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31일 수요일

한 성도가 보낸 편지

“데이빗 목사님, 몇 년 전 제 남편이 그에게는 너무도 소중했던 직장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이 그에게는 큰 비극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모든 자부심을 잃고 좋은 수입도 잃었습니다. 그 후 제 남편은 그 타격으로부터 결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다시 직장을 찾긴 했지만, 그가 받는 보수는 이전 직장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제가 우리 가정의 주된 부양자입니다.”

“몇 주 전, 제가 읽을 것을 찾던 중, 성령의 인도 하심으로 전에 보관해 놓았던 책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 상자에서 목사님의 오래된 설교 중 하나인, '막바지라고 불리우는 곳'이라는 설교를 꺼냈습니다. 제가 이 메시지를 읽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제가 바로 그 '막바지'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의 이 메시지를 통해, 제게 남편을 향한 분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제 남편, 곧 육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제게 공급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며,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구해 주실 유일한 분이시자 제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이제 저는 제 남편이 저를 결코 구해낼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읽으며, 저는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매우 힘겨운 상태입니다. 때로는 제가 앞날을 생각해볼 때는, 이스라엘 자녀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잠재적 재난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제게 공급하시는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해 제가 의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가르쳐 주셨듯이, 제가 또한 깨달은 것은, 제가 두려움을 잘 자제하긴 했지만, 제 의심에 결코 치명타를 가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끝내기를 원합니다. 아직은 그 실제적 공급이 오지는 않았지만, 저를 사랑하시고 제게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께 더 힘든 날들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리로 나오셔야만 합니다. “예수님, 저는 지금 제 모든 염려를 당신께 맡깁니다. 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부요하심의 상속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의 부요함이 제 모든 육적 필요의 온전한 공급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부분에 대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2013년 7월 30일 화요일

아버지의 위로



한 입양된 아들이 있는데 그가 성장해서 그 아버지에게 속한 모든 부의 주권을 상속받았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 아들은 자기가 노예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인들과 더불어 빈곤자의 삶을 계속 살아갑니다.

이 젊은이의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그가 사랑 받고 있으며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며, 속박 가운데에 있는 그를 위로하는 것이 타당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아들이 자신의 유업을 주장하며 그의 빈곤을 떨쳐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그에게 속한 부를 취하라고 설득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속박 가운데에 있는 우리를 위로만 하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내 아들딸들아, 너희가 언제나 내 옆에 있는 너희 자리를 차지하려니? 언제 내 집으로 와서 너희에게 이미 다 속해있는 모든 자원을 취하려느냐?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갈라디아서 4:6-7)

만일 예수님이 당신의 주님이시고 구원자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의 자녀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상속자이자,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모든 부요하심에 대한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물론, 상속인으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물질적 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금이나 은을 많이 가진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2: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에서 예수님께 모든 부요함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갖고 계십니다.

한편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적 삶이 잘 되는 것에도 관심이 있지 않으신가요? 제 힘든 날들 대부분은 부족한 재정 때문이거든요. 저는 생계를 유지하는 문제를 가지고 항상 걱정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 천부께서는 당신의 모든 육적 필요를 공급하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분께서 언약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영광 가운데서 그의 풍요함을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 (빌립보서 4:19) ‘필요’라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부족하거나 필요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이라는 뜻의 어근으로부터 비롯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염려 즉 사업과 재정,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을 돌보시는데 신실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취업,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가정도 포함해서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분 선하심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힘, 지혜, 은혜, 또한 그분의 완전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요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은혜조차 초월한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 있습니다."

2013년 7월 29일 월요일

마지막 때에 드러날 하나님의 권능 by Gary Wilkerson


제가 엘살바도르의 한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 성도들의 하루 평균 수입은 불과 4불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가 더욱 놀랐던 것은, 그들이 그 중의 2불을 구제 금으로 헌금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왜 그리도 많이 주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오히려 그들의 궁핍함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들이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 아닙니다! 우리는 축복받았고, 그 축복을 나누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불경건이나 자만으로 부풀어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은행 잔고가 거의 바닥났을 때에도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열정이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축복받은 만큼 다른 자들을 축복하는 일을 꺼릴까요?

다가오고 있는 환란의 때는 우리 마음의 중심을 드러낼 것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시민 중에서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믿는 자라고 여기는 사람의 수는 미처 반도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삼십 세 미만의 젊은 층에서 믿는 자의 비율은 그것도 훨씬 못 미치는 30퍼센트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들 중 다수가 그들의 종교 단체 가입 여부를 묻는 난에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그나마 믿는다고 여겨지는 이 남은 세대는, 세속주의와 불신의 영향으로 인해 십 년 이내에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추정됩니다.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핍박은 계속 증가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히브리서 10:32) 하나님께서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복음의 능력을 위한 도구로 전환시켰습니다. "혹은 비방과 환란으로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33-39)

이 말씀이 두렵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안에는 좋은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이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서도 그분은 무언가 영광스러운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가오는 환란의 때에 그분의 권능을 드러낼 마지막 때의 교회를 준비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2013년 7월 25일 목요일

사도 바울에게도 궂은 날들이 있었습니다

바 울은 마케도니아에서 여행하는 동안 힘든 날을 맞았습니다.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육신은 편하지 못하였고 사면에서 고난을 받았으니,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고린도후서 7:5) 이 거룩한 사도는 자신의 속 사람도 그저 한가지 두려움뿐만 아니라 많은 두려움으로 인해 시달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초-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도 우리가 모두 직면하게 되는 똑같은 인간적 감정을 지녔습니다. 한 때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했던 아시아의 모든 성도가 그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를 더욱 넘치게 사랑할수록 내가 덜 사랑받는다 할지라도” (고린도후서 12:15)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도 황망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날들이 가져다주는 느낌이나 유혹에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최악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때에도 이렇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위로로 충만해졌으니,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나는 기쁨으로 차고 넘치도다.” (고린도후서 7:4).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셨으며” (6절)

당신은 힘든 날, 힘든 주간, 아니면 오랜 세월 동안의 끊이지 않는 낙망의 때를 통과하고 계시는지요? 당신은 포기해버리고 싶은 생각들로 사로잡힌 채 실망하고 좌절하셨나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시련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당신을 꾸짖거나 훈계하실까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좌절하고 상처받았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며 도와주시려 준비하고 계시다.”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어떠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1:3-4) 여기서 쓰인 단어 ‘위로하다’가 헬라어로는 “위안하는, 용기를 북돋워주는, 그 사람 쪽으로 부르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요! 우리가 힘든 날들을 경험할 때 우리 천부께서는 그 시련의 기간을, 우리를 더 그분 가까이로 이끄시려는 통로로 삼으십니다.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일진이 안 좋은 날에는

제 경우에 일진이 안 좋은 날들은, 주님과 홀로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공부할 때 주로 오곤 합니다. 저는 제 무지의 감정에 의해 곧잘 눌리곤 하는데, 그것은 제 앞에 온 대양과도 같은 광대한 진리가 펼쳐져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 방대함 때문에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보다도 더 좌절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은 300년 전에 살았던 설교자들의 위대한 글을 읽을 때입니다. 저는 결국 이렇게 외치고 맙니다. “오, 주님, 이 영적 거장들에게 비하면 제 이해의 정도는 너무도 미약합니다. 그들은 아직 개화되지 않은 시대에 살았는데도, 나이 든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진리를 그들 젊은 나이에 썼습니다. 그러한 명철을 갖기가 제게는 왜 그리 힘든 겁니까?”

그에 대한 유일한 답변으로, 바울 서신에서 이 말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2:9) 모든 능력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진리를 깨닫고 거룩한 삶을 유지하는 능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 엄청난 보물이 각 질그릇 안에 들어있게 하심은, 모든 영광이 그분께 드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당신의 나쁜 하루가 당신 믿음을 공격하는 마귀의 일이라면, 그것을 감당하는 일 자체가 영적이지 않게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한 경건한 젊은이가 제게 전화해서는 울먹이며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오늘은 제 인생에서 최악의 날이었어요. 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이상한 느낌이 제게 몰려왔는데 그것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요. 데이브 형제님, 정말 하나님이 계신지 모르겠어요!”

이 젊은이는 그 의심의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 전혀 몰랐고, 그의 마음을 침범한 끔찍한 생각들로 인해 충격받고 상처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어요. 그리고 그분이 정말 존재하는지 의혹스러운 마음만 들고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이런 끔찍한 생각들은 상상도 하기 싫어요."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제 말을 믿으세요. 이것은 하나님께 귀한 젊은 성도들에게 마귀가 즐겨 행하는 상투적 속임수입니다. 그가 당신의 믿음에 해를 끼치며 당신을 혼동케 하려는 술책입니다.”

저는 이 젊은이에게, 제 아들 게리가 힘든 때를 지내고 있을 때 해줬던, 같은 조언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저 잘 견디렴. 네 하늘 아버지는 네가 겪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계시고, 네가 그것을 잘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거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실 거라는 언약을 꼭 기억해라. 그저 그분을 계속 찾아라—오직 믿음으로 말이다!” 

2013년 7월 23일 화요일

질그릇에 담긴 보물

그 리스도인의 삶이 순조로운 항해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경건한 성도라 할지라도 모든 성도는 궂은 날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좋은 날만의” 구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삶이 평탄할 때뿐만 아니라 힘들 때에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시기가 닥쳤을 때 그분은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면 내가 다시 오겠다.”며 사라지지 않으십니다. 절대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시며 자비로우십니다.

그의 서신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그 능력의 탁월하심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님이라.” (고린도후서 4:7)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분의 임재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질그릇'이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연약한, 쉽게 부서지는, 쉽게 유혹받는”, 즉 “부서지기 쉬운 토기”라는 뜻입니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이것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육신에 예수님의 임재를 담고 있느니라. 그러나 우리 육신은 연약하고 쉽사리 유혹당하며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

사실상 우리는 모두 성경에서 말하는 “질고”로 인해 고통당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들 삶에서의 주된 질고는 허약한 체질이나 안 좋은 건강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잦은 병에 대해 언급했고, 그것을 “자주 앓는 병고”라고 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23) 여기서 사용된 용어 '질고'의 헬라어 의미는 “병약한, 힘없는, 마음이나 육신이 허약한”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육체적 고난 외에 다른 질고가 있는데, 그것 역시 감당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저는 정신적 질고가 사람들이 가장 흔히 당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감정이 당신을 배반하며 당신 마음을 착각하게 하는, 설명하기 힘든 경우를 말합니다.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죄책감, 두려움 그리고 불안감 등은 모두가 마음의 병고들입니다. 당신은 당신 과거의 문제나 여전히 당신 삶에 붙어 있는 어떤 죄로 인해 시달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병들은 당신의 감정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와 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러한 공격을 견디는 과정에서 영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하늘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그분은 절대 당신 홀로 싸우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의심을 몰아내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실 겁니다. 마귀와 싸우려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다음 공격이 올 때면,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 달려가십시오. 그리고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하나님으로부터 능력 받은 삶 by Gary Wilkerson

믿 는 우리는 하나님의 방도를 알기 원하며 복음의 진리를 듣지만, 그것을 실제로 삶에 적용시키는 일은 회피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설교 말씀을 경청하며 예배는 기꺼이 드리나,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슬픈 실상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으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린도전서 2:4).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우리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지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서기 100년에도 그분 백성에게 능력 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희가 '종교개혁이 있을 때까지만' 이보다 더한 일을 하리라." 바울은 복음의 능력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고,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로 인해 디모데에게 그 능력이 임하기를 원했습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디모데후서 3:1-5)

바울은 여기서 믿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들을 "경건의 모양"만 있는 자들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은 회당에 가서 성서적 문구를 읊는다든지 종교적 예식에 참여하는 일은 기꺼이 행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이렇습니다. "이러한 자들과 어울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들의 행위가 옳은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건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 내면의 중심을 보고 계시다. 그리고 그들의 불경건과 자만을 보신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3:7) 달리 말하면, 그들은 모든 복음의 가르침은 들었으나 그것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능력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진리를 대적"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3:8)

바울이 본 장의 말씀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주목하십시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3:1) 그때가 되면 "평범한" 기독교 정신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며, 피상적인 신앙은 그러한 시험의 때에 말라 죽게 될 것임을 바울은 명백히 기록합니다. 아마도 저는 가장 예언적이지 못한 그리스도인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무딘 저라도 시험의 때가 임박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경제가 위태로워지면 미국 서민은 재정적 환난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치적 대변동이 고조되면 더 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환경이 참담해질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마음은 시험의 때를 감당할 준비가 실제로 되어 있습니까? 저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가 기근이 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했던 일을 우리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기근을 예비해서 생필품을 저장해놓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고통 받게 될 다른 교회들을 도울 준비를 했습니다. 

2013년 7월 19일 금요일

당신의 행위를 살펴보십시오

학 개 선지자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는 승리의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은혜 가운데 걸었던, 열린 하늘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의 완성되지 않은 성전을 보았을 때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오 너희들아, 이 집이 황폐하였는데 너희가 너희의 지붕 덮은 집들에 거하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숙고해 보라.” (학개 1:4-5)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을 멈추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우리 자신의 안락함뿐만 아니라, 낙심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학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지난 일은 잊어버리시오! 당신들의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당신들이 이 모든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멈추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의 일을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십니다. 자, 일할 도구들을 주어 들고 주님 안에서 당신의 자신감을 되찾으십시오. 기도 골방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신뢰했던 자리로 돌아가세요. 곧 그분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될 겁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주께서 스룹바벨의 영과…여호수아의 영과 …백성의 모든 남은 자의 영을 움직이시니, 그들이 와서 만군의 주, 곧 그들 하나님의 집에서 일을 하였더라.” (14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라…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개 2:18-19)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믿음과 의로움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학개 선지자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말씀을 선사합니다. “오, 큰 산아, 네가 누구냐? 너는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큰소리와 함께 머릿돌을 내어 놓으리니, 부르짖기를 ‘은혜가, 은혜가 그것에 있을지어다.’ 하리라.” (스가랴 4:7)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는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시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마음을 다시 한번 동하게 할 것이고, 당신은 마침내 당신 부르심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분의 능력으로, 당신 삶의 모든 견고한 진들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펼쳐놓으신 경주를 마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당신은 스가랴처럼 외칠 것입니다. “은혜, 은혜로다! 하나님은 나에게 자비하시고 신실하시도다!” 

2013년 7월 18일 목요일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스가랴 4:6)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두 명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스룹바벨과 대 제사장인 여호수아는 주님께 순종하며 열심과 충실함으로 그분의 일을 수행했던 경건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거센 대항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타락한 무리와 우상 숭배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질투하는 사마리아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일을 막기 위한 저항을 했습니다. 마침내 이 무리들은 그 두 사자의 사명을 저지하는 판결을 내리게 할 수 있는 고레스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 후,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반항와 중상모략, 그리고 오해를 받아가며 더욱 지치고 힘들어졌습니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물러서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고레스로부터 성전재건 수락을 철회하라는 어떤 칙령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일은 잠시도 중단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일을 추진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여전히 보유하고 계셨던 겁니다.

항상 그러듯이 사탄은 바로 이때다 하며, 타협적 삶을 부추기는 왜곡된 신학을 가지고 나옵니다. 이 경우에 그의 교리는 이러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야. 고레스의 말이 그것을 확인해주었지. 주님께서 재건하기에 적절한 때를 우리에게 알려 주실 거야. 그 동안 우리의 집을 짓자. 우리도 우리 종교를 즐길 필요가 있어!”

간단히 말해서, 이 두 경건한 사자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은 노골적 불신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도와주실 거라는 모든 확신을 깡그리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이와 똑같은 불신의 영이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는 것을 봅니다. 설교자들은 제게 매우 황당하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저는 은퇴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사람들과도 할 만큼 다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어요. 제 은퇴날짜가 오는 즉시 저는 여기서 나가버릴 겁니다.”

아니요! 이것이 절대로 진정한 하나님 종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만일 당신이 성령 안에 살며 그 안에서 사역하고 계신다면, 당신의 연륜이 찰수록, 더 오랜 세월 동안 사역할수록, 그 모든 시련을 통해 더욱 강해지며 성장할 것입니다. 당신께 하나님의 일은 해가 지남에 따라 더 흥미진진한 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3년 7월 17일 수요일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 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더듬거리는 혀를 고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3:19) 이 구절에서 “말을 더듬다”가 히브리어 단어로는 “결함이 있는 발언”을 뜻합니다. 그 의미는 능력도, 아무런 진실성도 없는 말을 하는 자의, 확신 없이 주저하는 말소리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선지자의 단호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천한 자는 비열하게 말하고 그의 마음은 죄악을 행하며, 위선을 행하고” (이사야 32:6) 여기서 "비열"이 히브리 단어로는 “어리석음, 사악한 범행”을 뜻합니다. 그것은 “멍청이, 바보”를 뜻하는 'nabal'이라는 단어로부터 유래합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사악하고 멍청한 자가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한다. 그의 말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주를 대적하고 주린 자의 혼을 텅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애리라.” (6절) 그 자신이 범하는 실수가 결국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게 됩니다.

저는 어떤 다른 것보다도 한가지 특별한 죄가 진리를 그처럼 노골적으로 왜곡하게 만든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많은 사역장에 만연해 있는 불신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의 죄를 “이집트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움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주를 찾지도 아니하는도다!” (이사야 31:1) “반역하는 자녀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그들이 계획을 세우며, 내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덮개로 덮나니...이집트로 걸어 내려가며” (이사야 30:1-2)

이사야는 많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나라의 정책과 안전에 대한 조언을 청하러 그들의 말에 올라타고는 이집트로 질주하는 것을 보자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찾거나 주님께 여쭐 시간이 없다고 선지자에게 말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두를 반역이라 책망하셨고 그들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집트로 내려가는” 사고방식에 대한 세미나와 집회에 참석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닙니다. 그들의 정보망은 잘 짜여져 있고, 전략적이며, 세상적 방법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영감의 조언을 받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무엇이든 그들을 흥미롭게 하는 새로운 것들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신실한 종은, 이집트의 개념들을 구할 시간이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달려가는 유일한 장소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는 그의 기도골방입니다!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진실된 하나님의 종

이 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와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해 예언할 때,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이 마지막 때의 우리 사역에 대해 결론적으로 이렇게 정의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평강의 왕이 다스리기 위해 오시기 바로 전에 사역하게 될 진정한 하나님 사람들의 표적을 알기 원한다!"

이사야는 이러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보라,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이사야 32:1) 이 선지자는 또 이렇게 덧붙입니다. “한 사람이 바람을 피하는 곳과 폭풍을 가리는 곳같이 될 것이요. 마른 땅에 흐르는 강 같고 피곤한 땅에 있는 큰 바위의 그림자 같을 것이니라.” (2절)

저는 이사야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종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충만하심에 대해 전파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성도는 자신의 주님이 그의 영혼을 물 댄 동산처럼 만들어주실 것을 신뢰하며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그는 요동치 않는 확신 가운데 살며, 그의 영혼은 안식과 평강으로 가득합니다.

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죄가 불러일으키는 거센 “폭풍”을 그의 영혼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전적으로 성령께 의지하며, 그의 영은 마치 한마리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그에게는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와 그의 주님 사이에서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기쁨이기에 그의 마음에는 노래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 종은 의인을 보호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인 보장과 위안을 붙들고 있기에,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를 대적하려고 만들어진 어떤 무기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대적하는 모든 혀를 대항해 일어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곤고한 땅에서 하나님은 그의 방패입니다!

이사야는 의로운 종으로 구별될 수 있는 두 가지 표적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그가 분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뚜렷하게 분간한다는 것입니다: “보는 그들의 눈이 침침하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그들의 귀가 경청하리라.” (이사야 32:3)

우리는 이러한 예를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처음 대면했을 때 볼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그분을 향해 오는 것을 보셨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한복음 1:47) 달리 말하면, "형제들이여, 볼지어다! 그는 위선이 없는 자로다. 그에게는 거짓도 부도덕함도 없도다. 그는 정결한 그릇이라!"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힘이 없습니다 by Gary Wilkerson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12:48)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힘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께는 이 말씀이 무례하게 들릴 수도, 또 다른 분들께는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말씀은 제가 교회를 향해 하고 싶은 말씀은 별로 아닙니다.

오늘날의 전형적 그리스도인의 "정상적" 기독교가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약간은 주관적이자 물질주의적이면서, 대부분 그의 일과는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의 일과는 교회 모임에 나가고 인터넷 방송을 시청하며 기독교 세미나에 참석하는 등의 영적 추구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축복된 삶을 누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세상적 추구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가 아닌 자기개선에 관한 것에 불과하며, 참된 복음의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인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정상적" 기독교에 속한다는 삶이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무력할 뿐만 아니라 아무 열정도 없으며, 자아 헌신이 결여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십자가가 없는, 즉,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적 행위입니다.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고, 누구에게도 짐을 지우려는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영적" 추구가 하나님의 심장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지, 아니면 부질없는 헛수고만 하는 것인지, 교회가 영적 성찰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복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별로 설교하지 않으며, 그분의 왕국을 향한 열정도 없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당신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자들이 거의 없는 교회 말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며 복음을 선포하고 각 성도에게 적합한 가정모임이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은 제가 겸손히 말씀 드리자면, 두 번째 선택이 당신의 영적 건강에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예수님께서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배운 만큼의 성경적 진리와 상응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무섭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7월 12일 금요일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선 지자 이사야는 “들을 수 있는 자들의 귀”가 언젠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실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의 청중은 하나님의 음성에 그들의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계속 붙들고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너희가 듣지 않았고, 오히려 내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즐거워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나 너희는 굶주리리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나 너희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의 즐거움으로 인해 노래할 것이나 너희는 마음의 슬픔으로 인해 울부짖으며 영의 괴로움으로 통곡하리라.” (이사야 65:12-14)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사랑의 경고를 거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요. 우리 육신의 죄를 극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을 때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해해 주실 점은, 자신이 미워하는 죄에 사로잡히게 된 어떤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제가 말하려는 것이 아닐뿐더러, 성령께서 그를 자유케 할 때까지, 자신에게 그 어떤 안식도 허락하지 않을 성도에 대해 말하려는 것도 더욱 아닙니다. 그보다는, 마침내는 자기 죄를 사랑하게 되어서, 자기 머리를 드릴라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성도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굳어진 양심을 소유한 자입니다.

죄악의 길을 계속 걷고 있는 종은 어떤 음성을 들을지는 몰라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닐 겁니다. 대신, 그는 망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망상을 택하겠고, 그들의 두려움을 그들에게로 가져오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았음이라. 그러나 그들은 내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고 내가 기뻐하지 아니한 것을 택하였도다.” (이사야 66:4)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끔찍할까요! 그러나 성령께서 사랑으로 경고하시며 죄로부터 우리를 보존해 주실 거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2013년 7월 11일 목요일

어두움의 일들

“만 일 네 눈이 악하면 네 온 몸도 어두움으로 가득 찰 것이라. 그러므로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크겠느냐? (마태복음 6:23) 성경 말씀은 숨겨진 죄가 “어두움의 일”이라고 분명히 기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두움은 사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 즉 한때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도 전파하셨다.” (베드로전서 3:19-20) 라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은 이러한 영혼들을 어두움의 감옥 속에 던져 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모든 자의적 불순종의 행위는 우리 속에 있는 분별의 빛을 어둡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차 진리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이 왜곡되며, 우리의 “열린 하늘”은 점점 흐려지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숨겨진 죄가 우리 영혼 위에 짙은 어두움을 드리울 때마다 많은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경고와 죄에 대해 깨닫게 하심을 저항하며 거절하는 것보다 그분을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한 편지에 묘사된 이 비극적 실례를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남편은 인터넷 음란물에 완전히 중독 됐습니다. 저는 지금 이혼소송을 제기했는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 25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습니다. 저는 그가 자기 방문을 닫고 들어가서는 왜 그토록 많은 시간을 컴퓨터에서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날 우연히 그 방에 들어갔을 때, 컴퓨터 화면의 더럽고 불결한 장면을 보고는 너무도 충격받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현혹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성격은 바뀌었고, 강퍅함이 그를 장악했습니다. 저는 그가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어쩔 수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사도 바울은 “허망한 마음으로” (에베소서 4:17) 행하는 자들을 향해 소름 끼치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죄를 합리화시키며, 그로부터의 탈출을 더 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명철은 어두워졌으며” (18절)

그들이 어떻게 그처럼 어두워지고 눈이 멀어졌을까요? 그들은 죄에 자신을 내어주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는 무분별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 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 (19절)

청교도 저자 존 오웬은 그러한 비극적 결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떤 지배적 욕정에 사로잡힌 자는 거짓된 안도감 속에 거하며, 그로 인해 곧 다가올 위기의 때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열린 하늘

예 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 (요한복음 1:51) 이 구절의 헬라어 표현은 “반복적인” 이라는 의미를 함축한 어근으로부터 나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계속해서 계시들을 열어주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죄나 어두운 비밀을 갖고 있지 않으며,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사는 모든 복음 사역자에게 이와 같은 언약을 하십니다. 그러한 종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계시의 흐름을 지속해서 공급받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신선한 말씀을 계속해서 공급받는 하나님의 사자로 행합니다.

저는 요즘 몇몇 무명의 젊은 설교자들로부터 듣는 신선한 기름 부음의 말씀에 자주 놀라곤 합니다. 우리는 온 나라 전역으로부터 수많은 설교 테이프를 받는데, 가끔 그러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테이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계시를 듣게 될 때면, 저는 때때로 그것을 설교한 사역자에게 전화해서 더 많은 테이프를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만일 그 테이프가 계시와 메시지에 있어서 일관성이 증명되면, 그 설교자는 타임스 스퀘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초청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은 우리 담임 목사이신 카터 콜론 목사님도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종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에서 솔직하고 순전하며, 감출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삽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에게 헌신되어 있으며 조금의 야망의 기색도 내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의 깨어있는 많은 시간을 오직 기도로 보내며 작은 목회도 기쁘게 섬깁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마치 생명의 강처럼 그들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계시로 충만합니다.

우리 교회는 또한 경건한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끔 제가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듣게 되면, 저는 경탄으로 머리를 저으며 이렇게 의아해합니다. “이 주님의 종들은 그토록 놀라운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능과 충만의 계시를 대체 어디서 받는 것일까? 저들이 신학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닌데도, 순수하며 거룩한 계시의 흐름을 가르치고 있네!”

나다나엘처럼, 그들에게는 간사함이 없으며, 비밀스러운 습관이나 죄가 없는 주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들으며 분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 심장의 고동소리를 명확히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2013년 7월 9일 화요일

거저 주어지는 은혜!

“아 버지가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지만, 너의 이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어버렸다가 찾았기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니라.” (누가복음 15:31-32)

탕자인 작은아들은 자신의 죄가 불러온 고독의 수렁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에 대해 완전히 참패했고, 비참함 가운데서 그의 고통을 훨씬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경험했는데, 그것은 바로 잃어버려짐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에게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고 말입니다. 그는 결코 아버지께 보답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어떤 선행으로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는 어떤 회복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자신의 잃어버려짐을 전혀 느껴본 적도 없고,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공백을 메꾸려는 노력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할 필요성을 절대 직면해보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깊은 공백은 행위나 언약, 또는 의지적 노력에 의해 결코 메꿔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사랑 안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특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것 외에는 그 어떠한 간구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그 공백을 메꿀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가 여기에 쓴 모든 것에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윌커슨 형제님, 당신은 죄인들에게, 그들이 회개만 한다면 모든 것이 금방 좋아질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과거를 깨끗이 용서하시고, 즉시 그들에게 그분의 은총과 축복을 가져다주실 거라고 말하고 있어요.”

맞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제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철저한 회개와 통회함, 그리고 겸손 가운데 주님께 돌아올 때마다, 그는 즉시 그의 사랑하는 목자의 팔에 안겨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자신의 자존감에 대해 못 박힌 자들과 자신이 얼마나 잃어버린 자인지를 인식하는 자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2013년 7월 8일 월요일

베니게에서 겨울을 날까요? by Gary Wilkerson

바 울과 "다른 죄수 몇 명"은 로마로 이송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여정은 절대 순탄치 않았습니다. 항해가 매우 위험해지자 바울은 '아름다운 항구'라고 불리는 곳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그들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또 그 항구가 겨울을 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어찌하든지 베니게까지 가서 겨울을 나자고 권고하는 자가 많더라." (사도행전 27:12)

폭풍을 지날 때 우리는, 우리가 전함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사탄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의 권세와의 끊임없는 투쟁을 당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베니게에서 겨울을 날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우울증, 가정파탄, 자라나는 청소년층의 헤로인중독, 그리고 수많은 도시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의 근원인 원수마귀를 대항해서 전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즉, 그분께서 묶여있는 자들의 족쇄를 부수고, 곤경에 처한 가정을 자유롭게 하며, 그분의 관대한 사랑으로 가장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반드시 도우실 거라는 믿음으로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이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자세가 반드시 요구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 자체가 항상 우선순위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우리가 의뢰한 자를 아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12 참조)

이것이 수긍이 되는지요? 당신 마음에는 당신의 행선이 예수님을 제치고 우선순위가 되어있습니까? 안위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또는 성공적 사역체를 소유하고 싶은 육적 욕망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십시오: 그분께서 당신이 열심히 일하거나 헌신적으로 섬기는 일을 멈추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 당신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당신께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만일 당신이 베니게에서 겨울을 나고 계신다면, 지금 로마로 행선을 바꾸라고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위한 사명"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2013년 7월 5일 금요일

탕자와 그의 형

탕 자와 그의 형은 둘 다 똑같은 분량의 실수를 범했습니다. 작은아들은 거룩의 장성함에 이르러야만 하는 은혜의 목적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맏아들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항상 순종과 옳은 행실로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의 선행과는 전혀 상관없이 무조건 늘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상 그의 아버지는 그를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가서 그에게 권하더라. 그가 자기 아버지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보소서, 수년 동안 내가 거역하지 아니하였으나 내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나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았나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더불어 탕진해 버린 그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셨나이다.” (누가복음 15:28-30)

이 맏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지난 모든 세월 동안 열심히 일해왔지만, 아버지는 제게 이런 종류의 사랑을 보여 주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심지어 저는 그런 사랑을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항변하는 아들의 근원적 문제를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동생이 은혜를 통해 얻은 것을, 그는 선행을 통해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느 율법주의자든지 자기 육신의 행위를 내려놓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우리 육신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잘 해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님 안에서 평강을 얻었습니다. 저는 승리를 얻기 위해 금식과 기도 등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노력했고, 이제는 마침내 그것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우리 육신이 항상 저항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 하심과 은혜에 의존하지 않으려 하며, 오직 그분만이 승리자로서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권세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 맏아들의 항거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의를 주장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콧등에는 악취인 것입니다! 

2013년 7월 4일 목요일

회개한 심령의 부르짖음

“그 때 큰 아들은 들에 있었는데, 그가 집 가까이 왔을 때 노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 하나를 불러서 이것이 부슨 일인지 묻더라. 종이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와서 당신의 아버지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무사하고 건강하게 돌아온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니이다 라고 하니 그가 화가 나서 들어가기도 싫어하더라.” (누가복음 15:25-28)

탕자의 형은 점점 더 화가 났습니다. 그 동안 그는 어떤 명령도 거역하지 않으며 아버지를 오랫동안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는 율법적으로 따지면 꿀림이 없었고, 그야말로 자신을 매우 정결하게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창문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은혜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아버지는 회개하는 아들, 그 잃어버렸던 아들을 포옹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어떤 질책이나 훈계도 하지 않았으며, 대신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는 아들로서의 온전한 은혜와 축복을 소유하는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 맏아들이 보았던 장면은, 아무리 깊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더라도, 단순히 자신이 주관하던 삶을 포기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회개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맏아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항의했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그토록 쉽게 받은 은혜의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돌아오는 죄인들에게 후히 베풀어지는 은혜에 항거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의 모형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 옆에 앉아서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제가 결코 저런 중죄를 짓지 않았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는 내일 또다시 실족할 수도 있어요.”

성경은 이러한 자만감이 그 어떤 중독보다도 치명적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0:12)

실상 이 탕자가 창문을 통해 그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자기 형을 보았을 때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오, 내 형님, 내가 형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를 알면 좋으련만! 형은 세상으로 나간 적도 없고 나처럼 죄도 안 지었잖아요. 형은 저보다 훨씬 좋은 간증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우리 가문의 명성에 먹칠한 기억을 갖고 평생 살아야만 해요. 나는 그 어느 것도 누릴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사실, 형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지요. 형과 함께 친교할 수 있다면 너무도 좋으련만!”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한, 겸손한 심령의 부르짖음이랍니다!

2013년 7월 3일 수요일

굶주린 그리스도인들

누 가는 탕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궁핍하게 되기 시작하니, 그가 나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더라. 그 주인이 그를 자기 농지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한지라. 그가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으나, 그에게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누가복음 15:14-16)

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종종 이러한 기아 현상을 보곤 합니다. 그들은 한때 은혜와 자비의 경탄할 만한 간증을 갖고 있었으나, 죄로 인해 어떠한 생명도 지니고 있지 않은 영적 해골들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때 그가 자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많은 품꾼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고도 남는도다. 그런데 나는 굶어 죽어가는도다! 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니,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17-19절)

이 젊은 탕자는 이렇게 시인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결국 이러한 축복을 잘 관리하지 못했어. 하나님과 내 가족에게 죄만 짓게 되었고, 내게 주어진 모든 축복을 탕진해 버렸어!”

회개란 그저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 통치를 완전히 내려놓고, 이렇게 고백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제 인생을 망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께 겸손히 나아가며 제 삶을 맡겨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회복의 일을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는 하인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 집에서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기꺼이 순복하며 아버지의 통치하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원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었고, 그의 아버지가 지시하는 대로 행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20-23절 참조)

이 얼마나 멋진 온전한 회복의 장면인지요!

2013년 7월 2일 화요일

은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타 임스퀘어 교회에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의롭다 일컬음 받는 것과 우리의 성화, 또한 그분의 아들 안에서 우리가 용납되는 것에 대해 설교합니다. 이 모든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중점을 둡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유한 유산을 쌓아두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누가복음 15:11-32의 비유에서 탕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고해 보십시오.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축적했을 때부터 그 재산은 그의 주머니로부터 새나가기 시작했고, 그는 욕정을 채우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축복은 오래 갈 거야!”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은혜의 축복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은 그분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묘사하는 모든 성경 구절로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면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용서의 메시지로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에 대해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그들에게 매우 큰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들이 이 부유하고 영광스러운, 그들을 향한 모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진리를 비축해 놓은 후에는, 그들의 육적 주머니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허가증이 되어버립니다!

그 탕자는 이런 식으로 그의 부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파티와 도박, 술 취함, 그리고 창녀들과 놀아나는 데에 탕진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밤마다 자기 축복을 남용하며 점점 더 깊은 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죄책감을 떨쳐버리고 그의 저장고로 가서는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 나는 괜찮아.”

이처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방종한 삶에 그 부유함을 쓰기 위해 어떤 금지된 쾌락의 장소로 향합니다. 그들의 정욕은 그들을 간통의 침대로, 코케인 중독으로, 동성연애로, 음란 외설물로, 술이나 마약으로 데려갑니다. 그들은 그들 죄 가운데서 자신을 계속 위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그분은 내가 육신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나를 사랑하실 거야.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시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왜곡되거나 남용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서, 우리로 신중하며 의롭고 경건하게 이 현세상을 살아가게 하시며” (디도서 2:11-12)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경건함과 의로움, 그리고 주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을 가르칩니다.

2013년 7월 1일 월요일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by Gary Wilkerson

환 란이 다가왔을 때 바울은 요동치 않았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사도행전 27:21-26)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으나, 저 같으면 그 말을 들었을 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이 배가 곧 파선할 거라고요? 어이쿠 주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만일 당신이 타고 있는 배가 곧 가라앉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당신의 부르심이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면 어떻게 반응하시렵니까? 우리 중 다수는 정체성 위기를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부르심으로 포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그 부르심이 우리의 가족이든, 직장이든 혹은 사역이든 지를 막론하고요. 우리가 타고 있는 배는 우리의 가정일 수도, 새 자동차일 수도, 우리 자녀가 운동을 잘하는 것일 수도, 또 그 외에 수많은 다른 것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주어진 배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은 없습니다. 또한, 그분의 부르심대로 우리가 섬겨야 하는 사람들보다 더 소중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타고 있는 배가 산산조각이 났을 때에도 그의 부르심 자체,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자를 안심시켜야 했으므로 폭풍이 지날 때까지 침착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이 안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언을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배가 가라앉으려는 때에 바울은 그들 모두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뭔가를 위해 당신을 부르셨다면 어떤 폭풍이 닥쳐온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끝이 아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여도 나는 할 수 있단다. 절대 포기하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