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들은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지 그 중심을 공략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다른 이들도 역시 ‘세상에서 나오게’하는 것임을 받아들였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요점적으로 그리스도는 “세상이 너의 처했던 상황에서 내가 너를 불렀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한다. 그리고 그들과의 친교 속에서 너를 불러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냥 불러만 낸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을 불러내려고 너를 다시 보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개신교 적그리스도 영은 세상에서 기독교인을 분리하기 어렵도록 만듭니다. 믿는 사람에게 세상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것이 가능해 보이도록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성결하지 않은 탐욕, 욕정적 광기, 포르노나 간통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사단의 악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주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줄여 말해 세상의 것은 그리스도와 자기 의지를 섞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고수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에 이끌려 한걸음 한걸음 순결하고 청결한 길을 걷게 됩니다. 경건한 책망을 감사하게 됩니다.

2015년 12월 30일 수요일

예수님 임재의 능력

저는 50년간,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매춘부 등 이 땅에서 가장 어렵고 악독한 죄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러한 죄인들이 자신의 상황에 눈이 가려진 교회 신도들보다 복음의 진실에 대한 저항이 적다는 것입니다.

미국 전역에 걸쳐 정기적으로 교회를 참석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의 어떤 사람보다 더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잔잔하고, 부드럽고, 진실이 반만 있는 복음은 악의 벽을 허물지 못합니다.

타르수스의 사울은 그러한 마음이 굳은 종교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대단히 종교적인 사회에 굳게 서 있는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무엇을 보고싶은지 물으며 조사를 하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 임재의 완전한 폭발이 있는 눈멀게 하는 빛으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마음과 죄를 꿰뚫어보는 날카롭고, 대치되는 만남이었습니다(행 9:1-9 참조).

그리스도 복음의 사역자로서 저도 그렇게 합니다. 형제자매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그러한 삶의 길을 계속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아첨하거나 소심함, 저를 좋아하게 하는 것들은 그 상황을 바꾸지 못합니다.

단순히 말하면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도록 이끄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오직 제 안에 계시는 성령님만이 이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 20:27).

제가 여기서 말하는 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 은혜를 설교합니다. 그리고 눈물 속에서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굳은 사람들의 벽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임재의 폭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뉘우치며 기도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의 입에서 나와야만 합니다.

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그리스도의 임무

세상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인정된 교회라는 표현은 불가능하므로 이율배반적인 말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세상이 사랑하는 어떠한 교회는 세상의 것이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 15:19).

제 삶은 1848년부터 1888년까지 인도에서 섬겼던 장로교 선교사 조지 보웬의 글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았습니다. 보웬은 선교 후원을 포기하고 빈민가로 들어가 현지인들이 사는 것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거의 빈민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진실한 능력의 간증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 경건한 분은 ‘현대 사회의 영’으로 밝혀지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보웬에 따르면 이 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사고방식과 방법, 도덕으로 개신교 교회에 잠입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사회와 교회가 구분하지 못할 때까지 지속해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시간에 걸쳐 세상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진정한 신자들을 향한 적대감을 잃을 것입니다. 박해를 멈출 것이고 교회는 세상에 사랑받게 되며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그리스도의 영이 왕좌를 탈환한 것이라고 보웬은 말합니다.

수년 전, 비영리 기독교 구호단체들에 이라크의 우호적인 문이 열리려고 할 때, 뉴욕 타임즈지는 비판적인 논평을 싣습니다. 그것은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언론으로부터 예상된 바였습니다. 이라크에 음식을 조달하는 것은 박수 칠만한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이 모든 노력에 비판적인 한 기독교학자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자기 일에 전념해야 한다며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교회가 전도하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듯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정해놓으신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임무에 가까이 갈수록 저희는 더 세상에 의해 멸시받을 것입니다.

2015년 12월 28일 월요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 것 by Gary Wilkerson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한 축복으로 이끄시면서 많은 위업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후에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던 초점이 흐려졌습니다. 대신 초점을 자신의 힘으로 바꿨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창 12:10)”.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돌아가서는 안 될 곳이 애굽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의 아내까지도 위험 속으로 넣었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는 왕에게 아내를 잃었으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말과 교묘한 조작을 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했던 사람이 어떻게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을까요?

아마 우리의 위기 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삶이 경제적인 면에서나, 건강, 가족에 관한 것들이 어려워질 때,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도움을 처하려 아브라함과 같이 ‘애굽에 내려간’ 적이 있다면, 그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 것입니다. 종종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수치와 절망을 더 합니다.

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세상과 멀어지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일어나며, 그 영광은 어려운 때에도 저희와 같이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보십시오.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1). 그 성스런 광경이 이사야를 경외감에 떨며 얼굴을 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5).

바로 그 순간 이사야는 하나님의 떨어뜨려 놓으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신성한 목적을 위해 너를 따로 떨어뜨려 놓았다. 내 말을 타락한 백성들에게 전하려 너를 보낸다. 그들은 너를 저항할 것이나 너는 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너에게서 등 돌릴 때, 너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015년 12월 25일 금요일

하나님은 아직 끝나지 않으셨다

성도여러분, 만약 당신 인생에 어떤 후회가 있습니까. 좌절된 기대 때문에 마음이 괴롭습니까? 예수 안에서 무언가에 당신의 마음이 상했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나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그가 시간 내에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런 증거는 눈에 안보이지만 구원받지 않은 자녀를 위해 기도해왔습니까? 결혼이나 직장의 어려움에 갇혀있지만 오랜 세월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까? 당신의 간구가 들려지지 않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사단은 당신이 초조해지길 원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여러분 자신과 또 가족과 미래와 사역에 대한 약속에 대해 초조해 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너무 느리게 반응하시고 당신의 간구를 무시했으며 당신을 뒷전에 두고 있다고 당신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모든 확신을 포기하는 지점까지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단이 세례 요한을 데려간 지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고통의 순간에 옳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그의 의심을 예수님께 바로 가져갑니다. 주님은 요한이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을 바로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바로 그 답을 주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요한은 다시는 그의 초조함을 토로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제가 확신하는 바, 요한이 사형집행자 앞에 섰을 때 그의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나는 요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그의 길을 곧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그 완전한 일을 당신의 영혼 속에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할 일은 단지 그 믿음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했을 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은 자이며 아무런 후회도 없습니다. 그는 나의 모든 기대들을 이루셨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긴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6)

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인내심이 약한 신자들

마귀는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죽음을 앞두고 인내심이 약해진 것을 느꼈음에 분명하다. 이 초조함은 기다림을 못 견디거나 또 어떤 괴로움을 조용히 인내해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초조해질 때 –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 – 우리는 초조함과 믿음이 뒤섞여서 우리의 기도가 “이상한 향기”가 되어 주께로 드려지게 됨을 본다. 이 초조함은 그 악취와 함께 우리의 존재, 즉 그의 몸된 성전을 채우게 된다. 향기로운 기도를 올려드리기보다는 우리는 악취를 뿜어 올리게 된다. 그리고 사단은 이 냄새를 기가 막히게 빨리 알아챈다.

인내심이 약해진 신자들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기적이 자신을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상한다. 그들의 하나님은 응답이 느려서, 마치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고 어디에 갇혀있는 것처럼 믿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이 요셉을 시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시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기간 동안에 믿음을 더하지 않으면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상할 수 있는 것이다. 잠언 18:19의 말씀에서처럼,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히브리말로 여기서 노엽게 되었다는 뜻은 “부서져 나간”이란 뜻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상했을 때는 우리의 신앙이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오래 붙들수록 우리의 불신의 감옥을 뚫고 나가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야고보서 1:2-4의 말씀은 우리에게 치유를 준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2015년 12월 23일 수요일

후회는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원수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넘어지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세례 요한에게 알려주신 적이 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11:6). 실족하다는 말의 그리스어는 “묶다, 함정에 빠뜨리다, 덫에 걸리게 하다”이다. 이 때 나는 예수님께서 부드럽게 요한에게 경고하고 계셨음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너는 내가 바로 오실 그인가라고 물었다. 요한아, 너는 여기서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니? 사탄은 나를 겨냥하고 있지 않단다. 사탄은 너의 그 질문을 통해서 너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는 거란다.”

예수님은 광야에서의 사십일 간의 시험을 통해서 똑 같은 질문을 통과하셨다. 그리고 지금 요한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사단은 지금 너에게 덫을 놓고 있는 거다. 그렇지만 너는 그의 거짓말에 걸려 넘어갈 순 없는 일이다. 사단은 오실 그가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너는 이 사단의 계략에 걸려들면 안된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남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실족한다”입니까? 무엇이 이 세 단어를 그토록 강하게 와닿게 합니까? 예수님은 요한이 사단의 거짓말에 걸려들었을 때에 초래하게 될 결과에 대해서 알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 거룩한 사람이 의심하기 시작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사단은 요한으로 하여금 딱 세 단어를 말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 전해져 온 모든 예언을 다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행하신 모든 선한 일들이 다 무효화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 세대들을 포함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같이 파선을 당하게 되는 거지요. 사탄이 요한의 입에서 듣기 원한 그 세 마디가 무엇인지 압니까? “아는 후회 하노라!”

“후회”란 단어의 뜻은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괴로움” 이다. 후회를 한다는 것은 “나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부인하는 발언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요한이 그 지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대신에, 그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 핵심은 “요한아, 네가 만약 사단의 거짓말에 저항해내면 너에게는 엄청난 믿음과 확신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단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불신이 너 안에 뿌리내리도록 놔두지 말아라. 만약 허용하게 되면, 너는 너 자신이 누구인가에서부터 하나님이 너의 인생에 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2015년 12월 22일 화요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대감들을 형성시킨다. 우리는 그의 말씀은 바위와 같이 굳건하고 강력한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의 약속임을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씀이 우리 스케줄에 따라 성취되지 않음을 볼 때가 많은데 이럴 때 우리의 원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사탄의 목적은 아주 단순합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확신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사단이 그로 하여금 온갖 의심이 들도록 부추겼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요한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라 상상이 됩니다: “그래 예수는 거룩한 자다. 그러나 그는 단지 선행을 베풀고 기적을 행하는 또 한 명의 선지자에 불과해. 만약 그가 구세주였다면, 너는 왜 이 꼴이란 말인가? 그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얘기했던 것을 왜 지키지 않는 거야? 게다가 네가 한 설교는 왜 너 자신에게는 안 먹혀 드는 거냐구?”

사탄은 동일한 거짓과 속임수를 오늘 우리에게도 사용합니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말씀과 약속들 그리고 기쁨들에 대해 의심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원수는 속삭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아버지가 기적의 아버지이고 불가능이 없다고 말하지. 그리고 니가 말하기도 전에 너의 간구를 들으신다고 말하지. 그런데 이 모든 괴로움들은 도대체 뭐야? 왜 하늘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왜 하나님께서 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아무 단서도 보이지 않는 거냐구?”

“주위를 둘러봐. 너만 빼곤 모두가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잖아. 너는 무너져버린 결혼 생활 속에 갇혀있잖아. 자녀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잖아. 수 년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사람들에게 설교해왔지만, 너한텐 왜 안 먹히는 거지? 하나님은 왜 너를 이런 괴로운 상황 가운데 버려두시는 거야?”

당신의 영혼 속에 불신이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그 동안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대해 기도하기를 멈추는 것이다. 당신의 짐을 더 이상 하나님께로 가져가지도 않는다.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는 거죠.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신은 그가 당신의 인생에 그의 방법대로 일하시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시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기꺼이 분리되기 by Gary Wilkerson

아브라함은 기독교인도 유대인도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의 그는 하나님과 어떤 종류의 경험의 역사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명하셨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그래서 아브라함은 짐을 싸고 떠났다!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어딘가 이상한 데가 있다. 여기 모든 것을 다 가진 한 남자가 있다 – 부와 물려받을 재산, 멋진 아내, 그리고 엄청난 가축과 땅.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목소리가 그에게 “일어나 떠나라”고 말했을 때, 그는 떠났다. 그는 기꺼이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 – 좋은 것들을 포함해서 – 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서 하나님을 따랐던 것이다. 


이제 결혼한 여러분들께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당신의 배우자가 어떤 한 목소리가 말하기를 직업과 집과 소유를 버리고 수입과 어떤 재정적 지원도 보장되지 않은 다른 주로 떠나라고 했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가 들은 게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겠는가? 아마도 기꺼이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 그러나 먼저 심리상담가에게 전화해보고 싶지 않겠는가?

무엇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떠나게 했는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깔끔하게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킬 힘을 주었는가? 사도행전 6장과 7장의 스데반집사의 모습에서 우린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초대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많은 기적과 표적들를 위해서 아주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재판을 위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말씀을 선포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7:2)

스데반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의 믿음이 여러분 기분을 상하게 합니까? 글쎄요, 이건 사실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 있는 그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에, 그는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기쁘게 자신을 분리시겼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도 스데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렇게 느꼈을 겁니다. “이전에 전혀 알지 못한 어떤 것을 지금 경험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기쁨을 이 전에는 전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경외감은 절대로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거룩한 땅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따름입니다.”

2015년 12월 18일 금요일

하나님의 사랑에 매임 받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남은 여생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넓히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삶에 놀라운 평화를 주셨으며 결국에 다윗의 원수들이 모두 잠잠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의 삶에서 반영된 하나님께서 주신 회복의 증거는 그의 간증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날들에 그가 기록한 것들을 읽어보십시오.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사무엘하 22:2-3). 이 간증은 낙심한 사람의 고백이 아닙니다.
  •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사무엘하 22:7,17,20).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던 많은 일들을 저지른 다윗은 그 이후에도 “나를 기뻐하시므로”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영원히 알려지게 된 이유는 그가 지체 없이 또 진심으로 그의 죄를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잠언 13:18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책망을 들을 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에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책망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행실의 열매를 먹고 너희 책략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제 고집대로 하다가 죽을 것이며 미련한 자들은 자만하다가 망할 것이지만”(잠언 1:30-32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책망을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죄로 인하여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 “교육적인 책망은 생명의 길이다”(잠언 6:23 현대인의 성경).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책망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리는 마음이 든다면, 즉 하나님의 영이 당신으로 하여금 죄 짓는 것에 대하여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놀라운 자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죽음에서 참된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께서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응답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참된 회복과 참회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가 훔쳐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

다윗 왕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매우 극심한 결과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심판을 스스로 예언하였습니다. 나단 선지자에게 가난한 사람의 양을 훔친 부자는 양을 네 배로 갚아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사무엘하 12:5-6). 그리고 다윗의 삶에서 그 예언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기는 수일 이내에 사망하였고, 다윗의 세 아들 – 암몬, 압살롬, 그리고 아도니야 - 은 비극적이고 때이른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신의 네 양으로 죄에 대한 결과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우리가 진실되고 온 마음으로 하는 회개로 하나님께 되돌아 올 때에 완전한 회복과 용서를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은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우리는 삶을 다할 때까지 마음 속을 갉아먹는 듯한 죄책감으로 살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돌아올 때에 바로 감싸주신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3).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놋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요엘 2:25-26).

이 예언이 전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확고히 하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를 위하여 놀라운 일을 할 것이다. 마귀가 훔쳐간 모든 것을 너희에게 회복해 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가장 최악의 죄인도 이렇게 말하게 만듭니다. “나는 마약중독자도, 알코올중독자도, 간통을 범한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의 영혼은 천국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으며, 나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 나의 모든 과거를 모두 뒤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나의 과거의 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나단 선지자처럼 마음을 찌르는 날카롭고 진실한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가 없었더라면 다윗은 사울과 같은 최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

다윗이 나단의 혹독하지만 사랑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전의 왕이 선지자의 경고를 받았던 상황을 기억해 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경고하는 사무엘 선지자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왕의 성의 없는 반응과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저는 사울이 “하나님께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했던 다윗처럼, 영혼과 마음을 다하여 죄를 고백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파멸하고 몰락하는 최후를 맞이한 사울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한때는 거룩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왕이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성령의 책망하는 말씀을 거부함으로 아집과 반항으로 살다가 결국에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무엘상 15:23). “여호와꼐서 사울을 떠나…”(사무엘상 18:12). 결국 사울은 점쟁이의 지도를 기대하였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사무엘상 28:15).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듣지 아니하였던 사울왕에게 닥친 끔찍한 최후를 기억하고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울과 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말씀을 전한 사무엘처럼, 나단 선지자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사울에게 그랬듯이 하나님의 영을 나에게서 제거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편 51:3-4, 7, 10-11).

2015년 12월 15일 화요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사랑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게 주신 가장 위대하고 자비로운 선물 중에 하나는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책망해주는 신실한 선지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목자로서, 사랑하는 영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어조를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전하면서 영혼들에게 사과를 할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에게 그들의 죄를 꾸짖지 못하고, 또는 안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그의 죄를 꾸짖지 아니하였다면 어떤 일이 발생되었을까요?(사무엘하 12장 참고).

생각해보면, 나단선지자는 다윗 왕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한 행동들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권력이 있는 다윗 왕이 자신을 언제든지 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 왕에게 그저 좋은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필요할 때 함께 있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의 죄를 보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랬더라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 없이는 다윗은 최악의 심판,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죄에 두시고 성령의 중재를 멈추시는 상황에 놓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육신을 만족시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씀만 선택하여 들음으로써, 죄로 인하여 근심하는 마음은커녕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지경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회개를 하지 못하고, 회개가 없으면 마음은 그저 단단해지기만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9-10).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죄를 꾸짖는 바울로 인하여, 성도들은 죄로 인하여 근심하기 시작하였고, 근심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바울의 직선적이고 죄를 꾸짖고 책망하는 설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매우 강한 어조로 말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다”(7:12). 다른 말로는 “여러분을 정죄하거나 불안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하는지 알게 하려고 여러분의 죄를 보여드린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실 때, 가끔은 아주 강하고 심하게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이시는 다정한 사랑입니다.”

2015년 12월 14일 월요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by Gary Wilkerson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나타내는 특징이 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과 분리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세상과 교회를 분별할 수 있는 특징이 너무 없어졌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아주 슬픈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목적, 즉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쓰일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분리시키셨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세상과 타협하여,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 보다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맞추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타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잃어버린 영혼들이 삶의 위기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소망은 찾을 수 없고 무척 혼돈스러워 합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에게 그들은 이세상과 다른 무엇을 기대합니다. 우리의 삶은 참된 소망, 기쁨, 평화, 사랑, 그리고 관용으로 이 세상과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크리스천들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가치관들을 삶에서 제거해버립니다. 그래서 잃어버리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크리스천의 삶에서 이 세상과 다른 점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항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나를 어떠한 한 관점으로 바라보지만 나는 너희에게 나를 완전히 나타내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희가 보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어떤 것인지 나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었다. 어떻게 살고, 믿어야 하며 아버지를 따르며 섬기는 방법 등을 나누었다. 이 모든 가치관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과 분리되게 하는 것들이다. 사탄은 나에게 속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너희의 삶에도 내가 있을 때 속하지 못한다.”(요한복음 14:27 참고).

하나님께서 거룩과 분리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리는 바로 우리의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 그리고 삶의 방식이 바로 거룩과 분리를 반영하는지 보여줍니다. 이전 세대의 크리스천들은 거룩과 분리를, 금주, 금연 또는 사교계에 참여하지 않는 것 등을 의미하였습니다. 사실 그것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의 마음이 이 세상에 향하여 있으며, 나를 무시하고 있지 않느냐? 이 세상의 기준으로 평안과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느냐 아니면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느냐?”

2015년 12월 11일 금요일

사랑과 관심의 새로운 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잘못 전하여, 믿는자들 이었음에도, 갑자기 교회안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땅을 팔아 받은 금액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본인이 아닌 성령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은, 만약 믿는자가 그 어느 누구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이 부부의 거짓은 무엇 이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기로 한 돈을 남용한 죄 입니다. 그들은 땅을 사는 사람에게 말하였을 것 입니다. “땅값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쓰일 것 입니다. 돈 전액은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일 것 입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과부와 가난한 자들의 것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품고, 세상에 그분을 잘못 전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어떻게 성령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새로 세례받은 신도들의 마음을 그렇게 빨리 변화 시키실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변화는 정말 놀라운 기적 이었습니다. 그들의 갑작스런 변화의 답은 말라기 선지가의 예언에 있습니다. 말라기는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선지자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을 압제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말3:5)

이제,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로 시간을 옮겨 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신앙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행2:42) 여기에서 언급하는 사도의 가르침은 무엇 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지시하기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2015년 12월 10일 목요일

빛 가운데로 걸으라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해주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1:7)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1:5, 11)

불신은 늘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예수님께서 세상에 굉장한 빛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 빛은 세상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 빛 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눈부신 빛을 비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수많은 불신의 예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아마 성경에서 예수님이 신이라는 증거를 제일 많이 보여주는 장 일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죽은자가 살아나는 장면을 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아는, 몇백년 전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도 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나는 음성을 실제로 듣는 장면도 봅니다.

이런 놀라운 이적들을 보고도, 사람들은 뻔뻔하게 예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요12:34)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네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말하지만, 우리가 아는 진실은, 진정한 메시야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시는 것이다.”

그때,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충격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인자는 누구냐?.” (요12:34) 그들의 맹목적인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기가 막히셨을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답변을 하는 대신, 경고를 하셨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요12:35-36)

2015년 12월 9일 수요일

대 배교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버리고 떠납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상황을 염려하며 경고 한 바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살마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가 후서 2:3)

구약에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떠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지는 예시가 나옵니다. 역대하 14장에 나오는 아사왕은 백만명이 넘는 에티오피아 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사왕은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하 14:11)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들을 아사와 유다 사람들 앞에서 치시니.” (대하14:12) 아사왕은 정말 대단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후로 몇년간, “이 때부터 아사 왕 제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대하15:19) 수년간, 아사왕은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았기에, 유다에게 주님의 은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온 땅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국가의 배고픈 자들이 유다에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은 아사왕이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사 왕 제 삼십 육년 되는 해에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쳐들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라마을 건축하여, 사람들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유다를 굶주리게 만들어, 항복을 얻어낼 생각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아사 왕은 취약한 상황에 있었지만, 전과는 달리 여호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로 주님의 뜻과 조언을 받는 대신, 아람 왕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사 왕은 아람 왕의 도움을 받는 대신,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적을 물리칠수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영광은 이방나라인 아람에게 갔으며, 유다는 더이상 여호와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을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 대하16: 7, 9 )

단언컨대, 오늘날의 수많은 믿는이들이 아사 왕과 똑같은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자립심과 바꿨기에, 영혼속에선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근원이 하나님 대신 다른 것 이라면, 믿는자들의 영혼속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입니다.

2015년 12월 8일 화요일

나날의 주님의 신실하심

지금,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마치 사나운 폭풍속에 있는 배처럼, 절망적이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곁에서 몰아치고 있는 폭풍이, 어쩌면 이제것 겪어본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 계신 분은 솔로몬 왕 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 이십니다. 그는 모든 폭풍의 주인이시며, 폭풍을 통해 여러분을 시험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위기를 통해, 여러분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원하십니다.

당신은 "정말로 배가 침몰하면 어떻게 하지?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하지?"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속 사도바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울 자신의 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타고 있던 배는 정말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는 그 폭풍속에서, 오직 주님께서 주신 말씀만 붙잡고 있었습니다. "배는 침몰하겠지만 너와 함께 행하는 자들은 네게 주노라." 폭풍이 끝나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로 많은 기적들이 따랐으며, 대단한 부흥들이 일어났습니다. (행28:1-10)

그렇습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들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견뎌내시고, 또한 여러분의 믿음도 견딜 것 입니다. 여러분의 배가 침몰할지라도, 주님께서는 헤엄쳐 해안에 닿을 힘을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하신 것 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물질적인 것만 잃게 될 것이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쉽게 그런것들을 교체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더 크고, 좋은 배들을 갖고 계시며, 여러분이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들로, 여러분을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55:22)

사실 저도,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꾸짖는 부분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 주님, 너무 불공평하신거 아니십니까! 저는 자신들의 끔찍한 재난을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들은 집을, 직장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입니다. 설마 그런 힘든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도, 충만한 믿음을 갖고 있기를 바라십니까!"

그때, 성령님께서 제가 전에 가 보았던 빈민촌들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판잣집에서 살며 땅바닥에서 자는 그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기쁨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날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뻐했으며, 그 어떤 시련속에서도,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넘쳐나게 하셨습니다.

2015년 12월 7일 월요일

구별하다 by Gary Wilkerson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요14:19)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 할거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에는 참 흥미로운 말 이었습니다. 제자들 중 한명이 물었습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14:22)

물론, 예수님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생각하시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요14:23, 27, 29-31)

저는 한 테마에 집중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요약했습니다. 그 테마는 분리입니다. 이 몇 구절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왕국과 세상 사이에 확실한 3가지의 구분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요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14:30)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구별을 보여 주셨을까요? 예수님께는 우리가 이런 확실한 구별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성경 내내 이런 구별을 하십니다. 창조때에는 빛과 어둠을, 밤과 낮을 구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 세상 모든 민족들과 구별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그의 교회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심판받을 날에는 그의 양을 염소로부터 구별하실 것입니다. 말씀 내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구분을 하시며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2015년 12월 3일 목요일

전적으로 믿음을 공격하는 전투

오늘날 교회를 향한 사단의 위협은 이 땅에 부어지는 더러움의 홍수보다 더합니다. 그것은 물질주의, 중독, 심각한 유혹을 넘어섰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믿음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찾으려 할수록 사단의 공격은 더 집요해집니다.

최근 들어 주님의 사도들로부터 그들의 생각을 공격하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신실함에 대해 괴롭히고 의심하게 하는 질문들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은 더 나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워하며 “더는 못하겠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든 한 살의 여인이 “내 남편은 뼈암으로 고생 중이고 아들은 에이즈로 죽어가며, 저는 당뇨로 서서히 쇠약해지고 있어요.”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가정이 겪고 있는 상황을 다 읽으면서 저는 머리를 흔들고 고민했습니다. “이 분은 어떻게 기쁨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겪기에는 너무 힘든 것 아닌가. 분명 하나님께서 그녀의 믿음에 사정을 봐 주실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불구하고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약속하신 말씀에 절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아들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을 직접 얼굴로 뵐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싸움은 전적으로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 그려진 것 같이 예수님께서 사천 명의 사람을 떡 일곱 개와 몇 개의 생선으로 먹이셨습니다. 그 후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편으로 건너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막 8:14-21).

2015년 12월 2일 수요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마가복음 4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라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간 대부분 군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이웃들이 몰려와 예수님께서 어떤 말을 했는지 물을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어? 배운 것을 말해 봐.” 예수님의 비유를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말은 아마도 생명력이 없고,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강단에서 전하는 말이 성령님의 계시나 죄에서 구하는 힘이 없는 죽은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성령님의 생명력 없이 들은 말을 되풀이할 지 모르겠습니다. 배움에 목말라 하던 제자들과 군중의 얼마나 극명한 대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삶의 변화시키는 계시를 원하는 남방 여왕의 신하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하는 것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막 4:11)라고 하셨습니다. ‘수수께끼’는 비밀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당신의 비밀을 오직 삶이 변화되는 진실을 갈망하는 사람에게만 보여주십니다. “너의 어려운 질문들에 대답을 원하면 나를 따르라. 나와 시간을 보내면 나의 말을 너에게 보이고, 다른 이가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이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외인”은 누구입니까(막 4:11)? 예수님을 기다리려고 하지 않는 군중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훈련하는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필요를 위해 주님을 찾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오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아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진정 자유케 하는 진실은 그들에게 당혹스럽고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2015년 12월 1일 화요일

진실을 향한 갈망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12:42).

오 늘날 우리 모두는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솔로몬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우리 곁에 있다면, 그가 우리를 혼돈 속에 놔둘까요? 그의 지혜가 항상 가까이 있다면, 남방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구한 것 같이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오늘도 그의 백성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구약이나 제자들에게나 초대교회에 그랬던 것 같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듣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4장 2절에서 보면 예수님은 비유로 많은 것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밭에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군중은 당황해하며 궁금해했습니다. “도대체 이 씨뿌리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씨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는 새, 사단, 가시떨기, 옥토는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에 보면 대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4:9)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제자들과 몇 사람만이 대답을 원했습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4:10),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셨습니다(막4:14-20 참조).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계시의 진실을 주셨지만, 그것이 군중을 더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 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4:34). 저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의 말을 다 이해하면 답을 얻기 위해 나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남방 여왕이 한 것 같이 너를 자유케하는 진실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나에게 와야한다. 너에게 필요한 모든 계시를 주겠다. 하지만 나를 갈망하고 따르는 귀를 가지고 나에게 와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믿습니다.

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할 뿐 아니라 양육시켜줍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디2:11).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했습니다. 더 얘기할 것이 있을까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바울은 재빨리 이와 같은 은혜가 “경건하지 않는 것을 버리도록 양육하신다”(디 2:12)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묘사하는 것은 주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하지 않거나, 세상적인 욕심, 이기적인 마음, 현재 우상 숭배하는 것을 버리는 것을 요구합니다(디 2:12).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삶뿐 아니라 현재의 풍성한 삶도 공급해줍니다. 주님 안에 거함으로서 복되고 신성하며 평안한 삶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디도에게 과감히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디 2:15). 이 구절에서 바울의 주제는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점을 말하면, “은혜가 설교 되지만 불경건한 것을 버리도록 훈련시켜주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려면, 말씀에서든 친구에서든 오는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연단 징계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

하나님의 연단은 아픔과 영광스러운 열매 맺음에서 놀랍습니다. 평안이 없습니까? 삶의 근원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곳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에 연단의 칼을 들어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아마도 속하지 않는 것들을 자르고 없애 버리실지 모르겠지만, 연단이 끝났을 때에는 그루터기가 아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왜 연단의 칼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충만”은 완전하고 큰 능력을 의미합니다. 선하고 진실하며 아름다운 말씀을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준 것같이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양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를 사랑하는 정원사의 손에서 기쁨을 생산합니다.

2015년 11월 27일 금요일

자욱한 혼돈

지금 이 메시지를 읽는 크리스천들 중에 혼돈과 혼란에 빠져있는 분들은 몇 명이나 될까요? 혹시 당신이 지금 혼돈과 혼란에 빠져 있습니까? 응답 받지 못한 기도가 있으십니까? 멈추지 않는 우울감에 빠져있습니까? 말로는 표현 안될 일들을 겪고 계신가요? 당신의 삶과, 상황 그리고 사람들에 의하여 실망하였습니까?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찾아보고 있습니까? 우울하고, 절망에 빠져있으며, 분별을 할 수가 없으며, 여기서 어떻게 헤어나와야 할지도 모르시겠습니까?

당신은 성숙된 크리스천이며, 수년동안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하여 왔지만, 지금 자신을 의심하며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때 경험해봤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화나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믿습니까? 설교자를 통하여 들은 말씀과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사탄과 싸우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저 무시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과 동행하시며, 당신의 삶의 모든 것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두움에 자신을 노출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에 사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한복음 12:35). 다른 말로는, “그런 사람은 길을 잃은 것이다. 가는 길을 헤매고 있으며, 분별력이 없으며, 그저 시야가 가리워진 상태에서 계속 걷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런 자욱한 어두움 속으로 걸어가는 느낌이 무엇인지 이해합니다. 모든 것이 헷갈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명료하게 들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 답을 빨리 얻고 싶어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예전처럼 하나님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결국에 당신은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불신에 대하여서는 연민도 동정심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에 대하여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았던 빛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기 시작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때에 우리는 어두움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믿음으로 돌아올 때에 어두움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2015년 11월 26일 목요일

빛으로 걸어가는 삶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요한복음 12:35). 여기서 어두움이 의미하는 것은 “영적 시야가 가리워지는 것, 혼돈, 불명료함, 우울”입니다. 처음에 저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두움이라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그러한 어두움에 붙잡힐 수 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빛의 물결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50년 이상 사역하는 동안 저는 하나님의 능력이 영적인 사망에 놓인 사람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약 중독과 술 중독이라는 무덤에서 생명으로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십자가와 칼이라는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은 오직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내용입니다. 평생 사역을 하면서 저는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새 언약, 예언의 성취,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등의 다른 광선형태를 가진 빛도 보았습니다. 사실 저는 요한복음 12장에서 언급된 모든 것, 그 이상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그의 백성들에게 유대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에서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위한 놀랍고 위대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에게 신약성서를 통하여 지시해주셨으며, 성령님을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그렇듯, 우리에게는 우리를 신성하고 거룩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더 나은 언약”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빛으로 넘치게 채워줄 수 있는 성령충만한 선생, 목회자, 설교자, 그리고 선지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진리로 채워주며,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전해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매번 상기시켜줍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어두움에 붙잡힐 수 있을까요?

보통 우리가 영적인 어두움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무신론자들을 생각합니다. 아니면 근심과 공허함에 지칠 대로 지친 죄악에 빠진 죄인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에서 언급하신 어두움은 그러한 형태의 어두움이 아닙니다. 이 어두움은 혼돈과, 영적시야의 가리워짐, 분별력의 상실, 영적 그리고 정신적 우울감을 의미합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어두움입니다.

그런 어두움이 다가올 때, 유혹과 절망에 포위될 때 우리는 확신을 갖고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나를 구하여 주옵소서. 나의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여지기를 원합니다.”

2015년 11월 25일 수요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마태복음 18:32-33).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나는 나의 형제들의 용서하는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가?” 내가 용서받은 것과 같이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악한 종”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우리가 죄를 허용하며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은혜에 대하여 담대하게 전하였지만 디모데에게 이렇게 지시하였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 우리는 순전하고 진실된 말씀의 담대한 수호자(guardian)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과 교리로 서로 간에 벽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지은 죄목이었습니다. 율법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명시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율법 만으로는 물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규율과 조건들을 만들어 안식일에는 육체적인 움직임을 최소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은 더욱 더 큰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고 하였으니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망령되이 일컫게 될 일도 없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나누셨던 감사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서 주인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마태복음 18:34). 그리스어로는 이 말씀이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밑바닥으로 끌고가 고통을 안겨주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만 같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저는 이 비유를 읽을 때 몸이 떨립니다. 이 말씀을 읽고 나서는 저는 무릎 꿇고 얼굴을 땅에 묻어 예수님께 나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사랑으로 세례를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음의 기도는 제 기도이지만 여러분도 함께 하여 당신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쉽게 화를 내며 분노로 반응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하심 없이는 내 삶은 그 어떤 의미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깊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때에 제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영으로 나의 형제들에게 자비함과 인내를 보일 수 있을 것 이라고 믿습니다.”

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하나님의 선하심과 놀라운 사랑

심판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하나님께 많이 용서받은 사람들이 왜 그들의 형제들과 교제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자, 이 문제는 가장 근심스러운 죄에 근본이 있습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율법주의 적인 믿음으로 살았고 그런 설교를 전하였습니다. 저는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율법주의적인 기준에 맞추어서 살아가기를 노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내가 삶에서 해도 되는 일 또는 하면 안 되는 일의 목록만 가져다 주었습니다.

실제로는, 그저 나의 모든 것이 밑천까지 드러나는 십자가 앞에 있는 것보다 나는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선지자들의 곁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나는 평화에 대하여 설교했지만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께서 나의 허물을 덮으신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 연약하고 악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기에는 너무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저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나의 죄를 더욱 확대시켜 보았던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 모두를 판단하였습니다. 저는 세상과 타협하는 나 자신을 보듯이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판단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나의 설교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악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악에 대하여 판단하며 부정적인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2-33절에 나오는 감사할 줄 모르는 어떤 종과 같이 저는 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를 사랑으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자비로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진짜 들어야 했던 질문이 내게 명료하게 들려왔습니다. 그 질문은 “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용서를 할 줄 모를까?”가 아닌 “내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데, 그가 명하신 대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31-32).

2015년 11월 23일 월요일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by Gary Wilkerson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한복음 15:2).

과실을 맺는 크리스천들의 가지가 가지치기를 당했습니까? 사실 열매가 달린 나의 가지가 제거되는 것은 평생을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보상은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하나님께 어떤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게 공평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위의 구절에서 언급하신 내용은 사실 반문화적이고 일반적인 직관에 반하는 사항이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어떠한 성취를 하였을 때 칭찬을 한번 받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그저 팀 스포츠에 참여하기만 해도 온갖 트로피를 상으로 받습니다. 제가 어릴 적 받지 못한 보상 때문에 그저 씁쓸해하는 중년남자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받는 긍정적인 칭찬과 지원에 대 찬성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최근에 아이들을 너무 애지중지하게 키워 발생하는 이차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지적 받기를 싫어하며, 하는 모든 일마다 축하해주기만 하니깐 아이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여깁니다.

자 이런 현상은 오늘날의 교회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면서 교정을 받고 지적을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과실을 맺는 가지에 대한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저 애지중지하게 아이들 돌보는 부모가 주는 사랑보다 더 깊고 넓은 사랑을 주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 좋은 과실을 맺고 있기는 하나 나는 너에게 더 크고 풍성한 생명의 기쁨을 주고 싶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가지치기를 하면서 너에게 주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지난해에 가지치기를 하는 정원사를 보면서 어렵게 깨달았습니다. 여행을 다녀왔을 때 저희의 정원에는 단 하나의 초록빛을 띠는 식물은 없었고 모두 가지치기를 해서 열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정원은 버려지고 외로이 떨어진 어떤 행성의 오래된 정원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정원사를 바꿔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고 나니까 모든 식물들이 지난해보다 두 배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식물 하나하나가 모두 더 빠르고 풍성하게 자랐습니다. 한때는 황폐한 것 같았던 정원이 이제는 아름답고 깔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하시는 가지치기도 그렇습니다. 겪을 때는 아프고 힘듭니다. 그리고 가지치기를 받는 모습이 아름답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치기를 통해야만이 더욱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015년 11월 20일 금요일

하나님의 인자하심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 하느냐.?” (롬2:4)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 하느냐” 는 무슨뜻 일까요? 여기서 멸시란 “그가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다” 란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 믿는 자는 이렇게 말한 것 입니다. “이런 은혜와 자비는 불가능하다. 난 도저히 이런 은혜와 자비를 헤아릴 수 없다.” 그의 신학과는 맞지않는 부분 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받아들이는 대신 거부했습니다.


마태 복음 18장 23-35절에 등장하는 배은망덕한 종은, 왜 왕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까요.? 이유는 단 하나- 그는 그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왕은 그 종에게 이미 말해주었습니다. “너에게 자유를 주노라. 더이상 죄책감도 갖지 말라. 너에게 필요한 일이나, 그 어떤 체벌과 책임도 없다. 네가 해야할 일은, 내가 너에게 보여준 선함과 관대함에 집중하는 것 뿐이다.”

비극적이게도,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그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종에게 일어난 일이 이것입니다. 그 종은 왕이 그에게 베푼 자비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과분한 용서의 목적은 단 하나 -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도바울이 묻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 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까?”

이 말씀에서, 왕이 종을 용서한 이유가, 바로 회개 시키기 위해서란 것이 분명합니다. 왕은 자기를 믿는 종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하기보단, 왕의 인자함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원했던 것 입니다. 이런 안식은 종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줄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종은 회개하는 대신, 왕의 인자하심을 의심하며 떠났습니다. 그리고 종은 대비책을 세웠습니다. 그는 왕의 자비를 멸시하며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큰 고통속에 살고 있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사람은 용서가 허락되는, 거룩한 곳을 떠났습니다. 그곳은, 그가 주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경험한 곳 이었습니다. 그는 기쁨대신, 완전한 자유를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불가능하다 여기는, 믿는자들은, 사단의 거짓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영혼의 안식이 없습니다. 그의 생각은 늘 혼란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는 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고문같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싸움과 갈라짐이 이렇게 많은 건가요?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서로 싸우며, 더 많은 교단들이 서로간의 친목을 거부하는 걸까요?

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은혜와 책임

마태복음 18장23-35 절 비유에서, 왕은 종의 죄를 눈감아 준 것인가요? 그 종의 부채를 눈감아 주고 대충 없었던 일로 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왕이 종의 죄를 용서해주며, 그 종의 어깨에 무거운 책임을 지워 주었습니다. 부채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말입니다. 이제 종은 왕에게,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빚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단순히 왕에게만 빚을 지었지만, 이제는 왕이 그에게 한 것처럼, 그 종도 다른 이들을 똑같이 용서해주고 사랑해주어야 할 책임이 생겼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책임입니까.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왕국에 대한 것들과 함께, 따로 다룰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5) 예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만약 너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아니한다면, 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이 말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명령 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결국은 이것 입니다. “난 너에게 관대하였다. 나는 사랑과 자비로 너희를 다루었다. 오직 나의 선함과 자비로 너희를 용서했다. 그러므로 너희도 똑같이, 너희 형제와 자매를 사랑과 자비로 대하여라. 내가 한 것같이 댓가 없이 용서하거라.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사랑과 은혜를 너의 가정, 직장, 교회 그리고 어느곳 에서든지 , 모든이에게 행하여라.”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명령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3:13)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이 명령에 어떻게 순종하는지 설명해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3:12-14)

관대하다란 무슨뜻 입니까? 그리스어로는 “참고 견디다” 란 뜻 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 일지라도 참고 견디라는 것 입니다. 다른이들의 실패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도 참고 견디라는 뜻 입니다.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주님의 자비를 받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을 통해, 우리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 대해 듣게 됩니다. 여기서 나오는 종은 능력있고 믿음직한 종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곧 채무자 중 채무자로 밝혀집니다. 이 종은 잘못된 동기를 가졌으며, 그 어느 누구의 자비를 받을 만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그를 댓가없이 용서해 줍니다 . 마치 예수님이 저와 당신을 용서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회개에 관한 짧은 말을 하겠습니다. 회개란 주로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가지고 있던 태도나 방식으로부터, 180도 전향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회개란 경건한 슬픔이 따릅니다.

하지만, 새언약은 또다시 구언약의 개념을 새롭게 합니다. 회개란 단순히 육신의 죄를 멀리하며, 지난 과거를 후회하거나, 하나님을 슬프게 해 속상한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비유를 보면, 회개란 우리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되돌아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믿는자들이 이런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을 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거야. 주님께 진실된 눈물, 진심어린 기도, 그리고 성경을 더 많이 읽으면,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거야.” 안타갑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 입니다. 이런 생각의 결말은 오직 하나 ¬- 가망 없는 절망 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힘들어 하고 늘 실패하다, 결국엔 진짜가 아닌 가짜 평화로 만족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며, 거짓된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까? 여러분의 눈물과 진실된 간청 이었습니까?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괴로워하는 모습 이었습니까? 혹은 죄짓는 삶에서 멀리하겠다는 다짐 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들 중 그 어느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구원해 준 것은 오직 은혜 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종처럼, 여러분 역시 주님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거룩해도 자격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진정한 회개에 이르기 위해 아주 단순한 공식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를 갚을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없애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이나 행위로 주님의 은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일이나 노력으로 내 죄를 지울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주님의 자비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구원과 자유의 길 입니다.

2015년 11월 17일 화요일

하나님을 갈망하는

예루살렘에 부흥이 있었을 때에, 천사가 사도빌립에게, 가사 사막으로 가면 수레를 타고 가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빌립이 내시를 만났을 때 그는 이사야서를 낭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시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 ” 물었습니다. (행8:30)

듣고 있으니, 그 내시가 이해하지 못하는 한 부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53:9-11)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읽으며 흥분하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상상해보세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왜 성경을 읽고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곧 오실 영원한 왕을 드러냈습니다. 새로운 계시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내시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연 이 훌륭한 사람은 누구인가?”

첫째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8:35) 빌립이 내시에게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에 등장하는 사람은 벌써 오셨고, 그의 이름은 나사렛 예수라. 그가 메시아 이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빌립이 이사야서 53장 11절을 설명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빌립이 내시에게 말하기를,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고역은 십자가에 못 박힘 이었다. 그때 그는 십자가에서 버림받고 묻히셨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고 이제 그는 영광 속에 살아계신다. 그 어느 누구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그를 믿으면 그의 자녀가 되리라.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은 만국에 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삶이 – 그의 자녀들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연장됩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도 그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는 이 얼마나 놀라운 뉴스입니까. 어떻게 보면 수레에서 내려와 침례받기를 원했던 것은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행8:38)

2015년 11월 16일 월요일

포도나무 안에 거하라 by Gary Wilkerson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15:1)

예수님께서 본인을 “참” 포도나무 라고 언급하실때, 예수님 말씀의 관점은 정확한 정보 전달에 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참” 이란 – 실제, 진짜, 그리고 지원이 필요할 때 물질적으로 도와줄수 있는 “참 친구” 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면 농부이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는 그의 정원을 사랑으로 완벽하게 돌보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의 생명의 흐름을 책임지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잘 자랄수 있도록, 적절한 방법과 정원의 알맞은 자리로 우리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포도나무” 에 붙어서,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 삶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생명의 흐름을 주셨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만약 우리가 포도나무에 접목 되었다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지 않을까요? 구원의 확신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다면, 또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그런 자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다시 예수님께서 키워드를 주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4) 여기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경보를 울릴만한 말이 또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한다면 ” 이 말씀을 읽을때, 일부 믿는자들은 겁을 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들에 대한 규칙을 만듭니다. 이런 규칙들이 그들을 참 생명으로부터 잘라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방정식처럼,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이 있는것 처럼 예수님께서도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분의 임재는 변함없고, 충실하며,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예수님께서 “만약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셨을 때,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확보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 – 우리의 증인, 올바른 삶, 우리의 기쁨과 평화 에 대한 것 이었습니다.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속임수, 말장난은 없습니다 by Jim Cymbala

하나님께서 한 지역의 도시에 일하시는 모습을 기록한 예로 사도행전 11장의 이야기보다 더 좋은 예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사도행전 11:20-21).

이런 믿음의 수확은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 그 도시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보내졌을 때 일어났습니다.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3-24절)

자, 예루살렘에 위치한 모교회보다 결국에 크게 성장하게 된 이렇게 큰 교회를 일으킨 이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이름도 그들의 신학도 방법론도 모르지만 몇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전파하니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20-21절).

이 교회는 다문화를 수용한 최초의 교회로서 사도행전 13장 1절에 보면 흑인인 시몬, 그리스인, 유대인 그리고 마나엔, 헤롯의 어릴적 동생 등의 다양한 인종/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함께 동역하며 더욱 더 강력한 다문화적인 통합을 이루어 냈습니다.
1세기 때에는 오늘날의 인종차별과는 차원이 다른 유대인-이방인 증오가 존재하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종 갈등을 미리 예측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현시대에, 뉴욕시의 인종갈등도 10년 전보다는 훨씬 악화된 상황입니다. 수많은 교회에 그로 인한 불편한 감정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전 안디옥 교회에서처럼 이러한 긴장을 완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 어떤 가르침도 해결 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기발한 지름길도, 속임수도, 말장난도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브룩클린의 지형학적인 지도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역의 가장 높은 고도의 위치를 파악하여 그 곳에 가서 우리 지역을 앗아가려는 귀신들을 내쫓기 위하여 기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내리게 하는 열쇠는 도시의 곳곳의 거리에서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행진을 하고, 현수막을 만들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큰 퍼레이드를 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북쪽을 향하여 발로 땅을 내리치며 귀신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자 우리의 생각으로 만드는 모든 새롭고 신기한 아이디어들은 모두 잊어버립시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언제 어떻게 하실 지는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그의 피의 능력, 그리고 믿음의 기도는 단 한번도 힘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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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안 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주여, 다시 한번 일으키소서!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군중을 먹이셨습니다. 이번에는 사천여명을 7개의 빵과 몇 개의 물고기로 먹이셨습니다. 다시 한번, 제자들은 먹고 남은 조각을 여러 개의 바구니에 거두었습니다(마가복음 8:5-8 참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제자들의 불신을 보고는 물으셨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마가복음 8:17).

저는 이 두 번째 기적을 본 제자들이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지?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이라면, 왜 우리를 통하여 저 놀라운 능력을 보이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이지? 우리는 그저 못 배운 어부일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왜 물위를 걷는 놀라운 일을 더 크고 영향력 있는 군중 앞에서 보이시지 않으시고 하찮은 우리 앞에서 보이신 것이지?”

여러분도 아마도 자신에 대하여 비슷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왜 내게 말씀을 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여러분의 구원과 변화는 절대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구원받으신 사건은 이유 없이 일어난 자연현상이 아닌,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크리스천의 삶에는 그저 자연적인 일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초자연적입니다. 태초부터 시작하여 당신이 구원받은 사건 또한 모두 온전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는 그 능력은 온전히 초자연적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에 있지만 당신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 때문에 빛 안에 있습니다. 당신의 육체가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도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초자연적이신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이 나의 몸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간혹 우리의 마음이 단단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자연적인 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기사와 이적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기적을 보고 “그냥 우연히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일에서 ‘초’를 빼고 자연적인 일로 여기기 시작한 순간, 당신의 마음은 더욱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몇 개의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당신의 위기 중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능력은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을 자유 안에서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연약함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이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환난이 닥쳐올 때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다시 한번 일으키소서. 내 삶에서 이미 기적을 일으키셨었습니다. 또한 과거에도 이미 하나님의 종을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나의 연약함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명기 1:27-35 참고)

당신은 구원받고, 성령충만하며, 거룩한 삶을 살고 있지만, 불신의 죄를 짓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나는 하나님을 불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일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될 때 화가 나십니까?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릴까 두렵습니까? 미래에 대하여 불안하고 두려우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평안을 누립니다. 이 평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완전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온전한 의지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이 바로 믿음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크리스천의 마음이 불신으로 완고해질 수가 있을까? 마가복음 6장에서는 놀라운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제자들은 베데스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며 나타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가복음 6:50).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올라타셨을 때 바람은 멈추었습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제자들이 그 순간 느꼈던 생각을 모두 말해줍니다.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6:51-62). 여기서 둔하여졌다는 그리스어의 의미는 돌처럼 단단하여진, 눈이 먼, 고집스러운 불신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열두 제자는 이전에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열두 제자를 통하여 일하셨으며, 마가가 말한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라고 말한 의미는 제자들이 기적과 예수님의 능력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둔하여지는 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초’를 제거하였을 때 나타납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불과 24시간 전에 목격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저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아직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

약속의 땅을 염탐하러 갔던 스파이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성벽과 거인들이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는 우리는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민수기 13장 참고).

자, 이 염탐꾼들은 하나님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불신을 말로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의 눈에는 작은 벌레만하다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순진하고 안전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빛이시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에 대하여 불평불만 할 때는 자신을 낮추는 행동과 생각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낮추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지 않음으로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빛으로 오신 주님에 대한 불신과 죄이며 어두움을 가져오는 생각의 씨앗입니다.

이스라엘 염탐꾼들은 그들의 연약함과 무능력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말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두려움과 불신에 어떻게 응답을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수기 14:11).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를 물으셨습니다. 그 죄는 바로 불신 이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에게 물으셨던 똑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언제쯤 믿겠니? 내가 너의 연약함 중에 힘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육체의 능력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 땅 위에서 연약하고, 가난하고, 멸시 받는 자를 들어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여호와이며 변치 않는 능력의 하나님이니라. 나의 능력, 나의 영으로 너를 힘있게 할 것이니라. 그러니 너는 이 약속을 믿고 따르겠니? 언제쯤 나를, 나의 약속을 믿겠니?”

2015년 11월 10일 화요일

유월절의 증인

유월절에 관한 대부분의 설교는 그때 사도들이 행한 기사와 이적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니면 그들은 삼천여 명의 구원받고, 방언을 말하며, 일어난 불길 등의 사실에 강조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월절의 가장 놀라운 사실을 쉽게 간과합니다.

기사와 이적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사도행전 2:44-45; 4:34-35).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가정들과 농장들을 모두 팔고, 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 가구, 옷, 주방도구, 예술품 등의 모든 물건을 팔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시장에서 도시의 출입구에서 물건들을 팔았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역사상 가장 큰 벼룩시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말씀에서는 집을 팔았던 사람들이 원래 거주하는 집을 매매한 것인지에 대한 사실여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평소에 사는 자기 집을 판 것이 사실이라면 교회가 집이 없어진 사람들에 대한 부담을 감당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가족과 자녀들을 위해 공급하라는 명령이 이록되어 있었고, 신자들은 자신의 집을 팔았을 경우에 그 명령을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서로의 집에서 모여 교제를 하였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사도행전 2:46). 분명한 것은, 그들은 아직도 거주하는 집은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팔았던 물건들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이었습니다. 생필품이 아닌 것들을 팔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물건들이 아마도 주인의 마음을 옭죄고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건들을 팔아 현금화한 다음에 교회의 과부들, 고아 그리고 노숙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유월절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성령으로 힘입은 신자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자신의 소유를 팔아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유월절의 증인들로부터 기대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으로 행동으로 아버지의 사랑의 증거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015년 11월 9일 월요일

참된 포도나무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밤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땅 위에서 마지막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한복음 14:31). 제자들과 함께 떠나셔서 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1-5).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요약해주는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로부터 나오는 가지 –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을 유지시키고 성장하게 하는 정원사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안에 사는 우리의 생명을 보다 선명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구절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원사가 사용하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도구도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자비롭고, 자애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도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단순히 생명의 자원뿐 만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바로 생명의 단 하나뿐인 근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포도나무들도 성공적이고 윤택한 삶을 기대하게 할 수도 있으나, 진리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다른 포도나무들에서 생명을 구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야망, 성공 그리고 편안함 등의 예수님이 아닌 다른 포도나무들이 아무리 합법적으로 보이고 좋아 보일지라도 그것에는 참된 진리와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참된 생명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포도나무에 단단하게 접목되어 풍성한 생명을 매일 공급받기를 원하십니다.

2015년 11월 7일 토요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by Carter Conlon

제가 본격적인 목회를 하기 위하여 다니던 직장을 사임할 시기를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은퇴계획으로 은행에 적정한 금액의 돈을 저축하였습니다. 저는 사실, 이 목회와 사역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저축한 금액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역을 하는 어떤 친구 한 명이 제 사무실에 찾아와서는 말하였습니다. “목사님, 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제 차의 엔진이 갑자기 망가졌고 저는 지금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에 갈 방법도 없는 상태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어려움에 닥쳐 있구나 라는 것을 인지하였고, 그리고 제 통장에 그가 차를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의 돈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갑자기 너무 너무 거룩해져서는 이렇게 말해버렸습니다. “아 그렇다면, 우리 기도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수천 개의 목초지뿐 아니라 그 위의 소떼들도 모두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다윗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25).”

그가 제 책상 건너편에 앉았을 때,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때에 제 입에 땅콩버터가 한 가득 들어있는 것처럼, 기도를 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제 안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위선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한일서 3:17).” 저는 이러한 목소리를 기도하면서 좇아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돈이 필요하면, 내 통장에 돈이 있습니다.”

결국에 저는 그에게 새 차를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차의 엔진이 고장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께 순종하였습니다. 그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마 후, 시골에 있는 교회를 구입하여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천장 페인팅을 돕고 있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긴급한 전화가 와있습니다!” 제가 전화를 받았을 때에, 전화건 사람은 제게 지역의 자동차 세일즈맨이라며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신사분께서 오늘 아침에 찾아와 당신을 위해 새 차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냥 오셔서 서명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그 신사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세일즈맨은 그가 익명으로 남기를 원하였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이 이야기를 나눈 이유는 여러분께서 어떤 친구를 위하여 차를 사준다면, 되로 새 차를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나눈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면서, 내 눈앞에 놓여진 도움이 필요한 사람 또는 상황을 보았을 때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급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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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타임스퀘어교회(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타임스퀘어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는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 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나의 입, 귀, 그리고 눈을 깨끗이 하소서

최근, 몇년간 알고 지낸 어느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을 마주칠때마다 저는 제 와이프에게 늘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저 목사님은 너무 세상적이야.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어떻게 하나님이 저런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시겠어.” 그러나 얼마 후 성령님께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저를 다루시고 난 후, 그 목사님을 또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성령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그를 사랑하라,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그리고 같이 기도하라.”

저는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을 사랑했고, 그의 말을 들어 주었고,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 다음, 서로 뒤돌아서자마자 저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깊은 슬픔에 시달렸습니다. 너무나도 큰 공포심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제가 지난 몇년간 그 목사님에게 한 행동들이 생각나면서 저에게 테러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지은 그 더러운 죄의 엄청난 사악함을 저는 보게되었습니다.

다윗이 권하기를,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사도바울은 또다시 이런 시각에서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1-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29-30).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메시지를 읽고 있는 사람 중, 그 어느누구도 귀를 기울리지 않고, 변화되지 않아도 될 만큼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지난 몇해 동안, 알게모르게 여러모로 사람들을 잘못 생각한 저를 보며 슬퍼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집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제 마음이 외치는 것 처럼 여러분도 외치시기를:

“오 주님, 왜 저는 이제서야 이런 말을 듣을 준비가 되었나요? 왜 전에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못했나요? 저는 주님의 복음을, 주님의 세대를 선포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의 더러운 입, 귀와 눈을 깨끗이 씻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온전히 나타내기 위한 저의 삶을, 그 무엇도 가로막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신속히 응답하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에게서 모든 악한말과 속삭임 그리고 악한 판단을 없앨 힘을 주실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날들을 연장시킬 수 있을 겁니다.

2015년 11월 4일 수요일

어떻게 예수님께선 교회를 개척 하실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도시나 동네에서 교회를 개척하신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아마도 제일 처음으로 하실 일은 지역을 돌며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있기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19:41-42).

무엇이 예수님을 눈물짓게 만들었을까요? 그 눈물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성을 보시며 걸었던, 그 애달픈 걷기가 아니였나 합니다. 신앙심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비통해 하셨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실을 버렸고, 죽은,형식적인 종교행위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목자가 없는 양들일 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어느 목사도 판단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님이 여러분의 동네를 돌며 슬피 우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개척을 위해 일하는 오늘날의 사람들과는 다른 이미지의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오늘날의 개척자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어떤 교회를 원하는지 설문조사를 하고 다닙니다. “설교는 얼마나 하길 원합니까? 15분? 10분?”

예수님의 시대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걸으실때, 돈거래하는 자들의 탁자와 하나님의 것들을 파는 목사들을 보셨습니다. 그곳엔 진정한 기도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들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19:46).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신다면 슬퍼하실까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하여 비통하는 목사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요?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실까요, 아니면 사리사욕에 힘쓰는 모습을 찾게 되실까요?

여러분의 도시를 우시며 살펴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하실까요, 아니면 이렇게 경고 하실까요: “ 이 시대에 눈먼자들아. 심판이 곧 문앞에 이르렀는데, 너희들은 더욱 세상을 닮아가는구나. 왜 기도하지 않느냐, 왜 이 시대를 구하는 지혜와 능력을 달라고 나를 찾지 아니하느냐?”

2015년 11월 3일 화요일

성령으로 부터의 강력한 말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교회에 속해 있다면, 성령님께서 강력한 메시지들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육에 속한 것들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육의 생각이나, 말, 행동들을 한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아우성을 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15:19).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의 증거는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복 하는 것입니다. 참된 종이 책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유는, 책망에는 결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변화가 오는지 보고, 또 그 변화가 곧 생명이란 것을 압니다.

심령의 깊은곳에선, 죄인 또한 책망의 참된 변화를 알기에 스스로 하나님의 집을 찾아 옵니다. 수많은 성도들 중 한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길을 잃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찾아주시길 원해서 입니다. 그의 영혼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수많은 밤을 잠을 잃은채 보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에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답을 , 진실을, 진정한 변화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춧돌이란 것은 누구나 다 배운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 바위는 거치는 바위니: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33). 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예수님은 부딪치는 돌이시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2:7-8) 베드로는 복음에서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경험으로 고백할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을때, 그는 불쾌해 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2)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하나님을 안다는것 by Gary Wilkerson

모든 세대의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임무나 행동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임무와 행동들인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과 이웃을 충실하게, 희생적으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서서히 ‘나만의 축복’을 바라는 사고 방식으로 변하게 되었는가? ”

예수님께서는 본인을 따르는 민중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6:26) 왜 여기에 예수님께서 표적을 언급하고 계신걸까요? 표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표적이란 어떤 것을 가르킵니다. 표적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덴버 60 마일” 이라고 써있는 도로 표지판을 볼때, 우린 아직 목적지인 덴버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가 요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셨습니다. 오병이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돌보심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의 표적일 뿐 입니다. 


무리들의 반응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6:31). 무리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조상들을 언급하며 예수님께 먹을 것을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보채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단지 그분의 공급만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흔히 기도할때 오늘,지금,이 시각에 당장 응답받길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세상은 “모든것을 지금 원하는” 문화 특성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가장 위대한 세대’가 소중히 여겼던 그 영적 비결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 세대는 믿음으로 큰 축복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자본주의적인 기독교

미국은 “자본주의적 기독교”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신자 수, 건물, 헌금의 증가가 영적인 성장보다 더 큰 목표가 되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심판이 현재 많은 교회에 적용됩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하는구나. 너의 눈먼 것이 너를 미지근하게 하는데 그것조차 보지 못하는구나. 아직 나를 향해 뜨겁다고 생각하는구나!” (계 3:15-17 참조)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과 친밀함을 잃는 죄를 지었습니다. 두아비라 교회는 분별력을 잃고 영적인 간음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는 가장 큰 죄에 빠집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벌거벗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벌거벗은 상태를 비난하셨습니다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3:18). 그리스어로 벌거벗음은 “풍부한 자원에서 벌거벗겨지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을 위해 그분의 자원을 보호하십니다. 그 자원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영적인 풍요인 주님의 능력, 기적을 행하는 힘, 가르침, 임재를 뜻합니다.

한 시간의 예배에 편안히 앉아있는 성도를 그려보십시오. 이들은 삶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간략한 설교를 듣고 문밖으로 나갑니다. 주님 앞에 부서져서 통회하는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가슴을 꿰뚫는 메세지로 죄를 깨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님, 저를 부러뜨려 주십시오. 주님만이 저희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라고 울부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열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한 성도는 한때 교회와 말씀에 열심이었고, 성령님의 비추심에 마음을 다 내어드렸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주일 예배 때만으로 제한하는 미지근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리오디게아 목회자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에게 주님의 자원에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19). 주님의 사랑의 손이 그들을 훈계해 주시고, 주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부르짖는 필요의 마음을 만들어주십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말씀을 오늘날에도 저희에게 하고 계십니다. 리오디게아 성도들에게 하신 것 같이 “이것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문들 두드릴 때 대답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 와서 같이 식사하자고 부르는 것이다.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이 나에게 있다. 나와 교제하는 것이 사역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모든 것은 나와 시간을 보내는 데서 오는 것이다.”라고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2015년 10월 29일 목요일

거짓 목자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음행하고 악한 세력들을 용납한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었을 때 목회자의 반응을 상상해보십시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계 2:18).

편지는 적당한 칭찬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2:19). 다시 한 번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행위를 안다. 사랑, 믿음, 섬김이 처음보다 많구나.” 무엇보다 큰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 친밀함을 잃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꿰뚫어보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20).

정확히 여기서 이세벨이라 하는 여자가 누구입니까? 사람들을 유혹하는 탐욕스런 사역자들을 보고만 있었던 거짓 목자를 말하고 계십니다. 두아디라의 목회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이세벨은 탐욕스런 사역자 이상을 지칭합니다. 이러한 거짓 목자들을 사실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계획을 지어냅니다. 간단히 말해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눈에 악하고 가증스러운 모든 것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그림입니까?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남녀입니다. 그들은 인내하며 신실하게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거짓 선지자에 끌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증스러워하는 사악한 사역자들에게 어떻게 유혹될 수 있습니까?

복음을 통틀어 예수님은 많은 이들을 속이고 집어삼키는 거짓 목자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수의 사람이 거짓 복음에 속을 정도로 분별력이 없음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실상은 사단의 것인 텔레비전의 말씀에 영이 집어삼켜 졌습니까? 노인들의 주머닛돈을 노리고 여러분의 정욕에 호소하는 번영에만 집중한 설교자의 메세지를 가까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세벨과 같은 세력 앞에 신실히 서 있는 이들에게 강력히 충고하십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25). 예수님은 “너는 진정한 분별력을 배웠다. 교리의 바람에 휘둘리지 않게 해라. 그리고 지금은 계속 붙잡고 있어라. 기만당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2:24 참조).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예수님 임재의 상실

요한 계시록 2장에서는 에베소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잃은 것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사회 복지과에서 일하거나 봉사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는 일에 진실되고 헌신적이지만 매일 벌어지는 현실은 감당하기 너무 큰 고통입니다. 기독교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역자들도 보살피는 사람들의 죄나 고통을 많이 보기 때문에, 마음이 굳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에베소에 있는 목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한때 다른 이들에게 친절했었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귀가 먹어버렸구나. 그들과 함께 앉아있지만 그들의 눈물에 동정을 보이지 않고, 사역 하지만 생명 없이 쳇바퀴 도는구나. 너에게서 내 임재를 거두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은 주님의 임재가 명백히 없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가까움을 알고 싶어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으면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납니다. 실제로 저는 “주님의 임재가 살아 있는 교회를 찾을 수 없습니다.”하고 하는 불만의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이런 불만을 가진 많은 기독교인이 안타깝게도 퇴보하는 것을 목격해왔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찾지 못해 집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설교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적인 음식으로 기름진 것을 얻지 못해 결국은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곧 교회를 다 져버리게 됩니다. 히브리서(10장 25절 참조)에서 경고했던 형제들과 모이는 데 등한시 하게 되고, 결국 완전히 예수님과 그 임재에 무관심해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어떤 불만이든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친밀한 교제를 계속하면 저희의 전부가 되어주십니다. 다니는 교회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우리는 귀한 시간을 주님께 드리는 데 부지런해야 합니다. 말씀이 저희 안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원하면, 주님의 임재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1~3장에서 같이, 모든 믿는 사람이 스스로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성경 공부나, 섬기는 일들이 예수님과 보내는 시간을 뺏어가고 있는가? 예전과 같이 아직도 그분을 향한 배고픔이 있는가? 아니면 잃어버린 것이 있는가?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우리의 현재 고난

아마 지금 여러분은 극심한 고난에 고통받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의 뒤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있는 죄들을 다루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극심한 고통을 겪도록 허락하셨는지 궁금해합니다.

고통의 용광로가 바뀌는 삶의 계시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욥에게 일어났습니다. 고난 속에서 욥은 놀라운 발견을 합니다. 그의 하나님을 아는 순수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정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이 고난을 겪었을 때 욥은 적어도 일흔 살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주님을 향한 재단 앞에서 많은 시간을 찬양과 경배로 보냈습니다. 오랫동안 주님은 그의 놀라운 방식과 신비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욥은 주님의 위안, 그의 거룩함, 성품, 기질, 진노에 대해 알아왔고 주님의 능력과 지혜의 신비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상상할 수조차 없는 위기가 왔을 때, 그는 주님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희미해진 신학적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날마다 삶에서 너무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주님이 이제는 그가 겪는 삶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갑자기, 주님은 설교 일부이거나 능력이나 생명이 없는 지식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것이 욥의 삶에서 드러나기를 원하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사랑의 아버지는 자녀들이 당신을 단순히 예배나 성경공부, 기도 모임에 참여함으로서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치열한 싸움이나 고난이 있는 저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저희가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기를 원하십니다. 죽은 신학의 하나님이 아닌 전능하시고, 가까이에 계시며 손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시는 하늘 아버지로 저희가 그분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현재 저희의 고난은 저희 안에서 이 둘 중의 하나를 열매 맺습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불신의 벽이 생기거나 저희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영광의 시각입니다.

2015년 10월 26일 월요일

우리는 왜 예수님을 따릅니까? by Gary Wilkerson

저에게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돌아선 이들에 관한 구절을 담고 있어서 모든 성경 말씀 중에서 가장 어렵게 다가옵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이 떼 지어 예수님을 떠나는 장면입니다(요 6:66 참조).

예수님은 이미 기적적으로 몇천 명의 군중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신 것에 놀라고 기뻐하며 이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를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이 따라야 할 것이 진정 무엇인지 시험했을 때 많은 군중이 비웃으며 떠났습니다.

이 구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질문입니다: “당신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도록 허락해드립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정하려고 합니까?”

많은 기독교인이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이와 같은 질문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처음에서부터 부딪히는 문화의 전쟁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바깥세상의 문화가 끊임없이 누가 이익을 얻을 것이냐고 저희를 부추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문화가 묻습니다. “어떻게 주님과 네 이웃을 섬길 수 있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서 전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많은 사람이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축복을 주셨을 때, 그들은 떼를 지어 “당신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면 당신을 따르겠어. 아픈 가족을 고쳐주고 기도에 응답해주면 제자가 되겠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우리 삶의 “도우미”가 아닌 것을 알았을 때도 얼마나 헌신적일 수 있습니까? 금방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주님을 져버렸습니다. 실망해서 떠났고 포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기적을 보이신 순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이것이 오늘날 저희에게도 적용됩니다. 저희는 예수님의 축복 때문에 따릅니까? 아니면 그분이 주님이어서 따릅니까?

2015년 10월 24일 토요일

어려운 시기를 위한 강력한 믿음 by Claude Houde

시편 6장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으신다는 말씀을 지극히 부드럽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번역에서는 이렇게도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눈물을 세고 계신다.”

사방에서 불확실, 분노, 두려움, 의심 그리고 근심 등의 위협을 받으며 세워야 하는 믿음의 제단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어느 싱글맘은 아들을 보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과 온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어느 순간 정체 모를 분노와 거리감을 느낄 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내 아들의 옷을 입은 이 오만하고 밉기만 한 이 괴물은 누구지? 왜? 아버지 없이 이 아이를 어떻게 혼자 키울 수 있을까?”

여러분과 저도 똑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았을 때의 두려움과 쇼크… 아직은 싱글이지만 주변의 결혼한 친구들과 그의 자녀들을 보면서 외로움에 가득 차 하나님께 “저는 언제쯤? 저는 왜?”라고 외치는 사람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시작한 사업이 한 순간 망하여 파산을 해야 하는 완전한 실패자로 느껴지는 어느 사업가…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십자가를 구경 온 관광객들은 가지 않을 길을, 즉 좁은 문을 향하여 전진합니다. 이러한 사망의 골짜기로 다닐 때에 우리는 진정한 크리스천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정적인 목회자가 교회의 분열을 지켜보며 수 없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 또는 배우자로부터 버려지거나 배우자의 외도로 상처 입은 믿음의 사람이 복원되지 않을 이혼을 하게 되는 것 등의 영혼을 부숴버리는 모든 삶의 문제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생 통증을 안고 살게 될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정비하고, 복구하며 심지어 부활의 믿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도 그의 믿음의 제단을 잃었습니다. 땅에 기근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따끔하지만 진리의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보이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진리의 거울이며, 그 목적은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서 1:23-2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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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로드 후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생명을 낳는 말씀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한복음 6:58-61).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믿는자들에게 전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던 부분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부분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한복음 6:53-54).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는 경악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까? 내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63).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료하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당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한복음 6:66).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복음에 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피와 그의 십자가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메세지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의 복음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단 하나의 진리이지만, 모두가 수용하고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요한복음 6:64).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에 투영됩니다. 놀랍게도, 몇몇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내용을 예배 중에서 아주 제거해버렸습니다. 목회자들은 더이상 그리스도의 피를 설교 중에 또는 찬송 중에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또는 불쾌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십니다. “너희에게 나의 진리가 얼마나 불편하고 불쾌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너희의 믿지않음으로 인하여 진리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생명을 낳게 하고, 너희는 음식과 음료수를 마시듯이 이 진리를 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이 진리가 너희 안의 세포에 흡수되어 너희 존재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전한 이 진리의 말씀을 묽게 변질되게 하여서는 안된다. 너희의 설교에서 나의 피와 심자가를 제거한다면, 영생에 대한 갈급함과 소망으로 오는 사람들을 생명의 공급원으로부터 끊어내는 것이다.”

2015년 10월 22일 목요일

예수님의 메세지의 핵심

회개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첫번째 설교에서 초점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월절에 모인 군중에게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사도행전 2:22-23).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때 그들은 강력한 단죄를 느꼈습니다. 그 메세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복음 16:8).

사람들의 마음은 요동쳤고, 그들은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그들의 앞에는 생과 사의 문제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사도행전 2:38, 40).

이 구절은 예수님의 메세지의 핵심에 회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메세지에 단죄(죄상에 대한 단호한 심판)가 없다면, 죄 그리고 죄책감 그리고 책임 등, 성령께서 그 말씀 안에 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월절에 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책망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저 진리를 전하고자 하였고, 성령께서 진리를 나타내실 때에 단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마음의 모든 방면의 죄를 드러내시고 뽑아버리십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는 이러한 회개가 이루어 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 사역에서는 이러한 편지를 종종 받고는 합니다. “제가 수개월 동안 전도하려고 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교회에 데리고 다니지만 그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커녕 말씀을 듣고 적용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제 목사님 또한 죄에 관한 설교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듣는 설교에는 단죄나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신다는 말씀은 전해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이웃은 똑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그 죄를 짓는것에 더욱 편안해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비극인지요. 하나님께서 오히려 교회 안에서 죄 짓는 것을 수용받고 괜찮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슬퍼하실지요. 예수님께서는 단죄하시는, 즉 나의 모든 죄를 드러내시는 성령의 능력과 임재 없이는 그 누구도 죄로부터 구원받을수도, 진리를 경험할 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2015년 10월 21일 수요일

회개의 자리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로마서 10:8-11).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죄에대한 고백으로 회개를 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13).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통하여 치유함 받는 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누가복음 5:31-32)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교회에서는, 회개를 통하여 치유받는다. 육체적인 질병이 있든지, 정신적인 아픔이든지 아니면 영적인 아픔이든지간에, 누구나 회개를 통한 회복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적인 메세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을 통하여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개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교회에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모든 죄인에게 해당한다.”

첫째로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리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4-15). 예수님의 첫 메세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회개에 대한 설교를 하셨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누가가 대답을 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누가복음 13:5).

몇몇 분들은 회개에 초점을 맞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울하게 받아들일수도 있지만 바울은, 회개하는 마음이 진정한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7:10).

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진정한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분명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뿐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그저 “예수님께 제 한 표를 보냅니다” 라며 동의하는 것이 믿음의 전부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의를 하지만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두 잊어버린채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속한 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38).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나의 교회는, 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박해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명예, 인정 그리고 세상적인 정욕 뿐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인할 준비를 하라.”

사실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으로부터 단 한번도 인정되고 수용되었던 적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산다면, 스스로 이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킬 필요도 없이, 그들이 당신을 분리시킬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로 결심을 한다면, 당신은 책망을 받고, 거절당하고, 악하다는 말을 들으며 치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누가복음 6:22). 예수님께서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분리되며, 욕을 듣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5). 다른 말로는 “이 세상을 의미있게 사는 방법은 자신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진실된 기쁨, 평화 그리고 만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교회는 단 하나의 흠도 주름도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 올때에, 너의 모든 죄를 내려놓고 회개하여야 한다. 세상적인 탐욕과 야망 그리고 자아까지, 모든 것을 나에게 내려놓고, 자신으로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나와 함께 장사되어질때에 내가 너에게 새 생명을 주어 다시 일으킬 것이다.”

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선한 목자의 인도 by Gary Wilkerson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2, 14-15).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이 세상의 가장 헌신적인 목회자도 삯군입니다. 그는 선한목자가 양을 지키도록 고용한 믿음직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직한 일꾼도 절박하게 배고픈 이리를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훌륭한 목회자들도 여러분을 실망시킬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또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회자는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아는 것과 같이 여러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전문적인 카운셀러의 지혜를 구해야 할때도 있을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주변의 수많은 인간적인 도움과의 가장 큰 차이는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0:11). 그는 당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시지 않으시며, 떠나지 않으시며 그리고 당신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던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부의 종교적인 관습을 엎으시고 이렇게 선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양들을 돌보는 목자이어야 하건만,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산 제사를 드리기 보다는 제사를 돈받고 팔고 있다. 이런 모든 관습을 내가 지금 뒤집는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을 나의 양들을 위하여 내려놓는 선한목자니라. 나는 나의 양들을 더 나은 좋은 초원으로 인도하며 그들의 생명을 지키고 축복할 것이다.” 여러분께서 진실된 삶의 인도를 받고 싶다면, 선한 목자의 음성을 익히셔야 합니다. 실제적인 음성으로 다가 올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항상 기록된 말씀, 즉 성경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과 길잡이가 필요합니까?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께 놓고,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듣고, 순종하십시오.

2015년 10월 17일 토요일

잃어버린 세월들 by Nicky Cruz

제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노후에 주술과 마법, 사탄숭배 등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다. 바로 제 어머니께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두분 모두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영원한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제 두 눈을 감으면 제 부모님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제 아버지가 이 땅 위에 사실 때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버지께서 믿지 않으실 때에는 저는 아버지께서 사탄숭배를 하는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열심 있고 성실한 증인으로 전도하며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삶의 모든 것을 뜨거운 열정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볼 때에, 제 아버지의 믿음은 그칠 줄 모르는 강력하고 실제적인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취하여 어디로 인도하시던지 따르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악마를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맞서 싸워 이겼을 것이며, 이 세상에 믿음으로 영향력을 미치시는 분이셨을 것입니다. 만약 제 아버지께서 조금 더 젊은 시절에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제 아버지의 삶과 마음을 앗아갔던 것처럼 사탄이 여러분의 삶과 마음을 앗아가게 허용하지 마십시오. 사탄의 거짓말에 유혹되지 마시고, 사탄의 의미 없는 약속들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님께 온 마음과 삶을 드리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일으키시고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실 수 있으십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사탄으로 하여금 당신의 세월을 훔쳐가게 허용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진리로부터 당신의 눈과 귀를 멀게 할 것입니다.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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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5년 10월 16일 금요일

잃어버린 그의 임재

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께서 계시록 일곱교회의 목사들에게 보내신 서신들을 요약해서 말씀하십니다. 강력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자주 열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지라도 집에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대신 문에 이 표지를 달아 놓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오늘 병원으로 전도하러 갑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교도소로 가고요. 교회에서 뵙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필요을 충족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있고, 성도들은 죄를 피하고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삽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이런 교인들은 한때 예수님과의 교제에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단 하루도 거루지 않고 주님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쁘게 어떤 일에 참여하러 가는 길에 잠깐 주님께 인사나 하는 정도 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심각한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무언가를 잃어 버렸다. 그것은 바로 나의 엄청난 임재다. 너는 골방으로 다시 돌아가 나와 교제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에게서 내 임재를 거둘 것이다. 너의 그 모든 선행들 – 설교, 전도 그리고 기부, 이 모든 것들이 너와 내가 함께하는 시간속에서 흘러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로 부터 흘러 나와야 한다.”

에베소 교회도 한때 그들이 소유했던 것– 그들 중 계셨던 예수님의 임재를 잃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예수님의 임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이 생각들이 목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서로 사랑하며 섬기던 성도들이 이제는 서로를 당연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생각들 또한 그들의 선행에 매우 좋지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섬기는 일에 바빠지다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그들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임재는 없어졌습니다.

2015년 10월 15일 목요일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

예수님께선 교회에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계셨습니다. 사도요한에게 그 주의사항들을 받아적어 일곱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자는 목사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계1:16) 예수님께서 마치 사도요한에게 이렇게 말씀 하시는것 같습니다. “나의 일꾼들을 사랑한다. 내가 그들을 불러 기름부었으니, 너는 이제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거라.”

저도 목사로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사도요한에게 이런 서신을 받아 읽었을 때 과연 어떤 느낌이였을지? “뉴욕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너의 교인들에 관하여 이르노니.” 그때 그 일곱 교회의 목사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에베소 교회의 목사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보세요. (계2:1-11) 사도요한이 보낸 서신에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 크게 기뻐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십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였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견뎠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게으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에베소의 목사가 이 글들을 읽으면서 감탄했을 것입니다, “와, 주님께서 우리를 매우 기뻐하시는구나. 이것은 분명히 추천장이야!”

하지만 더 읽으면서 예수님의 날카로운 말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계2:4)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2:5)

에베소 교회의 목사가 이 글을 읽고 얼마나 경악했겠습니까.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회개? 아니면 촛대를 옮기신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우린 언약속에 있는 신도들이고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었는데… 기부도 많이하고 남을 보살폈는데, 어째서 우리에게 마치 아무런 일이 없던 것 처럼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거지? 무슨 뜻이지? 정말 예수님의 말씀인가? 어떻게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읽어주지?

2015년 10월 14일 수요일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주셨으며,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저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춧돌이 되시며 또 그의 영광과 지혜가 교회에 임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교회를 설립하시고 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기름부음 받은 일꾼들을 – 목사로, 교사로, 사도로, 선지자로, 또 복음전하는 자로 – 삼으셨습니다. (엡4:11-12)

주님께서 교회를 축복하기 원하신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왜 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무시무시한 장면으로 기록해오고 있을까요? 요한은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 불꽃같은 눈과 우뢰같은 음성으로 그의 교회에게 찾아 오신다고 합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계1:13-16)

계시록은 하나님 말씀의 총체 입니다. 말세의 일어날 모든 일을 서술하고있는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됩니다. 왜 예수님의 모습이 불길한 예감을 주는 분으로 묘사 될까요? 왜 예수님께선 교회에게 날카롭게 말씀하고 계실까요? 사도 요한이 기록 하기를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날선 검과 같고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한때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요한은 얼굴을 땅에 대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계1:17).

그때 주님께서 직접 본인의 모습을 설명 하십니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계2:23)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살피러 오십니다. 그분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으로 고치시며 정결하게 하시러 오십니다.

2015년 10월 13일 화요일

절대적은 믿음을 개발하다

우리는 시련속에 있을 때, 그 문제에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이런시기에는, 우리자신에게 이런 격려의 말이 필요합니다. “나의 주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끔찍한 시련을 당하는 동안, 그는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도 나는 압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모든것은 주님의 지배안에 있습니다. 어느누구도, 그 어떤 능력도, 나를향한 그분의 계획을 바꿀수 없습니다.”

혹시 지금 낙심하고 있습니까? 이런 생각들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어. 이 시련을 이겨낼 수는 있을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렇게 고통속에 머물러야 할까? 주님, 제가 다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여기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약5:11)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42:10).

여러분은 욥처럼 잃은것을 두배로 얻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더이상 신학적인 이론이 아닌,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더이상 그 어떤 적이나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어려움을 이겨낸 승리자가 아닌, 그 이상의 것 , 천국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로 더이상 두려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의 여러분도 처음으로 시련을 맛본 욥과 같이, 하나님을 오직 성경공부와 설교로만 알고 계실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방법 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듣는것뿐 아니라 하나님을 볼수 있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을위해 거룩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자라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옥에 있는 마귀도, 여러분 앞에 나타나는 그 어느 괴물도 주님의 영원한 목적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장 힘든 시련 가운데서도 욥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있게 이 믿음의 구절을 낭독할 것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13:15).

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주님앞에서의 진실함 by Gary Wilkerson

매우 작은 결정에도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상표의 치약을 사야 할지 알고 싶다면, 하나님께서는 치약 상표 이름 대신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매일 매일 잊지 말고 양치질을 하여라.” 이처럼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것들이 이미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저는 터키에 갔었습니다. 이라크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난민사태를 보며, 월드 챌린지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난민들이 ISIS의 난폭한 학대를 피하여 터키 국경으로 도망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탑깝게도 이 지역엔 UN군의 도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입고 있는 옷 밖에 없는 수많은 난민들이 모여드는 곳이였습니다. 부모가 지뢰 폭파로 사망하시는 모습을 직접 본 한 아이와도 대화를 나누어 봤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트라우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광경을 보며 집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월드 챌린지 도 함께 돕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기도가 제 입술에서 나오자마나 거룩한 확신에 휩싸여 되뇌었습니다. “왜 이런 것 때문에 기도를 하고 있지? 당연히 가서 도와야지 않겠어!” 그때 깨달았습니다. “월드 챌린지는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소망이 있고 , 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원으로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월드 챌린지 사역의 DNA 입니다. 굶주린 자를 먹이라? 고통받는 자에게 위안을? 고아의 삶에 변화를? 왜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합니까? 갑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35-36).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의 양이고, 또 그의 목소리를 알기에 묻지 않아도 행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1:27)

2015년 10월 9일 금요일

하나님의 거룩한 산

이사야는 사탄의 굴욕을 이미 보았습니다. 사악한 영들이 능력과 자신감을 하나님 앞에서 잃는 것 또한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사 25:10).

이사야는 사단의 굴욕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기도와 찬양의 장소인 산에서 일어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여기서 모압은 이스라엘의 진짜 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악한 사단을 대변하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이사야의 환상이 예루살렘의 교화에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18-19).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지는 날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로 새롭게 되는 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새롭게 되는 날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고 치유하시는 날을 뜻합니다 (사 28:12참조). 그리고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목격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발현하여 수천 명의 군중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온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주님의 임재를 고넬료의 가정으로 움직여, 온 가족이 구원받는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바로 그때와 같은 깨어짐이 일어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묶여 있던 가정들이 자유롭게 되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던 수많은 자녀가 베일을 벗고 돌아가야 할 부모님에게 향할 것입니다. 저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예언과 시대를 분별하며 했던 대로 하면 됩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단 9:3). 다니엘은 부름 받은 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산으로 갔습니다. 많은 믿는 주님의 사도들이 이 마지막 때에 만나야 할 곳이 그곳입니다!

2015년 10월 8일 목요일

돌아오는 때에

곧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임재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주님께 회개와 용서, 말씀, 기도로써 온전히 돌아온 사람들은 그들의 눈물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 자유 된 사람들의 눈물이 방대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사단의 억압에서 풀어진 사람들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구원자를 찬양합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할 때 울며,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사 25:9)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본 것에 너무나 기뻐서 놀라움으로 거의 심장이 터져나갈 지경이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사 25:8). ‘수치’라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근간을 찾으면 “꾸짖다, 망신을 주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을 꾸짖고 창피를 주는 사단의 능력을 뜻합니다.

이러한 공격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단의 강한 덫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할 때 일어납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지옥의 수치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조롱하며 “네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자랑했는데, 그 응답이 어디 있는가? 자식을 위해 수년간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나아진 게 없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녀는 절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원망도 듣습니다: “다 네 잘못이다. 네가 네 자녀에게 반항의 씨를 심었다. 그의 마음을 굳게 한 것은 너다.” 이것이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잘 쓰는 수치의 말이지만, 다시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주신 말씀에 단단히 설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사 25:8)

2015년 10월 7일 수요일

마지막 날을 위한 기적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25:7).

여기에 놀라운 두 예언이 있습니다. 처음은 이스라엘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덮개는 모세의 때부터 이스라엘인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영적인 무지를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무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6).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5-26)

바울은 이사야가 이스라엘인에 관해 ‘구원자가 무지의 덮개를 제한다’는 예언을 했다고 믿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롬 11:30). 여러분, 이 예언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이 띄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잡지도 유대인이 예수님을 다시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예언은 우리의 가족과 관련된 다른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단에 의해 영적 무지의 덮개를 쓴 모든 배우자, 자녀, 가족 식구에게 적용됩니다. 저는 자녀들이 사단에 의해 눈이 멀었다고 호소하는 부모님의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크리스천 환경에서 양육했으나,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어. 아이들이 믿음을 상실해버렸고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아’라며 혼란스러워하고 힘들어합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우상들이 젊은 세대의 눈을 멀게 한다고 말합니다. 사단이 복음의 빛을 차단했기 때문에, 청년들이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상담, 설교, 좋은 부모 양육방식 등을 벗어나 있습니다. 단지, 간단한 기적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 우상의 영과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영들은 우리의 삶에 깊이 임재하고 계시는 예수님만이 다루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사단이 묶어놓은 사슬을 흘러내리는 초같이 녹일 수 있습니다.

2015년 10월 6일 화요일

예수님의 임재

여러분의 집을 방문하시는 분이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십니까? 그의 거룩한 향기가 여러분의 가정, 결혼생활, 관계 속에 스며있습니까? 가족의 중보의 눈물,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진실한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육이 다스립니까?

모든 기독교인의 가정은 고결한 곳이어야 하고, 세상과 육에서 떨어진 산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가정에서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불결한 것들로 더럽혀졌기 때문입니다. 선정적이고 비열한 사악함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허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일궈야 하는 가정에서 이러한 악이 존재하는 것을 마주하는 천사는 얼마나 아연실색하겠습니까? 지금 많은 크리스천들이 외설적인 비디오를 빌리고, 텔레비전의 타락에 젖고,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영화에 돈을 들이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그들의 가정에 영적인 죽음이 맴도는지 궁금해합니다.

우리 가정, 교회, 마음에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가져오고 지속시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 하심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우상숭배로 성령님을 근심시킵니다. 우리의 집이 더러운데 사랑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기적에 놀라운 기적을 더하셔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벅차게 하심으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약속의 계획을 만드셨으면, 그것은 무조건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연회에 초대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미지근해졌거나,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잔치에 참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연회의 만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사 25:6).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우유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던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책망을 사랑했으며, 기름진 말씀에 갈급했습니다. 오래 저장된 맑은 포도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찾고 또 갈급해 했습니다.

2015년 10월 5일 월요일

안내자 by Gary Wilkerson

수년 전에 친구들과 함께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라는 도시에 있는 알라모 요새를 보러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행 중의 한 친구의 고향이 마침 샌 안토니오여서 가이드를 하며 길 안내를 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도착하자, 같은 상점이 세 번이나 돌며 무언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계속 같은 자리를 도는 것 아니야?”라고 누군가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니야, 거의 다 왔어”라며 우리를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교통체증이 걸리는 곳으로 들어선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누군가가 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네가 이 도시를 잘 아는 줄 알았어. 고향이라고 했잖아?” 그 친구는 “맞아, 하지만 내가 두 살때 이사를 가버렸어”라고 대답했습니다.

분명히 마이클이라는 친구는 이상적인 안내자가 아니었습니다. 의도는 좋았지만, 저희를 어떻게 안내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는 우리가 살면서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만족스러운 삶과 반대되는 곳을 맴돌게 하는 안내자를 연상시킵니다.

다른 안내자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요점을 놓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아내 켈리와 필리핀으로 선교여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쉬는 날에 저희는 가이드가 딸린 카누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 투어 요원들은 작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필리핀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저희는 강물이 얕아서 그냥 떠내려 가야 하는 곳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저는 “투어의 한계에 이르렀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젊고 힘센 가이드는 제가 탄 카누를 들어서 깊은 물로 옮겨주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군! 정말 신뢰 가는 가이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렀을 때, 지도가가 우리에게 카누 젓는 것을 멈추라는 신호를 했습니다. “잘됐군. 이 나라의 놀라운 역사에 관해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어. 아마 이 나라의 민주 지도자들이 어떻게 혁명을 기획한 지일지 몰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이드는 신난 기색을 띠며 “이곳이 ‘람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곳입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곳을 가리키며 “이곳에서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소풍을 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저희가 살면서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했을 때 정보를 주는 안내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으로 이끄는 정보 또한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2015년 10월 2일 금요일

놀라운 연회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이사야 25:6).

이 구절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러한 놀라운 연회가 예수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울거나, 공포에 젖어있거나 패배하고 스트레스로 지쳐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을 먹으며 연회를 즐기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연회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마지막 때에 이러한 축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최고의 와인은 마지막을 위해 남겨두었단다. 그래서 지금 나의 백성들에게 부어줄 것이다. 나의 임재 안에서 나의 백성들이 놀랍고 즐거운 것들로 연회를 즐기게 할 것이다.”

저는 전 세계의 각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러한 놀라운 연회를 보았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영혼을 먹이시는 생명수를 구하며 복음을 갈급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거짓 복음과, 군중이 듣기 좋아하는 달콤한 유혹의 메시지보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그의 계시와 진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불과 같은 열정으로 기도함으로써 주변의 모두를 믿음으로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자, 이러한 놀라운 연회가 이루어지는 산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산은 거룩한 장소, 그리스도의 임재가 나타날 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심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머무를 이 산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하시는 모든 일들은 그의 임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임재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말할 때, 결코 우리가 쉽게 상상하는 미스터리하고 세상적이고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게 하십니다.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같이 녹았도다”(시편 97:5). 쉽게 말하자면, 모든 영적인 장벽과 세속적인 방해 등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모두 증발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분명히 실재하며, 진짜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직접 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15년 10월 1일 목요일

마지막 때에

현재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늦은 비”의 때에 살고 있으며 현재 하나님의 계획들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온 세계에 걸쳐 사탄의 도시의 높은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러시아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을 생각해보고ㅡ독일의 장벽은 말 그대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 만명의 사람들이 한때 사탄의 포박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자유함을 얻었고 그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게 됩니다. “강한 민족,” 즉 죄에 무뎌졌던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자, 우리는 현재 아주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50년 이상 사역하면서도 보지 못해왔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제 사역팀이 나이지리아에서 전도성회를 하는데, 하루에 500,000며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이 보다 더 절박해진 것이 보였습니다. 제가 과거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입니다.

또 그러한 놀라운 광경은 이란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수십 년 전에 제가 집필한 책 십자가와 칼이 살며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25,000부가 보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예수는 수백 개의 모임에서 은밀하게 상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이란 사람들이 복음으로 구원받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중동지역 어느 국가의 틴 챌린지 프로그램에서 제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이 나라에서는 알코올중독과 마약중독이 만연해있습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그 문제가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인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틴 챌린지 프로그램에서는 중독에서 자유함을 얻고, 예수님을 영접한 수백 명의 졸업자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어느 졸업자는 이제 그 지역의 유월절 교단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나라의 마약 황제로 알려진 사람이 틴 챌린지의 졸업식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저명한 이슬람 지도자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담대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중독에서 치유하셨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마약 황제가 몰랐던 한가지 사실은, 그 수백명의 틴 챌린지 졸업자들이 졸업 후에 각 지역으로 흩어져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틴 챌린지를 국가에서 가장 성공적인 마약 프로그램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온 세계에서 믿겨지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사탄의 장벽들이 모두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17).

2015년 9월 30일 수요일

놀라운 비젼

이사야서 25장에서는 놀라운 비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로 이동되어 마지막 때를 보게 됩니다. 성경 학자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말세에 관련한 가장 명료한 묘사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말세 직전에 나라와 교회를 위한 계획에 대하여 정확하게 전달해줍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마지막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25장 1절에서 5절까지, 이사야는 나라에 대한 계획을 언급하였습니다. 순식간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제국을 무너진 돌무더기로 만들어 버리고 마귀의 궤계에 포박된 나라들은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리고 기쁨의 찬양을 올립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이사야 25:1). 그가 말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이렇습니다. “주여, 이 모든 것은 모두 주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압니다. 과거에는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고, 지금은 이 시대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계획하셨던 것임을 우리가 압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목격하였을 때에 그의 영혼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세대에게 선포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전멸시킬 것입니다. 마귀의 신전들은 돌무더기가 될 것이고 마귀의 도시들은 먼지 더미가 돼버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포박하였던 쇠사슬이 풀릴 것이고, 두려움과 죄로 가득했던 사탄의 감옥으로부터 풀릴 것입니다. 이사야가 기록한 “강한 민족”이라는 것은 “한때 죄에 무디어졌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그런 “강한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수년 동안 사탄의 포박 아래 공포에 가득하였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만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 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이사야 25:4). 이 구절에서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계획을 온 세상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지금 온 세계의 수 만명의 사람들에게, 나라에 실현되고 있다고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강하게 되고, 빈핍한 자가 구원을 받고, 절망에 빠진 자가 풍족한 평안을 누립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안전, 피난처, 요새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뜨거운 달콤한 유혹이 다가오더라도 거룩한 성벽을 치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사탄의 한때 공포스러웠던 공격들은 믿는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2015년 9월 29일 화요일

한 그리스도인의 중요성

어느 토요일 저녁, 관광객들과 휴일에 쇼핑을 나온 사람들이 가득한 타임스퀘어를 걸어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워 때 그 지역은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구간입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수많은 인파를 바라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어느 순간, 성령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이 인파를 보아라. 그리고 그 인파에 수에 여러 번 배로 곱해보아라. 그 숫자가 바로 황야에서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이다. 그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명만이 살아 나의 휴식을 가졌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절망과 불신에 빠져 제명에 살지 못 했다.”

그런 생각을 주셨을 때 저는 벅차올랐습니다. 인파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사람들은 텔레비전, 라디오, 책 그리고 호텔방 안의 무료 성경책 등을 통하여 복음에 노출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저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똑같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알고자 한다면…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 전파하는 소책자를 나눠주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사람들은 쏜살같이 그들을 피해 도망가 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지만, 쾌락, 돈 그리고 소유물 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눈에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귀중한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들려집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 저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구하시며, 온 지역을 샅샅이 뒤져 그를 진정 사랑하는 몇 안되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시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는 지금도 대학 캠퍼스를 찾아 “이곳에서 나를 믿을 자가 누가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계십니다. 그는 워싱턴 디씨에서도 그리스도를 인정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는 온 나라에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만, 그저 소수의 믿음의 사람을 찾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는 그의 몸된 교회에서 진실된 믿음을 가진 그의 종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깊은 근심을 하게 하는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우셨던 것처럼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우시는 그리스도의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저는 목회자로서, 나의 목자의 짐을 함께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리스도의 근심이 느껴집니다. 현재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나의 집 안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매우 적구나. 수많은 나의 자녀들이, 나의 목장들도 시험이 닥칠 때에 엎어지고 넘어지는구나. 그들의 가족, 직장, 미래를 나에게 맡기지 못하고,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겠느냐? 나를 신뢰하느냐? 내가 네게 올 때에, 내가 네 안에 믿음을 찾을 수 있겠느냐?”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부요하고 만족스러운 삶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부요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설명하실 때에 양의 무리를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0:9). 우리 안에 든 양들은 모든 포식자로부터 안전하고, 꼴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기쁨, 평안 그리고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의 원수되는 마귀는 이러한 복된 삶을 앗아가려고 합니다. 사탄은 먼저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예수님을 강도라고 말합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한복음 10:1, 10).

사탄이 우리로부터 훔치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삶입니다. 사탄은 먼저 우리를 영적인 양식의 공급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미성숙한 크리스천들은 사탄의 강도 짓에 당하기 쉽습니다. 그들은 삶의 위기에 놓여있을 때 사탄의 계락에 쉽게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어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더 이상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신 것입니까?”

제가 뉴욕 시 타임스퀘어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에 수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일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성도들은 깊이 있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었습니다. 그러나 돈에 모든 초점을 맞춘 사기단의 강연을 듣기 위하여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다는 성도들의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적이고 영양가 있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성도들이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을까요?

이는 오늘날 모든 크리스천들이 직면하게 되는 이단의 가르침입니다.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10:5). 이러한 “타인(또는 낯선 사람)”은 좋은 설교자처럼 보이고, 들립니다. 그러나 그들의 설교와 메시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부요하고 만족스러운 꼴을 누리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오히려 영혼의 파괴시키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거짓된 목자들의 음성을 가려내어 오직 예수님만을 따르는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은 선하신 목자가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은 선한 목자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음성, 모습, 맛 그리고 향기를 아는 것입니다.

2015년 9월 26일 토요일

“어디입니까, 주님?” by Claude Houde

아브라함은 순종으로 단을 쌓고,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를 때에 주님을 믿었습니다. 개인의 삶에, 마음에 분노로 “어디입니까, 주님?”이라고 묻는 순간이 있습니다. 정확한 방향도 없이 결정지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어디”는 직장 경력, 학업, 학교, 이사 갈 곳, 교회 등등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어디”에 우리는 반드시 신뢰의 단을 쌓고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 맡겨야합니다. 어디로 갈 지도 모르는 때 조차 단을 쌓는 믿음은 절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또 믿음이 자라날 때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공급하시며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무엇,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것들을 모를 때에도 믿음으로 단을 쌓았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 . .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11:8-9, 12).

이 구절에는 놀라운 가치와 영적인 무게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은 그가 모르는 하나님의 “언제”에 대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약속의 실현은 언제나 지연되는 것 같고,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고 그 가운데 의심은 에베레스트 산 같이 큰 불신이 되어갑니다. 그는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어떻게 실현하실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되는 곳으로 왔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구절에서 사용했던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에게 그 약속은 너무나 믿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끝이 없는 불가능의 바다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믿음으로 단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 전체에서 불신과 전쟁같이 마주쳐왔습니다. 저희가 알다시피, 많은 시간동안 그는 험난한 믿음의 전쟁에 깊이 빠져있는 그를 마주했습니다. 그는 많은 믿는 자들이 끝없이 질문하는 번뇌의 괴로움으로 상심했었습니다: 언제입니까? 어떻게, 왜입니까? 어디입니까,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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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그들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서 군대를 정비하고, 계략을 짜고, 그리고 단독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적들이 이스라엘군대를 봤을때, 그들은 벌떼같이 쫓아가서 이스라엘을 멸하였습니다. (신 1:44 참조)

저는 믿는자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거하지 못하는 끔찍한 경우들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족의 위기, 경제적 어려움, 결혼문제 와 같은 가혹한 시험에 놓이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길 기다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치하셨다며 원망하고, 그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오늘날 이와같이 믿는자들에겐 안식과 평강이 없고 , 하나님의 임재를 모르며 , 끊임없는 의심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위기에서 다른 위기로 옮겨가며 그들의 최근 문제만을 얘기하는것 처럼 보입니다. 이런 모든 혼란들은 한가지 원인, 즉 불신 으로 발생합니다 .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9 ) 이 시편구절은 불신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 이야기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삶과 죽음이 헛되었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던 조부모의 똑같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들은 우울속에 살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투덜거리며 불평속에 외로이 죽고 또 잊혀집니다.”

이것은 불신의 공포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역사를 끊어버리고, 당신의 삶이 헛되었다는 것만을 기억할것 입니다. 이스라엘의 젊은 세대들이 조부모에 관해 물어볼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너희 조부모들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불평속에 의미없이 살았다. 그래서 죽을때까지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진정으로 믿는자들은 ,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않으실지라도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의 좋은것을 가져가시든 , 죽음의 목전에 있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안에 거하길 갈망합니다. 이런 삶의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들 자신의 일을 쉽니다.’ (히4:10 참조)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밤을 새지 않습니다. 대신 , 예수님께 모든걸 맡깁니다. 그들의 득과 실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의 계획과 우리삶에서 일하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