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31일 월요일

구경꾼 by Gary Wilkerson

하나님 안의 가족으로서,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며 말씀 듣고 나눕니다.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할 때 구경꾼으로 남아있기 쉽습니다. 종종 죄 안에 있는 사람을 볼 때 그들을 죄 밖으로 나오게 도와주기보다 그의 죄가 적발되기를 비밀스럽게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며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 사생활이 늘 좀 이상해 보이더라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할까요? 아마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이가 돌을 던질 만한 죄가 있습니다. 사실 여자를 부정하다고 고발하여 예수님 앞에 데려왔던 바리새인들은 아마 군중 속에서 아무나 끌고 나와 돌을 던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똑같은 일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로서 저는 이 구절을 좋아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 회개하는 우리 한 명 한 명에게 그와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했을 때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라고 말하셨을때 놀라움은 더 커집니다(요 8:26). 아마도 모욕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정죄할 끝없는 목록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죄하는 것 대신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순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2015년 8월 28일 금요일

목소리 없는 울음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귀머거리를 치유하시기 전에 우리는 이런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마가복음 7:34). 여기서 탄식은 신음소리 또는 가청 가능한 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짝 얼굴을 찡그리시며 마음으로부터 탄식하셨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물론 귀머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이 탄식은 무엇을 의미하였을까요?

그 의미에 대한 많은 해설과 주석을 읽어봤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제게 말씀해주시는 것과 같은 해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영이 두가지 이유로 조용히 울고 계셨을것 같습니다. 첫번째는, 이 귀머거리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마음과 두번째로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 특히 청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 때문에 우셨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와 현재에서 예수님께서 보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보신 그 귀머거리의 마음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목소리 없는 울음을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울음, 쌓이고 또 쌓여 표현할 수도 없는 짐과 무거움을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탄식하시고 표현할 수 없는 울음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탄식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귀머거리가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리도 내지 못하며 울면서 보냈을 수많은 밤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느낌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표현하고자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내가 만약 한번이라도 말을 시원하게 할수 있다면.. 1분이라도 내 혀가 풀려 내 영이, 내 마음이 겪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나는 바보가 아닙니다. 나는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몹시 혼란스럽고, 어려움을 갖고 있지만, 그저 그 누구도 내 소리를 듣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이 혼란스러워 하는 이 귀머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적인 탄식을 모두 이해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연약할때 주님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람의 귀먹고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주는 고통을 모두 느끼실 수 있으셨습니다.

2015년 8월 27일 목요일

수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마가복음 7:33). 예수님께서는 이 귀먹고 어눌한 자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아셨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져주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발견한 그 무엇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만나고 변화되는 경험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치유해 주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수년간 믿고 섬겨왔다면,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 예수님과 초자연적인 만남을 가진 순간을 기억할때에 그가 당신을 만져주셨고 당신은 예수님의 터치를 받은 순간 알아채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 안 것이 아니고 설교자가 전하는 메세지로 안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당신 스스로 만나고 경험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예수님과의 교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귀먹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계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의사소통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화였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마가복음 7:33).

이 귀머거리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정죄하시지도 의심하시지도 않으시네. 내가 무슨 상황에 놓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 알고 계시네. 내가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계시고 내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대화하고 싶은 내 소망도 알고계시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하는 것도 알고 계시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의 안수 없이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없다네. 그런데 나의 모든 소망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 또한 구원받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영혼도 그냥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울이었을 때, 그를 얼마나 인내하시고 걱정하시고 돌보아주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렇듯, 사울은 예수님과의 기적적인 만남을 가질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 앞에 언제든지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사울이 스데반을 군중 앞에서 돌로 쳐 죽일 때 그의 앞에 나타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울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기적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2015년 8월 26일 수요일

유일한 소망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귀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 이 사람은 바울이 언급한 다음의 특징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디모데후서 4:3-4).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로마서 11:8).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사도행전 28:27).

사실은, 이 사람은 듣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치유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마가복음 7:32). 이 남자는 예수님께 스스로 가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치유해주실 수 있다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글을 쓰건 손짓으로 하던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올 노력은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저는 그 사람들이 바로 그 귀먹고 어눌한 자를 사랑해주는 가족,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바로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청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스스로 나아오질 않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부모님, 친구들 또는 교회 식구들 등을 통하여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마치 그 귀먹고 어눌한 자의 부모님 또는 친구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매일, 믿음으로 기도하며 사랑하는 자녀들과 친구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친구들이 치유를 받고 참 소망을 갖게끔 하는 길은 오직 진리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마가복음 7:32). 여기서 간구라는 단어의 의미는 기도하여주시기를 애원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의 부모님과 친구들은 예수님께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주님, 제발 우리 아들을 만져주세요. 예수님의 손으로 우리 아이를 만져만 주세요.”

2015년 8월 25일 화요일

우리를 위한 교훈

마가복음 7장 에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마가복음 7:31-35).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데가볼리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귀가 먹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군중으로부터 빼내어 예수님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귀를 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져주시고 “열리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 남자는 듣고 또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 이 일이 일어나기 전 그는 어떤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냥 단순히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이 두가지 기적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저 이땅 위에서 예수님 생애의 한 순간일 뿐인것일까요?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이 두 장면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과 질병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강력하다는 것을 메세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이 두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받은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본보기와 교훈이 됩니다.

2015년 8월 24일 월요일

세상의 빛 by Gary Wilkerson

유월절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이 있는 말씀과 행하신 기사와 이적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후에 종교 지도자들도 도착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요한복음 8:3). 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나누시며 그의 진리의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의 교만하고 자기합리화시키는 종교적 관행을 낱낱이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다”(요한복음 8:6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예수님께 율법으로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게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한복음 8:6-11).

정말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발당하실 수 있는 순간을 진정시키신 것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생명 또한 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회개를 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떄에 우리에게 잘 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하나님의 빛이 모든 것을 변화시키십니다.

2015년 8월 21일 금요일

무한계의 용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누 17: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하루에 일곱 번, 내 눈앞에서 뻔히 알면서 죄를 지었던 사람이 와서 회개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계속해서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이 하늘 아버지께서 회개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자녀들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변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아니면 왜 주님께서 그렇게 용서해주시냐고 묻지 마십시오. 간단히 받아들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한 두번 용서하고, 또 잘못 하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하여라. 그리고 습관적 죄인이라고 불러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한적으로 조건을 따지지 않는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성품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 주님은 선하시며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누구든지 주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한없이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시 86:5)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저희에게 용서의 기쁨으로 가득 채우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가 해야 할 것은 영의 문과 창문을 열고 성령님께서 저희를 용서로 채워주시도록 허락해드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요일 2:2)라고 썼습니다. 요한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향하지 않고 주님을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 .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요일 2:1과 1:9).

자책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시오. 일분이라도 더 그 짐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의 문과 창을 열고 주님의 사랑이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주님은 저희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용서해주십니다. 시련 속에서 승리로 가는 능력을 주십니다. 저희가 구하고 회개하면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받아들이십시오!

2015년 8월 20일 목요일

그의 완벽한 계획

성경에서 가장 용기를 주는 구절 중의 하나는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바울은 이 질그릇을 메마르고, 모든 면에서 고난에 처하고, 핍박받고 넘어진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비웃으십니다. 착하게 되려고 인간적으로 노력하는 저희를 보고 웃으십니다. 주님은 높고 힘 있는 것을 사용하기보다, 세상의 약한 것들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저희를 표현한 구절이 아닙니까! 약하고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는 것! 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신비로운 그 완벽한 계획에서 하나님은 저희의 약함 가운데 부르십니다.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하기에 기뻐하시는 주님은 가치를 매길 수도 없는 보물을 저희라는 질그릇에 담으십니다.

저는 구주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무릎 꿇은 마우마우 갱조직의 리더, 이스라엘 나바레즈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이 아니라 진정으로 느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갱조직으로 다시 돌아가 살인죄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신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오래 견디시는 사랑과 용서의 주님을 접한,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입니다.

실패를 경험하셨습니까? 쉽게 시달리는 죄가 있습니까? 숨겨진 죄를 극복할 승리를 할 가치가 없는 약한 겁쟁이같이 느껴지십니까? 하지만 그런 약함 속에서, 또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고, 만나려고 합니까? 그 굶주림과 목마름이 승리의 열쇠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실망하게 했다고 자괴감 빠진 사람과 나를 구분시켜줍니다. 그 굶주림을 계속 지속시키시고 의를 향한 목마름도 지키십시오. 약함을 정당화하거나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2015년 8월 19일 수요일

고난으로 향하는 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고난으로 향하는 배에 타게 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마14:22)라고 말합니다. 그 배는 풍랑이 이는 물결로 향하고 있었고,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무서워하고 괴로워할 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바다가 보이는 산에서 제자들을 지켜보시며, 그들이 겪어야하는 고난에 실패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배를 타는 것, 풍랑, 일렁이는 파도, 거센 바람들이 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시험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교훈을 얻을 참이었습니다. 그 교훈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구별하여 찾는가’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가 되시며, 어떤 사람에게든지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세금을 내야 할 때, 고기의 입에서 돈을 찾게 하시어 모든 필요한 것의 공급자 되시는 분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기도하고 용서하고 묶고 풀어주는지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알았습니다. 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며, 사단의 일들을 물리치는 능력을 갖추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고난 속에서 찾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근원입니다. 우리는 기적과 치유 때문에, 또 우리의 구원과 죄의 용서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필요를 채워주시는 공급자로 그분을 보고, 또 언젠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데려가 주심을 믿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태풍이 몰아치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믿음을 가르치시려고 태풍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힘든 상황이 올 때 과연 주님이 곁에 계신가 의심하게 됩니다.

이 태풍 속에서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어렵거나 모호하거나 세상이 놀랄만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무리 힘든 시험의 시간 속에서도 기쁨과 믿음의 자신감을 잃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뿐입니다!

2015년 8월 18일 화요일

예수님의 권위

산상 수훈을 전하신 후 군중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쓰인 권위의 그리스어 의미는 "숙련됨, 능력, 자유; 조절력"입니다. 요점으로 얘기하면, 예수님의 군중들은 "이 사람은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는 것 같이 말을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자와 같고"라고 표현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크고 떠들썩한 목소리로 제압하는 듯이 말하는 것을 권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지 말로써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종교적인 체계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어디서 권위를 얻었는지 말하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21:23). 예수님께서 단도직입적으로,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4절, 27절 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권위를 어디서 받으셨는지 사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강단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사단의 힘을 제압할 수 있는 권위였습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섰을 때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들린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막1:24).

이제 회당에서 설교나 법의 강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세미나나 놀라운 새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귀신을 쫓고 눌린 자나 능력 잃은 교회를 깨끗게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위를 그렇게 사용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1:25)라고 말합니다. 요즘 말로 예수님께서는 "입 다물고 그 사람에게서 당장 나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귀신이…나오는지라" (1:26). 다시 한번 군중들은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1:27)라며 놀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능력과 권위가 필요한 때가 있다면 그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2015년 8월 17일 월요일

신랑의 친구 by Gary Wilkerson

세례 요한은 어떻게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참된 진실을 쫓는지 보여주는 성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라고 증언하였습니다(요 3:29). 예수님의 시대에,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 것은 명예와 존경을 뜻합니다. 그 자리는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이 있습니다.

그 당시, 신랑의 친구는 결혼 예식 전반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하객을 초대하고, 결혼 예식 계획을 짜고 구성하며, 피로연을 주최하며 감독했습니다. 신혼여행까지 주선하며, 신랑 신부보다 먼저 그곳에 가서 모든 것이 완벽한지 확인도 했습니다. 부부가 새로 살 집도 안전하게 책임지고, 그들이 들어와 살기에 불편함이 없게 보살폈습니다. 줄여 말해, 신랑의 친구는 모든 면에 걸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 역할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은혜의 엄중한 책임감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신학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질적인 것에 진실로 집중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세부한 사항들에 집착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희생물로 바치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시고, 믿음이 주름 없이 깨끗한 신부를 위해 다시 돌아오십니다. 당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들을 보지 못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그 목적을 향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헤롯왕의 신하가 그의 목을 원하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나는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이 이 긴박한 메세지를 전하는 데 쓰였으면 좋겠다: ‘예수님께로 돌아오라.’ 나는 나의 열정이 그 진실한 것을 위해 쓰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무엇보다 최우선시되는 열정이 있었고, 그것은 이 아름다운 구절에 잘 나타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요 3:29). 그의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요한은 한 가지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다!

2015년 8월 15일 토요일

완전한 변화 by Nicky Cruz

하나님께서는 제 어머니에게 무궁무진한 재능과 실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를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가정을 이뤄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어 이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사용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제 어머니가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발견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하였습니다. 사탄은 제 어머니의 어린시절부터 유혹하며 집중력을 흐트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하고 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과 더 가까워지게 하였습니다. 제 어머니를 어둡고 악한 세상으로 끌고 가면서 사탄은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셨던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그녀를 붙들어 눈을 멀게하며 이 세상에 복종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 어머니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모른채 사탄의 쇠사슬에 묶인채 살았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사탄의 저주로부터 자유함 바은 그 날부터 하나님께서 제 어머니를 위하여 계획하신 바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고, 눈을 뜨고 진리를 바라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봄으로써 과거에 묵여있던 증오와 난폭한 행동과 생각들을 미워하게되었습니다. 어린시절 사탄에 사로잡혀 가족들에게 했던 행동들과 진정한 사랑은 모른채 죄악을 사랑하며 살았던 삶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저를 볼때에 복수와 증오로 가득했던 제 어머니의 아름다운 초록색 눈빛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랑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했던 수심은 없어졌고 그녀에게는 놀라운 평안이 가득하였습니다. 에수님께서 그녀의 마음에 자리잡으시고 두려움과 모든 종류의 증오, 절망, 그리고 어두움을 제거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완전히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결국에 제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그녀의 소명, 목적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영광스런 미래를 안고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어머니의 마지막 25년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과 자비로 가득찬 삶을 사셨습니다. 훌륭한 아내 그리고 어머니로, 제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계획하신 모습 그대로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 어머니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선한 마음과 사랑으로인하여 축복을 받았으며, 그녀의 어릴적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제 어머니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랑으로 채워주실 때 우리는 완전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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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 크루즈는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전도사이고 다수의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합니다.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을 만나 폭력과 범죄를 일삼는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데이빗 윌커슨의 책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소개되었으며 나중에 니키 크루즈의 책 Run, Baby, Run에서 한번 더 소개되었습니다.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지옥과 같은 곳에서

“내가 무덤과 같은 곳에서 주의 도움을 구하였더니”(요나서 2:2). 하나님께서 요나를 왜 그렇게 낮은 곳 까지 보내셨을까요? 그는 어두움으로 가득하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지옥과 같은 곳에 있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그의 종 요나로 하여금 이런 경험을 하게 허락하신 것일까요? 저는 요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 지에 대한 내용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지옥같은 곳에서 3일 있었습니다.배를 침몰시킬 만한 태풍도 지옥과 같은 물고기의 뱃속에서도 요나는 기도하지 않고 있다가 3일 이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요나서2:1).

그는 왜 이런 일을 겪기 전에 그리고 심지어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간 순간에도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주 앞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요나서 2:4).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죽은 몸이네. 더 이상 칠 바닥도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쫓아내셨고, 나의 행동으로 인하여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신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요나서 1:17).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의미는 등록시키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물고기를 고르시고 물고기에게 급박한 욕구를 주셔서 요나가 배에서 던져졌을때 물고기는 요나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리를 통하여 일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요나가 니느웨로 가도록 재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머지않아 선지자는 물고기의 배에서 나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한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선택받은 전달자로서 니느웨의 길거리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요나의 무덤과 같은 곳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가르쳐주시려고 하셨던 것이 무엇일까요? 요나는 잠시나마 죽음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가리워졌고, 하나님의 손이 요나의 삶에서 떨어져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요나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순종을 강요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요나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지옥같은 곳에서 나의 말을 믿겠니? 아니면 마귀의 말을 믿겠니?”

결국에 우리는 요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2:1).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2:7). 요나는 하나님의 품으로 급히 돌아가고 그의 사랑을 증거하였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2).

2015년 8월 6일 목요일

하나님의 섭리

요나처럼 기도를 끊임 없이 하는 믿음의 사람이 자신의 소명으로부터 도망가고 하나님께 불순종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지식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강력한 계시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요나서 4:2).

요나는 이 이유때문에 도망을 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요나서 4:2). 그의 행동으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는 모든 자를 주께서 너무 쉽게 용서하십니다. 심판하시려고 하실때마다 자비로 용서하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예언을 하면 그들은 회개할 것이고 주는 당신의 은혜를 그들에게 부어주실 것 아니십니까?”

여러분, 요나가 도망간 이유의 문제점을 발견하셨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한 부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관대하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요나가 표현한 하나님의 섭리와 성격을 모두 옳습니다. 오래 참으시고 용서하시며 늘 은혜를 부어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부분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설교 하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로마서 1:18). 요나는 분명 하나님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왜 이부분을 경히 여겼던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요나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자비롭고 인애로우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기 더욱 쉬워집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요나의 불순종의 주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근면히 기도를 통하여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개개인에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셔야만 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꺠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언 2:4-5).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언 14:27).

2015년 8월 5일 수요일

예수님에게 배운다는 것

여러분께서는 기돌ㄹ 통한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예수님에게 가르침 받은 적 있으신가요? 책이나 이 세상의 선생님들로부터는 배우지 못할 것들을 예수님께 물어보신적 있으신가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조용히 앉아 그의 목소리를 듣기를 기다려보신적 있으신가요? 성경에서는 모든 진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당신으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의문점을 갖게 될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의 소리를 듣다가 자신을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가게하는 크리스천들도 더러 있지 않습니까? 마귀가 우리의 주변에서 서성이며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우리를 유혹하여 말도 안되는 것을 합리화시켜 속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에만 귀기울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1. 아버지, 그의 아들 그리고 성령은 살아계시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입니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이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인격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다스리시며, 신성한 섭리에 따라 일하십니다. 마음이 상한자를 위로하시고 약한자에게 힘을 주시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치십니다.
  2. 성경에서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갈라디아서 4:6). 또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표현됩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증거하여”(베드로전서 1:11).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로마서 8:9).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 동일하다는 것은 명백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동일한 영이 나옵니다.
  3. 기도나 하나님과의 교제 중에 마귀의 속임수와 유혹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다음의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목소리는 항상 다급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부터 오는 보호막은 우리로 하여금 기다릴 수 있게 합니다. 육체는 즉각적인 만족감을 원하기 때문에 인내가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며,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끊임없이 떠나려고 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2015년 8월 4일 화요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천국의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마태복음 16:1 참고). 예수님꼐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태복음 16:4). 그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이렇게 물ㅇ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5-16).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7).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저 나와 함께 동행하기 때문이 아니고 나의 아버지께서 천국에서 네게 보이신 것이니라.” 요약하자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이신 영광스런 계시를 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영광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6:20).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미 천국으로부터 그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이미 선포되지 않았습니까?

그 내막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증언할 준비가 아직 안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볼수 있는 예수님의 계시가 아직 완성되지 안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고통, 그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하여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질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 냈습니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동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진정한 목적을 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의 구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비로소 제자들에게 이 땅위에 오신 더 깊고 진정한 의미를 얘기해 주셨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태복음 16:21).

2015년 8월 3일 월요일

작고 사소한 것들 by Gary Wilkerson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가서 2:15). 솔로몬은 우리가 간혹 작고 사소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였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어느 새신자답게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목적으로 가득차 있었을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며 전도하고 섬기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이렇듯 새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고 소명을 갖고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예수님께 완전히 있었던 초점이 삶의 여러가지 요구들로 인하여 점점 흐릿해졌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작고 소소한 일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알게 모르게 점점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제 아버지,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은 크리스천들의 삶의 이러한 면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함으로 인도함 받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고, 아버지의 기도시간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2-4시간씩 기도하셨고, 어떤 날들은 하루종일 기도를 하신다며 저와 제 형제들에게 방해하지 않기를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바로 그 유명한 월랜다 가정입니다. 그들은 일곱세대에 걸친 줄타기 곡예사 집안입니다. 1년 전에 닉 월랜다는 가족의 줄타기 역사에 전설이 될만한 도전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랜드 캐년의 협곡 사이를 줄로 건넜습니다. 그날 거센 바람이 불어 닉은 도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심한 순간 그는 레이저같은 집중력으로 도전하였습니다. 언론들은 그의 표정에 주목하며 영상을 찍었습니다. 손에 장대를 쥔 채 줄을 탔습니다. 그가 한발을 내딛을 때마다 동시에 호흡을 내쉬었고, 거센 바람도 그의 집중력을 흐트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 한순간의 흐트러짐 없이 협곡을 건넜습니다.

닉 월랜다의 집중력은 말 그대로 생과 사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인 우리들은 사실 그보다 더욱 더 큰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닉이 가졌던 레이저 같은 집중력이 있습니까? 되돌아 볼 때 우리의 집중력을 흐트리는 것들을 차곡차곡 모으면 그것이 하루에서 수개월, 수년이 되어 정처없이 목적을 잃은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