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복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느니라.” (고린도후서 7:10)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사역을 회고하며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전하셨던 복음, 즉 회개의 복음을 내가 경솔히 다룬 것은 아닐까?” 내가 성경에 가위를 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요구되는 더 큰 희생을 본질적으로 잘라낸 것은 아닌가? 내가 사람들에게 그저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의 기준을 낮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죄를 향한 진정한 회개를 경솔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서둘러서는,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자들과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애통해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 이면의 욕정을 감추기 위해 믿음을 구했던 자들에게 구원을 제시했던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여러 사역단체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과장된 숫자를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이 수감소에서, 학교에서, 또 그 외 사역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 모두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실은 많은 경우에, 모든 사람이 단순히 기도문을 따라 낭독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기도하며, 대부분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믿음 없는 그들의 이전 삶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성령의 깊은 역사를 결코 체험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절대 회개하지 않으며, 그들의 죄로 인해 근심하지도 않을뿐더러 진실로 믿지도 않습니다. 비참하게도,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결코 제시하시지 않은 구원, 즉 회개가 결여된 구원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심지어는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감정을 삭재해 버렸다고 믿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구원받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더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눈물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생생한 감동이 있는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성령에 의해 감동받은 사람은, 그가 주님을 근심시킨 것에 대한 애통함을 저절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 그가 느꼈던 경건한 슬픔이 바로 그러한 감정입니다. 그때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이 갑자기 물밀듯이 떠올랐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생각하며 슬프게 우니라.” (마가복음 14: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