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일 화요일

예수님이 더욱 필요한 지금

저는 사도행전을 부끄러운 마음 없이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사도들은 기적적 영역에서 살며 사역했습니다.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은 일반 평신도들도 기적을 행하며 온 도시를 움직였고 성령 안에서 강력한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는 그들의 족쇄를 풀어주었으며, 경비가 삼엄한 감옥에서 걸어나오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명확하면서도 상세한, 놀라운 환상을 체험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성령 충만하여, 그의 그림자가 닿기만 해도 사람들의 병이 나았기에, 사람들은 병자들을 침상에 실어 거리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5:15) 불구자들은 고침을 받아 성전을 뛰어다녔으며 놀라운 기적들이 행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특별한 기적들을 행하셨으므로: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질병들이 그들에게서 떠나고 악한 영들도 그들에게서 나가더라.” (사도행전 19:11-12)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영역에서 살지 못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했습니다! 그때와 똑같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똑같은 언약을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때처럼 해주시시기를 기꺼이 원하십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에는 그러한 기적이 필요치 않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대는 그보다 더 큰 계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잘 교육받았으며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 그것이 꼭 필요했지만, 지금도 주님께서 그때처럼 역사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 대한 제 의견은 이러합니다. 만일 교회가 세워지는 데에 기적들이 필요했다면, 마지막 대의 교회는 더욱 그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죄가 몇 배나 더 증가하면서 사악한 자들은 더욱 사악해지고 있습니다. 유혹자들도 증가했으며 폭력은 제재할 수 없을 만큼 돌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은 그 경계선을 확장했습니다. 사탄은 엄청난 분노와 함께 내려왔습니다. 악귀적 교리들이 홍수처럼 밀려오면서 배교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배교에 처해있습니다. 이 땅은 낙태라는 죄의 피로 흠뻑 젖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학교 안으로까지 침투한 코케인, 크랙, 헤로인 등의 마약과 술로 인해 통제가 불가능해졌으며, 그것은 십대 청소년들을 광적 강도들과 가증한 살인자들로 변질시켰고 그들을 파멸케 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질병들은 온 세상으로 사망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거 그 어느 세대보다도 더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 그리고 치유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때의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의 대가를 알았으며 그것을 기꺼이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2014년 9월 1일 월요일

예수님을 바라보자! by Gary Wilkerson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2)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에 의해 우리 믿음의 경주를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릴 때, 원수는 그의 발을 내밀어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큰 승리를 맛본 후에 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순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셔! 이제 나는 그분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거야.” 그러나 곧 우리의 상황은 반대로 돌아가며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립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주여, 저는 이것이 제 돌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이 구절 끝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12:1) 비록 우리 상황이 우리를 의심하게 만들고, 우리가 죄로 인해 쉽게 넘어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달리는 경주는 인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인내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우리의 경주는 충분한 믿음을 쌓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12:2)이시므로, 믿음을 우리에게 공급해주시도록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창시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우리가 특정한 경주를 달리도록,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기 오래전부터 그 생각은 그분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기 원한다.” 그분은 우리 안에 믿음을 창시하셨고, 그분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을 보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경주를 달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속에 심어놓으신 믿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그것이 사장되었다고 느낍니까? 너무도 많이 발을 헛디딘 나머지 이제는 지쳤습니까? 친구들이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 안에 믿음을 창시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이전에 알았던 믿음을 재활시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로마서 10:17)

만일 당신의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완성시키고” 계심을 확신해도 됩니다.

2014년 8월 29일 금요일

예수님을 맞을 준비

안일한 생활에 안주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각성된 상태에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스바냐 1:12). “찌끼같이 가라앉아서”라는 뜻은 무심하고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찌끼”는 포도주 베럴의 바닥에 가라앉은 앙금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세례를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안일하고 느긋하게 앉아 앙금을 그저 마음 한켠에 담아 두고만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타임스퀘어 교회가 너무 극심하다며, 마음을 움직이고 각성하게 하는 메시지가 너무 많다고 말하며 교회를 떠납니다. 그들은 각성하게 하는 메시지가 없는 곳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그들은 “강력하고 각성의 메시지의 부담을 못견디겠습니다. 회개와 돌아오기를 너무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성령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촛불이 될것입니다. 이 도시에 불을 밝히며 안일한 삶에 안주하는 자들을 아주 불편하게 할것입니다. 예레미야 48장 11-12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압은 예로부터 평안하고 포로도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치 술의 그 찌끼 위에 있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음 같아서 그 맛이 남아 있고 냄새가 변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그릇을 기울일 자를 보낼 것이라 그들이 기울여서 그 그릇을 비게 하고 그 병들을 부수리니”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개입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롭고 방해받지 않는 풍요로움을 추구하였고 각성되고 변화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주님의 재림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알았더라면, 불과 같은 심판이 얼마나 가까운지 알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각성시켜 주심에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예배와 모임에서 마음의 온 앙금을 제거하고 성령으로 채움 받을 것입니다. 회개를 호소하고, 마음을 찌르는 진리의 말씀으로 의의 길로 가도록 권면하는 복음주의 설교자들에게 감사할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우리는 잠든 영혼을 깨우시는 나팔소리와 같은 메시지로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각성시켜주신 하나님께 영원토록 감사 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모든 짐을 싼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볼 준비가 되어있고 대면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