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31일 수요일

주님의 마음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모든 일은 깊고, 저의 인생을 변화시킨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1957년에 성령님께서 제 안에 애통하는 심령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제 자유시간을 모조리 장악했던 텔레비전을 팔고, 일년동안 세상의 모든것으로부터 차단시키고 온전히 기도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게 고통중에 있는 세상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뉴욕으로 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저는 순종했고, 뉴욕의 거리를 걷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갱단, 마약중독자와 술중독자에 대한 하나님의 무거운 마음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몇 년전에, 하나님께서 저를 더 깊은 교제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수 개월 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의 모든 것 계획, 야망 심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마져도 그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한번 제게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은 오직 기도와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헛된 것입니다.

제가 8살이었을 때, 캠핑 수련회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캠핑장이나 크리스천 수련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텐트나 작은 오두막이 교회에서 부담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저와 그웬은 펜실베니아 주의 체리트리 지역에서 열린 “리빙 워터스 캠프”에 가곤 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극장에 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충만하여 캠프에 오곤 했습니다.

거의 매일 밤 이루어진 집회에서는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나타내시어 모든 사람들이 주님앞에 달려가 무릎꿇게 하였습니다. 저는 한번 지푸라기에 무릎꿇고 하나님의 임재하심 중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너의 삶을 너의 생명을 나에게 주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으로 가득 찬 뜨거운 믿음으로 그 캠프 집회에 온 성도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 사역을 하고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고 저는 수 시간동안 울며 뛰며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섰을 때 저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이 내 삶을 인도하시고 계셨고 그의 마음이 나의 영에 들어왔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마음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어깨위에 주께서 짊어지셨던 마음의 멍에를 짊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 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빛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부터 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사도행전 9:3-4).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임재하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그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바로 사도행전 9장 6절에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살아계신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을 때 당신은 전략이나 온갖 방법을 가르치는 세미나는 필요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거하시며 “언제… 이곳으로, 저곳으로, 이렇게 하거라”라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려주실것입니다.

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악한 인류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올때면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기 위하여 사람들은 바위와 산이 자신들에게 떨어져달라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요한계시록 6:15-16).

타임스퀘어 교회에서는 죄에 관한 설교를 비교적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교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죄를 내려놓았더니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같지 않은 내 안의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합니다. 설교하는것 만으로는 죄를 미워하게끔 만들 수 없습니다.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하심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게 합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자랑합니다. “심판의 날에 나는 엎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나쁜점들까지 모두 들고 당당하게 설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나타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1).

사도요한은 우리의 “형제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요한계시록 1:9)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거룩을 목격하였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몸을 돌이켜…보았는데…인자 같은 이가….그의 눈은 불꽃 같고…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말라”(요한계시록 1:12-19).

당신은 요한처럼 주님 안의 의롭고 많은 환난을 견뎌낸 형제요, 자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 누구도 해처럼 빛나는 능력의 주 앞에서 바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글라스 없이 밝은 해를 바로 쳐다볼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얼굴을 바로 들고 쳐다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날에 우리를 만지시고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될것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다서 1:24).

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생명의 약속 by Gary Wilkerson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한복음 5:45).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데 소망을 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했을때 우리를 고소하는 모세의 목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은 왜 율법에 소망을 두지?”라고 생각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크리스찬들은 항상 율법에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을 주셨으니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할때가 바로 크리스찬들이 율법에 소망을 걸 때입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잠언 13:12). 우리의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소망을 모세에게 걸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데 소망을 둔다면 우리는 참 소망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생명의 약속입니다. 모세의 목소리로 “너는 거룩하지 않아”라는 고발을 당할 때 우리는 계속 개인의 노력으로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나 절망, 고발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믿음을 세우는 반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고발을 들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짓눌러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을 것입니다 ; “그 거짓말을 듣지 말아라.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한복음 8:11).

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믿음의 조상 by Claude Houde

만일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기적과 신성의 삶을 갈망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아브라함에 대해 세밀하며 열정적인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는 단지 구약의 한 평범한 인물도 아니며, 명단에 기록된 한 이름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믿음의 조상”, 즉 우리의 표상이며 모형이자 다림줄이며 기준이 되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서 4:12 참조)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 생동적 부르심을 선포했습니다.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이사야 51:1-4)

당신은 이 구절을 읽을 때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시사하고 있다는 감동을 받습니까? 예, 맞습니다. 학자이자 사도이며 탁월하고 영감에 넘치는 서필로,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세상을 뒤바꾼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16)

독자 여러분, 베일을 벗어버리고 보화를 발견합시다. 영원의 가치를 지닌 영적 금광인 부동의 믿음을 파헤치기 위해, 태초의 책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창세기로 들어갑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세기 12:1-3)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성품과 인생을 특징지었고 단정 지었던 이 부동의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여러분이 방금 읽은 놀라운 언약에 대한 완벽한 성취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성서적 측면과 세계적 관점에서, 아브라함은 역사상 수백만 유대인들의 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켜온 모든 성도의 영적 조상이기도 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십억이 넘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성장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이 보배로운 각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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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이것이 거룩입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거룩함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 (로마서 1:3-4) 진정한 거룩은 그 배후에서 그것을 운영하는 영이 있습니다. 그분의 백성 안에서, 또는 그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곳마다, 당신은 그들 안에서, 순종보다 더 많으며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보다 더 많고, 경건치 못한 것들로부터의 차단보다도 더 많이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순종의 영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순종이란 단지 옳은 일을 행한다든지 그릇된 일을 회피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너무도 즐기는 성도에게는, 그를 자동적으로 빛으로 인도하는 영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20-21)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 임재의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도 그는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거룩의 영이 이렇게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숨겨진 것들이 드러내어 지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지구상의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 종은 빛을 향해 달려나가며, 그가 순복할 때에는 그리스도 임재의 빛만이 그에게 순전한 영광이 됩니다.

그러한 영의 동기를 향한 거룩의 영의 언어를 들어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한일서 3:22) 헬라어 번역으로는 이 구절이 매우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며 큰 열정으로 그것들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교회에서 이 거룩의 영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 제가 믿는 바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형제자매들은 정복자의 미소를 지으며 승리 안에서 당신의 교회에 나옵니다. 그들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는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순종하며 흠 없이 걷는 것을 제 마음에 심어주고 계십니다.” 당신이 이것을 목격할 때 당신의 영은 기뻐하며 당신 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또 한 종이 그분께 기쁨을 가져다 드리는구나! 내 형제자매가 천국을 기쁘게 하는구나!” 당신의 기쁨은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자유마저 초월하고, 마귀의 권능으로부터의 우리의 구원을 넘어서 확산됩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어떻게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지를 우리가 배우는 지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의무감이나 비굴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순종의 영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쁨 안에서 즐거워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므로 즐거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2014년 12월 25일 목요일

하나님의 임재

예수님의 임재에는 죄를 파쇄하고 쫓아내는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시편 68:1-2)

이것이 바로 당신이 기도 골방에서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낼 때 일어나야만 하는 현상입니다. 그분의 경탄스러우며 명백한 임재는 욕정의 더러움과 매연을 폭풍처럼 날려보낼 수 있으며, 타오르는 불처럼 모든 강퍅함을 녹여내립니다. 사악함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소멸됩니다.

"산들이 주 앞에서 밀 같이 녹았도다." (시편 97:5) 이 시편에서 산들은 악귀의 요새와 완고함의 산들을 상징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친교하는 자들에게서 녹아 없어집니다. 우리는 지칠 때까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죄를 폭로하며 죄를 파쇄하는 당신의 권능을 우리 모든 교회에 보내주소서!” 그러나 그분의 임재를 성전 안으로 초청할 수 있는 순결한 마음을 지닌, 기도하는 거룩한 남은자들의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높임 받으실 때까지는, 그러한 기도가 아무 소용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점차 증가되는 죄에 대한 증오심, 즉 죄를 극복하지 못한 당신의 실패에 대한 날카로운 죄의식과, 우세하는 당신의 죄성에 대한 깊어지는 각성이 있기 전까지, 당신은 예수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지니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죄에 대한 부담감은 점차 줄어듭니다. 그분의 임재로부터 더 멀어질수록, 그들은 더 대담해지고 더 교만해져서 더욱 수월하게 타협하는 삶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함으로써 변화되고 정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26-27)

그분 임재 안에서 먹고 마신 자들은 실제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가르치실 때 거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입의 말로 인해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 아래 거했었다고 그들이 시인하지만, 그들이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도 자신들의 죄성과 강퍅함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내게서 물러가라!” 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강력히 드러내시어 그분의 영광과 임재를 발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하나님의 성도들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요. 마음의 질병인 죄의 추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치명적인가요! 당신은 주님께 감히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까? “저는 당신의 임재가 실제였던 교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오히려 그분의 임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면, 그것이 당신께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진정한 부흥

최근에 어떤 네 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지난해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을 때, 우리 교회는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넷은 기도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했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위해 불타오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모임은 열 명으로 불어났고,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 집사님들과 목사님들을 우리 기도 모임에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진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진정한 부흥이란, 예수님을 향한 그러한 강렬한 사랑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려는 새로운 열망과,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나는 순종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태도에 의해 판정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부흥이란, 개인적으로 모든 죄를 자백하고 버리며, 오직 그리스도 임재의 통로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 의한 순종적 사랑으로의 귀환입니다. 부흥은 그러한 사람들 안에서 구현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임재를 그들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이 언제나 그들을 통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꼭 와서 보셔야만 합니다. 수천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어요. 우리 교회는 완전 만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찬양은 참으로 근사합니다.” 저는 이러한 몇몇 교회들을 큰 기대를 하고 방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 모임에서 예수님의 실제적 임재를 감지하거나 경험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회중이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만일 한 선지자가 앞에 나가 이혼, 간음, 사통, 그리고 그러한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악과 혼합된 음악에 대해 폭로했다면, 회중 절반이 걸어나갔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들은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 교회의 어떤 사역자는 약 오십 명의 사람들을 기도실로 초청한 후 판매 광고를 했습니다. 그는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그 교회에 등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교회에는 그분 임재의 수단이나 통로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찬양과 찬송이라고 일컫는 것은 단순히 소음에 불과했고, 저는 그 무리가 소리쳐 오락을 구할 때가 곧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가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오직 스릴만을 원합니다. 제가 이러한 모임에서 나오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순종치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명백하기에, 그들은 진리 안에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을 사랑한다고는 말하지만, 그분께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요한복음 14:23)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그리스도 임재의 충만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어느 성도에게라도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그럼요, 당연하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말만 가지고는 그분 말씀의 거룩한 빛 안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확연히 드러내 줄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 두 가지 증거가 당신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단지 말 뿐이며, 행함과 진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당신의 순종과 (2) 당신 삶에서의 그분 임재의 나타나심입니다.

이 구절은 그 모두를 설명해줍니다. “내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여기서 “나타내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비추다, 또는 터뜨리다”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그리스도의 임재를 발산시키는 도구 또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흔히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당신의 임재를 우리에게 보내주소서. 저희 가운데 오시고, 저희에게 임하시어 행하소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그렇게 단순히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임해서 회중을 놀라게 하거나 압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뿜어주셔서 제사장들이 서서 사역할 수도 없었을 만큼 구약의 성전을 가득 채웠던 영광의 구름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잊고 있으며, 그분의 영광이 임한다면 그것이 우리 심령에 드러나야 하며, 우리 몸을 충만케 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분위기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사실상 천국조차도 그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그분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리고 그분의 성전인 성화된 몸을 통해 나타내어집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6: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19) 왜 우리들의 교회에는 예수님의 임재가 아주 적거나 아예 없는 걸까요? 왜 그토록 많은 교회에 생명이 없을까요? 왜냐하면, 그곳의 목회자나 성도들, 또는 그들 모두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단체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생명이 없으며 기도하지 않는 목자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죽음이 번져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여전히 성전이므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과 그분 임재의 도구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은 각 성도의 책임입니다. 당신의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있다 할지라도, 당신은 그리스도 임재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은혜에 대한 갈망 by Gary Wilkerson

저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성경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실 때,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누가복음 6:18)고 기록했습니다. 이 군중은 그들을 치유할수 있는 이 은혜의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누가복음 6:17) 이 고통 가운데 있었던 군중은 선생으로부터 더욱 분투하라는 설교를 듣기 위해 그토록 먼 거리를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하게 살려는 그들의 고투로 인한 낙심과 질병, 그리고 절망으로 이미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은 단지 “선한” 사람들만 모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생살이의 한계선에 달해 있었고, 그들 삶에서의 참담한 상황으로 인해 주위로부터 소외당했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을 생명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이 목마른 무리에게, 은혜에 대한 예수님의 정평은 실제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분은 은혜에 대해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를 치유하심으로써 그것을 실증하셨습니다.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누가복음 6:19)

제가 어렸을 때는 겸손, 정결, 그리고 자비를 얼마나 잘 실행했는지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정도를 가늠했습니다. 만일 저 자신이 도전적으로 변해가면, 저는 “나는 더욱 겸손해지고 온유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제게 음란한 생각이 들어오면, 저는 “어떻게 해야만 내가 항상 정결한 마음을 유지할수 있을까?”라고 자문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처럼, 저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자비로운 언약을, 제 힘으로 지켜보려는 율법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만일 제가 팔복을 잘 “준수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리, 너는 축복받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군중을 보셨을 때, 그분은 이미 그들 심령이 가난했으며, 겸손으로 무릎 꿇었고,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선한 삶을 살려는 노력으로 탈진되어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그들에게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주께서 깊은 흑암의 공허에 창조를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피폐한 죄인들과 삶의 무게로 녹초가 된 사람들에게 신성한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너희는 애통 가운데 이곳에 왔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하나님 보시기에 축복받았다고 말한다. 너희 가정이 축복받았고, 너희의 수고가 축복받았으며, 너희의 깊은 영혼이 축복받았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혁신적인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오직 구약의 말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희는 저주받았다! 너희는 신명기의 율법에 따라 살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너희 삶이 축복받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정 반대의 말씀을 그들에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내게 예배를 드리거나 고백하기 전에, 나는 이미 너희를 축복했단다!”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용서의 씨앗 by Nicky Cruz

저는 우리 가족이 체험했던 기적을 당신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저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우리가 어렸을 때 살았던 환경과의 차이와 다른 점을 당신이 느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 저는 제 형제자매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서로 대화하는 것보다 제가 더 원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제 고향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를 방문하는데, 그것은 저의 가장 소중한 추억들 중 하나입니다. 제가 집에 갈 때면, 저는 더이상 전도사나 연사인 니키 크루즈가 아니고 단순히 형제입니다. 저는 그저 가족의 한 구성원일 따름이고,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사실상, 제 두 형제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번도 제게 그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제가 집에 갈 때마다 그저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압니다.

제게는 가족과 함께 늦은 밤까지 먹으며, 웃으며, 담소하며, 기도하며, 울었던 수많은 기억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새벽 한 시까지 깨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나눕니다. 그것은 마치 큰 축제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행복하고 서로에게 스스럼없으며 서로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으로 들어오셨을 때, 그분은 폭발과도 같은 사랑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자비와 용서의 폭포수를 여셨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과거의 많은 아픔이 있으나, 어느 누구도 분노의 감정을 지니고 있거나 원한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차간에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후회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은 장래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가족들을 보는 것은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형제자매들은 오래전의 비통함과 분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과 행위로 인해 상처받은 남편과 아내들은 그 아픔이 점점 커져 곪아 터지게 하며, 암세포와도 같이 그들을 좀먹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심령에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기 위해 오실 때, 그분은 용서 이상의 것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용서의 씨앗을 남기십니다. 초자연적 씨앗은 죄를 지울 뿐 아니라 죄가 가져다준 고통까지 지워줍니다.
저는 우리 가족을 위해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가져다주신 용서와 자비, 그리고 은혜는 우리를 다시 화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와 똑같은 것을 여러분의 삶에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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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가엾이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오미는 마지막으로 룻에게 집으로, 모압땅으로 돌아가도록 권장하지만 룻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룻은 그를 붙잡았더라”(룻1:14). 이 구절은 마치 여종이 주인의 허리를 붙잡고 절대로 놓지 않겠노라하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룻은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룻이 유다 땅으로 넘어가자마자 그녀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표지판은 없었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는 축복의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다음 끼니는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들이 도착한 지역은 수확의 시기였습니다.

룻은 무일푼이었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덕목있고 선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여인이었습니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기 2:2). 정말 몹시 가난한 사람들만 그런 일을 하던 때였습니다. 법적으로 땅의 주인들은 가난한 사람들도 수확도 하며 남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땅의 모퉁이에서는 수확을 하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 19:9-10).

룻의 헌신은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의 땅으로 오게하고 그녀로 하여금 최저임금 직업의 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가난 이하의 빈곤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자세히 보십시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당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죽기까지 짊어진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악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린도전서 4:9-13)

그러나 여러분, 룻을 측은하게 여기거나 가엾게 여기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그녀는 그리스도를 곧 영접할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경계를 건너는 것

룻기 1장에서 나오미, 오르바 그리고 룻은 모압과 유다의 경계지역에 도착하여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온전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들의 이름의 뜻에서 우리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이름은 은혜, 오르바의 이름은 고집센, 그리고 룻의 이름은 친구, 동료 라는 의미입니다.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의 약속을 시험하기 위해 대면을 합니다. 그들에게 유다로 간다는 것은 정이나 몇마디 말로는 표현 못하는 여러가지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보상이나 큰 뜻을 보장받지 못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유다로 시어머니와 함께 끝까지 동행하거나 다시 모압으로 돌아가는 두가지의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안락함과 번영과 성공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기 보다는 고생과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적인 부에 대한 보장은 없고 오직 믿음으로 걷는 길만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사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권하고 있었습니다.(룻기 1:8-9 참조)

오르바와 룻은 이 얘기를 듣고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룻기 1:9-10). 오르바의 이름에서 온 의미에서부터 우리는 그녀가 울며 통곡하며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강하게 말하였지만 그녀는 포기하고 우상숭배의 모압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녀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저는 나오미가 오르바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오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여운 아이구나! 완전하신 하나님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의 쾌락에 더 마음이 있구나. 나와 함께 간다고 하여도 늘 후회하면서 슬퍼하겠지..”

그리하여 나오미는 “돌아가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마음의 결정을 내립니다. “저는 모압으로 돌아가서 저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섦기겠습니다. 저는 일단 제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저의 과거를 청산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룻 1:14). 이 구절의 원어를 보면 문장의 마지막에, “돌아갔더라” 라고 더해져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몇몇 분들은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속의 무언가 이를테면 예전의 세상적인 친구들 또는 옛 사랑들이 당신을 끌어당기고 있습니까? 

나 오미는 오르바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룻기 1:15). 이같이 어떠한 우상이 당신의 마음에 자리잡아 있습니까? 여러분의 과거 속에서 당신이 내려놓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기근의 끝

나오미는 유다 땅에 기근이 멈추고 하나님께서 양식과 축복을 더하여 주셨다함을 듣고 과거에 영혼을 채워주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거룩한 곳,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모압과 그의 우상숭배, 죽음 등이 지겨워진 상태였습니다.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룻기 1:6-7)

나오미의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그들의 부모님과 친지,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을 만나주시는 유다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민족을 다시 한번 만나주십니다! 다시한번 기근의 끝이 왔습니다! 우리 타임스퀘어 교회와 전 세계의 교회들에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을 만나주실 때에는 “그들에게 양식을 주십니다.”

말씀의 마지막 기근이 있을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모압인, 육신적인 것, 나태, 냉담, 쾌락 그리고 성공으로 떠났을 때 거룩한 하나님의 민족 또한 견디어냈습니다. 그들은 자화자찬하는 텔레비전 방송용 설교자들과 하나님의 집을 휩쓴 추악한 음행 그리고 강대상 위의 어리석은 목회자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크리스천들의 비웃음 등 모두를 인내를 갖고 견뎠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중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의 민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타임스퀘어 교회가 왜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로 가득차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소문이 납니다. 기근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양식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그 양식을 맛보지 못하였다면 지금 바로 모압을 떠나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을 만나주시는 곳으로 달려가십시요!

그것이 바로 나오미와 그의 두 며느리가 한 것입니다. 그들이 모압으로부터 유다로 향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 땅의 민족을 만나주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수 천명의 사람들이 얕고 가벼운 번영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자기자신의 욕망을 위한 믿음과 세상속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의 갈등 속에서도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 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룻기

룻기는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 여자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마음을 얻은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룻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예언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할 때 룻이 보아스의 마음을 얻은것과 같은 과정을 겪어야하기 떄문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11). 바울은 이렇게 성경 속의 이야기가 그저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기1:1).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이스라엘인 엘리멜렉,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유다를 떠나 모압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엘리멜렉은 그곳에서 죽었고, 나오미의 두아들은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모압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모압에서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압은 악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우상숭배의 나라였습니다. 모압족속은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모압이라는 이름은 간음, 사통,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민족을 유혹하여 결국에 24,000명을 전염병으로 죽게 만든 것도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압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명령하였습니다.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열왕기상 11:2).

영 적인 시각으로 볼때에 하나님 말씀의 기근이 있을 때 똑 같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민족들은 세상으로 향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가고 세상적인 사람들과 혼합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의 기근은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세상적인 것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차가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진실한 영적인 양식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가지만 듣는 설교는 얕고 가볍습니다. 즉 적절한 영양소, 생명의 물이 없고 즐길만한 엔터테인먼트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들에 불륜, 이혼, 세상적인 음악, 비성경적인 철학, 뉴에이지 가스펠이 급속히 퍼지고 있는 이유고, 우리 청년들은 마약을 사용하며 점점 성적으로 난잡해 지는 것있니다. 교회안에서 말씀의 기근은 믿는이들을 우상숭배의 장소인 모압으로 몰아가버렸습니다. 모압은 나오미의 아들이 일찍이 죽었듯이 청년들이 죽는 곳입니다.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축복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by Gary Wilkerson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하기엔 너무 좋아 의심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신이 의로운 그리스도인임을 보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로마서 6:15-17).

바울이 이 설교에서 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속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전처럼 계속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7:4).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우리는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함과 평강 그리고 기쁨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얽매임에서 풀려나고, 다윗처럼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편 40:8)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굶주린 영혼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어있는 어떤 것에서 생명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안의 죽고 시들어진 영혼에 부활과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사람의 지혜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바울이 언급한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구절처럼 – 슬픔과 상처로 애워싸인 당신의 삶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축복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은혜중에 주신 새 생명 안에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의 삶에 축복과 은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받으십시요!

2014년 12월 13일 토요일

그날이 올 것입니다 by Jim Cymbala

사도 바울은, 어느 날 우리의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나리라.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3-14) 나무, 건초, 밀짚들이 불타 없어질 때, 금과 은, 그리고 보석들은 견뎌내고 남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일의 양으로 시험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출석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일의 질에 모든 초점이 맞춰질 것입니다.

시카고 무디 교회(Moody Church) 목사였으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라디오 방송의 연사였던 워렌 워스비(Warren Wiersbe)는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 사역자들에게 이 구절에 대해 그의 흥미로운 관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물질들에 있어서, 물론 한 그룹은 불연성이고 다른 그룹은 그렇지 않다는 것 외에 서로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저는 나무, 건초, 밀짚들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집 문만 열면 있는 것들이고, 아니면 기껏해야 몇 마일 거리 밖에 있습니다. 어떤 숲에도 어떤 농장에도 그것들은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금과 은, 그리고 보석들을 원한다면 땅을 파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은 많은 노력을 쏟아야만 그것들을 찾을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무 데나 굴러다니지 않습니다. 당신은 땅속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게는 이 말이 심오하게 들립니다. 나무, 건초, 밀집을 사용하는 영적 “공사”는 쉽습니다. 그것은 고생도 산고도 없는, 약간의 노력과 약간의 열심만으로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척척 쌓아서 잠깐동안은 그럴듯하게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심판 날에 견딜수 있는 것을 세우기를 원한다면, 그 일은 더 많은 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당신 주위의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케팅 담당자가 어떠한 권고를 하는지도 중요치 않습니다. 당신과 저는 “불같은” 눈을 가진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전략이 얼마나 근사했었는지를 말씀드림으로써 그분의 호의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불타는 응시를 대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담대하며 신실했는지를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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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순종의 선을 넘어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누가복음 22:31-32)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걷고 계셨을 때, 그분은 험악한 세력의 맹렬함에 대해 잘 알고 계셨으며, 사탄이 주님의 제자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지옥의 온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공격해 오는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지금 영적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분쟁의 갈등을 알거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굳힌 성도들을 파멸하기 위해 사탄이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여정에서 우리는 어떤 선을 넘게 되는데, 저는 그것을 “순종의 선”이라고 칭합니다. 그것은 지옥의 모든 경종을 울립니다. 당신이 절대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의 결단을 내리며, 그 선을 넘어 순종의 삶과 예수님을 의존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어둠의 왕국의 위협이 되며 정사와 권세의 표적이 됩니다. 거룩을 추구하고 예수님과의 더 깊은 동행을 갈망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로 돌이키는 모든 성도의 증언은, 기이하며 극심한 문제들, 환란, 시험 등이 그들의 삶에 급작스럽게 돌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당신이 한때는 파트타임 제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했으나 영적으로는 태만했습니다. 당신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성도가 아니었거나, 영적인 것들을 제한했습니다. 당신은 광신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당신의 삶에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마귀는 당신을 그다지 귀찮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당신 삶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당신께 살아 역동하고, 당신은 기도하고 울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닥친 시험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은 바뀌었습니다. 당신이 체험한 이 심령의 변화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순종의 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순종의 선을 넘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누가복음 22:32)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마지막 건넘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강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강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 강을 건너니라." (여호수아 3:13-14, 17)

요단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자유로 들어가는 것을 은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자신 안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항상 우리를 무언가로부터 끌어내십니다! 사탄의 능력으로부터 탈출하여, 속박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여기서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영적 전쟁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놀라운 승리와 기쁨, 즐거움, 그리고 충만함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까지 왔을 때는, 더이상 낮의 구름 기둥과 밤의 불 기둥에 의해 인도받지 않았고 (출애굽기 13:21), 대신 언약궤에 의해 인도받았습니다. 우리는 요단 강으로 들어가는 언약궤 (예수님의 표상), 죽음으로 그 자신을 몰입시키며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언약궤를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분 안에서 세례를 받도록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요단 강을 나오면서 이스라엘 자손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상징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길갈에 진을 치매…" (여호수아 4:19) 이 시점에서 그들은 보혈로 인치심 받았고 원수의 능력으로부터 구원받았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 땅 안에서의 새 생명으로 부상했습니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당신은 주님의 마음을 얻었습니까?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8)

당신은 주님의 마음을 얻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가 과거의 삶을 포기하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사로잡혔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어”야 했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 사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계셨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을 얻기로 작정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울의 온 존재—그의 사역, 그의 인생, 그의 모든 삶의 목적은 오직 그의 주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쓰레기였습니다! 바울이 결혼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 “주께 속한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하려는” (고린도전서 7:32) 시간을 더 많이 드리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성도들에게도 그처럼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너희가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골로세서 1:10)

그와 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적일까요? 어쨌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아닌가요? 사실상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온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유형의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나 있을 수 있는 친밀한 사랑을 말하며,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솔로몬의 아가서에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그분의 신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낫구나." (솔로몬의 아가서 4:9-10) 그분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6:5) 그분의 신부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7:10)

저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그들의 주를 너무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고, 지극히 순종적이며 다른 모든 사람과 너무도 구별되는, 그분의 마음을 황홀케 하는 거룩한 자들로 구성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구절에 사용된 단어 “ravish”는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단 한 번 보는 것으로 그분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솔로몬의 아가서 4:9) 그 한 번 보는 눈은 그리스도 한분께만 집중된 일편단심입니다.

2014년 12월 9일 화요일

애굽의 수치

여호수아 5장에서의 이스라엘은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며, 영광과 권능의 극치에 달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그들 원수의 마음은 녹아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더이상 정신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5:1) 2절은 “그때에”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승리와 축복,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의 때였고, 그들이 들어가 막 땅을 차지하려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동을 거셨습니다. “모든 것을 멈추어라! 문제가 있다. 더 큰 승리가 눈앞에 있고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으나, 한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너희 마음속에 아직도 애굽의 수치가 남아있는데, 그것은 잘려지고 버려져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너희의 타락과 불평,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너희의 탐욕에 대해 끈기있게 참아왔다. 너희 아비들은 광야에서 열번씩이나 내 화를 돋웠으나, 나는 그 모두를 용서했다. 애굽의 철 용광로에서 핍박당하고 있는 너희를 발견했을 때, 나는 너희를 씻겨주었고 보혈로 감싸 보호했으며, 너희 원수들로부터 너희를 구원했다. 그러나 너희는 그동안 내내 마음속에 숨은 죄를 간직해왔다. 너희는 너희 마음속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우상을 내려놓는 일을 거부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그들 마음속에 우상숭배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희생물과 헌물을 내게 드린 적이 있었느냐? 오히려 너희가 너희의 몰락의 장막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너희 신의 별을 가지고 다녔나니…” (아모스 5:25-26) 그 수치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축복, 그리고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 마음속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으나, 또 다른 신이 그들 내면의 동기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선조들의 우상을 그들 짐보따리에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경탄스러운 음성조차도, 애굽에서 가져온 그들의 금 신상들과 신당들을 포기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상들에게 의존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계속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그때까지는 인내하셨으나 이제는 그들에게 최후통첩을 하셔야 했습니다. “이제 나는 오직 거룩한 자들과만 함께 갈 것이다. 너희 앞에 기쁨과 평강의 삶이 기다리고 있으나, 너희가 그 수치를 지니고 있는 한 이제는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을 잘라내라! 칼을 갈아라! 지금부터 육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상숭배를 그쳐라! 정욕을 쫓지 말라! 비밀스러운 그 수치를 버려라!”

2014년 12월 8일 월요일

은혜의 축복을 받으라 by Gary Wilkerson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삶이 의의 저울인 양 생각합니다. 저울의 한쪽은 그들의 모든 경건한 행위들이고, 다른 한쪽은 커져만 가는 죄와 실패 더미입니다. 만일 그들의 삶이 실패 쪽으로 많이 기울어가면, 그들은 기도를 더 해야 하고 성경 말씀을 더 공부해야 하며, 교회에 더 잘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한 행실들이 아무리 증가한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만들어놓은 의의 저울을 공평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최근 저는 운전석에서 주문하는 패스트푸드점 창구의 장면을 찍은 비디오 클립을 보았습니다. 운전석에서 한 고객이 주문을 마쳤을 때, 창구 직원이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원하시나요?” 이 말에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 그 고객은 감자튀김을 주문에 첨가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창구에서 같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하세요?” 순간적으로 당혹한 나머지 그 고객은 디저트까지 주문했습니다. 그런 후에도 또 그 직원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리고요?” 마침내 그 고객은 운전석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뇨, 아뇨, 아뇨! 더이상 ‘그리고요?’는 제발 그만하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력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끝내 이렇게 외치는 순간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그리고요?’를 더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왜 그토록 탈진을 느끼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그들의 노력을 “죽은 행실”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절대 의나 기쁨을 산출해내지 못하고 오직 피곤함과 고통을 자아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 없고 오직 죽음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로마서 5:17) 만일 죽음이 당신의 삶을 지배한다면—만일 당신이 죄의 끊임없는 비난의 무게를 느끼며, 당신이 행하는 어떤 일에도 만족하지 못한다면—당신은 아담 성향의 퇴색된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당신의 정체성과 상반되는 그러한 오랜 성향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육적 시도가 태동합니다.

바울은 같은 구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은 (아담의 범죄를 초월하여) 더욱 위대하다.” 우리가 어떻게 이 의를 취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선물을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을 넘어선 승리 안에서 살 것이다." 우리는 모든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끔 되어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고 예수님 한 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너희 자신이 만든 저울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지 아니하느냐? 나는 절대 나를 기쁘게 하라고 너희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한 가지를 하라고 너희를 불렀다. 그것은 내 은혜의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2014년 12월 6일 토요일

주님의 칼 by Carter Conlon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명이 이경 초에 진영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사사기‬ ‭7‬:‭19-21)‬

온 적군은 기드온과 그의 삼백 군사 앞에서 도망갔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나팔을 불며 손에 들었던 항아리를 부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논리와 모든 인간의 나약함, 모든 자기 비하와 무가치의 관념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다 깨부수고, 그 항아리 안에 있었던 하나님 권능의 상징인 횃불을 들어올렸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이 하나님의 증언이 가리워지는 것을 거부하며 공공장소에 서기를 결심한다면, 하나님은 기드온과 그의 군대에 하셨던 일을 당신에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적군 진영에 혼동을 가져올 것입니다! 성경은 미디안 군사들이 돌아서서 서로 싸웠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가시적 증거가 땅에서 다시 부상했기 때문에 적의 혼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승리가 오늘의 당신과 저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승리는 어떤 한 사람이, 또는 열명이나 스무명, 또는 오십명이나 백명의 사람들이 일어서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변화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그분이 내 마음에 긍휼을 주셔서 이 세대를 향한 목소리가 되도록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내 부족함 속에서도 그분을 믿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드릴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리라 믿습니다.”

지금도 저는 여러분과 제가 이러한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원수가 알기에, 온 지옥이 흔들리는 것을 상상합니다!



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2월 5일 금요일

날카로운 검

요한은 아시아 일곱 교회의 목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계시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감추어진 죄를 보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이신 계시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요한계시록 1:5).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와 제사장”(6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팔소리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0절). 예수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입에서 날선 검이 나오고..”(16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의 값으로 산 교회에게 날선 검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행실이 아무리 착하고, 열심으로 일하며 사랑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하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인내를 갖고 열심으로 일하였으며, 악한자들의 행위를 용납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첫 사랑을 잃고 나른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5).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결코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거짓되고 악한 교리가 점점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요한계시록 2:16).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이웃을 섬기고, 믿음, 인내를 가진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에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새밸의 영이 침투하였습니다. 두아디라교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요한계시록 2:22).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살아있는 교회로 잘 알려졌었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모임이 생명으로 가득차 넘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만이 현실에서는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날선검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날카로운 말씀앞에 우리 모두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2014년 12월 4일 목요일

이집트에 대한 책망을 제거하는 것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여호수아 5:2-3).

저는 지금 할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평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오래된 과정은 오늘날의 교회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언약의 징표로 날카로운 칼로 포피를 제거해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겠습니까!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황야에서 태어나 할례를 받아본적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 후에 그들은 수 일간 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칼로 할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날카롭고 예리한 말씀에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히브리서 4:12). 말씀은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쪼갭니다 :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사도행전 5:33).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에도 :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사도행전 7:54).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할례시켰다고 합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로마서 2:29). “또 그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로새서 2:11).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이집트의 책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적인 것이므로 모두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안의 정욕과 마귀에게 지배받았던 모든 것을 쪼개고 제거하시는 성령님의 수술이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사 성령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설교가 교회에 전해질 때 날카로운 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여호수아들에게 피로 산,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날선 검 아래 세워 우상숭배와 타협의 흔적까지도 모두 제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마지막 떄의 씨뿌리는 자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기쁨으로 씨를 뿌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줄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태복음 25:20-34).

저는 지금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울며 신음하며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진실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악한 무리에 의하여 불구가 되거나 짓밟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세력에 의하여 약해지거나, 혼돈하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수확을 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세명중 두명의 종들이 심판의 때에 가득찬 열매와 완전한 기쁨으로 큰 수확물을 거둬 올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거나 간신히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두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죽은 믿음을 가지지 않을것입니다. 그들은 우울하거나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비유에서 타국으로 갔다가 오랜 후에 종들에게 돌아온 주인입니다(마태복음 25:14, 19 참조). 우리가 바로 그 종들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그 달란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예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계시를 나가서 나누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예수님의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크기에 상관 없이 모두가 나누고 씨를 뿌려야만 합니다.

2014년 12월 2일 화요일

活出基督的生命

「太初有道, 道与神同在, 道就是神。这道太初与神同在, 道就是神。…‧道成了肉身, 住在我们中间(我们也见过祂的荣光, 正是父独生子的荣光)。」(约1:1,14)

有多少的道成了肉身?全然如此!「因为神本性一切的丰盛, 都有形有体的居住在基督里面。」(西2:9) 那麽, 我们要如何靠著祂口里所发的每一句话来活呢?我们要以纸笔来一一记录主的诫命,自律遵行, 直等到它们易如反掌吗?蒙爱的信徒啊,即使经过多年来的传道後, 我还是不懂得主许多宝贵的诫命!

在我看来,讨主喜悦惟一的办法就是:把你的身体献给祂(把「己」挪开), 且让主在你里面活出祂的生命。保罗说:「现在活著的, 不再是我, 乃是基督在我里面活著。」(加2:20) 这并非在心灵上神祕的属灵生活。不!保罗透过同一节经文继续说:「我如今在肉身活著,是因信神的儿子而活…」。

神正在引领我们进入那充满奶、蜜、油和酒的美地, 即神为我们所预备在基督里种种的属灵福份。当我们的身体死亡、被钉、受辱和倚靠时, 主就得著它, 在我们里面和透过我们活出祂的生命。神必不透过肉体, 甚至「良好」的肉体而动工!祂惟有透过圣子耶稣而动工!

保罗是个「好」人, 也就是说, 他既圣洁无瑕, 又持守神的诫命。然而, 这「好」保罗必须灵里天天死亡, 好让主能成就祂的圣工, 且在他里面活出祂的生命。然而, 我们许多人都不想活出基督; 我们只想把祂当作一套衣服, 方便时穿上, 又脱下来!

活出基督并不複杂。首先, 你必须一心一意要得著祂的生命。然後, 你不要背逆神, 乃要把一切交託给祂, 相信祂必全然得著你。最後, 你必须相信, 你倒空自己, 祂就必亲自充满你!

2014년 12월 1일 월요일

진짜 믿음 by Gary Wilkerson

구약성서에 보면, 다윗이 성전의 거룩한 곳에서 경험한 후에 쓴 시편은 오늘날 우리도 많이 암송하며 은혜를 받는 시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편 91:1).

율법으로는 다윗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었으나 그는 들어갔고, 들어간 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성경에서 나오는 수 많은 인물들이 어려운 상황들을 온전한 믿음으로 견뎌냈고, 열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그 인물들 중 하나는 바로 예수님께 귀신들린 딸 아이를 치유해 달라고 간청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마태복음 15:22). 이 여자는 예수님께 큰 소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의 딸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15:23).

이 가나안 여자는 보내버리자고 하는 제자들과 아무 말씀이 없으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끊임없이 애원하였습니다. 성경 이야기에 익숙한 여러분이라면, 예수님께서 끈질기게 구하는 사람들의 비유를 수 차례 하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 “끊임없이 두드리라. 끊임없이 구하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믿음에 응답하실 것이다.”

이 여자가 포기를 일찍이 하는 것이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끈질기게 구하였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5:26). 이 말씀의 의미는 이방인에 비해 우선권을 가진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저는 이 여자의 반응이 더욱 놀랍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15:27). 그녀는이렇게 말하고 있던 거십니다.”예수님, 천국의 능력에 대한 갈급함이오니,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충분합니다.”

그녀가 옳았습니다.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에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께서 딸을 완전히 구원해 주실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소심하게 간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작은 부스러기만한 믿음 만으로도 기적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간청하였습니다.

2014년 11월 28일 금요일

당신의 말씀을 주시옵소서

저는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소위 “떡” 성도라고 칭합니다. 그들은 오직 떡으로만 살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그분의 신실하심을 입증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들에게는 내면으로부터의 갈급함이 있는데, 무엇이 그것을 충족시킬지를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초기 사역의 수년 동안 저 역시 “떡” 성도였습니다. 제게는 설명할 수 없는 필요에 근거한 깊은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제게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제게 주어졌습니다! 제게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믿었을 때, 그것도 제게 주어졌습니다! 제게 돌아선 무리가 필요했을 때, 그들도 제게 주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랫동안 이러한 기도를 해왔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증거하소서! 제가 빚을 지었으니, 빚 갚을 돈을 보내주소서! 주여, 저를 축복하소서! 제 사역을 축복하소서! 제 기도에 응답하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이 모든 권능을 소유했음을 세상에 증명하게 하소서! 당신이 오늘도 동일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병자들을 고쳐주소서!”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그분의 뜻을 알며 행하는 것이 그들 삶에서의 유일한 목표이며,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 대신 “하나님, 순종과 의존의 문제에 있어서 저는 어느 위치에 와 있습니까?”라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서 발견하시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우리가 심판석 앞에 설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치유를 했는지, 얼마나 많은 귀신을 쫓아냈는지, 얼마나 많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또는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성취했는지에 의해 우리는 판결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뜻에 얼마나 의존하고 순종했느냐에 따라 판결받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께 “명하는” 일에 매우 친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와 귀신들에게 명령합니다. 우리는 견고한 진들이 무너지도록 명령합니다. 그 모두는 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렇게 부르짖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오, 하나님! 제게 명령하십시오!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뜻을 어떻게 행해야 할지 제게 보여주옵시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옵소서.”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유일한 공급원, 유일한 희망이 되기를 원한다. 나는 너의 유일한 신뢰의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제 부르짖음은 이것입니다. “오 하나님, 당신이 제정을 주관해 주시옵시고, 단지 당신의 마음만을 제게 주시옵소서. 나의 건강, 가족, 그리고 제 필요들을 주관해 주시옵고, 단지 당신의 말씀만을 제게 주시옵소서.”

2014년 11월 27일 목요일

그분의 말씀을 행하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신명기의 이 말씀은 너무도 강력해서, 예수님 자신도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2-4)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예수님 역시 굶주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히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이끌려야만 했던 것보다 더 큰 굴욕이 과연 있을까요?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그분이 당했던 이 굶주림의 위기와도 같은 고통에 의해 순종과 의존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나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내 육을 잘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버지의 완벽한 뜻을 행하기 위해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 염려를 아버지 손에 맡기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나는 내 모든 삶과 모든 시간을, 그분의 완전한 뜻을 행하며 아버지께 순종하는 데에 드릴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분의 방법으로 나를 돌보아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배고픔은 사라질지어다!”라고 한마디의 창조적 말씀만 하시면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아버지께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양식을 그분께 주실 것도 알고 계셨으므로 먹을 것이나 마실 것, 또는 입을 옷이나 집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보다도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고, 아버지께서 다른 필요를 해결하시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매우 심오한 것을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말씀을 내게 지켜주실 것을 요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그분의 모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한 아버지 사랑의 증거를 보기 위해 기적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말씀 안에 안식했습니다. 그분의 부르짖음은 “하나님, 저를 향한 당신의 말씀을 지켜주소서!” 가 아니었고, 그보다는 “모든 일에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을 행하게 하소서.” 였습니다.

2014년 11월 26일 수요일

완전한 의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신명기 8:7-14, 17)

주님은 여기서 이스라엘은 물론,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험의 목적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16)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에게 곧 부어주실 모든 축복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가르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비록 이스라엘 자손이 보혈로 인치심 받고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초자연적 인도하심을 받으며, 그분의 사랑과 기적의 권능을 베푸시는 대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한가지가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보혈은 당신의 죄를 가릴 수 있으나, 당신을 그분께 의존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기적은 사탄의 능력으로부터 당신을 구원할 수 있으나, 그것도 당신을 그분께 의존하게 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에 의해 인도받을 수 있지만, 여전히 주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자만감을 벗겨버리셔야만 하며, 우리의 독선, 영적 교만과 과시의 모든 잔재물을 말살시키셔야만 합니다. 그분의 위대한 영적 축복들을 상속받도록 운명지어진 모든 자에게 그분은 굴욕을 안겨주셔야만 하고, 또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은 타르수스 출신의—자신감에 차 있고, 독선적이었으며, 성경 지식이 충만하며,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고, 여호와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울을 치셔서 눈이 멀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세상 앞에서 치욕을 당해야 했고 어린아이처럼 이끌림 받아야 했으며,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며칠이고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까지 되도록 굴욕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2014년 11월 25일 화요일

시험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왕자였고 지도자들이었으나,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온갖 생필품을 실은 낙타도 없었습니다. 건과도, 건어물도, 빵도, 무화과도, 대추도, 건포도나 땅콩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바로의 물품들이 휩쓸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실은 짐들이 홍해를 따라 떠내려갔습니다! 그들의 논리적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집트를 떠날 날과 시간을 정확히 알고 계셨을 거야.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했는데, 왜 우리에게 여섯 달쯤 먹을 식량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이집트 신들도 그들의 군사들을 이보다 더 잘 대우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이 모든 금, 은, 보석들을 왜 빌려오라고 했을까? 이것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아니야. 여기서는 이런 것들이 아무 가치도 없어!”

그곳에서는 풀잎 하나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사냥할 짐승도, 과실나무도, 물물교환할 이방인들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집트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홍해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므로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홍해를 돌아서 갈 수 있었다 해도, 그들이 당해야 했던 온갖 재앙으로 인해 분노로 가득한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모든 막대기와 돌로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을 막았을 것입니다.

자, 이제 그들 앞에는 공허한 바람 소리만 들려오는 불길한 사막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울고 있었고 여자들은 어찌할 줄 몰라 손만 비비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들과 남편들은 모두 속수무책이었고 굴욕에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모세 주위로 몰려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데리고 나와, 이 전체 집회 무리를 굶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애굽기 16:3)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치욕이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들이 탐한 것 같이 우리가 악한 것들을 탐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0:6, 11)

하나님은 비참한 굴욕의 장소로 이스라엘을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험은 그들이 강한 적군을 대적할 용기가 있느냐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워주실 것을 이미 서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준비되지 않은 축복에 대한 시험이었는데, 그것은 좋은 집들, 술통에 가득한 포도주, 강물처럼 많은 우유, 풍부한 꿀, 밀과 가축—그리고 말할 나위 없이, 모든 종류의 영적 축복들이었습니다.

“그분께서 너를 낯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2014년 11월 24일 월요일

믿음의 분량 by Gary Wilkerson

얼마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성경은 명백히 말합니다.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한복음‬ ‭2‬:‭1-3)

무언가 다 바닥난 적이 당신에게도 있었습니까? 반항하는 당신의 자녀를 향한 인내심입니까? 당신의 가정문제에 대한 희망입니까? 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좀 해보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2:4) 마리아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래, 이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더해지지 않을 것이 천국으로부터 확실히 선포되었어.”라는 확답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신 그녀는 아들의 대답을 무시하고 전형적 유대인 어머니나 다른 엄마들처럼 행동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2:5)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중히 여깁니다. 저는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십니다. “나는 이것을 네게 맡긴다.” 이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요청에 전혀 수긍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은 확고한 신학적 이유까지 갖고 계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직 그분 공식사역의 시작을 공표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국의 시간표를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즉시 일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시간표가 움직였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2:7-10) 이 포도주는 단지 “교체된” 포도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최상급의 포도주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고, 그것은 심지어 마리아의 기대까지도 초월했습니다. 한편 이 사건은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반응에 주춤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직은 적절한 시기가 아닐 거야.”라고 동의하며 그분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신 그녀는 아직 저축도 하지 않은 천국은행으로부터 믿음을 인출하여 사용했던 것입니다.

2014년 11월 22일 토요일

그들은 실제 주인공입니다 by Claude Houde

새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발견하는 가장 큰 충격은, 성경 속의 인물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말씀에는 꾸밈도 속임수도 성형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는 헐리우드 시나리오도 없으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과장된” 완벽한 영웅도 없습니다.

매년 성경이 시대를 초월해서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인 이유 중 하나는, 그 안에서 발견되는 액션과 인물들이 매우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으로서, 성경을 구성하는 66권의 책은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게 되는 거울입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시간, 공간, 상황, 관습, 그리고 문화적 현실로부터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들의 인간적 경험과 인성은 놀랍도록 우리와 흡사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실제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당신은 동의할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실제상황 TV 프로그램”의 궁극적 체험입니다! 각 장은 우리를 매료시키며, 신성과 연결된 인간적 삶이라는 극단 관람석의 앞줄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우리는 그들의 모험, 전투, 희망, 불신, 열정, 그리고 믿음에 충격받고 놀라며 “도전”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리고 너무도 확연히 우리의 삶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 속의 삶의 이야기들은 우리를 웃게도, 울게도 합니다. 우리의 영은 그들이 실패할 때 깨지고, 그들이 실수할 때 부서지며, 그들의 모든 업적에 의해 승화됩니다.

성경 속의 남녀들은 살과 뼈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들은 꿈꾸고, 고통받고, 실수하고, 울며, 그들과 가장 친근했던 자들과 그들이 가장 신뢰했던 자들에게 배반당했으며 실망했습니다. 그들은 처절한 불신, 분노와 혼동, 그리고 순전한 고통으로, 하늘을 향해 그들의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들은 상처받았고 피 흘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비극이 닥칠 때 그분을 향해 맹렬히 돌진합니다. 너무도 강하면서도 너무도 연약한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때로는 그들이 증오하며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을 결국은 하게 됩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 정의의 세상, 그리고 “그들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름답고 고결한 세상을 꿈꿉니다.

성경은 정제되지 않은 다이아몬드로 가득한 보석상자입니다. 각 책과 각 장은 본질, 영원,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경험의 단면을 반영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발견할수 있고, 당신 자신을 찾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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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11월 21일 금요일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태복음 25:24-26, 29, 30). 이 게으르고 악한 종은 누구이며, 왜 그는 어두움에 내쫓김을 당했을까요?

첫쨰로, 그는 숨겨둔 죄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악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악함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는 열심으로 수확을 거두며 기쁨으로 일하는 무리의 종들과 함께 있었지만 그에게는 숨겨지고 밝히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마태복음 25:24) 그러나 그는 내려놓지 않은 숨겨놓은 죄 때문에 주님에 대한 변질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한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 안의 죄로 인하여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은 내게 너무 힘들고 벅찬 일입니다!”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마음은 자유하며, 순종이 더 이상 짐스럽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기쁨이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5-6).

어떤 한 목회자는 저희 교회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는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저런 삶을 살 수는 없어요! 모든 사람은 실수를 합니다. 저들이 설교하는 것처럼 순결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굳은 설교로 본 것입니다.

그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2014년 11월 20일 목요일

최전방에 서서

즐거이 헌신하는 사람들은 길에 있는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크리스천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길에 사자가 있으니 내가 나가면 나는 죽을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언 26:13).

길거리에 사자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사자가 울부짖으며 삼킬 궁리를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주님의 사람들은 그 어떤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뉴욕에 와서 목회를 시작하기 전에 마귀는 제 안에 두려움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저는 뉴욕시가 얼마나 더 악해질지 미리 보았습니다. 사탄은 말했습니다. “너는 뉴욕의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할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가 명령하셨습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누가복음 14:21).

저는 조용한 나만의 공간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기도 하지요. 오늘날 단순히 숨기 위하여 동산으로 들어가 버리는 크리스천의 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사자들이 그들을 몰아내어 그들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 떠난 것입니다. 저는 이미 이러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권위있는 재건주의자인 게리 노스(Gary North)는 Government by Emergency(비상사태의 통치)라는 책에서 크리스천들에게 생필품과 총기를 비축해 놓고 소유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숨을 준비를 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가 비축하도록 권장한 물품들에는 무정부 상태에 뇌물을 하기 위한 (그는 “물물교환”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술, 담배 등도 포함되었습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 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요한계시록 6:16). 이렇듯 산과 바위에게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숨겨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5).

성령충만한 마지막 때의 교회는 숨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최전방에 서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2014년 11월 19일 수요일

마지막 때의 추수

마지막 추수에 큰 수확물을 거두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추위에 밭을 경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하리라도 얻지 못하리라”(잠언 20:4).

예수님께서는 밭이 바로 이 세상 즉 나라, 사람 그리고 민족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1958년에 뉴욕으로 왔을 때 교회, 사회 그리고 정부는 마약 중독자들 특히나 헤로인 중독자들은 모두 구제불능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던 것입니다. “밭을 갈기엔 너무 춥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을 움직이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게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밭을 갈아라! 그들은 귀한 보석과 같은 풍부한 자원이니, 내가 그들을 통하여 큰 수확을 얻을 것이니라.”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큰 수확을 거두셨습니다.

남부지역부터 시작하여 수 만명의 불법체류자들이 몰려오면서 사람들은 모두 어쩔줄 몰라하며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뉴욕과 켈리포니아에는 전 세계에서 불법 체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부르셔서 어려움에 처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밈과 동시에 그들의 마음의 밭을 갈을 기회로 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교지를 바로 우리 앞에 놓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한때 불법체류자이었던 젊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고향 나라로 돌아가 선교하며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단의 차가운 물결이 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무슬림들도 모두 차갑게 변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없고 각박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게으르게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밭을 갈아라!” 그 어떤 사람들도 너무 차갑거나, 너무 각박하거나 너무 멀리 가버렸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지금 바로 가서 밭을 갈으십시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면 작물을 수확할 수 있을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때에 성령님께서는 모두를 정죄하실 것입니다.

제가 타임스퀘어 교회를 설립하기 전에 우리는 뉴욕이 너무 각박하고 악하며 소망이 없으며, 그 누구도 주일 저녁에 교회를 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뉴욕은 너무 냉소적이며, 범죄가 만행하며 밤중에 집을 나와 타임스퀘어로 나오지 않을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밭을 갈기엔 너무 추운 지역이었지요. 그러나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로 꽉 찬 이 교회는, 사람들의 말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2014년 11월 18일 화요일

주의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니

시편 110편은 마지막때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3절). 마틴루더 목사님은 이 시편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한 영광스러운 예언이며 교회의 모든 일원들은 이 시편을 소중히 여겨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즐거이 헌신” 즉 자발적으로 자원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능력으로 거룩한 선지자, 목자들을 보내시어 나팔을 불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움직이시어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회개에 귀를 기울이고, 대적을 맞서기 위한 믿음을 다지기 위하여 모이기에 힘쓸 것입니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기 위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부르짖기 시작할 것이고 교회들을 깨우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철병거로 공격하려는 시스라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데보라를 사사로 세웠습니다.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사사기 4:3).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데보라를 사사로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스라엘 민족 안에 일하셨던 것이고 나중에 데보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사사기 5:2). 하나님의 영이 백성들 안에 진실로 임하시면, 사람의 힘으로 백성들에게 권하고 약속하며 간청하며, 또는 협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즐거이 헌신하게 됩니다. 저희 타임스퀘어 교회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말씀으로 정결케 되고 하나님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 안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서는 수 많은 자발적인 봉사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시편 110:3). 이 말씀은 거룩이 너무나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을 향한 예언입니다. 주의 권능에 날에 그들은 주의 일이 어려운 짐이나 해야하는 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척 아름다운 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듣기 어려운 말씀에 몸을 움츠리며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깎고 반짝이게 하는 것처럼, 주의 영광의 빛이 더욱 빛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이 말씀은 악한 때를 위하여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2014년 11월 17일 월요일

천국의 자원 by Gary Wilkerson

“그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스가랴 12:8).

스가랴 선지자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한 구절로 요약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인하여 연약한 우리 크리스천들이 다윗과 같이 강하게 될것이며 우리의 족속은 하나님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기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자원을 미리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히나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자원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삶에 부어주실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이 모두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몇몇의 크리스천들이 발언대에 섰을때에 침묵을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겠지요.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응답하겠지요. “주님, 저는 야망은 더더욱 없고 오직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 응답이 겸손하고 거룩하게 들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응답은 성령님을 만족시키는 응답이 아니라고 성경에서 말해줍니다. 성령님께서는 “소망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대적하는 마귀가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더냐?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지만, 나의 구원의 능력을 알았더라면 자유함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주위를 둘러보아라. 너희가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나라들, 물리쳐야 하는 대적과 내쫓아야 하는 마귀들을 보고 맞설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힘써 영적 은사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주님앞에 섰을때에 우리의 소원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믿음의 은사가 있습니다. 제게 전도의 은사 또한 주셔서 다른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또는 “주님, 제게 말씀의 은사를 주셔서 소망없이 큰 고통을 견디고 있는 이웃에게 전할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저의 아버지,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께서 제게 가르쳐주신 가장 큰 교훈은, “네가 원하는 만큼의 예수님을 너는 가질 수 있다”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단 한가지는 바로 성령님께 지나친 열심으로 구하십시오!

2014년 11월 15일 토요일

어린 양치기 소년 by Nicky Cruz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지명하셨을 때, 다윗은 아버지의 양들을 돌보는 어린 목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사악함으로, 그의 왕위를 박탈하셨고, 대신 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을 찾도록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상 16:12-13)

그때 다윗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과연 그가 알고나 있었을까요? 그는 한낱 양치기 소년이었고, 언젠가 아버지의 산업을 물려받기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양치기는 가장 미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이새의 막내아들로서, 다윗은 양 떼를 돌보기 위해 날마다 들로 나가야 했습니다. 한편 그의 형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아버지조차 다윗 안에 숨겨진 위대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두를 뒤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보셨고, 그를 위한 언약을 만들기 위해 개입하고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장엄하고도 영광스러운 미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들판에서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데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풀을 지나 달리고 주님 앞에서 노래하며, 아름다운 산야에서 찬양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 높은 바위에 올라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장엄한 일출을 바라보곤 했을 것입니다. 그는 매일 아침 북풍을 들이마시고 야외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그의 뼈를 강건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처음 만났던 곳은 이곳 들판이었고, 그는 친구로서 그분과 대화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가 그처럼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시편에서 그와 하나님만이 가졌던—들에서 함께 춤추고 양들을 보살피며, 사랑과 우정으로 무르익었던—지난날들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편 19:1-2, 4-6)


목동 다윗은 하나님을 정열적으로 사랑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목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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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4년 11월 14일 금요일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는 것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위임장 없이 그분을 위해 자기 임의대로 행하며 수고합니다. 저 또한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선한 일들을 행하고 도전을 감수하며, 저는 부당한 일군들을 대항해 맞서고 있다고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곧 저는 수천 달러의 빚을 지게 되었고, 지치고 환멸을 느낀 나머지 언제 어디서나 도움을 구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에 의해 보내졌던 것이 아니었고,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기도로 태동한 것이 아니었으며 인간적 연민에 의한 것이었기에, 저는 상심했고 짓눌렸으며, 진정코 포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은 아닙니다, 주님! 당신이 명하지 않으시면 한 발짝도 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이제는 한치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모든 필요한 자금은 하나님께서 지원하시므로 모두 충당되었습니다. 그것은 부담 없는 기쁨이었고 구걸이 필요없는 평안이었습니다. 오늘날 사역에서의 구걸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보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선행의 결과입니다. 그들 자신의 욕심이 하나님의 제안으로 잘못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듣지 않고는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들은 그것들을 세상에 말하노라…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하니라.” (요한복음 8:26, 28)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이를 것과 말할 것을 친히 내게 명령으로 주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말하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내가 말하노라.” (요한복음 12:49-50)

여기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기 위한 네 가지 지침이 있습니다.
  1. 그분의 음성은 모든 죄와 욕정을 드러내며 언제나 당신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요한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 (요한계시록 1:17)
  2. 그분의 임재나 모습은 언제나 그분의 음성을 동반합니다. 당신은 그분 임재의 영광으로 압도당할 것이며 기쁨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3. 그분의 음성은 당신에게 성경적 확신을 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분 말씀 안에서 당신을 확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면에서 성경과 일치해야만 합니다.
  4. 그분의 말씀이 무엇이든 그 정결함과 순전함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2014년 11월 13일 목요일

그분 음성의 소리

그분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은, 그들이 그분 음성의 소리를 듣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한복음 3:29)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홀로 서서 기다렸고, 그분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솔로몬의 아가서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 혼인식 사랑의 이중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신랑은 그와 함께 은밀히 숨기 위해 그의 신부를 부릅니다.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서 2:14) 후에 그녀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아가서 5:2)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자들과 그분의 음성을 더이상 들을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분께 돌이킨다면, 그들에게 새롭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강퍅한 마음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당신이 변화를 원한다면요!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차단함으로써 당신 스스로 초래한 일입니다. 여기 당신을 위한 언약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11:18-20)

그리고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36:25-27)

2014년 11월 12일 수요일

그분 사랑의 팔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편 6:6)

거인 골리앗을 죽였던 전사, “다윗이 만만을 무찔렀도다”라고 백성들이 칭송했던 용사, 그리고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을 신뢰하는 것에 대해 그토록 많은 시를 지었던 하나님의 사람도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편 6:2) 다윗은 참혹한 죄를 짓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시편 38:4-6)

다윗은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것—마치 예기치 않았던 파도가 당신의 영혼을 휩쓰는 듯한, 죄로 짓눌린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왜 또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제게 너무도 힘듭니다! 제가 더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상처받았고, 당신의 속은 죄로 인해 악취가 풍기고 있음을 압니다. 당신은 자신이 어리석었으며 현명하지 못했음을 압니다. 당신은 영적 타락을 느끼며 당신 마음속에서부터 너무도 역겨운 나머지 당신의 몸까지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당신의 실패와 패배는 실제로 당신을 절망과 두려움으로 “온종일 애통하게” 만듭니다. 당신은 근심하고 있고 기가 꺾였으며,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혼란스럽습니다.

다윗은 그가 스스로 범한 죄의 자책감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단지 징계만 하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보다는 사랑으로 시정되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시편 6:1-2) 다윗의 울부짖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저의 어리석음과 저의 고질적 죄가 제게 이러한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를 바로잡고 징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가 아직도 당신의 자녀임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진노를 당신을 원치 않는 자들에게 쏟아부으세요. 제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저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를 사랑으로 훈계하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만일 당신이 과거와 현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화살을 당신 영혼에 느낀다면, 그리고 회개하는 심령과 함께 당신의 죄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분께 사랑의 징벌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징계받을 것이지만, 마치 자상한 아버지가 사랑으로 자식의 엉덩이를 때리듯이, 큰 자비와 긍휼 안에서의 징계일 것입니다. 당신은 이교도들을 향한 것과 같은 그분의 큰 진노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분의 회초리와 함께, 당신을 향해 펼쳐진 그분 사랑의 팔을 느낄 것입니다.

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새롭게 되어야 할 때

성경 말씀은 그들의 모든 힘을 잃고 한계에 달했었던 위대한 하나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기”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는데,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대면해야 했던 세 가지, 즉 고통의 잔, 혼돈의 시간, 그리고 고립의 밤에 대해서 거론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남녀를 불구하고 이것을 거쳤습니다.

당신이 처해있는 현재의 고통은 자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혼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남자와 결혼한 이유로 얼마나 많은 아내가 고통받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녀가 그들 부모를 한계로 몰아가며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너무도 많은 자가 그들 과거의 실수 때문에 에이즈나 다른 질병으로 인한 절망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그러한 문제를 일으켰던 것들에게서 벗어나서 깨진 심령과 회개, 그리고 믿음으로 들어갈 때입니다. 이제는 성령의 새로운 힘의 부어주심을 받아 새로워지고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만일 당신의 마음이 경건한 슬픔을 느낀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분을 사랑한다면, 당신이 침체되었을 수도 있으나 그분은 당신이 실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의 여정을 걸으며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시편 18:28-36, 3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에게 힘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시편 28:6-9)

당신이 부르짖으면 그분은 당신에게 그분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찌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편 138:3, 7)

2014년 11월 10일 월요일

천국 은행 by Gary Wilkerson

최근에 저는 제 마음속에 있는 한 이미지를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들어와 비즈니스를 행하는 천국 은행입니다. 이 은행은 언제나 열려있어서 우리가 저축도 할 수 있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와 근심, 걱정 등 모든 문제를 창구 직원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수탁물은 하나님 은혜의 보좌로 상달됩니다.

우리는 또한 이 천국 은행으로부터 인출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은행 창구에는 성령께서 좌정하셔서 무엇이든, 그리고 모든 천국의 자원을 풀어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창구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 믿음, 그리고 희망의 저장고로부터 인출해 쓸수 있습니다.

제가 이 은행에 대해 생각할 때, 저는 교회에서 우리 중 다수가 많은 저축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의 인출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은행 창구로 가서 아주 적은 액수를 구합니다. 우리는 겨우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약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만일 당신이 제가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도와주신다면, 그 나머지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머지를 해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모든 불안과 고통, 죄와 상처 등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금고에서 그분의 무한한 자원을 꺼내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 저는 문제 해결을 위해 십불어치의 믿음을 구하는 것에 진력이 났습니다. 저는 수천 액면만큼의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단지 제 문제만을 해결하기보다는 이 땅에 당신의 영광이 세워지기를 보기 원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 창구로 올 때, 저는 당신 성령의 더 위대한 부어주심을 구할 것입니다. 저는 더 많은 당신의 생명과 호흡, 그리고 제 안에서의 당신의 행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2014년 11월 8일 토요일

꿰뚫는 메시지 by Jim Cymbala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 절대 사람들을 능숙하게 다루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의사소통의 목적은 ‘근사하게’ 보이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적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일에 더 많은 사람을 교회에 나오게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주제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들 마음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시도 자체가 그들에게는 생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성경적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도록 하는 대신, 우리는 “교회 성장”이라는 비성경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은 숫자에 목표를 두라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대신 성령의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 교회에서는 어떠한 예배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지를 계속해서 관찰하며, 그 외에도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바꿀 수 있는 어떠한 허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인기가 있든 없든, 또는 시대적으로 “앞서” 있든 아니든, 우리는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를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실하고 담대하게 선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대형 교회를 세우라는 요청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성령의 기름 부음과 능력 아래서 그분이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고, 오직 그분만이 가져올 수 있는 열매를 맺으며, 오직 그분의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따라서 영광은 어느 교파나 지역 교회, 지역 목사, 또는 교회성장 상담가한테로 가지 않고 오직 그분께 드려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으로부터 탈선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는 이렇게 말하는 반권위적 영적 성향이 있습니다. “아무도 내게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어. 감히 그럴 수 없지.”
교 회 설교단과 교회 상담에서도 우리는 너무도 빈번히 그러한 사고방식에 빠지게 되며 죄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고린도전서 9:22)이라는 바울의 말씀에 계속 주목하지만, 바로 다음 구절의 말씀은 쉽게 간과해버립니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24절) 항변하기 위해 우리 스타일을 약간 수정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님 앞에서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지 않는 복음의 메시지는 절대 바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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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1월 7일 금요일

성령님께서 주시는 수업

다윗은 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다윗이 성령님의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기 떄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단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연단하기 위해서는 어려움과 환난이 그를 강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이 없었다면 다윗은 시험받지 못하여 연단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울은 의로운 방향으로 시작하였지만 곧이어 믿음이 시들해져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단 한번도 시험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견디고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을만한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구하셨습니다.

단 한 순간도 성령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지 않으셨던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셨을 수도 있고, 음성으로 다윗에게 말씀하셨을수도 있고, 천사장을 보내어 다윗을 어려움에서 구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까지 어려움을 겪도로 허용하시어 결국에 그가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할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다윗이 환난과 시험을 겪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믿음과 하나님에대한 전적인 신뢰에 대한 노래와 시를 성경속에서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시글락 성의 다윗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거나 시글락 성으로 향하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시글락 성을 불태우고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은 아말렉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심히 괴로워 하였고, 백성들은 각기 사로잡힌 가족들을 생각하며 다윗을 돌로 치자고하며 이 환난의 책임을 다윗에게 돌렸습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 30:6).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질문하여(8절), 그는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을 것이라는 확답을 얻었습니다. 19절에서는 결론적으로 :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은 가족들과 그의 빼앗겼던 모든 것들을 모두 되찾았으나 더욱더 큰 무언가를 되찾았습니다. 그가 다시 되찾은 무언가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용기 그리고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롭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날에 다윗은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용기를 얻을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다윗은 더욱더 강건하여졌습니다.

2014년 11월 6일 목요일

의로운 일을 하고도 되는 일이 없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은 의인의 예로 성경에 나옵니다(밧세바와 우리야에게 지은 죄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열왕기상 15:5). 사무엘이 그에 머리위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순간부터,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사무엘상 16:13). “여호와꼐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꼐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여호와꼐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사무엘상 18:12,14,28).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많은 축복을 얻었고 동시에 다방면에서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려움 없이 선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요. 군중이 “만만을 친 다윗”이라고 외치며 그를 칭송하지만 다윗은 가장 친한 친구와 멀어지고 난 후에 두려움에 찼습니다. 그는 크게 우려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미친 사람인 척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둘람 굴에 400명의 환난당한 모든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과 함께 숨었습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사무엘상 27:1). 다윗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마음이 많이 상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우시고 감동을 주셨던 것이 큰 실책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와 함께 계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주님의 감동을 받은 종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화나신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하신 적 없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다윗을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서도 크게 감동을 주시고 함께 동행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하시고 감동을 주신 날 부터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시험이 닥쳐올때, 여러분이 어려움에 처해있을때 하나님께 여러분의 위로자 되실 것입니다. 되는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여러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평강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2014년 11월 5일 수요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

만약 당신이 성령님의 타이밍(때 또는 시기)을 믿지 못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기도응답이 지연되는 이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을 믿지 않는 한 당신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의심될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희망을 잃었을 때 고백하였습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편 105:19). 다음의 두 구절 사이에 놓인 고백이었습니다. 1)”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18절) 2)”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20절).

요셉이 겪은 기다림의 시험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왕의 술 맡은 관원장 석방되고 관직으로 복귀한다는 것을 알게된 다음에 그에게 사정한 요셉의 한심한 부탁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창세기 40:14-15).

어떤 이들은 이 부분에서 요셉의 믿음이 어디에 보이냐고 물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과 무척이나 가까운 교제를 하고 있었기에 꿈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시험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씀으로 시험을 받을 때까지 그 말씀은 생명을 낳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도 말씀으로 극심한 시험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도 보았지만 오래간 응답되지 않은 자신의 기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당신의 부르짖음과, 눈물, 인내는 모두 들어지지 않은것 같고 응답의 증거는 그 어디에도 보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환난과 시험이 닥쳐있을때 믿는 우리는 더욱더 열심으로 의심을 버리고 언약위에 바로 서서 믿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일하시기를 인내로 기다리는 것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응답 시기가 지연될수록 더 분노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엇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6-19).

2014년 11월 4일 화요일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때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 나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하였도다.”(예레미야애가 3:1-2, 7-8, 18).

소망을 잃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말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는 바로 예례미야 선지자 입니다.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예레미야애가 3:44). 이 모습은 어려움이 닥쳐있을때 여러분과 저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았다고 느껴질 때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레미야와 같이 울부짖으셨습니까? “제가 어려움에 닥쳤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졌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가 계속 절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윗처럼 예레미야는 결국에 소망과 승리를 얻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상기하였습니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예레미야애가 3:21-26, 31-32).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편 6:8-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눈물을 보셨고, 울부짖음을 받아주셨고,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러분, 뜨거운 고난의 길을 떠나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곳에 당신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고, 모든 어려운 시험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더해주십니다.

2014년 11월 3일 월요일

큰 구원 by Gary Wilkerson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브리서 2:1-3).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간혹 이 말씀은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어떻게 견고한 권위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율법은 구원을 받기위한 방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필요성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그 견고한 역할을 다 하였고 성경에서는 시대에 따라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위의 말씀에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큰 구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이 어찌나 견고한 약속의 완성인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새 언약의 은혜는 우리 삶 속에서 직접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능력을 더하여 주셔서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말씀 따라 살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브리서 2:4)

사람들은 왜 이러한 큰 구원의 선물을 놓고 그냥 지나치는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노력과 힘써 일하는 행위로 율법에 반응하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영역에서도 우리의 노력과 노동을 구원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이성적으로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받는 방법은 우리의 노력과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실패하더라도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학습합니다. 집안에서도 기본적인 법도가 있습니다. 방을 치우거나, 저녁 식탁을 정리하는것 등의 일은 보상과 처벌에 기반한 조건과 규칙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가정에서는 그 방법이 적절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통제를 받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상과 처벌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실패를 할 때에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봅니다.

우 리의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결코 대신 할 수 없으며 우리의 노력으로는 거룩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에 감사함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나오는 우리 삶 속의 거룩한 행위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2014년 11월 1일 토요일

한 줌의 과자들 by Carter Conlon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초자연적 영역에서 걷도록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드온에게 일어났던 일인데,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바로 그 밤에 주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서 그 군대에게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그러나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종 부라를 데리고 그 군대에게로 내려가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리하면 그 뒤에 네 손이 힘을 얻어서 그 군대에게로 내려가리라.” (사사기 7:9-11)

달리 말하면, “만일 네가 두려우면 적군의 진영으로 내려가라. 그러면 너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살 특공임무’로 들어가기 위한 힘을 네게 공급해줄 것이다.”

“이에 기드온이 자기 종 부라와 함께 그 군대 안에 있던 무장한 사람들의 외곽으로 내려간즉… 기드온이 그곳에 이르즉, 보라, 어떤 사람이 자기 동료에게 꿈을 고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보라, 보리 빵 한 덩이가 미디안 군대 안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른 뒤에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뒤엎으매 그 장막이 쓰러지니라, 하니 그의 동료가 응답하여 이르되, 이것은 다름이 아니요…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더라.” (사사기 7:11-14)

아마도 여러분은 주님께서 좀 더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디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요. “나는 천천만만의 천사들의 병거를 보았어! 그들은 분노했고, 우리 모두를 죽였어!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해!” 그보다도 그는 빵 한 덩어리가 언덕에서 굴러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그들의 온 진영을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동료는 즉시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자, 이건 하나님의 칼이자 기드온의 칼임이 틀림없어! 그분이 온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붙이셨어!”

어떻게 적군이 그것을 알았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반복해서 그러한 공습을 받아왔었던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과 몇몇 하나님의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전진하기로 결심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빵 한 덩어리가 언덕에서 굴러내려올 때는 어둠의 왕국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빵 한 덩어리가 과연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단지 한 줌의 과자들이 모여 하나가 되어 움직이기로 결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자만과 우리의 인간적 논리를 굴복시켜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려야만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중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잔치에 초대받은 과자들입니다. 저는 그동안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무것도 아니며, 언제나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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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그분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하십시오

오래전에 저는 제 아내 그웬 옆에 서서 목사였던 제 아버지가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이빗을 당신의 법적 남편으로 받아들입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서약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웬은 저를 모든 면에서 사랑했지만, 저를 집안의 가장으로 존중했을 때가 무엇보다도 좋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기계를 잘 다루지 못했으므로, 그녀가 저로 하여금 “남편”의 역할을 하게끔 내버려두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제가 이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저를 격려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인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를 반영하도록 남편과 아내를 주셨습니다. “너를 만드신 이는 네 남편이니…” (이사야 54:5) 우리는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입니다. (요한계시록 21:2)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의 남편과는 다릅니다. 그분이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 완성을 보기 위한 모든 능력과 영광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서약을 그분의 모든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것을 주장하고 그것에 기초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도록 해드립니다. 여기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신실함을 서약한 모든 자에게 주신 그분의 서약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업고, 내가 너희를 안을 것이요…” (이사야 46:4) “여인이 자기의 자식을 잊을수 있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9:15)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7)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또 위로를 회복시켜 주리라.” (이사야 57:18)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하는 도중에 내가 들으리라.” (이사야 65:24)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3:5)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되시며, 우리의 건강, 우리의 구조자, 우리 구원의 반석, 우리 매일의 식량, 우리의 위로, 우리의 공급자, 우리의 강한 팔, 우리의 방패, 우리의 빛,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화—환란 날에 필요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당신의 하나님이 되게 하십시오. 불안해하거나 당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당신이 그분의 능력을 신뢰할 것이라고 그분께 증명해 드리세요!

2014년 10월 30일 목요일

“그녀는 나를 위해 이것을 하였도다”

“보라, 그 도시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신 것을 알고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분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 시작하여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고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에 부으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로 돌이키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씻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였고,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누가복음 7:37-38, 44-46)

당신은 그분의 발을 당신의 눈물로 씻긴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의 필요나 당신의 사역, 또는 당신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며 그분께 나아온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사랑과 경배의 향기로운 향유 옥합의 선물을 단순히 그분께 부어드리기 위해 그분께 나아온 적이 있습니까? 그분 심장의 이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고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위해 이것을 하였도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또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이 잡수실 때에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같이 허비하느냐?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마태복음 26:8-9) 우리는 이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이 우리의 시간과 기도 청원을 필요로 할 때, 홀로 그분의 필요를 섬기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그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 여자는 내게 선한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26:10-11) 본질적으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이것을 하였도다!”

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6)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과의 친밀함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랑하는 자와 단둘이만 있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성도가 어떤 기도 모임도 절대 빠지지 않으며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들은 소규모 가정 모임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또한, 두세 사람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곧 주님으로부터 당신에게 신호가 올 것이고, 그분은 당신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실 것입니다. “너 홀로 내게 나아오라. 그리고 문을 닫아라.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자.” 은밀한 골방 기도는 당신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것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그와 같은 교제가 없다면, 당신은 그분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함 없이는 당신의 선한 행실조차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이 말씀의 핵심은 “나는 너를 모른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과의 친밀함도 없고 그분을 진실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엄청난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열심히 프로그램을 따르며 구제활동을 하는 등, 선한 일을 행하는 데에 너무도 몰두하여, 예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단독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그분의 필요에 대해서 고려라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정과 사랑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인간성을 결코 내려놓지 않은 채, 우리처럼 거부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이시기도 합니다. 우리 질고의 고통을 느끼시며, 그분은 여전히 인간의 아픔과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최근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이 땅에 계셨을 때, 당신을 그저 한 인간 예수로서 사랑하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수많은 사람이 그분의 자비를 구하며, 시력을 얻기 위해, 치유 받기 위해, 식량을 구하고 기적과 이사를 구하기 위해 아우성치며 사방에서 그분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로 보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외침을 듣고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며, 단지 그분만을 사랑하기 위해 온 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예수님만 사랑하기

예수님은 속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십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이 온 역사를 통해 그분께 불충실했으며, 반복해서 영적 간음을 범했을 때 인내하시고 참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충실한 신부를 갈망하십니다. 그분은 다른 어떤 사랑도 침범할 수 없는, 오직 그분만을 바라볼 자들을 원하십니다.

한 아내나 남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신뢰를 발견할 수 있는— 거짓도 비밀도 없는 충실함입니다. 그처럼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겠느냐? 그녀의 값은 루비보다 훨씬 더 나가느니라. 그녀 남편의 마음이 그녀를 편안히 신뢰하므로 그가 노략물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리라.” (잠언 31:10-11)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우리를 편안히 신뢰하실 수 있을까요?

저는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한 복음주의적 여성단체를 압니다. 그들은 그분의 거짓되고 부정한 신부에 대해 회개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쓰라린 마음—결핍된 사랑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찾기가 무척 힘들 때 고통스러워하심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매우 상심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예수님! 제가 참으로 오랫동안 당신께 불충실했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제 마음을 너무도 빼앗겼습니다. 저는 자동차, 골동품, 스포츠 등을 추구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높이는 것을 즐겨하고 물질을 원하며, 다른 관심사에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15)

예수님께서는 매우 충격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 (누가복음 18:8) “믿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신뢰하며 진실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이 실족할 것이며, 그분의 택하심받은 자들조차 심히 유혹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실족할 것이며 이 세상의 정욕과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부르짖음은 이것입니다. “오 주여, 당신께로 저를 이끄소서.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무조건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당신을 향한 정결하고 거룩하며 순수한 사랑을 제게 주시옵소서!”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권능을 부여해주는 은혜 by Gary Wilkerson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삶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자녀나 갈등으로 가득한 결혼생활, 또는 지불할 돈은 없는데 쌓여만 가는 고지서들 등, 그 나름대로의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러한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면, 왜 다시금 행위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해야 합니까?

저는 행위가 은혜를 압도하는 노예적 사고방식보다 더 실제적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데, 당신이 어떻게 문제들을 다루는지에 대해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음란물에 중독된 한 젊은이가 그것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도 역시 “행위”의 사고방식으로 치우치고 있습니다. 어느날 그는 이러한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나이다.” (시편 119:9) 이 젊은이는, 만일 그가 성경 말씀을 더 읽으면 자유를 얻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구절을 읽게 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서 그는 교회 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가 시도한 이 모두는 좋은 일들이지만, 그는 자유함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행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그를 속박과 절망으로 더욱 빠져들게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세가 아닙니다.

같은 교회의 또 다른 젊은이도 그와 같은 외설물 중독에 빠져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 외에는 아무 힘도 없다는 것과, 저의 무력함에 대해 너무도 잘 압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 희망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절망을 넘어서서, 제 안에서 일하실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께 나아갑니다. 저는 이 죄를 극복하기 위해 단 한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것은 권능을 부여해주는 당신의 은혜입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지금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제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젊은이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가 주워질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 이유는 그가 이 단순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저지하는 모든 장벽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이 두 예는 표면적으로는 많이 달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구조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나는 이것을 얻어야만 해”라고 말하는 옛적 속박의 언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당신의 은혜가 내 모든 노력을 주도합니다.”라고 말하는 언약으로 전향합니다.

우리가 이 시점까지 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것을 우리 삶 가운데서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권면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워진 위대한 구원을 등한시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더욱 위대하시며, 모든 영역에서 여러분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로 돌이키십시오.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열망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by Claude Houde

저는 캐나다 몬트리올의 남해안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목사입니다. 우리는 학교 건물에서 빌린 작은 공간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과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매주 3,5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데, 퀘벡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곳은 전체 인구의 2% 미만이 복음주의적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형적 복음주의적 교회는, 평균 80명 미만의 출석률을 가지고 오십 년 이상이나 지탱해 왔습니다.

그러한 배경에서의 이 같은 풍성한 수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북아메리카의 가장 적대적이며 세속적인 환경 속에서도 이십 년 이상이나 연속적으로 성장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복음주의적 활동을 개최하지도 않으며, 현대 교회성장 전문가들의 “최첨단” 방식과 전략을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한 프로그램씩 세워가며, 주일에 몇 차례에 걸쳐 예배를 드리는데,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온갖 인종과 사회적 배경의 남녀노소들이 결단의 믿음으로 변화의 능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천재 불가항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은혜, 담력, 구원의 기적적이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간증하며, 매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 이웃들, 가족, 그리고 직장 동료들과 대학 친구들을 초청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의 말씀을 실제로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그렇게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세속적이고 냉소적인 현대의 퀘벡에서, 결단의 믿음은 부흥의 점화 불이며 인생들을 변화시키는 점화 불입니다. 다니엘과 같은 수천의 사람들은 반박할 수 없는 돌파와 구원을 경험합니다. 거기에는 유명세도, 기이한 신비도, 세련된 전문성도, 어떤 술책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날마다의 삶을 빛과 자유, 결단하는 믿음의 능력과 가능성에서 사는 현대판 “다니엘”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열망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과 비록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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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6-18).

그리스어로 “shout(호령)”이라는 단어는 일깨우다, 흥분하게 하다, 행동을 하게 자극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천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문 앞에 다가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맞으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은 길가에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 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큰 나팔소리와 천사들의 호령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공중에서 예수님을 맞을 것입니다. 그 만남이 조용할 것 같습니까? 새로운 몸으로 예수님을 만나는데 말입니다. 영생을 얻고 고대하던 집을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둥같이 요동치는 기쁨의 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기뻐하는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예수님을 맞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단순히 설명한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7). 누구는 천국에서 살지 이 땅위에서 살지에 대한 우리의 언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땅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확신을 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저는 이 말씀에 다시 한번 초점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께서는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도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 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한복음 17:24). 모든 시간과 시기를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께서 한시간 이내에 오실것이라는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사십시오. 그러나 항상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땅위에서 우리가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예수님의 재림은 큰 잔치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오실 주님의 신부로서 두려움 말고 주를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4:13).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미리 예비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베드로후서 3:12). 또한 주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또 이런 지침을 주십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배소서 5:16). 그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이기적인 꿈과 어리석은 야심을 품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로서 신랑이 올 때까지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이렇듯 준비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시에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예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의 신부인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가서 7:10). 우리는 가끔 예수님의 기대, 기쁨을 잊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부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내쫓았을 때 함께 기뻐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17-22 참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우리의 감정을 함께 경험하셨고, 신부와 함께하기를 기쁨으로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림하실때에 그의 임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서 9:28). 다음 오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르 죄악에서 구원하시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부인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땅에 남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그의 능력과 영광을 보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본 성도들은 자석같이 예수님께 이끌림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애를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부르시고, 우리를 더욱더 가까이 품어주십니다.

2014년 10월 22일 수요일

우리는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

무덤에서 살과 뼈의 육신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부활하였고 도마는 그의 몸을 만졌습니다(요한복음 20:26-29 참고).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졌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영광중에 아버지께로 들리워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구름으로 들리워져 올라가셨습니다. 정말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을까요. 영광의 빛으로 빛나는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올라가시는.. 사도들은 무릎꿇고 엎드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모습을 모두 다 보았습니다.”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사도행전 1:10). 우리가 순식간에 눈깜짝할 사이에 변할것이라는 것은 정말 진실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린도전서 15:51-52). 또한 바울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변화할 육적인 변화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7). 주님은 재빨리, 홀연히 오실 것이고 우리는 순식간에 변화할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작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날이 가까움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요한계시록 1:7).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4).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사도행전 7:55). 스테반 같은 사람이 바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성령충만하여 깨어있는 눈으로 열린 천국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영광중에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

“저희가 모엿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윈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6-7, 9-11).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볼 선택하신 사도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 “사도와 같이 모이사”(사도행전 1:4). 예수님께서는 대략 120명의 사도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 일어날 일을 갈피를 잡지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기 전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한복음 16:10). 우리의 부족한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신다는 것인지..? 다시 죽으신다는 것인지..? 천사들이 데리고 가신다는 것인지..? 엘리야처럼 천국의 마차들이 그를 데리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 대기 중에 갑자기 사라지신다는 것인지..?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에 이미 경고하고 말씀하셨던 바입니다. “내가 갔다가 너힁ㅔ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한복음 14:28).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지요.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요한복음 16:18).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늘 오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고 준비시키고자 하셨고, 약속 하셨듯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현재도 그렇게 일하시고 계십니다! 미국, 중국, 유럽, 폴란드, 러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부르심으로 작은 조직부터 큰 그룹까지 우리는 함께 모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나팔소리를 들었고, 그들은 이러한 부르짖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태복음 25:6)

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by Gary Wilkerson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나누는 것 등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기쁨 넘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데 기여하는 일들이지요. 그런데 간혹 우리는 이런 복된 일들을 성과주의 위주로 바라본 나머지 몹시 고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의무적으로 행함으로써 우리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합니다. 우리는 실패할찌라도 새 언약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진리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바울은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왜 구약의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입니까? 율법은 당신을 다시 노예같이 사로잡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은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새 힘을 주신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행위를 통하여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것을 하면 내가 복을 받고,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오늘날 성도들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대한 지켜야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거야.”라는 태도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미 복을 주었단다. 나의 명령을 지키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그리고 너희가 나의 명령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성령을 통하여 너희에게 새 힘을 줄 것이다. 너희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히브리서 2:1). 법칙을 따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한 복음의 은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4년 10월 18일 토요일

자비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마가복음 6:34)

노르웨이의 오슬로라는 지역에서 우리 사역팀은 그곳의 큰 루터파 교회와 연합했습니다. 그 교회는 우리 사역을 도울 의향이 있는 소수의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그 교회 젊은이들은 주님께 깊이 헌신된 성도들이었으나, 우리의 전도 방식에 대해서는 완전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주로 내면에만 간직하는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지역 중심부 거리 모퉁이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려 했으나, 불과 몇 주 후에는 우리가 그들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향한 순전한 집착으로, 그들 심령 속에서 복음 전파의 불길이 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성도는 우리를 돕기 위해 매일 아침 두세 시간씩이나 걸리는 기차여행도 마다치 않았고, 저녁 늦게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헌신조차 그들의 목마름을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뉴욕에서 온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 더 알기를 무척이나 갈망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 중 많은 성도가 과거에는 범죄 조직단이나 마약 중독자들이었다고 그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사역팀들의 삶에서 하신 일들과 지금 행하고 있으신 일들에 대해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매료되었던 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영혼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우리 젊은이들은 그들을 붙들고 함께 울며, 그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사역은 그 교회에서 매일 아침 몇 시간에 걸친 기도와 예배로 시작되었고, 그 루터파 교회 젊은이들은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 젊은이들의 사랑은 그들이 결코 체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 열정은 곧 그들에게 전이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일했던 모든 성도의 마음속에 산불처럼 번졌습니다.

그 부흥집회가 끝날 무렵, 노르웨이의 젊은 성도들은 우리가 떠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우리와 너무도 정이 들었고 너무도 사랑에 빠져서, 공항에서 비행기가 떠나기 전 몇 시간 동안 계속 울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그 여정을 통해 평생 친구들을 만들었고, 우리와 동역했던 성도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의 미와 본질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감정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우며 전염성이 강한 것입니다. 그 감정은 조작될 수 없고,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너무도 실제이며 너무도 강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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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실려 있습니다.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날마다 새로운 말씀

하나님께서는 듣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날마다 새로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점점 굳어져서 많은 사람은 그것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읽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7-8)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의 음성입니다. 그분은 가장 최근의 그분 음성을 우리가 듣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로, 듣는 자들을 경고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돌밭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나,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만 견디다가 후에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즉시 실족하는 자들이요…” (마가복음 4:16-17) 이 비유는 말씀 듣기를 즐기는 자들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들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은 그들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돌처럼 굳어만 가는 그들의 심령이 깨뜨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돌처럼 굳은 심령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감옥에 있습니까? 아니면 거리에 있습니까? 슬프게도, 가장 강퍅한 심령들은 그들의 심령이 강퍅해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자들로 가득한 하나님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이 어떻게 강퍅해지고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의 완고한 고집을 깨뜨리도록 허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그분의 말씀에서 듣고, 설교를 통해 들으며, 때로는 고요하며 작은 음성으로부터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음성에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그분의 백성을 은밀한 기도의 골방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순종에 대해, 당신의 문제와 당신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주기를 원하시며 이끌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일찍 일어나 말하고 말하였어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불렀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 7:13) 우리는 매번 그 부르심을 거절했고, 대신 우리 자신의 관심사와 행사들, 그리고 다른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앞세웠습니다. 우리는 매번 그날의 음성을 놓칩니다. 우리는 듣는 것을 매일 거절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갈수록 냉담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대신, 다른 음성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더 강퍅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한 하나님과의 시간을 가지려는 결단을 거부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대해 낯선 자들이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더이상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강퍅해지는 것을 보고 계시지만 여전히 그들을 돌보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향한 그분의 성령을 비추셔서, 신랄하며 꿰뚫는 말씀, 즉 그들을 일깨우기 위한 우뢰같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불쾌하게 하며, 결국 그들은 화를 내고 메말라버리게 됩니다! “해가 돋은 뒤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시들어 버렸고…” (마태복음 13:6)

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이제 기도 골방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6)

은밀한 기도로 그분과 교제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말씀하실지에 대해 매우 신중하십니다. 그분의 음성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는 자들만이, 온 세상을 차단하고 홀로 그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가 내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문을 닫고 기도 골방으로 들어가라. 내게 은밀히 기도하면, 내가 너에게 상을 줄 것이다.” 분주함, 욕정, 탐욕, 그리고 인생의 걱정거리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질식시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분주한 삶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분의 음성은 “말씀”입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정욕이 들어와 말씀을 숨 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니라.” (마가복음 4:18-19)

저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질식시키고 있을지 두렵습니다. 여기서 질식의 의미는 그분의 음성을 “혼잡하게 하다” 또는 “익사시키다”라는 뜻입니다. 한때 하나님은 당신께 명확히 말씀하셨고, 그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분을 사랑하지만, 그분을 위한 당신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분주함은 지금 당신을 요구합니다. 당신의 소유물, 당신의 관심사들, 당신의 문제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당신의 시간을 점령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부르고, 당신을 구하며, 당신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네가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너는 네 안에서의 나의 음성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다!”

당신은 너무도 바빠졌고, 삶의 문제와 염려의 수렁에 너무도 빠져있어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조차 당신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절)

좋은 땅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얼마는 삼십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백 배의 열매를 내는 자들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4:20)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까?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명확히 들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분명해서 “주께서… 그의 말들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시니라.” (사무엘상 3:19)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더라.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니라.” (사무엘상 3:21-4:1)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 또한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의 기쁨이었고 그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 속에서 이르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시편 60:6)

오늘날 많은 사람이 지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 그분이 말씀하시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원하거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말씀은 다 성경 기록에 저장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성경에 거스르는 말씀은 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1:1-2) 그리고 그분의 아들은 지금도 그분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의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며, 그 외의 음성은 듣지 않으리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는 어떻습니까? 마지막 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마스커스 노상에서 사울(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추더라.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9:3-4)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한 음성이 있어 내가 들으매 히브리말로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사도행전 26:14, 16)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기도 중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한 음성이 있어 내게 이르시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다시 음성이 있어 내게 응답하시되… 이 일이 세번 있은 뒤에…” (사도행전 11:7-10)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