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30일 월요일

주안에서 기뻐하라

우리의 평안과 만족은 우리의 삶을 주님의 손에 맡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말이지요. 시편작가는 이렇께 썼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 37:4).

당신이 당신의 삶 전부를 완전히 주님 손에 맡겼다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모든 상황을 인내할 수 있읍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이 걱정, 근심, 불안이나 두려움없이 아버지의 보살핌 안에서 전적으로 신뢰하며 일상 생활을 하기 바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맡김 안에는 보다 실용적인 삶의 효과가 있습니다. 주님의 보살핌과 보육안에 당신 삶을 맡기면 맡길수록 더 주위 상황에 마음쓰지 않는 당신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주님께 맡기고 나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지 늘 생각해 내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당신을 둘러싼 무서운 소식에도 공포에 떨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앞날들을 생각하며압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의 삶, 가족과 미래를 당신 하나님의 안전하고 사랑스런 손에 맡기었으니까요.

목자를 따라가는 양이 얼만큼 걱정과 염려에 차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자의 인도에 따라 전부를 맡기기 때문이지요. 그들처럼 우리는 좋은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이 삶과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며 평온을 잃고 불안해 해야합니까?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인도하시기때문에 양무리들을 확실히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저의 삶속에서도 문제 하나 하나를 주님께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한번도 주님을 믿어 증명된 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모든것을 주님께 맡기고 믿겠다 말할수 있겠습니까? 단지 말로만 " 나는 주님을 완전히 신뢰합니다"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내삶의 많은 부분들과 모든 것을 통해 반복된 경험으로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저는 체념 합니다, 저는 맡깁니다, 저는 믿습니다,"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맡김이란 내 지식과 요령의 끝이 보이기 전에 자유로이 자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백지수표로 드린 아브라함의 삶처럼 주님과 행동이 일치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모든 빈칸을 채울 수 있게 말입니다.

2008년 6월 27일 금요일

환란중에 기도

이처럼 위험한 때에 오늘날의 교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 합니까? 우리는 가만히 앉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면 그 상황을 위해 과감히 행동를 하도록 부름받은것입니까? 우리 주변 모든 세상이 두려움에 떨고있을때, 두려움에 차 모든 사들람들의 마음이 쇠약해져 있을때, 우리들은 영적인 무기를 꺼내들고 적과 전쟁을하도록 부름받은것입니까?

요엘 선지자도 이와같은 "어둠과 흑암" 날이 이스라엘 앞에 다가오는것을 보았습니다.요엘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이스라엘 앞에 닥쳐 온 어둠의 날들은 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엄청난 어둠의 날들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울부짖었습니다. “슬프다,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 부터 이르리로다" (요엘 1:15).

이스라엘의 어두운 날들을 향한 요엘 선지자의 조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에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요엘 2:12-14).
저는 이 성경구절을 읽으며 "이제라도" 라는 단어에 가장 강한 인상을 받았읍니다. 짙은 어두움이 이스라엘에 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호소합니다. "이제라도,나의 원수 갚는 시간중에라도-너희들이 나를 외면하고 사회밖으로 밀쳐 내었어도, 두려움과 흑암이 땅을 덮었어도- 이제라도, 내게로 어서돌아오라. 요시아에게 한 것처럼,나는 좀처럼 노하지않으며, 내 심판을 잠시 유보하기로 잘 알려져 있다. 내백성은 기도로 내자비를 구하라. 하지만 세상은 너희들이 자비가 없다 말하면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보이십니까?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기도하며 간구하면 그분은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간청 할 특권이 있으며 주님은 진심어리고 효과적인, 간절하고 뜨거운 그의 성도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2008년 6월 26일 목요일

두려움과 경외

하나님이 민족들을 흔들어 위험한 때가 닥치는 것을 볼 때 우리 자연인은 크게 두려워할 것이라고 선지자들은 경고합니다. 에스겔은 물었습니다. “내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겔22:14).

하나님이 노아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하며 방주를 지으라고 했을 때 노아는 “경외함으로”(히11:7)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대담하고 용기 있는 다윗도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삼판을 두려워하나이다”(시119:120)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는 재난의 날이 다가옴을 보고 울부짖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위 구절들을 읽으면서 주목하실 점이 있습니다. 이 신실한 자들에게 다가온 두려움은 육체적 두려움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경외심이었습니다. 이 성자들은 그들의 영혼의 대적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가오는 참화의 뒤에는 무서운 권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폭풍의 결과를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신성함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앞으로 재해와 파멸의 시간에 두려움에 압도당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두려움은 절대로 운명에 대한 육체적인 불안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신성한 경외로부터 기인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에 바탕을 둔 두려움을 경멸하십니다. 물질, 재산, 우리 삶의 기준을 잃어버리는 데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전 세계에서 자신의 나라 경제가 악화되어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이 같은 두려움에 차
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홍수가 발생하여 평생 동안 수고한 모든 것을 쓸어갈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소망이 없는 불신자들의 울부짖음입니다. 이것이 경건한 자들의 울부짖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으로 당신이 주님의 자녀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이와 같은 당신의 불신을 참고만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경고했습니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사51:12-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8:13).

하나님이 당신의 두려움과 경외가 되도록 하십시오. 이런 두려움은 사망으로 인도하지 않고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2008년 6월 25일 수요일

도움이 필요한 때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는 언약중 가장 강력한 약속인 아래구절을 보시고 조용히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산들이 노하여서 뒤흔들려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강 하나가, 그 강의 줄기들이, 하나님의 성을 즐겁게 하며,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하는구나.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니, 그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동틀녘에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민족들이 으르렁거리고 왕국들이 흔들리는데, 주님이 한 번 호령하시면 땅이 녹는다.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땅 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시편 46:1-7, 9)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저는 이 구절을 여러번 반복하여 읽어봤지만, 아직도 감동이 넘처흐릅니다. 우리에게 하시는 이 말씀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확고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시는 두려워 하지않아도 된다. 땅이 진동하여도, 바다가 넘처 흘러도, 산이 바다속으로 무너져도, 세상 전부가 소동하여도 관계없이 말이다. 모든것이 혼란스러워도, 너의 주변에 모든것이 소란스러워도.

"하지만 나의 언약의 말때문에 너희는 평온이 강 같을것이요. 모든 민족들이 분노하여도, 내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기쁨이 흐를것이다. 이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채울것이다."

지금은, 온세계가 다 두려움에 떨고있읍니다. 나라들은 어떤지역도 위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알고 테러리즘에 떨고 있읍니다. 개인적 문제와 고난은 더 해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46장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메아리쳐 울고 있읍니다: "내가 너희들 가운데 있다.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내 백성들은 멸하거나 움직이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존재하는 도움의 손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누구나 다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 모두는 소동, 유혹, 혼동의 시간들을 겪고 이로 인하여 우리영혼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시편 46장에 하나님이 보내는 메세지는 이러한 때를 위한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항복하여 고개를 숙이고 절망에 차 있으면, 우리 삶속의 살아있는 주님의 현실인 그의 정반대의 삶을 사는것입니다.

이 시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하는 말을 움켜 잡는것이 극히 중요합니다.

2008년 6월 24일 화요일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그리고 더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몸을 살펴보십시오. 손, 발, 눈, 귀가 있지요. 당신은 다른 지체에 부속되지 않은 고립된 두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단지 머리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몸이 있고, 우리가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지적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바꿔 말하면, 우리는 단지 머리되신 예수님께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서로에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와 동시에 결합되지 않고는 그분께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점의 핵심을 찌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6-17). 간단히 말해서 우리 모두는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즉, 그리스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6: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주 비유로 말씀하셨고 이 비유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진리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 비밀들은 창조 이전부터 성부, 성자와 성령께서 나누고 계셨습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마13:35). 이 숨겨진 진리들은 시간을 소요하여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만 밝혀진다고 예수님은 증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35, 51, 57). 여기서 떡에 대한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로 오면 너는 양육 받을 것이다. 나에게 붙어있어 내 몸의 지체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안에 있는 생명의 흐름으로부터 힘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그분의 몸의 모든 지체는 단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힘을 끌어들입니다. 바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승리하는 삶을 지속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우리에게 흘러옵니다.

이 떡이 우리를 그분의 몸의 지체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인류들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한 덩어리의 떡,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먹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7).

2008년 6월 23일 월요일

약속의 땅

나는 시편 46편이 신약의 “약속의 땅”을 묘사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편46편은 참으로 히브리서에 언급하고 있는 하늘의 안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4:9). 이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같은 안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항존 하는 힘, 환난 때에 도움, 혼란가운데 그의 평강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고 그분의 도움은 항상 제때에 도착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안식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시106:24). 슬프게도 오늘날의 교회도 이스라엘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평강에 대한 확신, 도움과 충만한 공급과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불평합니다. “내가 시련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나와 함께 계신건가 아닌가? 그분이 계시다는 증거가 어디 있지? 왜 하나님은 환난이 계속 내 위에 쌓이도록 허락하실까?”

오늘 나는 주님이 교회에게 묻는 소리가 들립니다. “너희는 내가 아직도 내 백성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느냐? 너희는 내가 너희를 돕고 인도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믿느냐? 너희는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매일, 매시간, 매 순간 순간마다 말하기 원한다는 것을 믿느냐?” 우리의 대답은 다윗과 같아야 합니다. 이 경건한 사람이 주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을 때 지옥이 흔들렸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33:9).

하나님의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신다는 그분의 말씀을 믿는 모든 세대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그분의 이 생각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성경은 명확히 밝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전에도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시고 마지막 끝 날까지 계속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오늘 당신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경건한 친구를 통해서 또는 성령님의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속삭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길이다. 이 길을 가라.”

하나님이 어떤 방법을 쓰시든지, 당신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들을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그리고 그분은 신실하게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97:10).

2008년 6월 20일 금요일

주 예수님, 속히 오시옵소서, 곧 오시옵소서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고 선포하십니다(계22:7). 다섯 절후에 그리스도는 또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주리라,”고 하십니다(계22:12).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계22:17).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지칭하는 것인데, 예수님의 주권 하에 있는 온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 신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종들은 모두 거듭났고 보혈로 씻음을 받은 신자들 입니다.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믿는 사람의 마음의 부르짖음인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왜 성령께서 예수님께 오시라고 부르짖으십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자신의 지상 사역이 거의 완수된 것을 아시고 드리는 마지막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은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성령께서도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이 성령의 부르짖음을 어디서 듣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성령 안에서 살고 걷는 사람들, 그들의 몸이 성령의 성전으로 되어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옵니다. 성령께서 그러한 사람들안에서, 그들을 통하여, “주님 속히 오시옵소서,” 하십니다.

“주 예수님, 속히 오시옵소서, 곧 오시옵소서,” 라고 가장 최근에 기도한 것이 언제 인지 기억나십니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 기도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이 기도를 하시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놀라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희랍어로, “그 날이 오기를 사모하라,”는 말은 “가속 시키다, 재촉하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기대에 찬 기도가 하나님 아버지로 하여금 그 아들을 속히 보내시도록 서두르게 하고 속도를 더 내고, 재촉, 권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하신 인내가 그분이 언제 돌아 오실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의 재림을 위하여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 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리라”(막13:19-20). 온 세상의 그리스도의 신부가 깨어나 성령 가운데서 “예수님,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2008년 6월 19일 목요일

살아있는 말씀에 구속됨

주님께서는 위엄과 권능으로 온 피조물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온 우주를 -온 자연과 모든 나라와 사람들의 모든 일들을-다스립니다. 하나님은 바다위에, 온 행성들 위에, 온 천체 조직들 위에, 그 모든 물체들의 움직임위에 군림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가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시66:7).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시93:1-2, 5).

이 시편들은 다윗이 썼는데, 핵심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의 증거들, 즉 주의 율법, 법령 그리고 말씀들은 취소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영원불변하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에는 어떻게 만물이 움직이는지에 대해 다스리는 법칙들이 있고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해, 달, 별들 그리고 지구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법칙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천체 조직들은 모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존재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계속 하나님이 또한 말씀으로 창조하신 법칙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오, 그분이 그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또 그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눈물을 모두 병에 담아두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그분께서 자신의 율법으로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왕이라고 듣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그의 법규이고, 그분의 모든 법령을 포함하고 있고, 그것들로 그분께서 의롭게 다스리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변함없는 말씀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지금 성경을 우리 손에 들고, “이 책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게 말 해준다. 그분의 성품, 본질, 약속 그리고 심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그분의 입으로부터 나온 그의 법규이며 그것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주님께서 스스로를 구속하셨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재판관은 세워진 법에 따라서 자기가 맡은 사건을 판단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영원한 법, 즉 그 자신의 확고히 세워진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심판하십니다. 주님께서 판결을 내리실 때, 자신이 스스로를 구속하신 그분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2008년 6월 18일 수요일

담대하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이 성경 구절들은 우리의 절박한 필요를 들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이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그분의 보좌로 오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그저 제안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그것을 선호하신다는 것이며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런 기도를 위한 담대함, 이 확신에 찬 나아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 “효력 있는 간구” 라는 말의 “효력 있다”는 단어는 희랍어 어근 “고정된 위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흔들릴 수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간구”의 “간절함”이란 말은 확고한 증거에 입각한 담대함, 당신의 청원을 인정해주는 절대적인 증명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를 종합하면 “효력 있는 간절함”으로서 잘 준비된 송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정에 출두하고 있다고 확신에 차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감정이나 요란함이나 과장된 열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살피고 주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행하기로 스스로 구속하셨다고 완전히 설복당한 종으로 부터만 나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 앞에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약속들을 가지고 나와서 그분께 그 약속들을 상기시켜드리고, 그분을 그 약속들에 구속시키며, 그 약속들 위에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환상을 본 그 장면에 이 말씀이 실연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몇 사람이 네 문 앞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그들과 더불어 가달라고 네게 요청할 것이다. 베드로야, 내가 이 사람들을 보냈으니, 아무것도 의심치 말고 그들과 가기를 내가 원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선포하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것에 상관하지 말고 그것을 믿고 그 위에 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나 우리의 적격성 여부를 따짐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지 측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시도를 한다면, 우리가 합당치 않다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무성한 말에 휘말려 하나님의 말씀을 청구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없게 되는 지경에 빠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도록 도움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좌 앞에 선 청원자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요 변호인으로서 그곳에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법정에서 우리 옆에 서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조언자가 되시는, 우리의 “보혜사”이십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있는 영원한 법령과 신성한 규약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시기 위하여 우리 곁에 계십니다.

변호인과 조언자가 우리 옆에 계신다는 놀라운 약속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오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2008년 6월 17일 화요일

큰 도움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환난의 때에, 네가 끈질기게 지속되는 사면초가 같은 악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내가 네게 큰 도움이 되리라”(시46:1 참조).

“큰”이란 말은 “언제나 있고, 언제나 이용할 수 있는, 무제한적으로 접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안에 항상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언제나 우리 안에 임재하시면, 그분은 우리와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직장에서나 가족들과 있거나, 친구들과 있거나, 하물며 불신자들과 같이 있을 때에도, 그분은 우리가 그분과 이야기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사탄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거짓말을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하기를 그치셨다는 거짓말 말입니다. 원수가 우리로 믿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권세와 영향력이 증가하도록 허락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큰 권위로 무장시켜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이르기를, “원수가 홍수처럼 밀려올 때 주님의 영께서는 그를 대적하여 기치를 들어올리시리라”(사59:19 KJV 번역). 마귀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사탄의 공격보다 항상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이 이사야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군대에 앞서서 군기를 들고 가는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백성들이 그분의 권능의 깃발을 따라 전투에 임하도록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은 그분의 깃발 하에 움직이고 있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군대가 있으며, 그 군대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략을 실행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환란 중에 있을 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십니까?” 그분의 도움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 삶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의 선물로서 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주님이 거하시는 거주지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진리를 찬양 드릴 때나 간증할 때 자주 되 뇌이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 진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 안에 내재하는 권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진리를 깨달아 붙잡고 신뢰한다면, 우리는 결코 다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도 이 진리를 온전하게 붙잡지 못했습니다. 목사로서 보낸 모든 세월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떤 감정을 북돋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몇 시간 씩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나는 네 안에 거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기 있다.”

다윗의 간증을 들으십시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 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7,8). 다윗이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늘 내 앞에 계시는 도다. 그리고 나는 그분을 항상 내 생각 가운데 모시기로 작정하였노라. 그분이 신실하게 나를 밤낮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다시는 혼돈에 빠질 이유가 없도다.”

2008년 6월 16일 월요일

주의 인자하심은 결코 폐함이 없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특정 인물을 중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즉 그분의 약속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 전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역사 전체를 통해서 보여주신 인자하심을 우리에게도 보여주시기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므낫세 왕은 그 이전의 어떤 왕보다도 더 사악한 죄를 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하였을 때 그는 회복을 받았습니다(왕하21:1-18 참조).

주님의 인자하심은 결코 폐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과거에 보여주신 인자하심의 선례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하는 바를 주님께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담대한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 당신이 주님의 인자하심에 역행하여 너무나 빈번하게 죄를 지었다고 두려워할 때, 당신이 어떤 경계선을 넘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당신을 포기하셨다는 생각이 들 때, 실패나 그리스도에 반하는 행위 때문에 실망하고 낙담해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선반위에다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닌가, 혹은 당신이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당신에게 금하고 계시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진리를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말씀을 준수하시도록 하십시오. 과거에 그분이 당신을 위해서 행하신 일중에 기억나는 모든 것을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베푸신 인자하심의 선례들을 찾아보십시오. 그 선례의 목록을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그분께 상기 시키십시오. “하나님,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부인 하실 수 없습니다.l 당신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내가 권하건대 이일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앞에 서둘러 나아가서 우리의 요구 사항들을 열정적으로 열심히 아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보좌에 나올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기도 시간 중에 사그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올 때에 확고한 위치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담대함은 감정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설복 당했을 때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제출할 송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약 시대 성도들이 그저 꿈에서나 상상했을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재판관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우리가 양자됨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우리와 피의 언약의 형제가 되시므로 우리는 성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재판관 앞에 설 때 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고, 그분 자신의 주장이 그분께 구속력이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말씀 외에는 가지고 나올 것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할 것이요, 내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 주실 것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의 중보자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나의 모든 청원에 귀를 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내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 주님! 내게, 지금, 이 필요한 때에,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아멘.”

우리가 이런 종류의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면서 그분 자신의 말씀이 그분께 구속력이 있도록 하면,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송축 받으신다고 나는 진실로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듯합니다. “드디어 네가 깨달았구나! 네가 나를 송축하는구나!”

2008년 6월 13일 금요일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살후2:1-2).

비웃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보시오. 초대교회의 누군가가 그리스도가 곧 재림하실 것이라는 메시지로 신자들을 동요시켰군요. 그래서 바울이 ‘아니다, 걱정하지 말라. 그말로 인해 흔들리거나 염려하지 말라’고 했군요.”

그러나 희랍어 원어의 의미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 어원을 살펴보면, “주의 날이 이미 왔다고 [흔들리지 말라]”라는 의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재림하셨으나 그들이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여 근심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 절에서 사도 바울은 확신을 주며 말하였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 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2:3). 바울이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두 가지 일이 먼저 일어나야한다”라고 한 것은 단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두려움을 다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울의 근본 신학은 무엇이었을까요? 두 성경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롬13:11-1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바울이 소리 높여 말하고 있습니다. “깨어나라! 이미 자정이 지났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오니 스스로를 일깨워라. 게으름 피우지 말라. 예수님은 그를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다.”

회의주의자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 자신이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전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큰 배교가 일어나기 전에는 주님이 오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스스로 신이라고 선포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적그리스도가 신전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숭배하라고 요구해야하지 않습니까?”

첫 번째, 온 세상에 이미 범람하고 있는 배교를 보지 못한다면,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불신이 온 땅을 휩쓸고 있으며 신자들이 곳곳에서 믿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배교는 분명히 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 할지도 모릅니다. “적그리스도가 권력을 쥐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오실 수 없다고 바울이 명백히 말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한번 고찰해 보십시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니...”(요일2:22). 요한에 의하면 누구든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들이 증가 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간략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막을 아무 요인도 없습니다.

2008년 6월 12일 목요일

하나님은 사람들을 쓰신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회복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쓰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종류의 사역을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말라기 선지자를 감동하셔서 이 사역이 마지막 때에 가장 필요한 사역이라고 하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당시에 어떻게 일대일 양육을 통해서 서로를 세워주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말3:16).

이일은 정확히 언제 일어났습니까?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은 불경건함이 범람하고 “삼키는 자”가 땅의 많은 열매들을 파괴했던 때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곤비하여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짐을 지는 것이 유익하다고 들어왔는데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니 오히려 교만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자들이 행복해 보인다. 그들은 부를 추구하며 걱정 없이 살면서 인생을 만끽하고 있다.”

성령께서 이스라엘에 운행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을 간구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함이 임했습니다. 갑자기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일대일 선교사들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서로를 가르치며, 주위의 사람들을 세워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역에 관한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이 오늘날을 그대로 거울같이 반영한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잡담과 불평을 그치고 새롭게 회복시키는 사역에 힘씀으로 성령이 말세에 퍼부어지는 그 모습을 말라기 선지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일이 전화, 편지, 이-메일을 통해서 그리고 직접 얼굴을 맞대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극히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기록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 낙담한 영혼을 위로해 주는 전화 한 통, 편지 한 장, 모든 노력들이 “기념 책”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 기록된 행실을 행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3:17).

심령이 낙담해 있는 사람에게 디도 같이 되십시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를 베풀기 원했던 오네시보로의 영을 구하십시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독특한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사람, 그 고통스러워하는 신자를 새롭게 회복시킬 수 있는 천국의 모든 권능이 당신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주님께서 과거에 당신에게 베푸셨던 위로를 통하여 회복시키기 원하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오늘 전화를 거십시오. 그리고 “형제여, 자매여,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당신을 격려하고자 합니다. 당신에게 들려줄 좋은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하십시오.

2008년 6월 11일 수요일

하나님께로 나아감

기도가운데 주님을 구하며 나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성전으로 만드시는데 가장 중요한 측면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답변은 이것입니다: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성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인즉,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그것도 단지 일 년에 한 번 하나님과의 접촉이 허락되었습니다. 때가 되면 제사장은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성전 안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가 만일 마음에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는 상태로 시은 좌에 다가갔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 좁고 제한된 공간에서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추악함과 부패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직접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안에 살려고 왔다. 너는 내게 너의 더러움이나 낙심을 숨길 필요가 없다. 내가 너를 원하기 때문에 너를 택했고 이제 너의 몸을 나의 집, 내가 살 곳, 내 거주지로 삼으려고 한다.”

“내가 너를 거룩하게 만들어줄 성령을 보낼 것이다. 그가 모든 방을 깨끗이 치우고 청소할 것이요, 네 마음을 나의 신부답게 예비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너를 나의 옆에 앉힐 것이고 너로 하여금 나의 보좌에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나오도록 권고할 것이다. 나는 네가 나에게 권능, 은혜, 능력,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구하기 바란다. 네가 이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도록 내가 천국을 네 영혼 안으로 가지고 왔다. 네가 부요하나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네가 내 모든 영광의 상속자이다.”

우리의 몸이 거룩한 유일한 이유는 성령이 그곳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의 지속적인 내재와 권능으로만 우리의 몸이 거룩하게 유지 됩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입구들만 지키려고 애써도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날아드는 먼지와 더러움을 막으려다 실패한 후 낙담할 것입니다.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빗자루로 쓸고 광내고 하면서 번듯하게 보이게 하려다가 지쳐 버릴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은 이 사실에 기뻐해야합니다 - 하나님이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 안에 항상 계시니, 누가 당신을 대적하겠습니까?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마음 넓히기

전도자로 활약했던 죠지 화이트필드와 죤 웨슬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야외 집회나, 길거리, 공원이나 감옥에서 수천 명에게 설교했고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어떻게 성화되어 가는가에 대한 교리적 문제로 말미암아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양 교리진영이 서로의 입장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바람에 악의에 찬 말이 오가고 두 사람의 추종자들이 덕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논쟁을 벌이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화이트필드의 한 추종자가 와서 그에게 “죤 웨슬리를 천국에서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웨슬리씨가 그런 오류를 가르친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화이트필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씨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도 높은 그리스도의 보좌 근처에, 주님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마음을 가리켜 “마음 넓히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강퍅하다고 비난했고 자기의 설교를 비웃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 자신이 이 마음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 졌으니,”(고후6:11)라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넓혀주실 때, 홀연히 많은 한계와 장벽들이 제거됩니다. 더 이상 편협한 관점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당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자석 같은 힘에 의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긍휼히 여기는 심령으로 이끌리어 올 것입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 당신은 심령의 온화함이 있습니까? 형제나 자매들 중에 죄로 인하여 실족하였거나 문제들을 겪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삶에서 잘못 된 점을 지적해주고 싶은 유혹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온유하고 온화한 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바로 그 영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여생을 위하여 마음으로부터 간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의 마음에서 모든 편협함을 제하여 주십시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의 긍휼의 영을 원합니다.... 실족한 사람들을 볼 때 주님의 용서의 영을.... 그들의 허물을 사하여주시는 주님의 회복의 영을....”

“나의 마음속에서 모든 배타성을 제거해 주시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나의 용량을 늘려주십시오. 내가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접할 때에 그를 심판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오히려 내 안에서 샘물이 솟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강물이 되어 흐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들에게 보여준 사랑이 그들 안에서 남을 사랑 할 수 있는 불을 지피게 하여 주십시오.”

2008년 6월 9일 월요일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그분의 교회는 배교와 거짓 교사들을 경험했습니다. 초대교회들, 즉, 바울과 사도들이 세운 사도시대의 조직체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성장과 불변하는 믿음에 유익이 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주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딤후4:3-4)는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바울이 예견했던 그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사도들이 죽은 후에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도 죽은 후에 교회에는 사악하게 그릇된 음모가 홍수처럼 밀려들었습니다. 믿는 자들은 낯선 교리에 유혹당하고 과학과 철학이 그리스도복음의 진리를 잠식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순결성에 대해 말 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5-27).

하나님은 신앙을 저버리는 교회에 대해 크게 염려하시지 않습니다. 배교하는 일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이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며 그분의 신비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승리하는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령의 강이 변절하여 사해가 되어버린 교회로 흘러들어와서 죄악과 미온적인 태도를 드러내어 줍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생명이 샘솟게 합니다.

죽어 생명이 없는 교회들로부터 돌이킨 사람들은 단지 자투리에 불과 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들판은 곡식이 익어 추수하게 되었다. 아직도 일꾼들이 추수할 시간이 남아 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성령이 추수할 곡식이 시들도록 내버려두고 떠나버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죄를 드러내시고, 사랑을 호소하시면서 배교한 자들을 포함해서 길 잃은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아직도 일하고 계십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하늘의 증인들은 우리에게 심판을 구하지 말고, 요새를 수비하는 일에 집중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아직 성령의 때입니다. 그분은 준비가 되어있는 그릇을 모두 채우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흠이 있든지 어떠하든지 아직도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2008년 6월 6일 금요일

준비하라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준비할 것을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4:44-51).

예수님이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해 보십시오. 한 종은 충성되다 하시고 다른 종은 악하다고 부르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그 다른 종을 악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은 그가 마음에 생각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종은 그러한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주님이 더디 오신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팔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가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한 것에 유의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갑자기 또는 예기치 않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 세대에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악한 종”은 명백하게 믿는 자의 한 부류입니다. 아마도 사역자 중에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는 “깨어” “준비하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고 명령을 받은 자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느슨하게 풀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만약에 종이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확신하게 되면, 그는 바르게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동료 종들과 화평하게 지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집이나 직장, 교회에서 일치감을 유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도리어 동료 종들을 때리고, 비난하고, 불만을 품고, 그들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이런 종은 자신의 정욕가운데 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으며 두 개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008년 6월 5일 목요일

원수의 거짓말

우리가 시련과 유혹을 당할 때, 사탄은 이러한 거짓말을 들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너는 지금 포위당했고 빠져 나갈 길이 없다. 너보다 위대한 종들도 이보다 열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포기해버렸다. 이제 네가 무너질 차례다. 너는 실패자다 아니면 이런 일을 겪고 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뭔가 잘 못 되었고 하나님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히스기야는 시련가운데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사납게 대어드는 목소리, 용기를 꺾고 협박과 거짓말을 퍼부어 대는 음성을 멈출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선지자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이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주님이 네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자, 이제 네 문에서 사탄에게 말하여라, ‘너야 말로 멸망할 자 이다. 네가 여기로 왔던 그 길로 네가 또한 나갈 것이다.’”

히스기야는 원수의 계략에 거의 넘어질 뻔 했습니다. 실상인즉, 만일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에 맞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위기에 빠진 순간에 믿음과 기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힘을 길어내지 않는다면, 마귀는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에 조준하여 공격을 일층 강화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산헤립에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마왕아, 네가 나를 모독한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 그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의 주님은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분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히스기야와 유다를 바로 그 밤에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셨다고 말해줍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

오늘날 믿는 자들은 언약위에 서있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위에 서 있습니다. 그 피안에서 우리는 모든 죄, 시험, 그리고 우리가 직면하는 전투에 대해 승리합니다. 당신은 최근 마귀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당신께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련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당신의 모든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서도? 당신의 모든 의심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만일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앞서 모범을 보였던 다윗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이 가련한 자가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당신도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2008년 6월 4일 수요일

평안과 성령

예수님은 누구에게 그분의 평안을 주셨습니까? 당신은 아마 “나는 주님의 평안 가운데 살아갈 자격이 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은 것들과 힘든 싸움을 해왔다. 나의 믿음은 너무 연약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제일 먼저 그분의 평안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중 아무도 평안을 받을 자격이 없었고 권리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래지 않아 저주를 내 뱉을 복음 사역자에게 그의 평안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의 열정이 있었으나 또한 그분을 부인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쟁심이 강하였고 항상 인정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분이 영광 중에 그의 보좌로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좌우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 보다 더 의로웠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진노하였습니다. 도마의 경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의심에 빠졌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였고 그로 인해 예수님은 놀라시고 곤비하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가장 고통당하던 순간에 그들은 모두 그분을 저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조차도 제자들은 그것을 더디 믿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한 혼동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그들은 혼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그들은 이제껏 그들이 갖고 있던 일체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두려움, 불신, 분열, 슬픔, 혼동, 경쟁심,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문제투성이 종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나의 평안을 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선하거나 의로웠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재주가 있거나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부와 품꾼들이었고 순박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심중에서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그들 각자가 성령께 순종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약속은 그분의 평안이 전부였습니다. 그 평안의 충만함은 오순절이 되어야 그들에게 부어질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들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안을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 이 평안은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할 때 우리에게 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원하면 할수록 성령이 당신에게 그분을 더욱 더 보여주실 것이며,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평안을 더욱 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08년 6월 3일 화요일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

전 세계적으로 만물이 흔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중동사태에 집중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각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집중되어있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시33:18).

우리 주님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모든 동작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시선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자녀들의 안녕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눈은 자신의 영적 몸인 각 지체의 고통과 필요를 응시하고 계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엇이든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그분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세상의 큰 전쟁들의 와중에서 조차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폭군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초점은 자신의 자녀들의 삶의 모든 상황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던 당시에 참새는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었고 두 마리에 한 페니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 미미한 생물들 중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떨어지다”라는 말은 새의 죽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람어로 이 말은 “땅위에 내리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떨어지다”라는 말은 작은 새가 미세하게 폴짝거리는 모든 동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눈은 참새가 죽을 때 그것을 주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 내려앉을 때에도 보고 계신다. 참새가 나는 것을 배울 때 그 새는 둥지에서 떨어져 땅위에서 폴짝거리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 새가 겪는 모든 미세한 어려움을 보고 계신다. 그분은 새의 삶의 모든 세밀한 부분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1). 진실로 그분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온 우주의 별들을 만드시고 세어놓으시고, 로마 제국의 모든 활동을 지켜보고 계시고, 은하계가 각각의 궤도를 유지하도록 하시는 그분이 시선을 당신에게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묻습니다. “그분께 너희는 더욱 더 귀하지 않느냐?”

2008년 6월 2일 월요일

놀라운 평안!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평안이 필요한 이유가 하나뿐이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14:30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방금 그분은 열두 제자들에게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요14: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바로 그 시각에 일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귀는 이미 유다를 자기 편으로 편입시켜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지옥의 권세로부터 능력을 받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마귀의 충동을 받은 군중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곧 다가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한 자, 사탄이 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투쟁에 대비하여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악한 자들의 손에 곧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탄이 자신의 평안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귀는 그분을 괴롭히고 낙심하게 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믿음을 붕괴시켜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피하도록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혼란 속에서 “모든 게 끝났다. 나는 끝까지 견딜 수 없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네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다. 와서 나의 평안을 마셔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직면하여 헤쳐 나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삶은 불안정하고 앞날은 소망이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이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는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어느 길로 돌아서도 당신은 더욱 스트레스와 혼동과 곤고로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겪고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삶은 마치 돌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마치 현대판 욥을 보듯 많은 시련을 견뎌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난 가운데에서 성령께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당신을 세례주시기를 구하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파탄에 빠졌다. 그런데도 그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로 결단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 오래 전에 포기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믿는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았다. 얼마나 놀라운 평안인가! 그것은 이해의 범주를 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