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0일 화요일

그들은 세상을 뒤엎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엎은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는데…” (사도행전 17:6) 누구의 세상이 뒤집혔단 말일까요? 그 세상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아무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세상이었습니다.

이곳 뉴욕의 한 목회자 아내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임스퀘어 교회는 뉴욕의 거의 모든 오순절파 교회들을 흔들었습니다! 목사님도 그것에 대해 알고 계시죠?” 사실 저는 몰랐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이 설교단의 교만 때문일지도 모르며, 아니면 성도들이 밖에 나가 오직 이 교회만이 진정한 거룩에 대해 설교하는 교회인양 자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와는 달리, 만일 우리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해 설교하기 때문에 우리 사역자들이나 회중이 “뒤집어졌다면” — 만일 사람들이 그들의 죄가 노출되지 않았거나 죄에 대해 도전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를 떠나고 있다면 — 만일 이 교회 성도들이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며, 그분의 성결 안에서 걷고 있다면 —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올바른 이유로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 움직이는 사람, 즉 바울이 요구하는 거룩의 복음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누구보다도 더 메말라 죽어가며 타협하는 교회와 설교자들을 일깨우며, 그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분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책망입니다! 당신은 각 교회에서, 바울이 칭했던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그리 흔치 않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울과 함께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고 (빌립보서 3:8) 고백할 때가 바로 당신이 소란꾼으로 지목되는 날입니다!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즉시로 보내니…” (사도행전 17:10)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다시 한 번 사탄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다음 안식일에 사람들이 모여 자랑스럽게 으스대며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게 무슨 부흥이었단 말이야! 우리는 그들이 오기 전부터 여기 있었고 그들이 간 후에도 여전히 이곳에 있어. 이곳 사람들은 그런 유형의 설교는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 자, 이제 그런 거룩의 선동자들로부터 더 이상의 방해 없이 하나님을 섬기자!”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곳 개종자들의 눈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예수님께로 진실로 돌이키게 했기에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고, 그 성읍은 계속 부흥했습니다. 핍박 아래서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강건해져서, 아시아 전 지역의 강력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 심령속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2014년 9월 29일 월요일

언약을 지키는 자들 by Gary Wilkerson

새 언약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신 변화산에서 명확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사,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분의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 보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분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마태복음 17:1-3)

그 영광은 너무도 엄청난 것이라서, 천국은 잠시 땅의 영역을 돌파하고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모세와 엘리야가 그리스도와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광경에 너무도 놀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세 장막을 세워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여러 언약을 한눈에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선지자들에게 있었던 언약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베드로의 시야에서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들)를 거두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 모든 언약 전체, 즉 인류에게 필요한 그 모두를 구현한다. 베드로야, 이제 네게는 한 계명만 남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네가 사랑하며 내 성령이 네 안에 거한다면 너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모든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율법이 네 삶의 원동력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로 네 삶의 원동력이 되신다.” (마태복음 17:5 참조)

이 얼마나 놀라운, 베드로와 오늘의 우리를 위한 계시의 순간인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를 알기 위해 그것을 합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눈에는 인류의 모든 필요가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언약을 계속 어기고 있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분은, 우리에게서 그분 아들의 표적을 보시며, 그 때문에 우리를 언약을 지키는 자들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선행들의 명단 저편에 있는 실패의 명단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아들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분 아들과 맺은 언약의 모든 혜택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모든 평강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 삶의 기복에 상관없이, 우리가 성공하고 있든 실패하고 있든, 모든 은혜는 우리에게 넘쳐흐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은혜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2014년 9월 27일 토요일

다니엘은 마음속에 작정하였습니다 by Claude Houde

“다니엘은…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겠다고 마음속에 작정하였으므로…” (다니엘 1:8) 그때 다니엘은 매우 담대했으며, 오늘의 여러분과 제게 무언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아직 십대 소년이었을 때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서 적대적이고 무서운 땅으로 보내졌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헤어져야만 했던 사건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충격적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당혹스러웠고 겁에 질렸으며 버림받은 그는, 부패한 왕의 궁정에서 죄수인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 부도덕하며 냉소적인 군주는 그에게 “벨드사살(Belteshazzar)”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것은 “벨(Bel)이 나를 통치할 것입니다; 벨(Bel), 나는 당신을 따르며 존중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벨은 그 시대의 우상이었고, 악귀적이며 혐오스러운 경배와 우상숭배의 표상이었습니다.

왕은 다니엘에게 그 나라와 정부의 철학, 사고방식, 그리고 풍습을 온전히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다니엘은 패륜, 욕정, 잔인함, 그리고 폭력의 시궁창으로 내던져진바 되었지만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령으로 다니엘의 마음속에 사명과 비전, 그리고 다른 가치들을 새겨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항상 거부했습니다. 다니엘서의 매 장마다, 우리는 다니엘이 그의 부르심과 그의 주를 저버리는 것을 누구에게도 절대 허용하지 않으며, 단호함과 초자연적 권능으로 저항하는 것을 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만이 나의 심판이 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결단입니다! 만일 어떤 비극이나 부당함, 또는 인생 그 자체가 당신을 “상품화” 시키려 한다면, 하나님의 권능과 믿음으로 그것을 저항할 수 있으며 저항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당신 영혼의 적과 운명을 향해 단순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심판이시며, 나의 근원, 나의 미래, 나의 희망, 그리고 나의 능력이시다. 그분은 아직도 나를 향한 그분의 마지막 말씀을 갖고 계시다!”

어쩌면 당신의 “이름”, 당신 인생의 과거와 현실은 당신을 이러한 단어들로 묘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대받은, 잊혀진, 패배자, 범죄자, 부정한 자, 속박된 자, 실패자, 이혼자, 자살성의, 비극적, 기만적, 고통 등... 당신 인생의 비극적 경험과 시간은 오늘의 당신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리고 다정하게 당신의 턱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든,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메시지를 갖고 계십니다. 당신은 결단할 수 있으며, 소망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종종 우리 과거의 산출물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과거의 포로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당신의 삶을 날마다 그분 손에 맡기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가능케 하시는 그분의 성령을 받으십시오. 당신은 당신 과거의 삶을 묻어버릴 수 있으며, 당신을 제한하거나 단정 짖도록 허용하는 성향이나 습관을 멈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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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타협없이 전한 복음의 말씀

“저희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사도행전 17:1-3). 데살로니가의 회당의 리더들은 수년 동안 조용히 방해 받지 않는 모임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부지런히 설교했고, 겉으로는 매우 거룩해 보였습니다.

거기에서 사고뭉치인 바울이 나타나 3주만에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하여 설교한 이 후에 데살로니가는 뒤집어졌습니다. 바울은 경험을 통하여 몇몇의 사람만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굳어버린 종교적 전통을 버리기 힘들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들의 전통을 흐트리려고 한다는 이유로 많은 미움을 받을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함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고도 언급하였습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데살로니가전서 2:2).

이러한 난폭한 저항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과 실라는 시끄럽지도 도발적이지도 교회를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후에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에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2:3-8).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년간 온순히 종교적으로 살아온 이 사람들은 이제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격노한 무리가 되어 야손의 집을 공격하고 도시의 관청들을 애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소란의 원인은 바로 타협없이 전한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사도행전 17:7).

2014년 9월 25일 목요일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저는 기도에 대하여 굉장히 강조하는 설교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의인들의 열정적이고 효과적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 만으로는 한 도시를 흔들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능력있는 기도를 하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왕국과 분노하는 이세벨을 흔든 것은 기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내어 그들을 도전하였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끔찍한 바알 숭배에 동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세벨에게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7000명의 성도들이 우상숭배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그들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때에 엘리야는 아합을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열왕기상 18:17) 라고 불렀습니다. 엘리야는 기손 시냇가에서 칼로 바알 선지자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마귀와 그의 무리에 관하여서는 결코 젠틀맨이 아니었습니다.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열왕기상 18:26-27). 마지막 때인 오늘날의 교회들은 거룩함의 결핍으로 인하여 어두움의 권세에 두려움으로 떨며 숨어 있습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잠언 28:1). 어떤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온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러 잡혀가실 때 저항도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원수의 손에 넘기워지는 어두움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낼 때 결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적 리더들을 백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며 책망하실 때에는 결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복음 23장 참조).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침묵을 지키며, 신사적인 외교관들 처럼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왕국은 도전받지 않은채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속삭이고 온화한 미소를 짓는 크리스천들은 차고 찼습니다! 저는 한번 어떤 분노한 남자가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돈 내기를 걸어 보겠습니다. 당신들 교회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잠시의 화젯거리는 될 수 있으나 그 어떤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폐쇄될 수 없고, 당신들에게는 능력도 힘도 없습니다.” 그 남자는 낙태에 관하여서도 언급하였습니다. 그 남자의 말투와 목소리에서 사탄의 조롱이 느껴졌습니다. 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영적인 겁쟁이들입니다. 끝까지 버틸 수도 없고, 장애물이 있을때에는 모두가 포기하겠지요. 그저 교회 안으로 다시 돌아가 숨어버리겠지요.”

아닙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하나님께서 당신과 동행하실 것입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사도행전 16:25-26). 간수가 이런 현상을 보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사도행전 16:30).

성읍의 관리직들과 종교적 리더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냈군! 드디어 방랑자 같은 사고뭉치들을 보지 않아도 되겠어. 이제야 그들이 조용히 있겠군.” 그러나 다음날 이 소동을 듣게 됩니다! 저는 군인들이 시장, 시의회와 종교적 리더들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하는 상상을 합니다. “서두르십시오! 시청으로 가보십시오. 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충격 상태에 빠져 관리직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뭐라고요? 지진이요? 감옥 문이 열리고, 수감자들의 사슬이 모두 풀렸지만 그 누구도 도망가지 않았다고요? 수감자는 그들의 신앙에 동참했다고요?”

도시의 관리직 관계자들은 로마 시민을 제압하는 것은 범죄이기 때문에 매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사도행전 16:39).

저는 이 스토리가 너무 좋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적 권위를 과시하지 않으면서 왕중의 왕 예수님의 대사로서 임무를 다했습니다. 바울과 신라가 그리스도가 조롱당하는 것을 보면서 작은 기도모임을 가졌고, 하나님께서는 지옥 앞에 서 있는 자들 앞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두 사람은 루디아의 집으로 갔고, 그 집에서 얼마나 뜨거운 영적 모임을 가졌을지 상상해봅니다. 바울은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보십시요. 마귀가 분노할 수 있고, 우리를 세상 권세로 위협할 수 있스ㅂ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을 모든 능력과 권세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다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동행하실 것입니다!”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더 많은 사고뭉치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사고뭉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뉴욕시와 온 세계의 도시와 지역을 흔들 사고뭉치 군대가 필요합니다. 성령충만한 이 사고뭉치들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리스도의 주권을 담대하게 인정하며 전하여, 악한 단체들을 믿음으로 흔들고, 죽은 교회들을 믿음으로 도전하고, 각 기관의 리더, 시장들, 시의회, 지역사회의 리더들을 애먹이는 뜨거운 믿음의 사고뭉치 군대 말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세상 제일의 사고뭉치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26절에서 그들은 이렇게 언급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 바울, 바나바, 실라 그리고 디모데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에서는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을 때 그들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무시아로 가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드로아로 갔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마케도니아로 부르는 환상을 본 즉시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인 빌립보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점을 보는 젊음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젊은 여인은 그들을 좇아와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사도행선 16:17). 바울이 며칠을 견딘 후에..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사도행전 16:18). 그녀는 치유 받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갑자기 온 도시에 대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점집은 빌립보의 큰 관광 명소였나 봅니다.

바울은 현상을 흔든 것입니다. 그는 수년을 마음대로 행악한 귀신을 도전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 여인의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고발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사도행전 16:20).

오늘날에 바울과 실라처럼 성읍을 요란케 할 사고뭉치들이 더 필요합니다!

2014년 9월 22일 월요일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정죄받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결점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고, 결점 없고,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지키셨습니다.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더해서 더욱 더 놀라운 소식은 예수님께서 약속의 완성을 자신만의 것으로 혜택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 혜택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을 나누기 위하여 제 친구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있을 때 내가 그들과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는 나의 친구의 의입니다. 그들의 죄 사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언약을 완성시켜야 하는 의무를 우리에게 지우시지 않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완벽히 지키고 완성시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아버지와의 언약 안의 관계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초대에 응낙할때에 우리는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다음 구절은 에스겔의 예언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에스겔서 36:26-27).

어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명령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이제 성경을 더 읽어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하고, 더 전도해야 되겠구나.” 만약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새 언약 안의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인 비극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한가지를 어길 경우 모든 것을 어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도록 명령받지 않아도,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받지 않아도 언약을 완성시키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안의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안과 밖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전도하는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게 됩니다!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마음의 열망 by Nicky Cruz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단지 구원해 주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탄이 훔쳐간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잃어버린 시간이 무엇이든 그분은 사랑을 통해 되찾아주십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가한 상처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의해 치유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신 구세주—우리가 경배하는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직도 죄로 묶여있는 세상에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로 중요한 단 한 가지—유일하게 전할 가치가 있는 증언입니다!

우리가 지붕 꼭대기에서 어떻게 그것을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해주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잠시라도 무관심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사탄과 그의 거짓말에 대한 이해와 명철을 갖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무조건적 용서를 경험하고 나서도, 그토록 순수한 정열과 열심을 가지고 살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침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 마음속에 들어오신 날부터, 제 삶에서의 집착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 마음을, 영혼을 향한 집착—구원주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강한 열정으로 불태우셨습니다. 그것은 절대 시들지 않고, 절대 지치지 않으며, 절대 수그러들지 않는 불입니다. 그것은 제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와 같으며, 날이면 날마다, 매달마다, 해마다 저로 하여금 영광스럽게 전진하게 합니다. 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한 메시지로 가득 차 있으며, 제가 하고 싶은 단 한 가지는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본 것 중 가장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 대답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영혼에 임하셔서 그것을 사랑으로 대치시키실 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기적입니다.” 저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날마다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번, 제가 그것을 직접 체험했을 때처럼 실제적이고 강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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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4년 9월 19일 금요일

주님의 심판은 실제입니다

주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은 절대 식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 그것들은 금보다, 참으로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들이며 또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또한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그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 (시편 19:9-11) “주의 종이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그들의 목자로부터 진실을 듣지 못하는 이 모든 현혹된 양들에게 과연 누가 경고의 말씀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이 최후심판일에 대한 설교를 부정적이며 거짓 예언이라고 말했으나, 다윗과 선지자들은 그것을 달콤한 꿀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해 하고 계시는 가장 감미로우며 자비로운 일은, 다시 한 번 담대한 선지자들과 목자들을 보내 교회를 일깨우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미로운 음성인지요: “하나님의 진노에서 탈피하라.” 꿀처럼 단 말씀입니다! “거룩함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으리라.” 꿀처럼 단 말씀입니다!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꿀처럼 단 말씀입니다! “지구와 그 안의 모든 업적은 불타 없어질 것이다!” 꿀처럼 단 말씀입니다! 저는 당신이 예레미야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예레미야 15:16)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24:13) 이 말씀은,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결코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며 모든 시험을 인내로 견뎌내는 자들을 말합니다. 디모데는 그것을 건전한 교리를 향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 짖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 (디모데후서 4:3-4) 순수하며 때 묻지 않은 교리에 대한 엄청난 저항은 바로 이 마지막 날에 몰려오고 있습니다. 건전한 교리는 듣는 자들을 성결로 인도하지만 많은 자들이 그것을 감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견뎌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에 대한 말씀과 예언적 경고를 대적하는 광범위한 거부가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0-12 참조)

마지막 시간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냉담해진 나머지, 떨어지는 심판조차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때의 백성을 향해 이렇게 애통해 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이 근심하지 아니하고, 주께서 그들을 소멸시키셨으나 그들이 바로잡는 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예레미야 5:3)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이러한 경고를 듣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들을 미리 알았은즉 저 사악한 자의 오류에 이끌려 너희도 너희 자신의 굳건함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 (베드로후서 3:17-18) 죄, 거짓 교리들, 또는 말씀을 향한 분노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2014년 9월 18일 목요일

천국에서 내려온 꿀

우리는 그분의 모든 말씀을, 천국에서 내려온 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반드시 배워야만 합니다. 한 성도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그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따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느 설교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진노의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나는 책망이 없는 오직 위로의 말씀만을 설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모든 애가와 재앙에 대해서는 이제 진력이 났습니다!” 이 설교자는 하나님의 꿀(말씀)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에스겔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반역하는 민족, 나를 반역한 민족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내게 죄를 짓되 바로 이날까지 그리하였나니, 그들은 뻔뻔하고 마음이 뻣뻣한 자손들이니라… 사람의 아들아, 오직 너는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을 듣고 그 반역하는 집같이 반역하지 말며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니라. 내가 보니, 보라, 그분께서 한 손을 내게 보내셨는데,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 한 권이 있더라.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셨는데 그것은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안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되어 있더라.” (에스겔 2:1, 3-4, 8-10)

하나님의 애통한 말씀이 이 선지자에게는 꿀처럼 달았습니다. “너는 반역하지 말며…” 어떻게 에스겔이 반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한 손을 내게 보내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두루마리를 들고 계셨는데, 그것에는 양면 모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인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토록 비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에스겔이 어떻게 해야만 했었나요? 그는 그것들을 먹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것으로 그의 배를 채우라고요! “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발견하는 것을 먹으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말하라, 하시기에 내가 입을 벌리니 그분께서 나로 하여금 그 두루마리를 먹게 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 배로 하여금 먹게 하고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창자를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그것을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꿀같이 달더라.” (에스겔 3:1-3)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 즉 꿀에 발린 만나였습니다!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창자를 채우라.” 여기서 창자는 심령을 의미하며 “그것을 먹으라.”는 그것을 주의 깊게 마음속에 새기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꿀같이 달더라.”

예레미야는 이전의 모든 선지자가 심판과 재앙을 경고해왔다고 말했습니다. “나와 너 이전에 옛적부터 있던 대언자들이 많은 나라들과 큰 왕국들을 향해 전쟁과 재앙과 역병에 대하여 대언하였느니라.” (예레미야 28:8) 모든 선지자는, 그것이 슬픈 말씀이든 기쁜 말씀이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의해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 모두를 꿀처럼 달게 받았습니다!

2014년 9월 17일 수요일

그분은 시온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순전한 마음들을 일깨워, 그들로 하여금 이전 선지자들의 경고를 상기하게 하는, 참으로 훌륭한 경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1-2) 베드로는 계속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는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에 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베드로후서 3:3-4) 베드로는 이 비웃는 자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교자들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다루셨던 심판을 고의로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베드로후서 3:5-6)

이것은 베드로의 신랄한 비난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백이십 년 동안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했던, 노아라는 의로운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악함과 폭력을 심판하실 것임을 이미 세상에 보이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엄청난 홍수를 보내, 온 지상의 모든 호흡 있는 생명을 말살시키셨음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경고로 가득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심판하시는지의 실례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아는 선생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돔의 파멸)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욕정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열망이나 그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한 열망은,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심판을 향한 자신들의 눈을 고의로 멀게 했습니다.

이러한 설교자들은 베드로와 사도들과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나니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라.” (베드로후서 3:13-14)

어떻게 우리가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백이십 년을 참고 기다리셨던 이유와 같습니다.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 (베드로전서 3:20)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그분은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하나님께서는 지금 마지막 대의 그분의 거룩한 백성, 시온이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온전히 그분에게 헌신된, 점도 주름도, 그리고 흠도 없는 그분의 백성을 불러내시며 그분의 거룩한 성령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2014년 9월 16일 화요일

당신은 어느 나라에 속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매일의 삶을 마치 “모든 것들의 종말이 가까운”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지런하고 깨어있어야 하며, 마치 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하인들처럼 그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해 이 땅을 떠날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갈망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태워지리라. 그런즉 이 모든 것이 해체될진대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 모든 거룩한 행실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서두르라. 그 날에 하늘들이 불이 붙어 해체되고 원소들도 뜨거운 열로 녹으려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 (베드로후서 3:10-13)

11절은 헬라어 원본에서 가장 명백히 설명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해체될진대 너희는 어느 곳에 속했느냐?” 당신은 해체되고 녹아 없어질 이 땅에 속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지으신 천국 시온의 시민입니까? 현재의 하늘과 땅의 파멸에 대해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이유는, 당신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함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 이어서, 우리가 다가오는 파멸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우리의 예복을 정결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나니,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라.” (3:14)

만일 베드로가 부활하여 지금 이 나라를 방문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들의 모든 솜사탕 설교에 경악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문했을 것입니다. “왜 저들은 다가오는 파멸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내게 이 메시지를 직접 주셨어! 왜 저들이 그것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왜 저들은 이러한 경고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각성시키지 않는단 말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와 똑같은 경고를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자기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태복음 24:29)

2014년 9월 15일 월요일

완벽한 언약 by Gary Wilkerson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7)

저는 이 말씀 중에서 한 부분을 항상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그 부분은 바로 “그분께서… 될 필요가 있었으니…”라는 구절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그분’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꼭 무엇을 하셔야만 했을까요? 그분은 하나님이신데요. 우리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시는 것을 택하셨고, 치유해 주시는 것을 택하셨으며, 그분 주위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택하셨다고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절은,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한 산 제사가 될 필요가 있었다고 했을까요? 그분이 천국에서 단순히 “나는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 천사들을 보낼 것이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 구절은 성경 말씀 중에서도 드물게, 주님께서 스스로 노고를 자처하셨음을 묘사한 구절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모두 새 언약 아래서 그리스도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다면 언약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상대편,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나 단체가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의무에 대한 합의입니다. 예를 들면 사업의 경우에 있어서, 법적 계약서는 두 회사가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의견을 동의하는 언약입니다. 전쟁 중인 양 국가가 서로를 향한 적대감을 멈추고, 다른 방법으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국가 간의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언약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 언약을 맺을 때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몫을 담당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만일 네 몫의 약속을 지킨다면 이러이러한 축복과 혜택이 네게 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분의 몫을 담당하셨지만, 인간은 그들의 약속을 절대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로 그분은 모든 언약에서의 그분의 궁극적 목적을 성취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태초부터 이 모든 것들을 예견하셨고, 절대 깨질 수 없는 완벽한 언약을 세우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그 누구도 절대로 깰 수 없는 독특한 목적을 지닌 확고한 언약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언약을 인간과 맺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과 맺으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새 언약이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과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맺기 위해 선택하신 분은 아담도 아니었고 노아도 아니었으며, 여러분도 저도 아닌—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언약이 영구하다는 보증이 되십니다. 어느 누구도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언약을 완벽하게 지켜주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보증서입니다!

2014년 9월 13일 토요일

넓이보다는 깊이를 by Jim Cymbala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는 범주가 있으며, 진리의 성서들 안에 기록되고 보존되어 있습니다. 마치 바닥 없는 우물처럼, 하나님 진리의 심오함은 그 누구도 측정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 능력, 기도, 성령, 또는 하나님 사랑의 권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우물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모든 남녀들은 이 방대한 저장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진리라는 우물의 주변에서 고작 물장구만 치다가 우물 밖 주위로 뛰어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 좀 보세요.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라고 사람들이 선언합니다. 물론 그 새 일은 약 육 개월 정도 지나면 점차 소멸 되어버리고, 그들은 다시 새로운 잔디밭으로 돌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우물 이쪽저쪽을 뛰어다니며 그들 온 삶을 보내지만, 결코 우물 안 생명수의 깊이를 탐색하지는 않습니다.

그 우물 안에는 떠나게 하거나 뛰쳐나가게 하는 아무런 요소가 없습니다.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을 측정할 수 있을까요? 과연 어느 누가 타락한 인간을 향한 그분 자비의 부유함을 고갈시킬 수 있을까요? 진정한 기도의 능력을 어느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특히 1960년대에는 유행이 북아메리카의 교회에 범람했고, 그것은 그저 더 새로운 유행으로 대치되곤 했습니다. 부흥을 열망했던 설교가이자 저자였던 영국 출신의 레너드 라벤힐(Leonard Ravenhill )은 그가 죽기 바로 전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며 확장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교회는 10마일이나 넓게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는 약 4분의 1인치 정도밖에 안됩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경기장에 가면, 우리는 값비싼 운동화를 신고 있는 유명 운동선수를 분명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그들이 공을 골인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최신 장비가 있으나 그들은 농구를 하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도 필요한 모든 장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천 년 동안이나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이름 안에서 득점판에 점수를 넣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자, 그러니 이제 우리가 받은 것들을 온전히 신뢰하며 전진합시다.

하나님에 대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내일보다는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를 돕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그분 언약에 우리 자신을 순전히 내어드린다면, 신약성서에서 그분이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결코 구하거나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행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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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9월 12일 금요일

능히 보호하시는 성령님

기도를 하지 않고, 준비가 되자 않은 사람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때에 바로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악마의 무리에 의하여 압도당할 것입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요한계시록 6:17). 하나님께 중심을 둔 모든 주님의 자녀는 악한 날에 설 수 있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에배소서 6:13).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다서 1:24).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이사야 59:19). 때때로 여러분은 예고없이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따사로운 햇볕을 기분 좋게 쪼이며, 기뻐하며 감사 찬양을 올리는 중에 갑자기 사탄의 공격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사탄이 당신의 성질을 알고 도발할 것입니다. 또는 갑작스런 홍수와 같이 몰려오는 두려움으로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또는 당신의 힘을 앗아가고 앓아 눕게 만드는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오래전 극복해 냈다고 생각한 정욕이 당신은 구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서 일어남으로 당신을 자극할 것입니다. 아니면 우울감으로 당신을 몰아세울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원인인지도 모른 채 홍수에 잠기듯 갑작스레 휩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과 같이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시편 142편).

2014년 9월 11일 목요일

천국에서 내려오는 이슬 처럼

구약성서에서 선지자들을 찾아보면 지금 우리가 예언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26장과 신명기 4장 30-31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명기 4:30-31). 이 구절은 우리 시대인 말세를 위한 말씀입니다!

미국은 의를 찾는 올곧은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국인들에게 선하셔서 은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만 미국은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일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신속한 심판을 주실 것입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이사야 26:9). 이사야의 예언적인 환상에서 심판의 밤이 와서 다가오는 어두움을 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며 고통을 견디는 남은 자들을 부르십니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구로하며 부르짖음같이 우리가 주의 앞에 이러하니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찌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이사야 26:17-19). 이 구절에서 여인은 해산의 고통으로 인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여인의 고통은 사망한 교회 속에서 생명이 있는 교회가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 몇 년간 영적인 고통을 부르짖으며 무언가 탄생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기를 소망하며 이곳과 저곳을 돌아다녔으나 상충하는 신학적 교리에 부딪히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처럼 당신의 죽은 마음을 다시 살아났습니다. 당신은 깨어났고 새 노래로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당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주의 이슬”은 “초자연적인 빛에 의하여 태어난”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그의 영광스런 빛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 이슬같이 신선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2014년 9월 10일 수요일

남은 자들을 부르시는 하나님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은 말세 때, 환난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남은 자들을 부르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다니엘은 과거 선지자들의 예언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그의 시대의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하였습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다니엘 9:2-3).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공부하면서, 이스라엘의 70년 망명은 곧 마칠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예레미야 29:10-11).

다니엘은 왜 기뻐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왜 믿음의 약속을 붙잡고 그냥 쉬지 않은 것일까요? 그는 왜 울며,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기도를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12-14절 말씀에서 구원과 선한일을 약속하셨지만 조건도 따랐습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예레미야 29:12-14).

죄 또는 무관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무산시킬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신명기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 인하여 흩어지게 될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관한 경고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 4:29).

2014년 9월 9일 화요일

기도의 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열왕기상 18:42-44).

엘리야 또한 인간이었고, 두려움, 기다림, 소망, 절망 그리고 필요 등 우리와 같은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응답을 받아 결과를 이끌어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달려가라”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온 마음을 다하여 문이 열려있든 닫혀있든 기도하십시오! 엘리야는 부지런히,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했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작은 한가지의 신호를 보게 하기 위해 그의 사환을 일곱 번까지 보내어 지평선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번, 두번 기도한 이후에 하나님께 화를 내며 포기를 합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로 해결이 안되었습니다. 기도를 했지만, 남편과 저의 문제는 계속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은 아직도 갖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끈질기게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야의 때로 돌아가서 머리를 땅에 박고 끊임없이 응답을 인내와 소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wrestling with God)”이라고 표현합니다. 야곱의 기도는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세기 32:26). 기다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마음과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지 않으면서 그의 임재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는 힘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될수록 당신의 기도는 더욱 효과적이고 진심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더욱 중요해질수록 응답과 문제의 해결은 더욱 중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의 문제가 해결되든 아니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이미 승리를 주셨습니다!

2014년 9월 8일 월요일

환난의 날을 직면하는 것 by Gary Wilkerson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1-5).

여기서 바울은 헌신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건의 모습만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믿는 자들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3:7). 다른 말로는 복음의 가르침을 모두 받았으나 진심으로 받아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능력 없는 신앙생활을 하였고 바울은 그들을 “진리를 대적”(3:8)하였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똑 같은 시험에 들지 않을 찌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우리도 물론 육적인 세상에 결코 면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시험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험과 환난은 우리 안에 전에는 갖지 못한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평범한 신앙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수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믿지 않는 한 명 한 명의 영혼은 지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지 않는 영혼 한 명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빠르게 늘어나는 믿지 않는 영혼의 수는 우리로 하여금 평범한 신앙생활에서 한발 짝 더 앞으로 나가서 두려움이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이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레오나드 라벤힐이 한 말을 제가 의역하여 인용해 보겠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너무 평범 이하인 나머지 만약 어느 크리스천이 신약 성서에 나오는 크리스천처럼 행동한다면 그가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여겨 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흘리기 보다는 행동으로 옮기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의 삶과 당신의 삶에 큰 차이가 보입니까?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요. “주님, 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남기 싫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내 삶에 더해주시옵소서. 주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2014년 9월 6일 토요일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by Carter Conlon

사사기는, 지상에서 초자연적 증거라고 불렸던 하나님의 친 백성 이스라엘이 그분의 임재를 기만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을 때를 묘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정직하게 동행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분을 경배하는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자체를 아예 포기한 듯 더욱 불순해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만적으로 대하는 것은 언제나 무력함을 초래하며, 결국은 그 사회의 적들에게 굴복당하게 만듭니다. 여기서의 적들은, 하나님을 모르며 그분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없는 자들, 그리고 그분과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도 원치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당시의 구약시대와 매우 흡사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그때는 추수 때였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여기서의 경우에는 미디안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모아놓은 모든 것을 말살시켰습니다. (사사기 6:2-3 참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 땅에서의 목적을 달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실증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곤경의 장소로 데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원수의 수가 그들보다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현세대에서 우리가 그러고 있듯이, 주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수가 너무도 많아, 실제로 그들이 땅을 모래처럼 덮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이 거리에 나가 있는 홀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시며, 도대체 그의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모르는 가장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분은, 이제는 일상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끔찍한 범죄들에 관한 뉴스를 보고 들으며 이 세대를 위해 부르짖는 자들의 외침을 듣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지금 이 세대는 우리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아는 자들이 이 나라를 위해 간구하기 시작하기를 절실히 요구합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 백성들로부터 시작되는 근본적 각성만이 우리 면전에 있는 지극히 어두운 시대로부터 구원의 때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만일 이해 2014년이, 여러분과 제가 오로지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이 땅의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는 해였다고 천국 기념책에 기록된다면 그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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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2014년 9월 5일 금요일

우리의 기도에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의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그저 믿음으로 취하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곳 타임스퀘어 교회에서도 우리는 믿음에 대해 설교합니다. 그러나 결코 기도를 등한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순종, 회개, 말씀, 믿음, 그리고 기도에 대해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기도해야 합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셨는데 왜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까?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신다면 왜 계속 구해야 합니까?” 어떤 교회는 심지어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분께서 이미 약속해주신 것을 다시 구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그저 그 언약을 주장하고서 안식하세요.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견고하며 막강한 민족을 이루리라는 언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언약을 이미 그와 맺으셨습니다.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네게 주리라… 내가 네 씨를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창세기 13:15-16)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는 자들을 축복하실 것이며 그를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너무도 강했기에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주를 믿으니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그는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굳건하며 믿음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기도하기 위해 계속 제단으로 달려갔습니다. (창세기 12:8, 13:4 참조)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믿음도,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도 결코 기도를 대체하지 않았음을 봅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그 어떤 축복보다도 소중히 여겼습니다. 산꼭대기에서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을 향해 그의 두 팔을 높이 들고 서 있었던 모세를 보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패배시키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을 미리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 두 팔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모세가 재단을 쌓고 그것의 이름을 여호와닛시라 하였으니…” (출애굽기 17:15)

기도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초대교회에 비하면 우리는 거의 무신론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는 은밀한 기도를 힘들고 지루한 것으로 간주하며, 어쩌다 가끔만 기도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집에 살면서 서로 대화도 없으면서, 공식 석상에서는 서로 친밀한척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일부 성도들은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 주님을 대합니다! 기도, 특히 은밀히 드려지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외시되었고 멸시당했으며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를 열망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 (야고보서 5:16)

2014년 9월 4일 목요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상세한 말씀

베드로는 지붕 위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사도행전 10:9)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또 한 사람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라 하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 하는 부대의 백부장이더라. 그는 독실한 사람이요,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백성에게 구제물을 많이 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하루는 아홉시쯤 되어 그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자기에게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는 것을 분명히 보매, 그가 그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하니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올라와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었은즉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부르라. 그가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와 함께 묵고 있는데 그의 집은 바닷가에 있느니라.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가 네게 말하여 주리라, 하더라.” (사도행전 10:1-6) 이 얼마나 상세한 지시인가요!

한편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세 사람이 너를 찾으니, 그러므로 너는… 그들과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0:19-20)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에 이 시간까지 금식하고 아홉시에 내 집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보라, 한 남자가 빛나는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이르되, 고넬료야, 하나님께서 친히 보시는 중에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그러므로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여기로 부르라. 그가 바닷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묵고 있는데 그가 와서 네게 말하리라,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당신이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그런즉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들으려고 여기 하나님 앞에 다 있나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10:30-33) 성령은 너무도 상세하게도 두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여기로 부르라.” (32절)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단어들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사가 말하기를…” 천국은 닫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확한 마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이며 자세하고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의 말씀은 오로지 많은 기도후, 그리고 하나님과 만의 비밀한 시간을 가진 후에서야 내려왔습니다.

2014년 9월 3일 수요일

주님의 얼굴을 구하라

사도행전은 주님의 얼굴을 찾는 경건한 사람들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시켰는지를 말합니다. 그들이 다락방에 있을 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행정관들로부터 숨기 위한 비밀스런 장소에 있거나, 또는 ‘곧은길’이라고 불리는 거리에 있는 시몬의 집에 있거나,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아침에도 밤에도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했고 베드로는 지붕에서 기도했습니다. 바닷가나 성전, 또는 사막에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상세한 인도를 받을 때까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하나님과 밀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놀라운 인도하심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는지요.

아나니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기도하는 제자였습니다. “다마스커스에 아나니야라 하는 어떤 제자가 있더라. 주께서 환상 중에 그에게 이르시되, 아나니야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곧은 거리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 하는 다소 사람을 찾으라. 보라, 그가 기도하고 있느니라. 그가 환상중에 아나니야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받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사도행전 9:10-12)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상세한 지시를 들어보십시오. 그분은 그 집의 이름과 집주인의 이름, 그리고 그가 기도해주어야 하는 사람의 이름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네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네 이름까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네가 그의 방으로 들어갈 때 네가 무엇을 할지도 알고 있다. 내가 그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왜 주님께서는 이 새로 회심한 자에게 그토록이나 친밀한 세부사항을 말씀해주셨을까요? 왜냐하면, 그가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삼일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주여, 저를 위해 무엇을 해주시렵니까?” 보다는 “주여, 제가 무엇을 하게 하실건가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사울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미디어 공세와 베스트셀러 책, 그리고 간증을 해달라는 온갖 교회로부터의 초청 등의 세상적 선전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많은 자들이 사울처럼 기적적으로 구원받지만, 그와는 달리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며 곧 혼동 속에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 (사도행전 9:6)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가서 기도하라! 내 얼굴을 구하며 나를 기다리는 것을 배우라.” 그가 사흘 동안 기도했을 때까지 아무런 인도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기간중 무언가 강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주님의 음성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비록 새 신자였지만 이미 하나님에 의해 인도받고 있음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보여줄 상담자도 선지자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는 지식의 말씀을 그에게 줄 어느 누구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사도행전 9:16)

2014년 9월 2일 화요일

예수님이 더욱 필요한 지금

저는 사도행전을 부끄러운 마음 없이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사도들은 기적적 영역에서 살며 사역했습니다.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일반 평신도들도 기적을 행하며 온 도시를 움직였고 성령 안에서 강력한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는 그들의 족쇄를 풀어주었으며, 경비가 삼엄한 감옥에서 걸어나오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명확하면서도 상세한, 놀라운 환상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성령 충만하여, 그의 그림자가 닿기만 해도 사람들의 병이 나았기에, 사람들은 병자들을 침상에 실어 거리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5:15) 불구자들은 고침을 받아 성전을 뛰어다녔으며 놀라운 기적들이 행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특별한 기적들을 행하셨으므로: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질병들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악한 영들도 그들에게서 나가더라.” (사도행전 19:11-12)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영역에서 살지 못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했습니다! 그때와 똑같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똑같은 언약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때처럼 해주시시기를 기꺼이 원하십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대는 그보다 더 큰 계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잘 교육받았으며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 그것이 꼭 필요했지만, 지금도 주님께서 그때처럼 역사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 대한 제 의견은 이러합니다. 만일 교회가 세워지는 데에 기적들이 필요했다면, 마지막 대의 교회는 더욱 그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죄가 몇 배나 더 증가하면서 사악한 자들은 더욱 사악해지고 있습니다. 유혹자들도 증가했으며 폭력은 제재할 수 없을 만큼 돌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은 그 경계선을 확장했습니다. 사탄은 엄청난 분노와 함께 내려왔습니다. 악귀적 교리들이 홍수처럼 밀려오면서 배교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배교에 처해있습니다. 이 땅은 낙태라는 죄의 피로 흠뻑 젖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학교 안으로까지 침투한 코케인, 크랙, 헤로인 등의 마약과 술로 인해 통제가 불가능해졌으며, 그것은 십대 청소년들을 광적 강도들과 가증한 살인자들로 변질시켰고 그들을 파멸케 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질병들은 온 세상으로 사망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거 그 어느 세대보다도 더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 그리고 치유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때의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의 대가를 알았으며 그것을 기꺼이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2014년 9월 1일 월요일

예수님을 바라보자! by Gary Wilkerson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2)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에 의해 우리 믿음의 경주를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릴 때, 원수는 그의 발을 내밀어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큰 승리를 맛본 후에 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순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셔! 이제 나는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거야.” 그러나 곧 우리의 상황은 반대로 돌아가며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립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주여, 저는 이것이 제 돌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 구절 끝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12:1) 비록 우리 상황이 우리를 의심하게 만들고, 우리가 죄로 인해 쉽게 넘어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달리는 경주는 인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인내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우리의 경주는 충분한 믿음을 쌓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12:2)이시므로, 믿음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도록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창시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우리가 특정한 경주를 달리도록,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기 오래전부터 그 생각은 그분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원한다.” 그분은 우리 안에 믿음을 창시하셨고, 그분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을 보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경주를 달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속에 심어놓으신 믿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그것이 사장되었다고 느낍니까? 너무도 많이 발을 헛디딘 나머지 이제는 지쳤습니까? 친구들이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 안에 믿음을 창시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이전에 알았던 믿음을 재활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로마서 10:17)

만일 당신의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완성시키고” 계심을 확신해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