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일 금요일

죽음 직전의 상태

마가복음 5장에서는 절박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딸을 고쳐달라고 구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12살 소녀는 죽음 직전에 있는 상태였고, 회당장은 예수님께 그의 집에 와서 딸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가는 길에 예수님은 혈루병을 앓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고 고침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서두르셨지만,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회당장에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마가복음 5:35).

회당장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늦지만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이젠 너무 늦었구나. 딸이 죽었구나.”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5:36).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울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회당장의 가족과 이웃들이 죽은 소녀를 인하여 비통해 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의 대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 이 세상의 창조주,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소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통곡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의 소망이 남아 있을 때만 구원해 주실 수 있구나. 생명이 모두 사라졌을때는 하나님을 더 이상 구할 필요가 없구나.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도 구원하지 못하시는 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어려움으로 절망에 빠져,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느 지점까지만 또는 삶의 무언가의 생명이 다할 때 까지만 믿습니다. 저는 그저 사람의 목숨만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면 결혼생활, 가정, 꿈, 구원의 소망 등의 생명이 다하였을 때, 즉 삶에서 직면하는 해결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불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에서 통곡하는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5:39). 예수님은 우리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생각하는 정도의 상황이 아니다. 너희는 소망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구원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마가복음 5:40-42)

이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께서 고치시기에 너무 죽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어려운 문제에 관하여 나에게 완전한 믿음을 가지거라. 내가 너를 구원하기에 너무 늦은 시기는 없단다.”

2014년 7월 31일 목요일

하나님께서 해결 못하시는 문제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어느 심란한 아버지가 마귀에 사로잡힌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구원을 소망하며 데리고 왔습니다. 이 아이는 단순히 문제가 많거나 반항적인 것이 아니라 악한 영으로 가득하고, 악한 영이 그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쌍한 아이는 완전히 절망적이라고 모두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청각 장애와 동시에 말을 하지 못하여 목 뒤에서 나올법한 소리만 뱉어내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계속 붙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끊임없이 아이를 강, 호수 또는 타오르는 불에 던져버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자살하지 않게 하는 것 만으로도 아주 힘들고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하는 일이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주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제자들 앞으로 아들을 내어왔을 때, 사탄은 아들을 통하여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땅에서 뒤틀며, 회전하며 뒹굴기 시작하였습니다.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아들을 놓고 기도를 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머지 않아 의심을 품은 서기관들이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왜 치유받지 못하는 것인가? 너희의 하나님에게 이 문제는 해결하기 너무 어려운 문제인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마귀가 더 강한 것인가?”

이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마가복음 9:18).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그리고는 예수님은 한 마디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9:25). 그때에 아이는 죽은 듯 땅에 쓰러졌습니다.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9:27)

이 장면에서 얼마나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있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깨끗함 받고 자유함 받은 아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고, 아버지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마가에게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쓰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 이야기는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 자녀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능치 못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도 복구가능하고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있단다. 네가 그저 믿기만 한다면 나를 통하여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2014년 7월 30일 수요일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그저 창조주로만 알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아예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 생각에는, 아무리 상담을 많이 받아도 기적의 하나님을 의심한다면 삶에서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크리스천 상담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상담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자로서 상담을 하곤 하는데,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부부가 하나님께서 가정을 구원해주실 것을 믿지 못하면 저는 부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으로 보이고, 수년 동안 쌓인 후회와 분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부부들에게 저는 이렇게 먼저 말합니다 “네. 상담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정과 결혼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당신의 눈에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도 복구하시고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누가복음 18:27).

미국에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가정과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의 제 친구이자 목회자인 지인들도 이혼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저는 그들이 가정과 결혼생활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크리스천 배우자들이 이미 포기하고 가정을 떠날 결정을 한 상태에서 저를 찾아와 결혼생활과 가정에 관하여 상담을 요청합니다. 그들이 저를 찾아온 이유는 이미 마음으로 선택한 결정에 대하여 저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지 못하면 이 세상 그 어떤 상담가도 당신의 어려움에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한다면, 당신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까지만 믿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14년 7월 29일 화요일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창세기 속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은 장막 앞에 앉아 있는 중에 나무 아래 서있는 세 명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사람을 영접하며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들의 대화 중에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가 어디있는지 묻고는 믿기 힘든 말을 했습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창세기 18:10)

그때에 사라는 장막 안에 있었는데, 사라가 이 대화를 들었을 때 웃었습니다. 그녀는 “말도 안돼,” 라고 생각 했겠지요. 그녀는 이미 가임 가능한 연령이 지난 상태였고 아브라함도 아이를 갖기에 너무 많은 나이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세기 18:13-14).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삶에서 어려운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려움 중에서 질문하십니다. “너의 문제가 내가 고치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네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내가 해결할 것이라고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누가복음 18:27).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결혼생활, 가정, 직장, 미래에 관하여 불가능한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격려를 쉽게 합니다. “앞을 바라보고 견디세요. 하나님을 계속 믿으세요.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정말 이러한 진리를 믿고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을 의심했지만, 그녀의 친구들에게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격려를 했을 것입니다. 사라의 입장에서, 그녀가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한 채 나이를 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옆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 격려를 했을 것 같습니까. 부부는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지만 육체적으로 점점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그들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라에게, 저 부부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녀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 부부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을 잃지 말고 기다리라고 전해주세요. 그들은 능치 못한 일이 없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라 자신은 능치 못한 일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담대하게 외치지만,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28일 월요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축복하기를 무척 좋아하십 by Gary Wilkerson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세기 26:12).

그 해는 두 번 째 기근이 있던 때였습니다. 이 전의 기근에서 남아있던 먼지가 아직도 있는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새 농작물을 심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삭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은 그 시기에 새로운 농작물을 심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였고 그 결과로 백배의 농작물을 거둬 들었습니다.

정말 많은 양이 아닙니까! 만약 우리 교회가 20퍼센트씩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또는 나의 재정상태가 20%씩 좋아진다면…… 여러분도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아시겠죠? 여러분 중에 결혼생활이 20%씩 개선되거나 자녀들이 20%씩 순종적으로 변화하거나 20%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십니까? 생각만해도 정말 좋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저 20%나 100%정도의 양이 아닌 백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이러한 복을 기근 중에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는 부분은 미국의 경제나 당신의 직장 또는 당신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필요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족해주실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축복을 이미 주셨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까다롭고 화내시며, 당신이 실수하기를 기다렸다가 주신 축복을 다시 가져가시는, 당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잘 들으면 선물을 주고 잘 안 들으면 선물을 주지 않는 산타클로스처럼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무척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삶 속에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이렇게 하거라. 그래도 나를 믿고 따르거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당신은 지금 부족한 자원으로 인하여 기근에 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영적 삶이 사막 중에 있다고 느끼거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증거하기에 부족하여 선교지로 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또한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행하기 위해 앞으로 갑니다. 그러면 항상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2014년 7월 26일 토요일

그분의 손이 더 큽니다 by Claude Houde

한 아이가 사탕 가게 바로 앞길에서 땅에 못 박힌 듯 서 있었습니다. 가게 안은 이 세상에서 최고급의, 그리고 가장 달콤한 초콜릿 과자들의 어마어마한 진열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커다란 눈으로 자기를 줄기차게 응시하고 있는 이 무일푼의 작은 소년을 모르는 채 하려고 부단히도 애쓰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긴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후, 마침내 가게주인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투덜대듯이 말했습니다. “예야, 내가 지나다니는 애들마다 다 쿠키하고 사탕을 줄 수는 없잖니! 이건 사업이고 나도 이걸로 먹고살아야 해!”

그러나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게주인은 더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마침내 단념하고는 그 아이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 영리한 소년은 번갯불보다도 더 빨리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가게 주인은 온갖 초콜릿 중에서도 가장 맛있는 (물론 제일 비싸기도 한) 초콜릿으로 가득 찬, 엄청나게도 큰 유리병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는 소년에게 손짓하며 “자, 좀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큰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가게주인은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가져가도 괜찮아. 원했잖아! 돈 안 내도 되!” 그러나 소년은 또다시 머리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이 착한 가게주인은 자기 손을 넣어서 이 아이에게 너무도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 한 움큼을 건네주었습니다! 

가게주인은 의아스럽다는 듯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왜 네가 직접 가져가지 않았니?” 이 영리한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요, 아저씨 손이 제 손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손은 우리 손보다 더 큽니다. 그분의 능력이면 충분합니다. 그분의 전지전능한 손이 우리의 떨리며 미약한 손을 잡으면 초자연적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분께서 저를 위해 준비해놓으신 것을 제 손으로 취하도록 허락하신 것도 바로 그분의 손이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마태복음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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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7월 25일 금요일

가족들만 남겨두고

“요셉이 자기 동생을 그리워하였으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자기 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울고는…” (창세기 43:30)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자의 마음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독이 된 후, 그의 형제들은 그의 집에 있었고 그가 보는 앞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따로 앉았으며 그들은 따로 차린 식탁에 앉았더라.” (32절) 그의 형제들은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그가 진실로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며, 사랑과 은혜의 계시 없이 요셉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계시를 받지 못한 채,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을 여전히 지닌 채, 주님의 임재 속에서 먹고 마시며 찬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 가서 노래하고 예배하며 찬양하고는, 늘 이러한 똑같은 거짓말로 되돌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상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아무 증거도 내게 보여주지 않아. 내 기도는 응답되지 않고 있어.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만큼 진정으로 나를 보살피지 않으셔.”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에게 온전한 사랑의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마지막 한 걸음을 더 내딛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계시는 상심하고 통회하는 자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희생물은 상한 영이라. 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요셉의 형제들은 아직 상심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을 때, 요셉은 그의 청지기에게 자기에게 속한 은잔을 막내 베냐민의 짐 속에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떠나자마자 요셉의 청지기가 그들을 따라잡고 그 잔을 훔쳤다고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의 결백함을 너무도 확신했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주의 종들 중에 누구에게서 그것이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 또한 내 주의 노예가 되리이다.” (창세기 44:9) 그들은 더이상 다투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의 자존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요셉의 집으로 되돌아갈 때 그들은 낮아졌고 상심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계시가 왔습니다. “그때에 요셉이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를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게 하고 자기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렸는데, 그때에 그와 함께 서 있던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창세기 45:1)

세상은 이 사랑의 계시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낮아진 자와 상심한 자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가족을 기뻐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에 안식하십시오!

2014년 7월 24일 목요일

더 위대한 만지심

엘리야와 엘리사는 “즐거움의 장소”라고 불리는 여리고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이제 초목도 목장도 과실도 없는 불모지였으며, 말라빠져서 전혀 생명이 없었습니다. 독물이 여리고의 물 근원을 오염시킨 이후로 그곳의 모든 생물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예수님께서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 (요한계시록 3:1) 라고 말씀하셨던 교회, 즉 죽고 메마른 기독교를 상징합니다.

엘리야는 여리고에 선지자 학교를 설립해 놓았습니다. 그와 엘리사가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어린 선지자 학도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오늘 당신의 주인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열왕기하 2:5) 엘리사는 얼른 이렇게 대답하며 그들을 잠잠케 했습니다. “조용히 하라! 내가 이미 알고 있노라.”

이 학도들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보내져서, 그곳 사회에서 사역해야 할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 무언가 결핍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 그리고 성령의 권능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 날 이 학도들은 엘리사에게, 성령께서 어느 산이나 골짜기에 그를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며 그들로 하여금 엘리야의 시신을 찾아보도록 보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뜻과 행하심에 대해 완전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증언하고 설교하며 기적에 대해 논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체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엘리야가 이러한 제안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야, 너는 지금 다음 세대 사역자들을 보고 있다. 이곳에 머무르면서 이 사역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가르치지 않겠느냐? 이 죽고 메마른 교회를 깨우칠 자가 바로 너란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가 만일 이 사역자들을 가르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의 놀라운 사역에 현혹된 채, 그에 대한 빗발치는 질문으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입니다. “당신의 선생은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했습니까? 그가 무슨 방법을 사용했나요? 그는 무슨 교리를 가르쳤습니까?” 엘리사는 그들에게 과거의 일들을 설명해주기 위해 그의 온 시간을 소비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젊은 사역자들은 (성령의 능력과 권능 없이) 엘리야의 기적들을 재현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의 온 에너지를 엘리야와 똑같이 되기 위한 노력으로 소모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그와 똑같은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게 만드는 방법과 비결을 배우려는 노력으로 과거의 운동과 부흥을 연구합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교회는 옛 방식의 성령 부흥을 구하기 위해 부르짖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일들을 재현해주시기를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임해야 할 특별한 기름 부음을 받기 전까지는 이 죽고 메마른 교회에서 단 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엘리야의 위대한 업적에 의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날의 영적 거장들인 내 선조들의 믿음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리고 저는 이전에 있었던 그 무엇보다도 더 위대한 만지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2014년 7월 23일 수요일

갑절의 기름부음

여러분은 엘리야가 왜 엘리사를 벧엘로 데려가고 싶어했는지 의아해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2:1-4 참조) 물론 엘리야에게는 이 여정이 마지막으로 가는 추억의 감상적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고, 이 현명한 선지자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엘리사에게 더 많이 요구될 하나님의 능력과 기름부음의 필요성에 대해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벧엘의 거리를 지날 때에, 엘리야는 완전히 타락한 사회를 향한 자기 제자의 공포와 분노를 감지했을 것입니다. 엘리야 자신도 갈멜 산에서 나름대로의 조롱자들과 냉소자들을 대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신세대와 맞서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초자연적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 세대는 그가 대적했어야만 했던 우상 숭배적 제사장들보다도 훨씬 더 강퍅하며 사악했습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엘리야가 자기 제자를 시험해보기로 작정했다고 믿습니다. 그는 분명 이렇게 제안했을 것입니다. “엘리사야, 네가 여기 머물면서 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려느냐? 네게는 확실한 부르심이 있고, 너는 그동안 잘 훈련받아 왔다. 너는 벧엘의 위대한 유산이 회복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가 벧엘의 상황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이 그곳의 사악한 영들을 대적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사악한 성읍에서 악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자기 안에서 더 크고 강력한 일을 해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엘리야가 줄곧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열왕기하 2:6)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 두 사람이 계속해서 가니라.” (6절)

저는 벧엘이 지난 한 세대 동안 급격히 악화된 우리 현 국가가 처해있는 사악한 사회의 표상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도 역시 조롱자들과 냉소자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관능적 사람들은 욕정과 우상숭배 그리고 동성애로 넘겨졌습니다. 이 세대는 엘리야나 엘리사가 대면해야 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사악합니다. 이 거룩한 선지자들은 아이들이 조롱하고 비난하며 신성모독 하는 것을 보았으나, 지금 이 나라 아이들은 서로를 살해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죄의식이나 비통함 없이 부모, 학교친구, 무고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죽이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젊은이를 다 보편화시켜서 통틀어 비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사회에도 예수님을 향해 불타는 많은 경건한 십대들이 있음을 압니다. 이토록 사악한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모든 젊은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사악한 때는, 잃어버린 세대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갑절의 성령의 능력과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 이때는, 역사상 우리가 결코 보지 못했던 만큼의 강한 기름부음을 요구합니다. 이 사악한 시대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일어나 엘리사와 함께 이렇게 부르짖어야만 할 것이 요구됩니다. “오 주여, 더 많이 구하나이다.”

2014년 7월 22일 화요일

교회는 조롱의 영을 대면하고 있습니

엘리사는 잃어버린 젊은 세대와 함께 타락한 성읍, 벧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조롱당했습니다.

“엘리사가 거기에서 벧엘로 올라가는데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어린아이들이 도시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그에게 이르되, 너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므로 엘리사가 돌이켜서 그들을 보고 주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하매, 숲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그 아이들 가운데 마흔두 명을 찢었더라.” (열왕기하 2:23-24)

이 얼마나 처참한 광경인가요. 당신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곰에게 공격당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냉혹한 일이야.” 그러나 이 구절에서의 “어린아이들”은 옳지 못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원본에서는 이 구절을 “젊은이들”이라고 읽습니다.

엘리사는 자기가 조롱당했기 때문에 불끈 화가 나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경건한 선지자는 성령의 능력과 권위하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 조롱하는 젊은이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소년들은 엘리야가 들리움 받아 승천했다는 사실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엘리사를 향해 “너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소리치며 조롱했을 때, 그들은 성령의 일을 조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거룩한 행사하심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엘리사를 향한 그들의 행위는 무엇보다도 그분을 대적하는 조롱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벧엘의 타락한 교회에 대해 인내하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타협의 제단에서 우상숭배 하기 위해 그곳에 모여들었고,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포함한 많은 선지자를 보내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 성읍의 우상숭배와 사악함을 용납하실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사악한 장소에 성령의 권능을 갑절로 가진 자를 보내셔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벧엘에서 엘리사는 권능으로 움직였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설교했습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젊은 사역자들이, 벧엘의 타락한 교회가 그랬던 것과 똑같은 육적 방식들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나라에 맨 처음으로 반항과 관능을 선동했던 바로 그러한 음악을 하나님의 집으로 들여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 건물 안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유인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죄로 만연한 사회를 여론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드리는 대신에 공연과 파티, 록 콘서트를 주최합니다. 그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간단하며 순수한 복음으로 그들의 죄와 공허함을 대면하게끔 하기는커녕 젊은이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시도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엘리사가 직면했던 것과 똑같은 조롱의 영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21일 월요일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by Gary Wilkerson

다윗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편 51:13, 15)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불을 지피실 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의 지역사회와 더 나아가 전 세계를 향해,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열정으로 우리를 불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불길이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것을 우리가 허용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 밖으로 복음을 갖고 나가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서 타오르는 이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것을 단지 품고만 있는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일까!”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인격적으로 정결케 되었을 때, 그리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끊임없는 갈증으로 채워졌을 때, 그것은 우리의 열정을 단순히 억제할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향해 그분의 찬양을 노래하게 만듭니다. 제가 아는 가장 훌륭한 예배자들 중 일부는 이렇게 외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제 직장동료가 오늘 저와 함께 교회에 나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할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불이 없다면, 우리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지극히 강렬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늘의 불이 우리 머리 위에 임해 우리가 모두 경탄으로 쓰러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오순절의 능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부흥이 교회 안에만 한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흥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불이 타오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도시에 불을 붙이도록 우리를 움직일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만일 당신의 불씨로 저를 감동시킬 거라면, 저로 하여금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말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사랑에 대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제게 기름부음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제가 세상으로 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

만일 성령의 불이 당신의 삶을 주도하고 있다면, 당신의 삶은 단지 불씨가 아니라 횃불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14년 7월 19일 토요일

성령 충만하여 by Jim Cymbala

“그들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4:31)

찬양사역자 스티브 그린(Steve Green)이 저희 브루클린 테버네클 교회에 처음 방문했을 때, 찬양예배가 시작되기 바로 전 저와 부목사님들은 제 사무실에서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그날 다 같이 하나님께서 저희 가운데 임해 주시기를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기도 후 눈을 떴을 때 스티브는 뭔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방금 느꼈던 진동이 무엇이죠? 혹시 이 근처에 기찻길이 있나요? 아니면 그것은 정녕 성령의 진동이었습니까?”

저는 그에게 그 진동은 성령의 권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우리 건물 바로 아래로 지나다니는 지하철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 그들이 느꼈던 진동은 진정으로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기도 모임에서 하나님의 권능은 신선하고 새로우며 더 깊은 감동으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했었으나 (사도행전 2장 참조), 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필요를 감지했고,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능력의 공급으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우리 영적 능력의 저장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소멸됩니다. 일상생활과 방해 요소들, 그리고 영적 전쟁도 그에 한몫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바울이 언급했듯이,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음주의자나 전통주의자, 근본주의자, 오순절파, 또는 카리스마파(권능주의, 또는 은사주의파)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스스로 진정한 능력의 결핍을 인식해야 하며 새로운 성령의 재충전을 구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기력함으로부터 일깨워줄 하나님의 신선한 바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신학적 논쟁의 후미에 숨어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너무도 어둡고 위태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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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7월 18일 금요일

여리고의 독이 든 물

하나님의 영감을 얻은 엘리사는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그의 첫 번째 여정지는 여리고 였습니다(열왕기하 2:1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50명 생도들은 엘리사를 맞았을 때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것을 즉시 알아채고 이러게 말했습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열왕기하 2:15). 가려져 있던 엘리사가 더 깊은 영적인 힘과 권위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생도들은 엘리사에게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2:19)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에 독이 있고, 그 물이 모든 것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그 50명의 생도들은 여리고에 죽음을 가져오는 이 독을 막는데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여기서 언급한 아름다운 터(plesant place)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사람이라.”(이사야 5:7).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가시나요? 여리고의 독이 든 물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오염된 설교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좇는 생도들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그들의 설교는 더럽혀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독으로 가득차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 없고, 육적인 설교는 사람들을 영적 죽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여리고의 독, 해독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물의 공급원을 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바로 공급원을 깨끗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지역의 물, 근원지에 소금을 던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은 깨끗하게 되었고, 생명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엘리사가 이용한 소금은 복음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깨끗한 새 그릇은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된 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하게 살며 순전하고 새로운 영감으로 말씀을 전하는 정결하고 온전한 그릇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오는 악하고 오염된 물결을 막을 수 있습니다.

2014년 7월 17일 목요일

하나님의 영으로 힘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승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일은 엘리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였으면 하는지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이 갑절이나 있기를 구하였을 때 엘리야는 어려운 일을 구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과연 누구에게 어렵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하시기에 어렵다고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죽은 사람을 일으키고 하늘에서 땅으로 불을 내리친 사람 엘리야에게 어려운 일이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엘리사에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엘리야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신다는 의미의 영감이라는 것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가 구하고 얻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영을 사람에게 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Nevertheless, if thou see me when I am taken from thee, it shall be so unto thee; but if not, it shall not be so)”(열왕기하 2:10). 이 구절에서 “when(언제,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 뒤에 쓰임)” 그리고 “am(있다, 존재하다)”이라는 단어는 원어인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으로 나중에 킹제임스 대역에 삽입된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만약 내가 네게서 취하여 지는 것을 본다면”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나와 함께한 과거의 기억들에 기댄채로 산다면 성령님께서 너의 안에 특별한 일을 하실 수 가 없단다. 내가 없어진 것을 알아야 한다. 엘리사야, 너에게 나는 필요가 없단다. 성령님을 통하여 내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께 달려가거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것이다.”

엘리사가 그의 선생인 엘리야가 천국 마차를 타고 회리바람으로 승천하신 것을 본 순간에 엘리사는 그의 세대에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르단 강의 물을 내리치고 난 후에 엘리야가 한 말은,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열왕기하 2:14) 이었습니다. 이 젊은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서 나의 영적 아버지들은 죽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어려운 상황에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를 통하여 다시 한번 일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하나님의 영으로 더욱더 힘 입어야 하겠습니다.”

2014년 7월 16일 수요일

당신의 삶의 강물을 가르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늙은 선지자 엘리야가 땅에서 마지막 날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벧엘과 여리고 지역을 방문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그의 제자인 엘리사와 함께 제가 생각하는 “교육용 여행”을 떠났습니다. 두 지역을 모두 방문한 이후에 요르단 강가에 도착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겉옷을 벗고 물을 내리 쳤습니다. 초자연적으로, 물은 갈라졌고, 두 사람은 강의 마른 땅을 밟고 건넜습니다.(열왕기하 2장 8절 참고)

엘리야는 왜 강을 가르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강을 건넌 것 일까요? 요르단 강은 깊지 않지만 넓은 강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그 강이 넘쳐흘렀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곳에는 두 선지자가 건널 수 있게 수 시간 이내에 뗏목을 만들 수도 있는50명의 젊은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엘리야가 그의 제자에게 모세 그리고 여호수아 시대의 기적이 현대에도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사에게 이런 도전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 “너의 사역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라고 설교 할 때에, 하나님께서 너에게 개인적으로 행하신 기적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엘리사야, 나는 곧 사라질테지만, 네가 이 강을 혼자 건너 되돌아 갈 때에 우리가 함께 건넌 방법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너의 삶 안에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거라.”

오늘날 저를 포함한 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현대에도, 우리의 삶에도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사와 이적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위해 더 나은 것을 내가 계획하고 있단다. 너의 삶 속에서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고 싶단다. 너의 가정, 결혼생활, 구원받지 못한 너의 가족, 친지들의 삶 속에서도 기적을 일으키고 싶단다. 너의 삶에서 너의 홍해를 만날 것이고, 너의 요단강을 만날 것이다. 그때 나는 그 물을 너를 위해 가르고 싶단다.”

2014년 7월 15일 화요일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당신을 통해 하고자 하십니다

열왕기하서 2장에는 구약성서 중 가장 화려하고 극적인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나이들어가는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종 엘리사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땅에서 그의 사역은 끝이 났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는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께서 그를 천국 마차를 태워 승천하게 할 특정한 장소로 이동하였어야 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목적지에 도착하였을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물었습니다.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9절). 엘리사는 주저함 없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9절).

처음에는 엘리야가 엘리사의 대답에 놀란듯 하였습니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10절). 보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 실망하기에 이르지 않도록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중에 홀연히 천국에서 마차가 나타나 그 둘을 갈라놓았습니다. 순식간에 엘리야는 마차를 타고 승천하였고, 엘리사는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12절).

엘리야는 사라졌지만 그의 겉옷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보았을 때 엘리사는 자신의 옷을 잡아 찢어버리고 엘리야의 겉옷을 주웠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요르단 강에 돌아왔을 때, 그는 그의 선생인 엘리야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엘리야의 옷으로 요단강 물을 내리쳤습니다. 그 즉시 물은 갈라졌고 엘리사는 마른 땅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이 젊은 선지자의 놀라운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장에서 나오는 사건들은 정말 놀랍고 굉장합니다. 이 구절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저는 실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중요한 교훈을 알아듣기 쉽고 아주 간단한 의미로 주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지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더 큰 일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세대는 개개인이 성령님을 경험하기를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힘 입을 수 있도록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2014년 7월 14일 월요일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by Gary Wilkerson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11.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하나님의 나타내심과 임재하심은 그 밖에 다른 모든 것들을 말해 줄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예배들의 시작을 성령님께서 오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구하는 찬양으로 여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필요합니다. 오늘 뿐 만이 아닌 내일도 필요합니다. 저는 제가 미적지근한 믿음으로 돌아가기 싫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 제발 성령님을 제게서 거두지 말아주세요. 제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중에 나와 함께 하여 주세요.”

우리 모두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부르짖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의 교제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 안에서 불꽃이 튀는 것처럼 상쾌하고 새로운 생명을 가져오는 경험과 함께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고자 구하며 부르짖습니다. 삶에서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직장, 가정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 등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주는 불꽃의 열기가 식기도합니다.

9월마다 하는 익스펙트(EXPECT) 컨퍼런스에서 저는 매년 반복적으로 이러한 시기를 보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신실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며 감명을 받으며 무릎꿇고 기도를 하게끔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그러나 지난 9월 저는 이런 담대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의 열정을 유지시켜주시지 않는다면 아예 주시지도 마십시요.”

저는 오르락 내리락 하는 롤러코스터가 지겨웠고, 불꽃 같은 열정이 튀기지만 불씨가 지속되지 않는 상황 또 일주일정도 산 꼭대기에 있는 듯 하다가 그 다음에는 다시 힘들고 단조로운 하루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삶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에 피우시는 열정과 믿음의 불꽃이 더욱 더 세고 깊게 커져갈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다윗이 구하였던 것처럼 제게도 충성된 영을 주시고, 제게 불꽃을 피우신다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최근 몇 개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 안의 불꽃을 유지시켜 주셨습니다. 제가 사역 중에 있는 교회의 교인들은 기도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개개인을 대상으로 함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충성된 영이 제 안에 있어 그 모든 개개인의 삶이 온 마음 다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낮과 밤으로 중보하고 있습니다.

2014년 7월 12일 토요일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by Carter Conlon

성경은 한나가 그녀의 가장 절박한 시간에, 마침내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무엘상 1:11)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빠른 기도응답을 받을 때, 우리 인간성의 경향은 그 응답을 그냥 집으로 가져갑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셨으며 어떻게 우리를 축복해주셨는지를 간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받은 후 결국은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한나처럼 절박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 응답을 돌려드리기로 작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한나는 그녀의 거룩한 절박함이, 그 나라가 직면하고 있던 위기에 대한 그분의 대책으로,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 가운데서 나오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알았던 것은 그녀의 서원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완전히 타락했고 나라는 기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그녀 마음속의 열망인 자기 아들을 성전에 맡기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저는 한나가 어린 아들을 마지막으로 성전에 남겨두고 떠날 때 그녀의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나, 당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이 아이를 주셨잖아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 제가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들, 즉 그러한 여정의 길을 절대 걷지 않을 사람들의 충고와 거짓된 이유들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한나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축복해주신 삶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아는 지각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그분께서 주실 생명을 돌려드린다는 약속을 하며 주님께 처음으로 서원할 때 성전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한나가 그녀의 안색에 더이상 슬픔이 없이 돌아가게 했던 이유였습니다. (사무엘상 1:18 참조)





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성경은 한나가 그녀의 가장 절박한 시간에, 마침내 이러한 기도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무엘상 1:11)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빠른 기도응답을 받을 때, 우리 인간성의 경향은 그 응답을 그냥 집으로 가져갑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셨으며 어떻게 우리를 축복해주셨는지를 간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받은 후 결국은 우리 자신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한나처럼 절박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 응답을 돌려드리기로 작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한나는 그녀의 거룩한 절박함이, 그 나라가 직면하고 있던 위기에 대한 그분의 대책으로, 하나님께서 그분 백성 가운데서 나오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알았던 것은 그녀의 서원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완전히 타락했고 나라는 기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토록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그녀 마음속의 열망인 자기 아들을 성전에 맡기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저는 한나가 어린 아들을 마지막으로 성전에 남겨두고 떠날 때 그녀의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나, 당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이 아이를 주셨잖아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과 제가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들, 즉 그러한 여정의 길을 절대 걷지 않을 사람들의 충고와 거짓된 이유들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한나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축복해주신 삶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아는 지각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그분께서 주실 생명을 돌려드린다는 약속을 하며 주님께 처음으로 서원할 때 성전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한나가 그녀의 안색에 더이상 슬픔이 없이 돌아가게 했던 이유였습니다. (사무엘상 1:1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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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7월 11일 금요일

한계에 이르렀을 때

목회자들은 포기하고 있는 교구민들에 대한 그들의 아쉬움을 한탄하는 편지들을 제게 보냈습니다. “선하며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은 죄의식과 비난으로 너무도 압도당한 나머지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기대에 합당치 못하게 살며 다시금 죄를 짓게 될 때, 결국은 포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의 한계에 이르러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포기하려는 생각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절망 속에 있는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을 포기하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은 오직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전합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즉각적 응답을 얻으며 기적들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며, 온 세상은 밝고 낙관적입니다. 저는 그러한 설교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좋은 모든 것들과 건강을 누리는 것을 제가 진정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정직하며 신실한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패배하며 포기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태평하고 부유하며 성공적인, 항상 긍정적 사고의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에 합당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의 세상은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통함, 매시간마다의 위기, 그리고 가정 문제들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힘에 겹도록 한량없이 눌려서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고린도후서 1:8)

긍정적 사고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어떤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는 것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해결책일까요? 여기 두 가지 절대적 진리는 제게 큰 위안과 도움을 주었습니다.
  •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오직 우리의 연약함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내기를 원하신다. 
  • 그분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분은 내가 그분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오 나의 힘이 되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리이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구출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신뢰할 나의 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로다.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주를 내가 부르리니, 이로써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시편 18:1-3)

2014년 7월 10일 목요일

우리의 목자

우리의 위대한 목자는 시험과 고난, 아픔과 상처로 인해 잃어버려진 모든 양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가 우리를 저버린다고 감히 비난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시며 항상 우리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현재 당신은 어떤 종류의 유혹이나 시험에 대항해서 승부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그 고투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죄의 속박으로 넘겨지는 것을 거부하며,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취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지쳐있으며 완전히 속수무책의 극도에 달했습니다. 원수는 당신을 절망과 두려움, 그리고 거짓말에 휩싸이게 합니다.

당신의 시험은 그보다도 더욱 혼란스러우며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어떤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 하더라도, 성령은 당신에게 여호와 로이 (즉, 주는 나의 목자)를 나타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에게는 그분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속에 새기기를 원하시는 목자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3:5) 그리고 우리의 천부 여호와 로이,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시편 23편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이름을 알며 네가 겪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게로 와서 내 은혜와 사랑 안에 안식하라. 모든 것을 스스로 파악하려 애쓰지 말고, 그저 너를 향한 내 사랑을 받아들이고 내 사랑의 팔에서 안식하라. 그렇다. 나는 만군의 주요, 존엄하고 거룩한 하나님이라. 나는 네가 나에 대한 이 모든 계시를 알기 원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너로 하여금 알기 원하는 계시는 여호와 로이의 계시다. 나는 네가 너를 지키는 사랑의 목자로서의 나를 알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의 자비와 사랑 안에서 네 모든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너를 인도할 것임을 네가 신뢰하기를 바란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알듯이 내가 아버지를 아노니, 나는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4-15)

2014년 7월 9일 수요일

“주께서 거기 계신다”

하나님의 진실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여호와 삼마—히브리어로 “주께서 거기 계신다.” (에스겔 48:35)—의 이름으로 인식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반드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께서 이 사람과 함께하고 계심이 틀림없어. 내가 그를 볼 때마다 그로부터 주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어. 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진실로 반영되어 있어.”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주님의 다감한 임재를 서로에게서 자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시간을 기도모임, 성경공부, 구제사역, 구역모임 등의 좋은 종교적 활동들로 소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활동은 매우 칭찬받을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 중 많은 자가 기도 골방에서 기도와 말씀공부로 주님을 섬기는 시간을 거의 갖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단순히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삶이나 몸된 교회에 똑같이 적용되는 진실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어떤 영적 기운이 신비롭게 어떤 사람을 감싸거나 교회 예배 중에 내려오는, 그러한 유형의 임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믿음의 여정의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거나 교회 전체에 드러나든 간에,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해왔어.” “이 교회는 그들의 설교 말씀을 진실로 믿는구나.”

여호와 삼마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단지 의로운 목회자만으로는 가능치 않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의로운, 그리고 하나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만일 한 방문자가 어떤 교회 예배에 참석한 후 “나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설교말씀이나 찬양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의로운 회중이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며, 주님의 영광이 그들 가운데 거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치리자들 앞으로 끌려갔던 사건에 대해 읽습니다. “이제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그들이 학문 없는 무식한 사람들인 줄로 알았으므로 이상히 여기며, 또 그들이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게 되고…”

2014년 7월 8일 화요일

탕자의 교훈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아버지가 자기 종들에게 이르되,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우고 그의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여기로 끌어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누가복음 15:20-23)

저는 이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기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고,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만일 그가 돌아간다면 자신의 죄 때문에 책망받거나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의 처량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떻게 맞이했는지를 주목하십시오. 이 젊은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그를 포옹했기에 그는 제대로 자백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단지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을 대적하여 죄를 짓고 아버지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더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나이다.” (누가복음 15:21)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젊은이의 죄가 이미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반응은 종들에게 이렇게 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내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그의 손에 반지를 끼워라. 우리는 축연을 할 것이니 잔치를 베풀라. 내 아들이 돌아왔으니 다 함께 즐거워하자!”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했으며 그가 온전히 회개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에게 죄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었던 단 한 가지 관심사는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자백하기도 전에, 이미 그가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를 훨씬 능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로마서 2:4)

2014년 7월 7일 월요일

불꽃 by Gary Wilkerson

불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순식간 타오른 후 꺼집니다. 그러나 불꽃은 무언가의 시작을 위해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면 불꽃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가스 그릴에 불을 지피는 데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꽃은 본질상으로 불은 아닙니다. 그것은 고기를 구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속에 의도하신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강렬한 은혜의 기름에 의해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불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윗의 삶은 그 실례를 보여줍니다. 그는 사울과 똑같은 영적 체험을 했으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짐 받고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받았던 불꽃은 불길로 번졌습니다. “사무엘이 기름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상 16:13) 여기서 “이날 이후로”라는 구절은 다윗과 사울의 삶에서의 차이를 나타내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불꽃을 받은 후, 그것을 보존했으며 기뻐했고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 불꽃을 주님을 위해 타오르는 불길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불꽃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것은 우리를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제하는 불을 지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거룩의 불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우리를 정결케 하며, 죄의 찌꺼기를 태워 없애고 우리가 타협하는 것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또한 거룩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켜서, 다윗처럼 “주님, 저는 당신 앞에서 정결해지기를 원하며 올바른 영을 갖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가 그것을 배타합니다. 신념은 변화를 유도할 수 있지만, 우리는 자신의 습성이나 갈망의 일부분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탄원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저로 하여금 당신께 순종케 해 주소서.” (시편 51:11-12)

이 구절에서 다윗이 순종에 대해 강조했음을 주목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불순종하고 자신의 의지를 따른 사역의 길로 갔을 수도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아시아에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안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께서 그곳에 가는 것에 대해 금하셨음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만일 그 일을 자기 임의대로 추진한다면 성령을 근심케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가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었지만, 그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소멸시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울 왕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가 계속 불순종할수록 그를 사용하시려는 성령의 능력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사울은 더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으며 성령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에 받은 불꽃이 정결케 하는 불로 지펴지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2014년 7월 5일 토요일

날마다 새로운 아침 by Claude Houde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예레미야애가 3:22-23)

저는 일월 첫 달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십일 기도와 금식으로 새해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수천 명 성도들과 세계 각처의 인터넷 성도들은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그들 나름대로 수십 가지가 넘는 우리 기도 모임에 동참하고 있으며, 각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새롭고 신선한 결심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 퀘벡(Quebec)에서도 새해는 다짐과 결단의 때입니다. 우리 지방에는 신년 결단에 대한 놀라운 “민속행사”가 있습니다.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은 온갖 종류의 결단과 “새 출발” 명단을 발행하며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수천 명의 사람이 살을 빼겠다는 결심을 하며 헬스클럽에 가입합니다. 저도 지난 이십여 년 동안을 정기적으로 운동해왔으며 일월만 되면 똑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것을 보아왔는데, 그것은 새로운 부류의 운동선수들이 헬스클럽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유명 브랜드 운동화와 운동복, 그리고 결심에 찬 눈빛으로 일 년 회원권을 지불할 수표를 손에 들고 나타납니다.

헬스클럽을 운영하는 제 친구가 한번은 이러한 사실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매해 일월에는 그의 헬스클럽 장비와 면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사람이 회원 가입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필연적이며 변치 않는 현상은, 일 년 회원비를 지불한 사람들의 80% 이상이 부활절이 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이랍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미처 알지도 못했던 신체 부위와 근육에 잠시 통증을 가한 다음, 건강에 해로운 음식과 그들의 절친한 친구 리모컨을 손에 들고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게 만드는, 인생의 압제자에 굴복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각 날은 새로운 시작의 기회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가장 본질은 그분의 자비가 매일 아침 새롭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전능하심, 그분의 선하심, 우리를 향한 그분의 열망과 성취, 그리고 그분 구원의 무한한 충만은 우리를 위해 날이면 날마다 온전히 새롭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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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7월 4일 금요일

끝까지 견디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누가복음 14:28-30)

예수님께서는 그의 많은 제자가 끝까지 버틸만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서고 끝까지 경주를 마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저는 믿는 이들의 가장 비참한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제자로서 성장하여 예수님을 닮아간 다음에 멀어지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기초를 먼저 세우고 시작하였지만 비용과 대가를 미리 예산하지 않아 일을 마치지 못한 것입니다.

경주를 끝까지 마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기쁜일인지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지혜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마다 변화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격려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이들이 소망하는 것은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영광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읽은 사람 중 잠깐 멈추고 있거나 잠시 뒤로 한 발자국 가는 과정에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한 걸음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지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만약 이에 해당한다면, 회개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순복하며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시간은 매우 큰 요소입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붙잡고자 한다면 지금 바로 붙잡으시고 끝까지 견디십시오!

2014년 7월 3일 목요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보내신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잃어버린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합니다.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린도후서 4:1-2).

바울은 여기서 볼 수 있는 표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밝게 드러내 보이는”것으로 어떠한 것을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이해하게 하는 소명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에서 그리스도 자체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개념을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린도후서 3:2-3). 우리의 삶은 성령님이 쓰신 편지이고 잃어버린 이 세상에 보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읽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일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순간 성령님은 예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새기시고, 항상 그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들어가고 있으십니다. 우리를 진실하고 정확하게 사람들의 양심에 박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성령님의 미션입니다.

2014년 7월 2일 수요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의 아버지는 도망간 당나귀를 찾도록 사울을 보냅니다. 사울은 사환 한 명을 데리고 낙담하고 포기할 마음을 가질 때까지 땅을 두루 다니며 찾았습니다. 그때 사환이 그에게 사무엘 선지자에 대하여 얘기해 주었습니다. 사환은 사무엘 선지자라면 나귀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나귀가 있는 방향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천국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쓰시기 위해 선택하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보자마자 한 것은 연회를 열고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사무엘상 9:19).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싶으신 것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아 섬기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함께 시간을 가지며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함께 성찬을 받을 수 있도록 염려하지 말라 라고 말하였습니다(사무엘상 9:20-25).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지 말라. 그것은 이미 해결되었다.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과 그의 영원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가야 한다.”

성찬을 받은 후에 사무엘은 친밀하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도록 사울에게 사환을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였습니다.(사무엘상 9:27, 10:1)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진실로 성령과 함께 동행하고 싶다면, 진실로 나의 영감을 구한다면 나로부터 어느 방향으로 갈지에 대한 질문 이상의 것을 소망해야 한다. 나의 임재 속에 거하며 나의 마음 나의 소망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가야 한다! 나는 너희 머리에 기름을 붓고 나의 나라를 위하여 쓰고 싶단다.”

사랑하는 여러분, 방향은 놓으시고 그 외 다른 모든 것들도 일단 내려놓으십시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가려지고 깊은 뜻을 가르쳐주실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머물며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시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2014년 7월 1일 화요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하나님은 우리의…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God is . . .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시편 46장 1절)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현재(present),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환난 중 큰 도움이셨지만, 현재에도 우리의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큰 도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46: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방패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God hath not given us the spirit of fear; but of power, and of love, and of a sound mind)”(디모제후서 1:7).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신실하시고 그의 말씀은 완전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 46:5).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성중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나는 옮겨지거나 흔들릴 수 없습니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46:6). 이방이 격노하고 이 세상 모든 왕국들이 흔들리고 옮겨질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악한 마귀의 공격을 모두 완전히 멸하실 것입니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46:9). 하나님께서 원수를 대적할 우리의 군대입니다.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54: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 찌어다”(46:10). 나는 주님이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앎으로 완전히 쉼을 얻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의 구원자시고, 나의 피난처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임재 하심과 사랑 안에 둘러싸여 있고, 나는 굳건히 서 하나님의 영광을 붙잡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 이시요 나의 요새 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 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 시요 나의 방패 시요 나의 구원의 뿔 이시요 나의 산성 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편 18:2-3)

2014년 6월 30일 월요일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의 반석 by Gary Wilkerson

우리는 크나큰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직장, 경제 그리고 인간관계의 불확실성 등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심지어 믿음까지도 불안하게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의 반석은 하나님만이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흔들 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으십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혈루병 있는 여인을 치유하시고(막 5:25-34) , 회당 주권자의 딸을 고치시고(5:35-43) 고향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완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언제나 저를 크게 놀라게 합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마가복음 6:5).

이 구절은 제가 연구한 신학을 그저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지 않음으로 인하여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 없을 수가 있습니까? 진실은, 예수님께서 그 지역에 전하는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어떤 이들은 내가 치유해줄 수 있도록 지붕에 구멍을 뚫어 병든 사람들 내게 데려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치유할 수 있다는 것 조차도 믿지 않고 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마가복음 6:6).

이것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경고로 여겨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읽고 불신의 마음을 갖고 그저 떠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선택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부르짖고, 하나님의 중재를 믿음으로 간구하여도 하나님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버리고 절대로 소망하지 말고 절대로 간구하지 말고, 소원 없이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도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그 어떤 시험을 겪더라도, 멀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은 늘 중재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 안에 믿음을 불어 넣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우리는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by Jim Cymbala

저는 지금 우리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깨어나야만 하는 절박한 시기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오늘날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실상 우리는 라오디게아적 사고로 체제화되어 있기 때문에 미지근함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몇몇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교회는 “탁월”하다고 간주됩니다.

일세기 말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보족한 것이 없다 하나...” (요한계시록 3:15-17)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럴듯한 “긍정적 고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승리와 축복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전혀 감명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그러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7, 19)

그것은 확실히 엄중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항상 엄중히 다루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브리서 12:7)

라오디게아인들이 모든 언약을 선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신체적 이익을 누리면서 그들의 이교도 이웃들보다 그들 자신을 당연히 더 의롭게 여기는 그리스도 지체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침을 받으려는 위기의 순간에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경종인지요!
그리스도의 지체에 문제가 발생할 때는 그때마다 강력한 조치가 요구됩니다. 우리는 단지 가만히 앉아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권능 안에서 역동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연합되었으며 늘 기도했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분투했으며,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첫번째 공격이 왔습니다. (사도행전 4:2-3 참조)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은 재빨리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주제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낮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사도행전 4:24, 29-30)

이것이 바로 수세기를 통해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권고해왔던 것입니다: 공격을 받았을 때나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을 때,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분은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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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6월 27일 금요일

생수의 강

에스겔 47장에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은 계시가 보여졌습니다. 가장 마지막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온 인류 역사를 통튼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이며 더욱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몸은 그 능력이나 영적 권위에 있어서 약화되거나 감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교회는 권능과 영광의 불꽃으로 전진할 것이며,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가장 충만한 예수님의 계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지역들의 물고기가 그것들의 종류대로 대해의 물고기같이 심히 많으리라.” (에스겔 47:10) 주님 임재의 차오르는 물속에서 헤엄칠 성도들의 지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차오르는 물에 관한 에스겔의 환상은(에스겔 47:3-4) 증가하는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대에는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증가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것입니다.
이 강의 근본 토대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의 성취를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군사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34)

물이 계속 차오르는 것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주어졌을 때의 오순절의 이미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선물로 주어짐과 동시에, 그분이 그들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 되어주신다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은 온 세상으로 흘러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38-39 참조)

에스겔의 환상에 의하면, 그 생수의 강은 주님이 오시기 바로 직전 최고조에 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를 놀라운 계시로 데리고 가셨고 에스겔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물들을 지나가는데…” (에스겔 47:3) 그리고 주님은 이 선지자를 더 깊은, 그리고 더 먼 강물로 계속 나아가게 했습니다. 결국에는 물이 너무 깊고 압도적이었다고 에스겔은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 물들이 솟아올라 헤엄칠 물이 되고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더라.” (47:5)

주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을 때 그가 얼마나 놀라워했을지를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물이 차오른 이 바다는 대체 무엇이냐? 이 강이 온전히 생명과 부활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그러한 영광 가운데서 헤엄칠, 그토록 축복된 자들은 과연 누구란 말이냐?” 에스겔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