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31일 목요일

고난의 풀무불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므로 또한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7-18)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면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험은 무엇 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의 눈을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 올 것, 모든 것을 바꿀 그것을 향하라고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원한 고향을 향해 한 발자욱 다가갈 때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은 잊어버리게 된다. 사도 바울의 포인트는 지금 현재 다가올 그 기쁨을 찬양하기 시작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브리서 13:15)

하나님은 “은처럼 단련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불에서 우리를 택하신다” (이사야 48:10)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젼을 알려준 그 백성들은 적의 불시험을 견뎠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에 지쳐서 시험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으면 어떤 미래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가 두려웠다.

이 때 어떤 말씀을 하나님은 보내셨는가? 이 말씀은 현재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말씀과 동일하다. “깨어나라!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의 힘, 너의 하나님은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다. 그러니까 절망의 먼지 가운데서 일어나서 내가 약속한 천국의 땅에 앉으라. 너는 너의 의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의의 옷을 입으라. 자신을 다그치며 말하라. 자신과 변론하라. 육체와 사단에게 말하라. ‘나는 나를 구원한 그 분으로 인하여 단순한 승리자 그 이상이 되었다’ (이사야 52:1-3)

“내가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냐 13:9)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찬양 학교

하나님은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오셨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당했습니다! 더 이상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하는데까지 가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제 그 땅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의 물질주의로부터 분리되어서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도록 도와주신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찬양을 위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이 “너희는 내가 창조한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이사야 65:18). 히브리 말로 창조하다라는 말은 “존재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백성들도 만드신다. 그는 아직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신부를 만드셔서 많은 시험들을 통해서 찬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우리 현재의 고난은 찬양의 학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모든 시험들은 우리의 영광의 날들을 위한 훈련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끊임없는 걱정과 고민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치 하나님이 죽으신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그 시험 가운데서 찬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현재 당하는 시험에는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들은 희망을 포기했다. 그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고 티끌 속에 앉아 만 있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석과 같은 굳건한 약속과 함께 목에 사슬을 두른 체 앉아 있다.

오늘날도 또한, 어떤 성도들은 이 시점에서 포기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지만,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지도 않고 “이런 숨막히는 상황 가운데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그리스도께 다가갈수록 더 고통스러워”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나는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했다” (골로새서1:23-24)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늘로 올리워진 적이 있고 거기서 영광이 그를 기다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가 본 것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그의 시험과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고 모든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마음이 기뻐하는 법을 배웠고 다가오는 세상을 준비하면서 또한 찬양을 훈련할 수 있었다.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문 밖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큰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의 입증된 믿음 뿐 아니라, 이삭을 바쳤을 때 아브라함은 이 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분리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목적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 속했지만 더 이상 이 땅의 사람이 다른 세상에 속한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보자. “그는 영문 밖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13:12). 예수님은 외인처럼 즉 형식적인 종교의 규율에서도 벗어나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않은 채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아무 데도 없는 외인이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 주님처럼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여기에 있는 도성이 아니라 다가오는 성을 바람이라” (13:14). 우리는 이 땅에서 일하고 살지만,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예루살렘인 까닭에 우리는 이 곳에서 외인이기도 하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13)” 우리가 영문 밖에 있는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욕망과 물질의 바깥에 있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의 신랑되신 분이 있는 곳에 있지는 않다.

나는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차를 몰고 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그런 물질적인 것이 내 마음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늘 깨어서 조심한다.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그렇게까지 바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산을 움직일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고린도전도 13:2)

슬프게도 주위를 돌아보면, 수 많은 믿음이 좋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들을 드물다. 대신, 우리의 눈을 세상의 것들에 두고 그것을 어떻게 가질 것인지에 관심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늘나라에 중심을 두고 세상과 분리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메시지는 그들이 지금 즐기고 있는 좋은 인생에 대한 방해일 뿐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문 밖으로 몰아내시는 좋은 방법들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배우자로 주려면, 네 인생에 다른 어떤 것도 네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 나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네가 아무 것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너의 가장 신나는 꿈, 가장 강력한 마음의 소망,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 되어야 한다.”

2016년 3월 28일 월요일

비관주의자들의 목소리 by 게리 윌커슨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 있다. 그리고 많은 인생의 시점에서 우리가 성취해야하는 계획들을 마련해 놓으셨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그를 신뢰하면, 그 계획들을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그의 높으신 부르심을 따르려면 많은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우리를 비관주의자의 목소리라고 부른다. 우리가 약속의 땅을 향해서 요단강을 건너야 할 때, 우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수 많은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그것도 아주 말이 되는 톤으로 말하는데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라는 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모든 기독교신자들에게 들려지는 이 비관론자의 목소리는 대충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 외부에서 오는 비관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 할 때마다 우리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친구, 가족, 지인들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이다.

그리고 사단의 비관론도 있다. 이것은 사단의 목소리인데,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부에서 오는 비관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모든 반대 의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 내부의 목소리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도 이 세 가지 목소리를 다 들었다. 강을 건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이 땅의 모든 미래의 영광이 거기에 있었다. 당신이라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목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강을 건널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더 크신 영광을 위한 그의 지휘에 순종하는 것을 막는 그 모든 목소리들을 뿌리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걸음을 떼라고 하실 때, 우리가 이전에 갖지 못했던 정도의 하나님의 신뢰를 가지고 건너 오라고 우리를 이끄신다.

“아무도 너의 날 동안에 너를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듯이, 너와도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 (여호수아 1:5)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믿음의 여정

현재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새로운 세상- 즉 새 천국, 새 지구-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 창조물은 새 예루살렘 즉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한 집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만들고 계시는 이 새 세상의 환상을 보았을 때 벅찬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이사야 65:17-18).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에게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현재 너희가 겪고 있는 시험 중에 너희 마음 안에 이 진리를 뿌리내리길 바란다. 현재 이 세상은 너의 집이 아니다. 너희가 보는 모든 것은 모두 지나갈 것이니라. 지구, 달, 해, 그리고 별들도 모두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새로 창조하는 이 세상에는 불, 폭풍, 마귀, 시험 그리고 고난이 없는 세상일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시험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어려움은 모두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모든 집중을 쏟고, 모든 사랑과 마음을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할 그 세상에 향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힘들게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때가 오면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시련은 시험이 아니라 연단입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세상은 완전히 새 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몸이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의 몸과 같은 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께 온 마음을 향한 삶을 살았던 표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잇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브리서 11:9-10).

2016년 3월 24일 목요일

그리스도의 신부

사실은, 우리 삶의 모든 어려움이 믿음의 시험은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역경을 겪고 있을 때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험을 겪을 때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동행하여, 결국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믿음의 시험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또 하나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읽는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크리스천이라고 예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견고한 믿음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신부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시험을 겪으며 신랑 되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불을 견디어낼 것입니다. 또한 신랑 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폭풍, 불, 그리고 역경을 통하여 연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은 그저 신부의 사랑과 헌신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견고한 믿음과 사랑을 더욱 더 연단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신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다른 방해요소는 모두 배제하고 온전히 예수님만을 사모해야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 5:8).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1).

바울은 그저 크리스천이니 죽은 삶이다 라는 식의 일차원적인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믿음의 삶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더욱더 주님과 가까이 함께 있고 싶습니다. 주님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며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갖는 것은, 바울이 이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예수님께 온 마음을 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승리하는 믿음

바울은 시험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견뎠을 때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간증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7). 물론 바울은 자신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일들 가운데는 시험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내가 원하는 만큼 이해하지 못하였고, 내가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지만, 믿음에 관하여서는 모든 시험 중에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군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폭풍우처럼 원수가 나를 삼키려고 하여도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방패막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모든 사실은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 또한 바울과 같은 간증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시험을 겪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험은 12살 배기 손녀딸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고통스러운 시련을 견디어낼 힘과 믿음을 주셔서 저는 그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알고, 그의 계획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이 없이는 이렇게 어려운 시험과 깊은 고통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당신 앞에 가져왔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시험과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시험을 겪는 동안 의심, 두려움 또는 분노를 경험하신 적 없으신가요? 이유 없는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며 하나님을 탓하지는 않으셨나요? “신실하게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녔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안됩니다”라고 말하며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아니면 당신은 아직도 천국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주님은 선하시고, 이 모든 일 중에 있더라도 주를 믿겠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나를 승리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계시다면, 당신의 믿음이 불을 견디어낸 것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이렇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시험과 고난을 겪어야, “나의 믿음이 견디어 승리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2016년 3월 22일 화요일

믿음의 시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시험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겪는 우리를 이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픕을 아노니”(요한계시록 2:9). 쉽게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단다. 지금은 이해 가지 않겠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단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시편 66:10).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베드로전서 1:7).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시편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34:19).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4절에서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과 많은 눈물이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환난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히브리서 11:37, 10:32).

성경에서는 믿는 우리의 환난, 시험 그리고 고난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시편 88:3).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71:20).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성경에서 언급된 다음의 상황들을 겪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험, 환난, 고난, 궁핍, 근심 등. 그리고 저 또한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아픔과 어려움, 그리고 시험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또 이 메시지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제 삶 또한 그렇습니다. 현재 저는 여러가지의 어려운 시험과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 모든 환난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시험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시험 뒤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1:7). 베드로는 이러한 경험들을 “불 시험”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4:12).

2016년 3월 21일 월요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실까요?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지요. 태초부터 지금까지 성경에서 우리에게 아주 명확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이 증거가 되어줍니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시편 89:15).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 임이니라”(예레미야 31:13).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이사야 65:18).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이사야 35:10). 그리고 다음의 구절에서는 오늘날의 세대에서 격는 문제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신명기 28:47).

신약성서에서도 행복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베드로전서 1:8).

성경에서 행복, 기쁨, 즐거움, 환호, 그리고 재미 등에 대한 구절을 2,700여개 찾았습니다. 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경험하는 삶의 일부입니다.

오랫동안 당신으로부터 멀어져있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육체적 고통, 심적 불안, 혼란 등의 상황에 놓여져 있을 때 어떻게 행복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도움이 될만한 팁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하신 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것은 성경이 증거가 되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기쁨은 몽상이 아닌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3.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매일 새롭게 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원수된 마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빼앗아 가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을 매일 누리시기 바랍니다.

2016년 3월 15일 화요일

복음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사도행전은 놀라운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 두 구절은 로마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사슬에 묶인 채 자택 구금된 바울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바울의 상황을 희망적으로 묘사한 구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그리스어의 “금지하다”라는 말은 사실 “방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표준역 성서에는 바울이 “온전히 방해받지 않고” 설교하며 가르쳤다고 합니다. 바울이 구금상태인 것을 볼 때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복음은 멈추지 않고, 가로막지 않는 의미로 “방해받지 않아야” 합니다. 저자는 “복음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놀라운 이 간증을 사도행전을 끝맺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슬에 묶인 바울이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초청했을 때, 그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을 모른다. 우리에게 누구란 말이냐?”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바울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교 했을 때, 서로 옥신각신 다투게 됩니다. 그때 네로황제는 로마거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죽입니다.

이런 산더미 갖은 방해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이 신이 없는 로마제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까? 로마에 세대를 아울러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감옥에 갇혀 그의 설교가 경멸받을 만한 바울이 로마인을 전도하는 하나님 최고의 도구였습니까?

2년동안 사도는 이 평범한 길가의 집에서 입막음을 당했습니다. 곁에서 같이 일하며 도와주는 디모데, 바나바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전파할 확성기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언을 받을만한 사람도 없고, 도움을 받을만한 정치적 연결고리도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바울은 계획한 프로그램이나 의도가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광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길거리 모임을 결성하거나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말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합당한 곳에 써주소서”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곳에 있으면서 온전히 만족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계획은 모르지만, 주님께서 저를 이곳에 놓으신 것을 압니다. 주님의 복음은 방해받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2016년 3월 14일 월요일

두려움을 위한 예수님의 처방전 by Gary Wilkerson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패배를 받아들인 것 같이 살고 있습니다. 믿음보다는 의심으로 생각이 지배되며 습관적인 죄 행동양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에게만 보이며 “내가 이렇게 허우적대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 없는 삶을 사는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을 처리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제자들은 말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세상을 두려워했습니다. 조롱, 비난, 박해 심지어 예수님께서 겪은 죽음의 가능성까지도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벽을 통과하셔서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내가 평강을 주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계속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다시 반복하셨어야 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21 참조). 예수님께서는 질책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같은 일이 일주일 후 다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문을 잠그고 무서움 속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0:26).

어떤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대신 인내를 보여주십니다. 일주일 전 도마가 불신을 표출했을 때,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없애기 위하셔 못자국을 보라고 하십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8).

여기에 우리 두려움을 위한 예수님의 처방전이 도마의 대답에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교회에 선포하셨고, 교회는 매주 오는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을 믿으라.”

2016년 3월 11일 금요일

하나님의 집을 향한 질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는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켰다” (요한복음 2:17). 그러나 그의 사데 교회를 향한 그리고 지금 우리를 향한 메시지는 “너는 나의 은혜를 즐겁게 받아서 좋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너는 강력한 예배와 말씀으로 복된 교회였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너는 생각했다. “우리는 다 왔다” 그래서 안도했다. 너는 더 이상 경계심을 잃어버렸고 무관심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적인 comfort zone으로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너는 내가 준 사명을 이루려고 나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집을 우리가 먼저 생각지 않았을 때 어떤 일들이 생기는 지를 보여준다. 학개에 더 자세하게 나와있다.

학개가 예언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데려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서 성전을 짓게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빛이 되는 교회를 원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내 교회에 집중하라. 이것이 너의 첫 번째 미션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약에 너희가 내 집을 잘 돌봐 준다면 나도 너의 집을 돌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의 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그는 또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다. 아직 하나님의 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아다” (학개 1:2). 여기서 이 말 뜻은 “ 우리는 그 일을 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이다. 그리고 사실은 자신의 집을 세우고 자신의 사업을 세우는 데 너무 바빴다.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는 학개를 통해 말씀하시길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학개 1:9)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셨고 그의 전을 재건하라는 미션을 주셨다. 그러나 너는 너의 집을 세우는 데 너무 바빠서 그의 집을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더 이상 너의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너는 온통 너 자신만의 관심사로 가득 차 있다.”

당신에게 동일한 더럽게 됨의 죄는 없는가? 당신은 당신만의 관심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어서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남은 에너지가 없지 않는가? 당신의 집을 세우기 위한 시간은 있지만 하나님 집을 위해 주일 아침에 한 두 시간 내기는 어렵지 않은가? 티비를 보기 위해서나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만 기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없지 않은가?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은 과연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휘저어 놓을 만한 여력이 있는가?

2016년 3월 10일 목요일

죽은교회

사데교회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그리고 위대한 사도적인 능력으로 시작됐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사데의 사역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의 교회가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시작됐지만 내가 준 생명을 내어버렸다. 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는 죽었다. 너는 이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다시 깨어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에 주께서 죽었다고 말하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직 그 교회 안에 깨어 있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있다고 한다. 주님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요한계시록 3:4)

예수님께서 “옷을 더렵혔다”는 것은 영의 죽음을 말한다. 무엇이 사데교회의 성도들이게 영적인 죽음을 불러 일으켰는가? 그들의 마음에 “특별한 관심”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다: 자선과 선교, 그리고 몸된 교회를 위한 신실한 모임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일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만의 관심사를 쫓아가고 있다.

사데는 번성하는 도시였는데 금을 녹이는 것과 좋은 옷감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사데의 기독교인들은 주변의 번성하는 문화를 사랑하게 되어서 자신들의 관심사가 옮겨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급속하게 주님의 관심사에서부터 멀어져 물질적인 마음으로 쏠리게 되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도 이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바를 흠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삶을 꾸려가고 있었고 그들의 사업을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족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삼켜버려서 결국은 하나님의 일들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남은 신실한 자들을 향해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3:2-3)

여기서 예수님께서 “곧 죽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경계하라! 나의 집을 향한 너의 관심과 나의 말씀을 향한 열정, 그리고 공예배에 대한 즐거움과 서로를 사랑하던 것들로부터 너는 죽어가고 있다. 너의 눈은 졸음으로 감겨져가고 있고 점점 뜨뜻미지근해지고 있다. 지금 일어나라! 만약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너는 결국 영적으로 죽게 될 것이다!”

2016년 3월 9일 수요일

조용하고 작은 음성

우리들의 영혼의 적들처럼, 우리의 육체의 함성도 들려진다. 그 함성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 한 명의 친구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결정을 축복하실 거라고 그러니까 가끔씩은 그 욕망을 들어줘도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또 다른 크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육체를 대적해서 싸운다고 성경은 말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성령만이 육체를 멸할 수 있다.

성령의 음성은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을 기도 가운데로 가지고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확인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이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든 크고 작은 문제들 가운데서 늘 유용하다.

사단이나 육체가 마치 홍수처럼 몰려올 때에 성령님은 항상 일어나셔서 적을 무찌르신다, 만약에 우리가 그를 신뢰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현재의 기독교 세대는 자신이 의견을 결정할 때 성령님과 의논 없이 해버린다. 많은 신자들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 행동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전혀 믿음이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최선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기반해서 자신이 할 일을 결정한다.

이러한 신자들의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의 종들이 자신만의 계획을 고안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길 거부하는 것처럼 성령님의 통치 밖에서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들은 영적인 벌집을 건드린 격이 되어서 휴식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나도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다. 사실 나는 나만의 방향을 따라서 내가 할 일들을 안 하는 대신 책을 쓸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모든 일들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성령의 고요한 음성을 듣는 것을 지난 수년간 배워왔다. 나는 이제 그의 절대적 통치에 “예스, 아멘”으로 답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가 나를 진리로 인도하고 나를 보호하며 앞으로의 일들을 보이심을 안다. 나는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신 것처럼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한다.

당신도 그렇게 하겠는가?

2016년 3월 8일 화요일

성령의 보호하심

“어떻게 나는 다른 음성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먼저, 성령은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성령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 성령님은 그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신다. 그런데 성령과 동행하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만약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 내가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완벽한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속고 있지 않는지 점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의 음성이나 마귀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과거의 안 좋은 경험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많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떻게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다는 것을 아는가? 나는 지나 번에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어. 속은 기분이 들어.”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셨어. 하나님이 저렇게 말하셨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겪는 불편한 기분 때문에 이런 일들에 관심을 끊기도 한다.

이 중요한 사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의 “아멘”을 요구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신뢰는 믿음의 행위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에베소서 6:16). 이것은 우리를 어떠한 속임수와 실수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약속이다.

사탄의 소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송사한다. 이러한 송사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어떠한 전쟁의 도구도 쓸모가 없게 된다. (이사야 54:17) 사탄의 연장은 송사와 거짓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늘 우리에게 신실하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적의 음성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책동한다. 그러나 모든 성령의 말씀은 성경으로 확증되어야 한다.

2016년 3월 7일 월요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by 게리 윌커슨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16-19)

십대일 때 나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했고 다른 종교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 당시에 나는 바하교의 교리가 마음에 들었는데 왜냐면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는 진리이고 모든 믿음은 우리를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바로 나는 위대한 기독교 저자인 C. S. Lewis의 책들을 읽었는데 나의 대충 대강 이해하던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는 모든 기독교에 대한 생각은 한 질문에 기반한다고 썼다: 부활은 과연 있는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노아의 방주가 과연 사실인지 과연 창조는 6일간 이루어진 것인지 혹은 에덴동산은 과연 있었는지에 대해서 상관이 없어진다. 만약 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중에 그 어떤 것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사람들이 치유받는 것, 죄가 제거되고, 천국이 실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다 –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한 복된 소망이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13)

나의 십대 시절에 더 많은 독서를 접하게 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를 보았던 증언들을 굳게 믿게 되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린도전서 15:6) 나는 부활을 단지 추가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우리를 위해 죽으심에 대한 완성이요 절정임을 알게 되었다. 복스러운 소망은 이제 내 마음에 심기워졌으며 매일 나의 삶의 근원이 되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매일 주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

2016년 3월 4일 금요일

성령과 하나님의 약속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음의 약속들을 생각해보고, 이 약속들에 대한 당신의 응답이 “예와 아멘”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1. 주께서 당신을 성령으로 바로 세우셨고, 인치셨고, 채우셨고, 감동시키셨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21-22).

성령이 당신의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성령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에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실은, 우리는 잘못을 하였을 때 옳을 일을 할 때만큼 성령을 필요로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 14:16-17, 26). 요약하자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진리로 채우시고, 오직 진리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약속에 대하여 “예와 아멘”으로 응답하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로 결심하였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우리 안의 목소리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3). 아직도 이렇게 위대한 약속의 진위에 대한 의심을 갖고 계십니까? 성령이 당신의 삶의 모든 부분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네 주님. 당신의 약속을 믿습니다. 당신의 약속이 나의 삶에 이뤄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삶의 방향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당신의 가는 길 오는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방향을 매 삶의 순간에서 인정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결심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예와 아멘”으로 응답하셨습니까?

2016년 3월 3일 목요일

그냥 “예(YES)”라고 말해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라디아서 5:25).

성령으로 행한다는 바울의 구절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를 나에게 명료하게 이해시켜 주옵소서.” 성령께서 제게 이렇게 응답하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 훈련을 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너무 간단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진리는 깨닫는다면 우리는 혼돈 없고 평안으로 가득 찬 명확한 삶의 방향을 가진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제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을 제 뇌리 속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저 ‘예’라고 말해요.”

그저 순종하면 됩니다!

이 문장이 의식 중에 스칠 때에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정말 간단하군요. 그러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바울이 쓴 편지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린도후서 1:20). 바울에 의하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에 확신에 가득 찬 돌이킬 수 없는 “예,” 즉 순종과 인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주신 약속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멘과 예로 모든 약속에 대해 대답하고 믿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에서 완전히 믿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야고보서 1:6-7).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예”라고 하는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구절에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단어 자체의 뜻은 “그렇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믿어도 좋습니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구절 전체를 보고 말한다면, “아멘”의 뜻은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나의 삶에 대한 말씀으로 믿겠습니다. 나의 삶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2016년 3월 2일 수요일

구름을 따르는 것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수기 9:22-23).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던 구름은 결국에 천국으로 들려 올려 졌습니다. 그러나 수 백 년 후에 다른 구름이, 예수살렘의 다락방에서 내려왔습니다. 성령- 즉 광야의 성막 위에 머물렀던 같은 영-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120여명의 예배자들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구름은 성막 위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까지 내려와 사람들의 머리 위에 굳게 결합된(cloven) 불길의 언어처럼 머물렀습니다.

굳게 결합된(cloven)라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빈틈없이 분포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구름이 분리되어 다락방에 있는 각 사람에게 나뉘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 같은 구름은 각 사람의 마음과 육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이 안에 거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완전히 따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이 당신의 삶에 거하실 수 있지만, 그것만이 당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순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도, 우리를 인도하는 구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 하여 기도하며 예배하며 성령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성령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살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라디아서 5:25).

2016년 3월 1일 화요일

성령을 따르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에게 완전히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의 인도함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한복음 5:19).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감히 우리의 구주이시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지 못하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솔직해 보자면, 우리가 방향을 잃었을 때 마지막으로 찾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게 우리는 카운셀러나 친구들과 수 시간씩 전화통화를 하면서 조언을 구합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은 생각 인 것 같아? 너의 생각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아?” 슬프지만 우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성령에게 묻습니다.

민수기 9장에 보면, 광야에서 성막 위에 드리운 구름에 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늘 함께하신 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그 구름 같은 존재로 거하시고 계십니다.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민수기 9:15-16).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그 구름을 항상 따랐습니다. 성막 위로 구름이 올랐을 때 백성들은 성막의 말뚝을 구름의 방향으로 옮겨가며 따랐습니다. 구름이 멈출 때 백성들도 함께 멈추어 천막을 지어 함께 머물렀으며 구름이 가는 곳 어디든지 함께 움직이고 멈추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구름이 이끄는 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구름은 매일 또는 매주 또는 수개월, 수십 년에 걸쳐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낮이나 밤이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지켜 진행치 아니하였으며”(민수기 9: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