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1일 월요일

찍어 내버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예수님은 이 문장을 “Wherefore”로 시작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이것에 비추어보아”입니다. 그분은 행위와 십자가를 결합하는데 관해 가르치고 계시던 교훈의 전체 맥락과 이 말씀을 연결시키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십자가가 육에게 드러내는 범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빼어 내버리라, 찍어 내버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유대인 청중들에게 먼저 그들 자신의 선행에 대한 자신감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손, 발 그리고 눈은 독립의 도구로 모두 육을 상징하는 데 그것들에 의해 사람이 자기 자신의 길을 가고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기의지와 인간적인 노력에 의존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의 눈은 잘못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너는 네 자신의 능력과 힘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네 눈을 빼어 내버리라. 너는 네 몸과, 정신과 마음으로부터 모든 그런 악한 생각을 없애 버려야한다. 그것을 내어버려라, 수술로 제거해 버려라. 하나님께 네 자신의 뛰어남이나 선함을 드리고자 하는 모든 소망을 찍어 내버려라. 정욕과 범죄는 모두 찍어 내버려져야 한다. 하지만 네 손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고 나서 그저 내 품안으로 달려오너라. 십자가위의 나의 승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린아이처럼 너를 낮추어라. 나에게 전적으로 헌신하고 의존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라. 갈보리에서의 나의 역사로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샀다. 나의 영이 내가 요구하는 거룩함을 네 안에서 성취할 것이다.”

2011년 1월 28일 금요일

이렇게 하지 않는 한 나는 너희에게 말할 수 없다

슬프게도 많은 수의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수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주님으로부터 친밀한 말씀을 그들의 속사람 안에 받지 못한 채 지내기도 합니다. 오, 하나님은 한 때 그들에게 실제로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그들 마음속에서 침묵시켜버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말들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지나친 어리석음 때문에 냉담해졌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자랑합니다만 그들이 들은 “말씀”은 단지 자신의 탐욕스런 육이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앞날에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듣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지시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정결에 대해 말씀하시도록 준비하십시오. 많은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벌어들인 것을 어떻게 붙들고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들의 사업이나 직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일에 어떤 지시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그분의 계명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15:17). 하나님은 먼저 집에서 당신의 아내와 자녀를 대하는 당신의 행동, 즉 성급한 성질, 원망, 용서하지 않는 기질에 대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삶 안에 숨겨져 있는 모든 은밀한 일을 지적하실 것이며 당신에게 사랑스럽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의 조언자, 상담자, 인도자, 보호자, 공급자가 되기를 원한다. 너의 모든 시험과 역경을 통해 너와 동행하기 원한다. 나는 성령으로 너에게 은혜를 베풀고, 복을 주고 지키기 원한다. 그러나 먼저 너는 네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우상들에 대해 내게 솔직해야만 한다. 지금 현재 너는 그것들을 붙들고 있지만 그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우리가 네 마음의 이러한 일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동행할 수 없다!”

2011년 1월 27일 목요일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 가십시오

하나님은 형편이 얼마나 어려워지든지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지탱해 주실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십니다. 그분의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매일 우리의 속사람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지탱해 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것을 확증해 줍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30:21).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최악의 시기에 이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나라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절대적으로 폐허가 된 채 심판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주님께 돌이키라! 그분은 너희에게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여기 길이 있다’고 말씀해 주심으로 지침을 주기 원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을 의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애굽의 병거와 말과 보급품들을 의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점에 이스라엘에 모든 심판을 내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계획이 바닥을 칠 때 까지 그분은 인내심 있게 기다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을까 전략을 짜며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기다릴 것이다. 나는 그들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긍휼을 보여주기 원한다”(18절). 당연히 모든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나라의 형편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모든 계획이 실패로 끝났을 때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나서게 하라! 너희 귀를 열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벗어나는 길을 안다. 내가 너희에게 지시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모든 움직임을 인도하기 원한다. 나는 내 음성으로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지막 세부 사항까지 너희에게 말해주면서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목청이 크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여러 음성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들리고 알 수 있는 주님의 고요하고 세미한 목소리가 여전히 있습니다.

2011년 1월 26일 수요일

누가 이 생존 계획을 생각해 냈을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왕상17:2-3).

엘리야가 다가오는 위기를 예견했을 때 사태가 절대적으로 그에게 절망적으로 보였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신실한 종을 위해 분명한 생존 계획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선지자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동쪽으로 가서 요단강으로 가라. 거기 작은 시내 그릿이 있을 것이다. 네가 마실 물은 그 시내에서 충분히 얻을 것이다. 아울러, 내 배달부 까마귀가 너에게 매일 음식을 전해주도록 조치해 놓았다!”

어느 누가 백 만년 걸린들 이러한 생존 계획을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엘리야는 온 땅에 가뭄이 들었는데 마실 물을 찾아 눈에 띄지 않는 시냇가로 보냄 받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리에 닿는 것마다 모조리 먹어치우는 탐욕스러운 새들이 매일 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그가 어떻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후, 그 시냇물이 드디어 말라버려 엘리야의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개입하셔서 선지자에게 새로운 지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절). 나는 다시 한 번 질문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가난한 과부가 경제 공황 한 가운데에서 한 남자를 며칠씩, 몇 주씩, 연달아 몇 달씩 먹여 살릴 수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경멸받고, 하찮은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분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녀에게 가서 내 말대로 하면 너는 살아남을 것이다. 내 말을 들어라-내 지시를 유념 하여라-그러면 너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 증거는 압도적입니다. 우리의 조언자, 상담자, 생존 전문가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어려운 시기를 직면하는 것을 돕기 위해 그분의 모든 자녀를 위한 세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2011년 1월 25일 화요일

하나님과의 평강

예수님은 나를 하나님과의 평강을 나를 위해 매입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위해 또한 내안에서 그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소유한 하나님과의 평강은 우리의 믿음이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됨을 보여줍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종교에서 죄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의 주권은 여전히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하지만 우리에게는 죄를 용서하심으로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습니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인류에게 평강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나를 위해 어떻게 하나님의 평강을 유지하십니까? 세 가지 방법으로 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피가 내 죄의 죄책감을 제거해버립니다. 이런 뜻에서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4).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나를 위해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믿음 안에서 나의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셋째, 예수님은 영광에 들어갈 소망으로 나를 기쁘게 하십니다. “우리가...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2).

간단히 말해서, 평강은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는 삶은 평강으로 가득찬 삶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 그분은 그저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어주신 영광을 누리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갈보리에서 우리를 위해 성취한 값비싼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현재 영광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손, 발, 눈, 머리카락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또한 두 손과 발에 못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분은 결코 인성을 버리신 적이 없으시며 여전히 영광가운데 있는 인간이십니다. 지금 현재, 영원 속에 있는 우리의 인간은 그분이 떠나실 때 우리에게 주셨던 평강을 우리가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지상에 있는 자신의 몸이 그분의 평강으로 충만하도록 지키시며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평강가운데 나타나”(벧후3:14)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 나의 평강은 두 개의 영역에서 훼방을 받습니다. 첫째, 내 양심이 불안해지고 나를 비난하는데 이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둘째, 사탄의 참소가 내안에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중보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두 가지 주요 영역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선, 나의 대제사장은 내 양심이 나를 포로로 잡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나에 대한 사탄의 참소가 아무 도전 없이 지속되도록 허락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지옥의 참소에 대응하여 아버지 앞에서 나를 변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변호사는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말해서 “법정에서 나의 친구”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이 법정의 친구는 또한 판사의 아들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변호사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사실인즉, 우리는 그 변호사와 더불어 판사의 재산을 상속하도록 정해져있습니다.

2011년 1월 24일 월요일

우리의 중보자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이 주제가 너무 심오하고 장엄하며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믿기에 그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 떨립니다. 이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여러 가지 견해를 피력합니다.

기도와 성령의 인도를 신뢰함을 통하여 나는 이 놀라운 주제에 대해 아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는 지극히 단순하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하늘에서 주님이 중보하시는 것이 나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주님의 말씀은 주께서 나를 위해 아버지 앞에 서신다고 합니다. 내가 주님과 매일 동행하는 것에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영어로 intercession (중보)은 “다른 사람을 위해 탄원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 당신 대신 당신의 사안을 탄원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의를 들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가 계속해서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긍휼, 용서, 은혜와 복을 구하며 간구하는 장면을 떠올립니까? 내 견해로는 이 이미지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인색한 분으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은혜를 우리의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캐내어야 한다고 믿기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우리가 중보에 대해 그처럼 좁은 정의로 제한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 더욱 심오한 영적 의미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내가 그분께 구할 수 있기도 전에 내 필요를 아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자주 그분은 내가 기도하기도 전에 그러한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분께 무언가를 간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아버지께서 이미 그분의 아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한 중보에서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 중보는 이 지상에서 그분의 몸의 성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마디와 부위에 능력과 힘을 공급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2011년 1월 20일 목요일

징계하심-당신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이 지금 죄로 인해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면, 등에 내리치는 주님의 채찍으로 인해 압도당해 있다면, 힘을 내십시오. 그분은 자신의 다정한 사랑 때문에 당신을 징계하는 중이십니다. 당신이 그분을 경외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당신에 대한 그분의 돌보심을 알기 원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안전하게 영원히 그분의 것이고 그분이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안다. 내가 고심하고 애쓸 때 마다 그분은 나의 고통을 느끼신다. 그리고 내가 불신에 대항하여 싸울 때 나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신다. 내가 그분을 부를 때 마다 항상 나를 용서해 주실 준비가 되어있으시다. 하지만 나는 또한 그분이 내가 그분의 말씀에 계속해서 불순종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내 천부께서는 나를 깊이 사랑하시므로 나에게 징계를 면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징계는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여 그분을 경외하기 원하십니다.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편 130:4).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분에게 단지 순종하는 것 이상 더욱 더 하고싶게 됩니다.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이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경외하는 것의 복된 결과입니다.

2011년 1월 19일 수요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논리로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 선물은 너무도 심오하고 은혜로우며 신비하여 모든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합니다. 우리 죄에 확실하게 적용되는 율법은 볼 수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악행에 대한 정죄, 두려움과 죄책감은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천부께서는 용서할 준비를 하시고 사랑하시며 항상 우리 옆에 서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피, 아버지의 사랑, 사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소원, 이 모든 축복들은 오직 믿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갈라디아서 3:11).

당신은 궁금할지 모릅니다. “똑같은 죄에 반복해서 빠질 때 주님은 몇 번이나 나를 용서해 주실까?” 그분의 놀라운 용서는 무한하시므로 안심하십시오. 죄를 지을 때 마다 당신은 예수님께 가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용서가 현명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천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하지만 어떤 경지에 이르면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히브리서 12:6)

2011년 1월 18일 화요일

다윗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함으로써 구렁텅이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주님께 통곡하고 울부짖은 후에 다윗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편 130:4). 성령께서 다윗의 영혼에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기억을 홍수처럼 밀려오게 하시자 그는 문득 아버지의 용서하시고 사하시는 성품에 대해 배웠던 것을 모두 기억했습니다. “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느헤미야 9:17).

그러자 다윗은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편 86:5)라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며 기뻐했습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편 103:3). 새 언약의 기본 약속들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선포합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예레미야 31:34). 그리고 바울이 신약에서 덧붙여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로새서 2:13).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해 주신다고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2011년 1월 17일 월요일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완전히 절망한 채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에게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는 것은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실패에 압도당하여 스스로 하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서 아무도 도와줄 수 없을 정도로 함정에 빠졌다고 느낍니다. 이사야는 이런 신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이사야 54:11).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께 분을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기다리다 지쳐 비난조로 부르짖습니다, “주님,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었건만 당신은 전혀 답이 없으셨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는데 아직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나는 아무런 변화도 보지 못한 채 회개하고 부르짖는데 지쳤습니다!” 수많은 이런 신자들이 더 이상 노력하기를 그치고 그들의 육에 자신을 넘겨 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냉담해지는 안개 속에 빠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신다고 확신합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이사야 40:27).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이사야 49:14).

또 어떤 사람들은 계속 자책하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여전히 자신의 실패에 전적으로 주목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에스겔 33:10)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사실, 자책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 죄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으로 인해 겸비해졌을 때, 우리는 그러한 감정들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자신의 한계로 몰고 가서 십자가의 승리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2011년 1월 14일 금요일

여호와 삼마-주님이 거기 계시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은 여호와 삼마의 이름으로 알려져야만 합니다. “여호와 삼마 (주님이 거기에 계시다)”(겔 48:35).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이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이 내게 확실하다. 내가 그를 볼 때 마다 예수님의 임재를 느낀다. 그의 삶은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고 있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서로에게서 주님의 다정한 임재를 아주 자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크리스천들은 기도모임, 성경공부, 전도사역 등 선한 종교적 활동들에 시간을 보내고 있고 이 활동들은 모두 칭찬받을 만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크리스천들은 기도의 은밀한 골방에서 주님을 섬기는데 거의 시간을 보내지 않거나 전혀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결코 위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삶에 적용하든지 교회 공동체에 적용하든지 진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할 때 어떤 사람을 신비롭게 감싸고 있거나 교회 예배 안에 임하는 어떤 영적 휘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단순하지만 능력있는 믿음의 여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크리스천의 삶에서 드러나든지 또는 회중 전체에게서 드러나든지 사람들은 주목하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 또는, “이 회중은 그들이 전파하는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

여호와 삼마의 교회를 세우는 데는 한 의로운 목사 외에 훨씬 더 많은 것이 요구됩니다. 의롭고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예배 후에 나오면서, “예수님의 임재를 느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설교나 예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회중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주님의 영광이 그들 가운데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2011년 1월 13일 목요일

우리의 의이신 주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비슷한 위기의 때에 선지가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시드케이누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분이 주님이 되시는 이 의가 무엇이며 이 역할로서의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며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서 의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4:3).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롬4: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갈3:6).

이 각 구절들은 아브라함이 진정한 의에 이르기 위하여 했던 한 가지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믿으매.

마침내, 바울은 의에 대해 주님이 내리신 정의를 제공해줍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20-22).

더 이상 명확히 할 수 없도록 성경은 밝혀 주었습니다. 의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라고 온전히 설득당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2011년 1월 12일 수요일

구렁텅이 속에서 다윗의 기도는 열렬해 졌습니다

절망가운데 다윗은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편 130:2). 이것은 내게 죽어가는 사람의 탄원처럼 들립니다. 다윗은 단지 “묵상기도”를 드리고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땅에 얼굴을 대고 심령이 상하여, 죄를 깊이 뉘우치며 자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내 죄는 항상 내 앞에 있고 나는 두려움과 공포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다윗은 자신의 영혼이 해방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해방을 발견하기 위해 오직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이토록 비참한 상태에 있으므로 오직 주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다. 나는 조언자들이나, 친구, 가족들조차 의뢰할 수 없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기도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간구를 들으실 때 까지 밤낮으로 부르짖을 것이다!”

당신은 다윗처럼 절망적이었던 때가 있습니까? 주님과 골방에 들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그분께 부르짖은 적이 있습니까? 무감동하고, 조용하고 게으른 기도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당신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치유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벗어나고자 할 뿐 입니다! 다윗은 증언했습니다. “내가...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편 38:8-9).

다윗이 하였듯이, 당신은 크게 외쳐야만 합니다. “주님, 나의 간구를 들으소서! 응답하실 때 까지 당신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는 여전히 길 잃은 양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위대한 목자는 시험들, 시련들, 아픔들과 상처들로 인해 길을 잃어버린 모든 양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버렸다고 결코 우리의 목자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여전히 우리 옆에서 걸으시며 항상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유혹에 맞서서 지는 싸움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고투가 무엇이든지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죄의 손아귀에 투항할 것을 거부했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지만 다윗처럼, 당신은 피곤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절대적으로 무력하게 느끼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원수는 당신에게 절망과 공포와 거짓말들을 홍수처럼 몰고 옵니다.

당신의 시험은 더욱 혼미하고 설명이 불가해졌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겪고 있든지 성령은 당신 안에 여호와 로이, 당신의 목자이신 주님을 계시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은 자신의 사랑을 당신 마음에 새기고 싶어 하시는 목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나는 결코 너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 여호와 로이,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시편 23편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이름을 알고 네가 겪고 있는 일을 안다. 와서 나의 은혜와 사랑 안에 누우라.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그저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사랑하는 팔 안에서 안식하라. 그렇다, 나는 만군의 주이다. 존엄하고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네가 나에 대한 이 모든 계시를 알기 원한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나는 네가 여호와 로이의 계시를 갖기 원한다. 너를 사랑하고 돌보는 너의 목자로 나를 알기 원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온유함과 사랑으로 네가 너의 모든 시험을 통과하도록 이끌 것이니 안심하기 바란다.”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나의 목자이신 주님

시편 23편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합니다. 이 안위하는 메시지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차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유명한 시는 다윗 왕이 썼고 이 중의 가장 유명한 구절은 첫 소절에 들어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사용한 부족함(want)이란 히브리 단어는 결핍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내가 결핍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구절의 앞부분과 연결하면 다윗은 “주님이 나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먹이신다. 그로인해 나는 결핍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다윗은 또 다른 주님의 특성과 성품에 대한 성찰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 첫 부분의 히브리어 본을 그대로 읽으면 여호와 로이입니다. 이것은 “주님, 나의 목자,”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로이는 단순히 온화하고 소극적인 목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양식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만 하는 삯꾼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풀밭과 물웅덩이를 가리키며, “저기 네가 필요한 것들이 있다. 가서 가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들에 대해 눈을 감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나 우리가 곤경에 빠진 것을 보았을 때 다른 길로 도망가 버리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견디고 있는 모든 고통, 우리가 흘리는 눈물, 우리가 느끼는 모든 아픔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너무 지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큼 감당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어떻게 우리를 구해내어 치유의 자리로 데리고 올 수 있는지 아십니다. 때마다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쫓아오셔서 들어 올려 안식의 자리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분은 지속적으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눕히십니다.

여호와 로이-우리의 목자 주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shekinah) 위해 우리로 그분을 따르게 하여 그분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출애굽기 29:45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여기서 거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shekinah로서 “거주하다, 옆에 정착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잠시 지나치는 임재가 아니라 영원한 임재, 절대로 떠나지 않는 임재를 나타냅니다. 간단히 요약해서, 하나님의 임재의(shekinah) 영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잉크처럼 우리 마음에서 없어져 사라지는 흔적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영원히 새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아주 근접하고 영원한 임재입니다.

이 장면은 영화롭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고통과 우울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오셔서 옆에 앉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아프고 병든 부위를 강건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입니다: 거하시고 영존하시는 주님의 임재.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목자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회복시키기 원한다. 비록 죽음의 그림자와 골짜기에 있다 해도 나는 너와 함께 있어 너를 회복시킬 것이다. 나의 임재는 마귀가 너에게 던지는 모든 것을 통과하도록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나로부터 도망가려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쫓아갈 것이다. 내가 너를 붙들면 내 팔에 안고 나의 안식으로 도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리고 너의 상처들을 싸매고 모든 병들을 낫게 할 것이다.”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당신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집이나 자동차, 가구, 저축, 또는 당신의 소유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믿음 즉,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당신의 강한 믿음이 전부입니다. 아마 그것은 더욱 영적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이 결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아마 다른 사람을 당신 보다 더욱 영적이라고 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은 어쩌면 외형적으로 의롭게 보이려고 애쓰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보시며 “저기 의로운 자가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의로워지는 것에 당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님이 그분의 의를 당신에게 주신다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바로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의롭게 여겨진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아브라함)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실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2-24).

당신은 “나는 이것을 믿는다.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주님이 문제에 빠진 당신의 결혼 생활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분이 영적으로 죽은 친척을 살려낼 수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습관의 구덩이에서 그분이 당신을 건져낼 수 있다고 믿습니까?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저주받은 과거를 지우시고 벌레가 먹어버린 그 세월들을 당신에게 회복시켜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까?

불가능한 상황가운데 처하여 아무런 자원도 없고 소망도 없어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일 때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의 필요를 돌보시는 여호와 이레가 되실 것을 믿습니까? 그분은 당신에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단하셨고 만일 그분의 말씀 중 단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하늘이 녹아버리고 우주가 붕괴해 버릴 것이라고 믿습니까?

2011년 1월 7일 금요일

우리의 의이신 주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위기와 비슷한 위기의 때에 선지가 예레미야에게 여호와 시드케이누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분이 주님이 되시는 이 의가 무엇이며 이 역할로서의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며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은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서 의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4:3).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롬4: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갈3:6).

이 각 구절들은 아브라함이 진정한 의에 이르기 위하여 했던 한 가지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믿으매.

마침내, 바울은 의에 대해 주님이 내리신 정의를 제공해줍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20-22).

더 이상 명확히 할 수 없도록 성경은 밝혀 주었습니다. 의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라고 온전히 설득당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2011년 1월 6일 목요일

우리는 소망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아는 우리는 마치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또한 그분을 경외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가장 어둡고 가장 두려운 시기에 처해 있을 때 우리에게 대한 그분의 뜻은 그분의 기쁨과 즐거움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심판이 행해지는 것을 볼 지라도, 심판이 임했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래하고 환호하며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51장 11절은 Therefore 란 단어로 시작하는데 “내가 방금 말한 것에 비추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방금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자신의 백성에게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사51:10)하셨다고 상기 시키셨습니다. 그 뜻은 “나는 여전히 주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이며 기적을 베푸는 자이다. 내 팔은 여전히 강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에 비추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무엇을 알기 원하실까요? 이사야 51:11에서 모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Therefore)여호와께 구속 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돌아오니” 이 말은 “나는 신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나에게 돌아오는 백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주변 상황에서 눈을 떼고 기쁨의 노래를 되찾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위에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체험하는 기쁨은 단지 주일 아침이나 한 주일 또는 한 달에 국한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해를 거듭하여, 어려운 시기를 넘어, 종말에 이르기까지도 지속 될 것입니다.

-“그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며{they shall obtain gladness and joy (KJV)}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는 없음).” 하나님은 시대를 꿰뚫어 내려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기쁨을 얻고, 그것을 취하여 간직할 백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쁨을 붙잡겠고 그것은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다.”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고난이 끝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우리를 모든 고통과 시련을 넘는 곳에 처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2011년 1월 5일 수요일

아버지 알아 가기

우리 육신의 자녀들은 그들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알아간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들이 고통, 고난, 궁핍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에 대한 우리의 깊은 보호와 공급을 인식합니다. 나의 자녀들이 자랄 때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그들에게 강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너희 아버지다. 나는 인내심이 많고 친절하고 너희에 대한 자비와 인애로 가득하지. 너희에 대해 마음이 부드러워 항상 너희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라고 말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 한다면 우스꽝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내 자녀들은 그들의 위기의 체험들 중에서 그들을 향한 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들이 자라 결혼하여 그들의 자녀를 갖게 되자 나의 아들딸들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나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인생에서 새로운 필요가 생긴 때에 그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행동을 통해 나를 더욱 더 알아갑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자신의 성품에 대해 계속 증가하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단지 자신이 누구이신지 선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다음과 같은 이름들이 내 성품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제 가서 이것들에 대해 배워라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어 표현들(이름들)은 우리 주님의 이름 안에 싸여져 있는 놀라운 영광과 공급에 대해 실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이렇다고 선언하신 것을 그들에게 실제 행하심으로써 자신의 성품의 이러한 양상들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들의 필요를 보셨고 그들에 대항하는 대적의 계교를 미리 아셨고 자녀들을 위해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를 심중의 차원에서 천천히 목적을 가지고 알아가기를 촉구합니다. 당신이 곤궁했던 때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셨던 천상의 공급의 여러 면을 기억나게 해 달라고 성령께 구하십시오. 그리고나서 성령께 스스로 있는 자, 언제나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이신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심령의 지식을 구축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2011년 1월 4일 화요일

모든 것 중 가장 큰 시험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길이 놓여있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그 물 벽을 보고 그들이 안전하게 건너편에 도착할 때 까지 하나님이 물을 지탱해주실 것을 믿기 원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선포하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이 기적을 시작하신 그분이 끝맺으실 것이다. 그분은 이미 자신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하셨다.”

“돌이켜보니 우리의 모든 두려움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애굽인들이 오는 것을 보았을 때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초자연적인 암흑의 벽을 세우셨기에 밤새 그들이 퍼부은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이 그동안 우리에게 조명하는 빛을 주셨던 반면에 우리의 대적은 어둠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또 쓸데없이 저 격렬한 바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던 내내 하나님은 그 바람을 이용하여 우리의 탈출로를 열고 계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로지 선을 행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우리를 위하시는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우리는 보았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 가운데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저 물 벽들이 설령 무너진다 해도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런 유형의 믿음을 원하셨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곧 광야를 통과하는 여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빈곤, 위험과 고난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들이 내가 오직 그들에게 좋은 것을 행한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그들이 위험에 직면할 때 마다 그들이 죽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지 않기 바란다. 모든 일에 내가 신뢰할만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백성을 나는 원한다.”

진정한 예배자는 승리를 얻은 후에 춤추는 자가 아닙니다. 대적을 정복하고 난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그들이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격찬했습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후, 이 똑같은 사람들은 마라에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극심하게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배자가 아닙니다 - 얄팍한 환성을 지르는 자들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는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운 자입니다. 이 사람의 예배는 단지 그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그의 신뢰는 흔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세상은 항상 고요합니다. 그는 더 이상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웬과 나는 이 흔들 수 없는 믿음을 열두 살 먹은 우리 손녀 티파니에게서 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임종이 가깝던 때에 침대 맡에 앉아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강을 그 아이에게서 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 나는 예수님을 보았는데 그분은 내가 그곳에 있기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어요. 나는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티파니는 죽음과 상실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안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처럼, 티파니처럼 말하는 확신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폭풍 가운데서 이렇게 말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 경제가 붕괴할지 모른다. 그렇다, 나는 여전히 어둡고 폭풍이 몰아치는 밤을 직면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신실하심을 나에게 증명하셨다. 나는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 안에 안식할 것이다.”

2011년 1월 3일 월요일

세 가지 일을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험을 당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견고히 서라. 주의 구원을 보라.”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불러 명하심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싸울 것이다. 너희는 그저 너희 평강을 지켜라. 잠잠하고 모든 것을 내 손에 맡겨라. 지금 나는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일하고 있다. 모든 것이 나의 통제 하에 있다. 그러므로 겁내지 말라. 내가 마귀와 싸울 것을 믿어라. 이 전투는 너희 것이 아니다”(출 14:13-14 참조).

곧 황혼이 진중에 깃들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캄캄하고 폭풍이 몰아치는 밤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분은 놀라운 수호천사를 보내 자신의 백성과 그들의 대적사이에 서도록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든 자 주위에 머물도록 수호천사를 보낸다고 믿습니다(시 34:7 참조).

주님은 또한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 주셨던 초자연적인 구름을 이동 시키셨습니다. 그 구름이 갑자기 이스라엘 진영 앞에서 뒤로 위치를 바꾸어 애굽 인들 전방에 칠흑같이 어두운 벽을 드리웠습니다. 이편에서는 그 구름이 초자연적인 빛을 비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출 14:20 참조).

바로의 군대들은 비록 철저한 암흑 속에 있었지만 여전히 목청은 높일 수 있었습니다. 밤이 지새도록 그들은 위협과 거짓말을 쏟아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은 어두운 밤 내내 이 거짓말의 집중 사격에 요동했습니다. 하지만 대적이 얼마나 시끄럽게 그들을 협박했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키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해 내시겠다고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당신이 피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은 당신과 마귀 사이에 무사 천사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명령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견고히 서라. 나의 구원을 믿어라.” 사탄은 당신을 대항하여 모든 악한 위협을 가하며 다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캄캄하고 폭풍이 몰아치는 밤 어느 순간에도 원수는 당신을 결코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하나님이 내리신 태풍은 너무도 강력하여 바다의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습니다. “큰 동풍이....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14:21).

여기서 쓰인 바람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격렬하게 내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숨을 내쉬자 물이 응고되어 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강력한 바람이 진영을 지날 때 이스라엘의 장막 집들은 사납게 흔들렸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한 마디 말씀으로 자연의 요소들을 잠잠케 하실 수 있었을 텐데 왜 이스라엘이 폭풍이 몰아치는 온밤을 지내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얼마나 대단한 폭풍이었을까요. 이스라엘에게는 얼마나 두려운 시간이었을까요. 당신께 묻겠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어떤 의도가 있으셨을까요? 왜 그토록 무서운 폭풍이 밤새도록 지속되게끔 허락하셨을까요? 왜 그저 모세에게 그의 외투로 물을 쳐 초자연적으로 파도를 가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이 두려운 밤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만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위기를 벗어날 길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무서운 폭풍을 이용하시며 내내 일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장막 안에 숨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왔던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빛의 장관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파도가 높이 오르고 물의 벽이 힘차게 일어나서 바다를 통과하는 마른 땅이 드러나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장면을 보았을 때 그들은 분명히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켜 우리를 위해 길을 여셨다. 주님을 찬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