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31일 금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즈음에는 진보된 학문을 배우고 존경받는 잘 훈련된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신학교에서 신학, 철학 그리고 도덕 등을 배우는 시간을 보냅니다. 출중한 스승에게서 배움을 받고,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 명망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 훈련된 사역자들이 설교하려 강단에 서면, 의미 없는 텅 빈 말만 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한 흥미로운 일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영을 식어버리게 합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계시가 없고, 주님과 개인적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통찰력은 빌려온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에베소서 4장, 특히 20절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을 누가 가르쳤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었던 설교들이나 주일 성경학교 공부에서 온 것입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주님을 아는 것의 한계가 거기까지입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설교하시든지, 스승이 얼마나 기름 부음을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머리속 지식보다 더 많이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제가 일회성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구원 능력과 은혜의 계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태껏 알고 있는 단 하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시고 구원자입니다. 그분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증거합니다. 모든 진정한 신앙인들은 이 놀랍고 삶이 변하는 계시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은 평생에 걸친 깊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바울은 다마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말에서 떨어지고 천국에서 말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누구도 이것보다 더 개인적인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2015년 7월 30일 목요일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계시

백부장 고넬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설교자도 목회자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10:2).

그는 자기의 직접적인 지시에 움직이는 백 명의 군사들이 있는 아주 바쁜 사람이지만, 시간이 나는 순간마다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하는 도중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백부장은 그것을 하나님의 목소리로 듣고 대답합니다,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행10:4).

주님께서 고넬료에게 가서 사도 바울을 찾으라고 직접 말하셨습니다. 그에게 주소와 해야 할 말 등 자세하게 지시 사항을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바울이 지붕에 올라가 기도할 때, 이렇게 듣습니다. "또 소리가 있으되" (10:13) 다시 한 번, 성령님께서 자세한 지시 사항을 주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행10:19-20).
바울은 진정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약속을 위해 고넬료의 집으로 그들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진 일은 유대 성령강림 교회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평범하고, 교육도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고넬료가 주님의 목소리를 똑똑히 듣고 능력있게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도전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천국에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해 보여준 것이 사람의 뜻으로 배워진 것이 아니라고 증거했습니다. 정작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예수님 그분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갈1:15-16).

바울의 시대에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아폴로나 가말리에라는 위대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과 얘기하고 같이 지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간접적으로 다른 이를 거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속 늘어나는 계시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2015년 7월 29일 수요일

광야에 홀로 있는 것

오늘날 안타깝게도 많은 사역자가 생명 없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 말씀은 죄를 일깨워주거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울부짖음에 대답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범죄 행위입니다. 굶주림이 큰 이 시대에 텅 빈 철학을 쏟아 내는 것은 듣는 이들에게 더 큰 상실감만 초래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 3:29). 그리스어 그대로 번역하면 “그 안에 거하고 함께하는 신랑의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랑의 음성을 듣고 있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 되었다. 그 소리는 나의 영혼을 만족하게 한다. 어떻게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가? 그의 곁에 서 있고 그의 마음을 말하는 음성을 들음으로써이다."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까?’라고 궁금해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 요한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은 그리스도의 세례 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몇 마디 말을 나눈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이 하신 것 같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운 것은 광야에서 혼자 있을 때였습니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 고립시켰습니다. 맛있는 음식, 편안한 잠자리나 좋은 옷으로 이 세상의 즐거움을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나 조언자, 책이 없었습니다. 그 고립된 시간 동안 요한은 주님과 교제했습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작고 고요한 목소리를 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세상에 육으로 오시기 전부터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류안에 거함으로써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그가 회개의 메세지를 받고, 어린 양이 오심을 깨닫고, 주님은 흥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느낀 것도 다 같은 방법을 통해서였습니다. 요한은 이 모든 것들을 주님에게서부터 배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은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이러한 교류를 한다면, 주님은 우리 삶의 자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알려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2015년 7월 28일 화요일

예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시간

저는 주님께서 사셨던 것 같이 사는 것이 은혜의 시간인 오늘날에도 가능한지 여쭤보곤 합니다. 영광 의 하늘 아버지 목소리에 완전히 의지할 수 있습니까?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마다 우리의 삶을 향한 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가능합니까? "나는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것만 말하고 그 분이 하시는 것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길이 저희 앞에 펼쳐져 있습니까?

저는 기쁨이 예수님과 홀로 둘러싸여 있을 때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쁨은 그분을 경배하고 섬기고, 그분의 마음을 드러내시도록 기다리는 것에서 옵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임재 속에서 작고 고요한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님으로서 제가 책이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절대로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을 말씀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섬겨 주십니다. 그분의 참되심이 제 영에서 살아있음으로 다가오고 제 안에 있는 심장이 기뻐서 뛰게 됩니다!

물론 그 곳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특정한 경험이 제 삶의 방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이렇게 여쭤보곤 합니다, "완전히 의지하는 삶이 가능할까요? 아니면 이것이 저의 소망에 불과할까요? 제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도록 꿈만 꾸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는 특권 아래 저희 많은 사람이 살아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주님 앞에 서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엘리야를 읽습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조언을 들으며 서 있는 예레미야를 읽습니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예레미야 23:18). 비슷한 이사야의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이사야 30:21).

많은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사는 우리 세대에게 왜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세상은 혼란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지금 왜 주님께서 침묵하시겠습니까?

2015년 7월 27일 월요일

주님 안에 거하는 것 by Gary Wilkerson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조건에 진실하셨습니까?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이끄시고 지켜주셨습니까? 주님의 영이 그 아들 위에 맴돌고, 위안과 격려를 주셨습니까? 주님께서 예수님을 시험 가운데 돌보시고 영광의 승리 집으로 안내하셨습니까? 당연히 그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같은 영원한 서약을 저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17:15).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6절). 요점을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진실로 그들을 신성하게 하셔주소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시고 악에서 보호하셔주시옵소서. 모든 유혹에서 함께하여주시고 저에게 주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약속을 주시옵소서.”

약속의 말씀을 사랑 안에서 지키심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2-23절).

다음번에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로 괴로워할 때, 아마 이런 정죄하는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너는 틀렸어. 죄를 너무 많이 지었어. 하나님께서는 너를 타락했다고 생각하셔. 너는 깨끗하지 않고 성스럽지 않고, 좋을 게 하나 없고 복음에 있어서 불명예야. 네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께, 사단에게, 또 나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나는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과 약속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그 자신의 피로 그 언약에 서명하셨고, 아버지께서 나의 시련 가운데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아버지께서 무엇이 오든지 내 손을 잡아주실 것이고 그분의 사랑을 나에게서 절대 거두지 않을 것이고, 나를 승리로 이끄실 것이다!”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서, 주님께서는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없애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네가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대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무나 강한 서약을 해서 네가 나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도 할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 깃들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할 때, 온전히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15년 7월 24일 금요일

하나님의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

성경은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막 6:56) 라고 예수에 대해 기록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의 믿음 없으므로 인하여 치유의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어떻게 치유할 때와 치유하지 않을 때를 아셨을까요? 분명 아버지의 미세한 음성을 들으셨을 겁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우리의 부르심도 이와 동일합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들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나아가 제자를 삼으라; 말씀을 상고하라; 의안에 거하라; 가난한 자, 병든 자, 궁핍한 자, 옥에 갇힌 자를 섬기라.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상황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급작스러운 상황을 맞을 때가 있고 이럴 땐 성경에는 없지만, 그 순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미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들으셨던 아버지의 음성을 우리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 15:15) 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는 아버지와 교통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40)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는 이스라엘의 선생들에게 “내가 지금 너희에게 전한 진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아브하함은 이렇게 할 수 없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죽은 신학 안에 살고 있다. 너희는 과거를 공부하고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율례와 법도를 배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지난 과거에 묶인 것이 아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침례 요한 또한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었습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요 3:32)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책과 설교들로 만족하지 마라.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은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다.”

2015년 7월 23일 목요일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단둘의 시간 가운데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곧 예수는 기도 가운데 아버지의 모든 격려와 예언의 말씀을 들으신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께 청원하고, 예배하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적을 행하신 후, 말씀을 가르치신 후, 또한 바리세인과의 논쟁 후 곧 예수는 다시 아버지와의 은밀한 교재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마태복음 1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침례 요한의 사망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마 14:13) (저는 혹시 예수께서 침례 요한이 수년을 지냈던 그 빈들로 가신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는 거기서 홀로 기도하시며 요한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은 사랑하는 친구였고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아버지와의 교재 가운데 예수는 은혜를 구하셨고 또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는 다음 날 행해야 할 지시를 받으셨습니다.

그곳을 떠나시자마자 예수는 이적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 14:4) 같은 날 예수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십니다. 얼마나 바쁘고 고달픈 하루였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날 저녁 예수는 무리를 돌려보내셨습니다.

곧바로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좀 쉬면서 식사라도 하시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니면 제자들과 함께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시지 않을까? 아니면 베다니로 돌아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편히 휴식을 취하지 않으실까?

예수는 이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길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 14:23) 라고 합니다. 또다시 예수는 곧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는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라는 것을 아셨던 겁니다.

2015년 7월 22일 수요일

아버지의 마음으로 부터

예수는 공생애 동안 아버지의 음성을 날마다 의지하셨습니다. 항상 그 음성의 지시를 따라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매 순간, 이적을 행하실 때 마다, 그리고 날마다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아버지의 세미한 소리를 들으셨을까요? 성경은 기도를 통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차례 예수는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 하셨습니다. 무릎을 꿇은 가운데 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반복하셨고 아버지는 그때마다 신실하게 무엇을 행하고 말해야 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 5:15~16)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선택할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 수많은 사람 중 어떻게 열두 명을 정하셨겠습니까? 훗날 신약 교회의 기둥들을 정하는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 열두 명의 이름을 미리 알려주셨을까요?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전날 저녁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을까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눅 6:12~13) 아버지는 그날 저녁 누가 제자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같은 날 저녁 아버지는 아들에게 팔복 산상수훈을 알려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5) 예수는 이 말씀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부터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2015년 7월 21일 화요일

주님 가신 길을 따라

예수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온전히 하늘의 아버지만을 의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 주는 영광 가운데 계신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행동과 발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오직 아버지의 지시하에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 8:28~29)

예수는 날마다 아버지의 인도 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하루하루의 삶은 아버지를 의존하며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의 연속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 중 예수는 안식일 베데스다 못에서 누워있는 다리 저는 자를 보셨습니다. 예수는 그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하시고 그는 곧 나아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 (요 5:17~20)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럼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 그리스도에게 이러한 명령을 주신 걸까요? 언제 예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신 걸까요? 언제 아버지가 예수께서 하실 말과 행동을 지시하신 걸까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전 영광 가운데 이 일들이 일어난 걸까요?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예수의 하루하루의 삶에 대해 계획한 걸까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유대인 명절 안식일 날 베데스다 못에서 다리 저는 자를 만나면 일어나 걷게 하라고 지시하신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우리가 주와 함께하는 동행하는 삶과 너무나 다릅니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삶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 와서 우리가 겪고 느끼고 만지는 아픔과 나약함을 직접 채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사시고 그가 걸으신 길을 따라 갈수 있는 것입니다.

2015년 7월 20일 월요일

모든 혜택은 결국 우리에게 by Gary Wilkerson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자신이 아버지와 맺은 언약들을 이루기 위해 하신 것들입니다. 길잃은 양들을 찾으셨고,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갇힌 자들을 푸시고 영생의 말씀을 선포하며 이적을 행하시고 귀신을 쫓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런 모든 복음서의 구절 구절 들은 아버지께서 예수를 보내신 목적을 이루시는 순간들입니다.

이 모든것을 통하여 예수는 아버지의 말씀이 응하게 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이사야 49:5).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히브리서 2:13). 아버지의 신실하신 말씀으로 예수는 고통스런 죽음의 순간도 견디실수 있었습니다.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 50:5~6)

예수의 마지막 기도 가운데도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 관계를 목격하게 됩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5) 또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루셔야 하는 언약의 부분을 기도로 아버지께 말씀드립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한복음 17:1, 4)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것은 바로 창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명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아들과 언약을 채결하셨습니다. 곧 예수는 “ 아버지. 제가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지켰습니다. 제가 인류의 구원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저들이 나와 한 몸이 될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를 믿는 모든자들에 대한 미래를 보장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아버지께 당당히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 주셨고, 아들은 목숨을 내어 주셨으며 우리는 그에 대한 모든 혜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29:29, 34)

2015년 7월 17일 금요일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반석

구약성서 다니엘서를 보면 우리가 말세의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어 끝날지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꾸었고, 다니엘은 해몽을 하였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다니엘 2:31-33).

왕은 사람의 형태를 띤 밝고 번쩍거리지만 끔찍한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그 몸통은 단단한 쇠로 만들어졌지만 그의 발은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니엘은 이 이미지가 이 세상의 나라들을 의미한다고 하였고, 진흙은 세상의 마지막 권력의 나약함을 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나라들은 말세가 다가올수록 점점 어두워지고 끔찍해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2:34-35).

여기서 다니엘이 언급한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시고 천국으로부터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의 모든 제국들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러한 현상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성은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무릎은 꿇게 될 것이고 모든 입술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기와 폭탄 또는 미사일로 테러집단을 박살내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가 임할 때에 모든 악한 권세를 물리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의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온 세상의 테러리스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놓여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테러리스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나의 희생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여자들과, 달콤한 음식들을 영원토록 즐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현듯 깨닫게 될 것입니다 - 그들이 완전히 말살시키려고 하였던 그 이름이, 자신들을 심판할 심판자로 앞에 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15년 7월 16일 목요일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1:3).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멀어지지 않기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진실함”이라는 단어는 성실함, 진심, 그리고 독점적인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그리스도는 복잡한 어떤 개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신성하시고, 성령으로 잉태하사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죽으신 이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의 진리로부터 떠나 부패해버릴까 걱정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다른 예수를 가르치는 목회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 11:4). 쉽게 말하자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을 구원한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에 대하여 듣고 있다면, 저는 여러분께서 다른 예수에 대하여 들음으로서 부패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여러분은 알지 못하나 조금씩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다른 복음을 용납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런 가르침을 전하는 선생들은 여러분을 부패시키고, 여러분은 자신을 부패시키는 그들을 묵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확인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분별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악한 복음을 들으며 알게 모르게 다른 예수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묵인과 용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한 구절로 요약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전적으로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무슬림도 아니고, 힌두교도 아니고, 유대교도, 그 어떤 이방신도 아니고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들에게 물으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가복음 8:27). 제자들은 대답하였습니다. “침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8:2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짜 질문을 하십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8:29).

우리의 대답은 베드로의 대답과 같아야 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 이 고백이 지금과 영원히, 온 세상 앞에서 우리 개개인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15년 7월 15일 수요일

사탄의 “사랑의 함정”

마귀가 세상의 교회에 악한 메시지를 퍼트릴 때, 미적지근한 믿음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속아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합리화 시킬 것입니다. “모든 교회들은 다 괜찮을 것이야. 그 교회들의 리더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하고 다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하고 다니는 교회는 믿음이 좋은 진짜 크리스천 교회일 것이야.”

그들은 상당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악한 만트라(기도 또는 명상 때 외우는 신념이 담긴 주문)는 바로 “예수, 예수, 예수” 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단체의 리더들은 벌써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모든 단체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까? 결국에는 유대교도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무슬림들도 예수를 선한 사람, 훌륭한 선생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시크교도 그리고 힌두교도들도 예수님을 존경합니다.”

제가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이 2001년에 9/11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 전국민적인 통합이 이루어져서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믿음을 가진 미국인들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모두 함께 기도하였던 것에 참으로 감사하였고, 그러한 통합이 이 비탄에서 극복된 이후에도 지속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종교적 통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매우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예언을 토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태복음 7:22).

거의 모든 종교는 귀신 쫓는 의식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설교하고, 봉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조금은 다른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셨듯이, 이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는 모든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르며 너 또한 나를 모른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너는 나를 단지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나의 복음의 능력을 없애버렸다. 자 이제는 나에게서 떠나가라. 하나님 나라에 너의 자리는 없다.”

2015년 7월 14일 화요일

최후의 전쟁

지금 이전쟁의 쟁점은 예수님의 신성(神性, divinity)입니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가? 그가 진정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독생자인가? 아니면 그저 선한 일을 하는 또 하나의 선지자일 뿐인가? 그는 신이 아닌,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아니던가?

사도바울은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하여 간증하였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땅 위에 영생을 주는 이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메시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한 바울도 다시 한번 말합니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에베소서 1:19-21). 그리고 유일하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베소서 1:22-23).

바울은 또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할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이 땅 위에 모든 입술은 알라, 모하메드 또는 그 어떤 힌두교의 신들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시대에 겪고 있는 전쟁의 쟁점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길 바랍니다. 이 싸움은 이 이름이다 저 이름이다 왈가왈부 할 문제가 아니고 오로지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2015년 7월 13일 월요일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지옥으로 가지 않도록 구출 작전을 세우셨습니다. “주께서 이상 중에 주의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돕는 힘을 능력있는 자에게 더하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으되”(시편 89:19).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류가 점점 죄로 인하여 연약해 지고 비참해져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못 찾고 있다. 그리하여 나의 거룩한 아들을 보내어 그들을 나에게로 돌아 올 수 있는 길을 내어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 하셨을 것 같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편 40:8).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한복음 12:49).

성경에서는 이러한 말씀을 명확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립보서 2:7). 그는 멸시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이사야서 53:2-3). 이 모든 것을 이루신 이후에 인류의 죄를 위하여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예수님께서는 무리의 목자로 인류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말씀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사야서 61:1-3).

2015년 7월 11일 토요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by Jim Cymbala

역대상 11장 22절을 보면, 다윗의 위대한 용사 중에 모압 사람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여 공훈을 세운 브니야가 소개됩니다. 그는 눈 올 때 함정에 내려가 사자를 죽였으며, 키가 2.5m가 넘게 큰 애굽 사람을 놀랍게도 막대기 하나로 그의 창을 빼앗아 죽입니다.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삼십 명 중에서는 뛰어나나 첫째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니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장을 삼았더라” (대상 11:23-25).

이 시대의 사람에게 명예를 주는 것은 박사학위가 아니었습니다. 명예는 돈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꼭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명예는 왕을 위해 공훈을 세운 결과로 따라오는 부산물이었습니다. 

누가 오늘날 하나님께 공훈을 세웁니까? 사단이 어디로 몰려 후퇴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깔끔한 설교로 사람들을 사로잡거나 매끄러운 조직능력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름 부음으로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는 위대한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저도 이러한 주님의 위대한 사람 중 한 명쯤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필리핀에서 온 리나는 저의 아내 캐롤과 저에게는 여동생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브루클린 태버나클 교회를 시작하던 초기에 커다란 축복으로 용맹한 영을 가진 그녀를 보내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안내원이 가끔 술 취한 사람이나 난폭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어쩔 줄 모를때 성령님께서 주시는 대담함으로 대신 맞서주었습니다.

연설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리나는 싸움에서 싸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도와 중보 사역을 이끌었습니다. 교회에 더 큰 건물이 필요하거나, 주님께 다시 데리고 와야 할 형제, 자매가 있을 때 그녀는 브니야의 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제단에서 도움을 청할 때 그녀는 하나님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헤쳐나가는 기술을 알고 있는 그녀가 주님 은혜의 보좌에 같이 서 있어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리나는 저희 교회에서 시작된 국내, 국외 교회들을 다니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공훈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리고 늘 기도의 불씨를 지펴줍니다. 할렘, 샌프란시스코, 페루의 리마와 관계없이 리나는 믿음의 여주인공으로서 살아있는 본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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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7월 10일 금요일

경종을 울려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깨우는 첫 번째 경종은 아시리아로부터의 침략이었습니다. 최대의 적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다행히도 침략은 그 두 곳에 불과했고 피해도 최소한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선택받은 백성은 경계심을 잊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두 번째 일깨우는 경종 소리를 받게 되고 이번에는 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불리는 시리아와 블레셋 두 국가가 연합해서 갑자기 공격해온 것입니다. 이사야에 의하면 이 공격은 모두 앞과 뒤에서 온 것입니다(사 9:12). 침략군이 동쪽과 서쪽에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공격했다는 뜻입니다. 이 뜻밖의 공격은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2011년 9월 11일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후, 많은 미국인은 묻습니다: 이런 뜻밖의 침략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이런 재앙이 오도록 그의 백성은 무슨 잘못은 한 것인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날에 그의 백성에게 신실히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사 9:8).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고 모든 백성들에게 그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구절은 우리의 비탄의 때에 중요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주님은 항상 말씀을 보내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재난의 때에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문도 모른 채 내버려두신 적이 없습니다. 저희를 버리시거나 저희 혼자서 깨닫도록 내몰지도 않으십니다. 항상 상황을 이해시켜주는 말씀을 제공해주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이 시간에 주님을 위해 말씀을 전하는 경건한 파수꾼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 목자는 주님의 얼굴을 찾으며 비탄해 하고 눈물 짓고 또 회개합니다. 저는 그들이 현재 일어나는 상황들 뒤에 전해지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듣는다고 믿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무서운 경고를 전하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재앙 뒤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말하게 마음이 움직여졌습니다.

2015년 7월 9일 목요일

말씀을 놓쳐서는 안되는 이유

많은 목회자와 성경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앙과 하나님은 연관된 것이 없다. 주님은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비극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국가적으로 급격히 놓치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많은 목사님과 같이 저도 끔찍한 재난에 울고 상심합니다. 저는 주님을 기도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찾습니다. 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죄 없는 사람들이 죽을 때 상심하는 것보다 더 깊은 비탄에 젖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거나, 주님의 크신 선포하심을 못 듣고 귀먹은 채로 있을 때 상실감 보다 더 깊은 슬픔이 저희에게 싸이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비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예로 드는 데 반대하시면, 사도바울의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1). 사도 바울은 구약의 경우들이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준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하던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250년간 참을성 있게 대처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회개케 하시려고 "가벼운 환난"을 백성 위에 내리십니다. 뻔뻔한 우상숭배에서 돌이키고 주님의 축복과 은혜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든 선지자가 동일한 핵심적인 말로 이스라엘인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겸손할지어다." 성경은 "또 우상을 섬겼으니...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라고 말합니다(왕하 17:12-13).

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분의 회개로 향한 소리를 거부합니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17:14). 이 백성들은 겸손하라고 조언하는 선지자들을 조롱합니다. 그리고 대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왕하 17:15-18).

2015년 7월 8일 수요일

완전한 준비

저는 전쟁터를 대비해서 완전히 준비된 용사가 되고 싶습니다. 싸움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신병 훈련소에서 훈련 가운데 아니면 조건적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사단이 갑자기 저에게 공격할 때, 저는 가능한 한 많은 탄약이 필요할 것이고 그 탄약은 제 마음속에 간직해 놓은 하나님 능력의 말씀에서 공급됩니다. 그래서, 다음에 사단이 공격할 때 저는 꺼내 쓸 수 있는 저장고가 있음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전쟁터를 나가기 전부터 저는 주님과 함께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장비를 갖춰주신다고 믿는 헌신적인 용사입니까? 그렇다면 다음 세 가지 요건을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1. 당신은 주님의 말씀을 성실히 읽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신하지 않으면, 다가올 시련을 처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으로 확신하여집니다.

2. 당신은 신실한 기도 시간을 통해 매일 하나님과 친밀함을 쌓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련의 시간에 주님께 울부짖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에 하는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좋은 때에도 아버지를 역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상황적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3. 당신은 하나님께서 견딜만한 만큼이 아니고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큰 시련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강건하든지 약하든지에 상관없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한 은혜를 주셨고, 당신이 하나님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 필요한 때에 주님께서 그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2015년 7월 6일 월요일

새 언약을 붙잡고 by Gary Wilkerson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 (시89:34).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언약’이라는 단어는 필수 요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언약’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는 설교나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 가지 언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은 인간과 계속 언약을 맺으십니다. 무엇에 관한 언약일까요? 더 중요한 것은 그 언약이 오늘날의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언약은 일종의 계약 같은 두 명 이상의 상호 간에 맺은 협정이거나 약속입니다. 그 협정을 이루기 위해서 각 측이 무조건 준수해야 할 조건이나 의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은 법적 구속력이 있으며, 일단 확정이 되면 각 측은 각각의 조건을 이행하지 못했을 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신약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전면 가득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교리를 몇 세대 동안 교회들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젊은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신약에 초점을 맞춘 ‘언약 신학’이 방종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신약은 너무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유로워서 사람들이 잘못 사용하거나 자유방임적인 생활방식을 권장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이 어두운 시대에 확신이 필요하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힘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약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격식을 갖춘 약속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스라엘의 영적 자손으로서 이 언약에 믿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시 89:28).

2015년 7월 4일 토요일

거절당함을 거부하는 것 by Carter Conlon

성경에는 어떤 사람이 늦은 저녁 이웃에게 가 빵을 달라고 하지만 손님이 와서 줄 것이 없어 거절당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누 11:7-8).

끈질김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기도로 말하자면 “이 세대가 빵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지만, 저에게는 풍족한 물량이 없습니다. 제 지식은 부족하고 제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은 너무 메말랐고 용기도 부족합니다. 이 세대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성령님을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주실 때까지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누 11:9-10).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받습니까? 모든 사람, 다입니다! 유명한 사람이나 예비 엘리야, 엘리사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여러분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볍게 구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다락방에서 120명의 사도가 기도할 때 그들은 단순히 가볍게 주님의 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집 밖으로 나가면 난폭한 군중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들이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거절당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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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타임스퀘어교회(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타임스퀘어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는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 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