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하나님께로 나아감

기도가운데 주님을 구하며 나는 그분께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성전으로 만드시는데 가장 중요한 측면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답변은 이것입니다: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는 것.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3:12)고 말씀합니다.


유대인의 성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인즉, 오직 대제사장에게만, 그것도 단지 일 년에 한 번 하나님과의 접촉이 허락되었습니다. 때가 되면 제사장은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성전 안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가 만일 마음에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는 상태로 시은 좌에 다가갔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그 좁고 제한된 공간에서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추악함과 부패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직접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안에 살려고 왔다. 너는 내게 너의 더러움이나 낙심을 숨길 필요가 없다. 내가 너를 원하기 때문에 너를 택했고 이제 너의 몸을 나의 집, 내가 살 곳, 내 거주지로 삼으려고 한다.


“내가 너를 거룩하게 만들어줄 성령을 보낼 것이다. 그가 모든 방을 깨끗이 치우고 청소할 것이요, 네 마음을 나의 신부답게 예비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너를 나의 옆에 앉힐 것이고 너로 하여금 나의 보좌에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나오도록 권고할 것이다. 나는 네가 나에게 권능, 은혜, 능력,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구하기 바란다. 네가 이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도록 내가 천국을 네 영혼 안으로 가지고 왔다. 네가 부요하나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네가 내 모든 영광의 상속자이다.


우리의 몸이 거룩한 유일한 이유는 성령이 그곳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의 지속적인 내재와 권능으로만 우리의 몸이 거룩하게 유지 됩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입구들만 지키려고 애써도 신경쇠약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날아드는 먼지와 더러움을 막으려다 실패한 후 낙담할 것입니다.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빗자루로 쓸고 광내고 하면서 번듯하게 보이게 하려다가 지쳐 버릴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은 이 사실에 기뻐해야합니다 - 하나님이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 안에 항상 계시니, 누가 당신을 대적하겠습니까?

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마음 넓히기

전도자로 활약했던 죠지 화이트필드와 죤 웨슬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야외 집회나, 길거리, 공원이나 감옥에서 수천 명에게 설교했고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어떻게 성화되어 가는가에 대한 교리적 문제로 말미암아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양 교리진영이 서로의 입장을 강경하게 고수하는 바람에 악의에 찬 말이 오가고 두 사람의 추종자들이 덕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논쟁을 벌이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화이트필드의 한 추종자가 와서 그에게 “죤 웨슬리를 천국에서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의 요지는 “웨슬리씨가 그런 오류를 가르친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화이트필드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씨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너무도 높은 그리스도의 보좌 근처에, 주님에게 너무도 가까이 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마음을 가리켜 “마음 넓히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강퍅하다고 비난했고 자기의 설교를 비웃었던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 자신이 이 마음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 졌으니,(고후6:11)라고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넓혀주실 때, 홀연히 많은 한계와 장벽들이 제거됩니다. 더 이상 편협한 관점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당신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자석 같은 힘에 의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긍휼히 여기는 심령으로 이끌리어 올 것입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 당신은 심령의 온화함이 있습니까? 형제나 자매들 중에 죄로 인하여 실족하였거나 문제들을 겪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삶에서 잘못 된 점을 지적해주고 싶은 유혹이 들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온유하고 온화한 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바로 그 영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여생을 위하여 마음으로부터 간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의 마음에서 모든 편협함을 제하여 주십시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의 긍휼의 영을 원합니다.... 실족한 사람들을 볼 때 주님의 용서의 영을.... 그들의 허물을 사하여주시는 주님의 회복의 영을....


“나의 마음속에서 모든 배타성을 제거해 주시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나의 용량을 늘려주십시오. 내가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접할 때에 그를 심판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오히려 내 안에서 샘물이 솟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강물이 되어 흐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들에게 보여준 사랑이 그들 안에서 남을 사랑 할 수 있는 불을 지피게 하여 주십시오.

2009년 11월 26일 목요일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그분의 교회는 배교와 거짓 교사들을 경험했습니다. 초대교회들, , 바울과 사도들이 세운 사도시대의 조직체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성장과 불변하는 믿음에 유익이 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주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딤후4:3-4)는 때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바울이 예견했던 그대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사도들이 죽은 후에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도 죽은 후에 교회에는 사악하게 그릇된 음모가 홍수처럼 밀려들었습니다. 믿는 자들은 낯선 교리에 유혹당하고 과학과 철학이 그리스도복음의 진리를 잠식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순결성에 대해 말 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5:25-27).


하나님은 신앙을 저버리는 교회에 대해 크게 염려하시지 않습니다. 배교하는 일들 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이거나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며 그분의 신비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승리하는 교회는 죽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령의 강이 변절하여 사해가 되어버린 교회로 흘러들어와서 죄악과 미온적인 태도를 드러내어 줍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생명이 샘솟게 합니다.


죽어 생명이 없는 교회들로부터 돌이킨 사람들은 단지 자투리에 불과 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들판은 곡식이 익어 추수하게 되었다. 아직도 일꾼들이 추수할 시간이 남아 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성령이 추수할 곡식이 시들도록 내버려두고 떠나버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죄를 드러내시고, 사랑을 호소하시면서 배교한 자들을 포함해서 길 잃은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아직도 일하고 계십니다.


구름같이 허다한 하늘의 증인들은 우리에게 심판을 구하지 말고, 요새를 수비하는 일에 집중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아직 성령의 때입니다. 그분은 준비가 되어있는 그릇을 모두 채우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흠이 있든지 어떠하든지 아직도 그분의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준비하라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준비할 것을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만 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4:44-51).


예수님이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종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주의해 보십시오. 한 종은 충성되다 하시고 다른 종은 악하다고 부르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눈에 그 다른 종을 악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에 의하면 그것은 그가 마음에 생각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종은 그러한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전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주님이 더디 오신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팔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가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한 것에 유의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갑자기 또는 예기치 않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 세대에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악한 종”은 명백하게 믿는 자의 한 부류입니다. 아마도 사역자 중에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는 “깨어” “준비하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24:44)고 명령을 받은 자 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느슨하게 풀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만약에 종이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확신하게 되면, 그는 바르게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동료 종들과 화평하게 지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집이나 직장, 교회에서 일치감을 유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도리어 동료 종들을 때리고, 비난하고, 불만을 품고, 그들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이런 종은 자신의 정욕가운데 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악한 생활을 하면서도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으며 두 개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009년 11월 24일 화요일

원수의 거짓말

우리가 시련과 유혹을 당할 때, 사탄은 이러한 거짓말을 들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너는 지금 포위당했고 빠져 나갈 길이 없다. 너보다 위대한 종들도 이보다 열악하지 않은 상황에서 포기해버렸다. 이제 네가 무너질 차례다. 너는 실패자다 아니면 이런 일을 겪고 있지 않을 것이다. 너는 뭔가 잘 못 되었고 하나님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히스기야는 시련가운데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사납게 대어드는 목소리, 용기를 꺾고 협박과 거짓말을 퍼부어 대는 음성을 멈출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선지자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어 이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주님이 네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 이제 네 문에서 사탄에게 말하여라, ‘너야 말로 멸망할 자 이다. 네가 여기로 왔던 그 길로 네가 또한 나갈 것이다.’”


히스기야는 원수의 계략에 거의 넘어질 뻔 했습니다. 실상인즉, 만일 우리가 사탄의 거짓말에 맞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위기에 빠진 순간에 믿음과 기도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힘을 길어내지 않는다면, 마귀는 우리의 흔들리는 믿음에 조준하여 공격을 일층 강화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산헤립에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마왕아, 네가 나를 모독한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 그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의 주님은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분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그분의 진노를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히스기야와 유다를 바로 그 밤에 초자연적으로 구원하셨다고 말해줍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


오늘날 믿는 자들은 언약위에 서있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위에 서 있습니다. 그 피안에서 우리는 모든 죄, 시험, 그리고 우리가 직면하는 전투에 대해 승리합니다. 당신은 최근 마귀로부터 편지 한 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당신께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련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당신의 모든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서도? 당신의 모든 의심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만일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앞서 모범을 보였던 다윗이 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이 가련한 자가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당신도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평안과 성령

예수님은 누구에게 그분의 평안을 주셨습니까? 당신은 아마 “나는 주님의 평안 가운데 살아갈 자격이 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은 것들과 힘든 싸움을 해왔다. 나의 믿음은 너무 연약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제일 먼저 그분의 평안을 주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 중 아무도 평안을 받을 자격이 없었고 권리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오래지 않아 저주를 내 뱉을 복음 사역자에게 그의 평안을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의 열정이 있었으나 또한 그분을 부인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쟁심이 강하였고 항상 인정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그분이 영광 중에 그의 보좌로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좌우에 앉기를 구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 보다 더 의로웠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두 사람에게 진노하였습니다. 도마의 경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의심에 빠졌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너무도 믿음이 부족하였고 그로 인해 예수님은 놀라시고 곤비하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가장 고통당하던 순간에 그들은 모두 그분을 저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조차도 제자들은 그것을 더디 믿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한 혼동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그들은 혼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그들은 이제껏 그들이 갖고 있던 일체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두려움, 불신, 분열, 슬픔, 혼동, 경쟁심,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문제투성이 종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들에게 나의 평안을 주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선하거나 의로웠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재주가 있거나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부와 품꾼들이었고 순박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심중에서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부르시고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그들 각자가 성령께 순종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약속은 그분의 평안이 전부였습니다. 그 평안의 충만함은 오순절이 되어야 그들에게 부어질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오셔서 그들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안을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 이 평안은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할 때 우리에게 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원하면 할수록 성령이 당신에게 그분을 더욱 더 보여주실 것이며,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평안을 더욱 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

전 세계적으로 만물이 흔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중동사태에 집중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각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집중되어있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33:18).


우리 주님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모든 동작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의 시선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자녀들의 안녕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눈은 자신의 영적 몸인 각 지체의 고통과 필요를 응시하고 계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무엇이든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그분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세상의 큰 전쟁들의 와중에서 조차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폭군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초점은 자신의 자녀들의 삶의 모든 상황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던 당시에 참새는 가난한 자들의 음식이었고 두 마리에 한 페니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 미미한 생물들 중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떨어지다”라는 말은 새의 죽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람어로 이 말은 “땅위에 내리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떨어지다”라는 말은 작은 새가 미세하게 폴짝거리는 모든 동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눈은 참새가 죽을 때 그것을 주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 내려앉을 때에도 보고 계신다. 참새가 나는 것을 배울 때 그 새는 둥지에서 떨어져 땅위에서 폴짝거리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 새가 겪는 모든 미세한 어려움을 보고 계신다. 그분은 새의 삶의 모든 세밀한 부분에 까지 관심을 기울이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31). 진실로 그분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온 우주의 별들을 만드시고 세어놓으시고, 로마 제국의 모든 활동을 지켜보고 계시고, 은하계가 각각의 궤도를 유지하도록 하시는 그분이 시선을 당신에게 고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묻습니다. “그분께 너희는 더욱 더 귀하지 않느냐?

2009년 11월 19일 목요일

놀라운 평안!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평안이 필요한 이유가 하나뿐이 아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14:30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방금 그분은 열두 제자들에게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14: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바로 그 시각에 일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귀는 이미 유다를 자기 편으로 편입시켜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지옥의 권세로부터 능력을 받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마귀의 충동을 받은 군중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곧 다가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한 자, 사탄이 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투쟁에 대비하여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악한 자들의 손에 곧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탄이 자신의 평안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귀는 그분을 괴롭히고 낙심하게 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믿음을 붕괴시켜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피하도록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당신은 어쩌면 혼란 속에서 “모든 게 끝났다. 나는 끝까지 견딜 수 없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네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다. 와서 나의 평안을 마셔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직면하여 헤쳐 나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삶은 불안정하고 앞날은 소망이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이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는 보이지 않는 것 같고 어느 길로 돌아서도 당신은 더욱 스트레스와 혼동과 곤고로 가득 차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겪고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삶은 마치 돌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마치 현대판 욥을 보듯 많은 시련을 견뎌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난 가운데에서 성령께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당신을 세례주시기를 구하면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파탄에 빠졌다. 그런데도 그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로 결단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 오래 전에 포기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믿는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았다. 얼마나 놀라운 평안인가! 그것은 이해의 범주를 넘는 것이다.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

구름같은 증인들

히브리서 12:1 말씀은 이세상이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구름 같은 증인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이 하늘의 증인들 무리가 현 세상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노아시대 보다 훨씬 더 악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증인들은 소돔의 죄를 능가하는 죄를 범하는 인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심히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우리 경제는 축복받았지만 사회는 비도덕적이 되고 폭력이 난무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하여 세속주의자들 조차도 우리가 어쩌면 이토록 타락하였는가 하며 통탄합니다. 모든 곳의 크리스천들은 왜 하나님이 이같이 악한 사회에 심판을 지연하고 계시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는 왜 그처럼 끔찍한 악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시는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구름 같은 하늘의 증인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과 인내에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름 같은 증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죄인중의 괴수” 조차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언합니다. 바울의 생애와 서신들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저주했던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냥해서 그들을 감옥이나 사형장으로 보내기 위해 끌고 갔던 테러리스트였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같이 무지하여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현 세대에 대해 인내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합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구름 같은 증인들 중에 있습니다. 그도 또한 하나님이 왜 그토록 인내하고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와 기록들은 우리에게 그가 예수님을 결코 모른다고 맹세하며 그분을 저주한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아직도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는 수많은 무리가 있기 때문에 심판을 보류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결코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베드로처럼 아직도 그리스도가 기도해 주고 계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이 구름 같은 증인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이전에 마약중독자였던 사람, 알콜 중독자였던 사람, 창녀였던 사람, 동성연애자였던 사람, 갱 멤버였던 사람, 마약 밀매꾼이었던 사람, 살인자였던 사람, 아내를 구타했던 사람, 이교도였던 사람, 관음중독자였던 사람들과 같이 사회가 포기해 버린 무리들의 얼굴 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의 품안에서 죽었고 지금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의 긍휼과 인내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일치된 증인으로서 예수님은 그들이 그분의 자비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을 심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 광적이고 비도덕적인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도 그분처럼 잃어버린 자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이 세상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랑과 인내를 우리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