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1일 목요일

이세벨의 영

이 세벨의 영은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경건한 예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또한 그가 어떻게 그 모든 대언자들을 칼로 죽였는지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에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네 생명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욱더 내리기를 원하노라.” (열왕기상 19:1-2)

이세벨 교리에 의해 묶여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들을 전혀 유념치 않습니다. 아합이 갈멜 산에서 벌어진 초자연적 권능의 놀라운 광경 모두를 말할 동안 아무런 감동이 없었던 이세벨처럼, 그들은 냉담하게 앉아있습니다. 이세벨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그녀는 더 확고부동해졌을 뿐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세벨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들과 그 희생자인 아합과 같은 자들은, 성령의 책망, 또는 회개와 거룩의 메시지에 마음이 열려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듣고도, 그들의 교리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완강해져서는 여전히 그들의 길을 갑니다. 그들 눈앞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거짓 선생과 이세벨 교리의 가장 뚜렷한 증거는, 예언적 경고를 멸시하며 심판에 대해 듣는 일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비관적 전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비웃고 멸시하며 조롱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목자들을 눈먼 바보라고 말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이 듣지도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악한 마음이 꾀하고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 뒤로 물러가고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 7:24)

이세벨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자기들이 선지자라고 자칭합니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 선지자를 분별하는 잣대가 있습니다. 이세벨의 선지자들은 오직 좋은 것들, 즉 평화와 번영만을 예언합니다. “또 내가 예루살렘의 대언자들에게서도 무서운 일을 보았노라. 그들은 간음을 행하고 거짓 속에서 걸으며 또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손을 강하게 하여, 아무도 자기의 사악함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게 하나니, 그들이 곧 그들 모두가 내게는 소돔 같으며 그것의 거주민들은 고모라 같으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주가 그 대언자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 예루살렘의 대언자들로부터 나와 온 땅으로 들어갔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고 쓸개 물을 마시게 하리라.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에게 대언하는 대언자들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드는 자들이니, 그들은 주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 계시를 말하느니라.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이르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셨다 하며, 또 자기 마음에서 상상하는 대로 걷는 모든 자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 23:14-17)

이세벨의 영을 가진 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악함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꿈을 말하며 설교단에서 어리석게 행동합니다. 

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가장 큰 기만

현 대 교회에서의 가장 큰 기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탐욕을 승인하는 배지를 붙여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이세벨 교리가 그럴듯합니다. (열왕기상 21:14-16) 그것은 아합이 원하는 것을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가 그의 권리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을 대적한 대 반역자가 돌에 맞아 죽었을 때 그의 모든 소유가 왕에게로 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기를, 주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에 자기 조상들의 상속 재산을 그에게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며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빵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영이 어찌하여 이같이 슬프게 되어 왕께서 빵도 들지 아니하시나이까?... 왕이 지금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빵을 드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리이다.” (열왕기상 21:4-7)

이세벨의 교리를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최고의 왕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합에게 말했습니다. “아무 걱정 말아요! 내가 해결해줄게요.”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거짓 복음입니다. “속 태우지 마세요. 당신을 속상하게 만드는 욕구들 때문에 슬퍼하거나 가책하지 마세요. 내가 그것을 당신께 가져다줄게요.” 이세벨이 사용했던 기만적 방법들처럼, 이러한 교리는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오용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한 성가신 하나님의 선지자 때문에 그가 받은 것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디셉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아합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거기로 내려가 거기에 있나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죽이고 또 소유로 빼앗았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내 원수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너를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 (열왕기상 21:17-20)

아합이 그가 방금 취한 포도원을 걸어 다니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인생은 참 달콤해. 아, 이세벨 말이야, 그녀의 방식에 내가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는 확실히 해.” 그러나 그의 모든 발자국을 따라다니는 자는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물질주의적 이세벨 교리에 대립하여 크게 외치며, 그들의 노리개와 소유물을 즐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팔려갔습니다. 그들이 보지는 못하지만, 죄가 이 모든 것의 저변에 있습니다. 제가 번영의 교리에 맞서 외칠 때마다, 저는 엘리야의 영과 능력이 제게 임한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이 이세벨의 교리가 더 밝혀지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크고 분명한 예언적 목소리가 이렇게 외치는 것이 들려올 것입니다. “죄입니다! 당신은 죄에 팔려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비밀스런 죄에 대한 경고

이 세벨 교리의 세 가지 뚜렷한 특징은, 거짓 교리들의 모체이자 전형인 구약의 이세벨을 통해 전부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이름을, 무엇이든 악을 선이라고 가르치며 신성모독을 순수하다고 가르치는 교리인, 거짓 교리의 동의어로 지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이세벨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정결한, 도덕적인, 우상숭배가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며 교활하고 가증스러운 여인이, 죄가 없으며 도덕적이라고 불리는 것을 말입니다. 무언가 아주 나쁜 것이 좋은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정결”이라고까지 불리다니요?

어떻게 그녀가 정결하게 될수 있었겠습니까?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자기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더라.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 가운데서 걷는 것을 가벼운 일로 여기고… 이세벨을 아내로 맞으며, 또 가서 바알을 섬겨 그에게 경배하고…” (열왕기상 16:30-31) 아합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그 아비의 성격을 빼닮은”이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거짓 교리를 상징하고 아합은 그 피해자입니다. 성경은 아합의 마음이 죄와 우상숭배, 그리고 타협으로 구부러진 것으로도 부족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을 더욱 확증시킬 사탄의 영향력을 그의 삶 속으로 들여옵니다. “그러나 아합과 같이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부추겼더라.” (열왕기상 21:25)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비밀스러운 죄와 욕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성향은, 오로지 그들의 죄를 부추기고 확증시켜주는 거짓 교리를 포용하고 그것과 연합한다는 사실입니다. 아합에게는 이세벨이 절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최악을 드러내서, 그것을 확장시키고는 그를 파멸케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당신 안에 어떤 죄나 욕정, 또는 세속적 탐욕이 있다면, 당신의 최악을 드러낼 교리가 당신에게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로 인해 죄를 범했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해줄 위로의 메시지를 가진 거짓 선지자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책망하는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왕이 그 사람이니이다.”라고 외쳤던, 타협할 줄 모르는 나단 선지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악함과 선함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혼합이 없습니다. “또 그들은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할지니라.” (에스겔 44:23)

지금 우리에게는 악을 보고도 그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혼동되어있는 전체 아이들 세대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을 속였습니다. 그들은 보라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록 가수들이 변태성욕자들처럼 옷을 입고는 설교단에서 뻔뻔스럽게 성적으로 몸을 흔들어대는 것을 좋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혼외정사가, 상대방을 서로 사랑하는 한, 그리고 상대를 진실로 존중해주는 한, 괜찮은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죄의 변호인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진정한 오순절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에서, 성령의 능력을 입었던 이름없는 성도들에 의해 일어났던 교회사의 역사적 변동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와 이방인의 장벽을 초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맨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자들입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사도행전 11:20) 저는 이 장에 기록된 “그 중에… 몇 사람이…”라는 구절을 너무도 좋아합니다. 그 충직했던, 이름없는 성도들은 그들이 역사상 얼마나 중대한 업적을 남겼는지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2,000년 전에 일어났었던 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현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소규모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그분의 증인들이 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제가 얼마 전에 방문했던, 북인도에 위치한 도시 바라나시라는 곳에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젊은 여성도가 그곳에 갔을 때는 불과 일퍼센트도 안되는 인구가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하나씩 둘씩 전도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전도된 성도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 여성도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았고, 그 결과로 지금은,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언을 가진 수천 명의 열성적 성도들이 그 지역에 탄생했습니다. 그 여성도처럼, 세계 방방곡곡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끝까지 알리기 위해 성령께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제 부친 데이빗 윌커슨 목사는, 그가 1950년대에 펜실바니아의 한 작은 교회 목사로 섬겼을 때 가장 슬퍼했던 것에 대해 제게 수차례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오순절파 교회였는데 예배의식은 그 나름대로의 절차를 따랐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오르간을 연주했고 성도들은 전통적 성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일어나서는 방언으로 메시지를 전달했고, 곧 다른 성도가 그 메시지에 대한 방언 통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아버지께서 설교 말씀을 전하신 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앞제단으로 나와서 성령께서 내려와 주시기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답니다.

이 교회에는 구제활동도, 선교활동도 없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 교회에서 목사로 섬기셨던 몇 년 동안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전도되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구했으나,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오순절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 아버지의 이 비통한 기도가 그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주님, 만일 이것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라면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축복받기’ 클럽 모임이 바로 그것이라면 저는 상관조차 하기 싫습니다.”

아버지가 텔레비전 시청하는 일을 멈추고 대신 기도에 전념하실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오순절을 갈망함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이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지요. 그로부터 몇십 년 후에 발간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깡패)’는 수백만 부가 팔렸고, 세계 전 지역의 천군데도 넘는 십 대 청소년 챌린지 센터는 버림받고 상처받은 청소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이세벨의 교리

요한계시록 2장 18~29절을 읽어보시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이세벨의 교리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이세벨이라는 그 여자를 용납하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를 가리켜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0) 이세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가짜선생”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입니다. 확실히 그녀는 거짓 교리의 표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한 모든 자들에게…” (요한계시록 2:24) 라고 말씀을 계속하시며 그것에 대해 명백히 밝혀주십니다.

여기에 많은 선행과 구제를 하며 믿음과 인내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훌륭하고 칭찬받을만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 매우 위태로운 것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유혹적인 나머지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심판을 보내셔서 그들을 모든 교회의 교훈으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사탄에게 팔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행과 구제, 섬김, 믿음, 그리고 인내는 거짓 교리의 유혹에 가려졌습니다. 그들은 거짓 가르침의 주술 아래 있었고, 진리의 말씀인 양 분장하고 나타났던 그 가르침은, 실제로는 악이었던 것입니다.

그릇된 가르침 아래서 배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눈은 교회를 꿰뚫어보고 계시고, 이러한 끔찍한 유혹으로부터 그분의 백성을 구해내기 위해 이미 경고하셨고 폭로하셨습니다. 당신이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고 누구 설교를 듣고 있으며, 당신이 흥미로워하는 가르침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참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유혹당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가 어떤 새롭고 이색적이며 이상한 가르침에 “끌려다녔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여러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다니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히브리서 13:9) 그 뜻은, 이 세미나에서 저 집회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근거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들의 귀는 항상 무언가 새롭고 선동적이며, 무언가 흥미롭고, 무언가 그들의 혼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을 듣기를 갈망합니다. 우리 타임스퀘어 교회에도 그러한 자들이 나옵니다. 분주히 나다니며 교리의 바람을 따라 굴러다니는 인간 검불덩어리들 말입니다. 그들은 이 아테네 사람들과 흡사합니다. “모든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있던 나그네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것 외에는 자기들의 시간을 달리 쓰지 아니하였더라.” (사도행전 17:21)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두고…” (디모데후서 4:3)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낙심과 좌절

무력함, 비탄, 곤경, 애통함—이 모든 것들은 다윗의 영혼을 절망케 했습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듯, 그저 방향을 잃은 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내 눈의 빛으로 말하건대, 그것도 나를 떠났나이다.” (시편 38:10)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적인 명철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전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저는 다윗의 심정이 어땠는지 너무도 잘 이해가 됩니다. 저는 한때, 수천명의 영혼이 한꺼번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복음 전도 부흥회를 인도하곤 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제 지난 삶은 너무도 풍요로운 축복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러한 부흥집회를 마친 후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빈번히 좌절감으로 압도당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위해 성취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낙심의 영이 하는 짓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커다란 영적 승리 후 순식간에 우리를 과녁하는, 지옥 권세의 타겟이 되게 합니다!

이 지독한 악령이 다윗을 너무도 무겁게 짓누른 나머지, 그는 하나님 전에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처럼 내가 듣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사오며, 내 입에 꾸짖을 말이 없나이다.” (시편 38:13-14)

이곳 마지막 구절의 히브리어 의미는 “더 이상의 답변이나 할 말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너무도 낙심되어 당신을 향해 손도 올릴 수 없습니다. 제가 너무도 혼란스러워서 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탈진되었고 공허합니다.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다윗은 낙심의 공격을 이겨내는 정의로운 영혼의 부르짖음을 대대적으로 공개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제 머뭇거리게 되었고, 내 고통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며.” (17절)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히브리어로는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이것이 분명 제 마지막이고, 저는 넘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낭패한 심정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죄와 어리석은 실수로 인한 절망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져버렸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다윗은 좌절했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의 믿음을 지켰던 자로서 우리의 표본이 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다윗은 자신이 불신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주께 소망을 두었사오니,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들으시리이다.” (시편 38:15)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참 좋은 말씀

우리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자녀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녀들을 대적하는 어떤 마귀의 공격도 그 계획을 변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과 고뇌, 그리고 아픔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 미래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일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게 될 계시와 우리가 즐기게 될 유용성, 우리가 볼 열매, 그리고 우리가 소유하게 될 기쁨과 평강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참 좋은 말씀”을 갖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고린도전서 2:10)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으신 일들에 대한 “참 좋은 말씀”을 우리에게 선보이시기를 열망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령이 그 좋은 말씀을 품고 계신 전달자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우리의 의기소침한 영혼에 날개를 달아주실 것이며, 마침내 우리는 마귀의 올무를 박차고 독수리처럼 날아오를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놀라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성령의 일은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고, 우리의 일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비록 낙심해있다 할지라도 지금 바로 기도 골방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세요. 비록 당신에게 말할 힘조차 없어도, 이 기도를 하며 영으로 그분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성령이 제 안에 거하고 있음을 압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로해주시고, 저를 강하게 만들어주시며, 제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계시해주시기 위해 성령님을 제게 보내주셨음을 압니다. 저는 지금 단순하고도 어린아이와도 같은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갑니다. 제게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으니 제 마음에 위로의 말씀을 주시옵소서. 제 영혼을 들어 올려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당신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이 지나고 있는 그 시험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믿음은 정금과도 같이 시험받고 단련되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해주셨던 모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우리가 좌절할 때

우리가 좌절할 때 성령께서 주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예수님의 소중한 언약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일입니다. 그분은 제게도 그렇게 해주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 언약의 말씀으로 제 영혼을 홍수처럼 적셔주셨습니다. 그분은 “이게 네 삶의 전부가 아니다.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네 삶의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성령의 일은 원수의 거짓말을 말소시키고 하늘로부터의 권면을 가져다줍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당연히 책망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날마다 그분의 임재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우리 주님을 슬프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기도로 나아갈 때 우리는, 자비로운 아버지로부터 좋은 말씀을 들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는 과거 수년 동안 기도 골방에 들어갈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을 것을 예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분은 제게 더 나은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성한 책망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 기독교 종파가 있습니다. 그들이 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메시지만 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리스도와 신약성서 저자들이 언급했던, 죄에 대한 모든 책망과 생명수와도 같은 꾸짖음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교회들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은혜를 설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죄짓는 허가증으로 남용합니다.

제가 이 메시지를 그러한 자들을 향해 쓰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짓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승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지속적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그분과의 친교를 즐기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당신을 묘사한다면, 또한 그러한 당신이 침체되어있거나 우울증에 빠져있다면,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공격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자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언약의 성취를 받을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사야 64:4)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9-10)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능력 입혀주심 by Gary Wilkerson

“제자들에게 능력을 입혀주실” 거라는 그분의 언약이 (누가복음 24:49 참조) 사도행전 시대의 교회에서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서 그것이 멈춰진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목회자나 지도자, 방송인, 저자 등 누구든 “강단”에 서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과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회중에게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실까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 성도에게, 주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성령의 능력이 입혀지고 있는 걸까요? 만일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여기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8:1) 이 구절에 의하면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모든 성도는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때,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사도행전 8:4-5) 그때 복음 전파를 위한 새로운 능력도 함께 풀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빌립이라고 불리는 자가 평신도였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 표적과 기사가 뒤따랐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었고 불구자들이 고침을 받고 기쁨으로 뛰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가 그러한 일들을 목격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왔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는” 것을 (사도행전 8:8) 보게 되었습니다. 온 도시가 하나님의 기쁨으로 감동되었던 장면을 보았던 것이지요! 단 한 명의 평신도에 의해 일어났던 일로서는 무척이나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다메섹에 살고 있었으며 예수님을 따랐던 자, 아나니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성령으로 충만했었으며 어려운 과제를 감당해야만 했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한때는 악명높은 그리스도인의 핍박자였으며 교회를 대적하며 격노했던 사울(바울)의 증인으로 서게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선으로 불려 나갔고, 만일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듣지 못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너무도 절박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짐으로써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불현듯, 아나니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철천지원수라고 자청했던 자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 후 사울의 변심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건이지요. 역대에서 가장 유명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된, ‘사울’의 ‘바울’로의 전환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의 사건일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에 신약성서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서신을 집필한 저자가 되었습니다.

2013년 10월 9일 수요일

경청에 대한 교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경청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호렙 산 꼭대기에 데려다놓고 실 예로 설교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11-13).

바람이 윙윙거리며 불기 시작할 때 나는 엘리야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에세벨을 왕좌에서 날려 버리십시오. 그녀와 그녀의 죄인 친구들을 바람에 던져 버리십시오. 그들 모두 날려 버리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은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자 엘리야는 말했습니다. “이 지진이 그들을 몹시 두렵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복하실 것이다. 그들의 신발이 내팽개쳐 지도록 그들을 흔들어 놓으실 것이다! 주님, 당신이 당신의 종을 신원해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는 불이 있었습니다! 희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하늘이 빛났습니다! 엘리야는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그들은 제단위에 떨어진 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태워버리십시오! 사악한 아합을 태워버리십시오! 이세벨을 구워버리십시오. 당신의 불이 사악한 자들을 멸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당신이 이 불속에 계신 줄을 나는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12절).

이것이 상상이 가십니까? 태풍이나 지진이나 하늘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던 선지자가 세미한 소리에 겁을 냅니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었습니다(13절).

엘리야는 겉옷으로 자기의 머리를 감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선지자는 하나님께 여러번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이 그를 강력하게 사용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이 낯설었습니다!

홀로, 조용히, 모든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떠나 엘리야가 드디어 그 음성이 말씀하시도록 허용했을 때 그의 사역 사상 가장 상세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하고...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하고...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5-16 참조).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바쁜 자녀들이 그 음성을 자신들에게 들리도록 한 적이 없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간증하느라, 선행하느라, 영적 각성을 위해 기도하느라, 금식하느라 분주합니다. 아주 열성적으로, 헌신적으로.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음성만은 듣지 못했습니다.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예수님의 마음속 일별하기

“너 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눅 17:7-8).

우리는 주인에게 수종드는 하인과 동일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찬양으로 가득한 테이블- 훌륭한 예배의 잔치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주님을 섬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 드리는 일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요 최고의 성취입니다.

한데 마지막 부분, 즉 주님의 부분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 후에 먹으라!”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섬기면서 체험했던 동일한 기쁨을 그분도 누리시도록 하기 위해 그분을 섬겨드린 후에 앉는 법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해드리는 일로인해 충분히 기뻐하신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시고 우리가 회개할 때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에 대해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우리의 어린아이 같은 신뢰에 대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가장 필요로 하시는 것은 자신이 지상에 남겨둔 자들과 일대일로 교제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늘의 어떤 천사라도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쟁터에 있는 자들과 말씀하기 원하십니다.

나는 어디서 그리스도께서 외로우시고 절실하게 말씀하고 싶어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방금 부활하셨고 바로 그날,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신 주님에 대해 슬퍼하고 있었으나 주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이야기해줄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15, 27).

이 제자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체험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갔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기쁨에 대해 생각 하지만 예수님의 기쁨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눈물이 영광을 받으신 그분의 두 뺨에 흘러내리고 그분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분은 충만해졌고 그분의 필요는 충족되었으며 나는 그분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분은 사역하셨고 영광을 받으신 형체로 그분의 첫 상호 교제를 체험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부으셨으나 그분의 외로운 마음은 어루만져졌고 그분의 필요는 충족되었습니다. 

2013년 10월 7일 월요일

시험을 이기는 법

시 험을 견디어 내고 굴복하지 않는 능력은 성경구절들로 우리 마음을 채우거나, 맹세하거나, 약속을 한다거나, 오래 동안 기도나 금식을 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을 위대한 영적인 목적에 드린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은 크리스천들의 성장을 위해 칭찬 받을 만하고 정상적인 일들이지만 우리의 승리는 이것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 하에서라도 견디어 낼 수 있는 단순한 비결은 사탄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깨뜨려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마귀를 무서워합니다. 귀신들로 인해 겁에 질립니다.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취향과 습관이 변경될 수 없음을 두려워합니다. 잠재적 욕망들이 폭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통제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일반인과 달리 정욕으로 가득 차 도울 길이 없는, 천명에 한 사람 정도 있는 사람이 아닐까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버릴 수 없으므로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사탄이 갖고 있지 않은 능력을 그의 능력으로 인정합니다. 인간은 부르짖습니다, “나는 중독되어 멈출 수가 없다! 주문에 빠져 마귀의 권세아래 있다. 마귀가 나를 이렇게 하도록 만든다!”

두려움은 심한 고통입니다. 당신이 마귀를 두려워하는 한 어떤 시험의 권세도 결코 깨뜨릴 수 없습니다. 사탄은 두려움 위에서 승승장구하고 마귀를 두려워하는 크리스천들은 저항할 능력이 거의 또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거짓말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탄이 중압감에 눌려있는 크리스천들을 파멸시킬 권세가 있다는 거짓말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보혈로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배하는 마귀의 모든 권세를 파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는 가끔 왜 하나님이 영적인 사람들이 그토록 시험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지에 대해 궁금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고전10;13)는 대신 모든 시험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실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일단 당신이 사탄이 얼마나 힘이 없는가를 알게 되면-사탄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이 배우게 된다면-하나님은 당신이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시는 모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면-그때부터 당신은 사탄이 당신에게 어떤 것을 쏘아 대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실족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굴복하게 만드는 마귀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 가운데 “안식”의 장소에 이를 때 까지 우리는 계속 시험을 당할 것입니다. 이 안식이란 하나님이 사탄을 패하게 하셨고 사탄은 우리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청구할 것도 없으며 우리가 불속에서 단련된 정금처럼 나올 것이라는 것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말합니다. 

2013년 10월 4일 금요일

충만한 계시

왜 모세는 그리도 간절히 하나님 영광의 계시를 사모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이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기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과 만나리니, 성막이 내 영광으로 거룩하게 되리라.” (출애굽기 29:43) 여기서 “거룩하게 되다”는 “정결하게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모세, 너와 백성들이 내게 예배할 때, 내가 너희를 만나줄 것이며 내 임재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내 영광을 너희에게 드러낼 때, 그것이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능력 있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와 씨름하며, 자유케 되고 정결케 되기를 열망하는 모든 자에게 희망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 성전은 내 영광의 계시로 정결해질 것이며, 그 계시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너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들어가야지만 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속 증가되는 예수의 계시를 우리에게 반영되도록 허용할 때, 우리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유리를 통해 보는 것같이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는 우리 모두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똑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느니라.” (고린도후서 3:18)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우리 삶을 지켜주는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는 모든 영광 위에 덮개가 될 것임이라.” (이사야 4:5)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삶의 가장 험난한 시기에도 우리를 정결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거짓말할 것입니다. “너는 패배했어! 너는 속이고 거짓말하며 행음하는 자야.”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사탄아, 그렇지 않다. 내게는 대제사장이 계시고, 나는 그분 영광의 계시로 정결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분 성품에 대한 모든 것을 드러내셨을 때,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출애굽기 29:43) 에 대한 완전한 계시도 함께 주셨습니다. 아사랴 선지자는 아사 왕이 가장 번영하고 있을 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너희가 주님과 함께하는 한, 주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고, 너희가 그분을 찾으면 너희를 만나 주실 것이나, 만일 너희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역대하 15:2) 달리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시하면, 그리고 죄와 타협하며 주님을 등한시하면, 그분은 너를 정결케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 아들을 알기 위해 시간을 보내라! 기도 골방에서 내 말씀을 찾으며 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네가 내 임재 안에 거하게 되며, 네 눈은 나의 영광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사랑, 은혜, 자비, 선하심의 충만한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실현되었다.” 

2013년 10월 3일 목요일

그분 임재의 나타나심

모 세는 하나님께 그분의 지속적 임재의 나타나심을 구했습니다. “나로 주를 알게 하시고…” (출애굽기 33: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나의 임재가 너와 함께 가며, 내가 너에게 쉼을 주리라.” (14절)

모세의 간구가 대부분의 성도에게는 매우 만족할만한 간구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축복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원합니다. 사실 어떤 성도가 그 이상의 것을 갈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마저도 모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출애굽기 33:18)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이한 빛을 발하는 구름으로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지축를 흔드는 권능의 전시로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분 성품의 단순한 계시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셨습니다. “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선포하시기를 ‘주로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출애굽기 34:6-7)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선하심, 자비, 그리고 사랑과 긍휼의 계시였습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와, 지난밤 우리 교회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웠는지요! 엄청난 찬양이 올라갔고,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 강타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영광의 나타나심의 증거는 아닙니다. 과열된 인간의 감정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논쟁할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체험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이 하나님 영광의 실현이지 않았습니까? 그곳에는 엄청난 빛도 있었고, 모세와 엘리야의 기적적 출현도 있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나 엘리야에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빛의 장관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그분의 영광은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은 빛처럼 희어지더라… 보라, 구름 속에서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7:2, 5)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여기—그리스도 안에, 나의 전형적 영광이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 즉,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하시며,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그분 성품의 실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에 내 영광의 실존하는 형상이 있다. 그 모든 영광은 내 아들 안에서 구현되었다!” 

2013년 10월 2일 수요일

그분 임재의 구름

이 스라엘이 광야에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름을 통해 그분의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구름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하나님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그 임재의 구름이 내려와 성막을 밤낮으로 덮었고, 그들의 모든 행사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름이 이동하면 그들도 이동했고, 구름이 머무르면 그들도 머물렀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나아갈 방향이나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시적 하나님 임재의 구름에 그들의 신뢰를 두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와 동일한 그분 임재의 구름이 당신의 기도 골방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 임재는 그분의 평강으로 당신을 감싸기 위해 날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임재하심은 당신을 이끌어주고, 권능을 부여해주며, 평강을 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대인관계도 상세히 인도해줄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 골방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샤워 중이라도, 버스나 지하철 속이라도, 아니면 출퇴근 시간도 좋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차단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30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경배합니다. 지금 이 시간이 당신과의 교제시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모든 것을 차단시키고, 지속적 기도생활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간구하며 기도하는 종이 될 때, 그분의 임재가 당신 삶 속으로 침투해서, 기회의 문을 닫고 열어주시며, 그분의 신성한 방법으로 당신 삶 전체를 다스릴 것을 약속하십니다. 한편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을 그분 영광의 계시 안으로 이끄실 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영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들 삶 속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압니다. 그러나 소수만이 그분의 영광을 압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그 차이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구름이 회중의 장막을 덮었으니, 주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우더라.” (출애굽기 40:34)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기록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하나님 임재의 구름 아래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항상 하나님 은혜의 장막 아래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는 것과 그분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2013년 10월 1일 화요일

온 마음 다해

하 나님께서는 온 마음 다해 그분을 찾고자 결심한 자들에게 확실하고도 특별한 약속을 해주십니다. 그 약속 중 하나가 그분 임재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매우 조건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언약의 규칙을 준수한다면,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 임재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명확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하는 자가 되어, 그분의 엄청난 임재가 우리에게 부어진 나머지 그것이 만민에게 보여지고 알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제사장 엘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그분 임재의 언약을 밝히셨습니다. 그 당시 엘리는 타락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와 타협을 허용하고 있는 그를 경고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모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무명의 선지자는 엘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참으로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서 영원히 행하리라고 말하였으나, 이제 주가 말하노니, 결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하는 자들을 내가 존중하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내가 소홀히 여기리라.” (사무엘상 2:30)

“소홀히 여기다”라는 표현은 하나님 임재가 거두어진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그 자신의 육의 힘으로만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네 집을 축복하며 네게 은총 베풀기를 원했다. 그러나 너는 죄에 대해 관대해졌으며, 욕정을 허용하고, 나를 뒷전으로 하며 나를 멸시했다. 이제는 내 임재를 네게서 거두어가겠다.”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대단한 믿음의 열정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열정은 수그러들고, 주님을 등한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계명을 “소홀히 여기고” 그들의 이전의, 죄악의 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여전히 그들과 함께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며 망상입니다. 당신이 만일 그분을 저버린다면, 그분도 당신을 저버릴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