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30일 금요일

성령의 증언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5:6).

성령의 내재적 증언이 나로 하여금 조용히 있지 못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내안에서 성령이 일어나시기에 나는 말해야만 합니다.

성령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드러내시려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분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우리의 거룩한 조상들은 믿는 자들 안의 이 성령의 사역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증언을 갖고 있음”에 대해 많이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 진리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사실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령의 증언은 실제적으로 들어볼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과거 어느 때 보다 성령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더 필요합니다! 사탄은 할 수 만 있으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조차 속이려고 뻔뻔스럽게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왔습니다. 거짓 교리, 거짓 교사, 거짓 복음들과 같은 그의 사악한 유혹은 더욱 극성스러울 것입니다.

성령의 내재적 증언은 “평강의 법칙”에 의해 작동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당신의 평강이 동요될 때 성령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영속에 동요가 있을 때 - 심중 깊이 흔들림과 소란이 있을 때 - 하나님은 무언가 거짓된 것이 있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중입니다. 당신은 그분이 당황하심, 즉 그분의 비통과 분노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3:15). 감춰진, 회개하지 않은 죄가 믿는 자에게서 소중한 평강을 앗아갈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죄의식, 비난과 두려움으로 갈가리 찢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단 두마디 말씀을 그에게 하실 것입니다. “회개하라! 도망쳐라!”

그렇습니다. 성령은 당신을 교정하기 위해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죄, 의와 심판에 대해 당신과 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지시를 내리실 때, 즉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는 성결하지 않은 그릇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죄를 고집하면 - 죄를 고백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으면 - 당신의 마음은 줄기차게 거짓말의 물줄기를 당신에게 대놓을 것입니다. 당신의 죄 가운데에서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가르침들을 듣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내 문제들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닐 것이다. 마음에 찔림을 받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완전히 길을 잃게끔 될 것입니다!

이사야는 올바른 하나님의 조언을 갈망한다고 주장하며 다니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사5:1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들 마음속에 기만이 있어 결국 그들의 모든 조언은 비뚤어졌습니다. 죄가 그들의 판단이 왜곡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악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순결한 것을 그들은 불의하다고 불렀습니다. 그들에 대해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있을진저”(사5:20).

2009년 1월 29일 목요일

아버지 사랑 안에 안식 하십시오

당신의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작스레 “나한테 화났어? 내가 뭘 잘못했니?”하고 물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아마 깊은 생각에 잠겨 조용히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니. 나 화나지 않았어. 네가 나한테 잘못한 것 없어. 나는 지금 그냥 조용히 있었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추궁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어?”

“아니, 네가 잘 못 말한 것 없어. 다 괜찮아.”

마침내 그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 당신을 그를 포옹해야 합니다. “자,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화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러면 나를 화나게 만들고 말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처럼 우리 하늘 아버지를 대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자신의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 한 번 생각해보자, 오늘 어떻게 예수님을 슬프게 해드렸나? 오늘 무엇을 잘못 했지? 무엇을 잊어버리고 안했지? 나는 정말 엉망진창이야. 주님이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는지 몰라. 주님, 한 번 더 용서해 주세요. 언젠가 잘 순종할 거예요. 그때에는 주님이 저를 사랑하시기가 쉬울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품에 안으시려고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자신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원하시고 당신이 그분의 사랑 가운데 편히 누워 쉬기를 원하십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맞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새 옷을 받고 그의 아버지의 식탁에서 먹으며 완전히 용서받았습니다. 이 아들이 한 가지 알았던 점은 그의 아버지 집에서 그가 안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참아주고, 같이 일하고 사랑할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 대해서 우리 하늘 아버지도 이와 같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길을 헤매든지 우리에게는 돌아갈 길이 늘 열려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엡1:6)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분은 자신들에게 열려있는 길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품에 안기위해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2009년 1월 28일 수요일

나는 너무 적은 것에 만족함으로 하나님을 제한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시고 싶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분의 갈망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말3:10)는 것입니다. 그분은 꽉 들어찬 창고 안에 서서 말씀합니다. “나는 주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로부터 받을 사람이 너무 적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도록 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그분이 이미 행하시고, 주신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다고 생각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에 앉아 하나님의 임재로 복을 받는 것에 만족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만족한 스폰지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흡수하지만 그분이 섬김을 위해 그들에게 기름붓기 원하실 때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기적들에 놀랐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해 앞으로 이보다 더 큰일을 준비하시고 계시다!” 우리들 대부분은 제자들과 같습니다. 한 가지 기적을 보면 남은 생애 동안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되시도록 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방, 주, 연방정부 기관들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이 실각시키실 것을 믿으며 믿음으로 천상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추락시켰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우리 도시가 흠뻑 적셔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를 겨냥한 모든 무기에 대항하여 일어섰을 것이며 우리 가족들과 교회들안에 있는 사탄의 견고한 진들을 무너뜨렸을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무한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위하여 이보다 더 큰일들에 관하여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2009년 1월 27일 화요일

그분이 알려지기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알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이 가르치는 대로 볼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분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대로, 즉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알고 보기 원하시는 대로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과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분이 알려지기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의 아들을 다음과 같이 보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예수님은 선물 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자원들을 예수님 안에 포장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한 선물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로 보십니까? 당신은 그분을 당신이 기쁘게, 승리하며 의롭게 평강과 안식으로 충만하게 사는데 필요한 전부로 보십니까?

옛적, 당신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당신의 상처와 필요가 어떠할지 아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앞서 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정답을 요약해서 당신에게 규칙서를 보내거나 “답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위기와 필요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한 사람, 한 길, 한 정답,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내일을 위해 살기 원치 않는다! 너는 다만 뒤돌아보며 오늘이 너의 가장 최고의 날일 수 있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그분 자신의 모습 보다 너에게 더 나아지거나 더 강해질 수 없다. 오늘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도록 해주지 않겠니?”

2009년 1월 26일 월요일

그분의 음성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보다 그분의 음성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당신에게 말씀하기를 갈망하신다는 것을 당신이 절대적으로 확신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이전에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들을 말씀해주시기 위해.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에게 다음 세 가지가 요구된다고 믿습니다:

1.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기 원하신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 당신은 이에 대해 온전히 납득하고 확신해야 합니다. 진실로 그분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은 절대로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2. 양질의 시간과 고요. 당신은 하나님과 기꺼이 따로 떨어져 있고 다른 목소리들을 잠잠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하루 종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 삶속에 무언가를 이루기 원하셨을 때 그분의 음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목소리를 폐쇄해야만 그분의 음성이 왔습니다.
3. 믿음으로 구하기. 그분의 온전한 뜻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분이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온전히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을 포함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놀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원수가 당신을 속이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평강이 따르고 사탄은 그 평강을 위조할 수 없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2-5).

2009년 1월 23일 금요일

당신이 서있는 장소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는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과 성품에 대해 더욱 큰 계시를 그에게 주시려고 했습니다. 이 계시는 우정이나 친밀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모든 그분의 백성이 알기 원하시는 계시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출33:19).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출33:20-22).

이 구절에서 영광의 히브리어는 “내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자신이 네 가까이 지나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번역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반석 틈에 너를 숨기고 내가 지나갈 때 까지 내 능력의 보호함으로 너를 방어해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빛을 거슬러 심각하게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 우리는 넘어진 상황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리어 반석 틈에 숨겨지기 위해 재빨리 예수님께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기록합니다. “우리 조상들이....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1,4).

하나님이 그분자신에 대해 모세에게 주신 위대한 계시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마음속으로 성화해야 할 그분에 대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출34:1,2, 5-7).

여기 더욱 큰 계시 즉,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온전한 묘사가 있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아침에 이 반석으로 올라와라. 너를 지켜줄 소망을 너에게 주겠다. 네가 이전에 전혀 본적이 없는 내 마음을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주님께 간청했던 “영광”이 무엇이었습니까?

영광이 여기 있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는 그 영광이 온전히 발현된 분이십니다. 진실로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아들안에 성육신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2009년 1월 22일 목요일

감사의 때

이 감사라는 주제가 최근 개인적으로 심히 중압감을 느끼는 가운데 내게 다가왔습니다. 그 당시 우리 교회 건물은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했습니다. 교구민들의 문제는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모종의 시련을 겪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사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자신에 대해 연민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이 불 가운데 두실 겁니까?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들에 대해 기도해야 당신이 일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언제 저에게 응답하실 건가요?”

갑자기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나는 부끄러워졌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감사하기 시작해라, 데이빗. 내가 과거에 너에게 해주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하려는 것에 대해 나에게 감사제를 드려라. 내게 감사의 제물을 바쳐라 그러면 갑자기 모든 것이 달리 보일 것이다!”

이 말씀들이 내 영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궁금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감사제‘란 무슨 뜻일까?” 나는 성경에서 이 구절을 찾아보고 내가 발견한 모든 참조 구절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시107:22).
-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116:17).
-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95:2).
-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피의 희생 예물을 아버지께 드리신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결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속죄의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편 100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주님의 궁정에 감사와 찬송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마리 “염소”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호14:2). 여기서 “수송아지”는 우리의 입술 또는 말들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어로 이 구절의 정확한 뜻은 “우리가 어린 수송아지, 즉 우리의 입술을 드리겠습니다,”입니다.

우리의 감사제는 우리가 가져오는 염소 두 마리, 즉 우리의 입술 또는 목소리로 드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현존 앞에 네 감사의 말들을 가져오라. 나에게 너의 찬양을 말하고 노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더 이상 피의 희생이나 금과 은의 제물을 가져오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찬양과 감사의 희생을 그분께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입술의 열매”가 깊은 사의와 감사입니다.

2009년 1월 21일 수요일

맞는 노래 - 틀린 편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시험을 겪고 있을 때 그 와중에서도 진정 깊은 사의와 감사를 표명해야 했을까요? 그들이 포위되어 소망이 없는 가운데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이 그러한 반응을 보이기를 정말 기대하셨을까요?

네,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비결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과 시련에 압도당해 있을 때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원하십니다.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우리가 그분께 감사제를 드리기 원하십니다.

나는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훈계할 때 그가 이 비결을 발견했었다고 믿습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그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포기하지 마라. 네 마음속에 제단을 쌓고 네 시련 가운데에서 기쁜 감사제를 드려라.”

물론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주님께 찬양과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홍해의 틀린 편에서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백성들은 밤새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즐거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승리가 온 이후에는 누구나 감사하여 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던지신 질문은, “내가 도움을 보내기 전에- 너희가 아직 전투 중일 때- 너희는 나를 찬양하겠느냐?”였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홍해 이편, “시련의 편”에서 즐거워하였다면 마라의 물에서 다시 시험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들이 홍해의 시험을 통과했더라면 마라의 물은 쓴맛이 아니고 단맛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목마른 채 지내지 않고 사막 모든 곳에서 물이 샘솟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시련의 시험이 진행되는 편에서 맞는 노래를 우리가 부르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늘 아버지께 최고의 환희를 가져옵니다.

당신은 지금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노래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주님께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전에도 나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기쁨가운데 안식합니다.”

2009년 1월 20일 화요일

감사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의 하나를 베드로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 믿음이 시험을 받아야 하는 필요에 대해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같은 구절에서 베드로는 그러한 믿음의 시험에 직면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예상해야 할 지 말해 줍니다.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v.6).

여기에서 쓰인 시험이란 말의 희랍어는 “입증하는, 검사하는, 어려움과 역경으로 시험하는”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심한 시련과 시험을 겪게 될 것이다. 혹독하게 시험 당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너의 믿음은 나에게 소중하다.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의 부 전체 보다 더욱 중요하다. 원수가 온갖 형태의 악을 너에게 보내는 이 말세에 나는 네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굳건히 설 수 있기를 바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모든 캄캄한 날을 지날 때 나는 너를 지키고 복줄 것이다! 네가 할 일은 단지 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너는 믿음을 통해 내 능력으로 보호를 받을 것이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v.5).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벧후2:9).
여기에서 쓰인 시험이란 말의 희랍어는 “역경을 견뎌내는 지 본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기록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명백히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가운데 두시기 원치 않습니다. 그분이 왜 우리를 시험과 시련가운데 두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그분의 자녀를 시험함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아니라 우리 시험의 결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시련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 시험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학교에 다닐 때 어떻게 마침내 그곳에서 벗어났습니까? 최종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벗어났습니다. 통과하지 못했다면 당신을 다시 교실로 돌려보냅니다.

바로 하나님이 옛 이스라엘을 홍해로 이끌어 내셨을 때가 이런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고 시련을 주고 검증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파멸하기 직전까지 몰아 가셨습니다. 양쪽의 산으로 그들을 포위하고 한쪽은 바다요 다른 쪽에서는 적군이 다가오는 상황으로 그들을 둘러 싸셨습니다.

한데 주님은 어떤 반응을 기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그 상황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기 바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병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셨는지 기억한다. 우리가 짚도 없이 벽돌을 만들며 쉬지 못하던 시련의 용광로에서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이끌어 내셨는지 기억한다.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또 다시 하실 것이다! 그분의 신실하심 가운데 즐거워하자.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이행하실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대항하여 오는 모든 대적으로부터 그분이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2009년 1월 19일 월요일

하나님 알기

나는 아주 충격적인 발언을 하고자 하는데 단어 하나하나 모두 진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분이 내가 그분을 알기 원하는 방식으로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다정하게 속삭이셨습니다. “데이빗, 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그분을 정말 알지 못한다. 너는 진정으로 그분이 너에게 하나님이 되시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한 백성을 - 다른 백성들보다 더욱 부하지도 않았고 더 똑똑하지도 않은 백성을 - 오직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출6: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는 너희가 내 백성이 되도록 가르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될 수 있도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고 나타내셨습니다. 그분은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들을 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구원을 이루시며 모든 약속을 이행하셨습니다. 하지만 40년간의 기적과, 표적과 기사 후에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너희들은 나를 모른다. 너희는 내 길을 알지 못한다!”였습니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95:10). 하나님은 “이 모든 와중에서도 너희는 결코 나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으로 삼지 않았다. 40년 동안 너희를 가르치려 하였으나 너희는 여전히 나를 알지 못한다 - 여전히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분을 자신들의 하나님을 삼아 진정으로 그분을 알고 그분의 길을 배우기 까지 하려는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limited, KJV) 하였도다"(시78:41). 이스라엘은 불신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 우리도 의심과 불신으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항상 경계와 한계가 있습니다. 적어도 한 작은 영역을 우리는 막아두고 이 부분만큼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떠맡으시리라고 진정으로 믿지 않습니다.

나는 치유 부분에서 가장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의 육체적 치유를 위해 기도했었고 하나님이 연이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나는 그분이 나에게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약을 복용하거나 의사에게 달려갑니다. 의사에게 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때로 나는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대하16:12)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는 사람입니다.

당신께 묻습니다. 당신은 중국이나 쿠바의 장벽을 허물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당신 자신의 가족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는 한 온스의 믿음도 없지 않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은 이것을 행하기 원치 않으시는 게 분명하다. 내 사랑하는 자는 아주 힘든 경우이다. 하나님은 이 문제만큼은 안 들어주시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길에 대해 무지합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엡3:20)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칠십인 장로들은 산 위에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먹고 마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에 대해, “너희들은 결코 나와 나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3년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고 밤낮으로 그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분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분의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와 찬양을 몇 시간 씩 반복해서 되풀이한다고 해서 그것들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의로운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가 그분을 알기를 갈망하고 그분의 길을 이해하는 자리에 이르지 못할 수 도 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아는 모든 사람이 그분과 아주 친밀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단지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만으로 그분의 길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분과 기도가운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고는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모든 필요와 간구를 그분의 손안에 내려놓고 거기에 놓아둠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는 질 높은 시간을 포함해야만 합니다.

2009년 1월 16일 금요일

자신의 한계에 도달 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한계에 도달했습니까? 지치고, 낙심하고 포기하려고 합니까? 다음 질문들에 네, 아니오 라고만 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고 세상 끝날 까지 당신과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분은 당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당신을 아버지 보좌 앞에 흠 없이 나타내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까?
-그분은 지속적으로 당신의 필요를 공급해주시겠다고 말씀 하셨습니까? 그분은 당신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필요한 모든 씨앗을 당신에게 약속하셨습니까?
-당신이 받는 것보다 그분은 더욱 기꺼이 주고자 하십니까? 세상에 있는 자 보다 당신 안에계신 그분이 더 위대하십니까?
-당신을 향한 그분의 생각은 선한 생각이십니까? 그분은 자신을 부지런히 구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입니까?
-그분은 당신을 위하여 영광 중에 거처를 마련하고 계십니까?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집으로 모아들이기 위해 구름가운데 오실 것입니까? 그분이 오실 때 당신을 그분과 함께 갈 것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당신의 대답은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이어야만 합니다.

이제 정리해보십시오. 스스로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시다고 믿는가 아니면 내 신뢰는 흔들리는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2-7).

당신은 하나님의 지혜, 인생의 문제들을 푸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를 붙들 수 있습니다 - 만일 당신이 이 약속에 당신의 전 생애와 미래를 던지고 흔들림 없이 믿는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지혜를....후하게 주십니다.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당신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불만에 찬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마음을 다하여는 “전심으로, 전력을 다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고후9:7). 사도는 이 연보하는 일을 두 가지에 적용했습니다. 곧, 우리의 금전적인 헌금에 관한 것과 우리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일에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의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걷게 해달라고 그에게 실제로 구걸하다시피 간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마게도냐인들은 주님께 온전히 헌신했기에 그들이 가난한 중에도 드렸습니다!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5). 바울은 마게도냐인들이 금전 그 이상의 것을 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여기 우리의 연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기를 자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의 형제를 섬기는 데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8:3). 그들은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넘어 많은 기도와 함께 드렸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이 오직 명령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드린다면 또는 “십일조는 신약의 개념인가 아니면 단지 구약의 개념인가?”하고 항상 궁금하다면, 당신의 마음 자세는 전혀 틀린 것입니다. 만약 목사님이 당신에게 요구했기 때문에 10%를 드린다면 그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중 어느 것도 그 핵심, 즉 드린다는 것이 의미하는 중심점에 이르지 못합니다!

당신이 자신을 주님과 그분의 사역에 온전히 드리고자 한다면 즐거이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이 구절은 나를 아프게 찌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종종 나의 삶과 사역에서 주님의 기쁨이 없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어떻게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이 오셔서 힘을 주셔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즐거워하는 영으로부터 솟아나야만 합니다. 이것은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가능하도록 열려있습니다.

즐거이라는 말의 희랍어는 “들떠서 법석대는, 즐거운, 반가운” -가벼운 마음, 기꺼움, 반가움, 들뜬 마음으로 가득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네가 무슨 수고를 하든지, 중보하든지, 내 집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또는 네 은밀한 골방에서 나를 찾든지, 즐거이 하라! 기뻐하고 모든 일- 너의 금전, 너의 섬김, 너의 시간, 너의 삶에 관용하라!”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지루하고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까? 대체로 당신을 슬프고 지치게 만들어 버리는 그저 부담스러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짐에 대해 당신이 불평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당신의 삶에서 그런 것들을 쫓아내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의 자원을 인출하는 당신의 수표책은 믿음입니다! 그분은 말씀 하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미 예비해 놓았다. 내가 필요보다 더 많이 공급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필요가 네 인생에 무엇이 있겠느냐?”

2009년 1월 14일 수요일

모든 일에 넉넉함

왜 수많은 신자들이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 없을 것처럼 연약함, 절망과 허무한 느낌을 체험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령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계시, 즉 믿음으로 청구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마련해두신 모든 예비하심에 대한 계시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바울의 풍요한 종에 대한 묘사, 즉 언제나, 모든 위기의 때에 필요한 모든 것, 그 이상을 소유한 자의 묘사에 들어맞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하늘 은행에서 인출함으로써 이것을 입증해보았습니까?

수년 간 나는 캐스린 쿨만과 사역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그녀의 모임에서 마음을 쏟아 설교했고 통상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기진맥진했습니다. 어느 날 밤 캐스린이 그웬과 내게말했습니다. “나가서 저녁을 먹읍시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너무 피곤합니다. 모텔로 가서 잠을 자야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데이빗, 오늘 밤 성령의 기름 부으심 하에 설교했나요?”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제단이 꽉 찼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캐스린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뭔가 놓친 것이 있어요. 만약 당신이 성령의 능력 하에서 사역한다면 시작했을 때 보다 예배가 끝났을 때 더욱 강해져야만 합니다. 그분은 생기를 주시는 영이시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당신의 육을 초월할 수 있어요. 성령에 의해 그 자유를 청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 이후로 나는 내 사역에서 그 진리를 입증했습니다.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여기서 넘치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계속 증가하다, 시작 보다 끝에 더욱 많이 갖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투가 강렬해 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증가 합니다! 연약함이 당신에게 임할 때 그분의 힘은 더욱 강하게 옵니다 - 당신이 그것을 믿는다면.

2009년 1월 13일 화요일

그분은 이미 예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역을 위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은 우리가 그일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예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이 구절은 단지 소망이 아닙니다 - 그것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능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당신의 필요를 만족시키는데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필요 보다 더욱 당신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풍성한의 의미입니다 - 계속 증가하는, 풍요를 넘는 공급하심!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3:20).

여기서 약속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낙심하고 지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어느 때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으로써 당신을 활기차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들어라 모든 목자여! 내 집을 성실하게 돌보고 기도, 찬양과 중보로 수고하는 모든 자들아 들어라! 나는 너희에게 풍성한 힘, 소망, 기쁨, 평강, 안식, 재정, 격려, 지혜를 주기 원한다. 실은, 나는 너희가 언제나 필요한 모든 것보다 넘치도록 풍성하게 갖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주님의 것들에 가난한 영적 거지가 되기를 의도하지 않으십니다. 정반대로 풍요한 종은 하나님이 그를 위해 마련해 두신 모든 엄청난 예비하심에 대한 계시를 누리는 자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계시를 쫓아갑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9-10).


바꾸어 말하면,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이 마련해두신 모든 엄청난 예비하심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시각, 청각 또는 상상 속에도 결코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도 이 일들에 대해 소경이 되어 우리의 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지낼 이유가 없다. 우리 눈이 봐야만 하고 우리 귀가 들어야만 하고 우리 마음과 정신 속에 들어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예비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해 주셨다!”

진정으로 성경은 우리가 이 계시를 위해 그분께 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이것을...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2-14절).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을 정말로 대면한 적이 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읽긴 했지만 다만 죽은 문자들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 예비하신 것을 계시해 주십시오. 당신의 자원들에 대해 내 마음과 내 영을 열어 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것들을 청구할 수 있도록 나에게 기꺼이 주어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고 합니다.”

2009년 1월 12일 월요일

풍요한 종!

최근 나는 많은 염려의 짐을 지고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기도 중에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분 앞에서 내 문제에 대해 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주님, 내 생애를 통틀어 이렇게 지친 적이 없습니다.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지쳤기 때문에 눈물이 내게서 문자 그대로 터져 나왔습니다. 울면서 누워 나는 “내 눈물이 분명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령이 진정 오셔서 나에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어떻게 하실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나는 동정, 격려, 이해를 원했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만 그 방법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주님은 고린도후서 9장 6-11절로 가라고 내게 친절히 가르쳐 주셨고 그 구절 안에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덮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혼동됩니다. 여기에 나를 돕거나 격려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드디어, 성령께서 나의 속사람에게 강권적으로 그러나 사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데이빗, 이것은 네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최근 너는 풍성하고 즐거운 마음 없이 나를 섬기고 있었다. 나를 섬기는 데 있어 네 기쁨과 행복이 어디 있느냐? 나의 말씀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 연보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내 몸에 대한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뉴욕 시로 불렀고 도움이나 풍부한 자원 없이 너를 보내지 않았다. 네가 필요한 모든 것 - 힘, 안식, 권능, 능력, 기쁨과 성원이 네게 주어져 있다. 네가 슬픔과 과중한 짐에 짓눌려 일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너는 모든 힘과 기쁨을 접할 수 있다!“

2009년 1월 9일 금요일

혼자 힘으로 일어나 싸우는 것을 배우십시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싸움을 싸우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해 어떤 다른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기도의 용사 친구가 있다면 전화를 걸어 “내 앞에 전투가 놓여있어요.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어요? 당신이 하나님께 영향력이 있는 줄 알아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입니다만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용사가 되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마귀와 대항할 수 있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삿6:16).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보냈다 -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을 무너뜨린 사람을 찾으려고 왔습니다. (삿6:28-30 참조). 기드온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는 숨어있었습니다 -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는지 의심하며. 기드온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13절). 우리 중 많은 사람도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서서 싸우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이 당신에게 온전히 납득되는 순간.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당신이 알아야할 모든 것은 보여주실 것이라는 것이 납득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합니다. 기드온처럼 당신도 의심할지 모릅니다. “내가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나는 약하고 경험도 없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삿6:14). “무슨 힘이요?” 당신은 묻습니다. 기드온의 힘은 그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싸여 있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똑같은 말-“내가 너와 함께 한다”-이 당신의 힘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으며 그에 의지하여 행할 때 당신은 그 힘을 받을 것입니다!

2009년 1월 8일 목요일

당신의 두려움과 불신을 처리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 깊은 죄는 여전히 불신이었고 그것은 온갖 종류의 두려움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의 뿌리를 드러내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선지자는 간단명료한 말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를 보아라. 일어나 싸우기를 무서워하여 숨어있는 겁쟁이 무리구나. 너희는 이미 포기했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하나님이 구원하신 역사가 있다! 그분은 너희 조상들이 그분을 신뢰했을 때 큰 승리를 주셨다. 그리고 너희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분을 믿지 않는다!”(삿6:7-10 참조).

많은 크리스천들은 마귀가 자신들을 파멸시킬까봐 공포에 질려있습니다. 그들은 실수를 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죄로 돌아가서 마귀가 제멋대로 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 구덩이에서 나온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당신이 이 삶을 살아나가며 공포에 질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당신이 두려움을 붙들고 있을 때 그것은 전염됩니다.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감염됩니다. 기드온이 군대를 집합했을 때,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군인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떠나 돌아가라....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삿 7:3).

하나님은 오늘 그분의 교회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묻습니다. “너는 왜 두려워하느냐? 내가 네 삶에 승리를 가져다줄 것을 신뢰하지 않고 죄를 짓느냐? 나는 너에게 대항하여 다가오는 모든 마귀의 권세를 무찌르겠다고 약속하였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거대한 돌로 바알신상과 아세라 여신상을 세웠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바알이 미디안에게 우리를 이기는 힘을 주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들의 신을 섬기면 우리에게 힘을 줄 것이다.” 수마일 떨어진 주변에서 미디안 사람, 모압 사람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그곳에 예배하러 왔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서 강력한 마귀의 견고한 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우상을 제거해버릴 때 까지 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헐고 찍어버려라!” 그래서 한 밤중에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삿6:27)하였습니다. 그는 수소를 끌어다 밧줄을 사용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헐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주었던 똑같은 메시지를 오늘날 그분의 교회에게 주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도와주기 원한다. 하지만 네가 나를 신뢰하지 않으면 도울 수가 없다. 너는 두려움에 차 있다. 내가 구원을 이루기 전에 너는 이 견고한 진, 항상 빠지는 이 죄를 헐어버려야만 할 것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12:1). 우리는 두려움과 죄의 모든 견고한 진을 헐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기드온은 힘센 수소를 이용하여 마귀의 견고한 진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드온의 수소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받았습니다(고후10:4-5 참조).

승리는 믿음으로 기도함으로 옵니다. 이것은 냉랭하고 공허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기도, 즉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6:18).

2009년 1월 7일 수요일

일어나 싸우는 법

교회에서 영적 전쟁에 대해 말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아직도 원수에 대항하여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제멋대로 까부르는 자들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당하는 모든 불운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주의, 불순종, 게으름의 많은 부분을 마귀의 탓이라고 그릇된 비난을 합니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세상에는 실제 마귀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계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을 그분의 옥좌에서 끌어낼 수 없다면 그는 당신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떼어내려 할 것입니다. 그는 예배자들을 불평하는 자와 신성모독 하는 자로 만들고자합니다.

사탄은 마음대로 당신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 주위에 화염벽을 두르셨고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벽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사탄은 크리스천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귀가 엿듣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하기를 두려워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마귀가 그들의 모든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소 불임하시며 전지 전능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육과 마귀에 대항하여 일어나 강건하고 싸움을 하라고 명령합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6:10).

당신은 마귀에 의해 제압당하는 데 대해 - 저급하고, 우울하며, 기쁨이 없고, 허무하고 쫓기는 삶에 대해 진저리를 내야만 합니다.

사사기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삿6:1-2).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형편없는 상태에 처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동굴과 습한 웅덩이에서 굶주리고 겁에 질려 무력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은 기드온으로부터 시작하여 전체 집단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어두운 동굴에 숨어있는 것에 염증이 나고 지쳤던 것입니다!

기드온이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이것을 견뎌야 하는가? 그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우리 땅을 휩쓸고 있다. 아무도 일어나 무언가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우리 조상들을 위해 움직이셨던 하나님이 계시다고 들었다. 한데 지금 우리를 봐라- 우리는 헐벗었고 아무도 돕는 이가 없다. 지속적인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기드온 안에서 무언가 불끈 솟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듣고자 기다리시던 바로 그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지나치다. 우리는 강하고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섬긴다. 왜 매일 매일 계속해서 이 학대를 당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이 온전히 역겨워할 때 까지 - 병들고 지쳐있는 것에 당신이 염증을 낼 때 까지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은 기드온이 했듯이 해야만 합니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우리는 이스라엘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을 섬깁니다. 만약 그분이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면 진실함 가운데 부르짖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2009년 1월 6일 화요일

불신의 기도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나는 이 기도에 상응하여 거울에 비친 형상, 즉 육에 기초한 기도가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불신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주님이 “그만 기도해라 - 무릎을 펴고 일어나라”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영이 당신에게 “그만 울고 눈을 닦아라. 왜 내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느냐?”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까?

주님은 바로 이 말들을 모세에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출14:15).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직역은 “너는 왜 내게 고함을 지르느냐? 내 귀에 들리는 이 시끄러운 간구는 다 무엇이냐?”입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이 말을 하셨을까요? 여기 한 경건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인생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에게 쫓기고 있었고 탈출구가 없었습니다. 대부분 크리스천들도 모세처럼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는 호젓한 언덕으로 올라가 홀로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그의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모세가 부르짖는 것을 하나님이 들었을 때, 그분은 그에게 “그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대해서는 성경에 명백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하나님은 아마, “모세야, 너는 내 앞에서 괴로워할 권리가 없다. 너의 부르짖음은 나의 신실함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이미 구원에 대해 나의 진지한 약속을 너에게 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행해야 할지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이제 울음을 그쳐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위기를 직면할 때 우리는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이다,”라고 스스로를 확신시키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동하라고,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때가 옵니다. 그런 때에 그분은 우리가 광야로 후퇴하여 기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불순종일 것이고 어떤 기도를 드려도 그것은 불신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불신의 기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만을 고려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심판의 준엄함을 무시합니다. 바울이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11:22). 사도는 여기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한숨에 말합니다. 두 개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사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더러워졌으며”(사59:1-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사이에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사야가 지적하였듯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룩하고 공정하시기 때문에 여전히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너희 죄로 인해 너희 말을 들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의 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17-20).

시편 기자의 말은 “나는 내 마음에 죄악을 보았고 그와 함께 거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래서 나는 죄를 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갔다. 그러자 그분은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 하지만 만약 내가 나의 죄를 붙들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내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을 것이다.”

2009년 1월 5일 월요일

교제의 다른 면

주님의 영광가운데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사랑을 주고받는 상호적인 애정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잠23:26)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전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요구하는 전적이고, 분열되지 않은 사랑으로 그분께 돌려드리는 우리의 답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확실한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을 벌어서 얻을 수 없다. 내가 너에게 주는 사랑은 공들여 얻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기록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0, 19).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안식과 즐거워함으로 특징지어 지듯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만 합니다.

1. 다윗이 다음과 같이 기록했을 때 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고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73:25).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평안을 얻기 위해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것을 완전히 멈춥니다. 도리어 그분 안에서 온전한 만족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인애가 생명보다 낫습니다!
2. 그러한 심령은 또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에 대한 기쁨의 환희속에 노래하고 춤춥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때에 그의 영혼에 기쁨이 깃듭니다!

전 성경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구절 중 하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언은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언적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잠8:30-3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여기 언급된 인자들입니다! 지구의 기초를 놓을 때부터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과 연결된 믿는 자들의 연합체를 예견하셨습니다. 그때에도 아버지는 이 아들들 가운데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즐거움이요, 그분 존재의 기쁨이었다. 이제 믿음 안에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모든 자가 또한 그분의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보답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요한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그분의 계명들은 무엇 입니까? 예수님은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40). 첫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우리의 온 마음과 혼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그분 앞에서 빼돌려 남겨두어서는 안됩니다. 둘째는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단순하고 무겁지 않은 계명들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만일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든지 원망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그분의 영광 가운데서 동행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009년 1월 2일 금요일

교제의 삶

하나님의 자녀중의 많은 이들이 그분과 교제하는 삶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크리스천들은 하늘 아버지에 대해 비감하고 왜곡된 개념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자기 주인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한 달란트를 숨겨둔 종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그 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내가 알았으므로”(마25:24).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반가와 사랑 안에서 기뻐하시며 노래 부르실 리가 없다. 때로 나는 비참할 만큼 그분을 실망시켜드렸고 그분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다. 어떻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이런 고투가운데?”

이것이 바로 왜 그토록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하늘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치 않는지 한 가지 큰 이유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어느 모로 그분을 실망시켰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분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소멸하는 불로 가득차고 그들을 심판하고 정죄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할 질문은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시고, 우리와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말씀하시고, 항상 우리를 감싸 안을 준비가 되어있으시고, 우리에 대해 오직 선한 생각만 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께 우리가 가까이 다가기를 원치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주십니다: 사탄은 네가 무용지물이라고 할 지 몰라도 나는 단언하건대 너는 나의 기쁨이란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명백히 주님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내가 내 죄의 길을 계속 간다면 그분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사고방식은 신성 모독에 근접한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그들의 죄는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분이 계속 죄를 짓는 자녀는 모두 책망하시지만 언제나 오래 참으면서 그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책망하신 후에 그분의 영이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에 대한 감각을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은 채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3:6). “아버지....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호11:9).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이 마치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뜨겁고 열정적이다가 미지근하거나 차갑기도 할 정도로 거의 매일 변합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느 날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가 그 다음 날에는 그분을 버려두고 달아납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 물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내 하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내가 그분 보시기에 다정하고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시고 나는 그분을 믿는다. 내가 무슨 일을 겪든지, 어떤 시험이나 시련을 겪게 되든지 그분이 나를 구해내실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분은 이 기간 동안 내내 내가 절대로 부서지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내 위를 감돌고 계실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우실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제가 시작되는 때 입니다. 우리는 매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 확신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그분의 계시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을 그분께 보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2009년 1월 1일 목요일

진정한 교제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과 친밀함에 대해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 나누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속에 그분의 사랑, 은혜와 자비에 대한 온전한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2. 보답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

당신이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지 주님께 아뢰며 매일 몇 시간 씩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면 그분과 교제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확신하지 않는 한 당신은 결코 주님과 친밀함을 나눌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주님께 나아올 때 나는 마음이 굳고, 사나우며 지나친 요구를 하는 아버지께 나아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분은 얼굴에 분을 띄고 내 등에 막대기를 내리치고 싶어 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분을 내가 실패하기를 기다려 “그것 봐”라고 말하기 위해 내 뒤를쫓아 다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자신을 순결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나에게 계시하신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그분은 친절하고 마음이 부드러우시고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시며 나의 모든 염려와 짐들을 들어주고자 애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분을 부를 때 결코 거부 하시지 않을 것을 나는 압니다.

그것이 내가 그분의 궁정에 찬양과 감사로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내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시 100 참조).

스바냐 선지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말씀을 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이 구절은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 안식하십니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he will rest in his love(KJV)}”의 히브리어 의미는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그분은 잠잠하실 것이다”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고 나는 완전히 만족한다. 아무런 불만이 없기에 다른 곳을 더 찾아 볼 필요가 없다. 이 관계에서 나는 완벽하게 충족감을 느끼며 내 사랑을 거둬들이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랑은 확정된 일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지극히 기뻐하십니다. 스바냐가 증언합니다.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의 말은, “너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커서 그분의 입술로 노래를 부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뻐하다(rejoice)”는 “기쁨과 즐거움을 갖다”라는 의미입니다. 내적인 즐거움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기뻐하다”의 의미로 스바냐가 사용한 히브리어는 tripudiare 로서 “기쁨의 환희를 못이긴 사람처럼 펄쩍 뛰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 생각만 해도 기쁨으로 펄쩍 뛰신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셨다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당신이 아담의 죄의 길에 빠져 그분의 원수가 되었을 때조차도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