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예배자 만들기

출애굽기 14장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놀라운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지휘 하에 애굽을 막 떠난 참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로의 군대에게 다급히 쫓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면이 가파른 산들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인도되었고 그들의 앞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바다가 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모르고 있었으나 이 백성들은 그들의 영혼의 가장 어둡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을 곧 체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지막 한계까지 시험할 공포와 절망의 고뇌에 찬 밤을 직면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온전히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의 백성을 예배자로 만드시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진정으로 성경의 다른 어느 장도 이것을 더욱 강력하게 제시하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예배자들은 부흥회에서나 순조롭고 해가 쨍쨍할 때 또는 승리하고 건강할 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배자는 캄캄하고 폭풍이 불어대는 밤에 만들어집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폭풍에 어떻게 대응하는 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유형의 예배자인지 결정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노년의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11:21). 임종 무렵의 야곱은 왜 이렇게 묘사되었을까요?

야곱은 자신의 생애가 끝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손자들에게 축복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애에 일어났던 일들을 회고하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는 예배로 옮겨갔습니다. 이 사람에게서는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팡이에 의지하였을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삶에 대해 경이로워하며, 그는 “경배하였”습니다.

야곱은 그 순간 자신의 영혼이 안식하였기에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이 족장은 결론지었습니다. “내가 어떤 전투를 통과했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셨다. 그분은 항상 신실하셨다. 오, 주님,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을 경배합니다.”

2010년 12월 30일 목요일

작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에 앞서 짧은 기간의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죽습니다! 또 실제로 고난도 당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상처를 입기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고통 없는 구원, 초자연적인 개입을 원합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나는 약하고 항상 약할 것이니 하나님이 하십시오. 내가 초자연적 구원을 기다리며 나의 길을 가는 동안 다 해주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귀신들의 탓으로 돌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그가 귀신을 내쫓아서 우리가 아무런 고통이나 고난 없이 우리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 되었다! 평화로운 승리의 인생에 순풍을 타고 도달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에게 안수하여 모든 메마름을 쫓아버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승리는 항상 고난과 아픔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죄를 보십시오. 그것을 직면하십시오. 예수님이 하셨듯이 고투하며 통과하십시오. 그분의 고난으로 들어가십시오. 고난으로 한 밤을 지나지만 다음날 아침 언제나 기쁨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전투에서 고통이나 고난 없이 우리를 초자연적으로 건져 내셨다면, 모든 시험과 모든 유혹이 중지 될 것이며 자유로운 선택이나 불같은 시험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인류위에 강요하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메마름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고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믿음의 인생으로 가는 길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로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메마름과 더 나아가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4:19).

고난은 언제나 궁극적인 승리에 앞서 잠시 당하는 것이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꼰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기도 생활 유지하기

영적 메마름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기도 생활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하는 대로 왜 아무도 기도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분과 홀로 떨어져 있을 때 우리의 모든 짐이 벗겨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령의 음성은 계속 기도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라!”

영혼의 갈증을 채워 줄 물로 나아오십시오. 자신의 자녀를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께로 오십시오. 모든 죄를 용서한다고 약속하신 생명의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당신을 정죄하기를, 당신을 버리기를, 당신에게서 숨어버리기를 거부하시는 그분께로 오십시오.

우리는 죄책감과 정죄감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할 지 모르지만 그분은 절대로 우리에게서 숨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죄를 범하고 실패했더라도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오십시오. 그분은 경건한 슬픔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즉시 용서해 주십니다. 당신은 후회와 죄책감에 몇 시간이나 며칠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그분의 선하신 은혜로 되돌아가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당신의 마음을 열고 당신의 고뇌와 고통에 대해 부르짖으십시오. 당신의 외로움, 고립된 느낌과, 두려움과 실패에 대해 말씀드리십시오.

우리는 기도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시도해봅니다. 책을 읽고 공식과 안내서를 찾아봅니다. 위로의 말씀이나 충고를 듣기위해 모든 곳을 찾아다니며 친구들, 목사님들, 상담자들에게 갑니다. 우리는 중재자를 찾지만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갖고 계시는 그 유일한 중재자에 대해서는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떨어져 한 두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메마름과 공허감을 흩어버리는 것은 없습니다. 호젓하고 은밀한 골방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건기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44:3).

2010년 12월 28일 화요일

건기 통과하기

수천 명에게 설교를 하긴 하지만 나도 따스한 주님의 존전에서 멀리 떨어져 아주 메마르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메마르고 공허할 때 나에게는 말씀을 읽고자 하는 강한 갈망도 없고 기도하고자 하는 강박감도 거의 없습니다. 내 믿음이 상하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강렬한 것도 알고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맛보고 싶은 욕망도 없습니다. 단지 여러 날 동안, 어쩌면 수 주일이 될 지도 모르는 동안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동안 다른 크리스천들이 복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증거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긴 하지만 세상에 불을 붙이지는 못하며 단지 터벅터벅 걷고 있을 동안 그들은 행복을 체험하는 산꼭대기에 살고 있는 듯 보입니다.

나는 모든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 그들 크리스천 삶의 어느 시점에 건기를 경험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고립됨을 느껴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지 않으면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영광의 이슬이 내려야만 메마름이 멈출 수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확신에 의해서만 절망이 사라져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이 마음, 몸과 영혼을 뜨겁게 덥혀야만 합니다.

내가 최악의 죄인처럼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었으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하튼 나는 분명하고 작은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자녀야, 오너라. 나는 네가 겪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결코 너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너의 아버지이고 너는 나의 자녀이니 우리가 같이 그것을 직면하자.” 나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내 안에 가지고 있고 그분이 나를 그 어떤 건기에서라도 이끌고 나오실 것을 압니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9-10).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43:19-20).

2010년 12월 27일 월요일

요즘 포기하고픈 생각이 드십니까?

많은 목사님들이 주저 없이 포기해 버리는 그들의 교구민에 대해 염려하는 편지를 나에게 보냈습니다. “선량하고 정직한 크리스천들이 죄책감과 정죄감에 압도당한 나머지 절망에 빠집니다. 그들 자신의 기대감에 그들의 삶이 미치지 못할 때, 죄에 다시 빠져들 때, 그들은 포기하기로 결정합니다.....”

한계에 도달한 크리스천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멈춘다는 생각을 감히 하는 크리스천은 거의 없지만 그들은 절망에 빠져 자신들에 대해 포기하는 것을 고려합니다.

오늘날 어떤 목사님들은 단지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계속해서 설교합니다.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모든 크리스천들은 기적을 체험하고, 기도에 즉각적인 응답을 받으며 모두가 기분이 좋고 잘 살고 세상 전체가 눈부시고 장밋빛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렇게 좋고 건강한 것들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런 설교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정직하고 신실한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패하여 포기하는 것도 의아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종교가 만들어 놓은 근심 없고, 부유하고, 성공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크리스천의 이미지에 맞추어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슴 아픈 일,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들, 그리고 가족의 문제들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이 환난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고후1:8).

긍정적인 사고는 이러한 문제들이 떠나가도록 하지 못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것도 사태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치료법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큰 위로와 도움을 준 두개의 절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로지 우리를 건져내기 원하시는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다.

*그분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나의 믿음이다. 그분은 내가 그분을 신뢰하기 원하신다.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당신은 살아남을 것입니다

행복은 고통이나 상처 없이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하루씩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당신은 거부당하고 내버려졌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약해지고 당신은 끝났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때로 슬픔, 눈물, 고통과 공허가 당신을 삼켜 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확신시키십시오. 당신은 거기서 벗어날 것이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삶은 계속 되고 하나님이 도우시면 당신이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지에 대해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고 고통을 멈추게 할 수 도 없지만 우리의 복된 주님이 당신에게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스런 손을 당신 아래 넣으시고 당신을 들어 올려 천상의 장소에 다시 앉히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하시고 당신에 대한 그분의 가없는 사랑을 계시하실 것입니다.

위를 쳐다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당신을 격려하십시오. 안개가 당신을 둘러싸서 당신의 딜레마로부터 빠져 나갈 길을 볼 수 없을 때 예수님의 품에 누워 그저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이 모두 하셔야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믿음과 신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크게 부르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 그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지금도 모든 것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나는 버림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탄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신을 잃거나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은 나를 사랑하신다!”

기본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로 이 절대적 말씀위에 안식합니다.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사54:17).

2010년 12월 23일 목요일

하나님은 당신이 부숴 지도록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감당 할 수 있는 지 정확히 아시고 당신이 부숴 지는 지점에 이르는 것은 허용치 않으실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상기시키십시오.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최악의 신성 모독은 당신의 모든 상처와 고통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늘의 아버지가 당신을 연단하시며 당신이 그분의 복을 받을 준비가 되기 위해 한두 번 더 비통한 일을 겪을 필요가 있다고 하나님이 생각하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징계는 잠시 동안이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 혼란을 초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도 아닙니다. 믿지 않는 부인을 통해서 욥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던 것처럼 원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합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눈을 깜박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모든 동작을 관찰하시고 모든 눈물을 병에 담아 두십니다. 당신의 모든 상처를 감지하시고 당신이 원수로부터 괴롭힘을 분량에 찰 만큼 당한 시점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개입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만 됐다!” 당신의 고통이 더 이상 당신을 주님께 더욱 가까이 이끌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영적 삶을 내리막길로 향하게 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그분의 자녀가 지나친 영혼의 고통과 고뇌로 인해 침몰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정시에 당신을 전투에서 들어 올려 구해 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당신의 상처가 당신의 마음을 파괴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정시에 오셔서 당신의 눈물을 닦으시고 애통대신 희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구하는 자가 되기로 결단함

“내가....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단9:3,4, 20). 이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분리된 삶을 살겠다는 그들의 첫 결단은 하나님을 구하는 자가 되겠다는 두 번 째 결단으로 뒷받침되어야만 했습니다. 진정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그러한 삶을 인도하시는 능력과 권위를 위해 하나님을 구하며 오랜 시간 무릎 꿇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 신실한 기도가 당신을 위기로부터 면제시켜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을 불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와 사자 굴로 데려갈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기도는 신뢰하며 이 모든 것을 직면할 수 있도록 당신을 준비시켜 줄 것입니다 - 예수님을 위하여 산 제물이 되도록!

다니엘의 기도는 그를 즉각 사자 굴로 인도 했습니다. 이번 시험은 이 히브리소년들이 시험을 겪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가왔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80대였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지나야 시험을 겪지 않을까 궁금하다면 아마 이 사실이 당신을 두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얼마간 세월을 지낸 후에 당신은 아마 모든 “중요한” 시험을 거쳤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한데, 여기서 하나님은 조용하고 온유한 영의 사람, 그분의 가장 위대한 기도 용사 중 한사람에게, 그가 수 십 년간 신실한 중보기도의 시간을 보낸 후 그의 일생일대의 위기를 직면하도록 허락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오실 때, 또는 당신이 그리스도안에서 죽을 때, 오직 그 때에만 시험이 그칩니다. 기도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은 더럽혀지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결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단은 또한 하나님을 구하겠다는 결단 없이는 실행에 옮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사악함 가운데서 더럽혀지지 않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여기서 더럽히다 라는 말은 “절연을 통해 자유함”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기준을 조금이라도 타협하는 것은 내게서 자유를 앗아간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열흘 동안 오직 콩만 먹고 물만 마시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가 환관장에게 이것을 고했을 때 환관장은, “너 때문에 내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열흘 후에 너는 병색이 돌 것이다. 네 뺨은 꺼지고 왕께서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 자, 고기를 조금만 먹어라. 너는 단백질이 필요하다. 혈색이 돌도록 포도주를 마셔라. 기운을 차리도록 단것도 좀 먹어라!”

나는 다니엘과 세 명의 히브리인들이 제사로 인해 더럽혀진 음식을 피하려고 했던 것 보다 더욱 큰 의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다른 수 천 명의 조국 사람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보았던 장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충격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할 수 없이 느슨하고, 부도덕하고 저주로 가득 찬 사회였기에 이 네 사람의 영적 민감성이 습격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은 결단하였습니다. 서로에게 “우리는 감히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 도덕 기준을 감히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분리하여 우리 믿음의 여정 안에서 훈련받을 것이다!”

이 네 사람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들과 하나님사이의 일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신은, “주님, 내가 당신이 필요 할 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부르짖습니까?

그 런데 주님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내가 목소리를 필요로 할 때 너는 어디 있느냐? 나는 이 죄가 만연한 시대에 내가 말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순수한 그릇, 목소리가 필요하다. 너는 네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와주기를 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너는 여전히 사악하고 세상적인 체제의 일부이다. 나에게 말해다오, 너는 내 목적에 헌신 되어 있느냐?”

2010년 12월 20일 월요일

교회는 회개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교회는 회개로 시작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십자가에 대해 설교하자 수 천명의 사람이 그리스도께 왔습니다. 이 새로운 교회는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고 모든 인종으로 구성된 한 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직의 생명은 복음 전도, 희생정신, 나아가 순교에 까지 이르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시작은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해 줍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렘2:21). 그런데 주님의 다음 말씀은 그 하신 일에 종종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2:21).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올바르게 심었다. 너는 내 이름과 성품은 지닌 나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는 타락해 버렸다.”

무엇이 교회 안의 타락을 야기했습니까?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인데,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실 때 우상숭배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2:11).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상을 하나님의 백성과 그분 자신 사이에 끼어드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우상숭배의 부분적 묘사에 불과합니다.

우상숭배는 더욱 깊은 마음의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서 첫 번째 우상은 간음, 음란물, 또는 알코올이 아닙니다. 그것은 더욱 더 강력한 정욕입니다. 이 우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공을 향해 쫓기는 야망입니다. 이것을 합리화하는 교리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우상숭배는 오늘날 하나님의 집의 많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깨끗하며 선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 야망의 우상을 세워놓았고 그로부터 요지부동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복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분의 백성이 정직하게 일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하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무리들을 덮치는 격렬한 영이 지금 이 땅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받기 좋아하고 물건을 손에 넣기 좋아하는 영입니다.

최근 어떤 세상 사람이 말했습니다. “가장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죽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비극적인 것은, 크리스천도 이 추구에 휘말려 있습니다.

자신, 자아와 세상적인 야망에 대해 죽는 것을 통하여 사는 복음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 헤매고 있는지요.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그리스도는 초청과 경고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서서 모든 사람을 그분의 자비로운 보호의 날개 아래로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분은 소경, 병든 자, 나병 환자, 가난한 자, 길 잃은 자, 모든 사람이 와서 치유와 용서를 받으라고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군중들은 그분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들에 대해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라고 증언하셨습니다.

이것을 읽는 동안 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구약에서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행하신 사역을 처분해 버리실까? 그분의 은혜, 자비와 깨우침에 대한 제안을 거절한 사람들을 내어버리실까?

네,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23:38). 그분은 그들에게 “이 성전은 이제 너희 집이지 나의 집이 아니다. 나는 이곳을 떠난다. 너희가 허비하고 버린 것을 내가 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덧붙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23:39)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선언하고 계십니다. “내 영광은 더 이상 이전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와 은혜가 성육신하신 분이 여기 서서 말씀하십니다. “이 낡은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은 새로운 것의 시작, 오순절로 옮겨가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낡은 것의 복제품이 아닌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기초부터 새것으로 세워나가실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제사장과 백성의 교회가 될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보는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입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승리하는 교회, 흠 없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보고 있습니까? 길 잃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이 말세에 하나님의 성령이 조성할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까?

당신은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임재하시고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는 교회를 찾았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감사해야하는지요! 당신은 아마 생명 있는 교회를 찾을 수 없는 많은 사람 중 하나 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습니다. “나는 내 영적 굶주림을 채워 주는 교회를 찾지 못했다. 지나치게 오락위주이고, 지나치게 자신에게 집중하고, 지나치게 메마르다.”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은 곧 믿을 수 없는 방법으로 사물을 흔드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두렵게 흔드시는 와중에서 하나님은 굶주린 양을 먹일 참된 목자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2010년 12월 16일 목요일

나는 이미 너에게 말씀을 주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광대한 복음 계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때 보다도 많은 설교자들, 서적들, 더욱 포화 상태의 복음 매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이토록 많은 고민, 시련, 괴로운 마음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요즈음 목사님들은 단지 사람들을 격려하고 절망을 헤쳐 나가도록 돕기 위해 설교를 구상합니다.

이것이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도 이러한 진리를 설교합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왜 그토록 승리와 구원을 보지 못하는가에 대해 여전히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불신입니다. 사실은 이 말세에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미 너에게 말씀을 주었다. 그것은 완성되었고 완전하다. 이제 그 말씀위에 서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을 겪고 있다고 아무도 우리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진실인즉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는 것의 기근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아주 비이성적입니다만 절대로 논리나 이성에 의해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마음에 진정한 믿음이 일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그에 의거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시34:15, 17, 19, 22).

시편의 단 이 몇 구절에서도 우리의 모든 불신을 몰아낼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이제 당신을 촉구합니다. 말씀을 듣고, 신뢰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안에서 안식하십시오.

2010년 12월 15일 수요일

내 영혼은 왜 낙심하는가?

시편 기자는 계속 되풀이하여 묻습니다. “내 영혼은 왜 낙심하는가? 나는 무용지물이고 버려진 것 같다. 내 안에는 쉼이 없다. 주님 왜 그렇습니까? 왜 나는 나의 시련 가운데서 그렇게 무력하게 느낍니까?”(시42:11, 43:5 참조). 이 질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겼던 많은 사람들이 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그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구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너무도 낙심하여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져 낙심한 의인 예레미야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부르짖습니다, “주님, 당신은 나를 속였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이 모든 일을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전 생애에 걸쳐 오직 당신만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가가 이것입니까?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 종들은 각각 일시적으로 불신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혼동과 의심의 때에 그들의 상태를 이해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분은 언제나 그들에게 빠져 나올 길을 가리켜 보이셨습니다. 그들의 시련 가운데서 성령이 그들을 위해 불을 켜 주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증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15:16). “여호와의 말씀이 그[엘리야]에게 임하여”(왕상 19:9). 어느 순간 이 종들은 각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며 그들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이 고투하고 있는 동안 내내 주님은 옆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난 후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슬픔과 의심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나는 너희가 나를 신뢰하기 원한다. 내 말로 돌아가겠느냐? 너희에게 준 내 약속을 붙들겠느냐?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내 말이 너희를 도와줄 것이다.”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내 약속이 네가 필요한 전부이다

믿음은 매우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다른 아무런 증거 없이 그것에 순종해야할 것을 믿음은 요구합니다. 우리의 장애물이 얼마나 크든지 상관없고 우리 환경이 불가능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약속이 네가 필요한 전부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이전의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의구심을 갖습니다. “주님, 내가 왜 이번 시험에 직면 했지요? 나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당신은 내 생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허락하셨습니다. 왜 내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으신가요? 왜 내 영혼이 이렇게 요동하고 크나큰 시련으로 꽉 찼을까요?”

다시 내 말을 들으십시오. 믿음의 요구는 인간에게 철저히 비이성적 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키시며 그분의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나에게 순종해라.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신뢰해라.” 그분은 아무리 우리의 환경이 불가능해 보여도 변명이나, 흔들림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이 아무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고통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와 상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그분의 손에 달려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실 것을 압니다. 그분은 단지 한 말씀으로 모든 시험과 역경을 우리에게서 없애 버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인즉, 하나님은 어떻게, 언제 그분의 약속을 우리에게 이행하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에게 이미 답을 주셨기에 더 설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삶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살아가며 부닥치는 모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전부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이 이미 계시한 말씀 위에 서 계실 것입니다. “너희 손닿는 곳에 내 말이 있다. 내 약속은 모든 믿는 자에게 예와 아멘이 된다. 그러므로 내 말위에서 안식하라. 그것을 믿고 순종하라.”

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믿음의 비이성적 면

하나님이 인류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전적으로 이성을 초월한 무언가를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완전히 비논리적입니다. 그 정의가 바로 비이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합니다. 우리는 요약하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지도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믿으라고 요구당합니다.

나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이 주제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지금 현재, 전 세계에 걸쳐 믿는자들의 많은 무리가 의기소침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에서 우리는 모두 계속해서 실망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의 본성, 즉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성질을 이해한다면 이를 통과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노아에게 요구된 믿음을 숙고해 보십시오. 그는 통제를 벗어났던 세대에 살았었습니다. 인간의 상황이 너무도 사악했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견디실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이제 그만! 인간은 스스로 파멸하기로 작정했다- 이는 중지되어야한다,”(창 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고 했던 노아의 당황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구 전체를 멸망시킬 만한 대 변동의 사건을 일으키실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그 일에 대해들은 것은 하늘로부터 온 이 짧은 말들이었습니다. 그는 120년 동안 더 이상의 지시를 받지 못했으나 단순히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믿음이 노아에게 요구되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대한 방주를 지으라는 엄청난 업무가 주어졌으나 당시 그는 위험한 세상에 살았어야했습니다. 그의 주변 세상 전체가 춤추고 잔치를 벌이고 관능 속에 뒹굴고 있는 동안 그는 믿음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가 받은 말씀을 한 세기가 넘도록 계속 신뢰했습니다. 그의 순종에 대해 성경은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히11:7)다고 말씀합니다.

창세기 12:1-4 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나가 너의 고향을 떠나라.” 당연히 아브라함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어디로요?” 하나님은 단순히 “네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가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각 하는 사람에게 전혀 비이성적인 요구입니다. 모든 크리스천 부인에게 묻는다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의 남편이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여보, 짐 싸요. 우리 이사 가요,”라고 말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연히 당신은 왜,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알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의 대답은 단지, “나도 몰라요.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신 것만 알아요,”뿐입니다. 이런 유형의 요구는 시운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명백히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정확히 이 비논리적인 지시를 아브라함을 따랐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짤막한 말씀이 그가 알고 있었던 것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아,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아무런 해도 당하기 않을 것이다.” 믿음은 아브라함이 단지 이 약속에만 의존해서 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별이 총총한 어느 날 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보이느냐? 할 수 있으면 그들을 세어보아라. 너는 앞으로 그렇게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이다”(창 15:5 참조).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분명 머리를 흔들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그는 나이 많았고 그의 아내 사라도 늙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나이를 훨씬 지났습니다. 하지만 이 때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의지하고 나아갈 증거는 하늘로부터 들려온 말씀, “나는...여호와니라”(창 15:7)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에 대해 노아에 대해 말씀했던 것과 같은 말씀을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다시 한 번, 우리는 비논리적인 장면을 봅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믿음이 의로 해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비논리적일지 모릅니다. 그분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증거를 주시지 않을 때, 상황이 소망이 없어 보이고 우리가 이제 모두 끝났다고 확신할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나를 신뢰해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비논리적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세기에 걸쳐 주님은 자신이 언제나 시간을 지키셨고 사탄이 마지막 말을 하도록 허용한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령의 완벽한 시간에 맞춰 해내고 마십니다.

2010년 12월 10일 금요일

날로 더욱 퍼부으심

에스겔 47장에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바로 종말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 역사를 통틀어 더욱 영광스럽고 더욱 승리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몸은 쇠약해지거나 피식거리며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숫자가 줄어들거나 능력 또는 영적 권위가 감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교회는 능력과 영광의 불꽃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예수님의 충만한 계시를 누릴 것입니다.

에스겔은 기록했습니다.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겔47:10). 주님의 임재의 불어나는 물속에서 헤엄을 칠 믿는 자의 하나된 무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차오르는 물의 환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겔47:3-4 참조).

에스겔은 여기에서 성령의 증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말세에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이 강의 샘과 근원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것의 문자적인 형상을 다음 구절에서 봅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4).

이 물의 흐름이 늘어나는 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오순절의 이미지입니다. 이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이 그들 안에서 솟아오르는 생명의 강이 될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은 온 세상으로 흘러나갈 것입니다(요7:39-39 참조).

이 생명의 강은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받았던 환상 속에서 예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놀라운 여행길에 데리고 갔습니다. 측량하는 막대기를 들고 주님은 1,000규빗, 약 삼분의 일 마일을 나아가셨습니다. 그만큼 떨어진 곳에서 주님과 에스겔은 발목까지 오르는 물속에서 걷기 시작 했습니다.

에스겔은 “그사람이...내게 물을 건너게 하”(겔47:3)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속 선지자로 하여금 앞으로, 더 깊이 더 멀리 물속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하셨습니다. 1,000규빗을 더 나아간 후 물은 그들의 무릎에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계속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겠습니까? 에스겔은 미래로, 바로 우리의 시대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이 환상속의 마지막 1,000 규빗의 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측량한 바로 그 물속에 있습니다. 에스겔이 이 측량한 물가에 발을 디뎠을 때 그 물은 그에게 너무 깊고, 너무 위압적이었습니다.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겔47:5).

하나님이 그에게 “에스겔, 이렇게 수위가 오른 이 바다가 무엇이냐? 이 강이 모두 생명과 부활의 능력에 관한 것이라면 이러한 영광 속에서 헤엄치도록 복 받은 자가 누구 이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나는 이 사람의 궁금증이 어떠했을 지 다만 상상할 뿐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을 마음에 그리어 볼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아마 예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체험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에 대해 현재 받은 계시로 당신은 흥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인에게 앞으로 다가올 증가된 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우리 가운데 경이롭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미 영화된 몸 안에 있지 않고는 지탱할 수 없을 만큼 그분의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면서 자신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2010년 12월 9일 목요일

까불림이 다가 올 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22:31).

사탄은 오로지 자신의 일을 위협하는 사람들만 까부르기 위해 찾는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무를 쫓아갑니다. 하지만 마귀는 왜 베드로를 까부르려고 했을까요? 왜 그를 시험하려고 안달했을까요? 3 년 동안 베드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불에 의한 또 다른 세례를 약속하신 것을 들었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제 마귀는 베드로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들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앞으로 행할 더욱 위대한 일에 비하면 지난 3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유다를 이미 끌어내리고 나서 그는 베드로의 믿음을 실패로 만들기 위해 베드로 안에 구축해 나갈 수 있는 어느 정도의 부패성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처럼 지금 당신도 흔들리고 까불림을 당하면서 체 안에 들어있을 지 모릅니다. 왜 하필 나에요? 왜 하필 이때지요? 라고 당신은 묻습니다. 우선, 당신은 지옥에서 그런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데 대해서 기뻐해야합니다. 당신이 순종의 선을 넘지 않았던 들 사탄은 절대로 하나님께 당신을 까부르도록 승락을 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을 두렵게 하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흔들어 대면서 당신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데 그가 힘을 쓰겠습니까? 당신이 이 말세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당신을 까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시대에 다시 한 번 새 일을 행하고 계시며 당신은 그분에 의해 많은 사람에게 강력한 증인이 되도록 구별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자유롭게 하셨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당신의 은사가 클수록, 당신의 가능성이 클수록, 하나님의 뜻에 더욱 당신이 항복할수록 까불림은 더욱 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까부르는 불을 통과하고 있을 때 그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예수님은 베드로의 임박한 실족에 대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분은 그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눅22:32)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의 본을 보고 내가 실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18:24)고 말씀하신 바로 그 친구인 것입니다. 그분은 베드로에게서 장점과 단점을 보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할 만하다. 사탄이 그를 원하지만 나는 한층 더 그를 원한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이 닥쳐올 줄 오래 전에 보셨습니다. 그분은 아마도 베드로에 대해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왕국에 베드로가 얼마나 필요한지, 그를 친구로 자신이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이야기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사랑을 주십시오! 형제와 자매가 타협하거나 문제와 재난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볼 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것처럼 단호하게 경고 할 만큼 그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탄과 전쟁하는 데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되었으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당신은 마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를 까부를 허락을 받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나의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선을 넘기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그분은 사탄의 능력의 치열함에 대해 그리고 사탄이 주님의 백성을 체로 치기위해 지옥의 모든 무기를 가지고 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나는 우리 중 누구도 영적인 영역에서 지금 맹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투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행하기로 그들의 갈급한 마음을 확정한 모든 신자들을 파멸하기 위해 사탄이 얼마나 굳게 결심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크리스천 여정에 있어 우리는 지옥의 전 경보시스템을 울리게 하는 순종이라는 선을 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선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만 의지하는 삶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흑암의 왕국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마귀의 통치지와 권세의 최대 표적이 됩니다. 전심을 다해 주님께 돌이킨 모든 믿는 자의 증언은 갑작스레 몰아닥치는 이상하고 혹독한 시련과 시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순종의 선을 넘어갔다면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8-34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이 체질 당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31절). 그리스도 당시에 곡식을 다루는 노동자들은 자루에 곡식을 담기 직전에 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물이 덮인 정사각형 상자에 밀을 퍼 넣고 상자를 뒤집어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그물사이로 모래와 먼지가 떨어져나가고 곡식 알갱이만 남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까부르다라는 말은 “흔들어 분리하다”라는 뜻으로 갑작스런 시련의 휘저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은 네가 단지 모래나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어서 너를 체 속에 넣고 흔들면 땅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시험과 시련이 있고 또 까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까부르는 것이 사탄이 중점적으로 총공격을 퍼붓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보통 짧지만 혹독한 기간으로 압축 되어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까부르는 것은 단지 며칠 동안이었지만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믿음이 흔들리고 충격적이고 후회스러운 날들이었습니다. 이 까부르는 시간은 베드로를 실패하게 만들었던 자만심을 날려 보냈습니다. 이 까부름은 그의 증언을 망쳐버릴 수도 있었던 방해 요소들을 그의 영혼에서 단번에 제거해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던 것이 명백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서도 그분은 똑같은 방식으로 기도하십니다.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고립의 시간

한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신성한 침묵을 직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압니다. 내 뒤의 조용하고 세밀한 음성이 완전히 침묵해 버려 뚜렷한 인도 없이 온통 혼동된 기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내 심령을 조언의 말로 충족시켜줄 친구도 가까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나에게 있었던 모든 유형의 인도함이 실패해 버리고 나는 철저한 흑암속에 남겨졌습니다. 나는 내 길을 볼 수 없었고 연이어 실수를 범했습니다. 나는 “오, 하나님, 무슨 일이 있어났나요?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로부터 얼굴을 가리십니까? 우리에게 신뢰와 의뢰를 가르치기 위해 잠시 동안 그분의 손을 들어 올리시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성경은 확연히 답해줍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32:31).

당신은 지금 시련의 홍수 속을 통과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하늘이 놋쇠 같다고 말 할 때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압니다. 반복되는 실패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당신에게 시련의 잔이 주어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무도 당신의 심령 안의 필요를 어루만질 수 없습니다.

그 때가 바로 당신의 자리를 지킬 때입니다! 웃거나 즐거워할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그 순간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은 영혼 속에 혼란 밖에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29:10).

곧 당신은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흥분하지 말라, 겁내지 말라. 그저 나를 바라보아라. 모든 것을 내게 맡겨라. 그리고 당신이 여전히 그분의 놀라운 사랑의 대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10년 12월 6일 월요일

하나님의 권능을 받고 그리고 가라

권능의 세례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사도행전 1:6). 예수님은 명확히 대답하셨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7절).

그들의 질문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멈춰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그 방으로 시작해서 단지 우리들만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실 겁니까? 우리가 바로 헤롯과 로마를 무너뜨릴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바로 땅을 정결케 하고 왕국을 세워 당신을 돌아오게 할 사람들 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 중 몇 사람 안에 있는 지도권과 권위에 대한 정욕을 다루셔야만 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 그들의 질문 안에 지위와 권력에 대한 갈증을 넘어 무언가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것은 무언가 위대하고 궁극적인 운명에 연루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특별하고 싶은 욕구 - 때에 맞는 타당한 인물이고 싶은 욕구입니다!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 당신의 예언적 계획 어디쯤 우리가 들어있습니까? 우리가 새 날이 동트려고 하는 한 체제의 종말에 있음을 아는 것은 대단한 영적 동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운명의 날에 살고 사역하며 당신이 우리를 쓰셔서 모든 것을 매듭짓고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면 우리가 얼마나 흥분하겠습니까!”

성도여러분, 운명의 인물이 되고 싶은 이 동일한 욕구는 어느 정도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퉁명스러웠습니다. “때와 시기는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예수님은 운명의 사람들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에 대한 증인들을 원하십니다! “문제는 ‘예언적 시기’나 너희에게 지정된 위대한 운명이 아니라 나는 이 현 세대에게 증언할 증인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나를 깊이 찔렀습니다. 오늘날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바로 이 시간 하나님의 예언적 시계 상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대 환란에 들어가려는 참일까요?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마지막 남은 자를 거둬들이는 중이실까요?

그때 나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은 네가 알 바 아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의 권능을 받고 나가서 증인이 되라!” 우리는 우리 등불의 심지를 가다듬고 불을 켜들고 기대하며 기다리면서 주의 깊게 살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재림을 갈망하고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경고를 선포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그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사람을 쓰십니다

나는 다수의 크리스천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죄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 안전하고 조용한 산속의 은신처로 도피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여 말합니다. “이 모든 도덕적 타락에 대해 기독교인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대하고 사납고 악한 도시에서 일개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예수님께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 되겠지.”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처럼 보잘 것 없는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있을까? 나는 돈도 없고 훈련받은 것도 없고 아무 영향력도 없고 다만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 있을 뿐인데.”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을 초자연적으로 퍼부으셔서 많은 무리를 그분의 왕국으로 쓸어 담거나 또는 심판을 내리셔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든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움직이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은 하나님이 악한 때에 사물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폐허를 재건축하는 그분의 방법은 언제나 그분이 감동시킨 평범한 남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강한 믿음과 능력으로 무장시키고 전투에 투입함으로써 이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말씀과 기도에 헌신한 사람들로 구성된 거룩한 사역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 위에도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을 잘 돌보는 남녀들로 마음이 감동되어 하나님을 구하고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 외에는 마음속에 어떤 계획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즉각 복무하라고 당신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평범한 사람, 평신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이 “학문 없는 범인”(사도행전 4:13)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쓰십니다.

성경은 또한 오순절 다락방에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사도행전 2:4). 모두가 전투에 강하게 되었고 모두가 담대하고 강력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 성령충만한 신자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다른 잘 알려진 사도들 뿐 만 아니라 과부들, 젊은이들, 하인과 하녀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을 압니다-“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사도행전 6:8).
그는 사도도 아니었고 안수 받은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기 위해 교회에서 식탁을 섬기라고 택함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했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는 곳에서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이 감동되고 기도가운데 그분을 구하며 스데반처럼 성령으로 인해 믿음과 권능이 충만하여 나아가는 평신도들을 사용하십니다!

2010년 12월 2일 목요일

예수님께 수갑채워짐

바울은 종종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the prisoner of Jesus Christ]”(에베소서 3:1)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는 주님의 포로가 된 것이 자신의 천직, 그의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에베소서 4:7).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디모데후서 1:8). 나이가 들어서도 이 사도는 주님께 붙들리고 그분의 뜻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빌레몬서 9절).

바울은 주님이 그에게 수갑을 채워 체포한 순간을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서신을 받아 쥐고 기독교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로 결단하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오도된 열정가운데 증오, 원한, 분노로 가득 차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사도행전 9:1).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사도행전 9:3). 그 빛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눈이 멀었습니다. 그 빛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무력한 포로가 되어 남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갔어야만 했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증언했습니다. 그는 시력을 잃은 채 금식하며 사흘간 고립된 방에 있었습니다. 영으로, 혼으로, 육신으로 그는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사흘 동안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이 사울을 수갑에 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인 바울로 만들고 계셨습니다!

이 생생한 장면에서 바울은 자신의 독립을 내어놓고 그리스도의 멍에에 순복했습니다. 자신의 손을 평생 수갑에 채우기 위해 예수님께 내밀었습니다! 그의 고통에 찬 기도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 주님, 나는 당신의 뜻을 행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그토록 눈이 멀 수 있었을까요?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며 나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생각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나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예수님, 여기 제 손이 있습니다. 내게 당신의 수갑을 채우십시오. 당신의 뜻에 포로가 되게 하시고 당신이 내가 가기 원하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당신의 강한 오른 팔에 나를 수갑으로 채워 주소서!”

2010년 12월 1일 수요일

허송한 세월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요엘 2:25).

회개하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기 전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송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죄와 반항의 느치가 먹어버렸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의 피 아래 용서받았고 당신의 과거기 잊혀 졌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 세월을 돌이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안에 더욱 더 깊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그분의 심령에 큰 기쁨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나 자신과 가족에게 그 같은 고통과 고난을 주지 않았을 텐데. 나는 얼마나 눈이 멀었던가, 얼마나 마귀의 노예로 지냈던가! 내 영혼과 온전한 정신을 잃을 뻔 했지 않았던가. 그렇게 허송한 모든 세월을 보상할 길이 전혀 없구나.” 얼마나 자주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바울은 생의 말기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디모데후서 4:7-8 참조).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3-14). 다시 말하면, “당신의 과거는 잊어버리고 예수 안에서 달려가십시오,”라고 합니다.

사탄이 즐겨 사용하며 괴롭히는 방법은 당신을 무섭게 하기 위해 옷장에서 해묵은 해골을 끄집어냄으로써 당신의 과거를 들먹이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옛 중독이나 정욕이 다시 일어나 당신을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설득하려 들 것입니다. 또는 당신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당신은 원수의 목표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살아있는 동안 내내 후회의 고통을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기억이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당신의 과거는 끝난 일입니다. 정죄와 죄의식에 관한 한 하나님은 “과거는 잊어버려라.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향해 달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이러한 회복의 모습을 봅니다.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태복음 12:13). 예수님이 당신을 회복시키실 때 상처도 또한 고쳐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간 상처들, 즉 당신이 허송한 세월에 대한 근심과 후회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 허송한 세월들을 당신에게 회복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십시오!

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오직 가족을 위하여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창세기 43:30).

이것이,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를 향한, 우리 구세주의 마음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의 앞에서 먹고 마시며 그의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렸습니다(창세기 43:32). 이 말의 중요성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은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진정으로 그를 알지 못한 채, 사랑과 은혜의 계시를 받지 못한 채 요셉 앞에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계시를 아직 받지 못한 채 주님의 존전에서 먹고 마시며 찬양하는 사람들 일 수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감정이 여전히 그들 마음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노래하고 예배하며 찬양하고 집에 돌아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셨다. 내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다른 크리스천들을 돌보시는 것처럼 나에게는 진정한 관심이 없으시다,”라는 동일한 거짓말로 되돌아가는 크리스천들의 경우입니다.

사랑에 대한 온전한 계시를 받기 전에 요셉의 형제들이 거쳐야할 마지막 한 단계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러한 계시는 마음이 상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7). 형제들은 아직 심령이 상하지 않았습니다(창세기 43:34).

이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나 요셉이 그들에게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 전에 그들의 비통함과 인간적인 자원의 막바지에 다다라 완전히 깨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을 마지막으로 시험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의 청지기에게 막내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가 쓰는 은잔을 집어넣도록 명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성읍을 벗어나기도 전에 요셉의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잡고 잔을 훔쳤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죄라고 확신했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창세기 44:9).

그들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창세기 44:16). 그들은 서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자존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낮아지고, 상하여 마침내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부르짖었습니다. “포기합니다! 항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계시되었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창세기 45:1).

세상은 이 같은 사랑의 계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제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용이라는 가족의 유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세기 45:2)고 말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을 수 있지만 오직 가족만이 그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가족만이 그러한 사랑과 긍휼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겸손하고 심령이 상한 자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은 그분의 가족가운데서 기뻐하십니다. 지난 모든 세월을 통틀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조차도.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십시오.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사랑의 계시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이 위기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창세기 41:56, 42:1-3).

그들이 요셉을 노예로 파는 죄를 범한 지 20년이 흘렀고 이제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그는 기근에 대비하여 7년 동안 곡식을 저장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기위해 애굽으로 간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더 크고 나은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랑의 계시를 받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비, 용서, 회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이었습니다. 심판받아야 마땅했으나 그들은 순수한 은혜를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기억하면서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그분을 실망시킨 모든 사람에 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입니다.

20년 동안의 죄와 속임으로 요셉의 형들은 요셉과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이 때쯤 그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가정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의 궁정에 도착하여 요셉 앞에 왔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요셉은 그들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창세기 42:8). 형들은 요셉이 꿈꾸었던 것처럼 그에게 절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진노하고 복수심에 불탔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처럼 사랑했던 형들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연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형들에게 쌀쌀하게 대하고 그들을 첩자로 몰았을까요(창세기 42:7)? 한 때 나는 요셉이 조금 복수한다고 생각했었으나 그의 동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교만한 사람들은 아직 은혜와 긍휼의 계시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의 죄의 대단히 추악한 모습을 보고 그들의 죄와 수치를 직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로지 긍휼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도록 자신들의 종착점에 도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입니다 - 자신들의 종착점에 도달한 모든 사람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

하나님은 이 진리를 요셉에게 보여주셨고 요셉은 형들을 사흘 동안 옥에 가두었습니다.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죄에 대한 진실을 대면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의 악한 본성을 보여주기 위해 법을 집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세기 42:21).

우리 자신의 자원들이 모두 고갈되고 그분의 자비를 체험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은혜는 모든 수치와 죄의식으로부터 구원합니다.

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심령으로부터의 부르짖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부르짖음 -여느 부르짖음이 아니라 구원해 달라는 겸손한 부르짖음- 에 응답하여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이 심령으로부터의 부르짖음에 대해 많이 언급합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시편 18:6).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시편 106:43-44).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언제나 하늘로부터 오는 치유의 말씀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손을 내밀면 어느 누구도 지나치게 사악하거나 지나치게 소망이 없지 않습니다. 므낫세 왕이 그 본보기입니다. 성경은 그가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열왕기하 21:2-6).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역대하 33:9-10).

이토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악과 흑암에 사로잡힌 자가 소망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만일 그가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고백하고 믿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므낫세는 결국 쇠사슬에 매여 외국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죄의 값에 대해 얼마나 생생하게 보여주는지요! 그러나 그의 환난가운데 그는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들으셨고, 용서하셨고 그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역대하 33:12-13).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거하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산에와 예루살렘에 쌓은 모든 제단들을 다 성 밖에 던지고”(15절).

소망, 용서, 자비, 사랑과 회복의 말씀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회개하며 온전해져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고침 받지 못하고 회복되지 못할 만큼 형편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010년 11월 25일 목요일

일어나 걸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요한복음 5:8). 베데스다 못에 있던 앉은뱅이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며 온 땅에 다니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예수님에 대해 다른 이야기들도 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에 얽어 매여 있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불행과 슬픔에 싸인 그에게 오셨고 자비를 베푸실 참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불쌍한 사람의 질병에 대해 마음이 움직이셨고 그에게 다만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이 곳을 떠나 걸어가라!”

후에, 이 사람을 고치시고 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이 사람을 만나 말씀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는 의지 할 곳 없이 절망 가운데 연못가에 누워서 그가 지냈던 고통스러웠던 세월 중 가장 중대한 결정에 직면했습니다. 부활 소망에 대한 말씀이 그에게 다가왔고 그는 도전을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일어나 온전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연민에 빠져 그곳에 누워 홀로 죽을 것인가!

그 사람은 불신하여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안 될 거야. 왜 하나님이 이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뽑아 고쳐주시겠나? 나는 이런 상태로 죽을 운명이야,”라고 생각하며 연못 옆에 계속 누워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뜻을 거슬러 그를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르짖음이 상달되었고 구원의 때가 이르렀음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요한복음 5:19-20).

요약하면, 예수님은 의심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가 고침받기를 원하시므로 내가 그를 고쳤다. 나는 오직 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한다.” 이 사람을 완벽하게 온전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바라심이었습니다.

당신이 기운이 빠지고 연약할 때는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숱하게 허송세월 했을 때, 죄로 인해 당신의 몸과 영혼이 불구가 되었을 때, 당신이 형편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아직도 나에게 관심이 있으실 이유가 있을까 의문이 들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한 발작 앞으로 나와 “주님, 당신의 말씀만 의지하여 내가 일어나 걷겠습니다 - 당신과 함께!”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 죄와 의에 대한 모든 교리를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에 대해 심오하고 깊은 의미로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당신이 순종의 첫걸음을 떼어 일어나 주님께로 돌이키면 모든 것이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한복음 7:17).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진정한 믿음의 기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가 소진할 때는 우리가 계속 반복해서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부인할 때 외에는 없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오늘날 스스로 만들어낸 광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기쁨도 없고 승리도 없습니다. 그들을 볼 때 당신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단지 그들을 스스로의 불평과 원망에 넘기셨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언약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의 전에서 푸른 나무들로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능력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신의 문제들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또한 주님께 소중합니다. 당신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전에서 푸른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 서 있으십시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편 18:19).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초입니다!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당신은 하나님의 보배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잠언 6:26). 이 구절에서 말하는 음란한 여인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들을 사냥합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에서 성경은 이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땅을 탐지하기 위해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40일 후에 이 정탐꾼들이 돌아와 그중의 열 명이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속에 세 가지 거짓말을 심어놓았습니다. (1) “그 땅에는 백성이 너무도 많고 그들은 우리 보다 너무 강하다.” (2) “성벽은 너무 높고 견고한 진은 난공불락이다.” (3) “그 땅에는 거인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의 상대가 못된다. 우리는 의지할 곳 없다! 끝장이다!”

이 거짓말들은 단숨에 이스라엘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성경은 이 백성이 밤새도록 절망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민수기 14:1). 2백만이 넘는 백성이 울며 통곡하며 슬퍼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의 통곡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는 오늘도 동일한 세 가지 거짓말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던집니다. “네 시련은 너무 여러 번 닥친다. 네 유혹은 너무 압도적이다. 너는 너무 약해서 다가오는 세력을 거역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은 또한 오늘날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a special treasure] 되겠고”(출애굽기 19:5)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a peculiar, precious, special people] 삼으셨느니라”(신명기 14:2).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소중하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 이스라엘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소망에 차 있을 수 있던 열쇠입니다.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수기 14:8).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므로 그 땅은 이미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윗이 받았던 계시도 이와 동일합니다. “그가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인도해 내시고 나를 구원하셨도다.” 이처럼 오늘날 승리하는 모든 크리스천은 사랑이 풍성하신 그들의 천부에 대해 이와 같은 계시를 받습니다. “우리는 패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대적은 우리의 먹이다. 우리가 주님께 소중하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19일 금요일

당신의 천부께 당신은 특별합니다!

나는 우리 아이 중 하나가 십대였을 때 나에게 와서 고백한 말을 듣고 느꼈던 고통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아빠, 나는 한 번도 아빠를 기쁘게 해드린 적이 없다고 느껴요. 아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이제껏 아빠를 실망만 시켜 드린 것 같아요. 아빠는 내게 정말로 실망하셨을 거예요.”

이보다 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말은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기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느꼈는지 스스로 자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 속 깊이 고통을 느끼며 나는 눈물이 글썽한 아이를 껴안았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나는 이 아이에게 내 사랑을 보여주었는데. 계속 반복해서 말해 주었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는데.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나의 사랑 속에서 안전하게 느끼는데. 이 아이는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전혀 쓸데없는 불행과 죄책감을 지니고 살았단 말인가?”

나는 사랑하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게 항상 특별하단다. 너는 내 눈동자와 같거든. 네 생각을 하면 나의 전체가 밝아진단다. 물론 때로 네가 어리석은 일을 하기도 했지만 네 형제들도 그랬단다. 너는 용서받았지. 너는 정말로 미안해했고 나는 결코 한 번도 너를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단다. 너는 내게 오직 기쁨이란다. 너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지. 너는 늘 내 마음을 기쁘게 한단다.”

많은 크리스천들과 그들의 천부의 관계가 바로 이렇습니다. 마귀가 이 믿는 자들이 자신들이 단지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그분을 결코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분의 진노가 항상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얼마나 비참하게 인생을 사는 길인지요. 자신의 자녀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이 태어난 날부터, 당신은 당신의 천부께 특별합니다.

2010년 11월 18일 목요일

당신은 하나님께 귀한 존재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

당신이 500년을 산다고 해도 당신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큼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육은 하나님께 용납되지 않습니다. 육은 개선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육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처리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그분이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오, 하나님이 신실한 목사님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며 그분 말씀에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장로님들이 그분께 소중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난과 시험, 시련을 견뎌내고 승리했으니까요. 하지만 나처럼 문제투성이 실패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기복이 심한 내 삶 때문에 그분은 내게 넌더리가 나실 게 분명합니다.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분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지만 틀림없이 내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경이로운 예언을 꼭 이해해 보십시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이사야 43:1).
이 말씀은 오로지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불신으로 인해 강도당하고, 약탈당하고 덫에 걸리고 감옥에 던져진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시점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너희의 모든 실패 후에, 내가 이 소망의 메시지를 들고 너희에게 왔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17일 수요일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세 명의 히브리 소년이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졌을 때 네 번째 사람이 그들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들은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옷이나 머리카락에서 연기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구원이 바로 당신이 영적인 계곡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져다주기 원하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당신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당신이 하나님께 유화적인 제스처를 썼기 때문일까요? 기도시간을 늘렸습니까? 성경 읽는 데 더 시간을 보냈습니까? 이 모두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참된 계시를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이사야 43:4-5).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 불과 홍수를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가 이 모든 것을 통과할 동안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너를 구원해 낼 것이다. 오직 너희가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의 이름을 안다. 너희는 내 마음의 기쁨이다.”

2010년 11월 16일 화요일

하나님의 순전한 긍휼

이사야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크나큰 기쁨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예언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1-2).

이사야는 문자 그대로의 홍수나 불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겪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홍수는 시련을, 불꽃은 유혹을, 물은 시험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파멸시키고 압도당하도록 하려는 사탄의 시도들입니다.

이사야의 말은 이스라엘을 위한 순전한 긍휼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백성은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련 때문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령이 상한 예언자를 보내주셔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너희들이 그분께 속하였다고 말하기 원하신다.”

지금 당신은 소용돌이치는 물 가운데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소멸시키려고 위협하는 시련과 유혹에 압도당하는 듯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예에서도 보듯이 주님은 언제나 물결을 잠잠케 해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항상 홍수를 막아주시지는 않으며 항상 불을 꺼주지는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약속하십니다. “나는 네가 끝까지 통과할 때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시련과 상황이 너를 파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너를 소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 나아가라. 내가 네 옆에 함께 있고 너는 끝까지 통과해 저편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2010년 11월 15일 월요일

모든 구원의 열쇠

성령께서 다윗에게 모든 구원의 열쇠에 대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원수에게서, 나의 모든 슬픔과 그리고 지옥의 권세로부터 구원해주신 이유는 내가 그분께 소중하기 때문이로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시는 도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편 18:19). 당신은 구원이 필요합니까? 정욕과 유혹과 시련으로부터? 정신적, 영적 또는 육체적 문제로부터? 당신이 승리할 수 있는 열쇠는 위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십니다! 그분께 당신은 소중합니다!

아가서에서 주님은 자신의 신부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아가서 7:6). 이 구절에 쓰인 세 개의 히브리 단어는 유사한 뜻을 갖고 있습니다: 아름다운(fair)-귀한(precious); 화창한(pleasant)-즐거움(pleasure); 즐거움(delight). 이 단어들은 예수님이 그분의 신부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분은 신부를 바라보며 말씀합니다. “너는 참으로 아름답고, 다정하며 즐거움을 주는구나. 사랑아 너는 내게 소중하구나.”

이번에는 신부가 자랑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가서 7:10). 이것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그가 나를 기쁨으로 뒤쫓는구나. 내가 그에게 너무도 소중하기에 나를 따르는구나.

이와 같은 생각들은 시편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편147:11).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편149:4).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멧비둘기

내가 고군분투할 때 하나님은 다윗 왕의 비밀스런 소망을 나에게 보여주심으로 나를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애통하며, 불평하며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진노하셨는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원수를 멸”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시편 74:11 참조).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원수가 지배하는 듯이 보였고 절망 가운데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시편 74:19).

다윗처럼, 우리도 자신들이 작은 멧비둘기처럼 악한 자의 올가미와 함정에 둘러싸여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장 혹독한 시련의 시기에 나 자신을 그분의 사랑스런 새로 여기며 악한 자의 올가미로부터 나를 지켜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 위에 안식하는 것이 나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멧비둘기처럼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구세주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비둘기의 형체, 즉 그분의 성령으로 나에게 자신의 끊임없는 사랑과 지속적인 보호를 계시해 주시면서 임하시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토록 위대하고 위엄 있는 하나님이 나의 필요에 상관하시기 위해 멧비둘기로 자신을 낮추시겠다니 이 어찌 말로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분이 비둘기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여,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까? 가정에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이 모든 일이 너무 심각하여 때로 혼란스럽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작은 멧비둘기이며 그분은 절대로 당신을 악한 자에게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원수의 모든 올가미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며 당신이 곤핍할 때 그분이 당신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당신에게 속삭이며, 말씀하시며 비둘기로서 항상 당신 곁에 계십니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아가서 5:12).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아가서 6:9)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입니다 - 그분의 비둘기- 한 마리 멧비둘기.

참새는 땅에 떨어지지만 멧비둘기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장중에서 그분의 사랑 안에 무사히 안전하게 보호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곤경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며 자신이 영원히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증명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온전히 안식하고 신뢰하며 기뻐하면서 모든 것을 통과해 나올 것입니다.

2010년 11월 11일 목요일

갈렙

강력한, 불굴의 정신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갈렙은 주님께 밀착하는 타입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인생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모든 굴곡을 겪으면서도 주님과 계속 동행하였던 인물을 상징하는 여호수아와 분리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갈렙은 요단너머로 파송되었던 정탐꾼과 동행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이 그를 “죽음의 장소”인 헤브론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곳에 매장되었고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른 족장들도 매장된 곳이며 훗날 그곳에서 다윗의 왕조가 시작될 것이었습니다. 경이에 싸여 갈렙은 신성한 산에 올라갔고 믿음이 그의 영혼에 밀려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성스러운 곳을 소중히 여겨 그 후로부터 헤브론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기 원했습니다.

갈렙에 대해서 “나를 온전히 따랐”(민수기 14:24)다고 말합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결코 동요하지 않았으며 85세에 이르러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여호수아 14:11).

노년에 갈렙은 가장 위대한 전투를 감행했습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14:12).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14:13).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14:14).

이 메시지는 참으로 영광에 넘칩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 과거 어느 순간 충만함을 경험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끝까지 성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동하지 않고 당신의 영적 능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년에라도 “주님을 온전히 좇기”위해서!

갈렙의 기업 헤브론은 연합한 집단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엇과 연합했다는 말입니까? 죽음입니다! 요단에서 죄에 대해 죽은 것 뿐 만 아니라 죽음의 장소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한 자들과 사는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이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에 대해 죽는 이 길을 내게 주소서!”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기 위해 제단을 쌓았었고 이곳에서 갈렙과 그의 족속이 산 제물을 드리는 제단과 지속적으로 연합하여 살아갈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갈렙의 온전한 마음은 그의 자녀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불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족속 중 두 종족과 반 종족이 돌이켜 세상과 우상을 포용한 반면, 갈렙의 가족들은 주님 안에서 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안식, 기쁨, 평강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힘을 다하여”(마가복음 12:30) 마지막까지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2010년 11월 10일 수요일

완주하기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누가복음 14:28-30).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공생애를 마무리하실 즈음, 추종자들에게 선한 의도만으로는 험난한 시기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수의 추종자들이 경주를 마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최고로 비극적인 상황은 그리스도를 붙들고 성숙한 제자로 자라가려는 의도로 출발했으나 표류해 버려 그분에 대해 냉랭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는 기초를 놓았으나 먼저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공하지 못했습니다. 자원이 바닥나 그만큼 진행하다가 멈추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일깨워 우리가 모두 변화하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가만히 정지 상태로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매일 변화되어 가든지 아니면 당신의 옛 육적인 길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리스도를 붙들려고 결단한 사람들은, 즉,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경주를 마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지혜에 자라가고 이 세상과 쾌락에서 점점 더 멀어지며 일층 더 하늘의 마음이 되어갑니다. 그들의 영적감각이 고도로 훈련되어 하나님의 것과 육의 것에 대한 분별력이 계속 증가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리스도에 허기를 느낍니다. 세상에 속한 부속물들을 끊어버리고 그분의 영광가운데 그분과 함께 있기를 더욱 간절히 갈망합니다. 그들에게 죽는 것은 유익이고 최고의 상은 영원히 그분 옆에 있기 위해 그분의 임재로 불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그분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그분께 있을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 교회는 이 세상과 온전히 동떨어져 있고 그분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썩어질 것으로부터 썩지 않는 상태로 이전하는 것은 다만 그분의 임재로 들어가는 마지막 사랑의 한걸음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 경주에서 당신은 어쩌면 넘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어나 다시 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치고 다리를 다쳐 트랙에 누워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약해진 무릎을 들어 올리시고 완주하도록 초자연적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로 당신은 경주를 마칠 것이고 주님이 결승선에 서서 “잘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2010년 11월 9일 화요일

우리의 유일한 양식!

우리가 먹는 음식이 바로 우리라는 말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60절). 유대인들은 그러한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했습니다(66절).

이 주님을 먹는다는 것을 단지 성찬 식탁으로 전락시키는 사람은 주님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만찬은 다만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매일, 그분을 먹고 마시기 위해 나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먹을수록 더욱 영적인 삶이 우리 안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식탁에 와서 먹고 강해지라는 공개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믿음의 기도 가운데 그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지 않으면 뼈가 앙상해지고 약해져서 쉽사리 원수의 먹이가 됩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서 주님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된 남녀종들로 구성된 남은 자 사역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을 따라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기를 구하는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적지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생명의 원천이 없습니다. 그들은 빈번하게 주님의 임재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생명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에 대항하기 위해 그분의 모든 자녀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 힘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떡을 먹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우리의 영적 건강과 힘이 이것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들을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한복음 6:57). 예수님은 아버지와 그토록 친밀하게 연합하여 있었고 오직 그분의 뜻을 행하기로 헌신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들이 바로 그분의 음식과 음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낸 결과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듣고 봄으로써 매일 지탱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4:32, 34). 더 나아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한복음 6:27).

우리는 이 힘의 비밀을 감히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조차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먹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주님과 따로 떨어져 그분의 임재가운데 양질의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굶주린 영혼을 먹이기 원하시고 이 위험한 시기를 통과하도록 당신을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이 전심으로 그분을 구할 때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2010년 11월 8일 월요일

온 집안 식구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0:44, 46). 이것은 고넬료 집안에 관한 말씀입니다.

온 집안 식구들에게 임하여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천상으로 들어 올린 사적인 오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적인 일입니다! 모든 친척들과 어린아이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여 드리는 찬양은 가슴 벅찬 감동입니다. 이 모두가 한 사람이 기도 응답이 올 때 까지 하나님을 구하기로 작정한 결과입니다.

여기, 우리는 성령이 물 붓듯 부어지는 때에, 많은 가정에서 그분의 역사와 임재의 증거를 거의 또는 전혀 보지 못한 채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 가정들의 많은 수가 현재 하나님의 성령 보다는 세상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그분이 거하시는 곳에는 안식과 평강,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이 세상의 영에 대한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영적 권위를 되찾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인 남편과 아내가 전적으로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영과 사랑가운데서 함께 흘러넘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극심한 위험이 닥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또는 두 사람 모두가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개인적인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 성령이 기사를 행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땅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매우 강력하고, 초자연적인 일로써 지옥을 두려워 떨게 합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분리하여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로이 세례받은 성도들에게 번영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새롭게 생생하게 만나는 것입니다. 집, 땅, 가구, 차들, 옷들, 이 모든 것들은 영광의 주님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가정의 구원자, 우리 가정의 구원자로 계시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는 영적 세계를 들여다보았고 귀신들이 도망치는 것을 봅니다. 나는 한때 잠자던 거인이었던 하나님의 진정한 교회가 성령의 자극을 받아 떨치고 일어나 자신의 세력과 권위를 청구함으로써 흑암의 권세가 두려워 떠는 것을 봅니다.

전 가정들이, 전 교회들이, 전 사역들이 뒤집어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것들에 진지해져라 그러면 내가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울 것이다!” 아버지께서 전 세계에 걸쳐 위대한 일을 행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강력한 축복의 참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10년 11월 5일 금요일

고넬료는 자기 집을 구원 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사도행전 10:1-2).

고넬료의 삶은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집을 구원했는지, 또한 그의 헌신이 어떤 기적을 불러일으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고넬료는 자신과 자신의 집이 하나님의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결단하고 실제로 하나님을 추구하기 위하여 먹는 일을 저버렸습니다. 그의 깊은 영적 굶주림과 갈망에 비하면 음식은 2차적인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이 따르지 않고 여러 날 금식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의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금식하는 것 보다는 먹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은 그분을 추구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에게서 식욕을 없애버립니다.

이 고넬료라는 사람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는 설교 테이프도 듣지 못했고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교 개종자도 아니었고 다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렵사리 배웠습니다. 세미나도 없었고, 집회도 없었고 하나님에게서 뭔가 얻어내는 방법에 대한 책도 없었습니다. 그의 안에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촉구하는 성령도 아직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금식하며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하는 삶은 그를 구제하는 자로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집을 구원해달라는 그의 기도에 하나님이 아직 응답하시지 않았으나 궁핍한 자들 모두에게 관대하게 베풀었습니다. 자기의 필요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모든 시간, 주의, 금전을 쏟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주목을 받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태초부터 그랬습니다.

고넬료가 자신의 집을 구원했던 동일한 방법으로 당신도 당신의 집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루만에, 영광스러운 기적 하나를 통해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루만에 그의 집이 영적 소경으로부터 경이로운 빛과 생명으로 변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 사람이 자신의 집을 구원하기 위해 굳게 결단하고 착수한 결과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길 잃은 가족과 친구를 위해 진지하게 기도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2010년 11월 4일 목요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사도행전 17:28). 하나님의 사람들은 바로 이 작은 원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 모든 동작, 실존 자체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으로부터 지속적인 계시의 흐름이 있어야만합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신다면, 아버지의 깊고 은밀한 것들을 살피신다면, 그리고 솟아나는 생수의 샘이 되실 것이라면, 이 생수의 샘은 지속적이고 끝이 없는 그리스도의 계시이어야만 합니다. 이 생수의 샘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 주실 것을 조용히 믿음으로 신뢰하며 믿으며 기꺼이 주님을 의뢰하는 주님의 모든 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의 확실한 말씀, 즉 진실 되고 살아있는 계시가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말씀을 받았고 전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이 말했을 때 그 땅의 모든 음성들 중에서 그의 말이 실현되었고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든 음성들을 체에 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포화처럼 퍼부어지는 음성들 속에 피곤해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다만 소수의 진리만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빛입니다. 온 세상은 어둠에 싸여있고 오로지 빛만이 어둠을 흩어버립니다. 당신은 지금 어두운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베드로후서 1:19).

바울이 말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 나라[사탄의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요한계시록 16:10).

당신의 선행이 어둠을 쫓아내지 못하고 사회 이슈에 대한 우리 설교도 어둠을 뚫지 못합니다. 당신의 모든 개인적 경험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흑암의 권세를 당신이 묶는다 해도 그리스도의 비추는 빛이 없이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어둠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가운데에서 사라져버립니다. 골방에 홀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연구합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았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바로 그 동일한 성령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2010년 11월 3일 수요일

날로 증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십자가 사건이후 모든 영적 거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대함속에서 길을 잃었고 여전히 그분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고 한탄하며 죽었습니다. 바울도 그러했고, 모든 제자들, 다수의 초대교회 교부들, 루터, 쯔빙글리, 청교도들, 경건한 영국의 설교자들, 그리고 오늘날 다수의 경건한 지도자들도 그러합니다.

이 거인들 모두가 동일하게 지배적인 열정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즉, 날로 증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그들은 휘황찬란하고 세속적인 이 세상 것들, 성공, 야망이나 세상의 명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물질이나, 건강의 축복, 쓰임 받기 위함, 자아에 속한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광대하심에 대하여 더 풍성한 계시를 받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세대에게 사탄은 더 큰 위력을 휘두르고 있고 지옥은 전 분노를 풀어 놓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세대 보다 원수의 견고한 진이 더욱 강화되었고 강력하고 참호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탄은 전례 없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으며 더 잘 알려지고, 사람들이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용납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성경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도에 대한 기초 지식은 충분치 않을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 아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우리는 더욱 큰 성령의 계시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그분의 식탁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내야합니다. 오로지 그분의 임재 속에 오래 있음으로, 오로지 그분과 함께 앉아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하늘의 지혜를 얻기 위해 그분을 기다리는 것으로만 당신은 그분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분주하고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사람들은 거의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날로 증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은 계시로 온 것입니다. 그는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에베소서 3:3).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고 감추어진 비밀들을 알고 계시고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8절)을 이해하고 설교하기 위해 은사를 지속적으로 간구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이 영광스러운 풍성함에 접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12절).

하나님은 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그분에 대한 계시를 구하는 신자들, 즉,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의 문을 여는 매우 깊고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를 추구하는 신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2010년 11월 2일 화요일

오직 그리스도!

주님께 헌신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분을 송축하고 기쁘시게 할까요? 더 많은 교회를 지어드릴까요? 성경학교를 더 지어드릴 까요?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집과 기관들을 만들까요? 이 모든 것이 가치 있고 필요하지만 손으로 만든 집에 거하시지 않는 그분은 이런 것 보다 훨씬 더 이상의 것을 원하십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해 영원한 성전을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이 지나자 그것은 쇠락했고 400년이 채 못 되어 완전히 파괴당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분의 백성, 사역자들, 목자들로부터 다른 그 무엇보다 추구하시는 것은 그분의 식탁에서의 교제입니다. 그분의 천상의 식탁에 둘러 앉아 하나 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장소요 시간입니다! 지속적으로 양식, 힘, 지혜와 친교를 위해 그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잔치, 즉 주님과 홀로 교제하는 잔치에 불참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주 예수에 대해 제한된 계시만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리가 비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처럼 높은 부르심의 장대함과 위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교제보다는 예배에서 우리의 영적 기쁨을 얻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더욱 더 일하면서 주님에 대해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고, 탈진하고 이 세상 어디라도 가며 그분의 일을 위해 우리 몸을 드립니다. 하지만 잔치자리를 거의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하여 그분에 대해 배우는 자리에 앉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천상에서 주님의 식탁에 앉아있었던 영광스러운 3년 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바울에게 가르쳐주셨고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안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개종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초자연적 환상으로 한 번 본 것, 하늘로부터 그분의 음성을 기적적으로 한 번 들은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환상을 한순간 보았고 더욱 더 원했습니다!

바울의 영혼 안에서 무언가 외쳤습니다. “오, 그분을 알았으면!” 그가 크리스천 체제 전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로 그들의 율법주의를 지키게 하라. 다른 이들로 교리의 쟁점을 논쟁하도록 하라.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는 지치도록 일하게 하라. 하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더욱 원하노라!”

2010년 10월 29일 금요일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안전합니다!

예수님은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받아들여졌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새 옷을 받고 그의 아버지의 식탁에서 먹으며 온전히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천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로, 나는 그의 아버지가 상황이 일단락되기 전까지는 아들과 많은 문제를 겪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이 아들이 알아야만 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의 사랑가운데 안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인내해주고, 같이 노력하고 사랑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천부께서도 우리에게 이같이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언젠가는 내가 완벽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되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죄인이고, 타락한 사람이고 그분의 원수이었을 때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그분과 화목했으니 얼마나 당신을 더 사랑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당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나에게 이방인이었을 때, 반역하고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너를 사랑했다. 네가 아들이 되겠다고 헌신했으니 이제 내가 너를 더욱 더 사랑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그분의 사랑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안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 대해 사랑이라(he IS love)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안식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16).

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깨어나 삶을 사십시오. 지금 당장!

우리의 대부분은 아직도 성취하기 위해 미래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사건이나 환경의 변화가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다려 봐. 내 때가 오고 있어. 어떻게 해서든지, 어느 날엔가, 어디선가....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도 어떻든지 오고 있는 중이야.” 우리는 마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날짜를 꼽고 있는 아이들 같습니다.

다윗이 슬픔에 잠겨 상념에 젖었던 때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고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이루어 놓은 것이 너무 적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모든 것이 헛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시편 39:6-7). 다윗은 심히 낙담했습니다. 그의 현재 상황은 너무도 헛되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바 모르는 심정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최근 나는 펜실바니아의 언덕을 홀로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이 동일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데이빗, 네가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왜 이 날이 네 인생의 가장 좋은 날이 아닌 것이지? 왜 너는 지금 충만하고 즐거울 수 없는 거냐? 저 너머에 네가 예수 안에서 이미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당신은 “오, 나의 이상형을 기다리지요,”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모든 외로움에서 건져내고 당신의 영혼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채워 주리라고 생각하는 경건한 사람을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우자에게 권태를 느껴 인생의 낭만을 찾고 허전함을 몰아내기 위해 배우자가 승천하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너머에는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모습, 존재를 변화시키거나 그것에서 구원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다른 사람이 당신의 고독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구원, 평강, 소망과 기쁨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공허함을 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깨어나 삶을 사십시오!

2010년 10월 27일 수요일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들을 제한하기

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시편 78:41).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불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켰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가 의심과 불신으로 오늘날 하나님을 제한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만 우리 믿음은 항상 범위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떠맡아주실 것이라는 것을 실제로 믿지 않고 차단해 버리는 한 작은 영역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독자들이 나의 아내 그웬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자신들의 남편, 아내, 아들, 딸들의 치유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나는 치유의 영역에 대해 가장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육신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이 연이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의 육신에 대해서는 나는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스스로를 위해 기도도 하기 전에 약을 털어 넣든지 의사에게 달려갑니다. 의사에게 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때로 다음과 같은 표현에 들어맞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역대하 16:12).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중국이나 쿠바의 장벽을 무너뜨려 달라고 기도하지만 당신 자신의 가족의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한 방울의 믿음도 없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하기 원치 않으실 게 틀림없어. 내 가족 케이스는 너무 심각해.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는 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분의 방식에 대해 무지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에베소서 3:20)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네가 내손을 묶어버렸다. 수갑을 채워버렸다. 내가 행할 것을 네가 진정으로 믿지 않는데 어떻게 너를 고칠 수 있겠느냐? 네 의심이 내가 네게 하나님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나는 네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기꺼이 더욱 주고자 하는 것을 알지 않는 한 너는 나를 모르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을까? 그렇지, 우리를 위해 홍해에 길을 내 주셨지. 그렇지만 떡을 주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떡을 주셨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그들에게 식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지만 물을 주실 수 있을까?” 그들은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주실 수 있을까?”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고기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대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을까?” 번번이 하나님은 모든 분야에서 공급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것을 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이 저것을 하실 수 있을까?”하며 40년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그분은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믿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고 하실 것입니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한복음 14:9). 우리는 예수님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알고 보기 원하시는 대로 보아야만 합니다.

내 서재에는 예수님에 대해 훌륭한 분들이 쓰신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들 중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을 보기 원하시는 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과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알려지기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알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야고보서 1:17).

예수님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자원들을 예수님 안에 포장하셨습니다. 그리고“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버지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선물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로 보십니까? 당신은 그분을 당신이 기쁘게, 승리하며, 의롭게, 평강과 안식으로 충만하게 살기위해 필요한 전부로 여기십니까?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좋은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사막의 태양을 가려주는 구름. 밤에 그들을 안위하고 인도해주는 불. 반석에서 솟구친 물. 쓴물을 고친 나뭇가지.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놋뱀. 그렇지만 이 모든 좋은 것들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물이 솟구친 반석은 누구였습니까? 불은 누구였습니까? 만나는? 놋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베푸신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선물들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린도전서 10:1-4).

오늘날 우리는 그림자를 훨씬 능가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체-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2010년 10월 25일 월요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을 알라고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음성들보다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당신에게 말씀하기 원하시고 당신이 결코 보거나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을 말해주기 원하신다는 것을 당신이 절대적으로 확신하기를 원하십니다.

최근 주님은 내가 아직도 내 영혼에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을 주저한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그분이 말씀하시고 그분의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내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내가 들은 음성을 검사하는데 온 시간을 들이다가 그것이 내게 너무 크거나 신비스러우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실 리 없지. 하물며 마귀도 말할 수 있지 않나. 육이 말하기도 하고 거짓의 영도 말하지. 수많은 음성이 우리에게 언제나 몰려오잖아.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 수 있겠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가 요구된다고 믿습니다.:

1.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기 원하신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고자 고대하신다는 것에 온전히 설복되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진실로, 그분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당신이 그분의 음성을 알아서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성경의 범주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기 위해서 박사학위가 필요하지도 없습니다. 당신이 필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2. 양질의 시간과 고요함. 당신은 기꺼이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 골방에 있고 다른 모든 음성을 잠잠케 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 종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이 내 삶속에다 무엇인가 세우려고 하시면 내가 그분의 음성 외에 다른 모든 음성들을 차단해 버린 후에야 그분의 음성이 다가오십니다.

3. 믿음으로 구하기.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이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실 수 있고 그분의 완전한 뜻을 우리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함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누가복은 11:11-12). 다시 말해서 당신이 천부께 명확한 지침, 경건한 고침, 특별한 필요와 같은 말씀을 요청했을 때 그분이 대신 마귀를 보내 당신을 속이도록 하실 것이라고 일시적이라도 생각합니까?

어떤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지침과 조언을 구하느라고 매일 밤 전화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장난삼아 자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사람을 고용해서 전화를 받도록 했습니다. 아들이 전화했을 때 이 가짜 아버지가 얼토당토않은 조언을 하고 허위 상담을 해주었습니다. 이 아들은 갑자기 온통 혼란스럽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듣는 것은 모두 이제껏 자기 아버지에게 배웠던 것과 상충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아버지라고 당신은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칭하는 자의 음성을 들려주는 분이라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괴롭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마귀가 당신을 속이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평강이 뒤따르고 사탄은 그 평강을 위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고요와 안식의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변함없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천 번이라도 되돌아 갈 수 있고 동일한 말씀을 받을 것입니다-왜냐하면 그것이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지연되는 기도 응답

우리들 대부분은 다윗처럼 기도합니다.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102:2).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69:17). 히브리어로 속히는 “지금 당장, 서둘러, 내가 당신을 부르는 바로 그 시간에, 해주세요!”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주님, 나는 당신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서둘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명령에 즉각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사실은, 때로 당신은 그분이 응답을 하시기는 하는 걸까 궁금해질지 모릅니다. 당신은 부르짖고, 통곡하고, 금식하고 소망하나 며칠이 지나고,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지나도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표징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먼저 당신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뭔가가 내 기도를 막고 있음에 틀림없다.” 당신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이렇게 됩니다. “주님, 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당신의 말씀에서 당신은 나에게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까?”

왜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지연하실까요? 그분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받기를 무엇보다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답은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18:1).

헬라어로 낙심하다, 또는 faint in KJV, 는 “믿음이 느슨해지다, 믿음이 약해지거나 지쳐버리다, 고투하기를 포기하다, 완성되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다”라는 의미입니다. 갈라디아서 6:9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주님은 그분께 나아오기를 늦추지 않고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은 그분의 일이 완성되기 전에는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응답하실 때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징계하는 사랑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은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회개하고 그분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징계입니다. 당신은 과거와 현재의 죄들 때문에 당신 영혼 안에 하나님의 화살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잘못으로부터 돌이키기 원한다면 그분의 징계하시는 사랑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고침을 받게 되나 그분의 크신 자비와 동정심으로 고쳐주실 것입니다. 당신은 이방인들이 그렇듯이 그분의 진노를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분이 사랑스런 손길로 치시는 훈련의 막대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의 고통은 잘못내린 결정에서 온 것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하나님이 결혼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사람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한계상황으로 몰아넣으며 마음 아프게 합니까? 하지만 많은 경우 부모 자신들의 과거의 죄와 태만과 타협으로 인해 생긴 일입니다.

당신이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때, 그 때가 깨진 가운데 회개와 믿음 안에서 주님을 구할 때입니다. 성령의 힘을 새롭게 주입 받을 때입니다. 당신 안에 영적 힘이 흘러넘치도록 새로워지고 회복되어야 할 때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은 당신에게 그분의 힘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시138:3, 7-8).

크리스천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유대인들은 번영과 건강을 경건한 것과 연관 지었습니다. 당신이 부유하고 건강하거나 또는 다른 면으로 복을 받았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만약 당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하나님이 절대로 당신이 고통당하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기만 하면 그분이 달려와 즉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교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동행하였으며 돌에 맞고, 조롱당하고, 고문당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습니다(36-38절).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했던 바울 자신도 파선을 겪고, 돌에 맞고, 채찍질당하고, 죽도록 내버림을 받고, 강도당하고, 투옥당하고 핍박받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믿음을 시험받고, 정화되고,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 마음가운데 뭔가를 심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주 예수님,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시고 나는 당신이 내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치하신다고 믿습니다.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은 당신이 허락하셨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시는 당신의 목적을 신뢰합니다. 그 일로 내가 어떤 교훈을 받기 원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가 의안에서 행하고 내 마음속에 당신의 기쁨이 있다면 내가 살든지 죽든지 당신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영광을 예비해 놓으셨을 수도 있고 내 유한한 마음이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어떻든지, 나는 ‘예수님, 살든지 죽든지 나는 당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2010년 10월 20일 수요일

하나님은 내가 들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밤 기도 모임에서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대해 내가 들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제게 속삭이셨습니다. “이 교회는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너무 많은 사람이 만족스러워 자기만족에 빠져있다. 너는 온 땅을 휩쓸고 있는 거짓 교리의 모든 풍파로부터 안전하고 위험을 느끼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것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 안에 작동하고 있는 성령의 증언을 소유하라는 메시지는 부탁이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만약 이 말세에 당신이 성령의 증언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끝까지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다가오는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당신은 매일, 당신의 직업에, 직장에서, 학교에서, 성령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체제로 갑자기 흡수되어버리지 않도록 정치가와 지도자를 올바르게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등잔에 기름이 떨어져 버린 어리석은 열처녀에 대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공급이 있었으나 궁극적인 순간에 그분의 증언이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열처녀 처럼 되지 마십시오! 당신의 교회나 목사님이 당신의 영혼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당신의 기름이 떨어지고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자신을 낮추고 당신의 마음을 탐색해 보십시오! 당신의 영혼에서 모든 분노와 원한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당신의 죄를 고백하고 내버리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든 것에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성령의 증언을 소유할 수 있도록 당신 마음 안에 하나님의 평강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아버지께 더욱 풍성한 성령의 부으심을 구하십시오. 모든 것에 그분이 당신의 증인이 되시고 안내자가 되시기를 청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가는 것의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또한 상급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다른 상급도 많이 있지만(마19:29참조), 이것이 우리가 필요한 전부이기 때문에 이를 언급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투옥되었을 때, 전 종교 체제가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성소를 더럽히고 거짓 교리를 전파한다고 고발했습니다. 그의 생명이 위험 했고 군인들 조차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 까”(행 23:10)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영내에 가두었습니다. 다음 날 밤 주님이 직접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들려주신 말씀은 얼마나 대단하던지요. “담대하라! 더 많은 어려움이 닥쳐오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가 명백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인과 같아질 것이라면 우리는 또한 이 대가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견디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가를 계산해보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상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임재라는 것을 알고 계십시오.

2010년 10월 19일 화요일

성령의 증언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6).

성령의 내재적 증언이 나로 하여금 조용히 있지 못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내안에서 성령이 일어나시기에 나는 말해야만 합니다.

성령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드러내시려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우리의 거룩한 조상들은 믿는 자들 안의 이 성령의 사역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증언을 갖고 있음”에 대해 많이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진리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사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령의 증언은 실제적으로 들어볼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과거 어느 때 보다 성령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더 필요합니다! 사탄은 할 수 만 있으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조차 속이려고 뻔뻔스럽게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왔습니다. 거짓 교리, 거짓 교사, 거짓 복음들과 같은 그의 사악한 유혹은 더욱 극성스러울 것입니다.

성령의 내재적 증언은 “평강의 법칙”에 의해 작동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당신의 평강이 동요될 때 성령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영속에 동요가 있을 때 - 심중 깊이 흔들림과 소란이 있을 때 - 하나님은 무언가 거짓된 것이 있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당신은 그분이 당황하심, 즉 그분의 비통과 분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 감춰진, 회개하지 않은 죄가 믿는 자에게서 소중한 평강을 앗아갈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죄의식, 비난과 두려움으로 갈가리 찢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단 두마디 말씀을 그에게 하실 것입니다. “회개하라! 도망쳐라!”

그렇습니다. 성령은 당신을 교정하기 위해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죄, 의와 심판에 대해 당신과 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지시를 내리실 때, 즉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는 성결하지 않은 그릇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죄를 고집하면 - 죄를 고백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으면 - 당신의 마음은 줄기차게 거짓말의 물줄기를 당신에게 대놓을 것입니다. 당신의 죄 가운데에서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가르침들을 듣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내 문제들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닐 것이다.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완전히 길을 잃게끔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올바른 하나님의 조언을 갈망한다고 주장하며 다니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사5:1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들 마음속에 기만이 있어 결국 그들의 모든 조언은 비뚤어졌습니다. 죄가 그들의 판단이 왜곡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악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순결한 것을 그들은 불의하다고 불렀습니다. 그들에 대해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있을진저”(사5:20).

2010년 10월 18일 월요일

아버지 사랑 안에 안식 하십시오

당신의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작스레 “나한테 화났어? 내가 뭘 잘못했니?”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아마 깊은 생각에 잠겨 조용히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니. 나 화나지 않았어. 네가 나한테 잘못한 것 없어. 나는 지금 그냥 조용히 있었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추궁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어?”

“아니, 네가 잘 못 말한 것 없어. 다 괜찮아.”

마침내 그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 당신을 그를 포옹해야 합니다. “자,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화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러면 나를 화나게 만들고 말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처럼 우리 하늘 아버지를 대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자신의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 한 번 생각해보자, 오늘 어떻게 예수님을 슬프게 해드렸나? 오늘 무엇을 잘못 했지? 무엇을 잊어버리고 안했지? 나는 정말 엉망진창이야. 주님이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는지 몰라. 주님, 한 번 더 용서해 주세요. 언젠가 잘 순종할 거예요. 그때에는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기가 쉬울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품에 안으시려고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자신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원하시고 당신이 그분의 사랑 가운데 편히 누워 쉬기를 원하십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맞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새 옷을 받고 그의 아버지의 식탁에서 먹으며 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이 아들이 한 가지 알았던 점은 그의 아버지 집에서 그가 안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참아주고, 같이 일하고 사랑할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 대해서 우리 하늘 아버지도 이와 같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길을 헤매든지 우리에게는 돌아갈 길이 늘 열려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엡1:6)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분은 자신들에게 열려있는 길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품에 안기위해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2010년 10월 15일 금요일

나는 너무 적은 것에 만족함으로 하나님을 제한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시고 싶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분의 갈망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말3:10)는 것입니다. 그분은 꽉 들어찬 창고 안에 서서 말씀합니다. “나는 주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로부터 받을 사람이 너무 적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도록 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그분이 이미 행하시고, 주신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다고 생각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에 앉아 하나님의 임재로 복을 받는 것에 만족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만족한 스폰지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흡수하지만 그분이 섬김을 위해 그들에게 기름붓기 원하실 때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기적들에 놀랐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앞으로 이보다 더 큰일을 준비하시고 계시다!” 우리들 대부분은 제자들과 같습니다. 한 가지 기적을 보면 남은 생애 동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시도록 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방, 주, 연방정부 기관들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이 실각시키실 것을 믿으며 믿음으로 천상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추락시켰을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우리 도시가 흠뻑 적셔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를 겨냥한 모든 무기에 대항하여 일어섰을 것이며 우리 가족들과 교회들안에 있는 사탄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렸을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무한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위하여 이보다 더 큰일들에 관하여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그분이 알려지기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알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이 가르치는 대로 볼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분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대로, 즉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알고 보기 원하시는 대로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과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분이 알려지기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의 아들을 다음과 같이 보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예수님은 선물 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자원들을 예수님 안에 포장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한 선물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로 보십니까? 당신은 그분을 당신이 기쁘게, 승리하며 의롭게 평강과 안식으로 충만하게 사는데 필요한 전부로 보십니까?

옛적, 당신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당신의 상처와 필요가 어떠할지 아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앞서 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정답을 요약해서 당신에게 규칙서를 보내거나 “답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위기와 필요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한 사람, 한 길, 한 정답,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내일을 위해 살기 원치 않는다! 너는 다만 뒤돌아보며 오늘이 너의 가장 최고의 날일 수 있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그분 자신의 모습 보다 너에게 더 나아지거나 더 강해질 수 없다. 오늘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도록 해주지 않겠니?”

2010년 10월 13일 수요일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과 그 아들의 귀하심으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축복을 가로막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하늘의 영광을 보장하고 원수의 모든 탄원을 이기는 답변을 제공함으로써 처리되었습니다.

허물이 문제입니까? 그분은 우리의 모든 허물들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죄가 문제입니까? 그분은 십자가에서 죄를 정죄하시고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죄책감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피로 지워졌습니다.
죽음이 문제입니까? 그분은 사망의 쏘는 것을 가져가시고 실제로 우리 속성의 일부로 만드셨습니다.
사탄이 문제입니까? 그분은 사탄의 모든 능력을 무효화 시키고 그를 멸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문제입니까? 그분은 우리를 세상에서 구원하시고 세상과 우리가 연결된 모든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크리스천 독자여러분,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영원한 축복은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덧붙여,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가운데 있고, 죄의 권세 하에, 사탄의 손아귀에서, 사망을 면할 수 없고, 악하고 그리스도가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일부로서 경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즉, 영원한 불의 보복에 노출될 것입니다.

복되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들의 합당한 위치, 즉,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과 또한 그분 안에서 그들이 죽었으므로 모든 원수들의 권세에서 벗어난 것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데이빗 윌커슨의 개인 묵상에 사용된 J. B. Stoney의 글에서 발췌함.

2010년 10월 12일 화요일

그리스도를 통해 받으심

누구든지 안정된 평안을 누리고저 한다면 자기 자신에 몰두하고 있는 한 그 자신으로부터 떨어져야만 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하며 일 혹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순전하고 귀하며 영원한 기록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변합니다. 나의 체격, 나의 감정, 나의 경험, 나의 환경이 지속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위치를 정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위대하고 필수적인 요점입니다. 이것은 막대한 능력과 자유 그리고 축복을 가져옵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한일서 4:17). 이것은 완벽히 경이로운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숙고해 봅시다. 초라하고 불쌍한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 세상의 신봉자, 영원한 지옥에 노출된 그러한 사람이 주권적 은혜로 취해져서 사탄의 손아귀, 죄의 지배, 현세의 악의 권력으로부터 완벽하게 구원받고, 용서받고, 씻음 받고, 의롭게 되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되고 그리스도안에서 받아들여지며 그분과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동일시되어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그러하심과 같이 그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게 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좋아 보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획득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송축하십시오. 그분이 주시지 못할 정도로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처럼 주십니다. 우리의 하찮음과 사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에게 합당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행하실 것입니다.

데이빗 윌커슨의 개인 묵상에 사용된 J. B. Stoney의 글에서 발췌함.

2010년 10월 11일 월요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지식을 초월합니다. 광대하며 넓고 높으며 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에베소서 3:17-20).

최근, 나는 믿음에서 퇴보하였다가 첫사랑으로 돌아오는 크리스천들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죄 사함을 받았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무서운 죄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제 돌아왔지만 내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지은 말할 수 없이 무서운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없을 것 같아 두렵습니다. 나에게는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너무도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고 싶지만 하나님이 나를 경멸하신다고 느낍니다. 나는 빛을 거슬러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들 중 한 사람입니다.”

믿음에서 퇴보하였던 사람들이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마약과 알코올, 정욕에 빠졌던 것에 진저리나고, 세상에 대해 지쳤습니다. 내 귀에 이렇게 들립니다. “나는 부도덕의 구렁텅이에, 끔직한 죄악에 너무도 깊이 빠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선을 그어놓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한계가 있고,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너는 나를 너무도 자주 격발했다. 나의 모든 간청과 경고를 거부했다. 이제 너는 선을 넘어 버렸다. 네 마음은 냉랭하다. 사탄이 네 마음속에 견고한 진을 건축했다”고 말씀하신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많은 믿음의 퇴보자들이 자신들이 죄를 지어 은혜의 때를 놓쳐버렸다고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거나 지나치게 확신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사랑과 자비로 자신들의 죄악의 상태 속으로 깊숙이 손을 뻗고 계신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침으로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자신이 불순종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를 그의 손에 묻히게 될 것이었습니다. 큰물고기의 뱃속에, 그의 죄와 반역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요나 2장 참조). 요나는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믿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깊음이 나를 에워싸고......내가.....내려갔사오며.....내 영혼이 내속에서 피곤할 때”(요나 2:3-7). 그가 바닥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깊이 내려갔을 때 새로운 만지심, 즉 특별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용서받았고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으로써 성령은 우리 죄의 심연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어느 누구도 지나치게 죄를 지었다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쫓아내지 않습니다. 성령이 여러 사람들을 다루시며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너를 돌이키기 위해 너의 최악의 상황가운데 내가 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 37-39).

예수님의 보혈은 죄의 깊숙한 곳까지 이르러 자유와 용서, 자비,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제공해 주십니다. 당신이 죄에 깊이 빠져 있다 하더라도 사랑과 용서는 더 깊숙이 뻗칩니다.

참으로 깊은 그분의 사랑의 깊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