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8일 금요일

그분이 우리 눈을 뜨이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우실 것임을 우리가 더욱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아 이 사역을 맡았은즉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린도후서 4:1)

그러면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받게 되는 자비로운 사역은 무엇일까요? 그분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깊은 자비로 우리 눈을 뜨이게 하십니다. 그분은, 주님은 우리 편이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깊은 명철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지, 우리가 겪는 모든 것들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 우리의 질고를 느끼시며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지금 당신은 학대받고 있으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마귀는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당신을 홀로 남겨두셨으므로 당신이 고통 받아 마땅하고, 모든 것은 끝났으며 전혀 희망이 없다고 믿게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들은 모두 지옥에서 나온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에 대한 왜곡된 개념을 없애기를 무엇보다도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시며 그분의 모든 자비를 당신께 부어주실 때를 이미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다윗은 그가 처했던 상황에 너무도 압도되어 처절히 울부짖었습니다. “내 마음이 얻어맞아 풀같이 시들었으므로 내가 빵 먹는 것도 잊고 있나이다… 내가 깨어 있으니 지붕 위의 한 마리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내 원수들이 종일토록 나를 모욕하고… 내가 마실 것에 눈물을 섞었사오니… 내 날들은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시편 102:4, 7-9, 11) 그는 신음하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담한 상태에 처해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시려는 찰나였고, 주님은 자비와 도움, 그리고 안식을 가지고 신속히 움직이셨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니, 그녀에게 호의를 베푸실 때 곧 참으로 정하신 때가 이르렀나이다.” (시편 102:13)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그의 가장 참담한 시간에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를 구원하시려 작정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은총을 베푸시기 위한 때를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주로 우리 시험의 최악의 시간에 찾아옵니다. 그 때가 바로 우리 자신의 분투를 멈출 때입니다. 그 대신 이렇게 시인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모두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당신께 모든 것을 맡겨드립니다.”

2014년 4월 17일 목요일

가리지 않은 얼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고린도후서 3:18) 여기서 사용된 “가리지 않은 얼굴”이라는 단어의 기원은 놀라운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내면에 감춰진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그것을 드러내도록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리지 않은 얼굴’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주님. 제 안에 어떤 사악함이 있는지 점검해 주십시오. 제게 당신의 말씀을 거역하는 부분이 있다면 보여주십시오. 당신과 닮지 않은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제 모든 교만과 야망들, 그리고 제 이기적 지성과 동기들을 제거해 주십시오. 저는 그러한 상태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음을 압니다. 성령님, 당신의 능력과 지혜가 제게 필요합니다. 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많은 성도에게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난 삶을 그들 자신의 수단과 지혜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통제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년 전에 주님께서는 이 영역에서 제 교만을 깨뜨리셔야만 했습니다. 지금 저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가 실수할 때마다 얼른 제 잘못을 시인합니다. 저는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종종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릅니다. 저는 참으로 한심한 실수를 범하며 저 자신을 끔찍한 상황에 몰아넣곤 합니다. 주님, 원컨데 그것들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구할 때 우리의 문제를 기꺼이 해결해주십니다.

위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유리는 거울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비춰줍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진리의 거울로 가서 네 삶을 비춰보아라. 네가 잘못된 경로에 있으며 변화되기를 원한다고 주님께 말씀드려라. 그분의 성령께, 너를 겸손하게 만들어주십사,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열어달라고 간구하라. 사람들의 충고와 너 자신의 생각들과 고안을 다 버려라. 대신,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성령께 돌이켜라. 그분이 네게 하시는 말씀을 믿어라.”

만일 당신이 성령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자 한다면, 다른 모든 도움으로부터 돌아서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당신 삶으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고, 당신은 바로 그 순간부터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성령의 일

변화는 전적으로 성령의 일입니다.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린도후서 3: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절대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들었습니다. “주님께로 돌이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눈의 베일을 벗겨주신다.” 그것은 순전히 성령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렇게 읽었습니다. “이제 주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7절) 여기서의 “자유함”은 “더이상 노예가 아닌, 책임이 사면된, 자유로우며 속박에서 벗어난” 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 눈이 뜨여짐과 함께 오는 자유함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홀연히 새로운 빛 가운데서 보게 됩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이전에 보아왔던 오랜 방식을 깨뜨리고, 되돌이켜 참된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돌이킴은 하나님의 영을 온전히 신뢰함을 뜻합니다. 또한 그 의미는, 모든 비성경적인 상담과 자기 생각, 그리고 모든 계획으로부터 돌이켜서 오로지 성령 한 분만이 당신을 이끌고 인도하도록 그분을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돌이킴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그의 이름이 아직 사울이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벌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잘못된 노선에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 얼마나 끔찍한 베일이 드리워져 있었는지요! 그때 사울은 그가 성도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던져넣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다고 실제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차단하고 그에게 인생의 위기를 주셨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셨을 때, 그분은 빛으로 그를 치셨고, 그 빛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를 실제로 눈멀게 했습니다. 사울은 눈먼 채로 다마스커스의 한 집으로 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야가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아나니야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올 때 길에서 네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사 네가 시력을 받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셨느니라, 하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사도행전 9:17-18)

사울은 그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모든 것을 성령께 굴복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의 베일이 즉시 벗겨졌습니다.

2014년 4월 12일 토요일

힘의 근원 by Carter Conlon

오늘 당신을 대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상속권 안에서 굳게 서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젊었을 때 당신 삶에 던져진 한마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넌 멍청이야! 넌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야. 내가 너를 떠나는 이유는 너와 함께 있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야.” 누가 무슨 말을 했든, 아니면 당신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반대편의 성향이 어떻든, 그 모든 것은 단지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들어가려는 경계선에서 당신을 멈추게 하려는 의도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양식이니라.” (민수기 14:9 참조) 달리 말하면, 적이 우리를 지탱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양육하며 먹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적이 우리보다 우월하며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들 눈에는 우리가 마치 메뚜기와도 같은 하찮은 존재로 느껴지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적이 어떻게 우리를 먹인다는 말일까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서 사역하실 때 제자들이 그분께서 잡수실 음식을 구하러 갔던 일을 기억합니까? 그들이 돌아와서는 예수님께 음식을 드시도록 권고했으나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한복음 4:32) 예수님 말씀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게는 너희가 미처 알지 못하는 힘의 근원이 있다. 너희는 그것을 맛보지 못했다. 너희는 그것이 무엇인지, 또는 그것이 어떻게 너희를 양육시킬지 알지 못한다.”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를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하, 누가 그분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끝마치는 것이니라.” (34절) 달리 말하면, “이것이 나의 양식이다. 이것이 바로 내 생명의 음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대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대면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그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아직 넉 달이 남아 있고 그 뒤에 수확할 때가 이른다, 하지 아니하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들을 보라. 그것들이 이미 희게 되어 수확하게 되었도다!” (35절)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추수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즉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그 엄청난 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잘 들어라. 너희 눈을 크게 떠라. 추수 때는 벌써 임박했다. 이미 추수할 때가 이르렀다!”

“거두는 자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 함께 기뻐하려 함이라.” (36절) 추수하러 나가는 자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며, 그 보상은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능력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주님, 제 삶의 주권을 당신께 드립니다. 제가 어떤 강적을 대면해야 한다더라도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합니다. 바로 그것이 제가 참 양식을 찾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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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4월 11일 금요일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음성

하나님께서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히브리서 12:26)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내가 시내산에서 이 땅을 진동하였다. 그러나 이 말세에 말할 때에는 육적 세계뿐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 진동 할 것이다. 현재의 상황들은 모두 흔들릴 것이고, 지금과 같이 그대로인 것은 없을 것이다. 종교적이라고 불리 우는 모든 것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일지언정 성자가 천국에서 말할 때에 모든 것이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에게 그의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은 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거시요”(신명기 18:19)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불순종에 대한 책망을 물을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한 사람들은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시들어지고 무정하게 되고, 기쁨이나 평안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히브리서 12:25)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국가든 개인이든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의 음성이 모든 기관과 지도자들 그리고 경제를 흔들며 온 나라를 흔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에게는 “땅 위에 불도록”, 구름에게는 “비를 멈추고”, 경제에는 “모든 탐욕이 심판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감옥, 정부, 금융제도, 학교, 군사, 법정과 입법부 그리고 이 땅 위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기반이 남지 않을 때까지 진동 할 것이다.”

마귀가 이 모든 것을 흔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계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진동하고 있습니다. 능력으로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진동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2014년 4월 10일 목요일

하나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분명하고 또렷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리고 이 땅 전체에 들려집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 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히브리서 12:18-27)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하늘에서 말씀하시지 마시고,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여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예언하였습니다. “너희가 구한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들어 쓰실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할 것입니다.”

약속하신 선지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셨고, 수 많은 증인들이 그가 육신의 모습으로 천국에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도, 영혼, 지체의 공동체, 즉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말세에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에게 다시 한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흔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2014년 4월 9일 수요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최근 어떤 사람이 저희 사역에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를 당신의 발송 리스트에 추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이름을 당장 삭제해 주십시오. 당신들의 우울한 가스펠과 죄에 대한 비난을 더 이상 못 견디겠습니다.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심지어 당신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심판과 죽음에 대한 당신의 메시지는 정말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예언자에게 이르기를 예언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이사야 30:9-11)

이 구절에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는, “듣기 좋은, 아첨”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민족은, 짧게 말해, “안 좋은 것들은 이제 그만 말하고, 우리가 어떻게 번영할 것인지 우리 앞에 얼마나 좋고 위대한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떠날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는 성도는 거룩하고 죄를 밝히는 말씀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늘 성령님의 진리의 음성으로부터 도망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에 대해 관대하고 부드러운 말과 듣기 좋은 예언을 하는 설교자에게 달려 갈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하신 듣기 어려운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명기 5:6-9)

이는 정결하고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장막으로 달려가 자신들이 만든 우상의 형상들을 부숴버리게끔 했어야 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더 이상의 번개, 불, 지진은 못 견디겠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그만.. 우리와 닮은 설교자를 주시고, 그가 우리에게 말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듣고 순종하겠습니다.”

2014년 4월 8일 화요일

더 부드러운 메시지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기 20:20)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신명기 5:33)
모 세가 한 말을 다른 말로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화가 나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 임재하심의 이유는 하나님의 당신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의 삶 속에 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강한 무기가 되고, 당신의 매일이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의 구절에서는 성경에서 가장 기묘한 논리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신명기 5:24-26). 그들은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죽어야 합니까? 이 세상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고 있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힌트를 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29절)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이사야 29:13)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만든 금 신상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에 직접 들은 하나님의 음성마저 무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우리는 좀 더 부드러운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옳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자신의 죄를 드러내며 영혼을 만지시는 성령님의 지시 앞에 섰을 때에 우리는 진정 죽게 될 것입니다.

2014년 4월 7일 월요일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by Gary Wilkerson

다윗은 단 한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목자가 되라고 하셨고 저는 좋은 목자였습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곰을 싸워 이겨 한 마리의 양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자랑은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무엘상 17:37)

바벨론 왕의 술 관원이던 느혜미야의 자랑도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도성을 재건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 받을 때에 가슴속에서 불같이 뜨거움이 느껴졌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데 힘썼습니다.

모세의 간증은 “나는 바로 왕의 궁전에서 살고 많은 권력을 가졌습니다.”가 아니라 그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하여 내게 말씀하셨고, 바로에게 직언하였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리고 그의 자랑은 홍해에서 하신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신자들도 같은 자랑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부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그 자체로 좋은 간증을 가지고 있는 스데반 집사의 자랑 역시 믿지 않는 관중에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있습니다. 그의 영감 있고 능력 있는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관중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간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그의 첫 번째 간증은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였다는 것이고, 또 그의 희생은 유대교 열성당원인 사울에게 미친 영향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좀 더 의미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도대체 언제쯤이 세대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인가?”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중재가 필요한 일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에 더 자주 가야겠습니다”라고 하기 보다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배우자와의 관계와 가정을 지키시고 나의 동료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미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자랑할 만한 간증을 주실 것입니다.”

죄책감을 갖게 하기 위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눌린 열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어떤 분들은 믿음을 너무 오래간 저버린 나머지 자랑할만한 간증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2014년 4월 5일 토요일

믿음은 단지 가르쳐지는 것만이 아니고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by Claude Houde

제가 여러분께, 당신 자신을 향한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보라고 도전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청소년이든 자녀를 가진 부모든 학생이나 가정주부, 또는 경력의 첫걸음을 내딛는 젊은이든, 당신의 믿음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친구나 부모님, 또는 자녀나 교회 성도 등 누구를 막론하고, 사랑과 기도와 용서, 회개와 섬김, 그리고 무언가 아름답고 고결한 일을 함으로써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승리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기가 불가능하다는 비전으로 심장이 뛰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다는 음성을, 당신의 영으로 하여금 듣게 하십시오.

믿음은 단지 가르쳐지는 것만이 아니고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리고 영적 실제는, 내 자녀가 그들을 위해 남겨놓을 아비인 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저소득 주거단지에서 성장했던 제 어린 시절의 간단한 이야기로 그것을 설명해드리기 원합니다.

  • 그날도 예외 없이 아버지께서 동네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을 때는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고, 아버지는 방금 그의 주급을 현찰로 바꿔오는 길이었습니다. 매주 어김없이 주급을 술로 탕진해버리는 것은 예사였기에, 그날도 아버지는 주급으로 술을 마셔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정신 나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은 아버지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식들을 먹여야 하고 방세를 내야 하며 난방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현실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내에게 맹세하고 또 맹세했던 약속들은, 그를 이 혐오스러운 습관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만드는 무모하고도 고질적인, 모든 것을 질식시키는 술에 대한 갈증으로 매번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증오했지만, 그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이러한 음성에 항상 굴복했습니다. “이건 나 자신만의 일이고, 나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고 있지 않아. 이것은 내 선택이야. 그저 술 몇 잔 마시는 것 뿐인데 뭘!” 그런데 갑자기, 추운 겨울밤의 적막을 깨고 어떤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눈을 밟는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였습니다. 그가 돌아보았을 때의 광경은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마치 쇠뭉치가 배를 치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 위에 남겨진 아빠의 발자국 위를 안간힘을 다해 한 발짝 두 발짝 작은 발로 따라 내딛는 그의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각자는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이끌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들은 거짓말하고 타인을 비난하며 속이는 것과 비평하는 것을 배우고 교만해져서는, 항상 쉬운 길만을 찾습니다. 반면 우리의 아들과 딸들은 사랑하며 기도하며 일하고 예배하며 섬기고 용서하며 믿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며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피부색보다는 그들의 성품으로 사람들을 분별하며, 정직하고, 어른들을 공경하며,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우리한테서 보고 배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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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어려운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4월 4일 금요일

감춰진 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진을 치고 있었을 때, 그들은 갑자기 짙은 구름과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렇게 경탄스러운 현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께서 이 말씀들을 산에서 불 가운데서, 구름 가운데서,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의 온 집회에 말씀하신 뒤에…” (신명기 5:22)

이 모든 현상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죽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마침내 그 음성은 잠잠해졌고 번개는 멈추었으며, 곧 해가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들 그대로 살아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실제 음성을 듣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 놀라운 현상이 일어난 후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족장들은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신은 이 회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찬양의 모임이었을 거라고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러한 경탄의 모임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터무니없게도, 장로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엄한 음성을 듣는 것을 더이상 원치 않습니다. 만일 그분이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사람의 음성을 통해 듣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습니다. 대체 누가 그토록 놀라운 하나님 영광의 나타나심에 그런 식으로 반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그 이유를 말씀드릴까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는 감춰진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은밀한 우상 숭배자들이었습니다.

믿을수 없게도, 이 백성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작은 금신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 스데반은 이러한 우상들이 “너희가 경배하려고 만든 형상들” (사도행전 7:43)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인들이 경배했던 거대한 금송아지들을 본떠 이 우상들을 새겨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금신상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당신은 이집트로부터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광야에서, 그들은 이 끔찍한 우상숭배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백성을 “광야에 있던 교회” (38절)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실제 음성으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과거의 우상숭배적 이집트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아니하고… 마음속으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39절)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이 이 백성을 왜 두려움으로 떨게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새겨 만든 무생명의 조각우상이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 권능의 임재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은 그들의 영혼을 꿰뚫었고,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입니다.

2014년 4월 3일 목요일

기도의 동역자들

한 목회자의 아내가 우리 사역 전화 응답기에 애처로운 음성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데이브 형제님, 수천의 목회자 아내들이 그들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은밀히 술을 마십니다. 제가 바로 그중 한사람입니다. 저는 아픔을 무마시키기 위해 술을 마십니다.” 다른 목회자들의 아내들은 그들의 실패하는 결혼에 대해, 또는 그들 남편의 포르노 중독에 대해 편지를 보내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지금 기도로 돕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분들입니다. 제가 목회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기도의 도움이 절실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보기도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직접 배워 알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해내셨습니다!

바울은 단지 기도의 동역자들의 중보를 구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 또한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그것이 복음 전도자로서 그의 부르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너희를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너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뻐하며 간구함은…, 너희가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라.” (빌립보서 1:1, 3, 4, 7)

당신은 그들의 결혼이 파탄 가운데에 있는 형제나 자매를 아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하십니까?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그 부부가 결별할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에 대해 말합니까? 아니면 당신은 주님께 그들의 이름을 올려드리며 열심히 기도합니까?

당신은 기도의 동역자로서의 사역을 원합니까? 만일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당신의 기도는 길지 않아도 됩니다. 단순히 간구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신뢰하십시오.

이것은 제가 아파 누워있었을 때 있었던 일을 설명해줍니다. 제 손자들 중 하나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 저의 어린 조력자는 그의 손을 제 이마에 얹고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할아버지를 싹 낮게 해주세요.” 저는 미소를 짓고 손자에게 고맙다고 말했으나 손자는 저를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 다 나았어요. 일어나세요!” 그래서 저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 나았습니다! 그의 믿음의 기도가 저를 온전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들의 형제자매들을 돕기 위해 어린아이와도 같은 믿음으로 부지런히 그분을 구할 때,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2014년 4월 2일 수요일

환란 가운데서 바울은 중대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바울이 그의 고충을 통해 배웠던 가장 의미심장한 교훈은, 그가 결국은 주님과 그분의 언약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더이상 자신의 육신이나 능력, 또는 의지력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 속에 죽음의 선고를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9)

바울의 시험은 그를 인내의 한계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흑암의 세력을 대항해 싸울 아무런 힘이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의 육신에 사망선고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적적으로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고 계시며 또 여전히 건지시리니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10절)

바울이 어떻게 구출될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기도의 용사였으며, 두 번째는 그가 주님 안에서 대단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분의 언약들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지금까지 구해주셨듯이, 그분은 지금도 이 시험에서 나를 구해주시기 위해 일하고 계신다. 지금부터 죽는 그 날까지, 나는 그분의 구원 능력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처럼 우리도 환란의 때를 견디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능력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육적 노력으로도 원수를 패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우리가 압도당하고 무력해지며 연약해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바울의 삶과 비교할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도록 유도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사도가 체험했던 것과 같은 구원의 경험은 절대 못할거야. 그는 성경 말씀을 통달한 사람이었고, 주님으로부터 예수님과 복음, 그리고 새 언약에 대해 엄청난 계시를 받았던 자야.”

“그리고 바울은 성령의 권능과 실증을 갖고 사역했지. 그는 단독으로 도시들과 나라들을 흔들었던 자야. 심지어는 돌에 맞았어도, 군중 폭행과 세 번의 파선으로도 마귀는 그를 죽일 수 없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죽은 자를 살려내기까지 하셨어. 이 사도는 역사상 가장 기름부음 받은 종들 중 한사람이지. 그는 영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했던 자야.”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도는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중대한 요인은, 무엇보다도 기도 조력자들의 강력한 중보 덕분이라고 명백히 말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해 기도로 함께 도울지니” (11절)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이 실현되도록 기도로 돕고 있다.”

2014년 4월 1일 화요일

돕는 자들”의 기도를 통해 구출되다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가 힘에 겹도록 한량없이 눌려서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고린도후서 1:8) 이 구절에서 쓰인 ‘눌려서’라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무겁게 짐 지워진, 통탄할 만큼 짓눌린”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했던 고난이 너무도 극심해서 거의 눌려 죽을뻔했다. 나는 그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힘들어서 그의 생명까지 단념했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는, 그가 실제로 참담한 형편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다른 구절들에서는 그의 고난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손에 붙었던 독사를 대수롭지 않게 떨쳐버렸던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세 번이나 파선했었으나,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는 매 맞았고 강탈당했으며, 돌에 맞았었고 감옥에도 갇혔었지만, 그 모든 환란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절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만큼은 바울이 완전 탈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견뎌낸 이 “곤란”이 정신적 고뇌였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고뇌가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확실히 알지는 못하지만, 고린도후서 7장 5절은 우리에게 힌트를 줍니다.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 육체에 안식이 없었으며,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여 밖에는 싸움이 있었고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노라.”

저는 바울이 그가 섬기고 있었던 양들로 인한 고통을 말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고린도에서는 거짓 선생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의 양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거부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지 않는 자들을 따르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 있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가지고 디도가 도착했을 때 그는 위로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디도를 오게 하사 우리를 위로하시되, 그를 오게 한 것뿐만 아니라 그가 너희 안에서 위로받을 때 얻은 그 안위로 위로하셨나니, 그가 너희의 간절한 소망과 애곡과 나를 향한 너희의 뜨거운 마음을 우리에게 고하였으므로 내가 더욱 기뻐하였느니라.” (6-7절)

저는 이와 비슷한 고뇌를 제 삶에서도 경험했습니다. 제가 사랑했었고 도와주었던 사람들의 말이 제 등을 찌르는 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다윗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입의 말들은 버터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속에는 전쟁이 있으며, 그의 말들은 기름보다 부드러우나 실상은 꺼낸 칼이었도다.” (시편 55:21) 그토록 힘들었을 때에 제게 가장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돕는 자들의 기도”였습니다.

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자랑할만한 간증 by Gary Wilkerson

우리는 성경적 예언들이 가시적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는 이 땅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 참조) 지금은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돈을 사랑하며 가증스럽고 거만해질 것이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가의 지도자들은 가장 기본적이며 상식적인 원칙마저도 서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대담하게 죄에 대해 언급하면, 그는 편협한 자라고 불리우며 따돌림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화의 한 구석으로 제쳐지면서, 죄는 더욱더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영적 충격을 느낍니다. 저는 매주 제 주위에서 또 하나의 결혼이 파탄되는 것을 봅니다. 아이들은 자기혐오로 그들 자신의 살을 벱니다. 마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매월 천오백 명의 목회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포기하고 있는 판국이며, 이러한 상황을 돕기 위한 목소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구약은 잇사갈 자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시세를 알며 세상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역대상 12:32 참조) 오늘날 그리스도의 지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때를 분별할 줄 안다면, 적당히 해서는 안 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알기 위한 유일한 길은, 교회가 현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악귀의 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마태복음 17:21)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기도는 뜨거워야만 합니다. 영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너무도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빛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때를 향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4:4) 하나님은 그분 백성의 삶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고, 우리는 모두 자랑스러운 간증으로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랑할만한 간증은 대체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걸까요? 제가 말하고 있는 종류의 자랑은 자랑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 (고린도후서 10:17)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종류의 자랑을 하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자랑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기도의 원조자

사도바울은 의식적으로 성도의 기도의 필요성을 알았고, 성도들에게 기도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요청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로마서 15:30-31)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25)

“Strive(힘을 같이 하여)”라는 단어의 그리스어의 의미는 “기도중보자로 함께 기도로 분투하고 싸워주십시오”라는 뜻을 가집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잠시 언급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함께 싸워 주십시오. 저와 또 복음을 위하여 영적 전쟁에서 함께 싸워 주십시오”라는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 그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고,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그를 위한 기도를 권고하였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립보서 1:19). 바울은 자신이 마귀에게 지목되어, 사탄의 무리가 그를 파괴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진실된 복음 사역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모든 목사님, 설교자 그리고 선교사들은 모두 지속적으로 그들을 위해 중보해줄 기도의 원조자들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것은, 저 또한 저를 위해 기도하며 수년간 함께 힘써 싸워준 기도의 조력자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최근에 유럽에서 이루어진 목회자 컨퍼런스와 밤마다 있는 전도대회를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을 진행하는 시간 내내, 성령님께서는 제가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프랑스 니스에서 미국인들은 비호감이고, 특히나 미국인 선교사들은 더욱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날 밤의 전도대회를 “과연 가능할까?”라는 염려와 함께 걱정했습니다. 프랑스는 무신론, 불가지론(agnosticism), 불신이 만연한 국가입니다. 또 우리가 계획하였던 집회는 단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종류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집회 시간이 다가왔을 때, 수 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준비한 모든 설교가 집회와 맞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작 전 저와 제 통역가는 메모한 말씀을 검토하였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집회와 맞는다는 확신이 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통역가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강단에 섰을 때 성령님께서 제게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수 천명의 성도들의 기도의 지원을 느낄 수 있었고 성령님께서는 나의 입을 말씀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40분동안 설교를 하였고, 그리고 설교하는 시간 내내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제가 마쳤을 때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시면, 앞으로 나오십시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지속적인 기도

몇몇의 신학자들은 같은 간구를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이 불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옳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연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금식하며 진실되고 온전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복음 7:7 참조)

시초부터 진실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언약들을 기도로 돌렸습니다 :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의 시작 전부터 약속하셨던 모든 것을 믿었고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수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지속적인 기도와 간구에 관한 비유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판관으로부터 원한을 풀어 정의를 지속적으로 구한 “번거롭게 하였던 과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1-8 참조) 
  •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하여 나라의 붕괴가 에덴동산과 같이 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 기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에스겔 36:37). 다른 말로는, “내가 너희에게 약속을 하였지만, 너희가 갖기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한다.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를 온전한 마음으로 구하라. 내가 너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구하여야 할것이다.” 
  • 다니엘은 예레미야에게 70년 후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읽어주었습니다(다니엘 9:2). 다니엘이 약속하신 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시기를 믿음으로 그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다니엘은 얼굴을 땅에 묻고 2주동안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흉갑에 모든 이스라엘의 족속의 이름을 새기고 다녔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민족을 마음에 새기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의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합니다. 게다가, 이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의 제사장이고, 늘 다른 사람의 필요와 기도제목을 마음에 새기고 다녀야 합니다.(야고보서 5:14-16 참조)

2014년 3월 26일 수요일

불온전한 마음의 기도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우리는 원수 마귀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지옥의 모든 것에 대한 위협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한 일을 수행하는데 마귀의 유혹과 궤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어느 부부 상담가가 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교회 어느 곳에서나 부부들이 이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문자 그대로 전염병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크리스천 가정에 파란을 일으키는 이유라는 이유는 모두 들은 것 같습니다. 성격차이, 의사소통의 부재, 애정의 부재, 불륜 등. 이 모든 것의 배후는 모두 성도들을 향한 지옥으로부터 오는 공격입니다.

믿지 않는 비기독인 가정의 불화의 원인은 놀랍지 않지만 의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불화와 혼돈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중에 말씀중에 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갑자기 가정에서의 권위가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의 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모든 권력을 물리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왜 계속 만연해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왜 그들의 가정이 그렇게 지속적인 위협에 처해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은 바로 부부 중 적어도 한 사람이 마귀의 망상에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가 영적으로 게을러 졌다던가 아니면 삶의 기준을 마귀의 유혹과 타협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격분한 마귀는 그들의 마음과 가정 안에 거점을 얻은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공격을 받고 있다면, 제자들이 질문하였던 것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는 왜 그 마귀를 내쫓지 못하였습니까?” 예수님은 특정 마귀의 구속은 단지 손을 얹었다고 또는 열정이 없고, 전심을 다하지 않은 일회적인 기도로 자유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구속은 깊이 자리잡고 있어 지속적인 기도와 금식으로만이 내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기도의 힘에 관하여 혼돈하고 있습니다. 수 백만명이 보는 앞에서 베일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어디서든 문제를 직면했을 때 예수님은 가장 마지막으로 찾고, 기도는 저버린 상태에서 심리학, 상담, 책 그리고 친구들을 찾습니다. 예수님만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가정이 파괴되었고, 그를 치유하고자 한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십니까? 텔레비전을 끄고 온전히 예수님께 짐을 내려놓고 그를 구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당신의 가정을 위해 몇번의 끼니를 거르는 금식을 하셨습니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5:16)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기도의 초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는 간혹 가장 이기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자신의 필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의 두 가지 주요 주제는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의 필요에 따른 기도제목으로 이루어집니다.

가끔, 자신의 폭 좁은 걱정을 넘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한번 기도를 하고 쉽게 그들의 필요를 잊어버리지요.

최근 저는 제 기도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의 옹졸함과 제한적인 기도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저는 기도시간에 하나님을 찾고 믿음을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저는 기도 중에 거룩함을 구하고, 더욱더 예수님 닮기 원하며, 영적 삶의 인도자가 되어달라고, 영감 있는 사역할 수 있도록 구합니다. 또한 저는 조용히 찬양하며 주의 임재 속에서 기쁨으로 새롭게 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립니다.

또 저는 매일 가족을 위해 중보합니다. 나의 자녀들을 마귀의 궤계에서 보호해주시고, 아들들이 은혜의 강물에 심어진 상수리나무같이, 딸들이 하나님의 궁전에 빛이 나는 원석처럼 그리고 손주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이들로 자라도록 기도합니다. 또 위기에 처한 개개인과 우리가 지원하는 수많은 선교사님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정말 칭찬 받을 만 하군요.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집중으로 교제하며 그 모든 필요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들여다보면, 기쁨이 있는 교제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기쁨있는 교제가 영적 성장의 비결이고 이 땅에서 그보다 더 귀한 경험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스스로의 의식고양과 필요를 위해서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는 이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 모두의 심각하고 절박한 필요를 위한 기도를 단순히 못 본 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37-38절)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거룩한 꿈

“요셉이 꿈을 꾸고” 창세기 37장 5절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으로 직접 말씀하셨고 요셉은 뒷걸음 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통하여 마음에 거룩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꿈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113번 언급되었고, 그 중 언급된 30번은 요셉과 관련된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장 5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러한 부끄러움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소망을 말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꿈을 외치는 것 자체가 큰 믿음을 요구하기 떄문입니다.

수년간 품어온 제 꿈은 스프링스 교회 같은 생기가 넘치는 지체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 꿈을 나눌 때면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저는 목회를 작은 교회에서만 하였기에 그들의 불확실성과 의심의 눈초리에 더욱 쉽게 휘말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령님께서는 저를 격려해주시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음탕하고 범법하며 부도덕한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파괴하고 포기하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려 할 때에 죄를 지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행동도 피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요셉의 진실성은 보디발의 아내를 몹시 화나게 하였지만 그는 의를 위하여 그녀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세기 39장 9절)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꿈을 찾아 외쳐야 하는 때입니다. 당신은 오랜 기간 겪어 시험이라고 여겨지는 수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기초작업인 것입니다. 당신은 꿈을 꾸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문제가 많은 환경에서 자랐습니까? 남아 있는 상처에도 굴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십시오.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죄를 지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방황하는 모든 양들을 찾으러 가신다고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믿음으로 환영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수렁에 빠진 모든 믿는 그의 종을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에 영광이 되는 길로 당신을 인도하고 싶어 하십니다.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부흥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by Jim Cymbala

당신이 역사상 일어났던 위대한 부흥들에 대해 연구해 본다면, 어떤 부흥이라도 그 배경에는 반드시 그들 자신과 교회가 현 상태로부터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집요하게 간구했으며, 기도는 마침내 부흥을 가져왔고, 부흥은 더 많은 기도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시편 80편의 내용과 흡사한데, 시편 기자 아삽은 무너진 성벽, 광포한 들짐승, 불타버린 포도원 등 그 당시의 애처로운 상황에 대해 탄식합니다. 18절에서 그는 이렇게 탄원합니다.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성령은 기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이 우리가 거하는 모든 장소에 하나님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운전 중의 차 안에서, 바로 그 도로 한복판에서도 우리의 영은 자발적으로 도움과 간구, 그리고 중보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교회가 기도하지 않으며,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인원이 예배에 참석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겠습니까? 천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 당신들 교회의 긴 신도석! 그것은 진정으로 아름답습니다! 이곳 천국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예기하고 있습니다. 설교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참으로 근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천국에 가는 것은 대체 무엇때문에 원하는 걸까요? 그곳에서 그분은 모든 것의 중심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분의 임재에 거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천국은 우리를 위한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분을 열렬히 갈망하지 않는 사람을, 그분이 왜 그곳에 보내겠습니까?

저는 기도사역이나 다른 헌신의 행위로 인해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고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시간을 드리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찬양을 올려드리며, 천국이 어떠할 것이라는 주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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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 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영원토록 그분의 것!

당신이 똑같은 죄를 계속 반복할 때, 주님이 당신을 몇번이나 용서해주실지 궁금해할 것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분의 놀라운 용서는 무한합니다. 당신이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 구원을 찾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는 현명치 못한 것이거나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천부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만, 우리가 계속 죄를 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언젠가는 우리를 징벌하십니다.

제가 아이들 넷을 키울때, 저는 제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벌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매를 대기 위해 아이들을 제 방으로 불러들이면, 그들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때리지 마세요, 아빠!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저는 아이들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들에게 매를 대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훈계의 수단이 아니라 단지 장난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뜻,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신 바는 분명히 뜻하신다는 것을 항상 우리에게 각성시켜줍니다!

제가 여러분께 희망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죄로 인해 지금 깊은 바닥에 계신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징벌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심을 압니다. 나는 정녕코 영원토록 그분의 것이며, 그분이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실 거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분은 내가 고투할 때마다 나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며, 내가 죄를 대항해 싸울 때에는 인내해주십니다. 내가 간구할 때마다 그분은 나를 용서하실 준비가 항상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천부께서는 나를 저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도록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용서가 주께 있사오니, 이것은 주를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4)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는 단지 그분께 순종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해드려서, 그분의 얼굴에 웃음을 선사해드리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의 축복된 결실입니다.

2014년 3월 20일 목요일

오직 믿음으로

새 언약(신약)에서의 기본 언약 중 하나는 예레미야 31장 3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신약성서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골로새서 2:1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죄 사함, 즉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죄 사함의 언약은 특정의 성도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들의 죄로 인해 압박당하며 진절머리가 나서, 죄의식의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서는 성령의 성찰을 견뎌낸 후,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이킨 자들에게만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슬프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죄에 대해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상습적 습관은 조금도 그들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은혜로 충만하셔서, 그들이 죄 가운데 계속 완강하게 거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거짓 평강을 합리화시키고는, 성령의 책망과 성찰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책감이 경건한 슬픔으로 발전되기도 전에 미리 용서를 구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추론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보혈의 은혜는 지극히 심오하고 자비로우며 너무도 신비스러워서 인간의 이해를 훨씬 초월합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한 비난,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 천부께서는 언제든 용서해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자비롭게 서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아버지의 사랑, 죄를 사해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열망, 이러한 모든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서 3:11)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주님은 선하시며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많은 성도가 그들의 실패에 너무도 압도된 나머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어떤 도움의 한계도 넘어선 강박감을 느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성도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오 고난 당하며 폭풍에 밀려다녀 위로를 받지 못한 자여…” (이사야 54:11)

어떤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께 화를 내게 됩니다. 그들은 그분이 도와주시기를 기다리다가 지쳐서는, 비난조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제게 당신이 필요했을 때 어디 계셨나요? 제가 도움을 청하며 외쳤으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아무런 변화도 보지 못하고 회개하며 우는 것에 지쳤습니다.” 그러한 많은 성도는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그들 자신을 욕정에 넘겨주고 맙니다.

한편 어떤 성도들은 영적 혼미 속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을 돌보시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길은 주께 숨겨졌으며 나에 대한 판결은 내 하나님을 떠나 지나가 버렸다.” (이사야 40:27) “주께서 나를 버리셨으며, 내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이사야 49:14)

그리고 어떤 성도들은 모든 염려를 그들의 죄에만 중점을 두며, 그들 자신을 계속 죄인의 상태로 유지시킵니다. 이것은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 뿐이며 이렇게 울부짖게 만듭니다. “우리의 범죄들과 우리의 죄들이 우리 위에 있어, 우리가 그것들 가운데서 쇠약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살리요?” (에스겔 33:10) 사실상 유죄의 감정은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의식으로 낮아지고 우리 죄로 인해 애통해할 때, 우리는 그러한 감정에 젖어만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한계까지 이르게 한 다음, 십자가의 승리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애통함과 부르짖음으로 주님께 간구한 후, 마침내 다윗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주께 있사오니…” (시편 130:4) 성령께서는 그의 영혼을 하나님 자비의 기억들로 채워주기 시작하셨고, 그는 아버지의 용서와 죄 사하심의 성품에 대해 배운 모든 것을 기억했습니다. “주는 항상 용서하는 하나님이시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시므로…” (느헤미야 9:17)

다윗은 곧 기쁨에 넘쳐 자신을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주여,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을 풍성히 베푸시나이다.” (시편 86:5)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은 요나에게 화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 주여, 주께서 곧 주께서 불법들을 지켜보실진대 누가 능히 서리이까?” (시편 130:3)

많은 그리스도인은 다윗과도 같이 고투합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일단 그들의 영혼에 뿌리내리게 되면, 그분의 엄청난 존엄이 그들 앞에 끊임없이 떠오르게 됩니다. 다윗처럼, 그들도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누가 당신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당신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요나도 그와 똑같은 간구를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부르짖었을 때, 그는 바다 밑바닥에 있었고 그의 딜레마에서 도피할 수 없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으로, 바다들 한가운데로 던지셨으므로 넘치는 큰물이 나를 에워싸고 주의 큰 물결과 파도가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밑바닥까지 내려갔으며…” (요나 2:3-6)

누가 요나를 그렇게 깊은 흑암으로 내던졌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천부께서는 이 선지자를 깊은 바닥으로 끌어 내리시고는, 고래가 그를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화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분의 종이 그분의 뜻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멈추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요나가 그분의 계획을 따르기를 원하셨고, 그로 인해 그가 축복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깊은 바닥으로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요나 2장 2절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추구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정확히 말해줍니다.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내가 지옥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주님은 요나가 그분께로 돌이키고 그분을 향해 홀로 부르짖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눈앞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거룩한 전을 바라보리이다.” (4절) “내 혼이 내 속에서 기진할 때에 내가 주를 기억하였더니…” (7절)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로 돌이키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을 때까지, 우리가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지옥의 뱃속으로부터 이렇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 주님, 제게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는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나이다. 당신이 저를 구해주셔야만 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 죄를 극복하는데에 완전히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 상습적 죄에 대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으며, 주님은 그러한 당신을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게끔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그분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을 열망하고 계십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그분께 부르짖었을 때 얼른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10절) 하나님은 고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그를 뱉어내라. 내 종이 내게 부르짖었으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하나님의 생기 by Gary Wilkerson

“내가 또 보니, 보라, 힘줄과 살이 그 뼈들 위에 생기며 그것들 위에 살갗이 덮였으나 그것들 속에 숨은 없더라.” (에스겔 37:8) 이 얼마나 처참한 광경인가요. 저는 모든 프로그램과 계획은 잘 짜여져 있지만, 생명이 없는 교회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는 모든 연령층과 성도들에게 필요한 세미나, 집회, 서적, 웹싸잇, 인터넷 통신서비스, 그리고 각종 모임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선한 동기로 고안되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불어넣어지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열망하시는 삶을 오히려 우리로부터 빼앗아가는 미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활동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영적이라는 착각 속으로 미혹됩니다. 그것은 마치 마른 뼈들이 연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생기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저는 천 번의 예배와 만 번의 전략을, 그분 성령의 한 가닥 생기와 바꾸겠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하는 일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37:9) 여기서 “생기(breath)”가 히브리어 단어로는 “ruach”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또 대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뼈들, 즉 사람들에게 대언해야 했지만, 이 두 번째 명은 하나님 자신, 즉 성령(ruach)에게 대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 걸까요?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향해 설교하는 것, 즉 교리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단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도록 간청하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분으로 하여금 상황을 바꿀 수 있게끔, 그분께 부르짖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생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먼저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지 않는 한, 우리 눈은 볼 수 없고, 우리 귀는 들을수 없으며, 우리 입은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실 때, 그 결과는 우리를 경탄케 합니다.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뼈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더라.” (37:10)

하나님의 생기는 우리를 담대함으로 서게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은 사도행전 2장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2:14) 베드로가 오순절에 선포했던 복음은 그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이제는 그가 일어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기로 말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 원하는 생기는,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어둡고 절망적인 환경에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혼돈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분은 잿더미에서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십니다. 그리고 원수가 파멸만을 추구했던 끔찍한 상황 안으로, 예수님은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열쇠 by Carter Conlon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들이니라.” (마태복음 7:12)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만일 상처를 입었다면, 나는 누군가 나를 돌보아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내가 만일 잃어버린 바 되었다면, 누군가 나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그들이 가진 것을 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에게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구하는 모든 자원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그것은 그분을 대항하는 자들의 비웃음을 견뎌낼 수 있는 열쇠이며, 당신의 원수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나는 누구도 실족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뺨을 맞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반박하지 않게 만드는 힘입니다. 또한 이것은, 당신의 일터에서 주위 사람들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열쇠인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은 약속으로 종결을 짖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를, 나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7:24-25) 그 집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폭풍으로 파산된 배에서도 굳게 서서 성찬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헤엄쳐서 바다를 건너야 했던 자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참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행해진 것이었지, 자신의 신변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평범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배의 선장과 다른 항원들은 볼 수 없었지만, 바울의 눈이 열려 놀라운 계시가 주워졌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영혼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대에 그들의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 신부들의 전형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1-13 참조)

저는 여러분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세밀히 읽어보시라고 추천합니다. 저는 이 세 장의 말씀을 반복해서 많이 읽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지침을 제시해준다고 믿습니다. 이 세 장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당신 스스로는 이 세상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며, 대신 하나님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께 말씀하십니다. “지금 구하라!” (마태복음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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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도에는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편 38:8-9)

당신도 다윗만큼 절실 했던 적이 있습니까?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시켜 하나님께 집중하며, 얼굴을 땅에 묻고 부르짖은 적이 있습니까? 지루하고 조용하고 태만한 기도는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치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러했듯이, 당신도 큰 목소리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여, 나의 간청을 들어주세요! 주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가졌던 어떤 절실함을 가졌었는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이 귀갓길에 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집에 다가갔을 무렵, 당신의 집 앞에 여러 대의 소방차가 줄지어 서있고 창문에서는 검정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나오고 있고 집 전체가 불길에 휩싸일 순간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와 아이들이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얼마나 침착하고 조용하게 계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불이 스스로 꺼지기를 기대하며 서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조용히 앉아서 “예수님, 불을 꺼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신 안에 조금이라도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연기가 피어나는 집으로 달려들어가서 무엇이라도 하려고 할 것 입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면, 그것은 배우자와의 관계가 타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당신의 집에 불이 났다는 것과 상통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 불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합니까? 가정의 붕괴에 대한 당신의 역할에 대하여 죄책감으로 부담을 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부담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강하고 능력 있는 말씀을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파멸하기 전에 자비로 당신에게 경고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달려가고 힘써 기도하십시오. 모든 치유는 간절히 하나님을 구할 때 시작됩니다.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소망이 있습니까?

절망의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130:2). 저는 이 구절이 죽어가는 사람의 간청처럼 들렸습니다. 다윗은 머릿 속 생각을 그저 읊으며 탄식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땅에 묻고 애통하며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간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의 자유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자유를 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몹시 안 좋은 상태입니다. 주님 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의 조언자, 친구 그리고 심지어 가족에게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단 한가지 소망은 기도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간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밤과 낮으로 부르짖을 것입니다!”

수많은 크리스천 가정들이 다윗이 구했던 이 자유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많은 부부들이 어두운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배우자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의사소통조차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보다 낯선 사람들에게 더 친절을 베풉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가정은 서로를 비방하고 치사하게 대하는 냉전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자신들은 모르지만, 그들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을 걷고 있고 그들의 관계는 제어가 안될 정도로 위협을 받게 됩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이 이미 한계치만큼 파괴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과 아내 혹은 남편의 관계는 붕괴직전의 상태에 있고 무슨 소망이 남아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상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거룩하지 못한 태도의 블랙홀에 빠져 있고, 이러한 상태는 단순하게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가정이 깨질 때까지 안 좋아지기만 할 것입니다.

성령님의 목소리에 자신을 바로 알도록 각성해야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내 혹은 남편이 함께 짓고 있는 가정 안의 죄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 죄를 직면하고, 내려놓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두운 우물의 밑바닥 안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당신의 근심과 걱정을 누구에게 가지고 가십니까? 당신의 친한 친구에게 짐을 덜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저 당신의 배우자를 험담하고 계십니까? 만약에 카운셀러와 상담하고 계시다면, 상담을 관계를 끊기 위한 정당화하고 합리화할 이유를 찾고 계십니까?

부디 나의 글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부부 상담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한 곳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어떤 곳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죄는 당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당신은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진리의 화살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바울의 파멸의 조건에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안심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9-10). 수많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 쉼 노력을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마음에 화살처럼 박히는 진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니라”(11절). 갑자기 그들은 내려놓지 못하여 자신을 사로잡은 정욕을 기억하게 됩니다. “나는 구원받고 정결케 되었는데 왜 나는 이 습관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진실로 자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오래 전 자신을 사로잡았던 정욕에 다시 돌아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들어갔거나 불륜이나 동성애에 말려들게 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당신이 회사의 물건을 훔쳤거나 퇴근 길에 몰래 술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의 오랜 습관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자신이 그 부분에 있어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마음이 들어도 놀랍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시편 77:3)

하나님께서는 정욕과 피에 사로잡힌 그의 자녀들을 볼 때마다 우리를 순종과 평강의 길로 되돌려 주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일하실까요? 그는 우리가 죄를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깊이의 상황으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애워쌈을 당하고 하나님의 질책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 있을 동안 요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종의 부르짖음에 재빨리 응답하시어 요나의 삶 속 하나님의 축복과 계획을 회복해주셨습니다.

2014년 3월 11일 화요일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편 1-4절

다윗은 자신이 원인이 된 추문으로 인해 근심했습니다. 그의 죄는 밝혀졌고 온 나라가 그의 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치에 대한 근심으로 휩싸였고,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시편 39편 8절

저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상황의 다윗과 같은 상황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빛에 반하는 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의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었고, 수년간 성경을 매일 읽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축복에 반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려놓지 않아 끊임없이 구속하는 죄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죄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끊었고,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습관을 지목하시고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성령님께서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죄에서 떠나야 한다! 이제 더 이상은 정욕으로 채우는 너희를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에게 기한이 주어졌고 내가 너희 개인에게 자신의 죄를 보여주었지만, 곧 이 세상에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설 때마다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부르짖을 것입니다. “나의 죄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나의 죄가 나를 사로잡은 나머지 저는 천국을 향해 낯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한 때 누렸던 모든 기쁨과 자유함을 모두 잃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낙심을 늘 갖고 있을 것이고, 약해지고, 영적으로 병들 것이고, 무릎 꿇고 쓰러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언급한 상대가 당신의 영혼의 현 상태를 묘사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을 당신 안에 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