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자랑할만한 간증 by Gary Wilkerson

우리는 성경적 예언들이 가시적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는 이 땅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1 참조) 지금은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돈을 사랑하며 가증스럽고 거만해질 것이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국가의 지도자들은 가장 기본적이며 상식적인 원칙마저도 서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대담하게 죄에 대해 언급하면, 그는 편협한 자라고 불리우며 따돌림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화의 한 구석으로 제쳐지면서, 죄는 더욱더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영적 충격을 느낍니다. 저는 매주 제 주위에서 또 하나의 결혼이 파탄되는 것을 봅니다. 아이들은 자기혐오로 그들 자신의 살을 벱니다. 마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매월 천오백 명의 목회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포기하고 있는 판국이며, 이러한 상황을 돕기 위한 목소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구약은 잇사갈 자손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시세를 알며 세상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역대상 12:32 참조) 오늘날 그리스도의 지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때를 분별할 줄 안다면, 적당히 해서는 안 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마땅히 행할 바”를 알기 위한 유일한 길은, 교회가 현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정한 악귀의 영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마태복음 17:21)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기도는 뜨거워야만 합니다. 영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너무도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빛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때를 향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너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그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4:4) 하나님은 그분 백성의 삶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고, 우리는 모두 자랑스러운 간증으로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랑할만한 간증은 대체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걸까요? 제가 말하고 있는 종류의 자랑은 자랑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 (고린도후서 10:17)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종류의 자랑을 하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자랑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2014년 3월 28일 금요일

기도의 원조자

사도바울은 의식적으로 성도의 기도의 필요성을 알았고, 성도들에게 기도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요청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로마서 15:30-31)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25)

“Strive(힘을 같이 하여)”라는 단어의 그리스어의 의미는 “기도중보자로 함께 기도로 분투하고 싸워주십시오”라는 뜻을 가집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잠시 언급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함께 싸워 주십시오. 저와 또 복음을 위하여 영적 전쟁에서 함께 싸워 주십시오”라는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 그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고,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그를 위한 기도를 권고하였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립보서 1:19). 바울은 자신이 마귀에게 지목되어, 사탄의 무리가 그를 파괴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진실된 복음 사역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모든 목사님, 설교자 그리고 선교사들은 모두 지속적으로 그들을 위해 중보해줄 기도의 원조자들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것은, 저 또한 저를 위해 기도하며 수년간 함께 힘써 싸워준 기도의 조력자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최근에 유럽에서 이루어진 목회자 컨퍼런스와 밤마다 있는 전도대회를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을 진행하는 시간 내내, 성령님께서는 제가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프랑스 니스에서 미국인들은 비호감이고, 특히나 미국인 선교사들은 더욱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그날 밤의 전도대회를 “과연 가능할까?”라는 염려와 함께 걱정했습니다. 프랑스는 무신론, 불가지론(agnosticism), 불신이 만연한 국가입니다. 또 우리가 계획하였던 집회는 단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종류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집회 시간이 다가왔을 때, 수 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무기력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준비한 모든 설교가 집회와 맞지 않다고 생각이 되어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작 전 저와 제 통역가는 메모한 말씀을 검토하였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집회와 맞는다는 확신이 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통역가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네”
하지만, 강단에 섰을 때 성령님께서 제게 큰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수 천명의 성도들의 기도의 지원을 느낄 수 있었고 성령님께서는 나의 입을 말씀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저는 40분동안 설교를 하였고, 그리고 설교하는 시간 내내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제가 마쳤을 때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시면, 앞으로 나오십시오.”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2014년 3월 27일 목요일

지속적인 기도

몇몇의 신학자들은 같은 간구를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이 불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옳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연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금식하며 진실되고 온전한 마음으로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십니다.(마태복음 7:7 참조)

시초부터 진실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언약들을 기도로 돌렸습니다 :
  •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의 시작 전부터 약속하셨던 모든 것을 믿었고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수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지속적인 기도와 간구에 관한 비유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판관으로부터 원한을 풀어 정의를 지속적으로 구한 “번거롭게 하였던 과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8:1-8 참조) 
  •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하여 나라의 붕괴가 에덴동산과 같이 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 기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에스겔 36:37). 다른 말로는, “내가 너희에게 약속을 하였지만, 너희가 갖기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한다.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를 온전한 마음으로 구하라. 내가 너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구하여야 할것이다.” 
  • 다니엘은 예레미야에게 70년 후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읽어주었습니다(다니엘 9:2). 다니엘이 약속하신 해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시기를 믿음으로 그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다니엘은 얼굴을 땅에 묻고 2주동안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흉갑에 모든 이스라엘의 족속의 이름을 새기고 다녔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민족을 마음에 새기고 지속적으로 기도하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의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합니다. 게다가, 이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의 제사장이고, 늘 다른 사람의 필요와 기도제목을 마음에 새기고 다녀야 합니다.(야고보서 5:14-16 참조)

2014년 3월 26일 수요일

불온전한 마음의 기도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우리는 원수 마귀로부터의 지속적인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지옥의 모든 것에 대한 위협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한 일을 수행하는데 마귀의 유혹과 궤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어느 부부 상담가가 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교회 어느 곳에서나 부부들이 이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문자 그대로 전염병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크리스천 가정에 파란을 일으키는 이유라는 이유는 모두 들은 것 같습니다. 성격차이, 의사소통의 부재, 애정의 부재, 불륜 등. 이 모든 것의 배후는 모두 성도들을 향한 지옥으로부터 오는 공격입니다.

믿지 않는 비기독인 가정의 불화의 원인은 놀랍지 않지만 의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불화와 혼돈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중에 말씀중에 있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갑자기 가정에서의 권위가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의 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모든 권력을 물리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왜 계속 만연해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왜 그들의 가정이 그렇게 지속적인 위협에 처해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은 바로 부부 중 적어도 한 사람이 마귀의 망상에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가 영적으로 게을러 졌다던가 아니면 삶의 기준을 마귀의 유혹과 타협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격분한 마귀는 그들의 마음과 가정 안에 거점을 얻은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공격을 받고 있다면, 제자들이 질문하였던 것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는 왜 그 마귀를 내쫓지 못하였습니까?” 예수님은 특정 마귀의 구속은 단지 손을 얹었다고 또는 열정이 없고, 전심을 다하지 않은 일회적인 기도로 자유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구속은 깊이 자리잡고 있어 지속적인 기도와 금식으로만이 내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기도의 힘에 관하여 혼돈하고 있습니다. 수 백만명이 보는 앞에서 베일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어디서든 문제를 직면했을 때 예수님은 가장 마지막으로 찾고, 기도는 저버린 상태에서 심리학, 상담, 책 그리고 친구들을 찾습니다. 예수님만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가정이 파괴되었고, 그를 치유하고자 한다면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십니까? 텔레비전을 끄고 온전히 예수님께 짐을 내려놓고 그를 구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당신의 가정을 위해 몇번의 끼니를 거르는 금식을 하셨습니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5:16)

2014년 3월 25일 화요일

기도의 초점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는 간혹 가장 이기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자신의 필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의 두 가지 주요 주제는 우리 자신의 영적 성장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의 필요에 따른 기도제목으로 이루어집니다.

가끔, 자신의 폭 좁은 걱정을 넘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면, 한번 기도를 하고 쉽게 그들의 필요를 잊어버리지요.

최근 저는 제 기도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의 옹졸함과 제한적인 기도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저는 기도시간에 하나님을 찾고 믿음을 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합니다. 저는 기도 중에 거룩함을 구하고, 더욱더 예수님 닮기 원하며, 영적 삶의 인도자가 되어달라고, 영감 있는 사역할 수 있도록 구합니다. 또한 저는 조용히 찬양하며 주의 임재 속에서 기쁨으로 새롭게 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립니다.

또 저는 매일 가족을 위해 중보합니다. 나의 자녀들을 마귀의 궤계에서 보호해주시고, 아들들이 은혜의 강물에 심어진 상수리나무같이, 딸들이 하나님의 궁전에 빛이 나는 원석처럼 그리고 손주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이들로 자라도록 기도합니다. 또 위기에 처한 개개인과 우리가 지원하는 수많은 선교사님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정말 칭찬 받을 만 하군요.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집중으로 교제하며 그 모든 필요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들여다보면, 기쁨이 있는 교제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기쁨있는 교제가 영적 성장의 비결이고 이 땅에서 그보다 더 귀한 경험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스스로의 의식고양과 필요를 위해서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는 이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 모두의 심각하고 절박한 필요를 위한 기도를 단순히 못 본 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장 37-38절)

2014년 3월 24일 월요일

거룩한 꿈

“요셉이 꿈을 꾸고” 창세기 37장 5절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으로 직접 말씀하셨고 요셉은 뒷걸음 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통하여 마음에 거룩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꿈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113번 언급되었고, 그 중 언급된 30번은 요셉과 관련된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장 5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그러한 부끄러움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한 소망을 말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꿈을 외치는 것 자체가 큰 믿음을 요구하기 떄문입니다.

수년간 품어온 제 꿈은 스프링스 교회 같은 생기가 넘치는 지체를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 꿈을 나눌 때면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저는 목회를 작은 교회에서만 하였기에 그들의 불확실성과 의심의 눈초리에 더욱 쉽게 휘말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령님께서는 저를 격려해주시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음탕하고 범법하며 부도덕한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파괴하고 포기하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려 할 때에 죄를 지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행동도 피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요셉의 진실성은 보디발의 아내를 몹시 화나게 하였지만 그는 의를 위하여 그녀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세기 39장 9절)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꿈을 찾아 외쳐야 하는 때입니다. 당신은 오랜 기간 겪어 시험이라고 여겨지는 수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기초작업인 것입니다. 당신은 꿈을 꾸는 것을 두려워합니까? 문제가 많은 환경에서 자랐습니까? 남아 있는 상처에도 굴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십시오.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죄를 지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방황하는 모든 양들을 찾으러 가신다고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믿음으로 환영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수렁에 빠진 모든 믿는 그의 종을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에 영광이 되는 길로 당신을 인도하고 싶어 하십니다.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부흥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by Jim Cymbala

당신이 역사상 일어났던 위대한 부흥들에 대해 연구해 본다면, 어떤 부흥이라도 그 배경에는 반드시 그들 자신과 교회가 현 상태로부터 변화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집요하게 간구했으며, 기도는 마침내 부흥을 가져왔고, 부흥은 더 많은 기도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시편 80편의 내용과 흡사한데, 시편 기자 아삽은 무너진 성벽, 광포한 들짐승, 불타버린 포도원 등 그 당시의 애처로운 상황에 대해 탄식합니다. 18절에서 그는 이렇게 탄원합니다.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성령은 기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이 우리가 거하는 모든 장소에 하나님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운전 중의 차 안에서, 바로 그 도로 한복판에서도 우리의 영은 자발적으로 도움과 간구, 그리고 중보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교회가 기도하지 않으며,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인원이 예배에 참석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키겠습니까? 천사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 당신들 교회의 긴 신도석! 그것은 진정으로 아름답습니다! 이곳 천국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오랫동안 예기하고 있습니다. 설교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참으로 근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천국에 가는 것은 대체 무엇때문에 원하는 걸까요? 그곳에서 그분은 모든 것의 중심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그분의 임재에 거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천국은 우리를 위한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분을 열렬히 갈망하지 않는 사람을, 그분이 왜 그곳에 보내겠습니까?

저는 기도사역이나 다른 헌신의 행위로 인해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고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시간을 드리며,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찬양을 올려드리며, 천국이 어떠할 것이라는 주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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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 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3월 21일 금요일

영원토록 그분의 것!

당신이 똑같은 죄를 계속 반복할 때, 주님이 당신을 몇번이나 용서해주실지 궁금해할 것입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분의 놀라운 용서는 무한합니다. 당신이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 구원을 찾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는 현명치 못한 것이거나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천부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만, 우리가 계속 죄를 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언젠가는 우리를 징벌하십니다.

제가 아이들 넷을 키울때, 저는 제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벌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매를 대기 위해 아이들을 제 방으로 불러들이면, 그들은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때리지 마세요, 아빠!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저는 아이들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들에게 매를 대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그것이 훈계의 수단이 아니라 단지 장난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뜻,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신 바는 분명히 뜻하신다는 것을 항상 우리에게 각성시켜줍니다!

제가 여러분께 희망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죄로 인해 지금 깊은 바닥에 계신다면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징벌하시는 이유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심을 압니다. 나는 정녕코 영원토록 그분의 것이며, 그분이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실 거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분은 내가 고투할 때마다 나의 아픔을 함께 느끼시며, 내가 죄를 대항해 싸울 때에는 인내해주십니다. 내가 간구할 때마다 그분은 나를 용서하실 준비가 항상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천부께서는 나를 저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두려워하도록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용서가 주께 있사오니, 이것은 주를 두려워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4)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우리는 단지 그분께 순종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추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해드려서, 그분의 얼굴에 웃음을 선사해드리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의 축복된 결실입니다.

2014년 3월 20일 목요일

오직 믿음으로

새 언약(신약)에서의 기본 언약 중 하나는 예레미야 31장 3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신약성서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 (골로새서 2:1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죄 사함, 즉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죄 사함의 언약은 특정의 성도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들의 죄로 인해 압박당하며 진절머리가 나서, 죄의식의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서는 성령의 성찰을 견뎌낸 후,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이킨 자들에게만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슬프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들의 죄에 대해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상습적 습관은 조금도 그들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님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은혜로 충만하셔서, 그들이 죄 가운데 계속 완강하게 거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거짓 평강을 합리화시키고는, 성령의 책망과 성찰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책감이 경건한 슬픔으로 발전되기도 전에 미리 용서를 구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추론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보혈의 은혜는 지극히 심오하고 자비로우며 너무도 신비스러워서 인간의 이해를 훨씬 초월합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한 비난,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리 천부께서는 언제든 용서해주시기 위해 우리 곁에 자비롭게 서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아버지의 사랑, 죄를 사해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열망, 이러한 모든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라디아서 3:11)

2014년 3월 19일 수요일

주님은 선하시며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많은 성도가 그들의 실패에 너무도 압도된 나머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어떤 도움의 한계도 넘어선 강박감을 느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성도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오 고난 당하며 폭풍에 밀려다녀 위로를 받지 못한 자여…” (이사야 54:11)

어떤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께 화를 내게 됩니다. 그들은 그분이 도와주시기를 기다리다가 지쳐서는, 비난조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제게 당신이 필요했을 때 어디 계셨나요? 제가 도움을 청하며 외쳤으나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아무런 변화도 보지 못하고 회개하며 우는 것에 지쳤습니다.” 그러한 많은 성도는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그들 자신을 욕정에 넘겨주고 맙니다.

한편 어떤 성도들은 영적 혼미 속으로 빠져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을 돌보시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길은 주께 숨겨졌으며 나에 대한 판결은 내 하나님을 떠나 지나가 버렸다.” (이사야 40:27) “주께서 나를 버리셨으며, 내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이사야 49:14)

그리고 어떤 성도들은 모든 염려를 그들의 죄에만 중점을 두며, 그들 자신을 계속 죄인의 상태로 유지시킵니다. 이것은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 뿐이며 이렇게 울부짖게 만듭니다. “우리의 범죄들과 우리의 죄들이 우리 위에 있어, 우리가 그것들 가운데서 쇠약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살리요?” (에스겔 33:10) 사실상 유죄의 감정은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의식으로 낮아지고 우리 죄로 인해 애통해할 때, 우리는 그러한 감정에 젖어만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한계까지 이르게 한 다음, 십자가의 승리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애통함과 부르짖음으로 주님께 간구한 후, 마침내 다윗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용서가 주께 있사오니…” (시편 130:4) 성령께서는 그의 영혼을 하나님 자비의 기억들로 채워주기 시작하셨고, 그는 아버지의 용서와 죄 사하심의 성품에 대해 배운 모든 것을 기억했습니다. “주는 항상 용서하는 하나님이시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큰 친절을 베푸시는 분이시므로…” (느헤미야 9:17)

다윗은 곧 기쁨에 넘쳐 자신을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주여,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을 풍성히 베푸시나이다.” (시편 86:5)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은 요나에게 화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 주여, 주께서 곧 주께서 불법들을 지켜보실진대 누가 능히 서리이까?” (시편 130:3)

많은 그리스도인은 다윗과도 같이 고투합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일단 그들의 영혼에 뿌리내리게 되면, 그분의 엄청난 존엄이 그들 앞에 끊임없이 떠오르게 됩니다. 다윗처럼, 그들도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누가 당신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당신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요나도 그와 똑같은 간구를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부르짖었을 때, 그는 바다 밑바닥에 있었고 그의 딜레마에서 도피할 수 없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으로, 바다들 한가운데로 던지셨으므로 넘치는 큰물이 나를 에워싸고 주의 큰 물결과 파도가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밑바닥까지 내려갔으며…” (요나 2:3-6)

누가 요나를 그렇게 깊은 흑암으로 내던졌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천부께서는 이 선지자를 깊은 바닥으로 끌어 내리시고는, 고래가 그를 삼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화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왜냐하면, 그분의 종이 그분의 뜻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멈추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요나가 그분의 계획을 따르기를 원하셨고, 그로 인해 그가 축복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깊은 바닥으로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요나 2장 2절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추구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정확히 말해줍니다. “내가 내 고난으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내 말을 들으셨고, 내가 지옥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주님은 요나가 그분께로 돌이키고 그분을 향해 홀로 부르짖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눈앞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거룩한 전을 바라보리이다.” (4절) “내 혼이 내 속에서 기진할 때에 내가 주를 기억하였더니…” (7절)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로 돌이키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을 때까지, 우리가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지옥의 뱃속으로부터 이렇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 주님, 제게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는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나이다. 당신이 저를 구해주셔야만 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 죄를 극복하는데에 완전히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 상습적 죄에 대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으며, 주님은 그러한 당신을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게끔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그분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을 열망하고 계십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그분께 부르짖었을 때 얼른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 내니라.” (10절) 하나님은 고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그를 뱉어내라. 내 종이 내게 부르짖었으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2014년 3월 17일 월요일

하나님의 생기 by Gary Wilkerson

“내가 또 보니, 보라, 힘줄과 살이 그 뼈들 위에 생기며 그것들 위에 살갗이 덮였으나 그것들 속에 숨은 없더라.” (에스겔 37:8) 이 얼마나 처참한 광경인가요. 저는 모든 프로그램과 계획은 잘 짜여져 있지만, 생명이 없는 교회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는 모든 연령층과 성도들에게 필요한 세미나, 집회, 서적, 웹싸잇, 인터넷 통신서비스, 그리고 각종 모임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선한 동기로 고안되었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에게 불어넣어지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열망하시는 삶을 오히려 우리로부터 빼앗아가는 미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활동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영적이라는 착각 속으로 미혹됩니다. 그것은 마치 마른 뼈들이 연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생기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저는 천 번의 예배와 만 번의 전략을, 그분 성령의 한 가닥 생기와 바꾸겠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가 하는 일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37:9) 여기서 “생기(breath)”가 히브리어 단어로는 “ruach”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또 대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뼈들, 즉 사람들에게 대언해야 했지만, 이 두 번째 명은 하나님 자신, 즉 성령(ruach)에게 대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신 걸까요? 그분은 우리가 서로를 향해 설교하는 것, 즉 교리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단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도록 간청하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그분으로 하여금 상황을 바꿀 수 있게끔, 그분께 부르짖게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만이 생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먼저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지 않는 한, 우리 눈은 볼 수 없고, 우리 귀는 들을수 없으며, 우리 입은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실 때, 그 결과는 우리를 경탄케 합니다.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뼈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더라.” (37:10)

하나님의 생기는 우리를 담대함으로 서게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은 사도행전 2장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2:14) 베드로가 오순절에 선포했던 복음은 그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니었으며, 이제는 그가 일어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기로 말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기 원하는 생기는,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어둡고 절망적인 환경에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은 혼돈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분은 잿더미에서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십니다. 그리고 원수가 파멸만을 추구했던 끔찍한 상황 안으로, 예수님은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열쇠 by Carter Conlon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대언자들이니라.” (마태복음 7:12) 이것은 예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만일 상처를 입었다면, 나는 누군가 나를 돌보아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내가 만일 잃어버린 바 되었다면, 누군가 나를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그들이 가진 것을 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에게 그렇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구하는 모든 자원의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그것은 그분을 대항하는 자들의 비웃음을 견뎌낼 수 있는 열쇠이며, 당신의 원수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나는 누구도 실족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뺨을 맞았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반박하지 않게 만드는 힘입니다. 또한 이것은, 당신의 일터에서 주위 사람들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열쇠인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은 약속으로 종결을 짖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것들을 행하는 자를, 나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7:24-25) 그 집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폭풍으로 파산된 배에서도 굳게 서서 성찬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헤엄쳐서 바다를 건너야 했던 자들을 격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참조)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행해진 것이었지, 자신의 신변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평범한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배의 선장과 다른 항원들은 볼 수 없었지만, 바울의 눈이 열려 놀라운 계시가 주워졌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영혼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대에 그들의 등불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 신부들의 전형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1-13 참조)

저는 여러분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를 세밀히 읽어보시라고 추천합니다. 저는 이 세 장의 말씀을 반복해서 많이 읽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지침을 제시해준다고 믿습니다. 이 세 장의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당신 스스로는 이 세상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며, 대신 하나님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신께 말씀하십니다. “지금 구하라!” (마태복음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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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도에는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3월 14일 금요일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편 38:8-9)

당신도 다윗만큼 절실 했던 적이 있습니까?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시켜 하나님께 집중하며, 얼굴을 땅에 묻고 부르짖은 적이 있습니까? 지루하고 조용하고 태만한 기도는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치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피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러했듯이, 당신도 큰 목소리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여, 나의 간청을 들어주세요! 주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가졌던 어떤 절실함을 가졌었는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이 귀갓길에 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집에 다가갔을 무렵, 당신의 집 앞에 여러 대의 소방차가 줄지어 서있고 창문에서는 검정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나오고 있고 집 전체가 불길에 휩싸일 순간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와 아이들이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이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얼마나 침착하고 조용하게 계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불이 스스로 꺼지기를 기대하며 서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조용히 앉아서 “예수님, 불을 꺼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신 안에 조금이라도 사랑이 있다면, 당신은 연기가 피어나는 집으로 달려들어가서 무엇이라도 하려고 할 것 입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면, 그것은 배우자와의 관계가 타버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당신의 집에 불이 났다는 것과 상통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이 불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합니까? 가정의 붕괴에 대한 당신의 역할에 대하여 죄책감으로 부담을 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부담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강하고 능력 있는 말씀을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파멸하기 전에 자비로 당신에게 경고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달려가고 힘써 기도하십시오. 모든 치유는 간절히 하나님을 구할 때 시작됩니다.

2014년 3월 13일 목요일

소망이 있습니까?

절망의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130:2). 저는 이 구절이 죽어가는 사람의 간청처럼 들렸습니다. 다윗은 머릿 속 생각을 그저 읊으며 탄식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땅에 묻고 애통하며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간청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의 자유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자유를 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몹시 안 좋은 상태입니다. 주님 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의 조언자, 친구 그리고 심지어 가족에게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단 한가지 소망은 기도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간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밤과 낮으로 부르짖을 것입니다!”

수많은 크리스천 가정들이 다윗이 구했던 이 자유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많은 부부들이 어두운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배우자들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의사소통조차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보다 낯선 사람들에게 더 친절을 베풉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가정은 서로를 비방하고 치사하게 대하는 냉전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자신들은 모르지만, 그들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을 걷고 있고 그들의 관계는 제어가 안될 정도로 위협을 받게 됩니다. 당신의 결혼생활이 이미 한계치만큼 파괴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과 아내 혹은 남편의 관계는 붕괴직전의 상태에 있고 무슨 소망이 남아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을 시작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상태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거룩하지 못한 태도의 블랙홀에 빠져 있고, 이러한 상태는 단순하게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가정이 깨질 때까지 안 좋아지기만 할 것입니다.

성령님의 목소리에 자신을 바로 알도록 각성해야 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내 혹은 남편이 함께 짓고 있는 가정 안의 죄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 죄를 직면하고, 내려놓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두운 우물의 밑바닥 안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당신의 근심과 걱정을 누구에게 가지고 가십니까? 당신의 친한 친구에게 짐을 덜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저 당신의 배우자를 험담하고 계십니까? 만약에 카운셀러와 상담하고 계시다면, 상담을 관계를 끊기 위한 정당화하고 합리화할 이유를 찾고 계십니까?

부디 나의 글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부부 상담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오직 한 곳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 어떤 곳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죄는 당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당신은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2014년 3월 12일 수요일

진리의 화살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바울의 파멸의 조건에 포함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안심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9-10). 수많은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기 위해 쉼 노력을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마음에 화살처럼 박히는 진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받았느니라”(11절). 갑자기 그들은 내려놓지 못하여 자신을 사로잡은 정욕을 기억하게 됩니다. “나는 구원받고 정결케 되었는데 왜 나는 이 습관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진실로 자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당신은 오래 전 자신을 사로잡았던 정욕에 다시 돌아갔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들어갔거나 불륜이나 동성애에 말려들게 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당신이 회사의 물건을 훔쳤거나 퇴근 길에 몰래 술을 마시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의 오랜 습관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자신이 그 부분에 있어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마음이 들어도 놀랍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시편 77:3)

하나님께서는 정욕과 피에 사로잡힌 그의 자녀들을 볼 때마다 우리를 순종과 평강의 길로 되돌려 주기 위해 재빨리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일하실까요? 그는 우리가 죄를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깊이의 상황으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애워쌈을 당하고 하나님의 질책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 있을 동안 요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종의 부르짖음에 재빨리 응답하시어 요나의 삶 속 하나님의 축복과 계획을 회복해주셨습니다.

2014년 3월 11일 화요일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편 1-4절

다윗은 자신이 원인이 된 추문으로 인해 근심했습니다. 그의 죄는 밝혀졌고 온 나라가 그의 죄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치에 대한 근심으로 휩싸였고,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나의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시편 39편 8절

저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상황의 다윗과 같은 상황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빛에 반하는 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의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었고, 수년간 성경을 매일 읽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축복에 반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려놓지 않아 끊임없이 구속하는 죄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죄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끊었고, 성령님께서는 그들의 습관을 지목하시고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성령님께서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죄에서 떠나야 한다! 이제 더 이상은 정욕으로 채우는 너희를 눈감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에게 기한이 주어졌고 내가 너희 개인에게 자신의 죄를 보여주었지만, 곧 이 세상에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설 때마다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부르짖을 것입니다. “나의 죄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나의 죄가 나를 사로잡은 나머지 저는 천국을 향해 낯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한 때 누렸던 모든 기쁨과 자유함을 모두 잃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했다는 낙심을 늘 갖고 있을 것이고, 약해지고, 영적으로 병들 것이고, 무릎 꿇고 쓰러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언급한 상대가 당신의 영혼의 현 상태를 묘사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을 당신 안에 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014년 3월 10일 월요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by Gary Wilkerson

에스겔서 37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 속의 마른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너의 반항하는 자녀들이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친지들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겠느냐?”

우리의 믿음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것이라고 믿는가?” 또한 우리의 소망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가? 삶의 마른 뼈들로 인해 애통하고 있는가?” 당신의 응답이 “그렇지 않다” 라면, 영적으로 말라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대한 영적 열정을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에스겔서37:3). 이러한 응답은 그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 주님만이 아십니다. 제게 참혹한 죽음의 환상을 보이셨고 그 뼈들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으십니다. 그것이 진정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질문은 에스겔의 믿음을 일깨웠습니다. 그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셨던 것이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영적 각성을 위해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37:4).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우리 마음을 감동케하셔서 믿음의 언약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동하도록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대언”하도록 하십니다. 그 의미는 우리 삶의 마른 뼈들에 대해 믿음으로 행동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언행에 주시는 힘을 믿고 가족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 어떤 어둠으로 가득 찬 환경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직장에서도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셔야 합니다.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37:6)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37:7). 에스겔이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당신의 삶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사람들에게 축복과 평강의 말씀을 전했고, 말하기 어려운 사항들도 말해야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전한 것이고, 내가 그 모든 일을 행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나와 늘 함께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에스겔이 믿음으로 예언하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37:7). 이 구절에서의 “소리(sound)”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님께서 유월절에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을 때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에스겔은 그와 비슷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바닥에 있던 마른 뼈들이 생명을 입고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뼈들은 움직여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37:6)

2014년 3월 8일 토요일

전염성 믿음 by Claude Houde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애처로우며 감상적인 거짓 겸손의 개념이 허용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권장했습니다. “저를 바라보지 마세요!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세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초점과 헌신,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 신뢰를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한 분께 두는 것은 건전한 성경적 자세입니다. 인간은 언제든 실수할 수 있으며 불완전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고 상처 입힐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왕국의 영원하며 완전한 보배가 인간성과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불완전한 질그릇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줍니다. (고린도후서 4:7 참조)

그렇지만 믿음, 사랑, 용서, 순수함, 관용,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집에 대해 우리 자녀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간과하며, 궁극적이며 신성한 부르심에 등을 돌리는 시간은 반드시 끝나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이나 가식 없이, 대신 하나님께 의뢰하는 깊고 예리한 영적 감각의 소유자로서, 자기 주변의 어린 성도들에게 열성적으로 간구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린도전서 11:1) 그 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2)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의 중대성, 즉 우리 안에 보유하고 있는 영향력의 엄청난 가능성을 깨닫고 이해할 때, 우리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부르짖음이 솟아오릅니다. “오 주님, 우리의 믿음을 증가시켜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개개인 모두가 전염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당신의 가치관과 열정, 그리고 당신 삶의 우선순위가 일상생활에서의 당신의 언행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습니까?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제가 만일 당신과 시간을 보내며 당신한테서 배우고 당신을 본뜬다면 제게 무엇이 “전이”될까요?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어떤 사람들의 믿음, 사랑, 기쁨, 그리고 열정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그들과 가까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우리를 치유해주고, 영혼들과의 화합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기를 즐깁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더 높은 갈망과 헌신, 그리고 가능성을 향해 우리가 전진하도록 밀어주며,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그들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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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어려운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3월 7일 금요일

촛대를 옮기리라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았던 모든 영적 권위를 가져가실 거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도시와 공동체, 우리 이웃, 그리고 우리 영향권 범위 내의 어디든 우리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두를 포함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영향력은 우리에게서 거두어질 것입니다.

현재 세계 전역에서 많은 교회의 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의 전등불은 실제로 꺼져가고 있으며,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이 불러들인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분별력과 영적 축복, 그들의 재정, 그리고 그분 자신의 임재를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분께서 주신 과거 축복의 기억만 갖고 있으며 죽어서 생명이 없습니다.
저는 30여 년 전에 많은 교회를 다니며 설교했습니다. 그때에는 열성적 성도들로 성전이 가득했으나, 지금은 단지 수십 명 정도의 성도들만이 신도석에 앉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마저도 곧 없어질 것이고 그러한 교회의 문들은 영영 닫혀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문지방에 “Ichabod(이가봇)”이라고 적으셨는데, 그 의미는 “주님의 성령(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와 똑같은 메시지를 모든 성도 개개인에게 주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계속 무관심 가운데 머물러있다면 나는 네 촛대를 옮길 것이다. 너는 네 가족과 직장 동료들, 또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경고를 이렇게 결론지어 주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 2:7)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예수님이 바로 그 생명나무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네가 회개한다면, 나는 너에게 내 존재 자체로부터 나오는 끊임없는 생명을 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나를 계속 사랑하는 한, 나는 네 안에 초자연적 생명의 흐름을 공급해줄 것이다. 이 생명은 너의 분별력에, 영혼들을 향한 너의 사랑에, 그리고 내 왕국을 위한 너의 선한 행실들에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진실로 사랑에 빠져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구별짖는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경건한 슬픔, 당신의 통회하는 심령, 그리고 그분을 향한 당신의 새로워진 사랑이 당신을 생명으로 이끌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 그분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게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제가 처음으로 당신과 사랑에 빠졌을 때의 그 모습으로 되돌려 주십시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저를 당신 안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당신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당신 안에 새로운 그리스도의 영광의 계시를 생성해내기 시작하실 것이며,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2014년 3월 6일 목요일

에베소 교회

여러분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사도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일곱 교회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중 한 교회가 예수님께서 매우 높이 평가하시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저는 타임스 스퀘어에 위치한 우리 교회가 그 에베소 교회와 비슷하다고 즐겨 생각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극도의 사악함 속에서도 절대 쓰러지지 않으며 성도들의 지체는 고투했습니다. 그들은 헌신적 삶을 살았고, 죄를 미워했으며 거짓 교리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 굳건히 섰으며, 사탄이 그들에게 어떠한 유혹을 던졌어도 아무 흔들림 없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러한 성도들 가운데서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이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온 백성을 비추는 밝은 등불이었기에, 그분은 이 교회가 죽어가는 것을 관망만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조금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 2: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너희의 불은 꺼지고 있다! 한때 너희의 신실함을 불러일으켰던 나를 향한 너희의 사랑은 소멸되고 있다. 한때는 너희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나의 짐을 지었으나, 지금은 그저 가만히 앉아서 설교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있다. 너희는 이제 나의 일은 무시한 채, 너희 자신들의 사적인 일에만 완전히 몰두되어 있다. 너희는 이전에 섰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로부터 떨어졌는지 기억하라.” (5절) 그분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라! 너희는 내 성도들과 함께 있기 위해, 그리고 내 짐을 지기 위해 내 집으로 오는 것을 갈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일 아침 한 시간이 네게 족하게 되었구나!”

자,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은 예수님을 향해 아직도 불타오르고 계십니까? 당신이 처음 구원받았을 때처럼 그분과 열렬히 사랑에 빠져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사역을 저버린 채 그분의 관심사에는 아예 흥미를 잃었습니까? 당신 삶의 많은 행사로 인해 너무도 분주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서 당신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라.” (5절)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커져만 가는 너희의 무관심에 대해 애통하라. 깊이 뉘우치고 신중히 생각하라. 그리고 네 슬픔으로 하여금, 네가 나를 처음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라!”

2014년 3월 5일 수요일

“깊이갈이(심경)”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로마서 2:4)

제가 청교도 저자들의 모든 교리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거룩”에 대한 강조를 너무도 좋아합니다. 이 경건한 설교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깊이갈이(심경)”라고 칭했습니다. 그들은 청중의 마음 밭이 깊이 일구어지기 전까지는 진정한 믿음의 씨앗을 심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그들 청중의 모든 메마른 영혼의 땅을 경작하며, 그들의 설교가 청중 마음속 깊이 스며들게끔 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회중 가운데서 진정한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실로, 많은 해에 걸쳐 강인하고 성숙하며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배양해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는 거의가 그저 경작 없는 씨 뿌림입니다. 요즈음 저는 겉흙을 관통해서 더 깊이 들어가는 설교를 거의 들어보지 못합니다. 깊은 경작은 단지 죄의 질병을 지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질병의 핵심 원인까지 파헤칩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설교는 질병을 무시한 채 처방에만 초점을 둡니다. 그것은 수술도 해주지도 않은 채 처방전만 제시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그들 자신이 병들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죄의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는 의로움의 옷을 입혀줍니다. 믿음의 필요성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설득합니다. 그들은 결국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내 삶에 더한다고 해서 나쁠건 없겠지.”

영국의 강력한 설교자 스펄전(C. H. Spurgeon)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비록 최근에는 그것에 대해 많이 들어보지 못했지만, 저는 비통한 참회가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너무 빨리 믿음으로 뛰어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오랜 친구 ‘회개’가 아직 죽지 않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회개와 너무도 깊은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쌍둥이 자매인듯합니다.”

“저는 눈물 없는 믿음에 대해서는 많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울음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그리스도께로 왔음을 압니다. 제가 믿음으로 갈보리에 왔을 때, 그것은 내 죄를 고백하며 통곡과 탄원으로,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구원을 찾으려는 열망과 함께 왔습니다.”

2014년 3월 4일 화요일

회개의 복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느니라.” (고린도후서 7:10)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사역을 회고하며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전하셨던 복음, 즉 회개의 복음을 내가 경솔히 다룬 것은 아닐까?” 내가 성경에 가위를 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요구되는 더 큰 희생을 본질적으로 잘라낸 것은 아닌가? 내가 사람들에게 그저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의 기준을 낮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죄를 향한 진정한 회개를 경솔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서둘러서는,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자들과 자신들의 죄로 인해 애통해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 이면의 욕정을 감추기 위해 믿음을 구했던 자들에게 구원을 제시했던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여러 사역단체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과장된 숫자를 끊임없이 듣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이 수감소에서, 학교에서, 또 그 외 사역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해 모두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실은 많은 경우에, 모든 사람이 단순히 기도문을 따라 낭독하는 것 뿐입니다. 그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기도하며, 대부분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믿음 없는 그들의 이전 삶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성령의 깊은 역사를 결코 체험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절대 회개하지 않으며, 그들의 죄로 인해 근심하지도 않을뿐더러 진실로 믿지도 않습니다. 비참하게도,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결코 제시하시지 않은 구원, 즉 회개가 결여된 구원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심지어는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감정을 삭재해 버렸다고 믿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구원받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더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눈물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생생한 감동이 있는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성령에 의해 감동받은 사람은, 그가 주님을 근심시킨 것에 대한 애통함을 저절로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 그가 느꼈던 경건한 슬픔이 바로 그러한 감정입니다. 그때 그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이 갑자기 물밀듯이 떠올랐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생각하며 슬프게 우니라.” (마가복음 14:72)

2014년 3월 3일 월요일

심히 마른 뼈들 by Gary Wilkerson

에스겔 37장의 환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에스겔 선지자를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에스겔 37:1-2) 에스겔이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끝없이 뼈로 가득한 골짜기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장면이었을까요?

에스겔처럼 당신도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 제 앞에 있는 것은 어려운 일들로만 가득합니다. 왜 저를 이 어두운 골짜기로 데려가시나요?” 왜냐하면, 마른 뼈 골짜기에는 다른 생명의 근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자신의 호흡도, 능력도, 힘도 없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는 우리에게 전적인 의존의 상황을 가져다줍니다. 2013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해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난해를 돌이켜보며 매 순간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삶의 모든 마른 뼈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제 삶의 막바지가 그분의 생명이 시작되는 성소가 되도록 계획하셨음을 봅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계시해줍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줍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며 최선을 다해 기도합니다. 교회는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통로입니다. 그러나 또한 제 마음에는 교회에 대한 부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교회가 마른 뼈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판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새에 메말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 2:4) 우리가 잘하고 있는 척 할수도 있지만, 실은 전혀 생명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에스겔의 환상에서 제가 보는 마른 뼈들의 계시는 우리 문화입니다. 한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했던 국가였습니다. 그때는 70%의 미국인이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교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최신 통계로는 그 숫자가 겨우 8%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 어둠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고 기도가 없으며 미적지근한 마른 뼈들의 교회가, 어떻게 마른 뼈들의 문화에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영이 성령에 의해 다시 소생되고 깨우쳐지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2014년 3월 1일 토요일

진정한 힘 by Jim Cymbala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탄의 주된 전략은 언제나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도록 그분을 부르지도 말고, 그분께 구하지도 말고, 그분께 의존하지도 마라. 너 자신의 명석함과 힘만 가지고도 너는 잘해낼 수 있어.”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마귀는 우리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에 그다지 겁먹고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도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올려드릴 때 그의 왕국이 타격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 4편 3절의 확신에 찬 다윗의 선포를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순전한 자세였으며 그의 본능이었고, 특별히 전투를 향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어떤 무기를 가졌는지가 그에게는 아무 상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움츠러들고 그분을 부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작은 군대라 할지라도 우리가 패배당할 수 있습니다.

제 귀에는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네가 나를 추격할 수도 있고, 핍박할 수도 있으며,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요청만 하면 너는 끝장이야! 내가 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들으실 거야!”

시편 14편 4절에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살펴보십시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이것이 바로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그들이 많은 일을 행할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을 낮추지도 않을 것이며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시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 겸손히 주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구원을 얻기가 불가능합니다. (사도행전 2:21 참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특별히 부요한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서 10:12-13 참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나님께서는 시편 50편 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으로부터 찬양받기를 열망하시지만, 육신으로서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환란의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그분께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 중재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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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 명도 채 못 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