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30일 수요일

울어버리십시오

가장 고통이 심할 때에 당신의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절망을 다 쏟아 울어버리십시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베드로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한 상처를 짊어지고 통곡하였습니다. 그 쓰디쓴 눈물이 그의 안에서 신묘한 기적을 이루어내었습니다. 그는 돌이켜 사탄의 왕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울부짖는 심령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한 번도 주님은 “네 자신을 추슬러라! 일어나 약을 복용해라! 이를 악물고 눈물을 닦아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결단코! 예수님은 모든 눈물은 그분의 영원한 눈물 병에 담아두십니다.

마음이 상하십니까? 몹시 상하십니까? 그러면 그저 울어버리십시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하지만 그 눈물이 불신이나 자기 연민이 아닌 당신의 상처로 부터만 흘러나게 하십시오.

삶은 계속됩니다. 당신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얼마나 견뎌낼 수 있는 지 당신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나 상처 없이 사는 것이 행복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모든 슬픔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하루씩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상관없이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당신은 거부당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버림받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당신의 믿음이 약할지도 모릅니다. 아무 쓸모없이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슬픔, 눈물, 고통, 공허가 때때로 당신을 삼켜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의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도울 수 없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된 주님은 당신에게 오셔서 그분의 사랑스런 손으로 당신을 일으켜 천상의 자리에 다시 앉혀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죽음의 공포에서 당신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당신을 격려하십시오. 안개에 휩싸여 당신의 딜레마를 빠져나올 출구를 볼 수 없을 때에. 예수님의 품안에 기대어 누워 단순히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믿음-당신의 확신을 원하십니다. 당신이 큰소리로 외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분은 나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분이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계신다! 나는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탄에게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나는 그분을 사랑한다-그리고 그분은 나를 사랑한다!”

기본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이 절대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사54:17).

2010년 6월 29일 화요일

헤아려본 하나님의 영광

“또 이르시되...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막4:24-25).

예수님이 이 말씀이 영적인 귀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릴 것을 아시고 먼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이 하나님의 영을 향해 열려있다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확연한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요약하면, 주님은 자신의 영화로운 임재를 교회에게든지, 개인에게든지, 여러 가지 분량으로 분배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의 영광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삶들과 교회들로부터 더욱 더 큰 분량으로 솟아나 날로 증가하는 분량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말일에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모든 성경 말씀은 시간이 끝날 때 승리하고 영광에 찬 교회를 기리키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지옥의 문들이 그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진맥진하어 우울하고 훌쩍거리며 패하고 낙심한 모습으로 절뚝이며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교회에 더욱 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 능력은 그저 표적과 기사로만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계시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만짐을 받아 마음들이 영화로운 변화를 받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욱 크고 날로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분량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막4:24).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네 자신을 나에게 할당한 몫만큼 나도 너에게 돌려줄 것이다. 네가 나를 다루는 그 방법으로 나도 너를 다룰 것이다. 너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나도 너를 헤아릴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당연시 여기며 그분께 게으름과 태만을 할당하면 졸음의 영을 상대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19:15). 그 결과, 당신의 영혼은 굶주리고 충족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혜는 끝이 없습니다. 여기서 이슈는 그분의 사랑, 자비 또는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그분의 영광의 복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우리가 우리 마음을 그분께 분배하는 것에 따라서 자신의 영광의 분량을 다르게 하여 우리에게 분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할 바는 우리의 예배, 순종과 부지런함 가운데 단순히 그분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2010년 6월 28일 월요일

고통스러울 때

이런 저런 경위로 우리는 모두 고통을 받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자신의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당신이 깊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내적인 공포와 가장 깊은 고뇌를 막아줄 수 없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들도 당신이 치르는 전투와 당신이 입은 상처를 이해 하지 못합니다.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연고가 있습니까? 가슴 속 깊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까? 조각 조각난 마음을 꿰맞추어 더욱 튼튼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절대적으로 가능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짖궂은 장난에 불과하고 하나님 자신은 거짓말쟁이 일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없는 인생길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탈출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연약하여 당신이 비틀거릴 때 바로 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당신의 하늘 아버지는 동요하지 않는 눈으로 당신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모든 동작이 관찰됩니다. 모든 눈물이 병에 담겨집니다. 그분은 당신의 모든 고통과 함께 하십니다. 모든 고통을 느끼십니다. 당신이 눈물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상처가 마음을 퇴락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정확한 시간에 오셔서 당신의 눈물은 닦아 주시고 애통대신 희락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당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당신을 응시합니다 -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두려움을 털어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2010년 6월 25일 금요일

승리에 필요한 모든 은혜

종종 우리는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공로 없이 받는 호의나 축복으로 정의하는 것을 듣습니다. 하지만 나는 은혜는 이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 견해로는 은혜는 우리의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 능력, 권세, 친절, 자비, 사랑 등 우리를 고난의 시기에 지켜주시는 모든 것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엄청난 시련, 고통, 시험과 고난의 시기였지만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했었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내 아내가 연이어 재발하는 암으로 고통당하고, 나의 두 딸도 또한 발병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의문을 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모두 건강하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또한 사탄의 사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나는 지독히도 시험과 유혹을 당해왔고 원수들이 사방에서 나를 둘러싸고 일어났습니다. 소문에 의해 비방을 당하기도하고 거짓으로 비난을 받고 친구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 캄캄했던 시기에 나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분의 은혜로 나는 항상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은혜가 충분합니다. 어느 날엔가 영광 중에 나의 아버지는 그분이 내내 갖고 계셨던 아름다운 계획을 나에게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모든 시련을 통해서 어떻게 내가 인내를 습득했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배웠는지, 내 약함 가운데서 어떻게 그분의 능력이 완전해 졌는지, 어떻게 나를 향한 그분의 절대적인 신실함을 배웠는지, 좀 더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내가 얼마나 갈망했는지, 그분이 나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도 이유를 물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실 때 까지 나는 그것을 용납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나의 시련과 고난에는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50 여 년간 사역하는 동안 그치치 않았습니다. 아직도 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하여,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분량을 아직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분의 영광에 대해 내가 받은 가장 위대한 계시는 나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장 처참한 순간에,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의 가장 충만한 분량을 당신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 우울증, 불안감에 대해 결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결코 알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야, 그것이 네가 필요한 전부이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대적하라 마귀가 피하리라

사탄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 이 말은 시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이상 망측하고 우스꽝스럽게 들립니다. 안 믿어질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강력하고 마음을 유혹하는 제안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하며 예수님께 도전하고 있습니다. “네가 단지 내 발아래서 절하기만 하면, 한번만 경배하기만 하면, 나는 싸움을 멈추겠다고 약속한다. 이 영역을 주관하는 내 모든 능력을 포기하겠다. 어느 누구도 사로잡거나 노예로 삼지 않겠다. 네가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 지금 당장 너를 희생하여 이 순간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왜 마귀는 이것을 위해 그의 모든 능력을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합니까? 그는 자기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갈보리에서 인봉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시는 것을 막기만 하면 그 운명에서 자신을 구해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마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고 궁금해 할지 모릅니다. 사탄은 아직도 비슷한 제안을 들고 의로운 자를 시험합니다. 우리에게 위협과 참소를 들고 옵니다. “너는 나를 경배할 필요가 없다 - 내가 이미 네 육에 접속되어 있으니까. 너의 모든 약점을 다 알고 있단다. 자,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해 증언해 보아라. 네가 가장 목청 높여 찬양하는 순간에 나는 네 마음을 악으로 장악해 버릴 것이다. 네 죄를 네 앞에 통렬하게 폭로할 것이고. 너는 자유롭게 되리라는 소망을 잃게될 것이다. 너는 털끝만한 힘도 없다.”

우리는 사탄의 참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사탄이 얼마나 많은 시험을 당신에게 던지든지 문제없습니다. 당신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그것을 덮었다면 마귀가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을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2010년 6월 23일 수요일

의문이 떠오를 때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2-3).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허약할 그 때에, 마귀가 그의 첫 시험을 던졌습니다.

배고픈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탄은 예수님께 이렇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네가 완전한 하나님이라면, 네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너는 현재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해서 너 자신을 구원하려무나. 네가 그 능력을 적절히 사용하는지 알기위해 그분이 너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았느냐?”

진실로 경건한 사람들이 당면하는 가장 교활한 시험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처럼 당신도 하나님을 위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분께 온전히 맡기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당신을 광야 체험으로 인도하시고 얼마 후 의문점들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무엇인가 의아해 하면서 당신의 삶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승리를 얻으려고 애쓰는 동안 사탄의 시험은 더욱 더 강렬해지는 듯이 보입니다.

원수는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네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견뎌 내야할 필요가 없다. 네 안에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그 말씀을 해버리고 너를 자유롭게 해라. 네 자신의 굶주림을 채워라,”고 말합니다.

사탄의 첫 번째 계획은 능력이 실패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청하셨다 해도 하나님이 예수님의 떡을 구하는 부르짖음을 들어주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능력이 실패하게 되면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의 지상에서의 영원한 목적으로부터 돌이킬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탄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일러준 말씀대로만 행하기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신의 안녕을 위해 불순종하도록 설득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 예수님이 현재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분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추후 십자가를 회피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행동 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상에 온 것은 나의 필요나, 상처나 육체적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러 왔다.”

고통의 정점에서도 예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광야 체험을 통해 의존과 동정심을 배웠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2010년 6월 22일 화요일

광야 여정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크리스천을 얼음 조각이 떠다니는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크리스천은 바다를 건너는 동안 하나님이 그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안식할 수 없습니다. 그는 어느 한 곳에 너무 오래 서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라앉아 버릴 테니까요. 한 걸음 뗀 후에 다음 걸음을 위해 주의 깊게 살펴야만 합니다. 그의 밑에는 심연이요 그의 앞에는 불확실함이 있지만 항상 앞장서시는, 든든하고 확실한 주님이 계십니다. 육지는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있다는 약속이 그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 여행자는 목적지만을 응시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것같이 인생을 광야 여정으로 생각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과 유다 전체 백성이 참여한 전투가 또한 우리의 전투입니다. (역대하 20장 참조). 확실히 그곳은 광야입니다. 뱀이 출몰하고, 말라버린 물구덩이들, 눈물 계곡들, 적군들, 뜨거운 모래, 가뭄, 통과할 수 없는 산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녀들이 그분의 구원을 보며 확고히 섰을 때, 주님은 그 광야에 식탁을 펴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비처럼 내려주셨고 -오로지 그분의 능력으로 적군을 멸하셨으며 -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 뱀에 물린 상처에서 독을 제거하셨으며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 그들에게 젖과 꿀을 주셨으며 - 드높고 강한 손으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다가올 모든 세대에게 전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도움을 청하려고 그릇된 방향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은밀한 장소에서 예수님과 홀로 계십시오. 당신의 혼란스러움을 그분께 모두 말씀 드리십시오. 그분께 당신은 달리 갈 곳이 없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분만이 당신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다루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매사를 헤아려보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역사하시는지 의아해 할 것입니다. -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 모든 것을 요약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이사야45:22).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가7:7).

2010년 6월 21일 월요일

터가 흔들리는 동안

세상의 모든 터가 흔들리고 사탄이 성난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도처에 혼돈과 폭력과 불확실이 난무하는 동안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 안에서 확신에 찬 사람은 심령과 마음에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기 위하여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위의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식을 누리며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이 위험한 시기에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당신에게 드립니다.

  •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사무엘하 22:31).
  •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시편 17:7).
  •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편 31:19).
  •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편 31:20).
  •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시편 31:24).
  •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편 37:5).
  •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시편 37:39-40).
  •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편 56:4).
  •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편 62:8).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편 125:1).
  •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언 29:25).

사탄의 거짓말과 악한 계교에 대응하는 유일한 보호 수단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가지고 그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강력한 힘이 있고 우리가 이 검을 들고 든든히 서있을 때 마귀는 아직도 두려워 떱니다.

오늘, 지금, 당신의 입장을 분명히 정하십시오.

2010년 6월 18일 금요일

거울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사도행전 7:55-56).

스데반은 진정한 크리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줍니다. 성령 충만하여 영광 중에 계신 분(Man in glory)에 주목하는 크리스천. 그는 본 자들이 모두 놀라고 경이에 차도록 그 영광을 잘 반영한 사람입니다. 그는 꾸준히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하고 항상 그를 쳐다보며 영광을 받으신 구세주에 온전히 몰두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보십시오. 종교적 광기, 미신, 편견과 질투심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성난 무리가 눈을 크게 뜨고 피에 굶주린 채 그에게 밀려들고 죽음이 바로 그의 앞에 어렴풋이 나타났습니다. 참으로 불가능한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을 우러러 그는 영광가운데 계신 그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문득 이 지상에서 거부당하는 것이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면서 모든 것을 초월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한 번 얼핏 보자, 그분의 귀하신 거룩함을 한 번 보게 되자 스데반은 더 이상 고통을 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돌이며 분노의 저주가 그에게는 모두 무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한 번 얼핏 보면 당신은 처한 모든 상황을 초월한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주목하고 깨어있는 매 시간마다 의식적으로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줄 수 없는 평강과 평온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스데반은 하늘에 계신 영광 받으신 분(glorified Man)의 빛줄기를 붙잡아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회에 반사했습니다.

우리가 본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진정 사실입니다! 적절한 번역은 이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맨 얼굴로 영광을 반사하며 변화되었습니다!” 이 생각은 즉 크리스천이 거울처럼 그가 계속해서 쳐다보는 영광을 반사한다는 것입니다. 거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들로써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주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분을 닮아갑니다.

적이 홍수처럼 밀려오고 괴로운 상황이 우리를 낙심하게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달콤하고 쉼을 누리는 휴식을 취함으로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놀라게도 하고 정죄하기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그리스도께 머무르게 하여 이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2010년 6월 17일 목요일

수그러들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수그러들지 않는(unrelenting)이란 단어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그것은 강도에 있어서나 수고의 정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논쟁에 의해 바뀔수도 없고 설득당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것은 정해진 길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이로운 묘사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죄인과 성도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찬 추구를 방해하거나 감퇴시키지 못합니다. 시편기자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139:5, 7-8).

다윗은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가장 높이 오를 때와 가장 낮은 곳에 처할 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복을 많이 받았을 때에는 기쁨으로 마음이 고양됩니다. 다른 경우에는 정죄당하고 하찮은 자로 지옥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내가 복을 받았다고 느끼든지, 내 상황이 형편없든지 간에 주님, 당신은 그곳에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수그러들지 않는 사랑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쫓아버릴 수 도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자격이 없는지 말씀드려도 당신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의 진리를 거슬러 죄를 짓고 당신의 은혜를 당연시 받아들이며 불순종 할 때조차도 당신은 멈추지 않고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의 생애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박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을 만납니다. 바울은 미친 사람 마냥 크리스천들을 증오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대제사장에게서 믿는 자들을 수색할 권한을 받아서 그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감옥으로 끌어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개종한 후에 바울은 자신이 편견에 차서 맹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죽이려던 그렇게 증오에 찬 세월을 지낼 때조차도 하나님을 자신을 사랑하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요약해서 말하면,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나를 찾고 계셨다. 결국 말위에 앉아 있는 나를 문자 그대로 떨어뜨려 나뒹굴 때 까지 그분은 사랑으로 계속 나를 찾아오셨다. 그것이 수그러들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모든 높고 낮음을 통해서 끝까지 뜨겁게 사랑하실 것이라고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는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그 무엇도 나를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 악마도, 귀신도, 권세자도, 사람도, 천사도, 아무것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멈추시게 할 수 없다.”

2010년 6월 16일 수요일

소리

세례 요한이 자신의 사역을 정의한 말은 둔탁하고 단순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한복음 1:23). 성경에 의하면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위대하였던 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종은 모든 선지자들 중에 가장 복되고 존경받는 의의 설교자였습니다.

요한의 통렬한 메시지를 듣기 위해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왕족들조차도 그의 막강한 영향력 하에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엘리야라고 여겼습니다.

요한은 칭찬을 받거나 높아지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비우고 계속해서 무대 중앙으로부터 몸을 사렸습니다. 모든 선지자 중 가장 위대한 그는 스스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었고 다만 겸손하고 나서지 않고 명예나 쓸모에 관심이 없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하는 사역이 있는지 또는 “하나님에 의해 강력하게 쓰임 받는지”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주인의 신발을 만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전 생애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복음 1:29)에게 헌신 되었습니다.

자아에 몰두하고, 개성을 조장하며, 영향력을 쟁취하고자 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며, 명예를 추구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주는 얼마나 강력한 꾸짖음인지요. 요한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으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30)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자기의 청중 모두에게 “나는 단지 소리”라는 것을 계속 상기시켰습니다.

요한의 행복의 비결은 그의 기쁨이 자신의 사역이나 일에 있지 않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쓸모나 넓은 영향력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순전한 기쁨은 신랑의 앞에 서서 그의 음성을 듣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 모여드는 것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알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는 자아와 또한 대단한 인물이 되려는 모든 욕망을 잃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임재 안에 사는 아들과 딸로서 단순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온전히 전념하는 것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단강에 서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의 임재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로 먹이고 그의 마음은 항상 흠모와 경외로 그분께 나아갔습니다.

2010년 6월 15일 화요일

사람을 시험하심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32:31).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는데 온 마음을 집중해 버려서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인생의 큰 시험에 대비해 마음을 예비해 두지 않았습니다. 혹시 현재 당신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시련이나 무거운 짐이 실제로는 당신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가서........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1-2). 하나님은 그 심중에 진실로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시기 위해 한 나라 전체를 검증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신8:2).

역대하 32장 31절에서 우리는 놀라운 일을 봅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왕을 시험하시기 위해 잠시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때때로, 주님의 청지기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의롭게 추진하고 있는 동안, 확연히 버림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도록 시험을 당하고 지옥의 세력과의 싸움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 모든 사람은 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이상한 환경에 놓여있습니까? 버려진 것 같고 홀로 있습니까? 예측할 수 없는 적과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시험 과정을 가리키는 표시들입니다.

승리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하지만, 당신이 실패했다 해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고독한 싸움에서 승리했든지 패전했든지 그 후에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에 하나님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내버려두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기록에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시험하시기 위해 그분의 임재를 거두시는 때가 있다고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 조차도 십자가에서 고독한 순간을 체험하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복된 구세주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깊이 느끼시고 마음이 움직이셔서 “내가 너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속삭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마16:24 참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연약하고 허약한 육을 말합니다. 그것을 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힘이 당신 안에서 완전해 질것입니다. 당신의 자아와 죄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습니까? 그렇다면, 친구여,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계속 따라가십시오. 그분은 이해하시고 무거운 짐을 들어 주시기 위해 당신 곁에 계실 것입니다.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사랑하시는 자들이 그분을 의심할 때 그리스도는 가장 고통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셨고 또한 그의 두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를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 그들의 집은 오아시스였습니다. 우리는 나사로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으나 성경은 가장 강한 어조로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적합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한복음 11:3).

예수님이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절).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영광을 주고 그들에게 확신과 믿음으로 주시기 위해 이 기적을 의도하셨음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께 얼마나 깊은 고통의 체험이 되었는지요! 제자들이 그분을 의심하였고 마리아와 마르다도 의심하였으며 눈물을 흘리던 나사로의 친구들도 의심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이 다른 일에 몰두하여 그들의 문제에 무관심했었다고 비난했을 때 얼마나 주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 알았을까요? “주님, 정시에 여기 계시기만 했더라면,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습니다. 만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21절 참조).

마르다는 자기가 주님의 부활 능력을 의심했을 때 그녀의 주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 알았을까요? 그분은 담담히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분의 말씀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요약해 보면, “네, 부활의 날에 살아나겠지만 오늘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24절 참조).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을 그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했을 때 그리스도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너희는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듯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으라. 나는 능력, 생명이 있느니라”(25절 참조).

그 순간 그분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 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도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나라 백성이 그분을 모른 것도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텐데 그분이 매우 사랑하던 자들도 그분의 능력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었을까요? 그분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조차도 믿지 못하는 도다. 그런즉 누가 믿을 것인가?”

우리 주님에게 심한 고통과 고민을 야기하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우리가 그분의 능력과 신실함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을 친구와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분이 우리의 모든 고통과 역경 가운데서 우리가 승리하고 기뻐하도록 지키는데 필요한 능력을 소유하신 것처럼 우리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흡족하게 만드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다정한 보호 안에서 완전히 안식하는 자녀입니다.

2010년 6월 11일 금요일

하나님의 전이 도둑의 굴혈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요한복은 2:13-17). 그 광경을 보고 경악하셨습니다. 상인들이 하나님의 전을 장악해 버렸습니다! 그분은 기도의 집을 찾으며 오셨으나 종교적 상품의 판촉, 진열, 판매로 선점되어 버린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세고 있었습니다. 그 분주함이라니! 하나님의 사람들이 종교적 상품의 행상인들이 되어 자신의 상품을 판촉 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 도처에 양, 소, 비둘기, 사탕, 향과 종교적 목적을 위한 다른 상품들을 판촉하기 위해 상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환전하는 손이 성전에서 가장 시끄러운 소리를 냈습니다. 하나님과 종교를 빙자하여 벌어들이는 돈이 말입니다.

어떤 혹독한 통증이 우리 주님의 연민에 찬 마음을 거룩한 분노로 끓게 만들었을까요? 그분의 극심한 고통은 온유한 그분의 영을 의분으로 격노케 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그려볼 수 있겠습니까? 손에 채찍을 들고 우리 주님은 성전 안으로 질풍처럼 들어가셔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들을 둘러엎으시며 사방을 후려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판촉 하는 자들, 노점상들, 행상인들을 흩어버렸습니다.

“나가라!” 그분이 우레같이 외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나가라! 너희는 기도하는 집을 상업용 시장으로 변질시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그것은 그의 전 사역을 통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중 하나였으나 그분은 수수방관하며 자신의 아버지의 전이 종교적 도둑들의 굴혈로 변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겠습니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전이 상인들에게 넘어간 것을 보시는 주님의 고통을 우리는 분담합니까? 복음이 무섭도록 상업화되는 것으로 인해 분개할 것입니까? 영적 행상 행위에 대한 그분의 격노를 느껴 그러한 모든 행동을 거두어들이겠습니까? 단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기계적으로 상품을 만들어내는 사역들을 부인할 만큼 그분의 고통을 느낍니까?

하나님의 전을 흥행업자를 위한 극장이나 유흥장으로 변질시키는 자들에게 대항할 만큼 이 시점에서 그분의 고난을 분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부당 이익을 얻는 자들로 인해 슬퍼할 수 있습니까? 돈에서 눈을 떼어 다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2010년 6월 10일 목요일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싸워 승리하셨다

최근 몇 달 동안 아직도 죄의 습관에 매여 있는 신도들로부터 애석하고 측은한 편지를 많이 받아 읽었습니다. 고투하고 있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썼습니다. “도박을 끊을 수 없습니다...알콜 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외설물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편지마다 이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자유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기도하고 통곡하고 경건한 조언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랫동안 나는 주님께 이 믿는 자들에게 무어라고 답변해야 할지 지혜를 구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이 자녀들의 삶을 알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되고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그들은 당신의 승리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자유를 모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느 날 나는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 성경 구절을 연구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흠없이 제시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성결케 하시기 위해서, 믿음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보존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믿음으로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또한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모든 약속들에 공통적인 구절인 “믿음으로”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들 고투하고 있는 크리스천의 문제들에 대해 명백하고 유일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을 속박하고 있는 것의 뿌리 근저에 불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단순하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승리를 얻고자 애쓰고 있습니까? 당신의 옛 성품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지적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당신의 승리는 통곡이나 수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승전하셨다는 믿음을 통해서 와야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진정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에 단 하나의 조건이 붙어있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골1:23).

그리스도는 온전히 순종하는 아들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그분의 아버지께 맡겼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그대로 우리도 아버지를 온전히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2010년 6월 9일 수요일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임재가 있는 산에 심기 원하십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이사야 2:3).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이사야 56:7).

오늘날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성령의 메시지는 “산으로 돌아가라, 그분의 거룩한 임재로 돌아가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르심을 듣고 있으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길을 가며 왕국의 세부 사항에 골몰하느라 바빠서 거룩한 언덕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깨어있는 사역의 영광과 잠들어 있는 소경 파수꾼의 비극을 둘 다 보았습니다. 어떤 파수꾼들은 자신을 흔들어 깨워 하늘로부터 오는 신선한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산으로 돌아가는 반면 다른 파수꾼들은 끊임없는 활동과 자기 향상 속에서 길을 잃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이사야 56:10-11).

이사야는 그들이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이사야 65:11 참조)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사망하여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손의 행위에 몰두하여 오직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자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내 종들은 내가 다른 이름으로 부르리라”(이사야 65:15)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를 듣는 게 좋았었을 걸 그랬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교회를 깨우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구도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골방에 있는 시간을 가지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새로운 비전을 얻고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이사야 65:13-14 참조)하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기쁨으로 돌아오는 “산 사람들”의 군대를 양성하고 계십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과 주권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그분의 정화하는 불은 우리 안에 새롭고 경건한 원칙을 일깨울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혼돈으로부터 교회를 구하는데 필요한 경건의 원칙들에 대해 죽어있었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그분의 성전 안에서 일반적인 선으로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는 심중에서 그리스도의 불을 찾으십니다.

2010년 6월 8일 화요일

하나님은 어디에 거하시는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 요한은 영광의 장엄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22-23). 다시 말해서 하늘에 있는 유일한 성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영광에 싸여 그분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지구상에서 주님은 어디에 거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셨듯이, “네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주겠느냐? 내가 안식할 곳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알듯이 어느 건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 계시지 않습니다. 뉴욕시의 성 패트릭 성당에 계신 것도 아닙니다. 유럽의 거대한 성당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 서서 말하였듯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17:24). 간단히 말해서,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를 어떤 건물 안에서 찾는다면,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처소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류의 몸들 속에 거하시고 안식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이 인간의 몸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거하시는 곳, 즉 성전이 됩니다. 이것은 다락방에서 눈앞에 생생하게 실연되었습니다. 성령이 그곳에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와 그들을 성령님 자신으로 충만케 하였습니다. 성령은 그들의 성결케 된 몸을 아버지께서 오셔서 거하실 하나님의 성전으로 점유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들의 죄악된 육의 행실을 억제하고 멸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손으로 짓지 않은 처소,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거처는 사는 곳, 머무르는 장소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다시 말해서 당신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분은 당신이 자신의 안식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 이제 이 진리에 대해 당신의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2010년 6월 7일 월요일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22). 이 말씀을 읽을 때 나는 거의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아버지가 자신을 주님에게 주신 것처럼 온전히, 완벽하게 우리에게 주님 자신을 주셨다고 우리 주님이 아버지 앞에서 고백하신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주님에게 주신 동일하게 친밀한 사랑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그것이 우리 안에 나타난 주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버지와 나눈 것과 같은 특별한 사랑의 관계로 이끌려 들어왔습니다. 더 나아가 그분은 두 분 사이의 사랑의 원을 열어서 우리를 그 안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해를 초월하는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아버지께 데리고 가서 “그들이 우리와 하나 되게 하소서”라고 간구하시다니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가운데 완벽하게 참여합니다.

실제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매우 사랑하시므로 아들에게 세상을 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절)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아들에게 세상에 있는 자들을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선물, 사랑의 선물이 우리 인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그들은 아버지의 것인데 모두 나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였기 때문에 그 선물을 그분께 돌려드리며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10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돌리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그 같은 사랑의 대상이 우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위안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위대하고 사랑하시는 손 안에 우리를 두시고 아버지께 우리를 보이시며 “아버지,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속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버지, 나는 그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은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우리의 거처를 정하고 그들이 얼마나 사랑 받는지 보여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명예인지요.

우리의 지성으로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갖고 있는 당신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도록 하기 위해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그들에게 알려줄 것입니다.”

2010년 6월 4일 금요일

아버지의 사랑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실하게 우리의 복된 주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주님과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더 가까이 더 친밀하기 원합니다. 주인이시여,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입니다. 표적이나 기사보다 당신의 임재가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분의 찬양어린 간구를 들어보십시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한복음 17:24).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매우 친밀한 종류의 사랑, 즉 사랑의 대상과 거리가 떨어지거나 분리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됨, 영원한 연합을 갈망합니다. 우리 주님과 아버지 사이의 이 신적인 사랑은 그분께 너무도 중요하기에 그분의 자녀들 모두가 자신들의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열망하고 계셨습니다.

그토록 영광스러운 생각을 하시는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아버지와 자신과의 친밀한 관계의 영광에 대해 넘치도록 기쁜 나머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것을 보도록 하늘로 데려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그들은 우리가 가진 이 영화로운 사랑을 보아야만 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시는지 그들 눈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창세전부터 내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구속받은 우리가 천상의 잔치에 참여하러 하나님의 거대한 연회장으로 인도 되어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우리의 복된 구세주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목격하도록 허용될 때 참으로 대단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아 보아라, 그렇지 아니하냐? 내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그분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지 않느냐? 그렇게 큰 사랑을 본 적이 있느냐? 진정으로 완전한 사랑이 아니더냐? 너희는 이제 나의 영광,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그분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았느니라.” 이렇게 그분이 피 값으로 산 자녀들을 보며 즐겁게 말씀하실 때 그 영광스러운 날, 나는 우리 주님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여, 그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 그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사랑 받는 구세주를 우리가 섬긴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그리고 루시퍼가 그러한 영광을 스스로 끊어버렸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섭지 않습니까? 그는 사랑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없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그의 가장 큰 손실입니다. 천부의 사랑에 대한 증인이나 감각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사탄의 자녀들의 가장 큰 손실입니다.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상에 있을 때에도 예수님과 하나 된 가운데 포용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안식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될 때, 그분은 자신의 모든 능력과 공급원을 가지고 오십니다. 갑자기 우리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힘, 지혜, 진리, 평강, 그리고 승리의 삶을 살기에 필요한 모든 것에 접속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능력 있는지 말해 줍니다.

“이러므로 내가......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이에게”(엡3:14-20).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바울은 주님이 우리에게 쓸 수 있도록 해주신 보물들 중에 단지 몇 개만 나열한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모든 부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경배 받는 것만을 기뻐하는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우리 주님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이유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분이 캄캄하고 광대한 우주 어느 곳에 계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확실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삶을 마음 내키는 대로 드나드시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처소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바울이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절대적으로 명백히 밝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전 안에 처소를 마련하시면 그분은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하시며 또한 그분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주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신성한 능력을 통하여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엡3:16-21참조).

2010년 6월 2일 수요일

하나님의 영광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5).

하나님이 자신을 정의하는 것보다 그분의 영광을 더 합당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며 인간의 한정된 지성으로는 너무 고상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주실 때 그분은 자신을 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는 또한 그분의 자비, 그분의 거룩함, 그리고 그분의 힘을 얻습니다. 그분의 자비를 받는 자는 또한 그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함이신 다른 모든 것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그분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고자 갈망한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고 이것은 그분이 우리가 안식과 확신의 충만을 누리기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 천부에게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5).

예수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셨고 그것이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연합하는 것은 그분 존재의 기쁨과 영광이었습니다. 그분은 친밀함, 연합, 하나됨을 소유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우주적인 권능과 광채라는 견지에서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제적 의미에 대해 문외한이라서 예수님이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0절)라고 말씀하셨을 때 무슨 뜻인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의 성도들 가운데서 지금 영광을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까? 그분은 자신의 모든 신성이 충만한 가운데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거하러 오실 때 자신의 모든 영광, 능력, 위엄, 거룩, 은혜와 사랑가운데 오십니다. 우리는 충만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늘이 열려 있습니다. 그분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간구를 알려드립시다.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요.

2010년 6월 1일 화요일

새로운 피조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2:2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내안에 계신 것을 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도 옛 습관과 고투를 벌이고 있다. 그 때문에 매우 낙심된다.” 사탄은 당신을 설득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포기해 버렸다고 확신시키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당신을 죄로 인해 더럽고 추악한 존재라고 여긴다고 생각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것은 육과 당신 안에 있는 영이 싸우는 것입니다. 이 전투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싸우고 있을 때 사탄은 아직도 “옛사람”이 통제하고 있다고 당신을 확신시키고자 합니다.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분은 아담의 후손들의 사악함과, 우상숭배와 정욕을 따라 행한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역사를 통틀어 말세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보존하셨고 그 때가 이르매 구출계획을 가지고 개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아담의 모든 후예가 화목하게 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하나님과 당신이 함께 서있는 것이 단 하나에 근거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당신은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이 승리는 당신의 어떤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우리의 승리는 오로지 회개, 믿음, 신조 그리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옵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분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자리에 확고히 서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너는 때로 실패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너를 볼 때 나는 다만 나의 아들 예수만을 본다. 너는 아무 죄의식이나 정죄받을 염려 없이 이 싸움의 결국에 승리자로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