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9일 금요일

삶을 통하여 하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그분의 전으로 불러 모으는지, 어떻게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구원하시는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은 삶을 통하여 하십니다.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밝히는 빛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종들이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가정에서, 동네에서, 도시에서, 직장에서 빛을 발합니다. 이러한 생명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결국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본으로서 비난받을 여지없이 올바로 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종들은 정직하고 이기심이 없고 자신 안에 조금도 어두운 부분이 없이 일을 처리합니다.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된 삶을 살며 항시 남을 섬길 태세가 되어있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종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롬2:18-19). 바울이 묘사한 이런 성도야 말로 칭찬받을 만 합니다.

이러한 빛에 대해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뉴욕에 소재한 어느 회사의 CEO가 우리 교회에 전화를 했습니다. 닐 목사님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CEO는 닐 목사님에게 우리 교회의 교인으로 자기 회사에 근무하는 두 여인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두 여인은 다른 직원들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의바르고 미소를 띠고 남을 도우며 결코 불평이나 험담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다릅니다. 그 다른 점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당신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그들 직장에 놓아두신 하늘의 촛대입니다. 그들이 비추는 빛이 온 직장을 밝힙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직장의 보스가 이세상의 것을 초월한 그 무언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CEO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부흥회 초청장에 응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작성한 자료 패키지를 읽어 본적이 있을까요? 아니오, 쓰레기통에 모두 버리고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진정한 빛, 즉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진 생명으로부터 탄생하여 겸손한 두 여인의 매일의 삶으로 드러난 빛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에 만 우리 지역사회에 빛을 비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능력 있게 메시지를 전파하려면 전하는 그 메시지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빛은 삶의 사소한 일들을 통하여 비친다는 것입니다.

2008년 8월 28일 목요일

탕자와 그의 아버지

나는 탕자가 (눅15 참조) 그의 아버지께 돌아온 것은 그와 그 아버지사이에 지나간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의 아버지가 분노하고 앙심을 품으며 그 아들을 구타하고 그가 탕진해 버린 돈을 일전까지 남김없이 갚게 할 사람이었다면 그가 왜 그런 아버지께 돌아왔겠습니까?

탕자는 만약 그가 돌아가면 자신의 죄에 대해 비판을 받거나 비난을 당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 아버지는 내 죄를 내 앞에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다시 받아주실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다면,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얼마나 인자한 축복으로 앞서 나아갔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이 젊은이는 아버지께 집으로 돌아오는 노중에서 되뇌었던 충심에 찬 참회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얼굴을 마주하자 충분히 고백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달려와 껴안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뻐서 “아들아 사랑한다. 집으로 와 원래대로 회복되어라,”하며 쉴 새 없이 여기 저기 입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백을 마치기도 전에 이렇게 하였습니다. 아들이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아버지가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만 하인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내 아들에게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축하 잔치를 준비해라. 내 아들이 집에 돌아왔으니 모두 즐기자.”

이 아버지에게 죄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유일한 문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참회의 말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자신이 용납된 것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점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보다 크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롬2:4).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성령 안에서” 가라

당신은 “성령 안에서”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아직 까지 손길이 미치지 않은 민족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당신의 은밀한 골방이 온 나라에 걸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본부가 될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악한 소돔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창18:26).

아브라함은 이를 듣고 주님과 협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18:28) 아브라함은 이렇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주님, 그 오십 명의 믿는 자 중에서 마흔 다섯 명만 의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직 그들만이 기도로 구하는 자들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을 구하는 올바른 사람이 단지 열 명만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께 기도하는 자가 열 명밖에 없다면 그 도시를 용서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18:32).

이 구절은 주님에 대해 시사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그분은 의로운 자들을 한 무리만 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사회 전체를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 보다 한층 더 나아가십니다. 에스겔서 22장에서 하나님은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기도하는 단 한 명의 신자를 찾으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겔22:30).

에스겔이 예언할 당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며 세속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압제 하에 있었고 모든 면에서 곤핍하며 정욕으로 가득 차 피차 강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주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중보하기위해 무너진 데를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단 한 명의 중보자만 찾았을 지라도 나라 전체를 구원해 주셨을 텐 데 말입니다.

당신이 직접 외국으로 나갈 수 없다면 중보기도로 지원하는 모임의 일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자신을 드린 사람들을 지원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 여행에 대하여 글을 쓸 때 자신을 돕는 자로서 디모데와 디도뿐만 아니라 자신을 공궤했던 루디아와 또 다른 귀한 여인들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가 전 세계를 복음화 하는데 일조했던 헌신된 종들입니다.

2008년 8월 26일 화요일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라

예수님이 자신의 때로부터 종말의 때까지 지켜보시면서 엄청난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마9:37).

이 말씀을 읽으며 나는 궁금해졌습니다. “해결책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일꾼들을 길러내어 세상으로 보낼 수 있을까?”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이 일꾼들을 추수하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8).

당신은 “전 세계에 걸쳐 문호가 닫히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어떤 나라들이 아무리 폐쇄적으로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유럽에서 철의 장막과 아시아에서 죽의 장막을 찢어버리셨다면 그 무엇도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서 일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1980년대 우리 사역이 텍사스 주에 본부를 두고 있을 때 나는 1년 동안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누군가를 뉴욕으로 보내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시든지 모금하고, 회의를 소집하고, 후원자들을 모으는 일 등을 돕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 특정지역의 추수를 위해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동안 주님은 나의 마음에 부담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렬한 기도를 통해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안디옥에서 교회의 장로들이 추수를 위해 기도하던 중 일어났던 일 이었습니다(행13:2-6 참조). 바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은 기도 모임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얻은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안디옥의 경건한 사람들처럼 추수를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성령께서 지상에서 주님께 쓰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 마음 가운데 다급함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분은 도처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시고 자신의 사역을 위해 구별해 두십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한 백부장이 죽어가는 하인을 고쳐주시기를 구하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백부장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마8:13). 나는 추수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할 때 성령께서 어떤 곳의, 그 누군가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어느 곳이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사실은, 우리의 기도가 일꾼들을 추수하는 곳으로 보내는데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2008년 8월 25일 월요일

그들은 생명과 빛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 못합니다.

왜 우리 정부의 지도자들과 언론은 크리스천들에게 그토록 경멸하는 태도를 보입니까? 왜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모든 의미와 목적을 상실했습니까? 왜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자신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제쳐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대체적으로 교회가 더 이상 빛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사회에서 다스리고 계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위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전에서 그리스도와 진정한 연합을 이룬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하늘과의 교제가 극히 미미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속적 방법을 거부하는 목회자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위가 어떤 영향을 미치려면 그 권위에 항복하고 순종하는 그릇으로서 사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왕 시대의 바벨론 왕국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는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가 그 뒤를 잇는 모든 왕이 그보다 열등하고 힘도 약하고 영향력도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진짜 통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제국 배후의 권세도 그가 세운 금 신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권위는 하나님께 속한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주님은 은밀한 천상의 정부를 세우셨고 다니엘과 세 명의 히브리 소년들이 다스렸습니다. 이들이 천상의 영역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시스템은 어떤 것이라도 거부하였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에게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거룩한 사람들은 시대를 알았습니다. 어느 때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라 전체를 비추는 밝은 빛이었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 아람이 이스라엘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분쟁의 때에 엘리사 선지자는 집에 앉아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밀한 정부였고 그는 권위 있게 다스렸습니다. 엘리사는 주님께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메시지를 보내 아람 군대의 모든 움직임을 경고하여 주었습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가 메시지를 보내 훼방하는 것을 알아내고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선지자의 고향을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셔서 엘리사는 그들을 이스라엘 군영으로 인도해 포로로 잡았습니다. 엘리사는 빛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모든 움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8년 8월 22일 금요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제한함(Limiting)

“그들이...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limited, KJV)하였도다”(시78:41). 여기에서 쓰인 limited 는 두 개의 어근을 가진 말입니다. “형적을 긁어내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을 슬프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limiting God 의 의미는 선을 긋거나 원을 그려놓고 “하나님은 이 안에 계신다. 이것을 넘지 않으신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믿는 자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규모에 대해 마음속에 아주 작은 형적이나 개념을 표시해 둡니다.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작은 원을 그려 그리스도를 제한하고 유대인들에게만 한정시켰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한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제한하는 우리의 작은 원을 지속적으로 타파하시고 항상 최대한으로 뻗어나가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약 40년 전 순복음주의자들은 성령 세례를 그들 자신만의 운동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대다수 순복음주의자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교회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순복음주의 설교자들은 죽어있는 주류 교단에 대해 애통하며 “저들은 우리와 같은 충만한 복음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불시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이 그려놓은 원을 터뜨려 버렸습니다. 성령이 모든 교단을 망라하여 믿는 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쓴 책이 John L. Sherrill의 “They Speak With Other Tongues(그들은 방언으로 말하였다)”입니다.

주님은 또한 내가 저술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십자가와 칼날)”을 사용하셨습니다. 특별히 캐톨릭 교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헌데 베드로와 초대교회마냥 나 자신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이 내 마음가운데서 역사하시도록 내어드려야만 했습니다. 나는 순복음주의자로 양육 받았는데 난생처음 신부님들이 죄를 자각하여 예수님께 울부짖으며 흐느끼는 것을 보았습니다.

곧 이어 복음주의적 설교자들이 나와 다투었습니다. “캐톨릭의 마리아 숭배 사상을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역할 수 있습니까?” 나도 베드로와 같은 답변을 하였습니다. “나는 마리아 숭배 사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캐톨릭 교회에도 굶주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님들 가운데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그분의 영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도처에 자신의 백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보잘 것 없다거나 불결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미미한 존재로 묘사하지 않도록, 또한 우리의 미약한 생각 안에 가두어놓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2008년 8월 21일 목요일

티나 주름 잡힌 것 없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결코 인정을 받거나 용납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위해 산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먼저 당신을 격리시킬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그분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갑자기 당신은 비난을 받고, 거부당하고 악하다고 불리어질 것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눅6:22).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이 진정한 성취로 가는 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다시 말해서 “네가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를 위해 너의 모든 것을 팔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진정한 기쁨, 평강, 만족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내 교회는 점이나 주름 잡힌 것이 없다. 그러므로 네가 나에게 오려면 자진해서 모든 죄를 내려놓아야만 한다. 나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어야만 하고 네 자신과 경건치 못한 야망과 자아에 대해 완전히 죽어야만 한다. 믿음으로 너는 나와 함께 장사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킬 것이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티는 얼룩입니다. 그렇다면 주름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주름”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것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개념에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추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름은 복음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리스도께 온전히 항복하지 않고 천국을 얻는 쉬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런 종류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설교는 단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러한 설교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 사역을 이루지 못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설교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목자로서 나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단순히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우리의 삶을 내려놓으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무시해 버린다면 진정한 필요는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필요는 자신에 대해 죽고 그분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채워집니다.

2008년 8월 20일 수요일

회개를 전파하셨다

예수님은 “내 교회는 수치심 없이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곳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사도 바울도 증언합니다.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하니“(롬10:8-11).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공개적인 회개의 고백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고 선언하시고 회개를 통해 우리가 치유되고 회복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1-32).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교회에서는 누구나 회개를 통해 치유 받는다. 너희가 누구이든지 상관없다. 육체가 상하였든지 정신적으로 병들었든지, 영적으로 아프든지 아무런 상관없다. 모두가 같은 길로 나에게 와야만 한다. 그리고 모두가 회개를 통해 고침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을 앞으로 나와 회개하라고 제단을 제공해 주는 교회가 얼마나 됩니까?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제단으로 초청하는 이 중요한 영적 사역을 멈추어 버렸습니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죄를 고백해야할 필요에 대해 무감각해져 버렸습니까?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사복음서에 걸쳐 이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교회에서 전파하는 말씀이 여기 있다. 이것이 모든 죄인에게 주는 나의 메시지이다.”

“예수께서 갈리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15). 이것이 예수님의 기록된 첫 말씀 입니다. 그분은 회개를 전파하셨습니다.

어떤 크리스천에게는 이것이 지나친 말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예수님이 얼마나 강도 있게 회개를 전파하셨나요?”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에 그 답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듣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5).

2008년 8월 19일 화요일

자신의 원 그리기

그리스도안에서 성장하지도 않고 성숙하지도 않는 것 같은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을 평가하면서 당신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을 그의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의미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원을 그려놓고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그 원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의 예수님은 너무 작고 너무 빠듯한 반경에 싸여있기 때문에 그분의 영이 어쩌면 더욱 깊숙이 은밀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을 당신이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의 형적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역사하실 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약 35년 전 셀레스트 호바쓰(Celeste Horbath)라는 매우 평판이 나쁜 여인이 브루클린에 있는 Teen Challenge에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 여자는 전국에서 가장 이름 있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성매매 조직을 운영하는 뉴욕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마담이었습니다. 셀레스트는 순복음주의 가정에서 자라났고 기도에 힘썼던 그녀의 할머니는 그녀가 복음전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셀레스트는 교회에서 양육 받았던 것을 저버리고 성매매에 뛰어들었습니다.

셀레스트의 성매매 조직이 확장 되면서 그녀는 마약 중독에 빠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밤 그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루만 더 버티게 해주십시오.” 결국 셀레스트는 체포되었습니다. 이 뉴스는 전국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오빠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너는 우리 가족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너는 도저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외로움이 극에 달했을 때 셀레스트는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깨어졌습니다. 그녀 안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 즉시 그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외부에서 셀레스트의 삶을 보았던 모든 사람은 그녀에게 철저히 소망이 없고 도저히 변화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제한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전 생애에 걸쳐 역사하신 성령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셀레스트의 삶을 단지 보잘것없고 불결하다고 여겼지만 주님은 그녀 안에서 복음전도자를 발견했습니다.

셀레스트는 형이 선고되기 직전 Teen Challenge에 모습을 나타냈고 우리는 그녀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형기를 보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지내는 동안 수많은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형기를 마친 후 그녀는 능력 있는 길거리 전도자가 되었고 롱아일랜드에 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도 그 교회의 회중은 불같이 뜨겁습니다.

2008년 8월 18일 월요일

경외와 존경

성경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길러나가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은 경외와 존경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훨씬 더 초월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시36:1). 다윗의 말은 “내가 죄에 탐닉하는 자를 볼 때, 저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 말한다. 그는 죄에 대한 진리나 거룩 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인즉, 경건한 두려움은 악한 시대에 승리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두려움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예언으로 대답해 줍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32:39-40).

이것은 주님이 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거룩한 두려움을 공급하실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초자연적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우리 마음속에 떨어뜨려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그분의 두려움을 넣어주십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두려움이 심겨진다는 뜻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의식적으로 결단할 때 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에스라에게 경건한 두려움이 이렇게 임하였다고 말해 줍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7:10).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단지 구약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신약과 구약 모두가 경건한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7). 마찬가지로 신약도 선포합니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리라”(롬3:18). 바울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2008년 8월 15일 금요일

숨겨져서는 안 되는 빛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사역을 훨씬 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일, 말씀을 전파하는 일,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일 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주 명백하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너희는 단순히 반사된 빛이 아니다. 너희는 그저 연결 통로가 아니다. 너희는 바로 빛 그 자체이다. 그리고 너희 빛의 조도는 너희가 나와 동행하는 강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함축된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세상은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을 알아봅니다. 당신의 이웃이나 직장 동료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와 매일 나누는 교제나 그분에 대한 믿음, 그분을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것 등에 대해 알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분과 함께하는 삶으로 인해 당신에게서 나오는 빛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삶을 방해받지 않는 한 당신의 빛은 어둠속에서도 계속 비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를 세상에 전시물로 두었다. 내가 너희를 구경거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들여다보고 있다. 너희는 숨겨져서는 안 되는 빛이다.”

그렇다면 산위에 세워진 빛이란 누구 입니까? 어디서 그들을 볼 수 있습니까? 통상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 중에서는 찾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기위해 사는 이기적이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또한 거룩한 체 하지만 가십과 불평과 원망을 일삼으며 스스로 중요하다고 일컫는 교회의 그룹 가운데 있지도 않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외견상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사실은 영적으로 게으른 신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이렇게 하는 것이 겸손인 양 여기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패와 연약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데 재빠릅니다. 그들에게는 진실하고, 베풀고, 사랑하는, 종과 같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습니다. 정반대로 그들이 가진 “빛”은 실제로는 어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3). 그리스도의 삶이 없는 곳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빛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 빛이 세상에 비치게 하여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008년 8월 14일 목요일

빛 그 배후의 생명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님은 과거에도, 지금도 세상의 빛입니다. 요한은 빛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에 의해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가 소유했던 생명이 세상에 비치는 빛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은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성경이 말하는 “빛 그 배후의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대부분 우리들은 이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안에 육체로 나타난 영원한 실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영존을 부여하는 그분의 권능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합니다. 그가 “생명”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예수님이 실존하셨던 전 생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처럼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분의 삶이 우리에게 알려지고 경험되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자신의 삶과 연관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나를 어떻게 연관시키는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행하시고 만지시고 말씀하신 친절하고 사소한 일들에 기뻐합니다. 나는 그분이 매일 행하신 일, 말씀 그리고 아버지와 동행하신 일들을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과 나사로의 우정을 생각해 봅니다. 장기간의 사역 후에 무리를 떠나시는 그분을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 마르다와 나사로의 집에서 쉬시는 그분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팔에 안고 축복하시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 이미 성인이 되셨지만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분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경멸당하고, 사랑스럽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생각해 봅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그분의 동정심과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는 그분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사랑과 종으로서 섬겼던 사역을 전부 기록한다면 책이 모자랄 것입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을 연관시키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바로 빛된 삶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2008년 8월 13일 수요일

약속에 편승하여

하나님이 앞서 실행하시겠다는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와 주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시21:1-2).

당신은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다윗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일생의 가장 험난한 공격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부상당하거나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

다윗이 대답합니다.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21:3){영접하시고(Thou preventest)KJV}. 다윗이 하는 말은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것입니다. “나는 나를 죽이려고 온갖 힘을 쏟는 강력한 군대에 대항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평안하다. 왜 그럴까? 주님이 내가 고투하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내게 부어주셨다. 나의 대적으로 인해 비틀거리거나 넘어질 수도 있다.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저 일어서기만 하면 그분의 힘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나서 전투에 임하기 직전에 다윗은 믿음의 선언을 했습니다. “순금 관을 그의(나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21:3). 다윗이 여기서 말한 순금 관은 승리와 주권의 상징입니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편승하여 전쟁터로 갈 것이다. 그분은 내가 승리의 관을 쓰고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앞서 실행하시는 선함”에 대한 교리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고투, 죄와 육과 마귀와의 싸움을 예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와 선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빚을 만기가 되기도 전에 청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정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서 실행하시는 선함은 특별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죄에 대해 놀라는 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주님은 비록 우리가 잠시 낙담하게 될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의 빚을 지불해주셨기 때문에 꼿꼿이 서서 전쟁에서 빠져 나올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십니다.

2008년 8월 12일 화요일

“앞서 행하시는(Preventing)” 사랑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21:3){영접하시고(Thou preventest)KJV}. 얼핏 보면 다윗이 쓴 이 구절은 약간 의아해 보입니다. “prevent”라는 단어는 보통 축복이란 말보다는 방해와 연관이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말로는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다윗을 훼방하시고”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언어로 “prevent”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냅니다. “기대하다, 앞서가다, 앞서 보고 미리 이행하다, 만기가 이르기 전에 빚을 청산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거의 모든 경우에 무언가 즐거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이러한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살짝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필요를 예상하시고 미리 채워 주시는 데서 오는 즐거움입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65:24).

이 구절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묘사해 줍니다. 분명한 것은 그분은 몹시도 우리에게 복주고 싶어 하시고, 우리 삶에 그분의 인애를 이행해 주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시기에 우리가 필요를 아뢸 때 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는 최상의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시편21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미처 구하기도 전에 당신은 나에게 복과 인애를 부어 주셨습니다. 내가 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여주신 경이로운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일들로 인하여 다윗은 대적에게 승리하였고, 기도의 응답을 받았으며, 승리하는 힘과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다윗이 미처 기도하기 전에, 그의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전에 또 그의 구할 것을 아뢰기 전에 이루어주셨습니다. 다윗이 드디어 그의 마음을 쏟아 부었을 때, 그는 하나님이 적을 물리칠 모든 길을 이미 예비해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 다다르기도 전에 다윗은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2008년 8월 11일 월요일

우리의 초점

바울시대 때에 크리스천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예언적 사건들에 대해 더욱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포로를 잡아 노예로 삼은 침략군의 무자비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위험한 시기가 임박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 것인지 더 알려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때를 알 수 있는지 써 보내주십시오.”

바울은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말로 응답했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5:1-2).

바울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묘사해줍니다.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8).

바울은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권고하였습니다. 말씀의 요점은 “너희는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두려운 징조와 재난에 대해서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자신의 백성을 데리고 가시기 위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다.”

역사는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벌어지는 사건들의 빠른 물결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향하여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표류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아무리 악하고 불신에 빠져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일층 속력을 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의 신성한 사건”을 향하여 신속하게 움직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시는 일입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토록 최고의 주권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매일 매일의 뉴스 보도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전쟁이나, 전쟁의 소문, 핵 사고에 대한 가능성이나 세상에 닥칠 일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21:18에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초점을 두어야 할 곳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08년 8월 8일 금요일

우리 괴물들의 하나님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40:15).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욥41:1). {베헤못은 하마, 리워야단은 악어}

왜 하나님은 욥에게 이 두 개의 거대한 괴물을 생각해보라고 하시며 계시를 시작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욥에게 하마와 악어의 얼굴을 들여다보라고 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이런 문제를 제시하셨습니다. “자, 욥아, 하마가 너를 추격해 온다고 하자. 어떻게 하려느냐? 네 육신의 힘으로 쓰러뜨릴 수 있겠느냐? 못한다고? 그렇다면 말로 타일러보려무나.

자, 위협적인 악어를 보아라. 어떻게 그것을 다루려느냐? 이 짐승의 심장은 돌 같구나. 자비라는 개념도 없단다.“ 이것은 동물의 왕국에 대한 단순한 강의를 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인생의 ‘괴물들’에 대해 무언가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종에게 이 두 개의 무시무시하고 사납고 당해 낼 수 없는 짐승들이 욥의 인생에 격심하게 들이닥친 괴물 같은 문제들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마를 생각해 보아라.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밟아버린다. 욥아, 네가 처리하기에는 명백히 너무나 큰 문제이다. 네가 당해낼 도리가 없다. 네게는 그를 길들일 방법이 전혀 없다. 오직 나, 여호와만이 저런 괴물 같은 짐승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욥아, 악어는 또 어떠하냐? 저런 짐승과 싸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의 힘만 가지고 그것의 두꺼운 갑옷을 벗길 자가 없다. 네 영적 원수인 마귀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나만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 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그분은 욥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네 인생에 있어서 괴물들의 참모습을 직면해 보아라. 너희는 그것들을 다룰 수가 없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욥이 대답했습니다. “주께서는 전능하시고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습니다. 나는 하마나 악어를 대적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렇지만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확고부동하게 서서 주님의 구원을 보는 것입니다”(욥42:1-2 참조).

2008년 8월 7일 목요일

모든 전투의 승자

하나님은 당신이 모든 전쟁에서 그분의 힘으로 면류관을 쓴 승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21:13).

하나님은 어떻게 이러한 선하심과 인애의 복으로 우리를 영접하십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 에 그분의 기쁨을 심어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두려움-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나님이 잘라내 버리시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성령의 임재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몰아내버리십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기뻐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극소수의 크리스천만이 이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다수는 영혼의 안식이나 그리스도의 임재로 인한 평강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날개 아래 있다기보다는 진노의 심판아래 있다고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면서 상중에 있는 자들처럼 다닙니다. 하나님을 어느 때든지 그들의 등에 채찍을 내려칠 수 있는 가혹한 십장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망도 없이, 살았다기보다는 죽은 자처럼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문제는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뢰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갈보리에서 단번에 해결하셨습니다. 그분은 “너희가 이번엔 선을 넘어 버렸다,”고 되풀이해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태도는 정반대입니다. 그분의 영은 우리가 실패했을 때라도 아버지의 인애를 상기시키시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구애하십니다.

우리의 죄에 초점을 맞추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애를 우리에게 부어주기를 몹시 열망하시기 때문에 예정보다 훨씬 앞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분 자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우리의 실패와 죄를 회개할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언제 우리가 뉘우칠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기다리고 계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즉각 개입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자녀에게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기 원한다. 내 아들의 속죄의 피를 통해 내가 이미 그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6일 수요일

“푸름”의 중요성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계9:4).

“푸름”이 왜 우리 믿음에 중요할까요? 기억하십시오, 황충은 푸른 것은 무엇이나 해하지 말라고 명령받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황충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공격이 극심할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견고하고 푸른 나무처럼 당당하게 서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황충의 해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총망라한 지옥의 공격과 모든 전갈유의 쏘는 침에 대해 가장 좋은 방어책은 영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건강은 오직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의 약속을 신뢰할 때 옵니다.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전적으로 신뢰합니까? 당신의 모든 죄를 씻기 위해 그분의 피를 의지합니까? 당신이 비난을 받는다고 느끼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쓴다면 당신은 푸르지 않고 건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소원은 당신이 그분의 용서를 선물로 받고 그 안에 안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신뢰합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넘어질 때 마다 우리를 잘라 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잘하라고 요구하시며 항상 우리 어깨너머로 감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저 우리에게 “주님, 나는 당신의 말씀을 믿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씻어주십시오, 당신의 팔로 안아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며 오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전 생애를 두려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과거의 실패를 가지고 우리를 송사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회개했다면 우리는 죄를 씻는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로 덮여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20:7-8).

2008년 8월 5일 화요일

일어나 예비하라

“여호와께서...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기도로 하나님과 함께하고 믿음으로 일어나 싸우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사탄이 가장 질투하고 두려워합니다. 적은 숫자일지라도 믿음으로 허리를 동이고 싸움에 임하는 군대를 두려워합니다. 두발로 서서 대적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앞에서 움츠러듭니다. 그리고 당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당신의 사기를 중화시켜 떨어뜨리려고 책략을 꾸밉니다.

마귀가 쓰는 방법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불신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도록, 패배의식이 들고, 좌절하게 만들고 마음을 분산시키는 지옥의 생각들을 당신 마음속에 밀려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과 영에 대고 그는 소리칩니다. “더 이상 싸워봤자 아무 소용없다. 네 개인의 문제로 투쟁하느라 너는 너무 지쳐있다. 너는 결코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지옥의 권세는 너무 커서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는 쉬는 게 좋을 것이다. 더 이상 전쟁에 열심 낼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이 정신을 분산시키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전략은 당신이 십자가의 승리로부터 눈을 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자신의 약점, 죄, 부족한 점에 시선을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신이 현재 겪고 있는 문제와 고통에 더욱 불을 지릅니다. 당신이 계속 지탱해나갈 만큼 강하지 않다고 믿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이 중요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죽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우리 모두는 전투 중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 고요하고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영적 전투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님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만큼 강한 무기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이 견뎌내지 못할 무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즉, 기도, 금식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현재 고통으로부터 눈을 떼 내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눈을 들어 이 전쟁의 대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승리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무기를 너에게 공급해주었다. 그리고 네가 연약할 때 힘을 부어 주기위해 준비되어 있다.”

2008년 8월 4일 월요일

기쁘시게 하는 행함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기쁘시게 행하려면 무엇이 필요 할까요?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2-13).

바울은 우리에게 여러 말로 이야기합니다. “이같이 중요한 시기에 너희에게 해 줄 말이 있다. 너희가 아는 험난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고려하여 너희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가? 나는 인내심이 늘었는가 아니면 성격이 더 급해졌는가? 친절하고 온유해졌는가 아니면 더욱 심술궂고 더 따지고 드는가? 더 온화해지고 용서하는가 아니면 더욱 불만에 싸여 원한을 품는가?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가? 가까운 사람들의 약점과 잘못을 잘 참아주는가 아니면 나만 항상 옳다고 고집하는가?”

바울은 다가오는 날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이 성취한 일이나 자선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 합니다. 당신이 낯선 사람을 얼마나 친절하게 대했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든지 상관없이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당신은 더욱 사랑하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용납합니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점검한다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행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저 “나는 이런 성도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결단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을 점검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께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견주어 우리 자신을 측정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나서 성령께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구합니다.

2008년 8월 1일 금요일

솔개를 쫓아버리라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영광스러운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족장에게 암소와 암염소를 가져와 둘로 쪼개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또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가져다 머리를 맞대어 땅에 놓아야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시를 따라 행했고 이 짐승들이 피를 흘리며 땅에 놓여 있을 때 솔개들이 사체위에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아브라함은 큰 흑암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흑암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탄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삶을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당신의 것이 되려는 것을 볼 때 사탄이 어떻게 반응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마귀는 질투에 불타 격노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님과 함께 끝까지 동행하리라고 굳게 결단하는 것을 볼 때 그의 반응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지옥 전체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솔개가 내려앉으려고 할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은 그가 솔개들을 쫓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도 우리에게 위협적인 솔개들을 다루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강력한 전쟁 무기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이 들거나 의문스러운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릴 때, 나의 사랑하는 주님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에 그것을 견주어 보아야만 합니다. 어떤 생각이든지 그것이 단지 내가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에 기초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생각들을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나를 위해 쟁취한 승리에 대하여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에 견주어 측정해 보아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내게 비난하는 생각들이 들어와 그것이 의심과 공포심을 야기하거나, 책망한다거나, 또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거나 하면, 나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무서운 생각들이 들이 닥칠 때를 대비해야만 합니다. 광야에서 시험 당하실 때 주 예수님조차도 예외 없이 원수로부터 온 이런 생각들을 겪으셨습니다.

솔개가 당신이 합당치 못하다거나 불안감을 야기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에게 내려앉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쫓아버리십시오. 주님의 인도로 당신이 드린 희생 제물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은 그것을 존중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