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은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지 그 중심을 공략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다른 이들도 역시 ‘세상에서 나오게’하는 것임을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요점적으로 그리스도는 “세상이 너의 처했던 상황에서 내가 너를 불렀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들과의 친교 속에서 너를 불러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냥 불러만 낸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불러내려고 너를 다시 보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신교 적그리스도 영은 세상에서 기독교인을 분리하기 어렵도록 만듭니다. 믿는 사람에게 세상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해 보이도록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성결하지 않은 탐욕, 욕정적 광기, 포르노나 간통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사단의 악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줄여 말해 세상의 것은 그리스도와 자기 의지를 섞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에 이끌려 한걸음 한걸음 순결하고 청결한 길을 걷게 됩니다. 경건한 책망을 감사하게 됩니다.

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예수님 임재의 능력

저는 50년간,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매춘부 등 이 땅에서 가장 어렵고 악독한 죄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러한 죄인들이 자신의 상황에 눈이 가려진 교회 신도들보다 복음의 진실에 대한 저항이 적다는 것입니다.

미국 전역에 걸쳐 정기적으로 교회를 참석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의 어떤 사람보다 더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잔잔하고, 부드럽고, 진실이 반만 있는 복음은 악의 벽을 허물지 못합니다.

타르수스의 사울은 그러한 마음이 굳은 종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대단히 종교적인 사회에 굳게 서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무엇을 보고싶은지 물으며 조사를 하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 임재의 완전한 폭발이 있는 눈멀게 하는 빛으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마음과 죄를 꿰뚫어보는 날카롭고, 대치되는 만남이었습니다(행 9:1-9 참조).

그리스도 복음의 사역자로서 저도 그렇게 합니다. 형제자매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그러한 삶의 길을 계속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아첨하거나 소심함, 저를 좋아하게 하는 것들은 그 상황을 바꾸지 못합니다.

단순히 말하면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도록 이끄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직 제 안에 계시는 성령님만이 이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7).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 은혜를 설교합니다. 그리고 눈물 속에서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굳은 사람들의 벽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임재의 폭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뉘우치며 기도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의 입에서 나와야만 합니다.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그리스도의 임무

세상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인정된 교회라는 표현은 불가능하므로 이율배반적인 말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세상이 사랑하는 어떠한 교회는 세상의 것이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제 삶은 1848년부터 1888년까지 인도에서 섬겼던 장로교 선교사 조지 보웬의 글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았습니다. 보웬은 선교 후원을 포기하고 빈민가로 들어가 현지인들이 사는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거의 빈민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진실한 능력의 간증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 경건한 분은 ‘현대 사회의 영’으로 밝혀지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보웬에 따르면 이 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사고방식과 방법, 도덕으로 개신교 교회에 잠입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사회와 교회가 구분하지 못할 때까지 지속해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시간에 걸쳐 세상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진정한 신자들을 향한 적대감을 잃을 것입니다. 박해를 멈출 것이고 교회는 세상에 사랑받게 되며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그리스도의 영이 왕좌를 탈환한 것이라고 보웬은 말합니다.

수년 전, 비영리 기독교 구호단체들에 이라크의 우호적인 문이 열리려고 할 때, 뉴욕 타임즈지는 비판적인 논평을 싣습니다. 그것은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언론으로부터 예상된 바였습니다. 이라크에 음식을 조달하는 것은 박수 칠만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이 모든 노력에 비판적인 한 기독교학자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자기 일에 전념해야 한다며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교회가 전도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듯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정해놓으신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임무에 가까이 갈수록 저희는 더 세상에 의해 멸시받을 것입니다.

2015년 12월 28일 월요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 것 by Gary Wilkerson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한 축복으로 이끄시면서 많은 위업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후에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던 초점이 흐려졌습니다. 대신 초점을 자신의 힘으로 바꿨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돌아가서는 안 될 곳이 애굽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아내까지도 위험 속으로 넣었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는 왕에게 아내를 잃었으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말과 교묘한 조작을 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던 사람이 어떻게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을까요?

아마 우리의 위기 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삶이 경제적인 면에서나, 건강, 가족에 관한 것들이 어려워질 때,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도움을 처하려 아브라함과 같이 ‘애굽에 내려간’ 적이 있다면, 그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 것입니다. 종종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수치와 절망을 더 합니다.

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세상과 멀어지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일어나며, 그 영광은 어려운 때에도 저희와 같이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보십시오.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1). 그 성스런 광경이 이사야를 경외감에 떨며 얼굴을 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5).

바로 그 순간 이사야는 하나님의 떨어뜨려 놓으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신성한 목적을 위해 너를 따로 떨어뜨려 놓았다. 내 말을 타락한 백성들에게 전하려 너를 보낸다. 그들은 너를 저항할 것이나 너는 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너에게서 등 돌릴 때, 너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하나님은 아직 끝나지 않으셨다

성도여러분, 만약 당신 인생에 어떤 후회가 있습니까. 좌절된 기대 때문에 마음이 괴롭습니까? 예수 안에서 무언가에 당신의 마음이 상했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나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그가 시간 내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런 증거는 눈에 안보이지만 구원받지 않은 자녀를 위해 기도해왔습니까? 결혼이나 직장의 어려움에 갇혀있지만 오랜 세월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까? 당신의 간구가 들려지지 않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사단은 당신이 초조해지길 원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여러분 자신과 또 가족과 미래와 사역에 대한 약속에 대해 초조해 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너무 느리게 반응하시고 당신의 간구를 무시했으며 당신을 뒷전에 두고 있다고 당신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확신을 포기하는 지점까지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단이 세례 요한을 데려간 지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고통의 순간에 옳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그의 의심을 예수님께 바로 가져갑니다. 주님은 요한이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을 바로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바로 그 답을 주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요한은 다시는 그의 초조함을 토로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제가 확신하는 바, 요한이 사형집행자 앞에 섰을 때 그의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나는 요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의 길을 곧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그 완전한 일을 당신의 영혼 속에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할 일은 단지 그 믿음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했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은 자이며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 그는 나의 모든 기대들을 이루셨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긴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6)

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인내심이 약한 신자들

마귀는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죽음을 앞두고 인내심이 약해진 것을 느꼈음에 분명하다. 이 초조함은 기다림을 못 견디거나 또 어떤 괴로움을 조용히 인내해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초조해질 때 –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 – 우리는 초조함과 믿음이 뒤섞여서 우리의 기도가 “이상한 향기”가 되어 주께로 드려지게 됨을 본다. 이 초조함은 그 악취와 함께 우리의 존재, 즉 그의 몸된 성전을 채우게 된다. 향기로운 기도를 올려드리기보다는 우리는 악취를 뿜어 올리게 된다. 그리고 사단은 이 냄새를 기가 막히게 빨리 알아챈다.

인내심이 약해진 신자들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기적이 자신을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상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응답이 느려서, 마치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고 어디에 갇혀있는 것처럼 믿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이 요셉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시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기간 동안에 믿음을 더하지 않으면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 있는 것이다. 잠언 18:19의 말씀에서처럼,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히브리말로 여기서 노엽게 되었다는 뜻은 “부서져 나간”이란 뜻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상했을 때는 우리의 신앙이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오래 붙들수록 우리의 불신의 감옥을 뚫고 나가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야고보서 1:2-4의 말씀은 우리에게 치유를 준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2015년 12월 23일 수요일

후회는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수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넘어지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게 알려주신 적이 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11:6). 실족하다는 말의 그리스어는 “묶다, 함정에 빠뜨리다, 덫에 걸리게 하다”이다. 이 때 나는 예수님께서 부드럽게 요한에게 경고하고 계셨음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너는 내가 바로 오실 그인가라고 물었다. 요한아, 너는 여기서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니? 사탄은 나를 겨냥하고 있지 않단다. 사탄은 너의 그 질문을 통해서 너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는 거란다.”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사십일 간의 시험을 통해서 똑 같은 질문을 통과하셨다. 그리고 지금 요한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사단은 지금 너에게 덫을 놓고 있는 거다. 그렇지만 너는 그의 거짓말에 걸려 넘어갈 순 없는 일이다. 사단은 오실 그가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너는 이 사단의 계략에 걸려들면 안된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실족한다”입니까? 무엇이 이 세 단어를 그토록 강하게 와닿게 합니까? 예수님은 요한이 사단의 거짓말에 걸려들었을 때에 초래하게 될 결과에 대해서 알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 거룩한 사람이 의심하기 시작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사단은 요한으로 하여금 딱 세 단어를 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 전해져 온 모든 예언을 다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행하신 모든 선한 일들이 다 무효화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세대들을 포함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같이 파선을 당하게 되는 거지요. 사탄이 요한의 입에서 듣기 원한 그 세 마디가 무엇인지 압니까? “아는 후회 하노라!”

“후회”란 단어의 뜻은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괴로움” 이다. 후회를 한다는 것은 “나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부인하는 발언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요한이 그 지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대신에, 그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 핵심은 “요한아, 네가 만약 사단의 거짓말에 저항해내면 너에게는 엄청난 믿음과 확신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단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불신이 너 안에 뿌리내리도록 놔두지 말아라. 만약 허용하게 되면, 너는 너 자신이 누구인가에서부터 하나님이 너의 인생에 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2015년 12월 22일 화요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대감들을 형성시킨다. 우리는 그의 말씀은 바위와 같이 굳건하고 강력한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의 약속임을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씀이 우리 스케줄에 따라 성취되지 않음을 볼 때가 많은데 이럴 때 우리의 원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사탄의 목적은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확신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사단이 그로 하여금 온갖 의심이 들도록 부추겼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요한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라 상상이 됩니다: “그래 예수는 거룩한 자다. 그러나 그는 단지 선행을 베풀고 기적을 행하는 또 한 명의 선지자에 불과해. 만약 그가 구세주였다면, 너는 왜 이 꼴이란 말인가? 그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얘기했던 것을 왜 지키지 않는 거야? 게다가 네가 한 설교는 왜 너 자신에게는 안 먹혀 드는 거냐구?”

사탄은 동일한 거짓과 속임수를 오늘 우리에게도 사용합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말씀과 약속들 그리고 기쁨들에 대해 의심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원수는 속삭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아버지가 기적의 아버지이고 불가능이 없다고 말하지. 그리고 니가 말하기도 전에 너의 간구를 들으신다고 말하지. 그런데 이 모든 괴로움들은 도대체 뭐야? 왜 하늘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왜 하나님께서 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아무 단서도 보이지 않는 거냐구?”

“주위를 둘러봐. 너만 빼곤 모두가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잖아. 너는 무너져버린 결혼 생활 속에 갇혀있잖아. 자녀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잖아. 수 년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사람들에게 설교해왔지만, 너한텐 왜 안 먹히는 거지? 하나님은 왜 너를 이런 괴로운 상황 가운데 버려두시는 거야?”

당신의 영혼 속에 불신이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그 동안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대해 기도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당신의 짐을 더 이상 하나님께로 가져가지도 않는다.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는 거죠.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신은 그가 당신의 인생에 그의 방법대로 일하시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시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기꺼이 분리되기 by Gary Wilkerson

아브라함은 기독교인도 유대인도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의 그는 하나님과 어떤 종류의 경험의 역사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명하셨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그래서 아브라함은 짐을 싸고 떠났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다. 여기 모든 것을 다 가진 한 남자가 있다 – 부와 물려받을 재산, 멋진 아내, 그리고 엄청난 가축과 땅.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목소리가 그에게 “일어나 떠나라”고 말했을 때, 그는 떠났다. 그는 기꺼이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 – 좋은 것들을 포함해서 – 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서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다. 


이제 결혼한 여러분들께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당신의 배우자가 어떤 한 목소리가 말하기를 직업과 집과 소유를 버리고 수입과 어떤 재정적 지원도 보장되지 않은 다른 주로 떠나라고 했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가 들은 게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겠는가? 아마도 기꺼이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 그러나 먼저 심리상담가에게 전화해보고 싶지 않겠는가?

무엇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떠나게 했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깔끔하게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킬 힘을 주었는가? 사도행전 6장과 7장의 스데반집사의 모습에서 우린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초대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많은 기적과 표적들를 위해서 아주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재판을 위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말씀을 선포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7:2)

스데반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의 믿음이 여러분 기분을 상하게 합니까? 글쎄요, 이건 사실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 있는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그는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기쁘게 자신을 분리시겼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도 스데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렇게 느꼈을 겁니다. “이전에 전혀 알지 못한 어떤 것을 지금 경험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을 이 전에는 전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경외감은 절대로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거룩한 땅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따름입니다.”

2015년 12월 18일 금요일

하나님의 사랑에 매임 받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남은 여생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넓히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삶에 놀라운 평화를 주셨으며 결국에 다윗의 원수들이 모두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의 삶에서 반영된 하나님께서 주신 회복의 증거는 그의 간증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날들에 그가 기록한 것들을 읽어보십시오.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사무엘하 22:2-3). 이 간증은 낙심한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사무엘하 22:7,17,20).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던 많은 일들을 저지른 다윗은 그 이후에도 “나를 기뻐하시므로”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영원히 알려지게 된 이유는 그가 지체 없이 또 진심으로 그의 죄를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잠언 13:18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책망을 들을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책망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행실의 열매를 먹고 너희 책략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제 고집대로 하다가 죽을 것이며 미련한 자들은 자만하다가 망할 것이지만”(잠언 1:30-32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죄로 인하여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 “교육적인 책망은 생명의 길이다”(잠언 6:23 현대인의 성경).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책망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리는 마음이 든다면, 즉 하나님의 영이 당신으로 하여금 죄 짓는 것에 대하여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놀라운 자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참된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께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참된 회복과 참회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가 훔쳐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

다윗 왕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매우 극심한 결과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심판을 스스로 예언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가난한 사람의 양을 훔친 부자는 양을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사무엘하 12:5-6). 그리고 다윗의 삶에서 그 예언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기는 수일 이내에 사망하였고, 다윗의 세 아들 – 암몬, 압살롬, 그리고 아도니야 - 은 비극적이고 때이른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신의 네 양으로 죄에 대한 결과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가 진실되고 온 마음으로 하는 회개로 하나님께 되돌아 올 때에 완전한 회복과 용서를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은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우리는 삶을 다할 때까지 마음 속을 갉아먹는 듯한 죄책감으로 살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돌아올 때에 바로 감싸주신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3).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놋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요엘 2:25-26).

이 예언이 전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확고히 하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할 것이다. 마귀가 훔쳐간 모든 것을 너희에게 회복해 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가장 최악의 죄인도 이렇게 말하게 만듭니다. “나는 마약중독자도, 알코올중독자도, 간통을 범한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의 영혼은 천국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으며, 나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 나의 모든 과거를 모두 뒤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나의 과거의 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나단 선지자처럼 마음을 찌르는 날카롭고 진실한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가 없었더라면 다윗은 사울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

다윗이 나단의 혹독하지만 사랑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전의 왕이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던 상황을 기억해 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경고하는 사무엘 선지자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왕의 성의 없는 반응과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저는 사울이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했던 다윗처럼, 영혼과 마음을 다하여 죄를 고백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파멸하고 몰락하는 최후를 맞이한 사울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한때는 거룩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왕이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성령의 책망하는 말씀을 거부함으로 아집과 반항으로 살다가 결국에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3). “여호와꼐서 사울을 떠나…”(사무엘상 18:12). 결국 사울은 점쟁이의 지도를 기대하였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사무엘상 28:15).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듣지 아니하였던 사울왕에게 닥친 끔찍한 최후를 기억하고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울과 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말씀을 전한 사무엘처럼, 나단 선지자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사울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의 영을 나에게서 제거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51:3-4, 7, 10-11).

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사랑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게 주신 가장 위대하고 자비로운 선물 중에 하나는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책망해주는 신실한 선지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목자로서,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어조를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전하면서 영혼들에게 사과를 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에게 그들의 죄를 꾸짖지 못하고, 또는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그의 죄를 꾸짖지 아니하였다면 어떤 일이 발생되었을까요?(사무엘하 12장 참고).

생각해보면, 나단선지자는 다윗 왕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한 행동들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권력이 있는 다윗 왕이 자신을 언제든지 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 왕에게 그저 좋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필요할 때 함께 있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의 죄를 보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랬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 없이는 다윗은 최악의 심판,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죄에 두시고 성령의 중재를 멈추시는 상황에 놓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육신을 만족시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씀만 선택하여 들음으로써, 죄로 인하여 근심하는 마음은커녕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지경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회개를 하지 못하고, 회개가 없으면 마음은 그저 단단해지기만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9-10).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죄를 꾸짖는 바울로 인하여, 성도들은 죄로 인하여 근심하기 시작하였고, 근심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바울의 직선적이고 죄를 꾸짖고 책망하는 설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매우 강한 어조로 말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7:12). 다른 말로는 “여러분을 정죄하거나 불안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하는지 알게 하려고 여러분의 죄를 보여드린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실 때, 가끔은 아주 강하고 심하게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이시는 다정한 사랑입니다.”

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by Gary Wilkerson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나타내는 특징이 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세상과 교회를 분별할 수 있는 특징이 너무 없어졌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아주 슬픈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목적, 즉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쓰일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분리시키셨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세상과 타협하여,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 보다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맞추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타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삶의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소망은 찾을 수 없고 무척 혼돈스러워 합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에게 그들은 이세상과 다른 무엇을 기대합니다. 우리의 삶은 참된 소망, 기쁨, 평화, 사랑, 그리고 관용으로 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크리스천들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가치관들을 삶에서 제거해버립니다. 그래서 잃어버리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크리스천의 삶에서 이 세상과 다른 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항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나를 어떠한 한 관점으로 바라보지만 나는 너희에게 나를 완전히 나타내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희가 보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나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어떻게 살고, 믿어야 하며 아버지를 따르며 섬기는 방법 등을 나누었다. 이 모든 가치관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과 분리되게 하는 것들이다. 사탄은 나에게 속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너희의 삶에도 내가 있을 때 속하지 못한다.”(요한복음 14:27 참고).

하나님께서 거룩과 분리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리는 바로 우리의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 그리고 삶의 방식이 바로 거룩과 분리를 반영하는지 보여줍니다. 이전 세대의 크리스천들은 거룩과 분리를, 금주, 금연 또는 사교계에 참여하지 않는 것 등을 의미하였습니다. 사실 그것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의 마음이 이 세상에 향하여 있으며, 나를 무시하고 있지 않느냐? 이 세상의 기준으로 평안과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느냐 아니면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느냐?”

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사랑과 관심의 새로운 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잘못 전하여, 믿는자들 이었음에도, 갑자기 교회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땅을 팔아 받은 금액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본인이 아닌 성령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은, 만약 믿는자가 그 어느 누구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이 부부의 거짓은 무엇 이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기로 한 돈을 남용한 죄 입니다. 그들은 땅을 사는 사람에게 말하였을 것 입니다. “땅값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쓰일 것 입니다. 돈 전액은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일 것 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과부와 가난한 자들의 것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품고, 세상에 그분을 잘못 전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새로 세례받은 신도들의 마음을 그렇게 빨리 변화 시키실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변화는 정말 놀라운 기적 이었습니다. 그들의 갑작스런 변화의 답은 말라기 선지가의 예언에 있습니다. 말라기는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선지자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을 압제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말3:5)

이제,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로 시간을 옮겨 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신앙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2:42) 여기에서 언급하는 사도의 가르침은 무엇 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지시하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2015년 12월 10일 목요일

빛 가운데로 걸으라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해주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1: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1:5, 11)

불신은 늘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예수님께서 세상에 굉장한 빛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빛은 세상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빛 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눈부신 빛을 비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수많은 불신의 예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아마 성경에서 예수님이 신이라는 증거를 제일 많이 보여주는 장 일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죽은자가 살아나는 장면을 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아는, 몇백년 전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도 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나는 음성을 실제로 듣는 장면도 봅니다.

이런 놀라운 이적들을 보고도, 사람들은 뻔뻔하게 예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요12:34)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네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말하지만, 우리가 아는 진실은, 진정한 메시야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시는 것이다.”

그때,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인자는 누구냐?.” (요12:34) 그들의 맹목적인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히셨을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답변을 하는 대신, 경고를 하셨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요12:35-36)

2015년 12월 9일 수요일

대 배교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버리고 떠납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상황을 염려하며 경고 한 바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살마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가 후서 2:3)

구약에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떠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지는 예시가 나옵니다. 역대하 14장에 나오는 아사왕은 백만명이 넘는 에티오피아 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사왕은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하 14:11)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대하14:12) 아사왕은 정말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후로 몇년간, “이 때부터 아사 왕 제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대하15:19) 수년간, 아사왕은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았기에, 유다에게 주님의 은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온 땅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국가의 배고픈 자들이 유다에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은 아사왕이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사 왕 제 삼십 육년 되는 해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쳐들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라마을 건축하여, 사람들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유다를 굶주리게 만들어, 항복을 얻어낼 생각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아사 왕은 취약한 상황에 있었지만, 전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주님의 뜻과 조언을 받는 대신, 아람 왕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사 왕은 아람 왕의 도움을 받는 대신,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적을 물리칠수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영광은 이방나라인 아람에게 갔으며, 유다는 더이상 여호와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을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 대하16: 7, 9 )

단언컨대, 오늘날의 수많은 믿는이들이 아사 왕과 똑같은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자립심과 바꿨기에, 영혼속에선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근원이 하나님 대신 다른 것 이라면, 믿는자들의 영혼속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입니다.

2015년 12월 8일 화요일

나날의 주님의 신실하심

지금,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마치 사나운 폭풍속에 있는 배처럼, 절망적이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곁에서 몰아치고 있는 폭풍이, 어쩌면 이제것 겪어본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신 분은 솔로몬 왕 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 이십니다. 그는 모든 폭풍의 주인이시며, 폭풍을 통해 여러분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위기를 통해, 여러분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원하십니다.

당신은 "정말로 배가 침몰하면 어떻게 하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하지?"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속 사도바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울 자신의 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타고 있던 배는 정말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는 그 폭풍속에서, 오직 주님께서 주신 말씀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배는 침몰하겠지만 너와 함께 행하는 자들은 네게 주노라." 폭풍이 끝나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로 많은 기적들이 따랐으며, 대단한 부흥들이 일어났습니다. (행28:1-10)

그렇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들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견뎌내시고, 또한 여러분의 믿음도 견딜 것 입니다. 여러분의 배가 침몰할지라도, 주님께서는 헤엄쳐 해안에 닿을 힘을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하신 것 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물질적인 것만 잃게 될 것이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쉽게 그런것들을 교체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크고, 좋은 배들을 갖고 계시며, 여러분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들로, 여러분을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55:22)

사실 저도,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꾸짖는 부분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 주님, 너무 불공평하신거 아니십니까! 저는 자신들의 끔찍한 재난을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들은 집을, 직장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입니다. 설마 그런 힘든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도, 충만한 믿음을 갖고 있기를 바라십니까!"

그때, 성령님께서 제가 전에 가 보았던 빈민촌들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판잣집에서 살며 땅바닥에서 자는 그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기쁨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날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뻐했으며, 그 어떤 시련속에서도,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넘쳐나게 하셨습니다.

2015년 12월 7일 월요일

구별하다 by Gary Wilkerson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요14:19)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 할거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에는 참 흥미로운 말 이었습니다. 제자들 중 한명이 물었습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14:22)

물론, 예수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생각하시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요14:23, 27, 29-31)

저는 한 테마에 집중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요약했습니다. 그 테마는 분리입니다. 이 몇 구절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왕국과 세상 사이에 확실한 3가지의 구분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요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14:30)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구별을 보여 주셨을까요? 예수님께는 우리가 이런 확실한 구별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성경 내내 이런 구별을 하십니다. 창조때에는 빛과 어둠을, 밤과 낮을 구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 세상 모든 민족들과 구별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그의 교회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심판받을 날에는 그의 양을 염소로부터 구별하실 것입니다. 말씀 내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구분을 하시며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2015년 12월 3일 목요일

전적으로 믿음을 공격하는 전투

오늘날 교회를 향한 사단의 위협은 이 땅에 부어지는 더러움의 홍수보다 더합니다. 그것은 물질주의, 중독, 심각한 유혹을 넘어섰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믿음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찾으려 할수록 사단의 공격은 더 집요해집니다.

최근 들어 주님의 사도들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공격하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신실함에 대해 괴롭히고 의심하게 하는 질문들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은 더 나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워하며 “더는 못하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든 한 살의 여인이 “내 남편은 뼈암으로 고생 중이고 아들은 에이즈로 죽어가며, 저는 당뇨로 서서히 쇠약해지고 있어요.”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가정이 겪고 있는 상황을 다 읽으면서 저는 머리를 흔들고 고민했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기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겪기에는 너무 힘든 것 아닌가. 분명 하나님께서 그녀의 믿음에 사정을 봐 주실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불구하고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약속하신 말씀에 절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아들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을 직접 얼굴로 뵐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싸움은 전적으로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그려진 것 같이 예수님께서 사천 명의 사람을 떡 일곱 개와 몇 개의 생선으로 먹이셨습니다. 그 후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막 8:14-21).

2015년 12월 2일 수요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마가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라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대부분 군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이웃들이 몰려와 예수님께서 어떤 말을 했는지 물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어? 배운 것을 말해 봐.” 예수님의 비유를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말은 아마도 생명력이 없고,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말이 성령님의 계시나 죄에서 구하는 힘이 없는 죽은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성령님의 생명력 없이 들은 말을 되풀이할 지 모르겠습니다. 배움에 목말라 하던 제자들과 군중의 얼마나 극명한 대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삶의 변화시키는 계시를 원하는 남방 여왕의 신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하는 것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막 4:11)라고 하셨습니다. ‘수수께끼’는 비밀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당신의 비밀을 오직 삶이 변화되는 진실을 갈망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십니다. “너의 어려운 질문들에 대답을 원하면 나를 따르라. 나와 시간을 보내면 나의 말을 너에게 보이고, 다른 이가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이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외인”은 누구입니까(막 4:11)? 예수님을 기다리려고 하지 않는 군중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훈련하는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필요를 위해 주님을 찾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오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아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진정 자유케 하는 진실은 그들에게 당혹스럽고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2015년 12월 1일 화요일

진실을 향한 갈망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12:42).

오 늘날 우리 모두는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솔로몬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그가 우리를 혼돈 속에 놔둘까요? 그의 지혜가 항상 가까이 있다면, 남방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구한 것 같이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백성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구약이나 제자들에게나 초대교회에 그랬던 것 같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듣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 2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밭에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군중은 당황해하며 궁금해했습니다. “도대체 이 씨뿌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씨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는 새, 사단, 가시떨기, 옥토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에 보면 대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4:9)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제자들과 몇 사람만이 대답을 원했습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4:10),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습니다(막4:14-20 참조).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계시의 진실을 주셨지만, 그것이 군중을 더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 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4:34). 저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의 말을 다 이해하면 답을 얻기 위해 나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남방 여왕이 한 것 같이 너를 자유케하는 진실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나에게 와야한다. 너에게 필요한 모든 계시를 주겠다. 하지만 나를 갈망하고 따르는 귀를 가지고 나에게 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