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5일 화요일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것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도록 만듭니다. 크리스챤들 가운데 불신앙의 요점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실패했을때, 하나님의 임재에서 도망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 화가나셔서 우리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와 깊은 관계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고, 수치심속에서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속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깨끗케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몇 주간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고 죄적인 습관을 버리면 다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정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악의 불신앙이고 하나님의 눈에 범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습관들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문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진정 잘못한 것이냐? 너의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느냐? 가서 한주에 이틀간 금식하고 매일 한시간동안 기도하거라. 오래 실패하지 않고 지속하면 너와 다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늘 아버지와 조화를 이뤄주셨을때, 그것은 모든 시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과 다시 관계회복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내치시거나 관계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보혈 때문에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갈라놓았던 장막은 찢어졌고, 영원히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은 절대 닫혀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3:12).

성경은 우리 중에 누가 죄를 지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님의 보좌 밖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서있으면 겸손이 아닙니다. 불신앙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2016년 4월 4일 월요일

변화 되는 것 - 게리 윌커슨

수년 간 많은 진실 된 크리스찬들이 예전 경험에서 오는 깊은 실망감 때문일지 몰라도 믿음을 잃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을 믿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가족이나 자녀의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을 지 모릅니다. 삶의 사역을 충족하기 위해 믿을지도 모릅니다. 습관적인 구속이나 하나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내적 갈등에서 자유롭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들에게는 노골적인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중재가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삶에 필요합니다. 줄여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에 왔을 때 하나님은 백성의 한 명도 뒤에 남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경험 많은 크리스찬이라면 요단강을 건널 태세를 취할 때보다 더 두렵고, 불안하고 의심되는 시간은 없을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살라고 허락한 땅을 갖기 바로 직전이기 때문입니다. 적군이 또 우리의 육이 저항하는 때입니다.

삶은 질문이 없는 요단강 건너기 전이 편안하기 때문에 더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때 편안했던 것들이 불편해지는 상황을 갑작스레 만들어서라도 우리가 움직이기를 유도하십니다. 갑자기 잡음이 나고 부패 되고 죽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편안한 곳에 계속 있기로 고집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삶의 비전이나 열정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유혹에 둔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동하도록 부르셨을 때 그가 받은 첫 지시는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가져라’ 였습니다(여호수아 1장 6절).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네 구절에 걸쳐서 세 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용기를 일으켜야 합니다. 누구에게는 편안한 마음을 주는 거짓 된 것들을 버려야 하는 용기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스트레스 받거나 불안해 질 때 주님께 왜 그런 지 보여 달라고 여쭤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버리기를 원하시면 믿음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합니다.

2016년 4월 1일 금요일

찬양의 위력

다니엘 3장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찬양의 위력을 보게 되는 얘기를 아는데 이는 느브갓네살 왕이 세 명의 히브리 소년들을 풀무불에 넣었을 때이다. 이들은 믿음이 있는 지를 시험 당하게 되는데 사실 그들의 믿음 때문에 이 시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이 있으셨을 거다. 생각해보라. 이 이교도 바벨론 사람들은 이들의 기도나 설교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람들이 풀무불을 보았을 때 이 세 사람이 가장 힘든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었다. (다니엘 3:24-30)

예수님께서 그들의 풀무물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 히브리 소년들에게 처음하신 말씀은 “일어나라. 너의 묶임이 풀렸도다. 이 하나니을 모르는 백성과 이교도 정부가 나의 백성이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게 하라.”

그들은 바로 그렇게 찬양했고 성경은 말하기를 느브갓네살 왕은 그 광경을 보고 심히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일어나 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는 세 사람을 풀무불에 던졌는데, 이제 네 사람이 되었고 그들을 묶은 끈이 풀어졌다! 보라, 그들은 저 네 번째 사람과 더불어 노래부르고 찬양하고 있다.” (다니엘 3:24-25)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험 가운데 부르는 찬양이 주는 위력이다. 자 이제 당신은 고난 가운데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보자. 당신은 혹시 적에게 대항할 아무런 힘도 없이 약해져서 두려움의 잔을 마시고 있는가? 이제 무거운 결박을 풀고 우리의 구속자를 향하여 거룩한 손을 높여드릴 시간이다. 당신은 어떤 시험이든지 이제 자유함을 얻었다. 풀무불 가운데 있던 네 번째 분이 당신과 함께 하고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리스도께서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보여주실 것이고 당신을 묶고 있는 모든 끈들은 불 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시험을 당하기 보다는 훈련을 받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2016년 3월 31일 목요일

고난의 풀무불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므로 또한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7-18)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면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험은 무엇 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의 눈을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 올 것, 모든 것을 바꿀 그것을 향하라고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원한 고향을 향해 한 발자욱 다가갈 때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은 잊어버리게 된다. 사도 바울의 포인트는 지금 현재 다가올 그 기쁨을 찬양하기 시작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브리서 13:15)

하나님은 “은처럼 단련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불에서 우리를 택하신다” (이사야 48:10)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젼을 알려준 그 백성들은 적의 불시험을 견뎠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에 지쳐서 시험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으면 어떤 미래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가 두려웠다.

이 때 어떤 말씀을 하나님은 보내셨는가? 이 말씀은 현재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말씀과 동일하다. “깨어나라!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의 힘, 너의 하나님은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다. 그러니까 절망의 먼지 가운데서 일어나서 내가 약속한 천국의 땅에 앉으라. 너는 너의 의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의의 옷을 입으라. 자신을 다그치며 말하라. 자신과 변론하라. 육체와 사단에게 말하라. ‘나는 나를 구원한 그 분으로 인하여 단순한 승리자 그 이상이 되었다’ (이사야 52:1-3)

“내가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냐 13:9)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찬양 학교

하나님은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오셨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당했습니다! 더 이상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하는데까지 가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제 그 땅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의 물질주의로부터 분리되어서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도록 도와주신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찬양을 위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이 “너희는 내가 창조한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이사야 65:18). 히브리 말로 창조하다라는 말은 “존재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백성들도 만드신다. 그는 아직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신부를 만드셔서 많은 시험들을 통해서 찬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우리 현재의 고난은 찬양의 학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모든 시험들은 우리의 영광의 날들을 위한 훈련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끊임없는 걱정과 고민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치 하나님이 죽으신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그 시험 가운데서 찬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현재 당하는 시험에는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들은 희망을 포기했다. 그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고 티끌 속에 앉아 만 있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석과 같은 굳건한 약속과 함께 목에 사슬을 두른 체 앉아 있다.

오늘날도 또한, 어떤 성도들은 이 시점에서 포기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지만,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지도 않고 “이런 숨막히는 상황 가운데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그리스도께 다가갈수록 더 고통스러워”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나는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했다” (골로새서1:23-24)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늘로 올리워진 적이 있고 거기서 영광이 그를 기다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가 본 것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그의 시험과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고 모든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마음이 기뻐하는 법을 배웠고 다가오는 세상을 준비하면서 또한 찬양을 훈련할 수 있었다.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문 밖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큰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의 입증된 믿음 뿐 아니라, 이삭을 바쳤을 때 아브라함은 이 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분리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목적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 속했지만 더 이상 이 땅의 사람이 다른 세상에 속한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보자. “그는 영문 밖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13:12). 예수님은 외인처럼 즉 형식적인 종교의 규율에서도 벗어나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않은 채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아무 데도 없는 외인이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 주님처럼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여기에 있는 도성이 아니라 다가오는 성을 바람이라” (13:14). 우리는 이 땅에서 일하고 살지만,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예루살렘인 까닭에 우리는 이 곳에서 외인이기도 하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13)” 우리가 영문 밖에 있는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욕망과 물질의 바깥에 있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의 신랑되신 분이 있는 곳에 있지는 않다.

나는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차를 몰고 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그런 물질적인 것이 내 마음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늘 깨어서 조심한다.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그렇게까지 바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산을 움직일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고린도전도 13:2)

슬프게도 주위를 돌아보면, 수 많은 믿음이 좋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들을 드물다. 대신, 우리의 눈을 세상의 것들에 두고 그것을 어떻게 가질 것인지에 관심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늘나라에 중심을 두고 세상과 분리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메시지는 그들이 지금 즐기고 있는 좋은 인생에 대한 방해일 뿐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문 밖으로 몰아내시는 좋은 방법들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배우자로 주려면, 네 인생에 다른 어떤 것도 네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 나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네가 아무 것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너의 가장 신나는 꿈, 가장 강력한 마음의 소망,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 되어야 한다.”

2016년 3월 28일 월요일

비관주의자들의 목소리 by 게리 윌커슨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 있다. 그리고 많은 인생의 시점에서 우리가 성취해야하는 계획들을 마련해 놓으셨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그를 신뢰하면, 그 계획들을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그의 높으신 부르심을 따르려면 많은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우리를 비관주의자의 목소리라고 부른다. 우리가 약속의 땅을 향해서 요단강을 건너야 할 때, 우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수 많은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그것도 아주 말이 되는 톤으로 말하는데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라는 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모든 기독교신자들에게 들려지는 이 비관론자의 목소리는 대충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 외부에서 오는 비관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 할 때마다 우리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친구, 가족, 지인들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이다.

그리고 사단의 비관론도 있다. 이것은 사단의 목소리인데,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부에서 오는 비관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모든 반대 의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 내부의 목소리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도 이 세 가지 목소리를 다 들었다. 강을 건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이 땅의 모든 미래의 영광이 거기에 있었다. 당신이라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목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강을 건널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더 크신 영광을 위한 그의 지휘에 순종하는 것을 막는 그 모든 목소리들을 뿌리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걸음을 떼라고 하실 때, 우리가 이전에 갖지 못했던 정도의 하나님의 신뢰를 가지고 건너 오라고 우리를 이끄신다.

“아무도 너의 날 동안에 너를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듯이, 너와도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 (여호수아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