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1일 화요일

새 언약의 축복

하나님의 영이 사울왕을 떠난 이후 그의 불순종은 그를 마귀의 영향을 받게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고, 그는 점쟁이에게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사울의 인생을 볼때에, “사울이 한 일들을 보면 그렇게 못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사울에게 혹독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라고 다시 한번 말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순종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나는 성의 없는 반쪽 짜리 순종이 아닌 너의 완전한 마음과 사랑을 원한다.”

만약 사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흐릿하고 불분명하였더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셨어야지 하면서 합리화 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하신 하나님의 지시는 분명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명령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하신 것은 구약시대의 율법의 근거하여 일어난 일이지 않습니까. 현재 우리는 은혜의 날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할 때 사울에게 하셨듯이 우리에게 혹독하게 대하시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은혜의 약속; 신약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로마서 2장 6-11절
구약에서의 사울과 새 언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다면, 성령님께서 그 명령을 지키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힘을 더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의 큰 축복인 것입니다.

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구덩이에서 끌어올리시는 주님 by Gary Wilkerson

제가 십대시절에, 여름에는 텍사스 동부에 있는 목장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장의 관리자 Jimmie(지미)는 크고 건장하였고,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모든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제게 풀을 깎고 건초를 끄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루는 우물을 파기 위해 6피트(1.8미터)되는 구덩이를 삽질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 물을 마시며 쉬는 동안 지미가 구덩이의 위치를 잘못 보고 그 곳을 향해 발을 디뎠습니다. 제 입은 물로 가득 차 있어서 그에게 주의를 주기 전에 그는 구덩이에 빠져버렸습니다. 저는 그가 깊은 구덩이에 빠져 사지에 골절이라도 입었을까봐 두려워 그를 돕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덩이를 바라보았을 때 지미는 이미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구덩이에서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지미의 인생을 그러했습니다. 그는 시력뿐 만 아니라 청력마저도 잃어가고 있었기에 그의 발 앞에는 매일 수 많은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빠진 모든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와 그저 앞으로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는 제게 그리스도의 지체에게 주는 믿음의 사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에서 빠지는 구덩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시각으로 그러한 구덩이를 직면하도록 말씀하십니다.

현재 당신이 그러한 구덩이에 빠져 꼼짝 못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인간관계, 재정난, 오래 앓은 질병일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한때 그리스도와 가깝게 동행하던 그때가 먼 꿈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재 당신이 빠져있는 그 구덩이를 통하여 능력의 말씀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구덩이의 종류 중 하나는 우리 자신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죄악된 습관이나 불건전한 생활패턴으로 돌아가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족한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의 구덩이에 있느냐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비로우신 주께서 그 모든 종류의 구덩이에서 나와 그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마태복음 12장 11절) 예수님께서는 “네가 자신의 구덩이를 만들었더라도 상관 없다. 세상의 법도 내가 너를 그곳에서 끌어올리는 데 막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의 말씀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충을 생각할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시는 건 아닙니까?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또 당연히 그럴만한 상황이지요. 그들의 절실한 필요 때문에 울부짖었다고 해서, 당신을 시험한다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백성들은 잘 먹여져 왔고 잘 가르침 받아왔으며, 이사와 기적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 초보자가 아니었고, 돌보아주는 목자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증거의, 가시적 구름 기둥의 보호가 날마다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하늘에는 불기둥의 광채가 그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그들은 하늘로부터 어김없이 땅으로 내려진 만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믿음을 쌓는 데에 필요했던 모든 것을 제공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을 때에는 사소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이는 나를 기쁘게 할 수 없다.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항상 믿음에 상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잘 먹여져 왔고 잘 훈련받아온 나의 자녀가 나를 신뢰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렇다면 당신이 겪고 있는 시험은 무엇입니까? 그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무엇을 원하실까요? 그분은 당신이 그분의 말씀, 즉 그분의 약속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그 고투에서 그분이 당신과 함께하고 계심을 당신이 전적으로 신뢰하기를 원하십니다. 온 지옥이 당신을 향해 진격해온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분의 임재는 당신의 공포와 눈물 가운데에서 당신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을 대적하는 어떤 마귀의 화살도, 어떤 막강한 침략도 당신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천부께서는 이미 구원의 계획을 준비해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맹신적으로 그분을 붙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모든 강렬한 시험을 대면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다 이해는 못해도, 주님이 나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아. 나는 그분이 나와 끝까지 함께하실 것을 신뢰하고 있어!”

당신의 투쟁은, 주님이 능력과 사랑으로 당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그분을 완전히 신뢰할 때야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눈을 감으셨다는 모든 생각은 버리세요. 그것은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며, 그분의 신실하심을 증명하라고 그분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수차례에 걸쳐 입증해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쓰러지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과정 동안 내가 너와 함께한다! 네가 만일 내 얼굴을 구하며 나를 신뢰한다면, 나는 끝까지 너를 도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항상 너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시험의 장소

“내가 므리바의 물들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시편 81:7)

우리는 우리 속마음을 정말 모릅니다. (예레미야 17:9 참조)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주님과 동행했다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기도했다 하더라도, 또는 얼마나 많은 성경 지식을 습득했다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이 아닌 것을 우리 안에서 보신다면,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실 것에 대해 신뢰하지 못한 영역에서, 그분은 우리를 므리바(시험/검증의 장소)로 데려갈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에 우리가 처하게 할 것이며, 우리는 혹독한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를 당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분명히 믿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내게 주셨다.”고 당신이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이 한 영역에서 문제를 갖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은 누군가 당신의 사랑이나 친절을 모독할 때마다 분통을 터뜨립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떨쳐버릴 수 없는 상처와 깊은 분노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러한 위선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그분은 당신을 시험의 장소로 데리고 가셔서, 한 비굴하면서도 고약한 성도를 당신 면전에 두실 것입니다! 갑자기 당신은 이렇게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주님, 저 사람을 제 인생에 왜 들여오셨나요? 그는 제 육신의 가시입니다! 저는 당신을 신실하게 섬기려 노력해왔으나 그 대가로 받는 것은 이러한 모욕뿐이군요!”

주님은 당신을 므리바에 두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 안에서 무언가를 완성하려 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 상황에서 일어나서 이렇게 외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알아. 내 삶의 걸음은 그분에 의해 정해졌고, 내 모든 상처와 분노를 해결하는 과정을 도우실 거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므리바로 데려가셨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십시오! 주님은 믿음을 찾고 계시며,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지 아십니다. 그분은 오직 당신이 그분을 신뢰하기만을 원하십니다!

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것!

인간은 먹지 않고도 몇 주를 견딜 수 있으나, 물 없이는 며칠밖에 견딜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 왔을 때, 그곳에서는 마실 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7)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은 울기 시작했고, 가족들은 점점 갈증으로 지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박한 상황이었지요.

모세는 주님의 뜻을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혹독하게 시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들 자신을 그분의 보호 안으로 완전히 맡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일어나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라고 말하기를 그분은 갈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그곳의 이름을 맛사와 므리바라 하였으니, 그 까닭은 이스라엘 자손의 다툼 때문이요, 또한 그들이 주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니 계신가? 하였기 때문이더라.” (출애굽기 17:7)

“맛사”와 “므리바”라는 단어의 뜻은 둘 다 같은 의미이며, “고난과 시험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진영 사이를 뛰어다니며 이렇게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맛사, 즉 시험에 불과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으니 잘 버티어라! 주님께서는 믿음을 찾고 계시고,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으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기만을 원하신다!”

비참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막대기를 손에 들고 호렙으로 가서 그곳의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반석을 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할 물이 솟구쳐 흘렀습니다. 그들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고 계심을 다시 한 번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어떻게 시험했습니까? 그 시험은 모세를 향한 그들의 분노였을까요? 그들의 불평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우상 숭배적 간음이었을까요?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도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했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주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니 계신가?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그 물을 내내 저장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갈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그 물을 공급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열망했던 것은, 그분의 특별하고도 선택된 백성이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하며, 자신들을 그분의 신실한 팔에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또다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시험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들에게 배고픔을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네 마음을 알고자 하심이라.” (신명기 8:2-3)

여기 또 하나의 믿음의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공복을 움켜쥐고 하나님께서 빵을 보내주시기를 기다려야 했을까요? 그들이 서로의 믿음을 부추겨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듣기를 원하셨던 것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위해 홍해를 열어주셨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먹여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셨던 전부입니다!

2013년 12월 24일 화요일

그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릴 때, 당신은 큰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사탄이 당신의 삶을 지배했을 때 당신으로부터 빼앗아 갔던 전리품을 다시 쟁취함으로써, 지옥의 권능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당신이 아직도 영적 승리와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두 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두 왕은 창세기 (14:17-24)에서 아브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두 왕과 같은 왕들입니다.

아브람은 어떤 인간이 경험했던 것보다도 더 강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의 발치에는 부와 재물, 그리고 명성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소돔 왕의 제안에 대한 그의 반응은 빠르고 명백한 “NO”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아브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명성보다는 하나님의 명예를 보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소돔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들과 재물, 이 모든 것을 당신께 돌려주노라. 왜냐하면, 이 모두가 내 주님께 속해있기 때문이라. 그분께서 만일 나를 부유하게 하려고 작정하셨다면 그렇게 하시리라. 그러나 네가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노라.”

아브람은 대체 어디에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그렇게 분리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며, 재물의 축복을 제안하는 사탄의 유혹을 그토록 노골적으로 거절할 수 있는 독립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신선한 계시가 그의 힘의 원천이었다고 명백히 기록합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 성품의 놀라운 계시로 아브람의 시야를 열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하여 이르되…, 네 원수들을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창세기 14:19-20)

이 구절에는 El Elyon 이라는 여호와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 문자적 의미는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자 주권자이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선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의 주님은 단지 다른 모든 신 위에 계시는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전 우주의 창조주시다. 그 안에 있는 모든 부유함, 가축, 소유물들이 다 그분께 속해있다. 그분은 네가 보는 주위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

2013년 12월 23일 월요일

성령 안에서의 삶 by Gary Wilkerson

때로는 이렇게 의문하는 사람이 저 혼자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주신 의로움의 선물을 내가 실제로 행하고 있나?” 갈라디아서 5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성경 말씀의 어떤 구절이든 은혜의 렌즈를 통해서도, 또는 율법의 렌즈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읽을 때, 때로는 “내가 이 말씀대로 해볼 거야!”라는 “행위적” 사고방식에 빠져서는 저 자신에게 이렇게 다짐하곤 합니다. “좋아, 나는 오늘 이 말씀대로 살아볼 거야. 나는 성령 안에서 행할 거야!” 그러나 저는 곧 불안해지며, 갑자기 성령 안에 전혀 거하고 있지 않은 저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그 다음 구절은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은 렌즈를 통해 읽습니다. “내가 육신에 거할 때도 있지만, 성령에 거할 때도 있어. 그러나 내가 성령에 거한다 할지라도, 곧 화를 내게 되는 상황으로 바뀌면 다시 육신으로 되돌아가곤 하지!”

갈라디아서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당신은 성령 안에 거합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속에 들어오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분이 당신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네 마음이 정말 의로운지 내가 점검해볼 것이다. 그런 후에 성령께서 와주시기를 나중에 초청하자꾸나.”

아닙니다!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당신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성령 안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실 때는 “영적으로 되도록 노력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영이 네 안에 거하신다. 그러니 성령으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당신께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안에서 이미 시작한 일을 따라오라. 네 삶에 이미 주어진 것들을 실천에 옮겨라. 그리고 염려와 걱정을 멈추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라.”

당신 자신이 너무 많이 육에 거하고 있는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지 마세요. 당신은 이렇게 요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더욱 영적이 되도록 도와주시겠어요?”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영적이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호흡이신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며 당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주께서 만져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by Carter Conlon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자신을 부인한 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저주하며 고개를 저으며 멸시하고, 예수님의 옷으로 내기를 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세대에 나를 미워하는 그 영혼을 사랑하도록 부르신 사명을 감당하게하는 힘은 바로 이 완전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반면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하게 되지 못한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만져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나무로만 보였던 맹인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맹인)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것을 밝히 보는지라” 마가복은 8장 23-25절

이 맹인은 부분적인 시력밖에 없었던 것 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다른 이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없으면 그들의 겉모습과 태도로 판단하고 내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맹인이 주께서 다시 한번 안수해주시기를 원했을 때에 그의 눈을 들게 하셨고, 바로 명료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간절히 원한다면 – 교회에서의 나와 교회 밖에서의 내가 다른것이 지겹고, “하나님, 나의 무기력함은 이제 그만이면 됐습니다. 제가 정신 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나를 조롱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설 수 있게 하는 힘을 내게 주시옵소서!”라는 외침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 당신을 위한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맹인을 다시 안수해 주신것 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시 한번 만져주고 싶어하십니다.


__________
Carter Conlon 목사님은 타임스퀘어 교회( Times Square Church)를 세우신 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 부터 섬기시고, 2001년에 담임목사님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강하고 자애로우신 리더이고, World Challenge 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에서 자주 오시는 초빙강사입니다.

2013년 12월 20일 금요일

기쁜 마음

결혼생활에서 신경을 자극하는 행동중의 하나는 침묵 요법입니다. 어느 젊은 아내가 제게 남편이 “정신차리도록 설득”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그녀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뜻이 맞지 않을 때 그냥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저와 싸우지도 않고 그냥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조금 침착을 되찾아 집으로 그가 돌아왔을 때는 제가 그와 화해를 하려고 해도 냉담한 반응뿐입니다. 그는 수일 동안 말 한마디 안 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싫습니다! 저는 차라리 그가 소리를 지르거나 심지어 때리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침묵요법은 더 이상 못 견디겠습니다.”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나를 혼자 있게 놔둬요. 말하기 싫어요. 나 지금 힘든 상황에 있으니 나 혼자 해결하도록 놔두세요. 지금 누구랑도 같이 있기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몹시 잘못된 언행입니다. 그것은 그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있어서 위기 때마다 서로와 나누고 서로를 돕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모든 변명을 들어보았습니다. “제 몸이 좋지 않아서” “저는 이미 안 좋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신경이 예민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들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차단할 도덕적 권리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늘 열어두십시오.

“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잠언 25장 28절

만약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면, 굳건한 결혼관계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결혼생활에서 기쁨을 잃는다면 나약해지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을 보여주시면 제가 기쁨이 넘치는 부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더 이상 함께 웃거나 놀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된 사랑에는 행복하고 어린아이 같은 면이 존재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우리의 결혼생활에서는 수많은 냉철한 남편들과 슬픈 아내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물론 질병, 예기치 못한 어려움, 재정적 문제, 오해, 고통 그리고 심지어 죽음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는 것이고, 수 많은 부부들이 삶을 거의 즐기지 않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은 계속 언젠가는 행복하고 만족함을 얻을 것이라는 소망을 합니다. 인생은 빠르게 지나가고 난 후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근심에 찬 얼굴의 주름들일 뿐 일 것입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됐습니다! 지금이 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고, 모든 것은 그의 통치권 안에 있습니다. 애통하는 때가 있지만 기뻐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선한 것이 악한 것보다 큽니다. 그러니 위를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17장 22절F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진짜 러브스토리

러브스토리 라는 1970년도의 영화에서는 유명해진 한 대사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결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에요” 영화 대사로는 괜찮지만 현실에서는 지옥 구덩이에서 나온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사랑은 “미안하다”라고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몹시 화난 한 남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젯밤 제 아내를 떠났습니다. 그녀는 항상 옳고 나는 항상 틀렸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다시는 제 아내가 저를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번엔 제가 옳은 것임을 확신하고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아내가 제게 손과 무릎으로 기어오며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떠나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부부들은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기 나름이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장 25-26절)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당신을 배신하였습니까? 불륜으로 인해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우연치 않게 비밀스러운 외도를 알게 되셨습니까? 진정한 회개가 있었습니까? 당신은 용서하고 잊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절대로 잊을 수는 없더라도, 반드시 용서를 해야 합니다. 당신이 사는 동안,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 안에 있는 상상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늘 아프고, 그 일로 한탄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는 그녀가 믿음 안에서 애통하고, 당신에게 용서받고 화해하기 위한 노력이 보여진다면 당신은 반드시 용서를 해야 합니다. 게다가 당신은 용서 한 이후에 과거를 다시 들추어내서는 안됩니다. 수천 쌍의 부부들이 온전히 죄에 대한 믿음 안의 애통과 그리스도를 닮은 용서로 부정(不貞)을 극복해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속적으로 지난 못난 과거를 꺼내 든다면 당신의 결혼생활은 위태로워 질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19장 11절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응답되지 않은 기도

어느 10대 소녀가 제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2년전에 제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최고의 부모님이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제 부모님이 그렇게 끔찍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도록 허용하셨는지 생각하며 지난 2년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보호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더 이상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낙심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냥 제가 주님께 화가 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젊은 부부는 주님께 10년 가까이 원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5살 난 딸이 뇌종양으로 진단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을 한 이후로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차 버렸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교회에 출석하며 모든 진행에 참여를 하지만 더 이상은 기도의 효력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거나 거짓말쟁이 또는 신실하지 않은 아버지라고 부르기엔 두렵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녀를 앗아간”것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응답되지 않은 기도라는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기도가 수주 그리고 수개월 많으면 수년(數年) 간 응답이 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상치 못한 질고 또는 비극적인 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경우를 말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들의 믿음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말씀에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산이 스케줄에 맞게 움직이지 않을 때 원한을 품는 경향이 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서있을 때 용서하지 못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저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품은 원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서 이 산이 없어지도록 또는 죄의 사함을 구하지 말라. 모두 꺼내 털어놓고, 성령의 용서함이 전해지도록. 신실하신 너의 아버지께 부르짖으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셨고, 응답하실 것이고, 공급하실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께 이러한 의심이 자라나게 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라.”

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예수님과 용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용서입니다.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 용납 그리고 치유에 대해 언급을 하지만 진실한 용서와 용납은 상당히 드뭅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평화를 중재하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며 늘 용서하고 용납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믿음의 영적인 사람조차도 용서를 하지 않음으로 형제 자매들을 상처 입히기도 합니다.

심지어 믿음 안의 최고의 크리스천들도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두 명의 좋은 크리스천 친구 사이가 틀어진다면, 평생 남을 원한을 품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은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친절한 전화통화, 좋은 말 그리고 “언제 한번 놀러 오세요”라는 초대로 은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나는 그저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만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그 사람은 그의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갈 테니”라고 쉽게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용서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곤 합니다.

또한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채로 사랑만 일방적으로 준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위해 희생을 했지만, 오히려 비난을 받거나 상대방이 당연시 여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내 일이 아니지만 도움을 주기 위해 해주었던 일이 감사하지 않는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만 돌려받은 것입니다. 당신의 순수한 의도와 당신의 좋은 행동이 자기 중심적인 행동이라는 오해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번이라도 용서한 적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웃어주고, 거리를 두고 인사를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시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해줄 것”이라는 마음의 결심을 합니다.

다음은 우리를 속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실패와 거짓말을 용서하기를 가장 불안해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속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만큼 우리를 극도로 화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선한 의도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가 잘못을 했다고 말할 때 그를 용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솔직한 자세로 바라보기보다는 우리 행동을 합리화시키곤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11-12절)

2013년 12월 16일 월요일

날마다 by Gary Wilkerson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먹을 음식, 입을 의복과 같은 사소한 것을 걱정 하기 쉽습니다. 27절에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걱정을 함으로 삶에 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불안으로부터 자유케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함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로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께서는 갈급함과 간절함으로 그를 찾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더해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고 피값으로 구원받고, 정함(깨끗하게 된것, 죄를 씻겨주신것)받았을 때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의를 피값으로 사주셨으나 내가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면 다시 가져가버리실거야”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의 의를 위하여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시고,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죄악성보다 위대하십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한일서 4:4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결과는 밤중에 평안하게 누워 쉴 수 있게 하는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만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매일의 삶 속에서 일하십니다. 당신과 동행하며 당신의 삶의 모든 면에서 돌봐주십니다.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니 by Claude Houde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대 교회의 표상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분은 교회에 주셨던, 시대를 초월하는 이 경고의 말씀을 지금도 여러분과 제게 하고 계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요한계시록 3:16)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요! 현대 교회가 자행하고 있는 이 범죄, 상상할 수 없는 죄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과 신뢰, 그리고 우리의 순종을 원하는 전능자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17 & 20)

너무도 자주, 문맥상의 의미가 완전히 무시된 채 인용되며 적용되는 이 성경 구절의 의미는, 잃어버린 세상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셔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무관심이라는 침대에 태만하게 누운 채, 그들 자신과 그들의 소유에 대해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현세대의 성도들을 향한 직접적이고 단호한 부르심입니다. 이 세대는, 불타는 믿음 없이는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영적 계시에, 참담할 정도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적 사회에서 따온 방법론, 그리고 최첨단 체재의 전환과 전략을 신뢰하고 있는, 너무도 자족 자만에 빠져있는 교회의 문밖에 실제로, 그리고 극적으로 서 계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부르짖으십니다. “나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라! 회개하라! 너희에게 결코 생명수를 줄 수 없는 그 깨진 물탱크로부터 돌아서라! 나는 신뢰와 확신으로 내 언약만을 붙들 자들을 부르고 있다. 내가 갈망하는 자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믿지 못할 것을 믿으며, 불가능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근사한 예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환상적인 찬양 프로그램과 아름다운 교회 건물들, 수많은 참석자와 감동적인 가르침,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교회와 사회 프로그램, 심지어 기독교적 용어와 성경 인용 등 그 모든 것들이 있다 해도,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신실한 성도가 단순하고 진실된, 열정적인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갈 때, 놀랍고도 신성한 개입으로 산을 움직이시며, 천국의 모든 광대한 자원들을 기꺼이 풀어놓으실 것입니다.

담대함을 요구하는 불타는 믿음은, 여전히 하늘 문을 열며, 그분의 마음과 손을 움직이게 하고, 놀랍고도 무궁무진하며, 불가해하고 기적적이며 초자연적 자원들을 향한 무제한적 통로를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믿음을 원한다! 믿음은 나를 감동하게 한다! 믿음은 나의 권능을 보게 할 것이며, 나의 은혜를 얻게 할 것이다!” 몬트리올에서 목회를 하면서, 저는 주일 아침에 수천의 사람들이 모여 현대의 기적과 사건들, 그리고 간증들이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이 세상에 보고되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신다는 증거를 보는 것을 너무도 좋아합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Claude Houde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 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어려운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3년 12월 13일 금요일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자기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니…” (시편 78:18) 이 구절의 히브리어 의미는, 이스라엘 민족은 “인내의 한도를 넘어서 시험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공급할 아무런 인간적 방법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 시험의 장소에 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버리셨고, 침묵하며 숨으셨다고 믿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선택하신 축복받은 자들이 시험의 불 속에 놓여지고, 그들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까지 그들의 환란이 극심해져 갈 때 일어납니다. 마침내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제 구원은 어디에 있나요? 왜 이 상황을 돕지 않으십니까? 저와 함께 계십니까, 아니 계십니까?”

구원받지 않은 자가 주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행운 아니면 불운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오직 주님께 가장 가까운 자들, 즉 그분의 능력을 보았으며, 그분의 은혜와 자비를 맛보았고, 믿음의 여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만이 그분을 시험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세례 요한조차도 하나님을 시험하게끔 할만한 고난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앉아 있었을 때, 그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그도 의심했음이 틀림없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셨던 모든 놀라운 일들, 즉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기적을 행하시며, 한때는 자기를 따랐던 무리가 그분께로 몰려가는 일들이 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홀로 감옥에 앉아, 처형당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흥하시기 위해서는 자기가 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스쳤음이 분명합니다. “쇠하는 것은 좋아. 그런데 죽음이라니? 만일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왜 죽어야 한단 말인가? 만일 그분이 사람들에게 이 모든 기사를 행하고 계신다면, 왜 그분께서는 나를 구해내지 못하는 것일까? 주님,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죽음의 쏘는 것을 제거하지 않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보내신 마지막 말씀은 너무도 의미심장합니다.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할 자는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1:6) 그리스도께서는 이 경건한 종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나로 인해 실족하지 마라. 나는 오직 아버지로부터 보고 듣는 것만 행한다는 것을 너는 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계시며 신뢰받기에 합당하시다. 만일 그분께서 나로 네게 가서 너를 석방시키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그곳에 즉시로 갈 것임을 너는 알고 있다. 네가 어떤 결과를 맞는다 해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확신해도 된다. 그리고 그것은 너를 위한 영원한 영광을 의미한다!”

“요한, 너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 의심이 네 믿음을 훔쳐가지 못하게 하라. 그 대신, 너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안식하라. 너는 심판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너는 그분 눈에 대단한 영광이란다. 절대 요동치 말아라!”

저는 요한이 잘 감당해냈다고 믿습니다. 끝내는 헤롯왕에 의해 그의 목이 잘렸을 때, 그는 믿음과 존귀의 영광으로 가득한 집으로 갔습니다!

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이 어땠는지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모두 드러내기 위해 그들을 시험의 장소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분은 폭풍이 곧 그들을 뒤덮을 것임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열두 제자에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자기들이 그들 선생의 신실한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방금 예수님이 물고기 몇 마리와 빵 몇 덩이로 수천 명의 사람을 먹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를 타면서, 이제는 예수님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신 목사님의 삶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권능을 보는 것과 당신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이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파도가 더 거세지면서, 제자들의 시험의 때가 다가왔습니다. 곧 배는 물로 찼고, 제자들은 최선을 다해 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배가 가라앉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 시험의 때에 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떠올랐는지 들어보십시오. “주님, 우리가 모두 죽게 되었는데도 상관치 않으십니까? 우리는 침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신가요? 우리가 어찌 되든 상관없습니까?”

예수님의 수제자들은 그분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했던 말과 거의 똑같은 말을 예수님께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니 계신가? 하였더라.” (출애굽기 17:7)

한편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람과 파도가 잠잠하도록 그 이전부터 명령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권능은 항상 그분께 임해 있었습니다. 그러는 대신 그분은, 그야말로 제자들이 죽음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시험받도록 내버려두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가서, 배에 올라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제 날이 어두웠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더라. 큰 바람이 불어 바다가 출렁이더라…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그분을 반가이 배로 받아들였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뭍에 이르렀더라.” (요한복음 6:16-21)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고난과 시험의 장소

많은 성도가 고난과 시험의 장소에 도달하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인생의 쓰디쓴 물이 있는 마라와 같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출애굽기 15:22-23 참조)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끊임없이 떠오르는 의혹들, 그리고 심각한 불신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항의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를 우상 숭배하며 간음했던 저 이스라엘 민족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당신은 제가 그들과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가여운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자신이 어떠했는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시험의 때가 닥칠 때까지 그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예레미야 17:9)

이 백성은 시내 산에서 주님의 계명을 들은 후 그분 전에서 떨었던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때 그들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모든 계명에 순종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자신이 말한 모든 것을 진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가득했으며, 그분을 영예롭게 받드는 일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영적으로 파산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목자이자 지도자인 모세의 체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들로부터 불러내셨을 때, 그들은 채 사십일도 되기 전에 타락해버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면, 그들은 전심으로 그 말씀에 순종할 것을 기꺼이 맹세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다른 사람의 체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태잎이나 세미나에서 가르치는 것들과 그들 목사님의 계시로 삽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와 그들 자신과의 아무런 깊은 체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누구한테서도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당신의 마음을 자극하며 당신께 영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경적 교훈을 발휘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님과 당신만의 고유의 체험을 가질 때까지,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역사를 펼쳐나가기 전까지는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체험이 될 때까지, 그분의 말씀은 당신 마음속에서 계속 일할 것입니다.

2013년 12월 10일 화요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10:8-10에서 묘사했던, “하루 만에 죽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뱀들에게 멸망당했던 수많은 자와 “파멸시키는 자에게 멸망당했던” 자들은 또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모압인도, 가나안 사람도, 블레셋 족속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주변의 이교도들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즉 믿는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초자연적 권능에 의해 영적 양식을 공급받았으며, 바울이 언급했듯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바위로부터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좋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잘 보호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 소멸되었으며 뱀들에게 멸망당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너무도 화나게 한 나머지 그분이 그들을 광야에서 “쓰러뜨렸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의미는 “그들을 그분의 손에서 내던졌고, 많은 먼지와도 같이 그들을 땅에 흩트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뜻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로부터 이것을 용납할 수 없다. 만일 너희가 순진무구했다면, 또 너희가 잘 훈련받지 못했으며, 내 손에서 영적 양식을 받아보지 못했거나 내 영광의 증거를 보지 못했다면, 내가 너희를 용서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많은 축복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욕정과 우상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너희를 흩어버릴 것이며 내 손에서 완전히 던져버릴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왜 주님께서는 엄청난 호의를 받았던 자신의 백성을 그토록 혹독하게 다루셨을까요? 바울은 9절에서 매우 분명하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자.”

“우리가 주님을 시험하지 말자”고 했을 때 바울이 뜻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의 기적을 경험한 직후에 벌어졌던 출애굽기 17장의 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흰색의 작은 과자는 그들이 생존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영양분을 함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작고 둥그런 과자”는 날마다 그들이 거하는 땅에 떨어져 내렸습니다. 이 백성이 그러한 초자연적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단지 그분의 은혜로 그들에게 만나를 먹이셨던 것이고, 그들의 일은 그것을 모아 담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마라’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했는데 그곳의 물은 마시기에 너무 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들은 또 다른 시험을 대면해야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백성은 곧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향해,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광야로 이끌어낸 냉혹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며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우리는 듣습니다. “그들이 주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아니 계신가? 하였더라.”

2013년 12월 9일 월요일

당신은 자유롭게 되셨습니까? by Gary Wilkerson

제가 여러분께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중요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당신은 자유롭게 되셨습니까? 처음에는 그 질문에 ‘예’라고 아주 쉽게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 다수는 어떤 형태의 공상적이며 환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고 씻김 받았으며, 구속되었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순수하고 정결하게 씻겨졌으며,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계 어딘가의 비현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서의 우리 존재 자체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 “내가 정말 자유롭게 되었나?”라는 의혹을 품기 시작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 간구하며 날마다 그분께 탄원합니다. “주님, 저를 자유롭게 해 주시옵소서! 저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며, 이 고질적 습관과 중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구해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씻김 받고 그분의 존귀한 보혈에 의해 정결해졌다면, 당신은 그분 안에서 이미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를 거둔 새 창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린도후서 5:17-18)

이제는 여러분이 절망과 죄책감에 빠진 채 제단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간청하고 애원하며 부르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발 저를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아닙니다. 그분은 이미 당신을 변화시키셨으며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당신의 불의를 해결하셨고 당신 안에 그분의 의를 심어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여러분은 그분께 당신을 의롭게 만들어달라고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분을 만났다면, 그분은 이미 당신을 의롭게 만들었고 온전케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요!

2013년 12월 7일 토요일

새로운 시작 by Jim Cymbala

약 백여 년 전에, 영국의 위대한 목회자 찰스 해돈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은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영성은 그들의 기도 모임에 의해 매우 정확히 평가될 수 있습니다.”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에서 시작된 화요일 밤 기도 모임 첫날에는 열다섯 명에서 열여섯 명 정도의 성도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무런 기도제목이나 계획 없이, 그저 앞에 나가서 성도들의 노래와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그런 후 찬양은 기도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시는 것 같았으며, 새로운 연합과 사랑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고, 기도들의 응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를 도울 수 있는 재능과 능력을 갖춘 새로운 성도들이 합류하기 시작했고, 미처 구원받지 못한 친척들, 그리고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 모임을, 영적 고통에 처해있는 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성령의 응급실”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시간은 계속되었고, 저는 성도들에게 계속 기도하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유창한 기도 소리를 듣기 위해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절박했습니다. 우리는 수평으로 서로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수직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때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님을 향해 다 함께 부르짖으며, 통성으로 같이 기도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모두 손을 잡고 둥글게 서서 기도했고, 또 다른 때에는 각양의 성도들이 그들의 고충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기도 모임의 형식은—우리의 온 존재로 부르짖으며 전능자를 감동시키는, 그 핵심에 비하면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우리 교회의 초기 시절에는, 사람들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성령 충만을 받았고,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되찾았으며, 그들의 일터에 대해,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에 대해, 그리고 그들 가족 모임 등에 대해 터놓고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 성도들을 데려왔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희 교회는 하양선을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은혜로, 성도들 가운데 당파가 일어나서 교회가 분열된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계속 보내주셨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알고 왔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 명도 채 못 되는 성도와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3년 12월 6일 금요일

거짓된 평강

오늘날 미국은 마귀의 거짓말로 인한 유혹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 과는 무관하며 오직 영적 진리와 관련이 있음을 더 이상을 언급하기 전에 미리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실은, 미국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져버리고, 성경적 진리를 전혀 존중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안에 속임을 주님께서 허용 하신 것입니다.

미국을 덮고 있는 마귀의 속임수는 거짓된 평강입니다. 그것은 바로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속임수의 선을 넘은 것이고 이제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 이러한 주의 심판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한때 성경의 진리를 믿었으나 나중에 부정한 길로 가는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도 원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욕까지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을 타락한 사람들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거짓을 믿고 싶었던 것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강한 망상이 그들에게 들이닥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미국의 현재 상태를 말합니다. 최근 우리의 대통령들은 온 국민들에게 “나는 이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중에 그가 직접 언급한 죄를 저지른 것이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오늘날 80퍼센트의 미국인들은 그의 이러한 죄와 그의 삶에 대하여 눈감아 버리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된대로, 진리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미국인들은 술취한 뱃사람들처럼 주식시장에서 도박을 하고 번창합니다. 게다가 조사에 의하면 65퍼센트의 대학생들은 속임수로 컨닝을 하면서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니깐 내가 하는 일은 다 괜찮을 것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하나님의 법을 가볍게 여깁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우리 나라의 수도에서 거짓말, 은폐 그리고 교묘한 조작들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여진 강한 망상은 단순히 워싱턴 DC로부터의 부도덕적 상태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속이는 힘은 그러한 배신, 타락, 부패보다 더 넓고 크게 작용합니다. 그의 크나 큰 속임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지옥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 바울은 우리에게 주의를 줍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바울이 말하는 속임당한 이 무리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바로 속임당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쓴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며 진리를 알았지만 자신의 정욕과 자신의 죄를 위안할 이단을 찾은 것입니다.

2013년 12월 5일 목요일

불법의 비밀 (죄의 미스터리)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 그는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 이라는 미래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음의 두 상황이 있을 때까지 이루어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 엄청난 배신. 하나님을 알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복음의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될것. 
  2. 적그리스도 또는 죄인이 드러나게 될 것. 
“배신”은 이미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의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오늘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냉담해졌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 저는 바울의 두 번째 포인트인 주의 날이 “적 그리스도가 드러날 때”까지 오지 않는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이세상을 지배하고 우리가 그의 정체성을 알게 될 때까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금방이라도 재림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실 것이라고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사용한 “드러나다(revealed)”라는 단어에서 그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로는 “아무것도 덮여있지 않은” 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바울이 “예수님께서는 적그리스도의 모든 계획과 의도가 노출되어 교회가 인식할 때까지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그리스도의 계획은 말씀에서 이미 노출되어 있습니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The mystery of iniquity doth already work)” (데살로니가후서 2장 7절) 그는 심지어 지금도 적그리스도에게 미스터리(mysterious)한 형태의 죄가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적그리스도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고 죄악의 영이 진리를 잃어버린 인류에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의 비밀(mystery of iniquity ; [직역] 죄의 미스터리)”은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조용한 개시(silent initiation)” 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의 어원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적그리스도 숭배로의 비밀스러운 시작-즉 치밀하고, 악한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현재, 이 같은 비밀스러운 영이 강한 유혹으로 수많은 대중을 적그리스도를 받아드리도록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수천이 매일같이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그의 궤계에 세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멀지 않은 미래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더욱 빠르게 커질 수 있도록 매우 빠르고 효과적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2013년 12월 4일 수요일

생명을 내게 주소서!

사도바울이 영적으로 가장 성숙했던 시기의 그를 만나봤으면 좋았겠습니다.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형제, 끊임없이 내리막길로 압박을 당하지 않았는가? 당신을 쓰러지지 않게 포기하지 않게 하였던 그것이 무엇인가? ”

저는 사도바울이 이렇게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억누름을 당하였지만 그 어떤 정신적 고통과 괴로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하지만 당신은 많은 시험들로 인해 종종 혼란스럽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절망으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누구보다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시종일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질병과 곤경으로 자주 치이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나를 파괴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8-9절 말씀으로 전세계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7절에서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린도후서 4장 12절) 사도바울은 간단명료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온전히 사망이 역사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간증을 듣는 모두 안에 생명을 낳게 될 것입니다.”

재정적 문제에 직면 했을 때, 육체적 고통에 시달릴 때, 당신의 이름과 명예가 실추될 때, 모든 눈이 당신에게 향해있을 때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직장동료들, 가족들,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 그리고 심지어 낯선 사람들까지도 당신의 반응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시기에 당신에게서 무엇이 흘러 나는지? 그들은 믿음, 신뢰, 내려놓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절망하고 소곤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이들에게 흐르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하여 여러분 안에 사망이 역사하도록 허용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아버지, 저는 주님께서 저로 인한 화로 이러한 어려움이 닥쳤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제 영혼에 무엇을 심고자 하심 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해주시고, 사망으로 역사하시고, 그 사망을 통해 생명을 내게 주소서”

2013년 12월 3일 화요일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초기에 고난의 시간을 견디어 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그는 적당히 주를 믿으면 모든 곤경으로부터 안전히 보호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처음으로 감옥에 갇히었을 때 구원을 위해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주여, 이 감옥의 문을 열어주시고, 복음을 위해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또한 그가 첫 조난사고로 인해서 그의 신앙은 극심한 시험을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매 맞음을 당 할 때는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 “주여 나를 안전히 지키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왜 이런 끔찍한 시험을 견뎌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상황은 모두 점점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말씀에서는 사도바울이 여러 곤경에서 고통이 경감되었다는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그의 두번 째 난파사고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만약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이대로가 좋습니다. 물에 가라앉던지 수용을 하던지, 내 삶과 생명은 주의 손에 있습니다” 라고 고백했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난파사고 때는, “천사들이여, 지옥의 악한 마귀들아, 나의 형제들 그리고 죄인들아, 나를 보아라. 나는 다시 한번 어둡고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지만, 죽음이 나를 사로잡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다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셨고,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주님께 내가 왜 이러한 시험을 받는지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나중에는 결국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임을 안다. 그래서 내 믿음이 정금과 같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리라”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죽음은 대개 우리 개인적인 어려움의 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의지하지 않으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러한 고백을 듣고 싶어합니다. “예수님,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지 않으시면 내게 소망은 없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나의 모든 믿음을 드립니다.”

2013년 12월 2일 월요일

너는 일어나 시르밧으로 가라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땅에 기근이 올 것이라는 예언을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역은 그리 인기가 높아지게 될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엘리야는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안전히 보호하시고 그릿시냇가로 보내셨습니다. 실제로 그곳이 그리 아름다웠을지는 알수 없지만, 그릿은 시냇가의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에 시냇가는 말라버렸습니다.(열왕기상 17:3-7) 누구나 먹지않고 몇일간을 버틸수 있겠지만, 물 없이는 짧은 기간에도 생명유지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엘리야 또한 물이 말라버렸으니 근심을 하는 모습을 상상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8-9절). 엘리야는 아주 작은 공급에도 가난한 과부에게 자신을 보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10절)

엘리야는 그녀에게 물 한 병과 빵 한 조각을 부탁하였습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12절)

과부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의 상처로부터 반응하였습니다. 그녀와 아들은 굶주리고 있을 때 엘리야는 찾아와 “당신이 나를 먹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과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불 가능해!” 그리고 그녀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절)

엘리야의 반응은 약간 이상했습니다 :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13절)

그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이 여자와 그의 아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작은 것을 나누어 주었을 때 자기 자신이 축복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 나누고 내려놓을수록 하나님께서 과부가 가진 것을 더욱 크게 하시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14-16절)

하나님께 순종을 하면 천국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복을 부어주시고 싶어하십니다.

2013년 11월 29일 금요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행하십니다

당신은 우리 죄를 부드럽게 드러내는 강력한 설교를 경청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 말씀이 당신의 죄를 깨닫도록 허용합니까? 아니면 그것에 대한 애통함 없이 다시금 그 죄로 돌아갑니까?

만일 당신이 애통함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훈계하시는 성령의 경고를 거부한다면, 당신은 적그리스도의 이단으로 소집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당신을 은밀하게 그의 “비밀스러운 죄”로 들여놓으며, 기적을 행하는 유망한 적그리스도가 도래할 때, 당신은 그의 거짓말에 휩쓸리게 될 것이고 망상에 내어준바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타협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그들 모두가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12)

다음은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불길한 결과들입니다:
  1. 죄의 속임수에 의해 마음이 강퍅해진다. 
  2. 죄의 형벌에 대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사탄은 강퍅해진 마음을 조종하여 죄를 정당화시킨다. 
  3. 성도는 죄의 대가가 없으며 심판의 날도 없을 것이라는 거짓말에 눈이 멀게 되며, 그로 인해 그의 육적 쾌락으로부터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4. 성도는 마귀 교리의 미끼로 전락해서, 악은 선이며 선은 악이라는 사고를 갖게 될 것이다. 
  5. 결국,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가서 누가 적그리스도인지도 분간할 수 없게 되며, 결국에는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섬기게 된다. 
  6.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권능을 통해 우리의 모든 망상을 없애주시고, 우리가 죄를 이기고 승리하도록 도우신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요청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습관과 결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과 동행하는 것을 거부한다. 아버지, 당신의 성령으로 저를 구원하소서.” 그분께서 이 기도를 들으실 때 그분은 하늘로부터 성령의 권능과 영광을 보내주실 것이고 마귀는 실패할 것입니다!

그분 말씀의 위대한 경외심을 당신에게 심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분께 성경 말씀을 잘 읽을 수 있도록 단련 받게끔 도와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읽고 그것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도와달라고 성령께 요청하십시요!

2013년 11월 28일 목요일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사울 왕의 생애에서 한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에게 명백하고도 구체적인 지시를 하셨습니다: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진멸하고 남기지 말며,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젖먹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사무엘상 15:3)

사울이 주님께서 내린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치고…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을 산 채로 잡으며… 그러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또 양과 소와 살진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그것들을 진멸하려 하지 아니하고...” (7~9절)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전쟁터로 나간 후, 주님 명령의 일부만 순종했습니다. 모든 자와 모든 것을 진멸하는 대신, 그는 아각 왕을 살려주었고 전리품까지 가져왔습니다.

사무엘은 이로 인해 비탄에 빠졌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왕을 보내 이동하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가서 죄인인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되 그들이 소멸되기까지 그들과 싸우라, 하셨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왕이 주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노략물에만 날아가 주의 눈앞에서 악한 일을 행하였나이까?” (18~19절)

이 시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통탄할 만큼 냉혹한 말을 합니다. “그때에 주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으로 인해 슬퍼하노니, 그가 나를 따르는 것에서 돌이켜 내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0~11절)

이 말씀이 당신의 삶을 묘사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분명히 나쁜 습관을 해결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여전히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영은 지금 이 시간에도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가 우리의 교류를 방해하며, 우리 사이에 끼어있다. 네가 그것을 계속하는 한, 나는 더이상 너를 축복할 수 없다. 내 자녀야, 내 영이 너를 도울수 있음을 신뢰해다오.”

사물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23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순종 때문에 사울을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하신 바는 그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를 향한 너의 순종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건성으로 하는 순종이 아닌, 네 온 마음으로 하는 순종을 원한다!”

2013년 11월 27일 수요일

죄와 결탁하다

사악한 자들은 항상 진리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경멸하고 짓밟으며, 하찮게 여기며 조롱합니다. 최근에 저는 이것에 대한 실례를 뉴욕 포스트지에서 보았는데, 한 기자가 “이제 과학은 믿음을 대치했다.”라고 자신 있게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항상 크게 우려했던 자들은, 진리의 길을 알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들의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계속해서 죄와 결탁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불의 가운데서도 진리를 추구하려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주셨으니…” (로마서 1:25-26)

어떤 자들은 그들의 불순한 쾌락에 속박되어서는, 평강을 얻기 위해 거짓 선생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정죄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많은 사람이 그들의 악독한 길들을 따를 터인즉, 그들로 인해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요…” (베드로후서 2:1-2)

배교와 적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모든 메시지는, 매우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우상숭배자들이나 그리스의 이교도들, 또는 알려지지 않은 곳의 이방 족속들을 향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바울의 이 메시지는 교회를 향한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직접 읽히도록 기록된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울은 진리를 사랑하고 탐구하며, 진리를 연구하며, 진리에 순종하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모든 곳으로부터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진리가 너희 등불이 되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마라. 성령께 그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 그리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요청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속임수에 빠지게 될 것이고 마침내는 거짓을 믿게 될 것이다. 사탄은 적그리스도의 이단으로 너희가 발을 들여놓게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단순히 성경 말씀을 회상하십시오. 예수님 재림 직전에는 사탄이 너무도 강력한 유혹을 홍수처럼 몰고 와서는, 가능하다면 선택된 자들까지도 속이려 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행했던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유혹을 맞게 될 것입니다. 가장 강인한 믿음의 성도조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도록 유혹받게 될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불신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바로 그 선택받은 자들을 속이리라.” (마태복음 24:24)

2013년 11월 26일 화요일

무법의 영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으나…” (데살로니가후서 2:7)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단어 ‘불법’의 헬라어 의미는 문자 그대로 “무법”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비는 무법 중 하나인데, 그것은 많은 자가 법의 제재를 무시하고 살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무법은 단지 인간의 규율을 향한 반역을 뜻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행정 당국을 거슬리는 행위나 도적질, 또는 강간이나 살인 등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법의 신비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단호한 부정이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경 말씀의 규율에 반역하는 것입니다!

이 무법의 영은 오늘날 우리 국가에 만연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을 추방해버리려는 법률을 제정하려는 저변 세력이며, 사탄이 이브에게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네가 불순종한다 해도 벌하지 않으실 거야. 너는 네 욕구대로 그 과일을 먹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될 거야!”라는 많은 말로 그녀를 속이기 위해 사용했던, 똑같은 영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그와 같은 거짓말을 사용해 많은 성도에게 죗값을 치르지 않고 그들의 죄를 추구할 수 있다고 믿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하며, 그것을 무법의 메시지로 변질시키려는 악귀적 술책입니다. 비참하게도 많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이 그 무법의 영에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잡고 일어날 것인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 인해 눈멀게 되고 기만당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9-10)

사탄은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으신다!”고 이브를 속였듯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묘하고도 강력한 거짓말을 믿게 함으로써 그들을 기만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속임수가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10절)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그들이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11절)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거나,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강한 미혹으로 인해 무너질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간과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곧 그들은 그것을 합리화시켜줄 은혜의 메시지를 열심히 찾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으로부터 완전히 빗나간 은혜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분의 은혜는 절대로 죄에 대한 허가로 이끌지 않는다. 그분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2013년 11월 25일 월요일

카우보이 부츠 by Gary Wilkerson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고린도후서 9:6)

몇 년 전에 저는 뉴욕 타임스퀘어 교회의 부목사로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제가 텍사스에 살았었는데, 그때 텍사스 정품 카우보이 부츠 한 켤레를 샀고 그것은 아주 좋은 부츠였습니다! 한 노숙자가 제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 저는 그 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그는 떠돌며 히치하이크로 대륙을 횡단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의 태도는 매우 불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군. 당신네 교회들은 다 똑같아. 당신들은 교회건물 사는데 돈만 낭비하는데다가, 목사들은 좋은 차를 몰며 잘살고 있지.”

그리고 그는 저를 내려다보며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참 멋쟁이구먼. 당신은 그렇게 좋은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있는데, 나는 다 떨어지고 오래된 캔버스 신발을 신고 있어.”

“이 부츠 맘에 들어요?” 하고 제가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저는 부츠를 벗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저는 신발을 신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약 육 개월 후, 북 캐롤라이나 그린즈버러에서 목회를 하는 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게리, 자네가 믿지 못할 일이 생겼네. 지금 여기 내 사무실에 어떤 사람이 앉아있는데, 육 개월 전 자네가 그에게 카우보이 부츠를 줬다고 하네. 그는 자네와 그 교회를 잊을 수 없다고 해. 그는 육 개월 동안 히치하이크를 하며 떠돌아다녔는데, 그가 걸을 때마다 그 부츠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는군.”

그는 제 친구의 교회로 걸어 들어가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있잖아요, 뉴욕의 어떤 목사가 이 카우보이 부츠를 나한테 줬어요. 내가 타임스퀘어 교회라는 곳에 갔었는데, 거기서 그는 부목사들 중 한 분이었어요.”

제 친구 스티브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그 사람 이름이 게리입니까?”

“예, 맞아요. 그분 이름이 게리였어요.”

제 친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지난 육 개월 동안 성령께서 당신과 함께하셨네요. 이제 당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릴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 삶을 예수님께 드리기 위해 이 교회에 왔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권면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기근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기회를 찾으시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에 기근이 왔습니까? 당신의 배우자를 섬기고 사랑하며 축복할 기회를 찾으십시오. 당신 자녀와의 사이에 기근에 있습니까? 분열과 갈등을 겪고 계십니까? 주님의 뜻에 따라 당신의 가정을 사랑하고 섬기며 잘 정돈할 기회를 찾으십시오.
재정 문제로 어려우십니까? 기근 중에서도 주위를 돌아보며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 삶에 많은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2013년 11월 23일 토요일

두려움 쫓아내기 by Carter Conlon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죄성으로부터 그 원천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천국에서 더이상 예배자의 위치에 서지 못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찬양받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깃든 그 욕망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영역 밖에서 그가 사고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가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 왔을 때—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살며 독립적으로 사고하려는 욕망,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그의 타락한 본성을, 자신 다음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놓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인간의 마음속에 심겨진 죄성을 시작으로, 다음 단계는 경배받기를 갈망하는 원초적 욕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타락한 인간은 서로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왜 우리의 온 정체성이 갑자기, 우리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판단하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좌지우지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실제로, 이렇게 칭송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많은 사람을 박수갈채와 명성의 영역 안에서 살 수 있는 산업으로 치닫게 했습니다. 그들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중독되어,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맙니다.

어느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이전에 알았던 사람이 우리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면 그 얼마나 큰 비극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진리를 알고 있었어요. 당신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잖아요!! 내가 무례하게 반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왜 내게 그걸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내가 여기 오게 될 거라는 사실과 내 자녀도 이곳에 오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왜 내게 말해주지 않았나요?”

슬프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변명은 이것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호감보다는 당신의 호감을 더 원했어요. 나는 당신이 나를 좋아하기를 원했어요. 나는 당신이 나를 향해 비웃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그리고 나는 당신으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칭찬보다 인간의 칭찬을 선호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사람을 두려워하는 올가미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인 것을 알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7 참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평에 의해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피할 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한일서 4:18) 하나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낼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서, 우리를 향한 그들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그들을 돕게 만들 것입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도에는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그리스도 생명의 나타나심을 방해하는 것들

만일 당신의 걸림돌이 야망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엄청난 기회의 문을 열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크고 야심적인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것에 발을 들여놓고 이렇게 생각하도록 허락하실 겁니다. “바로 이거야! 마침내 나는 큰 돌파를 얻은 거야.”

그리고 주님은 그 전체가 실패로 끝나는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울부짖으며 당신의 망가진 꿈 가운데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이 프로젝트가 당신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당신께 그것에 대해 신실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처참한 실패를 허락하실 수 있습니까?”

당신 프로젝트의 실패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당신 안에서 나타나심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당신의 걸림돌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 놀라운 계시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처럼 신선한 계시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느 날 당신은,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심오한 교리의 새 진리의 계시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확신은 계속 증가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모든 새로운 계시를 주님과의 동행에서 지속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당신의 영혼은 메마름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기쁨과 확신은 곧 나약함과 무용의 감정으로 무너져내립니다. 설명할 수 없는 절망감이 당신의 영혼을 채우며,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그토록 생생했던 성경 말씀은 이제 그 생명을 잃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계시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당신이 다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의 지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메마름은 당신의 모든 육적 확신에 대한 당신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을 얻기보다는, 당신에게 주어진 계시 안에서 영광을 찾으려는 당신의 육적 성향에 대한 죽음입니다.

사실 계시는 교만을 잉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은 바울이, 그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제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충실한 종이 모든 것들로부터 겸허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죽음의 상황들”을 감수해야 하는 이 모든 과정이 혹독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것은 예수님과의 동행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 맡은 일을 끝내도록 우리가 허용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서 자유롭게 흘러나올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그 죽음의 일을 저항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결코 소유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2013년 11월 21일 목요일

예수의 생명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께서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정하신 자같이 마지막에 두셨나니,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린도전서 4:9)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경건한 성도가 죽음의 상황으로 이끌릴 때는, 그것이 더이상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 가지로 구별되는 요원들, 즉 천사들과 마귀들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당신이 그 투쟁에서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 어두운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로 인한 비밀스러운 전투에 대해서는 모르고 계십니다. 한편, 그 세 영역의 요원들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고, 천사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궁금해합니다. “이 하나님의 종이 어떻게 그 시험에 반응할까?”

그렇다면, 그토록 경이로운 시험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왜 이러한 죽음을 통과해야만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천부께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타나심을 방해하는, 우리의 미처 성화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걸림돌,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야망, 우리의 욕망 등—예수님의 온전한 비춰지심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마음의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죽음의 상황들”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만일 당신의 걸림돌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움으로 마비시킬 수 있는 사람을 당신의 삶 속으로 들여올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은, 당신이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당신의 두려움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육체적 통증까지 발생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그들 삶을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인해 실제로 그들의 숨통이 막혀서, 급기야는 호흡장애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남녀를 당신 삶에 허락하실까요? 왜냐하면, 당신의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죽음에 넘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그 두려움은, 네 안에 있는 소중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흐름을 막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맺을 수가 없단다. 네 안에 있는 이 두려움은 끝을 보아야만 한다. 그래서 너는 그것으로부터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분을 향한 당신의 부르짖음은 이러할 것입니다. “주님, 제발 이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실 겁니다. “아니다, 나는 죽음이 그 맡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예수의 생명이 네 안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내가 이 모든 것을 허락했단다!”

2013년 11월 20일 수요일

매일 죽음으로 넘겨지다

경 건했던 사도 바울은 성령과 계시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기도했고 매일 예수님과 친교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는 핍박과 중상, 멸시와 매도를 당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험담거리였고, 그의 성품은 모욕당했으며, 그의 이름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너무도 자주, 그리고 너무도 많은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제자들조차 그가 왜 그토록 끊임없는 곤경과 박해를 당해야 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볼 때마다 그의 얼굴은 멍들어 있었고, 그의 뼈는 부러져 있었으며, 그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여기 권능으로 가득하며 신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자가 있었으나, 그가 가는 곳마다 매도와 모독이 뒤따랐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라는 한 친구만이 그에게 남아있으며 그가 “나의 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16) 바울은 이 친구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는 나의 투옥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비밀스러운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그는 나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한, 바울은 “결박 중에 있는 나를 불쌍히 여겼다.”는 성도들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히브리서 10:34)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나의 고충을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바울이 시험을 당할 때 그와 함께했던 자들이며, 그들은 “비방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경거리가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취급받는 자들과 사귀는 자들이 되었으니…” (33절) 이러한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고난의 동역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당했던 일들을 그들도 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깊은 영성을 가진 한 사역자를 아는데, 그는 수년에 걸쳐 다른 성도들로부터 악한 공격과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제가 그를 볼 때마다, 그는 제게 그의 문제들에 대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나 시간이 지나도 그의 시련은 그치지 않았고, 저는 그것이 귀찮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항상 왜 그리도 시달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당신은 제가 알고 있는 목회자 중에서도 가장 경건한 분입니다. 당신은 주님과 친밀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계속해서 그분의 말씀을 공부하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당신이 그토록 계속되는 곤경을 겪어야 하는 삶을 허락하실까요?”

그러나 그 경건한 사역자가 매일 죽음의 상황에 넘겨졌야 했던 이유는, 그가 부활생명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저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강력하게 사용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계속 그를 죽음으로 넘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구현되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바울을 파멸시키려고 작정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나타나심이 그의 삶에서 밝게 빛춰지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죽음에 넘겨지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1)

사도 바울이 “살아있는 우리”라고 말할 때, 그는 요한계시록 1장 18절 예수님의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자라.”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도 또한 죽음으로 넘겨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독생자를 죽음으로 넘기셨듯이,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도 죽음에 넘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손을 잡고 죽음의 문턱으로 데리고 가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음아, 여기 이 아이도 데려가렴. 얘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그리고 이 시점에서의 하나님의 손은 더이상 보호자의 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손은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독생자를 죽음에 넘기신 똑같은 이유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은 사망이나 고통, 그리고 슬픔이 더이상 우리를 삼켜버리거나 파멸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즉 그분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일이 모험이 아니었듯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도 모험이 아님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위한 승리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자기 독생자를 위해 승리를 계획하셨듯이요. 그러나 이 승리는 오직 죽음을 통과해야만 우리 안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 매일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 사도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8:36) 이 구절의 헬라어 의미는 이렇습니다. “날마다 우리는 죽음으로 넘겨졌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의 현실을 직면한다.”

여기서 반드시 이해하셔야 할 부분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동행에서 우리가 날마다 감당해야 하는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고 증언했을 때 그는 환난, 고충, 핍박, 위험등 온갖 종류의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본질적으로 말하고 있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갖고 있는 우리는, 죽음에서 또 다른 죽음으로 끊임없이 넘겨지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시험이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갖고 있다!” 

2013년 11월 18일 월요일

복의 근원으로 받은 축복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은 당신에게 복 주시고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가정과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축복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지혜와 분별력을 갖추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신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축복해서라기보다는, 그러한 축복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대해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중 많은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기적으로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12:16-19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축복받은 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나님은 관대하셔서 그분 자녀들에게 축복 부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그 부자는 많은 축복을 받았으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축복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축복받은 자가 “심중에 생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이 문제의 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실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가 받은 축복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할때, 대부분 이기심이 따라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가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그런데 이것이 누구의 곡물(축복)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이 부자의 마음은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인관계, 재능등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선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기심이 자신의 정체성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우리는 하나님 축복에 대한 설교를 들을 때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그분의 축복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안위와 쾌락을 위한 완벽한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축복을 쌓아놓아야 할까요? 아니면 주위를 돌아보며 불우한 자들을 도와야 할까요? 우리는 창세부터, 인류를 향한 하나님 축복의 언약으로 축복받았습니다—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복을 받은 것입니다! 

2013년 11월 16일 토요일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by Claude Houde

저는 현대 기독교에서 가장 치명적 것중 하나가 불신이라고 확신합니다. 불신은 우리를 영적으로 잠들게 하고 천천히, 그리고 냉혹하게, 오랜 기간동안 끈질기게 결박해서는, 끝내 우리가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용납하게 만듭니다.

지금 하나님의 왕국은 전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복음주의적 교회들 중 90퍼센트가 넘는 교회에서는 눈에 뜨일만한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영적 각성을 돌이켜보는 데에 머물러있거나, 최근에 유행처럼 들려오고 있는 놀랍고 즉각적인 돌파의 언약에 필사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제 말을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아프리카, 중국, 한국,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이전에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부흥은 기쁨과 찬사로 우리 마음을 뿌듯하게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난날에 하셨던 일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허용할 수 없는 것을 허용하도록 만든 제 믿음의 저조함에 대해 회개하고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세계 전역을 통해, 바로 우리 눈앞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혼구원을 위한 부흥의 새 장이 기록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영적 매마름 속에서 산다는 것과 그토록 끔찍한 상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해나 명철을 초월할 만큼 심각하고도 치명적인 것이 바로 불신입니다. 패륜, 타락, 우상숭배와 악귀적 종교의식으로 가득한 세상에 둘려싸여 있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굳건히 서 계셨고 요동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울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불신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그분을 상심케 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있듯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사랑했던 자들과 대화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굳은 마음과 그분에 대한 신뢰를 부인하는 모습을 보고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33-35 참조) 그분은 그분 권능의 언약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그들이 거부했을 때 우셨던 것입니다. 그처럼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무관심하며 나태한 우리의 태도로 인해 울고 계시며, 수치스러운 허위 종교적 “교리들”과 의식들이 합리화되고 구축되고 있는 실상으로 인해 울고 계시고, 참된 권능과 초자연적 열매를 회피하는 우리의 삶을 정당화시키도록 만드는 그럴듯한 논리들로 인해 울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는 편파가 없으십니다. (히브리서 13:8, 사도행전 10:34-35 참조) 그분은 불변하시고, 전능하시며, 절대적으로 의로우십니다.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그토록 장엄하게, 초자연적으로 행하고 계시는 일을 당신의 삶, 당신의 도시, 당신의 교회에서도 똑같은 열심과 갈망으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 권능의 무한한 위대함과 우리 사이에는 불신의 장벽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부르짖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을 증가시켜주소서!”


_________

저자 약력: Claude Houde는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어려운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3년 11월 15일 금요일

부활의 생명

예 수님께서 무덤에 고요히 누워계셨을 때, 사탄과 그의 무리는 기뻐 어찌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동안,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계획—부활의 생명을 위한 계획은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령을 사망의 음부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 주셨고, 성령께서는 그곳에서 예수의 몸을 사망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신성한 구세주는 두꺼운 돌을 통과하고 무덤에서 걸어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증언을 갖고 나오셨습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 (요한계시록 1:18)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의미는 이렇습니다. “내가 바로 영생을 가진 자다! 내가 한때는 죽었으나, 지금은 살아있고 영원토록 살 것이다. 나는 생명과 사망의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음부에서 걸어 나오시는 순간, 그분은 부활과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만을 위해 그 일을 행한 것이 아니라, 그날 이후로는 누구든 그분을 믿는 자들 모두를 위해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초월한 부활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한다든지 그것을 대적으로 볼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일으키셨으니…” (사도행전 2:24)

당신이 예수님을 당신의 구주로 영접했다면, 그분은 부활 생명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을 무덤에서 살려내신 바로 그 부활의 능력이, 당신 또한 지켜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후서 13:5)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 사탄이 절대 파괴할 수 없는 강력한 생명의 권능을 당신 존재 안에 갖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에베소서 3:14-16)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사망으로 넘겨지심

오 순절에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군중을 향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분(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지매,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사도행전 2:22-23)

베드로가 그렇게 말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헬라어 사전에서는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에 의해 원수들에게 넘겨져 사망에 주어진 바 되었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그토록 자비로운 천부께서 행하신 일이란 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고의로 죽음에 넘기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을 그의 가장 사악한 원수의 손에 의도적으로 넘기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기 내 아들이 있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런 후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사악한 원수들이 그를 죽이는 것을 내버려두고 보기만 하셨습니다.

대체 이것은 어떻게 예정된 계획이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사망으로 넘기셨을까요? 베드로는 그에 대한 답을 다음 구절에서 말해줍니다: “이는 사망이 그분을 붙들 수 없었기 때문이라.”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사망의 음부에 영구히 붙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생명의 권능에 의해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기고 영광스러운 승리자로서 무덤에서 나올 것임을 아셨기에, 자기 아들을 사망으로 넘기는 것은 전혀 모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러한 말씀을 전했던 시간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갈보리 사건이 있기까지, 사망은 인간에게 너무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마귀의 통치와 주권하에 속한 것이었으며,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대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망의 권세가 파쇄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 때문에 자기 아들을 사망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히브리서 2:14)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사망 권세를 단번에 파쇄하고, 사망의 결박을 없애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결박을 삼켜버리기 위해 예수님을 사망의 음부로 내려보내셨던 것입니다. 

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그분의 말씀을 믿으세요

만 일 당신이 정말로 하기 싫어하는 그 일을 계속하면서, 끊임없이 연약함과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다면, 그리고 왜 연거푸 넘어지는지 의아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언약들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방패이자 그의 보상이 되어주실 것과 그의 모든 원수를 물리쳐 주실 거라는 약속, 또한 그처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주실 거라는—그를 위해서 심지어 기적까지도 행해주셔야 하는—많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언약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영적 원수들과 싸우는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은 무엇이든 이루어주실 것을 우리가 마음으로 믿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도 우리 의의 시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을 보내시어 우리 영혼에 거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권능이며, 그 권능은 모든 악귀적 세력을 향해 전쟁을 선포합니다: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갈라디아서 5:17)

성령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마귀야, 이제 여기는 내가 거하는 성전이다. 너는 더이상 여기서 통치할 수 없으며 내 자녀를 대적해서 싸울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너는 나를 대항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너의 술책을 무너뜨릴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너와 싸울 것이다. 이 자녀는 이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6절) 간단히 말하면, “성령을 신뢰하라! 네 행사를 맡아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고, 너를 위해 싸우실 거라는 그분 언약의 권능에 거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정신적 고뇌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인, 철통과도 같은 굳센 언약입니다.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너희의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또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로 된 마음을 주리라. 또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 (에스겔 36:25-27)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분의 영이 당신 안에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정결케 하고 새 마음을 주신 다음, 당신을 순종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당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은, 그저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그분께서 약속을 지켜주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문제와 당신의 미래, 그리고 당신의 삶과 당신의 죄를, 전능하신 하나님 손에 맡겨드리고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2013년 11월 12일 화요일

당신의 지극히 큰 보상

오 늘날 세계적 추세는, 많은 사람이 왜 그토록 당혹해하며 불안해하는지를 파악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혼란스러운 논쟁거리밖에 되지 못합니다. 사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잠재적인 물질적 상실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도 그는 영적 영역에서의 문제들로 인해 고뇌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겪는 당혹함과 고충에 대한 실제적 원인을 알고 있었으며, 그 주제에 대해 로마서 7장에서 다루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로마서 7:15, 19)

이 사도가 말하고 있는 뜻은 이렇습니다. “내가 절대 원치 않는 일을 결국은 하게 된다. 반면, 하나님께 순종하며 내가 진실로 하고자 하는 일은, 내 힘으로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바울은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뇌하는 이유는, 그들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며 올바르게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방해하며, 너무도 쉽게 그들을 유혹하는 죄를 미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들은 고뇌하고 갈등하며 지친 나머지, 끝내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자인가! 나는 더이상 이걸 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이것을 저항하기에는 내가 너무 약한것 같아! 나는 어찌도 이렇게 연약하단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고투를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내 온 인생을 고백과 회개로,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며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은 내 죄로 되돌아가게 되는 걸까?”

아브라함도 그가 처해있는 딜레마에서 어떤 해결책도 찾지 못했을 때 주님께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창세기 15: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뜻은 이러합니다. “아브라함, 나는 나 자신을 네게 줄 것이며 그것이 전부다. 내가 너의 방패이자 매우 큰 보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네가 살아있는 동안 절대 어떤 원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11일 월요일

당신은 축복받았습니다 by Gary Wilkerson

네(이삭의) 자손으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창세기 26:4-5)

‘순종’은 이 구절에서 핵심 단어인데, 그것은 순종이 축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딛고 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이것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믿음 안으로 들어가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할 때, 당신을 향해 하늘 문이 열릴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행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해줍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배하며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구별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대체로 불순종은, 그분께서 우리의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한 은혜와 축복, 그리고 그것의 성취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에 순종하십시오. 만일 그분께서 주라고 하시면 주십시오. 만일 그분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십시오. 만일 그분께서 머무르라고 하시면 머무십시오.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축복이 당신께로, 당신 머리 위로, 당신 주위로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든 당신이 손대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축복받게 될 것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12절) 이삭이 씨를 뿌린 후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국 경제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속상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직장이나 당신 가정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왜냐고요? 그분은 그분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당신의 온갖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능력과 모든 자원과 모든 힘을 천국에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당신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마음입니다. 당신에게 있는 것들을 걷어가기 위해 당신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신경질적이며 구식의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없애버리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순종할수 있도록 권능을 부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을 축복해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013년 11월 8일 금요일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계획

우 리를 위한 주님의 계획은 언제나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대적해 오는 어떤 권세도 네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언제나 네 보호자가 되어줄 것이다. 네가 만일 내가 맹세한 언약들을 단순히 신뢰하고, 믿음으로 너 자신을 나의 보호 안으로 맡기면, 나는 너의 전능한 하나님이 될 것이다. 나는 너의 모든 원수를 물리쳐서 네 발 앞에 던져줄 것이다. 너는 정복자 이상의 승리를 맛볼 것이며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평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은 고요한 영과 평화로운 마음으로 두려움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 대부분은 우리 시간의 작은 부분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강의 문을 들락날락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안식으로 온전히 들어가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고질적 죄로 인해 불안해하고 곤혹스러워하며 괴로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화나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훈계하거나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을 당신에게 불어넣어 주시기를 갈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언약 안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그들의 모든 원수로부터 구원해줄 것임을 신뢰할 백성을 찾고 있다.”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을 잊지 말고 다른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며, 오직 주 너희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그가 너희를 너희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 내리라.” (열왕기하 17:38-39)

구약에서 그러한 원수들은 블레셋 족속, 모압 족속, 헷 족속, 여부스 족속, 가나안 족속 등의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악한 권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파멸시키고는 다시 속박의 권세안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원수는 악령의 권세, 육신의 정욕, 사악한 욕망과도 같은 영적 영역에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신약성서를 통해서도 그분의 백성을 향한 자신의 언약을 반복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아들, 나의 딸이 될 것이다. 사실상, 너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라. 너는 나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악령의 괴롭힘, 끈질긴 욕정, 떨쳐버릴 수 없는 습관, 고질적 죄 모두를 포함에서, 네 모든 원수의 손에서 너를 구해낼 것이다.” (히브리서 8:10 참조) 

2013년 11월 7일 목요일

아브라함의 씨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승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해주신 언약 안에 포장되어 있습니다.

“우리 원수들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심이요, 또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긍휼을 이루시고, 자신의 거룩한 언약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맹세하신 그 맹세를 기억하려 하심이며, 또한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 내사 우리가 평생토록 자신 앞에서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두려움 없이 자신을 섬기도록 허락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1:71-75)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해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맑은 수정과도 같이 명백합니다. 그분은 우리 매일의 삶을 근심 없이 평안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도록 모든 원수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언약은 지금 생존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에 의해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육체의 아이들인 자들, 즉 이들이 하나님의 아이들이 아니요, 오직 약속의 아이들이 그 씨로 여겨지느니라.” (로마서 9:8) “그런즉 너희는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라디아서 3:7)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언약의 계약상 권리를 주장할수 있을까요? 아브라함도 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때 주님께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내게 주려고 하시나이까? 나에게는 아이가 없나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창세기 15: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뜻은 이러합니다. “아브라함, 나는 나 자신을 네게 줄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너의 보호자이며 매우 큰 보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네가 살아있는 동안 절대 어떤 원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새 언약 안에서 다음과 같은 영광스러운 약속을 우리에게 해 주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8:10) 우리는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성경 전체를 통해, 그야말로 놀라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간구를 듣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 

2013년 11월 6일 수요일

경건한 근심

그것이 비록 가장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대적하는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근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 상태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일부 성도들은 단지 “큰 죄들”로 간주되는 그들의 죄, 즉 간음, 마약 남용, 음주, 욕설 등에 대해서만 한탄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는 어떤 죄도 작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험담할 때마다, 음담패설을 할 때마다, 오래가는 악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마다 애통해합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그의 심령 가장 깊은곳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그렇게 “사소한 것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변호하며 그것에 대해 전부 잊고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의로움은 당신의 신성한 구주를 근심케 하는 그 어느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세에 의해 측정됩니다.

얼마 전, 저는 아내에게 매우 반-그리스도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제 말은 전혀 합당치 않은 것이었고, 저는 곧장 죄책감으로 무너졌습니다. 저는 제가 아내를 부당히 취급했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상반되는 것을 감히 할 수 있었을까?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께 가까웠어. 그리고 지난해에는 가장 많이 기도했지. 그런데도 내 심령으로부터 그토록 저속한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면, 나 자신이 참으로 악함이 틀림없어.”

그 순간 원수마귀가 제게 속삭였습니다. “그까짓 작은 실수는 별것 아냐. 그건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해.” 그러나 성령께서 그 마귀의 음성을 공박하기 위해 즉시 제 마음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저를 안심시키셨습니다. “데이빗, 네가 이 죄에 대해 근심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네 안에서 일하고 있다는 증거란다. 나의 사랑과 상반되는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조차 네가 더 한탄할수록, 너는 승리에 더 가까워진단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는, 우리 육신의 갈망, 그리고 정욕을 대항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당신이 죄를 범했을 때 근심하지도 않으며, 죄의식이나 슬픔, 또는 후회 없이 당신이 지은 죄를 잊어버릴 수 있다면, 영적 전쟁을 하시는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내가 기뻐함은 너희가 근심하였기 때문이 아니요, 오히려 너희가 근심하므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방법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고린도후서 7:9)

만일 당신이 가장 가벼운 죄에 대해서도 죄의식을 갖는다면, 당신은 확실한 승리 가까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로 이끄는 경건한 슬픔을 당신 심령에 일으킴으로써, 그분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계십니다. 

2013년 11월 5일 화요일

불안해하지 말라

불 안한 마음은 계속되는 불만족으로 인해 고통받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눌려있고 심란하며 산만한 마음, 그리고 현재 상황은 물론 미래와 과거에 대해서도 초조해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어느 세대보다도 지금, 많은 사람의 마음이 불안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많은 자들이 믿지 않는 대중과 다름없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증거를 우리 목회로 날라오는 편지에서 봅니다. 수많은 성도가 염려와 낙심으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충으로부터 다소나마 자유를 얻으려는 희망을 품고 교회에 가지만,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다시 불안감에 휩싸이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재난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표적들이 있고 땅에는 민족들의 고난과 혼란이 있으며 바다와 파도가 울부짖으리로다. 땅에 임하는 그 일들을 내다보는 것으로 인해,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을 기진하게 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 (누가복음 21:25-26)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임하게 될 참사들이 너무도 두려워서, 실제로 사람들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년 전, 연세가 구십이 넘은 한 목회자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그는 대공황을 통해 미국에 심판이 내려졌던 1920년대의 부도덕함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마차로부터 시작해서 우주선까지, 그리고 잡음 나는 라디오부터 인터넷까지, 정보통신의 변천을 보아왔습니다. 짧게 말하자면, 그는 모든 것을 다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이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사악함은 그가 이전에 목격했던 어느 것보다도 그를 비통하게 한다고 썼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한 일들이 너무도 신속히 전개되고, 타락의 정도는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 모두를 수용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위안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명하십니다. “…주의하여 불안해하지 마라. 이 모든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마태복음 24:6)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경고하고 있는 이러한 험한 것들로 인해 절대 불안해하지 마라!” 

2013년 11월 4일 월요일

새로운 장 by Gary Wilkerson

사 도행전에는 28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수천수만의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 또 하나의 장을 기록해 오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빌립이나 다비다, 또는 디모데가 아닙니다. 오늘날 그들은 제니, 지미, 그리고 조나단과 같은 이름을 가졌습니다.

붉은색 머리를 가진 제니는 호주에서 왔는데 콜로라도 스프링에 있는 우리 교회에 참석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가장 쾌활한 웃음소리를 가졌는데, 무엇보다도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성도입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만나는 자마다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그리고 지미라는 이름을 가진 예수님 제자가 있는데, 그는 수십 년 동안 저와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지미처럼 전도하는 자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최근에 그가 어떤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며 “제가 당신 댁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할게요.”라고 제안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주변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그 집에 와서 구원받았습니다. 지미는 다른 동네에 가서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는 그렇게 전도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초자연적으로 영혼을 움직이는 성령의 능력을 믿는 한 열성적 그리스도인 덕택에, 성경공부 모임이 도시 전역에 우후죽순처럼 생겼던 것입니다.

조나단은 종신 선교 사역자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우리 교회 성도이며,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예수님 제자입니다. 그의 기도는 어른들로 하여금 무릎 꿇도록 만드는데, 상하고 통회한 심령의 목소리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조나단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열망하며, 그의 영적 갈망은 거의 전염적일 정도로 강렬합니다.

이처럼 제가 묘사하고 있는 예수님 제자들은 21세기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초대교회의 능력을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과 저 역시 하나님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성령에 의해 부르심 받았습니다. 저는 교회의 많은 성도가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물론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도 다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분의 영광에 대해 아는 것도 중요한 만큼, 그분처럼 우리가 사역할 수 있도록 그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통해 그분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함께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제안합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을 잘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배운만큼 당신의 말씀을 잘 행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늘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 임하게 하소서! 아멘.” 

2013년 11월 1일 금요일

세상과 맺은 아합의 계약

한 번은 아합이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실제로 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을 네가 보느냐?” (열왕기상 21:28-29) 나중에 아합이 그 사건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회개? 맞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그랬던 적이 있었지.” 그러나 아합에게 그것은 단 한 번의 경험이었을 뿐, 매일의 실습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이미 세상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어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의 의미는 “친밀함, 나와 같은 자, 내가 존경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과 계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아합은 진리를 사랑한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질책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진리만을 듣기 원합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진실 그대로 설교해주세요!” 그러나 그들의 속마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너무 완고해. 더는 이것을 견딜 수 없어.”

아합은 그가 거짓말하는 영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이 거짓 영은 가짜 선지자 시드기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과시하게 했습니다. (열왕기상 21:24 참조) 그로인해 아합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전쟁으로부터 승리해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세벨 교리에 묶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백 퍼센트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속임수를 보지 못합니다. 아합은 “그 사백 명의 대언자들은 가짜야.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며 전쟁터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는 전적으로 확신에 차서는, 완전히 속고 완전히 미혹된 채 나갔던 것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왜 속임수에 빠졌을까요? “보라, 너희가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거짓말을 신뢰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고 살인하며 간음하고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 걸으면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이 모든 가증한 것을 행하려고 우리가 구출 받았나이다, 하려느냐?” (예레미야 7:8-10)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상습적 죄에 붙들려 있으며, 마음속에 비밀스런 우상을 갖고 있습니다. 죄를 정당화시키며 세상과 결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와서 이렇게 과시합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거짓말하는 영에게 문을 열어놓는 초청장인 것입니다. 

2013년 10월 31일 목요일

이세벨의 영

이 세벨의 영은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경건한 예언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또한 그가 어떻게 그 모든 대언자들을 칼로 죽였는지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에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네 생명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욱더 내리기를 원하노라.” (열왕기상 19:1-2)

이세벨 교리에 의해 묶여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들을 전혀 유념치 않습니다. 아합이 갈멜 산에서 벌어진 초자연적 권능의 놀라운 광경 모두를 말할 동안 아무런 감동이 없었던 이세벨처럼, 그들은 냉담하게 앉아있습니다. 이세벨의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그녀는 더 확고부동해졌을 뿐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세벨 교리를 가르치는 선생들과 그 희생자인 아합과 같은 자들은, 성령의 책망, 또는 회개와 거룩의 메시지에 마음이 열려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듣고도, 그들의 교리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완강해져서는 여전히 그들의 길을 갑니다. 그들 눈앞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거짓 선생과 이세벨 교리의 가장 뚜렷한 증거는, 예언적 경고를 멸시하며 심판에 대해 듣는 일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비관적 전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비웃고 멸시하며 조롱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목자들을 눈먼 바보라고 말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순종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이 듣지도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악한 마음이 꾀하고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 뒤로 물러가고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 7:24)

이세벨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자기들이 선지자라고 자칭합니다. 그러나 진짜와 가짜 선지자를 분별하는 잣대가 있습니다. 이세벨의 선지자들은 오직 좋은 것들, 즉 평화와 번영만을 예언합니다. “또 내가 예루살렘의 대언자들에게서도 무서운 일을 보았노라. 그들은 간음을 행하고 거짓 속에서 걸으며 또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손을 강하게 하여, 아무도 자기의 사악함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게 하나니, 그들이 곧 그들 모두가 내게는 소돔 같으며 그것의 거주민들은 고모라 같으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주가 그 대언자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 예루살렘의 대언자들로부터 나와 온 땅으로 들어갔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고 쓸개 물을 마시게 하리라.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에게 대언하는 대언자들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만드는 자들이니, 그들은 주의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에서 나온 환상 계시를 말하느니라.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여전히 이르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평안하리라 하셨다 하며, 또 자기 마음에서 상상하는 대로 걷는 모든 자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 23:14-17)

이세벨의 영을 가진 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악함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꿈을 말하며 설교단에서 어리석게 행동합니다. 

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가장 큰 기만

현 대 교회에서의 가장 큰 기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탐욕을 승인하는 배지를 붙여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이세벨 교리가 그럴듯합니다. (열왕기상 21:14-16) 그것은 아합이 원하는 것을 갖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가 그의 권리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왕을 대적한 대 반역자가 돌에 맞아 죽었을 때 그의 모든 소유가 왕에게로 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기를, 주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에 자기 조상들의 상속 재산을 그에게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며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빵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의 영이 어찌하여 이같이 슬프게 되어 왕께서 빵도 들지 아니하시나이까?... 왕이 지금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빵을 드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리이다.” (열왕기상 21:4-7)

이세벨의 교리를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최고의 왕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아합에게 말했습니다. “아무 걱정 말아요! 내가 해결해줄게요.”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거짓 복음입니다. “속 태우지 마세요. 당신을 속상하게 만드는 욕구들 때문에 슬퍼하거나 가책하지 마세요. 내가 그것을 당신께 가져다줄게요.” 이세벨이 사용했던 기만적 방법들처럼, 이러한 교리는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오용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한 성가신 하나님의 선지자 때문에 그가 받은 것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디셉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아합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거기로 내려가 거기에 있나니,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죽이고 또 소유로 빼앗았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오 내 원수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너를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으므로…” (열왕기상 21:17-20)

아합이 그가 방금 취한 포도원을 걸어 다니며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인생은 참 달콤해. 아, 이세벨 말이야, 그녀의 방식에 내가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 처리는 확실히 해.” 그러나 그의 모든 발자국을 따라다니는 자는 엘리야 선지자였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물질주의적 이세벨 교리에 대립하여 크게 외치며, 그들의 노리개와 소유물을 즐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팔려갔습니다. 그들이 보지는 못하지만, 죄가 이 모든 것의 저변에 있습니다. 제가 번영의 교리에 맞서 외칠 때마다, 저는 엘리야의 영과 능력이 제게 임한 것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이 이세벨의 교리가 더 밝혀지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크고 분명한 예언적 목소리가 이렇게 외치는 것이 들려올 것입니다. “죄입니다! 당신은 죄에 팔려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 10월 29일 화요일

비밀스런 죄에 대한 경고

이 세벨 교리의 세 가지 뚜렷한 특징은, 거짓 교리들의 모체이자 전형인 구약의 이세벨을 통해 전부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이름을, 무엇이든 악을 선이라고 가르치며 신성모독을 순수하다고 가르치는 교리인, 거짓 교리의 동의어로 지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이세벨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정결한, 도덕적인, 우상숭배가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며 교활하고 가증스러운 여인이, 죄가 없으며 도덕적이라고 불리는 것을 말입니다. 무언가 아주 나쁜 것이 좋은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도, “정결”이라고까지 불리다니요?

어떻게 그녀가 정결하게 될수 있었겠습니까?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자기 이전에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더라.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들 가운데서 걷는 것을 가벼운 일로 여기고… 이세벨을 아내로 맞으며, 또 가서 바알을 섬겨 그에게 경배하고…” (열왕기상 16:30-31) 아합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그 아비의 성격을 빼닮은”이라는 뜻입니다. 이세벨은 거짓 교리를 상징하고 아합은 그 피해자입니다. 성경은 아합의 마음이 죄와 우상숭배, 그리고 타협으로 구부러진 것으로도 부족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을 더욱 확증시킬 사탄의 영향력을 그의 삶 속으로 들여옵니다. “그러나 아합과 같이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부추겼더라.” (열왕기상 21:25)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비밀스러운 죄와 욕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성향은, 오로지 그들의 죄를 부추기고 확증시켜주는 거짓 교리를 포용하고 그것과 연합한다는 사실입니다. 아합에게는 이세벨이 절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의 최악을 드러내서, 그것을 확장시키고는 그를 파멸케 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만일 당신 안에 어떤 죄나 욕정, 또는 세속적 탐욕이 있다면, 당신의 최악을 드러낼 교리가 당신에게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로 인해 죄를 범했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말해줄 위로의 메시지를 가진 거짓 선지자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책망하는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왕이 그 사람이니이다.”라고 외쳤던, 타협할 줄 모르는 나단 선지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악함과 선함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혼합이 없습니다. “또 그들은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를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할지니라.” (에스겔 44:23)

지금 우리에게는 악을 보고도 그것을 분별할 줄 모르는 혼동되어있는 전체 아이들 세대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을 속였습니다. 그들은 보라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록 가수들이 변태성욕자들처럼 옷을 입고는 설교단에서 뻔뻔스럽게 성적으로 몸을 흔들어대는 것을 좋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혼외정사가, 상대방을 서로 사랑하는 한, 그리고 상대를 진실로 존중해주는 한, 괜찮은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죄의 변호인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진정한 오순절

우리는 사도행전 11장에서, 성령의 능력을 입었던 이름없는 성도들에 의해 일어났던 교회사의 역사적 변동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와 이방인의 장벽을 초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맨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자들입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사도행전 11:20) 저는 이 장에 기록된 “그 중에… 몇 사람이…”라는 구절을 너무도 좋아합니다. 그 충직했던, 이름없는 성도들은 그들이 역사상 얼마나 중대한 업적을 남겼는지 감히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2,000년 전에 일어났었던 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현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소규모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 그분의 증인들이 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제가 얼마 전에 방문했던, 북인도에 위치한 도시 바라나시라는 곳에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젊은 여성도가 그곳에 갔을 때는 불과 일퍼센트도 안되는 인구가 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하나씩 둘씩 전도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전도된 성도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 여성도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았고, 그 결과로 지금은,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언을 가진 수천 명의 열성적 성도들이 그 지역에 탄생했습니다. 그 여성도처럼, 세계 방방곡곡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끝까지 알리기 위해 성령께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제 부친 데이빗 윌커슨 목사는, 그가 1950년대에 펜실바니아의 한 작은 교회 목사로 섬겼을 때 가장 슬퍼했던 것에 대해 제게 수차례에 걸쳐 말씀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오순절파 교회였는데 예배의식은 그 나름대로의 절차를 따랐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오르간을 연주했고 성도들은 전통적 성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일어나서는 방언으로 메시지를 전달했고, 곧 다른 성도가 그 메시지에 대한 방언 통역을 했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아버지께서 설교 말씀을 전하신 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앞제단으로 나와서 성령께서 내려와 주시기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례였답니다.

이 교회에는 구제활동도, 선교활동도 없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 교회에서 목사로 섬기셨던 몇 년 동안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전도되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구했으나,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오순절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 아버지의 이 비통한 기도가 그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주님, 만일 이것이 오순절 성령의 역사라면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축복받기’ 클럽 모임이 바로 그것이라면 저는 상관조차 하기 싫습니다.”

아버지가 텔레비전 시청하는 일을 멈추고 대신 기도에 전념하실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오순절을 갈망함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이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지요. 그로부터 몇십 년 후에 발간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깡패)’는 수백만 부가 팔렸고, 세계 전 지역의 천군데도 넘는 십 대 청소년 챌린지 센터는 버림받고 상처받은 청소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이세벨의 교리

요한계시록 2장 18~29절을 읽어보시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이세벨의 교리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이세벨이라는 그 여자를 용납하기 때문이라. 그녀가 자기를 가리켜 여대언자라 하며 내 종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하게 하고, 또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게 하는도다.” (요한계시록 2:20) 이세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가짜선생”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입니다. 확실히 그녀는 거짓 교리의 표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교리를 가지지 아니한 모든 자들에게…” (요한계시록 2:24) 라고 말씀을 계속하시며 그것에 대해 명백히 밝혀주십니다.

여기에 많은 선행과 구제를 하며 믿음과 인내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훌륭하고 칭찬받을만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 매우 위태로운 것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너무도 유혹적인 나머지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심판을 보내셔서 그들을 모든 교회의 교훈으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사탄에게 팔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선행과 구제, 섬김, 믿음, 그리고 인내는 거짓 교리의 유혹에 가려졌습니다. 그들은 거짓 가르침의 주술 아래 있었고, 진리의 말씀인 양 분장하고 나타났던 그 가르침은, 실제로는 악이었던 것입니다.

그릇된 가르침 아래서 배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눈은 교회를 꿰뚫어보고 계시고, 이러한 끔찍한 유혹으로부터 그분의 백성을 구해내기 위해 이미 경고하셨고 폭로하셨습니다. 당신이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고 누구 설교를 듣고 있으며, 당신이 흥미로워하는 가르침이 무엇인가의 문제는 참으로,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유혹당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가 어떤 새롭고 이색적이며 이상한 가르침에 “끌려다녔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여러가지 이상한 교리에 끌려다니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히브리서 13:9) 그 뜻은, 이 세미나에서 저 집회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근거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들의 귀는 항상 무언가 새롭고 선동적이며, 무언가 흥미롭고, 무언가 그들의 혼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을 듣기를 갈망합니다. 우리 타임스퀘어 교회에도 그러한 자들이 나옵니다. 분주히 나다니며 교리의 바람을 따라 굴러다니는 인간 검불덩어리들 말입니다. 그들은 이 아테네 사람들과 흡사합니다. “모든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있던 나그네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것 외에는 자기들의 시간을 달리 쓰지 아니하였더라.” (사도행전 17:21)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두고…” (디모데후서 4:3)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낙심과 좌절

무력함, 비탄, 곤경, 애통함—이 모든 것들은 다윗의 영혼을 절망케 했습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듯, 그저 방향을 잃은 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내 눈의 빛으로 말하건대, 그것도 나를 떠났나이다.” (시편 38:10)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적인 명철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전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저는 다윗의 심정이 어땠는지 너무도 잘 이해가 됩니다. 저는 한때, 수천명의 영혼이 한꺼번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복음 전도 부흥회를 인도하곤 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제 지난 삶은 너무도 풍요로운 축복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러한 부흥집회를 마친 후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빈번히 좌절감으로 압도당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위해 성취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의 낙심의 영이 하는 짓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커다란 영적 승리 후 순식간에 우리를 과녁하는, 지옥 권세의 타겟이 되게 합니다!

이 지독한 악령이 다윗을 너무도 무겁게 짓누른 나머지, 그는 하나님 전에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처럼 내가 듣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사오며, 내 입에 꾸짖을 말이 없나이다.” (시편 38:13-14)

이곳 마지막 구절의 히브리어 의미는 “더 이상의 답변이나 할 말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너무도 낙심되어 당신을 향해 손도 올릴 수 없습니다. 제가 너무도 혼란스러워서 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탈진되었고 공허합니다. 저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다윗은 낙심의 공격을 이겨내는 정의로운 영혼의 부르짖음을 대대적으로 공개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제 머뭇거리게 되었고, 내 고통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며.” (17절)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히브리어로는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이것이 분명 제 마지막이고, 저는 넘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낭패한 심정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죄와 어리석은 실수로 인한 절망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져버렸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다윗은 좌절했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의 믿음을 지켰던 자로서 우리의 표본이 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다윗은 자신이 불신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주께 소망을 두었사오니, 오 주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들으시리이다.” (시편 38:15)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참 좋은 말씀

우리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자녀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자녀들을 대적하는 어떤 마귀의 공격도 그 계획을 변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과 고뇌, 그리고 아픔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 미래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영광스러운 일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게 될 계시와 우리가 즐기게 될 유용성, 우리가 볼 열매, 그리고 우리가 소유하게 될 기쁨과 평강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참 좋은 말씀”을 갖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고린도전서 2:10)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으신 일들에 대한 “참 좋은 말씀”을 우리에게 선보이시기를 열망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령이 그 좋은 말씀을 품고 계신 전달자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우리의 의기소침한 영혼에 날개를 달아주실 것이며, 마침내 우리는 마귀의 올무를 박차고 독수리처럼 날아오를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놀라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성령의 일은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고, 우리의 일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비록 낙심해있다 할지라도 지금 바로 기도 골방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주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세요. 비록 당신에게 말할 힘조차 없어도, 이 기도를 하며 영으로 그분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성령이 제 안에 거하고 있음을 압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로해주시고, 저를 강하게 만들어주시며, 제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계시해주시기 위해 성령님을 제게 보내주셨음을 압니다. 저는 지금 단순하고도 어린아이와도 같은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갑니다. 제게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으니 제 마음에 위로의 말씀을 주시옵소서. 제 영혼을 들어 올려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당신은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이 지나고 있는 그 시험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믿음은 정금과도 같이 시험받고 단련되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께 해주셨던 모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우리가 좌절할 때

우리가 좌절할 때 성령께서 주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예수님의 소중한 언약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일입니다. 그분은 제게도 그렇게 해주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 언약의 말씀으로 제 영혼을 홍수처럼 적셔주셨습니다. 그분은 “이게 네 삶의 전부가 아니다.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네 삶의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성령의 일은 원수의 거짓말을 말소시키고 하늘로부터의 권면을 가져다줍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당연히 책망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날마다 그분의 임재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우리 주님을 슬프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기도로 나아갈 때 우리는, 자비로운 아버지로부터 좋은 말씀을 들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저는 과거 수년 동안 기도 골방에 들어갈 때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받을 것을 예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분은 제게 더 나은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성한 책망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 기독교 종파가 있습니다. 그들이 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메시지만 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그리스도와 신약성서 저자들이 언급했던, 죄에 대한 모든 책망과 생명수와도 같은 꾸짖음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교회들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은혜를 설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죄짓는 허가증으로 남용합니다.

제가 이 메시지를 그러한 자들을 향해 쓰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죄짓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승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지속적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그분과의 친교를 즐기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일 당신을 묘사한다면, 또한 그러한 당신이 침체되어있거나 우울증에 빠져있다면, 당신이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공격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자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언약의 성취를 받을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사야 64:4)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9-10)

2013년 10월 21일 월요일

능력 입혀주심 by Gary Wilkerson

“제자들에게 능력을 입혀주실” 거라는 그분의 언약이 (누가복음 24:49 참조) 사도행전 시대의 교회에서 멈추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많은 교회에서 그것이 멈춰진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목회자나 지도자, 방송인, 저자 등 누구든 “강단”에 서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과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긴 의자에 앉아있는 회중에게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실까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 성도에게, 주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성령의 능력이 입혀지고 있는 걸까요? 만일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여기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8:1) 이 구절에 의하면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모든 성도는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때,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사도행전 8:4-5) 그때 복음 전파를 위한 새로운 능력도 함께 풀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빌립이라고 불리는 자가 평신도였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 표적과 기사가 뒤따랐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었고 불구자들이 고침을 받고 기쁨으로 뛰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가 그러한 일들을 목격하기 위해 사마리아로 왔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는” 것을 (사도행전 8:8) 보게 되었습니다. 온 도시가 하나님의 기쁨으로 감동되었던 장면을 보았던 것이지요! 단 한 명의 평신도에 의해 일어났던 일로서는 무척이나 영향력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다메섹에 살고 있었으며 예수님을 따랐던 자, 아나니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가 성령으로 충만했었으며 어려운 과제를 감당해야만 했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한때는 악명높은 그리스도인의 핍박자였으며 교회를 대적하며 격노했던 사울(바울)의 증인으로 서게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선으로 불려 나갔고, 만일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듣지 못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너무도 절박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했으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짐으로써 그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불현듯, 아나니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철천지원수라고 자청했던 자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그 후 사울의 변심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사건이지요. 역대에서 가장 유명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된, ‘사울’의 ‘바울’로의 전환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의 사건일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에 신약성서의 주요 부분을 구성하는 서신을 집필한 저자가 되었습니다.

2013년 10월 9일 수요일

경청에 대한 교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경청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호렙 산 꼭대기에 데려다놓고 실 예로 설교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11-13).

바람이 윙윙거리며 불기 시작할 때 나는 엘리야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에세벨을 왕좌에서 날려 버리십시오. 그녀와 그녀의 죄인 친구들을 바람에 던져 버리십시오. 그들 모두 날려 버리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은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자 엘리야는 말했습니다. “이 지진이 그들을 몹시 두렵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복하실 것이다. 그들의 신발이 내팽개쳐 지도록 그들을 흔들어 놓으실 것이다! 주님, 당신이 당신의 종을 신원해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는 불이 있었습니다! 희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으로 하늘이 빛났습니다! 엘리야는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그들은 제단위에 떨어진 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태워버리십시오! 사악한 아합을 태워버리십시오! 이세벨을 구워버리십시오. 당신의 불이 사악한 자들을 멸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당신이 이 불속에 계신 줄을 나는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12절).

이것이 상상이 가십니까? 태풍이나 지진이나 하늘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던 선지자가 세미한 소리에 겁을 냅니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었습니다(13절).

엘리야는 겉옷으로 자기의 머리를 감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선지자는 하나님께 여러번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는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이 그를 강력하게 사용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이 낯설었습니다!

홀로, 조용히, 모든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떠나 엘리야가 드디어 그 음성이 말씀하시도록 허용했을 때 그의 사역 사상 가장 상세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하고...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하고...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 19:15-16 참조).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바쁜 자녀들이 그 음성을 자신들에게 들리도록 한 적이 없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간증하느라, 선행하느라, 영적 각성을 위해 기도하느라, 금식하느라 분주합니다. 아주 열성적으로, 헌신적으로.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음성만은 듣지 못했습니다. 

2013년 10월 8일 화요일

예수님의 마음속 일별하기

“너 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눅 17:7-8).

우리는 주인에게 수종드는 하인과 동일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찬양으로 가득한 테이블- 훌륭한 예배의 잔치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주님을 섬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 드리는 일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요 최고의 성취입니다.

한데 마지막 부분, 즉 주님의 부분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 후에 먹으라!”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섬기면서 체험했던 동일한 기쁨을 그분도 누리시도록 하기 위해 그분을 섬겨드린 후에 앉는 법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분께 해드리는 일로인해 충분히 기뻐하신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시고 우리가 회개할 때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에 대해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우리의 어린아이 같은 신뢰에 대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가장 필요로 하시는 것은 자신이 지상에 남겨둔 자들과 일대일로 교제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늘의 어떤 천사라도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쟁터에 있는 자들과 말씀하기 원하십니다.

나는 어디서 그리스도께서 외로우시고 절실하게 말씀하고 싶어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방금 부활하셨고 바로 그날,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신 주님에 대해 슬퍼하고 있었으나 주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말씀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이야기해줄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15, 27).

이 제자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체험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갔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기쁨에 대해 생각 하지만 예수님의 기쁨은 어떠했을까요? 나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눈물이 영광을 받으신 그분의 두 뺨에 흘러내리고 그분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분은 충만해졌고 그분의 필요는 충족되었으며 나는 그분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분은 사역하셨고 영광을 받으신 형체로 그분의 첫 상호 교제를 체험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부으셨으나 그분의 외로운 마음은 어루만져졌고 그분의 필요는 충족되었습니다. 

2013년 10월 7일 월요일

시험을 이기는 법

시 험을 견디어 내고 굴복하지 않는 능력은 성경구절들로 우리 마음을 채우거나, 맹세하거나, 약속을 한다거나, 오래 동안 기도나 금식을 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을 위대한 영적인 목적에 드린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은 크리스천들의 성장을 위해 칭찬 받을 만하고 정상적인 일들이지만 우리의 승리는 이것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 하에서라도 견디어 낼 수 있는 단순한 비결은 사탄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깨뜨려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마귀를 무서워합니다. 귀신들로 인해 겁에 질립니다.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취향과 습관이 변경될 수 없음을 두려워합니다. 잠재적 욕망들이 폭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통제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일반인과 달리 정욕으로 가득 차 도울 길이 없는, 천명에 한 사람 정도 있는 사람이 아닐까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버릴 수 없으므로 두려워합니다. 인간은 사탄이 갖고 있지 않은 능력을 그의 능력으로 인정합니다. 인간은 부르짖습니다, “나는 중독되어 멈출 수가 없다! 주문에 빠져 마귀의 권세아래 있다. 마귀가 나를 이렇게 하도록 만든다!”

두려움은 심한 고통입니다. 당신이 마귀를 두려워하는 한 어떤 시험의 권세도 결코 깨뜨릴 수 없습니다. 사탄은 두려움 위에서 승승장구하고 마귀를 두려워하는 크리스천들은 저항할 능력이 거의 또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거짓말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탄이 중압감에 눌려있는 크리스천들을 파멸시킬 권세가 있다는 거짓말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보혈로 씻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배하는 마귀의 모든 권세를 파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는 가끔 왜 하나님이 영적인 사람들이 그토록 시험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지에 대해 궁금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고전10;13)는 대신 모든 시험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실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일단 당신이 사탄이 얼마나 힘이 없는가를 알게 되면-사탄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이 배우게 된다면-하나님은 당신이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시는 모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면-그때부터 당신은 사탄이 당신에게 어떤 것을 쏘아 대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실족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굴복하게 만드는 마귀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 가운데 “안식”의 장소에 이를 때 까지 우리는 계속 시험을 당할 것입니다. 이 안식이란 하나님이 사탄을 패하게 하셨고 사탄은 우리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청구할 것도 없으며 우리가 불속에서 단련된 정금처럼 나올 것이라는 것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말합니다. 

2013년 10월 4일 금요일

충만한 계시

왜 모세는 그리도 간절히 하나님 영광의 계시를 사모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이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거기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과 만나리니, 성막이 내 영광으로 거룩하게 되리라.” (출애굽기 29:43) 여기서 “거룩하게 되다”는 “정결하게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모세, 너와 백성들이 내게 예배할 때, 내가 너희를 만나줄 것이며 내 임재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내 영광을 너희에게 드러낼 때, 그것이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능력 있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와 씨름하며, 자유케 되고 정결케 되기를 열망하는 모든 자에게 희망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 성전은 내 영광의 계시로 정결해질 것이며, 그 계시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너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들어가야지만 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속 증가되는 예수의 계시를 우리에게 반영되도록 허용할 때, 우리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유리를 통해 보는 것같이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는 우리 모두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똑같은 형상으로 변모되느니라.” (고린도후서 3:18)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우리 삶을 지켜주는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는 모든 영광 위에 덮개가 될 것임이라.” (이사야 4:5)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삶의 가장 험난한 시기에도 우리를 정결하게 지켜줄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거짓말할 것입니다. “너는 패배했어! 너는 속이고 거짓말하며 행음하는 자야.”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사탄아, 그렇지 않다. 내게는 대제사장이 계시고, 나는 그분 영광의 계시로 정결케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분 성품에 대한 모든 것을 드러내셨을 때,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출애굽기 29:43) 에 대한 완전한 계시도 함께 주셨습니다. 아사랴 선지자는 아사 왕이 가장 번영하고 있을 때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너희가 주님과 함께하는 한, 주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고, 너희가 그분을 찾으면 너희를 만나 주실 것이나, 만일 너희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역대하 15:2) 달리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시하면, 그리고 죄와 타협하며 주님을 등한시하면, 그분은 너를 정결케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 아들을 알기 위해 시간을 보내라! 기도 골방에서 내 말씀을 찾으며 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네가 내 임재 안에 거하게 되며, 네 눈은 나의 영광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사랑, 은혜, 자비, 선하심의 충만한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실현되었다.” 

2013년 10월 3일 목요일

그분 임재의 나타나심

모 세는 하나님께 그분의 지속적 임재의 나타나심을 구했습니다. “나로 주를 알게 하시고…” (출애굽기 33: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나의 임재가 너와 함께 가며, 내가 너에게 쉼을 주리라.” (14절)

모세의 간구가 대부분의 성도에게는 매우 만족할만한 간구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축복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원합니다. 사실 어떤 성도가 그 이상의 것을 갈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마저도 모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출애굽기 33:18)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모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이한 빛을 발하는 구름으로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지축를 흔드는 권능의 전시로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분 성품의 단순한 계시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셨습니다. “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선포하시기를 ‘주로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출애굽기 34:6-7)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선하심, 자비, 그리고 사랑과 긍휼의 계시였습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와, 지난밤 우리 교회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웠는지요! 엄청난 찬양이 올라갔고,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 강타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영광의 나타나심의 증거는 아닙니다. 과열된 인간의 감정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계시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논쟁할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체험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이 하나님 영광의 실현이지 않았습니까? 그곳에는 엄청난 빛도 있었고, 모세와 엘리야의 기적적 출현도 있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나 엘리야에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빛의 장관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그분의 영광은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의 옷은 빛처럼 희어지더라… 보라, 구름 속에서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마태복음 17:2, 5)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여기—그리스도 안에, 나의 전형적 영광이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 즉,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하시며,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그분 성품의 실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여기에 내 영광의 실존하는 형상이 있다. 그 모든 영광은 내 아들 안에서 구현되었다!” 

2013년 10월 2일 수요일

그분 임재의 구름

이 스라엘이 광야에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름을 통해 그분의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구름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하나님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그 임재의 구름이 내려와 성막을 밤낮으로 덮었고, 그들의 모든 행사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름이 이동하면 그들도 이동했고, 구름이 머무르면 그들도 머물렀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나아갈 방향이나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시적 하나님 임재의 구름에 그들의 신뢰를 두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와 동일한 그분 임재의 구름이 당신의 기도 골방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 임재는 그분의 평강으로 당신을 감싸기 위해 날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임재하심은 당신을 이끌어주고, 권능을 부여해주며, 평강을 줄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대인관계도 상세히 인도해줄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 골방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샤워 중이라도, 버스나 지하철 속이라도, 아니면 출퇴근 시간도 좋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차단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30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경배합니다. 지금 이 시간이 당신과의 교제시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모든 것을 차단시키고, 지속적 기도생활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근사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간구하며 기도하는 종이 될 때, 그분의 임재가 당신 삶 속으로 침투해서, 기회의 문을 닫고 열어주시며, 그분의 신성한 방법으로 당신 삶 전체를 다스릴 것을 약속하십니다. 한편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을 그분 영광의 계시 안으로 이끄실 거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영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들 삶 속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압니다. 그러나 소수만이 그분의 영광을 압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그 차이를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구름이 회중의 장막을 덮었으니, 주의 영광이 성막을 가득 채우더라.” (출애굽기 40:34)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기록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하나님 임재의 구름 아래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항상 하나님 은혜의 장막 아래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는 것과 그분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2013년 10월 1일 화요일

온 마음 다해

하 나님께서는 온 마음 다해 그분을 찾고자 결심한 자들에게 확실하고도 특별한 약속을 해주십니다. 그 약속 중 하나가 그분 임재의 언약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은 매우 조건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언약의 규칙을 준수한다면,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 임재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명확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하는 자가 되어, 그분의 엄청난 임재가 우리에게 부어진 나머지 그것이 만민에게 보여지고 알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제사장 엘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그분 임재의 언약을 밝히셨습니다. 그 당시 엘리는 타락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와 타협을 허용하고 있는 그를 경고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모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무명의 선지자는 엘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참으로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서 영원히 행하리라고 말하였으나, 이제 주가 말하노니, 결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하는 자들을 내가 존중하고 나를 멸시하는 자들을 내가 소홀히 여기리라.” (사무엘상 2:30)

“소홀히 여기다”라는 표현은 하나님 임재가 거두어진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그 자신의 육의 힘으로만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네 집을 축복하며 네게 은총 베풀기를 원했다. 그러나 너는 죄에 대해 관대해졌으며, 욕정을 허용하고, 나를 뒷전으로 하며 나를 멸시했다. 이제는 내 임재를 네게서 거두어가겠다.”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대단한 믿음의 열정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열정은 수그러들고, 주님을 등한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계명을 “소홀히 여기고” 그들의 이전의, 죄악의 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여전히 그들과 함께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며 망상입니다. 당신이 만일 그분을 저버린다면, 그분도 당신을 저버릴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2013년 9월 30일 월요일

아버지의 약속 by Gary Wilkerson

사 도행전 1장부터 6장까지는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설교, 대 회심, 기적적 치유 등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의 연속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신성한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부활하시기 전,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4:49)

그 언약은 성령강림절, 즉, 이스라엘 절기인 "초실절"부터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의 첫 열매를 마침내 세상이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획하고 계셨는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정말 대단해!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곧 회복시키신다는 의미야. 그분은 우리를 로마제국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하실 것이고 우리는 다시 그분의 백성이 될 거야."

예수님으로부터 그와 같은 언약의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의 교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 우리 교회는 부흥의 물결이 넘쳐 흐를 거야. 성령께서는 다른 도시에서도 움직이실 것이고, 사람들은 그 부흥을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 전 지역으로부터 몰려들 거야. 우리는 전례 없는 축복을 받게 될 거야!"

우리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쁨과 위안을 가져다 주기 위해 성전을 채우시기를 원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는, 믿는 우리만을 위한 영광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으려면, 내 교회 성도라야만 하고, 성경공부 하는 자들이어야만 하며, 기도 모임 참석자들이어야만 한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교회 벽을 넘어 가장 척박한 세상 끝까지 이르러야만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모인 군중을 향해 설교했을 때 삼천 영혼이 구원받았습니다. 그 후,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전역을 두루 다니며 증언했을 때, 기적적 치유와 구원은 물론, 표적과 기사가 따랐습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성령의 역사가 사도행전 6장에서 멈추었다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열두제자의 손에 남겨졌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시공간의 변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영은 더 이상 소수의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만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권능을 부어줄 것이다." 

2013년 9월 27일 금요일

하나님 임재 보존하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거하시는 그분 임재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역대하 15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전장 14장에서 아사 왕은 유다 군대로 하여금 에디오피아 백만 군사를 물리치게 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편 아사 왕은 그 대적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임재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아사가 주 그의 하나님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여, 그들의 수가 많든지 그들에게 힘이 없든지, 주께서 도와주시는 데는 아무것도 아니니이다. 오 주여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주의 이름으로 이 무리를 대적하러 감이니이다… 이에 주께서 아사와 유대 앞에서 에디오피아인들을 치셨으니...” (역대하 14:11-12)

아사와 그의 군대가 승리의 행렬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아사랴라고 불리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성문에서 그들을 맞았습니다. “아사야... 너희는 내게 들으라. 너희가 그분과 함께하는 한 주께서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고, 너희가 그분을 찾으면 너희를 만나 주실 것이나, 만일 너희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참 하나님도 없이.... 그러나 고난에 처한 그들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분을 찾으니 그분께서 그들을 만나 주셨느니라.” (15:2-4)

당신 삶에 하나님의 임재를 받고 보존할 수 있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어떤 제약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사, 네가 어떻게 이 승리를 얻었는지 절대 잊지 말아라.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너는 전심으로 나를 구했고, 나는 내 임재를 네게 보내주었다. 네 원수를 궁지에 몰리게 만든 것은 바로 내 임재였다!”

그때 아사랴 선지자는 아사 왕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정권을 잡기 전에 이 나라가 어떠했는지 기억합니까? 온 나라는 율법도, 지침도, 의로운 가르침도 없는 천방지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것을 행하며, 자기들 멋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신학이 아닙니다. 단순히 그분께 구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지속적 주님의 임재를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너를 만나주실 것이라.” (역대하 15:2) 여기서 '만나주다'가 히브리어 단어로 'matsa'인데, “가능케 하고 축복하기 위해 오시는 그분의 임재”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구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분의 임재로 네게 올 것이다. 참으로, 그분의 임재는 네 삶으로부터 발산되는 전능하신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