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7일 목요일

우리의 믿음 “고정하기”

사람들이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은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설교들을 들었고, 많은 책을 읽었지만 주위에서 난파한 믿음의 예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때 믿음과 맺어졌던 크리스천들도 그들의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소망을 갖기 위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성령은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믿음의 닻을 내려라.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마음을 고정하라.

 

우리의 믿음을 “고정” 한다는 것은 “안정시키다, 흔들리지 않도록 하다, 뿌리를 내리다, 기둥으로 받치다, 기초를 놓다”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썼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1:6-7).

 

이 구절에서, 주님은 전적인 책임을 믿는 자에게 두고 계십니다. 요점을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즘 같이 두려움에 떨고 불안한 시기에 세상이 내 백성을 볼 때, 그들이 믿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믿음은 굳건하고 뒤흔들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여, 너는 믿음의 닻을 내려라. 바로 너. 크리스천들아 자리를 고정하고 절대로 그 자리를 저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이 믿음에 대한 설교를 더 필요로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세상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남녀들의 삶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들이 직면하는 것과 같은 재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헤쳐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제 서야 죄인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강력한 증언과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31:19)라는 말로 이것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암흑가운데 있는 자에게 소망의 빛이 되는 강한 신뢰와 신실한 삶을 사는 믿는 자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모든 짐과 시련을 그리스도께 가져오며, 그분 발아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 안에서 안식할 때, 당신은 극심하게 시험받을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인내하는 믿음을 고정시키는 과정에 있을 때, 내가 진정으로 내 모든 짐을 주님께 내려놓았을 때, 나는 전화로 들려온 한 소식에 뒤흔들렸었습니다. 잠시 동안 공포의 홍수가 나를 휩쓸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믿음의 자리를 지켜라. 포기하지 마라. 내가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다. 그저 움직이지 말고 서있어라.” 그 순간 나에게 물밀듯 밀려왔던 평강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날이 저물 무렵, “나는 당신을 신뢰했습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깨달으며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2009년 9월 16일 수요일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것 배우기

나에게는 이것이 용서에 있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는 우리 주님의 은혜를 신속히 제공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에게는 빈약하게 나누어 줍니다.

 

다윗 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간음하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 남편을 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다윗은 회개하였고 주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51:8,12).

 

다윗은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요? 이 사람은 주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을 통해 화평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책에서 당신의 죄가 지워지는 것은 가능하지만 당신의 양심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다윗은 그의 양심이 자기 죄로 인하여 자신을 정죄하는 것을 멈추도록 하기위해 이 시편을 썼습니다. 아울러 다윗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함에 기인한 벌을 견디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벌이 바로 기쁨의 상실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므로 맺어지는 열매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나는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테일러는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선교사 중 한사람이며, 경건한 기도의 사람으로 중국의 광대한 내지를 총망라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수년간 기쁨 없이 사역했습니다. 그는 은밀한 동경과 불신의 생각들로 고통을 겪으며 자신의 고투로 인해 좌절 했습니다.

 

1869, 테일러는 혁명적인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눈물이나 회개 그 어느 것으로도 그분 안에 있는 복을 개봉할 수 없었습니다. 테일러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을 통하는 오직 한 길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맺은 모든 약속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테일러는 믿음을 분발시키기로 결단했지만 그 노력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가장 암담했던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믿음은 수고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위에 안식함으로써 오는 것임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든 복들에 접속되는 비법입니다.

 

테일러는 그리스도가 이미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고 말씀하셨던 죄에 대해 자신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들 위에 안식하였기에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염려들을 주님께 넘겨드리며 즐거운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9월 15일 화요일

시기와 질투의 씨앗들

우리 안에는 누구나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 누가 그것을 시인 할것인가 입니다.

 

토마스 맨톤이라는 청교도 설교자는 시기와 질투하는 인간 성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지고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유와 더불어 마셨습니다.

그것은 이토록 깊이 박혀있는 우리의 일부분입니다.

 

이러한 죄의 씨앗들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사역이나 일들의 성취 그리고 축복을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와 우리의 형제자매들 사이에 강한 장벽이 세워집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27:4).

 

야고보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3:14)

 

쉽게 말해서 이 시기와 질투의 죄는 맹독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붙들고 있으면 우리로 영적 권위를 상실하도록 할 뿐 아니라 악령들의 역사에 우리들을 노출 시킵니다.

 

전 성경을 통틀어 사울 왕이 이에 대해 가장 명백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8장에서 다윗은 블레셋사람들을 죽이고 전쟁에서 돌아옵니다. 그와 사울 왕이 예루살렘으로 말을 타고 들어올 때 이스라엘 여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다윗의 승리를 축하하려고 왔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 왕은 이 즐거운 축하연에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삼상18:8)

 

그 즉시 사울 왕은 시기와 질투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그에게 끼친 치명적인 결과를 봅니다.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 18:9)(시기하였더라) 비극적으로 이후부터 “사울이...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삼상 18:29)

 

사울 왕은 질투에 온전히 미혹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자신을 겸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시기를 시인하고 마음에서 뽑아내어 버렸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기름 부은 종에게 영예를 더하여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가장 낮은 자리로 자신을 끌어내릴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시기의 영에 이끌리어 가장 높은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일어난 일은 우리 모두를 거룩한 두려움에 싸일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 18:10-12).

2009년 9월 14일 월요일

서로 용납하기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3:13 저자 임의 강조).

 

용납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두 개의 개별적인 문제입니다. 용납하는 것은 보복하고자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을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당신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고통을 견뎌내십시오. 문제를 내려놓고 내버려두십시오.

 

헌데, 용납하는 것은 단지 신약에 나오는 개념이 아닙니다. 잠언서는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24:29)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우리는 이 훈계의 강력한 일례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나발이라는 사악한 자를 향하여 보복심에 불타 진노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움이 필요할 때 나발이 다윗을 돕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보복하기로 맹세하였으나 하나님의 충고에 순종하였습니다. “네 손으로 보복하지 말라....여호와가 네 싸움을 싸우도록 하라” 이 상황은 시의 적절하게 해결되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개입을 찬양하였습니다. (삼상 25장 전문 참조)

 

다윗은 또 한 번 손쉽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자신을 뒤쫓던 사울 왕이 다윗이 숨어있던 굴에서 잠이 든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이 사울 왕을 당신의 손에 붙였습니다. 이제 그를 죽여 당신의 원수를 갚으십시오,”라고 그를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참았습니다. 대신 사울왕의 옷자락을 베어 훗날 자신이 그를 죽일 수도 있었으나 그리하지 않았음을 증명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명한 행동들이 우리의 적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그 옷자락을 보여주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사울왕은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24:17)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제 용서하는 일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용서 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계명을 품고 있습니다. 첫째, 네 원수들을 사랑하라 그리고 둘째,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어느 나이 많고 지혜로운 설교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으면 당신은 나머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이 말이 참된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일이 쉬울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네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명령 하셨을 때 “사랑”이란 말의 헬라어는 “애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이해”를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을 제거해버리는 도덕적 결단의 문제인 것입니다

2009년 9월 11일 금요일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 됩니다

요한복음 15 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은 내가 나의 배우자와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관련된 것 입니다. 미혼인 사람들은 룸메이트, 동료 크리스천,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요 사역자가 되려면 나의 아내는 하늘과 지옥과 온 세상 앞에서 정직하게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남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합니다. 실수를 하긴 하지만 점점 더 인내하고 나를 이해합니다.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마음을 써줍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기도합니다. 그는 가짜가 아닙니다. 그가 하는 설교의 바로 그 실체입니다.

 

그러나 내 아내의 증언이 이러하지 않다면-만약 내 아내가 “내 남편은 본인이 그런 체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가슴에 비밀스런 고통이 있다면-내 인생의 모든 것은 허사 입니다. 나의 모든 사역들-설교, 성취한 일들, 자선 단체에 기부한 일, 그 많은 여행들-모두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닮은 열매를 맺지 않는 시들고 쓸모없는 나뭇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 안에서 죽음을 보게 하실 것이며 그분의 왕국을 위해 나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한 중년 목사와 그의 아내가 마음이 상하여 울며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데이브 형제여, 나는 하나님과 내 아내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간음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나에게 고백하며 경건한 슬픔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나를 향하여 나직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는 내게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나는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아름다운 치유가 시작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과거의 실패를 결코 만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은 해충이 파괴해버린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결혼 생활을 누리는 모든 부부가 일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진실을 이야기 했으면 합니다. 결혼 생활은 크리스천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매일 매일 노력해야 하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길처럼 당신의 권리를 매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 할 필요도 없이, 사탄은 당신의 마음이 가정에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시련을 가져올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학교보다 더 어렵고 혹독한 학교는 없습니다. 결코 졸업하는 법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백히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 우리의 모든 시험들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요, 바로 정상이라고. 우리가 이곳에서 어긋나면 우리는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2009년 9월 10일 목요일

다른 사람 사랑하기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 여정에서 내가 알기로 주님께 자신이 온전히 드려진 귀한 사람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는 순간 내 가슴은 고동칩니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없었을 지라도 성령께서 그분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하다고 증거 해주십니다.

 

나는 아직도 그분 중 몇몇 얼굴들이 기억납니다. 목사님들, 주교님들, 가난한 거리의 전도자들. 그분들을 만났던 순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어도 “이 분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이 여자 분은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들과 인사하며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말을 합니다. “형제님, 자매님, 당신에게서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스도 닮기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즉 내가 우리 가족외의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 우리를 멸시하며 이용하는 사람, 우리를 사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과 같은 우리의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이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책도 없고 정해진 원칙도 없으며 어떠한 인간의 지식의 양으로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점점 성장하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교회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나의 얼굴에 침 뱉는 무슬림사람을 내가 어떻게 사랑합니까? 인터넷 싸이트를 운영하면서 나를 거짓선지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사랑합니까? “예수는 동성연애자” 라고 쓰인 간판을 들고 뉴욕 시내 5번가를 행진하는 동성연애자들을 내가 어떻게 사랑합니까?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어떻게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합니까? 내 자신의 능력으로는 다른 크리스천을 사랑하는 법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이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17:26)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을 넣어주시기를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모든 방법을 성실하게 모아서 당신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16:15) 진실로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더욱 더 보여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성전인 우리 몸에 거하시는 이유입니다.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14:17, 26)

2009년 9월 9일 수요일

하나님만 아시는 길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The steps of a good man are ordered by the Lord. KJV)(37:23) 이 구절에서 ordered 히브리어 의미는 “정해진, 또는 미리 계획된”입니다. 하나님은 하루 일정표를 가지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루, 일주일, 또는 일 년 앞서서 우리의 길을 계획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모든 믿는 자의 전 생애에 걸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순간 그 계획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 미리 계획된 길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아주 단순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14:6). 그리스도 자신이 영광과 영생에 이르는 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은 천국에서 그분의 품안에서 끝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2:10)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어떤 특정한 길을 택하시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남은 여정이 어떠할 지 확신 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께 만 알려져 있는 길입니다. 내 인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칠십 여 년 동안 영광으로 향하는 노중에 있습니다. 그 노상에서 하나님은 목적들도 주시고 꿈과 비전도 주셔서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에게 전 노정의 윤곽을 그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실인즉, 이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내일 이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야곱이 나이 들었을 때, 바로 왕에게 그의 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여기서 “험악한”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재난들, 고통들, 슬픔들, 환난들, 역경들을 의미합니다.

 

나는 야곱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의 순례 길에서 어떤 시기는 다시 살고 싶지 않은 기간이 있습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복과 기적들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살아오는 동안 내 안에 지어주신 믿음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내 인생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면, 나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길은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2009년 9월 8일 화요일

마음을 쏟아 부으라

다음 말씀은 기도의 응답이 필요한 사람, 고난의 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있고 또 그렇게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선, 시편46:1에 있는 이 언약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a very present help)very present라는 구절은 “항상 이용 가능한, 즉각적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밤이나 낮이나 모든 시간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이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확신에 근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 안에 거처를 정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모든 기도의 생각과 부르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들으시면 우리의 요청들을 허락해주실 것을 압니다. 성령은,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그분의 존전에서 시간을 드려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하늘과 땅을 움직이실 것입니다.

 

다음은, 시편62:5-7을 읽고 믿으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만 기다리십시오. 다른 어떤 공급원으로 부터의 도움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분만이 당신의 공급원, 당신의 유일한 소망 그리고 방어막이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당신의 응답이 올 때 까지 당신이 살아갈 힘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당신이 주님 한분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을 때 - 사람의 도움을 받고자 하기를 그치고 초자연적인 일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때 - 아무것도 당신을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당신을 절망으로 격동하게 만들 수 없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선포하였습니다. “내가 흔들리지 아니 하리로다”(62:6).

 

그 다음이 바로 모든 것의 핵심으로서, 모든 시대의 온 성도들이 배웠던 극복하는 기도의 비밀입니다 - 주님 앞에서 마음을 쏟아 붓는 것.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62:8) 하나님은 당신이 기꺼이 잠시 동안 모든 수단을 닫아버리고 그분 앞에서 당신의 마음을 부르짖고, 마음을 쏟아 부으며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을 보실 때 당신을 들으시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슬기로운 처녀가 되기 위하여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25:1-2)

 

당신이 정직하다면, 그분의 말씀에 동의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 비유는 나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게을러졌습니다. 미련한 처녀가 되어 표류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준비되어 있기를 원합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되기 원한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간단한 것이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1. 그리스도를 당신의 생각하는 삶의 중심으로 삼으십시오. 주님이 당신의 모든 생각 가운데 있도록 하십시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분의 이름을 속삭이십시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무릎을 꿇고 생각 속에서 그분을 부르십시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4:8) 이 구절 말씀이 온종일 당신이 드리는 간단한 기도의 기초가 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 당신은 참되시고, 정직하시고, 옳으시고, 정결하시고, 사랑스러우십니다. 당신은 나의 복음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주께서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고전3:20)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생각을 기록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그분을 생각할 때 마다 아십니다. 그러니 그분께 당신의 모든 감사하는 생각들을 드리십시오.

 

2. 온종일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단순한 기도가 당신의 등불을 위한 기름입니다. 이렇게 매일 기도하는 것이 주님을 만나기를 예비하기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질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당신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 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미약한 선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당신이 보시기에는 모두 더러운 걸레와 같습니다. 나는 나의 선행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신 앞에 겸손하게 나옵니다. 주님,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2009년 9월 4일 금요일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을 잡수시기위해 초청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집주인과 마찬가지로 율법사들의 지도자인 다른 바리새인들도 초청받았습니다.

 

집주인이 그의 손님들을 자리에 앉으라고 불렀을 때 갑자기 귀빈석의 제일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광경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높은 자리 들을 택하였는가 주목하셨다고 말씀합니다. (14:7) 그것은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고자하는 자존심을 철면피처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잡수시러 앉았을 때 그분은 방안 가득 들어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이 말씀으로 꾸짖으셨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8-11) (저자 임의 강조)

 

이 장면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있었던 청중을 염두에 두셨기에 특정한 타입의 지도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외식으로 길게 기도...(20:46-47)하는 자들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는 단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 받기를 좋아하고 끊임없이 자신들을 위해 나팔을 불어댑니다. 이것은 사역자들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실 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셨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은 “더 높은 곳으로 오라”고 우리 모두를 의로운 존귀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이 “더 높은 곳으로 오라”는 부름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의 충만함 가운데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풍성하고 친밀한 교제로의 부름이며 더 설득력 있으며, 확신에 찬, 의로운 주님의 신탁으로의 초청입니다

2009년 9월 3일 목요일

좋은 증거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2) {By their faith...the elders obtained a good report KJV}

 

희랍어로 여기서 “얻었다”는 말은 “증인이 되다, 증거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 있었던 우리의 조상들은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고, 고정된 믿음을 소유하였었고 그것은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첫째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신다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홍수들, 조롱, 속박, 투옥, 고문, 전쟁, 사자들의 굴, 불을 통과하며 그분을 신뢰하였습니다.

그 모든 일들 후에 그들은 그들에게 미소 지으시며 “잘하였다. 너희는 나를 믿고 신뢰 하였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기쁨을 알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며 믿음자리를 지킬 때 마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똑같은 확언을 듣습니다. “잘하였다. 너희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내가 폭풍을 통과하며 안식할 수 있을 때, 나의 모든 짐을 그리스도께 내려놓고 나의 믿음자리를 지킬 때 나는 좋은 증거를 얻은 것입니다.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망의 횃불이 되어 갑니다. 내 집이나, 직장, 그리고 내가 사는 동네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에게도 소망과 구원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의 위기의 때에 나를 보고 그들은 “소망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건재해 있다.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자가 있다. 그는 그의 하나님을 신뢰 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재난이 더 빈번해지고, 세상이 심한 절망에 빠질 때에, 믿는 자의 반응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증언이어야만 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이 거하고 계시고, 우리는 온전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은 자랑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 할 수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나는 완전 무장하고 “나는 내 마음을 작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육의 의심과 두려움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뒤로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토라지거나, 조바심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을 것 이다”라고 결단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럼에도, 종종 불신으로 인해 승리를 빼앗겼습니다.

 

나는 아직도 믿음을 고정시키는 일에 대해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든 것에 주님을 신뢰했을 때,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께 내 모든 짐을 내려 놓고 안식하며 나의 길을 갔을 때, 찾아온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2009년 9월 2일 수요일

죄인들의 친구

누가복음 7장은 예수님과 식사하기 위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도대체 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는지, 더군다나 그분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서 다른 철저한 종교인들을 같이 초대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시몬과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을 초청하여 예수님이 선지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했거나 또는 실상은, 선지자인 그분을 폄하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 구절은 시몬은 예수님의 선지자로서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7:39)

 

성경은 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말씀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신학적인 이야기일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에 정통한 사람들이고 다른 경우에도 교묘한 질문으로 주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아셨고 그것은 곧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다음 우리는 “죄를 지은” 거리의 여인이 불청객으로 등장하는 것을 읽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 여자를 돌아보시...” 었다고 말씀합니다. (7:44) 여기서 보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어야만 하는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거짓 종교나 거짓 교사가 아닌, 죄인들에게 맞추어져야만 합니다.

 

시몬과 그의 손님들로부터 눈을 돌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7:47,50) 예수님은 여기서 왜 그분이 오셨는지 계시해주십니다. 타락한자, 친구가 없는 자, 죄에 빠진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사역의 모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초점이 고정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회복시키고 그들의 치욕을 벗겨주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는 기꺼이 죄인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이것을 바로 진정한 영성의 시금석으로 세웠습니다.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희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6:1) 바울은 그리고 나서 곧 덧붙여 그리스도의 길을 교훈하였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2009년 9월 1일 화요일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신뢰하라

어찌하여, , 당신이 고통스러운지 따져보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상황은 전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옳은지 그른지는 이 시점에서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기꺼이 하나님 안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당신의 인생에 신비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입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3)

 

아마도 당신은 당신의 할 바를 다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였고, 정직하게 당신의 마음을 따랐으며, 기꺼이 당신을 드렸을 것입니다. 당신의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저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은 정직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의 모든 과정을 인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왜 당신의 면전에서 산산조각 부서져 내리는지 당신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마음으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 일이 절대로 잘 되지 않을 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셨다면 왜 하나님은 애초에 내가 이일에 관여하도록 내버려두셨단 말인가?” 주님은 유다도 부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는 구주께서 손수 발탁하셨고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렸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출발했던 일이 유다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재난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당신의 죄의식을 털어버리십시오. 자신을 저주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가 입니다. 당신은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단지 당신이 너무 지나치게 쏟아 부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처럼 당신도 이렇게 말하여야 합니다.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