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0일 금요일

주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이 말은 빌립보인들에게 보내는 바울 서신의 끝맺음 말입니다. 바울은 “나는 감옥에 갇혀있고 이 족쇄들은 축복입니다. 나는 이 고통으로 인해 아주 행복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바울이 매일 출감을 위해 기도하였고 때로는 견뎌낼 힘을 달라고 부르짖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도 그분의 시련과 고통의 때에 아버지께 부르짖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맨 처음 충동적으로 “왜?”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부르짖음을 참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만일” 또는 “왜”라는 질문에 답을 예비해두셨습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7-18).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이 고통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욕되게 하거나 무력하게 보이지 않게 하도록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나의얼굴로, 나의 안식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전파하는 복음이 이토록 어려운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누구든지, 불이나 홍수나 어떤 상황을 거쳐야 하든지, 지켜주실 수 있다는 확증이며, 그분의 복음은 체험을 통해서 전파될 것입니다.


내가 바울과 아브라함을 통해서 듣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어떤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역할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두고 그분이 우리를 돌보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하면, 우리의 주변상황에 상관없이 그분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특별히 우리의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우리 안에 최대로 계시될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장로 중 한분인 쌤이 나에게 이렇게 말 한 적이 있습니다. “데이빗 목사님, 당신이 고난에 반응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하나의 간증이 됩니다.” 쌤 장로가 모르는 것은 그의 삶이 나에게는 하나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는 만성 통증 때문에 매일 밤 두세 시간 밖에 잠을 못자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속적이고 맹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대한 그의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간증입니다. 그의 삶은 바울의 어느 설교만큼이나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현재 고난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습니까? 당신 가족이 당신 안에 역사하는 복음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은 단지 공포, 절망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의문만을 보고 있습니까? 당신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전 세계는 지금 지구 도처에서 발생하는 테러와 재난으로 인해 떨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또 다른 재난 소식이 들립니다. 어떤 관측자들은 우리가 지금 세계 3차 대전의 시초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런 해결책이 없으며 모든 것을 두루 통찰하는 관리체계가 없기 때문에 만사가 소용돌이쳐 혼돈으로 치닫는다고 확신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반복해서 기억하게 하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의 지식과 통치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2:28). 마찬가지로, 이사야 선지자도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34:1).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시오, 나라들이여, 내게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세상의 창조자에 대해 중요한 말을 하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라들과 그들의 군대에 대하여 불일 듯 할 때, 주님 자신이 그들을 몰살당하도록 넘겨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여기느니라......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40:15,17,22,25).


이사야는 그리고 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상하고 곤고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는 조언합니다.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영광스러운 하늘을.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뭇 별들을 보십시오. 당신의 하나님이 지으시고 각각 이름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저 별들보다 더욱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는 하늘에 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께서 역사를 진행하실 개요를 계획해 놓으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태초부터 종말을 알고 계십니다. 이 계획이 결실하게 될 때, 나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모든 와중에 주님의 눈은 어디를 주목하고 계실까?” 하나님의 눈은 이 세상의 양철조각 우상같은 독재자들이나 그들의 위협에 주목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폭군들의 폭탄이나 군대나 권력이 주님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그분은 그들이 그저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고 비웃으시고 곧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40:23-24참조).

2009년 10월 28일 수요일

나는 헛되이 수고하였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루신 것이 없다는 느낌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알면 놀라시겠습니까?


이사야 49: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이 말은 이사야의 말이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그는 성숙한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오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49:1,5)에서 묘사된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분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미 수없이 읽었던 이 구절에 부딪쳤을 때 나는 의아했습니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라는 말은 지금 막 아버지께서“너는 나의 종이요...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자라고 선포하신 것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대답을 읽게 됩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49:4).


이것을 읽고 난 후 나는 서재에서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이 당면하는 것을 체험하며 아버지께 고백하시는 이토록 취약한 분이시었다니 믿을 수 가 없다. 그분은 인성을 가지시고 똑같은 좌절, 똑같은 낙심, 똑같은 상처를 맛보셨다. 그분은 내가 내 자신의 인생에서 가졌던 생각들 - ‘내 생각에는 이러한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내 힘을 낭비해 버렸구나, 모두가 헛수고였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이 말씀들을 읽으며 나는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히브리서 4:15이 단순히 진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진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십니다. 그분도 바로 이와 똑같은 사탄의 시험을 알고 계시고, 똑같이 참소하는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너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네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다. 네 모든 수고한 것의 열매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부흥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명령을 받은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예수님이나, 또는 하나님의 사람 어느 누구나, 왜 “헛되이 수고하였다” 같은 절망적인 말을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세대에 걸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듯 낙담스런 말이 나오도록 위축되어 버렸을까요? 그것은 모두 높은 기대치에 반하여 작은 성과를 측정한 결과입니다.


당신은 아마 “이 메시지는 사역자들이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나 성경의 선지자들을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본다.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거대하고 공통된 목적, 하나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과 한 치도 틀림없는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

이사야 49장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투쟁을 알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당신에 앞서 싸웠습니다. 당신의 수고가 헛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견디는 것이나, 산산 조각난 기대 때문에 실패감으로 낙담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몸소 체험 하셨고 죄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지옥으로부터 난 거짓말이 당신의 영혼을 곪게하고 불사르게 내버려두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그러한 좌절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49:4). (이탤릭체 저자 임의 사용) 여기서 판단이란 말의 히브리 원어 의미는 “판결”입니다.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마지막 판결은 나의 아버지께 달려있다. 내가 행한 모든 것과 내가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에 대해 그분만이 판단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나를 대신해서 네가 한일에 대해 판결 내리는 일을 멈추어라. 네가 얼마나 효율적인지 판단하는 것은 네 일이 아니다. 그리고 너는 네 자신을 실패자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너는 아직 네가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 알지도 못한다. 너는 네게 다가오고 있는 복을 알아보는 눈이 전혀 없단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영원 속에서 그분 앞에 서기까지는 이런 무수히 많은 일에 대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49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 이스라엘은 아직 모아지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지파들을 모아들이라고 너를 불렀고 그 일은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부름은 네게 다가오고 있는 일에 비하면 단지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가 비장해두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를 온 세상을 위한 빛으로 만들 것이다. 너는 온 지구상에 구원을 가져올 것이다”(45:5-6 참조).


마귀가 당신에게 당신이 헛수고를 하였다고, 당신의 기대가 충족되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영광 중에 더욱 큰 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 또는 구하는 것을 너머 더 나은 것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대적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성령께서 우리가 좀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역사하실 것을 믿으며 그 안에서 안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절망으로부터 일어나 이 말씀위에 서야 합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15:58).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나에게 너의 모든 내일을 맡겨라

주님은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믿을 수 없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한사람을 택하셔서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일어나 가기를 원한다. 모든 것, 너의 집, 네 친척, 네 나라조차도 뒤로하라. 나는 너를 어떤 곳으로 보내기 원한다. 가는 도중에 그곳으로 가는 길을 인도해 줄 것이다.


이 믿기 어려운 주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왜 하나님은 온 나라들을 뒤져 한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부르셔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도도 없이, 방향도 예상 못하고, 목적지도 모른 채 여행길에 오르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어떻게 먹이고 필요를 채우실지 결코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얼마나 멀리 가야하는지 또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지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애초에 두 가지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그리고 “내가 길을 보여 주겠다”.


요점만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늘 이후로, 나는 네가 너의 모든 내일들을 내게 맡기기를 원한다. 너는 네 남은 생애 동안 너의 미래를 한 번에 하루씩 내손에 맡기고 살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너에게 한 언약에 너의 생애를 의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것을 행하겠다고 결단하면 내가 너에게 복주고 네가 상상해 본적이 없는 곳으로 너를 안내하고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도하여 가시고자 하는 곳은 그분이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을 데리고 가기 원하시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학자들이 “모형 인간” 부르는, 즉 주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여야하는지 그 예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 결단으로 부르셨을 때 그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의 가족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계획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의 경중을 달아보며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에 대해 염려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우리의 모든 내일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라는 똑같은 부르심에 청종하였기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2009년 10월 23일 금요일

아버지께서 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으며 우리의 미래를 전부 그분의 손에 맡기는 삶의 길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6:31-14).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미리 계획을 세우지 말라거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일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염려의 대부분은 내일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짧은 단어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만일.


“만일 경제가 악화되어 해고당하면 어떡하나? 집 대출금을 어떻게 갚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까? 만일 건강 보험을 잃게 되면 어떡하나? 내가 병들거나 입원하게 되면 우리는 파산할 텐데.” 또는 “만일 고난이 닥쳐올 때 내가 믿음을 저버리면 어쩌나?” 우리 모두는 수천가지 “만일”로 인해 근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만일”을 중단시키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너희를 돌보실지 알고 계신다.” 더 나아가 “너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너희 아버지께서 네가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너를 절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신실하게 너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너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6:26, 28-30).


우리는 과거 우리가 지은 죄들을 주님께 넘겨드림으로 즐거이 우리의 모든 어제를 그분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지난날 실패들, 의심들, 두려움들을 용서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일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인즉,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의 꿈을 붙들고 있을 권리를 원하면서 우리 미래에 굳게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동떨어져서 계획을 세우고는 후에 그 희망과 욕망을 축복하고 이루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2009년 10월 22일 목요일

평강과 안전

나는 다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로 부터 표류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나태해지고, 영적으로 태만해지며, 기도없는 삶에 휩쓸리고, 며칠 씩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 않고 지낸다고 생각하면 몸이 떨립니다. 나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이 악한 표류의 “영적 쓰나미”를 목격했습니다. 교단들 전체가 무감각이라는 폐허를 흔적으로 남기고 지나가는 이 쓰나미의 물결에 휩싸여버렸습니다. 성경은 신실한 신자들도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할 수 있다고 명백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평강과 안전을 추구하고 그저 구원에만 매달려있는 크리스천은 비싼 영적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로부터 표류하거나 그토록 위대한 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바울이 그 방법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1).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빨리 속독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루에 많은 장을 읽는다든지, 또는 성경을 빨리 통독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뿌듯한 성취감을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읽은 것을 영적인 귀를 열고 “듣는” 것이고, 그것을 묵상함으로써 우리 마음가운데에 “들리게”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부동하게 머물러 있는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2:1)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바울은 이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들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서 당신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영적 재고 조사를 해 보십시오. 당신은 예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알기에 당신이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분이 당신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셨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구속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당신과 그리스도의 교제는 어떠합니까? 당신은 아주 근면하게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까? 당신의 어려운 때에 그분에게 기대고 있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내 삶에서 조금씩 표류하는 것이 보입니다. 졸음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점점 기도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정도에서 어긋났습니다.”라고 깨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

2009년 10월 21일 수요일

구원자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하사...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벧후2:4-9).


이러한 예들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안위하기위하여 명백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는 내 동정심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두 개의 예를 보여주었다. 세상을 삼켜버리는 홍수가운데서도 내가 의로운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다면... 또한 너도 구해 낼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기적적으로 탈출 할 길을 내지 못하겠느냐?


“내가 단번에 도시 전체를 태워버릴 불과 유황의 심판을 내릴 수 있다면, 또 그 혼란 속으로 천사를 보내어 롯과 그의 딸들을 구해 낼 수 있다면...네 시련가운데서 너를 구원하도록 천사를 보내지 못하겠느냐?


의로운 사람을 위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불같은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그의 대적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기 위해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또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시련에서 구하시기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들이 굶주려 죽지 않도록 기적의 떡과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식을 먹이셨습니다. 홍수로부터 노아를 구하시기 위해 방주를 짓게 하시고, 불로 멸망당하지 않도록 롯을 천사로 호위하여 구해내셨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 법을 아시고,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씀한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는 단순하게 “하나님이 이미 계획을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놀라운 진리는, 우리가 그분께 부르짖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이미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깔고 앉아계시지 앉습니다. 다만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일생의 가장 힘든 고난에 얽혀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내실 것인가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쓰인 예레미아 29장에서 보게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었던 가장 어려운 고난 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칠십년이 지나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to give you an expected end(KJV)}(29:11) 마지막 구절은 문자 그대로 “네가 기대 하던 것을 주리라”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구원을 받을 준비가 되도록 계속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2009년 10월 20일 화요일

가만히 서서 알라

1958, 나는 일곱 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한 절름발이 소년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는 뉴스를 접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령이 내안에서 너무도 강력하게 감동하셨기에 나는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뉴욕 법정으로 가야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 아이들에게 말하라고 나를 충동하신다고 확신하며 법정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날의 공판이 끝나갈 무렵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 소년들은 쇠고랑을 차고 옆문으로 인도되어 나갈 것이고 나는 그들을 다시 못 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소년들이 감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기위해 판사석을 향하여 통로를 걸어갔습니다.


그 즉시 경찰들이 나에게 달려들어서 다짜고짜 법정 밖으로 나를 호위해 나갔습니다. 나의 사방에서 온통 플래시가 터지고 나는 이 재판을 취재하던 기자들의 질문에 둘러 쌓였습니다. 이러한 모욕적이고 민망한 상황에 나는 완전히 멍하여져서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고향의 내 교회에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 나는 너무 순진했었다,” 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혼란 가운데, 나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이 나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물론, 취재진들이 내가 보기보다 더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나는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므로 이미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습니다.) 소리를 내어 크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하나님은 이 불쌍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늘 나의 침묵의 부르짖음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 법정에서의 민망스런 바로 그 장면으로부터 십대 청소년을 위한 Teen Challenge 사역이 태동하여 오늘날 전 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기쁘게 시편 34편에 나오는 다윗의 겸허한 증언을 같이 나눕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듣고 기뻐하리로다” (34:2).


요점을 말하면 다윗은 여기서 “나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대대로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겸손한 백성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주님은 그분께 부르짖고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아주 바보스럽게 행동 하였을지라도 그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긍휼과 사랑으로 나를 구원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의 복된 주님은 큰소리든, 소리를 내지 않든, 모든 신실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리석게 행동하였거나 엄청난 믿음의 실패를 했다 할지라도 다만 당신의 구원자에게 돌아와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은 신실하게 당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행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