해주는 격려가 되는 간증입니까!

그러므로 당신이 시련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이 당신의 대답이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소망은 십자가 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일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죄, 병 그리고 슬픔을 자신에게 담당 시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는 승리와 소망의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인 사랑의 행동이 당신의 상황 안에 있는 당신을 위해 행해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삶 가운데에서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히브리서 12:2)

2013년 2월 22일 금요일

사랑하기

사람이 부당할 일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고통을 견디면 이것은 감사할 일이나…,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맛대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베드로전서 2:19-23).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삶에서의 모든 상황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상처를 주고 매도했을 때, 그분은 그들을 대적하거나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분과 논쟁하려 했을 때 그분은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께서는 그냥 가버리셨습니다.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21절). 베드로는 여기서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행실의 본보기가 되십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네게 사랑—즉,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의하면 사랑은 누구에게든 예외 없이 친절을 베풀어야 함을 뜻합니다: 절대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아니하며…… 자기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누구에게라도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누가 잘못 되었을 때, 그가 원수라 할지라도,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 둘 다 이 구절들을 통해 아주 명확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바는 너희 중 서로 대적하거나 복수하거나 협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너희의 모든 염려와 두려움과 억울함을 그리스도께 맡겨라.”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주님, 그것이 바로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 번의 승리를 쟁취하고는 이만하면 됐지 하고 자신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누가 갑자기 고약한 말이나 행동을 우리에게 함으로서 예상치 못했던 일을 당하게 되면—우리의 마음은 분노의 생각들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를 화나게 했던 사람에게 독한 화살의 언어들을 쏘아댑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고 진리를 붙들고 노력함으로써, 많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보기 좋게 실패했음을 깨닫습니다. 원수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올 때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려는 모든 노력에서도 우리는 완전 실패하고 맙니다.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히브리서 12:1). 여러분은 단지 여러분 자신에 대해, 그리고 여러분의 성숙하는 과정을 인내하셔야만 합니다. 결국, 이 경주는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도 있을 것이며, 숨이 막힐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서는 계속 전진하시게 될 것입니다.

2013년 2월 21일 목요일

당신은 하나님께 화났습니까?

저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화난 감정을 가진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향해 불만스러운 감정을 가진 신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충격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그분이 어떤 특정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거나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이 무관심하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사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가 받은 심판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 심판의 말씀을 전한 후, 요나는 언덕에 앉아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십일이 지났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회개했고, 그 덕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려 했던 마음을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대부분 분노는 실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의 마음의 짐을 지우셔서, 보내시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잘못 인도 받았나 하는 마음, 혹은 배신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과 혼란의 울부짖음을 아십니다. 결국, 우리의 울부짖음은 인간적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요?” 하고 울부짖으셨던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화를 품으면, 그것은 분노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나에게 물으셨던 똑같은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요나 4:9). 달리 말하면, “네가 성낼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요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분노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잘하는 것이니이다” (요나 4:9). 이 선지자는 하나님께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든 죽든 상관 없습니다. 내 사역은 실패입니다. 나는 그분께 화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음성을 억제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억제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이 보상을 받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예레미야 31:16). 즉, 이런 뜻입니다. “그만 불평해라. 내가 너의 충실함을 보상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너희가 아느니라” (고린도전서 15:58).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여러분이 흘린 눈물과 기도는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고통과 눈물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겠지. 너는 오직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실패와 파탄만을 보는구나. 그리고는 ‘이제 다 끝났다’고 말하고 있지.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것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나는 지금 네게 부어주기 시작할 보상을 보고 있다. 내가 너를 위해 아주 좋은 것들을 준비해 놓고 있단다. 그러니 인제 그만 울거라!”

2013년 2월 20일 수요일

그리스도를 완전히 신뢰함

제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신뢰하라고 말할 때는 그분의 구원 능력을 신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지켜주시는 능력도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삶을 따를 수 있게 만드는—즉,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보존하실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반드시 신뢰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전에는 악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당신은 어떠한 선행을 하셨습니까? 아무 것도 못 하셨지요!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 찌어다” (베드로 전서 1:16) 라는 말씀을 받아 들임으로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함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여러분 믿음의 여정에 상응하는 실제적 삶에서의 노력도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마저도 우리가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과 우리 나날의 삶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면” (골로새서 1:2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면”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나를 신뢰하며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면, 내 아버지 앞에서 너를 정결하고 흠 없고 거룩한 자로 내가 너를 세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한 신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에는 등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초신자라도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단 하나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는데, 그 평가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분의 거룩하심은 같은 분량으로 우리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어떤 교회 지도자나 평신도를 보고서는 “아, 나도 저 사람처럼 거룩하게 될 수 있다면….” 하고 절대 다시는 말하면 안됩니다. 당신은 그 사람만큼의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보다 더 많은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께로부터, 당신이 인정받는 것보다 더 많이 인정받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눈으로는 당신보다 더 사랑받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2013년 2월 19일 화요일

거룩해질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

우리 자신의 힘이나 의지력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나아와 이렇게 말씀 드려야만 합니다, “ 주님, 주님께 드릴 것이 저에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해보려고 합니다. “만일 내가 이 마지막 남은 죄만 극복할 수 있다면 거룩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의지력과 약속들, 그리고 선한 동기들의 검을 들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원수를 없애려고 전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의 (self-righteousness)의 땅에 서 있는 동안은 결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세가 보았던, 바로 그 불타는 떨기나무를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떨기나무는, 거룩을 가장하면서 그분의 임재 앞에 불려 왔던 모든 육신을 향한 하나님의 불 같은 열의를 상징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그러한 너 자신의 육신만 가지고는 내 앞에 설 수 없다. 내 앞에 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거룩한 땅이 있다면 그것은 내 아들과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그분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만일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매우 소수 숫자만 구원의 후보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구제불능의 도적이나 강간범, 살인자, 마약 중독자 또는 알코올 중독자와 같은, 선한 행실이라곤 전혀 없었던 자들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들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라고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 능력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행위로 충분하다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심판 날에 그들의 육신은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위해서 했던 모든 일을 보세요. 저는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예언도 했고 가난한 자들을 먹였으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일은 당신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것이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너는 그 모든 일 중 단 하나도 내 성령의 능력으로 하지 않았다. 너는 너 자신의 힘으로 그 모든 일을 했다. 나는 단 한 사람, 오직 내 아들의 의로움 만을 인정한다. 그런데 네게서 내 아들을 볼 수가 없구나.”

“너희는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으니, 이것은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30-31).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두려워하지 마세요 by Gary Wilkerson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었느니라” (누가복음 1:30).

하나님께서 ‘올해는 내 은총의 해’라고 말씀하실 때는, 바로 ‘올해’를 뜻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번 달, 이번 주, 바로 오늘 그분의 은총을 취하라고 여러분께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콜로라도 스프링에 있는 스프링 교회 (The Springs Church )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 말씀을 전했을 때, 알코올 중독자였던 어떤 여자분이 그곳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그녀는 성령께서 그녀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네가 그 동안 절망 속에 있었지만, 내 은총이 네게 임했단다. 이제 네 인생이 180도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예배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모두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후로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는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뉴욕에서 일 년 동안 노숙자로 떠돌아다녔던 한 젊은이가 우연히 타임스 스퀘어 교회 (Times Square Church)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지만, 나갈 때는 “난 이곳이 정말 싫어.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에 끌려서 그 다음 주에도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이전처럼 “절대로 다시 오지 말아야지” 하며 떠났습니다.

매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마침내 일 년 후 이 젊은이는 예배를 마치고 일어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사랑해요. 제 삶에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가 제단 앞으로 나가서는 그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타임스 스퀘어 교회의 목사님들은 이 젊은이에게 사역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성경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고, 거기서 그가 뛰어난 학생임이 증명 되었습니다. 그는 평균점수 4.0으로 성경학교를 마쳤고 신학교에 등록해서는 삼 년이 걸리는 학위를 불과 18개월 만에 마쳤습니다. 그 신학대학에서는 그에게 교수로 남을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아닙니다. 저는 목사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며 거절했습니다.

제가 스프링 교회에서 이 말씀을 전하고 있던 바로 그날, 그 젊은이는 타임스 스퀘어 교회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노숙자들과 비천한 인생들에 임했고, 주님은 그들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실 새로운 것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분의 자비가 당신의 삶에 임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 가족, 상황 등, 그 모든 것들을 그분께 맡기세요. 그리하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2013년 2월 15일 금요일

주님의 임재 안에

“아무 육체 라도 그분의 면전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되리라” (고린도 전서 1:29). 이 구절은 신약에만 나와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세의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일은 어떤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크리스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려고 애쓰는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만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하셨듯이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오직 한 곳에서만 나에게 다가올 수 있고, 그 곳은 바로 거룩한 곳이다. 나의 임재 안에서는 어떠한 육체도 감당할 수 없기에 너의 육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신발에 초점을 두셨습니다. (출애굽기 3:5) 왜냐하면 우리의 발은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상하기 쉬운 두 부분입니다. 우리의 살을 보호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 외에 과연 신발이란 무엇일까요? 신발은 사물로부터, 돌과 뱀, 오물과 먼지, 그리고 뜨거운 포장도로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모세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매일의 일상의 것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후에 동전, 진주, 낙타 그리고 겨자씨를 인용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모세야 너는 너의 몸을 다치는 것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고 있지. 그러나 내가 너를 죄악의 소굴인 애굽으로 보낼 때는 육신을 보호했던 그 어느 것도 너를 보호해 줄 수가 없고 너는 강팍한 독재자를 감당할 수가 없단다. 너는 오직 나만이 너를 구해낼 수 있는 그러한 환경가운데로 놓여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네가 너의 육신의 힘, 즉 너의 온유함, 열심 그리고 겸손을 의지하는 모는 것을 내려 놓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분부한 것을 너는 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너의 모든 능력은 내가 너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 한 소용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사실 모세는 삼십만 명을 광야 가운데로 인도 하면서 모든 종류의 시험과 시련을 만났습니다. 식료품 가게도, 쇼핑 몰도, 그리고 우물조차도 없이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 했어야만 했습니다.

모세는 육신의 힘으로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40년 전에 그는 손에 칼을 들고 잔인한 애굽 노예 관리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 모세야 너의 열심은 성화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심이 너를 멸망시킬 것이다. 너는 너의 칼을 내려놓고 나를 신뢰하겠느냐?”

2013년 2월 14일 목요일

우리는 주님의 몸입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의 지체들이라” (고린도 전서 12:27).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바로 그 지체들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는 한 가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 사람이 서로의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당신도 아시다시피 무덤으로부터 한 새사람이 나왔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로 회개하고 이 새 사람을 믿은 자들은 모두 그 분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으니” (고린도 전서 12:13-14).

더 이상 흑인이나 백인, 황인종이나 갈색인들, 유대인, 이슬람교인 혹은 이방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핏줄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이 율법이나 규례를 지킴으로 거룩해지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일들, 의로운 행동들, 인간적 노력 혹은 육신의 분투로 인해 인간이 거룩해 질 수가 없기 때문 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통하여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함이며 그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죽이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2:16). “원수 된 것, 곧 법령 안에 속한 계명들의 율법까지도 그의 육신 안에서 폐기하셨으니 이는 그 둘을 자기 한에서 한 새 사람으로 창조하사 화평케 하시고” (15절).

새 사람으로 부활한 사람만이 아버지께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사람이 그분의 아버지께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올려드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응답 하셨습니다. “ 나는 너희 모두를 거룩하다고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너희는 나의 거룩한 아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시어” (에베소 1:6).

더욱이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인쳐졌습니다, “ 이는 때가 찬 경륜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함께 모으려는 것이니라…… 너희가 그분을 믿고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 (에베소서 1:10, 13).

그러므로 거룩함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수 있거나, 획득하거나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할 때에 만이 우리를 거룩하다고 받아주십니다. 거룩함으로 이르는 길은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2013년 2월 13일 수요일

거룩한 가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베드로 전서 1장 16절을 읽으면서 당신은 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 제가 예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흠도 없고 완전하셨어요. 도대체 그 어떤 사람이 그 기준을 맞추며 살수 있단 말입니까?”

율법의 가장 큰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의 기준에 부합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의지력, 힘, 혹은 능력이 크다 해도 우리를 절대로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 길만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되도록 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며 그의 거룩하심이 우리의 거룩하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거룩하니라” (로마서 11:16). 바울은 예수님이 거룩한 뿌리이시기에 가지인 우리가 또한 거룩하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들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거룩함의 속성에 의해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만을 거룩하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는 온 역사를 통틀어서 오직 두 사람의 대표자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문자 그대로 아담과 예수님이신 둘째 아담입니다. 모든 인류는 첫 번 째 아담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온 인류가 죄인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때 새로운 한 사람으로 오셨고 그분의 십자가상의 화해를 통해서 모든 인류는 그분 안에 속해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 한 사람 예수만을 인정하시며 그 예수께서는 거룩하십니다.

아담처럼, 우리를 구속해주신 그리스도로부터 떠나서는 우리는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살며, 혹은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하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며 얼마나 자주 성경을 읽던지, 또 얼마나 많은 욕심을 이겨 냈어도 우리는 결코 온전히 거룩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완전한 거룩함에는 그리스도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떤 사람이 언젠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서 그 분으로부터 받아 들여져야 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어떤 칭찬이나 공로 없이 아버지 앞에 섭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서는 것입니다.

2013년 2월 12일 화요일

제 평생에

구약은 신약의 진리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신약에 있는 진리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마다 저는 구약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그것에 대해 예시하는 것을 찾곤 합니다. 사실 저는 구약에 나와있는 각각의 사건이나 이야기가 신약의 신자들을 위한 분별 있는 진리를 나타내 준다고 믿습니다.

하나의 실례로는 떨기나무 불꽃 앞에 있는 모세에 관한 구절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특별히 거룩함의 주제에 대한 깊은 신약의 진리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의 양들을 치면서 호렙 산에 홀로 있는 동안에 한 이상한 광경이 갑자기 그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가시덤불이 불붙은 것처럼 환하게 타고 있었는데 가시덤불이 소멸되지는 않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세히 보려고 가보기로 마음 먹고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께서 가시덤불 가운데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이제 내가 옆으로 비켜서서 그 가시덤불이 왜 타지 않는지 이 큰 광경을 보리라 하는데 주께서 그가 보려고 옆으로 비켜서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께서 가시덤불 가운데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출애굽기 3:3-4).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셨기에 가시덤불은 소멸되지 않은 채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임재 하시는 모든 곳은 거룩합니다.

신약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 “오히려 너희를 부르신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 이는 기록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기 때문이니라” (베드로 전서 1:15-16). 다른 말로 하자면, “ 이는 기록되었고 완전히 정해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정함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4: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저 구원하려고, 혹은 천국에 가게 하려고, 혹은 그분의 용서를 받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우리의 이 한 진정한 부르심에 따르는 혜택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순수하고 흠 없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거듭났다면 당신의 심령의 부르짖음은 다음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 하나님, 제 평생에 예수님처럼 당신 앞에 거룩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2013년 2월 11일 월요일

이제 후로는 by Gary Wilkerson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누가 1:30)하는 천사의 말이 있은 후에 마리아가 “수태가 되었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십니다.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일단 자식이 태어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당신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 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할 때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녀는 어떤 문제가 따라올지라도 상황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천사는 그녀에게 그녀의 아들이 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해 줄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이 마리아의 영혼을 감화시켰습니다. 마리아는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함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누가 1:46-50).

마리아의 노래에서 중요한 두 구절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첫 번 째 “ 그는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형편, 그녀의 마음, 그녀의 두려움, 소망 그리고 꿈들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저를 이와 같이 “돌아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래도 나의 삶을 되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해. 그 어느 것도 절대 바뀌지 않을 거야” 라는 생각을 포함한 우리의 필요, 바램 그리고 두려움을 주님께서는 직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마리아와 더불어 이렇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주님께 은혜를 입은 자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언제라도 나의 인생에 변화를 주실 수 있으며 내가 결코 상상도 못하는 것들을 잉태하게 하실 수 있다”

마리아의 노래의 두 번 째 구절에서,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 것이다. 나는 나의 모든 보호와 안전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일을 다 내려 놓고 나의 모든 필요와 바램도 주님께 온전히 맡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밝히는 결정적인 순간인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이라는 말은 우리의 방향에 180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걸어가는 이들은 누구든지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의 중독이 나를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한다. 나의 힘든 결혼 생활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부드러워 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고 있는 나의 자녀는 하나님의 간절하신 사랑의 호소하심을 느낄 것이다.”

2013년 2월 8일 금요일

성령의 능력

다락방으로 향했던 자들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었습니다. 그들은 동정심으로 가득하고 헌신적이며 영혼들을 사랑하는 자 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분의 증인이 되기 위한 자격이 된 것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영혼들을 향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학교에서 (예수님한테 직접) 배웠습니다. 그들은 병든 자를 고쳤으며 귀신을 쫓아냈고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변형산에서 영원한 영광의 옷으로 입혀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기도 하시며 핏방울 땀을 흘리실 때에도 그분 가까이 있었고,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텅 빈 무덤을 보았고 부활하신 그분을 보았으며, 영광의 몸을 입으신 그분과 함께 먹으며 대화도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분이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은 그분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왜 예루살렘에 때지어 있는 군중에게 얼른 가서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지 못했을까요? 그 사건을 맨 처음으로 증거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가 이렇게 설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나셨어요! 그리고 승천하셨어요! 회개하셔야 합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들에게 강력한 발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한 그분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사도행전 5:32).

베드로를 통해서 들려지는 성령의 말씀에 제사장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 했더라” (사도행전 5:33). 성령께서는 오순절에도 베드로를 통해 말씀 하셨는데, 그것을 들은 모든 자들은 “마음에 찔렸더라” 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37)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더라” (사도행전 7:51, 54).

당신이 신실하게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성령으로 충만이 채워졌을 때, 동료나 가족 또는 어느 누구 앞에서나 담대하게 설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증거는 이 두 반응 중 하나를 야기할 것입니다. 하나는 “어떻게 해야만 제가 구원받을 수 있나요?” 라고 그들이 외치던지, 아니면 당신을 죽이고 싶어할 것입니다! 당신이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말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 (당신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자격이 되는지 않되는지)는 (당신이 갖고 있는)성령의 능력에 의해 구별됩니다.

2013년 2월 7일 목요일

십자가로 가지고 가세요

구약 시대의 언약은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가장 경미한 불순종 조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표현 하자면, 죄를 지으면 그냥 죽었습니다.

이 계명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온전한 순종을 묘사하면서,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온전한 순종을 가능케 하기 위한 공급을 육신에 제공해주지 않았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목의 멍에……” (사도행전 15:10).

한편 바울은 또한 율법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4). 율법은 우리의 속성을 노출시키고 우리의 약한 의지력을 드러내 주며 아기처럼 무능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요구 하시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능력은 공급해주시지 않으실까?” 성경은 그것을 명확히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곳까지 데려가셔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기까지는 400년간의 고난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노예 삼고 있는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세주—은혜의 손길을 뻗쳐 그들의 결박으로부터 구출해주실 하나님—이 계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에게 구세주가 필요함을 인식하기 까지는 수세기—선지자 스가랴 시대까지— 가 걸렸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사면에서 (그들을 위한) 불 성곽이 되며, 그 (그들) 가운데서 영광이 되어주실” (스가랴 2:5) 구원자가 필요함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둘러싼 불 성곽이 되어 주시며 그들 안에서 영광이 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직도 이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속박 아래서 육신으로(자신의 힘으로) 분투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약속을 해가면서 그들의 죄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저는 이 결박들을 부숴버릴 힘과 의지를 찾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저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아니요! 절대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더 많은 죄책감만 남겨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능하다는 것과, 우리에게 구속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십자가로 데리고 가는 통로입니다.

2013년 2월 6일 수요일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야고보서 1:14).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욕정에 미혹되어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요!

그리고 야고보는 덧붙이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야고보서 1:15). 그분은 여기서 죄가 탄생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은 욕정의 근원이며 우리가 짖는 모든 죄는 그 근원으로부터 탄생합니다. 세상에 똑같이 생긴 두 아이가 없듯이 똑같은 죄도 없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 고유의 죄를 만들어 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숨겨진 죄에 대해 점점 무감각하게 되며, 롯이 그랬듯이 자신들의 죄에 대해 눈이 멀어지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리스도 지체 안에서 많이 발생하는 그러한 예들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아부하며 좋은 직책을 탐내는 죄를 간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뿌리가 깊고 성경 지식이 풍부하며, 끊임없는 기도 생활을 한다는 등의 교만의 죄를 간과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겸손하고 친절하며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죄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실전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제가 지난 50년 동안의 사역을 되돌아 보며, 교만의 죄에 속아왔었던 때를 생각하면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특별 사역자들이 모이는 집회에 특별 강사로 초청되었던 때를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엄청난 계시로 나를 축복하셨어. 난 이 집회에 참석한 그 어느 유명 목사들에게도 감명받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기름부음 받은 강사로 구별하셨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는 성령의 탐조등 밑에 비춰지게 되었고 제 교만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만일 제가 이러한 교만을 없애기 위해 사도 바울의 권고를 붙들지 않았다면, 저는 절망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게 자비를 베푸셨고, 그때나 지금이나 저를 향한 그분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에 감사 드립니다.

오늘, 제 마음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 주님, 저는 제 자신에 대해 항상 생각해왔던 그런 겸손하고 잘난 체하지 않는 성직자가 아닌걸 압니다. 저는 항상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하며 의욕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는 모든 기름부음이 주님의 인자하신 사랑 덕분이라는걸 지금 깨달았습니다!”

2013년 2월 5일 화요일

그분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존하세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5)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처음 구원했을 때 네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보아라. 너는 매 주일마다 교회 가는 것을 애타게 기다렸고 시간 날 때마다 성경을 공부하며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배우려 했다. 내가 너의 전부였기 때문에 너는 기도하는 것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너는 생명 자체보다도 더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지금은 네가 이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너는 내게 아주 조금의 시간밖에 주지 않고 있으며 아주 조금밖에 나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 너는 내게 냉담해졌다. 다른 것들에게 네 마음을 빼앗겼다!”

자, 위 구절에 있는 심각한 경고를 보십시오: “회개 하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경고가 다른 의미이기를 바라며 부드럽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드러운 의미로 바뀔 수는 없었습니다—왜냐하면 그 의미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불(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내가 네 마음의 기쁨이 아니라면, 네게 있는 나의 모든 빛을 가져가 버릴 것이다! 네가 나를 위해 아무리 좋은 일들을 할지라도 너는 더 이상 나의 증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네가 나를 향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네가 하는 어떤 일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귀중합니까?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다른 것들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와 당신의 생각과 사랑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이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모든 것을 멈추고 이렇게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가만 있자. 이것이 어떻게 내 삶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향한 나의 귀중한 사랑을 훔쳐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구나. 이제 더 이상 이대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주님, 절 용서해 주세요! 제 등불을 새롭게 지펴주소서.”

오늘 주님을 향한 당신의 첫사랑을 되찾으십시오.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다시금 보존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을 구하십시오.

2013년 2월 4일 월요일

하나님의 은혜가 고난의 삶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by Gary Wilkerson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누가복음 1:28-29).

천사가 와서 마리아에게 말했을 때 그녀가 놀랐던 이유는, 자기 조상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던 선조들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축복도 받았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예들을 살펴봅시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 가인은 그러한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벨을 시기하게 되었고, 끝내 아벨은 자기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악한 세대에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대 홍수의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렸던 세상의 모든 안락함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놀라운 방주를 지었던 그의 이야기는 결코 가벼운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적 규모의 비극적인 심판의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노아와 그의 가족이 생존할 수는 있었으나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롯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심판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서운 불 심판을 직면하고 있었던 소돔에서 구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롯도 자기 아내를 포함한, 그에게 소중한 것을 거의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요셉 또한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고 예언적 꿈들로 인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은혜 받은 것을 각별하게 했던 바로 그 선물이 주위의 사람들을 또한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제 요점은 은혜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그것을 구구절절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위험, 고난, 압박, 핍박, 고통 그리고 시련들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미국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동반하는 것들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은혜는 우리를 부유하게 하고 좋은 집이나 자동차를 갖게 되는 것이며, 절대로 핍박 받지 않고 고난 없이 항상 잘 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마리아가 잘 깨닫고 있었다는 것은 천사에게 이렇게 응답함으로써 증명됩니다: “나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38). 그것이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할지라도 저는 그것을 편하고 안락한 삶과 바꾸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주님의 은혜를 놓치는 것이라면 저는 고난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2013년 2월 1일 금요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안식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은 육신의 쉼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거룩한 안식은 영혼의 쉼으로부터 시작합니다. “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 안식이 남아 있도다” (히브리서 4:9). 이 안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 믿음으로 너는 아버지의 안식(Sabbath)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너는 더 이상 너의 짐들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고 나가고 하기를 거부하고 대신 그것들을 내게 주거라.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고 오직 나만이 너의 짐을 질 수 있는 자란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어째서 이 예수님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저는 만일 예레미야 선지자 가 오늘 날 살고 있었다면 그는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죄의 짐지는 것을 계속하면서 유혹과 싸우는 것을 보고 아마도 어안이 벙벙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외쳤을 겁니다, “ 아니 당신은 왜 이모든 짐들을 이러한 영광의 안식일에 지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너의 집으로 짐을 가지고 들어가지 말라” 고 얘기했듯이 예수님이 당신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왜 당신은 주위의 그런 짐들을 지기를 계속합니까? 안식일에 짐을 지지 마시오, 왜냐하면 그 날은 주님께 속한 거룩한 날이니까요!”

여기에서 요지는 안식이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의지하고 우리가 우리자신의 일, 인간의 힘으로 고투하는 것을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옮기지도 말며 너희는 어떤 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예레미야 17:22).

여기에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님께 드리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삶을 위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와 유혹을 통해 우리의 것을 이루려는 모든 우리자신의 노력을 내려 놓음으로 안식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주일날뿐 아니라 매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