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30일 수요일

놀라운 비젼

이사야서 25장에서는 놀라운 비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로 이동되어 마지막 때를 보게 됩니다. 성경 학자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말세에 관련한 가장 명료한 묘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말세 직전에 나라와 교회를 위한 계획에 대하여 정확하게 전달해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마지막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25장 1절에서 5절까지, 이사야는 나라에 대한 계획을 언급하였습니다. 순식간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국을 무너진 돌무더기로 만들어 버리고 마귀의 궤계에 포박된 나라들은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리고 기쁨의 찬양을 올립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이사야 25:1). 그가 말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이렇습니다. “주여, 이 모든 것은 모두 주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압니다. 과거에는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고, 지금은 이 시대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계획하셨던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목격하였을 때에 그의 영혼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세대에게 선포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전멸시킬 것입니다. 마귀의 신전들은 돌무더기가 될 것이고 마귀의 도시들은 먼지 더미가 돼버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포박하였던 쇠사슬이 풀릴 것이고, 두려움과 죄로 가득했던 사탄의 감옥으로부터 풀릴 것입니다. 이사야가 기록한 “강한 민족”이라는 것은 “한때 죄에 무디어졌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런 “강한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수년 동안 사탄의 포박 아래 공포에 가득하였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만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 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이사야 25:4). 이 구절에서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계획을 온 세상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지금 온 세계의 수 만명의 사람들에게, 나라에 실현되고 있다고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강하게 되고, 빈핍한 자가 구원을 받고, 절망에 빠진 자가 풍족한 평안을 누립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안전, 피난처, 요새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뜨거운 달콤한 유혹이 다가오더라도 거룩한 성벽을 치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사탄의 한때 공포스러웠던 공격들은 믿는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2015년 9월 29일 화요일

한 그리스도인의 중요성

어느 토요일 저녁, 관광객들과 휴일에 쇼핑을 나온 사람들이 가득한 타임스퀘어를 걸어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워 때 그 지역은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구간입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순간, 성령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이 인파를 보아라. 그리고 그 인파에 수에 여러 번 배로 곱해보아라. 그 숫자가 바로 황야에서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이다. 그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명만이 살아 나의 휴식을 가졌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절망과 불신에 빠져 제명에 살지 못 했다.”

그런 생각을 주셨을 때 저는 벅차올랐습니다. 인파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사람들은 텔레비전, 라디오, 책 그리고 호텔방 안의 무료 성경책 등을 통하여 복음에 노출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저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똑같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알고자 한다면…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 전파하는 소책자를 나눠주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사람들은 쏜살같이 그들을 피해 도망가 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지만, 쾌락, 돈 그리고 소유물 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눈에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귀중한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들려집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 저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구하시며, 온 지역을 샅샅이 뒤져 그를 진정 사랑하는 몇 안되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는 지금도 대학 캠퍼스를 찾아 “이곳에서 나를 믿을 자가 누가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계십니다. 그는 워싱턴 디씨에서도 그리스도를 인정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는 온 나라에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만, 그저 소수의 믿음의 사람을 찾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는 그의 몸된 교회에서 진실된 믿음을 가진 그의 종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깊은 근심을 하게 하는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우셨던 것처럼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우시는 그리스도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저는 목회자로서, 나의 목자의 짐을 함께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리스도의 근심이 느껴집니다. 현재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나의 집 안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매우 적구나. 수많은 나의 자녀들이, 나의 목장들도 시험이 닥칠 때에 엎어지고 넘어지는구나. 그들의 가족, 직장, 미래를 나에게 맡기지 못하고,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겠느냐? 나를 신뢰하느냐? 내가 네게 올 때에, 내가 네 안에 믿음을 찾을 수 있겠느냐?”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부요하고 만족스러운 삶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부요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설명하실 때에 양의 무리를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9). 우리 안에 든 양들은 모든 포식자로부터 안전하고, 꼴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기쁨, 평안 그리고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의 원수되는 마귀는 이러한 복된 삶을 앗아가려고 합니다. 사탄은 먼저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예수님을 강도라고 말합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한복음 10:1, 10).

사탄이 우리로부터 훔치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삶입니다. 사탄은 먼저 우리를 영적인 양식의 공급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미성숙한 크리스천들은 사탄의 강도 짓에 당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삶의 위기에 놓여있을 때 사탄의 계락에 쉽게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어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더 이상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신 것입니까?”

제가 뉴욕 시 타임스퀘어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에 수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성도들은 깊이 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었습니다. 그러나 돈에 모든 초점을 맞춘 사기단의 강연을 듣기 위하여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다는 성도들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적이고 영양가 있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성도들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을까요?

이는 오늘날 모든 크리스천들이 직면하게 되는 이단의 가르침입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5). 이러한 “타인(또는 낯선 사람)”은 좋은 설교자처럼 보이고, 들립니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와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요하고 만족스러운 꼴을 누리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오히려 영혼의 파괴시키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거짓된 목자들의 음성을 가려내어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는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은 선하신 목자가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은 선한 목자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음성, 모습, 맛 그리고 향기를 아는 것입니다.

2015년 9월 26일 토요일

“어디입니까, 주님?” by Claude Houde

아브라함은 순종으로 단을 쌓고,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를 때에 주님을 믿었습니다. 개인의 삶에, 마음에 분노로 “어디입니까, 주님?”이라고 묻는 순간이 있습니다. 정확한 방향도 없이 결정지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어디”는 직장 경력, 학업, 학교, 이사 갈 곳, 교회 등등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디”에 우리는 반드시 신뢰의 단을 쌓고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겨야합니다. 어디로 갈 지도 모르는 때 조차 단을 쌓는 믿음은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또 믿음이 자라날 때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공급하시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무엇,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것들을 모를 때에도 믿음으로 단을 쌓았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11:8-9, 12).

이 구절에는 놀라운 가치와 영적인 무게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그가 모르는 하나님의 “언제”에 대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약속의 실현은 언제나 지연되는 것 같고,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고 그 가운데 의심은 에베레스트 산 같이 큰 불신이 되어갑니다. 그는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어떻게 실현하실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되는 곳으로 왔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구절에서 사용했던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은 너무나 믿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이 없는 불가능의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믿음으로 단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 전체에서 불신과 전쟁같이 마주쳐왔습니다. 저희가 알다시피, 많은 시간동안 그는 험난한 믿음의 전쟁에 깊이 빠져있는 그를 마주했습니다. 그는 많은 믿는 자들이 끝없이 질문하는 번뇌의 괴로움으로 상심했었습니다: 언제입니까? 어떻게, 왜입니까? 어디입니까,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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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서 군대를 정비하고, 계략을 짜고, 그리고 단독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적들이 이스라엘군대를 봤을때, 그들은 벌떼같이 쫓아가서 이스라엘을 멸하였습니다. (신 1:44 참조)

저는 믿는자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지 못하는 끔찍한 경우들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족의 위기, 경제적 어려움, 결혼문제 와 같은 가혹한 시험에 놓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길 기다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치하셨다며 원망하고, 그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이와같이 믿는자들에겐 안식과 평강이 없고 , 하나님의 임재를 모르며 , 끊임없는 의심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위기에서 다른 위기로 옮겨가며 그들의 최근 문제만을 얘기하는것 처럼 보입니다. 이런 모든 혼란들은 한가지 원인, 즉 불신 으로 발생합니다 .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9 ) 이 시편구절은 불신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 이야기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삶과 죽음이 헛되었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던 조부모의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들은 우울속에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투덜거리며 불평속에 외로이 죽고 또 잊혀집니다.”

이것은 불신의 공포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역사를 끊어버리고, 당신의 삶이 헛되었다는 것만을 기억할것 입니다.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이 조부모에 관해 물어볼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너희 조부모들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불평속에 의미없이 살았다. 그래서 죽을때까지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진정으로 믿는자들은 ,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않으실지라도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의 좋은것을 가져가시든 , 죽음의 목전에 있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안에 거하길 갈망합니다. 이런 삶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들 자신의 일을 쉽니다.’ (히4:10 참조)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밤을 새지 않습니다. 대신 , 예수님께 모든걸 맡깁니다. 그들의 득과 실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계획과 우리삶에서 일하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2015년 9월 24일 목요일

불신의 결과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신2:15,14) 성경에서 말하는 불신에 대한 강한 경고의 말 중 하나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말씀이 아니야. 하나님께선 불신을 그렇게 심하게 벌 하시지 않아.” 하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성경은 은혜아래 살고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받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

우리 삶에서 불신의 죄를 단 한 문제로만 분리할수 없습니다. 불신의 죄는 우리 삶의 모든 면으로 흘러 더럽히고 오염시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심은 그들의 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의 의심은 매일 먹을 양식의 공급에 대한, 자녀들의 보호에 대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것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지조차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신1:40, 42)

만약 한 부분에서 불신이 존재하면, 곧 모든 부분으로 번지며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더럽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과 , 그분의 전지전능함과 , 우리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사실들을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까? 우리의 건강과 재정을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까? 죄로부터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까?

불신은 가정이란 죄로 이릅니다. 무엇을 가정한다는 것은 주제넘게도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만은 결국엔 “내 갈길은 내가 안다” 란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집니다.

불신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지은 죄는 여기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돌아가라고 말씀 하셨을 때 그들은 순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죄를 알고 주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올라가 적과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 하였습니다.

중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심하며 비극적인 실수를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려 실패할 때 믿음이 아닌 육으로 상황을 만회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만회할지를 본인의 지혜와 능력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두려움속에서 나온 생각과 행동을 거절하며 오직 주님께서 일하시길 기다립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앞서서 일하지 않습니다.

2015년 9월 23일 수요일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선지자이자 기적을 행하는 자로 오셨습니다. 단,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마13:58). 얼마나 믿기힘든사실입니까! 불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도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는 신약성경 곳곳에서 불신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들을 볼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불신 때문에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셨습니다. (마17:14-21) 부활하신 이후, 사도들의 불신 때문에 예수님께선 또 한번 놀라셨습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막16:14). 더욱이 사도바울이 유태인들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롬11:20).

왜 신약에선 불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토록 엄격하신걸 까요? 오늘날의 신도들은 구약에서의 신도들이 꿈꾸지 못했던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로 우리를 축복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구 언약 아래에선,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가끔씩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기 위해 직접 성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을 그의 백성으로 지정하셨습니다. 곧 우리가 주님의 성전이며 , 믿는자 모두에게 주님의 임재가 임하게 된것입니다.

구약에선 가끔씩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거나 , 가끔씩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실 것을 믿었으며, 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롬4:20).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겐 예수님과의 만남이 언제나 가능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예수님을 언제든지 부를 수 있고 그분께서 응답 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담대히 보좌앞에 나아가 우리의 기도제목을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평안과 삶의 안내지를 주시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축복에도 불구하고, 힘든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불신을 꾸짖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18:7-8) 만약 그리스도께서 오늘 오신다면, 당신의 마음속의 믿음을 찾으실수 있을까요?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믿지않은 이스라엘

하지만 주님을 향한 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지시를 받은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너의 적들)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신 1:29-30).

이것은 새로운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주님께서 전에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말씀을 다시 하셨던 것 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4).

주님께서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울지니 이 약속을 붙잡고 잊지 말거라.” 하지만 그들은 적 앞에서 떨며 그들의 연약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끝내 그들은 “우리는 적들과 싸울 수 없어.” 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노골적인 의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그들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이렇게 반응하지 않으실거라 생각하시겠지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비슷한 말과 행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정말 저와 함께 하시죠? 저에게 약속을 주신걸 알지만, 정말 약속하신 건가요? 제가 정말 주님의 말을 믿을수 있는 건가요? 저에겐 새로운 계시가 필요합니다. 좀더 확신을 가질수 있는 말씀을 해 주세요.”

주님의 약속을 믿지않기에, 결국 우리 모두는 우리 영혼의 적 앞에서 떨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우리는 주님께서 단 한번도 말씀해 주지 않으신것처럼 행동을 하며 그를 “유혹” 하기 시작합니다. 그토록 우리에게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의 신실하심을 새롭게 증명하라고 애원합니다. 또다시 우리의 믿음을 키울 수 있는 말씀을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말씀만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믿으라. 나를 믿으라.”

2015년 9월 21일 월요일

신실한 안내자 by Gary Wilkerson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2-3).

우리 모두는 삶의 결정들을 내리기 위하여 때로는 어떤 가이드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좋은 가이드를 얻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그리스도인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윗 구절을 통해 명백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의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그에게로 간다”라고 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낮 양들을 돌보시고 관리하시는 그림을 그려 봅니다 .

우리는 살면서 어려운 결정들을 많이 내려야 합니다. 윗글에 그려진 예수님의 해답으로 만족하십니까? 우리는 각자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 합니다. 누구랑 결혼하지? 어떤 직업을 갖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런 결정들은 긴장감 없이 내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특히 과거에 내렸던 결정들을 후회하고 있는 상황에선 더욱더 팽팽한 긴장감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축복을 제게 내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아이들이나 그 후세들이 제가 한 실수를 따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일 좋은 가이드를 주고 싶은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좋은 소식이 있다면, 우리에겐 신실하신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가이드를 주시고 ,우리가 내린 결정들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옆에서 신실하게 인도해 주시는 분 입니다. 우리의 삶을 안내해 주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라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가이드를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삶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릴때 누가 여러분을 안내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갖고 있는 경험, 지혜, 아님 지식? 무엇이 여러분을 가이드하고 있었습니까?

어떤 가이드들은 우리가 힘들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도움이 되는 지혜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혜가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풍성한 삶으로 우릴 안내해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가이드가 아닌 그 이상의 것 즉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언제 어디를 가야하는지만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시고 또 그 관계를 통하여 얻는 풍성함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설명지를 찾기 바쁠때 주님께선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라.”

2015년 9월 19일 토요일

벌거벗은 믿음 by Nicky Cruz

많은 사람의 예수님을 향한 저의 열정이 오랜 공부와 기도 또 사역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이 저를 온전히 혼자 남겨놓은 것 같은 어려운 때에 오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큰 혼란과 좌절의 순간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위험이 코앞에 닥쳤을 때도 그 상황, 상황마다 제 앞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볼 때 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진 비행 청소년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때마다, 내 구역의 구석에서 용감하게 설교하던 데이빗 윌커슨을 봅니다. 범죄와 마약이 들끓는 그 동네를 걸어 다닐 때마다, 오래전 윌커슨을 뉴욕의 거리로 보냈던 그 힘을 느낍니다. 내 품에 잃었던 아파하는 영혼을 안을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느낍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주님께서는 제 과거의 아픔을 사용하셔서 저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 그분과 더 깊게 교제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단이 악한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을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쓰십니다.

제 삶의 그 어떤 기쁨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두웠던 마음에 불을 밝히시고, 용서가 필요한 죄 위에 그분의 자비를 덮어주시는 것을 보는 기쁨 앞에서는 다 무색해집니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그분의 능력은 경험하지도 못한 채 인지만 하기는 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고,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께 우리의 겨자씨만 한 믿음을 가지고 산을 옮겨서 바다에 던져달라고 울부짖지 못하게 됩니다.

벌거벗은 믿음은 마음과 영혼이 만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배우기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교만과 의심, 두려움을 제쳐놓고 하나님 앞에 서서 텅 비고 무너진 채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채로 믿음으로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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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5년 9월 18일 금요일

목전에 닥친 불가능

가데스 바네아는 목전에 닥친 불가능 같은 장소였습니다. 그 이름도 히브리어에서 어원을 찾으면 피난자, 방랑자 또는 나그네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곳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평생 광야에서 헤매게 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지금 그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계약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놀라운 시간 속에 구원의 기적을 잇달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거짓말과 함께 와서 그들에게 가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자격이 충분하지 않다고 믿어버리고는, 하나님이 과거의 지은 죄에 아직 화가 나 있으며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해보십시오. 이런 거짓말을 믿고 계십니까? 당신의 환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말씀의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사실이 당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마주하는 시험이 남은 여생을 결정할 단서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어려운 환난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뒤돌아보면 끔찍했던 시험들과 견뎌야 했던 아픈 실패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시험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신실하셨습니다. 매번 하나님은 자비로 저희를 들어 올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절대 나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신다. 오늘 내가 이렇게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아버지가 아이를 안듯, 하나님께서 그의 팔에 나를 품어주셨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환난에서 데려와서 다른 곳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던 것 같이 우리 앞에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 하나님께서는 안식의 땅으로 이끄시려고 저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무엇입니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주님 안에서의 확신이 그곳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장 힘든 시간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 안식의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가데스 바네아를 지나가야 합니다. 그 곳에 있을 때,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던 극한의 싸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적군, 거인, 높은 성벽 등 말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015년 9월 17일 목요일

비극적인 실수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비극적인 실수에 대해 묘사합니다. (민13-14장 참조) 그것은 홍해를 건넌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담대히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고 능력 확신의 말씀도 주셨습니다:“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 . .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21, 29-30).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적군 그 누구 하나도 그들 앞에서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신 7:24 참조).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크게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보다는, 가나안땅에 정탐꾼을 보내자고 고집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탐꾼들은 불신으로 가득 찬 “사악한 보고서”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강하고 거대한 거주민과 견고한 성읍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보고를 믿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신 1:26). 이제 모세는 젊은 세대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즉시 하나님의 말씀에 거해야 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 말씀에 거역했다.”

그 세대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이십니까?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낸 것은 불신의 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탐꾼들이 그곳에 정탐하는 동안 사단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악한 보고를 들은 후, 사람들은 주먹을 하나님 앞에 흔들며 공격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버렸습니다. 이곳에서 죽게 하려고 데려왔습니다.” 몇 달 전만 해도,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사람이 혼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서로에게 혼란스러워하며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는 하신 건가?” 곧 그들은 자녀들을 보며 울고 소리칩니다, “이 광야에서 나의 자식들이 굶어 죽겠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신다!”

모세는 젊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의 부모 세대의 원망에 대해 상기시켜줍니다: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1:27).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불신의 위험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신의 위험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앞서 넘어진 사람들같이 위험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 4:11). 요약해서 말하면, “어떠한 불가능해 처해 있던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시 예전과 같은 불신의 죄로 빠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처했듯이 끔찍한 광야에 다다를 것이다. 그리고 남은 평생 그곳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 뜻에 따라 우리 아버지들을 위기 속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가르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나왔을 때 정금같이 순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선하신 것을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을 증거 삼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세대가 불신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그로 인한 참담한 결과를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많은 믿는 사람들이 우울함과 불안 속에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의학적인 이유로 이런 고통을 받지만,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상태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견디고 있습니다. 저에게 그들의 우울증은 지속적인 불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오는 결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불신을 이야기 할 때 항상 진노, 분노와 같은 강한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젊은 이스라엘의 세대들에게 이것을 다시 상기시켜줍니다: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 . .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신 1:31, 34-35).

2015년 9월 15일 화요일

우리를 위한 본보기

신명기 전체는 모세가 죽기 전에 전한 설교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 설교는4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뒤돌아보고 그것은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에게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인 가데스 바네아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38년 전에 서 있었던 약속의 땅, 가나안의 경계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역시 하나님께서 구세대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에는, 구세대가 다 죽을 때까지 그들은 광야로 다시 보내졌습니다.

이제 모세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들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어떻게 구세대의 아버지들이 하나님의 눈에 반역자로 비치어 죽었는지 알기를 원했습니다. 모세는 윗세대의 비극적인 실수를 통하여 아랫세대들이 배우기를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너는 너희 아버지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선택받았으며 기름 부어졌다. 주님께서 그들은 너무나 사랑하시어 시간이 지나도록 그의 팔로 품으시고 옮겨주셨다.”

“결국, 주님의 인내심이 끝에 다다랐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을 져버렸고, 그들의 마음을 돌리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셨다. 주님께서 행하신 어떠한 기적도 그들을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가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한 명도 내가 약속한 땅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너희는 지금 되돌아서서 다시 그 광야로 돌아가라’라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지만 모세는 단지 이스라엘의 신세대들에게만 이 말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늘의 우리를 포함한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이 따르기를 원하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모든 구약의 말씀들과 같이, 이 구절도 우리를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1).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은혜로 인한 변화 by Gary Wilkerson

예수님은 사역기간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두 가지 종류의 질문들을 받게됩니다. 첫 번째는 고발하는 종류의 질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십니까? 그런 평판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할 수 있습니까?”

삶의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오는 질문이 두번 째 종류입니다: “아픈 제 딸을 고칠 수 있습니까? 귀신 들려 불에 뛰어드는 제 아들을 축귀할 수 있습니까? 평생동안 고통을 준 이 혈루병으로부터 고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저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이 두 종류의 질문간에 차이점이 보입니까? 둘 다 하나님의 성품을 찾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이고 두번째 질문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려 하실까?”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질문들에 대해 행동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처음에 소외 받는 이들을 사회에서 소외된 곳으로서 부터 하나님 사랑의 중심으로 데려옴으로써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에게 “너는 무대의 중심에 있다. 내 아버지 나라의 가장 중심부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는 고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들에게 분명하게 “내 아버지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의미있고 중요한 역할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집었던 돌을 내려놓고 그의 은혜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죄로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예수님과 같이 행동할 때마다, 여러분은 그 위대한 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행동으로 변화될 것이고, 소극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이 솟아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군대의 일원이 되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나라의 모든 영혼이 사랑받고 속함 받으며 우리 구원의 주의 놀라운 은혜로 변화받을 것입니다.

2015년 9월 12일 토요일

기도를 배우는 것 by Jim Cymbala

기도는 사실 원리, 규칙 또는 세미나를 통해서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필요와 갈급함으로부터 나옵니다. 만약에 제가 “기도를 해야겠다”고 말하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 육신의 것이 너무 크고 강력하기 때문에 기도하고자 하는 동기가 금새 없어져 포기하고 말것입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부정”하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언젠가 제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말하는 부모들은 사실은 이미 포기한 상태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우리 아이가 올바르지 않은 길로 갔고, 부모로서 나는 노력했습니다. 아이가 어렸을때 세례도 받게하였고.. 뭐 언젠가는..”

우리가 기도하면 할 수록 우리는 기도에 대한 필요와 갈급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에 더 갈급할 수록 더욱더 기도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기도는 크리스천 삶의 원천이고 생명선입니다. 기도가 없다면 숨을 쉬지 않는 아이를 안고 예쁘게 옷을 입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쁜 옷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아이가 숨을 쉬지 않고 맥박이 뛰지 않으면 무엇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 전하는 가르침과 원리들이 제한적인 결과물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가르치는 것은 생명이 온전할 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듣는 이들이 영적인 혼수상태에 빠져 활력징후가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원리와 원칙들로 가르침을 받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비록 옳은 말과 원칙들을 전한다고 하더라도 영적 생명의 회복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여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자, 이 말은 우리 모두를 몹시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기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며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도행전 2장 42절 말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면 우리는 기도가 크리스천 교회의 정상 상태라는 증거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우리의 교회가 또는 당신의 교회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형화된 예배 또는 참석 인원 수 등의 표면적인 것을 자랑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브룩클릭 태버나클에서 애통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면, 우리 교회 예배에 만여명이 참석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제 아내 캐롤과 저는 서로에게 수없이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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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소외되고 어려운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20명이하의 성도들과 함께 브룩클린 태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브룩클린 출신의 목사님은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으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를 통해 주최되는 Expect 컨퍼런스의 강사입니다.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그가 나의 귀를 깨우시다

영국제도에 설교를 하러 가기전까지, 제가 오염된 귀로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와 제아들 게리를 태우고 다음 설교장소로 운전하시던 한 목사님이 저에게 예배반응에 대해 정중히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답을 하려고 하면 본인의 이야기로 제 말을 가로막아 버렸습니다. 대화도중 매번 이런일이 벌어졌습니다. 제 얘기에 한술 더 떠 본인의 예배엔 더 많은 성도들의 참석과 더 많은 곳을 여행해봤다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전 그냥 입을 닫고 그분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제 아들 게리를 보고 눈을 굴리며 생각했습니다. ‘자랑을 쉴새없이 하는걸 보니 정말 거만한 분이시구나.’

그 순간 저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데이빗, 네가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해 보아라. 너의 말을 듣지않아 화가 난것이 아니라 저분의 자랑에 너도 똑같이 너의 사역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냐! 비록 네가 자랑하지 아니해도 너의 마음속엔 거만의 영이 존재하고 있단다.”

더욱이 저는 제 입을 더럽혔습니다. 입으로는 그 목사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사실 그 분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 아들을 보며 눈을 굴리는 순간 저는 제 아들에게 그 분을 비난했습니다.

저는 거룩한 삶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죄들에 대해 연설을 할수 있습니다.새 언약에 대해 설교를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귀의 오염됨을 용납한다면, 저의 관심사에만 빠져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존중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한다면, 더이상 제 안에 예수님의 삶이 존재하지 못할 것 입니다. 저는 주님을 만족 시키는 삶을 살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고난이 낳은 열매도 맺지 못할것 입니다.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사50:4-5)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시40:6).

2015년 9월 10일 목요일

오염된 귀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사 50:4-5).

마지막 구절을 보면, 매일 아침 성령께서 예수님을 깨우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령이 그의 귀를 맞췄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라고 간증하실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세상에 있었을 때는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하고, 어떤 것을 들어야 하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를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매일 이런 영적인 모닝콜이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저를 매일 이렇게 상기시키시기를 원합니다. “데이빗, 모든 비방하는 소리, 험담,그리고 음란한 말로 부터 귀를 닫고 네 자신을 더럽히지 말거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염된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누9:44).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거였습니다, “중요한 계시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귀를 기울이고 듣거라. 나는 곧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할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라. 너희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니라.”

그럼,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성경에 기록되 있기를 ,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누9:45). 왜 제자들은 스승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귀가 사리사욕에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구절은 ,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누9:46).

이것이 바로 오염된 귀는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는 깊은 계시를 받을 수 없다는 확증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들 옆에서 지극히 평범한 말로 쉽게 설명을 해주시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기록 되기를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누9:45)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십자가를 다르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중심에 빠져있으면 남의 말을 듣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설령 본인이 그 사실을 안다해도 인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였습니다. 오직 자기 자리와 자신을 자랑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2015년 9월 9일 수요일

헛된 말들

부정한 말에 어떤 책망이 따르는지는 시편50편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시50:19-23)

그럼 우리는 왜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거나 신뢰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는 남에게 쉽게 헛된 말들을 할 수 있습니까? 왜 계속해서 경솔하게 말하며 혀를 통제하지 못합니까? 그이유를 시편은 말합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남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 있도록 우리는 성경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깊은 곳에 숨어있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행하신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시편 50편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이 있기를 원하여 나는 너를 꾸짖을 것이다. 내가 이 더럽힘을 어찌 여기는지 네가 알기를 원하다. 이렇게 못되고 악한 것이 네 혼에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주님의 목자로서, 나의 설교에 그리스도의 삶이 흘러나가길 원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할아버지로서, 나의 식구들에게 그리스도의 삶이 흘러 나가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근원이 오염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우물에 독이 있기를 용납할 수 없으며 또 그 어떤 방해물도 허락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꾸준히 성령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자신을 더럽힐 때마다 신념을 심어주십시오.” 다윗도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시17: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141:3)

당신은 의구심이 들수도 있습니다. “혀를 통제하고 입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사는것이 정말 가능할까?” 다윗이 증언하기를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39:1) 다윗이 얘기한 이 말의 본질은 “내가 말을 탈 때마다 말에게 굴레를 씌우듯이, 나 역시 내 입을 열때마다 내 혀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2015년 9월 8일 화요일

최악의 강도질

야곱이 교회에게 경고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3:6).

이 사야서에서도 비슷한 경고를 읽을 수 있습니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사58:9). 여기서 허망하다는 무례한, 불손, 결례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매우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우리의 말이 천국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여기에 조건을 붙이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것 같습니다. “만약 너희 말을 내가 듣기 원한다면 먼저 너희 자신을 되돌아보아라. 내가 듣겠노라 .만약 네가 남에게 손가락질을 안한다면. 내가 듣겠노라. 만약 네가 남을 비난하지 않으면.”

주님이 보시기엔 어느 누군가의 평판을 더럽히는 것은 매우 큰 죄입니다. 잠언에 써있기를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22:1). 좋은 평판은 마치 오랜 시간을 거쳐 쌓은 보물과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입에서 나온 단 한마디 말로 긴 세월동안 쌓은 보물을 순식간에 없앨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사람이 어떻게 함부로 어느 누구의 금시계나 통장을 훔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누군가의 평판을 더럽히는 것은 최악의 강도질이라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미묘한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고, 어느 누구의 인성을 논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저기서 들은 소문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말중에 제일 무서운 말은 “혹시 그 소식 들었니?” 일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인성을 논할때 그는 매우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입을 더럽힐 것입니다.

2015년 9월 7일 월요일

관용받은자 by Gary Wilkerson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비난받던 여인을 인정받는 사람으로 받아주십니다. 간음한 여인의 생명은 예수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녀를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받아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벼랑끝에 서 있는 우리를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지금 너는 벼랑끝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중심에 서 있는 자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일은 간음한 여인에겐 중대한 일이 였습니다. 그 이유는 목숨은 건졌지만 남은 삶을 그곳 이웃들과 식구들속에서 본인이 진 죄를 지고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겐 더 이상 죄 값을 치를 이유는 없지만 죄가 낳은 결과를 피할수는 없습니다. 개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마약중독자들은 회복이 얼마나 힘든일인지 잘 압니다. 식구들, 이웃들, 동료직원들과 깨진 그 신뢰를 되찾기 위해선 대단한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간음죄에 따르는 그 결과들은 어떨까요? 원하지 않은 임신, 배우자와 아이들과의 깨진 신뢰, 손가락질 하는 주변의 시선들.간음한 죄가 낳은 결과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몇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들 안에는 진정한 자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8:11). 여러분 제가 만약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주님의 충실한 목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받아주십니다. 용서해 주십니다. 단 죄란 것은 분명히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결과가 있습니다. 이런이유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저는 목사로서 자주 목격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어기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의 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고전6:18) 그러므로 더욱더 모든 죄를 주님에게 갖고 나와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의 무한한 능력과 구원의 은혜만이 우리를 완벽하게 고치고 회복시켜줄 수 있습니다.

또 한 그룹의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로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간음한 여인을 비난하던 바리세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정한 계획이 역효과를 보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간음한 여인은 정죄받지 않고 대신 구함을 얻고 치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구원의 은혜가 나타날 때 사단은 수치심속에 물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9)

2015년 9월 5일 토요일

새 계명 by Carter Conlon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33-35).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놓고 하신 말씀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지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놀라운 사랑의 표본이자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서로를 사랑하도록,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당신처럼 서로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 명령은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이 사랑은 단순히 정을 나누거나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들이 한없이 깊고 인간의 능력 그 이상의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부인할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로서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린도전서 13:4-8).

이러한 새 계명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 순간 그 명령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한복음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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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타임스퀘어교회(Times Square Church)의 창립목사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에 오셨으며,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강인하고 열정적인 지도자이며, 세계 전역에서 월드챌린지의 주최로 이루어지는 Expect 컨퍼런스의 강사입니다.

2015년 9월 4일 금요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얼마 전에, 한 청년이 타임스 스퀘어 교회의 기도 예배 도중에 울고 떨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워싱턴 주에서 왔으며 우연히 예배에 참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나가서 콘서트장으로 갔으나, 다시 그 콘서트장을 떠나 교회로 되돌아왔습니다. 지금 그는 기도를 원했고, "부모님이 크리스천입니까?"라고 저는 물었습니다. "네, 늘 저를 위해 기도하십니다."라고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청년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만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강제적으로 하거나 애원하지 않았습니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는 예수님에 의해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일어난 것이 그의 걱정하는 부모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마가복음 7장 31-37절을 보면 귀먹고 말 더듬는 자가 예수님께 온 이야기를 봅니다. 예수님은 그를 군중에서 따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막 7:34-35)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을 하심으로서 증명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이 귀먼 사람이 처음 들었던 목소리가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렸을 때 그가 어떻게 말을 했을지도 말입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안으로만 삭혔던 그 모든 것을 말로써 쏟아냈을 것입니다.

저는 그가 주님의 팔에 안겨 우는 것을 상상합니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시 5:2). 이 고침 받은 사람에게 시편 5편이 주었을 능력을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5:2-3). 예수님과 직접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이제는 고침 받은 사람의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같이 아파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델카폴리스에 있는 한 사람만을 위해서 가슴 아파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희의 자녀,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울고 계십니다. 아마도 여러분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방식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새로운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일깨워 주도록 말입니다.

2015년 9월 3일 목요일

작은 누룩

바울은 갈라디아의 교회에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 5:7-9).

여기에서 바울이 얘기하는 것은 교리적인 믿음이나 신학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는 묻습니다. "무엇이 당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복의 충만함으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됩니까? 한때 당신은 너무나 잘했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기도하고 선한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 것을 아는데 무언가가 이상합니다. 더는 자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육에 의존하는 상황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의 향기를 더이상 맡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확신, 분명함, 판단력이 모두가 없어졌습니다. 무엇인가가 당신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에 주저앉도록 설득한 것입니까? 무엇이든지 저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사실 저는 어떤 종류의 타협이라는 누룩을 당신 안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잡고 놓지 않는 무언가가 당신을 가리고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무엇입니까?"

저는 한때 주님께 놀랍게 쓰임받았던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신실했고 늘 기도했으며 믿음의 사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경험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는 많은 사역자도 포함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승리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 어떤 타협이 몰래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그것이 삶을 자리 잡아 버렸습니다. 종종 그러한 방해하는 누룩은 한 가지 빠지기 쉬운 죄입니다.

그러한 모든 사람에게 바울은 묻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삶에 그리스도의 복이 흐르는 것을 방해합니까? 어떤 누룩이 몰래 들어온 것입니까?”

바울은 이 구절을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경고로 끝을 맺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 5:9).

2015년 9월 2일 수요일

거룩한 확신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로마에 있는 교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롬 15:29).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거룩한 확신이 있어서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행 24:16).

요약해서 말하면 바울은 "주님 앞에서 내 삶은 다 열려 있다. 내 마음에 숨겨진 죄는 없고 이 사실에 대해 논쟁할 수도 없다. 주님의 축복은 나에게 늘 흐르는 계시여서, 내가 설교할 때 여러분은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영리한 신학으로 가득 찬 설교를 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바로 그 말이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재물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건강과 이 땅에서의 자원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에서 오는 축복이라고 여겨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더욱 큰 복을 얘기합니다. 그리스어 의미로 복은 “하나님의 칭찬”이라는 뜻입니다.

줄여 말해, 그리스도의 복은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 함께 있어 너무나 기쁘다 내 딸, 아들아. 세상 어디에도 우리의 관계를 어긋나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히 13:20-21).

저는 이러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향기가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이러한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거룩한 불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있고 싶어 하고 그와 더 깊은 친밀함을 나누고 싶어하는 욕구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만 말하며,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이 스며 나옵니다.

2015년 9월 1일 화요일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짐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롬15:29)라고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썼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여러분들을 만날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될 줄 의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의 말은 모든 신도가 알아야 할 무언가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에는 다양한 정도와 척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도는 이 목적이 되는 복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복의 충만함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 복의 약간 밖에는 누리지 못합니다.

에베소인을 향한 그의 편지에서 바울은 모두에게 이 복의 충만함을 구하라고 권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4:7, 13, 3:19).

이 구절의 "충만"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의 의미는 "가득 채우는 일을 완성하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축복이 충만함을 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글로써 자세히 설명합니다. "몸이 하나요…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 줄여 말해,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그리고 성령님께서 모든 자녀 가운데 계신다”하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요 14:23). 바울은 주님께 가는 동일한 수단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한없이 큰 축복을 가질 동등한 기회를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의 삶은 바울이 얘기하는 "그리스도의 축복” 안에서 늘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축복의 놀라운 정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 계시가 그를 완벽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복이 흐르는 데 방해하는 것이 그의 삶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