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금요일

회개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크리스천들은 회개라는 의미를 단순히 “돌아선다” 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반대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회개가 이보다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회개(repent)”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하나님께 지은 죄를 자각하고 반성하며, 깊이 뉘우치며, 후회하며; 방향을 전환하고자 하는 마음” 입니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점은 “하고자 하는(want)” 이라는 부분입니다. 진실된 회개는 변화하고자 하는 갈망을 포함합니다.

그저 미안해하고 후회하는 것이 회개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진실로 애통하는 마음이 회개할 수 있게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장 10절)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근심은 후회가 없는 근심, 즉 회개자의 삶에 박혀 진심에서 나오는 애통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애통함은 자연적으로 회개를 가져오고 그는 죄를 증오하며, 하나님에 대한 의로운 두려움 그리고 부정을 의로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바울사도가 믿는이들에게 회개를 설교한 것이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한 설교자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하나님께 풍성한 축복을 받았지만 그들의 교회는 여전히 죄악된 삶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린도후서 12장 12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먼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20절에 보면, 바울은 그들에게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내가 갈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바울의 두려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21절)

이러한 애정 어린 마음의 목자가 세상과 타협하는 고린도의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죄악된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잘 배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죄와 타협하는 성도들을 사랑으로 대하였고 설교를 전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방문할 때에, 여러분은 근심에 차있는 제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것이고 내 목소리는 슬픔으로 흐느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부정하고, 음란과 정욕에 빠져 죄악된 삶을 지속한다면 저는 낙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에 복음이 진정으로 박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여러분에게 회개하라고 외칠 것입니다!”

2014년 2월 27일 목요일

유월절 날에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인 회중에게 설교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장 37-38절)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그저 “믿고 구원받으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그저 예수님을 선택하도록 하는 결정을 부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먼저 외치고 그리스도에게 순복하여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인 아덴사람들에게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무슨 복음을 전했습니까?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사도행전 17장 30절)

여기서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어려움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취미가 많은 신을 “믿는 것” 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어떤 한 신에 대하여 설득조로 설교하기 시작하면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아직도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저 믿는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여러분의 여러 신의 목록에 추가시키고 마는 정도는 합당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모두를 믿을지언정 예수님과의 관계는 결코 그렇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정결케 하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 이후에,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이 같은 회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사도행전 26장 19-20절)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 다는 회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진실된 회개는 그에 대한 행동의 변화로 입증됩니다!”

이러한 구절은 사도시대의 교회에서 부끄럼 없이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외친 같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속죄를 위하여 회개를 하라!”

2014년 2월 26일 수요일

회개에 대한 설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난 후에 처음으로 한 설교가 무엇입니까?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장 17절)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기도 전해 회개하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장 14-15절).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회개하고, 믿으라.”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그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장 13절). 그리고 나서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 13장 3절).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회개입니다!

세례요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 회개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유대인을 향한 세례요한의 설교는 단순하고 직선적이었습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3장 1-2절)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외쳤습니다. “메시야가 우리에게 곧 나타나실 것이니, 당신은 그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식에 그저 신이 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도 죄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정결하고 거룩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은 죽은 자의 뼈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독사의 세대입니다[마태복음 3장 7-12절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따르기 전에 당신의 죄를 먼저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시고, 당신의 죄로부터 떠나 진실한 변화를 반영하는 삶을 사십시오!”

2014년 2월 25일 화요일

사랑으로 행동할 떄

“너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누가복음 6장 36절)

이 구절에서의 “자비(mercy)”라는 단어의 기원은 “고통(misery)”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misericordia 에서 기원하였습니다. 이 단어의 진의는 “다른 이의 고통을 위로와 고통경감을 목적으로 마음으로 새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자비롭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떠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입니다. 얼마나 많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통과 슬픔을 떠맡으시고 위로, 평안 그리고 용서로 되갚아 주셨습니까? 얼마나 자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눈물을 닦으시고 받을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당신에게 온화한 말씀으로 위로를 해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고통 중에 있을 때 그 슬픔과 아픔을 대신 떠맡고자 하는 마음이 어떻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친절(kindness)”이라는 그리스어에는 “귀중한 조언을 주는 사람 또는 신탁(oracle)” 그리고 “부드러운 감촉(soft touch)” 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게 부드럽게 마음의 위로를 주며 희망을 가져오는 귀중한 조언을 주는 사람입니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나타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Compassion(연민, 동정심)”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하기로 결심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죄악된 삶을 살고 있는 어떤 형제에게 다가가 “하늘에서 형제에게 전해주라는 말씀을 가지고 왔습니다. 형제는 죄악 중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죄악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예례미야가 울부짖었던 것처럼 응답할 것입니다. “제발 나에게 분노하지 말아주십시오. 나의 삶의 모든 의미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저는 이미 바닥 끝까지 와있습니다. 저를 더 이상 내리치지 말아주세요.”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았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 자비하심 그리고 용서를 이미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영광으로 변화가 되고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영광을 세상에 빛추어라. 하나님께서 계속 너희에게 사랑으로 일하신 것처럼, 너희도 사랑으로 행동할 때이다.

2014년 2월 24일 월요일

그곳에 머물러, 내가 너희 안에 행할 일을 보라 by Gary Wilkerson

에스겔은 영적 힘이 있는 위대한 선지자이었습니다. 에스겔서 37장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주신 환상은 오늘날 메마른 현대교회의 영적 각성을 위한 시기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처럼 에스겔도 이스라엘 왕을 섬겼습니다. 왕의 군대와 동행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보통 사람들은 평생 보지 않아도 될 학살을 수 없이 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평생 목격한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강력한 환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이 환상은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고, 에스겔은 이를 증거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에스겔 37장 1절)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보게 됩니다. 특히 저는 매년 많은 가정이 무너지는 것과 젊을 때에 약물중독으로 삶을 파괴시키는 청년들을 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예수님을 모르는 이 도시에 사는 80%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진 악한 죄를 짓도록 의도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참혹한 환경에 있더라도 우리는 에스겔처럼 하나님 안에서 평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권세로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리가 우리 안에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 가정, 친구 그리고 지역의 이웃들에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과의 전쟁에서 맞서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머물러, 내가 너희 안에 행할 일을 보라. 내가 놀라운 일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육신의 지혜로는 붙잡지 못 할 것이다. 나의 영이 너희에게 보이게 하여야 볼 수 있느니라.”

에스겔서 37장에서의 “앉다(sit down)”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는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실 때 “머물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4장 49절 중) 이 두 구절에서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그 의미는 이러합니다. “너의 계획과 전략을 내려 놓고 내가 나의 능력으로 너희를 채울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거라.”

반드시 이 시대의 교회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세미나, 콘서트 그리고 집회 등의 행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불어 넣으시지

않으시면 사람의 일을 통한 변화는 없습니다. 온전히 성령님께서 일하실 때만이 진실로 영혼들에게 나눌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회개는 어디로 갔나요?

회개는 어디로 갔습니까?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로부터 “회개”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을 들어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에 대해 슬퍼하며 애통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그들의 목회를 소집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대신 오늘날 많은 설교단으로부터 우리가 듣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그저 믿으세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당신은 구원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사용했던 성경 구절은 사도행전 16:30-31절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 갑자기 땅이 흔들리며 모든 감옥 문들이 열렸습니다. 그때 간수는 순간적으로 모든 죄수가 탈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처형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갑작스러운 절망과 두려움으로 자포자기하여 칼을 빼 자결하려 했으나, 바울과 실라는 그를 말리며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다고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그는 사도들 앞으로 달려와 엎드려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 (사도행전 16:30-31)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때, 그 간수가 칼을 손에 들고 자결하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는 이미 회개의 장소에 있었습니다. 그는 무릎 꿇었으며 상한 심령으로 사도들 앞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순전한 믿음 가운데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실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마가복음 16:16) 이 구절의 예수님 말씀으로는, 단순히 그분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에 이 말씀부터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15절) 여기서 그분 말씀의 본질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 되기 전에, 그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져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복음, 즉 회개의 복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광야에서 시험을 통과하시고 난 후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첫 번째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17)

2014년 2월 20일 목요일

기쁨으로 넘치는 때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혼인에 거짓을 들여놓았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도피함으로써 그들의 반역을 가중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숨지 않으십니다. 오직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 남녀 간의 첫 번째 혼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분은 모든 성도의 결혼에 대해 그만한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만일 두 부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숨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을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가까운 배우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결혼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결혼이 거의 성공할 확률이 없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부부 중 최소한 한사람이 날마다 주님과 상담 가운데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다 그분과 대화하는 것이 최상이겠지만, 만일 한 배우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한다면 다른 배우자가 도움과 안내를 구하는 기도의 골방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아내는 그녀의 결혼을 구할 수 있으며, 기도하는 남편 또한 그렇습니다.

사랑만 가지고는 결혼생활을 견고히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 능력은 수많은 결혼을 회복시키고 보존시키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통치하는 가정에서의 결혼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넘어지지 아니하게 하시고, 넘치는 기쁨으로 자신의 영광이 있는곳 앞에 흠 없이 너희를 제시하시는 분께 영광과 존엄과 통치와 권능이…” (유다서 24-24절)

우리는 주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8:10 참조) 그러므로 견고한 결혼은 기쁨으로 넘쳐야 합니다. 결혼이 그 기쁨을 잃게 되면, 그 결혼은 힘이 없어지며 무너지기 쉽게 됩니다.

물론 모든 결혼은 많은 시험을 겪게 될 것입니다. 질병이나 제정 문제, 그리고 오해나 아픔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은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아계시고, 그분 관할하에 모든 것은 잘 통제되어 있습니다. 제게는 저를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제 생애의 모든 순간을 만끽하며 계속 기쁨이 넘쳐흐르기를 기대합니다. 살다 보면 울 때도 있지만 기쁨으로 넘치는 때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선은 언제나 악을 능가합니다. 그러니 하늘을 바라보며 사십시오!

2014년 2월 19일 수요일

교회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어디서든 성도들이 주님을 예배하는 장소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 대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로마서 16:5)

많은 성도가 집에 돌아와서는 요란한 텔레비전 방송이나 시청하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시간은 매우 등한시합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주님을 찾지도 않고, 그들의 배우자나 자녀들을 위해 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좋은 교회를 찾을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당신 가정에 제사장 역할을 할 남편이나 아버지가 없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은 편모일 수도 있고 독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분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좋은 교회도 찾았고, 거기서 매주 주님을 만납니다. 저는 경건한 설교 말씀을 들으며 근사한 예배로 몰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교회에 만족합니다.”

저는 당신이 그럴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나 단지 교회를 당신이 사는 지역에서 친교를 하기 위한 장소로 여긴다면, 당신은 아직 진실된 교회를 찾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의로운 교회는 바로 당신이 살고 있는 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만일 당신이 가정에서 주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당신의 개인적 필요에만 당신의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비밀스러운 기도 골방에 들어갈 때까지, 당신은 올바른 교회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께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드림으로서 올바른 교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당신과 친교 하기를 원하는 그분의 열망을 섬김으로써 말입니다!

당신의 가정이 교회가 될 때, 당신의 모든 절실한 필요들은—인간의 수단이 아닌, 하늘에 계신 당신의 천부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당신 자녀들의 필요도 역시 채워질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기도 골방에서 당신과 친교 하시는 성령 덕분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교회라도 갈 수 있게 됩니다. 그 교회가 아무리 침체되어있다 할지라도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곳에서 주를 갈망하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갈망하는 종들은 어디에든 있습니다. 주님을 예배하기를 원하는 당신의 갈망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초자연적으로 당신을 데려가실 것입니다.

2014년 2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은 사악함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숨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어리석음과 사악함으로부터 “그분의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예레미야 33:5 참조) 그러나 그분과 함께 기도 골방에서 헌신하는 자들로부터는 절대 숨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늘 기도하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그것에게 건강과 치유를 가져오며 그들을 치유하고 평안과 진리의 풍성함을 그들에게 드러내리라.” (예레미야 33:6)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 네가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내 백성을 회복시킬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들을 풍성한 평강과 진리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곧 새로운 자비와 함께 위대한 정화를 가져오려 한다. 그리고 내 교회는 다시금 모든 속박이 파쇄된, 기쁨과 진실된 찬양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 영광스러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이 황폐한 이곳과 거기의 모든 도시에 다시 목자들의 거처가 있으리니, 그들이 자기 양 떼들을 누이리라.” (예레미야 33:12)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모든 도시에 수많은 경건한 제사장들을 세울 것이다. 그들은 나를 진실로 섬길 것이며, 나의 양들로 하여금 안식으로 들어오게 할 것이다!”

모든 도시와 성읍은, 산지나 골짜기, 북쪽이나 남쪽을 막론하고 목자가 돌보는 양 떼가 거하는 “양 우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 떼들이 그것들을 세는 자의 손 밑으로 다시 지나가리라. 주가 말하노라.” (13절) 이 구절은 모든 양을 향한 친밀한 사적 개입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 경건한 제사장들은 나의 백성을 개별적으로 돌보아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분 회복의 축복을 이렇게 집약해주셨습니다.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에 약속한 선한 일을 이행하리라.” (14절) 이 “선한 일”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게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정결케 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회복시켜 주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경건한 목자들을 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님 자신만이 그러한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전도부흥사나 교사, 또는 새로운 운동도 그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언약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이러한 언약이 우리 시대를 향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2014년 2월 17일 월요일

그분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by Gary Wilkerson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요한계시록 12:10) 살아계시고 숨 쉬고 계시는 우리의 언약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 중 하나는 사탄의 참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거짓말을 파쇄하기 위해 신학적 이론을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창세기의 가장 첫 예언에는, 사탄은 메시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15 참조) 이천여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 실체를 우리의 삶에 가져다주셨습니다.

가끔 저는 한밤중에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 깨어나곤 합니다. 그것은 마치 제가 무엇을 잘못한듯한 죄책감인데, 저는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한 느낌은 바로 참소자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아무 쓸모 없고 무가치한, 다른 사람들의 짐밖에 안되. 네가 얼마나 많은 실수를 범했는지 과거를 돌아봐. 너는 절대 변화되지 못할 거야.” 그 음성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우리에게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끝났다.” 그와 더불어 그분은 놀라운 확언을 해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지 말라.” (요한복음 5:45)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한복음 8:11)

하나님께서는 절대 우리를 참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의 굳건한 반석에 우리가 세워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반석은 율법이나 참소, 또는 절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럽고 자비로운 행하심에 기초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참소를 그분이 들으시는 즉시, 그분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파쇄하라.” 그 순간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그 거짓말에 귀 기울이지 말아라. 그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파쇄되었다. 하나님은 너를 참소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아들이 너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지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명백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가 듣는 음성은 성령의 음성일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실 것이나, 그것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회개로 인도하는 희망찬 책망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주어졌고, 우리가 좌절할 때면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하고 그분의 이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께서 이 반석 위에 세워진 그분의 은혜로 당신을 충만케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2014년 2월 15일 토요일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by Claude Houde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7-8)

제가 이 말씀과 그 영향력에 대해 묵상할 때면 눈물이 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 즉 다른 영혼들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는 위치에 계시는 부모님들이나 목사님, 그리고 성숙한 성도들을 향해 강력한 촉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이 하나님의 사람들(우리들의 자녀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여정에 두신 모든 소중한 영혼들)이 우리가 겪는 모든 시험과 고난, 우리의 가장 깊은 가치관과 열정, 우리의 반응과 결단, 그리고 우리 삶에서의 진정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보며, 그야말로 우리의 믿음을 본떠 행하고 우리의 믿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놀라운 불변의 원칙은 나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진리에 대한 간증과 선포가 되어야 하며,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질되기 쉬운 내 삶을 주시하고 있는 모든 자를 향해, 그분의 신실하심과 불변하심,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자는 결코 실족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분을 향한 나의 믿음과 신뢰로 변론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나의 자녀가 그들 친구에게 “내 부모님이 날이면 날마다 그들 삶에서의 힘겨운 비극과 고난을 통과하고, 그 모든 고통과 압박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믿음을 지키며 사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제 부모님의 믿음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것을 제게 증명했습니다.” 라는 증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성도가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영적 영향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완성해야 할 과제 또는 성취해야 할 목적인, 나만이 다룰 수 있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은 당신에 의해 변화되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이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할 수 없는, 오직 당신만이 성취하도록 부르심 받은 영원한 숙명적 임무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주위의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결실을 맺어야만 하는 귀한 “당신의 믿음”인 것 입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어려운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2월 14일 금요일

교회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당신은 주일 아침에 당신의 자녀들을 가르쳐줄 교회를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진실된 교제를 하고자 하거나 좋은 경배와 찬양에 굶주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당신 삶의 깊은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진실된 교회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에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바로 목자이자 목회자,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된 교회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신실의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로 부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내가 맡긴 직분을 지키되”(에스겔 44장 15-16절)

신학교를 나오거나 성직 서임을 증명하는 서류가 있어야 왕 같은 제사장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씻김받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졌습니다.

제가 자랄 때 저희 집에는 “가족 제단(altar)”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히브리서에 나온 말씀 중에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제단을 절대로 빠질 수 없었습니다.

저와 제 형제들이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가족 제단에 모일 시간이 되면 부모님이 “기도 시간!”이라고 외치는 소리에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은 모두 윌커슨 가족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모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우리 가정의 제사장과 목자로서의 역할을 기쁘게 수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가정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2014년 2월 13일 목요일

거룩한 목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하게 하리라”(예레미야 33장 22절). “이 언약을 너에게 줄 것이다. 점점 성장하는 나의 무리를 인도할 거룩한 제사장을 더 세울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런 신실하고 거룩한 목자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그들은 어디서 사역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그들의 의로운 교회들은 어느 도시, 지역에 가서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세상에는 이러한 놀라운 예언을 성취할 신학교가 충분히 없다. 주님께서 젊고 신실한 목회자들을 세우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말로 흔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이루실까요? 우리는 그 답을 요한계시록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요한계시록 1장 5-6절).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의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해방된 모두가 바로 그의 왕 같은 제사장인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사도베드로도 이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장 5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를 섬기는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교회”라는 의미는 우리의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 육체적 그리고 정서적인 치유를 받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교회를 이루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드러나 진실된 교회는, 말씀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섬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교회에 대한 의미는 그 어느 장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바로 그곳을 뜻합니다.

2014년 2월 12일 수요일

여호와는 우리의 의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예레미야 33장 15절)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비젼이 성취되는 그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의로운 가지”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로 이 비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의 교회를 세우시고 침례교, 오순절파 또는 다른 그 어떤 이름으로도 아니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16절)

아직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9절)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그들은 떨며 굉장히 놀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놀라운 일을 할 것이다. 나의 충만한 평강과 진리를 명백히 보게 되어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떨게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냉혹한 심판의 말씀? 율법의 가르침?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 아닙니다! 모든 두려움과 떨림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죽어 마땅한 그의 민족에게 충만한 평강과 평안을 주시는 감당치 못할 축복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에게 믿음을 통한 의를 약속하셨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갑자기 거룩의 기준을 낮추며 부주의하게 살았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평강과 평안의 언약은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떨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4장에서 이러한 거룩한 떨림을 볼 수 있습니다. 폭풍이 제자들의 목숨을 위협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마가복음 4장 39절). 제자들은 이를 보고 어떻게 반응을 하였습니까?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41절)

제자들이 왜 “심히 두려워”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셨고, 고요한 평강을 가져오셨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받을 자격이 없는 믿음없는 제자들에게 보이신 그리스도의 선하심에 떨었습니다.

2014년 2월 11일 화요일

알맞은 교회를 찾는 것

저는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의 이런 불평을 지속적으로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교회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어요! 우리 가정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 아이들이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을 배우며 자랄 수 있는 교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좋은 교회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제가 당신에게 전해줄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안 좋은 소식입니다. 알맞은 장소에서 찾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절대로 의로운 교회 즉 축복 중에 거룩하고 의로운 교회는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 좋은 소식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거룩하고 복된 교회를 어디로 가면 찾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선 지자 예레미야는 의로운 교회를 찾았습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예레미야 33장 1절). 신실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감옥에 앉아 있을 동안 구약시대 교회의 예배의 중심을 상징하는 예루살렘은 황폐해 졌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고 정결한 제사장들과 거룩한 선지자들이 섬기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질병과 사망, 거짓 선지자들과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시대의 남은 몇 안 되는 거룩한 성도라고 하면, 당신은 단 하나의 의로운 교회는커녕 신실한 목자 한 명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한때 거룩하고 복된 모든 것들이 파괴된 시대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이 끔찍한 장면을 보았을 때 그는 찢어지듯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파괴된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에게 주신 새 언약을 보는 시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을 곱 씹으며 더욱 더 체념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다 소용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리셨고, 이제 더 이상 진실한 예배당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무릎 꿇고 내게 부르짖으라. 너는 남아있는 나의 교회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나의 백성들을 위하여 계획한 놀라운 일들을 이제 너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예레미야 33장 3절 참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고 알맞은 교회를 찾고자 하거든 모두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곳을 가던, 버스, 기차, 비행기 등 무엇을 타더라도 하나님의 진실된 교회는 찾지 못할 것입니다. 현대 문물로는 하나님의 진실된 교회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단 하나의 믿을만한 길은 골방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뿐 입니다.

2014년 2월 10일 월요일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의 축복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는 부서지고 소망을 잃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팔복을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닌 내가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복을 받을것이다” (마태복음 5장 2-11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지요! 우리는 그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마태복음 1장 23절)라는 의미의 임마누엘의 축복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함께 볼 때에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이사야 49장 8절).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의 축복은 우리의 비난과 질책을 모두 침묵하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침묵은 간음으로 잡혀온 여인에게 일어났습니다.(요한복음 8장 1-11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고발하기 위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인을 데리고 온 배경에는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비난하고 고발하는 것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상담을 하면서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시지 않아요. 열심으로 기도하는데 응답을 안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도 나를 구원해주시지 않으세요.” 이것은 바로 마귀가 원하는 생각입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탓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박의 끝없는 반복을 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과 그리고 자신의 고발자들에게 답했습니다.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한복음 8장 7절) 더 이상 고발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포트라이트를 필요한 곳으로 조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였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하나씩 하씩 나가고” 그들은 떠나감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 9절)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한복음 8장 10절). 킹 제임스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 고발한 자들은 어디 있느냐?”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희에게 “너는 죄악되고 희망도 없고 실패자야!’라고 말하는 그들이 어디있느냐? 그들은 사라졌다! 이제는 내가 너의 공의이고, 내가 그들을 모두 침묵하게 하였다.”

그러한 음성들이 귓가에 계속 맴돌 때, 우리는 그들을 무찌르는 또 하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장 27절). 예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너의 고발자들의 말문을 막히게 하였다” 그의 진리는 시끄러운 소음을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으로 잘라낼 것입니다.

2014년 2월 7일 금요일

하나님 영광의 계시

우리가 하나님 영광의 계시를 받았으면, 더이상 이전 방식대로 계속 사람들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바뀌어야만 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진노와 분노와 소리 지르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고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 (에베소서 4:31-32)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내 영광을 보았으며 내 본성과 성품, 즉 나는 자비로우며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제는 너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나타내기를 원한다!”

모세는 이 하나님 영광의 계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백성에게 그것을 잘못 전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에 인내심을 잃게 되었고, 마침내 화가 나서는 “너희는 목이 굳은 한심한 반역자들이다!”고 말하는 듯 그의 지팡이로 바위를 쳤습니다.

하나님은 그 행위를 절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그분의 영광, 즉 그분의 자비로움, 선하심,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셨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잘못 나타내는 것을 그분이 참지 못할 것입니다. 바야흐로 구약성서를 통해 가장 온유하며 가장 경건한 인물이었던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영광을 잘못 전달한 결과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부터 이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묘사를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빚을 그의 주인으로부터 탕감받은 한 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주인은 자기 종에게 놀라운 자비와 은혜, 그리고 용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종이 용서를 받자마자 자기에게 조금 빚진 자를 찾아서는, 그 빚을 다 갚기를 요구하며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사랑과 용서를 방금 경험했던 자가, 그 보답으로 자기 채무자에게 아무런 자비로움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아버지의 사랑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그분은 그분의 자비를 통해, 그리고 너희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서 그분의 놀라운 영광의 은혜를 너희에게 베풀어주셨다. 그러나 그분의 영광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세상을 향해 그것을 잘못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명령을 요약합니다. “그분이 너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

2014년 2월 6일 목요일

하나님 영광의 충만하심

모세의 얼굴과 마음에서 발했던 광채는 하나님 성품의 충만하심을 단지 조금 맛본 결과였습니다. (출애굽기 34:2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를 보았을 때, 그들은 그가 초자연적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의 형제자매와 회중은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했다. 그는 한계를 초월했다.” (출애굽기 34:29-35 참조)

오늘날 우리는 모세가 가졌던 것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손에 댔고 만졌습니다.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요한일서 1:1)

이 구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영광의 충만하심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이 한 사람 안에 구현된 것을 보았으며 그분과 대화했다. 우리는 그분을 만지기까지 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영광의 충만하심을 보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그 영광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우리 마음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6)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뜻은 이렇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구현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 사랑, 자비, 은혜, 그리고 오래 참으심을 앎으로,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임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단지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 그분 영광의 충만하심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우리 안에 계신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디도서 2:11) 대체 누가 이 은혜란 말입니까? 그분은 바로 자비와 친절, 사랑으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12절)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거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선하심의 계시다. 그리고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한다면, 그분의 계시가 너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2014년 2월 5일 수요일

더욱더 예수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을 보고 모세 얼굴의 피부가 빛나는 것을 보았으므로, 모세가 그분과 말씀을 나누러 들어갈 때까지 다시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애굽기 34:35) 사람의 얼굴은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표상입니다. 하나님 영광의 계시가 모세에게 실제로 임했을 때, 그것은 그의 얼굴 모습까지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사 내가 그분을 선포하게 하시고…” (갈라디아서 1:15-16)

바울이 말하고 있는 뜻은 이렇습니다. “내게는 누군가 고안해낸 어떤 교리보다도 더 많은 계시, 즉 그리스도를 단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능가하는 계시가 있다. 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계시, 즉 그분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계시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계시는 내 모든 존재와 모든 행위의 원천이 되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내 삶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계시의 본질을 죄짓는 허가증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유다는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유일하신 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유다서 4절)

바울에 의하면, 그러한 자들은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로마서 6:1) 죄 가운데 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비와 용서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면, 나는 그분께 모든 기회를 제공해 드릴 것이다. 내가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볼 것이며, 그것은 그분의 은혜를 넘쳐흐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향한 놀라운 간증이 될 것이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 사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안색이 그것을 번연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의 영광의 눈을 자극하기 때문이니라. 그들의 안색이 드러나 그들을 대적하여 증언하며…” (이사야 3:8-9) 이 선지자가 말하는 뜻은 이렇습니다. “너희의 죄가 너희 모습 자체에서 너희를 대적하여 증거한다. 너희 마음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너희 안색에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반면, 가장 초심의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예수님과 함께”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당신은 누구와도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무언가 다릅니다. 당신한테서는 겸허한 확신이 풍겨나오며, 아무런 숨김도 없어 보입니다. 당신에게는 비밀이 없으며 어떤 원한이나 상처도 갖고 있지 않은듯합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제가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당신의 인생은 참으로 일목요연하군요!”

그렇지만 죄는 어떤 모양새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미소로도 그것을 감출 수 없으며, 그의 음성은 공허의 소리, 즉 딸랑거리는 심벌 놋쇠의 울림소리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계시된 자들은 날마다 변화됩니다. 그들의 얼굴은 더욱더 예수의 모습으로 닮아갑니다.

2014년 2월 4일 화요일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제 오랜 사역의 여정에서, 때로는 저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원수들에 의해 제가 압도당하는 때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게는 주님의 징계가 마치 등을 때리는 회초리처럼 느껴졌습니다. 특별히 제가 잊을 수 없는 한 때를 기억하는데, 그때는 제게 사방팔방으로부터 비난이 퍼부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데이빗, 자네에 대해 의혹스러운 말들이 들려오는데 그게 사실인가? 자네에 대한 이 모든 소문이 마귀로부터 오는 건가? 아니면 하나님이 자네에게 뭔가 말씀하시려는 건 아닌가?”

그러한 질문조차 저를 당혹게 했고, 저는 그 모든 것으로 인한 감정적 고통으로 완전히 압도당했습니다. 지속되는 고충으로 인해 저는 신체적으로도 더욱 지치게 되었고 설교하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조차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제 아내가 제 공부하는 의자에서 그야말로 저를 들어 올려야만 했습니다. 교회로 향하던 길 도중에, 저는 아내에게 더이상 이렇게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정말로 가짜인지 의심하며, 우리 교회 예배에 가서 누구의 얼굴도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저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그러자 주님은 저를 예레미야가 했던 이 기도의 말씀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 주여, 나를 바로잡으시되 공의로 하옵시고 주의 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를 없애실까 염려하나이다.” (예레미야 10:24)

예레미야의 이 말씀은 그 혹독한 시험의 때를 통과하는 동안 제 일상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 그렇게 하셔야만 한다면 저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시옵소서. 그러나 원컨데 분노로는 하지 마옵소서! 만일 제가 한번만 더 격노의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저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제발 저를 먼지와도 같이 낮추지 마옵소서, 주님. 저는 이미 낮을 대로 낮아졌습니다!”

제가 이 기도를 할 때마다 주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데이빗, 만일 내가 너를 바로잡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시험은 절대 나의 심판이 아니다. 나는 너를 향한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요동치 말고 나의 영광을 보아라!” 그분 영광의 이 계시는 저를 온전한 안식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면팔방으로 저를 변호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이 영광의 계시를 받으면, 그분이 당신을 분노로 징계하실 거라는 두려움을 다시는 절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회초리를 자비와 사랑의 손에 들고 계십니다. 그분은 오직 자애로운 연민의 마음으로 당신을 훈계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 당신을 상처 입히거나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가 기뻐하는 아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 같이,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바로잡아 주시느니라.” (잠언 3:12)

2014년 2월 3일 월요일

예수님이 곧 언약이십니다 by Gary Wilkerson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이사야 49:8)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을 했을 때,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우리는 성탄절마다 이사야의 예언적 선포를 경축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부르짖음과 기도의 응답으로서, 하나님께서 곧 그분의 아들을 보내주실 것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우리가 주로 연상하는 구유의 아기 이야기보다도 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맺으신 인간과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심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장차…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그분은 새로운 일련의 규칙으로 새 체재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새 언약으로서 한 사람, 즉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전 언약(구약)은 조건에 기초를 둔 일련의 규칙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정해졌습니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다.” 물론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청결한 그분의 법을 지킬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인생은 죄의식과 수치, 그리고 절망에 끌려다니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이전 언약(구약)이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약을 바꾸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언약 그 자체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축복을 보여주려고 그분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곧 은혜의 축복이십니다.

교회사를 통해, 루터나 웨슬리와 같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율법이 무엇이고 은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평생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루터와 웨슬리는 이것이 진리임을 깨달았는데, 그들 자신이 그 절망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 새 언약 아래서의 하나님의 법은 더이상 육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표면적 기준이 아닙니다. 대신 그분의 법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 5:5)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자체인 성령으로 채워졌습니다. 우리가 이 새 생명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