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30일 금요일

구름같은 증인들

히브리서 12:1 말씀은 이세상이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구름 같은 증인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이 하늘의 증인들 무리가 현 세상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노아시대 보다 훨씬 더 악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증인들은 소돔의 죄를 능가하는 죄를 범하는 인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심히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우리 경제는 축복받았지만 사회는 비도덕적이 되고 폭력이 난무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여 세속주의자들 조차도 우리가 어쩌면 이토록 타락하였는가 하며 통탄합니다. 모든 곳의 크리스천들은 왜 하나님이 이같이 악한 사회에 심판을 지연하고 계시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는 왜 그처럼 끔찍한 악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구름 같은 하늘의 증인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과 인내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름 같은 증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죄인중의 괴수” 조차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언합니다. 바울의 생애와 서신들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했던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냥해서 그들을 감옥이나 사형장으로 보내기 위해 끌고 갔던 테러리스트였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무지하여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현 세대에 대해 인내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합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구름 같은 증인들 중에 있습니다. 그도 또한 하나님이 왜 그토록 인내하고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와 기록들은 우리에게 그가 예수님을 결코 모른다고 맹세하며 그분을 저주한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아직도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는 수많은 무리가 있기 때문에 심판을 보류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결코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베드로처럼 아직도 그리스도가 기도해 주고 계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이 구름 같은 증인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이전에 마약중독자였던 사람, 알콜 중독자였던 사람, 창녀였던 사람, 동성연애자였던 사람, 갱 멤버였던 사람, 마약 밀매꾼이었던 사람, 살인자였던 사람, 아내를 구타했던 사람, 이교도였던 사람, 관음중독자였던 사람들과 같이 사회가 포기해 버린 무리들의 얼굴 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의 품안에서 죽었고 지금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의 긍휼과 인내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일치된 증인으로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을 심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 광적이고 비도덕적인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도 그분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이 세상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랑과 인내를 우리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2008년 5월 29일 목요일

성령이 임하실 때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이 사람에게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묘사합니다. 그는 예언합니다.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사32:15).

이사야는 “성령이 오실 때는 한때 황량하던 광야가 추수하는 들판이 될 것이다. 죽은 듯한 땅덩이가 갑자기 열매로 가득 넘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시적인 추수가 아니다. 열매가 가득한 들판은 더욱 커져 숲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해마다 이 숲에서 수확할 수 있을 것이며 계속해서 너희의 비옥함이 더욱 풍성해 질 것이다”라고 말씀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덧붙였습니다. “그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위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사32:16).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성령은 오실 때에 또한 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메시지는 사람들 안에 공의를 낳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흥’과 같은 성령의 단발적인 퍼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지속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부흥은 평균적으로 오년간 직속되며 혼란과 불화를 흔적으로 남긴다고 합니다. 나도 소위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몇몇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성령이 남겨주신 흔적을 볼 수 없습니다. 이 교회들은 죽어있고, 메마르고, 텅비어 있습니다. 한 때 천 명을 수용하던 교회 전들이 텅 빈 무덤들이 되어 단지 오십여 명이 예배를 드릴 뿐입니다.

이사야는 계속합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사32:17-18).

공의가 활동하기에 평화가 옵니다. 성령은 모든 동요, 훼방, 정죄를 쓸어내기에 바쁘십니다. 그 뒤를 따라서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그리고 하나님의 집의 평화가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평강을 소유할 때 그들은 쉽사리 그것으로부터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32:19-20).

성령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은 웃시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또한 적용됩니다. 그것은 이중적 예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인즉, 모든 세대가 성령의 퍼부으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성취하기 원하시는 일에 비하면 오늘날의 교회가 목격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습니다.

2008년 5월 28일 수요일

회복 사역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은 로마로 향하는 배에 타고 있었고, 그 배는 시돈에 잠시 정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휘관인 백부장에게 시내에서 친구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했습니다.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행27:3).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사용하여 다른 믿는 자를 회복시키시는 또 다른 예를 봅니다.

바울이 어떤 믿는 자에 대하여 기록한 디모데 후서에서도 이런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1:16-18).

오네시보로는 바울의 영적 아들 중 한사람으로서 바울을 깊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였기에 그가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를 찾아왔습니다. 언젠가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전 시내를 뒤져 결국 그를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동기는 단순히, “나의 형제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파선의 공포를 겪었고 이제는 사탄과 악전고투 중이다. 그를 격려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복 사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요즈음 교회에서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 길잃은 영혼을 구하는 능력, 죄를 이기는 능력, 등등. 그러나 나는 회복되어 새로워진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훌륭한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울증, 심리적 고민 또는 병든 영은 온갖 종류의 육체적 질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그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느낄 수 있도록 회복되고 격려를 받은 영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치유의 향유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도 이러한 회복 사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 그는 밤낮없이 도망 다녀야만 했으므로 지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때에 그는 하나님의 지도자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꼈습니다. 그러자 결정적인 순간에,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다윗에게 이르러...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삼상23:16-17).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즉시 그의 영은 소생하여 앞으로 나아 갈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성경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천사를 보내시거나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동료를 보내십니다.

2008년 5월 27일 화요일

염려라는 이교주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6:31-32).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족의 미래나 직장이나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 등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생활 방식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들을 돌보시고 필요를 채워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알지 못합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6:34). 이 단순한 말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일 무슨일이 일어날는지, 일어나지 않을는지 생각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염려한다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너희가 염려한다면 너희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을 할 따름이다”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든 염려를 그분께 던져버리고 계속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계속 그분의 신실하심 가운데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너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 받을 수 있도록 확실히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걱정과 불안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당황스러워 하지나 않을까 궁금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마치 하늘에 우리를 돌보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염려하는 것이 주님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모욕적인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천사들은 그들 끼리 얼마나 곤혹스러운 질문을 주고받겠습니까? “저희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없는가? 저희들은 그분이 자신들은 사랑하시는 것은 믿지 않는가? 그분은 저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두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 저희들은 새들과 모든 짐승을 먹이시는 그분이 자신들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을 믿지 않는가? 저희들이 만약 그분이 모든 능력과 부를 소유하시고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초조해하고 염려할 수 있을까? 저희들은 마치 그분이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지 않은 듯이 저희의 천부가 태만하시다고 비난하는 것인가?”

당신에게는 천부가 계십니다. 그분을 신뢰 하십시오!

2008년 5월 26일 월요일

위로와 회복

바울이 의기소침하였을 때 성령은 어떻게 바울을 위로 하셨을까요? 사도가 자신의 입으로 말합니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6). 디도가 회복된 심령으로 마케도니아로부터 도착하자 갑자기 바울의 마음은 기운을 얻었습니다. 두 사람이 교제를 하면서 기쁨이 바울의 몸과 마음과 영에 물밀듯 흘러들어 왔고 사도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7:4).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문제에 당면해 있지만 주님은 이 싸움에 필요한 것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디도를 통해서 나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내가 사역했던 기간 동안 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인내심이 다하여져서 의기소침해지고 완전히 혼란에 빠져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번민하며 주님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하면 당신의 이 종들이 고통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건져낼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을 돕기 위해 무슨 말을 하며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로 여기 바울의 증언에 그 답이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 한사람이 너무도 지쳐서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가장 힘든 시기에 처해 있었고 더 할 수 없이 기운이 빠져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어두운 구덩이를 완전히 빠져나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사도는 사랑받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느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고린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디도가 그곳에 도착하여 교회 지도자들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의 교훈을 듣고 교회에서 영적 자각이 일어났고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디도는 이러한 격려의 소식을 들고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사도여, 고린도의 형제들이 그들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있던 죄를 제하여 버렸고 거짓 선지자들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당신의 고난을 경멸하지 않고 도리어 당신의 간증으로 인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가 가지고온 이 유쾌한 말이 즉시 바울을 그의 구덩이로부터 들어 올렸습니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7:6). 당신은 여기서 그 예를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회복하시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은 바울을 회복하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받은 위로는 회복된 디도의 영혼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디도가 이번에는 바울의 영혼을 회복시켰습니다.

2008년 5월 23일 금요일

불신의 과도한 위험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3:18-19, 12)

히브리서는 신약의 교회들에게 이렇게 경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예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그들처럼 타락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악한 불신에 빠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삶은 길고도 끝없는 광야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되돌려 보냈던 불신의 세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도자로부터, 사사들과 레위족속을 무론하고 그들에게 대적하여 자신의 손을 들 을 것이라고 신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부터, 그들이 알게 된 것은 지치고 수척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대신,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고 자신의 정욕에 의해 소진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모든 믿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에 대해서만 모든 생각과 관심이 사로잡혀 버립니다. 그들에게는 비전도,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감각도, 기도도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이웃이나, 잃어버린 세상이나 결국에는 친구에게 조차도 무관심해 집니다. 그들은 자신들 삶의 전 초점을 그들의 문제, 고통, 질병에 고정시킵니다. 그들은 연이어 위기를 겪고 자신의 고통과 고난에 갇혀 버립니다. 그들의 나날은 혼동과, 분쟁, 질투와 분열로 채워집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홍해의 물을 가르셔서 양쪽에 벽처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걸어서 통과하도록 하셨을 때, 그들은 춤추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겨우 사흘이 지난 후에 이 똑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불평하고, 중얼대고 원망하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38년 동안 모세는 이 불신 세대의 모든 사람이 한사람씩, 한사람씩 죽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광야에서 인생을 낭비해버린 사람들을 회고해 보면서 모세는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신2 참조) 하나님은 그 모든 세월동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유예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어떤 크리스천은 단지 죽을 때 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 위하여, 성장하고 또는 성숙하기 위하여 아무런 위험도 무릎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불신 가운데서 강퍅해져 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만 죽기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2008년 5월 22일 목요일

하나님은 당신에게 마음을 두셨다

히브리서 12:1에서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은 당신과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들과 더불어 승리하는 자들에게 주는 그들의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단순히 이것입니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3:12)

나는 이 하늘의 증인의 거대한 무리가 우리에게 복잡한 신학이나 교리를 지키는데 대하여 말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간결한 진리로 우리에게 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볼 것을 우리 에게 증거 합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십자가의 승리를 전파하고, 죄인들의 우리를 거 역하는 일을 참으며,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 를 해야 할 것입니다. (히12:1-2 참조)
-다윗왕은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신뢰할 수 있고, 그분은 우리에게서 자신의 성령을 거두어가지 않으실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다윗은 살인을 저질렀고, 간음한 자요, 거짓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였고 아버지께서 그를 마음에 두고 계셨기 때문에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빛을 거슬러 죄를 범하였다고 증언 합니다. 이 제자는 예수님 앞에서 걸었고, 주님을 만졌으며 그리스도로부터 개인적 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죄의식과 정죄 속에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하 지만 하나님은 그를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동안 매일 고통당하시고 고통가운데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바울을 불렀을 때 그분은 바울에게 얼마나 많은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지 보여주셨습 니다.

그의 전 사역기간을 통해, 바울은 진정으로 환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환난은 하나님이 당신을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3:3).

우리는 또한 욥의 증언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욥7:17-18, 이탤릭체 저자 임의사용).

하나님이 당신을 마음에 두고 계실 때, 당신은 자주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당신의 시련이 더 길고 더 심해질수록, 하나님이 당신을 더욱 깊이 마음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의 생애와 예수님의 생애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원수는 당신을 대적 하러 올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에 대항해서 기치를 높이 드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절대적인 안식을 발견합니다.

2008년 5월 21일 수요일

믿음의 궁극적인 시험

모든 믿는 자에게는 사는 동안 또한 교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궁극적으로 시험하시는 때가 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광야에서 당면했던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이 시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에 놓인 모든 위험을 보고-우리가 직면한 거대한 문제들, 고통의 높은 벽들, 우리를 멸하고자 하는 영적 세력과 권세들-그리고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약속에 온전히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자신을 평생에 걸쳐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문제와 원수들 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결단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는 한 번에 한 문제씩 다루는 믿음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평생의 믿음, 전 생애에 걸친 결단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우리의 상황에 상관없이 우리 영혼에 평온과 안식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의 하나님이 더욱 크시다. 그분은 어떤 것이든, 모든 고통가운데서 나를 건져내실 수 있다.”고 단번에 결단했기 때문에 이 평온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기 백성이 불신에 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아마 여러 번에 걸쳐 시험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이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궁극적인 시험을 이겨내는 믿음, 아무것도 당신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와 확신으로부터 흔들 수 없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이란 주제를 둘러싸고 너무도 많은 신학적 설명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는 믿음을 인위적으로 한 순간에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다...”라고 반복함으로써 만들어 낼 수 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우리가 결단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믿음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대했을 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저 행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신실하게 믿는 자들은 속으로 “주님,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나는 진정 믿고 싶습니다,”라고 속삭이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 하셨던 것, 즉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한 가지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은 의문을 품지 않고 또는 경시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을 순종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순종하기로 작정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혼동하지 않고 명백히 깨달을 수 있도록 분명히 해 주실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시면, 우리에게 순종할 능력과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욜3: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6:10).

2008년 5월 20일 화요일

하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수많은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시련과 환난 가운데 이 구절을 매일 인용합니다. 한데 바울이 말씀하는 문맥상 보면 이것은 더욱 깊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두 구절 앞에서 바울은 선언했습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4-55).

바울은 하늘을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웅변을 토했었습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고후5:1-2 이탤릭체 저자임의 사용).

그리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바울에 의하면, 하늘-주님의 존전에 영원히 거하는 것-은 우리가 전심으로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할 때, 내게는 영광스러운 광경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나는 예수님이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그 큰 무리가 모여드는 것을 상상합니다. 이 다수의 무리가 모두 모였을 때, 나는 하늘에서 수백만의 영광을 입은 자녀들이 옛적 성전에서 그러하였듯이 주님께 호산나를 부르며 거대한 승리의 행진을 하는 것을 그려봅니다.

다음에는 순교자들 순서입니다. 일전에 땅위의 공의를 부르짖던 그들이 지금은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칩니다. 모두가 “승리, 예수안의 승리”를 외치며 기쁘게 춤을 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힘찬 함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것은 온 나라들과 족속으로부터 온 많은 무리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아마 당신에게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릴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울 자신이 이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이 신실한 사도가 하늘로 이끌려 갔을 때,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 할 말...”(고후12“4)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그 곳에서 들은 말로 인해 휘청거렸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것들이 바로 그가 들었던 소리라고 믿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그들의 완전해진 몸으로,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찬 그들의 영혼으로 하나님의 존전에서 기뻐하며 하나님께 노래하며 찬양하는 전야제를 본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소리였기에 바울이 들을 수는 있었으나 흉내 낼 수는 없었습니다.

2008년 5월 19일 월요일

그리스도의 평강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든지, 모든 상황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그런 평강이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이 말씀은 제자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자신의 평강이 된다는 것은 거의 믿을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과거 3년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목격하고 경이로워 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항상 평온하셨고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적인 일로 진노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때로 그분은 흥분하셨고,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평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화목하셨고, 시험에 직면하여서 평화로우셨으며, 거절당하고 조롱당할 때에도 평강을 누리셨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 사람들이 공포에 떨 때에도 그분은 갑판에서 주무실 정도로 평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분에 찬 무리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높은 벼랑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동요하지 않고, 평강으로 가득 찬 채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 나가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보고 제자들은 의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폭풍가운데서 어떻게 주무실 수 있을까? 저 무리들이 낭떠러지로 던져 버리려고 했을 때 어떻게 그렇게 평온하실 수 있었을까? 사람들이 조롱하고, 모욕하고, 침 뱉어도 그분은 전혀 대응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평강을 깨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은 지금 이들에게 바로 그 평강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 약속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경이에 차서 서로를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갖고 계신 바로 그 평강을 갖게 된다는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덧붙여,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감각이 마비되고 이 세상을 벗어난 환각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물질로 마음의 평강을 사려고하는 부유하고 유명한 자들의 일시적인 평강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평강,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했을 때 그것은 마치 그분이 그들과 또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앞으로 직면해야 할 시기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다. 너희는 내가 곧 겪어야할 십자가와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너희 마음을 평강의 자리로 인도하기 원한다. 너희는 너희 안에 지속되는평강이 없이는 다가오는 일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는 내 평강을 소유해야만 한다.”

2008년 5월 16일 금요일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바울이 로마에서 재판을 앞두고 있었을 때, 그는 험악한 상태에서 갇혀있었습니다. (빌1:13-14 참조) 그는 양발이 한쪽씩 병사들에게 쇠사슬로 묶인 채 24시간 친위대 병사들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이 병사들은 무례하고, 강퍅하며 수시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들은 산전 수전을 다 겪었기에 그들의 임무 상 모든 옥에 갇힌 자들은 바울을 포함해서 죄를 범한 범죄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당했을 모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홀로 있는 시간이 전혀 없었고 자유로운 시간이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모든 친지의 방문은 철저히 감시당하였고 아마도 간수들이 바울의 대화를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대우를 받으면서 그 경건한 사람의 위신은 완전히 발가벗겨지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이 사람은 아주 활동적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 대로와 공해를 통해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울은 그 지역 전체에 걸쳐 자신이 세워놓은 교회들을 방문하는데서 가장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쇠사슬에 매여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퍅하고 불경스러운 자들에게 묶여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바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는 “왜 하필 나란 말인가”하며 진부한 자기중심적인 질문을 되 뇌이며 병적으로 비뚤어진 감정으로 돌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는 “나는 여기 묶여있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영혼들을 추수하며 기뻐하는데 내 사역은 중단되고 말았다. 왜?”라는 생각에 온전히 휩싸여서 자기 논리에 따라 결국은 소망이 보이지 않는 우울증에 빠져들어 절망의 구덩이로 기어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신, 바울은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나의 현재 상황은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광을 가져다 드릴 것인가? 내 시련을 통해서 어떤 위대한 유익이 있을 것인가?” 이 하나님의 종은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현재 나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 이런 상태로 죽게 될 확률이 크다. 하지만 나는 주님이 나의 발걸음을 명하신 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크게 높일 것이며 이 쇠사슬에 묶여있는 동안 세상에 간증이 될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바울의 태도는 우리가 우리의 불행과 근심의 어두운 구덩이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줍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불안하게 기다리면서 우리의 미래를 낭비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주안점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나는 기적과 기쁨을 완전히 놓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의 선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동정하지 마십시오. 또는 내가 내 미래 때문에 낙담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사역이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나는 쇠사슬에 묶여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전파되고 있습니다.”

2008년 5월 15일 목요일

머리카락을 만져 보아라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를 곤고하고 두려운 시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민족들이...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눅21:26, 25).

이러한 재난에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앞으로 다가올 두려움에 대한 그분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께서 참새를 돌보시는 모습과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한 올 까지도 세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주셨습니다. 이 모습들은 예수님이 그것들을 주실 때의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분은 열두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성읍과 마을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내시면서 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막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종류의 병과 질병들을 고치는 권세를 부여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흥분된 순간이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기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직후 그들의 주인은 이처럼 두려운 경고를 하였습니다.

“주머니에 아무 돈도 가지지 말라. 그리고 집도, 잠들기 위한 지붕조차도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는 이단이라거나 마귀라고 불릴 것이다. 너희는 회당에서 매 맞고 재판관 앞으로 끌려가고 감옥에 던져질 것이다. 너희는 미움을 받고 경멸당하고 배신당하고 핍박당할 것이다. 너희는 돌에 맞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도망 다녀야 할 것이다.“

자,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이 휘둥그레 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틀림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이렇게 의아해 하리라고 상상해 봅니다. “무슨 사역이 이렇단 말인가? 이것이 나의 미래란 말인가? 이것은 내가 들어 본 중에서 가장 침울한 인생 전망이로구나.”

한데 바로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마10:26,28,31).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모든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항상 참새를 지켜보신다. 그분의 눈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너희를 얼마나 더 항상 지켜보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의심이 밀어 닥칠 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리고 네가 겪고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여기 안식하고 확신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창문 밖의 작은 새들을 보아라. 그리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져 보아라. 그 후에 내가 네게 말한 것을 기억하여라. 저 작은 새들이 너희 아버지께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네 머리카락은 그분에게 너희가 얼마나 더 귀한 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분의 눈은 언제나 너를 지켜보신다. 네 모든 동작을 보시고 들으시는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
우리 아버지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이렇게 돌보십니다.

2008년 5월 14일 수요일

생명의 말씀을 밝혀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6).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의 존전에 서고 구속의 비밀들이 밝혀지는 날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날에 우리의 눈이 열리고 주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분이 우주의 모든 신비의 베일을 벗기고 그 배후에 있는 자신의 권능을 보여줄 때 불타오를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가 이세상의 고난을 겪고 있을 때 우리에게 제공되었던 모든 것의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과 자원들, 수호천사들, 그리고 항상 거하시는 성령의 임재.

우리가 이러한 것들의 위엄을 보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내내, 나의 전사들이 네 주위에 진치고 있었고, 강력한 사자들의 전 군대가 너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너는 결코 사탄으로 부터의 위험에 처해 있지 않았다. 너는 전혀 너의 미래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에 주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실 것 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하늘 아버지의 위엄을 볼 때 우리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관심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며 갑자기 진리가 우리에게 전력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이분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진실로, 가장 위대하신 ‘스스로 있는 분’”.

이것이 바로 바울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말씀을 밝히고’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날에 그는 주님의 존전에서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눈이 멀었었단 말인가? 왜 나의 주님의 목적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을까? 나의 모든 근심과 의문들은 헛된 것이었다,”라는 생각에 잠겨있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나는 그날 내 눈이 활짝 열렸을 때 기뻐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했고, 또 내가 의심으로 가득 찬 채 수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앎으로 모든 계시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내 고통에 대한 모든 반응가운데 생명의 말씀을 밝혔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나의 주님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확증했다는 것을 알기 원합니다.”

그리고 나서 요약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3). 한마디로, 그는 먼저 자신의 과거를 주님의 손에 내려놓지 않고는 미래를 내려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8년 5월 13일 화요일

주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이 말은 빌립보인들에게 보내는 바울 서신의 끝맺음 말입니다. 바울은 “나는 감옥에 갇혀있고 이 족쇄들은 축복입니다. 나는 이 고통으로 인해 아주 행복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바울이 매일 출감을 위해 기도하였고 때로는 견뎌낼 힘을 달라고 부르짖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도 그분의 시련과 고통의 때에 아버지께 부르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맨 처음 충동적으로 “왜?”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부르짖음을 참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만일” 또는 “왜”라는 질문에 답을 예비해두셨습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7-18).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이 고통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욕되게 하거나 무력하게 보이지 않게 하도록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나의얼굴로, 나의 안식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전파하는 복음이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누구든지, 불이나 홍수나 어떤 상황을 거쳐야 하든지, 지켜주실 수 있다는 확증이며, 그분의 복음은 체험을 통해서 전파될 것입니다.”

내가 바울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듣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어떤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역할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두고 그분이 우리를 돌보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하면, 우리의 주변상황에 상관없이 그분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특별히 우리의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우리 안에 최대로 계시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장로 중 한분인 쌤이 나에게 이렇게 말 한 적이 있습니다. “데이빗 목사님, 당신이 고난에 반응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하나의 간증이 됩니다.” 쌤 장로가 모르는 것은 그의 삶이 나에게는 하나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는 만성 통증 때문에 매일 밤 두세 시간 밖에 잠을 못자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맹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그의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간증입니다. 그의 삶은 바울의 어느 설교만큼이나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현재 고난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습니까? 당신 가족이 당신 안에 역사하는 복음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은 단지 공포, 절망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문만을 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2008년 5월 12일 월요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전 세계는 지금 지구 도처에서 발생하는 테러와 재난으로 인해 떨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또 다른 재난 소식이 들립니다. 어떤 관측자들은 우리가 지금 세계 3차 대전의 시초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런 해결책이 없으며 모든 것을 두루 통찰하는 관리체계가 없기 때문에 만사가 소용돌이쳐 혼돈으로 치닫는다고 확신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반복해서 기억하게 하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의 지식과 통치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22:28). 마찬가지로, 이사야 선지자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사34:1).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시오, 나라들이여, 내게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세상의 창조자에 대해 중요한 말을 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라들과 그들의 군대에 대하여 불일 듯 할 때, 주님 자신이 그들을 몰살당하도록 넘겨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여기느니라......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사40:15,17,22,25).

이사야는 그리고 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상하고 곤고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는 조언합니다.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영광스러운 하늘을.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뭇 별들을 보십시오. 당신의 하나님이 지으시고 각각 이름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저 별들보다 더욱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는 하늘에 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역사를 진행하실 개요를 계획해 놓으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태초부터 종말을 알고 계십니다. 이 계획이 결실하게 될 때,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모든 와중에 주님의 눈은 어디를 주목하고 계실까?” 하나님의 눈은 이 세상의 양철조각 우상같은 독재자들이나 그들의 위협에 주목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폭군들의 폭탄이나 군대나 권력이 주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그분은 그들이 그저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고 비웃으시고 곧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사40:23-24참조).

2008년 5월 9일 금요일

나는 헛되이 수고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루신 것이 없다는 느낌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알면 놀라시겠습니까?

이사야 49: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이 말은 이사야의 말이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성숙한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오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사49:1,5)에서 묘사된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분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미 수없이 읽었던 이 구절에 부딪쳤을 때 나는 의아했습니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라는 말은 지금 막 아버지께서“너는 나의 종이요...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자라고 선포하신 것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대답을 읽게 됩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사49:4).

이것을 읽고 난 후 나는 서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이 당면하는 것을 체험하며 아버지께 고백하시는 이토록 취약한 분이시었다니 믿을 수 가 없다. 그분은 인성을 가지시고 똑같은 좌절, 똑같은 낙심, 똑같은 상처를 맛보셨다. 그분은 내가 내 자신의 인생에서 가졌던 생각들 - ‘내 생각에는 이러한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내 힘을 낭비해 버렸구나, 모두가 헛수고였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이 말씀들을 읽으며 나는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히브리서 4:15이 단순히 진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진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 그분도 바로 이와 똑같은 사탄의 시험을 알고 계시고, 똑같이 참소하는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너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네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네 모든 수고한 것의 열매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부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

예수님이나, 또는 하나님의 사람 어느 누구나, 왜 “헛되이 수고하였다” 같은 절망적인 말을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세대에 걸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듯 낙담스런 말이 나오도록 위축되어 버렸을까요? 그것은 모두 높은 기대치에 반하여 작은 성과를 측정한 결과입니다.

당신은 아마 “이 메시지는 사역자들이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나 성경의 선지자들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본다.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거대하고 공통된 목적, 하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과 한 치도 틀림없는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

2008년 5월 8일 목요일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

이사야 49장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투쟁을 알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당신에 앞서 싸웠습니다. 당신의 수고가 헛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견디는 것이나, 산산 조각난 기대 때문에 실패감으로 낙담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몸소 체험 하셨고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지옥으로부터 난 거짓말이 당신의 영혼을 곪게하고 불사르게 내버려두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그러한 좌절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49:4). (이탤릭체 저자 임의 사용) 여기서 판단이란 말의 히브리 원어 의미는 “판결”입니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마지막 판결은 나의 아버지께 달려있다. 내가 행한 모든 것과 내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에 대해 그분만이 판단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나를 대신해서 네가 한일에 대해 판결 내리는 일을 멈추어라. 네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판단하는 것은 네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너는 네 자신을 실패자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너는 아직 네가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알지도 못한다. 너는 네게 다가오고 있는 복을 알아보는 눈이 전혀 없단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영원 속에서 그분 앞에 서기까지는 이런 무수히 많은 일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49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 이스라엘은 아직 모아지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지파들을 모아들이라고 너를 불렀고 그 일은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부름은 네게 다가오고 있는 일에 비하면 단지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가 비장해두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온 세상을 위한 빛으로 만들 것이다. 너는 온 지구상에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사45:5-6 참조).

마귀가 당신에게 당신이 헛수고를 하였다고, 당신의 기대가 충족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영광 중에 더욱 큰 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 또는 구하는 것을 너머 더 나은 것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대적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성령께서 우리가 좀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그 안에서 안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절망으로부터 일어나 이 말씀위에 서야 합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2008년 5월 7일 수요일

나에게 너의 모든 내일을 맡겨라

주님은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믿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한사람을 택하셔서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일어나 가기를 원한다. 모든 것, 너의 집, 네 친척, 네 나라조차도 뒤로하라. 나는 너를 어떤 곳으로 보내기 원한다. 가는 도중에 그곳으로 가는 길을 인도해 줄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주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왜 하나님은 온 나라들을 뒤져 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부르셔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도도 없이, 방향도 예상 못하고, 목적지도 모른 채 여행길에 오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어떻게 먹이고 필요를 채우실지 결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멀리 가야하는지 또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지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애초에 두 가지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그리고 “내가 길을 보여 주겠다”.

요점만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늘 이후로, 나는 네가 너의 모든 내일들을 내게 맡기기를 원한다. 너는 네 남은 생애 동안 너의 미래를 한 번에 하루씩 내손에 맡기고 살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너에게 한 언약에 너의 생애를 의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것을 행하겠다고 결단하면 내가 너에게 복주고 네가 상상해 본적이 없는 곳으로 너를 안내하고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도하여 가시고자 하는 곳은 그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을 데리고 가기 원하시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학자들이 “모형 인간” 부르는, 즉 주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하는지 그 예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 결단으로 부르셨을 때 그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의 가족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계획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의 경중을 달아보며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에 대해 염려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우리의 모든 내일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라는 똑같은 부르심에 청종하였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008년 5월 6일 화요일

아버지께서 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며 우리의 미래를 전부 그분의 손에 맡기는 삶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마6:31-14).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미리 계획을 세우지 말라거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일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내일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짧은 단어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만일.

“만일 경제가 악화되어 해고당하면 어떡하나? 집 대출금을 어떻게 갚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까? 만일 건강 보험을 잃게 되면 어떡하나? 내가 병들거나 입원하게 되면 우리는 파산할 텐데.” 또는 “만일 고난이 닥쳐올 때 내가 믿음을 저버리면 어쩌나?” 우리 모두는 수천가지 “만일”로 인해 근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만일”을 중단시키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너희를 돌보실지 알고 계신다.” 더 나아가 “너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너희 아버지께서 네가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너를 절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신실하게 너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너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26, 28-30).

우리는 과거 우리가 지은 죄들을 주님께 넘겨드림으로 즐거이 우리의 모든 어제를 그분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지난날 실패들, 의심들, 두려움들을 용서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꿈을 붙들고 있을 권리를 원하면서 우리 미래에 굳게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져서 계획을 세우고는 후에 그 희망과 욕망을 축복하고 이루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2008년 5월 5일 월요일

평강과 안전

나는 다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로 부터 표류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나태해지고, 영적으로 태만해지며, 기도없는 삶에 휩쓸리고, 며칠 씩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 지낸다고 생각하면 몸이 떨립니다. 나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 악한 표류의 “영적 쓰나미”를 목격했습니다. 교단들 전체가 무감각이라는 폐허를 흔적으로 남기고 지나가는 이 쓰나미의 물결에 휩싸여버렸습니다. 성경은 신실한 신자들도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할 수 있다고 명백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평강과 안전을 추구하고 그저 구원에만 매달려있는 크리스천은 비싼 영적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하거나 그토록 위대한 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그 방법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2:1).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빨리 속독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루에 많은 장을 읽는다든지, 또는 성경을 빨리 통독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뿌듯한 성취감을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읽은 것을 영적인 귀를 열고 “듣는” 것이고, 그것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마음가운데에 “들리게”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부동하게 머물러 있는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2:1)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바울은 이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들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서 당신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영적 재고 조사를 해 보십시오. 당신은 예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알기에 당신이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분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셨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구속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당신과 그리스도의 교제는 어떠합니까? 당신은 아주 근면하게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까? 당신의 어려운 때에 그분에게 기대고 있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내 삶에서 조금씩 표류하는 것이 보입니다. 졸음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점점 기도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정도에서 어긋났습니다.”라고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4.)

2008년 5월 2일 금요일

구원자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하사...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벧후2:4-9).

이러한 예들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안위하기위하여 명백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내 동정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두 개의 예를 보여주었다. 세상을 삼켜버리는 홍수가운데서도 내가 의로운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다면... 또한 너도 구해 낼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기적적으로 탈출 할 길을 내지 못하겠느냐?”

“내가 단번에 도시 전체를 태워버릴 불과 유황의 심판을 내릴 수 있다면, 또 그 혼란 속으로 천사를 보내어 롯과 그의 딸들을 구해 낼 수 있다면...네 시련가운데서 너를 구원하도록 천사를 보내지 못하겠느냐?”

의로운 사람을 위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불같은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그의 대적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또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시련에서 구하시기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들이 굶주려 죽지 않도록 기적의 떡과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홍수로부터 노아를 구하시기 위해 방주를 짓게 하시고, 불로 멸망당하지 않도록 롯을 천사로 호위하여 구해내셨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 법을 아시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한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는 단순하게 “하나님이 이미 계획을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진리는, 우리가 그분께 부르짖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이미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깔고 앉아계시지 앉습니다. 다만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일생의 가장 힘든 고난에 얽혀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내실 것인가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쓰인 예레미아 29장에서 보게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었던 가장 어려운 고난 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칠십년이 지나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to give you an expected end(KJV)}”(렘29:11) 마지막 구절은 문자 그대로 “네가 기대 하던 것을 주리라”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되도록 계속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2008년 5월 1일 목요일

가만히 서서 알라

1958년, 나는 일곱 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한 절름발이 소년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는 뉴스를 접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령이 내안에서 너무도 강력하게 감동하셨기에 나는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뉴욕 법정으로 가야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아이들에게 말하라고 나를 충동하신다고 확신하며 법정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날의 공판이 끝나갈 무렵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소년들은 쇠고랑을 차고 옆문으로 인도되어 나갈 것이고 나는 그들을 다시 못 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소년들이 감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기위해 판사석을 향하여 통로를 걸어갔습니다.

그 즉시 경찰들이 나에게 달려들어서 다짜고짜 법정 밖으로 나를 호위해 나갔습니다. 나의 사방에서 온통 플래시가 터지고 나는 이 재판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질문에 둘러 쌓였습니다. 이러한 모욕적이고 민망한 상황에 나는 완전히 멍하여져서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고향의 내 교회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 나는 너무 순진했었다,” 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혼란 가운데, 나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이 나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물론, 취재진들이 내가 보기보다 더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나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므로 이미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습니다.) 소리를 내어 크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하나님은 이 불쌍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늘 나의 침묵의 부르짖음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 법정에서의 민망스런 바로 그 장면으로부터 십대 청소년을 위한 Teen Challenge 사역이 태동하여 오늘날 전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기쁘게 시편 34편에 나오는 다윗의 겸허한 증언을 같이 나눕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듣고 기뻐하리로다” (시34:2).

요점을 말하면 다윗은 여기서 “나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대대로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겸손한 백성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주님은 그분께 부르짖고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아주 바보스럽게 행동 하였을지라도 그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긍휼과 사랑으로 나를 구원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복된 주님은 큰소리든, 소리를 내지 않든, 모든 신실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리석게 행동하였거나 엄청난 믿음의 실패를 했다 할지라도 다만 당신의 구원자에게 돌아와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은 신실하게 당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행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