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31일 목요일

그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면서 이 장에 언급된 사람들의 생애에서 한 가지 공통분모를 발견합니다. 각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형의 믿음을 상징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이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믿음이 주님과 깊은 친밀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친밀한 교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분을 갈망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가깝게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런 종류의 친밀함은 밀접한 개인적 유대감, 연합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이 세상의 어느 것 보다 더 갈망할 때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이 구절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 자신이 아벨의 예물, 또는 제물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둘째, 아벨은 주님께 제단을 쌓아야 했고 그곳으로 희생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희생 제사를 위해 흠 없는 양을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 양들의 기름도 드렸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창4:4).

여기서 기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레위기는 기름에 대해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3:16).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제물의 부위였습니다. 짐승의 이 부위는 빨리 불이 옮겨 붙고 타면서 향기로운 냄새를 풍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유형의 기도나 교제를 나타냅니다. 은밀한 골방에서 기도하는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역입니다. 주님 자신이 이러한 친밀한 예배가 향기로운 냄새로 자신께 올라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처음으로 이런 유형의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벨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은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을 드리면서 주님과 친교를 나누었던 종의 유형이었습니다. 히브리서가 선언하듯이 아벨의 본보기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로서 오늘날도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2008년 7월 30일 수요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마가복음 4장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몹시 흔들릴 때의 이야기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단 한 번의 명령으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장면을 봅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막4:40).

당신은 지나치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런 폭풍을 무서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꾸짖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토록 나와 함께 있고서도 너희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렇게 긴 세월을 나와 함께 동행 하고서도 어떻게 나를 친밀하게 알지 못할 수가 있느냐?”

제자들은 진정 예수님이 행하신 엄청난 기적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4:41).

상상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몰랐습니다. 그분은 제자들 각각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하였고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많은 무리에게 사역하였습니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였고 굶주린 많은 무리를 먹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주가 진정 누구인지에 관해 생소했습니다.

비극적이지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수의 크리스천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그분 곁에서 사역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가 누구신지 정작 모르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홀로 있는 친밀한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 마음을 열고 기다리며 그분이 무슨 말을 하기 원하시는지 깨닫기 위해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존전에 조용히 앉아 있는 적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제자들의 믿음에 관한 또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라고 요청하며 나아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답을 얻기 위해 주님 자신을 찾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음을 더 얻기 원한다면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분은 믿음을 구하는 요청에 무엇이라고 답하셨습니까?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17:8). 예수님 말씀의 요점은 “인내의 옷을 입어라. 그리고 내 식탁에 와서 나와 함께 먹어라. 나는 네가 그곳에서 나를 먹여주기 원한다. 너는 하루 종일 나를 위해 기쁘게 수고하였다. 이제 나는 네가 나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한다. 나와 함께 앉아서 마음을 열고 내게 배워라.”

2008년 7월 29일 화요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에녹은 주님과 가깝게 교제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과 그의 교제가 너무도 친밀했기에 주님은 그의 지상에서의 생명이 끝나기 오래 전에 그를 영광으로 옮기셨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주님은 왜 에녹을 옮기시기로 작정하셨을까요? 위 성경 구절 첫 부분에서 그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아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에녹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기쁘시게 했다는 말의 헬라어 어근은 완전히 연합한, 전적으로 동의한, 총체적으로 하나 된 이란 의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에녹은 하나님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친교를 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친밀한 교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성경은 에녹이 그의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 주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에녹은 그 당시 65세였습니다.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지냈습니다. 히브리서는 분명하게 에녹이 아버지와 아주 긴밀하게 접촉하며 시간시간 너무도 가깝게 교제하였기에 하나님이 그를 그분 자신에게로 데려왔다고 밝힙니다. 요점은, 주님이 에녹에게 “네가 육신에 있는 한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다. 나와 네가 더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너를 내 곁으로 데려와야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에녹을 영광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따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에녹의 친밀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기에 이 사람은 결코 기적을 행한 일도 없고, 심오한 신학체계를 개발한 적도 없고 성경에 언급할 만큼 가치 있는 위대한 일을 행한 적도 없습니다. 그 대신 이 신실한 사람의 삶에 대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단순한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에녹은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진정으로 믿음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간증입니다.

2008년 7월 28일 월요일

하나님의 벗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묘사한 “나의 벗 아브라함”(사41:8)이란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신약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3).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칭찬입니까! 대부분 크리스천들은 유명한 찬송가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를 불러 보았을 것입니다. 위의 두 성경 구절들은 이 진리를 힘차게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께서 한 인간을 벗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 일어났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사용한 친구라는 히브리말은 애정과 친근함을 의미합니다. 야고보가 사용한 헬라어 친구는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뜻합니다. 둘 다 깊은 친밀함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자라갈수록, 그분의 존전에서 전적으로 살고자하는 우리의 바람도 커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토대가 되심을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0)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인생에서 영원한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그에게는 “낯선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뿌리를 내릴 곳이 못 됩니다. 아브라함이 갈망했던 하늘의 본향은 실제로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집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의 본향”의 히브리말은 Pater 인데 아버지(Father)를 뜻하는 말의 어근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바랐던 하늘의 본향은 문자 그대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몽롱한 영적 안개에 싸여 살았던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상의 삶을 살았고 세상사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어떻든 수천이나 되는 가축을 소유했던 사람이었고 사병을 조직할 만큼 많은 하인이 있었습니다.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소, 양, 염소들을 사고파느라 바빴을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업무와,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2008년 7월 25일 금요일

늘푸름의 위력

나는 인도하심을 받아 황충에 관한 요한 계시록 9장을 읽고 연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황충에게 푸른 것은 멸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4절을 읽으며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공포의 시기에 안전하게 살아남는 열쇠가 여기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 “푸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52:8) 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푸른”은 영적 건강을 의미합니다. 번성하고,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 건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서 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번영합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가 내 안에서 영적 생명을 생산해 냅니다.”

여기에 바로 푸름을 유지하는 것의 위력에 대한 영광스러운 진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렘17:5-6).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 네가 나보다 인간의 힘을 믿는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엇을 생산해 내는 지 보십시오.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17:7-8).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할 때 우리는 그분의 건강한 강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러면 그분의 신성한 힘, 즉 감미롭고 푸른 영적 건강이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흐릅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부패할 때 우리는 푸른 나무처럼 건강하고 강하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의 시기가 올 때, 쇠하거나 시들지 않고 우리의 믿음은 성장 할 것입니다.

2008년 7월 24일 목요일

하나님의 불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몸의 대부분은 현대판 마른 뼈 계곡과 유사합니다. 그것은 쓰러진 크리스천들의 하얗게 바랜 해골들이 즐비한 광야입니다. 목사들과 헌신적인 신자들이 죄에 빠져 소진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수치심으로 가득 차 자신들이 판 동굴 속에 숨어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했듯이 그들 스스로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렘20:9).

하나님은 아직도 에스겔에게 물었던 그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이 죽은 뼈들이 다시 살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절대적으로 “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함으로 가능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소모하는 불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절망의 어두운 밤을 지낼 때 유일하게 우리에게 있는 진정한 빛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적이 거짓으로 우리에게 “이제 모두 끝났다. 너는 불을 잃어버렸고 결코 되찾지 못할 것이다”라고 속삭여 댈 때 그에 대한 유일한 방어 수단입니다.

우리를 암흑 가운데서 빠져나오게 하는 유일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 심겨진 말씀을 붙들면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침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중단할 이유가 없다. 내 말 안에 안식하라.”

당신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 어두운 밤은 이전의 내가 알던 어떤 것 보다 더 지독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설교를 수천가지 들었지만 현재 나에게는 어느 것도 가치가 없어 보인다.”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눈에는 안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불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불에 믿음의 기름을 부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의 의심과 정욕이 모두 소멸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마른 뼈에게 다시금 생명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분이 그들 속에 심어놓은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죽어서 누워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부르짖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은 내안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더 이상은 품고 있을 수가 없다. 주님의 권능이 나를 일으키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이 내안에 생명을 불어넣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내게 주신 말씀을 말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긍휼과 치유 능력을 선포할 것이다.”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성경은 야곱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만남을 통해서 엄청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30). 이 계시를 둘러싼 상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때는 야곱의 생애 중 가장 비참하고 두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야곱은 두 개의 강력한 세력, 즉, 분노로 가득한 장인 라반과 적개심을 품고 격분한 그의 형 에서사이에 끼어있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을 위해 20년 넘게 일을 했고 라반은 계속해서 그를 속였습니다. 결국 야곱은 견디다 못해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라반은 적은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죽이기 위해 동쪽에서 부터 추격해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해하지 말라고 경고함으로써 라반은 사위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라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자마나 에서가 서쪽에서 달려왔습니다. 그도 자신의 장자권을 훔친 동생을 죽이려고 400명되는 적은 군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여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암흑의 시간에 야곱은 전에 결코 경험해 보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천사와 씨름을 했는데 학자들은 그 천사가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믿습니다.

이제 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욥이 가장 어려운 시련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던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계시중 하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우주로 들어 올리셨고 또 바다의 심연 속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의 비밀로 그를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과 위엄을 보았습니다. 욥은 그 체험을 통하여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당신의 판단에 의문을 품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나는 모든 것이 당신의 주권 하에 있고 당신의 은혜에 의해 인도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계획이 있으셨고 이제 나는 실제로 내 눈으로 당신을 보았습니다”(욥42:2-5참조).

우리가 그저 단순히 믿을 때 경이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평강에 싸여서 우리는 “이 호된 시련으로부터 무슨 일이 닥치든지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나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말 할 수 있게 됩니다.

2008년 7월 22일 화요일

그분이 모든 열쇠를 쥐고 계신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계시는 사람들이 환난, 재해, 고립과 고난을 겪고 있을 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의 생애에서 이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도는 3년간 “예수님의 품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환난이나 시련이 없는 완벽한 안식과, 평강, 기쁨의 시기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요한은 거의 아무런 계시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인자로 알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영광 중에 있는 계시를 받았을까요?

그것은 요한이 쇠사슬에 묶여 에베소에서 끌려나온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고 중노동 형에 처해졌습니다. 아무런 교제나, 그를 위로해 줄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홀로 고립되었습니다. 말 할 수없이 절망적인 시기였고 그의 생애의 가장 처참한 기간이었습니다.

이때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권이 된 주님의 계시를 받았고 그것이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가 암흑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성령의 빛이 그를 비추고 요한은 이전에 전혀 보지 못했던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다른 사도들과 같이 있을 때나 또는 예수님의 지상 공생애 기간 동안에 조차도 이 계시를 받지 않았습니다. 한데, 그의 생애 중 가장 암흑의 시간에 요한은 그리스도가 모든 영광 중에서 “곧 살아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8) 라고 선언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놀라운 계시에 요한은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일으키시고 그분 손에 들고 계시는 열쇠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1:17)고 확신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계시가 곤핍한 중에 고통당하며 기도하는 모든 남종과 여종에게 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생명과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죽음은 그분의 장중에 놓여있다.” 이 계시는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생명과 사망의 열쇠를 들고 우리 앞에 서 계시며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라고 확신을 주시는 예수님을 그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여야 할까요? 욥이 하였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2008년 7월 21일 월요일

사람 은혜

하나님은 종종 천사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사역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은혜를 나누어주시는 일에 자신의 백성 중에서 남을 잘 돌보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곧, 은혜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되어있는 존재들입니다. 나는 이것을 “사람 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하나님이 은혜로 베풀어 주신 위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 어느 누구도 전 생애를 계속 슬퍼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주님에 의해 치유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저수지를 짓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7-8)를 기록한 의미라고 믿습니다.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1:7). 이 사도는 심오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보좌에 은혜를 얻기 위해 나아가는 것은 너희를 위해서이다. 나는 너희에게 정죄하는 목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목자가 되기 원한다. 너희가 곤궁할 때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기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을 애통하는 자와 함께 울 수 있는 자비로운 목자로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기록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선한 청지기가 된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자로서 봉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는 그런 사람인가요? 또는 나는 단지 자신의 아픔과, 애통과 고투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시간을 가집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통들은 우리 삶에서 아주 소중한 것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 은혜와 긍휼의 은사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형성해 갑니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나눠주기 원하는 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2008년 7월 18일 금요일

부스러기

귀신들린 딸을 가진 여인이 끈질기게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마침내 제자들이 그들의 주를 재촉했습니다. “주님, 그녀를 보내십시오. 떠나게 하십시오. 우리를 계속 성가시게 합니다.” 그 여인의 간구에 예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15:23). 그리스도는 이 전체 상황을 무시하고 계신것 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야기가 미래의 전 세대에 알려질 것을 아시고 이것을 읽는 모든 자들에게 진리를 밝혀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5:24). 그리스도께서 “나는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 내가 그들을 위한 복음을 왜 이방인에게 낭비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었다면 대부분 그 자리를 떠나 우리 갈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자주 당신은 기도하다가 포기해 버립니까? 얼마나 여러 번 당신은 지쳐버리고 “나는 주님을 구했다. 기도하고 간청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라고 따져봅니까?

이 여인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원망하거나 “예수님, 왜 나를 거부 하십니까?” 하며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성경은 그 정반대로 했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15:25).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읽기가 괴롭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은 그 여인을 퇴박했습니다. 오히려 이번 그분의 대답은 가혹하기 조차 했습니다. 그분은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15:26)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그분은 이 여인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15:27). 얼마나 놀라운 대답인지요. 이 굳게 결심한 여인은 예수님께 구하는 것을 늦출 태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15:28).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부스러기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 필요한 모든 은혜와 긍휼을 약속 받았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 가족에 관여된, 그들이 구원을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모든 위기 상황을 포함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좌 앞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오도록 초청 받았습니다.

2008년 7월 17일 목요일

인간의 소망 너머에

인생을 살다보면 인간의 소망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때가 있습니다. 조언도 없고, 의사나, 약, 다른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상황은 불가능으로 치닫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에 유일하게 남은 소망은 누군가가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든, 어머니든, 또는 아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붙드는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응답을 듣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이제 됐다. 네 길을 가라’고 말씀해야만 한다,”라고 결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한 가족을 봅니다.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요4:46). 이는 아마도 왕족이었을 지도 모를 지체 높은 집안이었습니다. 부모가 죽어가는 아들을 간호하고 있을 때 죽음의 영이 그 가정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다른 가족, 아마 고모나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다른 자녀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인들을 포함해서 전 가족이 믿었다고 우리는 듣습니다.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4:53).

문제에 처했던 그 가정에서 어느 한 사람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고 그분의 기적적인 권능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25마일 가량 떨어진 가나에 계시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그 가정에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절박한 나머지 주님을 찾아 몸소 나섰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요4:47). 이 신하는 단단히 결단하고 주님을 향하여 무리를 헤치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이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요4:47). 얼마나 놀라운 중보의 장면입니까. 이 사람은 주님이 한 말씀 해주실 것을 간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젖혀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 예수님은 무슨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분은 이 사람에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기적적인 구원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그 가족의 집에 들어가 죽어가는 아들에게 안수하고 그를 낫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이 가족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은 그분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사람과 그 가족에게 그이상의 무엇인가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육신을 입은 하나님으로 믿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신하에게 핵심만 보면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네가 지금 이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구하고 있는 이가 하나님인 것을 믿느냐? 너는 내가 그리스도요 세상의 구세주 인 것을 믿느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요4:49). 이 때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서 믿음을 보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뒤이은 구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요4:50)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인 것을 믿는다.”

2008년 7월 16일 수요일

믿음의 초석

당신의 믿음은 어떤 초석위에 세워져 있습니까? 성경은 믿음이 들음에서 나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들을 수 있도록 “영적인 귀”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롬10:17 참조). 자, 우리 인생에서 겪는 광야 체험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지 살펴봅시다.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69:15). 명백히 경건한 자들의 삶에는 고통의 물결이 홍수처럼 밀려듭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면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시66:10-12). 누가 우리를 고통의 그물로 끌어들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하십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

이 구절들은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고통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하물며 우리를 축복해 줍니다.

시편기자의 증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 하는도다....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슬픔과 환난을 만났을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시116:1-4). 여기 하나님을 사랑하고 위대한 믿음을 소유했던 신실한 종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슬픔과 고통, 환난과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이 주제는 성경 전체에 걸쳐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가는 통로는 홍수와 불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소리 높여 선언합니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시77: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43:19).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사41:13).

이 마지막 구절이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광야에서 우리아버지는 우리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직 광야를 통과하는 자 만이 이 위로의 손길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맹렬한 환란의 강물 가운데 빠져 있는 자들에게 이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2008년 7월 15일 화요일

구원하시는 성령의 능력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10).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바울은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절망적인 상황에서 건져내셨다. 그분은 지금도 나를 건져내고 계신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모든 고통가운데서 건져내실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감정적인 표현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령의 나타남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나는 계속 점증하는 지식을 통해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그분의 구원 능력, 짐을 지심, 공급하심에 대해 계속해서 점점 밝아지는 빛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되풀이해 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1:3). 베드로에 의하면 성령의 신성한 능력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요1:16). 더욱이, 그분이 완전히 우리를 담당하시기 전에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께 완전한 통제권을 드리지 않았다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전적으로 그분의 돌보심에 맡겨야만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마지막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19장에는 무서운 위기에 빠진 롯과 그의 가족이 나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도시 소돔에 심판이 내려질 찰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그분의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롯은 이 주님의 사자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고 그들은 집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전 가족을 구해낼 하늘의 권능이 있었으나 이 천사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천사들은 롯과 그의 가족을 강제로 소돔 밖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피난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먹이고, 입히고 돌보실 계획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알듯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 죽고 말았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기를 원한다면 너는 고삐를 내려놔야 한다. 네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바라면, 너의 계획을 포기하고 기꺼이 그분의 길을 가야한다.” 간략히 말해서, 성령은 의심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불신은 그분의 사역을 멈추게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길을 선택 하셨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분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도록 해야만 합니다.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주 즐거워하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구원하심으로 실제로 복을 받고 계십니다.

우리 손자 손녀중 하나가 전화를 할 때 마다 내 아내 그웬에게서 나는 바로 이런 종류의 부모 된 즐거움을 봅니다. 사랑스런 어린 아이가 전화할 때 그녀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환해집니다. 세상 어느 것도 그녀가 전화를 끊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대통령이 우리 집 문 앞에 왔다고 해도 그녀는 나를 쫓아버리고 통화를 계속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자손들을 기뻐하는 것보다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덜 기뻐하신다고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때때로 내 자녀들은 내가 가르쳤던 것과 반대로 행하여 나를 실망시켰습니다. 하지만 결코 한 번도 나는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추거나 그들을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불완전한 아버지로서 그토록 지속적인 사랑을 품고 있다면 우리 하늘 아버지는 얼마나 더욱 그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서서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8). 얼마나 간단하지만 강력한 선언인가요. 그들은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 그분은 모든 거인들을 쳐부술 것이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물을 쳐다보지 말아야한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에만 주목 하여야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읽습니다.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11:20).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5:8).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18:17-19).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상황들이 결국에는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에 찬 뜻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팔에 기대어 광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2008년 7월 11일 금요일

어두움 정복하기

어두움을 정복하고 흩어 버리는 유일한 것, 그것은 빛입니다. 이사야가 선언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또한 요한도 말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빛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나는 빛을 보았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제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주님은 이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의기양양한 마귀를 보지 않고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의 능력은 지옥의 모든 권세를 능가합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무저갱이 엄청난 능력을 가진 황충과 전갈을 토해내는 것을 읽습니다. 그리고 용, 짐승들, 뿔 달린 짐승들, 그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존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실은, 우리는 알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나 짐승의 표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성령의 권능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렇다면, 환란의 시기에 성령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실까요? 그분의 능력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짐을 지는 분으로 받아들일 때만 발휘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감당하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짐을 그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분을 받아들였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은 영광가운데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여기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포함해서, 우리 삶의 모든 상황을 주관해 주시기 위해 안타깝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절망하며, 의문을 품으며, 불안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며 계속 두려움가운데 산다면 성령을 우리의 위로자,
돕는자, 안내자, 구원자, 그리고 우리의 능력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짐을 성령께 던져버린 크리스천이 세상에 증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믿는 자들은 주위를 둘러싼 엄청난 문제들을 보고 있지만 그는 주님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안위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하실 것을 신뢰합니다. 그리하여 어두움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기쁨을 구현하기에 길 잃은 세상에 대해 강력한 간증거리를 갖게 됩니다. 그의 삶은 세상에게 “이 사람은 빛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008년 7월 10일 목요일

은밀한 골방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과거에 나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필요 때문에 “골방 기도”를 차 안이나, 버스 속, 또는 직장의 휴식 시간 동안이든지 어디서나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정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한층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희랍어로 이 구절에 나오는 “골방”은 “사적인 방, 비밀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의 문화에는 집 깊숙한 안쪽에 창고 정도로 사용되었던 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바로 이 은밀한 골방에 혼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교회에서나 다른 기도의 동역자와는 할 수 없는 그런 기도로 몰입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적인 장소로 가서 기도하심으로 이 본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은 계속 반복하여 예수님이 기도하시기 위해 “따로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도 그분보다 더 바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느라 자신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에서 듣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14:23).

우리 모두는 은밀하고 특별한 장소에서 홀로 기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그런 사적인 장소가 없다거나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경건한 청교도 작가인 토마스 만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은밀히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외의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아이들과 지내고, 할 시간은 있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것을 위한 시간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적인 장소가 없다고 합니다. 한데 주님은 산을, 베드로는 지붕 위를, 선지자들은 광야를 찾아내었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따로 호젓이 있을 장소를 찾아낼 것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기도하기로 마음먹는 것의 중요성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원칙으로 준수하거나 굴레로 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그분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보시고 우리가 엄청난 자원과 매일 매일 충전이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이 모든 것은 그분과 함께하는 은밀한 곳에 있습니다.

2008년 7월 9일 수요일

주님과 함께 앉음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영적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져 예수님과 함께 천상의 장소에 앉혀졌다고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앉혀진 이 천상의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다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보좌 실, 즉,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은혜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두 구절 뒤에 어떻게 우리가 이 경이로운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읽게 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이 보좌 실은 모든 권능과 주권이 있는 자리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모든 통치자들과 권능들을 다스리시고 인간사를 주관 하십니다. 바로 이곳 보좌 실에서 하나님은 사탄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시고 인간의 모든 생각을 감찰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아계십니다.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요1:3) 그리고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골2:9)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 평강, 모든 능력, 힘, 승리의 삶과 열매 맺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모든 부요에 접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이 분명하듯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아버지께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광의 보좌로 인도되신 것이 분명하듯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동일한 그 영광의 장소로 인도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이 거하시는 곳에 또한 우리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믿는 자들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그가 거하시는 동일한 천상의 장소에 그와 함께 앉아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영적 축복을 이 보좌 실에서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모든 그리스도의 부요, 즉, 확고부동함, 능력, 안식, 날로 더욱 충만한 평강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2008년 7월 8일 화요일

대각성

대각성이란 말을 나는 어떤 의미로 썼을까요? 나는 바울이 계시와 계몽이라고 묘사한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눈뜨게 해주시기를 기도 합니다. 나는 그분께 당신이 자기 유산, 즉 그리스도안에서 당신에게 속한 부요함을 새롭게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풀어놓기 원하시는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은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 안에 있었던 바로 그 능력이 지금 당신 안에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의 능력이]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의 능력과 같다는 것입니다(엡1:20, 19).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고후13:5)하라고 권고합니다.

우리 자신을 어떻게 시험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에 자신을 견주어 봄으로써 시험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자원에 의지하는가? 죄를 이기기 위해서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는가? 나는 예외 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기쁨, 평강, 안식 속에서 계속해서 살고 있는가?”

당신 개인의 “대각성”은 어느 날 당신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 그날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삶은 틀림없이 이것 보다 뭔가 더 나아야만 한다. 내 모든 계획은 흐트러지고 내 모든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공포와 육신의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나는 주님이 이 패배한 삶보다 나은 것으로 부르신 줄 알고 있다. 또한 나는 위선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 하나님, 내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당신의 힘을 공급해 주시는 그런 곳이 실제로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나를 시련가운데서 정복자보다 뛰어난 자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도 나를 위하여 완벽한 평강의 자리를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당신과 지속적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요? 내가 더 이상 냉랭한 상태에 빠지지 않아도 되고 또 당신을 기쁘게 하기위해 고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사실인가요? 내 믿음이 굳건하게 지속되기 때문에 더 이상 부흥이 결코 필요 없는 안식처가 실제로 당신 안에 있습니까?”

2008년 7월 7일 월요일

성령 충만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1:3).

오랫동안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증거 했습니다. 나는 성령이 내게 간증하라고 권능을 주었다고 또한 나를 성화시키신다고 설교했습니다. 나는 성령 안에서 기도했고, 성령께 말씀드렸고, 성령과 동행하였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덟 살이란 나이에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그 곳으로 당신을 데리고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나는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내안에 거하시는 이 엄청난 능력에 대해서 내가 정말 알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령은 내게 단지 교리에 불과한 것입니까? 내가 어쩌면 그분을 무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분이 하시려고 오신 일을 내게 이루어주실 것을 구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실제로, 당신은 아주 귀중한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평생 자신의 작은 농장에서 일하며 살았던 농부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는 돌밭을 경작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결국 불만가운데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이 농장을 물려받았습니다. 어느 날 밭을 갈다가 그 아들은 금빛 줄무늬가 있는 돌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감정 결과 그것은 순금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곧 이 농장이 금으로 꽉차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일순간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금이 자기 땅에 있었지만 부를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가진 것, 즉 우리 안에 거하시는 능력에 대해 무지한 채 살아갑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성령이 주시는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성령을 충만하게, 능력가운데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 안에서 성령은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영원한 사역을 성취하지 않고 계시는 것 입니다.

2008년 7월 4일 금요일

가족 기도

“너희중에 두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것을 “합심기도”라고 부릅니다. 당신이 같이 기도하는 헌신적인 형제나 자매가 있다면 당신은 크게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실제로, 내가 알고 있는 중에 가장 권능이 있는 중보기도자들은 대개 두 사람씩 혹은 세 사람씩 같이 활동했습니다.

이런 기도가 가장 강력하게 일어나는 곳이 우리들의 가정입니다. 내 아내 그웬과 나는 매일 같이 기도하는데 그것이 우리 가족을 지켜준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자녀들의 성장기에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들 중 하나라도 영적으로 길을 잃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친구관계, 다른 친분들, 또 장래 배우자에 대해서 기도했고 요즈음은 손자 손녀들을 위해서 같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크리스천 가정들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가족기도 덕분에 내가 오늘날 사역에 몸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매일, 내 형제와 내가 앞마당이나 길거리에서나 어디서 놀고 있든지 우리 어머니는 집 앞문을 여시고, “데이빗, 제리, 와니타, 룻, 기도할 시간이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내 동생 돈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우리 가족기도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 부르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 시간 중에 무엇인가 확실히 일어났는데, 성령께서 우리 가족가운데 운행하시며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아마 당신은 가족 기도 모임을 갖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비협조적인 배우자가 있거나 반항하는 자녀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누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부엌 식탁에 와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것이 당신가정의 기도 시간이 될 것이고 가족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2008년 7월 3일 목요일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와는 연결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는 교제를 나누지만 다른 신자들과는 교회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예수님의 몸 중에서 머리외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몸이 한 지체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머리에서 팔 하나만 자라나온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팔 다리도 없고 장기도 없이 머리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더불어 있지 않고는 주님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머리 뿐 만이 아니라 온 몸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필요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필요에 의해 함께 짜여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 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전12:21).

이 구절의 후반부를 주의해서 보십시오. 머리도 다른 지체에게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몸의 어떤 지체에게도 ‘나는 네가 쓸데가 없다,’ 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되신 분이 기꺼이 자기 자신을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연결시키십니다. 더구나 그분께서는 우리가 다 중요하며 몸이 제대로 작용하는데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특별히 멍들고 상한 지체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힘주어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12:22).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전12:23)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런 지체들이 무척 존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움직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얼마나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지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크리스천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한다. 너는 그 몸의 그저 중요한 일개의 지체가 아니다. 그 몸이 기능을 발휘하는데 네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중요한 지체들로서, 신자들은 다른 신자들을 향한 사탄의 공격에 대적하여 스스로를 일깨워 진지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명령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믿는 사람이 고통가운데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물론 위로해주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경건한 사랑의 행위이기는 합니다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믿는 사람 모두가 예수의 이름으로 사탄을 결박하여 바깥 어둠속으로 던져버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몸의 진정한 지체라는 증거입니다.

2008년 7월 2일 수요일

하나님의 보살핌에 맡김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는 민족들이...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눅21:25-26).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내게 소망을 두지 않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공포에 질려 죽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그 자녀들을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영광스러운 해방이 있습니다. 사실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다음의 비밀을 붙들 수만 있다면 다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두려움으로부터의 참 해방은 우리 삶을 주님의 손길에 완전히 맡겨 버리는 데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돌보심에 맡기는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분의 권능, 지혜 그리고 자비하심 아래 맡겨서, 그분의 뜻대로만 인도하심을 받고 보존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하면,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피난처를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모든 악으로부터 지켜주시며, 전적으로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셨을 때 이 거룩한 맡김의 궁극적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영혼을 떠나보내시기 전에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그리스도께서는 문자 그대로 그의 생명과 영원한 미래를 아버지의 손길에 맡겼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양떼에 속한 모든 이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길에 맡기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의아해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을 권세도 있고 또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하시지 않았는가?(요10:18) 그분께서 다시 얻을 권세도 갖고 계셨는데, 왜 그 생명을 하나님이 보존하시도록 맡기셨다는 말인가?” 그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분의 양 떼가 다 그렇게 따르도록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어떤 자에게 맡기라고 요구받는다면, 그 사람이 우리를 모든 위험과 위협과 폭력에서 지켜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 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2008년 7월 1일 화요일

보좌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

이 천상의 장소는 당신이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의지력을 발휘하여 갈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보좌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산 제물로 드리는 방법뿐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부당했고, 시험을 받았으며, 핍박당하고, 매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파선 당했고, 돌에 맞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염려들을 감당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한다”고 증거 했습니다.

그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이 천국 여정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 알기 원하십니까? 어떤 형편에서 처해져도 만족하고,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안식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알기 원하십니까? 여기에 그 길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천국에서의 지위를 누리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오직 내 자신의 뜻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나는 자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산”이란 희랍어 단어의 어원은 “한평생 지속되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구속력 있는 헌신, 평생에 한번 드리는 제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제사는 죄를 대속하는 제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제사만이 유일하게 합당한 대속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그것이 아니라, 바울은 다른 종류의 제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은 구약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사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히10:6). 왜 이 제사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그 제사들은 마음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묘사하는 제사는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시는 것으로 그 이유는 바로 그 제사가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뜻에 대해 죽는 것이요, 우리가 스스로 충족하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야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 몸을 드리라”고 권고하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 전체를 주님께 바치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스스로 충족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부활한 자녀로서,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거룩하며,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용납된 자녀로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뜻을 주님께 의탁하는 그 순간, 제사가 드려진 것입니다. 당신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포기할 때 이 일이 일어납니다. 이 믿음의 행위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영적 예배 (합당한 예배)”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공급하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우리의 뜻을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