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6일 금요일

하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수많은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시련과 환난 가운데 이 구절을 매일 인용합니다. 한데 바울이 말씀하는 문맥상 보면 이것은 더욱 깊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두 구절 앞에서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4-55).


바울은 하늘을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웅변을 토했었습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후5:1-2 이탤릭체 저자임의 사용).


그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바울에 의하면, 하늘-주님의 존전에 영원히 거하는 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할 때, 내게는 영광스러운 광경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나는 예수님이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그 큰 무리가 모여드는 것을 상상합니다. 이 다수의 무리가 모두 모였을 때, 나는 하늘에서 수백만의 영광을 입은 자녀들이 옛적 성전에서 그러하였듯이 주님께 호산나를 부르며 거대한 승리의 행진을 하는 것을 그려봅니다.


다음에는 순교자들 순서입니다. 일전에 땅위의 공의를 부르짖던 그들이 지금은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칩니다. 모두가 “승리, 예수안의 승리”를 외치며 기쁘게 춤을 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힘찬 함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온 나라들과 족속으로부터 온 많은 무리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아마 당신에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울 자신이 이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이 신실한 사도가 하늘로 이끌려 갔을 때,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 할 말...(고후124)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 곳에서 들은 말로 인해 휘청거렸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것들이 바로 그가 들었던 소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그들의 완전해진 몸으로,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찬 그들의 영혼으로 하나님의 존전에서 기뻐하며 하나님께 노래하며 찬양하는 전야제를 본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소리였기에 바울이 들을 수는 있었으나 흉내 낼 수는 없었습니다.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그리스도의 평강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든지, 모든 상황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그런 평강이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14:27). 이 말씀은 제자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자신의 평강이 된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과거 3년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목격하고 경이로워 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항상 평온하셨고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적인 일로 진노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때로 그분은 흥분하셨고,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평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화목하셨고, 시험에 직면하여서 평화로우셨으며, 거절당하고 조롱당할 때에도 평강을 누리셨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 사람들이 공포에 떨 때에도 그분은 갑판에서 주무실 정도로 평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분에 찬 무리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높은 벼랑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동요하지 않고, 평강으로 가득 찬 채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 나가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보고 제자들은 의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폭풍가운데서 어떻게 주무실 수 있을까? 저 무리들이 낭떠러지로 던져 버리려고 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평온하실 수 있었을까? 사람들이 조롱하고, 모욕하고, 침 뱉어도 그분은 전혀 대응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평강을 깨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은 지금 이들에게 바로 그 평강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약속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경이에 차서 서로를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갖고 계신 바로 그 평강을 갖게 된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덧붙여,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감각이 마비되고 이 세상을 벗어난 환각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물질로 마음의 평강을 사려고하는 부유하고 유명한 자들의 일시적인 평강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평강,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했을 때 그것은 마치 그분이 그들과 또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앞으로 직면해야 할 시기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다. 너희는 내가 곧 겪어야할 십자가와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너희 마음을 평강의 자리로 인도하기 원한다. 너희는 너희 안에 지속되는평강이 없이는 다가오는 일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는 내 평강을 소유해야만 한다.

2009년 11월 4일 수요일

머리카락을 만져 보아라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를 곤고하고 두려운 시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민족들이...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21:26, 25).


이러한 재난에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에 대한 그분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께서 참새를 돌보시는 모습과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한 올 까지도 세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주셨습니다. 이 모습들은 예수님이 그것들을 주실 때의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분은 열두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성읍과 마을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내시면서 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막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종류의 병과 질병들을 고치는 권세를 부여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흥분된 순간이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기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직후 그들의 주인은 이처럼 두려운 경고를 하였습니다.


“주머니에 아무 돈도 가지지 말라. 그리고 집도, 잠들기 위한 지붕조차도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는 이단이라거나 마귀라고 불릴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 매 맞고 재판관 앞으로 끌려가고 감옥에 던져질 것이다. 너희는 미움을 받고 경멸당하고 배신당하고 핍박당할 것이다. 너희는 돌에 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도망 다녀야 할 것이다.


,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틀림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이렇게 의아해 하리라고 상상해 봅니다. “무슨 사역이 이렇단 말인가? 이것이 나의 미래란 말인가? 이것은 내가 들어 본 중에서 가장 침울한 인생 전망이로구나.


한데 바로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10:26,28,31).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모든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항상 참새를 지켜보신다. 그분의 눈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너희를 얼마나 더 항상 지켜보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의심이 밀어 닥칠 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리고 네가 겪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여기 안식하고 확신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창문 밖의 작은 새들을 보아라. 그리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져 보아라. 그 후에 내가 네게 말한 것을 기억하여라. 저 작은 새들이 너희 아버지께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네 머리카락은 그분에게 너희가 얼마나 더 귀한 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분의 눈은 언제나 너를 지켜보신다. 네 모든 동작을 보시고 들으시는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


우리 아버지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이렇게 돌보십니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바울이 로마에서 재판을 앞두고 있었을 때, 그는 험악한 상태에서 갇혀있었습니다. (1:13-14 참조) 그는 양발이 한쪽씩 병사들에게 쇠사슬로 묶인 채 24시간 친위대 병사들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이 병사들은 무례하고, 강퍅하며 수시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산전 수전을 다 겪었기에 그들의 임무 상 모든 옥에 갇힌 자들은 바울을 포함해서 죄를 범한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당했을 모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홀로 있는 시간이 전혀 없었고 자유로운 시간이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모든 친지의 방문은 철저히 감시당하였고 아마도 간수들이 바울의 대화를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 경건한 사람의 위신은 완전히 발가벗겨지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이 사람은 아주 활동적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 대로와 공해를 통해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그 지역 전체에 걸쳐 자신이 세워놓은 교회들을 방문하는데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쇠사슬에 매여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퍅하고 불경스러운 자들에게 묶여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는 “왜 하필 나란 말인가”하며 진부한 자기중심적인 질문을 되 뇌이며 병적으로 비뚤어진 감정으로 돌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는 “나는 여기 묶여있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영혼들을 추수하며 기뻐하는데 내 사역은 중단되고 말았다. ?”라는 생각에 온전히 휩싸여서 자기 논리에 따라 결국은 소망이 보이지 않는 우울증에 빠져들어 절망의 구덩이로 기어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신, 바울은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나의 현재 상황은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광을 가져다 드릴 것인가? 내 시련을 통해서 어떤 위대한 유익이 있을 것인가?” 이 하나님의 종은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현재 나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 이런 상태로 죽게 될 확률이 크다. 하지만 나는 주님이 나의 발걸음을 명하신 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크게 높일 것이며 이 쇠사슬에 묶여있는 동안 세상에 간증이 될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20).


바울의 태도는 우리가 우리의 불행과 근심의 어두운 구덩이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줍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불안하게 기다리면서 우리의 미래를 낭비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주안점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나는 기적과 기쁨을 완전히 놓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의 선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동정하지 마십시오. 또는 내가 내 미래 때문에 낙담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사역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나는 쇠사슬에 묶여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전파되고 있습니다.

2009년 11월 2일 월요일

생명의 말씀을 밝혀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2:16).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존전에 서고 구속의 비밀들이 밝혀지는 날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날에 우리의 눈이 열리고 주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분이 우주의 모든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그 배후에 있는 자신의 권능을 보여줄 때 불타오를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가 이세상의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우리에게 제공되었던 모든 것의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과 자원들, 수호천사들, 그리고 항상 거하시는 성령의 임재.


우리가 이러한 것들의 위엄을 보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내내, 나의 전사들이 네 주위에 진치고 있었고, 강력한 사자들의 전 군대가 너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너는 결코 사탄으로 부터의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다. 너는 전혀 너의 미래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에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실 것 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하늘 아버지의 위엄을 볼 때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관심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며 갑자기 진리가 우리에게 전력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이분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진실로, 가장 위대하신 ‘스스로 있는 분’”.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말씀을 밝히고’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그는 주님의 존전에서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눈이 멀었었단 말인가? 왜 나의 주님의 목적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을까? 나의 모든 근심과 의문들은 헛된 것이었다,”라는 생각에 잠겨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나는 그날 내 눈이 활짝 열렸을 때 기뻐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했고, 또 내가 의심으로 가득 찬 채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앎으로 모든 계시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내 고통에 대한 모든 반응가운데 생명의 말씀을 밝혔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나의 주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확증했다는 것을 알기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요약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3). 한마디로, 그는 먼저 자신의 과거를 주님의 손에 내려놓지 않고는 미래를 내려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주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이 말은 빌립보인들에게 보내는 바울 서신의 끝맺음 말입니다. 바울은 “나는 감옥에 갇혀있고 이 족쇄들은 축복입니다. 나는 이 고통으로 인해 아주 행복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바울이 매일 출감을 위해 기도하였고 때로는 견뎌낼 힘을 달라고 부르짖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도 그분의 시련과 고통의 때에 아버지께 부르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맨 처음 충동적으로 “왜?”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부르짖음을 참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만일” 또는 “왜”라는 질문에 답을 예비해두셨습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7-18).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이 고통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욕되게 하거나 무력하게 보이지 않게 하도록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나의얼굴로, 나의 안식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전파하는 복음이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누구든지, 불이나 홍수나 어떤 상황을 거쳐야 하든지, 지켜주실 수 있다는 확증이며, 그분의 복음은 체험을 통해서 전파될 것입니다.


내가 바울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듣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어떤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역할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두고 그분이 우리를 돌보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하면, 우리의 주변상황에 상관없이 그분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특별히 우리의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우리 안에 최대로 계시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장로 중 한분인 쌤이 나에게 이렇게 말 한 적이 있습니다. “데이빗 목사님, 당신이 고난에 반응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하나의 간증이 됩니다.” 쌤 장로가 모르는 것은 그의 삶이 나에게는 하나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는 만성 통증 때문에 매일 밤 두세 시간 밖에 잠을 못자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맹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그의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간증입니다. 그의 삶은 바울의 어느 설교만큼이나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현재 고난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습니까? 당신 가족이 당신 안에 역사하는 복음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은 단지 공포, 절망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문만을 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전 세계는 지금 지구 도처에서 발생하는 테러와 재난으로 인해 떨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또 다른 재난 소식이 들립니다. 어떤 관측자들은 우리가 지금 세계 3차 대전의 시초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런 해결책이 없으며 모든 것을 두루 통찰하는 관리체계가 없기 때문에 만사가 소용돌이쳐 혼돈으로 치닫는다고 확신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반복해서 기억하게 하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의 지식과 통치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2:28). 마찬가지로, 이사야 선지자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34:1).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시오, 나라들이여, 내게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세상의 창조자에 대해 중요한 말을 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라들과 그들의 군대에 대하여 불일 듯 할 때, 주님 자신이 그들을 몰살당하도록 넘겨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여기느니라......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40:15,17,22,25).


이사야는 그리고 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상하고 곤고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는 조언합니다.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영광스러운 하늘을.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뭇 별들을 보십시오. 당신의 하나님이 지으시고 각각 이름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저 별들보다 더욱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는 하늘에 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역사를 진행하실 개요를 계획해 놓으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태초부터 종말을 알고 계십니다. 이 계획이 결실하게 될 때,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모든 와중에 주님의 눈은 어디를 주목하고 계실까?” 하나님의 눈은 이 세상의 양철조각 우상같은 독재자들이나 그들의 위협에 주목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폭군들의 폭탄이나 군대나 권력이 주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그분은 그들이 그저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고 비웃으시고 곧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40:23-24참조).

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나는 헛되이 수고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루신 것이 없다는 느낌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알면 놀라시겠습니까?


이사야 49: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이 말은 이사야의 말이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성숙한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오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49:1,5)에서 묘사된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분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미 수없이 읽었던 이 구절에 부딪쳤을 때 나는 의아했습니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라는 말은 지금 막 아버지께서“너는 나의 종이요...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자라고 선포하신 것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대답을 읽게 됩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49:4).


이것을 읽고 난 후 나는 서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이 당면하는 것을 체험하며 아버지께 고백하시는 이토록 취약한 분이시었다니 믿을 수 가 없다. 그분은 인성을 가지시고 똑같은 좌절, 똑같은 낙심, 똑같은 상처를 맛보셨다. 그분은 내가 내 자신의 인생에서 가졌던 생각들 - ‘내 생각에는 이러한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내 힘을 낭비해 버렸구나, 모두가 헛수고였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이 말씀들을 읽으며 나는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히브리서 4:15이 단순히 진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진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 그분도 바로 이와 똑같은 사탄의 시험을 알고 계시고, 똑같이 참소하는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너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네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네 모든 수고한 것의 열매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부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예수님이나, 또는 하나님의 사람 어느 누구나, 왜 “헛되이 수고하였다” 같은 절망적인 말을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세대에 걸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듯 낙담스런 말이 나오도록 위축되어 버렸을까요? 그것은 모두 높은 기대치에 반하여 작은 성과를 측정한 결과입니다.


당신은 아마 “이 메시지는 사역자들이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나 성경의 선지자들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본다.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거대하고 공통된 목적, 하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과 한 치도 틀림없는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

이사야 49장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투쟁을 알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당신에 앞서 싸웠습니다. 당신의 수고가 헛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견디는 것이나, 산산 조각난 기대 때문에 실패감으로 낙담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몸소 체험 하셨고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지옥으로부터 난 거짓말이 당신의 영혼을 곪게하고 불사르게 내버려두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그러한 좌절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49:4). (이탤릭체 저자 임의 사용) 여기서 판단이란 말의 히브리 원어 의미는 “판결”입니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마지막 판결은 나의 아버지께 달려있다. 내가 행한 모든 것과 내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에 대해 그분만이 판단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나를 대신해서 네가 한일에 대해 판결 내리는 일을 멈추어라. 네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판단하는 것은 네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너는 네 자신을 실패자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너는 아직 네가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알지도 못한다. 너는 네게 다가오고 있는 복을 알아보는 눈이 전혀 없단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영원 속에서 그분 앞에 서기까지는 이런 무수히 많은 일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49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 이스라엘은 아직 모아지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지파들을 모아들이라고 너를 불렀고 그 일은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부름은 네게 다가오고 있는 일에 비하면 단지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가 비장해두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온 세상을 위한 빛으로 만들 것이다. 너는 온 지구상에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45:5-6 참조).


마귀가 당신에게 당신이 헛수고를 하였다고, 당신의 기대가 충족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영광 중에 더욱 큰 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 또는 구하는 것을 너머 더 나은 것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대적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성령께서 우리가 좀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그 안에서 안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절망으로부터 일어나 이 말씀위에 서야 합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나에게 너의 모든 내일을 맡겨라

주님은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믿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한사람을 택하셔서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일어나 가기를 원한다. 모든 것, 너의 집, 네 친척, 네 나라조차도 뒤로하라. 나는 너를 어떤 곳으로 보내기 원한다. 가는 도중에 그곳으로 가는 길을 인도해 줄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주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왜 하나님은 온 나라들을 뒤져 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부르셔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도도 없이, 방향도 예상 못하고, 목적지도 모른 채 여행길에 오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어떻게 먹이고 필요를 채우실지 결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멀리 가야하는지 또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지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애초에 두 가지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그리고 “내가 길을 보여 주겠다”.


요점만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늘 이후로, 나는 네가 너의 모든 내일들을 내게 맡기기를 원한다. 너는 네 남은 생애 동안 너의 미래를 한 번에 하루씩 내손에 맡기고 살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너에게 한 언약에 너의 생애를 의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것을 행하겠다고 결단하면 내가 너에게 복주고 네가 상상해 본적이 없는 곳으로 너를 안내하고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도하여 가시고자 하는 곳은 그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을 데리고 가기 원하시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학자들이 “모형 인간” 부르는, 즉 주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하는지 그 예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 결단으로 부르셨을 때 그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의 가족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계획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의 경중을 달아보며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에 대해 염려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우리의 모든 내일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라는 똑같은 부르심에 청종하였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009년 10월 23일 금요일

아버지께서 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며 우리의 미래를 전부 그분의 손에 맡기는 삶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6:31-14).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미리 계획을 세우지 말라거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일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내일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짧은 단어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만일.


“만일 경제가 악화되어 해고당하면 어떡하나? 집 대출금을 어떻게 갚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까? 만일 건강 보험을 잃게 되면 어떡하나? 내가 병들거나 입원하게 되면 우리는 파산할 텐데.” 또는 “만일 고난이 닥쳐올 때 내가 믿음을 저버리면 어쩌나?” 우리 모두는 수천가지 “만일”로 인해 근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만일”을 중단시키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너희를 돌보실지 알고 계신다.” 더 나아가 “너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너희 아버지께서 네가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너를 절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신실하게 너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너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6:26, 28-30).


우리는 과거 우리가 지은 죄들을 주님께 넘겨드림으로 즐거이 우리의 모든 어제를 그분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지난날 실패들, 의심들, 두려움들을 용서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꿈을 붙들고 있을 권리를 원하면서 우리 미래에 굳게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져서 계획을 세우고는 후에 그 희망과 욕망을 축복하고 이루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2009년 10월 22일 목요일

평강과 안전

나는 다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로 부터 표류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나태해지고, 영적으로 태만해지며, 기도없는 삶에 휩쓸리고, 며칠 씩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 지낸다고 생각하면 몸이 떨립니다. 나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 악한 표류의 “영적 쓰나미”를 목격했습니다. 교단들 전체가 무감각이라는 폐허를 흔적으로 남기고 지나가는 이 쓰나미의 물결에 휩싸여버렸습니다. 성경은 신실한 신자들도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할 수 있다고 명백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평강과 안전을 추구하고 그저 구원에만 매달려있는 크리스천은 비싼 영적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하거나 그토록 위대한 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그 방법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1).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빨리 속독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루에 많은 장을 읽는다든지, 또는 성경을 빨리 통독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뿌듯한 성취감을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읽은 것을 영적인 귀를 열고 “듣는” 것이고, 그것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마음가운데에 “들리게”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부동하게 머물러 있는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1)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바울은 이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들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서 당신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영적 재고 조사를 해 보십시오. 당신은 예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알기에 당신이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분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셨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구속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당신과 그리스도의 교제는 어떠합니까? 당신은 아주 근면하게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까? 당신의 어려운 때에 그분에게 기대고 있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내 삶에서 조금씩 표류하는 것이 보입니다. 졸음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점점 기도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정도에서 어긋났습니다.”라고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구원자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하사...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벧후2:4-9).


이러한 예들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안위하기위하여 명백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내 동정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두 개의 예를 보여주었다. 세상을 삼켜버리는 홍수가운데서도 내가 의로운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다면... 또한 너도 구해 낼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기적적으로 탈출 할 길을 내지 못하겠느냐?


“내가 단번에 도시 전체를 태워버릴 불과 유황의 심판을 내릴 수 있다면, 또 그 혼란 속으로 천사를 보내어 롯과 그의 딸들을 구해 낼 수 있다면...네 시련가운데서 너를 구원하도록 천사를 보내지 못하겠느냐?


의로운 사람을 위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불같은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그의 대적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또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시련에서 구하시기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들이 굶주려 죽지 않도록 기적의 떡과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홍수로부터 노아를 구하시기 위해 방주를 짓게 하시고, 불로 멸망당하지 않도록 롯을 천사로 호위하여 구해내셨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 법을 아시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한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는 단순하게 “하나님이 이미 계획을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진리는, 우리가 그분께 부르짖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이미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깔고 앉아계시지 앉습니다. 다만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일생의 가장 힘든 고난에 얽혀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내실 것인가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쓰인 예레미아 29장에서 보게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었던 가장 어려운 고난 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칠십년이 지나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to give you an expected end(KJV)}(29:11) 마지막 구절은 문자 그대로 “네가 기대 하던 것을 주리라”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되도록 계속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2009년 10월 20일 화요일

가만히 서서 알라

1958, 나는 일곱 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한 절름발이 소년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는 뉴스를 접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령이 내안에서 너무도 강력하게 감동하셨기에 나는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뉴욕 법정으로 가야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아이들에게 말하라고 나를 충동하신다고 확신하며 법정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날의 공판이 끝나갈 무렵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소년들은 쇠고랑을 차고 옆문으로 인도되어 나갈 것이고 나는 그들을 다시 못 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소년들이 감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기위해 판사석을 향하여 통로를 걸어갔습니다.


그 즉시 경찰들이 나에게 달려들어서 다짜고짜 법정 밖으로 나를 호위해 나갔습니다. 나의 사방에서 온통 플래시가 터지고 나는 이 재판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질문에 둘러 쌓였습니다. 이러한 모욕적이고 민망한 상황에 나는 완전히 멍하여져서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고향의 내 교회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 나는 너무 순진했었다,” 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혼란 가운데, 나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이 나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물론, 취재진들이 내가 보기보다 더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나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므로 이미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습니다.) 소리를 내어 크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하나님은 이 불쌍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늘 나의 침묵의 부르짖음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 법정에서의 민망스런 바로 그 장면으로부터 십대 청소년을 위한 Teen Challenge 사역이 태동하여 오늘날 전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기쁘게 시편 34편에 나오는 다윗의 겸허한 증언을 같이 나눕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듣고 기뻐하리로다” (34:2).


요점을 말하면 다윗은 여기서 “나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대대로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겸손한 백성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주님은 그분께 부르짖고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아주 바보스럽게 행동 하였을지라도 그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긍휼과 사랑으로 나를 구원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복된 주님은 큰소리든, 소리를 내지 않든, 모든 신실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리석게 행동하였거나 엄청난 믿음의 실패를 했다 할지라도 다만 당신의 구원자에게 돌아와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은 신실하게 당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행하십니다.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우리의 믿음 “고정하기”

사람들이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설교들을 들었고, 많은 책을 읽었지만 주위에서 난파한 믿음의 예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믿음과 맺어졌던 크리스천들도 그들의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소망을 갖기 위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성령은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믿음의 닻을 내려라.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마음을 고정하라.

 

우리의 믿음을 “고정” 한다는 것은 “안정시키다, 흔들리지 않도록 하다, 뿌리를 내리다, 기둥으로 받치다, 기초를 놓다”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썼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1:6-7).

 

이 구절에서, 주님은 전적인 책임을 믿는 자에게 두고 계십니다. 요점을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즘 같이 두려움에 떨고 불안한 시기에 세상이 내 백성을 볼 때, 그들이 믿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믿음은 굳건하고 뒤흔들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여, 너는 믿음의 닻을 내려라. 바로 너. 크리스천들아 자리를 고정하고 절대로 그 자리를 저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이 믿음에 대한 설교를 더 필요로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남녀들의 삶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들이 직면하는 것과 같은 재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헤쳐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제 서야 죄인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강력한 증언과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31:19)라는 말로 이것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암흑가운데 있는 자에게 소망의 빛이 되는 강한 신뢰와 신실한 삶을 사는 믿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모든 짐과 시련을 그리스도께 가져오며, 그분 발아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 안에서 안식할 때, 당신은 극심하게 시험받을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인내하는 믿음을 고정시키는 과정에 있을 때, 내가 진정으로 내 모든 짐을 주님께 내려놓았을 때, 나는 전화로 들려온 한 소식에 뒤흔들렸었습니다. 잠시 동안 공포의 홍수가 나를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믿음의 자리를 지켜라. 포기하지 마라. 내가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다. 그저 움직이지 말고 서있어라.” 그 순간 나에게 물밀듯 밀려왔던 평강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날이 저물 무렵, “나는 당신을 신뢰했습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깨달으며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것 배우기

나에게는 이것이 용서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는 우리 주님의 은혜를 신속히 제공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에게는 빈약하게 나누어 줍니다.

 

다윗 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간음하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 남편을 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다윗은 회개하였고 주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8,12).

 

다윗은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요? 이 사람은 주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을 통해 화평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책에서 당신의 죄가 지워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당신의 양심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다윗은 그의 양심이 자기 죄로 인하여 자신을 정죄하는 것을 멈추도록 하기위해 이 시편을 썼습니다. 아울러 다윗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함에 기인한 벌을 견디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벌이 바로 기쁨의 상실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므로 맺어지는 열매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나는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테일러는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선교사 중 한사람이며, 경건한 기도의 사람으로 중국의 광대한 내지를 총망라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수년간 기쁨 없이 사역했습니다. 그는 은밀한 동경과 불신의 생각들로 고통을 겪으며 자신의 고투로 인해 좌절 했습니다.

 

1869, 테일러는 혁명적인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눈물이나 회개 그 어느 것으로도 그분 안에 있는 복을 개봉할 수 없었습니다. 테일러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을 통하는 오직 한 길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맺은 모든 약속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테일러는 믿음을 분발시키기로 결단했지만 그 노력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가장 암담했던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믿음은 수고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위에 안식함으로써 오는 것임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든 복들에 접속되는 비법입니다.

 

테일러는 그리스도가 이미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고 말씀하셨던 죄에 대해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들 위에 안식하였기에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염려들을 주님께 넘겨드리며 즐거운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시기와 질투의 씨앗들

우리 안에는 누구나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 누가 그것을 시인 할것인가 입니다.

 

토마스 맨톤이라는 청교도 설교자는 시기와 질투하는 인간 성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유와 더불어 마셨습니다.

그것은 이토록 깊이 박혀있는 우리의 일부분입니다.

 

이러한 죄의 씨앗들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사역이나 일들의 성취 그리고 축복을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와 우리의 형제자매들 사이에 강한 장벽이 세워집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27:4).

 

야고보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3:14)

 

쉽게 말해서 이 시기와 질투의 죄는 맹독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있으면 우리로 영적 권위를 상실하도록 할 뿐 아니라 악령들의 역사에 우리들을 노출 시킵니다.

 

전 성경을 통틀어 사울 왕이 이에 대해 가장 명백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서 다윗은 블레셋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에서 돌아옵니다. 그와 사울 왕이 예루살렘으로 말을 타고 들어올 때 이스라엘 여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다윗의 승리를 축하하려고 왔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 왕은 이 즐거운 축하연에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삼상18:8)

 

그 즉시 사울 왕은 시기와 질투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그에게 끼친 치명적인 결과를 봅니다.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 18:9)(시기하였더라) 비극적으로 이후부터 “사울이...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삼상 18:29)

 

사울 왕은 질투에 온전히 미혹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자신을 겸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기를 시인하고 마음에서 뽑아내어 버렸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기름 부은 종에게 영예를 더하여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가장 낮은 자리로 자신을 끌어내릴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시기의 영에 이끌리어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일어난 일은 우리 모두를 거룩한 두려움에 싸일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 18:10-12).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서로 용납하기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저자 임의 강조).

 

용납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두 개의 개별적인 문제입니다. 용납하는 것은 보복하고자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을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당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고통을 견뎌내십시오. 문제를 내려놓고 내버려두십시오.

 

헌데, 용납하는 것은 단지 신약에 나오는 개념이 아닙니다. 잠언서는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24:29)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우리는 이 훈계의 강력한 일례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나발이라는 사악한 자를 향하여 보복심에 불타 진노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움이 필요할 때 나발이 다윗을 돕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보복하기로 맹세하였으나 하나님의 충고에 순종하였습니다. “네 손으로 보복하지 말라....여호와가 네 싸움을 싸우도록 하라” 이 상황은 시의 적절하게 해결되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을 찬양하였습니다. (삼상 25장 전문 참조)

 

다윗은 또 한 번 손쉽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자신을 뒤쫓던 사울 왕이 다윗이 숨어있던 굴에서 잠이 든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이 사울 왕을 당신의 손에 붙였습니다. 이제 그를 죽여 당신의 원수를 갚으십시오,”라고 그를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았습니다. 대신 사울왕의 옷자락을 베어 훗날 자신이 그를 죽일 수도 있었으나 그리하지 않았음을 증명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명한 행동들이 우리의 적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그 옷자락을 보여주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사울왕은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제 용서하는 일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용서 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계명을 품고 있습니다. 첫째, 네 원수들을 사랑하라 그리고 둘째,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어느 나이 많고 지혜로운 설교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으면 당신은 나머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 말이 참된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일이 쉬울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네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명령 하셨을 때 “사랑”이란 말의 헬라어는 “애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이해”를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을 제거해버리는 도덕적 결단의 문제인 것입니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 됩니다

요한복음 15 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은 내가 나의 배우자와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련된 것 입니다. 미혼인 사람들은 룸메이트, 동료 크리스천,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요 사역자가 되려면 나의 아내는 하늘과 지옥과 온 세상 앞에서 정직하게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남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합니다. 실수를 하긴 하지만 점점 더 인내하고 나를 이해합니다.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마음을 써줍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기도합니다. 그는 가짜가 아닙니다. 그가 하는 설교의 바로 그 실체입니다.

 

그러나 내 아내의 증언이 이러하지 않다면-만약 내 아내가 “내 남편은 본인이 그런 체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가슴에 비밀스런 고통이 있다면-내 인생의 모든 것은 허사 입니다. 나의 모든 사역들-설교, 성취한 일들, 자선 단체에 기부한 일, 그 많은 여행들-모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열매를 맺지 않는 시들고 쓸모없는 나뭇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 안에서 죽음을 보게 하실 것이며 그분의 왕국을 위해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한 중년 목사와 그의 아내가 마음이 상하여 울며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데이브 형제여, 나는 하나님과 내 아내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간음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나에게 고백하며 경건한 슬픔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나를 향하여 나직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는 내게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나는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아름다운 치유가 시작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의 실패를 결코 만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은 해충이 파괴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결혼 생활을 누리는 모든 부부가 일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진실을 이야기 했으면 합니다. 결혼 생활은 크리스천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매일 매일 노력해야 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길처럼 당신의 권리를 매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 할 필요도 없이, 사탄은 당신의 마음이 가정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시련을 가져올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학교보다 더 어렵고 혹독한 학교는 없습니다. 결코 졸업하는 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백히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 우리의 모든 시험들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요, 바로 정상이라고. 우리가 이곳에서 어긋나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다른 사람 사랑하기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 여정에서 내가 알기로 주님께 자신이 온전히 드려진 귀한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는 순간 내 가슴은 고동칩니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없었을 지라도 성령께서 그분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하다고 증거 해주십니다.

 

나는 아직도 그분 중 몇몇 얼굴들이 기억납니다. 목사님들, 주교님들, 가난한 거리의 전도자들. 그분들을 만났던 순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어도 “이 분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이 여자 분은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들과 인사하며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말을 합니다. “형제님, 자매님, 당신에게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스도 닮기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즉 내가 우리 가족외의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 우리를 멸시하며 이용하는 사람, 우리를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과 같은 우리의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이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책도 없고 정해진 원칙도 없으며 어떠한 인간의 지식의 양으로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점점 성장하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교회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나의 얼굴에 침 뱉는 무슬림사람을 내가 어떻게 사랑합니까? 인터넷 싸이트를 운영하면서 나를 거짓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사랑합니까? “예수는 동성연애자” 라고 쓰인 간판을 들고 뉴욕 시내 5번가를 행진하는 동성연애자들을 내가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어떻게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합니까? 내 자신의 능력으로는 다른 크리스천을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이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17:26)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을 넣어주시기를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모든 방법을 성실하게 모아서 당신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16:15) 진실로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더욱 더 보여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성전인 우리 몸에 거하시는 이유입니다.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14:17, 26)

2009년 9월 9일 수요일

하나님만 아시는 길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The steps of a good man are ordered by the Lord. KJV)(37:23) 이 구절에서 ordered 히브리어 의미는 “정해진, 또는 미리 계획된”입니다. 하나님은 하루 일정표를 가지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루, 일주일, 또는 일 년 앞서서 우리의 길을 계획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믿는 자의 전 생애에 걸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 그 계획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미리 계획된 길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14:6). 그리스도 자신이 영광과 영생에 이르는 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은 천국에서 그분의 품안에서 끝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2:10)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어떤 특정한 길을 택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남은 여정이 어떠할 지 확신 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께 만 알려져 있는 길입니다. 내 인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칠십 여 년 동안 영광으로 향하는 노중에 있습니다. 그 노상에서 하나님은 목적들도 주시고 꿈과 비전도 주셔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에게 전 노정의 윤곽을 그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실인즉, 이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내일 이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야곱이 나이 들었을 때, 바로 왕에게 그의 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여기서 “험악한”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재난들, 고통들, 슬픔들, 환난들, 역경들을 의미합니다.

 

나는 야곱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순례 길에서 어떤 시기는 다시 살고 싶지 않은 기간이 있습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복과 기적들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살아오는 동안 내 안에 지어주신 믿음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내 인생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면, 나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길은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2009년 9월 8일 화요일

마음을 쏟아 부으라

다음 말씀은 기도의 응답이 필요한 사람, 고난의 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고 또 그렇게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선, 시편46:1에 있는 이 언약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a very present help)very present라는 구절은 “항상 이용 가능한, 즉각적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밤이나 낮이나 모든 시간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확신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 안에 거처를 정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기도의 생각과 부르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들으시면 우리의 요청들을 허락해주실 것을 압니다. 성령은,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그분의 존전에서 시간을 드려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하늘과 땅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다음은, 시편62:5-7을 읽고 믿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만 기다리십시오. 다른 어떤 공급원으로 부터의 도움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분만이 당신의 공급원, 당신의 유일한 소망 그리고 방어막이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당신의 응답이 올 때 까지 당신이 살아갈 힘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주님 한분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을 때 - 사람의 도움을 받고자 하기를 그치고 초자연적인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때 - 아무것도 당신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당신을 절망으로 격동하게 만들 수 없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선포하였습니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 하리로다”(62:6).

 

그 다음이 바로 모든 것의 핵심으로서, 모든 시대의 온 성도들이 배웠던 극복하는 기도의 비밀입니다 - 주님 앞에서 마음을 쏟아 붓는 것.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62:8) 하나님은 당신이 기꺼이 잠시 동안 모든 수단을 닫아버리고 그분 앞에서 당신의 마음을 부르짖고, 마음을 쏟아 부으며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을 보실 때 당신을 들으시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슬기로운 처녀가 되기 위하여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25:1-2)

 

당신이 정직하다면, 그분의 말씀에 동의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 비유는 나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게을러졌습니다. 미련한 처녀가 되어 표류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준비되어 있기를 원합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되기 원한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간단한 것이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1. 그리스도를 당신의 생각하는 삶의 중심으로 삼으십시오. 주님이 당신의 모든 생각 가운데 있도록 하십시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분의 이름을 속삭이십시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생각 속에서 그분을 부르십시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4:8) 이 구절 말씀이 온종일 당신이 드리는 간단한 기도의 기초가 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 당신은 참되시고, 정직하시고, 옳으시고, 정결하시고, 사랑스러우십니다. 당신은 나의 복음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주께서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고전3:20)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생각을 기록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생각할 때 마다 아십니다. 그러니 그분께 당신의 모든 감사하는 생각들을 드리십시오.

 

2. 온종일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단순한 기도가 당신의 등불을 위한 기름입니다. 이렇게 매일 기도하는 것이 주님을 만나기를 예비하기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질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당신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미약한 선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당신이 보시기에는 모두 더러운 걸레와 같습니다. 나는 나의 선행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신 앞에 겸손하게 나옵니다. 주님,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2009년 9월 4일 금요일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을 잡수시기위해 초청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집주인과 마찬가지로 율법사들의 지도자인 다른 바리새인들도 초청받았습니다.

 

집주인이 그의 손님들을 자리에 앉으라고 불렀을 때 갑자기 귀빈석의 제일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광경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높은 자리 들을 택하였는가 주목하셨다고 말씀합니다. (14:7) 그것은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고자하는 자존심을 철면피처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잡수시러 앉았을 때 그분은 방안 가득 들어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이 말씀으로 꾸짖으셨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8-11) (저자 임의 강조)

 

이 장면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있었던 청중을 염두에 두셨기에 특정한 타입의 지도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외식으로 길게 기도...(20:46-47)하는 자들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는 단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 받기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자신들을 위해 나팔을 불어댑니다. 이것은 사역자들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실 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셨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은 “더 높은 곳으로 오라”고 우리 모두를 의로운 존귀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이 “더 높은 곳으로 오라”는 부름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의 충만함 가운데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풍성하고 친밀한 교제로의 부름이며 더 설득력 있으며, 확신에 찬, 의로운 주님의 신탁으로의 초청입니다

2009년 9월 3일 목요일

좋은 증거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2) {By their faith...the elders obtained a good report KJV}

 

희랍어로 여기서 “얻었다”는 말은 “증인이 되다, 증거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 있었던 우리의 조상들은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고, 고정된 믿음을 소유하였었고 그것은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첫째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신다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홍수들, 조롱, 속박, 투옥, 고문, 전쟁, 사자들의 굴, 불을 통과하며 그분을 신뢰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들 후에 그들은 그들에게 미소 지으시며 “잘하였다. 너희는 나를 믿고 신뢰 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기쁨을 알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며 믿음자리를 지킬 때 마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똑같은 확언을 듣습니다. “잘하였다. 너희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내가 폭풍을 통과하며 안식할 수 있을 때, 나의 모든 짐을 그리스도께 내려놓고 나의 믿음자리를 지킬 때 나는 좋은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망의 횃불이 되어 갑니다. 내 집이나, 직장,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에게도 소망과 구원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위기의 때에 나를 보고 그들은 “소망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건재해 있다.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자가 있다. 그는 그의 하나님을 신뢰 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재난이 더 빈번해지고, 세상이 심한 절망에 빠질 때에, 믿는 자의 반응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증언이어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거하고 계시고, 우리는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은 자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 할 수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완전 무장하고 “나는 내 마음을 작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육의 의심과 두려움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뒤로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토라지거나, 조바심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을 것 이다”라고 결단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럼에도, 종종 불신으로 인해 승리를 빼앗겼습니다.

 

나는 아직도 믿음을 고정시키는 일에 대해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든 것에 주님을 신뢰했을 때,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께 내 모든 짐을 내려 놓고 안식하며 나의 길을 갔을 때, 찾아온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2009년 9월 2일 수요일

죄인들의 친구

누가복음 7장은 예수님과 식사하기 위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도대체 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는지, 더군다나 그분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서 다른 철저한 종교인들을 같이 초대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시몬과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선지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했거나 또는 실상은, 선지자인 그분을 폄하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 구절은 시몬은 예수님의 선지자로서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7:39)

 

성경은 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말씀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신학적인 이야기일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에 정통한 사람들이고 다른 경우에도 교묘한 질문으로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아셨고 그것은 곧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다음 우리는 “죄를 지은” 거리의 여인이 불청객으로 등장하는 것을 읽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 여자를 돌아보시...” 었다고 말씀합니다. (7:44) 여기서 보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어야만 하는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거짓 종교나 거짓 교사가 아닌, 죄인들에게 맞추어져야만 합니다.

 

시몬과 그의 손님들로부터 눈을 돌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7:47,50) 예수님은 여기서 왜 그분이 오셨는지 계시해주십니다. 타락한자, 친구가 없는 자, 죄에 빠진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사역의 모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초점이 고정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회복시키고 그들의 치욕을 벗겨주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는 기꺼이 죄인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이것을 바로 진정한 영성의 시금석으로 세웠습니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희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6:1) 바울은 그리고 나서 곧 덧붙여 그리스도의 길을 교훈하였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신뢰하라

어찌하여, , 당신이 고통스러운지 따져보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상황은 전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옳은지 그른지는 이 시점에서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기꺼이 하나님 안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당신의 인생에 신비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입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아마도 당신은 당신의 할 바를 다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였고, 정직하게 당신의 마음을 따랐으며, 기꺼이 당신을 드렸을 것입니다. 당신의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저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은 정직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의 모든 과정을 인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왜 당신의 면전에서 산산조각 부서져 내리는지 당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마음으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 일이 절대로 잘 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셨다면 왜 하나님은 애초에 내가 이일에 관여하도록 내버려두셨단 말인가?” 주님은 유다도 부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는 구주께서 손수 발탁하셨고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렸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출발했던 일이 유다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재난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당신의 죄의식을 털어버리십시오. 자신을 저주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가 입니다. 당신은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단지 당신이 너무 지나치게 쏟아 부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처럼 당신도 이렇게 말하여야 합니다.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12:15)

2009년 8월 31일 월요일

그분의 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구하는 요청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17:7-8, 10).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분의 종들인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주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양식을 공급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궁금할지 모릅니다. “주님께 우리가 어떤 음식을 갖다드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분의 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11:6) 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가장 즐기시는 음식은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양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단지 말씀만 하셔서 그의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구하였을 때 그리스도는 그의 생동적인 믿음으로 진수성찬을 드셨습니다.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8:10).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이방인, 이 외인이 내 영을 먹이고 있다. 이 사람의 믿음은 내게 얼마나 영양분 있는 음식인가.

 

나는 예수님의 말씀가운데서 직설적인 선언을 감지했습니다. “네가 먼저 먹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먹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필요를 위해서 믿음을 소모해 버리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주님의 주림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라,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예수님의 말씀 다루기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6:12)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하여금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계시를 원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렇지만 너희가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준 것들에 대해 신뢰할 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너희에게 그러한 믿음을 맡길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준 것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전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듯이 보였습니다.

 

주님이 ‘남의 것’(16:12) 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분은 자신의 피 값으로 산 우리의 몸과 영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Ye are bought with a price; therefore glorify God in your body and in your spirit, which are God's. KJV.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몸은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 만일 네가 그 몸을 돌보지 않는다면-만일 네가 나로 하여금 네 안을 들여다보고 네 죄를 다루고 너를 성화시키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너에게 더욱 큰 것을 맡기리라고 기대할 수 있느냐?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구하였고 그들에게 주님은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17:6)

 

예수님은 이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나는 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뿌리들을 뽑아내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뿌리들, 그분을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가 처리해야만 하는 은밀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산들을 움직이신다고 믿을 수 있게 되려면 먼저 너는 뿌리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위대한 사도의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최소한의 믿음만 있으면 된다. 나는 네게 가장 기초적인 것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죄의 뿌리들을 뽑아내라는 것이다. 네 마음을 점검해보고 나를 닮지 않은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한다.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날로 더하는 믿음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맏음을 더하소서 하니” ( 17:5). 그리스도 주변에 가까이 있던 자들이 그들의 주께 중요한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더 깊이 깨닫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 대해 계시해 주십시오.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최대한 파악하기 원합니다.

 

표면상으로 그들의 요청은 칭찬 할 만해 보입니다. 하지만 나는 사도들이 예수님께 이 요청을 한 것은 그들이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앞 장에서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6: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육이 사소한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작은 일에 충성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기초적인 일이며, 더욱 큰일에도 충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본 요건에 비춰 자신이 신뢰할 만한지 증명해 보여라.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더 한층 깊은 척도에 견주어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느냐?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사도들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시인할 것입니다. 우리도 산을 움직이는 믿음과 같은 것을 얻고자 하여 곧장 큰 믿음의 문제들을 향해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처럼 종종 눈에 보이는 결과들로 믿음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믿음은 당신이 성취하려고 목표한 일의 양이나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 인생의 초점과 방향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비전에 관여하신다기보다는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위하여 세상 전부를 얻는 것 보다 나의 전부를 얻으시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2009년 8월 26일 수요일

질그릇

성경 말씀 중 가장 격려가 되는 말씀 중 하나가 바로 고린도후서 4:7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는 이어 이러한 질그릇을 죽어가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답답한 일을 당하는, 박해를 당하는,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버림을 당하거나 낙심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육신의 무게아래서 신음해왔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덧입혀지기를 갈망하면서.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을 조롱하십니다. 그분은 선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노력을 비웃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높은 자나 강한 자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 세상에서 약한 것을 들어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페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세상에! 그 말씀이 얼마나 나를 묘사하는 것인지요! 약한 것! 미련한 것! 멸시 받는 것! 천한 것! 문벌이 좋지 않은 것! 그리 똑똑하지 못한 자! 능하지 못한 자! 이러한 자를 하나님이 사용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정신 나간 일인가요! 하지만 그것이 그분의 완전한 계획이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해도 우리의 약함 가운데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은 이러한 질그릇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담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내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연약한 자들을 통해서 그분의 목표를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연약하였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였고 자신의 아내를 간음한 여인으로 만들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