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8일 월요일

포기한 인생

“포기하다.” 이 단어는 당신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문자 그대로 포기하다 라는 말은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당신에게 주어진 것을 단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소유물, 능력, 목표, 당신의 생명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포기한 인생에 대해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포기한 인생이란 그분이 당신에게 주신 생명을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것은 통제, 권리들, 능력, 방향, 당신이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을 그분이 기뻐하는 대로 처리하시도록 온전히 그분의 손에 양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포기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8:50).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치심 없이는 어떤 행동도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8:28-29).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온전한 포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본보기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삶은 지구에 오시기 이전에 이미 포기하셨다.” 하지만 포기한 인생은 예수님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의무로 지워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잇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0:17-18).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해하지 마라. 자기 포기의 행위는 온전히 내 권한 안에서 하는 일이다. 나는 내 목숨을 내려놓기로 선택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내 목숨을 내게서 빼앗을 수 없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내 생명을 내려놓을 권리와 특권을 주셨다. 그분은 또한 이 잔을 지나가고 십자가를 피하는 선택도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분에 대한 사랑과 그분께 온전히 포기하기에 그것을 행하기로 선택하였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도 이와 똑같은 권리, 즉 포기한 인생을 선택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강요받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뜻을 희생하고 우리 생명을 그분께 돌려드리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그분은 값없이 우리에게 젖과 꿀과 과일로 가득한 약속의 땅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충만한 장소에 들어가지 않기로 선택할 지도 모릅니다.

진실인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과 지시에 따라 충만하게 살면서 우리가 선택하는 만큼 그분 안에 깊이 침잠할 수 있습니다.

2011년 2월 11일 금요일

어떤 위기든지 맞을 준비를 하십시오

위기가 닥칠 때는 기도와 믿음으로 당신 자신을 세울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부부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나타내는 심령으로 최근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스물 네 살 난 그들의 딸이 친구와 함께 놀러 나갔는데 한 미치광이가 이 두 젊은 여자들을 납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딸을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 부부는 쇼크에 빠졌습니다. 그들의 친구와 이웃들은 “어떤 부모가 이런 비극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의문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 내로 흐를 즈음 성령이 이 슬픔에 잠긴 부부에게 초자연적인 위로를 가져오셨습니다. 당연히 고통스런 날들이 뒤따랐고 이 애도하는 부모들은 하나님께 왜냐고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내내 그들은 하늘의 안식과 평강을 체험했습니다.

이 부모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평온함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 부부는 그들의 위기의 순간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배후의 목적 없이는 아무 일도 그들에게 절대로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소식에도 그들은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이 부모와 그들의 다른 자녀들은 살인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건한 부부는 어떤 일을 직면하든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가르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힘이 오직 예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곧 그들은 이 부부에 대해, “이들은 기적이다. 이들은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1-3).

2011년 2월 10일 목요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4:13).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판결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며 서있었고, 방금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들 옆에 서있었습니다. 그곳에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혈과 육을 입은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제, 회당의 지도자들은 “병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행4:14)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났을 때 무엇을 하였습니까?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4:23).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은 이 두 사도들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4:29-30). 그들의 기도는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형제들에게 담대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을 압니다. 우리 모두가 거룩한 확신으로 말 할 수 있도록 계속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데 대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주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대제사장이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체념의 표정을 보았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에게 윙크하며 이렇게 말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이걸 모른다. 그들은 우리가 몇 주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것을 기억할 뿐이지. 우리가 부활하신 주와 그동안 내내 함께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다락방에서도 그분과 함께 있었지. 그리고 오늘 아침 우리 감방에서 기도했을 때도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었다. 여기를 나가자마자 우리는 다시 그분을 만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시간을 보낸 남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낸 시간에서 떠나올 때 그분은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2011년 2월 9일 수요일

거룩한 담대함과 영적 권위

예수님과 함께 있을수록 그 사람은 순수함, 거룩함과 사랑의 면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갑니다. 그 다음에는 그의 순수한 삶이 그의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크나큰 담대함을 조성해 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28:1). 이 구절에서 담대하다는 말은 “안전한, 자신있는”의 의미입니다. 회당의 통치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역할 때 바로 이런 유형의 담대함을 보았습니다(행4:1-2참조).

이전 장에서(행3장) 베드로와 요한은 걸음을 걷지 못하는 거지를 위해 기도하였고 그는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가 고침을 받은 일은 성전 주위에 큰 소요를 일으켰고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저지하기위해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체포하여 공중 재판에 넘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회당의 지도자들을 만났으나 성경은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이 장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건대, 이 종교 지도자들은 그 장면이 매우 장엄하고 예식적이 되도록 연출했을 것입니다. 먼저 고위관리들이 엄숙하게 벨벳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다음에 대제사장들의 친척들이 뒤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기다리는 가운데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들이 점잔빼며 들어옵니다. 이 제사장들이 재판 석을 향해 뻣뻣하게 복도를 걸어 들어와 옆을 지날 때 모두가 절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상상해 봅니다. “자, 이제 이 회의를 시작하자. 내게 강단을 넘겨주고 결박을 풀어주기만 하여라. 이 모임을 위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다. 예수님, 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도록 내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도행전 4장 8절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이것으로 볼때 그는 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있거나 뒤로 물러나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터질 듯한, 예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정체성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의 안에서 담대하게 서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숨길 것이 없고 누구 앞에든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설 수 있습니다.

2011년 2월 8일 화요일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가는 장면을 봅니다. 성전 문 바로 앞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생전에 한 발자국도 떼어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행3:6). 그리고나서 베드로는 그 거지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 그 즉시 이 사람은 치유되었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는 “예수님이 나를 고쳐주었다!”고 껑충껑충 뛰고 소리치며 성전을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앉은뱅이 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천명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성전 지도자들이 “이르러....전함을 싫어하”(행4:1-2)였습니다. 이들 신분이 높고 유력한 자들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4:7). 베드로는 성령으로 담대해졌습니다. 그가 이 지도자들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바로 너희가 삼 주 전에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 그분이 이 사람을 고친 능력이시다. 다른 이름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너희는 길을 잃게 될 것이다.”(4:10-12참조).

지도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이...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4:13). 이 구절에서 알다(took knowledge, KJV)라는 말은 “구별되는 어떤 표시로 말미암아 알려지다”라는 어근에서 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구별 지었던 이 표시는 무엇 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을 닮은 모습과 영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분을 더욱 더 충만한 분량으로 소유하기 원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주를 더 잘 알고, 그분께 더 가까기 나아가고, 그분의 길들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 계속 부르짖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롬12:3참조). 바울이 말하는 이 분량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정된 분량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지식에 대해 정해진 분량을 받았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이 처음 분량이 그들이 원하는 전부입니다. 그들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용서받은 것을 느끼기 위해서, 좋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주 일요일 한 시간 동안 교회 예배를 견뎌내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예수님을 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지 방식”에 처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오직 최소한도의 요구 사항만을 드립니다.

바울은 모든 믿는 자들이 다음과 같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선지자로,...복음 전하는 자로,..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1-15).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득 채워지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영적 선물들을 주셨다. 이것이 필수적인 것은 속이는 자들이 너희에게서 믿음을 빼앗으려고 오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분 안에서 성숙해 진다면 어떤 현혹시키는 교리라도 너희를 요동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한데, 그 정도로 성숙해지도록 성장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더욱 원하는 것이다.”

2011년 2월 7일 월요일

요셉 일단(一團)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 자기의 삶이 위대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질투심에 불타던 그의 형들이 그를 노예로 팔아버렸을 때 그 비전은 한낱 몽상이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후 몇 년간 요셉의 인생은 역경과 불공평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난 후 요셉이 어느 정도 회복된 듯 보였을 때 그는 강간 미수 혐의로 허위 고발당하여 투옥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동안 내내 요셉의 인생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 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바로의 집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결국 요셉을 애굽 전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임명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분은 남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진실로, 모든 세대에 있어 주님은 요셉 일단을 세우십니다. 그분은 이렇듯 헌신된 종들을 택하여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굳세게 하기위하여 오랜 세월 고난과 시험을 통과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요셉이 이것을 견뎌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오늘날에도 주님에게는 요셉 일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분이 감동시키고 부르신 경건한 남녀들입니다. 그들은 명예나 부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 부름을 이행하기 위해 살고 죽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생명이 그분의 왕국에 속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요셉은 자신의 고난의 세월을 돌아보며 이렇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여정에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나로 하여금 이 모든 역경을 지나게 하신 것은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내가 견뎌낸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제 압니다. 형들이여, 주님은 당신들을 섬기라고 나를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나에게 행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들을 그분의 보존의 은혜 아래로 이끄시려고 주님이 모든 일을 연출하셨습니다.”

요셉은 얼마나 놀라운 계시를 받았는지요! 한데, 여기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교훈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과거에도 우리를 보존하셨고 미래에도 우리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 배후에 그분이 영원한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당신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앞에 하늘의 사역을 펼쳐 놓으셨습니다. 오직 단련되고, 시험받고, 확증된 신자만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심한 믿음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크나큰 시험을 견뎌낸 모든 크리스천들이 한 발작 앞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두려움에 질린 사회 한가운데에서 우리로 하여금 일어서서 “능력있는 믿음”에 참여하라고 우리의 대장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요셉의 선언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7).

2011년 2월 4일 금요일

목적이 있어 보존 되었다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16:1). 이 구절에서 다윗이 사용한 지키다(preserve)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요약해 말하면 “가시로 된 보호벽 울타리로 내 주위를 둘러주십시오. 나를 보호하고 지켜 주십시오. 나의 모든 행동, 들고 나는 것을 지켜봐 주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이 의인을 지켜주신다고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다윗이 그의 모든 길에서 도움을 받고 보존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복 받은 사람은 선언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121:4-7).

동일한 히브리 단어 지키다가 이 구절에서도 또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다윗은 하나님의 신성한 울타리, 초자연적인 보호벽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우리를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눈은 너를 보고 계신다.”

진실로 주님은 모든 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쇼핑할 때도. 그분은 우리 차 속에서, 버스나 지하철안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은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들에 대항해서 만들어진 모든 가능한 무기들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 번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지키시는 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셨을까요? 주님은 왜 그토록 우리를 보존하시는 데 뜻을 두셨을까요? 모세의 말에서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시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신6:24). 모세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을 보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고 보호하기 원하시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보존하신 모든 방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막에서 치명적이었던 뱀에 물린 상처를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들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능력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주님이 모든 원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분이 우리에게 양식과 물을 주셨고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 그분이 이 모든 것을 통과하도록 이스라엘을 지켜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증언은 이것 뿐 이었을까요? 이 사람들이 다만 광야에서 죽음으로 생을마감하기 위해 보존 받고 보호받았을까요? 모세는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신6:23).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속박에서 구해내신 모든 기적적인 방법들을 보아라. 결국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하느냐? 왜 그분이 세상에 기초를 놓을 때부터 너를 특별한 자로 표하시고 선택하셨다고 생각하느냐? 왜 그분은 너를 노예 신분에서 구해내셨느냐? 네가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데 왜 너에게 복을 주느냐?”

주님은 당신을 어느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당신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기적들을 초월하여 당신의 삶에서 무엇인가 이루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고 그들 주위에 벽을 두르셨습니다. 즉 유용하게 쓰임 받을 장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약속의 땅, 운명의 장소로 인도하시고 계셨습니다.

2011년 2월 3일 목요일

뱀을 다루는 자들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 한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효율적으로 사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뱀들과 마주치는 위험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이것을 친절하게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사악한 자들이 독뱀들과 같고 우리는 뱀을 다루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성경이 사탄을 “옛 뱀”(게12:9)이라고 부르는 것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이 “뱀을 집어올”(막16:18)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길과 산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하지만 전도서에서 우리는 경고를 받습니다.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전10:8). 담들은 뱀들로 가득 차 있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우리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 에 뱀을 주며”(눅11:11).

영혼을 얻는 자들에게는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막16:18). 이것은 선교사나 또 다른 신자들이 예기치 않게 독을 마셨을 때에 대한 언급입니다만 이 말씀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생명의 강, 그분의 신성한 사랑과 아름다움인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 이세상의 독도 또한 무의식적으로 마십니다.

우리는 이세상의 영을 아주 많이 흡수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그러한 치명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면 크리스천 사역자들이 죄인들이 있는 곳에 어떻게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안에 이러한 입에 올릴 수 없는 것들을 마셔들이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능 안에서 뱀들을 추적하는 동안 당신이 어떤 치명적인 것을 마셨다면, 그 독은 당신을 상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진리를 나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셨을 때 나는 집으로 돌아가 기도했고 성령의 입김이 내 조직을 통해 부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독은 자연히 빠져 나갔고 나는 씻김을 받아 순전하게, 상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2011년 2월 2일 수요일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이런 종류의 말은 우리의 현대 영적 어휘에서는 전혀 생소한 말입니다. 우리는 삶을 숭배하는 자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떠나고 싶다는 갈망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 하지만 개종한 자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껍질에 머무르는 것” 또는, 그의 말대로 “육신으로 있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가 불건전하게 죽음에 고착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복으로 주신 삶을 그가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최대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은 선물이었고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그 삶을 잘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사망의 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육신에 거하는 것 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승리자들입니다. 남아있는 우리가 패자들입니다. 죽음은 궁극적 치유책이 아닙니다. 부활이 궁극적 치유책입니다. 죽음은 통로이고 때로 그 통로는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이 몸들을 파괴하든지 간에 이 통로를 견뎌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영광과는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죽음에 관한 메시지는 어떤 것이든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조차 무시해 버립니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병적이 아닌가 하고 의심합니다. 때로 우리는 천국이 이럴 것이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죽음에 관한 주제는 금기입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달랐던 지요! 바울은 죽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부활하는 것은 신약에서 우리의 “복된 소망”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죽음은 우리가 익숙해진 좋은 삶으로부터 우리를 끊어 버리는 훼방꾼으로 간주됩니다. 우리의 삶을 지나치게 물질로 어질러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 빠져 꼼짝도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물질주의라는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아름다운 집들, 사랑스런 것들, 매력적인 연인들을 떠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지금 죽는 것은 엄청난 손실일 것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내 부동산을 즐길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결혼했다. 내 소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당신은 요즘 천국이나, 이 낡은 세상을 뒤로하고 떠난다는 것에 대해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챘습니까? 그 대신,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이용하여 더 많은 것들을 얻는 가에 대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들에 관해서 얼마나 성장이 결핍된 개념들인지요! 그렇게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워지는 게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진실인즉, 우리는 이세상과 그에 속한 모든 얽매임을 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이해하는 것에서 거리가 멉니다. 그분은 와서 죽으라고, 죽되 우리자신을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지 말고, 우리가 어떻게 기억되어야만 하는지 염려하지 말고 죽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서전이나, 본부 건물이나, 대학이나 또는 신학교를 남기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에 대한 기억을 영속시킬 것을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고 다만 떡과 포도주만을 남기셨습니다.

2011년 2월 1일 화요일

탕자의 교훈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나는 이 탕자가 그의 아버지와 좋은 기억이 있었기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믿습니다. 이 젋은이는 그의 아버지의 성품을 알았고 그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그가 돌아가면 자신의 죄 때문에 꾸지람을 듣거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을 알았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측은한 상황에 있던 그를 어떻게 영접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이 젊은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충심으로부터 나오는 고백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를 마주 대 했을 때 그는 충분히 고백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달려와 껴안아 중단시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젊은이는 단지 하고자 했던 말의 서두만 꺼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 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절).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끝낼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이 젊은이의 죄가 벌써 해결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반응은 그의 종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라. 축하할 것이니 잔치를 준비해라. 내 아들이 집에 왔으니 모두 즐거워하라.” 그는 그의 아들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온전히 회개한 것을 알았습니다.

이 아버지에게 죄는 문제 꺼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유일한 문제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이 고백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이 용납되었다는 것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조하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 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십니다(롬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