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31일 화요일

끝까지 해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14:28-30).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중에서 다수가 끝까지 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돌이키는 고로 경주를 마치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붙들려는 의도로 충만한 채 시작하여 성숙한 제자로 성장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다가 그만 흘러 떠내려가 버리는 것이 신자의 가장 비극적인 상황 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먼저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초를 세우고는 준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경주를 마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지요!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순간순간마다 변화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바로 이 메시지를 읽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잠시 쉬거나 뒷걸음질 치고 있는 중 인 것으로 압니다. 작은 걸음인 듯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급격한 하강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런 경우에 처해 있다면 성령이 되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회개와 자기 부인과 항복으로 돌아오라고. 바로 이 순간, 시간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붙들려고 한다면, 지금 하십시오. 끝까지 해내십시오!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사랑과 미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희랍어로 미워한다는 말은 “비교해서 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우리의 세상에 속한 모든 애정은 근접할 수 도 없을 만큼 그분에 대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열렬하며 절대적인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달콤한 임재로 나아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압니까? 단지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완벽하게 사랑하시는 것에 감사하여 그분께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가운데에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주십시오, 만나주십시오,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를 사용해 주십시오, 보호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성경적일지 모르지만 초점은 우리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조차도 이기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알 수 있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봉사를 복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은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다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이 되어 가는지에 대해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사역의 문이 닫혀서 상심한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선반에 얹어 두고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린 듯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것이 주님께 더욱 유용하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은밀한 골방에서의 기도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역을 할 때 보다 더욱 주님께 유용할 수는 없다고 나는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끝없이 탐색할 때, 그때가 바로 우리가 가장 유용할 때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하기보다 사랑의 교제 가운데 그분과 함께 홀로 있는 것이 더욱 더 하나님을 송축하고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도록 열어 주시는 사역은 모국에서든지, 외국에서든지 우리의 그분과의 교제로부터 인위적 노력없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전 세계를 얻어드리는 것 보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통째로 얻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것은 영혼을 얻기 위한 열정적인 수고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령이 복 주시는 복음전도는 교제 가운데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자주 기도가운데 함께하는 증인에게 지혜와 성령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2010년 8월 27일 금요일

그분의 식탁으로 나아옴

오래된 복음성가 하나가 나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식탁을 베푸셨네/그곳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이 먹는다네/그분은 택하신 백성을 초청 하신다네/와서 먹으라고.”

얼마나 흥겨운 전망입니까! 주님은 천상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를 위하여 식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눅22:29-30). 주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도 또한 이 식탁에 앉혀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고전 5:8)라고 가르칠 때 그는 우리가 천상에서 주님과 함께 그분의 왕의 식탁에 자리를 배정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명확히 이해하게 만들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항상 오십시오. 당신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말을 하게하지 마십시오.”

슬픈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명절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들려져 천상의 장소에서 그분과 함께 앉음으로 우리에게 수여된 위엄과 영예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져서 그분의 식탁에 앉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제보다는 봉사를 통해 영적 기쁨을 끌어내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덜 알게 되는 주님을 위해 더욱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분의 일에 바쳐 누더기가 되도록 분주한 반면 명절은 거의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분의 종, 사역자, 목자들로부터 다른 모든 것보다 구하는 것은 자신의 식탁에서 나누는 교제입니다. 이 식탁은 영적으로 친밀해지는 장소며 매일 베풀어집니다. 명절을 지킨다는 것은 계속해서 양식, 힘, 지혜와 친교를 위해 그분께 나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사건 이후 모든 영적 거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식탁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광대함 가운데에서 자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직도 자신들이 그분과 그분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애통하며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너무 왜소하고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악한 세대의 복잡하고 날로 늘어가는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대함”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단지 이세상의 문제를 풀어주시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의 광대함 속으로 삼켜버리십니다! 그리스도의 광대함에 대한 계시가 늘어나는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마귀도, 지구상의 어떤 권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가 크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분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경계가 없으시고, 측량할 수 없으며, 무한 하시고 거대하신지에 대한 계시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문제들에 의해 결코 다시는 압도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처럼 날로 증가하는 계시를 갖기로 결단했습니다. 사실인즉,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소유했던 것 모두가 계시에 의해 왔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그는 배웠고 성령에 의해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개종한 후 삼년 후에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만나 교제하였고 선교 여행을 계속하기 전 단지 15일 동안만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말했습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엡3:3). 성령은 하나님의 깊고 은밀한 비밀들을 아시므로 바울은 지속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엡3:8)을 이해하고 전파하는 은혜의 선물을 얻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기 위해 상반되는 목소리들을 걸러내는 데 만족하지 않는 신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한 계시를 갈망하기 원하십니다. 깊고 인격적인 친밀함,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완전한 마음은 의뢰합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22:4-5).

의뢰하다라는 말의 히브리 어근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다”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마치 서까래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뛰어 내려라!”하는 말을 듣고 순종하여 아버지 품안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그런 자리에 있습니까? 모서리에 밀려 휘청거리며 예수님의 품안으로 자신을 던지는 선택 외에는 없습니까? 당신은 그저 상황에 굴한 것일 뿐 그것은 의뢰가 아닙니다. 그것은 체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뢰는 수동적인 포기와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갈망할 때 그분을 의뢰하는 것의 기초가 튼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에 진정으로 그분을 의뢰할 수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대국을 통제할 수 없기에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께 더 가까워지고 그분을 더욱 잘 알게 되면서 이것이 바뀌어집니다. 이 말은 우리가 속수무책일 때 다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과 아주 가깝게 동행하기 시작하므로 시련이 닥쳐오고 있다는 그분의 경고를 듣습니다.

의뢰하는 마음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모든 발걸음은 주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다. 그분은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다. 내게 고통과 유혹과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결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위한 영원한 계획과 목적이 있으시다. 내 머리의 모든 머리카락을 세어놓으시고 나의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에 내 모든 신체 부분을 조성하셨다. 내가 그분의 눈동자이기 때문에 내가 앉고 서고 눕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단지 나만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주관하신다.”

완전한 마음은 또한 깨어진 마음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깨어짐은 슬픔과 통곡 그 이상, 부수어진 영 그 이상, 겸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깨어짐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맡긴 가장 큰 능력 - 죽은 자를 살리고 병과 질병을 치유하는 것 보다 더욱 큰 능력을 마음 가운데 방출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폐허를 회복시키고 하나님께 특별한 종류의 영광과 명예를 가져오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아시다시피, 깨어짐은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벽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의 상한 심령을 연관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를 기뻐하시리니....”(시 51:17-19).

느헤미야는 심령이 상한 사람이었고 그의 예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관계가 있습니다. (느 2:12-15 참조). 캄캄한 밤에 느헤미야는 “성벽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히브리어 shabar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시편 51:17의 “상한 심령”으로 쓰인 말과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충만한 의미로, 느헤미야의 마음은 두 가지로 상하였습니다. 첫째, 폐허에 대한 고통으로 상하였고 둘째, 다시 건축 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터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상한 심령입니다. 먼저 폐회가 된 교회와 가족들을 보고 주님의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령은 주님의 이름위에 던져진 비난에 대해 몹시 슬퍼합니다. 또한 다윗이 했던 것처럼 내부를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수치와 실패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 상함에는 두 번째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진정으로 상한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건축할 것이다.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파손된 곳을 다시 건축하는 일을 시작하라!”

믿음의 전쟁터로부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무엇인가를 나누어 줄 사람을 찾는 낙심한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명백히 말합니다. “내가....예루살렘에 올라 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갈2:1-2). 바울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신비를 나누고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경건한 사람은 자신만의 충만하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계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파하는 교리는 서재에 처박혀 책과 주석을 공부하여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차세대들이 내 연구 업적을 읽고 배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신학적 진리를 몽상해낸 고립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어디서 어떻게 그의 서신들을 썼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어둡고 습한 감옥 안에서 썼습니다. 채찍질 당한 후 등 뒤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썼습니다. 다시 한 번 파선한 배에서 살아남아 바다에서 기어 나온 후에 썼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모든 진리와 계시가 믿음의 전쟁터로부터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위하여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조난당해 본적이 있는 모든 선원에게, 아무런 소망 없이 갇혀 있었던 모든 수감자들에게, 죽음을 직면해 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권위를 갖고 전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검증 받은 고참병으로 만들고 계심으로 나는 들을 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탄의 권세에 넘겨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당신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시련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구히 당신 안에 형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결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얻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현재 있는 곳, 유쾌하든지 불쾌하든지 상관없이 당신의 현재 상황가운데에서 와야만 될 것입니다.

나는 바울의 영성에 있어 가장 큰 비결의 하나는 그가 어떤 조건에 있든지 불평하지 않고 수용하였다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자족하다의 헬라어 의미는 “피하다”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불쾌한 나의 상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나는 그것들을 껴안습니다. 주님과 함께 했던 지난날을 통해 나는 그분이 내안에서 무언가 영원한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고전 10:13).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감당하다는 말은 우리의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요점은 우리에게 그 상황하에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면 우리가 결국 파멸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모든 시련에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고통가운데에서도 자족하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자원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시련가운데서 “자족”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즐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더 이상 그것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족하여 흔들리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견뎌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를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만들어 가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현 세대는 견딤에 대해 모릅니다

견디다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실행하다, 포기하지 않고 고통을 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간략히 말해서 지탱하다 또는 인내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요즘 세대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중도 포기자들입니다. 그들의 배우자, 가족,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포기 합니다.

이 사안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그리고 덧붙여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일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0-25).

사도 바울은 명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마지막으로 주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이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결혼 생활이 혼란에 빠졌습니까? 직장이 위기에 처했습니까? 친척이나 집주인, 당신을 배신한 친구와 대립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소망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의 고난이 결코 완화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계시, 성숙, 깊은 믿음, 흔들리지 않는 평강도 결코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면, 진정 나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한다면, 그렇다면 나의 주변 상황과 싸울 수 없다. 나는 견뎌내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내가 고난 가운데서 매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는 것을 내게 줄 수 없다. 그분은 나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다.”

바울은 생애는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호흡 했습니다.” 진실로 영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성령께서 그 종의 내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천국 미풍을 쏟아내십니다. 이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생의 가장 힘든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미소 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분의 영원한 영광을 계시하시면서 그의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2010년 8월 24일 화요일

그리스도의 개인적 계시

당신이 설교자이거나, 선교사, 교사라면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것은 사람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것입니까? 어떤 위대한 교사의 계시를 재탕한 것입니까? 또는 당신 자신만의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계시를 체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까? 하늘이 당신에게 열렸습니까?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아주 작지만 광대한 원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 전 존재가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하여 요약되었습니다. 오래전 나는 성령이 그리스도 한분 만 전파하는 사역으로 나를 이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오직 그분만 전파하기를 갈망했던지요! 그러나 내 마음은 집중하지 못했었고 그 원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결과 나의 설교를 지탱해 나갈 계시가 흘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기위해서는 성령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계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부한 메시지를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아버지의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탐색한다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샘솟아 흐르는 물이시라면, 우리는 그 흐르는 물로 채워질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계시는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에게 나타내 주실 것을 믿고 신뢰하며 기꺼이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주님의 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다만 그에게 계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계시되었다고 말했습니다(갈1:16 참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도자의 삶과 사역에서 이미 능력을 발휘한 말씀이 아닌 것을 전파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어떤 얄팍한 사람들에게는 괜찮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하지만 그 계시가 우리 안에 깊은 변화를 가져올 때에만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또한 개인적인 염려를 피력합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확실히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의 안전을 결코 의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버림을 당하다”는 단어의 희랍어 의미는 “인정받지 못한”, 또는 “자격이 없는” 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이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거나, 또는 자신이 완전히 실천하지 않는 복음을 선포했다는 심판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토록 자주 “살아계신 그리스도” 또는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다음 질문에 대해 개인적으로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한 시간이라도 계속 우리가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나는 진실로 오직 그리스도만 원하는가? 그분은 진실로 나의 모든 것,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인가?

당신의 대답은 네 입니까? 정말로 그렇다면 당신은 바울이 “내가...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라고 말했을 때처럼 당신 인생의 배설물 무더기를 지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위해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까? 당신이 오직 그리스도만 원한다면 당신의 사역은 직업이 아닙니다. 당신의 사역은 기도입니다! 당신은 그분을 구하라고 재촉당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은밀한 골방으로 자주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들어가는 순간 그분의 식탁에 앉혀질 것을 알며. 당신은 그분 존전에 서두르지 않고 앉아서 그분을 사랑하고 두 손 들어 찬양하고 그분을 갈망하고 그분의 지혜에 대해 감사하며 그분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2010년 8월 20일 금요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5:24). 동행하였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 의미는 에녹이 하나님과 팔짱을 끼고 계속하여 그분과 대화하며 더욱 가까워지며, 오르내리고, 들고 나며, 오고 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녹은 365년 또는 일 년의 날 수 만큼의 해를 살았습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신자를 봅니다. 그는 성인으로 보낸 매해의 365일 동안 주님과 팔짱을 끼고 동행하였습니다. 주님이 바로 그의 생명이었기에 그는 인생의 종점에서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히 11:5).

에녹처럼 인생에서 옮겨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향권에서 옮겨 집니다. 그의 흑암의 왕국에서 건져져 그리스도의 빛의 왕국에 놓여집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에녹은 사악한 사회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행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광야 동굴에 숨어살던 은둔자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문제꺼리와 부담을 지고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식이 있고 의무와 책임들이 있었던 인생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거룩하기 위해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는 이 구절이 에녹의 옮겨짐, 즉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더 한층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쓰인 것처럼 있지 아니하였더라 (he was not) 라는 구절은 또한 “그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he was not of this world)”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영과 감각들에 있어서 에녹은 이 사악한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는 땅의 것에서 마음이 점점 멀어졌습니다. 바울처럼 그는 이 땅의 삶에 대해 매일 죽었고 그의 영 안에서 천상의 영역으로 올려 졌습니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에녹은 자신의 모든 책임을 이행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일하고, 사역하고 거주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당면한 문제들 그 어느 것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1:5은 명백히 말합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어떤 면이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의 안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형의 믿음을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개의 구절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5-6). 뒷 구절은 우리가 자주 듣는 구절입니다만 그 앞의 구절과 연결해서 듣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 또 전 역사를 통해서보면,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했던 사람들은 깊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만일 교회가 계속 하나님과 교제하며 매일 동행하면 그 결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정한 믿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에녹 주위의 인간들은 한층 더 불경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욕과 굳은 마음, 관능으로 꽉 찬 짐승처럼 변해갈 때에도 에녹은 점점 더 자신이 동행했던 그분을 닮아갔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이것은 거의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에녹의 전 믿음은 그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갈망하는 것, 즉 주님과 함께 있는 것에 집중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를 옮기셨습니다. 에녹은 더 이상 휘장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보아야만 했었습니다.

우리의 형제 에녹은 성경책도, 찬송가도, 친교를 나눌 사람도, 교사도, 성령의 임재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찢겨진 휘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에녹이 하나님이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믿음인 것을 우리가 알고 또 에녹이 그분을 기쁘시게 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상하시는 분, 보수를 지급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실함에 대해 후하게 지불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어떻게 상을 주실까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그분과 동행하는 데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상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상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마귀가 들어와 차지해 버림으로 곧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그가 예수님과 사랑에 빠져 그분과 동행하고 대화하기만 했었더라면! 하나님은 곧 사탄이 그에게 진정으로 아무런 권세도 부리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 사람은 속히 그리스도가 자신을 통제하시도록 허용했을 것입니다.

2. 믿음에 따라오는 두 번째 상은 “순결한 빛”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빛, 방향, 분별, 계시,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특정한 “앎”을 상으로 받습니다.

3. 믿음으로 동행함에 따르는 세 번째 상은 우리의 모든 대적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입니다.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사54:17). 히브리 원본에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어떤 계획도, 어떤 파괴의 도구도, 어떤 사탄의 무기도 너를 밀치거나 너를 넘어가지 못하고 아무 쓸모도 없어 질 것이다.”

2010년 8월 19일 목요일

전리품을 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그 일례

다윗과 그의 군대가 집을 떠나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그의 마을 시글락을 침략했습니다. 이 약탈을 목적으로 침략한 자들은 마을 전체를 불사르고 여자와 아이들 모두를 잡아갔습니다. 다윗이 돌아왔을 때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대단한 영적 전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을 대적하는 공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항하는 총력전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마귀는 하나님의 씨를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영적 전쟁의 초점입니다. 원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씨를 파멸시키려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실은 변치 않았습니다. 사탄은 아직도 하나님의 씨를 파멸하려고 다니며 그리스도의 씨인 우리를 공격함으로써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하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다윗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올바른 것을 알았고 주님 안에서 자신을 격려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즉시 이 믿음의 사람은 아말렉 사람들을 뒤쫓아 갔습니다. 그는 금세 그들을 따라잡아 모든 사람과 잃어버렸던 소유물들을 되찾았습니다(삼상 30:19-20 참조). 다윗은 시글락에서 탈취 당했던 물건들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이 약탈한 다른 모든 것도 되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전리품을 가지고 다윗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유지하는 데 이것들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다의 장로들과 그와 그의 부하들이 숨어있던 마을들에게 이 탈취물을 선물로 보냈습니다(삼상 30:26, 31 참조). 이것이 우리의 영적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의 또 다른 일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만 전리품을 취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획득한 자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 위함입니다.

기근 때에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아람 군대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굶어죽기를 기다리며 성 주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성안의 상황은 최악이어서 나귀머리 하나가 은 80 세겔에 팔렸습니다. 상황이 너무도 다급했던지라 여인들이 그들의 자녀를 삶아 먹기위해 내어 놓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완전히 광란의 지경이었습니다(왕하 6 참조).

성 밖에 살던 나병환자 네 사람이 마침내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왕하 7:3-4). 그리하여 그들은 아람 진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해보니 모든 것이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장막을 수색해 보았으나 모두가 도망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7:6-7).

나병환자들은 이것을 깨닫자 진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신 다음 성으로 돌아가 외쳤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 믿기 어렵겠지만 아람군대가 진을 버리고 도망쳤다”(7:10 참조). 주님은 전체 상황을 180도 전환 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전리품을 취하셔서 지상에서 그분의 뜻을 유지하시며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기운을 차리게 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당신이 현재 치르고 있는 전투의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합니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는 원수의 모든 세력을 이기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렇다, 너는 승리하며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를 승리자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내 왕국을 위하여 네 안에 더욱 위대한 목적을 고안하고 있다. 너는 네가 처리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이 전투에서 나올 것이다.”

2010년 8월 18일 수요일

영적 전투의 전리품들

“그들이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 중에서 구별하여 드려 여호와의 성전을 개수한 일 과”(대상26:27). 이 구절은 심오하고 인생을 변화 시키는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전쟁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략하여 얻은 물건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개수하는데 바쳐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 배후에 있는 강력한 진리를 파악한다면 왜 주님이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격심한 영적 전쟁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한 번 구원받으면 그들의 시련은 끝나고 인생은 순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투를 허용하실 뿐 아니라 우리 삶속에 이 전투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은 무엇일까요? 전리품들은 전쟁에서 승자가 노략하고 약탈한 물건들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4장에서 여러왕들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했을 때 전리품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침략자들은 주민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했습니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창14:11-12).

아브람이 그의 조카 롯이 사로잡힌 것을 듣고 하인 318명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적을 추격하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침략자들을 따라잡아 “그들을 쳐부수고....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록솨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14:15-16).

승전한 아브람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는 기쁨에 찬 사람들과 온갖 물건들이 산더미 처럼 쌓인 수레들의 긴 행렬에 앞장 서 있습니다. 그 길에서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람은 마음이 감동하여 자신이 노략한 모든 물건의 십일조를 이 왕에게 주었습니다(14:20 참조).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7:4).

하나님이 우리가 붙들기 원하시는 원칙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승자로 만드는 것, 그 이상의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전쟁에서 전리품, 물건들, 영적 부요를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수레에 가득한 자원들을 가지고 전쟁에서 벗어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저자 임의 강조)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들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의 생애 말년에 제정한 법령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좌를 계승하도록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신성한 질서를 세우고자 나라의 지도자들을 소집하였습니다. 이 거룩한 역사를 위해 어떠한 자원을 사용했습니까? “그들이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 중에서 구별하여 드려 여호와의 성전을 개수하”(대상 26:27)였습니다.
이 장면을 그려보겠습니다. 승전할 때 마다 다윗은 전리품을 거둬들여 금, 은, 놋, 목재, 셀 수도 없이 많은 돈을 풍성하게 쌓아 두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성전을 세우기 위해 이 전리품들을 자원으로 사용하려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성전을 개수한다고 말할 때,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집을 수리하고 건축된 부분을 보강하고 통합하다”입니다. 이러한 자원들은 성전 본래의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 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백성, 즉 당신, 나, 전 세계에 있는 그분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그리고 옛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주님은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통하여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시련이 우리의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전투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부요, 자원들, 부를 따로 떼어 두십니다. 우리의 전쟁으로부터 물건들의 보고 전체를 쌓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전리품들은 그분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바쳐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오랫 동안 과거 전쟁들에서 취한 전리품들로 성전을 잘 유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이 모든 시련으로부터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걸쳐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한 공급”의 원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010년 8월 17일 화요일

영적인 것은 복제 불능입니다

이곳 뉴욕시의 거리에서는 로렉스 시계를 15불에 살 수 있습니다. 뉴욕 사람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시계들은 진짜 로렉스가 아닙니다. 다만 진짜를 모방한 싸구려 모조품입니다.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의 복제품이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복제 불가능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영성입니다. 진실로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복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분이 손수 하신일은 알아보시고 그분의 신성한 작업을 인간이 모방한 것을 용납지 않을 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실로 영적인 것을 인간이 복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시면서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로서는 그 일을 재생해낼 방도가 없습니다.

현대 종교의 큰 오류가 이것입니다. 단지 성경지식과 성경의 원리들을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그들이 영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도, 어떤 기구도 사람 안에 영성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만이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영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4:18).

이 구절의 문맥상 바울은 고통과 시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 외에는 아무도 우리가 당면한 모든 일을 알지 못한다. 혹독한 시련 한 가운데, 바로 여기가 진정한 영성이 발현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복하는 사람들, 즉 주님이 자신들안에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계신다고 확신하며 시련을 직면하는 사람들은 혹독한 시련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벗어나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을 때 보다 그들의 고난의 시기에 성령께서 더욱 많이 가르쳐주셨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한 세월동안, 순조로웠던 시기에 내 영성이 증가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도리어, 내가 성령이 허락하신 모든 역경, 고뇌, 시험을 견뎌낼 때 증가되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길을 가던 어떤 지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20:21-11 참조). 진정으로 바울의 전 생애에 걸쳐 그의 시련은 결코 완화된 적이 없었습니다.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시련과 어려움은 우리 안에 영원한 가치를 생산해냅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마 전 생애에 걸쳐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영원에 비하면 그것은 다만 잠시일 뿐이다. 이제 우리가 시련을 견디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지속될 그분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생산해 내고 계신다.”

2010년 8월 16일 월요일

그리스도 얻기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바울은 그의 주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얻을” 필요를 느꼈을까요? 그리스도는 이미 자신을 사도에게 만 아니라 그의 삶속에서 확연히 계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을 얻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바울은 전 존재, 즉 그의 사역, 인생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주인 주님을 기쁘게 하는데 집중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유익”한 것일지라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다는 생각이 성경적인 것인가 물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가? 진정으로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전 인류에게 미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이 거의 체험하지 못하는 다른 유형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남편과 아내사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아가서에 나타나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묘사되었고 주님이 그분의 신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ravish, KJV)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아4:9-10).

그리스도의 신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열망하는 거룩한 사람들로서 오로지 순종하여 살며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었기에 그리스도가 마음을 빼앗겨버릴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ravish 란 말은 “마음이 녹아버리다” 또는 ”마음을 빼앗다“라는 뜻입니다. 킹 제임스 번역본 성경은 단지 “한번 쳐다보는 것(one eye)”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빼앗겨버렸다고 말합니다. 나는 “한번 쳐다보는 것”이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된 일편단심이라고 믿습니다.

2010년 8월 13일 금요일

금보다 귀합니다

에스더 왕후의 이야기는 격렬한 전투에 관한 것으로 성경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적 전투 중 하나입니다. 마귀가 이번에는 사악한 하만을 통하여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파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자는 바사 왕을 설득하여 인도로부터 에디오피아(구스)에 이르기까지 왕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칙령을 선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만의 눈에 뜨인 첫 유다인은 에스더의 삼촌으로, 의로운 모르드개였습니다. 하만은 특별히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교수대를 세웠으나 에스더가 개입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도를 촉구하고 하만의 명령을 취소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계획을 폭로하시고 하만은 자신이 세운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왕은 사형 명령을 반전 시켰을 뿐 아니라 요즘 시가로 수백만 불에 달하는 하만의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전리품은 단지 하만의 집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존귀함이 있”(에8:16)었다고 말해줍니다. 이것들이 대적과의 전투에서 획득하는 진정한 전리품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시련은 영적인 부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강하고, 순결하게 계속 유지되도록 지켜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때 그분은 시련이 우리 안에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생산해 내도록 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호가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마귀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탈취하시고 노략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승리의 부활을 하셨을 때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신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 값으로 사신 행렬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망에 대한 승리를 초월하여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삶에 관련된 놀라운 전리품들, 즉 은혜, 자비, 평강, 용서, 힘, 믿음, 승리하는 삶을 주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를 위해 획득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성령은 여기서 우리에게 경이로운 진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보고를 활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에 필요한 자원들은 우리 전투의 전리품으로부터 직접 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성전 유지가 가능하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가계로 입양하셨습니다. 그분은 성전의 주춧돌로 서 계시고 성전 전체를 성결케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는 이제 완전히 세워지고 완성된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반 쯤 완성된 전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성전은 완전합니다.
이 성전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항상 잘 정비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는 자원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영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모든 전리품의 출납담당자입니다.
이 자원들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보고 하나님과 협력할 때 방출됩니다.

이 협력은 우리가 시련 중에 있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의 자원은 전투에 몰두하는 중에 얻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입니다. 대적과의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들, 믿음, 성품인 것입니다. 전투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투로부터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2010년 8월 12일 목요일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붙드십시오

우리에게 갈등, 중압감, 시련이나 전쟁이 없다면 우리는 수동적이고 미온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퇴락하고 폐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쟁취한 영토를 치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우리를 빼어 내고자 합니다. 그의 목표는 우리에게서 모든 싸움을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할 힘과 원수를 압도하는 능력 등과 같이 영적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 발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그분은 우리에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겪은 일을 기억하느냐? 또 그 지독한 전투에서 겪은 일도? 그 모든 일을 통해서 네가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아라. 모두 네가 승리했던 전투를 통해서 확보했던 것이다.”

사실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보물을 인간의 몸속에 두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그분의 영이 거하시는 집, 즉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성전을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이 게으르고 무관심해져서 정기적인 기도, 하나님의 말씀 먹기, 성도들과의 친교와 같이 필요한 보수 작업을 방치해두면 퇴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완전히 폐허로 남게 되고 말 것입니다.

내 자신의 오십년간에 걸친 사역을 돌이켜 볼 때,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쉬웠던 때가 여러번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주님, 이번 공격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언제 끝날 것 입니까?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러한 시련들의 열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원, 힘, 영적 부요와 같은 그 열매는 그 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었을 정도로 나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당신에게 촉구합니다.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붙들고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더욱 강하게...사탄으로부터 노획물을 탈취하도록 돕기 위해...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분께 영광이 되도록 성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잇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7-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2010년 8월 11일 수요일

절대 위축되지 않기

당신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지속적으로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어떤 마귀 권세에게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보섬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귀신들이 방해하려 했습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13:6-8).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 또는 “빛의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대적하는 마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습니다.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행13:9-12).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흑암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이 당신을 훼방하려는 시도에 대해 마음 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방해를 받다, 괴롭힘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날을 그대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바울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고 마귀 권세에게 외쳤습니다. “이제 그만하라. 그만하면 충분하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행16:16-18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귀로부터 지나치게 많이 수용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만 됐다.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떠나가라!”고 대적해야만 할 때가 옵니다.

우리가 권위를 행사하여 마귀에게 떠나라고 명령할 때, 사탄은 그의 무기고에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당신을 치러올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6-18에서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마자 사탄이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군중들을 자극하여 바울과 실라를 대적하게 함으로써 일순간에 그들은 엄청난 위기에 빠졌습니다!

관리들이 그들에게 매를 치고 투옥시켰습니다. 회초리가 그들의 등을 내려칠 때마다 나는 마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니? 나의 부하들을 쫓아내고 내 권위 위에 서겠다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종에게 매를 치면 칠수록 그에게서 더 한층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자아내게 됨을 마귀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를 위기 가운데 던져 넣고 문제꺼리들과 괴로움으로 결박해 놓으면 그는 노래하고 외치고 예배드릴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면 사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셔야만 해도 상관없습니다. 바울을 위해 정확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

사탄은 당신이 이제까지 직면했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두려운 유혹이나 시련을 쏟아 부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죄의식, 정죄와 자기 성찰의 수렁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성령 안에서 일어나서 당신의 주변 상황과 속박으로부터 눈을 떼어야만 합니다. 그 모든 것의 해결책을 생각해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찬양하고 노래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2010년 8월 10일 화요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의 더 높은 의미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집나간 나귀들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사환 한명을 데리고 사울은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찾았습니다. 결국 그는 의욕을 잃고 찾는 일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의 사환이 선견자 사무엘에 대해 말하며 그분이라면 어디서 나귀들을 찾을지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성령의 한 유형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길을 가르쳐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심중에 무언가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하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데 일역을 담당하도록 선택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도착했을 때 사무엘이 했던 첫 번째 일은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삼상9:19). 이것은 정확히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아서 따로 질 높은 시간을 가지며 그분의 마음을 들으며 섬기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정결케 할 것을 청했습니다.(삼상9:20-25). 사무엘은 “이제 나귀를 찾는 길을 묻는데 집중하기 말라. 모두 해결되었다. 바로 앞에 더욱 중요한 일이 놓여 있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제의 밤이 지난 후 사무엘은 얼굴을 맞대고 친밀한 시간을 나누기 위해 사울에게 사환을 방에서 내보내도록 청했습니다. (삼상9:27; 10:1 참조).

하나님이 여기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네가 진정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기 원한다면, 네가 진정으로 나의 기름 부음받기를 원한다면, 너는 나에게 길을 묻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구해야한다. 너는 내 임재 속으로 들어와 나의 마음, 나의 소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나는 너를 나의 왕국에서 쓰기 위해 기름 붓기 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길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이제 모든 것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성령이 하나님의 깊이 감추어진 것들을 당신에게 가르치도록 허용 하십시오. 그분의 임재 속에 가만히 서서 그분이 주님의 심중을 당신에게 보여주시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의 가장 최상의 형태입니다!

주님의 존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길 잃은 세상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낙심하지 아니하고......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고후4:1-2).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압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가 예수님을 나타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눈에 보이도록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빛을 발함”으로 어떤 것을 명확하고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알려지고 이해되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각 개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그 성품과 닮은 모습이 빛나야만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에 대한 개념을 더 한층 승화시킵니다. 그는 우리가 실제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2-3). 우리의 삶은 성령이 쓰신 편지이며 길 잃은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주위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읽혀지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들이 됩니까?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예수님의 바로 그 형상을 새겨주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 형상을 늘 다듬어 가십니다. 성령의 임무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장 진실 되게, 정확하게 빚어내는 것으로 이는 실제로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2010년 8월 9일 월요일

어떻게 하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을까?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은 단지 소수의 초특급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1. 당신안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 행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먼저 성령께 당신의 안 내자와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만약 당신이 구원 받았다면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분이 당신을 인계해주시기 구하고 그분께 항복하십시오. 마음으로부터 그분이 당신을 인도하고 안내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결단해야만 합니다. 모세는 훗날에 대해 말하며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4:29) 고 했습니다.

2. 성령을 알고 듣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문제와 유혹으로부터 눈을 떼십시오. 바울, 실라와 디모데가 만일 자신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눈물 과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실패에 초점을 둡니다. “지난 날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지금 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을까?”라고 말하며 우리의 패배를 거듭해서 되뇌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그 피가 모든 것을 덮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것도 잊어 버리십시오. 오직 주님만이 앞일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오직 성령에 집중하십시오.

3. 성령과 교제하며 질 높은 시간을 많이 보내십시오. 그분은 서두르는 사람에게 말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주님을 구하고 찬양을 드리십시오. 당신 귀에 속삭여대는 모든 다른 음성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십시오. 성령이 이것들 보다 위대하심과 당신이 속거나 눈이 어두워지도록 방치해두지 않으실 것을 믿으십 시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2010년 8월 6일 금요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들은 기꺼이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거듭 거듭 가책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책 하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성령이 그 사랑을 그의 영혼에 역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타임 스퀘어 교회에서는 의로운 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책망을 사랑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는 성령이 그의 감추어진 죄와 불신의 영역을 드러내는 것을 환영하도록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더욱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헌데, 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서 “주님 나를 계속 심판해 주십시오. 책망하시고 꾸짖어 주십시오,”라는 태도를 감지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찔림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뉴스레터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에서 이런 태도를 많이 접합니다. 내가 천둥 치는 듯한 심판의 메시지를 쓸 때, 엄청나게 긍정적인 답신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에 대하여 나누면, “당신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군요!”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이분들은 “당신이 꾸짖지 않으면 당신의 말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신자들은 성령의 위대한 사랑의 사역에 전혀 참여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 꼭 배워야만 하는 영역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그분이 행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일을 하시게끔 허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에 넘치게 부으시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66:13). 이사야는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사57:17)는 고집 센 하나님의 백성에게 쓴 것입니다.

말해보십시오. 조언을 듣기 거부하는 고집 세고 완고한 학생의 곁에 선생님은 얼마나 오래 있어줄까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 중에 가장 숭고한 이미지 중에 하나인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들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걸려 뉴욕주 북쪽에 위치한 감옥에 있는 아들을 방문하러 갑니다. 그녀는 단지 잠시 동안 아들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흉한 죄수복을 입은 아들을 쳐다보고, 고통어린 그의 눈을 보면서 매번 갈 때 마다 마음속으로 조금씩 죽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입니다!

이 같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갖고 계신 사랑이라는 것을 성령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언젠가 너희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렸다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을 그분께 드렸고 그분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제, 나도 너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을 하기위해 그분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고 계속 일할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 외에 이 세상에는 진정한 위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 한 분만이 어두운 밤, 따뜻한 침대에 당신을 누이시고 완전한 평강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고통과 슬픔의 때에 진정으로 당신을 안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위로는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영구한 것이다!”라고 당신에게 확신 시켜 주실 분입니다.

2010년 8월 5일 목요일

자존심을 버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성령은 사람들에게 가장 이례적인 방법으로 강림 하셨습니다. 그분은 건물을 뒤흔드셨습니다. 사람들의 혀는 새로운 언어로 그분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전적으로 통제하셨습니다!

오순절에 그분은 급하고 강한 바람과 함께 오셨습니다! 불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사물들이 진동하였습니다. (행 2:4, 4:31 참조).

세례 요한은 설교했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3:16).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오실 때 당신을 성령과 불로 세례주기 원하십니다! 성령은 불, 즉, 예수님에 대한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 을 가지고 오십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신자들이 일순간 뜨겁다가 곧 냉담해져서 결코 완전히 항복하지 않고 절대로 승복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일까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책망하시리라”(요16:8). 이 신자들이 성령을 그들 안의 합당한 자리에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책망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은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그리스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진정 이 면에서 그분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에 대해 책망하실 때 그것을 내어버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 위안인 것입니다!

성령은 절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일을 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강림하실 때 죄인들은 당신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할 만한 방법으로 오실지도 모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령이 너무 소란스럽고,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지나치게 예측불허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2010년 8월 4일 수요일

성령은 자신의 하시는 일을 아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하시되 연결성이 없거나 계획성 없이 행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단순히 우리가 인생을 헤쳐 나가는 것을 돕거나 위기를 통과하거나 외로운 밤을 무사히 지내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들어 올려 힘을 조금 불어 넣은 다음 다시 경주를 계속 하도록 내려놓으려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이 오신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준비된 신부로 본향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그 임무에 일치하게 행동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도자, 우리의 보혜사, 곤고할 때에 우리의 힘이십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모든 구원 사역-우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모든 경우-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신부로서 합당하게 만드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이 세상에 단지 은사를 주시기 위해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모든 은사는 배후에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의 메시지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중심적인 진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그분은 마치 오색찬란한 보석처럼 빛날지 모르지만 모든 진리의 빛은 우리를 오직 단하나의 진리로 이끌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도록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를 다른 모든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진리를 계시하도록 너희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진리가 모든 죄의 속박을 깨뜨리고 모든 불신을 처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신랑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을 향해 나아가고 그분의 결혼 만찬을 위해 준비되어 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나는 너희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너희를 흠 없고 그분을 향한 정열적인 사랑을 마음에 품은 자로 나타내고자 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사랑에 빠지도록 예수님을 교회에 드러내는 것,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2010년 8월 3일 화요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 성도들이여, 이 말씀은 당신의 믿음을 점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을 붙들어야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당신은 하나님께 이 선물을 구했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지속적으로 두드리고 있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단순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 성령 세례를 구하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마귀가 진노하여 나돌아 다니는 것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휘하의 모든 권세들을 풀어놓아 악한 세력의 군대들이 하늘을 대적하여 마지막 투쟁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믿음과 순종으로 행하는 의롭고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와는 맞설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성령을 소유한 신자를 내게 보여주면 나도 지옥의 군대가 쫓겨가도록 만든 사람을 보여주겠습니다.

하나님, 성령을 보내주십시오! 우리위에 강림하십시오! 강하게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이 시대에 승리하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사탄의 견고한 진을 대적하도록 우리를 파송하여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이어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5:25)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전 생애를 통해 이 구절을 들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게 말하지 못합니다. 이제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다”는 한 문장으로 정의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서 이루시려는 일을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성령을 보내셨는지 이해할 때 까지 당신은 성령이 그 일을 행하시도록 허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하나의 (오직 단 하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명과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일을 이해하기 전 까지는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실수를 저지를 것입니다. 하나는 그분의 사역 중의 작은 일부분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즉, 몇 가지 영적 은사들이 그분의 모든 것 인양 오해하여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는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놓치고 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이 신비하고 그분의 존재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믿음으로써 우리안의 성령을 소멸하여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치시고, 성화시키며 능력을 부어주시기 위해 당신과 내안에 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신부를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믿는 자들과 성령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구약의 유형을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의 신부를 찾기 위해 자신의 가장 연로한 종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엘리에셀이란 이름은 “강력한 천상의 돕는 자”라는 뜻, 즉, 성령의 유형입니다. 이 강력한 돕는 자가 리브가를 이삭의 신부로 인도하여 돌아온 것이 확실 한 것처럼 성령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틀림없이 신부를 데리고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신부로 리브가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을 그녀에게로 곧장 인도하셨습니다. 이 종의 전적인 사명과 목적은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리브가를 이삭에게 인도하는 것,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삭에게 마음을 쏟고 그의 배우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의 부모가 엘리에셀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데리고 가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창24:50-51).

당신과 나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그리스도를 위하여 택함 받음-은 주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로 안전하게 본향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2010년 8월 2일 월요일

“아바, 아버지”

성령은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순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 구절은 아이를 입양하는 데 관한 성경 시대 동양의 관습에 대해 언급합니다. 입양하는 아버지가 입양 서류에 서명하고 날인할 때까지 아이는 이 사람을 단지 아버지로만 여깁니다. 아이는 이 사람을 “나의” 라는 의미인 “아바”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류에 서명을 하고, 등록과 날인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후견인은 그를 입양하는 아버지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어린아이는, “내 아버지! 이제 더 이상 어떤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훈육하십니다. 당신을 아버지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신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서류를 날인했다. 너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다. 너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에게는 이제 너를 지극히 사랑하고 부유하고 힘센 아버지가 계시다. 그분을 포옹하고 ‘내 아버지’라고 불러라. 나는 그분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분은 너를 사랑했고 너를 원했다.”

우리의 외침은 한없는 기쁨과 감사여야만 합니다. 우리안의 성령은 문자 그대로 외칩니다. “너는 상속인이다. 예수님이 쟁취하신 모든 것의 상속인이다.” 당신의 아버지는 온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신 분이니 당신의 유산은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그분앞에서 부끄러워 피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진노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가난에 찌들고 기쁨과 영적 승리가 결핍된 고아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버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동과 고통의 순간에도 성령은 우리와 함께 그곳에 계십니다.

성령의 임무는 신랑이 그 자리에 없을 때 그리스도의 신부를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14:26).

보혜사는 “고통과 슬픔의 때에 위로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고통과 슬픔을 누그러 뜨리고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안전하고 따뜻한 침대위에 눕혀주는 자”라는 희랍어 정의를 좋아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그분은 자신의 위로의 폭신한 침대위에 당신을 눕히시고 부드러운 손길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심으로 예수님은 절대 확실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불편하게 고통당하고 위로가 필요할 것이며 종말의 때에 그분의 백성들 간에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그분이 하나님의 내재적 속성에 속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이 때문에 당신은 “내 안에 계신 이가 온 세상의 모든 능력을 합친 것보다 크시다. 모든 마귀의 권세보다 위대하시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탄의 손아귀로부터 보호하기위해, 당신의 영의 사기를 진작 시키시고, 모든 우울함을 쫓아버리고 당신의 영을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하시려고 그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시도록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