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31일 금요일

그분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하십시오

오래전에 저는 제 아내 그웬 옆에 서서 목사였던 제 아버지가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이빗을 당신의 법적 남편으로 받아들입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서약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웬은 저를 모든 면에서 사랑했지만, 저를 집안의 가장으로 존중했을 때가 무엇보다도 좋았습니다. 제가 특별히 기계를 잘 다루지 못했으므로, 그녀가 저로 하여금 “남편”의 역할을 하게끔 내버려두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제가 이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저를 격려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부인 우리와 그분과의 관계를 반영하도록 남편과 아내를 주셨습니다. “너를 만드신 이는 네 남편이니…” (이사야 54:5) 우리는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입니다. (요한계시록 21:2)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의 남편과는 다릅니다. 그분이 “내가 그렇게 하리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 완성을 보기 위한 모든 능력과 영광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서약을 그분의 모든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것을 주장하고 그것에 기초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도록 해드립니다. 여기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신실함을 서약한 모든 자에게 주신 그분의 서약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업고, 내가 너희를 안을 것이요…” (이사야 46:4) “여인이 자기의 자식을 잊을수 있겠느냐?... 참으로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9:15)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7)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또 위로를 회복시켜 주리라.” (이사야 57:18)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하는 도중에 내가 들으리라.” (이사야 65:24)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3:5)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되시며, 우리의 건강, 우리의 구조자, 우리 구원의 반석, 우리 매일의 식량, 우리의 위로, 우리의 공급자, 우리의 강한 팔, 우리의 방패, 우리의 빛,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화—환란 날에 필요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당신의 하나님이 되게 하십시오. 불안해하거나 당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당신이 그분의 능력을 신뢰할 것이라고 그분께 증명해 드리세요!

2014년 10월 30일 목요일

“그녀는 나를 위해 이것을 하였도다”

“보라, 그 도시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신 것을 알고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분 뒤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 시작하여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고 그분의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발에 부으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로 돌이키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씻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였고,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누가복음 7:37-38, 44-46)

당신은 그분의 발을 당신의 눈물로 씻긴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 자신의 필요나 당신의 사역, 또는 당신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며 그분께 나아온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사랑과 경배의 향기로운 향유 옥합의 선물을 단순히 그분께 부어드리기 위해 그분께 나아온 적이 있습니까? 그분 심장의 이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고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위해 이것을 하였도다!”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또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그분이 잡수실 때에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같이 허비하느냐?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마태복음 26:8-9) 우리는 이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이 우리의 시간과 기도 청원을 필요로 할 때, 홀로 그분의 필요를 섬기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그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 여자는 내게 선한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26:10-11) 본질적으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이것을 하였도다!”

2014년 10월 29일 수요일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6)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주님은 당신과의 친밀함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랑하는 자와 단둘이만 있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성도가 어떤 기도 모임도 절대 빠지지 않으며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들은 소규모 가정 모임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또한, 두세 사람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곧 주님으로부터 당신에게 신호가 올 것이고, 그분은 당신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실 것입니다. “너 홀로 내게 나아오라. 그리고 문을 닫아라.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자.” 은밀한 골방 기도는 당신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것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그와 같은 교제가 없다면, 당신은 그분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함 없이는 당신의 선한 행실조차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이 말씀의 핵심은 “나는 너를 모른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과의 친밀함도 없고 그분을 진실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엄청난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열심히 프로그램을 따르며 구제활동을 하는 등, 선한 일을 행하는 데에 너무도 몰두하여, 예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단독의 시간을 가질 때, 우리는 그분의 필요에 대해서 고려라도 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정과 사랑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인간성을 결코 내려놓지 않은 채, 우리처럼 거부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이시기도 합니다. 우리 질고의 고통을 느끼시며, 그분은 여전히 인간의 아픔과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최근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이 땅에 계셨을 때, 당신을 그저 한 인간 예수로서 사랑하는지 누군가에게 물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수많은 사람이 그분의 자비를 구하며, 시력을 얻기 위해, 치유 받기 위해, 식량을 구하고 기적과 이사를 구하기 위해 아우성치며 사방에서 그분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들로 보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외침을 듣고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며, 단지 그분만을 사랑하기 위해 온 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2014년 10월 28일 화요일

예수님만 사랑하기

예수님은 속임 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아십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이 온 역사를 통해 그분께 불충실했으며, 반복해서 영적 간음을 범했을 때 인내하시고 참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충실한 신부를 갈망하십니다. 그분은 다른 어떤 사랑도 침범할 수 없는, 오직 그분만을 바라볼 자들을 원하십니다.

한 아내나 남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신뢰를 발견할 수 있는— 거짓도 비밀도 없는 충실함입니다. 그처럼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겠느냐? 그녀의 값은 루비보다 훨씬 더 나가느니라. 그녀 남편의 마음이 그녀를 편안히 신뢰하므로 그가 노략물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리라.” (잠언 31:10-11)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고 우리를 편안히 신뢰하실 수 있을까요?

저는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한 복음주의적 여성단체를 압니다. 그들은 그분의 거짓되고 부정한 신부에 대해 회개합니다. 그들은 그분의 쓰라린 마음—결핍된 사랑을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고통”에 대해 말합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찾기가 무척 힘들 때 고통스러워하심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매우 상심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예수님! 제가 참으로 오랫동안 당신께 불충실했습니다. 이 세상 것들에 제 마음을 너무도 빼앗겼습니다. 저는 자동차, 골동품, 스포츠 등을 추구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높이는 것을 즐겨하고 물질을 원하며, 다른 관심사에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일서 2:15)

예수님께서는 매우 충격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 (누가복음 18:8) “믿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신뢰하며 진실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을 향해서 말입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이 실족할 것이며, 그분의 택하심받은 자들조차 심히 유혹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실족할 것이며 이 세상의 정욕과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부르짖음은 이것입니다. “오 주여, 당신께로 저를 이끄소서. 당신이 신뢰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을 무조건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당신을 향한 정결하고 거룩하며 순수한 사랑을 제게 주시옵소서!”

2014년 10월 27일 월요일

권능을 부여해주는 은혜 by Gary Wilkerson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삶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자녀나 갈등으로 가득한 결혼생활, 또는 지불할 돈은 없는데 쌓여만 가는 고지서들 등, 그 나름대로의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러한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면, 왜 다시금 행위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해야 합니까?

저는 행위가 은혜를 압도하는 노예적 사고방식보다 더 실제적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데, 당신이 어떻게 문제들을 다루는지에 대해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음란물에 중독된 한 젊은이가 그것으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도 역시 “행위”의 사고방식으로 치우치고 있습니다. 어느날 그는 이러한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나이다.” (시편 119:9) 이 젊은이는, 만일 그가 성경 말씀을 더 읽으면 자유를 얻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구절을 읽게 됩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서 그는 교회 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그가 시도한 이 모두는 좋은 일들이지만, 그는 자유함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행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그를 속박과 절망으로 더욱 빠져들게 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공급하실 수 있는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세가 아닙니다.

같은 교회의 또 다른 젊은이도 그와 같은 외설물 중독에 빠져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 외에는 아무 힘도 없다는 것과, 저의 무력함에 대해 너무도 잘 압니다. 그리고 당신이 제 희망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절망을 넘어서서, 제 안에서 일하실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께 나아갑니다. 저는 이 죄를 극복하기 위해 단 한 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것은 권능을 부여해주는 당신의 은혜입니다. 그것으로 하여금 지금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제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젊은이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의 은혜가 주워질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 이유는 그가 이 단순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저지하는 모든 장벽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이 두 예는 표면적으로는 많이 달라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구조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마음은 “나는 이것을 얻어야만 해”라고 말하는 옛적 속박의 언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당신의 은혜가 내 모든 노력을 주도합니다.”라고 말하는 언약으로 전향합니다.

우리가 이 시점까지 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것을 우리 삶 가운데서 행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권면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워진 위대한 구원을 등한시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더욱 위대하시며, 모든 영역에서 여러분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로 돌이키십시오.

2014년 10월 25일 토요일

열망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by Claude Houde

저는 캐나다 몬트리올의 남해안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목사입니다. 우리는 학교 건물에서 빌린 작은 공간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과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매주 3,5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데, 퀘벡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곳은 전체 인구의 2% 미만이 복음주의적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형적 복음주의적 교회는, 평균 80명 미만의 출석률을 가지고 오십 년 이상이나 지탱해 왔습니다.

그러한 배경에서의 이 같은 풍성한 수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북아메리카의 가장 적대적이며 세속적인 환경 속에서도 이십 년 이상이나 연속적으로 성장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복음주의적 활동을 개최하지도 않으며, 현대 교회성장 전문가들의 “최첨단” 방식과 전략을 시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한 프로그램씩 세워가며, 주일에 몇 차례에 걸쳐 예배를 드리는데,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온갖 인종과 사회적 배경의 남녀노소들이 결단의 믿음으로 변화의 능력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천재 불가항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은혜, 담력, 구원의 기적적이며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간증하며, 매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 이웃들, 가족, 그리고 직장 동료들과 대학 친구들을 초청하여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의 말씀을 실제로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그렇게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세속적이고 냉소적인 현대의 퀘벡에서, 결단의 믿음은 부흥의 점화 불이며 인생들을 변화시키는 점화 불입니다. 다니엘과 같은 수천의 사람들은 반박할 수 없는 돌파와 구원을 경험합니다. 거기에는 유명세도, 기이한 신비도, 세련된 전문성도, 어떤 술책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날마다의 삶을 빛과 자유, 결단하는 믿음의 능력과 가능성에서 사는 현대판 “다니엘”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열망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과 비록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10월 24일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와 함께 오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6-18).

그리스어로 “shout(호령)”이라는 단어는 일깨우다, 흥분하게 하다, 행동을 하게 자극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천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문 앞에 다가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맞으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은 길가에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 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큰 나팔소리와 천사들의 호령과 함께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 공중에서 예수님을 맞을 것입니다. 그 만남이 조용할 것 같습니까? 새로운 몸으로 예수님을 만나는데 말입니다. 영생을 얻고 고대하던 집을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둥같이 요동치는 기쁨의 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기뻐하는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예수님을 맞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단순히 설명한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7). 누구는 천국에서 살지 이 땅위에서 살지에 대한 우리의 언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땅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확신을 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저는 이 말씀에 다시 한번 초점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여러분께서는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도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하신 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한복음 17:24). 모든 시간과 시기를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께서 한시간 이내에 오실것이라는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사십시오. 그러나 항상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땅위에서 우리가 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2014년 10월 23일 목요일

예수님의 재림은 큰 잔치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오실 주님의 신부로서 두려움 말고 주를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 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 4:13).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미리 예비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베드로후서 3:12). 또한 주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또 이런 지침을 주십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배소서 5:16). 그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이기적인 꿈과 어리석은 야심을 품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로서 신랑이 올 때까지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이렇듯 준비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시에 닥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예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그의 신부인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가서 7:10). 우리는 가끔 예수님의 기대, 기쁨을 잊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부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마귀를 내쫓았을 때 함께 기뻐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17-22 참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우리의 감정을 함께 경험하셨고, 신부와 함께하기를 기쁨으로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림하실때에 그의 임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서 9:28). 다음 오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르 죄악에서 구원하시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부인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땅에 남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그의 능력과 영광을 보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본 성도들은 자석같이 예수님께 이끌림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애를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부르시고, 우리를 더욱더 가까이 품어주십니다.

2014년 10월 22일 수요일

우리는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

무덤에서 살과 뼈의 육신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부활하였고 도마는 그의 몸을 만졌습니다(요한복음 20:26-29 참고).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졌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영광중에 아버지께로 들리워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구름으로 들리워져 올라가셨습니다. 정말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을까요. 영광의 빛으로 빛나는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올라가시는.. 사도들은 무릎꿇고 엎드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모습을 모두 다 보았습니다.”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사도행전 1:10). 우리가 순식간에 눈깜짝할 사이에 변할것이라는 것은 정말 진실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린도전서 15:51-52). 또한 바울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변화할 육적인 변화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데살로니가전서 4:17). 주님은 재빨리, 홀연히 오실 것이고 우리는 순식간에 변화할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작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날이 가까움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요한계시록 1:7).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요한계시록 22:4).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사도행전 7:55). 스테반 같은 사람이 바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성령충만하여 깨어있는 눈으로 열린 천국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영광중에서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14년 10월 21일 화요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

“저희가 모엿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윈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6-7, 9-11).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볼 선택하신 사도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 “사도와 같이 모이사”(사도행전 1:4). 예수님께서는 대략 120명의 사도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 일어날 일을 갈피를 잡지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기 전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한복음 16:10). 우리의 부족한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신다는 것인지..? 다시 죽으신다는 것인지..? 천사들이 데리고 가신다는 것인지..? 엘리야처럼 천국의 마차들이 그를 데리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 대기 중에 갑자기 사라지신다는 것인지..?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에 이미 경고하고 말씀하셨던 바입니다. “내가 갔다가 너힁ㅔ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한복음 14:28). 사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지요.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요한복음 16:18).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아,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늘 오시기 전에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고 준비시키고자 하셨고, 약속 하셨듯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현재도 그렇게 일하시고 계십니다! 미국, 중국, 유럽, 폴란드, 러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부르심으로 작은 조직부터 큰 그룹까지 우리는 함께 모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나팔소리를 들었고, 그들은 이러한 부르짖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태복음 25:6)

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by Gary Wilkerson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나누는 것 등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기쁨 넘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데 기여하는 일들이지요. 그런데 간혹 우리는 이런 복된 일들을 성과주의 위주로 바라본 나머지 몹시 고된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의무적으로 행함으로써 우리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합니다. 우리는 실패할찌라도 새 언약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진리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바울은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왜 구약의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것입니까? 율법은 당신을 다시 노예같이 사로잡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은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새 힘을 주신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행위를 통하여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것을 하면 내가 복을 받고,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오늘날 성도들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대한 지켜야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거야.”라는 태도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미 복을 주었단다. 나의 명령을 지키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말이다. 나는 그리고 너희가 나의 명령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성령을 통하여 너희에게 새 힘을 줄 것이다. 너희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히브리서 2:1). 법칙을 따르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한 복음의 은혜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4년 10월 18일 토요일

자비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마가복음 6:34)

노르웨이의 오슬로라는 지역에서 우리 사역팀은 그곳의 큰 루터파 교회와 연합했습니다. 그 교회는 우리 사역을 도울 의향이 있는 소수의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그 교회 젊은이들은 주님께 깊이 헌신된 성도들이었으나, 우리의 전도 방식에 대해서는 완전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주로 내면에만 간직하는 조용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지역 중심부 거리 모퉁이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려 했으나, 불과 몇 주 후에는 우리가 그들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향한 순전한 집착으로, 그들 심령 속에서 복음 전파의 불길이 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성도는 우리를 돕기 위해 매일 아침 두세 시간씩이나 걸리는 기차여행도 마다치 않았고, 저녁 늦게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헌신조차 그들의 목마름을 채우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뉴욕에서 온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 더 알기를 무척이나 갈망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 중 많은 성도가 과거에는 범죄 조직단이나 마약 중독자들이었다고 그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사역팀들의 삶에서 하신 일들과 지금 행하고 있으신 일들에 대해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장 매료되었던 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영혼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우리 젊은이들은 그들을 붙들고 함께 울며, 그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사역은 그 교회에서 매일 아침 몇 시간에 걸친 기도와 예배로 시작되었고, 그 루터파 교회 젊은이들은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 젊은이들의 사랑은 그들이 결코 체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 열정은 곧 그들에게 전이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일했던 모든 성도의 마음속에 산불처럼 번졌습니다.

그 부흥집회가 끝날 무렵, 노르웨이의 젊은 성도들은 우리가 떠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우리와 너무도 정이 들었고 너무도 사랑에 빠져서, 공항에서 비행기가 떠나기 전 몇 시간 동안 계속 울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그 여정을 통해 평생 친구들을 만들었고, 우리와 동역했던 성도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의 미와 본질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감정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우며 전염성이 강한 것입니다. 그 감정은 조작될 수 없고,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너무도 실제이며 너무도 강력합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실려 있습니다.

2014년 10월 17일 금요일

날마다 새로운 말씀

하나님께서는 듣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날마다 새로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점점 굳어져서 많은 사람은 그것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읽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7-8)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의 음성입니다. 그분은 가장 최근의 그분 음성을 우리가 듣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로, 듣는 자들을 경고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돌밭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나,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만 견디다가 후에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즉시 실족하는 자들이요…” (마가복음 4:16-17) 이 비유는 말씀 듣기를 즐기는 자들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들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은 그들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돌처럼 굳어만 가는 그들의 심령이 깨뜨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돌처럼 굳은 심령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감옥에 있습니까? 아니면 거리에 있습니까? 슬프게도, 가장 강퍅한 심령들은 그들의 심령이 강퍅해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자들로 가득한 하나님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이 어떻게 강퍅해지고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의 완고한 고집을 깨뜨리도록 허용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그분의 말씀에서 듣고, 설교를 통해 들으며, 때로는 고요하며 작은 음성으로부터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음성에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그분의 백성을 은밀한 기도의 골방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순종에 대해, 당신의 문제와 당신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주기를 원하시며 이끌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일찍 일어나 말하고 말하였어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불렀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 7:13) 우리는 매번 그 부르심을 거절했고, 대신 우리 자신의 관심사와 행사들, 그리고 다른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앞세웠습니다. 우리는 매번 그날의 음성을 놓칩니다. 우리는 듣는 것을 매일 거절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갈수록 냉담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대신, 다른 음성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더 강퍅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한 하나님과의 시간을 가지려는 결단을 거부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대해 낯선 자들이 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더이상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보기에도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강퍅해지는 것을 보고 계시지만 여전히 그들을 돌보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향한 그분의 성령을 비추셔서, 신랄하며 꿰뚫는 말씀, 즉 그들을 일깨우기 위한 우뢰같은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불쾌하게 하며, 결국 그들은 화를 내고 메말라버리게 됩니다! “해가 돋은 뒤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시들어 버렸고…” (마태복음 13:6)

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이제 기도 골방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6)

은밀한 기도로 그분과 교제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말씀하실지에 대해 매우 신중하십니다. 그분의 음성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는 자들만이, 온 세상을 차단하고 홀로 그분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가 내 음성을 듣기 원한다면 문을 닫고 기도 골방으로 들어가라. 내게 은밀히 기도하면, 내가 너에게 상을 줄 것이다.” 분주함, 욕정, 탐욕, 그리고 인생의 걱정거리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질식시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분주한 삶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분의 음성은 “말씀”입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것들에 대한 정욕이 들어와 말씀을 숨 막히게 하여 열매 맺지 못하게 되는 자들이니라.” (마가복음 4:18-19)

저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질식시키고 있을지 두렵습니다. 여기서 질식의 의미는 그분의 음성을 “혼잡하게 하다” 또는 “익사시키다”라는 뜻입니다. 한때 하나님은 당신께 명확히 말씀하셨고, 그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분을 사랑하지만, 그분을 위한 당신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분주함은 지금 당신을 요구합니다. 당신의 소유물, 당신의 관심사들, 당신의 문제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은 당신의 시간을 점령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부르고, 당신을 구하며, 당신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네가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너는 네 안에서의 나의 음성을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다!”

당신은 너무도 바빠졌고, 삶의 문제와 염려의 수렁에 너무도 빠져있어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조차 당신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절)

좋은 땅에 뿌려진 것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얼마는 삼십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백 배의 열매를 내는 자들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4:20)

2014년 10월 15일 수요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십니까?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명확히 들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분명해서 “주께서… 그의 말들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시니라.” (사무엘상 3:19)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더라.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니라.” (사무엘상 3:21-4:1)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 또한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의 기쁨이었고 그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 속에서 이르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시편 60:6)

오늘날 많은 사람이 지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성경을 통해 그분이 말씀하시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원하거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말씀은 다 성경 기록에 저장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성경에 거스르는 말씀은 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1:1-2) 그리고 그분의 아들은 지금도 그분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의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며, 그 외의 음성은 듣지 않으리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는 어떻습니까? 마지막 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마스커스 노상에서 사울(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추더라.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9:3-4)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한 음성이 있어 내가 들으매 히브리말로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사도행전 26:14, 16)

베드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기도 중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한 음성이 있어 내게 이르시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여, 그리할 수 없나이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다시 음성이 있어 내게 응답하시되… 이 일이 세번 있은 뒤에…” (사도행전 11:7-10)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

진실한 성도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바울, 베드로, 사도들, 그리고 밧모섬에서의 요한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확실하며 명확하게 듣는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종말의 때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분의 음성을 명확하게 들려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약속과 경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며 구별된 남은자들을 영적 시온으로 데려가실 것이며, 그들에게 그분의 음성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히브리서 12:22)

하나님께서는 불리움 받은 모든 자에게 이 메시지를 주십니다: 지난 세대에 온 땅을 진동시켰던 하나님의 음성은, 또 한 번의 마지막 진동과 권능으로 들려올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흔들었거니와 이제는 그분께서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아직 한 번 더 흔드노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2:26) 여기, 그분의 거룩한 믿음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가 있습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말한 자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분에게서 돌아선다면 더더욱 피하지 못하리로다.” (히브리서 12:25)

왜 지금 하나님께서는 죽은 교회들로부터 사람들을 모으고 계실까요? 왜 성령께서는 “내 백성들아, 바빌론에서 나오거라! 그녀의 죄에 동참하지 말지어다.”라고 부르짖고 계신 걸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혼란스러운 종말의 때에 거짓 교리에 융화되지 않은 자들, 즉 시온의 백성들을 꼭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거짓 선생을 따르지 않으며,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명확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시며,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따라서 삽니다! 그들은 그분 음성의 지시를 받으며, 그분 음성에 의해 위안을 받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의 음성으로 인도받습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놀라운 특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통제받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하고 확고부동하며 틀림이 없습니다!

2014년 10월 13일 월요일

예수님이 더 뛰어나십니다 by Gary Wilkerson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 아들께서는…” (히브리서 1:1-3)

히브리서 첫 장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잘 알고 있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직 소수의 성도만이 “더 뛰어나신 예수님”에 대한 계시를 발견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주제에 너무도 집중한 나머지, 안부 인사로 서두를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서신에서처럼 독자들에게 지침을 주지 않았고, 대신 “더 뛰어나신 예수님!”의 계시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매료되었고, 감격에 넘쳤으며 압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보다 더 뛰어나시다는 말인가요?”하고 당신은 물을 것입니다. 저는 그 답을 히브리서 1장에서 발견합니다. 그분은 모든 선지자나 제사장들, 그리고 왕들과 천사들보다도 훨씬 뛰어나십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뛰어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살아계시는 구원자이심을 아는 우리를 향한 뉴스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창세에 계셨으며 영원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도 더 뛰어나십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이 더 뛰어나시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데에 실패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행위보다 월등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보다도 더 의미있다는 듯이 삽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구원받았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행위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은 우리를 속박으로 이끄는 구약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소수만이 그 함정에 빠진다는 사실을 지각합니다.

히브리서를 계속 읽어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더 위대한 언약”을 봅니다. “이제 그분께서 더욱 뛰어난 섬김의 직무를 얻으셨으며, 그것에 의해 또한 그분은 더 나은 약속들 위에 세워진 훨씬 더 나은 언약의 중재자이시니라…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 들이 이르리니 그때에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 (히브리서 8:6, 8)

예수님이 더 뛰어나십니다!

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라 by Jim Cymbala

사도행전의 교회에서는 무엇을 중요시했을까요? 사도들의 기도는 우리에게 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줍니다. “주의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사도행전 4:29)

담대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함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전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미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신약성경의 전도자들은 담대했으며, 성령께서 회심에 필요한 확신을 주실 것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했던 이 말을 들어보십시오: “너희가 그분을 붙잡아 사악한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사도행전 2:23) 이 말은 그 무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였습니다. 만일 데이빗 레터맨(David Letterman: 미국의 유명한 TV 토크쇼 사회자)이 유대인 청중에게 하지 말아야 할 톱 텐 금기가 있다면, 그중 첫 번째는 바로 이 말일 것입니다. “있잖아요… 당신들이 방금 당신 자신들의 손으로 메시아를 죽였잖아요. 이스라엘이 수 세기 동안 기다려왔던 그분 말입니다.”

한편 베드로의 담대함은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말은 그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그 날이 저물 때쯤에는 큰 무리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전향했습니다.

그다음 장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고 난 후에 몰려든 군중을 향해 계속해서 담대히 말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신 분, 곧 의로우신 분을 부인하고 살인자를 너희에게 달라고 구하여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 (사도행전 3:14-15, 19)

그로부터 몇 년 후 바울이 에베소에서 말씀을 전할 때, 이방 우상숭배에 대한 그의 비난이 너무도 신랄한 나머지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진노가 가득하여 외치며 이르되, ‘위대하시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다이아나여!’ 하니, 온 도시가 혼란에 빠지고…” (사도행전 19:28-29) 이 사건으로 볼때, 저는 사도들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든지, 그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들은 그때, 담대하며 정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과 온 도시의 모든 교회는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만 할 것입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회개와 거룩의 삶

진실한 회개와 세상과의 분리 즉 거룩 없이는 진정한 부흥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느혜미야 9:2). 성경에서 믿음의 회복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적이고 쾌락적인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수년간 저는 분리되고, 온전히 예수님께 내려놓고 거룩한 삶을 사는 크리스천들이야말로 이 육적인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분리되고 정결하기를, 다시 말해 “다르기를” 기대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죄가 만행하는 뉴욕의 거리에서 분리되고 정결한 그리스도로 충만한 크리스천들이 원수된 마귀를 좇아 낼 수 있습니다. 죄와 타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오히려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갈망하는 남아있는,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성도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두 모으셨을 때에는 대부분의 믿는 이들도 그들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챘다면 그들을 거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한 성도들은 승리의 나팔 소시를 들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쉽게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그 무엇도 소유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편 50:10-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저 하나님의 소유에 대한 관리자일 뿐입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생과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여러분은 자신에게 쏟는 투자와 하나님의 일에 관한 참여를 비교해 보았을 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령충만 할 때의 가장 큰 효과는 바로 하나님 앞에 나의 소유, 나의 인생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사도행전 4:32).

2014년 10월 9일 목요일

기쁨과 축제

“느혜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하는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케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느혜미야 8:10-11).

그 어느 곳에서든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되어 진실된 회개가 이루어 졌을 때에 엄청난 파도와 같은 기쁨과 경배가 따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세상에는 가짜 기쁨과 축제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높이며, 금송아지를 둘러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회를 따른 진실된 기쁨과 우상숭배자들의 가짜 기쁨을 구별하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산에서 내려온 후에 진중에서 나오는 큰 소리를 들었습니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출애굽기 32:18).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노래를 하며 춤을 추고 기뻐하고 있었지만 모세는 육적인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이 고집부리고 불순종하며, 정욕과 음란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의 함성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죄를 드러내기 위한 율법의 가르침도, 말씀을 깨닫고 울며 얼굴을 굽히며 하는 회개도, 거룩하고 영적인 함성도 찬양도 없다면 말입니다. 조심해야합니다. 깨어있지 않고 분별력 없이는 우상숭배하는 노래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릴 수 있습니다.

느혜미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영적 부흥으로 인한 기쁨과 축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느혜미야 8:12). 다른 말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분별하여,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애통하는 회개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혜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느혜미야 8:6-9).

말씀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즐거움과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멘 아멘 소리치며, 여호화를 경배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 134편 2절에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를 땅에 굽히게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진실된 회개를 하고 두려움과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원한이나 앙금을 품고 남을 배신하고 탓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을 바로잡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르게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시간 낭비를 하지도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마음을 강타하는 말씀으로 인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회개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다른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오로지 말씀으로만 바로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9-21절에서 진실로 회개한 성도들의 본질을 묘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2014년 10월 7일 화요일

하나님의 완전한 인도하심

부흥의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소망과 의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느혜미야 8:1-3, 5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에스라는 강단에 서서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은 집중하여 말씀을 듣고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고집과 불순종으로 인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영혼 또는 교회의 부흥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입니다. 가졌던 신앙을 버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루하다며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신나는 것입니다. 타락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보다는 짧은 예화를 나눕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인간의 죄를 들여다 보게 하여 교회를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죄와 하나님의 법에서 타협하는 자들은 몹시 당혹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일하실 때에는 교인들은 진리의 말씀을 요구할 것입니다. 저는 진리에 굶주린 수백 명의 교인들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우리는 너무 배고픕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가 없는 죽은 편지를 받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되고 경건한 마음가짐이 있을 때 설교자는 자극되어 신나게 말씀을 나눕니다.

카리스마적 교회들에서 교인들이 설교를 견디지 못하다는 것은 매우 속상한 일입니다. 그들은 그저 음악, 즐거움, 스페셜 싱어 등의 엔터테인먼트만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진리의 말씀도 함께 들릴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좋을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의 계명, 언약 등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과 명령을 원합니다.”

2014년 10월 6일 월요일

완전한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 by Gary Wilkerson

예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의 도움은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래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조금은 나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저 엉망으로 만들 뿐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에 무언가를 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지 않으면 결코 은혜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도 그것은 우리의 자비와 은혜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에서 “하나님 아들을 밟고”라는 뜻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힘으로 무언가를 더하려고 할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이루어진 일을 우리의 힘으로 희석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업적을 모욕합니다. 사실은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삶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는 불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불충분하다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무언가를 더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만약 전자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그 무엇도 하지 않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더 많은 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담스러운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일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오늘의 할 일에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모든 자원, 평화, 기쁨 그리고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신앙생활이 보잘것없어 보이고 비참하게 느껴진다면, 구원을 받지 못할 까봐 교회에 가기 때문에 지쳐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다시 한번 초대하고 계십니다. “내 아버지와의 약속 안으로 오라. 하나님의 은혜를 네게 더하여 주고, 성령으로 네 삶에 새 힘을 더해주겠노라.”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정결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완전히 마치신 일에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이 영광스런 선물을 받고 기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2014년 10월 4일 토요일

큰 잔치 by Carter Conlon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누가복음 14:16-17)

달리 말하면, 그 큰 잔치를 베푼 사람은 그분의 놀라운 생명과 능력의 잔치에 당신과 저를 초대하신 주님과 같습니다. 비전, 방향, 공급, 그리고 미래는 그곳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왜 그들이 올 수 없는지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자들은 그곳에 가는 것을 단순히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 잔치에 무언가를 가져가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며, 그 이유로 결국은 그 초청을 거부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여러분과 제가 직면해 있는 딜레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삶을 통해 무언가를 하기 원한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의 놀라운 초청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들이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결혼식에 가져가는 선물이 그들 앞에 차려질 음식과 비슷한 값어치여야 한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례입니다.

물론 그 잔치의 값어치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만일 당신과 제가 어떤 의무감을 느낀 나머지 그 가치에 합당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는 터무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 가는” 잔치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 없는 자들은 오라. 재능 없는 자들은 오라. 능력 없는 자들은 오라. 돈 없이 와서 배를 채우라! 너희를 진실로 배부르게 하며 진실로 충족시키는 것을 먹어라.” (이사야 55:1-2 참조)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33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 의미는 당신이 집과 은행 예금을 포기해야 하며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본질은, 그것을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하려는 생각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언을 반대하는 세력은 이 세대에 너무도 강력합니다. 사회적 추세는 하나님 말씀의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전투는 너무도 치열하며, 우리의 자원은 그 필요를 충당하기에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모든 자기의존을 떨쳐버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잔치에 우리 그대로의 모습으로 참여하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
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0월 3일 금요일

그분 권능의 위대하심

저는 며칠, 몇 주, 심지어는 몇 달이라는 기간 동안 줄곳 기도만 해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예언과 긴 “영적” 글 등을 받습니다. 어떤 분은 제게 그의 아내를 잘 좀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의 아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죽어서 천국에 갔었으며, 예수님과 춤을 추었고 그분과 함께 스카이다이빙까지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러한 계시가, 많은 시간을 기도한 후에 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왜 이러한 사랑스러운 성도들이 사람들에게로 나아가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걸까요? 왜 사람들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상심한 마음 없이,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는 데에 그들의 온 시간을 보내는 걸까요? 실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최고의 처방은 죄인들에게로 나가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 우리에게 와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입니까? 단순히 우리를 축복해주시며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달라는 의도입니까? 아니면 우리 주님의 상심한 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시고 우리를 준비시켜달라는 의도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을 떠나시기 전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가복음 16:15)

우리는 타임스퀘어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술집이 문을 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왔습니다. 그 건물주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 큰일 났군요.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천만에요! 그는 자기가 예수님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8:18)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께서 나를 돕는 분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행하든지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니라.” (히브리서 13:6)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바 그분의 지극히 큰 권능이 어떤 것인지 너희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권능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휘하셨으며… 또 그때에 그분을 모든 정사와 권능과 강력과 통치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리는 모든 이름보다 훨씬 위에 두시고, 또 모든 것을 그분의 발아래 두시며…” (에베소서 1:18-22)

사탄은 여러분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변절에 대한 두려움, 빠지기 쉬운 죄에 대한 두려움, 또는 고질적 습관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했으며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야고보서 4:7) 도망 가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닌 바로 마귀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전쟁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날지라도 내가 이것을 확신하리로다… 그분께서 고난의 때에 자신의 천막 속에 나를 숨기시고… 반석 위에 세우시리로다.” (시편 27:3-5)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빌립” 사역

그리스도의 거룩 안에서 행하는 모든 성도를 위한 지침으로써 “빌립” 사역을 들 수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시로 내려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매, 빌립이 행한 기적들을 사람들이 듣고 보며 한마음으로 빌립이 말한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였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던 부정한 영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마비 병에 걸린 많은 사람과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더라. 그 도시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 8:5-8)

빌립은 전문 사역자는 아니었지만, 부활 생명의 그리스도의 권능을 순전히 믿었던 성령 충만한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시장 사람이었는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온 시장을 다녔습니다. 우리 지체의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악령을 쫓아내며 직장 동료들의 구원과 치유를 위해 기도해주었던, 믿음의 평신도 전도자 빌립처럼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도시나 다른 어떤 도시에도 절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악한 도시를 각성시킬 수 있으며 각성시켜야만 합니다!

플리머스 형제 교회 운동(The Plymouth Brethren movement )은 영국의 플리머스에서 오래전에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가지고 거리로 나갔던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영혼을 향한 그들의 부담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고, 그리스도는 천국의 영광스러운 분으로 사람들에게 인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연구하는 일에 너무도 사로잡혔고, 그들의 예배 형식에 대해 너무도 몰두한 나머지, 영혼을 향한 그들의 부담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열린 형제들(Open Brethren)’과 ‘닫힌 형제들(Closed Brethren)’이라는 두 파로 나뉘었습니다. ‘닫힌 형제들’ 파는 초청 외에는 누구도 그들 그룹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정도까지 심각해졌습니다. 그 본래 운동을 통해 오늘날까지 남은 것이 있다면, 다비(Darby), 스토니(Stoney), 메킨토시(Mackintosh), 그리고 레이븐(Raven)과 같은 자들이 쓴 훌륭한 책들뿐인데, 그 모두는 그리스도와 거룩에 대해 가르치는 훌륭한 책들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에게 영적 선민 주의(elitism)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열정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깊고 순수한 말씀과 함께,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열정이 배합된 균형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중심적이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의 문제들에만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가복음 16:15)

2014년 10월 1일 수요일

침묵하는 증인들?

바울은 부활 권능의 왕 예수님에 대해 설교함으로써 그들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하니라… 이는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과 부활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라.” (사도행전 17:17-18)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빛을 드러내는 것을 가장 꺼려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바로 그들의 일터일 것입니다. 이 나라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집에 앉아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강렬한 사랑을 선포하면서도, 일터에 가서는 소심하기 짝이 없으며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탐독하며 거룩 안에서 걷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예수님에 대해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걸까요? 왜냐하면, 바울과는 달리 우리는, 주위 사람들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보면서도 마음의 요동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16 참조) 우리는 감히 이렇게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설교자였잖아요. 그는 이 일을 위해 특별한 부르심을 받았잖아요!”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며, 절대 우리의 빛을 숨기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이 아테네인들은 현 시대에 당신이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자기들의 시간을 달리 쓰지 아니하였더라.” (사도행전 17:21) 이 나라 전체도 그와 같습니다. 당신 일터 주위의 대부분 사람은 우상숭배, 잡담, 그리고 모든 종류의 미신에 빠져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가 너무도 심각한데도 요동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탄이 그 도시를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당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에 대항할 수 있는 비밀 무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권능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마귀가 저질러 놓은 일들에서는 눈을 떼고, 대신 예수님께서 부활의 권능 안에서 하실 수 있는 것들에 집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잡담꾼”, 즉 부랑자, 터무니없는 설교자라고 모욕했으나 그는 상관치 않았습니다.

당신은 “잡담꾼”이라고 불려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내 권리를 침해하지 마세요. 당신의 종교를 나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나를 당신이 믿는 것처럼 믿게 하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그러나 그 어떤 조롱도 바울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은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강경하게 증언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단지 바르게 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는 진부한 관념 뒤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누리는 말 없는 증인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증언은 반드시 말씀의 선포가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네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이사야 52:8)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로마서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