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9일 월요일

부활의 능력을 입는 것 by Gary Wilkerson

부활의 엄청난 결과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제 아내인 켈리와 저는 서로에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대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약을 완성시키시고,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옷을 입듯이 우리의 삶에 입혀야 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린도전서 15:54).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우리가 크리스천 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부활이 있었든 없었든 상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부활이 없었다는 증거가 나타나도 나는 크리스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이 세상도 더 나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견해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결과는 매우 끔찍한 세상이었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린도전서 15:14-15).

쉽게 말하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설교도, 전도도, 선한 일도 모두 멈출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이 더 살기 편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크리스천의 믿음은 그저 도덕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이라는 약속으로 위안을 얻기 위하여 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에게 속죄는 없었을 것입니다.

2016년 2월 25일 목요일

당신도 행할 수 있습니다

몇 달 동안 저는 과부, 고아,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왔습니다. 궁핍해서 더 이상 보험료를 낼 수 없거나 살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편지를 받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만군의 여호와여, 먹을 것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행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네가 그들을 먹이거라. 너에게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생각하셔야 할 것은 아무도 좋은 일을 행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그 일로서 심판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굶주린 자를 먹였는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 점은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서도 나만을 위해 살았는가? 욕심스럽고 과하게 사모으느라 예수님을 잘못 증거가 되고 있는가? 도움이 필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눈감고 지나쳤는가?”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에 우리의 증거가 가져야 할 조건은 말씀과 행동 두 가지 다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돕는 행위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듯이, 행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4-16).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의 계시에 두 가지 방법으로 반응합니다. ‘쉬운 복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혹독하지 않으셔. 최후의 심판일 설교뿐이야. 하나님은 사랑이 너무 많으셔서 가혹하게 심판하지 않으셔”라고 합니다. ‘강한 복음’의 사람들은 “이건 너무 엄격하고 원하는 것이 많아. 이러한 부담스러운 말은 받아들이지 않겠어. 나는 절대 만족하게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의 복음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정당화하고 답보합니다. 한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부활을 증거가 되려고 합니다. 다른 쪽은 기도 모임을 열고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도록 하나님께 여쭙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도움이 필요한 가족들에게 선물 바구니를 나눠주고, 다른 때에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을 줍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온전히 행하는 헌신은 아주 적습니다.

2016년 2월 23일 화요일

성령으로 행하는 것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이 간단한 지시에서 사도 베드로는 평범한 말로 “성령으로 살면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게 내어드려라. 우리는 모두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지속적이고 확실한 인도자로 보내졌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몸에 거주하고 마음을 다스리기를 요청하십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성령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고 매 순간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시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위기의 순간 때마다 위로를 얻으려 그분을 셀 수도 없이 불렀습니다. 성령님을 존중하며 그분에 대해 설교하고 성령의 선물과 열매에 관해 가르칩니다. 성령님께 기도하며 찾고, 천국을 열어 교회를 회복시켜달라고 애원합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진실한 성령님의 발현을 경험했지만, 적은 사람만이 성령 안에서 걷는 의미를 아는 것 같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진실을 알게 되면 혼란, 갈등, 불화, 고통, 괴로움, 망설임이나 정욕에서까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러니 진실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 분명히 쓰인 것처럼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행할 방법은 육 아니면 영,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육은 본연의 고집스러운 의지가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택하고 나서 하나님께 그 선택들을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건전한 정신을 주셨으니 나는 똑똑하게 선택하겠다. 하나님의 지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영으로 행하는 것은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의지를 성령님께 위탁하고 그분의 작지만, 지속적인 목소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지도해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다스림을 만들러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라고 말하듯이, 성령님은 걸음을 정하십니다.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정하시고 이끌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2016년 2월 22일 월요일

그리스도 부활의 목적 by Gary Wilkerson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매일의 삶에서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서고 다시 살아나신 이야기의 부분은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그 놀라운 진실을 적용하기 충분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을 만듭니다.

그리스도 부활은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을 위해서도 급진적인 결과를 가집니다. 부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사람이 영적인 삶과 연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땅에서의 매일의 삶과 결부 짓지 않습니다. 부활이 우리의 결혼, 직장, 가족과 어떻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일, 심부름, 의무, 요구로 어쩔 줄 모르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의 첫 번째 중요성을 상기시켜줍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25)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 베드로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의로움은 삶의 새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의로움 없이는 아마 죄와 용서의 반복 속에 갇혀있을 것입니다. 죄의 무게가 우리의 삶에 가져다 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거나 행동을 비관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비난이 매일의 삶에 밀려오면,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정결해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것으로 충분합니까?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해질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았던 것 같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에게 기쁨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매일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능력 있는 진실입니까! 하지만 크리스챤들이 매일의 삶에서 이 새로움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삶의 새로움이 있어? 나는 좌절감이 들고 짜증이 나며 실망스러운데.”라고 제 아내에게 말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삶을 새롭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은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또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2016년 2월 19일 금요일

당신을 위한 구원의 말씀

엘리야가 이사벨로부터 도망쳐서 동굴에 숨었을 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열왕기상 19:11) 하나님은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1)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겨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2)

하나님은 당신이 지치고 상처받았을 때 어떤 말씀이 필요한 지 잘 알고 계신다. 그런데 이건 당신을 판단하는 말이 아니고, 혼내시는 말씀도 아니고, 꾸짖는 설교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본다. “네가 시험에서 넘어졌을 때, 너를 심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는 아주 세밀하고 친절한 음성을 듣고 싶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2). 어떤 번역은 이를 “부드러운 소리”라고도 말하고 “새롭게 하는 부드러운 바람”이라는 뜻이다.

이 부드럽고 세미한 음성은 오늘도 우리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메시지는 동일하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서 5:11).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편 103:8-11, 13).

여기 당신을 향한 구원의 말씀이 있다. 일어나라 신뢰하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폭풍우 속에 함께 하시다는 것을 믿을 때가 온 것이다. 그가 이 모든 것을 견딜 힘을 주실 것이다.

네가 망가질 거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라. 사단에겐 절대 승산이 없다. 주님을 말씀하셨다. “아무리 네가 상하였을지라도, 너를 꺾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의 촛불이 꺼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영이 너의 타 들어 가는 촛불에 불을 붙여서 나를 향해 타오르게 할 것이다.”

2016년 2월 18일 목요일

하나님은 당신에게 화나신 게 아니다

당신은 충성 어린 종이요, 열심히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다. 과거에 승리한 적도 있으며, 주님을 깊이 사랑한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전에 없이 깊게 상처 받았으며, 심지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도 힘들다.

사랑하는 이 성도는 지금 영적 전쟁 중인 것이다. 전투와 상처, 당신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악랄한 적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자신을 정죄하는 생각들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양심은 이렇게 속삭인다. “옛날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 않잖아. 말씀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너는 메말랐고, 미지건 해서 불이 없어져버린 상태라 좋은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거야. 이제 당신은 사탄에게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그 평안을 빼앗아 가게 놔둬버리게 된 거야. 너를 붙들어 줄 것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나는 주님을 저버렸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어.” 너의 꺼져가는 믿음은 점점 약해져서 사단은 그것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마치 엘리야처럼, 당신은 완전히 탈진했고 용기를 잃었다. 단지 자고 싶을 뿐이다. 성경은 이 거룩한 선지자는 오직 잠만 자고 싶어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누워서 잤다” (열왕기상 19:5)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짐을 지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꾸짖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충성어린 종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안 것이다. 나는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상처받고 지친 이 충성스런 종을 보라. 그는 자신의 한계점에 다달아서 자신의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나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열왕기상 19:7)

이 말씀은 이를 읽고 있는 모든 상한 갈대들에게 엄청난 말씀이다. 당신이 얼마나 상했는지 상관이 없다. 시험을 당하여서 얼마나 넘어졌는지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촛불이 꺼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너의 믿음이 사그라 들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하늘로부터 당신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다. 당신은 지금 이 말씀으로 어루만져지고 있다. “일어나 먹으라. 하나님은 당신께 화나신 게 아니다. 당신을 넘어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 상황이 당신이 핸들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는 당신에게 초자연적인 힘으로 부으실 것이다. 그가 당신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공급하실 것이다.”

2016년 2월 17일 수요일

믿을 수 없는 사랑

예수님이 한 번은 그의 육신의 친척들에게 말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요한복음 7:7)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진정한 제자들을 향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내어놓으신다. 지금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이 말이 해당될는지 궁금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예수님은 한마디로 “너희들은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왔구나. 그래서 내 복음을 희석시켜버렸구나. 세상의 품에 푹 안겼구나. 그래서 세상의 친구가 되어버렸구나.” 야고보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물론 예수님은 정치가들과 죄인들의 친구이셨다. 그렇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보면 그는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히브리서 7:26) 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한 사역을 하셨지만, 늘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치 주님처럼,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만약 그들이 나를 핍박하면 너희들도 또한 핍박할 것이다” (요한복음 15:20). 그렇다고 당신이 굳이 핍박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이 핍박은 당신의 능력이나, 인종, 외모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주님을 당신의 주로 인정한 것 때문에 오는 것이다.

이제 격려의 말을 전하겠다. 비록 세상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를 미워하고 핍박할 지라도, 우리는 교인들 사이에서 점점 더 자라나는 사랑과 경건한 애정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수록 우리의 의로운 형제와 자매들은 점점 더 하나가 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날에는 교회 안에서의 사랑이 점점 더 귀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고, 미디아로부터 놀림을 받을 것이며, 할리우드로부터 비웃음을 받을 것이며,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오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엄청난 사랑이 넘치는 장소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핍박을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지는 상관이 없다. 교회는 우리를 이러한 말들로 맞이 할 것이다 “집으로 잘 오셨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여기가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진정한 복음을 들고 나아가기 위해서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2016년 2월 16일 화요일

왜 세상은 교회를 싫어하는가?

진정한 기독교인은 사랑과 평안과 헌신과 돌봄을 실천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이들은 자기희생적이며, 겸손하고 친절하다.

우리의 상식은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고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고 저주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일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약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들 보다 나를 먼저 미워하였음을 기억하라…그들이 나를 핍박한 것처럼 너희들도 핍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18, 20) 그렇다면 왜인가?

교회는 교회의 사명, 즉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주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인 바로 그 사명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내가 지금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하면 아마 좀 놀랄런지도 모르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경건하지 않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self-righteousness)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의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자신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형성하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선행 위에 우상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마음 착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지를 스스로 칭송해 마지 않는다. 물론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선하며 지옥엔 절대 갈 수 없을 만큼 착하다고 말이다.

이 세속적인 사람은 오랜 세월을 자신의 양심을 눌러왔다. 자기 잘못을 얘기하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잠재워왔다. 그는 이 위장 평안을 누리다 못해 하나님이 자신을 아주 귀하게 여기신다고 믿을 정도로 자신의 거짓에 길들여왔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그 순간, 당신 바로 기독교인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전하는 진리는 자신의 죽은 양심보다 훨씬 크게 그 음성을 발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갑작스럽게 당신은 바로 그 사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당신은 모든 게 안전하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확신을 빼앗아 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 수년의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이 정말 안전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당신은 그 모든 선행들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한테 당신은 절대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의 눈에 당신은 밤의 평안한 잠을 앗아가는 고통을 주는 사람인 것이다.

2016년 2월 15일 월요일

아가페 사랑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마지막 교훈의 말씀을 전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 질문을 세 차례나 하셨고, 그 때마다 베드로는 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매번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1:15-17)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랑이란 단어의 그리스어 아가페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런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니가 나를 싫어한다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만약 니가 나를 부인한다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디. 만약 니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을 때, 그는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매번 그가 사랑을 맹세했을 때, 그는 필리오, 즉 형제간의 사랑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죠. 즉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기본적으로 “주께서 저를 사랑해주신다면 저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답은 우리 주님께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나랑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또 말했다. “나의 백성들이 도움에 필요하다, 베드로. 그들을 돌봐라. 그들을 먹이라. 그들에게 너의 생명을 주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라고 명하고 계신다. 주님은 이 제자가 지난 몇주동안 심하게 망가졌으므로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뒷부분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생명을 주는 것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부서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말하노니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를 메고 네가 가고 싶은대로 다녔겠지만, 네가 늙어서는 네 손을 남에게 의지하고 네 옷을 입히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이는 그가 어떤 죽음을 맞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이 후에 그는 말했다.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8-19)

이 마지막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축복된 삶에서 주는 삶, 부서지는 삶으로 이끄셨다. 이로써 베드로에게 정말로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 고통, 고뇌, 슬픔이 하나님께서 그의 앞에 두신 주는 삶(giving life)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은 베드로의 죽음조차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는 이 땅에서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는 있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을 살 때에 마치 제단에 부어진 포도주처럼 당신의 삶이 부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서 당신은 타자중심적이고 강력하며,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세상이 당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주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며, 그의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성품을 세상 가운데 증거케 될 것이다.

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자비의 시간

하나님의 의의 불길을 다시 키울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서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높일 사람들이 아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검게 그을린 심지를 볼 때에 나는 그 불씨를 끄지 않을 것이다. 불길은 사라져서 불이 보이지 않더라도 작은 잿불이라도 보인다며 그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라도 신실하게 부르짖는 나의 종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할 것이다.”(이사야 42:3 참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지금 ”자비의 시간"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특히 유럽을 여행할 때는 이 사실을 더욱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대륙은 미국보다 더 타락하였고, 선택적으로 하나님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렸습니다. 유럽의 어떤 나라들은, 길을 걸을 때 쉽게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오만한 태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스웨덴은 유럽국가들 중 비교적 부유한 국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더욱더 부유해질수록 배교자들의 수는 늘고,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신앙은 점점 식어가고 있는 위험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일랜드 또한 수 십 년 동안 찢어지는 가난에 시달렸다가 이제 부유해지고 있는데, 영적인 기후는 이미 무감동의 상태로 세속주의가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 전체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심판이 온다면 뭐 어때? 그래서 뭐? 그냥 신나게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거야.” 하나님을 찾는 마음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조급함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향하여 명료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초자연적으로 막을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말씀만 하시면, 천사들이 모든 마귀의 권세를 땅에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국제적으로 자연적, 경제적, 사회적 재난을 허용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 할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3-4).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상한 영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금과 법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욕심 많은 사제들은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며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혹사당하는 노동자들은 조롱 받았고 업신여김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은 타락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예수님께서 큰 빛을 가지고 어두움의 시간에 오실 것이라는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죄악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현 상태를 보시고는, 예루살렘은 곧 황량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시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회에 70여년 동안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로 부름 받은 성령충만한 증인들이 소망, 회개의 말씀을 전하며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인 이스라엘을 그렇게 쉽게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 이 그림이 바로 현재 미국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부도덕과 죄악으로 인하여 완전히 멍들고 상해버린 사회. 또한 미국은 현재 우울하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며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그리고 카운셀러들이 많은 시대이지만, 도움을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학대, 폭행 그리고 이혼 등의 문제로 우리의 자녀들은 멍들고 상처 입었습니다. 십대 청소년들은 부도덕, 물질주의 등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사탄은 악의 폭풍을 이 나라에 불러일으켜, 꺾이고 멍들고 상한 사람들로 채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러한 멍든 영혼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대형교회들에서 죄와 의에 대하여 선포하지 않는 목회자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크리스천들로부터 오는 수 많은 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황하고 혼돈한 상태로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된 찬양과 경배는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심령도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제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데이빗 목사님, 제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뉴욕타임즈에서 대형 오순절 교회에 관하여 기사를 내었습니다. 그들의 주요 메시지는 “우리 교회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거짓된 희망과 일시적인 안심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이사야 42:3). 이 나라의 어느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한때 불로 뜨겁게 타오르던 심지가 그을려서 검게 된 상태를 보고 계실 것입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목적과 마음을 갖고 활활 타오르던 믿음들이 이제는 거의 불도 찾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16년 2월 10일 수요일

심판 받는 아메리카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미국을 아직 심판하지 않으신 겁니까? 왜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노아의 시대에는 120년 동안 경고를 하시다가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판단하시고 홍수를 내리셨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미국의 죄를 오랫동안 견디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미국을 의로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미국을 사랑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미국에 닿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에 놀랄 뿐입니다.

사실은 저 또한 오늘날에 심판의 초입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끔찍한 재난들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가 아직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있는 그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미국은 위기 때마다 넘어지기도 하지만, 오직 은혜로 인하여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혼돈에는 오직 한가지의 해답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입증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이사야 42:3). 미국은 상한 갈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갈대는 길고 속이 빈 줄기를 가졌으며 물가나 늪이 많은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아주 부드러운 식물이기 때문에 큰 바람이나 강한 물살에 의하여 쉽게 굽혀집니다. 그러나 굽혀지다가도 어느 각도에 이르면 완전히 꺾여 물살에 흘러내려가게 됩니다.

잔잔한 날씨에 자라는 갈대처럼, 미국은 한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큰 목적과 희망을 갖고 자랐습니다. 미국의 사회는 하나님을 높였으며, 법과 사법의 기준은 성경이었습니다. 적어도 제 어린 시절에만 해도 학교 교재와 수업은 성경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번영하면서 고대 이스라엘과 같이 오만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기간에 많은 것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법정과, 학교에서 쫓아내었고, 하나님의 이름은 조롱 받고 멸시당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도덕적인 나침반을 완전히 잃은 결과로 한때 곧게 서있던 미국은 이제 구겨지고 굽어진 상한 갈대같이 되어버렸습니다.

2016년 2월 9일 화요일

메시야에 대한 새로운 계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1-4).

이 말씀은 온전히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감동을 주셔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시작문구는 이렇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이 문구는 듣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메시야에 관한 새 계시를 듣기 위한 준비를 하라.”

이 구절들이 연상하게끔 하는 장면은 아주 명료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도록 강요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떠들썩하고 거창한 소리와 함께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정하고, 애정 어린 구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치유하였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마태복음 12:15).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분노로 복수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대하는 세력들을 불을 내리라며 저주하는 제자들 같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불로써 반대하는 세력들을 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마귀와 맞서 싸울 천사들을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다정함이 이사야의 예언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19).

이사야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 나라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주의적이고 거창하며 떠들썩한 성격이 아닌 개개인의 안에 거하시며 안정감 있고 잔잔한 목소리로 사랑을 얘기하시는 구주로 오실 것입니다.”

2016년 2월 8일 월요일

굶주린 아이들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무리들을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은 아이들을 보살피듯이 섬기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피를 흘리는 여인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무리를 먹이신 순간들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만들었고,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때문에 그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또한 개인적으로는, 제 가장 깊은 필요를 예수님께서 충족시켜 주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십대 청소년인 저로서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대대로 내려오는 목회자의 집안에서 자라왔지만, 저의 믿음이 부모님으로부터 반복해서 전해들은 가르침 때문인지 실재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상한 저의 영혼을 만나주시고 내 안에 오셔서는 제가 필요로 하는 사실들을 보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도 무하마드도 공자도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의 시작에서 경험하고, 축복에서부터 상처와 고난 중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으로써 우리를 성장할 수 있게 하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육신은 고통과 상함을 요구하는 나눔과 희생을 무척 싫어합니다. 만약에 축복을 기대하며 기독교 자기계발도서 칸에 있는 책을 보러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중에 나누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생각합니다. “나는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조난 당하고, 돌에 맞고, 두들겨 맞으며 나눔에 소명을 두었던 사도바울에 대하여 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과 축복을 나누기 위해 살았던 여러 사도들의 고난 받고 핍박 받았던 내용을 읽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긴 글렀네.”

사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예수님의 시대에 이미 입증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려운 진리에 대하여 설교하시기 시작하셨을 때, 군중들은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한복음 6:66-69).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우리의 삶의 목적과 계획을 우리 스스로 정하여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리하였다면, 우리는 모두 받기만 하고 나누지는 못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과 계획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렵고 좁은 길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 아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2016년 2월 5일 금요일

예수님은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교회와 수확을 그리면서 믿는 사람들의 뒤돌아섬을 보셨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퇴보를 보시고 그의 영은 상심할 것입니다. 풍부한 수확하는 대신에, 믿는 사람들이 시간과 힘을 세상적 성공과 물질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이들이 수확을 거두지 못할것입니다. 익은 들판이 잠자듯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천군 천사를 보내 수확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의하시고, 갑자기 수천 개의 천인이 지구에 나타나 초자연적인 빛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영광의 옷을 입은 초자연적 존재가 교회와 공공장소에서 말하는 광경입니다. 그들은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기자들에 의해 인터뷰를 합니다. 십자가, 부활, 승천, 하나님의 사랑과 마지막 올 심판에 해 이야기 합니다. 매끄러운 말솜씨와 확신으로 말하지 때문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많은 요나와 같이 세상에 경고를 합니다.

조금 지나지 않아 이 빛나는 천사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사로잡혔다고 합시다. 귀한 음식, 물질적인 것, 부와 명예에 넘어갔습니다. 곧 성공, 야망, 부를 쫓게 됩니다. 오래지 않아 서로에게 시기 질투하고 화를 내며, 자만, 교만함을 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오늘날의 교회와 같이 된 것입니다! 제가 드릴 질문은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입니다. 세상에 빠져있는데 어떻게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간증은 김이 빠져버렸으며 모든 초자연적인 능력들이 고갈되어 무기력해지고, 의심만 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스트레스에 고통받고 기쁨 없을 때 누가 복음을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예수님 사람은 충분하며 나의 모든 것이고, 지속적인 공급처다”라고 말하면서도, 평안이 없이 제가 항상 두려워 하고 걱정하면 누가 제 말을 믿겠습니까? 그 누구도 제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그리스도인이 다를게 뭐가 있어? 항상 그 상태이면 예수님이 치유자일 것 같지 않은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굴 표정은 중요합니다. 아가서에서 예수님께서 신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십시.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네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2016년 2월 4일 목요일

추수할 시간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라고 선포하셨습니(마9:37-38참조). 예수님 세대의 그때, 놀라운 마지막 영적 추수가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 추수가 지속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때에 무엇이 “추수할 때가 되었다. 이제 거두는 때이다.”라고 할 수 있게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영적인 깨어짐을 보신 것일까요? 회당에 회복이 있었을까요?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회심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이 회개로 깨우쳤을까요? 무엇 수확할 때가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요?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어떤 영적 움직임이 있었는지 증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비웃음을 샀습니다. 나라의 영적 지도자는 그의 진실성과 신성을 의심하며 배척했습니다. 어떤 종교 무리는 예수님을 절벽으로 밀어버리려 했습니다. 예수님도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회개하지 않음을 호되게 나무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군중들은 혼동스러운 절망에 휘말려있었습니다. 성경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말합니다(마 9:36). 여기에 걱정에 빠져 지치고 우울한 사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찾을 수 있는 어디에서든지 도움을 청하며 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은 “들판이 익었으니 수확할 때가 되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수확에 관한 말씀이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까? 들판이 익어 추수하기를 기다리는 증거를 보십니까? 어느 나라들이 회개하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교회가 깨어나고, 종교 지도자들이 회복에 목마르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세대에 신성함을 향한 울부짖음이 있습니까?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의 때에 그분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안 좋은 조건들에 의해 움직이셨습니다. 보는 곳마다 사람들이 절망으로 힘들어할 때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시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6년 2월 3일 수요일

추수에 쓰이는 도구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9:36–38).

예수님께서는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일꾼은 적다”라고 간단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일꾼이 적은 것일까요?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신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돈이 예배당을 세우는 데 쓰여집니다.

영혼을 수확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설교하는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일꾼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진실 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 주님의 약속은 사실인 것을 이 세상에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꾼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손에 있는 수확의 도구입니다. 주님의 때에 낫이라는 긴 손잡이가 달린 길고 휜, 한 면이 날카로운 칼로 된 도구가 있었습니다. 대장장이에 의해 주조되며 불에 넣었다 모루대에 올려져 두들겨지고 모양을 잡아갑니다. 이 전 과정이 잘 단면이 날카로워질 때까지 지속해서 반복됩니다.

비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주조하고 계십니다. 단지 죄를 두드려 없애시는 게 아닙니다. 이 과정이 왜 일꾼이 적은지 알려줍니다. 대부분 교회를 가는 사람은 구약의 기드온과 동참하겠다고 자원한 수천 명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안의 두려움이 불과 두드림, 힘든 시간을 극복하지 못함을 아시고 오직 삼백 명만 선택하셨습니다.

오늘날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확을 부름 받은 사람들은 불 속에서 정제되며 모양을 잡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견뎌내지 못하는 과정입니다.

2016년 2월 2일 화요일

그리스도의 섬기는 마음

바울은 한때 모든 동료와 바리새인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자신을 정결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땅에서 명망 있고 다른 이의 눈에 흠잡을데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4-5).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았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삶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노력하고 경쟁하는 것을 내려놓았다. 주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온전히 알게 되었다”라고 계속 말합니다.

한때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야망, 열정, 경쟁의 영, 바쁨들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이 자신을 향한 육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성공과 인정을 향한 열망을 다 내려놓고 종이 되기로 했다.”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섬기는 삶을 사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섬기는 종의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처 바울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희생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 또한 섬기는 마음을 가진 아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 교회를 위해 종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도바울같이 저도 그리스도의 섬기는 마음을 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그리스도의 마음은 신학을 넘어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 예수님의 관심사에 우리의 의지를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6년 2월 1일 월요일

주는 삶by Gary Wilkerson

아버지는 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나눌 줄 알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주는 삶으로 가족의 이름을 물려받으라고 손짓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놀라운 그림을 제시해주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들어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리는 나의 피니라’(막 14:22-23)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주님은 부어주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축복되어지고 부서졌으며 나누어졌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필요를 채우는 것이 주목적인 보통 사람과 다른 이를 위해 삶의 목적은 찾고 부어주는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주님 안에서 저희는 ‘받는’ 삶에서 ‘주는’ 삶으로 전환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육적인 영에서 주님의 신실한 영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힘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나에게서 받은 축복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신학체계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거쳐야 할 가장 어려운 전환점입니다. 지난 몇 년간 크리스챤 인기도들은 ‘받는’ 삶에 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주된 주제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축복하기 원하시는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는 본성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국 문을 열어 놀라운 자원들을 저희에서 부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진정 우리의 결혼, 건강, 재정들에 복주고 싶어 하십니다. 저도 그런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받는’ 삶보다 훨씬 축복받는 것이 ‘주는’ 삶입니다. ‘받는’ 것은 쉽지만 ‘주는’ 것은 어렵고 보람찹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고 나누어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종종 첫 번째 관문에서 많은 교회 주저앉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축복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삶이 부서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주는’ 마지막 단계로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 안에 있는 하나님 축복의 목적을 절대 채우지 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