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5일 화요일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것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도록 만듭니다. 크리스챤들 가운데 불신앙의 요점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실패했을때, 하나님의 임재에서 도망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 화가나셔서 우리와 친밀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와 깊은 관계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를 멈추고, 수치심속에서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속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깨끗케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몇 주간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고 죄적인 습관을 버리면 다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정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악의 불신앙이고 하나님의 눈에 범죄인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습관들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문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증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진정 잘못한 것이냐? 너의 눈물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느냐? 가서 한주에 이틀간 금식하고 매일 한시간동안 기도하거라. 오래 실패하지 않고 지속하면 너와 다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하늘 아버지와 조화를 이뤄주셨을때, 그것은 모든 시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과 다시 관계회복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내치시거나 관계를 부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보혈 때문에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갈라놓았던 장막은 찢어졌고, 영원히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문은 절대 닫혀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엡 3:12).

성경은 우리 중에 누가 죄를 지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님의 보좌 밖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서있으면 겸손이 아닙니다. 불신앙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2016년 4월 4일 월요일

변화 되는 것 - 게리 윌커슨

수년 간 많은 진실 된 크리스찬들이 예전 경험에서 오는 깊은 실망감 때문일지 몰라도 믿음을 잃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을 믿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가족이나 자녀의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을 지 모릅니다. 삶의 사역을 충족하기 위해 믿을지도 모릅니다. 습관적인 구속이나 하나님을 믿는데 걸림돌이 되는 내적 갈등에서 자유롭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들에게는 노골적인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중재가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삶에 필요합니다. 줄여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에 왔을 때 하나님은 백성의 한 명도 뒤에 남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경험 많은 크리스찬이라면 요단강을 건널 태세를 취할 때보다 더 두렵고, 불안하고 의심되는 시간은 없을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살라고 허락한 땅을 갖기 바로 직전이기 때문입니다. 적군이 또 우리의 육이 저항하는 때입니다.

삶은 질문이 없는 요단강 건너기 전이 편안하기 때문에 더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때 편안했던 것들이 불편해지는 상황을 갑작스레 만들어서라도 우리가 움직이기를 유도하십니다. 갑자기 잡음이 나고 부패 되고 죽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편안한 곳에 계속 있기로 고집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삶의 비전이나 열정을 잃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유혹에 둔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동하도록 부르셨을 때 그가 받은 첫 지시는 ‘마음을 굳게 먹고 용기를 가져라’ 였습니다(여호수아 1장 6절).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네 구절에 걸쳐서 세 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용기를 일으켜야 합니다. 누구에게는 편안한 마음을 주는 거짓 된 것들을 버려야 하는 용기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스트레스 받거나 불안해 질 때 주님께 왜 그런 지 보여 달라고 여쭤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버리기를 원하시면 믿음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야 합니다.

2016년 4월 1일 금요일

찬양의 위력

다니엘 3장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찬양의 위력을 보게 되는 얘기를 아는데 이는 느브갓네살 왕이 세 명의 히브리 소년들을 풀무불에 넣었을 때이다. 이들은 믿음이 있는 지를 시험 당하게 되는데 사실 그들의 믿음 때문에 이 시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무슨 생각이 있으셨을 거다. 생각해보라. 이 이교도 바벨론 사람들은 이들의 기도나 설교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니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람들이 풀무불을 보았을 때 이 세 사람이 가장 힘든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었다. (다니엘 3:24-30)

예수님께서 그들의 풀무물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 히브리 소년들에게 처음하신 말씀은 “일어나라. 너의 묶임이 풀렸도다. 이 하나니을 모르는 백성과 이교도 정부가 나의 백성이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게 하라.”

그들은 바로 그렇게 찬양했고 성경은 말하기를 느브갓네살 왕은 그 광경을 보고 심히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일어나 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우리는 세 사람을 풀무불에 던졌는데, 이제 네 사람이 되었고 그들을 묶은 끈이 풀어졌다! 보라, 그들은 저 네 번째 사람과 더불어 노래부르고 찬양하고 있다.” (다니엘 3:24-25)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험 가운데 부르는 찬양이 주는 위력이다. 자 이제 당신은 고난 가운데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보자. 당신은 혹시 적에게 대항할 아무런 힘도 없이 약해져서 두려움의 잔을 마시고 있는가? 이제 무거운 결박을 풀고 우리의 구속자를 향하여 거룩한 손을 높여드릴 시간이다. 당신은 어떤 시험이든지 이제 자유함을 얻었다. 풀무불 가운데 있던 네 번째 분이 당신과 함께 하고 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리스도께서 고난 가운데서 자신을 보여주실 것이고 당신을 묶고 있는 모든 끈들은 불 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시험을 당하기 보다는 훈련을 받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2016년 3월 31일 목요일

고난의 풀무불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므로 또한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7-18)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면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험은 무엇 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의 눈을 현재의 고난에서 장차 올 것, 모든 것을 바꿀 그것을 향하라고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영원한 고향을 향해 한 발자욱 다가갈 때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은 잊어버리게 된다. 사도 바울의 포인트는 지금 현재 다가올 그 기쁨을 찬양하기 시작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브리서 13:15)

하나님은 “은처럼 단련하지 않고, 고난의 풀무불에서 우리를 택하신다” (이사야 48:10)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젼을 알려준 그 백성들은 적의 불시험을 견뎠다. 이제 그들은 두려움에 지쳐서 시험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으면 어떤 미래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가 두려웠다.

이 때 어떤 말씀을 하나님은 보내셨는가? 이 말씀은 현재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보내시는 말씀과 동일하다. “깨어나라! 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의 힘, 너의 하나님은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다. 그러니까 절망의 먼지 가운데서 일어나서 내가 약속한 천국의 땅에 앉으라. 너는 너의 의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의의 옷을 입으라. 자신을 다그치며 말하라. 자신과 변론하라. 육체와 사단에게 말하라. ‘나는 나를 구원한 그 분으로 인하여 단순한 승리자 그 이상이 되었다’ (이사야 52:1-3)

“내가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냐 13:9)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찬양 학교

하나님은 어떻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오셨나?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당했습니다! 더 이상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요.”라고 하는데까지 가게 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제 그 땅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시대의 물질주의로부터 분리되어서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도록 도와주신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찬양을 위한 곳이라고 말했다. 그 땅에 거주하는 모든 자들이 “너희는 내가 창조한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이사야 65:18). 히브리 말로 창조하다라는 말은 “존재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는가?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백성들도 만드신다. 그는 아직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신부를 만드셔서 많은 시험들을 통해서 찬양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우리 현재의 고난은 찬양의 학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모든 시험들은 우리의 영광의 날들을 위한 훈련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끊임없는 걱정과 고민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마치 하나님이 죽으신 것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그 시험 가운데서 찬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가 현재 당하는 시험에는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들은 희망을 포기했다. 그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고 티끌 속에 앉아 만 있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석과 같은 굳건한 약속과 함께 목에 사슬을 두른 체 앉아 있다.

오늘날도 또한, 어떤 성도들은 이 시점에서 포기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지만,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지도 않고 “이런 숨막히는 상황 가운데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그리스도께 다가갈수록 더 고통스러워”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나는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했다” (골로새서1:23-24)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늘로 올리워진 적이 있고 거기서 영광이 그를 기다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가 본 것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은 그의 시험과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고 모든 시험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마음이 기뻐하는 법을 배웠고 다가오는 세상을 준비하면서 또한 찬양을 훈련할 수 있었다.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문 밖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큰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 그의 입증된 믿음 뿐 아니라, 이삭을 바쳤을 때 아브라함은 이 땅에 속한 것으로부터 분리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목적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 속했지만 더 이상 이 땅의 사람이 다른 세상에 속한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지 보자. “그는 영문 밖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13:12). 예수님은 외인처럼 즉 형식적인 종교의 규율에서도 벗어나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않은 채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머리 둘 곳이 아무 데도 없는 외인이셨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 주님처럼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여기에 있는 도성이 아니라 다가오는 성을 바람이라” (13:14). 우리는 이 땅에서 일하고 살지만,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예루살렘인 까닭에 우리는 이 곳에서 외인이기도 하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13)” 우리가 영문 밖에 있는 것처럼, 이 땅의 모든 욕망과 물질의 바깥에 있기도 하지만 아직 우리의 신랑되신 분이 있는 곳에 있지는 않다.

나는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차를 몰고 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그런 물질적인 것이 내 마음을 앗아가지 못하도록 늘 깨어서 조심한다.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리스도를 그렇게까지 바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산을 움직일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고린도전도 13:2)

슬프게도 주위를 돌아보면, 수 많은 믿음이 좋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들을 드물다. 대신, 우리의 눈을 세상의 것들에 두고 그것을 어떻게 가질 것인지에 관심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늘나라에 중심을 두고 세상과 분리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메시지는 그들이 지금 즐기고 있는 좋은 인생에 대한 방해일 뿐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문 밖으로 몰아내시는 좋은 방법들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배우자로 주려면, 네 인생에 다른 어떤 것도 네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 나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네가 아무 것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너의 가장 신나는 꿈, 가장 강력한 마음의 소망,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 되어야 한다.”

2016년 3월 28일 월요일

비관주의자들의 목소리 by 게리 윌커슨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 있다. 그리고 많은 인생의 시점에서 우리가 성취해야하는 계획들을 마련해 놓으셨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그를 신뢰하면, 그 계획들을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그의 높으신 부르심을 따르려면 많은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우리를 비관주의자의 목소리라고 부른다. 우리가 약속의 땅을 향해서 요단강을 건너야 할 때, 우리를 건너지 못하게 하는 수 많은 목소리들을 듣게 된다. 그것도 아주 말이 되는 톤으로 말하는데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라는 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모든 기독교신자들에게 들려지는 이 비관론자의 목소리는 대충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 외부에서 오는 비관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 할 때마다 우리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친구, 가족, 지인들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이다.

그리고 사단의 비관론도 있다. 이것은 사단의 목소리인데,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부에서 오는 비관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모든 반대 의견을 불러 일으키는 우리 내부의 목소리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도 이 세 가지 목소리를 다 들었다. 강을 건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이 땅의 모든 미래의 영광이 거기에 있었다. 당신이라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목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강을 건널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더 크신 영광을 위한 그의 지휘에 순종하는 것을 막는 그 모든 목소리들을 뿌리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걸음을 떼라고 하실 때, 우리가 이전에 갖지 못했던 정도의 하나님의 신뢰를 가지고 건너 오라고 우리를 이끄신다.

“아무도 너의 날 동안에 너를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듯이, 너와도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 (여호수아 1:5)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믿음의 여정

현재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새로운 세상- 즉 새 천국, 새 지구-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 창조물은 새 예루살렘 즉 그리스도의 신부를 위한 집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만들고 계시는 이 새 세상의 환상을 보았을 때 벅찬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이사야 65:17-18).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에게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현재 너희가 겪고 있는 시험 중에 너희 마음 안에 이 진리를 뿌리내리길 바란다. 현재 이 세상은 너의 집이 아니다. 너희가 보는 모든 것은 모두 지나갈 것이니라. 지구, 달, 해, 그리고 별들도 모두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새로 창조하는 이 세상에는 불, 폭풍, 마귀, 시험 그리고 고난이 없는 세상일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시험에는 끝이 있으며 모든 어려움은 모두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모든 집중을 쏟고, 모든 사랑과 마음을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할 그 세상에 향하게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힘들게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때가 오면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시련은 시험이 아니라 연단입니다.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세상을 위하여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세상은 완전히 새 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몸이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의 몸과 같은 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 또한 하나님께 온 마음을 향한 삶을 살았던 표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잇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브리서 11:9-10).

2016년 3월 24일 목요일

그리스도의 신부

사실은, 우리 삶의 모든 어려움이 믿음의 시험은 아닙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역경을 겪고 있을 때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험을 겪을 때 그리스도와 더 가까이 동행하여, 결국에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믿음의 시험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또 하나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읽는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크리스천이라고 예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견고한 믿음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신부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시험을 겪으며 신랑 되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불을 견디어낼 것입니다. 또한 신랑 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폭풍, 불, 그리고 역경을 통하여 연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은 그저 신부의 사랑과 헌신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견고한 믿음과 사랑을 더욱 더 연단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신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다른 방해요소는 모두 배제하고 온전히 예수님만을 사모해야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린도후서 5:8).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립보서 1:21).

바울은 그저 크리스천이니 죽은 삶이다 라는 식의 일차원적인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믿음의 삶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더욱더 주님과 가까이 함께 있고 싶습니다. 주님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며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갖는 것은, 바울이 이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예수님께 온 마음을 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승리하는 믿음

바울은 시험을 받을지라도 끝까지 견뎠을 때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간증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디모데후서 4:7). 물론 바울은 자신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일들 가운데는 시험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내가 원하는 만큼 이해하지 못하였고, 내가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지만, 믿음에 관하여서는 모든 시험 중에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군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폭풍우처럼 원수가 나를 삼키려고 하여도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한 방패막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모든 사실은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 또한 바울과 같은 간증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시험을 겪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험은 12살 배기 손녀딸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고통스러운 시련을 견디어낼 힘과 믿음을 주셔서 저는 그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내가 알고, 그의 계획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이 없이는 이렇게 어려운 시험과 깊은 고통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의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당신 앞에 가져왔습니다.”

현재 겪고 있는 시험과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시험을 겪는 동안 의심, 두려움 또는 분노를 경험하신 적 없으신가요? 이유 없는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며 하나님을 탓하지는 않으셨나요? “신실하게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녔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안됩니다”라고 말하며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아니면 당신은 아직도 천국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나요? “주님은 선하시고, 이 모든 일 중에 있더라도 주를 믿겠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나를 승리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계시다면, 당신의 믿음이 불을 견디어낸 것입니다. 만약 아니라면, 이렇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시험과 고난을 겪어야, “나의 믿음이 견디어 승리하였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2016년 3월 22일 화요일

믿음의 시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시험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겪는 우리를 이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픕을 아노니”(요한계시록 2:9). 쉽게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단다. 지금은 이해 가지 않겠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단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시편 66:10).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베드로전서 1:7).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시편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34:19).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4절에서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과 많은 눈물이 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환난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히브리서 11:37, 10:32).

성경에서는 믿는 우리의 환난, 시험 그리고 고난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왔사오니”(시편 88:3).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71:20).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성경에서 언급된 다음의 상황들을 겪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험, 환난, 고난, 궁핍, 근심 등. 그리고 저 또한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아픔과 어려움, 그리고 시험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또 이 메시지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제 삶 또한 그렇습니다. 현재 저는 여러가지의 어려운 시험과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 모든 환난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시험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시험 뒤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1:7). 베드로는 이러한 경험들을 “불 시험”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4:12).

2016년 3월 21일 월요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 by Gary Wilkerson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실까요?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갖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지요. 태초부터 지금까지 성경에서 우리에게 아주 명확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이 증거가 되어줍니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시편 89:15).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 임이니라”(예레미야 31:13).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이사야 65:18).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이사야 35:10). 그리고 다음의 구절에서는 오늘날의 세대에서 격는 문제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신명기 28:47).

신약성서에서도 행복에 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베드로전서 1:8).

성경에서 행복, 기쁨, 즐거움, 환호, 그리고 재미 등에 대한 구절을 2,700여개 찾았습니다. 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면서 경험하는 삶의 일부입니다.

오랫동안 당신으로부터 멀어져있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육체적 고통, 심적 불안, 혼란 등의 상황에 놓여져 있을 때 어떻게 행복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도움이 될만한 팁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하신 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이것은 성경이 증거가 되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기쁨은 몽상이 아닌 진짜 현실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3.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매일 새롭게 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원수된 마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빼앗아 가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기쁨을 매일 누리시기 바랍니다.

2016년 3월 15일 화요일

복음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사도행전은 놀라운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 두 구절은 로마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사슬에 묶인 채 자택 구금된 바울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바울의 상황을 희망적으로 묘사한 구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

그리스어의 “금지하다”라는 말은 사실 “방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표준역 성서에는 바울이 “온전히 방해받지 않고” 설교하며 가르쳤다고 합니다. 바울이 구금상태인 것을 볼 때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복음은 멈추지 않고, 가로막지 않는 의미로 “방해받지 않아야” 합니다. 저자는 “복음은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놀라운 이 간증을 사도행전을 끝맺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슬에 묶인 바울이 로마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을 초청했을 때, 그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을 모른다. 우리에게 누구란 말이냐?”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바울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교 했을 때, 서로 옥신각신 다투게 됩니다. 그때 네로황제는 로마거리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고문하고 죽입니다.

이런 산더미 갖은 방해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이 신이 없는 로마제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까? 로마에 세대를 아울러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감옥에 갇혀 그의 설교가 경멸받을 만한 바울이 로마인을 전도하는 하나님 최고의 도구였습니까?

2년동안 사도는 이 평범한 길가의 집에서 입막음을 당했습니다. 곁에서 같이 일하며 도와주는 디모데, 바나바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전파할 확성기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언을 받을만한 사람도 없고, 도움을 받을만한 정치적 연결고리도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바울은 계획한 프로그램이나 의도가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광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길거리 모임을 결성하거나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말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합당한 곳에 써주소서”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곳에 있으면서 온전히 만족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계획은 모르지만, 주님께서 저를 이곳에 놓으신 것을 압니다. 주님의 복음은 방해받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2016년 3월 14일 월요일

두려움을 위한 예수님의 처방전 by Gary Wilkerson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패배를 받아들인 것 같이 살고 있습니다. 믿음보다는 의심으로 생각이 지배되며 습관적인 죄 행동양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에게만 보이며 “내가 이렇게 허우적대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 없는 삶을 사는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을 처리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제자들은 말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세상을 두려워했습니다. 조롱, 비난, 박해 심지어 예수님께서 겪은 죽음의 가능성까지도 무서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벽을 통과하셔서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내가 평강을 주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계속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다시 반복하셨어야 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21 참조). 예수님께서는 질책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같은 일이 일주일 후 다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문을 잠그고 무서움 속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0:26).

어떤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질책하지 않으시고 대신 인내를 보여주십니다. 일주일 전 도마가 불신을 표출했을 때,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없애기 위하셔 못자국을 보라고 하십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8).

여기에 우리 두려움을 위한 예수님의 처방전이 도마의 대답에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교회에 선포하셨고, 교회는 매주 오는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을 믿으라.”

2016년 3월 11일 금요일

하나님의 집을 향한 질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는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집을 향한 열정이 나를 삼켰다” (요한복음 2:17). 그러나 그의 사데 교회를 향한 그리고 지금 우리를 향한 메시지는 “너는 나의 은혜를 즐겁게 받아서 좋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너는 강력한 예배와 말씀으로 복된 교회였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에 너는 생각했다. “우리는 다 왔다” 그래서 안도했다. 너는 더 이상 경계심을 잃어버렸고 무관심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적인 comfort zone으로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너는 내가 준 사명을 이루려고 나아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집을 우리가 먼저 생각지 않았을 때 어떤 일들이 생기는 지를 보여준다. 학개에 더 자세하게 나와있다.

학개가 예언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데려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해서 성전을 짓게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빛이 되는 교회를 원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내 교회에 집중하라. 이것이 너의 첫 번째 미션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약에 너희가 내 집을 잘 돌봐 준다면 나도 너의 집을 돌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의 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그는 또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다. 아직 하나님의 전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아다” (학개 1:2). 여기서 이 말 뜻은 “ 우리는 그 일을 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이다. 그리고 사실은 자신의 집을 세우고 자신의 사업을 세우는 데 너무 바빴다.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는 학개를 통해 말씀하시길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학개 1:9)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셨고 그의 전을 재건하라는 미션을 주셨다. 그러나 너는 너의 집을 세우는 데 너무 바빠서 그의 집을 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더 이상 너의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너는 온통 너 자신만의 관심사로 가득 차 있다.”

당신에게 동일한 더럽게 됨의 죄는 없는가? 당신은 당신만의 관심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어서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남은 에너지가 없지 않는가? 당신의 집을 세우기 위한 시간은 있지만 하나님 집을 위해 주일 아침에 한 두 시간 내기는 어렵지 않은가? 티비를 보기 위해서나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지만 기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없지 않은가?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은 과연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 자신을 휘저어 놓을 만한 여력이 있는가?

2016년 3월 10일 목요일

죽은교회

사데교회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그리고 위대한 사도적인 능력으로 시작됐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사데의 사역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의 교회가 엄청난 명성을 가지고 시작됐지만 내가 준 생명을 내어버렸다. 너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너는 죽었다. 너는 이 말을 듣고 받아들이고 다시 깨어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에 주께서 죽었다고 말하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직 그 교회 안에 깨어 있는 거룩한 남은 자들이 있다고 한다. 주님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요한계시록 3:4)

예수님께서 “옷을 더렵혔다”는 것은 영의 죽음을 말한다. 무엇이 사데교회의 성도들이게 영적인 죽음을 불러 일으켰는가? 그들의 마음에 “특별한 관심”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관심이 있었다: 자선과 선교, 그리고 몸된 교회를 위한 신실한 모임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일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 자신만의 관심사를 쫓아가고 있다.

사데는 번성하는 도시였는데 금을 녹이는 것과 좋은 옷감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사데의 기독교인들은 주변의 번성하는 문화를 사랑하게 되어서 자신들의 관심사가 옮겨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급속하게 주님의 관심사에서부터 멀어져 물질적인 마음으로 쏠리게 되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도 이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바를 흠잡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삶을 꾸려가고 있었고 그들의 사업을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족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삼켜버려서 결국은 하나님의 일들을 게을리 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남은 신실한 자들을 향해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계시록 3:2-3)

여기서 예수님께서 “곧 죽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경계하라! 나의 집을 향한 너의 관심과 나의 말씀을 향한 열정, 그리고 공예배에 대한 즐거움과 서로를 사랑하던 것들로부터 너는 죽어가고 있다. 너의 눈은 졸음으로 감겨져가고 있고 점점 뜨뜻미지근해지고 있다. 지금 일어나라! 만약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너는 결국 영적으로 죽게 될 것이다!”

2016년 3월 9일 수요일

조용하고 작은 음성

우리들의 영혼의 적들처럼, 우리의 육체의 함성도 들려진다. 그 함성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 한 명의 친구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결정을 축복하실 거라고 그러니까 가끔씩은 그 욕망을 들어줘도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또 다른 크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다.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육체를 대적해서 싸운다고 성경은 말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성령만이 육체를 멸할 수 있다.

성령의 음성은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을 기도 가운데로 가지고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확인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이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든 크고 작은 문제들 가운데서 늘 유용하다.

사단이나 육체가 마치 홍수처럼 몰려올 때에 성령님은 항상 일어나셔서 적을 무찌르신다, 만약에 우리가 그를 신뢰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현재의 기독교 세대는 자신이 의견을 결정할 때 성령님과 의논 없이 해버린다. 많은 신자들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 행동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전혀 믿음이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최선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기반해서 자신이 할 일을 결정한다.

이러한 신자들의 결과는 무엇인가? 만약 하나님의 종들이 자신만의 계획을 고안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길 거부하는 것처럼 성령님의 통치 밖에서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들은 영적인 벌집을 건드린 격이 되어서 휴식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나도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은 경우들이 많이 있다. 사실 나는 나만의 방향을 따라서 내가 할 일들을 안 하는 대신 책을 쓸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모든 일들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성령의 고요한 음성을 듣는 것을 지난 수년간 배워왔다. 나는 이제 그의 절대적 통치에 “예스, 아멘”으로 답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가 나를 진리로 인도하고 나를 보호하며 앞으로의 일들을 보이심을 안다. 나는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신 것처럼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한다.

당신도 그렇게 하겠는가?

2016년 3월 8일 화요일

성령의 보호하심

“어떻게 나는 다른 음성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먼저, 성령은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성령님께 맡기지 않은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 성령님은 그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신다. 그런데 성령과 동행하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만약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 내가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완벽한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속고 있지 않는지 점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의 음성이나 마귀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과거의 안 좋은 경험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많다고 느낀다. 그들은 “어떻게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다는 것을 아는가? 나는 지나 번에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어. 속은 기분이 들어.”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셨어. 하나님이 저렇게 말하셨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겪는 불편한 기분 때문에 이런 일들에 관심을 끊기도 한다.

이 중요한 사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신뢰의 “아멘”을 요구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신뢰는 믿음의 행위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에베소서 6:16). 이것은 우리를 어떠한 속임수와 실수로부터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약속이다.

사탄의 소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송사한다. 이러한 송사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어떠한 전쟁의 도구도 쓸모가 없게 된다. (이사야 54:17) 사탄의 연장은 송사와 거짓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늘 우리에게 신실하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적의 음성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책동한다. 그러나 모든 성령의 말씀은 성경으로 확증되어야 한다.

2016년 3월 7일 월요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by 게리 윌커슨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16-19)

십대일 때 나는 하나님에 대해 의심했고 다른 종교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 당시에 나는 바하교의 교리가 마음에 들었는데 왜냐면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는 진리이고 모든 믿음은 우리를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바로 나는 위대한 기독교 저자인 C. S. Lewis의 책들을 읽었는데 나의 대충 대강 이해하던 생각들을 바로잡아 주었다. 그는 모든 기독교에 대한 생각은 한 질문에 기반한다고 썼다: 부활은 과연 있는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노아의 방주가 과연 사실인지 과연 창조는 6일간 이루어진 것인지 혹은 에덴동산은 과연 있었는지에 대해서 상관이 없어진다. 만약 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중에 그 어떤 것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사람들이 치유받는 것, 죄가 제거되고, 천국이 실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다 –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한 복된 소망이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13)

나의 십대 시절에 더 많은 독서를 접하게 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를 보았던 증언들을 굳게 믿게 되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린도전서 15:6) 나는 부활을 단지 추가적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우리를 위해 죽으심에 대한 완성이요 절정임을 알게 되었다. 복스러운 소망은 이제 내 마음에 심기워졌으며 매일 나의 삶의 근원이 되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매일 주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

2016년 3월 4일 금요일

성령과 하나님의 약속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음의 약속들을 생각해보고, 이 약속들에 대한 당신의 응답이 “예와 아멘”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1. 주께서 당신을 성령으로 바로 세우셨고, 인치셨고, 채우셨고, 감동시키셨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21-22).

성령이 당신의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성령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에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실은, 우리는 잘못을 하였을 때 옳을 일을 할 때만큼 성령을 필요로 합니다.

2.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한복음 14:16-17, 26). 요약하자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진리로 채우시고, 오직 진리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약속에 대하여 “예와 아멘”으로 응답하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로 결심하였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우리 안의 목소리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3). 아직도 이렇게 위대한 약속의 진위에 대한 의심을 갖고 계십니까? 성령이 당신의 삶의 모든 부분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네 주님. 당신의 약속을 믿습니다. 당신의 약속이 나의 삶에 이뤄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삶의 방향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당신의 가는 길 오는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방향을 매 삶의 순간에서 인정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로 결심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예와 아멘”으로 응답하셨습니까?

2016년 3월 3일 목요일

그냥 “예(YES)”라고 말해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라디아서 5:25).

성령으로 행한다는 바울의 구절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를 나에게 명료하게 이해시켜 주옵소서.” 성령께서 제게 이렇게 응답하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의미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 훈련을 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너무 간단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진리는 깨닫는다면 우리는 혼돈 없고 평안으로 가득 찬 명확한 삶의 방향을 가진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제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장을 제 뇌리 속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저 ‘예’라고 말해요.”

그저 순종하면 됩니다!

이 문장이 의식 중에 스칠 때에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정말 간단하군요. 그러나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바울이 쓴 편지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린도후서 1:20). 바울에 의하면,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에 확신에 가득 찬 돌이킬 수 없는 “예,” 즉 순종과 인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주신 약속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멘과 예로 모든 약속에 대해 대답하고 믿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에서 완전히 믿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야고보서 1:6-7).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예”라고 하는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구절에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단어 자체의 뜻은 “그렇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믿어도 좋습니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구절 전체를 보고 말한다면, “아멘”의 뜻은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나의 삶에 대한 말씀으로 믿겠습니다. 나의 삶의 약속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2016년 3월 2일 수요일

구름을 따르는 것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수기 9:22-23).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던 구름은 결국에 천국으로 들려 올려 졌습니다. 그러나 수 백 년 후에 다른 구름이, 예수살렘의 다락방에서 내려왔습니다. 성령- 즉 광야의 성막 위에 머물렀던 같은 영-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120여명의 예배자들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이 구름은 성막 위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까지 내려와 사람들의 머리 위에 굳게 결합된(cloven) 불길의 언어처럼 머물렀습니다.

굳게 결합된(cloven)라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빈틈없이 분포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구름이 분리되어 다락방에 있는 각 사람에게 나뉘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 같은 구름은 각 사람의 마음과 육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이 안에 거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완전히 따르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이 당신의 삶에 거하실 수 있지만, 그것만이 당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완전히 순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도, 우리를 인도하는 구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 하여 기도하며 예배하며 성령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성령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살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라디아서 5:25).

2016년 3월 1일 화요일

성령을 따르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에게 완전히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의 인도함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한복음 5:19).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감히 우리의 구주이시고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지 못하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솔직해 보자면, 우리가 방향을 잃었을 때 마지막으로 찾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게 우리는 카운셀러나 친구들과 수 시간씩 전화통화를 하면서 조언을 구합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은 생각 인 것 같아? 너의 생각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아?” 슬프지만 우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성령에게 묻습니다.

민수기 9장에 보면, 광야에서 성막 위에 드리운 구름에 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늘 함께하신 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그 구름 같은 존재로 거하시고 계십니다.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민수기 9:15-16).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그 구름을 항상 따랐습니다. 성막 위로 구름이 올랐을 때 백성들은 성막의 말뚝을 구름의 방향으로 옮겨가며 따랐습니다. 구름이 멈출 때 백성들도 함께 멈추어 천막을 지어 함께 머물렀으며 구름이 가는 곳 어디든지 함께 움직이고 멈추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구름이 이끄는 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구름은 매일 또는 매주 또는 수개월, 수십 년에 걸쳐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낮이나 밤이나 백성들은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지켜 진행치 아니하였으며”(민수기 9:18-19).

2016년 2월 29일 월요일

부활의 능력을 입는 것 by Gary Wilkerson

부활의 엄청난 결과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제 아내인 켈리와 저는 서로에게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대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약을 완성시키시고,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옷을 입듯이 우리의 삶에 입혀야 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린도전서 15:54).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우리가 크리스천 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부활이 있었든 없었든 상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부활이 없었다는 증거가 나타나도 나는 크리스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이 세상도 더 나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견해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결과는 매우 끔찍한 세상이었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린도전서 15:14-15).

쉽게 말하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크리스천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설교도, 전도도, 선한 일도 모두 멈출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이 더 살기 편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면, 크리스천의 믿음은 그저 도덕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생이라는 약속으로 위안을 얻기 위하여 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에게 속죄는 없었을 것입니다.

2016년 2월 25일 목요일

당신도 행할 수 있습니다

몇 달 동안 저는 과부, 고아,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왔습니다. 궁핍해서 더 이상 보험료를 낼 수 없거나 살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편지를 받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만군의 여호와여, 먹을 것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행해야 한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네가 그들을 먹이거라. 너에게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생각하셔야 할 것은 아무도 좋은 일을 행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그 일로서 심판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은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굶주린 자를 먹였는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 점은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서도 나만을 위해 살았는가? 욕심스럽고 과하게 사모으느라 예수님을 잘못 증거가 되고 있는가? 도움이 필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눈감고 지나쳤는가?”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에 우리의 증거가 가져야 할 조건은 말씀과 행동 두 가지 다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돕는 행위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듯이, 행하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4-16).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의 계시에 두 가지 방법으로 반응합니다. ‘쉬운 복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혹독하지 않으셔. 최후의 심판일 설교뿐이야. 하나님은 사랑이 너무 많으셔서 가혹하게 심판하지 않으셔”라고 합니다. ‘강한 복음’의 사람들은 “이건 너무 엄격하고 원하는 것이 많아. 이러한 부담스러운 말은 받아들이지 않겠어. 나는 절대 만족하게 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의 복음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정당화하고 답보합니다. 한쪽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부활을 증거가 되려고 합니다. 다른 쪽은 기도 모임을 열고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도록 하나님께 여쭙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도움이 필요한 가족들에게 선물 바구니를 나눠주고, 다른 때에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을 줍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온전히 행하는 헌신은 아주 적습니다.

2016년 2월 23일 화요일

성령으로 행하는 것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5). 이 간단한 지시에서 사도 베드로는 평범한 말로 “성령으로 살면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게 내어드려라. 우리는 모두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지속적이고 확실한 인도자로 보내졌으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사람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몸에 거주하고 마음을 다스리기를 요청하십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성령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고 매 순간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시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위기의 순간 때마다 위로를 얻으려 그분을 셀 수도 없이 불렀습니다. 성령님을 존중하며 그분에 대해 설교하고 성령의 선물과 열매에 관해 가르칩니다. 성령님께 기도하며 찾고, 천국을 열어 교회를 회복시켜달라고 애원합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진실한 성령님의 발현을 경험했지만, 적은 사람만이 성령 안에서 걷는 의미를 아는 것 같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 진실을 알게 되면 혼란, 갈등, 불화, 고통, 괴로움, 망설임이나 정욕에서까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러니 진실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 분명히 쓰인 것처럼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행할 방법은 육 아니면 영,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육은 본연의 고집스러운 의지가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택하고 나서 하나님께 그 선택들을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건전한 정신을 주셨으니 나는 똑똑하게 선택하겠다. 하나님의 지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영으로 행하는 것은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의지를 성령님께 위탁하고 그분의 작지만, 지속적인 목소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지도해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다스림을 만들러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듯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시 37:23)”라고 말하듯이, 성령님은 걸음을 정하십니다.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정하시고 이끌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2016년 2월 22일 월요일

그리스도 부활의 목적 by Gary Wilkerson

거의 모든 크리스챤들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매일의 삶에서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서고 다시 살아나신 이야기의 부분은 알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그 놀라운 진실을 적용하기 충분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큰 차이점을 만듭니다.

그리스도 부활은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을 위해서도 급진적인 결과를 가집니다. 부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사람이 영적인 삶과 연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땅에서의 매일의 삶과 결부 짓지 않습니다. 부활이 우리의 결혼, 직장, 가족과 어떻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일, 심부름, 의무, 요구로 어쩔 줄 모르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의 첫 번째 중요성을 상기시켜줍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25)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 베드로의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의로움은 삶의 새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의로움 없이는 아마 죄와 용서의 반복 속에 갇혀있을 것입니다. 죄의 무게가 우리의 삶에 가져다 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거나 행동을 비관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비난이 매일의 삶에 밀려오면, 그것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정결해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것으로 충분합니까?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해질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았던 것 같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에게 기쁨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매일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능력 있는 진실입니까! 하지만 크리스챤들이 매일의 삶에서 이 새로움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삶의 새로움이 있어? 나는 좌절감이 들고 짜증이 나며 실망스러운데.”라고 제 아내에게 말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삶을 새롭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은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또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2016년 2월 19일 금요일

당신을 위한 구원의 말씀

엘리야가 이사벨로부터 도망쳐서 동굴에 숨었을 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열왕기상 19:11) 하나님은 거기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9:11)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겨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2)

하나님은 당신이 지치고 상처받았을 때 어떤 말씀이 필요한 지 잘 알고 계신다. 그런데 이건 당신을 판단하는 말이 아니고, 혼내시는 말씀도 아니고, 꾸짖는 설교도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본다. “네가 시험에서 넘어졌을 때, 너를 심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는 아주 세밀하고 친절한 음성을 듣고 싶었다.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9:12). 어떤 번역은 이를 “부드러운 소리”라고도 말하고 “새롭게 하는 부드러운 바람”이라는 뜻이다.

이 부드럽고 세미한 음성은 오늘도 우리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메시지는 동일하다.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서 5:11).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편 103:8-11, 13).

여기 당신을 향한 구원의 말씀이 있다. 일어나라 신뢰하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폭풍우 속에 함께 하시다는 것을 믿을 때가 온 것이다. 그가 이 모든 것을 견딜 힘을 주실 것이다.

네가 망가질 거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라. 사단에겐 절대 승산이 없다. 주님을 말씀하셨다. “아무리 네가 상하였을지라도, 너를 꺾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의 촛불이 꺼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영이 너의 타 들어 가는 촛불에 불을 붙여서 나를 향해 타오르게 할 것이다.”

2016년 2월 18일 목요일

하나님은 당신에게 화나신 게 아니다

당신은 충성 어린 종이요, 열심히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다. 과거에 승리한 적도 있으며, 주님을 깊이 사랑한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전에 없이 깊게 상처 받았으며, 심지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도 힘들다.

사랑하는 이 성도는 지금 영적 전쟁 중인 것이다. 전투와 상처, 당신을 망가뜨리려고 하는 악랄한 적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자신을 정죄하는 생각들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양심은 이렇게 속삭인다. “옛날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 않잖아. 말씀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너는 메말랐고, 미지건 해서 불이 없어져버린 상태라 좋은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거야. 이제 당신은 사탄에게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그 평안을 빼앗아 가게 놔둬버리게 된 거야. 너를 붙들어 줄 것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

그리고 우리는 생각한다. “나는 주님을 저버렸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어.” 너의 꺼져가는 믿음은 점점 약해져서 사단은 그것이 완전히 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마치 엘리야처럼, 당신은 완전히 탈진했고 용기를 잃었다. 단지 자고 싶을 뿐이다. 성경은 이 거룩한 선지자는 오직 잠만 자고 싶어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누워서 잤다” (열왕기상 19:5)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짐을 지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엘리야를 꾸짖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충성어린 종이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것을 안 것이다. 나는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상처받고 지친 이 충성스런 종을 보라. 그는 자신의 한계점에 다달아서 자신의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약속했다. “나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열왕기상 19:7)

이 말씀은 이를 읽고 있는 모든 상한 갈대들에게 엄청난 말씀이다. 당신이 얼마나 상했는지 상관이 없다. 시험을 당하여서 얼마나 넘어졌는지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너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너의 촛불이 꺼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너의 믿음이 사그라 들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하늘로부터 당신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다. 당신은 지금 이 말씀으로 어루만져지고 있다. “일어나 먹으라. 하나님은 당신께 화나신 게 아니다. 당신을 넘어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 상황이 당신이 핸들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는 당신에게 초자연적인 힘으로 부으실 것이다. 그가 당신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힘을 공급하실 것이다.”

2016년 2월 17일 수요일

믿을 수 없는 사랑

예수님이 한 번은 그의 육신의 친척들에게 말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요한복음 7:7)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진정한 제자들을 향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내어놓으신다. 지금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이 말이 해당될는지 궁금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예수님은 한마디로 “너희들은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왔구나. 그래서 내 복음을 희석시켜버렸구나. 세상의 품에 푹 안겼구나. 그래서 세상의 친구가 되어버렸구나.” 야고보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물론 예수님은 정치가들과 죄인들의 친구이셨다. 그렇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보면 그는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히브리서 7:26) 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한 사역을 하셨지만, 늘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치 주님처럼,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만약 그들이 나를 핍박하면 너희들도 또한 핍박할 것이다” (요한복음 15:20). 그렇다고 당신이 굳이 핍박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이 핍박은 당신의 능력이나, 인종, 외모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주님을 당신의 주로 인정한 것 때문에 오는 것이다.

이제 격려의 말을 전하겠다. 비록 세상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를 미워하고 핍박할 지라도, 우리는 교인들 사이에서 점점 더 자라나는 사랑과 경건한 애정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수록 우리의 의로운 형제와 자매들은 점점 더 하나가 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날에는 교회 안에서의 사랑이 점점 더 귀하게 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고, 미디아로부터 놀림을 받을 것이며, 할리우드로부터 비웃음을 받을 것이며,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오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엄청난 사랑이 넘치는 장소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핍박을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지는 상관이 없다. 교회는 우리를 이러한 말들로 맞이 할 것이다 “집으로 잘 오셨습니다, 형제 자매님들. 여기가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진정한 복음을 들고 나아가기 위해서 이곳에서 우리는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2016년 2월 16일 화요일

왜 세상은 교회를 싫어하는가?

진정한 기독교인은 사랑과 평안과 헌신과 돌봄을 실천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이들은 자기희생적이며, 겸손하고 친절하다.

우리의 상식은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하며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고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고 저주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일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약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들 보다 나를 먼저 미워하였음을 기억하라…그들이 나를 핍박한 것처럼 너희들도 핍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18, 20) 그렇다면 왜인가?

교회는 교회의 사명, 즉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주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인 바로 그 사명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내가 지금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하면 아마 좀 놀랄런지도 모르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지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경건하지 않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self-righteousness)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의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자신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형성하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선행 위에 우상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마음 착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지를 스스로 칭송해 마지 않는다. 물론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선하며 지옥엔 절대 갈 수 없을 만큼 착하다고 말이다.

이 세속적인 사람은 오랜 세월을 자신의 양심을 눌러왔다. 자기 잘못을 얘기하는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잠재워왔다. 그는 이 위장 평안을 누리다 못해 하나님이 자신을 아주 귀하게 여기신다고 믿을 정도로 자신의 거짓에 길들여왔다.

그리고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그 순간, 당신 바로 기독교인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전하는 진리는 자신의 죽은 양심보다 훨씬 크게 그 음성을 발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갑작스럽게 당신은 바로 그 사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당신은 모든 게 안전하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확신을 빼앗아 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 수년의 세월 동안 그는 자신이 정말 안전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제 당신은 그 모든 선행들은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한테 당신은 절대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아님이 분명한 것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의 눈에 당신은 밤의 평안한 잠을 앗아가는 고통을 주는 사람인 것이다.

2016년 2월 15일 월요일

아가페 사랑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마지막 교훈의 말씀을 전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에서 시작됐다. 그는 이 질문을 세 차례나 하셨고, 그 때마다 베드로는 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매번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21:15-17)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랑이란 단어의 그리스어 아가페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런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니가 나를 싫어한다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 만약 니가 나를 부인한다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것디. 만약 니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을 때, 그는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매번 그가 사랑을 맹세했을 때, 그는 필리오, 즉 형제간의 사랑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죠. 즉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기본적으로 “주께서 저를 사랑해주신다면 저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답은 우리 주님께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나랑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은 또 말했다. “나의 백성들이 도움에 필요하다, 베드로. 그들을 돌봐라. 그들을 먹이라. 그들에게 너의 생명을 주어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라고 명하고 계신다. 주님은 이 제자가 지난 몇주동안 심하게 망가졌으므로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뒷부분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생명을 주는 것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부서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말하노니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를 메고 네가 가고 싶은대로 다녔겠지만, 네가 늙어서는 네 손을 남에게 의지하고 네 옷을 입히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이는 그가 어떤 죽음을 맞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이 후에 그는 말했다.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8-19)

이 마지막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축복된 삶에서 주는 삶, 부서지는 삶으로 이끄셨다. 이로써 베드로에게 정말로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 고통, 고뇌, 슬픔이 하나님께서 그의 앞에 두신 주는 삶(giving life)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은 베드로의 죽음조차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신과 나는 이 땅에서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는 있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을 살 때에 마치 제단에 부어진 포도주처럼 당신의 삶이 부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서 당신은 타자중심적이고 강력하며,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세상이 당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주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며, 그의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성품을 세상 가운데 증거케 될 것이다.

2016년 2월 12일 금요일

자비의 시간

하나님의 의의 불길을 다시 키울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서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높일 사람들이 아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검게 그을린 심지를 볼 때에 나는 그 불씨를 끄지 않을 것이다. 불길은 사라져서 불이 보이지 않더라도 작은 잿불이라도 보인다며 그 불씨를 완전히 꺼버리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작은 목소리라도 신실하게 부르짖는 나의 종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할 것이다.”(이사야 42:3 참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지금 ”자비의 시간"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특히 유럽을 여행할 때는 이 사실을 더욱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 대륙은 미국보다 더 타락하였고, 선택적으로 하나님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버렸습니다. 유럽의 어떤 나라들은, 길을 걸을 때 쉽게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오만한 태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스웨덴은 유럽국가들 중 비교적 부유한 국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더욱더 부유해질수록 배교자들의 수는 늘고,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신앙은 점점 식어가고 있는 위험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일랜드 또한 수 십 년 동안 찢어지는 가난에 시달렸다가 이제 부유해지고 있는데, 영적인 기후는 이미 무감동의 상태로 세속주의가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 전체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심판이 온다면 뭐 어때? 그래서 뭐? 그냥 신나게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거야.” 하나님을 찾는 마음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조급함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향하여 명료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초자연적으로 막을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말씀만 하시면, 천사들이 모든 마귀의 권세를 땅에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국제적으로 자연적, 경제적, 사회적 재난을 허용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 할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3-4).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상한 영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금과 법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욕심 많은 사제들은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며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혹사당하는 노동자들은 조롱 받았고 업신여김을 받았고, 수많은 사람들은 타락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예수님께서 큰 빛을 가지고 어두움의 시간에 오실 것이라는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충족시켜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과 죄악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현 상태를 보시고는, 예루살렘은 곧 황량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시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부짖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회에 70여년 동안 복음을 전해들을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로 부름 받은 성령충만한 증인들이 소망, 회개의 말씀을 전하며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한 갈대인 이스라엘을 그렇게 쉽게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자, 이 그림이 바로 현재 미국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부도덕과 죄악으로 인하여 완전히 멍들고 상해버린 사회. 또한 미국은 현재 우울하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며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입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그리고 카운셀러들이 많은 시대이지만, 도움을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학대, 폭행 그리고 이혼 등의 문제로 우리의 자녀들은 멍들고 상처 입었습니다. 십대 청소년들은 부도덕, 물질주의 등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사탄은 악의 폭풍을 이 나라에 불러일으켜, 꺾이고 멍들고 상한 사람들로 채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러한 멍든 영혼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대형교회들에서 죄와 의에 대하여 선포하지 않는 목회자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크리스천들로부터 오는 수 많은 편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황하고 혼돈한 상태로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된 찬양과 경배는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임재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심령도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제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데이빗 목사님, 제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뉴욕타임즈에서 대형 오순절 교회에 관하여 기사를 내었습니다. 그들의 주요 메시지는 “우리 교회는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거짓된 희망과 일시적인 안심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이사야 42:3). 이 나라의 어느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한때 불로 뜨겁게 타오르던 심지가 그을려서 검게 된 상태를 보고 계실 것입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목적과 마음을 갖고 활활 타오르던 믿음들이 이제는 거의 불도 찾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16년 2월 10일 수요일

심판 받는 아메리카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미국을 아직 심판하지 않으신 겁니까? 왜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노아의 시대에는 120년 동안 경고를 하시다가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판단하시고 홍수를 내리셨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미국의 죄를 오랫동안 견디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미국을 의로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는 미국을 사랑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미국에 닿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는 것에 놀랄 뿐입니다.

사실은 저 또한 오늘날에 심판의 초입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끔찍한 재난들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가 아직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나라는 있는 그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미국은 위기 때마다 넘어지기도 하지만, 오직 은혜로 인하여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혼돈에는 오직 한가지의 해답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에서 입증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이사야 42:3). 미국은 상한 갈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갈대는 길고 속이 빈 줄기를 가졌으며 물가나 늪이 많은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아주 부드러운 식물이기 때문에 큰 바람이나 강한 물살에 의하여 쉽게 굽혀집니다. 그러나 굽혀지다가도 어느 각도에 이르면 완전히 꺾여 물살에 흘러내려가게 됩니다.

잔잔한 날씨에 자라는 갈대처럼, 미국은 한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큰 목적과 희망을 갖고 자랐습니다. 미국의 사회는 하나님을 높였으며, 법과 사법의 기준은 성경이었습니다. 적어도 제 어린 시절에만 해도 학교 교재와 수업은 성경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번영하면서 고대 이스라엘과 같이 오만하고 감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기간에 많은 것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법정과, 학교에서 쫓아내었고, 하나님의 이름은 조롱 받고 멸시당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도덕적인 나침반을 완전히 잃은 결과로 한때 곧게 서있던 미국은 이제 구겨지고 굽어진 상한 갈대같이 되어버렸습니다.

2016년 2월 9일 화요일

메시야에 대한 새로운 계시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1-4).

이 말씀은 온전히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령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감동을 주셔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시작문구는 이렇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이 문구는 듣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메시야에 관한 새 계시를 듣기 위한 준비를 하라.”

이 구절들이 연상하게끔 하는 장면은 아주 명료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도록 강요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떠들썩하고 거창한 소리와 함께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정하고, 애정 어린 구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마태복음 12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의 손을 치유하였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마태복음 12:15).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 대하여 분노로 복수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대하는 세력들을 불을 내리라며 저주하는 제자들 같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불로써 반대하는 세력들을 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마귀와 맞서 싸울 천사들을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다정함이 이사야의 예언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19).

이사야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 나라로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주의적이고 거창하며 떠들썩한 성격이 아닌 개개인의 안에 거하시며 안정감 있고 잔잔한 목소리로 사랑을 얘기하시는 구주로 오실 것입니다.”

2016년 2월 8일 월요일

굶주린 아이들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무리들을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지 않은 아이들을 보살피듯이 섬기셨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피를 흘리는 여인을 치유하시고, 배고픈 무리를 먹이신 순간들에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만들었고,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 때문에 그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또한 개인적으로는, 제 가장 깊은 필요를 예수님께서 충족시켜 주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십대 청소년인 저로서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대대로 내려오는 목회자의 집안에서 자라왔지만, 저의 믿음이 부모님으로부터 반복해서 전해들은 가르침 때문인지 실재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상한 저의 영혼을 만나주시고 내 안에 오셔서는 제가 필요로 하는 사실들을 보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처도 무하마드도 공자도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주셨고, 그것은 나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의 시작에서 경험하고, 축복에서부터 상처와 고난 중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여 주심으로써 우리를 성장할 수 있게 하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육신은 고통과 상함을 요구하는 나눔과 희생을 무척 싫어합니다. 만약에 축복을 기대하며 기독교 자기계발도서 칸에 있는 책을 보러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중에 나누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생각합니다. “나는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조난 당하고, 돌에 맞고, 두들겨 맞으며 나눔에 소명을 두었던 사도바울에 대하여 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과 축복을 나누기 위해 살았던 여러 사도들의 고난 받고 핍박 받았던 내용을 읽었다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긴 글렀네.”

사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예수님의 시대에 이미 입증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려운 진리에 대하여 설교하시기 시작하셨을 때, 군중들은 예수님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한복음 6:66-69).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우리의 삶의 목적과 계획을 우리 스스로 정하여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리하였다면, 우리는 모두 받기만 하고 나누지는 못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목적과 계획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렵고 좁은 길로 인도하실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신다는 확신 아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2016년 2월 5일 금요일

예수님은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교회와 수확을 그리면서 믿는 사람들의 뒤돌아섬을 보셨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퇴보를 보시고 그의 영은 상심할 것입니다. 풍부한 수확하는 대신에, 믿는 사람들이 시간과 힘을 세상적 성공과 물질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이들이 수확을 거두지 못할것입니다. 익은 들판이 잠자듯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천군 천사를 보내 수확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의하시고, 갑자기 수천 개의 천인이 지구에 나타나 초자연적인 빛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영광의 옷을 입은 초자연적 존재가 교회와 공공장소에서 말하는 광경입니다. 그들은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기자들에 의해 인터뷰를 합니다. 십자가, 부활, 승천, 하나님의 사랑과 마지막 올 심판에 해 이야기 합니다. 매끄러운 말솜씨와 확신으로 말하지 때문에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많은 요나와 같이 세상에 경고를 합니다.

조금 지나지 않아 이 빛나는 천사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사로잡혔다고 합시다. 귀한 음식, 물질적인 것, 부와 명예에 넘어갔습니다. 곧 성공, 야망, 부를 쫓게 됩니다. 오래지 않아 서로에게 시기 질투하고 화를 내며, 자만, 교만함을 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오늘날의 교회와 같이 된 것입니다! 제가 드릴 질문은 “이러한 교회가 세상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입니다. 세상에 빠져있는데 어떻게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간증은 김이 빠져버렸으며 모든 초자연적인 능력들이 고갈되어 무기력해지고, 의심만 할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스트레스에 고통받고 기쁨 없을 때 누가 복음을 듣고 싶어 하겠습니까? “예수님 사람은 충분하며 나의 모든 것이고, 지속적인 공급처다”라고 말하면서도, 평안이 없이 제가 항상 두려워 하고 걱정하면 누가 제 말을 믿겠습니까? 그 누구도 제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그리스도인이 다를게 뭐가 있어? 항상 그 상태이면 예수님이 치유자일 것 같지 않은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굴 표정은 중요합니다. 아가서에서 예수님께서 신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십시.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네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2016년 2월 4일 목요일

추수할 시간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라고 선포하셨습니(마9:37-38참조). 예수님 세대의 그때, 놀라운 마지막 영적 추수가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그 추수가 지속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때에 무엇이 “추수할 때가 되었다. 이제 거두는 때이다.”라고 할 수 있게 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영적인 깨어짐을 보신 것일까요? 회당에 회복이 있었을까요?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회심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이 회개로 깨우쳤을까요? 무엇 수확할 때가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요?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어떤 영적 움직임이 있었는지 증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있다면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비웃음을 샀습니다. 나라의 영적 지도자는 그의 진실성과 신성을 의심하며 배척했습니다. 어떤 종교 무리는 예수님을 절벽으로 밀어버리려 했습니다. 예수님도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회개하지 않음을 호되게 나무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군중들은 혼동스러운 절망에 휘말려있었습니다. 성경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라고 말합니다(마 9:36). 여기에 걱정에 빠져 지치고 우울한 사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찾을 수 있는 어디에서든지 도움을 청하며 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은 “들판이 익었으니 수확할 때가 되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수확에 관한 말씀이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합니까? 들판이 익어 추수하기를 기다리는 증거를 보십니까? 어느 나라들이 회개하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교회가 깨어나고, 종교 지도자들이 회복에 목마르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세대에 신성함을 향한 울부짖음이 있습니까?

약간의 예외가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의 때에 그분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안 좋은 조건들에 의해 움직이셨습니다. 보는 곳마다 사람들이 절망으로 힘들어할 때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시간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6년 2월 3일 수요일

추수에 쓰이는 도구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9:36–38).

예수님께서는 “수확을 해야 하는데 일꾼은 적다”라고 간단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일꾼이 적은 것일까요?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신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돈이 예배당을 세우는 데 쓰여집니다.

영혼을 수확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설교하는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일꾼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 진실 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이 주님의 약속은 사실인 것을 이 세상에 증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꾼으로서 우리는 주님의 손에 있는 수확의 도구입니다. 주님의 때에 낫이라는 긴 손잡이가 달린 길고 휜, 한 면이 날카로운 칼로 된 도구가 있었습니다. 대장장이에 의해 주조되며 불에 넣었다 모루대에 올려져 두들겨지고 모양을 잡아갑니다. 이 전 과정이 잘 단면이 날카로워질 때까지 지속해서 반복됩니다.

비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일꾼을 주조하고 계십니다. 단지 죄를 두드려 없애시는 게 아닙니다. 이 과정이 왜 일꾼이 적은지 알려줍니다. 대부분 교회를 가는 사람은 구약의 기드온과 동참하겠다고 자원한 수천 명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안의 두려움이 불과 두드림, 힘든 시간을 극복하지 못함을 아시고 오직 삼백 명만 선택하셨습니다.

오늘날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수확을 부름 받은 사람들은 불 속에서 정제되며 모양을 잡아갑니다. 많은 사람이 견뎌내지 못하는 과정입니다.

2016년 2월 2일 화요일

그리스도의 섬기는 마음

바울은 한때 모든 동료와 바리새인들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자신을 정결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땅에서 명망 있고 다른 이의 눈에 흠잡을데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4-5).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았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삶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노력하고 경쟁하는 것을 내려놓았다. 주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온전히 알게 되었다”라고 계속 말합니다.

한때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야망, 열정, 경쟁의 영, 바쁨들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이 자신을 향한 육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성공과 인정을 향한 열망을 다 내려놓고 종이 되기로 했다.”라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섬기는 삶을 사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섬기는 종의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처 바울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희생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 또한 섬기는 마음을 가진 아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 교회를 위해 종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도바울같이 저도 그리스도의 섬기는 마음을 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그리스도의 마음은 신학을 넘어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 예수님의 관심사에 우리의 의지를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16년 2월 1일 월요일

주는 삶by Gary Wilkerson

아버지는 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나눌 줄 알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주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주는 삶으로 가족의 이름을 물려받으라고 손짓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놀라운 그림을 제시해주십니다. 떡과 포도주를 들어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리는 나의 피니라’(막 14:22-23)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시고 떼어 나누어 주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주님은 부어주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축복되어지고 부서졌으며 나누어졌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필요를 채우는 것이 주목적인 보통 사람과 다른 이를 위해 삶의 목적은 찾고 부어주는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주님 안에서 저희는 ‘받는’ 삶에서 ‘주는’ 삶으로 전환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육적인 영에서 주님의 신실한 영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힘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나에게서 받은 축복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신학체계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거쳐야 할 가장 어려운 전환점입니다. 지난 몇 년간 크리스챤 인기도들은 ‘받는’ 삶에 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주된 주제는 ‘얼마나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축복하기 원하시는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는 본성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국 문을 열어 놀라운 자원들을 저희에서 부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진정 우리의 결혼, 건강, 재정들에 복주고 싶어 하십니다. 저도 그런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받는’ 삶보다 훨씬 축복받는 것이 ‘주는’ 삶입니다. ‘받는’ 것은 쉽지만 ‘주는’ 것은 어렵고 보람찹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고 나누어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종종 첫 번째 관문에서 많은 교회 주저앉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축복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삶이 부서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주는’ 마지막 단계로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 안에 있는 하나님 축복의 목적을 절대 채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by Claude Houde

저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단순히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을 알게 된 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처음 믿음 생활을 시작했을 때, 인내로 저를 가르치고 지도한 사람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사랑하는 저의 영적인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전도적인 교회의 사고방식에서 이러한 태도가 존재했습니다: 문제나 아픔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머리를 들고 당당히 걸어라; 할 수 있다 어서 가라! 그리고 그 태도는 성경 구절과 결합하어 계속 강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항상 기뻐하라…모든 것에 감사하라… 눈을 들어보라… 머리를 들라… 너는 용사다! 앞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가 머리를 높이 들고 어깨를 펴고 눈을 하늘로 향하고 설 때, 하나님의 팔이 저희를 보호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광야에서 가뭄과 슬픔으로 우리의 눈이 땅으로 향하고 지치고 힘없을 때, 이렇게 성경은 쓰여있습니다. “영원한 주님의 팔 안에 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신다” (사 42:3).

이사야(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약속을 주는 그 사람)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둑에서 온종일 노는 아이들은 이 놀이를 알고 있습니다. 신중하게 갈대를 뽑아서, 입김을 불면 높은 소리의 플룻 같은 소리가 납니다. 아이들은 기쁨으로 크게 웃습니다. 연약한 갈대가 찢어져 소용이 없게 되면, 버리고 다시 새로 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가 상해도 버리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네 삶이 그 멜로디, 노래를 잃어버리고 기도와 찬양이 사라지고 밤마다 제단에서 침묵으로 소리 질러도, 나는 너를 회복시키겠다. 내 앞에서 찬양과 기쁨을 되찾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간에 너를 치유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단을 쌓아라 나는 너를 다시 세울 것이다. 아직 타고 있는 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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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6년 1월 22일 금요일

비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찾기

다메섹에 사는 경건한 사람 아나니아에게 성령님이 찾아 오셨다. 성령님은 그로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 했다. 물론, 아나니아는 악명 높은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어떻게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맡겼는지를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도행전 9:11)

한마디로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날 것이다. 그는 네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그는 네 이름까지도 그리고 왜 네가 그에게 보내졌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다시 뜨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 사울은 이 내면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는 이런 환상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이 순수한 말씀을 듣게 되었을까? 그것은 간절한 기도와 간청으로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아나니아를 향한 성령의 말씀들은 어떻게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은 사흘 동안 물과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과만 독대하고 있었다. 그가 원한 모든 것은 주님 뿐이었고, 무릎 꿇고 온종일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내가 신앙의 성장을 이루고 있던 시절에 나를 지도해 주신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길을 만들어 주신단다.” 주님께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로 이 부분을 나에게 가르쳐 주신 시간들이 있었다. 펜실바니아에 있는 젊은 목사님였던 나는 깊은 목마름이 올라와서 기도에 부지런을 내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금 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욱 섬기기 원합니다. 오 주님, 말씀대로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이기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울면서 기도했는데 마침내 주님께서는 나에게 뉴욕으로 가서 갱들과 마약 중독들자들을 위해 사역하라는 사명으로 나를 불러주셨다. 벌써 몇 십년 전 일이다.

하나님께서 뉴욕으로 다시 부르셔서 타임 스퀘어 교회를 시작하라고 하셨을 때도 나는 무릎 꿇고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데이빗, 나는 네가 나의 마음, 나의 생각들을 갖기를 원한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것은 성경공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도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통해서 왔다. 만약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비밀한 곳에서 그와 보낸 시간 때문이다.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종교적인 야심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여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립보서 3:4-6)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전에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을 포함은 많은 나의 동료들은 나를 우러러 봤었습니다. 나는 바래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거룩한 자요, 율법의 능한 선생이었습니다. 나는 이 곳에서 꽤 유명했고 사람들의 눈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로 다가왔을 때,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나의 모든 노력들과 경쟁심 즉 나의 인생에 의미를 주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내 삶에 주님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한 때 자신의 종교적 야심, 열심과 경쟁적 마음과 모든 업적과 분주함, 이 모든 것들은 의로운 것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한 육체의 일들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성공과 인정을 위한 나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린도 전서 9:19)

바울은 예수님 자신이 종의 인생을 사신 것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종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종의 마음을 가진 아들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종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 자신 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안다. 그러나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빌립보서 2: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신학적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생각을 가지기 위해 우리 자신의 의지를내려놓는 것이다.

2016년 1월 20일 수요일

마음을 새롭게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고 담대하게 말했을 때, 그는 “나도 나의 모든 명예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처럼, 종의 역할을 택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7) 그리고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것을 권면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 (고린도전서 2:16)

여러분들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바울이 종이 되었단 말인가? 이전에 믿는자를 박해하던 자이자 살인의 마음을 가진 자가 언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단 말인가?

사도 바울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꼭 집어서 말 할 수 있을 듯하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언제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를 볼 수 있다. 다메섹 직가라는 곳에서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이다.

당시에, 바울은 사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옥에 가두고 고문하기 위해 작은 군대를 이끌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 앞에 나타나서 그를 눈멀게 하신 다음에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가게 하셨다. “그리고 사울은 거기에서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9:9)

그 사흘 동안, 사울의 마음은 새롭게 되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깊은 기도의 시간을 보냈었고, 그의 과거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 일들을 경멸하게 되었다. 그 때가 바로 사울이 바울이 된 순간이다.

그는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잘못된 열심으로 가득차서 지체 높은 종교지도자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셔서 그를 나 자신에게 보여주셨고 나는 나의 지난 삶을 버렸다. 더 이상 인간을 기쁘게 하지는 않고, 종교적 양식들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8)

2016년 1월 19일 화요일

예수님의 마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에베소서 4:23)

이 모든 말씀들은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 –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 – 이 너의 생각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가 구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자만,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 온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곤한다. “나 자신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내 인생에 경험케 하는 모든 경험들을 통해 나의 모든 형상들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립보서 2:7)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을 때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기로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기를 자처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이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제가 갑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은 진작에 이를 결심하셨다. “아버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나의 뜻을 내려놓습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음으로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과 행위는 모두 당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내려놓습니다.”

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 by Gary Wilkerson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1-4)

“나에게 성화와 칭의 둘 다가 필요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 그 둘의 차이는 구속과 자유의 차이이다. 묵은 것에 묶여있는 것과 새로운 인생을 향해 걸어가는 자유함의 차이 같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은 당신의 죄와 유혹 그리고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이겨나가는 것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만약에 성화와 칭의 모두가 필요하다면, 둘 다 같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만약에 둘 다가 필요하다면, 둘은 같은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잠깐만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 모두는 칭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부터만 온다고 믿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성화는 인간에게서부터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만 나온다고 믿는다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거룩하게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입었지만 내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내가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 나를 의롭다 하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나를 의롭다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죄를 속하시고 내 죄를 대신하여 속량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자리에 대신 서시고, 내 죄를 대신 지셨음을 감사합니다. 나를 의롭게 하기 위해 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 보답으로 내가 이제 얼마나 나를 거룩하게 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는 그런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 분 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유일한 근원이 되십니다.

2016년 1월 15일 금요일

예수님으로 족하다라는 살아있는 증거

제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어디서부터 시작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통받고 가난하고 죄악에 억압된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을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누가복음 14:23).

전세계적으로 1100여개의 센터에서 마약/알코올 재활 사역을 하고 있는 틴챌린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고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사역을 하면서 구원의 기적을 목격한 수많은 사역자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확을 시작하셨던 지점에서 똑같이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은 바로 어린 양들이 있는 곳, 사로잡히고 상처받고, 감금되고, 나환자, 맹인, 가난한 사람 그리고 환난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 지점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잘아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말세에 직면하게 된 모든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어떤 세대보다 죄악, 스트레스, 외로움이 만연하며, 재정적 재앙, 걷잡을 수 없는 이혼, 공격적인 동성애, 타락 등이 30여년 전의 최악의 죄인들도 얼굴을 붉히게 할 정도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불로 연단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일꾼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바로 서서 이렇게 말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사탄은 나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을 보십시오. 저는 불을 여러 번 겪고 반복적으로 연단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하고 극복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나누는 나의 삶의 얘기는 바로 예수님 만으로 족하다라는 살아있는 증거가 됩니다.”

2016년 1월 14일 목요일

수확의 때

모세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라고 말하였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수확의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얽매임에서 구원받을 때가 된 것입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5:2). 바로는 거짓 종교와 억압, 압제를 포함하는 사탄의 악한 계통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전에는 어두움의 권세가 흔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아홉 가지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재앙들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에 애굽 사람 모두를 비탄에 빠뜨리게 만드는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지도자부터 평범한 시민들에게 까지 닥친 이 재앙은 그저 자연 현상으로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사자를 보내시어 애굽 가정의 바로의 장자를 포함한 모든 장자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수확이 심판 직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수 백 년 이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예수님께서 이미 심판의 때가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로마황제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백 만 여명의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도시 자체가 불에 타오를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 그 세대에 경고를 하신 것 이었습니다. “보통 수확 전 4개월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너희에게 수확의 때가 지금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큰 환난이 문 앞에 다가왔으니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집중하여야 한다. 이제 나의 일을 마치도록 너희를 보낼 것이다. 수확을 시작하는 때는 바로 오늘, 지금이다.”

예수님께서 다가 올 환난을 어떻게 묘사하셨습니까?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복음 24:21). 그러한 환난이 오기 전에, 우리는 수확의 때에 일을 하여야 합니다.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수확의 법칙

예수님은 번성하는 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인간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재난과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영원을 직면하게 됩니다. 고난과 두려움은 복음을 듣고 수용할 수 있게 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마태복음 9:36-37).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백성들에게 질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여 주셨고, 번성케 하고 땅, 푸른 초장과 젖과 꿀, 과실 등의 큰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너희가 번영하면서 하나님께 저항하고 불순종하였다. 너희의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버린것이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명기 32:15).

성경에 이스라엘이 그 이후에 고난을 겪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겪는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편 107:6).

다윗의 간증도 생각해보십시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편 18:4-6).

고난, 역경 그리고 혼돈은 도움을 찾는 부르짖음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역사에 걸친 패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뉴욕의 쌍둥이빌딩이 무너진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기억해보십시오. 교회들은 굶주린 영혼들로 가득 찼습니다! 양키즈 경기장에서는 기도성회가 열렸고, 나라의 수도에서 국가 의회 지도자들은 기도하면서 “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동안, 온 국가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고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찾게

2016년 1월 12일 화요일

수확의 준비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말세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시작되었고, 다시 돌아오실 때 마침표를 찍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더욱더 가까워진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세의 현상들을 알고 싶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대하여 기근, 지진, 환난, 국가들의 분리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타락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기만 했다는 이유로 혐오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은 차갑게 식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 몇몇은 죄에 대해 무뎌짐으로써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누가복음 21:25-26).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묘사하는 것은 가장 불안하고, 우울하고, 스테레스로 지친 세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예언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대는 불안과 근심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태풍, 지진, 쓰나미, 산사태, 토네이도 등의 엄청난 재난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온 나라가 테러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첫 번째로 많은 사망원인은 심장발작입니다.

거짓 종교,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가 수많은 사람들을 타락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수 만 명의 사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이슬람 지지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국가들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저 의미 없는 부정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격변과 혼란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한복음 4:35).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혼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추수의 때라는 것을 믿고 수확하기 시작하여야 하는 때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수확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한지는 상관 없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강력해 보이는지는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려운 장애물만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추수와 수확의 때가 다가왔노라.”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그리스도, 율법의 마침 by Gary Wilkerson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

우리 삶에서 내려놓아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죄, 습관,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 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부분들은 우리를 쉽게 지치고 곤하게 만듭니다. 모두 내려놓아야 할 삶의 일부입니다.

성령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에 대한 갈망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르는 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말입니다.

사탄의 죄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죄악 중에 살아가고 있으며 생각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죄악을 이기고자 하는 원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결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렬한 의와 정결에 대한 갈망을 심어 주십니다.

로마서 10:3에서 나오는 “의” 라는 뜻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되고, 의로운 행동, 의로운 동기, 의로운 생각, 의로운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옳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의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저 옳은 일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은 동기로 옳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겉으로는 의롭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0:4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이고, 그로 인하여 예수를 믿는 자 마다 의롭게 된 것입니다.

2016년 1월 7일 목요일

하나님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십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들고 어두운 시간 속에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1:3-7)

여러분은 여기 하나님의 목적이 보이십니까? 고통에 처한 우리를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극심한 고통속에 처한 다른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일 입니다: 달련되 자들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위로해주시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통이 더욱 심해질수록,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위로가 더욱더 강력해 진다는 것 입니다.

저희 사역 우편물 수신자 명단에는, 이스라엘과 제시란 소중한 두 형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형제는 100살 이며, 제시는 102 살 입니다. 한 형제는 92세에 은퇴 했으며, 다른 형제는 97세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수년간 저희 설교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이 두분은 혈육이며, 또한 주님안에서 형제 입니다. 두분 다 간증하기를, 일생의 시련을 통해, 그들안에 성령의 기쁨은 깊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한 세기의 참사 – 1930년 대의 대공황, 두번의 세계 대전, 무시무시한 가뭄 을 직접 목격해 오셨던 분 들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었던 시련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그들은 전보다 더 웃으며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시간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단 한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을 견뎌낸 그들의 간증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위로 입니다.

2016년 1월 6일 수요일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 입니다

헌신적이고 경건한 사도바울조차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게 쓴 서신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8)

여기서 사도바울이 그리스어로 쓴 “낙심”을 번역하면, “우린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어요. 우린 살 소망이 끊어질 때까지 낙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곧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린 죽고싶었습니다. 우리가 격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우린 죽고싶었습니다.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들을 했을 거라곤 상상하기 힘듭니다. 어느 누가 사도바울 보다 더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어느 누가 바울보다 더 금식하고 기도하며, 더 많은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까? 이런 바울에게도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낙담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은 어땠을 까요?

몇몇 성경해설자들은 바울이 여러가지 시련을 통해 이렇게 낙담했을거라 믿습니다. 이 많은 시련들 중, 바울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으로, 그는 극심한 정신적 비통에 빠졌을 것입니다. 한때 가까웠던 이 친구들이 그를 배신하고 떠나며, 거짓증언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의 이름을 훼손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극심한 병으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번의 난파를 당하고, 그를 해치려는 자들의 음모도 여러번 겪었습니다. 이 모든 일 위에, 그는 많은 교회들을 살펴야 하는 근심도 있었습니다.

이 일들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련들을 합해도, 여전히 바울이 느꼈던 그 깊은 낙담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기록하기를, “ 나는 극심한 고통에 빠졌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거라 생각지 못 했습니다. 이 고통이 나를 죽일수도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사도바울은 그 고통속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곡적으로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지긋지긋한 시간을 절대 잊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고후1:10)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셨고, 또 다시 우리를 구해주 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그분에게 두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2016년 1월 5일 화요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우울증을 격어본 적이 있습니까? 걱정 근심에 시달려 잠 못 이룬적이 있습니까? 너무 힘들고 침체되어, 그 어느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까? 인생에 실패했단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적이 있었습니까?

저는 육신적인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신적인 질병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아닙니다. 저는 이따금 뜬금없이 나타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크리스천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입니다. 그들의 우울증은 어떤 한가지 이유보단 다양한 이유로 다가오게 됩니다. 때로는 모든 방면에서 공격이 이루어지며,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 절망외에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윗 글에 공감 하신다면, 시편 77편은 여러분을 위해 집필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시편 77편은 여러분에게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레위 지파 출신인 아삽의 의해 작시되었습니다. 아삽은 찬양자 였으며,다윗의 성가대 지위자 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총11편의 시편을 작시했으며, 그의 시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관한 내용이었으며, 저에게 그는 설교하는 평신도와 같습니다.

아삽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뒤, 시편 77편을 작시 했습니다. 그의 상태는 너무 나빠져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위로해줄 수 없었습니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77:2) 이 경건한 자는 너무 절망하여, 아무도 그의 비통에서 그를 건져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삽 자신도 어쩔줄 몰라 한마디 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시77:4)

하지만 아삽은 기도하는 자 였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77:1)


제가 확신하기에는, 아삽은 아마도 비슷한 상황을 격었던 다윗의 증언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시편 34:15) 시편34편을 통해, 다윗은 이미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34:4,6)

2016년 1월 4일 월요일

그분은 우리안에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은 – 그의 순정, 거룩과 전능 같은 우리와의 차이가 들어납니다. 그의 임재안에 거하는 천상의 생명체들도, 그를 장엄하고 분리된 자로 여깁니다. 지금도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임재안에 있으며, 밤낮으로 쉬지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멈추지 않는 찬양은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계5:12)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의 영향입니다: 그분은 모든 상황과 모든 순간 우리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십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세상은 나를 못볼지라도, 너는나를 볼지라.”

유태인 리더들은 하나님을 특별히 분리된 분으로 섬겼지만, 하나님의 다정함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을때, 그들은 분노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일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담대한 가르침을 한걸음 더 진보 시키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또 곧 너희 안에 거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14:23)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다락방 제자들 가운데 계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조와 똑같이, 하나님을 본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살아 남을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의로운 모세도 하나님의 한 부분만을 봤기에 살아 남을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때, 이렇게 생각 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야. 그분은 너무 거룩하시고, 또 엄청난 분이신데 어떻게 내 안에 거하실수 있겠어. 절대 그런일은 없을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두가지 진실을 맡기셨습니다 : 하나님은 정녕 거룩하시고 순전하시며, 그는 그의 창조물인 우리안에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이제 막 시작하신 교회에 주신 가르침을 생각해보세요. 그분은 우리를 위한 집을 준비하시기 위해 떠나셔야 한다는 말씀으로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절인 아름다움 입니다. –거룩하고 순전하며, 동시에 친밀하고 다정하십니다. 그는 우리 위에 계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찾을 수 없는 평화를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