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1일 금요일

성숙한 성도의 표적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는” (에베소서 4:14) 일을 거부하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표적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은 그 어느 선생의 영향력에 의해서도 조종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푸른 초장에서 잔치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음악이나 친구들, 또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기적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매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리를 돋보이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 2:10) 그리스도의 교리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과 세상 정욕들을 거부하고, 우리로 신중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이 현 세상을 살아가도록” (디도서 2:11-12)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모든 감춰진 죄와 악한 욕망을 드러낼 것입니다.

당신의 선생은 디도서 2장에서 가르치는 대로, 죄를 버리고 모든 우상을 내려놓으라고 설교하고 권면하며, 권위를 갖고 책망합니까? 당신은 온 힘을 다해 죄를 미워하는 것을 배우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깊은 각성 없이 교회를 나섭니까? 그리스도 교리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린도후서 7:1)

많은 사람이 제게 그들의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저는 죄에 대해 설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또는, “여러분은 이 강단으로부터 정죄하는 설교는 절대 듣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 회중들로부터 두려움과 절망을 걷어내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답니다.” 오순절파 목사님들도 두 부류의 극단이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사랑이 결여된, 단지 행위만을 강조하는 딱딱하고 율법적인 복음을 외치는 반면, 또 다른 설교자들은 같은 메시지에서 그 모든 진리를 빼버린 채, 겁쟁이처럼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경건함과 거룩함의 교리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다르게 가르치며, 건전한 말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따른 교리에 일치하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다만 질문과 언쟁만 좋아하는 자니 거기서 시기와 다툼과 악담과 사악한 의심이 생겨나며.” (디모데전서 6:3-4)

그리스도의 교리에 합당한 설교는 당신을 축복하고 굳세게 하며 격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당신의 죄를 깊이 깨닫게 하므로 숨겨진 죄를 붙들고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없게 할 것입니다.

2013년 5월 30일 목요일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역

바울은 특별한 은사나 재능을 요구하는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든 실행해야 하는 사역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역은 모든 성도에게 있어서 첫 번째 부르심이며, 이러한 부르심으로부터 시발 되지 않았다면, 그 어떤 사역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역에 관해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고린도후서 3:18)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헌신적이며 집중된 예배,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또 다음 구절을 얼른 추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역을 맡았은즉...” (고린도후서 4:1).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모두가 헌신해야만 하는 사역이라는 것을 바울은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위 구절에 사용된 단어 '바라보다'를 헬라어로 보면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 표현을 해석하자면, 그것은 단지 바라본다는 행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정시켜 앙망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이 현장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무엇을 하기 전에, 단 한 가지라도 성취하려는 노력 이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해야만 합니다.”라고 결단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반영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 뜻이 아닙니다. 그가 뜻하고 있는 것은, 더 명확히 보기 위해 투명한 유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강렬하게 초점이 맞춰진 응시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단호히 결심하며, 바로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 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 신념으로 지성소에 들어가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고는, 열렬히 그분만을 앙망하는 집중된 헌신으로 친교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변화되도록 말입니다.

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는…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3:18)

이 구절에서 ‘변화되어’라는 단어의 헬라어 의미는, '변형된' 또는 '변모된'이라는 의미로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듯) 완전히 바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계속 그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고정시켜 앙망하는 모든 성도는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변형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도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성품으로 닮아갑니다.

2013년 5월 29일 수요일

실패보다 더 안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차 안에 앉아 저 자신이 형편없는 실패자라고 자책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일곱 명의 십 대 살인자들의 증인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세우셨다고 생각했던 법정으로부터 인정 사정없이 쫓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일 그 어둡고 힘들었던 때의 일들을 포기했다면 얼마나 많은 축복을 놓쳤을까를 생각할 때 몸서리가 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실패를 직면하게 하시고, 그분께서 준비해놓으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 것을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쁩니다.

저는 두 명의 훌륭했던 하나님의 종들을 압니다.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역했던 자들이었으나, 다윗이 밧세바와 범했던 죄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 중 한 사역자는 다시는 사역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는 술을 마시며, 한때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설교하며 가르쳤던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역자는 회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수만 명의 영혼을 섬기는 국제 선교 단체를 운영합니다. 그는 과거의 실패를 극복하고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중독자들, 그리고 벗어나기 어려운 고질적 습관을 지닌 자들과 일하면서 제가 한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언가 하면, 그들의 이전 습관으로 되돌아가곤 했던 자들 대부분이, 그들의 실패를 직면하고 주님께로 돌아설 때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더 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치러야만 했던 고투를 통해서 사탄의 권세와 육신의 의지력의 전적 거부에 관한 뭔가 특별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사악함을 외치라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 너무도 두려운 나머지 주님 전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바닷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했을 때, 그는 주님 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한가지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제 사역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진리는, 실패보다 훨씬 더 안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실패 후에 따르는 두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요나, 그리고 베드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쳤던 이유는, 그분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해해 주시기에는 너무도 화나계실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은 그러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노력해도 아무 소용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다윗이 자신의 실패에 체념해 버렸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성전으로 달려가 재단의 뿔을 잡고 기도했으며, 죄 사함을 받고 평강을 얻고서는 최상의 여생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당신에게도 실제가 될 수 있답니다!

2013년 5월 28일 화요일

실패했던 하나님의 영웅들

당신은 모세를 실패한 자로 간주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워싱턴 대통령과 링컨 대통령을 합친 영향력 이상으로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율법자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의 경력은 살인으로 시작되었고, 그 죄의 심판으로부터 숨어 다니는 사십 년의 삶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모세는 겁이 많고 믿음이 적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 (출애굽기 4:10) 모세는 평생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갈망했으나 그의 실수로 인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 3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신실함을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견주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실수는 했을지언정,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웅들 서열에서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로 야곱을 주님의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대단한 기도 용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연이은 실수로 가득했습니다. 청년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훔치기 위해 눈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는 라헬을 향해서는 강하고 은밀한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 자기 아내이자 그녀의 언니인 레아는 멸시했습니다. 그는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실행치 않았습니다.

야곱은 기만, 절도, 불성실, 일부다처제 등 거미줄같이 얽힌 실수투성이의 삶을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막강한 전사이자 찬송 시를 지어 불렀던 다윗왕은 주님의 율법을 기뻐했으며 죄인들 가운데 서지 않을 의인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자의 연약함은 얼마나 충격적인지요. 그는 밧세바를 그녀의 남편 우리아로부터 빼앗아 취하고, 아무 영문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자를 자기 군대 전방에서 죽게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범한 그 이중 죄가 주의 원수들에게 신성 모독의 큰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죽은 사생아기 관 앞에 서 있는 위대한 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옆에는 빼앗아온 부인이 있고요. 그리고 그 악한 죄들로 인해 하나님을 모독하는 원수들이 그 현장에 가득한 장면을요. 그래도 하나님은 다윗을 그분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3:14)

만일 당신이 자신의 실수들로 인해 낙심해 있다면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자신의 패배를 직시하고 대면하면서, 평강과 승리의 삶으로 전진해 나가는 자들보다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계속 전진하십시오! 때로는 실패 후 하나님을 위해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내는 인생들을 종종 볼 수 있답니다.

실패했던 하나님의 영웅들

당신은 모세를 실패한 자로 간주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워싱턴 대통령과 링컨 대통령을 합친 영향력 이상으로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율법자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의 경력은 살인으로 시작되었고, 그 죄의 심판으로부터 숨어 다니는 사십 년의 삶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모세는 겁이 많고 믿음이 적은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는 말에 능하지 못하나이다... 나는 말이 느리고 혀가 둔하나이다.” (출애굽기 4:10) 모세는 평생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갈망했으나 그의 실수로 인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 3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신실함을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견주어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실수는 했을지언정,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웅들 서열에서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로 야곱을 주님의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대단한 기도 용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연이은 실수로 가득했습니다. 청년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훔치기 위해 눈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는 라헬을 향해서는 강하고 은밀한 사랑을 품고 있으면서, 자기 아내이자 그녀의 언니인 레아는 멸시했습니다. 그는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실행치 않았습니다.

야곱은 기만, 절도, 불성실, 일부다처제 등 거미줄같이 얽힌 실수투성이의 삶을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막강한 전사이자 찬송 시를 지어 불렀던 다윗왕은 주님의 율법을 기뻐했으며 죄인들 가운데 서지 않을 의인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자의 연약함은 얼마나 충격적인지요. 그는 밧세바를 그녀의 남편 우리아로부터 빼앗아 취하고, 아무 영문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자를 자기 군대 전방에서 죽게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범한 그 이중 죄가 주의 원수들에게 신성 모독의 큰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죽은 사생아기 관 앞에 서 있는 위대한 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옆에는 빼앗아온 부인이 있고요. 그리고 그 악한 죄들로 인해 하나님을 모독하는 원수들이 그 현장에 가득한 장면을요. 그래도 하나님은 다윗을 그분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사무엘상 13:14)

만일 당신이 자신의 실수들로 인해 낙심해 있다면 여기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자신의 패배를 직시하고 대면하면서, 평강과 승리의 삶으로 전진해 나가는 자들보다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계속 전진하십시오! 때로는 실패 후 하나님을 위해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내는 인생들을 종종 볼 수 있답니다.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진정한 예수 운동 by Gary Wilkerson

평생 고투하던 문제들이 하나님에 의해 해결되는 곳, 놀라운 기적과 치유가 일어나는 장소에, 고통 중에 있는 남자, 여자 또는 아이들을 막론하고, 어느 누가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예수 운동”입니다. 그것은 어떤 계획이나, 기발한 재주 또는 조직적인 행사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일어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설교를 통해서든, 아니면 간단한 간증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그 영광을 맛보기 위해 어디든지 사람들이 달려갈 것입니다.

그들은 “함께 달려갔습니다.” (사도행전 3:11) 여기서 “함께”라는 단어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먼저 가려고 서로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임재의 장엄한 권능에 압도당한 채 겸허하게 하나가 되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러한 효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외로 우리를 연합시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이십니다. 즉 서로의 이견을 내려놓고, 서로의 불찰을 용서하면서, 우리의 용서가 필요하거나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 할 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함부로 악하게 발설하는 혀를 제어하지 않고, 원한에 부글거리는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영을 고수한다면,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영광스러우며 장엄한 하나님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적의와 분열이 가득한 교회로 왜 달려오겠습니까? 하나님 영광의 행사가 우리 마음을 하나로 엮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분열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엮어질 수 있겠습니까?

왜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특정한 교회들과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나타났는데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성전 앞 장면을 통해 답변해줍니다. 그는 경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3:12-1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위엄, 영광 그리고 능력을, 유일한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셨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영리하고 능력 있는 자들에 의해 알려지거나, 아니면 훌륭한 계획이나 기발한 전략으로 나타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광은 단 하나의 근원, 즉 예수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만일 우리의 삶과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가 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책략을 통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채워주실 우리 자신의 비움으로 말미암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과 함께 이렇게 말해야만 합니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30)

2013년 5월 24일 금요일

부르짖는 이 곤고한 사람

시편 51 편의 맨 첫 절에 보면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깊은 자비와 용서에 호소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자비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다윗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편 34:6). “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편 34:17).

사랑하는 성도여, 이것이 죄를 이기는 당신의 승리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심각하게 죄를 졌든 혹은 타락했든지 간에, 당신을 용서하시려고, 고치시기를 애타게 갈망하는, 그리고 당신이 언제든 필요로 하는 것보다도 당신을 향한 더 많은 인자하심을 품으신 주님을 당신은 섬기고 있다는 전적인 확신입니다.
마귀는 당신한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만일 네가 그렇게 쉽게 처벌을 면하게 된다면 너는 금새 죄로 빠지게 될걸.” .” 마귀는 당신을 참담하게 만들며, 손을 들어 하나님께 찬양할 자격도 없다고, 그분의 말씀을 배울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당신의 무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듯이 당신의 마음을 다하여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분께 이렇게 말씀 드리십시오. “주님, 당신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당신께서 저를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심을 제가 압니다. 제가 고백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당신은 당신의 죄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주셨고 그분이 이미 당신의 죄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자비로우신, 사랑의 중재자가 당신을 구하고 건져내기를 애타게 갈망하고 계십니다. “ 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 일서 2:1)

나의 어린 손녀가 낮은 콘크리이트 벽 꼭대기 위를 걷기를 원했었습니다. 제가 뒤에서 그 아이를 잡자, 손녀딸은 나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습니다. 제가 손을 놓자 결국 손녀딸은 넘어졌습니다 (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가 넘어졌을 때, 저는 “ 그것 봐라. 너는 더 이상 내 손녀가 아니야!” 라고 말하며 그 아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너는 너 자신이 이 아이에게 그처럼 사랑하는 것을 허용했지, 그러나 너는 내가 너를 같은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는 너의 자녀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부풀어 있으나 내가 너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주의 두려우심

저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습니다. “당신이 그저 지옥이 두렵기 때문에 구원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저 단순한 믿음으로 나아 오십시오” 하지만 제가 틀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기 때문에 사람에게 권유하노라” (고린도 후서 5:11). 회개로 인도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옥이 마귀와 그의 졸개들을 위해 예비되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값없이 얻은 은혜로 인해 구원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신도들의 보장이라는 것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저는 육신의 공허한 경주와 세속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 났습니다. 저는 이겨보려는 경쟁을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육적 동기의, 자기 중심적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경주를 달리지 않습니다.

저는 물질, 집, 차, 땅등의 소유물에 대한 정신적 애착을 단순히 포기하는 그 이상의 것을 하기 원합니다. 저는 제 욕구를 억제할 수 있는, 모든 쓸모 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내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처분하며, 사며, 쌓으며, 불필요한 것들을 모으는 것을 멈출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의 눈이 그리스도와 영원에 너무도 집중되어서, 이세상의 것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 힘을 잃어버리며 물질주의가 다시는 나의 주인이 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이 메시지가 당신에게 잘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면, 만일 조금이라도 당신을 화나게 하거나 속상하게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최근에 제가 해왔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주님과 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성령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탐조등을 당신 의 영혼에 비춰달라고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진정으로 솔직해야 합니다. 당신은 제가 그랬듯이 당신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비했는지, 얼마나 어리석은 탐욕과 바램이 당신을 무능력하게 만들었는지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당신 안의 냉담함과 공허함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이것을 정직한 심령으로 행한다면,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주시며, 색 다른 경주를 달리도록 당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 여러분, 곧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신부- 흠 없고 티없는 신부를 데리러 영광의 구름가운데 곧 오십니다. 탐욕과 자만 그리고 세속의 야망이 제거된 신부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구멍 난 자루에 돈을 집어넣으면서 보내야 할까요? 아니지요! 저는 막 통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관습에 묶여 있는 것을 더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좋은 것들- 가족, 좋은 집, 현대식 자동차로 인해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매일 저는 구주의 팔에 안기기 위해 그 모든 것들로부터 나의 마음이 떠나게 준비를 한답니다!

2013년 5월 22일 수요일

공허한 경주공허한 경주

“race”라는 단어는 경주를 의미하며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장거리 경주를 하는 자들과 비교하십니다. 오늘날, 그 경주는 타락되었고 그 상은 육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그저 몇 분만이라도 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는 육적인 경주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 문 안에서 잠깐 동안의 경험을 할 수만 있어도, 즉 평강, 아름다움, 하늘의 장관을 맛보며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천사들의 장엄한 찬양을 들으며, 족장들, 순교자들, 사도들, 대 환란에서 나온 자들과 만나고, 헤어졌던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빛의 비추임을 느끼며, 그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얼굴을 언뜻 보며 그분의 임재로부터 비춰 나오는 영광과 따스함 그리고 안정감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다시 돌아와서는 그 죽을 수밖에 없는 경주를 다시 하려고 할까요? 결코 아닐 겁니다! 당신과 저는 세상과 그것의 모든 쾌락과 육신의 것들을 거부하며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달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옥에서 몇 분만 있어도 우리는 절대로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불타는 용광로와 영원한 흑암 가운데로 끌려가는 것이 어떨지 상상해 보십시오. 갑자기 사악하고 저주, 미움, 탐욕 그리고 타락의 마귀의 세상으로 던져지고; 영원한 형벌로 인한 신음소리들과 그들의 겁에 질림, 그들의 이를 가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떨지 상상해 보십시오. 사악한 자들, 주 예수를 못박은 자들과 지내며, 끝없는 낙망의 소리들,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 자들의 소용없는 애원들, 공의의 하나님께 그들의 주먹을 휘두르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요. 잃어버려 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하나님 그리고 진리와 사랑, 평강과 모든 위로로부터 끊어짐을 느끼는 것이 어떨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옥을 잠시 다녀오고 나서 당신이 어떻게 또다시 같은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집, 그분의 사랑을 등한시 하는 삶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금과 은을 사재기하며 그리고 더욱더 기도하는 이기적인 축적을 추구하는 것을 계속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절대 아니지요. 당신과 저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시간들을 살 것입니다.

당신은 달리면서 허공만 치는 것을 그만두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얼굴과 마음을 주님을 찾는데 고정시키십시오.

2013년 5월 21일 화요일

等候祂

先知撒母耳曾吩咐扫罗说: 「你当在我以先下到吉甲…等我到了那里, 指示你当行的事。」(撒上10:8) 扫罗惟一的责任就是要等候!神要听见扫罗说: 「神言出必行; 撒母耳所说的话从未落空。神说我该等候指示, 我会等的。」

但是, 骄傲的心却会理论说: 「神一定不是认真的。也许我听错了。」我们不倚靠神的话语, 反倒会自己极力瞭解事情。我们会在夜深人静时躺在床上, 说: 「主啊, 在我看来, 我可以这样做。」没有按照神清晰的指示, 来做一些非常合逻辑, 且合理的事情,就是邪恶。你若要向神证实什麽, 就证实你会忍耐的等候祂行事吧。

「撒母耳说: 「你作的是什麽事呢?」扫罗说: 「因为我见百姓离开我散去, 你也不照所定的日期来到, 而且非利士人聚集在密抹; 所以我心里说, 恐怕我没有祷告耶和华, 非利士人下到吉甲攻击我, 我就勉强献上燔祭。」撒母耳对扫罗说: 「你作了糊塗事了…现在你的王位必不长久; 耶和华已经寻著一个合祂心意的人, 立他作百姓的君, 因为你没有遵守耶和华吩咐你的。」」(撒上13:11-14)

扫罗等了七天, 但他并没有存著圣洁的心去等候。他不耐烦, 害怕, 又恼怒。我们必须存著信心来等候, 相信神必看顾怜爱我们,且必準时临到。等候这件事如此要紧, 以致我必须以经文来说明。

「到那日人必说, 看哪, 这是我们的神; 我们素来等候祂, 衪必拯救我们, 这是耶和华; 我们素来等候祂, 我必因祂的救恩欢喜快乐。」(赛25:9)

「从古以来人未曾听见, 未曾耳闻, 未曾眼见, 在你以外有什麽神为等候祂的人行事。」(赛64:4)

2013년 5월 20일 월요일

求你彰显你的荣耀 by Gary Wilkerson

彼得和约翰上圣殿,遇见了一名无法走动的乞丐。他向他们讨钱,彼得便对他说:「金银我都没有,只把我所有的给你,我奉拿撒勒人耶稣基督的名,叫你起来行走!」(徒3:6)

那乞丐立刻得医治了。这神蹟实在令人瞩目。「那人正在称为所罗门的廊下,拉著彼得约翰;众百姓一齐跑到他们那里,很觉希奇。」(3:11) 这又是神彰显荣耀,令人惊异的一个情景。

那得蒙医治的人「拉著」彼得约翰(3:11)。有人因著自己的生命,而毫无羞耻的拉著他们。这人彷彿说:「神的同在是真实的!我多年来坐在这里求乞,但却从未有过这等经历。衪前所未有的感动了我的灵!」

神喜欢被人得著。祂喜爱追求祂的心灵会呼求说:「主啊,你的荣耀太伟大了,我无法让它擦身而过。我要持定你所赐予的指望,即为要得医治,被改变的指望,好让你会临到我的生命和我的世界。」

「众百姓」(3:11)都为要看过究竟而来了。神带著权能而彰显衪的荣耀,人们的回应就绝不会微不足道。衪伟大的权能必吸引周遭每个人的注意力。

假若这乞丐在我所牧养的教会里神奇的得医治了。人们就会鱼贯而来,令本堂座无虚席。我并不是指那些喜欢观看奇特现象的人。我们大家都渴望被神触摸。 现在,信徒和非信徒都同样痛苦,像羊没有牧人一般流浪,渴慕那真实的。所以,当神彰显荣耀,带来新生命时,就会吸引万人的注意力。

「众百姓…很觉希奇。」(3:11) 人们看见那乞丐得医治了,便惊歎说:「我们所知道的都不如这事。神诚然在这里!」

请问,你希望自己的人生会因神而更有进展吗?你希望衪的荣耀会临到你的家庭、婚姻、儿女,而改变事情,以致人人都惊歎不已吗?这也是神的心意!衪要 你因衪的荣耀而惊歎,且因此而被改变。而且,衪希望以自己荣耀的权能来更新你的景况,使之有如枯木逢春:这样,你周遭的人也就会惊歎起来。

2013년 5월 17일 금요일

무한한 연민

어느 사랑스러워 보이는 열아홉 살 된 간호사가 전도집회 후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채 울먹이면서 애처로운 고백을 했습니다. “윌커슨 목사님, 저는 레즈비언입니다. 저 자신이 너무도 더럽고 불결하게 느껴져요.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제게 다시는 나오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어요. 그 교회 목사님은 제가 교회 안에서 다른 신도들을 유혹할지도 모를까 봐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제게는 자살만이 유일한 탈출구인 것 같아요. 저는 너무도 큰 두려움과 자책감 속에 살고 있어요. 제가 자살을 하면 평강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제 앞에 서 있는 자신이 너무도 불결하게 느껴지는 듯, 계속 뒤로 물러났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아직도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예, 그럼요.” 하고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 동안 제 마음은 그분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이 끔찍한 습관에 묶여있어요.”

그러한 갈등 속에 있는 그녀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해주었을 때, 환해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은 너무도 은혜로웠습니다. 저는 또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당신 자신을 당신의 죄에 넘겨주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있는 바로 그 곳에 선을 그으십니다. 그분을 향한 모든 시간은 의로 여겨집니다. 그분으로부터 멀어져서 그 선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가면 그분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당신의 영적 상태를 유지하세요! 아직 완전한 승리를 얻지는 않았어도 계속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그분이 날마다 주시는 용서를 받아들이세요. 하루 하루를 잘 지내세요.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렇다면 당신도 사랑하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세요!”

그녀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윌커슨 목사님, 당신은 제게 희망의 광선을 비춰준 유일한 목사님이십니다.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분이 아직도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이 묶임으로부터 구해 주실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날마다 너무도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희망과 사랑의 말씀을 전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 당신은 어떤 죄책감 속에 살고 계십니까? 주님께 죄를 지으셨습니까? 당신 삶 속에서 성령을 슬프게 하셨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이길 수 없는 유혹 때문에 패배의 투쟁을 계속하고 계십니까?

당신께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당신을 향한 그분의 무한한 연민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윗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여, 주께서 불법들을 지켜보실진대, 오 주여, 누가 능히 서리이까? 그러나 용서가 주께 있사오니, 이것은 주를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3-4)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그분의 인자하심

우리는 주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온 인류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실하심과 주의 구원을 밝히 드러내었으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를 그 큰 회중에게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40:10)

다윗은 이 훌륭한 메시지를 자신에게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 회중과 척박한 세상에도 이 메시지가 꼭 필요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토록 큰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자신의 실패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불법들이 나를 붙들므로” (시편 40:12).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만 하는 메시지입니다!

다윗과 함께 이렇게 선언할 수 있습니까? “주의 인자하심을 그 큰 회중에게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가장 많이 찬양 가사로 불리는 구절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63:3) 당신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인생은 짧습니다! 그것은 쇠잔하는 풀과 같아서 한철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 철에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천만년이 지난다 해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는 있어도, 그분의 인자하심은 절대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의 인자하심에 대한 최고의 선포는 기쁨에 찬 찬양입니다. 멈추어서 잠깐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절대 당신에게 화나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금 범하고 있는 죄를 멈출 준비가 되어 있다면, 당신은 이 순간에 용서받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에 그 무엇도, 즉 어떤 죄나 죄의식도, 어떤 비판적 생각도 끼어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주님 안에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깨끗해졌고, 자유로워졌으며, 죄 사함 받았고, 의로워졌으며, 성결케 되었고, 구속되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그분의 인자하심을—얼마나 인내하시며 관심 갖고 계신지, 용서해주고 축복해 주려고 얼마나 준비하고 계시는지를—당신이 진실로 이해했다면, 당신의 북받치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소리 높여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께는 여러분을 사랑하는 자비롭고 인자한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흘린 모든 눈물을 병에 담아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필요와 당신의 모든 생각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2013년 5월 15일 수요일

승리의 노래

이스라엘 자손은 참담한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홍해가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산이 있었고요. 더군다나 바로와 그의 철 병거들이 뒤에서 점점 가까이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앉아서 도살당하기를 기다리는 오리들처럼, 속수무책으로 궁지에 몰린 듯했습니다. 그러나 믿기 어렵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이 위태로운 상황으로 몰고 오셨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이것은 그야말로 공포의 시간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두려움으로 떨었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조부모들과, 그리고 다른 친척들과 함께모여 부둥켜 앉고 울었습니다. 갑자기 모세는 격분한 족장들에 의해 갑자기 공격을 당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제는 정녕코 끝장이야! 애굽에 무덤이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그때 애굽에서 우리를 여기에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였노라. 우리가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이 비참한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으리라!” (출애굽기 14:10-12 참조)

저는 이 상황에서 모세에게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울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출애굽기 14:15).

하나님께서 곧 가져다 주실 어마어마한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바람은 홀연히 바다를 갈랐고,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물결 사이의 마른 땅을 걸어서 통과했습니다. 바로와 그의 막강한 군대가 그들을 쫓으려 했으나, 바닷물은 다시 넘쳐 흐르기 시작했고, 그들 모두를 물속으로 휩쓸어 버렸습니다!

그 얼마나 엄청난 광경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바다 건너편에서 그들의 강력한 적군이 마치 장난감 병정들처럼 진멸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진영에서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불가능한 상황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셨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그리고 그들이 불렀던 노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주께 노래하고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주께 노래하리니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도다. 그분께서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도다. 주께서는 나의 힘이시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 되시는 도다. 그분께서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께 처소를 예비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을 높이리로다.” (출애굽기 15:1-2)

2013년 5월 14일 화요일

기도하는 페이슨

“기도하는 페이슨”이라고 알려진 에드워드 페이슨 박사는 거의 200년 전 메인 주에 있는 포틀랜드라는 곳의 목사였습니다. 독립선언이 일어났던 불과 몇 년 후인 1806년에, 미국은 심각한 경제 공황으로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주 어두운 시기였고, 페이슨 박사는 그가 살고 있던 지역의 비참함을 생생히 기록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비즈니스는 침체되었고 많은 사람이 실족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자가 직장을 잃고 매우 궁핍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저는 가여운 내 나라를 보며 떨고 있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죄가 이러한 심판을 불러 내리는 데에 한 몫 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제 막 믿게 되었던 훌륭한 젊은이 중 일부는 그들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참담한 상황에서도 기쁨과 평강을 유지하는 그들을 보는 제 마음은 매우 흡족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 삶의 동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근심하며 좌절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페이슨 박사와 그의 신도들은 그들이 누렸던 모든 편리를 포기해야만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페이슨 박사 역시 이 어려운 때에 매우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1807년 12월 28일에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렇게 썼습니다: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어요. 이전에 부유했던 많은 상인이 지금은 빈곤 속에 살고 있답니다. 사업들은 날마다 망해가고 있어요. 빈곤함은 이미 극에 달했고, 아직도 많은 사람을 먹여야 하는 실정이에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던 자들도, 지금은 당장 먹을 식량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어요.”

“아마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 안타까워하시며 ‘불쌍한 에드워드!’라고 한탄하고 계시겠죠.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어머니께서 ‘부유한 에드워드’라고 외치며, 저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기뻐하셔야 할 때랍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요. 제 믿음은 이러한 난리 때문에 흔들릴 만큼 그렇게 부실한 기반에 서 있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환란 속에서도 저를 고요함과 평강으로 지켜 주시며, 심지어는 행복감까지 갖게 해 주세요. 제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은 아녜요. 저도 고통을 느끼고 있어요. 제 모든 세상적 희망은 박멸되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거예요. 저는 제가 이전에, 이 세상은 믿을 수 없다는 것과 세상 향락은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 어려운 시간이 저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탈피하고 하나님의 것들을 추구하도록 가르쳤어요. 제가 기도하는 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어떤 세상적 축복을 마련해 놓고 계신다면, 대신 제게 그분의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페이슨은 자신 삶의 경주를 달리려는 노력을 그쳤습니다. (히브리서 12:1 참조) 그가 자기 모든 소유를 기꺼이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지,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 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9).

2013년 5월 13일 월요일

더 큰 것들은 아직 주시지 않았습니다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대단한 일들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우리를 통해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취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우리에게 있는 어떤 고집이라든지,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거부하는 불순물들—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지적해 주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최선을 우리에게 베푸시기 전에, 우리 삶에서 무언가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지 않았던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스스로 이렇게 반문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시킨 일을 내가 게을리하고 있나?”

우리는 그러한 예를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제자들이 유다를 대신할 자를 임명했을 때입니다. 그들이 다락방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할 때였는데,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인듯했습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소경을 눈뜨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지구 역사상 전례 없이 진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이 놀라운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내 영을 너희에게 보내면 너희는 이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될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권능을 주리라. 더 큰 것들은 아직 오지 않았느니라!” (사도행전 1:1-8 참조).

사실상 이 제자들은 이스라엘 외에도 중동, 유럽, 그리고 인도나 아프리카로 들어가서, 그들 세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방에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제자를 더하는 일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요? 한가지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라고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에 베드로가 제자들의 한가운데서 일어나 이르되, ‘형제들아, 유다에 대하여 성령님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이 성경 기록이 반드시 성취될 필요가 있었나니, 이는 그가 우리와 함께 계수되어 이 사역의 한 몫을 맡았기 때문이라’” (사도행전 1:15-17). 베드로는 시편 109편 8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여기에 이 시대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값진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거리끼는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다루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 드러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더 큰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2013년 5월 10일 금요일

의심 처리하기

당신이 지금 당신의 내면에 있는 의심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투덜거림과 불평의 영에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심은 간단하게 진압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뿌리째 뽑혀야만 합니다.

애굽으로부터 구출되고 나서 단 사흘 후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들은 노래하며, 탬버린을 흔들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며, 전능하신 그분의 능력과 힘을 증언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마라(Marah, “쓴 물”이라는 뜻)라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이곳은 그들이 시험 받기 위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끝내 교훈을 얻을 때까지 시련에서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시험으로부터 배우기를 계속해서 거부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투덜거림과 불평의 영에 스스로 넘어가도록 허락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로 들어가 광야에서 사흘 동안 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였더라…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하며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시리요? 하매” (출애굽기 15:22, 24).

주일에 이스라엘 백성은 노래하고 춤추고, 찬양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수요일이 되었을 때 그들은 곤경에 빠졌습니다. 또 하나의 시험이 닥쳤을 때 –그들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 백성은 그렇게도 빨리 그들의 확신을 잃어버릴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어떠한 확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저변에 그러한 확신의 반석이 결코 세워져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시험을 통해 전혀 배운 것이 없었고, 그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빛나게 할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날로부터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분의 선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음식이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진 밖에 삼 피트까지 쌓이도록 하늘로부터 메추라기도 떨어뜨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말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그들은 탐욕스러워져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이 굳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오, 시련에서 시련을 연이어 통과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바로 이것이 당신을 불평불만의 영에 넘겨지게 하는 저주를 동반합니다.

2013년 5월 9일 목요일

제 불신을 고쳐주소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그 사람은 주께로부터 어떤 것이든 받으리라 생각하지 말라” (야고보서 1:6-7).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양, 교회 탁상에 둘러앉아 수군거리며 불평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투덜거림을 들으십니다! 그러한 투덜거림은 하나님이 무관심하다는 비난이며, 그분이 우리를 실망하게 했다고 은근히 불평하는 암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저를 괴롭히는 의심과 두려움에 대해 누구에게도-아내, 친구들,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직장 동료 등-언급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의심들을 십자가로 가져가서 “예수님, 제 불신을 고쳐주소서. 그것을 없애주세요.”라고 말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험담, 불평, 비통과 질투로 가득한 혼란스러운 40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칭하면서도, 거룩을 주장하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요. 그러나 이렇게 불만에 찬 삶의 증언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었지,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장소로 나와야만 합니다. 지금 당신이 그것을 배울 수 있다면, 다음에 시련이 올 때 당신의 구원자에게 노래하며, 찬양으로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당신이 맛볼 그 승리여!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모든 의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신에 치명타를 가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하나님 말씀의 거울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입니다. 지난 30일 동안 당신이 했던 말과 행실을 살펴 보십시오. 투덜거린 적이 있습니까? 불평은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지요. “예, 그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한테 불평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한테 한 것입니다! 당신이 어디서 불평했던지, 누구에게 불평했던 지를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펴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나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네 모든 행사를 내게 맡겨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합니다. 잠잠히 서서 주님의 구원 하심을 보십시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난다면요?” 그러한 반응이 바로 당신의 의심과 두려움을 표출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로 나아가세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 드리세요. “주님, 저는 제 상황 가운데서 제가 아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이제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의 승리를 기다리겠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의 증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해 간증하게 하십시오. 바로 지금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해 그 분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모든 문제, 모든 믿음, 그리고 모든 신뢰를 그분께 올려 드리세요!

2013년 5월 8일 수요일

고난 중에 부르는 노래

“이는 거기서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간 자들이 우리에게 한 노래를 청하였고 우리를 황폐케 한 자들이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시온의 노래 중 한 곡을 우리에게 부르라 함이었더라. 우리가 타국 땅에서 어찌 주의 노래를 부르리요?” (시편 137:3-4)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 삶 중 가장 어려운 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끌려가면서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로부터 노래를 부르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더 이상 활기가 없었고, 오직 암울함과 절망과 낙심뿐이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늘날 이와 똑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환경에 의해 묶여 있거나, 마귀가 예전의 유혹으로 당신에게 접근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난 안될 것 같아. 나의 모든 부르짖음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결박이 나를 영원히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야!”라고 생각하며 거의 포기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을 함락한 자들이 그들에게 소리쳤습니다.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라! 우리는 너희의 모든 것과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다 들었다. 자, 너희 탬버린을 꺼내오고 너희 하프를 가져와라.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주렴. 너희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다오!”

저는 이 요청이 단지 조롱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가련한 요청이었다고도 믿습니다. 바빌론 백성의 신들은 그들을 공허하고 메마른 상태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불가능한 상황을 승리로 이끄시는 그들의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백성에게는 그들을 위해 바다를 가를 수 있는 하나님이 있어. 그의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가 하면, 그들의 대적들을 막아주고 있지.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이 신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해!”

온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빌론 백성은, 그들과 똑같은 역경을 견뎌내야만 했고 그들이 직면해야만 했던 똑같은 전투에서 싸워야만 했던, 그러나 그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그들의 믿음을 지키며 노래하고 외칠 수 있었던 백성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빌론 백성이 이스라엘에게 노래를 요청한 이유는, 그들 각자의 마음속에 무언가 이렇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잃었는데도, 도대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이 그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만드는가?” 그들에게는 간증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떤 상황에서나 어떤 고난 중에도 시온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세요!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아니요, 소경이 눈을 뜨거나 절름발이가 고침 받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이성으로는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당신 삶에서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웃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당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보기 원하는 기적입니다.”

2013년 5월 7일 화요일

섬김

자존심은 섬김의 정신에 의해 격퇴당합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종이 되는 것만큼은 원치 않습니다. 미국에는 “우주의 주권자들”이라고 불리는 어린이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게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신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갈라디아 4:7). 여기서 바울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올바르게 배운 아들은 그가 법적으로 모든 권한을 가진 왕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버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종의 역할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고 야고보도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종은 자신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주인의 말씀이 곧 그의 의지입니다. 십자가는 나 자신의 모든 계획과 생각, 바램, 희망 그리고 모든 꿈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는 나 자신의 의지에 대한 절대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참된 의미의 겸손입니다.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 (빌립보서 2:8).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음식 (삶에서의 만족)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라 (요한복음 4:34). 달리 설명하면, “나는 스스로 행하기를 거부한다. 나는 내 아버지로부터 모든 인도하심을 듣기 위해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분이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요한일서 4:17).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그분의 뜻을 따르길 원해.”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우리가 원하는 것에, 무언가 좋아 보이는 것에, 그리고 논리적으로는 그럴싸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들에 우리 마음을 둡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중보합니다.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웁니다. 선포하며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받아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가장 큰 함정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좋은 발상,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닌 전략, 그분 것이 아닌 잘 잉태된 계획입니다. 당신의 열망이 십자가를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그것으로부터 떠나서 그것에 대해 죽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정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 마귀가 저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이것은 저를 망하게 할 거예요. 제가 십자가에 그것들을 던져버립니다. 당신의 방법으로 해 주세요, 주님!”

2013년 5월 6일 월요일

끈질긴 믿음 by Gary Wilkerson

"주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것을 내가 등한시한 적이 있는가?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그 어떤 걸림돌도 제 삶에서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분의 백성을 이 시점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바로 전에,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승리를 안겨주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온전한 헌신도 원하십니다.

여호수아 서의 처음 여섯 장은, 수년에 걸쳐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 가운데서 하신 영광스러운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0년의 종살이에서 드디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또한,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는 삶에서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접경지대에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강을 건넜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그 즉시 여호수아는 젊은 남자 세대를 준비시켜 하나님께로 구별되게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준비를 묘사할 때 “할례”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미로 “그들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그런 일을 했을까요? 그들은 이제 막 요단강을 건넜고, 너무도 견고한,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여리고 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오합지졸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 대적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최근 수년간 너희를 축복했다. 너희는 나의 놀라운 부유함을 체험했지. 그러나 너희 믿음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단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전쟁을 준비했습니까? 그들은 칼날을 갈며 갑옷에 기름칠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전쟁 준비는 그들의 심령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노래하고 기도하며 그 성을 돌면서 그분을 기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분은 그들로 하여금 나팔을 불며, 단 한 번 크게 외치게 하셨습니다. 한 순간에 그 난공불락의 벽들은 허물어졌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대적을 무찌르고 넓은 땅을 물려받으며 이전에 없었던 승리를 맛보는 굉장한 공적들을 세웠습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모세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31명의 왕을 무찔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이긴 왕들의 수보다 10배나 많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서 하기를 원하시는 표본이라고 믿습니다. 그분은 10배의 증가를 가져오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영을 놀랍게 부어주기를 원하시며, 또한 이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를 원하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끈질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2013년 5월 3일 금요일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여기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련된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되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베드로전서 2:23).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인지요. 그분은 자신을 박해했던 자들에게 단 한 번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벌하지 않으셨으며 그 누구에게도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지요! 고통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질 때 우리는 위협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며 우리의 권리와 평판을 계속해서 옹호합니다. 그중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협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주 미묘해서 우리 대부분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합니다. 기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 문제와 재난이 우리 삶을 칠 때—마침내는 주님께 버림받은 것 같고 고통 속에 홀로 남겨졌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읽기를 게을리합니다. 여전히 그분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그분을 향한 우리의 열성을 포기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며, 우리의 믿음은 약해지고 무력해집니다. 이러한 반응이 모두 주님을 대적하는 위협입니다.

우리가 온 정성 다해 주님 찾기를 멈출 때마다 우리는 그분을 위협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님,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당신은 나를 저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상처받은 자들을 향한 무한한 인내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보호 하심으로 돌아올 때까지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우쳐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그분 안에서 새롭게 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위협하는, 당신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도 혼란스러워서 그들의 육정과 욕구로 전락합니다. 그들의 싸움이 너무도 절망적인 것 같아, 대신 욕망을 추구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하나님께 구해달라는 도움을 요청했지만, 전혀 도움이 없었어. 눈물과 간구로 기도했지만 내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어.”

그리고 결국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어. 왜냐하면, 내가 너무도 상처받았기 때문이야.” 이것은 하나님을 위협하는 겁니다. 기도 응답을 제때에 해주시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을 가지세요! 만주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 한 분만이 우리의 목자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자녀가 낙망하고 실패하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으실 겁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바닥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우리도 합시다.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베드로전서 2:23). 여기서 “맡기다”라는 용어는 당신 생명을 전적으로 그분의 손에 의탁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그 고투를 포기하세요.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성취하려는 노력을 멈추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몸과 영혼을 만주의 주께 맡기세요!

2013년 5월 2일 목요일

하나님은 여전히 약자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고린도전서 1:27).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약자를 택하셔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당신은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한탄해본 적이 있으신지요? 당신이 하나님께 무가치하고 허약하며 쓸모없다고 느끼십니까? 당신은 매주 강인하고 완벽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과 비교되는 자신이 너무도 죄가 많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사용되기에는 정말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영적 거장들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육신의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와도 같은 믿음을 가진 평범한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그분의 도구로 기름 부으셔서 강한 자들과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은 육신의 능력에 의지하는 자들과 그들의 재능, 지식, 배경, 그리고 자기 가문의 명성을 신뢰하는 자들을 간과하실 겁니다. 대신, 상심한 자들, 약하고 지친 자들을 일으키실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찬양의 영과 사랑의 세례를 부어주실 겁니다. 그분의 위대하심과 신실하심, 그분의 언약들을 그들에게 보여주실 것이고, 그들은 주님과 그분의 권능 안에서 강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내면에 주님 안에 있는 더욱 새롭고 높은 영역을 갈망하는 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불이 여러분 가슴속에 지펴져 있는지요? 여러분의 영이 하나님을 향한 새로워진 믿음과 신뢰로 끌려 당김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세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약속들은 위대하며 보배롭습니다. “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쌓아 두신 주의 선하심, 곧 사람들의 아들들 앞에서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베푸신 그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 앞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들을 은밀히 천막 안에 두사 혀의 말다툼에서 벗어나게 하시리이다” (시편 31:19-20).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성령께서는 참으로 모든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9-10).

2013년 5월 1일 수요일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

“모세가 진영의 문에 서서 이르되, 누가 주의 편에 속하느냐? 그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니 레위의 모든 아들들이 함께 모여 그에게로 오매” (출애굽기 32: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패를 어떻게 박멸하실까요? 사악한 시대에 누구를 그분의 도구로 선택하실까요? 천사들이 내려와서 의로운 심판을 시행할까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미 부패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를 그분의 거룩한 군사들로 세우셔서 빛을 발하게 하실까요?

온 백성 중에서도 그분은 레위 지파를 선택하셨습니다. 형 시므온과 더불어 야곱의 가족을 이방인들 앞에서 욕보였던 살인자의 아들들 말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각자 칼을 들고 그들의 누이 디나를 강간한 세겜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 아비 하몰을 죽였으며, 그들의 양과 소와 나귀들과 모든 재물,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까지 빼앗았습니다.

오! 그분의 도구로서 가장 무가치하고 가장 어리석은 자들을 선택하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여… “레위의 모든 아들들이 함께 모여 그에게로 오매…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출애굽기 32:26, 28).

아마도 그들 깊은 내면의 무언가가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이 했던 것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야! 우리 하나님 이름에 더는 먹칠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나가서 주님 편에 설 거야!”
모 세가 그들에게 약속했었습니다. “너희가 가족과 친구와 형제를 쳐서 너희 자신을 주께 거룩히 구분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상을 주시리라” (출애굽기 32:29 참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이라고 불리는, 반-제사장 직분으로 성전에서 섬기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상 주셨습니다.

주님 편에 선다는 것은 그분의 검을 취한다는 것과,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불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친구들이 얼마나 믿음이 없든 간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 얼마나 세속적이던 간에를 막론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이렇게 선포해야만 합니다. “나는 주님 편에 있다! 나는 우리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신실하심을 방해하는 모든 공격을 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