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한 심령의 부르짖음

“그 때 큰 아들은 들에 있었는데, 그가 집 가까이 왔을 때 노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이것이 부슨 일인지 묻더라. 종이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무사하고 건강하게 돌아온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니이다 라고 하니 그가 화가 나서 들어가기도 싫어하더라.” (누가복음 15:25-28)

탕자의 형은 점점 더 화가 났습니다. 그 동안 그는 어떤 명령도 거역하지 않으며 아버지를 오랫동안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는 율법적으로 따지면 꿀림이 없었고, 그야말로 자신을 매우 정결하게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창문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은혜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아버지는 회개하는 아들, 그 잃어버렸던 아들을 포옹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어떤 질책이나 훈계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는 아들로서의 온전한 은혜와 축복을 소유하는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 맏아들이 보았던 장면은, 아무리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단순히 자신이 주관하던 삶을 포기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회개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항의했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그토록 쉽게 받은 은혜의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돌아오는 죄인들에게 후히 베풀어지는 은혜에 항거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의 모형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 옆에 앉아서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제가 결코 저런 중죄를 짓지 않았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는 내일 또다시 실족할 수도 있어요.”

성경은 이러한 자만감이 그 어떤 중독보다도 치명적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0:12)

실상 이 탕자가 창문을 통해 그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자기 형을 보았을 때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오, 내 형님, 내가 형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를 알면 좋으련만! 형은 세상으로 나간 적도 없고 나처럼 죄도 안 지었잖아요. 형은 저보다 훨씬 좋은 간증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우리 가문의 명성에 먹칠한 기억을 갖고 평생 살아야만 해요. 나는 그 어느 것도 누릴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사실, 형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지요. 형과 함께 친교할 수 있다면 너무도 좋으련만!”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한, 겸손한 심령의 부르짖음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