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31일 월요일

마음 속에 있는 이집트 by Gary Wilkerson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목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왕이자, 목사, 지도자 그리고 중건자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가서 무너진 성벽의 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바사의 왕을 방문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본즉…” (느헤미야 13:15).

느헤미야가 성으로 돌아왔을 때, 애초에 이스라엘의 열조들을 포로로 만들고 노예생활을 시작하게 만든 그런 풍습들을 그 자손들이 똑같이 번복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되어 그들의 고향에 가서 성벽을 중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그들은 그 벽들이 무너지게 만들었던 그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그들은 벽을 세우고 있으면서 막상 그 벽이 허물어지도록 한 그 똑 같은 죄를 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손으로는 성을 재건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성을 허물고 있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그들의 삶을 일궈가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들의 삶을 파괴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제단으로 나아와 예수님께 부르짖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예전의 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교회에 가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술집에 가고 클럽에 가며 컴퓨터로 음란물을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직도 타협을 합니다.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상의 것들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옛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세우고 있었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오래된 옛 것이 남아있었습니다. 모세의 지도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나왔지만 그들 안에는 애굽이 남아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39 참조). 우리들은 세상의 것들로부터 자유해지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 안에는 세상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한 자리로 내려가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대적을 이겨가는 삶, 승리의 삶을 계속하기를 원합니다. 항상 말입니다!

2012년 12월 28일 금요일

눈깜짝할 사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여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날 만큼 쉽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비극이지요! 우리의 뜻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순간 우리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악에 우리의 마음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한후 첫번째로 바뀐것이 그들의 말투였읍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 자, 그를 죽이자. 아니, 그를 구덩이에 던지자. 그보다,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푼돈이라도 챙기자!” 그들의 마음은 경멸과 배신으로 가득찼고 그들의 타락한 마음으로부터 세속적인 사악한 말들이 용솟음치듯 뿜어져 나왔습니다.

불경건한 언어는 굳어진 마음의 확실한 증표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죄에 대해 둔감해지고 그들의 불순한 대화는 범행을 저지르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사악한자들처럼 말했고 그들은 사악한 자들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읍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냉랭한 타산적인 범죄자들이 되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범죄를 저지른것뿐 아니라 그들의 범행을 덮고서 아무일없는 듯이 양치는 본업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면 얼마나 내리막길로 치닫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얼마나 타락하고 둔하여지는지 말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굳은 마음에 대해 경고했었읍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의심의 희생물로 전락했고 그들은 죄에 대해 둔감해졌습니다. 말라기서의 시작은 “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주의 말씀의 엄중한 부담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그러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떤점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1:1-2) 이럴수가!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 대들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보살피는지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 증거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하여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다루기로 결심한 기독교인들을 저에게 예를 드신다면 저는 그들이 불순한 언어로 가득 찬 기독교인임을 보여드리지요. 거의 하룻밤새에 그들은 눈에 띄게 변할것입니다. 그가 더 의심할 수록, 그의 언어는 더욱 불경건해질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충격 그 자체입니다. 한때, 그들은 경건히 경외감과 경배가 가득 찬 믿음의 감탄사와 기쁨으로 말했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영적인 언어로 부드럽게 말했지요. 하지만 지금 그들은 퉁명하게 경외함도 없이 말합니다. 그들의 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공포, 불신, 절망을 애써 감추고 있는것입니다.

모든 악인 불신의 생각들을 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계속 의심하지마십시오!

2012년 12월 27일 목요일

용서하는 사랑

구약의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신약의 기독교인들에게 강한 메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형이고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택한 백성들의 한 모형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창세기 35장 11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다룬 방법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임에 틀림없습니다. 죄지은 형제들을 향해 용서하는 한 사람의 사랑의 이야기는 곧 죄지은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아름다운 한 장면입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성경 말씀을 통털어 가장 슬프고 비극적입니다. 이 선택된 자의 자손들은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결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심에 의해 야기된 파괴적인 죄의 물결과 비애는 우리들 모두에게 엄숙한 경고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그가 노년에 얻은 아이 요셉에 대해 유난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살피는데 있어 특별한 대우를 했습니다. 야곱의 큰 아들들은 이러한 요셉이 받는 특별한 관심이 그들의 아버지가 요셉을 그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4)

야곱이 요셉을 매우 소중히여기고 사랑하였다고해서 그의 다른 아들들을 덜 사랑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그의 모든 자식들을 신실하게 보살피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사랑의 인도와 훈련을 받았읍니다. 그럼에도 큰 아들들은 한 형제의 총애 받는 자리를 질투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근사한 채색옷을 포함하여 그가 마음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셉은 더욱 축복받고, 총애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았고 이것이 그들을 화나게 하고 질투나게 했읍니다.

당신은 주안에 있는 형제가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듯 보일 때 시기라는 죄의식을 가져 본적이 있습니까? 그의 기도는 항상 빨리 응답을 받는것 같아 보입니다. 당신이 버림받고 외로울때도 그는 결코 고독하거나, 사랑받지 못하거나 불필요한 존재로 보이지 않습니다. 쓴뿌리들과 질투가 자라기 시작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위기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덜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에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을 모든 악에 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환경에 대해 큰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평할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곧 요셉의 형제들을 온갖 혼란 속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 태도 입니다.

2012년 12월 26일 수요일

하나님을 울게 만드는 죄

제가 이것을 직선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둘러서 얘기하거나 부드럽게 말하지 않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울게 만드는 죄는 일상에서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교도의 행악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크리스천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그분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죄입니다.

당신은 그 분께서 우신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너무 인간 같고 약하게 비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백성들이 그 분의 바로 그 사랑의 본성을 의심할 때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 지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의하면 그분은 그의 가장 가까운 자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을 의심했을 때 우셨습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친구들로 인해 우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했던 자들이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폭풍에 휩쓸려 물에 갈아 앉고 있는 배 안에서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배 뒤쪽에서 곤한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개의치 아니하시나이까?” (마가 4:38). 그들의 비난이 얼마나 주님을 슬프게 했을 까요! 그들의 배 안에 있었던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들을 개의치 않았겠습니까? 인간이 자신들의 눈을 주님으로부터 떼고 대신 그들의 환경에 집중할 때마다 의심이 생겨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몹시 놀라셨습니다! “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 어떻게 너희가 두려워할 수가 있지? 나의 사랑과 돌봄을 어찌 의심 할 수가 있느냐?”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이 일에 있어서 더욱 더 주님을 슬프시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신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의 불신보다 더 큰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대한 빛에 대항하여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높은 산에 서서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 보다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뢰성을 완전하고 자세히 기록해 놓은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20세기 동안 내려온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변하는 증거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크리스천들과 경건한 조상들의 자자손손들의 간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온유하신 사랑과 애정을 증거하는 셀 수 없는 개인적인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우리의 불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분이 누구이신지 인정합시다!

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치유의 말씀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병약한 사람에게 이끌렸읍니다. “거기에 38년동안 병약함을 지닌 어떤 사람이 있더라. 예수님께서 그가 누운 것을 보실 때에 그가 이제 그런 상태로 오랫동안 있은 줄 아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 (요한복음5: 5-6). 이 이름 모를 불구자는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수많은 무기력한 기독교인들을 여러 면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무기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옵니다 즉, 육체적, 영적, 정신적 혹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가오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쩌면 정신적, 그리고 영적으로 그 사람처럼 연못가에 누워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희망이 없어 보이고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상황속에 있을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깊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즉 유일한 친구, 혹은 연인일지라도 당신 안의 상처를 진정으로 만져줄 시간과 사랑, 열정이 없어 보입니다.

유심히 그 무기력한 사람을 보면서 수많은 갈등의 세월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상처들은 무관심하고 무정한 사람들에 의해 그 사람 위에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자주 그의 마른 손을 들고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바삐 지나치는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어야 했을까요, “ 누구 도와주시겠읍니까? 제발! 저는 혼자서 할 수가 없읍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허약해져 있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적 생명과 활력소를 도둑질하는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들과의 질질 끄는 씨름 때문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낙담이라는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서 항상 기적을 바라며, 다른 사람이 뭔가를 일으키어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위대한 인생 역전이란 기적을 바라면서 자신들을 이 모임 저 모임, 상담, 세미나들로 끌고 다닙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가슴으로 통곡하는 자에게 보여주십니다. 또 제가 믿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그 사람의 깊은 고통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시러 그에게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마음으로부터의 울부짖음에 대해 많이 쓰여있읍니다. “ 내가 고통중에 주를 부르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성전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고 내 부르짖음이 그 분 앞에 이르되 그 분의 귀에까지 이르렀도다” (시편 18:6). 하나님을 향한 심령으로부터의 울부짖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자비와 치유의 말씀으로 항상 응답받게 될것입니다.

2012년 12월 24일 월요일

분열된 교회 by Gary Wilkerson

고린도 교회엔 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분열, 수군거림, 험담, 질투, 다툼 그리고 성적인 죄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타협과 허용 그리고, “ 글쎄, 우리 모두는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지지.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나쁘지 않아” 라고 하는 듯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절에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은 그들에게 격려의 말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강한 말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의 굳어진 마음의 묵은 땅을 기경코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계속 합니다, “ 내가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성장과 안정을 향해 자라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영혼을 채우고 양육해 줄 수 있는 단단한 말들을 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미성숙으로 인해 바울은 그들에게 계속 젖만 주어야 했었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3절). 성경은 “ 이 세대의 영을 가진”이란 의미인 “육신의”(육적인)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육신의 영은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묘사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당신 자신의 힘으로 일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3절) 바울은 이 인간적이며 육신적인 영이 일하고 있는 몇 가지 방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시기합니다. 그것은 항상 질투합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집 안에 다툼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육신의 영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 내가 더 낳지” 라고 하는 그런 태도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를 회개토록 하며 “ 하나님 당신이 가지신 모든 것을 저는 원합니다” 라고 말하게 하기 위해 바울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둘만의 기도 시간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기꺼히 드린다면, 우리는 옛 선조들과 같은 기도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012년 12월 21일 금요일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참조: 다음의 증거들은 당신이 모든 악을 떨쳐 버리고 영원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을 어두움으로부터 그분의 빛의 나라로 옮기도록 하며 죄를 회개했느냐 하는 여부에 따른 것입니다.)

1. 당신이 계속 새로워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한번의 회심경험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을 통해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끊임없이 간구 합니다. 그들의 매일의 기도는, “주님 저로부터 당신의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은 다 제거해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린도 후서 5:17). “ 우리의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느니라” (디도서 3:5-6)

2. 만일 당신의 삶이 성경말씀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두려워합니까?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해지니,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아느니라” (요한 일서 2:5). 성경은,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확실히 말씀합니다

3. 만일 당신의 믿음이 구제와 함께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성경은 만일 당신이 박애정신 혹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네가 예언의 은사가 있어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고린도 전서 13:2). 히랍어로 ‘아무것도”라는 뜻은 “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아니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모두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도 아니며 또 항상 아무도 아닐 것이다”인 것입니다.

당신은 위대한 믿음 안에서 은사가 넘치는 설교가, 능력 있는 전도자, 혹은 기름 부으심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 일수도 있겠지만 만일 당신에게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2012년 12월 20일 목요일

집중적인 믿음

예수께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 나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오며 또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이옵니다 내가 그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었나이다” (요한복음 17: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시고 또 내가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26절).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히 하십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것과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 자신의 아들을 기뻐하시는 것 같이 우리를 기뻐합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신 것처럼 우리의 아버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증명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또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라” (요한복음 20:17)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얼마나 힘들게 고분분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느끼는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분을 속상하게 하고 있다고 느끼는 “침체기”을 지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느낌 보다 사실을 인지하십시오. 사실인즉슨, 하나님의 기쁨은 당신의 애씀, 열심, 선한 의도 혹은 선행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절대 아니고 말고요, 그것은 모두 당신의 믿음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른바 “집중된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고 믿는데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모든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와야 한다는 원칙에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2절에 보면 저자는 “믿음 없는 악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근본적인 교리를 떠난다면 우리는 율법, 즉 육적, 영적 속박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 감이라……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에서 쉬신 것같이 그도 자기 일에서 쉬었느니라” (히브리서 4:3, 10).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즉 믿음의 증거는 안식인 것입니다.

당신의 분투, 수고함, 괴로운 영혼이 평강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내가 기복이 있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내가 어떻게 느끼던 간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그분과 같이 앉아 있는 것이다!”라고 확신 시키는 일입니다.

2012년 12월 19일 수요일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기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이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가서 6:6-7).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즉 “어떻게 해야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어떤 종류의 희생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실까? 우리의 피, 우리의 몸, 우리의 자녀?”

하나님의 대답은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 있습니다: “ 나는 너의 희생들, 너의 선행들, 너의 약속들, 너의 도덕적 행동들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육신적인 것들은 내 눈에 차지 않는다. 오직 나의 아들과 그 아들 안에 모인 모든 자들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를 기쁘게 할 수가 없노라.”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도덕적이며 올바른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자도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선행, 친절한 성품 그리고 베푸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누더기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까요?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시어” (에베소서 1:6). 우리의 선행들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께 온전히 당신의 마음을 드렸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물었던 똑 같은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 오 하나님, 어떻게 하면 당신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의 기쁨이 될 수 있나요? 저는 약속을 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제가 잘 되어 가는 지를 생각 할 때마다 정작 뒤쳐져 있음을 봅니다. 성경을 더 읽어야 할까요? 기도시간을 더 늘려야 할지요? 간증을 더해야 할까요? 주님 저게 더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스라엘에게도 그리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어떠한 희생도 선행도 원하지 않는다. 나의 기쁨인 나의 아들의 일만을 나는 인정할 뿐이다. 나는 이 세계의 기초가 생기기도 전에 너를 택해서 나의 아들에게 혼인 하도록 했단다. 내가 너에게 구애했고, 죄를 깨닫게 했으며 나의 영을 통해서 너를 예수 안으로 데리고 왔단다. 나는 나 자신의 몸을 미워할 수가 없다!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한 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이사야 42:1). 하나님께서 붙드시며 그의 모든 발걸음을 지켜주시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선택 되고 뽑혔으며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하는 이 자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마태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 3:16-17)

여기에서“내가 진실로 기쁘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 나의 영이 나의 아들, 예수를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를 통틀어 실로 엄청나게 많은 양과 소들이 희생으로 주님께 바쳐졌습니다. 짐승들의 피가 수세기 동안 강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희생들의 어떤 것도 주님께 기쁨을 가져다 드리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주께서 죄로 인한 번제들과 희생제들은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니” (히브리서 10; 4, 6).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읽습니다. “그때 내가 말씀 드리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왔나이다 (7절). 그리스도는 어떤 짐승의 제사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 하셨도다” (5절). 하나님은 최종적이며 완전한 희생을 제공할 수 있는 한 육신을 가진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 자신을 인간의 자궁 속에 넣으시므로 우리의 모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되기 위해 하늘의 부요함을 포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예수님, 나의 전부를 받으소서 by Gary Wilkerson

1800년대, 한 젊은 여인이 여덟 명의 자녀를 둔 어떤 부부를 방문한 후에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한 찬송 시를 썼습니다. 그 가족들 모두가 교회에 다녔지만 닷새 동안을 같이 지내는 동안 그 여인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것에 대해 냉담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열정도 없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도 없는 듯했습니다.

마음에 짐을 느낀 이 젊은 여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을 만져주시리라 믿으며 그들과 같이 지냈던 전 시간 동안에 그 집 주인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사랑 가운데 진리를 전했고 담대하게 그들에게 충고도 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 이 열명의 식구들에게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삶 가운데에 행하신 일들을 감격해 하며 수 시간을 울었습니다!

이 찬송 시를 지은 프렌시스 하버갈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전 너무 행복해서 잠을 잘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온 밤을 찬양과 재 헌신을 다짐하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이 짧은 시는 자연스레 이어졌고”영원토록, 오직,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의 마지막 시행으로 맺어질 때까지 제 가슴 속에서 계속 울려 나왔답니다!”

헌신의 찬송

나의 생명 받으시어 주님, 당신께 드려지게 하소서.

나의 순간들과 날들을 받으시고 그것들이 끊임없는 찬양 안에 흘러가게 하소서.

나의 손을 받으시어 당신의 사랑에 따라 움직이게 하소서.

나의 발을 드리니 당신을 위해 민첩하고 아름답게 쓰여지게 하소서.

나의 음성 드리니 항상 오직 당신 만을 위해 찬송하게 하소서.

나의 입술을 드리니 당신으로부터의 메시지로 가득 차게 하고서

나의 은과 금을 드리니 제가 조금도 움켜쥐지 않게 하소서.

나의 생각 드리니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써 주소서.

나의 뜻을 드리니 그것이 당신의 뜻이 되게 하시고 더 이상 저의 생각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의 마음을 드리니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보좌에 있게 하소서

나의 사랑 드리니, 나의 주님, 사랑의 보물 창고인 당신의 발아래 붓습니다

저 자신을 받으소서, 영원토록 모든 것을 다해 오직 당신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을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해달라고 구하시겠습니까? 당신을 이 기도에 초청합니다, “ 예수님 저를 받으소서, 저의 삶이 당신께 온전히 헌신되어 지기를 원합니다!”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승리의 함성을 되찾기

다윗 왕은 간음 죄를 저지른 후 충실한 부하를 살해되도록 일을 꾸몄으므로 이제 젊은 아내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과 그의 하늘 아버지 이름 앞에 부끄러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일년 내내 자신의 끔찍한 어두움을 숨겼었고 이제 완전 파멸 일보직전에 와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후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 내 마음에 합한 자”( 사도행전 13:22)라고 불렀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다윗이 쓰러지기 바로 직전에 자신을 낮추고 회개한 데 있습니다.

“나는 내 죄악을 선언할 것이요, 내 죄로 인하여 괴로워 하리이다” (시편 38:18). “주, 주만을 거역하여 내가 죄를 지었으며 주의 목전에서 이 악한 행실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고 주께서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리이다’(시편 51:4).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11).

당신은 당신을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 죄의 무거운 짐들 아래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임을 느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치유함과 구원의 길의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다윗이 회개했을 때 그는 마침내 터널의 끝에서 비쳐오는 한 줄기 빛을 언뜻 볼 수 있었답니다.

“내가 내 죄를 주께 시인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내 죄과들을 주께 자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주는 나의 은신처시니 주께서 고난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시며 구원의 노래들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시펀 32:5, 7)

참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당신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죄를 완전히 고백하시고 떨어 버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목에 입맞추고 의의 옷을 입히시며 그리고 당신 앞에 잔치를 베푸실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다윗과 함께 이렇게 증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주를 신뢰하는 자는 자비가 그를 두르리라. 너희 의인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음이 정직한 너희는 모두 기쁨으로 소리칠지어다. (시편 32:10-11)

2012년 12월 13일 목요일

죄를 경히 여기는 것

에스겔 선지자는 우리에게 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생생한 실례를 보여 줍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유다의 칠십 명의 장로들이 주님으로부터의 말씀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성전의 예배를 섬기는 자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선지자와 함께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을 때 에스겔은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의 집에 앉아 있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하나님의 손이 거기서 내게 임하시더라. 그 때 내가 보았더니 보라 불의 모양같이 생긴 형상이라, 광채 모양 같으며, 황갈색 같은데, 그가 손의 형체를 내밀어 내 머리 한 타래를 잡고 그 영이 땅과 하늘 사이로 나를 들어올리어 하나님의 환상들 안에서 예루살렘으로 나를 이끌어” (에스겔서 8:1-3)

이어서 4절에는 “보라, 거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데” 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이 모임에 임하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빛으로 그 곳에 가득 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의 임재가 모임 가운데 임 할 때면 죄는 항상 드러나게 됩니다. 갑자기 선지자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 기어 다니는 것들과 가증스런 짐승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0절). 그는 그것을 마귀의 아성들, 악한 것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집에 침투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칠십 명의 노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인도하심을 구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하고 조용하고 얌전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은 숨겨진 죄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사역의 외적 예배 절차만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재로는 태양을 경배하는 은밀한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말이지요. 그들은 성전에 고용된 매춘부였으며 예배의식의 일부로 이 소위 경건한 장로들은 간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나빴던 것은, 이 사람들은 그들의 끔찍한 우상숭배에 대한 죄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우상숭배를 눈감아 주시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죄로 인해 무거운 짐에 눌려 있었지만 이 칩십 명의 장로들은 어떠한 죄책의 화살도, 육체적 힘의 소진함도, 감정적인 아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모세가 “가짜 평안”이라고 불렀던 그러한 것에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 저주의 말을 들을 때에 그가 자신의 마음 속에 스스로를 축복하여 말하기를, 내가 비록 내 마음의 상상대로 행하여 죄악을 물같이 마실지라도 내게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신명기 29:19).

다른 말로 하자면, “스스로 속아 있는 사람은 술 취한 자와도 같다는 말입니다. 즉 그는 분별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그는 목마름과 술 취함의 차이조차 분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숨겨진 죄의 짐

다윗 왕이 일년 내내 지녔던 숨겨진 죄의 짐이 그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건강을 망가뜨렸고 그의 마음을 괴롭게 했으며 그의 영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것은 그의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환멸을,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이 울부짖었습니다, “이는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내 슬픔은 계속해서 내 앞에 있음이니이다” (시편 38:17). 히브리어로 ‘halt’ 는 “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 저는 이 무거운 슬픔의 짐 때문에 넘어지려고 합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혼란에 빠져있는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 사탄이 다윗에게 가져온 이 얼마나 처참한 비극인가? 이 부드러운 심령을 가졌었던 시편 기자가 어떻게 이토록 실족하는 지경에 올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마 어마하게 화가 나셨음에 틀림 없어.”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죄를 그토록 무겁게 만든 것은 사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지극하신 긍휼가운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깊은 곳까지 가라앉게 허락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중대성을 알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고백하지 않은 죄를 그처럼 무겁게 함으로써 다윗이 더 이상 그 짐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끝내는 회개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다윗처럼 의로운 자만이 자신의 죄로 인해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의 양심은 아직도 살아 있어서 그의 마음을 찌르는 하나님의 정죄의 모든 화살로 부터 날카로운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나의 슬픔이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전체 이야기의 비밀입니다. 즉 다윗은 거룩한 슬픔, 하나님에 대한 깊고도 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시인합니다, “ 저는 이 일 가운데 저의 무릎을 누르고 있는 주님의 경책의 손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주의 진노의 막대기로 인하여 고난을 본 사람이로다. 그가 나를 인도하시어 어둠 속으로 데려 오셨으나 빛으로는 데려오지 아니하셨도다. 그가 나의 뼈를 꺾었다. 그가 나를 치러 일어나서……늙어 죽은 자들처럼 어두운 곳에 두셨도다. 그는 내 둘레에 울타리를 둘러 나로 나갈 수 없게 하셨으며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도다……그가 다듬어진 돌로 내 길을 막으셨도다” (예레미야 애가 3:1-9)

저자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즉 우리가 숨겨진 죄를 지니고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란스럽고 무섭게 하시며 우리의 족쇄를 무겁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토해내며 깊은 회개를 하도록 몰고 가십니다.

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에베소의 교회

에베소의 교인들은 주님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읽으며 저는 이 사람들이 듣고 또 살았던 그 복음에 놀라게 됩니다. 사실 바울은 그들을 소상하게 칭찬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으로…택하신…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신” (에베소서 1:1-5)이라고 하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그 얼마나 축복받은 거룩한 백성에 대한 묘사인지요! 예수님은 또한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인들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너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며”(계시록 2:2). 다른 말로 하자면, “ 나는 너희들의 삶 가운데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선한 일들을 알고 있다. 너희는 불평 없이 나를 위해 인내하며 수고를 했고 또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너희가 선한 일을 하는 데 부지런한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하구나.”

예수님은 이러한 에베소 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다른 무엇, 무언가 깊이 잘못되어있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모든 행위, 즉 죄를 미워하고, 진리를 향한 너의 사랑, 의로운 용기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수고함 가운데에 너는 너의 첫사랑이 시들어 가는 것을 허락했구나. 나를 향한 너의 애정이 죽어가고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사랑을 져버린 것 때문이다” (4절).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을 읽고 또 읽으면서 그 것의 심각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다소’라는 낱말은 무엇인가 가볍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말은 희랍어 원본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에 원어로는 말 그대로 “ 나는 너에게 거슬리는 것이 있다!”라고 번역됩니다.

저는 제가 에베소인 타입의 크리스천, 신실한 일꾼이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저는 저의 고난이 예수님을 위한 것, 즉 그 분을 영화롭게 하고, 의로운 삶을 실천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늘에서 제가 그분과 같이 앉아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에베소인들처럼 그렇게 제대로 배운 신자들 가운데를 다니시면서 “ 나는 너에게 거슬리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때 그 말씀은 저의 영을 휘어잡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이렇게 여쭤 볼 수 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 저에 대해서도 거슬리는 것이 있으십니까? 저 또한 당신에 대한 애정을 잃었는지요?”

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당신은 원하는 만큼의 예수를 가질 수 있다 by Gary Wilkerson

저의 아버지 데이빗 윌커슨은 제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제가 배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게리, 너는 네가 원하는 만큼의 예수를 가질 수가 있단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은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의 예수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작위로, “나는 너를 고를 것이고 그리고 너는 아니야.”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채워질) 것 임이요”(마태 5:6). 이 구절은 “저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모두 원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저는 영적인 주림에 있어서 간절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남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마음이 온전히 주님의 것이어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남녀들을 하나님은 찾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역대하 16: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가 구별 된,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10퍼센트 또는 75퍼센트 성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 분의 몸인 그의 신자들이 100퍼센트 전심으로 주님께 매진 하기를 원합니다.

그 분의 영의 기름 부으심을 저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분이 부어주는 것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 오셔서 이 마지막 때에 그 분의 성령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주시고자 하는 것에 반응하는 남녀들이 일어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나는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기를 선택했다. 나는 성화된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나는 이것으로부터 단념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즉 나는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지고, 성령의 불로 지펴지길 예비하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로부터 그 어떤 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당신의 사랑은 살아 있습니까?

만일 모든 종류의 방해와 요구를 겪으면서도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그런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는 십 분도 보내지 않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당신이 어떤 누구보다도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무의미해지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연애 시절에 당신의 배우자를 처음 사랑했던 것과 같지 않나요? 만일 그녀가 당신이 바쁜 중에 전화를 했다면 당신은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중단 했지요.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단둘이 만의 시간을 끼어 들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괘씸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당신 둘만의 사랑을 키워나가기 위해서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차 순위로 밀려났고요.

오늘 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과의 질적인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몇 주, 혹은 몇 달을 지냅니다.

그들이 여러 날 동안을 주님을 등한시 하면서 어떻게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서에 보면, 신부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가 물러나 가버렸다….” (아가서 5:6)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한 밤 중에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 내 혼은 낙망하였도다……내가 그를 찾았으나 발견 할 수 없었고, 내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내게 응답하지 않았도다’ (6절).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사랑하는 자를 찾고자 급히 거리로 달려 나아가 외칩니다, “ 내 사랑하는 자를 보았습니까?”

어째서 이 일이 그녀에게 그토록 심각한 문제였을까요? 그것은 그녀가,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이며 이는 나의 친구라” (16절). “내가 사랑으로 병이 났다” (8절) 라고 말했듯이 그녀는 그 사랑하는 자 없이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들, 즉 친구들을 애타게 기다리는데 우리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실까요? 성경은 우리를 그의 신부, 그의 사랑하는 자, 그의 최고의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주님과 교제하기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주님보다 다른 것들을 중히 여긴다면 주님께서는 어떠한 거절 감을 느끼시겠습니까?

2012년 12월 6일 목요일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붙잡고 있나요?

바로 이 순간 무엇이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습니까? 당신의 영혼이 예수를 갈망하고 있나요, 아니면 이 세상의 것들인가요?

우리 우편 수신자 명단에 있는 한 여자 분이 이러한 우울한 글을 썼습니다,” 저의 남편은 한 때 하나님을 향해 불타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을 그는 주님의 일에 신실하게 자신을 드렸었는데 지금은 그는 어떤 새로운 추구하는 것으로 온통 미쳐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주님을 위한 시간을 갖지 않아요. 그가 점점 냉담해 져가서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정당한 추구함에 관한 비유를 말씀 해 주었습니다. 한 부자가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모든 친구들을 초청하고자 그의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람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변명하기 시작했다”(누가복음 14:18)고 말씀합니다.

한 친구는 종에게”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네. 그러니 너의 주인에게 가서 내가 갈 수 없다고 말해 주게.” 그 다음 친구는 말하기를, “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해 볼 시간이 없었어. 그러니 갈 수 없다고 주인에게 말하라, 왜냐하면 소를 데리고 밭에 가야 하거든. “ 또 한 사람은 말하기를, “ 나는 장가를 들어서 신혼 여행을 가려는 참이야 그러니 잔치에 갈 시간이 없네.”

이 사람은 자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모든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그 친구들의 안락함과 편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식탁은 차려졌고 모든 것들이 준비가 되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그저 너무 바쁘거나 다른데 정신이 몰두되어 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오지 못한 데에는 선한, 합법적이 이유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친구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파티에 가거나 술집을 여기 저기 기웃거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대로 이 사람들이 하고 있던 모든 일들을 추천합니다. 즉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은 사람들의 가족들의 생활을 보장 해줄 수 있고 대량 구입한 것을 시험하는 것은 정상적인 비즈니스 관행입니다. 마지막으로 결혼은 성경이 격려하고 있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대로와 산간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오게 하여 내 집을 채우도록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 하노니, 전에 초대되었던 그 사람들은 아무도 내 저녁을 맛보지 못하리라” (누가 복음 14:23-24).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논지를 아주 분명히 하십니다. 즉 이러한 좋고 정당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주님보다 우선권을 차지 할 때에는 악한 것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2012년 12월 5일 수요일

예수님과 에베소 교회

요한 계시록의 처음 세 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도 요한의 놀라운 환상 중에, 그는 예수님이 신약에 나와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걷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눈은 불꽃이며, 그 분은 제사장의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러한 교회들을 의로 심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장 17절에서 “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한다” 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일곱 교회 가운데 나타나시므로, 그 분은 그가 보시는 선과 악에 따라 교회들을 심판 하시기 시작합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심판은 붉은 색의 글자들로 써 있는데, 이것은 모든 말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 일곱 교회들은 실제로 현재의 에베소, 서머나, 라오디게아, 등등 에 있었던 실제 회중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은 단지 이 특정한 교회들만을 향해서가 아니라 저 세계의 교회들을 향한, 즉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바라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듣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찬양하는 교회들에 대해 많은 좋은 것들을 열거 하시면서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좋은 일들로 각 교회들을 칭찬하시지만 또한 자신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여러가지 들을 보시고 각 교회들에게 경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번 째 메시지는 사도 바울의 경건한 가르침 위에 세워진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은, “ 너희가 첫 사랑을 져 버렸다” (계시록 2”4)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첫 사랑’ 이라는 단어를 사용 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덜 성숙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독점적인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 내가 한 때 너의 마음의 제일 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 그러나 지금 너는 나를 향한 독점적인 사랑을 잃어버렸다. 너는 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허락했다”라는 것입니다.

그 것은 예수께서 이 일곱 교회들에게 지적했던 모든 죄들, 즉 간음, 탐욕, 미지근함, 가짜 가르침, 이세벨적인 권위, 죽은 예배, 영적 소경의 죄들 중에서 가장 중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첫 번째 죄가 그 분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질투하는 연인이시며 그 분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 앞에 그 어떤 것도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2012년 12월 4일 화요일

너의 첫사랑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제가 너의 첫사랑을 져버린 것 때문이라” (계시록 2:4)

저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이 경고가 이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모든 크리스천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네가 죄로 인해 슬퍼하고 진리를 설교하는 그런 헌신적이고 구제하는 부지런한 종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단다. 도덕적 기준을 붙잡고, 나를 위해 고난을 견디며, 혹은 너의 믿음을 위해 화형을 당한다 해도 그것 또한 충분치 않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의 일환이란다.”

너희가 나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일들을 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나를 향한 너의 애정이 증가 되지 않는 다면, 만일 내가 너의 심령에 점점 더 큰 기쁨이 되고 있지 않다면, 너는 너의 첫사랑을 져버린 것이지. 만일 나에 대한 너의 애정이 더 이상 너에게 큰 관심거리가 안 되고 있다면, 나는 네게 뭔가 거슬리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다윗이 시편 73편 25절에서 “ 하늘에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 위에도 주 외에는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라고 말한 것을 상고해 보십시오,” 강한 어조의 말들이지요, 하지만 다윗은 “ 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 내가 나의 주만 을 사랑하는 것만큼 내 마음을 독차지 하는 이가 없다. 나는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주님을 갈망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또한 시편 63편 1절에서,”오 하나님이여, …내 혼이 주를 갈망하오며 내 육신이 건조하고 메마른 물 없는 땅에서 주를 사모하오니.” 라고 말하고 있고 시편 42편 1-2절에서는 “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는 것같이, 오 하나님이여, 내 혼도 그처럼 주를 갈망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사슴이 쫓김을 당한 후에 목말라 하는 것처럼 간절히 주님을 갈망합니다. 사슴은 물을 찾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견뎌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셨지요, “너는 더 이상 사슴이 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나를 구하고 있지 않다. 나는 더 이상 너의 갈망의 주 대상이 아니구나. 너는 나를 위해 기꺼이 무언가를 하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내가 너의 마음의 중심에 있지를 않는구나!

오늘 당신의 첫사랑으로 돌아 가십시오. 예수님께 그 분을 향한 당신의 애정을 지킬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은혜와 힘을 구하십시오!

2012년 11월 30일 금요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오늘 날 크리스천들은 빛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놀라우신 일의 의미와 그분의 희생으로 얻어진 엄청난 축복들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때 암흑시대로 알려졌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놀라운 일이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있었습니다.

암흑기 동안의 대부분의 설교들은 지옥과 하나님의 진노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교황과 사제들은 행위의 복음을 설교했고 사람들은 하나님께 잘 보이고자 여러 종류의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지에 절 하러 가기 위해 수십 마일을 여행했으며 돌로 만든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묵주를 만지면서 긴 기도를 되풀이 했었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단지 그들의 속박을 증가시켰을 뿐이었고 그들의 영혼에 더 깊은 어두움만을 가져 왔습니다.

그 때의 사람들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축복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그 주제에 관한 많은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 많은 중요한 점들,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 떼들을 돌보는 한 목자로써 저는 때때로 지옥,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승리의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의 축복과 유익함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만이 그 위에 진정한 거룩함과 의로움이 세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초가 없이는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경건의 모양을 만들어 내려고 우리의 육신을 의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거룩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알 때에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서, 우리를 가르치시되, 불경건과 세상 정욕들을 거부하고, 우리로 신중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이 현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며” (디도서 2:11-12).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에게 그 어떠한 행위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그러한 경건으로 이르게 하는 신학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2012년 11월 29일 목요일

즐거운 소리를 알기

오늘날 그리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두려움과 혼란가운데 살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희년의 즐거운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분의 보혈에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들이 자유가운데 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제공하신 모든 것들의 즐거운 소리를 이해 하지 못했습니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89:15). 오늘날 우리가 듣는 즐거운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우리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입니다.

희년의 즐거운 소리에 대한 또 다른 축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1.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오 주여, 그들이 주의 얼굴빛 가운데 행하리이다” (시편 89:15). 여기에서 히브리어로는 “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안전하고 그분의 임재 하심 안에서 평온한 가운데 기뻐하며 살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이나 혼란 가운데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얼굴의 빛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주의 이름 안에서 그들이 종일 즐거워할 것이요, 주의 의 안에서 그들이 높아지리니” (16절). 우리는 우리의 의가 누더기 조각 같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의를 우리 것 삼아 기뻐하며 용기를 내야 합니다.

3. “이는 주께서 그들의 힘의 영광이시기 때문이니이다. 주의 은총 가운데서 우리의 뿔이 높아지리이다” (17절). 그리스도 홀로 우리의 모든 힘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는 더 이상 마귀의 손아귀 아래서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구주가 대적 마귀를 짓밟아버린 모습만을 바라보아야 할 뿐인 것입니다!

4. “주는 우리의 방패시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우리의 왕 이시니이다” (18절). 우리는 육신으로는 완전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대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그리스도는 중보 하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대 제사장이 속죄의 날에 성소의 계단을 올랐던 것처럼, 우리의 대 제사장은 하늘의 장막 안으로 오르셨습니다, “...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러한 건물이 아닌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을 통하여” (히브리서 9:11). 예수님은 단지 그 분이 받기에 합당한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대신해서 일하시기 위해 승천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일은 모두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살아 계셔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심이라”(7:25). 그리스도의 하시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위함입니다! “ 그 분께서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심이라” 는 말씀이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세가지 방법으로 중보 하신다고 믿습니다.

첫째,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서서 우리가 잘못할 때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는 우리에 대한 사탄의 참소와 관계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마귀는 우리의 모든 잘못과 범죄함을 하나님께 참소하기 위해 옵니다. 마귀는 이렇게 외칩니다, “ 나는 공의를 원합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이 사람을 처벌하여 멸망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 분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간단히 그 분의 십자가의 승리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느냐? 너는 나의 자녀 위에 어떤 소송의 권한이 없다. 나의 것으로부터 너의 손을 거두어라!”

둘째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는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희년에 의해 제공된 모든 혜택을 취해서 누리기를 확실히 하신다는 뜻입니다. 레위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제공하던 법을 시행하던 것과 꼭 같이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희년의 특권을 시행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법적으로 자유하다는 것을 알기를 확실시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화목케 하시며 우리 자신의 심령 안에서 중보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에 계속 응답하시면서 우리에게 우리는 용서받았노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과 힘을 제공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27일 화요일

철장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겨 내어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15 ).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승리의 행렬 뒤에서 비틀거리는 것은 바로 쇠사슬에 묶여있는 사탄 자신이었습니다. 천군들의 병거바퀴 아래에는, 패배한 마귀와 결박 받고 완패한 어두움의 모든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자가를 품고 죽은 믿음의 조상들 앞에서, 공개적 수욕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이 질그릇같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지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요한 계시록 2:27). 예수께서는 그의 손에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철장” 인 의의 홀을 을 잡으시고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승리의 입성 후에 예수께서는 모든 능력, 권세, 그리고 지배권을 전적으로 차지하는 합법적인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면인지요! 사탄은 힘을 잃었습니다. 공산주의도, 무신론도 힘을 잃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은 오로지 그분의 허락 하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들은 그들의 죄의 잔을 채우는 것을 계속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며, 그 어느 날 그분이 준비가 되시면, 그 분은 “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릴 것이며, 토기장이의 질그릇같이 산산이 부술 것입니다” (시편 2:9).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과 죄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애매모호하거나 혼란스러운 신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탄이 완전히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또 이해 해야만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감옥에 가둘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그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강과 희락, 그리고 자유를 주고 계십니다.

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다른 영 by Gary Wilkerson

“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에게 다른 영이 있어…” (민수기 14:24). 갈렙의 어떤 점으로 말미암아 그가 다른 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였을까요?

당신은 주리고 목말라하며 하나님에게 “ 저를 다른 영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라고 부르짖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광야를 그저 헤매면서 기꺼이 삶을 소모하는 중도의 길에 있는 우유부단한 크리스천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안에 있던 그 무엇이 그들을 구별시켰을까요? 왜 그들은 다른 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과연 무엇이 사람들을 다른 영을 가진 남녀로 구별 짖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그들은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다른 이들은 그것을 왜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일까요? 어떻게하여 이러한 남녀들은 이 다른 영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내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을까요?

저희 교회의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그의 얼굴을 부싯돌처럼 굳혔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 있을 때 저는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예수님, 저도 이 젊은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간절한 영을 원합니다. 저는 그 불과, 그 열정, 그 순결함과 그 경건함을 더 원합니다.”

이 젊은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저는, 내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저는 깨끗한 손과 정결한 마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그는 이 타협의 시대에 그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자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주위의 다른 이들은 큰 군중을 끌고자 교묘한 방법으로 화려한 이벤트로 다가갈 때, 그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 주님,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 저 역시 수많은 자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만 당신을 더 갈망합니다.”

이 다른 영을 가진 젊은이 곁에 있을 때 저에게 부러움이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더 소유한 사람을 향한 질투와 부러워함을 허락하십니다!

2012년 11월 23일 금요일

예수님은 우리의 희년!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사야 61장 1-3절).

우리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죄와 죽음에 대한 정복을 선포한 것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여기서 희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팔을 불어라! 구세주가 우리에게 주신 즐겁고 기쁜 자유의 해가 도래한 것을 알려라!”

이 구절은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복된 아들의 엄청난 고통을 보신 하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천국입성을 위해 만군 천사들에다가 병거까지 갖춰 장엄하게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시 68편 17-18절).

유한한 우리 생각으로 이 영광스러운 위용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향해 백마타시고 전진하는 그리스도의 호위 행열의 장관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천국문을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진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 가시도다”(시 47편 5절).

이것이 그 기쁜 소리입니다. 나팔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믿는자들의 희년이 도래했음을 알렸습니다! 그 소리는 만민을 향한 선포였습니다. “내가 너희로 감옥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또 충족된 삶을 즐기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마련했다. 원수들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이제 자유다. 내 기쁨 안으로 어서 들어와 거하라!”

2012년 11월 22일 목요일

자유의 환호성

희년이 오면 온갖 부채를 탕감했습니다. 모든 임대차 계약과 소유권상의 변동이 본주인에게로 환원되었습니다. 농부가 본래 자기 땅과 가족을 되찾는 때였습니다. 레위기 25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때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이스라엘과 유대땅 전역에 펴져나간 환희가 쉽게 상상이 될 줄 압니다. 7번째 달 제 10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순간 종으로 팔렸던 모든 동족 히브리인들이 다 해방되었습니다. 재산을 잃었던 사람도 다시 다 되찾았습니다. 가족들이 재결합되었고 집을 다시 찾았고, 그야말로 구출과 자유와 해방의 날이 온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들리면 넘어가려고 빈곤한 농부들이 자기네 옛날 토지 경계선을 따라 서서기다리는 모습을 나는 상상합니다. 10년을 , 5년을, 1년을 기다렸다가 이제 마지막 그 기쁨의 소리를 듣기 몇분전 까지 그들은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틀림없이 이렇게 그들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잃었던 것들을 이제 모두 되찾을 때가 왔다. 내 것이 다시 되는 것이야. 이제 희년이 왔으니까!”

희년에는 심음과 거둠이 전혀 없었습니다. 대신 기뻐하면서 보내라는 것이었지요. 희년은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과 자유를 찬양하면서 일년내내 성탄절인 것 같았습니다.

희년에 선포된 이 자유가 어떤 불투명한 개념 같은데 믿음으로 받아야지 하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 땅의 토지법이었습니다. 채무자가 할 일은 법대로 아는 것을 실천하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모두에게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지를 감시하는 보안관이나 지도원 으로 레위인들이 활약했습니다.

때로는 종에게, “떠나긴 어딜 떠나. 내 종 주제에. 가서 일이나 해”라고 말하는 주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종은 주인의 면전에서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우리 모두 알고있쟎아요. 그것은 내가 자유라는 반가운 소리란 말예요. 당신은 법적으로 내게 아무 권리가 없어요. 나는 자유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그 소리 듣기를 고대했을까요. 마음놓고 이렇게 말할 자유 말입니다. “과거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지 이젠 그걸로 나를 원망하지 말라. 나는 구제 받았고 내 분깃을 누구도 박탈할 수 없다.” 자유를 되찾고, 잃었던 재산을 돌려받고 싶은 사람은 나름대로 행동 개시를 해야 했습니다. 춤을 추든지 외치면서 회당 같은 데서 “나는 자유다! 모든 것이 다 네게 회복되었다”고 선언해야 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분명하게 선포하기 전에는 자기 권리를 하나도 즐길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중요한지 보이십니까? 대부분 크리스챤들은 예수님이 주신 희년을 주장할 줄 모릅니다. “즐거운 소리”를 많은 사람들이 찬양할 때 흥이 돋아 손벽치거나 춤을 추는 것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훨씬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통해 마련해주신 자유와 평화와 영광을 실제로 찾아 쓰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으로 나가 확실하게 내 것을 주장해야합니다!

2012년 11월 21일 수요일

하나님이 “나를 의뢰하라”하실 때에는 정말 그리 해야함

잠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이 필요한 것들을 통해 어떻게 만나주셨는지 역사적으로 살펴봅시다.

광야시절 이스라엘에게는 물론 슈퍼마켓도 식료품점도 없었습니다. 풀 잎 하나 눈에 띄지 않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만나를 하늘로부터 부어주셨기에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먹을 수가 있었고 때로는 보내 주신 새들을 말로 거둬들여 고기도 먹게했습니다. 암반에서조차 물이 솟구치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신발과 옷이 40년동안이나 닳거나 헤어지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어느 배고픈 선지자가 까마귀 때문에 먹고 산 이야기, 한통의 가루와 한병의 기름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여러사람들이 배불렀던 이야기, 또 (포위망을 조이던) 적군이 이상한 소리를 듣고 갑자기 철수한 덕분에 굶주리던 성읍 전체 거민들이 다 흡족하게 먹을만한 양식이 생겼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약에는 물을 변화시켜포도주를 얻은 이야기, 세금 낼 돈을 물고기 입에서 건지기도 했던 이야기, 고작 5덩이 떡과 두어마리 물고기를 가지고 5천명이 먹고남았던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이처럼 초자연적으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들이 웅변으로 전달하시는 메세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분은 우리가 신뢰할만한 분이시다.” 그리고 또 다른 초자연연적인 현상을 레위기 25장에서 우리가 보는데 안식년 바로 전해에 그 땅에 허락하시는 가득한 풍년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7번 연속해서 안식년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8절). 다시 말해 “너희는 안식년을 7번째 해에 지키되 7년씩 7번 즉 모두 49년간 그렇게 할지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적으로 49년은 한세대 전체를 망라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만 의뢰해보았더니 한세대 전체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간증할 자료가 쌓이고도 남을만한 기간이었습니다. 그정도 기간이면 부모와 조부모가 자기생애에 경험한 믿음의 역사를 자손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래. 하나님이 6년동안 잘 공급해주셨지만 막상 제7년이 되자 많이들 두려워했었지. 그런데 웬걸 제8년, 제9년까지도 염려없었어. 어떤 때는 물론 혼난 적도 있었지만 결국 부족하지 않았어. 아무도 굶지 않았고, 남에게 구걸할 필요도 없었어. 그동안에 우리 믿음은 시험대 위에 올랐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공급하셨고 끝까지 신실하였어!”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의뢰하여라” 하실 때에는 정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20일 화요일

희년의 절기

레위기 25장을 보면 유대인의 절기 희년의 유래가 나옵니다. 7년째 해가 돌아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쉬는 것부터 시작하여 희년을 지키게 했습니다. 제7년 안식년으로 규정된 그해에는 모든 토지가 휴경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 농작물을 심지도, 거두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3-4절).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일년내내 모든 농업활동을 차단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 입장에선 지원책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살아야한다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손에 삶을 의탁한 채 그분이 모든 것들을 공급하시리라 전적으로 믿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년을 통털어 거둬들이는 농작물이 전혀 없습니다. 사료용 작물도 거두면 안됩니다. 농부가 일을 하면 안됩니다. 포도원을 가꿀 일손도 구하면 안됩니다. 요즘 크리스챤더러 이렇게 살라고 하면 일년은 고사하고 일주일도 못가 공황장애를 겪을 만 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이상하고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7년째 해에는 어디서 양식을 구한다는 말인가? 가족과 가축떼가 무얼 먹고 산담? 안식년 바로 전 제6년까지 우리가 남김 없이 다 먹어치우고나면 우리 아이들이 굶을 텐데 그래도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정말로 포도가 나무에 달린 채 썩도록 하나님은 우리더러 보고만 있으란 말씀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년을 명령하실 때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신실하심을 친백성에게 계시하는 것이있습니다.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20-21절)

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나님은 22절에서 3년치의 추수를 보증하셨습니다. “만약 너희가 눈 감고 나만 푹 믿는다면 내가 제 6년에 가서는 너희가 3년간 먹을 양식을 추수하도록 해주련다.”

주님이 여기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의뢰하며 순종하는 자들을 위하여 항상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012년 11월 19일 월요일

하나님이 대신 일하시네 by Gary Wilkerson

예루살렘 성벽은 재건되고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보기에 사람들 마음이 죄와 예속됨과 실망감에 사로잡히가 시작했습니다.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 갈 때에 내가 명하여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느헤미야 13장 19절).

이 구절에서 느헤미야는 성령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 성향과 어디로 끌리는지를 잘 안다. 안식일을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빠져서…결국 나를 잊을 것이다.” 그래서 어두워지기도 전에 느헤미야가 문을 닫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문제가 뭔지 아직 모르고 있을 때에도 이미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고 계십니다. 죄악이 자리잡기 시작하여 당신을 장악하기 전에 하나님은 미리 움직이십니다. 청교도들은 이를 선행적 은총이라고 불렀습니다. 유혹이 들어오기 전에 마련된 은총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쫒겨나기 전에, 죄가 선악과를 장악하기 전에 하나님은 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자손이 네 머리를 상할 것이다”(창세기 3장 15절). 아담과 하와가 속아넘어가고 만국을 형성할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을 뱀이 미혹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빠져나가기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였습니다. “내 계획이 벌써 가동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결코 곁으로 물러나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만약 죄를 범하게 되거든 내게로 와서 회개하거라. 내가 또 용서해주마.” 물론 그분은 그리하실 분이십니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혹이 다가오기 전에 이미 당신의 삶에 방벽을 쌓기 시작하십니다. 그분은 은혜와 성장으로 말씀위에 말씀으로 계명위에 계명으로 차근차근그것을 쌓아 영적으로 성숙하여지는 과정속에서 보강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벌써 당신의 승리를 계획하고 계십니다!

2012년 11월 16일 금요일

소돔으로부터의 구출

우리들 대부분은 소돔을 샌프란시스코나 뉴욕, 혹은 뉴 올리안즈 같은 사악한 현대도시들의 모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 자신의 심령을 들여다 보기만 하면 소돔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극도로 악한 것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졌던 소돔 사람들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 정녕 너희가 마음으로는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폭력을 측정하는도다” (시편 58:2)

저는 다음 구절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소돔으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가를 나타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신성의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에 따라 그에 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부르셨으니, 이로써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들을 주심은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통해서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 후서 1:3-4)

하나님은 속아서 매여 있는 우리들에게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에 대한 능력의 약속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분은 “ 나는 너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고 지켜 줄 것을 맹세한다. 나는 너에게 나를 순종하는 심령을 주리니 나의 약속들이 너를 붙잡아 주게 하여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우며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는 진리인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잡을 때 우리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는 이 서신에서 그가 말하고 있던 신자들은 “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절). 어떻게 이 크리스천들은 죄를 피했을까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들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경건의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기쁨에 대해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기쁨은 당신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될 때에만이 터져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당신의 욕정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제거시키시도록 하십시오. 바로 지금 그렇게 하여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 오 하늘의 아버지, 저의 죄에 대해 당신께 동의 합니다. 저의 타협의 악취가 하늘에 닿았고 저는 그것이 즉각 없어져야 함을 압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에 찬, 하늘의 최후 통첩을 받아들이며 당신 앞에 모든 것을 내려 놓습니다. 제 안의 사악한 모든 것을 다 태워주시고 당신의 약속이 저의 심령을 붙들게 해 주시옵소서. 저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2012년 11월 15일 목요일

하나님 안에서 충만함을 향해 전진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분 자신의 손으로 일하시지 않았었더라면 롯은 소돔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 그대로 롯과 그의 가족들을 그 도시에서 끄집어 내셨습니다, “롯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이 그의 손과 그의 아내의 손과 그의 두 딸의 손을 잡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를 인도하여 성읍 밖에 두시니라” (창세기 19:16)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은혜의 그림인지요! 롯이 파멸을 눈앞에 두고도 힘이 없어, 아니면 자신을 구원할 의지가 없어 꾸무럭거릴 때, 하나님께선 이 혼란 속에서 죄에 묶여 속고 있는 사람들을 안전함으로 구해 내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은 롯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 롯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네가 이 대 참사가운데서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단다. 너는 의로운 자란다. 하지만 내가 경고하노니, 이제 그 곳에서 나오너라!”

로마서 5장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 연약하였을 때”라는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기꺼이 우리를 위해 대신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롯에게 또 하나의 지시를 하셨습니다, “ 네 목숨을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그래야 소멸되지 않으리라” (창세기 19:17) 여기에서 산은 하나님의 임재, 즉 그 분과 홀로 있는 장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들이 성경 전체를 통해 되풀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곳도,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 앞에서 변형하셨던 곳도,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로 그 분의 아버지를 찾았던 곳도 산에서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산에서 일어났습니다.

“ 주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도성과 그의 거룩한 산에서 크게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편 48:1). “우리가 주의 산에,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자. 그리하면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길에서 행하리니” (이사야 2:3). 여기에서의 메시지는 “ 그 분의 약속들을 믿는 당신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 하실 때, 그 분의 거룩함의 산을 향해 똑바로 달리라!”는 말씀입니다.

롯은 아직도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기꺼이 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소알 성읍으로 우회할 것을 구했습니다. 그가 말하길, “내가 산으로 도피할 수 없나이다. 혹 어떤 재앙이 나를 붙들면 내가 죽을까 함이니이다” (창세기 19:19).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고 롯이 결국은 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는 거기에 있었을 때에 소돔에서 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롯이 술에 취했었고 자신의 두 딸에 의해 동침함으로 근친 상간의 아들들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얼마나 비극적인 장면인지요!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롯이, 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충만함 가운데로 전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2012년 11월 14일 수요일

죄와의 평화협정을 멈추십시오

“그들이 롯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 밤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려오라. 우리가 그들을 알고자 함이라” (창세기 19:5). 롯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소돔성의 미쳐 날뛰는 군중들이 롯의 집을 에워 싸고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음담패설을 떠들어 댔습니다. 그들은 롯의 집에 머물고 있는 두 천사들을 겁탈하겠으니 내놓으라고 소동을 부렸습니다.

그 얼마나 끔찍한 장면입니까! 하지만 이에 대한 롯의 반응은 그 군중들과 거래를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롯은 성문에 앉아 있던 것으로 보아 소돔의 재판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롯의 명성은 보호하는 자로 평판이 나있었기에 폭도들을 설득하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들을 “형제들” 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소돔의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탁 하노니, 형제들아, 그처럼 악하게 행하지 말라. 보라, 내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이 있도다. 내가 간청하노니, 내 딸들을 너희에게고 데려가서,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자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7-8절).

한 신학자는 롯은 그 남자들이 동성연애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딸들은 위험하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아마 롯은 자신에게 이렇게 합리화 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 이 사람들은 소돔 식의 파티를 하려 하겠지, 자신들의 변태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말이야. 여자들에겐 위협적이지 않으니 만일 내 딸들을 내 보내도 내일 아침이면 아무 일 없이 돌아 올 거야.”

그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롯은 하나의 죄를 다른 죄로 대치시키려고 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탐욕을 가지고 흥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분명히 자신에게 속고 있는 롯은, 숨겨진 죄가 의인에게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예입니다. 그의 죄는 자신의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그러한 위험한 지경을 자신 안에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사람은 현실을 마주 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부적절한 타협을 맺어 가면서 대가를 받는 순간을 최대한 지연시켜 그의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늦추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오늘 날 많은 크리스천들의 태도 입니다. 그들은 “나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지, 그분은 이전에 나의 죄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또 다시 그렇게 해 주실 거야.” 하면 자신들을 납득시키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절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더 이상의 흥정은 없다. 경한 죄로 중한 죄를 대신 바꾸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모든 죄는 다 버려야 한다!”

2012년 11월 13일 화요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들의 죄가 매우 중하므로” (창세기 18:20).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 은혜, 그리고 오래 참으심에 대해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멀지 않아 그분께서 소돔의 것들과 같은 모든 것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분의 성품을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 주께서 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시기를, 주로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출애굽기 34:6-7 ).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계속하십니다,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7절).

주님은 “ 나는 죄를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자비롭고 오래 참지만 너희들의 죄에 대한 나의 인내가 끝나는 때가 오고 있노라. 그리고 그 때는 소돔이 불 타버릴 때인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명의 천사가 롯에게 와서 경고하기를, “ 일어나서, 네 아내와 여기에 있는 네 두 딸을 데리고 가라. 그래야 네가 성읍의 죄악 속에서 소멸되지 않게 되리라” (창세기 19:15 ).

롯은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다음날 아침 천사가 와서 깨울 때까지 잠을 잤었으니까요. 그의 사위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 당연합니다, “ 만일 그가 그 경고를 정말 믿었다면 그는 지금쯤 은 여기에서 도망 나가고 있었을 거야. 롯은 그 것을 믿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왜 우리가 그걸 믿어야 하지? “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임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실 것처럼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이들이 우리의 증언을 들을 것입니다.

저는 소위 “신의 최후통첩”이라는 것을 믿는뎨, 그것은 당신의 죄가 당신을 멸망 시켜버리려 하는 때를 성령께서 아시 는 때입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구원하기를 원하고 있다. 자, 너의 죄로부터 돌이키거라. 나의 말에 순종하거라!”

이러한 최후 통첩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 됩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은 우리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함으로써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며 거짓을 말했고 그 즉시로 죽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 참조).

당신이 하는 많은 기도와 금식,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얼마나 신실한지는 결코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심각하게 대처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by Gary Wilkerson

저는 속박과 사로잡힘으로부터 계속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승리를 유지 할 수 있을까요? 한때 우리를 괴롭혔던 것들에게로 되돌아 가지 않고 어떻게 하면 끊임 없는 승리가운데 살수 있을 까요? 그리고 저는 그저 죄에 대해서만 얘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자라면서 지니게 되는 감정적인 응어리들이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삶의 유형을 가지고 살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이들은 계속 극복해가야 만 했던 연쇄적인 실망감들을 경험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속박을 떨쳐 버릴 뿐 아니라 계속 그 자유함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걸까요? 승리를 얻을 뿐 아니라 그 승리를 계속 지킬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우며, 넉넉히 이기고, 지속적이면서도, 능력 있는 승리를 전 생애를 걸쳐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당신은 아마도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십 여 년의 상담이 필요할 것이며, 혹은 그것을 당신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려면 이십 여 년의 성숙해 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한 순간에 당신을 자유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그 자유 함 속에서 계속 거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느혜미야가 성벽 재건을 감독하려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은 장기간의 과정이 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느혜미야와 같이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노예이거나 종들이었으며,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지만 그들은 일을 하려고 마음을 정했었지요. 그들은 그들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것들을 위한 열정들이 있었고 단 오십 이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종류의 열정, 즉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 가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목적, 계획 그리고 야망을 위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당신의 눈을 예수께 고정 시키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당신을 세우시고 당신을 번성케 하실 것입니다. 그 분께서는 당신을 일으켜 세우시고 자유케 하시며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자유함을 누릴 수 있으실 것입니다.

“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는 자들보다 더 나으니라” (로마서 8:37).

2012년 11월 9일 금요일

구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한번은 어떤 사역자가 청중을 향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구약은 현대와 동떨어진 것이기에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는 책입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요! 구약 읽기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신약의 내용을 너무나 명료하고도 간단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신약교회의 모형이고 애급은 세상을 대표합니다. 광야길을 걸었던 그들의 여정은 크리스챤들의 영적인 순례길입니다. 또한 마라에서 쓴 물을 고쳤던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물이 터져나온 사막의 반석은 장차 오실 구세주를 각각 나타내는 한 모형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육신으로 싸웠던 모든 전쟁을 거울삼아 오늘 날 영적인 전쟁을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1절). 장막과 기물들조차도 하늘에 있는 것들의 일례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8장 5절).

이모든 구약의 예들은 옛적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우리가 불신으로 떨어지지 말라는 뜻으로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브리서 4장 11절). 다른 말로, “구약을 공부하여 이스라엘에게서 배우라. 그들이 범했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라”입니다.

신약의 진리가 이해가 안될 때면 나는 구약을 찾아서 어디 예화가 없을까 뒤적입니다. 예를 들어 사탄 마귀가 내 삶에 쌓아놓은 영적인 벽에 같혀있다는 느낌이 들어 이걸 어떻게 무너뜨리나 내가 알고 싶어집니다. 이때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 성벽이 어떻게 무너져내렸나를 보게됩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몸으로 싸웠던 전투장면은 하나의 그림과 유형을 보여줍니다. 나로 하여금 현재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있다면 그것을 허물 방도를 거기서 보는 것입니다.

2012년 11월 8일 목요일

그들은 전혀 순종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에스겔의 능력있는 설교를 즐겨 들었지만 그 말씀대로 한번도 순종한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에스겔서 33장 31-32절).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끝나면 내게 다가와 껴안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그러고 그들이 물러갈 때면 성령께서 내게 속삭이듯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들은 네가 한 말을 한마디도 듣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강력한 경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브리서 3장 7-8절). ”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16절) 이 구절들은 명백하게 증거합니다. 무신론자, 공산주의, 등등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강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행하지 않는 것이 강퍅한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능력있는 설교 역시 달게 들었던 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자기네 죄를 합리화나 하면서 죄악을 선이라 선을 죄악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지시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사야6장 9-1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질적인 죄를 내려놓지 않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인 쾌락과 경건치 못한 벗들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자들이 절대로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 내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 대신 네가 더욱 그들을 강퍅케 하도록 하기를 원한다, 이사야야. 그렇게 하면 그중에 몇은 너무 늦기 전에 돌아올지 모르니까!”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전적으로 헌신하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진리를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바르게 시작하는 모습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육신의 길을 버렸을 때 그들은 주님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런 그들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테스트 한번 합시다

강퍅한 마음으로 가는 첫걸음을 이미 뗀 것인지 아닌지 다음 테스트로 한번 알아봅시다.

     1. 매일 기도와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설교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집에서 골방기도를 하지 않고 교회에서 한두번 기도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만일 믿으신다면 이 세상의 험한 나날 속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형편이 좋을 때에도 우리의 심신을 고치고 강화시킬 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려 한다면 장차 다가올 어려운 때에 극복할 힘을 어떻게 찾겠다는 것입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장차 닥칠 날들을 대비하는 유일한 길을 안 것입니다!

     2. 얼마나 여러번 뒷공론에 따른 심각한 결과에 대해 경고를 들었습니까?

뒷공론에 관한 주제로 내가 설교할 때 때론 부드러운 비처럼, 또 때로는 천둥같이 요란한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죄악의 위험성에 대해 거듭거듭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주님께 불순종했고 그것이 바로 뱀이 많이 사는 사막에서의 지긋지긋한 삶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뒷공론과 끝없는 불평의 댓가를 이스라엘은 삶의 모든 것들로 톡톡히 치르고 말았습니다.

지난 주간 혹시 어느형제나 자매를 놓고 공연히 상관도 없는 일에 뒤에서 험담을 한 일은 없었나요? 아니면 그런 한담에 귀를 기울였었나요? 만약 그랬다면, 혹시 그(녀)를 의심하는 씨앗이 그대의 영혼에 떨어져 심어지도록 허락했는지요? 뒷공론 하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채 그러고도 뒷공론을 계속했다면 당신은 강퍅한 마음을 향해 내리막 길로 접어들어습니다.

     3. 얼마나 많이 은밀한 죄를 품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나요?

그 은밀한 죄, 계속 하나님의 성령께서 책망하신 그죄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 작은 죄와 놀아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의 글을 나는 지난 수년간 여러번 썼습니다. 죄를 대항하자는 설교 뿐만 아니라 부활의 능력에 관해 기르치는 것도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자기 성령을 통해 이길 힘을 주시며 오래 참아주시는 동시에 선한 일을 행할 의지까지 우리마음 속에 심어주셨다고 설교로 강조해왔습니다.

매주 앉아서 책망을 거듭 듣기만 하고도 계속 죄를 짓는 사람은 강퍅한 마음이 되는 길로 내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발 되지 마십시오!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강퍅한 마음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언 29장 1절).

여기서 “책망을 받는다”는 뜻의 히브리말은 교정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또한 “피하지 못한다”는 “치료방법이 없는, 구제불능의 상태”입니다. 이 구절은 첫째,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 거듭 경고를 묵살하거나 진리가 손짓하는데도 계속 한쪽 옆으로 제껴놓는데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둘째로, 이같이 굳어진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 말씀을 가장 많이 들어야 할까요? 그건 의당 크리스챤들입니다. 매주 하나님의 집에 책망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강퍅한 마음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기로 굳게 결심한 마음이기에 요동을 일으킬수 없고 또 성령의 책망이나 경고에 대해서도 면역이 되다시피 되어 반응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비극적이지만 실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같은 메세지를 들었어도 수많은 크리스챤들은 들은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일정구역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고 청종하지 않으면서도 듣기는 계속하기에 강퍅한 증세가 시작됩니다.

대조적으로 강퍅한 마음을 고친 죄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향해 성난 주먹을 들었고 저주하기까지 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성령의 순수하고도 사랑스러운 책망을 감지하자 그들이 마음이 녹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예수께로 돌이켰던 것입니다.

매덜린 머리 오헤어의 아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그는 아마도 미국서 가장 무신론적인 집안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도와 하나님과 종교를 말살하자는 십자군의 기치를 들고 일했습니다. 그런 그가 복음을 듣자 영광스럽게 구원을 받아들였고 주의 사역자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기는 커녕 전파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설교를 마냥 듣기만 하고 계속적으로 거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강퍅한 상태를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경험으로는, 항상 성령의 기름부은 설교를 듣지만 귀를 막아버린 청중들 가운데 구제불능의 강퍅한 마음이 있습니다. 냉냉하고 죽어버린 것 같은 형식적인 교회나 몇세대째 복음이 변질되어 내려온 그런 교회에 강퍅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만에요. 강퍅한 마음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강단으로부터 항상 선포되는데도 불구하고 신도석에서는 듣기를 거절할 때 생깁니다.

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좋으신 하나님인줄 알라!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은 당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좋으신 분입니다. 당신이 삶에서 직면하고 있는 어떤 것 , 습관, 죄, 힘든 감정, 그 어느 하나라도 예수님이 다스릴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처참하게 파괴된 그곳 상황을 본 느헤미야는 곧장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독려하여 성벽재건에 착수함으로서 영적인 돌파구를 열었습니다(느헤미야서 참조). 느헤미야처럼 저도 여러분들께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푹 믿고 온 마음과 힘과 생명을 다해 한번 맡겨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대적 사탄과 그의 세력을 분쇄, 정복하고 완패시킬 수 있습니다. 아군의 성벽 안에 깊숙히 같혀 고립된 적들이라면 보호받을 데도 없고 제거될 처지이기에 도망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해묵은 악습, 두려움, 중독증 같은 것들이 우리들 곁에 다시 접근하면 고생을 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 나만 쳐다보아라! 만약 나를 너의 승리로 삼는다면 그것들이 끝장난 꼴을 함께 보게해주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승리로여긴다면 대적 원수의 최후를 본 것과 다름없습니다. 원수마귀는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을 해보았다가 일단 자리를 떳지만 그 후에도 계속 예수님을 흔들어보려했던 것처럼 물론 우리를 여전히 시달리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그분을 당신의 삶과 마음의 중심에 모신다면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서적인 어려움들을 그분이 다 근절하실 것입니다.

습관적인 죄의 행태로 인한 두려움 속에서 당신이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발을 씻고 깨끗해진 줄 알지만 워낙 가까운데 그것이 있으니까 언제 또다시 죄의 노예가 될지 몰라 그것이 두려운 당신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전심으로 의뢰할 때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안정과 안전지대로 바로 인도하기 위해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장 57절).

2012년 11월 2일 금요일

심령을 소생시키심

당신은 처음에그 분으로부터 오직 무엇인가를 원하기 때문에 주님께 나왔습니까? 마약 중독을 버리기 위해, 결혼이 회복되기 위해, 재정 문제로부터 놓여나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 왔습니까?

사실인즉,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그 분은 당신의 삶 가운데 불가능한 일을 행하여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분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만을 위해 왔다면, 즉 당신의 문제들로부터 놓여나기만을 위해서 왔다면 당신은 결코 성숙함을 향해서는 한 자도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당신은 오직 마음이 굳어져 갈뿐일 것입니다

당신이 회심했을 때를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메뚜기들이 모든 것을 다 먹어 치운 후에 회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신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였나요 ? 당신 자녀들 중에 누군가가 문제 가운데 있었나요? 당신 위를 맴도는 죽음과 파멸로 인해 당신은 황폐함 가운데 있었나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패망한 자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그 분은 항상 가까이에 계시고 구원 하심에 있어서 신실 하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오직 놓여남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올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그 분이 당신의 하나님이며 그 분께서는 당신의 삶, 당신의 경배, 당신의 순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므로 그 분께 와야 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 맞아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시 해 왔었고 아직도 습관적인 죄에 얽매어 있습니다. 주님의 치유의 만지심을 받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겠지요?”

아니요,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당신이 오늘 당신의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을 찾는다면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새로운 안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그 분께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드릴 때마다 그 분은 당신의 심판자가 아니라 당신의 중재자요 중보기도 자로써 일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원합니까?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 안에서 경책하시며 거룩함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오늘 그 분을 부르십시오. 그 어떤 것도,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부르짖는 당신을 하나님의 예비하신 길로부터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영원히 거하시는 높고 우뚝 솟은 분, 그의 이름이 거룩이신 분이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고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려 함이라” (이사야 57:15 ).

2012년 11월 1일 목요일

불가능한 임무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 그리스도는“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한가지 이유, 즉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함이니라” 라 말씀하셨습니다 “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임무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임무이기도 합니다. “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세상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예수님은 여기에서 적은 무리의 믿는 자들, 다락방에 모여 있는 백이십 명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얼마나 불가능한 과제를 분부하셨는지요!

“이방 나라들로 가서 그들과 살면서 그들의 언어도 배워라. 병든 자에게 손을 얹어 마귀도 쫓아내며 기쁜 소식을 선포하거라. 사탄이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곳에 가서 부활하신 구주의 능력과 승리를 설교하여라.”

우리는 예수님이 평범하고, 하찮으며 배우지고 못한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말씀 하시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 분의 교회의 미래를 그들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황 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그들의 주인께서 하늘로 올려 가셨을 때 틀림없이 말해졌을 그들의 대화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들은 건가? 어떻게 우리가 전세계적인 개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거지? 우리는 단 한 푼도 가진 게 없고 로마 사람들은 우리를 때리고 죽이려고 하는데. 만일 우리가 이곳 예루살렘에서 이런 식으로 취급을 받는다면 로마에서 증언하고 설교할 때는 어떠할까?”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 어떻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여리고로 갈 돈도 제대로 없는데 복음을 가지고 우리가 전 세계로 가기를 기대 하실까? 우리는 무식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언어들을 배우라는 것일까? 이건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그것은 참으로 불가능한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사명들 또한 벅차긴 마찬가지이고 말고요!

만일 이 메시지를 읽는 모든 분들이 성령님이 이 말들을 그들에게 실제가 되게 하시기를 허락 한다면, 즉 그 분의 마음의 부담과 인도하심을 구한다면, 어떤 류의 추수를 성령님이 거두실 것일까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영생을 위한 가장 위대한 일은 거대한 전도 집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 다가가는 한 성도와 함께 일어난답니다.

2012년 10월 31일 수요일

구원하시는 주님의 능력

앗수르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 시점에 히스기야 왕은 “ 우리는 이 번에 육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방법으로 할 것이다!” 라고 결단했습니다.

왕은 자신을 낮추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 그 때에 히스기야 왕이 그 말을 듣자, 자기 옷을 찢으며 굵은 베로 두르고 주의 전에 들어 가더라” (이사야 37:1). 히스기야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주님, 전 제 믿음 외에는 당신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산헤립과 싸울 힘이 저에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적에게 포위 당했습니다, 당신의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히스기야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있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사절을 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사야에게 “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3절)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행하려 하나 남아있는 힘이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말이었지요

이사야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너희는 들은 말로 인하여 두려워 말라……내가 산헤립을 칼에 죽게 하리라” ( 6-7절). 하나님은 “ 지금 너희의 적은 그 누구라도 나의 적이다. 왜냐하면 너는 그 전쟁을 나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누구든지 너를 대적하여 말하며 너에게 상처를 주고 너를 조롱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에게 공격하고 있는 것이야. 내가 그 원수들을 사람이든, 마귀든지 내가 대신 싸워주마.”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33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너의 주변의 모든 이들이 넘어지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너는 나의 언약 안에서 함께 걷고 있고, 나는 너를 공격하는 모든 대적들을 내가 대신 싸운다고 약속 했거든.”

우리를 대적들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지요! 적들은 우리에게 불 화살로 공격할 지라도 우리를 맞추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엄청난 탐욕과 시험의 군대를 동원해서 우리를 요란하게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결국 뒤돌아서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포 하셨습니다., “ 나는 자신의 칼을 내려 놓을 정도로 나를 믿는 나의 자녀들을 보호 할 것이다.”

2012년 10월 30일 화요일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로다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로다. 말들을 의지하고 병거들을 의뢰하나니, 이는 그들이 많이 있음이라. 또 기병들을 의뢰하니, 이는 그들이 매우 강함이라.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바라보지 아니하며, 주를 찾지도 않는도다! (이사야 31:1)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적들과 싸우려고 시도 한다면 승리의 가능성은 없다고 경고 했습니다. 이사야 31장에 보면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 적과 싸우려 했을 때 헛됨에 대한 실상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오늘날 인간의 생각과 방법들을 의지해서 탐욕, 습관 그리고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죄를 물리치려 하는 우리들의 시도가 쓸데 없음을 보여주는 모형이자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가 이 경고의 글을 쓰고 있었을 때에 산헤립 왕과 앗수르 군대들은 이미 유다를 통과해서 행진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쳐들어 오면서 대부분의 도시들을 점령했고 이제 지금은 예루살렘을 장악할 계획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산헤립’이란 ‘성공의’ 란 뜻이고 ‘앗수르’란 “ 증가하는 죄”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합하면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거대한 승리를 가지는 악한 대적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앗수르는 우리를 향해 오는 모든 마귀적이며 탐욕적인 영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우리를 이겨서 절망으로 우리를 몰아 넣겠다고 확신하는 마귀 그 자신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31장을 통하여 어떻게 마귀와 그 마귀 때들이 집중적이며 거대한 승리를 점점 더 해가면서 물밀듯한 시험들을 교회들에게 가져오고 있는 지를 보여주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이31 장은 또한 마지막 때에 어떻게 죄가 불어나는지에 대한 표본입니다. 성경은 사회가 점점 악해져 갈 것이며(디모데 후서 3:13절 참조), 교회들은 속임수와 마귀의 교리로 넘쳐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바로 지금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믿습니다. 마귀 때들은, 우리의 문화를 감각적이며, 노출적인 그리고 모든 종류의 변태적인 것들로 넘쳐나게 하면서 모든 방송과 모든 모양의 과학기술에 잠입했습니다. 요한 계시록 12장 15절에 계시되었듯이 사탄은 “ 여자의 뒤에서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지금 여기에 새 언약이 있습니다 by Gary Wilkerson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2-14)

얼마나 놀라운 제사인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언약이 천사들과 맺은 언약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담과 맺은 언약, 즉 아담이 실패한 언약과 같지 않으며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패했던 할례의 언약과도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으로 맺은 언약과도 같지 않으며 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의 언약과도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그 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맺은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더 좋은 언약이며 더 훌륭한 언약, 거룩한 언약인 것입니다. 그 언약은 우리 안에 새 생명, 새로운 창조를 주기 위해 오는 그리스도의 언약입니다. 그 분은 옛 것은 없애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과에 근거한 언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호간의 활약 조건에 따라 하나님과 협력적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거래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것은 즉 하나님이 조건을 제시하며 “나는 네가 그것들을 실행하면 내가 이것들을 행하겠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대신 하나님께선 “네가 이러한 옛 언약들이 신물 나지 않느냐? 이제 실패로 인해 충분히 지치지 않았더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당신의 도덕성을 가지고 노력하느라 지치고 좌절하진 않았는지요? 마치 주님과 맺은 언약을 흥정하여 당신이 대등한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양 당신을 주와 동등하게 여기는 일에 지치시지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오래 전에 만드신 모든 언약은 한가지 목적, 즉 우리의 도덕적 기질의 무능력, 하나님과 대등한 입장에서 언약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 참조). 그것은 신약의 때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통해서 하셨듯이,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합니다, “ 저는 제 힘으로는 혼자 할 수 없고 주님께 드릴 수도 없습니다. 주님과 저와 둘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주님께서 제 언약의 몫도 취하심이 없이는, 즉 당신이 당신의 약속을 완성하고 저를 위한 약속을 이뤄주심이 없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설 수가 없습니다.”

자 여기에 있는 새로운 언약인 것입니다!

2012년 10월 26일 금요일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능력

이사야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능력을 새의 모습으로 비유했습니다.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넘어와서 구원하리라”(이사야 31장 5절).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어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어미새들이 그 새끼들 위에서 펄럭이듯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나래를 예루살렘 위에 펼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원수가 총공격해올 때 보호받기를 원한다면 내 날개 밑으로 숨으렴.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감추듯이 내가 안전하게 해줄께. 더이상 원수들때문에 떨면서 살 필요가 없단다!”

내가 하나 묻겠습니다. 현재 큰 전쟁이 있습니까? 상대도 안되게 너무 강력한 대적과 싸웁니까? 그렇다면 순수하게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사탄마귀가 포효하는 사자처럼 유혹과 정욕을 부추기며 달려들고 좌우로 다 흩어지는데 과연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단순히 못쓰는 칼을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대신 칼을 잡으실 터이니 맡기라 하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싯점에 도달한 당신의 이런 고백을 그분이 듣고싶어하십니다. “주님, 이제 이 싸움이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줄 알겠습니다. 수없이 실패했습니다. 이제 단순한 믿음으로 나아옵니다. 나를 좀 살려주세요. 하나님.”

주님의 권면입니다. “싸움이 치열할수록 내게 매달리거라. 전적으로 내가 너를 구원할 능력이 있고 능히 그렇게 할 내 뜻을 믿는 믿음에 네 승리가 달렸다. 대적에게 압도당할수록 내게와 네 맘을 쏟아놓아라. 전심으로 나를 찾아라 그러면 내가 대신 싸워줄 것이다.”

싸움은 절대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항상 주님의 것입니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91편 4-5절).

2012년 10월 25일 목요일

내 힘이 아님

과거 이스라엘백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크리스챤들도 손쉽게 인간의 것으로 육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보려합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책꽂이에 꽂혀있는 수많은 소위 셀프헬프에 관한 책들이 좋은 예입니다. 수만권의 이런 책들이 우리의 육신을 개선하며, 달래며, 다루는 확실한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정말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의 필요를 메꿀 육적인 대안들은 넘쳐납니다. 교회들 역시 안수기도 한방에 우리의 모든 영적인 필요가 채워질 것처럼 기름부음의 부흥회라며 약속을 남발합니다. 부흥사들도 즉각 귀신을 쫒고, 즉각 치유가 임하고, 즉각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며 자랑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이스라엘이 일찌기 도전받았던 것처럼 어려운 환경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든지 아니면 육적인 해법을 선택하든지 둘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뜻대로 한번 해보아라. 네 안을 깊숙히 들여다보고 책도 읽으면서 연구하고 작전을 새우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아라. 그 어느 것도 잠간의 승리조차 줄 수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죄악을 벗어나기 위한 인간적인 모든 노력들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적인 노력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확신이 들 때까지 계속 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인간적인 능력으로 힘센 대적들을 물리치려고 시도했을 때 하나님은 즉각 질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이사야 31장 3절). 성경의 하나님은 분명한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모든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고. 오직 그분만이 대적의 수중에서 우리를 구출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경건한 심지와 견고한 도덕적 기반에다가 때묻지 않은 정신의 소유자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이땅에서는 가장 깨끗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가진 어떤 재능이나 은사로도 마귀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항상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현재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닥쳤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스가랴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배워야만 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장 6절).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승리의 열쇠

새언약을 공부해보니까 이 영광스런 진리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시던 구약시절에 이미 돋보이게 계시되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한바,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하신 그대로입니다(고린도전서 10장 11절). 하나님이 내게 마치 이렇게 묻고계심을 직감했습니다. “데이빗, 승리의 열쇠가 뭔지 알고싶지? 너 죄와 육신과 마귀를 이기고싶지? 원수들과 싸우는 법을 알고싶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과거에 어떻게 했었는지 거기 다 써있으니까 보고 배우면 돼. 너희들을 위해 미리 다 기록해 놓은 것이니까 거기서 경건생활하는 교훈을 얻도록 해. ”

죽음의 사자가 에집트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던 유월절 그밤에 이스라엘 백성은 단 한명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들이건 그들은 모두 집 출입문 양쪽을 양의 피로 발랐던 덕분에 무사했고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출애급기 12장). 이 밤에 안전하게 쉬는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주님의 보혈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감싸주실 능력을 일찌기 그림으로 보여준 예표입니다. 크리스챤들로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문기둥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이미 뿌린 사실을 믿으며 신뢰하는 백성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죽임 당한 양의 피에다가 신뢰를 두었을 때 놀라운 일들을 많이 이루었습니다. 죽음의 사자에서 보호받은 것 말고도 바로왕 밑에서 다스림을 받던 노예의 굴레를 벗어나 에집트를 탈출했습니다. 그외에도 이스라엘이 풀려나야할 다른 원수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역시, 오늘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것은 단지 구원을 얻기 위한 것뿐이 아닙니다. 원수들이 틀어쥐고 있는 견고한 진들을 모두 격파하고 자유를 얻으려면 더욱 필요한 것이 보혈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 말에 혹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으셨다면, 즉 그리스도의 보혈의 보호속에 들어와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업만을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으신 것이라면 절대 안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면에서 끊임없이 죄의 권세와 싸우느라 치솟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고질적인 악습들은 어떻고요. 여러분들의 영혼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싸움에서 물리칠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실상은, 비록 우리가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보혈의 보호 아래 있다해도 하늘 세계에 속한 악한 정사와 사탄적인 권세와 귀신적인 진들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언약에 의거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마련된 권능을 우리가 주장해야하는데 이 권능은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임합니다!

2012년 10월 23일 화요일

새사람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새언약을 한마디 강력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분이 자기 백성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에서 영원히 구원할 것이라 하신 취소불능의 약속입니다.

이 새언약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바치는 모든 육적인 노력들을 우스꽝스러운 무용지물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극복하기 위한 육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쏟아붓는 결심, 능력 및 합리적인 사고 같은 모든 것들에 종지부를 찍게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뭔가 해야만 하는 부담을 벗겨서 하나님이 대신 맡아주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에스겔 11장 19-20절).

새언약에 의하면, 쉽게 말해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하며 생각하던 내가 끝이 난 것입니다. “내 힘만으로 다 할 수 있어. 기도와 성경공부도 내가 한 번 했다 하면, 이 문제도 곰곰히 내가 깊이 생각해본다면, 내 인생인데 내가 왜 변화를 못일으키겠어”

하나님의 새언약은 뭐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옛사람에게는 안녕을 고하고 이렇게 말하는 새사람을 소개합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없어. 그렇지만 성령의 능력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새언약을 연구한 결과 얻은 가장 중요한 소득은 여기에 바로 종말의 시대를 이기는 삶의 비결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마귀는 우리가 일찌기 보지 못했던 악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부터 이 일이 벌써 시작되고 있음을 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집안에 궤계를 써서 거짓말, 이단 사설, 귀신적인 가르침을 이미 침투시켰습니다. 슬프게도 분별력 없는 크리스챤들이 넙죽넙죽 잘 받아 삼킵니다. 목하 수많은 속임수와 이단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가는데, 내가 하나 묻겠습니다. 이런 시대를 믿는 자들이 과연 어떻게 해야 버틸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자기가 직접 감당한다고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두려워하지말라. 내가 이 문제를 내손으로 직접 처리할 것이다. 나의 새언약으로 큰 힘을 너희들에게 실어주어서 원수들의 총공세가 몰려와도 다 물리치게 해줄 것”이라고 거듭 안심시켜주십니다.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by Gary Wilkerson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예레미야 32장 38-41절)

초등학교 3학년 때 손을 들고 이렇게 물은 기억이 있습니까? “선생님, 저 화장실에 갈 수 있어요?”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물론 네가 갈 수 있지. 그렇지만 정확한 질문은, 저 화장실에 가도 되나요란다”

이 구절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하나님이 엄히 말씀하는 서술문입니다. 그분은, “너희가 나와 맺은 언약을 깨면 안되겠기에 내가 내 법을 너희안에 담아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 나오는 영원한 언약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나눠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이 언약에 대한 이해와 그 실재를 즐기면서 동행하는 것에 관한 이 메세지입니다.

그런데 이 새언약이 과연 깨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예레미야선지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찐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예레미야 31장 35-36).

언제 새언약이 깨진다고요? 별들이 빛을 잃고 태양이 더 이상 있지 아니하며 사람이 지구 중심까지 들어가서 별들과 우주 전체를 측량하는 그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새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012년 10월 19일 금요일

영혼의 추수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5)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측량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한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은 것에 의해 계수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한량없는 성령을 소유하셨던 단 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보면 많은 남자, 여자들에게 놀라운 정도의 성령이 부어졌었습니다. 그러한 신도들은 잃어버려지고, 망가진 세상을 위해 울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서 성령께서 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부분은 이렇습니다.” 성령님 당신께서는 내 주위에서 죄책을 느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바로 그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고요한 밤에 흘려지는 모든 눈물을 보고 계시고 당신께서는 절망가운데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모든 이들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당신의 도구입니다. 당신의 심중의 부담을 저에게 채우시고 당신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에게로 인도하소서!”

하나님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능력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거리고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성령님의 확실한 불을 가진, 관통하며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을 말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영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인해 무엇인가가 요동치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 주위에 있는 자들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됩니까? 아니면 당신은 당신의 필요함에만 끊임없이 집중하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분의 부담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그 분에게 쓰임 받을 것을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영생의 일은 머나먼 이국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친구 그리고 직장동료들이 중심으로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구조건들은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당신은 주님께 그들이 죄를 깨닫게 역사해 주실 것과 때에 맞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켜달라고 구해야만 합니다.

금식과 기도가운데 당신을 인도해 달라고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진 자들에게로 말입니다 그 다음엔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적을 일으키실 능력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012년 9월 21일 금요일

자존심과 질투의 우상들


죄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그가 듣는 진리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일까요? 왜냐하면 모든 죄는 그것이 진리인양 받아들여질 거짓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특정한 죄나 혹은 습관에 대해 믿는 자의 마음에 자각하게 하실 때는, 분은 사랑의 경고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부드러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사랑으로 차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훈련을 가져오시기 전에 먼저 기다려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의 타협함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사랑의 깨달음을 쉬지 않고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모든 호소와 경고하심이 무시되고 죄가 뿌리를 박을 , 그에 대한 값은 체벌이며 결국은 심판이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습관적인 죄인이 자신의 타락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그들의 눈이 멀고 마음이 굳어지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결국 그의 굳어진 마음은 철벽같이 것입니다.

사울의 마음은 자존심과 질투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자존심은 다윗과   누구든지 성결하게 사는 자들을 질투하게 하면서 사울 안에서 계속 고개를 들었고 그의 마음은 우상숭배로 점령되었던 것이지요.

사무엘 28 15절에 보면 우상을 숭배하는 왕의 슬픈 간증이 나옵니다 사울이 대답하기를, 내가 심히 불안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떠나시어 선지자를 통해서도, 꿈을 통해서도 이상 내게 응답하지 아니하십니다”. 사울은 울고, 선지자들을 찾아 다녔으며, 꿈에 보여달라고 기도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 아니다 사울아, 나는 이상 너에게 얘기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마음이 우상으로 차있기 때문이야.”

예레미야서는 죄로 인해 주님의 극심한 징책 하에 있었던 에브라임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그의 우상들로부터 돌아섰고 그들을 부숴버리며 회개했습니다. 그의 간증은 이러합니다, “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내가 회개 하였고 후에 나는 교훈을 받았다” (예레미야 31 19)

에브라임이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을 당신은 이해합니까? 결론은 이것입니다. “ 나의 마음에 우상() 갖고 있으면서 교훈을 받기 위해 주님께 갔었다. 그러나 나는 하늘로부터 마디도 들을 없었지. 내가 회개하고 나의 우상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릴 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말도 들을 없었다. 후에야 비로소 나는 분명한 교훈을 받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