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30일 금요일

하나님 말씀을 무시할 때

여 호사밧이 아합 왕과 전쟁에 합류하기로 약속했을 때, 자신은 의롭게 처신한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오늘 주의 말씀에 여쭈어 보소서, 하니라.” (역대하 18:4) 그는 “그 일에 대해 주님께 조언을 구합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들을 때까지는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과 아합에게 그 모든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파멸이다! 위험을 감수하라. 그 전쟁터에는 죽음과 패배만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역대하 18:16 참조)

이 시점에서 볼 때, 여호사밧은 진실된 예언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시행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수 세기 동안 성서학자들은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여호사밧이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것을 무시해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께 순종하려는 열망에 대해 실컷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불경건한 친구들의 현혹으로부터 떨쳐 나와 성령의 분별력을 구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친구와 그의 전쟁에 동참할 수는 있겠지만, 막상 승산이 없어지면 그는 적에게 당신을 넘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사밧이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갔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사악한 왕 아합은 여호사밧이 살해를 당하게끔 역모를 꾸몄습니다. 자신은 병사의 옷을 입는 반면, 여호사밧에게는 자신의 왕복을 입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적군이 자기대신 여호사밧을 추격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아합은 갑옷 이음새를 뚫고 들어온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홀연히 적군 병사들에게 포위당했고, 그들의 칼에 맞아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신이 죽음을 직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주께서 그를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움직여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니라.” (18:31)

그 전쟁은 완전 패배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병은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혼란 가운데서 탈주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은, 그의 친구 아합은 죽고 그의 군대는 패배당한 채, 예루살렘으로 철수했습니다. 그가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피할 때 무슨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 상상이 됩니다: "오 하나님,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서야 제가 악한 친구와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는 결단코 세속적 체제와 결탁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신실한 우정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즉 당신이 그리스도의 혈육이라면, 사탄은 당신의 모든 경건함을 파괴하기 위해 누군가를 당신 삶 속으로 침투시키려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잠깐만요! 저는 제 친구들에 대해 의혹을 품거나, 갑자기 그들을 의심스럽게 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성령 안에서 당신과 연합된 진실한 친구들이라면, 그들과의 친분 관계에 대해 점검해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교우관계를 말씀의 빛으로 조명해보아야 합니다.

당신의 친밀한 우정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아니면 원수가 당신을 파멸하기 위해 침투시킨 자들인지 분별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히 당신과 가장 친한 친구를 생각하며 다음 질문들에 대답하십시오:
  • 그는 (혹은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수군대거나 헐뜯는다든지 험담을 합니까? 
  • 그는 성경 말씀에 대해 따지기 좋아하고 끊임없이 논쟁하면서도,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합니까? 
  • 그는 경건한 사람들을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릅니까? 
  • 당신은 그의 발언 중 불순종, 질투심, 또는 의심의 영을 감지합니까? 
  • 그는 자기 배우자에 대해 격분되어 함부로 말합니까? 
  • 그는 당신 마음속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어 놓았습니까? 
  • 당신은 그와 합세하여 격분하기 시작했습니까? 
만일 당신의 친구가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이 친구와의 관계로 인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면, 마귀가 당신 삶 속에 그를 침투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아합의 영을 가졌고, 당신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일을 멸하기 위해 보내진 것입니다.

한편, 진실되며 경건한 친구는 어떤 경우에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이며, 단지 친구라는 이유로 당신을 옹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친구는 죄의 비통함 가운데 있는 당신과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께 진실을 말해줄 것입니다.

“친구가 주는 상처는 신실한 것이나, 원수의 입맞춤은 속이는 것이니라.” (잠언 27:6) 

2013년 8월 28일 수요일

달콤한 유혹

비참하며 정의롭지 못하고 반항적인 사람과 친분을 맺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끔찍한 결과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주의 두려움이 유다 주변에 있는 땅의 모든 왕국들에 임하므로, 그들이 여호사밧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아니하더라.” (역대하 17:10) 여호사밧의 왕국 유다는 축복받아 풍요롭게 번창했으며, 누구도 감히 그들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아합과 친분을 맺은 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합이… 라못 길르앗에 올라가도록 [여호사밧]을 설득하여… 그리고 그가 아합에게 대답하기를,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으니 우리가 당신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리이다.” (18:2-3)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관여하지 아니하시는 승산 없는 전쟁에 자진해서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설득하다’가 히브리어 단어로는 “달콤한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사밧은 “나는 당신과 같다”라고 대답하며, 아합의 전쟁 속으로 빠져들도록 자신을 허용했습니다. 달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네 친구라. 그러니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겠다. 나는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를 믿어도 돼!”

비통함과 증오, 분노로 가득한 당신의 가까운 친구가 어떤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그가 결혼생활이나 가족문제, 또는 어떤 개인적 문제로 인해 고투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당신은 그에게 도움과 격려를 주는, 여호사밧과 같은 친구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주의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거기에 점차 휘말려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머지않아 당신은 친구의 복잡한 상황 가운데 강타당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어떤 입장을 취하라는 요청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만일 당신의 친구가 문제투성이의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한쪽 편을 들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결국 그의 이혼 끄트머리까지 동정과 함께 그를 지지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조심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반역 가운데 있는 자에게 위로나 격려를 줄 때마다, 성령을 거역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죄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슬프게도, 여호사밧이 아합의 전쟁에 합류했을 때, 그는 친구가 걷는 파멸의 길을 재촉했을 따름이었습니다 

2013년 8월 27일 화요일

곧 등장하게 될 거룩한 전사들!

미 가 선지자는 모든 구약 성서 예언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예언으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습니다. “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네 모든 사람을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의 우리 한가운데 있는 양 떼같이 그들을 함께 두리니...” (미가서 2:12)

미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파송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같은 심장 박동으로 뛰며, 성령에 의해 너무도 강한 인도하심을 받아, 변질된 교회로부터 소외된, 사생아라고 불리는 자들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저는 민족을 모으며 또 쫓겨난 민족과 내가 고난을 주었던 민족을 모을 것이요, 또 내가 저는 민족으로 남은 자가 되게 하며 쫓겨났던 민족으로 강한 민족이 되게 할 것이요, 주가 이제부터 영원무궁토록 시온 산에서 그들을 치리하리라.” (미가서 4:6-7)

이 거룩한 남은 자들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자랑스럽게 자기중심적 사역을 하고 있으며, 세련되었고, 박수갈채를 받는 유명 인사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시험의 불을 통해 단련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고, 소외된 자들이며, 높이 추앙받는 대형 교회와 견주어 볼 때 너무도 하찮게 여겨지는 자들이며, 하나님 집에서의 부패에 대해 소리 높여 항거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함께 모으리라!” 하나님의 종들을 함께 모으려는 모든 인간적 노력은 헛된 수고입니다. 하나님께서만이 그 일을 하셔야 합니다. 이 남은 자들이 서로 의견을 같이하며 연합하게 하는 한가지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통회하는 심령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 중 한 사람이며 성서학자였던 제롬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통회하는 자들이며, 세상 것들을 초월하고 천국을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천국의 마음을 지닌 자들입니다. 경박함과 타협에 지친, 하나님 집에서 거룩을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성도 가운데서 뚜렷이 등장하고 있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집에서의 죄와 부패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의 맥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점점 노출되고 있으며, 머지않아 뛰쳐나올 것입니다!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그분 은혜의 풍성함 by Gary Wilkerson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에베소서 1:7-8)

저는 우리가 교회로서 은혜의 피상적 단계조차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의 여정에서 종종 은혜의 잔으로부터 몇모금씩 마시고는, 나머지 여정을 우리 자신의 힘에 점차 의존해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순종의 영역을 고르고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특별히 할당된 주님의 부르심을 수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거듭나야하고 믿음을 가져야 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과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모든 계명을 '그렇습니다'와 '아멘'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는 모든 순종의 영역중 한 부분만을 선호합니다. 그들은 선교나 사회 정의를 강조한다든지, 아니면 정치적 활동이나 구제, 또는 기도등 한편으로 치우칩니다. 그들이 시인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다른 교회들의 중점 활동은 덜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덟 개 실린더 중 하나만 작동되는 교회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 계명의 어떤 부분도 무시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그분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요한계시록 3장을 읽어보십시오. 어떤 성도나 교회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면 불순종에 거하게 됩니다. 한편, 완벽한 순종은 우리 능력 범위 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순종의 어떤 부분만을 강조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계명보다 지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실행함으로써 상까지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기쁨과 승리의 삶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잘 순종했는지 못했는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순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교회에서, 나 자신의 의지로 영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청년부 지도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유혹에 다시 말려들지 않을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여러분 자신을 건져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시도였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우리 자신을 억지로 변화시키려 애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그리고 우리 세상 안에서 말입니다.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미가의 예언

미 가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교회를 보았던 선지자였고, 이는 그의 영혼을 애통함으로 울부짖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신 것을 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과 목자들과 지도자들의 심각하고 끔찍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보았던 것입니다! 매춘하는 교회가 매춘의 열매를 맺고 있는 비극 말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이는 그 상처는 고칠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미가서 1:8-9)

미가의 애곡을 들어보십시오.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미가서 1:12-13)

미가는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고쳐질 수 없는 질병을 보았고, 그로 인해 반드시 임할 심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패역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그리고 무엇이 그분 책망의 원인이 되는지를 살펴봅시다:
  1. 돈과 재물과 명성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고안된 새로운 탐욕적 책략. 
  2.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 “죄악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찐저… 이는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들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취하니, 그들은 (내 백성을) 학대하는도다." (미가서 2:1-2) 
  3.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즉,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과는 역행한다고 주장하는 것!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주의 영이 참지 아니하시겠느냐?” (미가서 2:6-7) 
거짓 선지자들과 도적질하는 목자들은 미가에게 입을 닥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심판에 대해 설교하지 마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잖아. 그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 우리에게 심판 같은 것은 없을 거야.” 적나라하게 해석하자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입 닥쳐! 하나님 백성을 향한 그 따위 심판의 메시지는 그만 전해! 착한 백성을 책망하는 일 좀 멈춰라!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그러나 미가의 대답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예언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예언하지 않아야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미가서 2:6) 달리 설명하면, 만일 그 메시지가 그들에게 들려오지 않으면, 그 나라를 향한 심판도 그들에게 임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망설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내 말이 유익이 되지 아니하겠느냐? (즉,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내 말을 듣고 회개하며 돌아설 것이다!)” (미가서 2:7)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영광에서 영광으로

바 울은 특별한 은사나 재능을 요구하는 사역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부르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유명 사역자든 평신도든,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사실상 이 사역은 모든 성도를 향한 첫 번째 부르심이며, 그 외의 모든 사역은 이 부르심으로부터 흘러나와야만 합니다.

이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사역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있는 이 사역은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역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고린도후서 3:18)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헌신적이며 집중된, 단지 그분만을 바라보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다음의 구절을 얼른 덧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맡았은즉...” (고린도후서 4:1)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모두 헌신해야만 하는 사역이라는 것을 바울은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위 구절에 사용된 단어 '바라보다'는 헬라어로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그 뜻은, 단지 바라보는 행위에 국한된 것이 아닌 “고정시켜 앙망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나는 이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무엇을 하기 이전에, 무언가 단 하나라도 성취하려는 노력 이전에, 반드시 하나님 임재 안에 거해야만 합니다.”라고 결단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많은 성도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3:18)의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반영된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가 뜻하고 있는 것은, 더 명확히 보기 위해 투명한 유리를 통해 무언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강렬하게 초점이 맞춰진 응시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단호히 결심하며, 바로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 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한가지 열망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열렬히 그분만을 앙망하는 집중된 헌신으로 친교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 다가가서 그분을 앙망하는 자는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한 성도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앙망할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리를 통해 보는 것같이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는 우리 모두는, 주의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똑 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느니라." (고린도후서 3:18)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요청

그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그것이 바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요청입니다. 교회의 영성이 미지근해질 때가 곧 올 것이고, 수많은 성도의 마음은 차갑게 변질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을지어다. 마음의 문을 열어라. 나로 하여금 네 기도 골방에 들어가게 해다오. 내가 너에게 말하게 하고, 너는 내게 말하려무나. 서로 교제하자. 그래야만 온 세상으로 밀려오고 있는 유혹의 때로부터 내가 너를 지킬 수 있단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 가운데서, 우리 주님의 마음이 더는 외롭지 않을 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 요한은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이 예비되었더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을 값없이 주리라.” (요한계시록 21:2-6)

그것은 중간에 막힌 담이 없는 자유로우며 완전한 소통을 의미합니다. 즉, 탁한 유리 벽이 제거된, 부분적 사귐이 아닌,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교제를 뜻합니다! 우리는 주님 발치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으로 영원을 사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울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놀라운 대 재회가 우리 구주께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모든 자녀가 집에 와서 그분의 실체와 아무런 스스럼없이 교제하는 것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앉혀 놓고, 그분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강물처럼 흘려 보내실 것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하셨듯이, 우리 구원자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선지자까지 우리와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주의 비밀들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그분의 모든 계획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은 추방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영원을 공유하실 것입니다!

저는 천국의 진정한 기쁨이 우리에게만 속한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도 속한 것임을 압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자유롭게 대화하시는 아버지의 기쁨을 보는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열망이 온전히 충족된, 그리스도의 충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2013년 8월 20일 화요일

그들은 갑옷을 내려놓았습니다

"모세가 보니 백성이 벌거벗은 지라. (이는 아론이 그들로 벌거벗게 하여 그들의 원수들 가운데서 수치가 되게 하였음이라.) 그때에 모세가 진영 문에 서서 말하기를, 주의 편은 누구냐? 내게로 오라.” (출애굽기 32:25-26)

여기서 ‘벌거벗은’으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 ‘para’는 “느슨해진, 드러난, 해체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또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한 맥주 광고는 이 세대에게 “오늘 밤 느슨해지세요.”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의미하는 것은, 그 동안의 도덕적 관습을 떨쳐버리고, 모든 율법을 회피하며, 당신 자신을 즐기기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당신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는 말이지요.

그들이 단순히 옷을 벗었다고 해서 타락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이교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신호였습니다. 당신은 저 멀리 주변 산등성에서 이 기막힌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말렉 족속을 보십니까? 한 때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 떨었던 이 적들이, 지금은 이렇게 말하면서 비웃고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저들 좀 봐! 저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어! 그들의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없어. 저들은 그분을 신뢰하고 있지도 않아!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욕을 추구하고 파티를 하며 즐기길 원해. 참으로 위선적이군!"

한 번의 벌거벗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경건치 못한 자들 앞에서 그들의 하나님을 하찮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냉정하고 잔인하며 무관심하고 무력한 분으로 보이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예와 존엄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본이 되지 못했으며, 더 이상 선망의 대상도 아니었을 뿐더러, 두려움이나 존경의 대상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파티하기 위해서 그들의 갑옷을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적과 싸우고 싶지 않아! 우리는 저항하고 싶지도 않아! 우리는 거부도 많이 당했고 희생도 많이 했으며, 미래 소망을 바라는 것도, 까마득한 축복을 기다리는 것도 이젠 지쳤어. 우리에게는 지금의 삶도 중요해! 우리도 이제는 즐기며 살기를 원해! 그리고 좋은 삶이 계속되기를 원해."

타락은 다름 아닌 이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더 이상의 전투가 필요없는 새 출발을 원한다는 것이었지요! 만일 그들이 힘겹고 잔혹한 광야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들의 고투를 포기하고 그들의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것이었지요. (하나님 없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말입니다.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은혜의 문 by Gary Wilkerson

이 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이사야 61:4) 그러나 이사야의 청중은 그가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자유와 공적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수 세기 동안 율법 아래 압박 당하고 있었으며, 그 부담으로 인해 탈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세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지워진 율법적 부담을 받아들이며, 그에 따르는 노고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분 사역의 시작을 통고하실 때 인용하셨던 이사야의 예언이 그 세대 사람들에게 왜 그토록 혁명적이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이사야 61:1)

예수님께서는 은혜의 선물이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해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메시지는 단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가져다 줌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그것은 믿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한복음 8:36)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 세대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 자신에게 부담을 지웁니다. 우리는 은혜를, 무언가 부드럽고 수월하며, 무사통과 할 수 있는 티켓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은혜는 당신 인생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 중 가장 탁월한 능력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동행 길에 있는 당신의 기도생활, 예수님 증인으로 사는 삶, 그리고 그분 이름 안에서 행해지는 당신의 선한 행실에 참된 열매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갈 때, 그분께서 우리 앞에 마련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그분의 교회가 움직여지고 권능 받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당신은 완벽해지기 위해 여전히 분투합니까? 완벽으로 들어가는 통로의 입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의 문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당신은 이미 하나님의 눈에 완벽합니다. 자,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분투를 멈추십시오.

당신의 노력은 당신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대신 후퇴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놓치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부르심을 달성케 할 자유, 기쁨, 그리고 능력을 가져다 줄 은혜 말입니다. 실상은, 당신이 예수님과 함께 전진할 때 은혜에 은혜가 더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당신의 수고를 배가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부어주셨음을 신뢰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당신을 향한 특별한 부르심의 여정에 필요한, 모든 단계의 은혜 말입니다.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불경건한 동맹

여 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국이 나뉘어졌을 때 유다를 치리하던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그 시대의 어떤 자보다도 더 큰 축복과 영예를 누렸습니다. “주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역대하 17:3)

그러나 성경은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을 치리하던 사악한 왕 아합과 동맹을 맺었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사밧에게 재물과 영예가 풍성히 있었으며, 그가 또 아합과 친족 관계를 맺었더라.” (18:1) 성경은 아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자기 앞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을 더욱 격노케 하였더라.” (열왕기상 16:33)

당신은 여호사밧과 같은 의로운 왕이 어떻게 그토록 불경건한 왕과 동맹을 맺게 되었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의로운 여호사밧을 파멸하려는 사탄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여호사밧은 바알의 모든 우상을 몰아냈고, 우상 숭배하는 선지자들을 죽이며 그 땅을 정결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사악한 부인 이세벨은 바알을 숭배했고, 그녀의 우상에게 여호사밧이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의로운 왕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이세벨은 여호사밧의 경건한 궁정을 침투하기 위해 그녀의 사악한 딸 아달리야와 계략을 세웠습니다. 아달리야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을 만나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그녀의 모든 매력을 다 사용했습니다. 그 계획은 성공했고 여호람은 아달리야와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한테 축복해달라고 요청했고, 어리석게도 여호사밧은 그것을 승낙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말미암아 악이 여호사밧의 핵심세력 안으로 침투했고, 이에 마귀는 신이 나서 춤을 췄음이 틀림없습니다! 여호사밧은 그의 아들에게, 아달리야는 그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반역적인 여자라고 경고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호사밧은 아들에게 이 관계를 당장 끊으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사밧은 다윗이 아주 명백히 기술한 이 성경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간계에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도다.” (시편 1:1)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전혀 맞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가장 가까운 친구들

당신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누구입니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질문이 주님께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인간관계는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중요한 지침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당신은 제 인간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당신을 기쁘시게 하나요?” 하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상 의로운 친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불의한 친구는 당신을 끔찍한 속박으로 이끄는, 온갖 형태의 악의 사슬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메시지 전반에 걸쳐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직계 가족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친구의 정의는, 당신과 가깝게 연관된, 당신이 터놓고 자연스럽게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친구는 당신이 함께 동행하고 대화하며, 당신의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당신은 각계각층의 친구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직장 동료들이나 동업자들을 포함한 “사업상”의 친구들이 있을 것이고, 겉으로만 유대관계를 가진 “사회적”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불경건한 사람들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부류와의 관계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이 땅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두는 부류는 당신의 절친한 친구들입니다. 이들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당신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자들입니다. 이 관계는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끌리며, 대부분 것들에 동의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서로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탄의 유혹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마귀의 가장 상투적 공격 중의 하나는 우리의 절친한 친구들의 연합 안으로, 미혹가운데 사는 자, 즉,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임무를 맡은 한 지옥의 요원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사탄은 특히 외롭거나 동정심이 많은 성도에게 이 술책을 사용합니다. 그는 분별력 없는 자의 친절함을 악한 영에 대한 친근감으로 바꾸려 합니다.

“미혹되지 말라. 악한 사귐은 좋은 행실을 부패시키느니라.” (고린도전서 15:33) 

2013년 8월 14일 수요일

찬양으로 화답하기

하 나님께서는 원수의 힘에 대해서는 절대 불평하지 않으시지만, 그분 백성의 조급함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의존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분께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모든 행사의 원천이자, 절대 요동치 아니하시는 힘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눈살을 찌푸릴 때나 말씀으로 꾸짖으실 때, 또는 그분 손으로 치실 때, 그 모든 진노 가운데서도 그분의 심장은 사랑으로 불타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모든 생각은 평강과 선하심입니다.

모든 위선은 불신에 근거하며, 하나님을 의존할 수 없는 영혼은 절대 그분께 진실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의 계획으로 자족하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자손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시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모세]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애굽기 32:1)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불평하는 마음속에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미련한 자만이 감히 그분의 과실을 찾으려 합니다. 그분은 그러한 자가 스스로 입을 다물도록 촉구할 것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고통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의 언어로 신음하시며,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따라 기도합니다. 그러나 환멸을 느낀 성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육적 투덜거림은 독과도 같습니다. 불평은 온 백성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것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면 불평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불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마치 얼은 호숫물과도 같습니다. 믿는 자는 담대함으로 그 위로 나아가지만, 두려움으로 가득한 불신자는 깨진 얼음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고 있다면, 그것이 뜻하는 단순한 의미는 당신의 요청이 그분 축복의 은행에서 이자가 붙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너무도 확신하기에, 그 결과를 보기 전부터 기뻐합니다. 그들은 이미 받았다는 듯이 기쁨으로 전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속을 받기 전에 찬양으로 화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기도 가운데 우리를 도우시며, 하늘 보좌에서 환영받고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성령을 거부하실까요? 절대 그리하지 않으십니다! 당신 영혼으로부터 들리는 그 성령의 신음은 결코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거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믿음에는 좋은 기억력이 필요합니다

믿 는 영혼은, 그의 마음을 주께 기도하며 내려놓은 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그분의 지혜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가 진실로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자비에 기도 응답의 결과를 맡겨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응답하시든 간에, 그 성도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집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언약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비록 내 집이 하나님과 더불어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더불어 영원한 연약을 맺으셨으니” (사무엘하 23:5)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어떻게 그리고 언제 달라고 처방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실제로 제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문으로 응답을 가져오지 않으시므로, 그들은 뒷문으로 오시는 그분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들은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만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시간이나 형식, 또는 방법에 얽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영원토록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보다 더 좋은 건강과 은혜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과 그 이상의 것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이며 그보다도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저 그분의 능력의 팔에 우리의 요청을 맡겨놓고, 우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며, 평강과 고요함 가운데 그분의 응답 하심을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가졌는데도, 그토록 믿음이 적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당신이 낙심했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었다고 사탄이 속삭일 때, 이 말로 사탄의 입을 막으십시오. “마귀야, 잊어버린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다. 내가 그분이 베풀어주신 모든 과거의 축복을 다 잊어버렸음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할 수 있겠니?”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성급하고 경솔한 언어는 그분께서 베푸신 은총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함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연약함이라. 그러나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오른손의 여러 해를 기억하리이다. 내가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리니, 참으로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이적들을 기억하리이다.” (시편 77:10-11)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그분 은혜로 말미암은 능력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를 향한 부르심의 목적까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다음의 표현들이 주님과 동행 길에 있는 당신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부담스러운, 스트레스 받은, 마음이 무거운, 정신적으로 탈진된, 피곤한".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우리의 육신이 두 배로 노력할 때마다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대신 율법이 나를 주도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쟁취하신 자유는,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좋은 소식일뿐더러, 각 믿는 성도들을 위한 희소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로서의 자질이 못 된다는 탁한 생각 속에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의무적으로 자기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고, 흠도 있으며, 불완전한 열두 제자 모두를 그분께로 부르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과의 친교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5:15)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심장 속에 있는 간절한 소망을 그 친구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당신께도 이미 그렇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기도로 그분께 나아갈 때나 교회로 걸어 들어갈 때, 그분은 "또 너로구나"라는 덤덤한 태도를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그분은 당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고, 당신 옆에 앉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을 정말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제 삶의 어떤 것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4) 오랜 기간 동안 율법에 따라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계속 위로할 것입니다. "내일은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스스로 재충전 시키면 돼."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짐으로 억눌리게 되고, 우리 자신의 한계에 다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모든 육적 수고의 한계선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013년 8월 9일 금요일

기도의 능력

우리가 기도의 능력을 의심하면, 기도는 그 힘을 잃게 됩니다. 마귀는 기도가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우리의 소망을 도적질하려 합니다.

거짓말과 불필요한 두려움으로 우리를 속이려는 사탄은 얼마나 교묘한지요. 요셉이 죽임을 당했다는 거짓 통보를 야곱이 들었을 때, 그것이 거짓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은 그를 절망으로 병들게 했습니다. 요셉은 살아서 축복받고 있었지만, 그 모든 세월 동안 거짓을 믿어온 그의 아버지는 슬픔과 비통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의 두려움은 믿는 자로부터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과 확신을 도적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오직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적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강한 확신 가운데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거짓말로부터 우리를 방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의 증거를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이 지연될수록, 마침내는 더 완벽한 것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셔도 됩니다. 또한, 침묵이 깊을수록, 그 응답은 더 크게 들려올 것입니다!

우리 인내의 결핍은 기도 응답으로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도 골방을 나오면서도 우리는 계속 길을 헤쳐나갈 준비가 이미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말 기도 응답을 해주시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충격 받을 것 같은 태도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팔에 자식을 안을 때까지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까? 모든 믿음의 기도는 그것이 드려지는 순간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방법과 그분의 때에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는 동안 그분은 우리가 언약의 성취를 기다리면서, 그 순전한 약속 안에서 기뻐하며 소망의 향연을 즐기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한편, 거절당하는 기도는 사랑의 친절한 포장에 담아 주십니다. 우리가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그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히브리서 10:36) 

2013년 8월 8일 목요일

기도와 순종

때로는 우리가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분이 우리를 지원하며 우리가 간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부유한 친척이나 되는 것처럼,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우리는 손을 들고 기도하지만 다시 그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우리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분은 모든 능력을 가지셨고, 나에겐 아무 힘도 없어. 그러니 나는 그저 잠잠히 있으면서 그분이 일하시도록 해야 해.”

그것이 좋은 신학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문 앞에 게으른 거지들을 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일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자선을 베푸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우리의 눈물에 수고를 더하는 것은 절대 비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비밀스런 욕정을 정복하기 위한 기도를 한다 합시다. 당신은 그것을 기적적으로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단순히 기도하고는, 그 욕정이 저절로 없어지기를 기대하며 그냥 가만히 앉아 있나요? 여호수아의 경우처럼, 그 어떠한 죄도 인간 스스로 극복해보려는 협력 없이는 마음에서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패전에 대한 상심으로 납작히 엎드려 밤새도록 슬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으키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네가 이렇게 네 얼굴을 대고 있느냐?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고,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언약도 어겼나니,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라.” (여호수아 7:10-13)

하나님은 우리의 꿇은 무릎을 일으켜 세우실 모든 권리를 갖고 계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게을리 앉아 기적만 바라느냐? 내가 너희에게 악은 무슨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명하지 않았더냐? 네 탐욕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도만 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너도 그것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는 명을 받았다. 너는 명해진 모든 것을 다 행할 때까지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순종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지 않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당신은 그분의 과실이라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신성 모독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의 장본인은 당신 자신인데도 말입니다.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지연되고 응답되지 않는 기도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4:3)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더하게 하거나 우리의 유혹을 부추기는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탐욕을 품고 있는 자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기도의 응답은 우리 마음으로부터 악함, 탐욕, 그리고 끈질긴 죄를 없앨 수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생각하면, 주께서 내게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편 66:16)

우리의 간구가 탐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한 점검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 비결은 우리가 지연되고 있거나 응답되지 않는 기도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습니다. 탐욕에 기초한 기도는 성급한 응답을 요구합니다. 만일 탐욕스러운 마음이 바라던 것을 빨리 얻지 못하면, 그 마음은 훌쩍이며 울다가 졸도하고 기절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귀를 막았다고 비난하면서, 원망과 불평의 쓴소리를 내뱉습니다.

“우리가 금식하였으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사야 58:3)
탐욕으로 가득한 마음은 그분의 거절과 지체하심 가운데서 그분의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죽음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구해달라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거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 요구를 거절하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저는 몸서리가 쳐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공의 안에서, 모든 이기심과 탐욕이 제거될 때까지 우리 기도의 응답을 늦추거나 거부하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이 저지를 받는지에 대한 어떤 확연한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탐욕이나, 또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죄의 결과일까요? 오직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그분의 거룩한 산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었습니까? 모든 죄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만이 하늘문과 축복의 통로를 열리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대신 여러 상담가를 분주히 찾아다니며 절망, 공허함 그리고 불안감 등을 잘 견디게 해주는 도움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죄와 탐욕이 온전히 제거되지 않는 한 그러한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죄는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순복하며 모든 감춰진 죄를 버릴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 See more at: http://sermons.worldchallenge.org/et/node/23885#sthash.dW75Lsga.dpuf

2013년 8월 6일 화요일

상납 되지 않는 기도

우 리는 무엇이든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무작위로 기도해서도 안 되고,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사고와 아무 생각 없는 횡설수설을 터뜨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런 분별도 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간구를 수락하신다면, 결국은 그분의 영광을 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기도에도 법칙이 있는데, 이 법칙은 신실하게 간구하는 자들이 확신 가운데 구하는 것을 가능케 해주는 동시에, 자기중심적 기도를 선별하게 해 줍니다. 달리 말하면, 그분의 뜻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안에서 가지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가 우리를 들으시는 것이라.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가 들으시는 줄을 안다면, 우리가 그에게 구한 요청들을 받은 줄도 아느니라. (요한일서 5:14)

제자들이 앙심을 갖고 기도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간구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이 내리도록 명하여, 마치 엘리야가 한 것처럼 그들을 살라 버리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주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희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알지 못하고 있도다.’” (누가복음 9:54-55)

비통 가운데서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는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조급하게 되어 말을 내지 말라.” (전도서 5:2)

다니엘은 올바르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먼저 말씀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찾았습니다. 그런 다음, 명확한 지침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후, 강한 확신으로 하나님의 보좌로 달려갔습니다. “내가 내 얼굴을 주 하나님께 향하여 두고, 기도로 구하고” (다니엘서 9:3)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너무도 잘 알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아주 조금밖에 모릅니다. 그분의 뜻에 어긋날 때, 우리의 기도는 상납 되지 않을 것입니다.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은혜, 그리고 우리의 노력 by Gary Wilkerson

제게는 주님과의 동행에서 실족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가동되는 자동 시스템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은 그분과의 연합을 재정립하기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지하는 대신, 행위에 의지하는 제 성향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우리 대부분이 그러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울이 신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재차 강조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매 서신마다 그는 주님과 우리와의 올바른 관계를 위한 은혜의 충분함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을 만회하려고 행위로 향하려는 충동인, 이 본능적 자동 시스템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합니다. 제가 은혜에 대해 그토록 자주 설교하는 이유는, 그것이 제게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때로는 제가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생각함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묻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다면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은혜의 언약 안에서, 어떤 부분을 우리가 담당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우리 대부분에게 있어서 은혜의 개념은, 우리들 실제 삶 속에서 아무런 능력 발휘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과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소중하고 값진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하거나 실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족할 때 우리는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어 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어처구니없어하며, 그러한 우리를 보고 애석해하며 머리를 젓고 계신 그분의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우리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며, 갑절 더 열심히 기도한다든지, 더 많이 성경 말씀을 읽는다든지, 또는 더욱 열심히 사역에 전념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데에 그러한 노력은 아무 소용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진정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한 시간보다는 두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을 그분이 원하실까요? 우리가 더 바빠지는 것을 정말로 그분이 원하실까요? 

그 렇게 우리 자신을 구해보려는 노력으로부터 오직 두 가지 열매가 맺힙니다. 첫 번째 열매는, 우리 자신의 죄성을 대면하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보다도 훨씬 더 나쁜 두 번째 열매는,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샘물로부터 마실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딜레마를 교회들로부터 일찍이 경험했습니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맞섰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서 3:1-2) 바울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너희는 십자가 보다 너희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정말 생각하느냐?” 

2013년 8월 2일 금요일

이스라엘을 소란케 하는 자들

오 늘날 하나님 집에서 실제로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교회의 가증스러움으로 인해 한숨짓고 탄식하는 엘리야 군단일까요?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죄를 폭로하며 그들의 악행을 참소하는 자들일까요? 아니면 시온에서 안주하는 자들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분열의 원인은 타협입니다. 하나님 집에서의 모든 문제는 주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그것을 저버린 결과의 부산물입니다. “이는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3:16)

바울은 형제들에게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고 경고합니다. (로마서 16:17) 그러나 “배운 교리를 역행하는” 자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다름 아닌 그저 “자기 배(이익)만을 섬기는” 이기적이며 타락한 무리였습니다. (18절) 이 말씀은 분열이 자신의 잇속만 차리는 교만과 자만에서 비롯됨을 증명해 줍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의심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속이느니라.” (18절) 죄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 악행을 간과하면서 연합을 부르짖는 자들이 진짜 분열 파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지체에는 절대 분열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거룩한 연합 가운데 있는 자들은 이미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죄가 바로 분열의 원인인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성읍을 “심히 소란케 한다”는 죄목으로 빌립보 성의 행정관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사도행전 16:20) 그들이 일으킨 분쟁의 결과로 그들은 매를 맞았으며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극심하게 소란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점을 쳐줌으로써 자기 주인들에게 상당한 수익을 얻어준” 소녀로부터 점치는 영을 쫓아주었습니다. “그 소녀의 주인들이 보니 자기들 수익의 희망이 없어진지라, 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사도행전 16:16, 19)

어떤 식으로든 자기 유익이 위협받았을 때 불평 소리는 더욱 거세집니다. “분쟁 파들이다! 분열이다! 연합의 위협이다!" 바울과 실라는 종교적 사기놀음과 종교를 가장한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했습니다. 그 속임수는 분별력 없는 군중을 조종할 줄 아는 소수 사람들에게는 매우 수익성 있는 책략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분열"이라는 참소의 소리를 높였나요? 바울과 실라가 했던 일은 정결케 하는 부흥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불화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바울과 실라를 참소한 자들에게는 이면에 숨은 동기가 있었으며, 그들은 회개와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거부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 종교적 위선과 불순종에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소란케 하는 자들을 우리에게 더 보내주시옵소서! 

2013년 8월 1일 목요일

선지자 엘리야

엘 리야는 선지자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과 마음이 타락한 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만 보기를 원했습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비록 죄에 대한 그들의 비난은 신랄하다 할지라도, 자비롭고 친절하며 오래 참는 심장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참된 성서적 회심을 보게 되면, 그들은 무너졌던 곳을 재건하고 회복시킵니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증오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의 강렬한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는 결코 사람을 증오하는 자가 아니었고, 대신 죄를 증오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보복을 좋아하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원하는 심장을 지닌 자였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에게 임했던 성령과 권능을 이해하려면, 갈멜 산에서 그가 부르짖었던 이 비통한 외침을 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오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말을 들으사 주께서 주 하나님이신 것과 또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신 것을 이 백성이 알게 하소서 하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열왕기상 18:37-39).

저는 진정한 목자들인 엘리야 군단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역자가 타락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영광만 추구하는 자들은 아닙니다. 저는 무심한 양들에 의해 상처 입고 거절당하고 있는, 더 많아져만 가는 거룩한 목자들에게서 듣고 있습니다. 어떤 목자들은 거룩의 기준에 대해 설교했다는 이유로 그들이 섬기는 교회로부터 말 그대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일은, 그 안에 자비도 없고 구원적 가치가 결여된 차가운 “예언적 음성”으로부터 나온, 소위 '예언'과 '맹렬한 비난'들입니다.

만일 당신이 아무에게나 저주를 선포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그가 그리스도의 성령과 동행하는 자가 아니라고 확신해도 됩니다. 그는 오만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으며, 대부분은 교만에 빠져서 자신이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을 분명히 합니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14) 계속 저주의 말만 내뱉는 자들은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두렵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것이 그에게 닥치게 하시고, 그가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이 그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소서. 그가 옷을 입듯 저주로 자신을 덮었으니, 그것이 물같이 그의 창자 속으로, 기름같이 그의 뼈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시편 109:17-18)

엘리야 군단은 통곡하는 자들과 그 눈물로 적셔진 입술에서 나오는 예언적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통함과 경건한 슬픔 가운데, 그들은 회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를 간과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해 일어설 때가 오면, 그 어떤 사람도, 어떤 마귀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