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31일 월요일

그분의 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구하는 요청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 17:7-8, 10).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분의 종들인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주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양식을 공급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궁금할지 모릅니다. “주님께 우리가 어떤 음식을 갖다드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분의 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11:6) 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가장 즐기시는 음식은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양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단지 말씀만 하셔서 그의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구하였을 때 그리스도는 그의 생동적인 믿음으로 진수성찬을 드셨습니다.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8:10).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이방인, 이 외인이 내 영을 먹이고 있다. 이 사람의 믿음은 내게 얼마나 영양분 있는 음식인가.

 

나는 예수님의 말씀가운데서 직설적인 선언을 감지했습니다. “네가 먼저 먹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먹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필요를 위해서 믿음을 소모해 버리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주님의 주림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라,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2009년 8월 28일 금요일

예수님의 말씀 다루기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16:12)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로 하여금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계시를 원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렇지만 너희가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준 것들에 대해 신뢰할 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너희에게 그러한 믿음을 맡길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준 것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전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듯이 보였습니다.

 

주님이 ‘남의 것’(16:12) 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그분은 자신의 피 값으로 산 우리의 몸과 영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Ye are bought with a price; therefore glorify God in your body and in your spirit, which are God's. KJV.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몸은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 만일 네가 그 몸을 돌보지 않는다면-만일 네가 나로 하여금 네 안을 들여다보고 네 죄를 다루고 너를 성화시키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너에게 더욱 큰 것을 맡기리라고 기대할 수 있느냐?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구하였고 그들에게 주님은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17:6)

 

예수님은 이 이미지를 통해 무엇을 제시하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나는 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뿌리들을 뽑아내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악의 뿌리들, 그분을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가 처리해야만 하는 은밀한 것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산들을 움직이신다고 믿을 수 있게 되려면 먼저 너는 뿌리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위대한 사도의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주 최소한의 믿음만 있으면 된다. 나는 네게 가장 기초적인 것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죄의 뿌리들을 뽑아내라는 것이다. 네 마음을 점검해보고 나를 닮지 않은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한다.

2009년 8월 27일 목요일

날로 더하는 믿음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맏음을 더하소서 하니” ( 17:5). 그리스도 주변에 가까이 있던 자들이 그들의 주께 중요한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더 깊이 깨닫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에 대해 계시해 주십시오.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최대한 파악하기 원합니다.

 

표면상으로 그들의 요청은 칭찬 할 만해 보입니다. 하지만 나는 사도들이 예수님께 이 요청을 한 것은 그들이 혼동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앞 장에서 그리스도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6: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육이 사소한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작은 일에 충성하면,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기초적인 일이며, 더욱 큰일에도 충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본 요건에 비춰 자신이 신뢰할 만한지 증명해 보여라.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더 한층 깊은 척도에 견주어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느냐?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사도들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시인할 것입니다. 우리도 산을 움직이는 믿음과 같은 것을 얻고자 하여 곧장 큰 믿음의 문제들을 향해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처럼 종종 눈에 보이는 결과들로 믿음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믿음은 당신이 성취하려고 목표한 일의 양이나 크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 인생의 초점과 방향과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비전에 관여하신다기보다는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위하여 세상 전부를 얻는 것 보다 나의 전부를 얻으시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2009년 8월 26일 수요일

질그릇

성경 말씀 중 가장 격려가 되는 말씀 중 하나가 바로 고린도후서 4:7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는 이어 이러한 질그릇을 죽어가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답답한 일을 당하는, 박해를 당하는,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버림을 당하거나 낙심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육신의 무게아래서 신음해왔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덧입혀지기를 갈망하면서.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을 조롱하십니다. 그분은 선하고자 하는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노력을 비웃으십니다. 그분은 결코 높은 자나 강한 자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 세상에서 약한 것을 들어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십니다.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페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세상에! 그 말씀이 얼마나 나를 묘사하는 것인지요! 약한 것! 미련한 것! 멸시 받는 것! 천한 것! 문벌이 좋지 않은 것! 그리 똑똑하지 못한 자! 능하지 못한 자! 이러한 자를 하나님이 사용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정신 나간 일인가요! 하지만 그것이 그분의 완전한 계획이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해도 우리의 약함 가운데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은 이러한 질그릇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담습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내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에서, 연약한 자들을 통해서 그분의 목표를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연약하였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였고 자신의 아내를 간음한 여인으로 만들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3).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소라게

수많은 시편의 저자인 다윗왕은 고군분투하던 중 피곤해졌습니다. 그의 영혼이 너무 곤하고, 온갖 문제점들과 싸우며 둘러싸였기에 그는 오직 평화롭고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55:4-8)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우는 대신 쉬운 길을 택하고 우리의 전투에서 손을 떼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자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근 나는 게에 대한 생물학자의 연구논문을 읽었습니다. 게는 뾰족한 암초들이 있는 험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사는 생물입니다. 매일 이들은 파도에 휩쓸리고 더 깊은 물에서부터 온 다른 생물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공격을 당합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우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껍질은 단단해지고 생존 본능이 강해졌습니다.

 

놀랍게도 어떤 종류의 게는 생존을 위한 싸움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다른 생물들이 버린 껍질 안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이 종류의 게를 소라게(hermit crab 숨어있는 게라는 뜻)라고 부릅니다. 안전하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이들은 전투에서 퇴각하고 이미 지어져있던 중고 집으로 도피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소라게들의 소위 ‘안전한 집’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하고 그들을 망치는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싸울 일이 없기에 그들 몸의 중요한 부분들이 퇴화해 버렸습니다. 몸의 기관들도 사용하지 않기에 시들어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라게는 움직이는 모든 힘을 잃어버렸고 또한 도망하는데 꼭 필요한 몸의 부분들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들의 사지는 그저 떨어져 버렸고, 위험으로부터는 벗어났으나 단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도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한편, 계속 투쟁했던 게들은 성장하고 번성합니다. 그들의 다리 다섯 쌍은 살이 차고 강한 파도를 이겨내느라 튼튼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적으로부터 숨는 법을 배워 바위 밑으로 재빠르게 도망칩니다.

 

이 자연의 법칙은 또한 영의 법칙을 보여줍니다. 믿는 자들인 우리에게는 고난의 파도가 계속 밀려와 우리를 까부르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통치와 세력 안에 있는 악한 적을 대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싸워나가므로 우리는 더욱 강하게 성장합니다. 그리고 사탄이 우리에게 그의 간계를 부릴 때 그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 즉 ‘반석사이의 틈’을 발견합니다. 그제 서야 우리는 우리의 전투 가운데서 진정으로 안전하게 됩니다.

2009년 8월 24일 월요일

당신은 칠천 명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털어 7 이란 숫자는 곧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동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이 열왕기상 19:18에서 인용하신 7000 이란 숫자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모든 사람들을 통털어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위하여 남겨놓으신 백성의 숫자는 70도 될 수 있고 7백만도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완전히 그분께 드려진 자들 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자들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분된 특징이 있습니다.

1. 주님을 붙들고자하는 변함없는 태도입니다. 모든 남은 신자는 악의 물결을 거슬러 헤엄치고자하는 확고한 결심을 한 자들입니다. 어느 순간에 당신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이시대의 악한 영에게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선언하며 태도를 분명히 해야합니다.

 

2. 가난한자와 기꺼이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경향은 부하고 성공하는 사람과 사귀고자하지만 당신을 고통당하는 자의 편이 되십시오. 오바댜는 이세벨의 집에서 섬기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만 경외하기로 작정하였고 그의 마음가짐이 옳았음을 보여주었으며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선지자 백 명을 돌보아 줌으로써(왕상18:4)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3. 소망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7000명은 다가올 구원에 소망을 두고 인내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교회의 복된 소망은 임박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나팔소리가 한번 울리면 모든 악은 끝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낙태, 모든 난삽한 도착증, 모든 인종 학살을 폐하실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남은 자 중 한사람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자랑스러워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나에게 주었다. 그는 나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전체가 나의 것이다.

우리는 아직 낮이 밝은 동안 전도하고, 섬기고 일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왕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소망 속에서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영원한 보좌로부터 그분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2009년 8월 21일 금요일

하나님의 성공 척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시는 성공은 그분을 섬김으로써 완전히 충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종들은 성취하려고 애쓰거나 세상적인 안전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주님을 알기 원하고 그분을 섬기기 원합니다.

 

오바댜가 숨겼던 백 명의 선지자들(왕상18:4)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심한 기근 동안 굴속에서 적어도 삼사년에 걸쳐 고립된 생활을 했습니다. 이 선지자들은 전혀 외부에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잊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있었던 엘리야의 승리조차도 같이 나누지 못했습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세상은 그들을 실패자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하찮은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헌신된 종들에게 시간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몇 날, 몇 주 아니 몇 년이라는 기도하고, 성장하고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백성을 섬기도록 하기위해 풀어줄 날에 대비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과연, 바로 이들이 엘리야의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들을 목양했을 것입니다.

 

수 년 전, 주님은 나에게 이 시간을 선물로 복주셨습니다. 한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숲으로 들어가 새들과 나무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나는 아무런 계획도, 일정도, 꿈도 없었습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구하며 그분을 섬기며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내 성경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줄곧 내가 있는 곳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나의 충고는 이것입니다. “사역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을 구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다. 그분이 보시기에 당신이 준비되었을 때 그분은 당신을 불러내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보좌에서 성공하기를 애쓰십시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당신은 이미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한 자입니다

2009년 8월 20일 목요일

흥분된 나날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로, 모든 듣는 자에게 예수님이 오신다, 이제 준비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해 재난이 지구를 강타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자신의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새 왕국이 도래하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듣기에 둔한 자들임을 아시고, 지진 정도의 재난이나 겨우 그들의 주의를 끌 수 있음을 아십니다. 이러한 재난들은 마지막 때의 무대를 설정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일종의 카운트다운입니다. 이러한 진통은 마지막 시간이 다가 올수록 더욱 빈번하고 더욱 강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21:28)

 

이 모든 것이 무섭게 들리십니까? 진실이 두렵습니까? 세상의 종말이 이르렀다는 것이 정말 가능 할까요? 이 시점이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때일까요? 가장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도 이 지구의 마지막 때가 얼마나 두렵도록 가까이 왔는지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친구여러분, 요즈음 성령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단지 짤막한 다섯 마디입니다만, 대단히 강력한 말씀으로서 내안에 영광스러운 새로운 소망과 믿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 다섯 마디 짤막한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 하신다” 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당신은 모든 재난을 똑바로 대면하여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이 우주에게 말씀하시고 그분의 능력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다만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이 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교만과 성령의 음성

교만과 겸손을 명확히 구분해 보겠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고개를 떨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며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모든 것에, 모든 상황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이 그를 인도하시고 힘을 주시고 북돋아주셔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으면 자신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 반대로, 어느 정도 하나님을 사랑할지는 모르나 자기 방식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교만의 뿌리는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이론, 기술과 능력에 기초해서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에게 훌륭한 지성을 주셨고 내가 그것을 사용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그분께 인도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지요,”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유명한 사람에게는 귀를 기울일지 모르겠으나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받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의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진리를 증언할 성령님이 계시기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4:12)

 

교만은 독립이고 겸손은 의존입니다. 겸손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조언 없이는 움직이지 않고, 결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의로운 사람의 발걸음은 주님이 명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독립적인 영의 발걸음에게는 명하실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전적인 통제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분께 이것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4:6)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세 적국의 군대가 유다를 포위해 들어오고 있을 때, 여호사밧 왕은 전투 계획을 짜기 위하여 전국의 백성을 예루살렘에 소집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응전을 포고할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든 즉시 대처했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여호사밧은 그의 백성 앞에 서서 하나님께 고백하며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니이다”(대하20:11-12)

 

우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저런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어찌 할 바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 세상이나 또는 경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즈니스 세계는 한층 더 혼란스럽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미래에 대해 서로 논쟁하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심리학자나 정신신경과 의사들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앉아서, 하나님이 모두 알아서 하시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 하고 계속 응시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할지 아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홍수위에 좌정하시는 왕 이심을 압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시고 비록 세상이 두 조각이 나고 또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그분은 확고한 반석이심을 압니다. 우리의 눈은 부활하신 주님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찌 할 바를 모른다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확신시켜 줍니다. 그분이 아신다고.

2009년 8월 17일 월요일

요나는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요나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위에 넘쳤나이다...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2:3-6)

 

요나는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큰 물고기의 뱃속에 매장되었습니다. 그는 절망과 수치와 죄의식으로 가득찬 채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싸움 중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사람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극한 상황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어떻게 이 구덩이로부터 빠져나왔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는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2:7,9).

 

요나는 구원에 관한 아무런 말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혀 희망이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주위는 모두 어둡고 암울했습니다. 거의 혼절할 지경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모든 곤경가운데에서, 요나는 주님의 존전에 들어가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요나야, 네가 그 말하기를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그 모든 와중에서 나를 신뢰했다. 너는 시험을 통과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2:10) 하늘에서 한 마디 명령이 떨어지자, 그 물고기는 요나를 해변에 토해냈습니다. 괴로움에 처했었던 그는 해변으로 굴러 나오며 틀림없이 “나는 이제 자유다. 자유다,”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아마 머리에 붙은 해초를 떼어내며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감사의 제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무 곳도 의지할 곳이 없을 때, 감사의 제단으로 돌아가십시오. 용서해 주심을, 당신을 과거의 모든 죄로부터 풀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당신을 사자의 이빨로부터 구원해주심을, 영광 안에서 당신에게 새 집을 주심을, 지난 날 그 분이 베풀어주신 모든 복을, 그분의 모든 약속들을, 미래에 행하실 모든 일을,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드리십시오!

 

“지존자여...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92:1).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4-15).

2009년 8월 14일 금요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나님은 항상 그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더욱 부어주시기 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3:20) 해주시고자 갈망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분 자신에 대해 몹시 굶주려 갈급해 하는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의 백성들이 전 생애를 통해 경험했던 모든 것을 넘는 그분의 경이로운 임재로 그들을 채워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3: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풍성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시는 일에 더욱 더 풍성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우리가...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15:58).

 

희랍어 원어로 “풍성하다 (abound)”의 뜻은 “초과하다, 뛰어나다, 넘치도록 풍부하다 - 충분하고 남아돌고, 차고 넘치고, 측량을 넘는, 측량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넘치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이제까지 당신이 경험했던 작은 순간들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 당신의 기도들이 단순히 당신이 식사 때 복을 구하는 정도는 넘어서야 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6,7) 바울은 우리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토록 풍성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당신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섬겨야만 합니다. , 게으르고 잠에 빠져있던 종들을 뛰어넘는 사랑과 헌신으로.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1:8) 하나님은 이전에 측량할 수 있었던 정도를 모두 초월하여 당신에게 영광과 계시를 나누어 주시기 원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1:9)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게 나의 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네게 그 비밀들을 계시해 주기 원한다.

2009년 8월 13일 목요일

I AM

우리가 운영하는 십대를 위한 마약 갱생 센터의 청소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성령께 믿음을 한 단락으로 설명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의 서재에는 믿음의 정의에 대하여 삼백 페이지가 넘게 쓴 책이 있습니다. 나는 전혀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그 책의 저자도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모세도 언젠가 우리가 질문하는 것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을 설명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마디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 ('I AM')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3:14) (현대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과도히 단순화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모세에게 “누가 너를 보냈느냐?” 물었을때 “'I AM'이 보내셨다,” 라고 대답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까?

 

I AM 이라니요? 너는 무엇이 필요하지? 구원? 그러면 나는 (I AM) 구원이다. 나는 (I AM) 네가 무엇이 필요하든지 바로 그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다(I AM)” 이라고 말씀하시면 내가 “그분이시다 (HE IS)”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자신을 묘사하신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는 너를 폭풍으로부터 구해 낸다,” 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이 나를 폭풍으로부터 구해내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자신이 어떤 분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폭풍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것에 대처하십니까?

 

그분께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당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그분께 구하십시오. 폭풍은 바로 탈출구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11) 나는 믿음이 바울을 붙든 순간 그가 자족했다고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 한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내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으로부터 쏘는 침을 제거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서도 폭풍으로부터 두려움을 제거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하시도록 하겠습니까? 당신의 폭풍을 통과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무너지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2009년 8월 12일 수요일

우리의 사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고후3:18)

주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바울은 여기서 헌신적인, 집중된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분을 바라보기 위해 주님께 주어진 시간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곧 덧붙여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고후4:1) 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우리가 자신을 드려 헌신해야만 하는 사역이라고 명확히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보다”라는 말의 희랍어 원어는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그저 한번 보는 것이 아니라 “뚫어지게 쳐다보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나는 지금 이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무언가 하기 전에, 단 한 가지라도 성취하려고 하기 전에, 나는 하나님 존전에 있어야만 한다,” 라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거울을 보는 것 같이... (고후3:18)를 잘 못 해석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거울에 반사되어 그들에게 보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강렬하게 집중된 시선을 말합니다, 마치 더욱더 명확히 보려고 애쓰며 열심히 유리를 통해 뭔가를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위해 결단하고 이런 식으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박적일 만큼 한 목적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외부로부터 자신을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마침내 변화될 수 있도록 집중하여 응시하고 헌신적으로 교통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변화된다는 말의 희랍어 원어는 “metamorphosed, , “변화되다, 변형되다, 변모되다”입니다. 지성소에 자주 들어가 그리스도에 주의 깊게 눈길을 고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metamorphosed”되고 있습니다. 모습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분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주님의 존전에 자주 들어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만큼 자신이 변하는 것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말씀드리건대, 당신은 변화(metamorphosis)가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확실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변화를 받지 않고는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말씀의 마지막 구절을 주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다...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이탤릭체는 저자 임의로 사용) 다음은, 바로 전 구절을 주의해 보십시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3:17)

 

사도 바울이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곳에는 변화될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존전에 있음으로써, 우리는 성령께 그분의 뜻대로 우리를 다루시라고 우리의 삶들을 통치할 자유를 드립니다. 그것은 “주님, 내 뜻은 당신의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든지 나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켜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2009년 8월 11일 화요일

한그루의 나무를 심으라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고통을 면제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궁핍에 처하지 않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 평화, 평온, 안전 또는 지속적인 경제적 풍요에 대한 약속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진정한 필요에 대한 초자연적인 공급, 즉 영혼과 마음의 평강과 안전에 대하여 약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양식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을 약속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히려 사도 바울이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8) 라고 말할 때 도달한 그 경지에 오기를 원하십니다.

 

미래는 악해 보이고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믿는 자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미래도 또한 그분의 통제 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래도 모두 미리 계획해두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40:15, 17)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까지 우리가 계속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종말이 결코 이르지 않을 것처럼 일하고 또 세상의 종말이 내일 이를 것처럼 살라는 의미입니다. 위대한 부흥사 D. L. Moody 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내일 재림하실 것을 알았다면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한그루 나무를 심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가서 나무를 심고 하나님의 씨앗을 뿌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하며 바쁘게 일하십시오. 그분이 오실 때 우리가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을 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머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다 세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참새들이 떨어지는 것을 세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구하기도 전에 구하는 것을 듣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가 그분을 부르기 전에 대답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게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십니까?

2009년 8월 10일 월요일

다윗의 놀라운 고백

시편 119편에서 다윗은 장문의 시로 하나님의 말씀을 높여드린 후 이렇게 끝맺었습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 119:176)

 

본질적으로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는 것처럼 저를 찾아 주십시오. 내 모든 성경지식이나 말씀 전파나 당신과 함께 지냈던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이지 나는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떠나 길을 잃었습니다. 내가 한때 주님 안에서 누렸던 안식의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완전히 무력함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저에게 오십시오. 이 끔찍하고 메마른 곳에서 나를 찾아내 주십시오. 내 힘으로는 당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저를 찾아주셔야만 합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말씀이 진리인줄 믿습니다.

 

다윗은 그가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떠나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이전에 위기에 처했을 때 깨달았던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어야 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잃어버린 주의 종을 찾아 주소서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자는 다시 한 번 다윗을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다윗의 마음은 평안을 찾았습니다. 그는 “나의 목자는 내 이름을 안다” 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인도함을 받아 언덕을 내려가 푸른 계곡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푸른 초장에 도착하자, 여호와 로히 (여호와 나의 목자)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누워라.

잠을 자고 네 피곤한 영혼을 쉬도록 하여라. 염려하지마라. 내가 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돌보아 주겠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다윗의 상황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성경에서 말씀하기를 다윗을 괴롭히던 원수의 숫자는 더욱 증가했었습니다. (시편 3:1)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그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3:8)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증언했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 계획을 짜지 마라. 더 이상 일을 해결해 보려고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지 마라. 나는 나의 목자의 사랑 안에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가리라. 나를 향하여 벌리신 두 팔을 반갑게 맞으리라. 그리고 그의 안식 안에 누울 것이라.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잠들 것이라.

2009년 8월 7일 금요일

인도하시는 성령

성경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고 말씀하실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우리 몸을 소유하시고 그의 전을 삼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마음과 음성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3).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령께서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면, 그분은 당신을 개인적으로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목사나 선지자, 교사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이것은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령께서는 그의 백성을 이끄시고 인도하실 때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으로 가라, 저곳으로 가라....이 마을로 들어가라....저 사람에게 기름 부으라...” 초대 교회 신자들은 모든 곳에서, 모든 일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경을 거스르는 말씀을 한 마디도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씀하시기 위해 성경을 사용 하십니다. 그분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안위하시며 장래 일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계시된 말씀을 우리에게 열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이 모세처럼 “와서 옆에 서는”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신다고 확신합니다. 말은 우리가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있기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서두르지 않고,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믿으며 하나님과 함께 매일 친밀한 시간을 보내야 함을 의미 합니다. 그분은 아무것도 우리에게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임을 당하거나 혼동에 빠지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험난한 시기를 지날 때라도 우리는 기쁨이 넘치는 시간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전에 결코 본적이 없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9년 8월 6일 목요일

기쁨은 도대체 어떻게 됐습니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쁨으로 즐거이 주를 섬기도록 회복하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 위에 젖은 담요같이 털썩 떨어진 절망과 슬픔을 바라보며 하늘은 얼마나 비통해할까요! 

 

시편 기자는 선언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 144:15)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12:3)

 

성령께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문제에 대해 나를 다루실 때, 나는 이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아 곤혹스러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가슴 아픈 일들과 비교할 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 일 수 있겠는가 의아해 했습니다.

 

크리스천 중에도 자유에 대한 진리와 생명을 자유하게 하는 갈보리에서의 희생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십자가가 모든 공포와 굴레로부터 그들을 자유하게 하도록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부족하거나 제한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즐거워하지도 못하고 기쁨이 넘치지도 못합니다.

 

당신은 속죄, 화목, 구속, 은혜, 성화, 등등 모든 교리에 관하여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 앞에서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이 기초적인 한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위에서 드려진 그리스도의 희생에 완벽하게 만족하셨다!

 

이것이 필요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모든 사람을 지금 기꺼이, 즐거이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서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 값을 모두 치렀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에게 이 진리를 깨우쳐주도록 하십시오. - 우리는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기쁨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충만하고 완전한 기쁨 말입니다. 되어 누르고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성도들이 그분을 즐거워하기를 갈망하신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7:13)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35:10)

2009년 8월 5일 수요일

울어버리십시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에는 기도하는 골방으로 들어가 원통함을 다 쏟아 울어버리십시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그 고통을 안고서 통곡하였습니다. 그는 슬픔에 잠겨 홀로 산을 거닐며 울었습니다. 이 쓰디쓴 눈물이 그의 안에서 신묘한 기적을 이루어내어 그는 돌이켜 사탄의 왕국을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수년전 유방절제 수술을 받았던 한 여인이 “먼저, 울라” 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최근에 나는 한 친구와 이야기 하다가 그가 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눈물이 모두 말라 없어질 때 까지 울어버리는 것이네. 그리고는 예수님께 한발자국 씩 더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하지. 주님의 팔이 나를 꼭 붙잡아 주실 때 까지.

 

예수님은 결코 울부짖는 심령으로부터 눈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한 번도 주님은 “네 자신을 추슬러라! 일어나서 약을 복용해라! 이를 악물고 눈물을 닦아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단 한번도!

예수님은 모든 눈물을 영원한 눈물 병에 담아두십니다.

 

마음이 상하였습니까? 그러면 그저 울어버리십시오. 눈물이 말라 더 이상 흐르지 않을 때 까지 우십시오. 다만 그 눈물이 불신이나 자기 연민이 아니라 당신의 상처로 부터만 흘러나게 하십시오.

 

주안에서 당신을 격려하십시오. 안개가 당신을 두르고 당신의 딜레마로부터 헤치고 나올 방법이 안 보일 때 예수님의 팔베개에 누워 그저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이 모든 것을 해결하셔야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믿음, 당신의 확신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이렇게 크게 외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나와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하고 계십니다! 나는 낙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사탄에게 희생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의 방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십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2009년 8월 4일 화요일

주님, 나를 본향으로 데려 가십시오

다니엘서 3:15-16에서 읽었듯이, 세 명의 히브리 소년이 불속으로 들어갈 때 이미 그들의 육신은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육신을 즐거이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그들의 위기 속에서 그들을 만나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용광로 안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예수님께 무슨 말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통스럽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년 더 살도록 또 한 번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나는 그들이 이렇게 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님, 우리를 데려가 주십시오. 이곳에 남겨두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 희열, 그 영광을 만져보았습니다 -- 우리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도록 본향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아십니다. 이런 마음에 그 분은 자신을 의탁하십니다.

 

당신도 “주님, 나를 본향으로 데리고 가십시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아마도 당신은 당신의 몸, 당신의 사업, 당신의 결혼, 당신의 위기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리라 믿으며 항상 믿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응답하지 않으실지라도, 주님, 나는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상황에 대하여 온전히 그분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이 불타는 용광로에서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믿을 것입니다. 이 혹독한 시련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고통과 시험을 더 겪어야 한다 해도 나는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다만 오셔서 나와 함께 동행 하여주십시오!”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나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위기 속으로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손을 잡고 불속을 통과하여 나오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의 위기 속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가장 대단한 기도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오실 때 그분의 현존은 나를 나의 모든 고통과 나의 모든 상처와 나의 모든 혼란 너머로 들어 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당신 옆에 나타나실 때, 그분은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을 든든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2009년 8월 3일 월요일

맡김 - 살든지 죽든지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3:14-15)

 

다니엘의 친구들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셔서 기적적으로 구원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죽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당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찾아오실까요? 이 세 히브리 소년이 했던 것처럼 당신을 내어 맡길 때 주님이 오십니다.

.....왕 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3:16-18)

 

다시 말해서,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습니다. 허나 우리 하나님은 이 불같은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 내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믿음이 바로 천사들이 기뻐하며 하나님의 충심을 송축하도록 만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는 확신합니다. 주님은 나를 완전히 설득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 만 하시면,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나는 도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버렸다고 비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계속 신실하며 진실하겠습니다. 당신의 길이 나의 길 보다 높습니다. 그리고 내 생명은 당신의 손 안에 있습니다. 비록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주님을 의뢰 하리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위기 속으로 오시도록 만듭니다 - 그분이 우리를 어떠한 위기로부터라도 구하여 내실 수 있다는 충만한 자신감!  이것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손안에 있다는 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