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31일 수요일

전쟁에서 영리함

적대 세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더욱 번성합니다. 거친 폭풍이 나무에 몰아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이 나무를 뿌리 채 뽑아 날려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가지를 부러뜨리고 잎사귀를 날려 버립니다. 뿌리를 느슨하게 만들고 봉우리들이 바람에 날아갑니다. 그래서 폭풍이 지나간 후 소망이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나무 둥치 주위에 틈새를 벌려놓은 바로 그 폭풍이 뿌리가 더욱 깊이 박히게끔 도와주었습니다. 그 나무는 이제 영양분과 수분을 얻을 수 있는 새롭고 더 깊은 출처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죽은 가지가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봉우리들이 날아가긴 했지만 다른 봉우리들이 더욱 풍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실은 이제 나무가 더욱 튼튼해지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라고 있습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테니까요!

당신은 현재 폭풍가운데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을 난폭하게 흔들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서 당신은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이여, 두려워 마십시오. 이 태풍의 와중에서 당신은 영적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더욱 깊어지는 겸손, 죄에 대해 더욱 쓰라린 애통과 슬픔, 그분의 의에 대하여 더욱 심화된 굶주림을 계발하시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험이 풍부한 십자가 군병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전쟁의 흉터가 있는, 그러나 전쟁에서 영리하고 용감한- 때로 당신은 자신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분은 주권적으로 행동하셔서 언제라도 당신의 고투에서 당신을 뽑아낼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 안에 그분을 향한 더 깊은 갈망을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은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이루는(worketh, KJV) 줄 앎이로다” 이루다는 성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4:17에서 읽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worketh, KJV) 함이니” 이 구절에서 이루다는 로마서 5:3의 이루다와 같은 것입니다.

2008년 12월 30일 화요일

영적 성장에 대해 모든 크리스천이 알아야 하는 것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살후1:3).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에게 바울은 얼마나 대단한 칭찬을 하는지요! 그가 말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나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서나 너희가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놀랍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의 영적 성장에 대해 자랑한다. 너희로 인해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지!”

이 짧은 구절에서 바울은 연합하여 사랑가운데 성장하는 신자들의 몸에 대해 놀라운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자라고 (groweth exceedingly, KJV)"에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는
”다른 것들 위로, 넘어, 그 위로 자라다“라는 의미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조직체로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은 다른 모든 교회를 능가했습니다.

명백하게,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단지 그들의 믿음을 붙들고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우고, 움직이고,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의 삶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모든 교회의 화제 거리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들었던 설교가 그들이 그리스도와 더욱더 깊이 동행하도록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육적인 야망을 녹이고 그리스도답지 않은 습관들을 뉘우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의 성령께서 모든 문화적, 인종적인 장벽을 허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교육을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누구든지 감싸 안는 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 서로를 아껴주며 서로를 극진히 배려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마시고, 양식을 먹고 있다면 사는 동안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나는 우리 회중 모두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알고 있듯이 “더욱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름부음 받은 설교는 언제나 성장을 이룹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도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이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성령께서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시키시며 항상 일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육을 죽이고 우리 속사람 안에서 순결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서 분노, 원한, 적의 그리고 모든 악한 것을 제거하기위해 일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서로를 향한 친절, 부드러움, 용서를 형성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이 우리 주님께 합당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성장 시켜 가십니다!

바울은 한층 더 우리를 촉구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고전11:28). 여기서 살피다로 쓰인 헬라어는 “면밀히 조사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고 있는지 네 자신을 시험해 보라.” 우리는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변하고 있는가? 더욱 사랑스럽고 마음이 온유해지고 있는가? 내 가족과 친구들을 경건하게 존중하며 대하는가? 나의 대화는 더욱 의로워지고 있는가?”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때로 우리는 성장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어떤 신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삶에서 확실한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성령께서 그들을 위해 원수를 물리치셨는지 당신에게 간증하고 당신은 그들과 함께 그들의 승리를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크리스천들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는 동안 영적인 진전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전심으로 주님을 구합니다. 그들 안에 영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안에 어떤 성장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런 신자 유형의 한 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 행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게 진전이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은 그리스도답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마다 종종 내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크리스천이었다. 언제 쯤 배우게 될까?”하고 궁금해집니다.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에 대한 바울의 빛나는 평가를 들었을 때 매우 놀랐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살후1:3 참조).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희가 지극히 잘 성장하고 있다고요? 바울사도가 농담하시는군요.”

하지만 바울은 영적 성장이 은밀하고 감추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꽃이나 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게 자라는 것에 비유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 14:5-6).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백합화에 가거라! 그들이 자라는 것을 보려고 애써 보아라. 하루해가 질 때 까지 아무것도 못 볼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알아두어라. 나는 내가 내리는 이슬로 매일아침 백합화에 물을 주고 있고 그것은 자라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감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을 때, 끊지 못한 죄로 인해 전혀 고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간증 합니다. “내가 예수께 나오자마자 주님이 내게서 그 유혹을 제거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자유롭습니다.” 이전의 마약 중독자들로서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이 개종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이 미워하고 다시는 보기 원치 않았던 옛 부패성이 그들 안에 다시 풀려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싸워 봐도 하나 남은 정욕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낙담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혼은 “언제까지 입니까, 주님? 언제 이 쇠사슬이 끊어집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귀가 그들에게 와서 “너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 하에서 너는 절대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게 당신을 위한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의 고투 중에 당신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당신의 고투로 인해 훌쩍 훌쩍 성장하는지도 모릅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당신은 폭풍을 뚫고 나올 때 더욱 강해져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원수와 전투 중일 때 당신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능력을 실습하고 동원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나약하게 느껴진다 해도 그 은혜와 능력은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당신의 기도가 더욱 급박해지고, 둘째, 당신의 모든 교만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폭풍은 실상 당신 삶의 모든 분야에서 당신이 “영적 경비”를 서게끔 만들어 줍니다.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그분의 사랑을 알고, 믿고, 계속 신뢰 하십시오

누구든지 시련이나 시험받지 않고 성령 안에서 순행할 때는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특히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지 아주 간단하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간단히 말해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기대하는 상태로 머물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매일 새롭게 되기를 우리가 기대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사랑하셨고 항상 우리를 사랑하실 것을 아는 지식 가운데 매일 매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감정의 오르내림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들락날락합니다. 우리가 잘했을 때만 그분의 사랑 안에 안전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었을 때나 시련을 겪을 때 또는 그분을 실망시켰을 때는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때 특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이런 성경 말씀들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떤 시련에 직면했든지, 절대로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네가 능동적으로 나의 사랑을 신뢰하면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대로 네가 사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대해지고 번창했지만 온갖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정욕이 시큼해져버렸습니다. 자신들의 관능적인 식욕을 채우는데 쾌락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곧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돌이켜 주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분의 사랑의 마음이 그들에게로 향하셨습니다. 그분은 교정하시는 채찍으로 그 백성을 징벌하셨고 이스라엘은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렘31:18-19).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20절).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3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만 할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징벌하고 너에게 가혹한 진리의 말을 해야만 했다. 그때에도 너는 나에게 죄를 범하고 그리함으로써 내가 너에게 내려준 은혜와 자비를 경멸하였다. 너는 내 사랑에 등을 돌리고 나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창자가 너에 대한 동정심으로 들끓었다. 나는 너의 고투 중에도 너를 기억하였고 너를 반드시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가 기꺼이 너를 용서하고 회복시킬 것이다.”

2008년 12월 25일 목요일

영광 중에 동행하기

다가오는 시련의 시기를 지탱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당신에게 높고 고상한 개념처럼 들려서 신학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는 모든 진실한 신자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을 붙듦으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주님의 성품과 존재에 관한 계시입니다. 당신은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를 일견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이전에 주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말씀 외에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모세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 더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간청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모세를 데리고 바위틈에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분이 그분의 모든 영광 중에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출 34:6-7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일에 있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은 인류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이 모세에게 나타내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그분의 위엄, 광채, 능력과 주권 또는 그분의 백성가운데 나타나심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의 결과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분이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그 영광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자비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그분께로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영원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는 그것을 받는, 그리고 또 이해하기위해 기도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모세는 주님을 율법과 진노의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분께 탄원하고 부르짖고 간구하면서 그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대면한 관계의 기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으로 보게 되자 모세는 더 이상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배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출 34:8). 그는 하나님이 단지 그를 두려워 떨게 만들었던 천둥, 번개, 귀를 찌르는 나팔소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셨고 그분의 성품은 인애와 자비였습니다!

성경이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진리를 아시겠습니까? 진정한 예배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보고 압도당한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 자신, 그분의 선하심, 자비, 용서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심에 대한 계시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찬양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바로 이 그분에 대한 이러한 놀라운 진리에 기초를 두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되면 우리의 예배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 삶의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분을 더욱 닮아가도록 “영광에서 영광으로” 우리를 변화 시키며 우리의 얼굴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새로운 계시 하나 하나가 초자연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2008년 12월 24일 수요일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그는 기록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우리는 어떻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얻었습니다.

헌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우리의 본보기로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3:16). 예수님 안에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가 여기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이 구절의 후반절은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에 대해 말해줍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도록 인도합니다.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형제자매를 위해 진심으로 내어놓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요한은 외국 땅에서 순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기를 기증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를 대신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한분만이 그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형제에게 생명과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오직 한 유형의 크리스천은 죽은 자입니다. 그러한 종은 이 세상에 대해, 즉, 자신 전체, 자아 그리고 야망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 “죽은” 크리스천은 성령께서 그의 영혼의 영적 재고를 인수하시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안의 부패와 불경건함을 꿰뚫어 봅니다. 그래서 자원하여 “주님, 저를 소멸해 주십시오. 전부 가져가십시오,”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어야만 그의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최근 나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구절로 인도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20-21).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나는 성령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이빗, 너는 아직 내 사랑의 충만과 기쁨 속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네 신학은 올바른 것이지만 너는 아직도 내 사랑가운데 머무르는 환희의 절정과 안식을 체험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너는 발목까지만 그 안에 담그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안에서 헤엄칠 만한 바다와 같은 내 사랑이 너를 위하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주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확신 안에 머무르는데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거듭날 때 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3장16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진리를 파악할 때 그것은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당신은 갑자기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길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이방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독생자를 나를 위해 희생하심으로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배운 크리스천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무언가 알고 있지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는 거의 구하지 않습니다. 사실인즉,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아내라고 하면 단지 몇 개만 지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냉랭해지고 게을러집니다. 사탄의 공격에 맞서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성령의 계시를 통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요17:24). 얼마나 놀라운 생각입니까!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 주목할 만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21,23). 또한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내 지체로 이끌어 들이는 사람들을 사랑하실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함축된 의미는 아버지께서 영원이전에 예수님을 사랑하셨을 때 우리도 또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속에서 인간이 아직 하나의 생각에 불과했을 때, 주님은 이미 우리의 신체조직을 세고 계셨고 우리의 구속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셨을까요? 그분이 존재하신 후부터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성품이십니다. 그분은 죄인인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이 태중에 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언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기를 멈추실까요? 자신의 독생자 사랑하기를 멈추실 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실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오래전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롱아일랜드에 소년의 집을 시작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이 일 배후에 주님이 계심을 느꼈습니다. 헌데 그 집을 운영하는데 있어 주정부가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규정을 적용했기 때문에 단지 18개월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집을 운영하던 짦은 기간 동안 우리는 네 명의 소년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을 닫고 난 후 그들과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나는 항상 이 시도가 이제까지 가장 실패작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30여 년간 나는 하나님이 왜 이 계획을 진행 시키셨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최근, 클리포드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데이빗 형제여, 나는 롱아일랜드에 있던 집으로 보내졌던 네 명의 소년 중 한사람입니다. 당신의 집 관리인들은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장막 부흥회를 열고 있는 교회로 갔습니다. 나는 너무도 마음에 원한이 쌓였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그곳에서, 장막아래서, 성령이 내 마음을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설교자가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모든 세월동안의 고통, 혼란, 절망이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35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를 전도자로 부르시고 전임 사역자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내내 감사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돌보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당신께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사람의 편지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없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 소년의 집은 실패작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길 잃고 혼란에 빠진 유태인 소년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12월 19일 금요일

사탄은 미묘한 계략을 사용합니다

“앗수르왕이....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왕하 18:17). 앗수르사람들은 오늘날의 “번영 지침서”를 상징합니다. 마귀는 당신의 성벽을 둘러싸고 자신의 군대를 행진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능력 있고, 아름답고,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그들을 볼 때 당신은 마치 수감된 자처럼 벽에 가로막힌 듯 느낄 것입니다!

이 죄인의 첫 번째 계교는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신자의 결단에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술취한 외교사절”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랍사게는 왕의 대사였습니다. 그는 거룩한 자를 조소하며 조롱했습니다(왕하 18:19-20 참조). 조소의 내용은 “하나님은 이 환난에서 너를 구해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침몰하고 있다! 너는 정말 난관에 봉착했고 네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한 번 더 비틀어 놓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 배후에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당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사자는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왕하 18:25)고 주장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수하신다, 당신에게 진노하셨다고 당신을 설득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교활한 거짓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고 환난과 애통에 처하도록 넘겨버렸다고 믿도록 만듭니다. 그는 당신의 모든 문제가 과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믿지 마십시오! 사탄은 당신을 파멸시키려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원자시오, 요새이십니다. 이사야는 그분이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사61:3)고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도여, 당신은 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기 때문에 단지 대적의 거짓말의 집중 사격을 받으며 공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1-33).

에녹은 언젠가 예언했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14). 성경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 왕들과 제사장들이며 사탄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나아가는 이 수만의 무리를 대표한단고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극심하게 미워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하여 전쟁을 벌입니다(계12:17 참조).

우리는 다가오는 것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불법의 홍수가 하나님의 백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적 전투를 치르며 우리 생애를 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기로 결단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의 모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할 것을 보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싸우는 하늘의 전 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은 성령의 투쟁력을 주셔서 우리 각 개인이 세상과 지옥의 무리를 향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 37-39)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갈망하는 자들의 전투 함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남녀 불문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제물이 되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지옥의 악한 계략의 목표물이 될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 안에서 행하고자 마음을 정한 사람들을 향해 대적하기 위해 지옥의 무리들이 풀어 놓아질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기만 프로그램에 당신이 실제로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괴롭히고 방해물을 설치할 것입니다. 당신은 전쟁을 그만두고, 포기하고, 중도 하차하여 둔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방황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마귀에 계략에 대항하여 믿음 가운데 일어나 싸움을 계속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사탄은 진정으로 주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2008년 12월 17일 수요일

끝까지 해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14:28-30).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중에서 다수가 끝까지 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돌이키는 고로 경주를 마치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붙들려는 의도로 충만한 채 시작하여 성숙한 제자로 성장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다가 그만 흘러 떠내려가 버리는 것이 신자의 가장 비극적인 상황 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먼저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초를 세우고는 준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경주를 마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지요!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순간순간마다 변화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바로 이 메시지를 읽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잠시 쉬거나 뒷걸음질 치고 있는 중 인 것으로 압니다. 작은 걸음인 듯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급격한 하강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런 경우에 처해 있다면 성령이 되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회개와 자기 부인과 항복으로 돌아오라고. 바로 이 순간, 시간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붙들려고 한다면, 지금 하십시오. 끝까지 해내십시오!

2008년 12월 16일 화요일

사랑과 미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희랍어로 미워한다는 말은 “비교해서 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우리의 세상에 속한 모든 애정은 근접할 수 도 없을 만큼 그분에 대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열렬하며 절대적인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달콤한 임재로 나아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압니까? 단지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완벽하게 사랑하시는 것에 감사하여 그분께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가운데에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주십시오, 만나주십시오,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를 사용해 주십시오, 보호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성경적일지 모르지만 초점은 우리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조차도 이기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알 수 있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봉사를 복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은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다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이 되어 가는지에 대해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사역의 문이 닫혀서 상심한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선반에 얹어 두고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린 듯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것이 주님께 더욱 유용하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은밀한 골방에서의 기도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역을 할 때 보다 더욱 주님께 유용할 수는 없다고 나는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끝없이 탐색할 때, 그때가 바로 우리가 가장 유용할 때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하기보다 사랑의 교제 가운데 그분과 함께 홀로 있는 것이 더욱 더 하나님을 송축하고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도록 열어 주시는 사역은 모국에서든지, 외국에서든지 우리의 그분과의 교제로부터 인위적 노력없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전 세계를 얻어드리는 것 보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통째로 얻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것은 영혼을 얻기 위한 열정적인 수고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령이 복 주시는 복음전도는 교제 가운데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자주 기도가운데 함께하는 증인에게 지혜와 성령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2008년 12월 15일 월요일

그분의 식탁으로 나아옴

오래된 복음성가 하나가 나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식탁을 베푸셨네/그곳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이 먹는다네/그분은 택하신 백성을 초청 하신다네/와서 먹으라고.”

얼마나 흥겨운 전망입니까! 주님은 천상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를 위하여 식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눅22:29-30). 주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도 또한 이 식탁에 앉혀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고전 5:8)라고 가르칠 때 그는 우리가 천상에서 주님과 함께 그분의 왕의 식탁에 자리를 배정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명확히 이해하게 만들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항상 오십시오. 당신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말을 하게하지 마십시오.”

슬픈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명절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들려져 천상의 장소에서 그분과 함께 앉음으로 우리에게 수여된 위엄과 영예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져서 그분의 식탁에 앉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제보다는 봉사를 통해 영적 기쁨을 끌어내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덜 알게 되는 주님을 위해 더욱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분의 일에 바쳐 누더기가 되도록 분주한 반면 명절은 거의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분의 종, 사역자, 목자들로부터 다른 모든 것보다 구하는 것은 자신의 식탁에서 나누는 교제입니다. 이 식탁은 영적으로 친밀해지는 장소며 매일 베풀어집니다. 명절을 지킨다는 것은 계속해서 양식, 힘, 지혜와 친교를 위해 그분께 나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사건 이후 모든 영적 거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식탁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광대함 가운데에서 자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직도 자신들이 그분과 그분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애통하며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너무 왜소하고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악한 세대의 복잡하고 날로 늘어가는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대함”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단지 이세상의 문제를 풀어주시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의 광대함 속으로 삼켜버리십니다! 그리스도의 광대함에 대한 계시가 늘어나는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마귀도, 지구상의 어떤 권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가 크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분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경계가 없으시고, 측량할 수 없으며, 무한 하시고 거대하신지에 대한 계시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문제들에 의해 결코 다시는 압도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처럼 날로 증가하는 계시를 갖기로 결단했습니다. 사실인즉,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소유했던 것 모두가 계시에 의해 왔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그는 배웠고 성령에 의해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개종한 후 삼년 후에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만나 교제하였고 선교 여행을 계속하기 전 단지 15일 동안만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말했습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엡3:3). 성령은 하나님의 깊고 은밀한 비밀들을 아시므로 바울은 지속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엡3:8)을 이해하고 전파하는 은혜의 선물을 얻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기 위해 상반되는 목소리들을 걸러내는 데 만족하지 않는 신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한 계시를 갈망하기 원하십니다. 깊고 인격적인 친밀함,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2008년 12월 12일 금요일

믿음의 전쟁터로부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무엇인가를 나누어 줄 사람을 찾는 낙심한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명백히 말합니다. “내가....예루살렘에 올라 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갈2:1-2). 바울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신비를 나누고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경건한 사람은 자신만의 충만하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계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파하는 교리는 서재에 처박혀 책과 주석을 공부하여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차세대들이 내 연구 업적을 읽고 배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신학적 진리를 몽상해낸 고립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어디서 어떻게 그의 서신들을 썼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어둡고 습한 감옥 안에서 썼습니다. 채찍질 당한 후 등 뒤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썼습니다. 다시 한 번 파선한 배에서 살아남아 바다에서 기어 나온 후에 썼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모든 진리와 계시가 믿음의 전쟁터로부터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위하여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조난당해 본적이 있는 모든 선원에게, 아무런 소망 없이 갇혀 있었던 모든 수감자들에게, 죽음을 직면해 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권위를 갖고 전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검증 받은 고참병으로 만들고 계심으로 나는 들을 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탄의 권세에 넘겨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당신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시련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구히 당신 안에 형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결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얻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현재 있는 곳, 유쾌하든지 불쾌하든지 상관없이 당신의 현재 상황가운데에서 와야만 될 것입니다.

나는 바울의 영성에 있어 가장 큰 비결의 하나는 그가 어떤 조건에 있든지 불평하지 않고 수용하였다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자족하다의 헬라어 의미는 “피하다”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불쾌한 나의 상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나는 그것들을 껴안습니다. 주님과 함께 했던 지난날을 통해 나는 그분이 내안에서 무언가 영원한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이 감당할

2008년 12월 11일 목요일

현 세대는 견딤에 대해 모릅니다

견디다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실행하다, 포기하지 않고 고통을 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간략히 말해서 지탱하다 또는 인내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요즘 세대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중도 포기자들입니다. 그들의 배우자, 가족,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포기 합니다.

이 사안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그리고 덧붙여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일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0-25).

사도 바울은 명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마지막으로 주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이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결혼 생활이 혼란에 빠졌습니까? 직장이 위기에 처했습니까? 친척이나 집주인, 당신을 배신한 친구와 대립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소망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의 고난이 결코 완화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계시, 성숙, 깊은 믿음, 흔들리지 않는 평강도 결코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면, 진정 나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한다면, 그렇다면 나의 주변 상황과 싸울 수 없다. 나는 견뎌내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내가 고난 가운데서 매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는 것을 내게 줄 수 없다. 그분은 나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다.”

바울은 생애는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호흡 했습니다.” 진실로 영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성령께서 그 종의 내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천국 미풍을 쏟아내십니다. 이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생의 가장 힘든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미소 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그리스도의 개인적 계시

당신이 설교자이거나, 선교사, 교사라면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것은 사람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것입니까? 어떤 위대한 교사의 계시를 재탕한 것입니까? 또는 당신 자신만의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계시를 체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까? 하늘이 당신에게 열렸습니까?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아주 작지만 광대한 원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 전 존재가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하여 요약되었습니다. 오래전 나는 성령이 그리스도 한분 만 전파하는 사역으로 나를 이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오직 그분만 전파하기를 갈망했던지요! 그러나 내 마음은 집중하지 못했었고 그 원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결과 나의 설교를 지탱해 나갈 계시가 흘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기위해서는 성령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계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부한 메시지를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아버지의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탐색한다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샘솟아 흐르는 물이시라면, 우리는 그 흐르는 물로 채워질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계시는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에게 나타내 주실 것을 믿고 신뢰하며 기꺼이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주님의 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다만 그에게 계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계시되었다고 말했습니다(갈1:16 참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도자의 삶과 사역에서 이미 능력을 발휘한 말씀이 아닌 것을 전파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어떤 얄팍한 사람들에게는 괜찮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하지만 그 계시가 우리 안에 깊은 변화를 가져올 때에만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또한 개인적인 염려를 피력합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확실히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의 안전을 결코 의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버림을 당하다”는 단어의 희랍어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완전한 마음은 의뢰합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22:4-5).

의뢰하다라는 말의 히브리 어근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다”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마치 서까래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뛰어 내려라!”하는 말을 듣고 순종하여 아버지 품안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그런 자리에 있습니까? 모서리에 밀려 휘청거리며 예수님의 품안으로 자신을 던지는 선택 외에는 없습니까? 당신은 그저 상황에 굴한 것일 뿐 그것은 의뢰가 아닙니다. 그것은 체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뢰는 수동적인 포기와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갈망할 때 그분을 의뢰하는 것의 기초가 튼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에 진정으로 그분을 의뢰할 수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대국을 통제할 수 없기에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께 더 가까워지고 그분을 더욱 잘 알게 되면서 이것이 바뀌어집니다. 이 말은 우리가 속수무책일 때 다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과 아주 가깝게 동행하기 시작하므로 시련이 닥쳐오고 있다는 그분의 경고를 듣습니다.

의뢰하는 마음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모든 발걸음은 주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다. 그분은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다. 내게 고통과 유혹과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결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위한 영원한 계획과 목적이 있으시다. 내 머리의 모든 머리카락을 세어놓으시고 나의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에 내 모든 신체 부분을 조성하셨다. 내가 그분의 눈동자이기 때문에 내가 앉고 서고 눕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단지 나만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주관하신다.”

완전한 마음은 또한 깨어진 마음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깨어짐은 슬픔과 통곡 그 이상, 부수어진 영 그 이상, 겸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깨어짐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맡긴 가장 큰 능력 - 죽은 자를 살리고 병과 질병을 치유하는 것 보다 더욱 큰 능력을 마음 가운데 방출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폐허를 회복시키고 하나님께 특별한 종류의 영광과 명예를 가져오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아시다시피, 깨어짐은 부서지고 무너져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5:24). 동행하였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 의미는 에녹이 하나님과 팔짱을 끼고 계속하여 그분과 대화하며 더욱 가까워지며, 오르내리고, 들고 나며, 오고 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녹은 365년 또는 일 년의 날 수 만큼의 해를 살았습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신자를 봅니다. 그는 성인으로 보낸 매해의 365일 동안 주님과 팔짱을 끼고 동행하였습니다. 주님이 바로 그의 생명이었기에 그는 인생의 종점에서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히 11:5).

에녹처럼 인생에서 옮겨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향권에서 옮겨 집니다. 그의 흑암의 왕국에서 건져져 그리스도의 빛의 왕국에 놓여집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에녹은 사악한 사회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행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광야 동굴에 숨어살던 은둔자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문제꺼리와 부담을 지고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식이 있고 의무와 책임들이 있었던 인생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거룩하기 위해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는 이 구절이 에녹의 옮겨짐, 즉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더 한층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쓰인 것처럼 있지 아니하였더라 (he was not) 라는 구절은 또한 “그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he was not of this world)”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영과 감각들에 있어서 에녹은 이 사악한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는 땅의 것에서 마음이 점점 멀어졌습니다. 바울처럼 그는 이 땅의 삶에 대해 매일 죽었고 그의 영 안에서 천상의 영역으로 올려 졌습니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에녹은 자신의 모든 책임을 이행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일하고, 사역하고 거주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당면한 문제들 그 어느 것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1:5은 명백히 말합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어떤 면이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의 안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형의 믿음을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개의 구절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5-6). 뒷 구절은 우리가 자주 듣는 구절입니다만 그 앞의 구절과 연결해서 듣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 또

2008년 12월 5일 금요일

전리품을 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그 일례

다윗과 그의 군대가 집을 떠나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그의 마을 시글락을 침략했습니다. 이 약탈을 목적으로 침략한 자들은 마을 전체를 불사르고 여자와 아이들 모두를 잡아갔습니다. 다윗이 돌아왔을 때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대단한 영적 전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을 대적하는 공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항하는 총력전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마귀는 하나님의 씨를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영적 전쟁의 초점입니다. 원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씨를 파멸시키려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실은 변치 않았습니다. 사탄은 아직도 하나님의 씨를 파멸하려고 다니며 그리스도의 씨인 우리를 공격함으로써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하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다윗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올바른 것을 알았고 주님 안에서 자신을 격려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즉시 이 믿음의 사람은 아말렉 사람들을 뒤쫓아 갔습니다. 그는 금세 그들을 따라잡아 모든 사람과 잃어버렸던 소유물들을 되찾았습니다(삼상 30:19-20 참조). 다윗은 시글락에서 탈취 당했던 물건들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이 약탈한 다른 모든 것도 되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전리품을 가지고 다윗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유지하는 데 이것들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다의 장로들과 그와 그의 부하들이 숨어있던 마을들에게 이 탈취물을 선물로 보냈습니다(삼상 30:26, 31 참조). 이것이 우리의 영적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의 또 다른 일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만 전리품을 취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획득한 자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 위함입니다.

기근 때에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아람 군대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굶어죽기를 기다리며 성 주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성안의 상황은 최악이어서 나귀머리 하나가 은 80 세겔에 팔렸습니다. 상황이 너무도 다급했던지라 여인들이 그들의 자녀를 삶아 먹기위해 내어 놓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완전히 광란의 지경이었습니다(왕하 6 참조).

성 밖에 살던 나병환자 네 사람이 마침내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왕하 7:3-4). 그리하여 그들은 아람 진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해보니 모든 것이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장막을 수색해 보았으나 모두가 도망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7:6-7).

나병환자들은 이것을 깨닫자 진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신 다음 성으로 돌아가 외쳤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 믿기 어렵겠지만 아람군대가 진을 버리고 도망쳤다”(7:10 참조). 주님은 전체 상황을 180도 전환 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전리품을 취하셔서 지상에서 그분의 뜻을 유지하시며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기운을 차리게 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당신이 현재 치르고 있는 전투의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합니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는 원수의 모든 세력을 이기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렇다, 너는 승리하며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를 승리자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내 왕국을 위하여 네 안에 더욱 위대한 목적을 고안하고 있다. 너는 네가 처리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이 전투에서 나올 것이다.”

2008년 12월 4일 목요일

영적 전투의 전리품들

“그들이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 중에서 구별하여 드려 여호와의 성전을 개수한 일 과”(대상26:27). 이 구절은 심오하고 인생을 변화 시키는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전쟁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략하여 얻은 물건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개수하는데 바쳐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 배후에 있는 강력한 진리를 파악한다면 왜 주님이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격심한 영적 전쟁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한 번 구원받으면 그들의 시련은 끝나고 인생은 순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투를 허용하실 뿐 아니라 우리 삶속에 이 전투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은 무엇일까요? 전리품들은 전쟁에서 승자가 노략하고 약탈한 물건들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4장에서 여러왕들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했을 때 전리품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침략자들은 주민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했습니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창14:11-12).

아브람이 그의 조카 롯이 사로잡힌 것을 듣고 하인 318명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적을 추격하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침략자들을 따라잡아 “그들을 쳐부수고....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록솨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14:15-16).

승전한 아브람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는 기쁨에 찬 사람들과 온갖 물건들이 산더미 처럼 쌓인 수레들의 긴 행렬에 앞장 서 있습니다. 그 길에서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람은 마음이 감동하여 자신이 노략한 모든 물건의 십일조를 이 왕에게 주었습니다(14:20 참조).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7:4).

하나님이 우리가 붙들기 원하시는 원칙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승자로 만드는 것, 그 이상의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전쟁에서 전리품, 물건들, 영적 부요를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수레에 가득한 자원들을 가지고 전쟁에서 벗어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저자 임의 강조)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들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의 생애 말년에 제정한 법령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좌를 계승하도록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신성한 질서를 세우고자 나라의 지도자들을 소집하였습니다. 이 거룩한 역사를 위해 어떠한 자원을 사용했습니까? “그들이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 중에서 구별하여 드려 여호와의 성전을 개수하”(대상 26:27)였습니다.
이 장면을 그려보겠습니다. 승전할 때 마다 다윗은 전리품을 거둬들여 금, 은, 놋, 목재, 셀 수도 없이 많은 돈을 풍성하게 쌓아 두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성전을 세우기 위해 이 전리품들을 자원으로 사용하려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성전을 개수한다고 말할 때,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집을 수리하고 건축된 부분을 보강하고 통합하다”입니다. 이러한 자원들은 성전 본래의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백성, 즉 당신, 나, 전 세계에 있는 그분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그리고 옛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주님은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통하여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시련이 우리의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전투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부요, 자원들, 부를 따로 떼어 두십니다. 우리의 전쟁으로부터 물건들의 보고 전체를 쌓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전리품들은 그분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바쳐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오랫 동안 과거 전쟁들에서 취한 전리품들로 성전을 잘 유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이 모든 시련으로부터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걸쳐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한 공급”의 원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3일 수요일

영적인 것은 복제 불능입니다

이곳 뉴욕시의 거리에서는 로렉스 시계를 15불에 살 수 있습니다. 뉴욕 사람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시계들은 진짜 로렉스가 아닙니다. 다만 진짜를 모방한 싸구려 모조품입니다.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의 복제품이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복제 불가능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영성입니다. 진실로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복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분이 손수 하신일은 알아보시고 그분의 신성한 작업을 인간이 모방한 것을 용납지 않을 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실로 영적인 것을 인간이 복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시면서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로서는 그 일을 재생해낼 방도가 없습니다.

현대 종교의 큰 오류가 이것입니다. 단지 성경지식과 성경의 원리들을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그들이 영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도, 어떤 기구도 사람 안에 영성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만이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영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4:18).

이 구절의 문맥상 바울은 고통과 시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 외에는 아무도 우리가 당면한 모든 일을 알지 못한다. 혹독한 시련 한 가운데, 바로 여기가 진정한 영성이 발현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복하는 사람들, 즉 주님이 자신들안에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계신다고 확신하며 시련을 직면하는 사람들은 혹독한 시련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벗어나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을 때 보다 그들의 고난의 시기에 성령께서 더욱 많이 가르쳐주셨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한 세월동안, 순조로웠던 시기에 내 영성이 증가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도리어, 내가 성령이 허락하신 모든 역경, 고뇌, 시험을 견뎌낼 때 증가되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길을 가던 어떤 지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20:21-11 참조). 진정으로 바울의 전 생애에 걸쳐 그의 시련은 결코 완화된 적이 없었습니다.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시련과 어려움은 우리 안에 영원한 가치를 생산해냅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마 전 생애에 걸쳐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영원에 비하면 그것은 다만 잠시일 뿐이다. 이제 우리가 시련을 견디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지속될 그분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생산해 내고 계신다.”

2008년 12월 2일 화요일

그리스도 얻기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바울은 그의 주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얻을” 필요를 느꼈을까요? 그리스도는 이미 자신을 사도에게 만 아니라 그의 삶속에서 확연히 계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을 얻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바울은 전 존재, 즉 그의 사역, 인생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주인 주님을 기쁘게 하는데 집중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유익”한 것일지라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다는 생각이 성경적인 것인가 물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가? 진정으로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전 인류에게 미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이 거의 체험하지 못하는 다른 유형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남편과 아내사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아가서에 나타나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묘사되었고 주님이 그분의 신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ravish, KJV)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아4:9-10).

그리스도의 신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열망하는 거룩한 사람들로서 오로지 순종하여 살며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었기에 그리스도가 마음을 빼앗겨버릴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ravish 란 말은 “마음이 녹아버리다” 또는 ”마음을 빼앗다“라는 뜻입니다. 킹 제임스 번역본 성경은 단지 “한번 쳐다보는 것(one eye)”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빼앗겨버렸다고 말합니다. 나는 “한번 쳐다보는 것”이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된 일편단심이라고 믿습니다.

2008년 12월 1일 월요일

금보다 귀합니다

에스더 왕후의 이야기는 격렬한 전투에 관한 것으로 성경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적 전투 중 하나입니다. 마귀가 이번에는 사악한 하만을 통하여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파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자는 바사 왕을 설득하여 인도로부터 에디오피아(구스)에 이르기까지 왕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칙령을 선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만의 눈에 뜨인 첫 유다인은 에스더의 삼촌으로, 의로운 모르드개였습니다. 하만은 특별히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교수대를 세웠으나 에스더가 개입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도를 촉구하고 하만의 명령을 취소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계획을 폭로하시고 하만은 자신이 세운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왕은 사형 명령을 반전 시켰을 뿐 아니라 요즘 시가로 수백만 불에 달하는 하만의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전리품은 단지 하만의 집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존귀함이 있”(에8:16)었다고 말해줍니다. 이것들이 대적과의 전투에서 획득하는 진정한 전리품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시련은 영적인 부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강하고, 순결하게 계속 유지되도록 지켜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때 그분은 시련이 우리 안에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생산해 내도록 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호가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마귀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탈취하시고 노략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승리의 부활을 하셨을 때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신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 값으로 사신 행렬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망에 대한 승리를 초월하여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삶에 관련된 놀라운 전리품들, 즉 은혜, 자비, 평강, 용서, 힘, 믿음, 승리하는 삶을 주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를 위해 획득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성령은 여기서 우리에게 경이로운 진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보고를 활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에 필요한 자원들은 우리 전투의 전리품으로부터 직접 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성전 유지가 가능하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가계로 입양하셨습니다. 그분은 성전의 주춧돌로 서 계시고 성전 전체를 성결케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는 이제 완전히 세워지고 완성된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반 쯤 완성된 전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성전은 완전합니다.
이 성전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항상 잘 정비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는 자원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영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모든 전리품의 출납담당자입니다.
이 자원들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보고 하나님과 협력할 때 방출됩니다.

이 협력은 우리가 시련 중에 있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의 자원은 전투에 몰두하는 중에 얻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입니다. 대적과의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들, 믿음, 성품인 것입니다. 전투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투로부터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붙드십시오

우리에게 갈등, 중압감, 시련이나 전쟁이 없다면 우리는 수동적이고 미온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퇴락하고 폐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쟁취한 영토를 치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우리를 빼어 내고자 합니다. 그의 목표는 우리에게서 모든 싸움을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할 힘과 원수를 압도하는 능력 등과 같이 영적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 발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그분은 우리에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겪은 일을 기억하느냐? 또 그 지독한 전투에서 겪은 일도? 그 모든 일을 통해서 네가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아라. 모두 네가 승리했던 전투를 통해서 확보했던 것이다.”

사실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보물을 인간의 몸속에 두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그분의 영이 거하시는 집, 즉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성전을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이 게으르고 무관심해져서 정기적인 기도, 하나님의 말씀 먹기, 성도들과의 친교와 같이 필요한 보수 작업을 방치해두면 퇴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완전히 폐허로 남게 되고 말 것입니다.

내 자신의 오십년간에 걸친 사역을 돌이켜 볼 때,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쉬웠던 때가 여러번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주님, 이번 공격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언제 끝날 것 입니까?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러한 시련들의 열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원, 힘, 영적 부요와 같은 그 열매는 그 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었을 정도로 나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당신에게 촉구합니다.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붙들고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더욱 강하게...사탄으로부터 노획물을 탈취하도록 돕기 위해...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분께 영광이 되도록 성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잇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7-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절대 위축되지 않기

당신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지속적으로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어떤 마귀 권세에게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보섬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귀신들이 방해하려 했습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13:6-8).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 또는 “빛의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대적하는 마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습니다.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행13:9-12).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흑암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이 당신을 훼방하려는 시도에 대해 마음 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방해를 받다, 괴롭힘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날을 그대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바울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고 마귀 권세에게 외쳤습니다. “이제 그만하라. 그만하면 충분하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행16:16-18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귀로부터 지나치게 많이 수용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만 됐다.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떠나가라!”고 대적해야만 할 때가 옵니다.

우리가 권위를 행사하여 마귀에게 떠나라고 명령할 때, 사탄은 그의 무기고에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당신을 치러올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6-18에서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마자 사탄이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군중들을 자극하여 바울과 실라를 대적하게 함으로써 일순간에 그들은 엄청난 위기에 빠졌습니다!

관리들이 그들에게 매를 치고 투옥시켰습니다. 회초리가 그들의 등을 내려칠 때마다 나는 마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니? 나의 부하들을 쫓아내고 내 권위 위에 서겠다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종에게 매를 치면 칠수록 그에게서 더 한층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자아내게 됨을 마귀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를 위기 가운데 던져 넣고 문제꺼리들과 괴로움으로 결박해 놓으면 그는 노래하고 외치고 예배드릴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면 사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셔야만 해도 상관없습니다. 바울을 위해 정확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
사탄은 당신이 이제까지 직면했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두려운 유혹이나 시련을 쏟아 부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죄의식, 정죄와 자기 성찰의 수렁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성령 안에서 일어나서 당신의 주변 상황과 속박으로부터 눈을 떼어야만 합니다. 그 모든 것의 해결책을 생각해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찬양하고 노래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2008년 11월 26일 수요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의 더 높은 의미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집나간 나귀들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사환 한명을 데리고 사울은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찾았습니다. 결국 그는 의욕을 잃고 찾는 일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의 사환이 선견자 사무엘에 대해 말하며 그분이라면 어디서 나귀들을 찾을지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성령의 한 유형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길을 가르쳐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심중에 무언가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하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데 일역을 담당하도록 선택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도착했을 때 사무엘이 했던 첫 번째 일은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삼상9:19). 이것은 정확히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아서 따로 질 높은 시간을 가지며 그분의 마음을 들으며 섬기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정결케 할 것을 청했습니다.(삼상9:20-25). 사무엘은 “이제 나귀를 찾는 길을 묻는데 집중하기 말라. 모두 해결되었다. 바로 앞에 더욱 중요한 일이 놓여 있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제의 밤이 지난 후 사무엘은 얼굴을 맞대고 친밀한 시간을 나누기 위해 사울에게 사환을 방에서 내보내도록 청했습니다. (삼상9:27; 10:1 참조).

하나님이 여기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네가 진정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기 원한다면, 네가 진정으로 나의 기름 부음받기를 원한다면, 너는 나에게 길을 묻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구해야한다. 너는 내 임재 속으로 들어와 나의 마음, 나의 소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나는 너를 나의 왕국에서 쓰기 위해 기름 붓기 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길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이제 모든 것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성령이 하나님의 깊이 감추어진 것들을 당신에게 가르치도록 허용 하십시오. 그분의 임재 속에 가만히 서서 그분이 주님의 심중을 당신에게 보여주시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의 가장 최상의 형태입니다!

주님의 존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길 잃은 세상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낙심하지 아니하고......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고후4:1-2).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압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가 예수님을 나타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눈에 보이도록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빛을 발함”으로 어떤 것을 명확하고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알려지고 이해되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각 개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그 성품과 닮은 모습이 빛나야만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에 대한 개념을 더 한층 승화시킵니다. 그는 우리가 실제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2-3). 우리의 삶은 성령이 쓰신 편지이며 길 잃은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주위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읽혀지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들이 됩니까?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예수님의 바로 그 형상을 새겨주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 형상을 늘 다듬어 가십니다. 성령의 임무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장 진실 되게, 정확하게 빚어내는 것으로 이는 실제로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2008년 11월 25일 화요일

어떻게 하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을까?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은 단지 소수의 초특급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1. 당신안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 행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먼저 성령께 당신의 안 내자와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만약 당신이 구원 받았다면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분이 당신을 인계해주시기 구하고 그분께 항복하십시오. 마음으로부터 그분이 당신을 인도하고 안내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결단해야만 합니다. 모세는 훗날에 대해 말하며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4:29) 고 했습니다.

2. 성령을 알고 듣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문제와 유혹으로부터 눈을 떼십시오. 바울, 실라와 디모데가 만일 자신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눈물 과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실패에 초점을 둡니다. “지난 날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지금 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을까?”라고 말하며 우리의 패배를 거듭해서 되뇌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그 피가 모든 것을 덮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것도 잊어 버리십시오. 오직 주님만이 앞일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오직 성령에 집중하십시오.

3. 성령과 교제하며 질 높은 시간을 많이 보내십시오. 그분은 서두르는 사람에게 말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주님을 구하고 찬양을 드리십시오. 당신 귀에 속삭여대는 모든 다른 음성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십시오. 성령이 이것들 보다 위대하심과 당신이 속거나 눈이 어두워지도록 방치해두지 않으실 것을 믿으십 시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2008년 11월 24일 월요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들은 기꺼이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거듭 거듭 가책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책 하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성령이 그 사랑을 그의 영혼에 역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타임 스퀘어 교회에서는 의로운 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책망을 사랑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는 성령이 그의 감추어진 죄와 불신의 영역을 드러내는 것을 환영하도록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더욱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헌데, 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서 “주님 나를 계속 심판해 주십시오. 책망하시고 꾸짖어 주십시오,”라는 태도를 감지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찔림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뉴스레터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에서 이런 태도를 많이 접합니다. 내가 천둥 치는 듯한 심판의 메시지를 쓸 때, 엄청나게 긍정적인 답신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에 대하여 나누면, “당신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군요!”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이분들은 “당신이 꾸짖지 않으면 당신의 말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신자들은 성령의 위대한 사랑의 사역에 전혀 참여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 꼭 배워야만 하는 영역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그분이 행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일을 하시게끔 허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에 넘치게 부으시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66:13). 이사야는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사57:17)는 고집 센 하나님의 백성에게 쓴 것입니다.

말해보십시오. 조언을 듣기 거부하는 고집 세고 완고한 학생의 곁에 선생님은 얼마나 오래 있어줄까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 중에 가장 숭고한 이미지 중에 하나인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들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걸려 뉴욕주 북쪽에 위치한 감옥에 있는 아들을 방문하러 갑니다. 그녀는 단지 잠시 동안 아들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흉한 죄수복을 입은 아들을 쳐다보고, 고통어린 그의 눈을 보면서 매번 갈 때 마다 마음속으로 조금씩 죽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입니다!

이 같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갖고 계신 사랑이라는 것을 성령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언젠가 너희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렸다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을 그분께 드렸고 그분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제, 나도 너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을 하기위해 그분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고 계속 일할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 외에 이 세상에는 진정한 위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 한 분만이 어두운 밤, 따뜻한 침대에 당신을 누이시고 완전한 평강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고통과 슬픔의 때에 진정으로 당신을 안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위로는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영구한 것이다!”라고 당신에게 확신 시켜 주실 분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들은 기꺼이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거듭 거듭 가책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책 하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성령이 그 사랑을 그의 영혼에 역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타임 스퀘어 교회에서는 의로운 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책망을 사랑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는 성령이 그의 감추어진 죄와 불신의 영역을 드러내는 것을 환영하도록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더욱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헌데, 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서 “주님 나를 계속 심판해 주십시오. 책망하시고 꾸짖어 주십시오,”라는 태도를 감지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찔림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뉴스레터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에서 이런 태도를 많이 접합니다. 내가 천둥 치는 듯한 심판의 메시지를 쓸 때, 엄청나게 긍정적인 답신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에 대하여 나누면, “당신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군요!”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이분들은 “당신이 꾸짖지 않으면 당신의 말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신자들은 성령의 위대한 사랑의 사역에 전혀 참여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 꼭 배워야만 하는 영역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그분이 행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일을 하시게끔 허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에 넘치게 부으시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66:13). 이사야는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사57:17)는 고집 센 하나님의 백성에게 쓴 것입니다.

말해보십시오. 조언을 듣기 거부하는 고집 세고 완고한 학생의 곁에 선생님은 얼마나 오래 있어줄까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 중에 가장 숭고한 이미지 중에 하나인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들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걸려 뉴욕주 북쪽에 위치한 감옥에 있는 아들을 방문하러 갑니다. 그녀는 단지 잠시 동안 아들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흉한 죄수복을 입은 아들을 쳐다보고, 고통어린 그의 눈을 보면서 매번 갈 때 마다 마음속으로 조금씩 죽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입니다!

이 같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갖고 계신 사랑이라는 것을 성령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언젠가 너희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렸다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을 그분께 드렸고 그분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제, 나도 너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을 하기위해 그분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고 계속 일할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 외에 이 세상에는 진정한 위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 한 분만이 어두운 밤, 따뜻한 침대에 당신을 누이시고 완전한 평강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고통과 슬픔의 때에 진정으로 당신을 안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위로는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영구한 것이다!”라고 당신에게 확신 시켜 주실 분입니다.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자존심을 버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성령은 사람들에게 가장 이례적인 방법으로 강림 하셨습니다. 그분은 건물을 뒤흔드셨습니다. 사람들의 혀는 새로운 언어로 그분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전적으로 통제하셨습니다!

오순절에 그분은 급하고 강한 바람과 함께 오셨습니다! 불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사물들이 진동하였습니다. (행 2:4, 4:31 참조).

세례 요한은 설교했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3:16).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오실 때 당신을 성령과 불로 세례주기 원하십니다! 성령은 불, 즉, 예수님에 대한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 을 가지고 오십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신자들이 일순간 뜨겁다가 곧 냉담해져서 결코 완전히 항복하지 않고 절대로 승복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일까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책망하시리라”(요16:8). 이 신자들이 성령을 그들 안의 합당한 자리에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책망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은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그리스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진정 이 면에서 그분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에 대해 책망하실 때 그것을 내어버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 위안인 것입니다!

성령은 절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일을 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강림하실 때 죄인들은 당신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할 만한 방법으로 오실지도 모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령이 너무 소란스럽고,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지나치게 예측불허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2008년 11월 20일 목요일

성령은 자신의 하시는 일을 아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하시되 연결성이 없거나 계획성 없이 행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단순히 우리가 인생을 헤쳐 나가는 것을 돕거나 위기를 통과하거나 외로운 밤을 무사히 지내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들어 올려 힘을 조금 불어 넣은 다음 다시 경주를 계속 하도록 내려놓으려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이 오신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준비된 신부로 본향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그 임무에 일치하게 행동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도자, 우리의 보혜사, 곤고할 때에 우리의 힘이십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모든 구원 사역-우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모든 경우-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신부로서 합당하게 만드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이 세상에 단지 은사를 주시기 위해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모든 은사는 배후에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의 메시지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중심적인 진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그분은 마치 오색찬란한 보석처럼 빛날지 모르지만 모든 진리의 빛은 우리를 오직 단하나의 진리로 이끌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도록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를 다른 모든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진리를 계시하도록 너희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진리가 모든 죄의 속박을 깨뜨리고 모든 불신을 처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신랑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을 향해 나아가고 그분의 결혼 만찬을 위해 준비되어 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나는 너희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너희를 흠 없고 그분을 향한 정열적인 사랑을 마음에 품은 자로 나타내고자 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사랑에 빠지도록 예수님을 교회에 드러내는 것,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 성도들이여, 이 말씀은 당신의 믿음을 점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을 붙들어야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당신은 하나님께 이 선물을 구했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지속적으로 두드리고 있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단순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 성령 세례를 구하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마귀가 진노하여 나돌아 다니는 것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휘하의 모든 권세들을 풀어놓아 악한 세력의 군대들이 하늘을 대적하여 마지막 투쟁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믿음과 순종으로 행하는 의롭고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와는 맞설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성령을 소유한 신자를 내게 보여주면 나도 지옥의 군대가 쫓겨가도록 만든 사람을 보여주겠습니다.

하나님, 성령을 보내주십시오! 우리위에 강림하십시오! 강하게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이 시대에 승리하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사탄의 견고한 진을 대적하도록 우리를 파송하여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이어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5:25)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전 생애를 통해 이 구절을 들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게 말하지 못합니다. 이제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다”는 한 문장으로 정의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서 이루시려는 일을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성령을 보내셨는지 이해할 때 까지 당신은 성령이 그 일을 행하시도록 허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하나의 (오직 단 하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명과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일을 이해하기 전 까지는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실수를 저지를 것입니다. 하나는 그분의 사역 중의 작은 일부분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즉, 몇 가지 영적 은사들이 그분의 모든 것 인양 오해하여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는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놓치고 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이 신비하고 그분의 존재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믿음으로써 우리안의 성령을 소멸하여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치시고, 성화시키며 능력을 부어주시기 위해 당신과 내안에 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신부를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믿는 자들과 성령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구약의 유형을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의 신부를 찾기 위해 자신의 가장 연로한 종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엘리에셀이란 이름은 “강력한 천상의 돕는 자”라는 뜻, 즉, 성령의 유형입니다. 이 강력한 돕는 자가 리브가를 이삭의 신부로 인도하여 돌아온 것이 확실 한 것처럼 성령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틀림없이 신부를 데리고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신부로 리브가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을 그녀에게로 곧장 인도하셨습니다. 이 종의 전적인 사명과 목적은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리브가를 이삭에게 인도하는 것,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삭에게 마음을 쏟고 그의 배우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의 부모가 엘리에셀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데리고 가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창24:50-51).

당신과 나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그리스도를 위하여 택함 받음-은 주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로 안전하게 본향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아바, 아버지”

성령은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순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 구절은 아이를 입양하는 데 관한 성경 시대 동양의 관습에 대해 언급합니다. 입양하는 아버지가 입양 서류에 서명하고 날인할 때까지 아이는 이 사람을 단지 아버지로만 여깁니다. 아이는 이 사람을 “나의” 라는 의미인 “아바”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류에 서명을 하고, 등록과 날인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후견인은 그를 입양하는 아버지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어린아이는, “내 아버지! 이제 더 이상 어떤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훈육하십니다. 당신을 아버지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신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서류를 날인했다. 너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다. 너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에게는 이제 너를 지극히 사랑하고 부유하고 힘센 아버지가 계시다. 그분을 포옹하고 ‘내 아버지’라고 불러라. 나는 그분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분은 너를 사랑했고 너를 원했다.”

우리의 외침은 한없는 기쁨과 감사여야만 합니다. 우리안의 성령은 문자 그대로 외칩니다. “너는 상속인이다. 예수님이 쟁취하신 모든 것의 상속인이다.” 당신의 아버지는 온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신 분이니 당신의 유산은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그분앞에서 부끄러워 피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진노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가난에 찌들고 기쁨과 영적 승리가 결핍된 고아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버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동과 고통의 순간에도 성령은 우리와 함께 그곳에 계십니다.

성령의 임무는 신랑이 그 자리에 없을 때 그리스도의 신부를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14:26).

보혜사는 “고통과 슬픔의 때에 위로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고통과 슬픔을 누그러 뜨리고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안전하고 따뜻한 침대위에 눕혀주는 자”라는 희랍어 정의를 좋아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그분은 자신의 위로의 폭신한 침대위에 당신을 눕히시고 부드러운 손길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심으로 예수님은 절대 확실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불편하게 고통당하고 위로가 필요할 것이며 종말의 때에 그분의 백성들 간에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그분이 하나님의 내재적 속성에 속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이 때문에 당신은 “내 안에 계신 이가 온 세상의 모든 능력을 합친 것보다 크시다. 모든 마귀의 권세보다 위대하시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탄의 손아귀로부터 보호하기위해, 당신의 영의 사기를 진작 시키시고, 모든 우울함을 쫓아버리고 당신의 영을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하시려고 그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시도록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3, 5).

2008년 11월 17일 월요일

하늘 맛보기

시식한다는 것은 미리 맛보거나 실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Earnest(KJV. 나머지에 대한 보증으로 미리 주거나 행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4). 이것은 우리가 전부를 소유하기 전에 그 맛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기업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성령은 영원한 사랑과 그분과의 교통을 누리는 신부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미리 맛보게 하기위해 우리를 그분의 임재로 이끌어 갑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엡1:13)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합니다. 이는 특별히 성령의 역사로 표를 받은 백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들 안에 특이한 표식 즉, 영광스런 내부적 역사를 통해 그들을 영원히 변화시킨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 두지 않고 하늘의 것에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사건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요지부동합니다. 더 이상 미적지근하거나 냉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밤낮없이 그들의 마음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성령은 이 신자들에게 무슨 일을 행하신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을 주님의 소유로 영원히 표시하고 인치셨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이것입니다. 성령은 그들에게 그분의 임재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하늘을 젖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의 더없이 위대하심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현현을 체험했습니다. 우리의 식욕을 돋우어 하늘로 가도록 하기위해 “작은 하늘”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계시의 날에 당신은 성령이 어떠한 신부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리라고 생각합니까?
마음이 나뉘어진 사람일까요? 사랑이 미지근하거나 차게 식어버린 사람일까요? 예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원치 않는 사람일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은 당신의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깨어있는 매 순간마다 그분이 임재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은 “그런 일은 내가 죽은 후에 일어날 것이다. 내가 천국에 가면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주님의 특별한 신부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망은 아무도 성화시키지 않습니다. 이 성령은 오늘 이곳에 계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죽음 이전에 당신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정열적인 사랑이 솟아나도록.

로마서 8:26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행하시는 가장 강력한 역사를 묘사해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탄식하다라는 말의 희랍어 의미는 “갈망하다”, 즉 그리스도를 더욱 더 열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하기에 그분의 존전에 앉아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깊은 탄식만 할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만이 이 세상에 있는 단 하나의 행복입니다. 나는 당신의 선하심을 맛보았고 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부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의 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채워질 수 없는 갈급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그도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자정 일분 전

사무엘상 13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모든 믿는 자가 결국에는 직면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인내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사울에게 이 중요한 순간은 이스라엘위에 불길한 전운이 감돌 던 때에 다가왔습니다. 블레셋사람들이 거대한 마병과 철병거, 그리고 최신 무기를 휘두르는 대군을 집결시켰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전 군을 통틀어 단지 두 개의 칼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사울왕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요나단의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무로 만든 창이나 조야한 농기구를 임시변통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일주일 전 사무엘은 사울에게 전쟁에 임하기 전에 길갈에서 그를 기다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선지자는 주님께 합당한 희생을 드리기 위해 일주일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칠 일째가 되고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사울의 군대는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어떤 방식을 취했을까요? 사울이 굳게 서서 “사무엘이 도착하는데 팔 일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위에 설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자신의 주변상황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편리한 대로 조작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부재중임에도 그곳에 있었던 제사장에게 희생을 드리라고 명령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을 거스르는 비통한 죄를 지었습니다(삼상 13:11-12 참조).

아닙니다 - 하나님은 절대로 늦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무엘이 길갈로 향하는 내내 모든 발걸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 선지자를 하늘의 운행 유도 시스템에 두시고 그의 도착 시간을 마지막 초까지 정확히 지정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칠 일째 되는 날, 비록 자정 일분 전일지라도, 그날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대에 걸쳐서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백성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 하지말라”(삼상12:15 의역)는 명령을 순종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전적인 확신 속에 행할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듯이 보여도 우리는 두려움에 싸여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분의 말씀이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인내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사실인즉, 하나님은 거대한 블레셋 군대가 몰려들 때 사울 바로 옆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울이 처한 위기를 아셨고 모든 세부 사항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위기에 대해 자세히 주목하고 계십니다. 당신에게 몰려오는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상황이 매일 악화되는 것을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기도하며 평온한 믿음으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결코 진정한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당신의 모든 두려운 생각들을 아십니다. “나는 이 빚을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다....내 결혼 생활에 아무 소망이 없다....이 직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에게 주시는 그분의 명령은 여전히 진실 됩니다. “두려워하거나 내 앞서 행하지 말라. 오직 기도만 하고 나를 의지하라. 나는 나를 신뢰하는 모든 자를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에게 하신 말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오 너희의 방패시로다”(시115:11).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불신은 치명적이고 그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시련을 통과하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대신 우리가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비참한 결과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강력한 영적 피마자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쓰고 맛없는 약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삼켜야만 했던 피마자유처럼 치료하는 약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거스르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스며든 육의 정신을 역으로 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을 오직 다른 유대인들만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악수를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옷자락이 외부인의 옷을 스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여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25:21-22)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공무원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 낙태주의자들,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모든 사람의 죄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으로서의 그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돌아가신-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느 때라도 내가 어떤 사람 배후의 원리를 미워하지 않고 그 사람을 미워하다면,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곳 뉴욕시에서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25만 명의 동성애자들이 다수가 반쯤 벗은 채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동성애자”라고 쓴 팻말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그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랑하십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크리스천에게 달려드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들 위에다 소돔에 내렸던 것과 같은 불을 명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고 나서 내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불을 명하여 태워버리기 원했던 제자들과 같구나.”

동성애는 죄입니다. 간음도 죄입니다. 원한과 용서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방약무인하고 호전적인 죄인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당신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십시오!

2008년 11월 12일 수요일

다니엘-다른 유형의 사람!

애통에 대해 말하는 다니엘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다니엘 9:3-4). 한편, 다니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시대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다니엘 9:2).

다니엘은 어떻게 이와 같은 애통, 지식과 분별의 길에 이르렀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시작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말씀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말씀을 비장하고 있었기에 빈번이, 상세하게 인용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다니엘 9:13).

10장에서 이 경건한 선지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를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10:5-6).

나는 당신이 오늘 마음을 정하고 모든 근면과 결단으로 하나님을 구하기를 촉구합니다. 그리고나서 날로 늘어나는 사랑과 갈망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으로 가십시오. 애통에 대해 그분의 짐을 받기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성령이 당신에게 하늘의 복을 열어주시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내버리십시오. “다른 유형의 사람”이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가져옵니다. 다니엘이 증언했습니다.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다니엘 10:10). 여기서 어루만지다라는 말은 “강렬하게 휘어잡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분의 손을 내게 얹었을 때 나는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그분의 어루만지심은 나의 전부를 던져 그분을 추구해야겠다는 긴박한 마음을 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인생을 어루만지실 때 마다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무릎을 꿇게 되고 주님을 추구하는데 사로잡혀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는 종종 왜 하나님이 이같은 긴박함으로 특정한 사람을 어루만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어떤 종들을 그분을 굶주려 찾는 자들이 되고 반면에 다른 신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갈까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받은 종들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왜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안수하시고 그렇게 그를 어루만지셨을까요? 왜 다른 사람들은 듣거나 보지 못했던 것을 이 한 사람은 보고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선언합니다. “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다니엘 10:7).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대언할 음성이 필요하셨습니다. 자신의 부름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기도하는 종을 원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씩 경건하게 기도해왔습니다. 이제 그가 강을 따라 걸을 때,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에게 계시하셨습니다(다니엘 10:7-9 참조).

하나님은 다니엘로 그분의 신탁을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1. 다니엘은 결코 기도를 중지하지 않았습니다(다니엘 10:2-3 참조).
2. 다니엘은 사회와 교회의 영적 쇠퇴를 슬퍼했습니다(다니엘 9장 참조).
3. 다니엘은 죄를 비호하거나 은닉하기를 거부했습니다(다니엘 9:4-5).

2008년 11월 11일 화요일

당신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구원받은 지 몇 년 된 사람이 있고, 일 년 된 사람도 있고, 몇 개월 또는 몇 주 된 사람도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아 참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휘하의 훌륭한 군병이 되려면 단지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이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 시대에 어떤 믿는 이들은 성령이 계신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사도행전 19:2). 이 사람들은 구원받았지만 성령 충만이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우리가 성령의 권능과 사역을 통하여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례를 주시고, 충만케 하시고 , 소유하신다고 성경이 말씀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기 전까지는 세상으로 파송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분명 순전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 이상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원하여 죽고자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위해서 세상으로 파송하는 데 그분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중의 어떤 것도 충분치 못했습니다. 분명히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진실로 성령을 원하십니까? 당신에게 성령이 임하여 불로 세례를 주시기 원합니까? 이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성령의 권능과 인도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분이 지금도 세례를 베푸시고, 지금도 그들의 몸을 소유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강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저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사도행전 2:38-39).

매일 매 시각, 전 세계의 많은 무리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이 약속을 읽었거나 설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청구하며 부르짖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는 특별히 말세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행 2:17-18). 구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하나님은 당신이 성령 안에서 살고 행하기 원하십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찾으러 뛰어다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병든 자에게 안수하고 귀신을 쫓아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과 권능으로 충만한 증인들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2008년 11월 10일 월요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받음

그리스도가 최고의 통수권자로서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들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분에 의해 통치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사전에 의하면 통치하다는 “인도하다, 지시하다, 권위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행위를 통제하다”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모든 사고와 말과 행위를 포함한 모든 우리의 행동과 행실을 예수님이 통제하실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의 나라들을 통치하십니다. 성경은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시66:7)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103:19).

속지 마십시오. 우리나라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또는 다른 어느 인간적 권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월스트리트나 재벌들에 의해 통제받지 않습니다. 지상의 권력이든 초자연적인 권력이든, 어느 권력도 미국을 위시한 다른 나라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다스리십니다.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로 좌정하시고 그분의 하늘 보좌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미국 전역에서 우리는 엄청난 도덕적 타락, 사교들의 출현, 만연한 성적 일탈, 격노하도록 방약무인한 무신론을 목격합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지옥의 무리가 우리나라를 서서히 잠식하며 사탄의 암흑 왕국을 세워나간다고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확신시켜 줍니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이사야14:5, 12, 15-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탄에 대해 추호도 불안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보듯이 악이 우리나라를 잠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초조해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은 영구히 사라져 영원토록 고통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왕국 즉, 그분이 자신의 백성의 심령가운데 구축하신 왕국에서 최상의, 최강의 통치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 우리 마음의 영역에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치유하시고 우리의 행동과 행실을 통치하시며 최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이사야 17:21). 이 구절은 예수님의 통치가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왕의 통치에 항상 더욱 더 순종하여야만 합니다.

당신은 매일 매일 당신에 대한 예수님의 통치가 증가되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더욱 더 그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당신은 의아해 할지 모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늘에 계셔서 아버지 우편에서 전적인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신다면 이 지상에 있는 그분의 왕국은 어떻게 통치 하실까? 히브리서에 그 답이 있습니다. 저자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히 1:1-2 참조).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천상의 말씀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기록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통치자의 규이며 이를 통하여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를 받은 사람의 증언을 듣기 원한다면 시편 119:11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05, 123, 133, 162절도 참조하십시오).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은혜 안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

에베소서 4:3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위해 우리 삶에서 제거해야할 요소들의 목록을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바울의 목록에 있는 요소들을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도는 우리가 은혜안에서 성장하려면 이러한 요소들을 절대적으로 직면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심령의 문제점을 무시해버린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의 성장은 지체되고 당신은 영적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바울의 목록 중 첫 세가지, 악독, 노함과 분냄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것들 입니다. 악독(bitterness, KJV)은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기 거부하거나 지난날의 원한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함은 복수하려는 의도를 품고 원한의 견고한 진을 쌓는 것입니다. 분냄은 격노를 말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분출되기도 하고 시간을 두고 서서히 타오르기도 합니다. 비방하는 것은 끌어 내리는 말로서 사람을 세워주거나 세워주는 말을 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비방하는 것은 악의가 있고 상처를 입힙니다.

떠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돌연히 격발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소란, 목적 없이 요란한 소음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큰 문제를 야기 시킬 때 또는 돕거나 치유하려고 하기 보다는 소동을 일으킬 때 떠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록 중 마지막 요소는 악의입니다. 악의는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많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악의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하나님이 벌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으로 대부분의 경우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이 “너희는 이 모든 악들을 버리라”고 말할 때 일시에 고쳐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는 성장의 문제로서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러한 악을 제거하는데 실패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속히 회개하고 사람과 화해하고자 결단할 때 차츰 이러한 문제점들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2008년 11월 6일 목요일

은혜안의 폭발적 성장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사람들을 세워 주려고 할 때 은혜 안에서 우리의 성장은 폭발적일 수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29-30).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덕을 세운다’는 말의 어근은 ‘집을 짓는 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의 어근은 ‘세우다’라는 어근에서 온 것입니다. 요약하면 덕을 세우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하여 세 가지 요점을 말합니다.
1.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야합니다.
2.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3. 우리의 말로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영적 거인 몇 분의 전기를 읽으며 깊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 경건한 남녀들은 천상의 마음을 지녔고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이었고 자주 기도하고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헌신이나 기도의 강렬함뿐만 아니라 또한 이것들이 그들의 삶에서 맺은 경건한 열매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는 이들 영적 거인들 사이의 공통적인 맥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주관심사가 거룩한 대화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순결한 마음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기로 선택할 때 은혜 안에서 성장합니다. 이 은혜안의 성장은 나의 가정에서 내 배우자와 내 자녀들에게 날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가정은 모든 문제와 모든 오해가 “항상 옳고자 하는 나의 시도”를 자진하여 포기함으로써 극복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터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옳아야만 할 필요가 결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어느 때 보다 더 누리도록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논쟁을 이기려고 애쓰기보다 서로를 세워주려고 노력할 때 모든 논쟁, 모든 소위 “옳다”는 것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모두 성장합시다. 은혜 안에서.

2008년 11월 5일 수요일

다른 유형의 사람들

구약에서 경건한 사람들의 용맹에 대하여 읽을 때, 내 심령에 불길이 일어납니다. 이 종들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명분을 위하여 큰 책임 부담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을 당혹시킬 만한 대단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이러한 옛 성도들은 바윗돌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한발작도 나아가기를 거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안의 타락한 상황을 보고 며칠 씩 울며 슬퍼하였습니다. 그들은 먹거나, 마시거나 몸을 씻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머리채와 수염을 쥐어뜯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거리에 365일간 옆으로 누워 계속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성도들이 어디서 이러한 일들을 할 영적 권위와 힘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들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종들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과 그들의 여정에 대해 전혀 연관 지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그들과 전혀 다른 유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나를 괴롭힙니다. 성경은 이러한 구약의 인물들의 용맹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타락한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본보기로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도들은 특별한 품종의 사람들 입니까? 이들은 예정된 운명을 지니고 우리 세대가 알지 못하는 초능력을 부여받은 슈퍼맨들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경건한 선조들이 당신이나 나와 똑같이 육체의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야고보 5:17 참조). 사실인즉, 그들의 본보기는 우리가 따라 갈 수 있도록 한 모형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 위에 안수하시도록 만드는 어떤 것을 성품 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바로 이와 같은 성품을 찾으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에스라는 자신의 온 나라를 일깨웠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에스라가 증언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에스라 7:2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뻗어 에스라를 감싸고 그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에스라에게 이 일을 행하셨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에는 수 백 명의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동일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이 한 사람에게 그분의 손을 얹고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기 위해 오만 명의 사람을 치리하도록 했을까요?

성경이 대답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 그것은 간단합니다. 에스라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준행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서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씀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모든 것을 준행할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라에게 손을 얹기 오래 전부터 이 사람은 말씀을 부지런히 구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자신을 점검하고, 씻어내고 몸과 영혼의 모든 부정함을 정결케 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에 굶주렸고 그 안에서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도록 그는 허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그분의 손을 에스라에게 얹으시고 기름 부으신 이유입니다.

2008년 11월 4일 화요일

하나님의 특전사

여러분은 미 육군 특전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고도로 훈련된 군대중의 군대로서 헌신된 장병들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입니다. 특전사는 모두 상관들의 눈에 띄어 발굴된 자원 전투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들이 나약하고 비겁하며 산악 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탈레반이 미군들을 수치스럽게 귀향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미국의 특전사를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 용맹한 부대는 단 2천명의 군대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습니다. 수일 내에 모든 적진의 위치를 추적해 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영적 영역에서도 유사한 일을 하신다고 믿습니다. 기도 중에 나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이 천상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원 정예 부대를 구성하기 위해 자신의 정규군 중에서 물색하며 군대중의 군대를 양성하고 계십니다. 이 특전사는 대적과 전투하기 위해 그분이 감동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투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사병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삼상10:26).

오늘날 하나님의 특전사는 나이가 어린 사람, 중년 또 노인들조차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은밀한 기도의 골방에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전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떤 영적 도형에서든지, 산에서든지 계곡에서든지 전투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중의 군대는 모든 국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는 암약 중 일지 모르나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으로 공훈을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편만하고 기근이 그칠 것입니다. 주님이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모든 것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다니엘11:32).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1).

2008년 11월 3일 월요일

우리는 가족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을 청구하는 것은 복잡하고 숨겨진 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내 서재에는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해 쓴 책들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깊이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심오하여 독자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고 말 뿐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리는 아주 간단하여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그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온전히 납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것이 사실일수 있을까 물으시겠지요?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과 말씀하시고 그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구했던 모든 간구를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그분은 항상 내말을 들으셨습니다,” 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는 그분의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를 마치 그분 자신의 아들처럼 친밀하게 받아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어”(요17:21-23).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가족입니다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들과 하나 된. 우리는 자녀로서 갖는 유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지닌 채 입양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능력과 자원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공식이 아닙니다. 단순히 입 밖에 냄으로 능력이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이 우리의 간구를 지시고 자신의 공로로 인해 아버지 앞에 들고 가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분은 변호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아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우리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완벽한 신실하심의 수혜자들입니다.

2008년 10월 31일 금요일

은혜안의 성장은 저해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4:14). 당신은 아마 “이 구절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내 기초는 성경적으로 확고하다. 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하는 모든 새로운 복음의 유행이나 경박한 수법에 현혹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리고 기초를 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뒤이은 바울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4:14) 아마도 당신은 거짓 교훈에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당신이 아직도 다른 많은 문제로 인해 휩쓸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당신은 당신을 반대하는 자들의 사악한 계획에 의해 요동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다시 한 번 자신을 점검하라고 우리를 청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스스로 호칭하면서 우리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울이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라고 명령할 때 그는 우리에게 “험담과 비방, 사기와 조작, 교활함과 간사함, 기만과 음흉의 수법을 사용하는 너희의 원수들, 그들은 모두 반역하는 자녀들이다. 그들은 교활하고 타락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악하고 유치한 게임에 농락당하지 말라. 그들은 자신들의 심술에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반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에게 유치함으로 응대하지 말아야 것이다.”

그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성숙을 향하여 전진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4:15). 그는 말합니다. “너희가 받는 경멸, 입은 상처, 너희에 대한 험담, 너희를 겨냥한 사기와 기만을 너희는 어찌 할 수 없다. 하지만 너희는 이것들을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이것들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회로 삼아라. 온유한 심령으로 부드럽게 응대하라. 악의로 너를 이용하는 자들을 용서하라.”

2008년 10월 30일 목요일

지옥을 뒤흔드는 기도

다니엘서가 기록 되었을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6장에 이를 때 다니엘은 오랜 사역에 몸 바치고 여든 살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항상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노후에 이르러서도 기도 생활을 느슨히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다니엘이 지치고 낙심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반대로, 다니엘은 정작 시작하는 중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여든 살이 되었을 때에도 그의 기도가 마귀를 격분케 하며 지옥을 뒤흔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그 땅의 최고위직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왕자들과 120개 도의 고관들을 총괄하는 세 명의 총리 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리오는 다른 두 총리들 보다 다니엘을 총애하여 정부 정책을 기안하는 일 그리고 궁정 관리들과 지식인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겼습니다(다니엘6:3).

다니엘은 무척 바쁜 선지자였음이 분명합니다. 분주한 스케줄과 시간을 요하는 회의들로 이 사역자가 받을 중압감을 나는 그저 상상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다니엘에게서 기도하는 시간을 앗아가지 못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가 수행해야할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추적인 직무였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주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도자로서 자신의 의무와, 부담, 요구사항으로부터 몸을 빼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모든 활동을 멈추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무릎 꿇고 있는 동안 그가 가진 모든 지혜, 방향, 말씀과 예언을 받았습니다(다니엘 6:10 참조).

당신은 아마 지옥을 뒤흔드는 기도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나라와 교회가 죄의 나락으로 깊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신실하고 부지런한 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무릎을 꿇고 부르짖습니다. “주님,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사악한 시대에 당신의 보전하시는 능력의 본보기가 되기 원합니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기도할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합니까? “나는 믿음으로 그저 감당할 것이다,”라고 말하십니까? 당신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아신다. 나는 하루 종일 생각으로 그분께 기도드린다.”

나는 주님이 우리와 단둘이서 질 높은 시간, 서두르지 않는 시간을 보내시기 원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단순히 탄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의 몸짓이 될 것입니다.

2008년 10월 29일 수요일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 청구하기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16:23). 그리고나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요.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떠나갈 것과 잠시 동안 그들을 보지 못하실 것을 경고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그분은 그들이 모든 하늘의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들을 두드리고, 찾고, 구하라는 예수님의 개인 교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모든 은혜, 능력, 힘과 같은 아버지의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2-14).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의 정곡을 찌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16:24). 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이빗, 너는 내가 너에게 허용해준 능력을 청구하지 않았다. 그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된다.”

모든 육의 죄를 다 합한 것보다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비탄에 잠기게 하는 것이 여기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약속에 대해 나날이 불신이 깊어가는 것, 그분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에 대해 날로 의심이 늘어가는 것,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점점 더 청구하지 않는 것을 애통해 하십니다.

당신이 아무리 많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구했다 해도 그분의 창고에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영적 지혜의 자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풍성하게 구하십시오! 지혜를 구하십시오.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계시를 구하십시오. 그러나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만 합니다.

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당신의 예수님은 얼마나 크십니까?

요한복음 14장은 두 가지 장엄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합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2-14).

두 구절 지나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그리스도께서 “나는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주겠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이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두 가지 엄청난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끼어있는 한 구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이 말씀이 왜 이곳에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순종의 문제가 이 약속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 약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족되어야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청구하는 데 아무런 장해물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의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질책이라고 확신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크리스천들이 더욱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결국에는 단지 구원으로 만족합니다. 언젠가 천국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그리스도의 끝에 도달해 있습니까?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그리스도는 또 하루를 지탱할 만큼의 힘을 주시는 데서 끝납니까? 그분은 인생의 대부분을 사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당신에게 때때로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그 자리에서 끝나고 마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안의 이 모든 구절들은 “나의” 예수님은 나의 요청하는 것만큼만 크다는 것을 나에게 설득해 줍니다. 하지만 비통하게도 많은 믿는 자들이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무의미하고 무능력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의 그리스도가 제한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나의 큰 요청으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 지옥의 온 마귀가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로부터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어느 때 보다 그분이 더욱 더 커지시기를 원합니다.

2008년 10월 27일 월요일

그분의 손에 당신의 이름을 쓰셨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권위가 주어졌는지요. 정확히 어떻게 우리는 이 권위를 사용합니까?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사용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을 두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나는 그분 안에 있으며, 나는 그분과 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은 자신의 손바닥에 그 이름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하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이 단지 비인격적인 공식이 아니라는 이유를 아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과 함께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위입니다. 그리고 그 지위를 아버지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16:26-27).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너희의 요청은 마치 내가 구하는 것과 똑같은 능력과 효과가 아버지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도는 마치 아버지 보좌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병자에게 안수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마치 예수님이 병자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것처럼 우리를 보십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받기 위하여.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나는 가서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택함 받은 자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이제 나의 기쁨이 충만하기 위하여 풍성하게 구합니다.”

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했지만 내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 믿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청구하려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더럽히는 어떤 죄를 허용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은 장해물이 되어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버릴 때까지 그분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나 냉담한 태도 때문에 막히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는 의심에 눌려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는 경고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야고보1:6-7).

야고보는 분명히 말합니다. “흔들리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야고보가 사용한 흔들리다라는 단어는 “결정하지 않은”이란 뜻입니다. 사실은 이러한 사람들이 요청을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에게 응답하시면,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이 기도만 응답해 주시면 당신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언제 우리가 그분의 아들에 대하여 헌신을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전적으로 그분께 맡기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2008년 10월 24일 금요일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느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이사야30:18-19, 21,29).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희가 단순히 주님을 의뢰하기만 하면, 너희가 다시 그분께 부르짖으며 돌이켜 그분을 신뢰하면, 그분은 내가 말했던 것 모든 것 그리고 그보다 더욱 너희에게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원수는 우리 앞에서 넘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이사야30:3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 없으며 입술에서 나오는 단지 한마디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이기지 못하실 전쟁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거기에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이사야30:33)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해가는 이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최근 나는 이곳 뉴욕시에 있는 우리 교회의 건물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 구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이일에 대해 당신을 신뢰합니다. 나는 당신께 구했고 이일에 대해 평강을 누릴 것입니다.” 그분은 내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데이빗, 너의 부동산, 재정, 그리고 다른 물질적인 일에 대해 나를 신뢰할 수 있다니 놀랍구나. 그런데 너는 아직도 너의 건강문제에 대해서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내 나이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내 가족이 어떻게 될지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정곡을 찌르시는 말씀이 번개처럼 나를 쳤습니다. 나는 모든 물질적인 염려는 그분의 손안에 두었는데 영원한 염려는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주님, 당신은 내가 모든 것에 당신을 신뢰하기 원하시는군요, 그렇지요?”

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 당신의 건강, 가족, 미래. 그분은 당신이 모든 문제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고요함, 자신감, 안식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주님과 홀로 계십시오. 그분께 모든 것을 들고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약속하셨습니다.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믿음의 증거는 안식입니다. 신뢰하는 믿음의 귀결은 마음의 평강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은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2008년 10월 23일 목요일

영적인 힘과 신뢰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의 손안에 내려놓고 그분의 권능을 신뢰할 때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룻은 이런 종류의 신뢰의 본보기가 됩니다. 남편이 죽은 후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살았습니다. 나오미는 룻의 행복과 장래를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부유한 보아스의 발치에 눕고 자신의 친족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를 청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날 저녁, 곡식 까불리는 일을 마친 후 보아스는 “곡식 단 더미의 끝에”(룻3:7)누워 이불을 덮었습니다. 새벽에 보아스는 깨어나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룻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당시에 통상적인 관습으로 부도덕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룻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3:9).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친척의 의무를 맡아주시겠습니까?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시겠습니까?” 실제로는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작해 꾸민 계략이 아닙니다. 룻과 나오미는 하늘의 질서를 따라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혈통이 룻을 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룻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나오미가 물었습니다.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룻3:16 KJV: Who art thou, my daughter? 내 딸아 너는 누구냐? ). 나오미는 다시 말해서 “너를 ‘약혼한’ 룻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아직도 ‘과부’ 룻이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자초지종을 고했습니다. 나오미의 경건한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아니하리라”(룻3:18). 나오미는 이일에 대해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며 기도했었고 하나님은 그녀에게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기업 무를 자에 대한 규례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전형이며 예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신과 룻이 할 바를 다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제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도록 그분을 신뢰할 시간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아,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편안히 쉬고 잠잠히 있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집에 고요와 평강이 깃들었습니다. 아무도 손톱을 물어뜯으며 “하나님이 과연 하실까? 언제 이 일이 이루어질까?” 궁금해 하며 안절부절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신실한 두 여인은 편안히 쉬며 주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며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했습니까? 신뢰했습니까? 가만히 앉아 “주님의 구원을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분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2008년 10월 22일 수요일

기도의 사람 되기

예레미야 5장에서 하나님은 간청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5:1). 주님이 말씀하시는 요점은 “단 한사람이라도 나를 찾는 사람을 발견하면 내가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시절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서 그 한사람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주님은 그런 유형의 경건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신실한 종들을 찾습니다.

다니엘처럼, 그러한 사람은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다니엘에게 임했을 때 이 선지자는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계시하셨습니다. 계시가 임하자 다니엘은 기도할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다니엘9:3-4).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회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지자는 자신의 동료들의 죄를 맹렬히 비난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 타락을 자신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는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다니엘9:5,8).

하나님은 오늘날 자신의 백성에게 복주시기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마음이 이세상의 영으로 오염되어 있다면 그분의 복들을 받을 태세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말씀을 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내리게 하셨사오니”(다니엘9:13-14).

하나님께 구하옵기는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성령께서 우리가 타협하고 있는 부분들을 보여주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한 나라를 위하여 하는 기도보다 더욱 더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울부짖을 것입니다. “오 주님, 나의 마음을 수색해 주십시오. 내 영혼 속에 숨어든 모든 이세상의 영을 내 안에 드러내 주십시오.” 그 연후에 우리는 다니엘처럼 우리 가족, 우리나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2008년 10월 21일 화요일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새 일을 행하시려고 합니다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달리 행하였었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나라들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에스겔20:14).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새 일을 행하시려고 합니다. 이 새 일은 부흥이나 각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참지 못하시고 홀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이 짓밟혀 수렁에 쳐 박히고 소위 “교회”라는 곳이 가증한 것으로 더럽혀졌다고 판결하실 때가 오면, 그분은 일어나 상실한 세상에 대하여 자신의 이름을 방어해야만 합니다.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나님은 두 가지 강력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첫째, 그분은 나라들과 그분의 교회를 구속하시기 위한 심판들로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동성애자들과 삯꾼들이 그분의 집을 침입하는 것을 막으실 것이며 사역을 성결하게하고 정화하며 그분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한없는 자비로 간섭하셔서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심판이 행하여지는 극심한 고통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로 남은 자들을 그분 자신에게로 “돌이키시는” 반전의 결과를 얻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실 때 행하셨던 일들을 다가오는 미래에도 다시 행하실 것입니다.

에스겔서 36:21-38에서 이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 예언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 정결하게 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한 것이다.”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막아 달리 행하였나니 내가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을 본 여러 나라 앞에서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음이로라...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20:22,44).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영적인 힘의 비결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이사야30:15).

여기 영적인 힘에 대한 하나님의 비결이 있습니다. “잠잠하고 조용하여야 힘을 얻을 것”입니다. 잠잠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휴식”을 의미하고 휴식은 모든 불안으로부터 평온하고, 긴장을 풀고 자유하게 됨을 말하며, 고요하고 밑에서 받쳐줌으로 편안히 눕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잠잠함과 신뢰를 소유한 크리스천이 많지 않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광적으로 활동에 관여하고 부와 소유물과 쾌락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합니다. 사역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종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회의나 세미나, 베스트셀러 책들에서 답을 찾으려고 허둥댑니다. 모두가 자신의 영을 안정시키기 위한 안내와 해법, 그 무언가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 모든 출처를 뒤져보지만 정작 하나님은 제외합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그들에게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을 자신들의 원천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노력은 애통과 혼동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서 무엇을 성취하기로 되어있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이사야32:17). 우리가 진정으로 의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의 삶은 고요한 영, 잠잠한 마음, 하나님과 화목이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말과 병거에 의지하고 사람을 신뢰하여 애굽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사들이 오고갑니다. 지도자들이 긴급 전략회의를 주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우리가 어찌 할꼬?” 울부짖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확신을 주었습니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 너희의 타락에서 돌이켜라. 다른 것들을 신뢰한 반역을 회개하라. 주님을 의지하라 그러면 그분이 너를 평강의 이불로 덮어줄 것이다. 그분은 네가 당면한 모든 것 가운데서 너를 잠잠케 하시고 쉬게 하실 것이다.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마흔 한 번째 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시고 난 직후 마흔 한 번째 날에 그분을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분의 얼굴은 광채가 납니다.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셨기에 아버지를 찬양하며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과 자신감이 풍겨 나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지옥의 권세를 상대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암흑가운데 처해있는 큰 도시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떠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알며 병든 자들을 고칩니다.

한편 당신은 자신의 삶을 점검하며 정반대 상황을 봅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메마른 광야 체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탄의 불같은 공격을 견뎌낸 후 당신의 영혼은 낙심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와 같은 시련을 겪지 않으셨다. 이것들 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아마 믿음이 강해 보이는 사역자를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도 강하게 확신하는 것처럼 들려서 당신은 “그는 나 같은 문제를 겪어보지 않았을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말씀을 전파하라고 부르시고 그 후에 혹독하게 시험받게 하시려고 광야로 인도하셨을 때 당신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가 절망으로 낙심하여 한 없이 낮아졌을 때 당신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그의 가장 훌륭한 설교가 자신의 삶에서 받았던 시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다.

바울은 우리가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교하여 우리의 의를 측정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마흔 한 번째 날, 예수님이 길고도 험난한 시험에서 막 헤어 나왔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분에게서 본 그 영광이 사람들이 당했던 어떤 것보다도 더 험했던 고투에서 나왔던 것이라는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의, 그분의 거룩함에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에 똑같이 접속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시험의 때에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 자신의 영이 당신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 자신의 아들이 이미 그곳에 계셨었고 당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분이 당신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신뢰를 쌓는 역사를 완수하시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자신감, 경건한 동정심과 남을 돕는 힘을 가지고 나올 것입니다.

2008년 10월 16일 목요일

울어버리십시오

가장 고통이 심할 때에 당신의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절망을 다 쏟아 울어버리십시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베드로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한 상처를 짊어지고 통곡하였습니다. 그 쓰디쓴 눈물이 그의 안에서 신묘한 기적을 이루어내었습니다. 그는 돌이켜 사탄의 왕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울부짖는 심령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한 번도 주님은 “네 자신을 추슬러라! 일어나 약을 복용해라! 이를 악물고 눈물을 닦아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코! 예수님은 모든 눈물은 그분의 영원한 눈물 병에 담아두십니다.

마음이 상하십니까? 몹시 상하십니까? 그러면 그저 울어버리십시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하지만 그 눈물이 불신이나 자기 연민이 아닌 당신의 상처로 부터만 흘러나게 하십시오.

삶은 계속됩니다. 당신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 지 당신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나 상처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모든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하루씩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당신은 거부당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버림받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당신의 믿음이 약할지도 모릅니다. 아무 쓸모없이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슬픔, 눈물, 고통, 공허가 때때로 당신을 삼켜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된 주님은 당신에게 오셔서 그분의 사랑스런 손으로 당신을 일으켜 천상의 자리에 다시 앉혀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죽음의 공포에서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당신을 격려하십시오. 안개에 휩싸여 당신의 딜레마를 빠져나올 출구를 볼 수 없을 때에. 예수님의 품안에 기대어 누워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믿음-당신의 확신을 원하십니다. 당신이 큰소리로 외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나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분이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계신다! 나는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탄에게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그리고 그분은 나를 사랑한다!”

기본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이 절대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사54:17).

2008년 10월 15일 수요일

헤아려본 하나님의 영광

“또 이르시되...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막4:24-25).

예수님이 이 말씀이 영적인 귀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릴 것을 아시고 먼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이 하나님의 영을 향해 열려있다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확연한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요약하면, 주님은 자신의 영화로운 임재를 교회에게든지, 개인에게든지, 여러 가지 분량으로 분배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의 영광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삶들과 교회들로부터 더욱 더 큰 분량으로 솟아나 날로 증가하는 분량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말일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모든 성경 말씀은 시간이 끝날 때 승리하고 영광에 찬 교회를 기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지옥의 문들이 그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진맥진하어 우울하고 훌쩍거리며 패하고 낙심한 모습으로 절뚝이며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교회에 더욱 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 능력은 그저 표적과 기사로만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계시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만짐을 받아 마음들이 영화로운 변화를 받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욱 크고 날로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분량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막4:24).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네 자신을 나에게 할당한 몫만큼 나도 너에게 돌려줄 것이다. 네가 나를 다루는 그 방법으로 나도 너를 다룰 것이다. 너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나도 너를 헤아릴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당연시 여기며 그분께 게으름과 태만을 할당하면 졸음의 영을 상대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19:15). 그 결과, 당신의 영혼은 굶주리고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여기서 이슈는 그분의 사랑, 자비 또는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그분의 영광의 복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 마음을 그분께 분배하는 것에 따라서 자신의 영광의 분량을 다르게 하여 우리에게 분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할 바는 우리의 예배, 순종과 부지런함 가운데 단순히 그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11.

2008년 10월 14일 화요일

고통스러울 때

이런 저런 경위로 우리는 모두 고통을 받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자신의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당신이 깊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적인 공포와 가장 깊은 고뇌를 막아줄 수 없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들도 당신이 치르는 전투와 당신이 입은 상처를 이해 하지 못합니다.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연고가 있습니까? 가슴 속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까? 조각 조각난 마음을 꿰맞추어 더욱 튼튼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절대적으로 가능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짖궂은 장난에 불과하고 하나님 자신은 거짓말쟁이 일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없는 인생길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탈출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당신이 비틀거릴 때 바로 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동요하지 않는 눈으로 당신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모든 동작이 관찰됩니다. 모든 눈물이 병에 담겨집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고통과 함께 하십니다. 모든 고통을 느끼십니다. 당신이 눈물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상처가 마음을 퇴락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정확한 시간에 오셔서 당신의 눈물은 닦아 주시고 애통대신 희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당신을 응시합니다 -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두려움을 털어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2008년 10월 13일 월요일

승리에 필요한 모든 은혜

종종 우리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공로 없이 받는 호의나 축복으로 정의하는 것을 듣습니다. 하지만 나는 은혜는 이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 견해로는 은혜는 우리의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 능력, 권세, 친절, 자비, 사랑 등 우리를 고난의 시기에 지켜주시는 모든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엄청난 시련, 고통, 시험과 고난의 시기였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했었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내 아내가 연이어 재발하는 암으로 고통당하고, 나의 두 딸도 또한 발병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의문을 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모두 건강하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또한 사탄의 사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나는 지독히도 시험과 유혹을 당해왔고 원수들이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일어났습니다. 소문에 의해 비방을 당하기도하고 거짓으로 비난을 받고 친구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 캄캄했던 시기에 나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분의 은혜로 나는 항상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은혜가 충분합니다. 어느 날엔가 영광 중에 나의 아버지는 그분이 내내 갖고 계셨던 아름다운 계획을 나에게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모든 시련을 통해서 어떻게 내가 인내를 습득했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배웠는지, 내 약함 가운데서 어떻게 그분의 능력이 완전해 졌는지, 어떻게 나를 향한 그분의 절대적인 신실함을 배웠는지, 좀 더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내가 얼마나 갈망했는지, 그분이 나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이유를 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실 때 까지 나는 그것을 용납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나의 시련과 고난에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50 여 년간 사역하는 동안 그치치 않았습니다. 아직도 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하여,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분량을 아직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분의 영광에 대해 내가 받은 가장 위대한 계시는 나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장 처참한 순간에,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의 가장 충만한 분량을 당신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 우울증, 불안감에 대해 결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결코 알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야, 그것이 네가 필요한 전부이다.”

2008년 10월 10일 금요일

대적하라 마귀가 피하리라

사탄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이 말은 시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이상 망측하고 우스꽝스럽게 들립니다. 안 믿어질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강력하고 마음을 유혹하는 제안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하며 예수님께 도전하고 있습니다. “네가 단지 내 발아래서 절하기만 하면, 한번만 경배하기만 하면, 나는 싸움을 멈추겠다고 약속한다. 이 영역을 주관하는 내 모든 능력을 포기하겠다. 어느 누구도 사로잡거나 노예로 삼지 않겠다. 네가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 지금 당장 너를 희생하여 이 순간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왜 마귀는 이것을 위해 그의 모든 능력을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합니까? 그는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갈보리에서 인봉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시는 것을 막기만 하면 그 운명에서 자신을 구해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마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사탄은 아직도 비슷한 제안을 들고 의로운 자를 시험합니다. 우리에게 위협과 참소를 들고 옵니다. “너는 나를 경배할 필요가 없다 - 내가 이미 네 육에 접속되어 있으니까. 너의 모든 약점을 다 알고 있단다. 자,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해 증언해 보아라. 네가 가장 목청 높여 찬양하는 순간에 나는 네 마음을 악으로 장악해 버릴 것이다. 네 죄를 네 앞에 통렬하게 폭로할 것이고. 너는 자유롭게 되리라는 소망을 잃게될 것이다. 너는 털끝만한 힘도 없다.”

우리는 사탄의 참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사탄이 얼마나 많은 시험을 당신에게 던지든지 문제없습니다. 당신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것을 덮었다면 마귀가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을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2008년 10월 9일 목요일

의문이 떠오를 때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2-3).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허약할 그 때에, 마귀가 그의 첫 시험을 던졌습니다.

배고픈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탄은 예수님께 이렇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네가 완전한 하나님이라면, 네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너는 현재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해서 너 자신을 구원하려무나. 네가 그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는지 알기위해 그분이 너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았느냐?”

진실로 경건한 사람들이 당면하는 가장 교활한 시험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처럼 당신도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분께 온전히 맡기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당신을 광야 체험으로 인도하시고 얼마 후 의문점들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무엇인가 의아해 하면서 당신의 삶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승리를 얻으려고 애쓰는 동안 사탄의 시험은 더욱 더 강렬해지는 듯이 보입니다.

원수는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네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견뎌 내야할 필요가 없다. 네 안에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그 말씀을 해버리고 너를 자유롭게 해라. 네 자신의 굶주림을 채워라,”고 말합니다.

사탄의 첫 번째 계획은 능력이 실패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청하셨다 해도 하나님이 예수님의 떡을 구하는 부르짖음을 들어주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능력이 실패하게 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의 지상에서의 영원한 목적으로부터 돌이킬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탄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일러준 말씀대로만 행하기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의 안녕을 위해 불순종하도록 설득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 예수님이 현재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분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추후 십자가를 회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행동 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상에 온 것은 나의 필요나, 상처나 육체적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러 왔다.”

고통의 정점에서도 예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광야 체험을 통해 의존과 동정심을 배웠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2008년 10월 8일 수요일

광야 여정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크리스천을 얼음 조각이 떠다니는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크리스천은 바다를 건너는 동안 하나님이 그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너무 오래 서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라앉아 버릴 테니까요. 한 걸음 뗀 후에 다음 걸음을 위해 주의 깊게 살펴야만 합니다. 그의 밑에는 심연이요 그의 앞에는 불확실함이 있지만 항상 앞장서시는, 든든하고 확실한 주님이 계십니다. 육지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있다는 약속이 그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 여행자는 목적지만을 응시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것같이 인생을 광야 여정으로 생각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과 유다 전체 백성이 참여한 전투가 또한 우리의 전투입니다. (역대하 20장 참조). 확실히 그곳은 광야입니다. 뱀이 출몰하고, 말라버린 물구덩이들, 눈물 계곡들, 적군들, 뜨거운 모래, 가뭄, 통과할 수 없는 산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구원을 보며 확고히 섰을 때, 주님은 그 광야에 식탁을 펴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처럼 내려주셨고 -오로지 그분의 능력으로 적군을 멸하셨으며 -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 뱀에 물린 상처에서 독을 제거하셨으며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 그들에게 젖과 꿀을 주셨으며 - 드높고 강한 손으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다가올 모든 세대에게 전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도움을 청하려고 그릇된 방향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은밀한 장소에서 예수님과 홀로 계십시오. 당신의 혼란스러움을 그분께 모두 말씀 드리십시오. 그분께 당신은 달리 갈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분만이 당신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다루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매사를 헤아려보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역사하시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 모든 것을 요약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이사야45:22).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가7:7).

2008년 10월 7일 화요일

치유하는 고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나는 치유에 대해 믿습니다. 나는 고난에 대해 믿습니다. 나는 “치유하는 고난”을 믿습니다. 내가 그릇행하는 것을 막고 그분의 말씀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만드는 고난은 치유입니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가장 은혜로운 치유능력은 고난들 일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라고 다윗을 몰아댄 것이 마귀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나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나는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그분이 완전히 치유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믿는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께 현재의 상태에 대해 감사드리고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그분을 진실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다윗과 함께 나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그러한 괴로움이 믿음과 통찰력을 지닌 위대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벧전5:7).

바울은 자신에게 지워진 교회들의 “염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고후11:28 참조). 새로 태어난 교회는 모두 그의 어깨에 지워진 또 하나의 “염려”였습니다. 교구가 성장하고 확장되고 연장되는 것들은 항상 새로운 염려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깨가 넓어야합니다. 수많은 염려와 책임들의 도전앞에서 감히 움츠러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밟도록 하시는 새로운 믿음의 단계마다 수많은 새로운 염려와 문제들이 야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여 맡길 수 있는 염려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 지 정확히 알고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건강이나 기력을 상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추수할 것은 너무 많고 자원하는 일꾼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서는 거두어져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염려의 짐 덩어리를 잊어버리십시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그분께 맡길 수 있지 않습니까?

모든 새로운 축복은 염려 일가와 친척입니다. 이들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이 염려와 함께 사는 것을 배우기 전 까지는 축복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2008년 10월 6일 월요일

수그러들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수그러들지 않는(unrelenting)이란 단어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그것은 강도에 있어서나 수고의 정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논쟁에 의해 바뀔수도 없고 설득당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것은 정해진 길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이로운 묘사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죄인과 성도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찬 추구를 방해하거나 감퇴시키지 못합니다. 시편기자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9:5, 7-8).

다윗은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높이 오를 때와 가장 낮은 곳에 처할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복을 많이 받았을 때에는 기쁨으로 마음이 고양됩니다. 다른 경우에는 정죄당하고 하찮은 자로 지옥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내가 복을 받았다고 느끼든지, 내 상황이 형편없든지 간에 주님, 당신은 그곳에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수그러들지 않는 사랑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쫓아버릴 수 도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지 말씀드려도 당신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의 진리를 거슬러 죄를 짓고 당신의 은혜를 당연시 받아들이며 불순종 할 때조차도 당신은 멈추지 않고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박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을 만납니다. 바울은 미친 사람 마냥 크리스천들을 증오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대제사장에게서 믿는 자들을 수색할 권한을 받아서 그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감옥으로 끌어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개종한 후에 바울은 자신이 편견에 차서 맹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죽이려던 그렇게 증오에 찬 세월을 지낼 때조차도 하나님을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요약해서 말하면,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나를 찾고 계셨다. 결국 말위에 앉아 있는 나를 문자 그대로 떨어뜨려 나뒹굴 때 까지 그분은 사랑으로 계속 나를 찾아오셨다. 그것이 수그러들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모든 높고 낮음을 통해서 끝까지 뜨겁게 사랑하실 것이라고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는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 무엇도 나를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 악마도, 귀신도, 권세자도, 사람도, 천사도, 아무것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멈추시게 할 수 없다.”

2008년 10월 3일 금요일

사람을 시험하심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32:31).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는데 온 마음을 집중해 버려서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인생의 큰 시험에 대비해 마음을 예비해 두지 않았습니다. 혹시 현재 당신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시련이나 무거운 짐이 실제로는 당신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가서........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1-2). 하나님은 그 심중에 진실로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시기 위해 한 나라 전체를 검증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신8:2).

역대하 32장 31절에서 우리는 놀라운 일을 봅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왕을 시험하시기 위해 잠시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때때로, 주님의 청지기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의롭게 추진하고 있는 동안, 확연히 버림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도록 시험을 당하고 지옥의 세력과의 싸움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 모든 사람은 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이상한 환경에 놓여있습니까? 버려진 것 같고 홀로 있습니까? 예측할 수 없는 적과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시험 과정을 가리키는 표시들입니다.

승리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하지만, 당신이 실패했다 해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고독한 싸움에서 승리했든지 패전했든지 그 후에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에 하나님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내버려두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해 그분의 임재를 거두시는 때가 있다고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 조차도 십자가에서 고독한 순간을 체험하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복된 구세주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깊이 느끼시고 마음이 움직이셔서 “내가 너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속삭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16:24 참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연약하고 허약한 육을 말합니다. 그것을 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힘이 당신 안에서 완전해 질것입니다. 당신의 자아와 죄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까? 그렇다면, 친구여,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계속 따라가십시오. 그분은 이해하시고 무거운 짐을 들어 주시기 위해 당신 곁에 계실 것입니다.

2008년 10월 2일 목요일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싸워 승리하셨다

최근 몇 달 동안 아직도 죄의 습관에 매여 있는 신도들로부터 애석하고 측은한 편지를 많이 받아 읽었습니다. 고투하고 있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썼습니다. “도박을 끊을 수 없습니다...알콜 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외설물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편지마다 이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자유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기도하고 통곡하고 경건한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랫동안 나는 주님께 이 믿는 자들에게 무어라고 답변해야 할지 지혜를 구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이 자녀들의 삶을 알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되고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그들은 당신의 승리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자유를 모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느 날 나는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 성경 구절을 연구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흠없이 제시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성결케 하시기 위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믿음으로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또한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모든 약속들에 공통적인 구절인 “믿음으로”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들 고투하고 있는 크리스천의 문제들에 대해 명백하고 유일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것의 뿌리 근저에 불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단순하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승리를 얻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당신의 옛 성품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지적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당신의 승리는 통곡이나 수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승전하셨다는 믿음을 통해서 와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진정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에 단 하나의 조건이 붙어있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골1:23).

그리스도는 온전히 순종하는 아들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그분의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그대로 우리도 아버지를 온전히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