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0일 금요일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최근에 매우 심란한 한 자매가 제게 편지를 써왔습니다 : “너무 두렵습니다. 그저 저와 제 가족에게 수소 폭탄이 떨어지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빨리 이 상황에서 나와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을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제 남편을 암으로 잃었고, 제 두 딸은 건강상의 문제가 있어 2년동안 직장을 다니지 못했습니다. 저 또한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서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로 아직도 회복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 몇 년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제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믿음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고 있고, 제 친구들 또한 무자비한 고난 중에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제 삶을 애워쌌습니다. 웰커슨 목사님, 우리는 많이 아픕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들에게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사실 이 자매는 절망과 소망을 잃은 상태에서 편지를 쓴 수천명 중에 한명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눈에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어서 어렵다는 내용의 연락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막다른 길에 놓여진 결혼생활, 건강상태 그리고 가족문제 등을 언급하며 말합니다. “정말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 무엇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쁜 상태에서 최악의 상태로 진행될 뿐입니다.”

“가끔 저는 이렇게 견디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주께서 저를 그저 이 구덩이서 바로 건져주셨으면 합니다.”

어리석고 미치는 것보다 더 최악의 것은 절망때문에 소망을 잃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찬송을 드리십시다! 우리는 소망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소망의 그리스어는 elpo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즐거운 확신과 신뢰, 기대로 앞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 언급하였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5:13).

바울은 정말 놀라운 생각을 하였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마도 바울은 이런 의미로 말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을 정도의 소망을 가지길 - 남을 뿐만 아니라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넘쳐흐르기를 원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정말 악랄한 농담이군요. 지금 제가 처한 상황에서는 그저 한줄기의 빛과 같은 소망만을 원할 뿐입니다. 기도 응답의 작은 증거말입니다.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작은 희망의 징표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셔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이 크고 넘치는 셀 수없는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2015년 1월 29일 목요일

부활의 능력과 생명으로 사는 것

피로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잠시 멈추어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그곳에는 도움이 필요한 잃어버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편안하게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한복음 4:32).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과 생명으로 살 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에너지입니다!

저는 제가 자주 수명이 다된 자동차 배터리같다고 느낍니다. 여러분께서 자동차의 라이트를 끄는 것을 잊는다면 그다음날 차는 죽은 기계에서 나는 땡그랑 울리는 소음을 낼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셨던 성령님이 오늘날 우리와도 함께 하시지만, 저는 오늘날의 믿는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11).

끊임없이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 성경에 정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며 특별한 에너지를 주셔서 우리의 육신에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로새서 2:13).

여러분은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으로 새 생명과 새 힘을 얻으십시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편 103:2,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디도서 3: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과 성령님의 거하심과 동행에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적용하셔서 부활의 능력과 새 생명으로 사는 삶을 사십시요.

2015년 1월 28일 수요일

성령으로 힘입어

우리의 믿음은 사망과 그 어떤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를 넘어서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사망한 모든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한 것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 아무리 절망적이고 헤쳐나갈 희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포기하여서는 안됩니다.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마가복음 5:21-43)를 참고해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의 능력을 알리고자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방안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마가복음 5:43).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오직 하나님과 당신만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할것이고, 설레게 할 것이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임재의 위대함은 한 강력한 구절로 간단히 요약됩니다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요한복음 1:4). 예수님은 그때도 지금도 영원토록 생명을 빛 같이 비추실 것입니다. 그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되셨고, 수 많은 군중이 그에게 몰려 들더라도 지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 한번도 성급하게 움직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쉬기 위하여 제자들을 모았을 때, 그들은 호수 저편의 조용한 공간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곳에까지 모여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또 문제의 집단이 말도 안되는 불평과 질문들을 들고 찾아왔구나. 도대체 언제까지 따라올런지?”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성령에 힘입어 그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 또한 고생스런 하루도 있었고, 밤새 기도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2015년 1월 27일 화요일

믿음의 편에서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시대에 회당장의 집에서 아주 안 좋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집 안에는 혼돈, 의심, 두려움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마가복음 38-40).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의 삶에 왜 그렇게 많은 소란과 슬픔이 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죽음에서도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고, 이미 엎어진 물이고, 예수님은 너무 늦게 오시고, 예수님이라도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우리 안에,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일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불신으로 인하여 여러분은 미리 포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모두는 위의 말씀에서 언급된 비웃은 사람들과 같은 죄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어려움 중에 하나님을 찾고, 너무 늦기 전에 응답하시고 중재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나서 응답이 우리가 생각하는 타이밍에 오지 않으면 바로 슬프게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마귀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인정한 것처럼 그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떨기 시작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패배하시고 마귀가 승리한 것 처럼 말입니다.

간혹 우리 삶의 어려움과 환란들은 안좋은 상태에서 최악의 상태까지 다다릅니다. 그럴때면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끝났군. 너무 늦었어. 그 어떤 이유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나를 구원하시지 않으실 것이야.”

희망을 잃었다고 생각했을때에는 그저 섬기고,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 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모든 소망을 잃었을 때 가장 지켜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어디있습니까? 마치 당신은 절대로 직장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아니면 사방에서 온갖 어려움이 자신에게 닥쳐올때에,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을 때 말입니다.

만약, 어려움에 놓인 당신에게 지금 바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당신은 예수님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직도 슬퍼하실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은 아직도 혼란 상태에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을 드렸으면 합니다. “주님, 절망적으로 보이고, 더 이상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저는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있을때와 제 앞에 계신 지금 모두 같으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십니다. 사망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실 수 있고, 이 절망과 어려움에서 나를 치료하실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2015년 1월 26일 월요일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by Gary Wilkerson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3:5).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중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저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양을 참 좋아합니다.
     은이나 금보다 예수를 갖는 것이 낫네.
     말할 수 없는 부(富)를 갖는 것보다 그분의 것이 되는 것이 낫네.
     집이나 땅보다 예수를 갖는 것이 낫네.
     못자국 난 그분의 손의 인도를 받는 것이 낫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언약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에는 이 세상의 다른 무엇에는 그 어떤 의미도 둘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동행 할 수 있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함을 얻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구 할 때 응답하시고 우리안에 거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이 후에는 그 어떤것과도 예수님을 바꿀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께 나와서 마음을 드리면, 주께서 당신의 삶에서 빛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당신의 처음과 나중 그리고 전부가 되어주실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마음의 중심이 있는 사람들은 언약의 완성을 안고 예수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을 산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더 이상 바라보지 않으며 이 세상의 육신적인 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힘겨운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들은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구하지 않아서 개개인의 삶은 점점 빛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바란단다. 너희가 꾸는 꿈의 그 이상을 계획하였고, 이룰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거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2015년 1월 24일 토요일

우리는 하란에 머무는 것을 거부합니다 by Claude Houde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너의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전 장과 문맥상의 자세한 내용의 본질을 주의 깊게 읽고 이해해야만, 우리는 그 부르심에 대한 온전한 의미와 중대성의 심오함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비, 그리고 그들의 전 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갔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 숙명, 성취,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축복의 풍만함과 성취를 상징합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그들의 삶과 우리 삶 속에 거하시기를 원하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그 여정은 혹독하고 길며 고달픈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극과 위협들, 그리고 엄청난 충격적 경험들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그들의 가족이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애통의 골짜기를 걸어서 통과할 때, 그 약속의 땅은 머나먼듯했습니다.

그들은 북시리아의 유프라테스 강 서부 600 마일쯤 되는 곳에 있는 성읍인 하란에 멈추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당도했을 때는 그들 여정의 3분의 2 이상을 마쳤을 때였는데, 그들은 육체적으로 탈진되어 있었고 영적으로도 지친 상태였습니다. “하란”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마른 땅, 결실이 적은”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비는 축복과 풍성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와 똑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생명에 대해 말씀하실때 사용하신 “zoe”라는 헬라어는 매우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완전함, 충만함, 풍성한 결실맺음, 진정한 행복과 성취” 등의 개념을 표현합니다.

자, 그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과 그의 아비, 그리고 온 가족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있었지만, 그들은 불행하게도 적은 결실의 땅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들은 더 힘써 전진하며 나아가고, 충만함과 풍성함을 얻기 위해 인내했어야 했으나, 범속한 것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적은 결실의 땅에서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 나는 이 적은 예배, 적은 성화, 적은 변화, 적은 전환과 적은 믿음의 실상을 거부합니다.” 저는 열방의 남녀 성도들, 모든 민족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렇게 선포하는 맹렬하고 열정적인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란에서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 아비의 집에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이고, 또한 당신과 저에게 하고 계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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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5년 1월 23일 금요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야이로라는 한 비통한 아비가 예수님께로 와서는 그의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마가복음 5:22-24)

이 야이로라는 사람은 거의 모든 기독교인의 표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알고 있으며, 우리에게 환란이 닥칠 때마다 그분께 달려가 그분 발치에 엎드려 그분의 자비와 도움을 구합니다. 야이로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3절) 라고 간청했습니다. 이것은 진실된 믿음의 확신이었습니다. “주님, 내 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당신입니다. 당신은 모든 권능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은 내 딸을 살릴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은 “그와 함께 가셨습니다.” (24절)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시간을 지연시키셨는데, 그것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분의 부활 권능을 믿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 믿음은 절망을 넘어서고 사망을 초월하는 믿음입니다! 이 어린 소녀의 병상 곁에 있었던, 명목상 믿는 자들은 그러한 한정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생명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나 희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했고 그분을 찾았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당신이 훌륭한 의사이며 치유자라고 믿습니다. 당신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신 줄을 압니다. 그러나 부디 서둘러주세요. 아이가 곧 죽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유형의 믿음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오직 죽음이 임하기 전까지만의, 죽을 때까지만의 믿음입니다. 상황이 가망 없어 보일 때, 이 믿음은 죽어버립니다.

끝내 이 어린 소녀는 죽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녀의 맥을 짚어보고 그녀가 죽었다고 단정 짖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작은 믿음조차 이제는 아예 사라져버졌습니다. 그들 장례식 절차의 맨 첫 번째 순서는 의사에게 그가 더이상 필요치 않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마가복음 5:35)

그러한 말들은 모든 것이 끝장난 것처럼 들렸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이 단어들은 당신 귀에 이렇게 울렸을 것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마시오!” “당신의 사역이 죽었으니 주님을 귀찮게 하지 마시오!” “당신 자식은 속수무책으로 죄에 빠져있어요!” “당신 배우자와 당신은 이제 가망 없어요!”

그러한 두려움에 찬 단어들이 예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절대 죽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부활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36절의 가장 적절한 표현인 헬라어 번역은 이렇습니다. “마치 그들이 하는 아무 말도 듣지 않으셨다는 듯,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부활의 권능

죽음을 정복하신 이는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죽음에서 일으키신 자들보다 더 위대한 그리스도 권능의 증거는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한복음 5:21)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는 권세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은 명백히 선포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자신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25)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실증해주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제로 믿고 있을까요? 그분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한복음 5:25-2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부활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죽은 자들을 일으킬 수 있는, 그분의 현재 권능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그분의 생명으로 넘치게 할 그분의 현존하는 권능 말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다들 우리 인생에서 오래전에 포기했던 어떤 사람이나 상황 등, 비밀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묻어버렸고, 그것이 죽은 날짜를 묘비석에 새겨놓았습니다!

우리와 친근한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녀는 우리에게 자기 자녀 졸업식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졸업식에는 친척들도 참석할 것이며, 오래전 다른 여자를 만나 떠났던 그녀의 전남편도 참석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여인이 그의 아내가 되었으므로, 이제 그들 결혼의 재활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들 결혼의 무덤으로 되돌아가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위해서도요! 이 여인은 그의 영적 죽음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친근한 또 한 자매가 있는데, 그녀 역시 그녀의 남편이 떠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 깊은 죄에 빠져 있습니다. 한때 좋았던 결혼이 있었던 장소에 이제는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그녀 역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도 절대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상 그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그가 죄로 인한 사망으로부터 부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죽은 자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현존하는 부활의 권능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5년 1월 21일 수요일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하심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에베소서 1:16-20)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는 단순히 이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과거의 위대하심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그분의 위대하심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교회는 이 땅을 걸으셨던 갈릴리의 예수님, 가르치셨으며 기적을 일으키셨고, 마리아의 아들이셨던 그리스도를 향한 큰 경외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셨고, 모든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셨으며, 중풍 병자를 일어나 뛰게 하시고, 구부러진 팔이 피게 하셨으며,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으며, 빵 몇 덩이와 물고기 몇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셨고, 죽은 자를 살려 일으키셨던 나사렛 예수의 위대하심에 대해 듣고 이야기하는 것을 결코 피곤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한 시점에서, 우리는 이 위대하시고 능하시며, 기적을 베푸시는 구원주에게 한계를 그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자연계가 아닌 영계만 다스리는 하나님의 신학을 개발해 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우리의 죄책감을 없애주시며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등,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든 일만 행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매일의 삶의 하나님, 즉 우리 자녀의 하나님, 우리 직장의 하나님, 우리 청구서의 하나님, 우리의 가정과 관계 등, 우리 실재 삶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바울은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난 후 부터의 그리스도 능력의 계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1:22)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하나님께서 통제하십니다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54:17) 당신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모든 노력은 그저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당신을 향해 겨냥된 저 큰 총구들은 주님의 임재 안에서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에서 이 구절은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너를 파멸하려는 어떤 계획이나 어떤 무기도, 그 어떤 험악한 대포도 너를 밀쳐내거나 넘어뜨리지 못할것이며, 오히려 그것은 없어져 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겨냥한 사탄의 공격을 말살시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을 열심히 찾는 자들의 상은 정복자 이상이 될 수 있다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37)

365년 동안 에녹은 모든 불화살을 떨쳐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숨 쉴 때까지 완전한 승리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기어 나오지도 않았고 절뚝거리며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삶의 불꽃과 영광으로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11:5)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라. 그들이 모일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이사야 54:14-15)

의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당신은 압제와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롭게 행하는 자들에게는 해가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이사야 54:16) 심지어 “진멸하는 자”도 주님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파괴적 무기를 통제하십니다. 우리의 안전은 의안에, 예수님과의 동행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도 절대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2015년 1월 19일 월요일

더 위대한 것들을 위해 그분을 믿으세요 by Gary Wilkerson

저는 최근 아일랜드의 한 목회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어려움을 예상하며 히브리서 11장 1절을 인용했는데, 그것은 제게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어보신 적이 있으시죠?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리고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게리, 당신도 알다시피 두려움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증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요. 그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는 소신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것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인생에서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걸림돌입니다.”

저는 오늘 이날이 지나가기 전에 당신께 권면하고 싶습니다. 그분의 완전한 사랑, 당신을 위한 그분 은혜의 일들, 모든 두려움을 쫓아낼 그분과의 언약 안으로 당신을 데려가도록 하나님께 요청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완전한 사랑을 받을 때 당신이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분의 사랑만이 완전한 사랑이며, 그분의 완전한 사랑은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당신은 사랑받았으며, 받아들여졌고, 당신 자신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한 어떤 우상들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 후,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습니다. 이제 당신을 위해 남아 있는 것은 당신의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할렐루야, 그것은 참으로 좋은 소식입니다!

창세기 15장 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오셔서 “이 땅을 주어 기업으로 삼게 하리라”는 언약을 그에게 주시는 것을 봅니다. 아브람 앞에는 긴 여정이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갖고 있었습니다!

친구여,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갖고 있다면, 그것에는 여정의 가치가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갖고 있다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형제 자매들아, 딸아, 아들아, 나를 믿으라! 믿음을 가져라!” 이전에 당신이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면, 올해는 그분 안에서 믿음을 가지세요. 이미 당신이 믿음을 갖고 있다면, 올해에는 그 믿음을 증가시키세요. 만일 당신이 위대한 것들을 위해 하나님을 믿어왔다면, 이제는 그보다도 더 위대한 것들을 위해 그분을 믿으십시오.

2015년 1월 17일 토요일

새로운 미래 by Nicky Cruz

제가 하나님께 처음으로 헌신했을 때, 제 마음 외에는 그분께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시건방지고 사회성도 전혀 없는 깡패였습니다. 저는 거리의 부랑아였습니다.

저는 뉴욕에서의 폭력과 범죄의 삶을 떠나 제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성서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성서대학에는 들어갔지만, 설교자나 전도사가 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라틴 사투리가 심한 저에게 그러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분께서 저를 무엇으로든 사용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무슨 쓸모가 있나? 하나님을 위해 나 같은 것이 뭘 할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으로 저는 혼란스러웠고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낙심되고 외로운 마음으로 제 방에 있었습니다. 저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왜 이렇게 고통당해야 합니까?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 평강을 주시옵소서. 저를 향한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보여주시옵소서!”

저는 그렇게 네 시간 동안을 방바닥에 누워,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실 때까지 그분께 간구했습니다. 갑자기 저는 제 영 안에서 놀라운 평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물결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심호홉을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했고 그분이 제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제 영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 니키야, 걱정하지 말라.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나는 어떤 목적을 위해 너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나는 너를 네 친구들과 네 과거로부터 분리시켰고, 이제 너에게 새 미래를 열어줄 것이다. 니키, 나는 너를 위한 계획을 갖고 있다. 나는 네가 나를 신뢰하기를 원한다. 나는 너를 전도사로 키울 것이다. 나는 네가 젊은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너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절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것이다.”

저는 하나님께 제가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분을 섬기기를 원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제가 더 말할수록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니키, 그저 나를 신뢰하라. 믿음을 지키면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네게 보여줄 것이다. 너는 내가 인도할 때 그것을 듣고 따라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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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5년 1월 16일 금요일

빛으로 부르신

주님과 동행할 때 당신은 빛, 방향, 분별력, 계시, 지식을 상으로 받을 것입니다. 매일 자신이 죽을수록 빛은 더 환해질 것입니다. 스가랴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어둠 속에서 우리를 비춰줄 빛으로 오셔서 우리의 발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79 참고).

당신이 지금 어떠한 어둠과 망설임의 저주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한복음 12:46).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로새서 1:13).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당신의 삶은 아직도 혼란, 안개 등의 어둠속에서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있고, 그와 대화를 하며, 친밀한 교제를 하면 예수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의 임재 안에는 조금의 어두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악의 어두움은 하나님을 혐오하는 공산주의 지도자 또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그러한 최악의 어두움은 자신을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면서 빛되신 주와 동행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누가복음 11:35).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 빛을 거부하고 왜곡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복음 9:39-41).

바리새인들처럼 몇몇의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나는 보입니다.” 또는 “저도 보입니다. 그 어떤 목사님이나 다른 믿는 사람들보다 더 잘 보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먼저 자신의 삶, 자신의 가정 중에 있는 어려움, 혼란을 인정하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십시요. 제가 눈이 먼 것입니까?”

우리가 만약 진리, 진정한 빛에 우리를 내려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거짓된 빛에 있음에도 빛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매일 동행하는 삶으로 돌아가십시요. 그와 매일 함께 걸을 때에 우리 안의 모든 어두움을 꺼내어 노출시키시고 진정한 빛으로 부르시고 채워주실 것입니다.

2015년 1월 15일 목요일

모든 통치권은 오직 주님께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마귀가 들어서서 탈취하기 때문에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엇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정말 엄청난 충격을 받고 파괴적인 자아상(Self-image)을 갖게 될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제어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혀와 행동은 분노와 쓰라림으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함께 동행하고, 그와 대화하면 – 예수님께서 사탄은 우리를 지배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곧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재빠르게 하나님께 모든 통치권을 드릴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마귀를 좇아내고, 믿음으로 바로서서 모든 두려움, 거짓, 음모, 지옥으로부터 오는 모든 궤계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하시더라”(마가복음 16:17-18).

바울은 정욕을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들에게 경고를 줍니다.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디모데후서 3:6). 자신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하고, 거룩한 질책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치 못하는 여인들은 그들이 듣고자 하는 기도를 해주고 자신을 잡아먹을 선생들을 찾아갑니다. 자, 이렇게 “유인하는자”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여인들을 이러한 약속으로 유인합니다. “우리 모임에 오면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곳으로 가면 오히려 사로잡힌바 될 것이고 그들은 유인하여 여러분을 탈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편한 곳으로 달려가기 보다는 다시금 열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하며 동행하면 됩니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편 69:20).

2015년 1월 14일 수요일

하나님의 임재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워 졌습니다. 에녹은 장막의 뒤편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체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 믿고 기도했습니다. 에녹은 이 땅위에서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오시옵소서! 이 땅위에 내가 남아 있어야할 그 무엇도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소위 말하는 “믿음”을 얼마나 허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그들의 믿음은 모두 자신의 필요, 계획과 목적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흔히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만 합니다. 에녹과 같이 마귀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하나님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에녹은 성경책도 찬송가도 선생님도 성령님도 거룩한 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장막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선지자의 책망이나 촉구 없이, 남이 보여준 좋은 예시도 없었지만 그는 주님을 따르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많은 도움과 더불어 예언적 경고와 성령님의 거하심이 있음에도 왜 하나님을 믿고 그저 따르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요? 에녹이 오늘날 우리가 가진 많은 도움들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던 악한 시대에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옮기워졌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도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승리 안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구하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브리서 11:6). 에녹이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충성됨과 믿음에 대하여 분명히 상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찾는 이에게 어떻게 상을 주실까요?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제 경험에 의하면, 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상을 주셨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 제가 가진 모든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제 아내, 자녀들, 친구들 그리고 사역까지도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삶으로 거대한 강물처럼 흐르는 참된 생명이 자연스럽게 삶에서 흐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 시험과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상을 주실것입니다.

2015년 1월 13일 화요일

예수 안에서 승리의 부재

이 세대의 가장 비극적인 현실은 바로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진실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음아파하시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안에 참된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수 많은 믿는 이들이 어느 순간 타오르듯이 뜨겁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차가워 집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우울증은 증기롤러처럼 그들을 덥치고 밀어버립니다.

부부들의 결혼생활도 극과극을 달립니다. 하루는 모든 것이 좋다가도 그 다음날에는 비참할 정도로 비관적입니다. 어떤 날들은 서로 대화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요. “뭐, 원래 결혼생활이 그런거지. 언제나 행복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야.”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서 믿는이들에게 말합니다.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이 구절은 수 많은 크리스천들에 대하여 완벽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사탄은 마음대로 크리스천들의 삶에서 들어갔다 나왔다 합니다. 그들은 사탄이 마음속에 침투하는 것을 막을 권세도 능력도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마귀의 덫에 걸려 있는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거역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디모데후서 2:25 참고). “거역하는 자”라는 의미는 자기 자신이 덫에 걸리도록 만들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승리의 길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덫에 걸린 이유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승리를 잊은채 또는 아예 모른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까? 마귀의 궤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 “예수님께 온 마음을 드리고도 당신의 소망과 의지는 마귀에게 주어도 괜찮습니까? 과연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주신 증거고 간증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불행을 질환, 오해 또는 무신경한 가족, 친구 또는 상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당신이 선택하는 모든것에 당신의 불행을 탓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마귀의 노예로 살아가는 데에는 그 어떤 이유도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귀가 당신의 감정을 가지고 이용하여 당신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기만 하고, 삶의 문제들은 점점 커지기만 하고, 두려움은 자라나나 기쁨은 점점 소멸되고, 슬픔이 당신의 맘 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 그것은 바로 당신이 원수 마귀에게 사로잡혀 조종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지금 덫에 걸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받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수개월 이상 섬기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을 알아가며 매일 영적으로 자라가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영적 승리는 달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임재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2015년 1월 12일 월요일

거하는 자 by Gary Wilkerson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세기 11:31).

데라라는 인물에 관하여서는 너무 조금 기록되었기에 우리는 그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합니다.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은 한참 떠오르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번영과 활기가 넘치기 시작하는 떄였습니다.

아브람은 점점 부유해지고 있는 그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전도 유망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을만한 살기 좋은 지역이었지요. 그러나 아브람의 아버지는 그 땅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떠난 이유가 아브람 아버지의 야망 때문인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11장 31절에는 “데라가…데리고”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데리고”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기회를 붙잡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갈고 주먹을 꽉 쥐며 “미래는 내가 설계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것이야”라고 말하는 어감이지요. 이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주신 언약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기회를 붙잡은 삶의 방식의 결과는 31절의 끝부분에서 데라가 하란에 거하였다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하신 적 있으실 것입니다. “과정이 나에겐 너무 벅찹니다. 압박감, 강도 모두가 큰 바위를 동산으로 밀고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 육신으로 그 어떤 것을 시작하려고 한다면 데라 같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란에 머물렀지요. 평범한 것에, 보통 정도에 그저 머물고자 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계획을 향해 출발을 해 놓고도 갑자기 포기하는 것이 바로 데라가 얻은 결과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위한 미래를 설계하고, 더 부자가 되기 위하여, 더 많은 명옝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것은 데라처럼 “거하는” 즉 머물게 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의 반 까지밖에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15년 1월 10일 토요일

뒤따르는 표적으로 by Jim Cymbala

그리스도의 세계를 얻으려면 열심히 탐구하는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올바른 교리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습니다. 선포와 가르침도 충분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뒤따르는 표적으로 그분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4 참조) 달리 말하면, 복음은 하늘에서 보내주신 성령의 개입하심과 함께 전해져야 합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 초자연적 일들을 행해주십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관념이나 이론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의 손을 펼쳐주시옵소서. 저희와 함께 일해주시옵소서.” 그들은 확실히 살아있는 믿음, 단지 십자가에만 기초한 믿음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텅 빈 무덤에 기초한, 살아있는 믿음을 원했습니다. 타락한 정치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임당했던 한 순전한 자에 대한, 너무도 가슴 아픈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아도 이해할만합니다. 그러나 그 텅 빈 무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직 초능력의 하나님만이 그러한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열정적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는 하나님 권능의 실현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 그들은 소수의 사람이나 관심 있어하는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논쟁을 듣습니다. 기독교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서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을 향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해야 한다는 끝없는 반복과 계명들로 구성된 구약의 “언약 종교”입니다. 모세와 같은 현대적 설교자들은 언약을 구하며 산에서 내려옵니다. 모두가 ‘예’라고 말하지만 불과 이틀 내에 그 언약은 깨지고 맙니다. 지속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우리를 초자연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경우도 매우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데 교회에 말씀하셨듯이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1-3, 6)

저는 사람들의 감정을 일깨우기 위한 멜로드라마나 연극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분을 손을 뻗치시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시라고 요청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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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1월 9일 금요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이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해드린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뻐하시는 믿음을 낳았던, 그의 하나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다음의 두 구절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브리서 11:5-6)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고 온 역사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들은 믿음의 남녀들이 되었습니다. 만일 교회가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지속적으로 우리 주님과 친교한다면, 그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믿음에 대한 세미나를 주최하고, 믿음에 관한 녹음테이프를 배포하며 믿음의 말씀들을 인용하는 등, 모두 믿음을 낳게 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로마서 10:17)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곧 말씀이십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없다면, 문자는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죽었으며 이기적인 부담스러운 감정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믿음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분과 가까이 동행함으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히브리서 12:2)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은 오늘날 교회에서 상실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과 존엄하심에 친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분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그분을 가장 많이 신뢰합니다.

그분과 가까이 동행하며 죄를 미워하고, 세상과 분리되며 그분의 음성을 알아가는 사람들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설교나 교육이 필요없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열 단계’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의 심장 속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며 부상하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분 고유의 믿음이 될 것입니다!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이, 그것과 상응하며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던 믿음을 낳지 못했다면, 아마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옮기워졌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요! 그의 믿음의 전부는 그의 마음속의 한 위대한 열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열망이었습니다!

2015년 1월 8일 목요일

그는 세속적이지 않았습니다!

살아있을 때 들리움 받아 올라간 (승천한) 단 두 명의 선지자였던 엘리야와 에녹에게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다 죄를 혐오했고, 그것을 대항해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너무도 가까이 동행했기에, 경건치 못한 것들에 대한 그분의 증오를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든 자에게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성향은 죄에 대한 증오가 점점 커진다는 사실이며, 죄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당신이 아직도 이 세상을 사랑하며 경건치 못한 것들에 친숙해 있다면, 그리고 그분을 욕하는 자들과 친분을 맺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며, 그분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걷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창세기 5:24)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이것이 에녹의 승천을 말하고 있으며, 그가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깊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 정의된 “그가 더이상 있지 아니하더라.”는 “그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의 영 안에서와 그의 분별력 안에서, 에녹은 이 악한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 안에서 천국의 영역으로 들리워졌습니다. 그가 날마다 주님과 동행했을 때, 그는 땅의 것들로부터 더욱 분리되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매년마다, 그는 본향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으며, 더욱 영광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 세상에 대해 날마다 죽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에녹은 그의 모든 의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보살폈고, 일하며 섬겼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세속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의 그 어떤 부담도 하나님과 그와의 동행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의 모든 깨어있는 순간은 그분께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마음은 마치 커다란 고무줄처럼 하나님께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고무줄은 당기면 당길수록 그것을 놓는 순간 더 빨리 튕겨져 나갑니다. 에녹의 마음은 항상 주님께로 “튕겨나갔”습니다.

그의 주위 모든 인간이 더욱 사악해지고 있을 때, 그리고 인간들이 욕정, 강퍅함, 그리고 관능으로 가득한 야수와도 같이 변질되었을때, 에녹은 점점 더 그와 동행했던 그분을 닮아갔습니다.

2015년 1월 7일 수요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증가하는 재난들로부터 숨기 위해 산속으로 달려갑니다. 소위 선지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그들의 피난처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예측되는 미국 경제 붕괴로부터 탈출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제가 어디에 있을지를 압니다. 경제가 몰락하면, 1987년 10월 19일에 증권시장이 몰락했을 때 제가 그랬던 것처럼, 저는 증권가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현대판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고 대화하며, 두려움 없이 평온하고 담대한 증인으로서, 그들의 세계가 무너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가라!”고 말씀하셨지, “너희는 숨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령이 계시는 곳에 있기를 원하며, 그분이 전방의 최전선에서 곤경에 처해있고 두려움으로 가득한 자들을 그분 자신께로 부르실 것임을, 당신은 확신해도 됩니다.

에녹은 이 세상을 악하게 보았습니다. 그가 사는 세상은 사악했으며, 온 역사와 마지막 끝날까지를 내려다보며, 그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경건치 못하다! 경건치 못하다!” 였습니다. 아담의 칠대 후손인 에녹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슬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유다서 14-15)

당신은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에녹이 세상을 보았던 것처럼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경건치 않고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득하며, 당신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퍅한 언사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요. 어찌 당신이 경건치 못한 일들에 참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이 오셔서 정죄하시려는 자들과 당신이 어찌 연합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분은 수만의 그분의 성자들과 함께 이 죄로 범람했으며 패역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했습니까?

만일 당신이 예수님과 팔짱을 끼고 그분과 대화하며, 그분으로부터 경청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 경건치 못한 세상 체제를 증오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대적해 발언하는 자들을 대항해서 그분 편에 설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나와 원수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4:4 참조)

2015년 1월 6일 화요일

하나님과 동행하기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5-6)

“동행했다”라는 단어의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에녹이 오르락내리락, 들락날락,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과 친교하며 성장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에녹의 아버지 야렛은 962년을 살았고, 그의 아들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365년, 또는 “한해의 햇수”만큼을 살았습니다! 그의 온 생애 모든 해의 365일 동안, 그는 주님과 팔짱끼고 동행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삶 자체였습니다!

에녹은 사악한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한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 딸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22) 그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의무 등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똑같은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고 그들의 생계를 감당하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사탄의 손아귀와 그 어둠의 왕국으로부터 나와, 그리스도의 빛의 왕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골로세서 1:13) 우리는 마귀의 올무로부터 예수님의 심장 속으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옮기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셔서 마귀의 권능에서 우리를 들어내셔서, 우리를 천상의 장소로 옮기신다는 의미를 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녹처럼 그분께 가까이 동행하는 자들만을 옮겨주십니다. 사탄의 뜻에 사로잡힌 자들은 어둠으로부터 들리워져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당신의 마음을 단호히 굳힐 때까지는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으며 그분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향해 당신이 그분께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이 기도하고 울며 그분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날마다 그분과 동행하지 않는 한, 당신은 절대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더 깊은 속박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2015년 1월 5일 월요일

은혜가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by Gary Wilkerson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1:3-4)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못마땅하게 여길지언정, 에베소에 머물 것을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그곳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다면, 그 이유는 에베소 교회가 당면하고 있었던 문제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해 보이고 의로워 보이려고 노력하며, 독선에 빠져 살고 있는듯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독선적일 때,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속은 것이며, 그것은 당신을 탐욕과 야심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마게도냐에는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역시 기근과 빈곤으로 찌들어 있었습니다. 마게도냐와 예루살렘이 그러한 환란 가운데 있었을 때에도, 에베소의 경기는 여전히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많은 자원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해서만 그것에 집착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디모데전서 6:17-18)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단어 ‘명하여’는 “엄격히 명령하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대의 부한 자들에게 관대하도록 명하라.” 왜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관대해야 하며, 더이상 자신들을 위해서만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율법적으로 들렸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어디서 은혜를 잃었으며,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인들에게 그렇게 명하도록 바울이 권고했던 이유는, 단지 그들로 하여금 헌금을 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고, 그들의 삶에서 은혜가 결핍되었음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2015년 1월 3일 토요일

하나님의 길은 더 높습니다 by Carter Conlon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나의 쏘는 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사무엘상 20:35-38)

그의 인생에서 이 어려운 시점까지 오게 된 다윗의 여정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날도 들에서 아버지의 양들을 보살피는 평상의 날에 지나지 않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날 그는 느닷없이 안으로 불려들어가 사무엘 선지자를 만났고, 사무엘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다음 왕이 되도록 그에게 기름부음을 했습니다. 왕좌를 계승하기 전에 다윗은 은밀하고도 엄청난 승리들을 거두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리앗이라고 불리는 거인을 상대로 공공연하고도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의 삶에 그러한 믿음과 담대함을 부여했던 그 기름부음 안에서 행했을 때, 다윗은 그의 마음속에서 불타올랐음이 틀림없습니다.

머지않아 사울은 다윗을 그의 시종으로 삼았고, 다윗은 사울의 삶에 있었던 어둠을 몰아내는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주님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다윗은 내내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체험했고, 그를 대적할 원수는 없는듯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사울은 시기심 외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사무엘상의 이 구절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한테 타진해 볼 거야. 너는 들판에 숨어있어. 그럼 내가 돌아와서 화살을 쏠 때, 만일 나와 함께 있는 아이한테 ‘화살이 네 앞편에 있다.’고 내가 말하면, 네게 해가 미칠 것이 분명하니 너는 반드시 도망쳐야만 해.”

저는 이 상황을 이렇게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말씀하시려 했으나, 다윗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듣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네 마음에 준 모든 소원을 성취시킬, 네 인생을 향한 계획을 갖고 있다. 사울의 통치 아래 실패할 체제적 과도기가 오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 시기를 재촉할 것이고 너는 그것을 주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까지 나는 너를 어둠의 장소들로 데려갈 것이다. 네가 그 산전수전을 통과할 때에, 비록 그것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나를 따라야만 한다.”

저는 그것이 바로 ‘화살이 네 앞편에 있다.’라는 말의 더 깊은 의미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다는 하나님의 표시이자 암시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전부는 우리가 그분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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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1월 2일 금요일

큰 함성

우리는 그저 잠잠히 있으며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면 됩니다. 때때로 영이 달콤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예수님께 드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적을 이기는 승리를 주실때에 사람들은 언제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리고를 돌던 일곱번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것이라”(여호수아 6:5). “이에 백성은 외치고 …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여호수아 6:20).

에스라서에서는 성전의 지대가 놓여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한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 여호와를 찬송하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를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이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에스라 3:10-11, 13). “함성”이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귀를 찢어지게하는” 뜻을 가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넘치는 기쁨으로 큰 소리로 찬양을 드려 귀를 찢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 안에서 나는 큰소리와 함성을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데살로니가전서 4:16).

시편에서는 우리에게 기쁨의 소리를 하나님께 외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소리”는 천둥, 불꽃, 불을 의미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찌어다”(시편 66:1).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시편 81:1). “온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 찌어다…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찌어다”(시편 98:4, 6, 8).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경험하는 엄청난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는다면 숲의 나무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타임스퀘어 교회에서는 이런 찬양을 합니다. “두려워말고, 얼굴을 들라. 하나님의 능력이 내려올 때까지 노래하자.”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2015년 1월 1일 목요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사도행전 2:28).

여러분은 예수님께서는 일상에서 어떤 분이셨는지 상상해 보셨습니까? 그의 마음은 어떠하셨을지, 그의 자세는 어떠하셨을지? 짊어지셔야 하는 수 많은 짐 때문에 움추린 듯 해 보였을까요? 예수님은 우셨을까요? 예수님의 모습에서 엄숙하고 무거움이 느껴졌을까요?

예수님은 우셨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처럼 피를 흘리셨을 때, 그리고 불신 때문에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참된 기쁨이 충만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사도행전 2:25-26). 베드로는 유대인 의회에 이 말씀을 전하면서 시편 16편의 예언을 인용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마음은 기뻐하며, 입술로 즐거움을 표현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 앞에서 충만한 기쁨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듯이 기쁨은 충만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첫번쨰 이유는 바로 사망이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이 사실을 앎으로 예수님께서 마귀의 손에 의하여 죽으시고 지옥으로부터 싸워 돌아오셨다는 악한 교리를 짓밟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주께서 우리의 오른편에 서서 우리의 어려움 중에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소망을 갖고 기대하며 평안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27절). 


우리는 버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얻고 새 몸으로 하나님 나라로 부름 받을 것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그의 임재가 우리로 하여금 넘치는 기쁨을 갖게 합니다! 지옥과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고, 영생을 약속받았으며 이 땅에서 어려움 중에 있으나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삶에서 나타나는데 어찌 소리치며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