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생기 by Gary Wilkerson
“내가 또 보니, 보라, 힘줄과 살이 그 뼈들 위에 생기며 그것들 위에 살갗이 덮였으나 그것들 속에 숨은 없더라.” (에스겔 37:8) 이 얼마나 처참한 광경인가요. 저는 모든 프로그램과 계획은 잘 짜여져 있지만, 생명이 없는 교회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는 모든 연령층과 성도들에게 필요한 세미나, 집회, 서적, 웹싸잇, 인터넷 통신서비스, 그리고 각종 모임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선한 동기로 고안되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불어넣어지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열망하시는 삶을 오히려 우리로부터 빼앗아가는 미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활동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영적이라는 착각 속으로 미혹됩니다. 그것은 마치 마른 뼈들이 연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생기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저는 천 번의 예배와 만 번의 전략을, 그분 성령의 한 가닥 생기와 바꾸겠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하는 일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37:9) 여기서 “생기(breath)”가 히브리어 단어로는 “ruach”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또 대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뼈들, 즉 사람들에게 대언해야 했지만, 이 두 번째 명은 하나님 자신, 즉 성령(ruach)에게 대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 걸까요?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향해 설교하는 것, 즉 교리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단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도록 간청하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분으로 하여금 상황을 바꿀 수 있게끔, 그분께 부르짖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생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먼저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지 않는 한, 우리 눈은 볼 수 없고, 우리 귀는 들을수 없으며, 우리 입은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실 때, 그 결과는 우리를 경탄케 합니다.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뼈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더라.” (37:10)
하나님의 생기는 우리를 담대함으로 서게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은 사도행전 2장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2:14) 베드로가 오순절에 선포했던 복음은 그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이제는 그가 일어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기로 말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 원하는 생기는,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어둡고 절망적인 환경에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혼돈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분은 잿더미에서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십니다. 그리고 원수가 파멸만을 추구했던 끔찍한 상황 안으로, 예수님은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우리는 교회 활동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영적이라는 착각 속으로 미혹됩니다. 그것은 마치 마른 뼈들이 연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생기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저는 천 번의 예배와 만 번의 전략을, 그분 성령의 한 가닥 생기와 바꾸겠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하는 일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37:9) 여기서 “생기(breath)”가 히브리어 단어로는 “ruach”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또 대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뼈들, 즉 사람들에게 대언해야 했지만, 이 두 번째 명은 하나님 자신, 즉 성령(ruach)에게 대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 걸까요?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향해 설교하는 것, 즉 교리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단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도록 간청하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분으로 하여금 상황을 바꿀 수 있게끔, 그분께 부르짖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생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먼저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지 않는 한, 우리 눈은 볼 수 없고, 우리 귀는 들을수 없으며, 우리 입은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실 때, 그 결과는 우리를 경탄케 합니다.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뼈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더라.” (37:10)
하나님의 생기는 우리를 담대함으로 서게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은 사도행전 2장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2:14) 베드로가 오순절에 선포했던 복음은 그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이제는 그가 일어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기로 말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 원하는 생기는,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어둡고 절망적인 환경에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혼돈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분은 잿더미에서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십니다. 그리고 원수가 파멸만을 추구했던 끔찍한 상황 안으로, 예수님은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