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31일 수요일

전쟁에서 영리함

적대 세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더욱 번성합니다. 거친 폭풍이 나무에 몰아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람이 나무를 뿌리 채 뽑아 날려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가지를 부러뜨리고 잎사귀를 날려 버립니다. 뿌리를 느슨하게 만들고 봉우리들이 바람에 날아갑니다. 그래서 폭풍이 지나간 후 소망이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나무 둥치 주위에 틈새를 벌려놓은 바로 그 폭풍이 뿌리가 더욱 깊이 박히게끔 도와주었습니다. 그 나무는 이제 영양분과 수분을 얻을 수 있는 새롭고 더 깊은 출처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죽은 가지가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봉우리들이 날아가긴 했지만 다른 봉우리들이 더욱 풍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실은 이제 나무가 더욱 튼튼해지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라고 있습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더 많은 열매를 맺을 테니까요!

당신은 현재 폭풍가운데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을 난폭하게 흔들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어서 당신은 가라앉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이여, 두려워 마십시오. 이 태풍의 와중에서 당신은 영적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안에 더욱 깊어지는 겸손, 죄에 대해 더욱 쓰라린 애통과 슬픔, 그분의 의에 대하여 더욱 심화된 굶주림을 계발하시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험이 풍부한 십자가 군병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전쟁의 흉터가 있는, 그러나 전쟁에서 영리하고 용감한- 때로 당신은 자신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그분은 주권적으로 행동하셔서 언제라도 당신의 고투에서 당신을 뽑아낼 수 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 안에 그분을 향한 더 깊은 갈망을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은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이루는(worketh, KJV) 줄 앎이로다” 이루다는 성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4:17에서 읽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worketh, KJV) 함이니” 이 구절에서 이루다는 로마서 5:3의 이루다와 같은 것입니다.

2008년 12월 30일 화요일

영적 성장에 대해 모든 크리스천이 알아야 하는 것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살후1:3).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에게 바울은 얼마나 대단한 칭찬을 하는지요! 그가 말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나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서나 너희가 얼마나 성장하였는지 놀랍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의 영적 성장에 대해 자랑한다. 너희로 인해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지!”

이 짧은 구절에서 바울은 연합하여 사랑가운데 성장하는 신자들의 몸에 대해 놀라운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 자라고 (groweth exceedingly, KJV)"에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는
”다른 것들 위로, 넘어, 그 위로 자라다“라는 의미입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조직체로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은 다른 모든 교회를 능가했습니다.

명백하게,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단지 그들의 믿음을 붙들고 있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우고, 움직이고, 성장하고 있었고 그들의 삶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들은 아시아에서 모든 교회의 화제 거리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들었던 설교가 그들이 그리스도와 더욱더 깊이 동행하도록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육적인 야망을 녹이고 그리스도답지 않은 습관들을 뉘우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의 성령께서 모든 문화적, 인종적인 장벽을 허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교육을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누구든지 감싸 안는 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 서로를 아껴주며 서로를 극진히 배려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마시고, 양식을 먹고 있다면 사는 동안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나는 우리 회중 모두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알고 있듯이 “더욱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름부음 받은 설교는 언제나 성장을 이룹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도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이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성령께서 우리를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시키시며 항상 일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육을 죽이고 우리 속사람 안에서 순결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속에서 분노, 원한, 적의 그리고 모든 악한 것을 제거하기위해 일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서로를 향한 친절, 부드러움, 용서를 형성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이 우리 주님께 합당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성장 시켜 가십니다!

바울은 한층 더 우리를 촉구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고전11:28). 여기서 살피다로 쓰인 헬라어는 “면밀히 조사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고 있는지 네 자신을 시험해 보라.” 우리는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변하고 있는가? 더욱 사랑스럽고 마음이 온유해지고 있는가? 내 가족과 친구들을 경건하게 존중하며 대하는가? 나의 대화는 더욱 의로워지고 있는가?”

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때로 우리는 성장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어떤 신자들은 자신들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삶에서 확실한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성령께서 그들을 위해 원수를 물리치셨는지 당신에게 간증하고 당신은 그들과 함께 그들의 승리를 기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크리스천들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는 동안 영적인 진전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전심으로 주님을 구합니다. 그들 안에 영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안에 어떤 성장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런 신자 유형의 한 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의 가운데 행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게 진전이 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은 그리스도답지 않은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마다 종종 내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크리스천이었다. 언제 쯤 배우게 될까?”하고 궁금해집니다.

데살로니가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에 대한 바울의 빛나는 평가를 들었을 때 매우 놀랐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살후1:3 참조).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희가 지극히 잘 성장하고 있다고요? 바울사도가 농담하시는군요.”

하지만 바울은 영적 성장이 은밀하고 감추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꽃이나 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게 자라는 것에 비유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 14:5-6).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백합화에 가거라! 그들이 자라는 것을 보려고 애써 보아라. 하루해가 질 때 까지 아무것도 못 볼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알아두어라. 나는 내가 내리는 이슬로 매일아침 백합화에 물을 주고 있고 그것은 자라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영적 성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감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을 때, 끊지 못한 죄로 인해 전혀 고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간증 합니다. “내가 예수께 나오자마자 주님이 내게서 그 유혹을 제거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자유롭습니다.” 이전의 마약 중독자들로서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이 개종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들이 미워하고 다시는 보기 원치 않았던 옛 부패성이 그들 안에 다시 풀려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싸워 봐도 하나 남은 정욕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낙담하게 됩니다. 그들의 영혼은 “언제까지 입니까, 주님? 언제 이 쇠사슬이 끊어집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귀가 그들에게 와서 “너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 하에서 너는 절대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친구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게 당신을 위한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당신의 고투 중에 당신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당신의 고투로 인해 훌쩍 훌쩍 성장하는지도 모릅니다.

안심하십시오. 당신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면 당신은 폭풍을 뚫고 나올 때 더욱 강해져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원수와 전투 중일 때 당신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능력을 실습하고 동원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나약하게 느껴진다 해도 그 은혜와 능력은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당신의 기도가 더욱 급박해지고, 둘째, 당신의 모든 교만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폭풍은 실상 당신 삶의 모든 분야에서 당신이 “영적 경비”를 서게끔 만들어 줍니다.

2008년 12월 26일 금요일

그분의 사랑을 알고, 믿고, 계속 신뢰 하십시오

누구든지 시련이나 시험받지 않고 성령 안에서 순행할 때는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특히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기를 원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지 아주 간단하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간단히 말해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기대하는 상태로 머물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매일 새롭게 되기를 우리가 기대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를 사랑하셨고 항상 우리를 사랑하실 것을 아는 지식 가운데 매일 매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감정의 오르내림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들락날락합니다. 우리가 잘했을 때만 그분의 사랑 안에 안전하게 느낍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었을 때나 시련을 겪을 때 또는 그분을 실망시켰을 때는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때 특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이런 성경 말씀들 가운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떤 시련에 직면했든지, 절대로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네가 능동적으로 나의 사랑을 신뢰하면 그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대로 네가 사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해 줍니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대해지고 번창했지만 온갖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정욕이 시큼해져버렸습니다. 자신들의 관능적인 식욕을 채우는데 쾌락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곧 그들은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돌이켜 주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분의 사랑의 마음이 그들에게로 향하셨습니다. 그분은 교정하시는 채찍으로 그 백성을 징벌하셨고 이스라엘은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내가 돌이킨 후에 뉘우쳤고”(렘31:18-19).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20절).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3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당신이 알아야만 할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징벌하고 너에게 가혹한 진리의 말을 해야만 했다. 그때에도 너는 나에게 죄를 범하고 그리함으로써 내가 너에게 내려준 은혜와 자비를 경멸하였다. 너는 내 사랑에 등을 돌리고 나를 거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창자가 너에 대한 동정심으로 들끓었다. 나는 너의 고투 중에도 너를 기억하였고 너를 반드시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가 기꺼이 너를 용서하고 회복시킬 것이다.”

2008년 12월 25일 목요일

영광 중에 동행하기

다가오는 시련의 시기를 지탱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당신에게 높고 고상한 개념처럼 들려서 신학자들에게 맡겨두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는 모든 진실한 신자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을 붙듦으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주님의 성품과 존재에 관한 계시입니다. 당신은 구약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를 일견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이전에 주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말씀 외에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모세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 더 알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간청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영광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모세를 데리고 바위틈에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분이 그분의 모든 영광 중에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출 34:6-7 참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일에 있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은 인류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이 모세에게 나타내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이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그분의 위엄, 광채, 능력과 주권 또는 그분의 백성가운데 나타나심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의 결과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분이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그 영광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자비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그분께로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영원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는 그것을 받는, 그리고 또 이해하기위해 기도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모세는 주님을 율법과 진노의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분께 탄원하고 부르짖고 간구하면서 그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대면한 관계의 기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으로 보게 되자 모세는 더 이상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배로 나아갔습니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출 34:8). 그는 하나님이 단지 그를 두려워 떨게 만들었던 천둥, 번개, 귀를 찌르는 나팔소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셨고 그분의 성품은 인애와 자비였습니다!

성경이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진리를 아시겠습니까? 진정한 예배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보고 압도당한 마음에서 우러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 자신, 그분의 선하심, 자비, 용서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심에 대한 계시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찬양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바로 이 그분에 대한 이러한 놀라운 진리에 기초를 두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되면 우리의 예배는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 삶의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분을 더욱 닮아가도록 “영광에서 영광으로” 우리를 변화 시키며 우리의 얼굴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새로운 계시 하나 하나가 초자연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2008년 12월 24일 수요일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요한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사랑은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그는 기록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우리는 어떻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얻었습니다.

헌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칩니까? 우리의 본보기로 그리스도를 쳐다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3:16). 예수님 안에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가 여기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으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이 구절의 후반절은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에 대해 말해줍니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도록 인도합니다.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형제자매를 위해 진심으로 내어놓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요한은 외국 땅에서 순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기를 기증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를 대신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한분만이 그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형제에게 생명과 소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오직 한 유형의 크리스천은 죽은 자입니다. 그러한 종은 이 세상에 대해, 즉, 자신 전체, 자아 그리고 야망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 “죽은” 크리스천은 성령께서 그의 영혼의 영적 재고를 인수하시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안의 부패와 불경건함을 꿰뚫어 봅니다. 그래서 자원하여 “주님, 저를 소멸해 주십시오. 전부 가져가십시오,”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어야만 그의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최근 나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구절로 인도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20-21).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나는 성령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이빗, 너는 아직 내 사랑의 충만과 기쁨 속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네 신학은 올바른 것이지만 너는 아직도 내 사랑가운데 머무르는 환희의 절정과 안식을 체험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너는 발목까지만 그 안에 담그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안에서 헤엄칠 만한 바다와 같은 내 사랑이 너를 위하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주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내가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확신 안에 머무르는데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거듭날 때 옵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분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3장16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진리를 파악할 때 그것은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당신은 갑자기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길을 잃고, 무너져 내리고, 이방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독생자를 나를 위해 희생하심으로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배운 크리스천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무언가 알고 있지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는 거의 구하지 않습니다. 사실인즉,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에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아내라고 하면 단지 몇 개만 지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냉랭해지고 게을러집니다. 사탄의 공격에 맞서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성령의 계시를 통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요17:24). 얼마나 놀라운 생각입니까!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 주목할 만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21,23). 또한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내 지체로 이끌어 들이는 사람들을 사랑하실 것을 나는 압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함축된 의미는 아버지께서 영원이전에 예수님을 사랑하셨을 때 우리도 또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속에서 인간이 아직 하나의 생각에 불과했을 때, 주님은 이미 우리의 신체조직을 세고 계셨고 우리의 구속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셨을까요? 그분이 존재하신 후부터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성품이십니다. 그분은 죄인인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이 태중에 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언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기를 멈추실까요? 자신의 독생자 사랑하기를 멈추실 때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실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오래전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롱아일랜드에 소년의 집을 시작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이 일 배후에 주님이 계심을 느꼈습니다. 헌데 그 집을 운영하는데 있어 주정부가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규정을 적용했기 때문에 단지 18개월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집을 운영하던 짦은 기간 동안 우리는 네 명의 소년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을 닫고 난 후 그들과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나는 항상 이 시도가 이제까지 가장 실패작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30여 년간 나는 하나님이 왜 이 계획을 진행 시키셨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최근, 클리포드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데이빗 형제여, 나는 롱아일랜드에 있던 집으로 보내졌던 네 명의 소년 중 한사람입니다. 당신의 집 관리인들은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장막 부흥회를 열고 있는 교회로 갔습니다. 나는 너무도 마음에 원한이 쌓였고 절망스러웠습니다. 그곳에서, 장막아래서, 성령이 내 마음을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설교자가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모든 세월동안의 고통, 혼란, 절망이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35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나를 전도자로 부르시고 전임 사역자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내내 감사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돌보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당신께 전하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사람의 편지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헛된 것이 없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 소년의 집은 실패작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길 잃고 혼란에 빠진 유태인 소년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12월 19일 금요일

사탄은 미묘한 계략을 사용합니다

“앗수르왕이....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거느리고....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 왕을 치게 하매”(왕하 18:17). 앗수르사람들은 오늘날의 “번영 지침서”를 상징합니다. 마귀는 당신의 성벽을 둘러싸고 자신의 군대를 행진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능력 있고, 아름답고,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그들을 볼 때 당신은 마치 수감된 자처럼 벽에 가로막힌 듯 느낄 것입니다!

이 죄인의 첫 번째 계교는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신자의 결단에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술취한 외교사절”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랍사게는 왕의 대사였습니다. 그는 거룩한 자를 조소하며 조롱했습니다(왕하 18:19-20 참조). 조소의 내용은 “하나님은 이 환난에서 너를 구해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침몰하고 있다! 너는 정말 난관에 봉착했고 네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한 번 더 비틀어 놓습니다. 이 모든 문제들 배후에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당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사자는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왕하 18:25)고 주장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복수하신다, 당신에게 진노하셨다고 당신을 설득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교활한 거짓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고 환난과 애통에 처하도록 넘겨버렸다고 믿도록 만듭니다. 그는 당신의 모든 문제가 과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믿지 마십시오! 사탄은 당신을 파멸시키려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원자시오, 요새이십니다. 이사야는 그분이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사61:3)고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도여, 당신은 침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신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기 때문에 단지 대적의 거짓말의 집중 사격을 받으며 공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1-33).

에녹은 언젠가 예언했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14). 성경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 왕들과 제사장들이며 사탄의 군대와 싸우기 위해 나아가는 이 수만의 무리를 대표한단고 말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극심하게 미워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하여 전쟁을 벌입니다(계12:17 참조).

우리는 다가오는 것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불법의 홍수가 하나님의 백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적 전투를 치르며 우리 생애를 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기로 결단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의 모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할 것을 보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싸우는 하늘의 전 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은 성령의 투쟁력을 주셔서 우리 각 개인이 세상과 지옥의 무리를 향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 37-39)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갈망하는 자들의 전투 함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남녀 불문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제물이 되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지옥의 악한 계략의 목표물이 될 것입니다. 거룩한 믿음 안에서 행하고자 마음을 정한 사람들을 향해 대적하기 위해 지옥의 무리들이 풀어 놓아질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기만 프로그램에 당신이 실제로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괴롭히고 방해물을 설치할 것입니다. 당신은 전쟁을 그만두고, 포기하고, 중도 하차하여 둔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방황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마귀에 계략에 대항하여 믿음 가운데 일어나 싸움을 계속 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사탄은 진정으로 주님을 의뢰하는 사람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2008년 12월 17일 수요일

끝까지 해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14:28-30).

그리스도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중에서 다수가 끝까지 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돌이키는 고로 경주를 마치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붙들려는 의도로 충만한 채 시작하여 성숙한 제자로 성장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다가 그만 흘러 떠내려가 버리는 것이 신자의 가장 비극적인 상황 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먼저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초를 세우고는 준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경주를 마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쁜지요! 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순간순간마다 변화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격려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바로 이 메시지를 읽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잠시 쉬거나 뒷걸음질 치고 있는 중 인 것으로 압니다. 작은 걸음인 듯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분의 사랑으로부터의 급격한 하강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런 경우에 처해 있다면 성령이 되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회개와 자기 부인과 항복으로 돌아오라고. 바로 이 순간, 시간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를 붙들려고 한다면, 지금 하십시오. 끝까지 해내십시오!

2008년 12월 16일 화요일

사랑과 미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6).

희랍어로 미워한다는 말은 “비교해서 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우리의 세상에 속한 모든 애정은 근접할 수 도 없을 만큼 그분에 대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열렬하며 절대적인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달콤한 임재로 나아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압니까? 단지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완벽하게 사랑하시는 것에 감사하여 그분께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가운데에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주십시오, 만나주십시오, 축복해 주십시오, 우리를 사용해 주십시오, 보호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이 성경적일지 모르지만 초점은 우리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조차도 이기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알 수 있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우리의 봉사를 복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은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다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이 되어 가는지에 대해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사역의 문이 닫혀서 상심한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은 “선반에 얹어 두고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린 듯 느낄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한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것이 주님께 더욱 유용하다고 생각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은밀한 골방에서의 기도로 그분을 사랑하는 사역을 할 때 보다 더욱 주님께 유용할 수는 없다고 나는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알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끝없이 탐색할 때, 그때가 바로 우리가 가장 유용할 때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하기보다 사랑의 교제 가운데 그분과 함께 홀로 있는 것이 더욱 더 하나님을 송축하고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도록 열어 주시는 사역은 모국에서든지, 외국에서든지 우리의 그분과의 교제로부터 인위적 노력없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전 세계를 얻어드리는 것 보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통째로 얻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이것은 영혼을 얻기 위한 열정적인 수고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령이 복 주시는 복음전도는 교제 가운데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자주 기도가운데 함께하는 증인에게 지혜와 성령의 때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2008년 12월 15일 월요일

그분의 식탁으로 나아옴

오래된 복음성가 하나가 나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식탁을 베푸셨네/그곳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이 먹는다네/그분은 택하신 백성을 초청 하신다네/와서 먹으라고.”

얼마나 흥겨운 전망입니까! 주님은 천상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를 위하여 식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눅22:29-30). 주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우리도 또한 이 식탁에 앉혀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고전 5:8)라고 가르칠 때 그는 우리가 천상에서 주님과 함께 그분의 왕의 식탁에 자리를 배정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명확히 이해하게 만들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항상 오십시오. 당신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말을 하게하지 마십시오.”

슬픈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명절을 지킨다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들려져 천상의 장소에서 그분과 함께 앉음으로 우리에게 수여된 위엄과 영예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져서 그분의 식탁에 앉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제보다는 봉사를 통해 영적 기쁨을 끌어내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덜 알게 되는 주님을 위해 더욱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분의 일에 바쳐 누더기가 되도록 분주한 반면 명절은 거의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분의 종, 사역자, 목자들로부터 다른 모든 것보다 구하는 것은 자신의 식탁에서 나누는 교제입니다. 이 식탁은 영적으로 친밀해지는 장소며 매일 베풀어집니다. 명절을 지킨다는 것은 계속해서 양식, 힘, 지혜와 친교를 위해 그분께 나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사건 이후 모든 영적 거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식탁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광대함 가운데에서 자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직도 자신들이 그분과 그분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고 애통하며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은 너무 왜소하고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악한 세대의 복잡하고 날로 늘어가는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대함”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단지 이세상의 문제를 풀어주시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의 광대함 속으로 삼켜버리십니다! 그리스도의 광대함에 대한 계시가 늘어나는 사람은 아무런 문제도, 마귀도, 지구상의 어떤 권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가 크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분이 얼마나 광대하신지, 경계가 없으시고, 측량할 수 없으며, 무한 하시고 거대하신지에 대한 계시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문제들에 의해 결코 다시는 압도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처럼 날로 증가하는 계시를 갖기로 결단했습니다. 사실인즉,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소유했던 것 모두가 계시에 의해 왔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그는 배웠고 성령에 의해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개종한 후 삼년 후에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만나 교제하였고 선교 여행을 계속하기 전 단지 15일 동안만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말했습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엡3:3). 성령은 하나님의 깊고 은밀한 비밀들을 아시므로 바울은 지속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엡3:8)을 이해하고 전파하는 은혜의 선물을 얻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발견하기 위해 상반되는 목소리들을 걸러내는 데 만족하지 않는 신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한 계시를 갈망하기 원하십니다. 깊고 인격적인 친밀함, 그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2008년 12월 12일 금요일

믿음의 전쟁터로부터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곳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무엇인가를 나누어 줄 사람을 찾는 낙심한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명백히 말합니다. “내가....예루살렘에 올라 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갈2:1-2). 바울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신비를 나누고자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이 경건한 사람은 자신만의 충만하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계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파하는 교리는 서재에 처박혀 책과 주석을 공부하여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차세대들이 내 연구 업적을 읽고 배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신학적 진리를 몽상해낸 고립된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어디서 어떻게 그의 서신들을 썼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어둡고 습한 감옥 안에서 썼습니다. 채찍질 당한 후 등 뒤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썼습니다. 다시 한 번 파선한 배에서 살아남아 바다에서 기어 나온 후에 썼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모든 진리와 계시가 믿음의 전쟁터로부터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련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위하여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조난당해 본적이 있는 모든 선원에게, 아무런 소망 없이 갇혀 있었던 모든 수감자들에게, 죽음을 직면해 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권위를 갖고 전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검증 받은 고참병으로 만들고 계심으로 나는 들을 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탄의 권세에 넘겨준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당신 안에서 보이지 않는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시련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구히 당신 안에 형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결코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얻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현재 있는 곳, 유쾌하든지 불쾌하든지 상관없이 당신의 현재 상황가운데에서 와야만 될 것입니다.

나는 바울의 영성에 있어 가장 큰 비결의 하나는 그가 어떤 조건에 있든지 불평하지 않고 수용하였다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자족하다의 헬라어 의미는 “피하다”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불쾌한 나의 상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나는 그것들을 껴안습니다. 주님과 함께 했던 지난날을 통해 나는 그분이 내안에서 무언가 영원한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이 감당할

2008년 12월 11일 목요일

현 세대는 견딤에 대해 모릅니다

견디다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실행하다, 포기하지 않고 고통을 당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간략히 말해서 지탱하다 또는 인내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요즘 세대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중도 포기자들입니다. 그들의 배우자, 가족,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을 포기 합니다.

이 사안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그리고 덧붙여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일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0-25).

사도 바울은 명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마지막으로 주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이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결혼 생활이 혼란에 빠졌습니까? 직장이 위기에 처했습니까? 친척이나 집주인, 당신을 배신한 친구와 대립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소망을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의 고난이 결코 완화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계시, 성숙, 깊은 믿음, 흔들리지 않는 평강도 결코 감소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면, 진정 나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한다면, 그렇다면 나의 주변 상황과 싸울 수 없다. 나는 견뎌내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내가 고난 가운데서 매일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는 것을 내게 줄 수 없다. 그분은 나를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다.”

바울은 생애는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호흡 했습니다.” 진실로 영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성령께서 그 종의 내적 존재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천국 미풍을 쏟아내십니다. 이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생의 가장 힘든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미소 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8년 12월 10일 수요일

그리스도의 개인적 계시

당신이 설교자이거나, 선교사, 교사라면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것은 사람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것입니까? 어떤 위대한 교사의 계시를 재탕한 것입니까? 또는 당신 자신만의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계시를 체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까? 하늘이 당신에게 열렸습니까?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아주 작지만 광대한 원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 전 존재가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하여 요약되었습니다. 오래전 나는 성령이 그리스도 한분 만 전파하는 사역으로 나를 이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오직 그분만 전파하기를 갈망했던지요! 그러나 내 마음은 집중하지 못했었고 그 원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결과 나의 설교를 지탱해 나갈 계시가 흘러들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기위해서는 성령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계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부한 메시지를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고 아버지의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탐색한다면, 그리고 우리 안에서 샘솟아 흐르는 물이시라면, 우리는 그 흐르는 물로 채워질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그리스도의 계시로 충만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계시는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에게 나타내 주실 것을 믿고 신뢰하며 기꺼이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주님의 종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다만 그에게 계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계시되었다고 말했습니다(갈1:16 참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도자의 삶과 사역에서 이미 능력을 발휘한 말씀이 아닌 것을 전파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어떤 얄팍한 사람들에게는 괜찮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 증가하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하지만 그 계시가 우리 안에 깊은 변화를 가져올 때에만 전파해야 합니다.

바울은 또한 개인적인 염려를 피력합니다.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확실히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의 안전을 결코 의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버림을 당하다”는 단어의 희랍어

2008년 12월 9일 화요일

완전한 마음은 의뢰합니다

시편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22:4-5).

의뢰하다라는 말의 히브리 어근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다”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마치 서까래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뛰어 내려라!”하는 말을 듣고 순종하여 아버지 품안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그런 자리에 있습니까? 모서리에 밀려 휘청거리며 예수님의 품안으로 자신을 던지는 선택 외에는 없습니까? 당신은 그저 상황에 굴한 것일 뿐 그것은 의뢰가 아닙니다. 그것은 체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뢰는 수동적인 포기와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더 갈망할 때 그분을 의뢰하는 것의 기초가 튼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느 시점에 진정으로 그분을 의뢰할 수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진정으로 대국을 통제할 수 없기에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께 더 가까워지고 그분을 더욱 잘 알게 되면서 이것이 바뀌어집니다. 이 말은 우리가 속수무책일 때 다만 그분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과 아주 가깝게 동행하기 시작하므로 시련이 닥쳐오고 있다는 그분의 경고를 듣습니다.

의뢰하는 마음은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모든 발걸음은 주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다. 그분은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다. 내게 고통과 유혹과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결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위한 영원한 계획과 목적이 있으시다. 내 머리의 모든 머리카락을 세어놓으시고 나의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에 내 모든 신체 부분을 조성하셨다. 내가 그분의 눈동자이기 때문에 내가 앉고 서고 눕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단지 나만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주관하신다.”

완전한 마음은 또한 깨어진 마음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깨어짐은 슬픔과 통곡 그 이상, 부수어진 영 그 이상, 겸손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깨어짐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맡긴 가장 큰 능력 - 죽은 자를 살리고 병과 질병을 치유하는 것 보다 더욱 큰 능력을 마음 가운데 방출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졌을 때, 우리에게는 폐허를 회복시키고 하나님께 특별한 종류의 영광과 명예를 가져오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아시다시피, 깨어짐은 부서지고 무너져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5:24). 동행하였다는 말의 히브리 원어 의미는 에녹이 하나님과 팔짱을 끼고 계속하여 그분과 대화하며 더욱 가까워지며, 오르내리고, 들고 나며, 오고 갔다는 것을 뜻합니다. 에녹은 365년 또는 일 년의 날 수 만큼의 해를 살았습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신자를 봅니다. 그는 성인으로 보낸 매해의 365일 동안 주님과 팔짱을 끼고 동행하였습니다. 주님이 바로 그의 생명이었기에 그는 인생의 종점에서 죽음을 보지 않았습니다(히 11:5).

에녹처럼 인생에서 옮겨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향권에서 옮겨 집니다. 그의 흑암의 왕국에서 건져져 그리스도의 빛의 왕국에 놓여집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에녹은 사악한 사회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동행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광야 동굴에 숨어살던 은둔자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문제꺼리와 부담을 지고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식이 있고 의무와 책임들이 있었던 인생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거룩하기 위해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는 이 구절이 에녹의 옮겨짐, 즉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더 한층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쓰인 것처럼 있지 아니하였더라 (he was not) 라는 구절은 또한 “그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he was not of this world)”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영과 감각들에 있어서 에녹은 이 사악한 세상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는 땅의 것에서 마음이 점점 멀어졌습니다. 바울처럼 그는 이 땅의 삶에 대해 매일 죽었고 그의 영 안에서 천상의 영역으로 올려 졌습니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에녹은 자신의 모든 책임을 이행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일하고, 사역하고 거주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당면한 문제들 그 어느 것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11:5은 명백히 말합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어떤 면이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의 안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형의 믿음을 생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개의 구절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5-6). 뒷 구절은 우리가 자주 듣는 구절입니다만 그 앞의 구절과 연결해서 듣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 또

2008년 12월 5일 금요일

전리품을 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그 일례

다윗과 그의 군대가 집을 떠나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그의 마을 시글락을 침략했습니다. 이 약탈을 목적으로 침략한 자들은 마을 전체를 불사르고 여자와 아이들 모두를 잡아갔습니다. 다윗이 돌아왔을 때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30:6).

대단한 영적 전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을 대적하는 공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항하는 총력전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마귀는 하나님의 씨를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영적 전쟁의 초점입니다. 원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씨를 파멸시키려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실은 변치 않았습니다. 사탄은 아직도 하나님의 씨를 파멸하려고 다니며 그리스도의 씨인 우리를 공격함으로써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하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다윗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중심이 하나님께 올바른 것을 알았고 주님 안에서 자신을 격려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즉시 이 믿음의 사람은 아말렉 사람들을 뒤쫓아 갔습니다. 그는 금세 그들을 따라잡아 모든 사람과 잃어버렸던 소유물들을 되찾았습니다(삼상 30:19-20 참조). 다윗은 시글락에서 탈취 당했던 물건들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이 약탈한 다른 모든 것도 되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전리품을 가지고 다윗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유지하는 데 이것들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다의 장로들과 그와 그의 부하들이 숨어있던 마을들에게 이 탈취물을 선물로 보냈습니다(삼상 30:26, 31 참조). 이것이 우리의 영적 전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의 또 다른 일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만 전리품을 취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획득한 자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기 위함입니다.

기근 때에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아람 군대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굶어죽기를 기다리며 성 주위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성안의 상황은 최악이어서 나귀머리 하나가 은 80 세겔에 팔렸습니다. 상황이 너무도 다급했던지라 여인들이 그들의 자녀를 삶아 먹기위해 내어 놓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완전히 광란의 지경이었습니다(왕하 6 참조).

성 밖에 살던 나병환자 네 사람이 마침내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왕하 7:3-4). 그리하여 그들은 아람 진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해보니 모든 것이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장막을 수색해 보았으나 모두가 도망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7:6-7).

나병환자들은 이것을 깨닫자 진을 돌아다니며 먹고 마신 다음 성으로 돌아가 외쳤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 믿기 어렵겠지만 아람군대가 진을 버리고 도망쳤다”(7:10 참조). 주님은 전체 상황을 180도 전환 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전리품을 취하셔서 지상에서 그분의 뜻을 유지하시며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고 기운을 차리게 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당신이 현재 치르고 있는 전투의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합니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는 원수의 모든 세력을 이기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렇다, 너는 승리하며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를 승리자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내 왕국을 위하여 네 안에 더욱 위대한 목적을 고안하고 있다. 너는 네가 처리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이 전투에서 나올 것이다.”

2008년 12월 4일 목요일

영적 전투의 전리품들

“그들이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 중에서 구별하여 드려 여호와의 성전을 개수한 일 과”(대상26:27). 이 구절은 심오하고 인생을 변화 시키는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전쟁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략하여 얻은 물건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개수하는데 바쳐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구절 배후에 있는 강력한 진리를 파악한다면 왜 주님이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격심한 영적 전쟁을 허락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한 번 구원받으면 그들의 시련은 끝나고 인생은 순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투를 허용하실 뿐 아니라 우리 삶속에 이 전투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은 무엇일까요? 전리품들은 전쟁에서 승자가 노략하고 약탈한 물건들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4장에서 여러왕들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했을 때 전리품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침략자들은 주민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했습니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창14:11-12).

아브람이 그의 조카 롯이 사로잡힌 것을 듣고 하인 318명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적을 추격하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침략자들을 따라잡아 “그들을 쳐부수고....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록솨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창14:15-16).

승전한 아브람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는 기쁨에 찬 사람들과 온갖 물건들이 산더미 처럼 쌓인 수레들의 긴 행렬에 앞장 서 있습니다. 그 길에서 그는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람은 마음이 감동하여 자신이 노략한 모든 물건의 십일조를 이 왕에게 주었습니다(14:20 참조).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7:4).

하나님이 우리가 붙들기 원하시는 원칙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승자로 만드는 것, 그 이상의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전쟁에서 전리품, 물건들, 영적 부요를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수레에 가득한 자원들을 가지고 전쟁에서 벗어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저자 임의 강조)고 언급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들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의 생애 말년에 제정한 법령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좌를 계승하도록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신성한 질서를 세우고자 나라의 지도자들을 소집하였습니다. 이 거룩한 역사를 위해 어떠한 자원을 사용했습니까? “그들이 싸울 때에 노략하여 얻은 물건 중에서 구별하여 드려 여호와의 성전을 개수하”(대상 26:27)였습니다.
이 장면을 그려보겠습니다. 승전할 때 마다 다윗은 전리품을 거둬들여 금, 은, 놋, 목재, 셀 수도 없이 많은 돈을 풍성하게 쌓아 두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성전을 세우기 위해 이 전리품들을 자원으로 사용하려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성전을 개수한다고 말할 때,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집을 수리하고 건축된 부분을 보강하고 통합하다”입니다. 이러한 자원들은 성전 본래의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백성, 즉 당신, 나, 전 세계에 있는 그분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그리고 옛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주님은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통하여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시련이 우리의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이유입니다. 모든 전투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부요, 자원들, 부를 따로 떼어 두십니다. 우리의 전쟁으로부터 물건들의 보고 전체를 쌓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전리품들은 그분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바쳐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오랫 동안 과거 전쟁들에서 취한 전리품들로 성전을 잘 유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백성이 모든 시련으로부터 승리하였을 뿐 아니라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걸쳐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한 공급”의 원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3일 수요일

영적인 것은 복제 불능입니다

이곳 뉴욕시의 거리에서는 로렉스 시계를 15불에 살 수 있습니다. 뉴욕 사람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시계들은 진짜 로렉스가 아닙니다. 다만 진짜를 모방한 싸구려 모조품입니다.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의 복제품이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복제 불가능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영성입니다. 진실로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복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그분이 손수 하신일은 알아보시고 그분의 신성한 작업을 인간이 모방한 것을 용납지 않을 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진실로 영적인 것을 인간이 복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시면서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로서는 그 일을 재생해낼 방도가 없습니다.

현대 종교의 큰 오류가 이것입니다. 단지 성경지식과 성경의 원리들을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그들이 영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도, 어떤 기구도 사람 안에 영성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만이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영적인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4:18).

이 구절의 문맥상 바울은 고통과 시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 외에는 아무도 우리가 당면한 모든 일을 알지 못한다. 혹독한 시련 한 가운데, 바로 여기가 진정한 영성이 발현되는 곳이다.”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복하는 사람들, 즉 주님이 자신들안에 무엇인가 만들어내고 계신다고 확신하며 시련을 직면하는 사람들은 혹독한 시련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벗어나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모든 것이 순조로웠을 때 보다 그들의 고난의 시기에 성령께서 더욱 많이 가르쳐주셨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한 세월동안, 순조로웠던 시기에 내 영성이 증가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도리어, 내가 성령이 허락하신 모든 역경, 고뇌, 시험을 견뎌낼 때 증가되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길을 가던 어떤 지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20:21-11 참조). 진정으로 바울의 전 생애에 걸쳐 그의 시련은 결코 완화된 적이 없었습니다. 계속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바울에 의하면 우리의 시련과 어려움은 우리 안에 영원한 가치를 생산해냅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마 전 생애에 걸쳐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영원에 비하면 그것은 다만 잠시일 뿐이다. 이제 우리가 시련을 견디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지속될 그분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생산해 내고 계신다.”

2008년 12월 2일 화요일

그리스도 얻기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바울은 그의 주님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를 “얻을” 필요를 느꼈을까요? 그리스도는 이미 자신을 사도에게 만 아니라 그의 삶속에서 확연히 계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을 얻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바울은 전 존재, 즉 그의 사역, 인생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주인 주님을 기쁘게 하는데 집중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유익”한 것일지라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다는 생각이 성경적인 것인가 물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가? 진정으로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전 인류에게 미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이 거의 체험하지 못하는 다른 유형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남편과 아내사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아가서에 나타나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유형으로 묘사되었고 주님이 그분의 신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ravish, KJV)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아4:9-10).

그리스도의 신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열망하는 거룩한 사람들로서 오로지 순종하여 살며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었기에 그리스도가 마음을 빼앗겨버릴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ravish 란 말은 “마음이 녹아버리다” 또는 ”마음을 빼앗다“라는 뜻입니다. 킹 제임스 번역본 성경은 단지 “한번 쳐다보는 것(one eye)”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빼앗겨버렸다고 말합니다. 나는 “한번 쳐다보는 것”이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된 일편단심이라고 믿습니다.

2008년 12월 1일 월요일

금보다 귀합니다

에스더 왕후의 이야기는 격렬한 전투에 관한 것으로 성경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적 전투 중 하나입니다. 마귀가 이번에는 사악한 하만을 통하여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파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자는 바사 왕을 설득하여 인도로부터 에디오피아(구스)에 이르기까지 왕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칙령을 선포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만의 눈에 뜨인 첫 유다인은 에스더의 삼촌으로, 의로운 모르드개였습니다. 하만은 특별히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교수대를 세웠으나 에스더가 개입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도를 촉구하고 하만의 명령을 취소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계획을 폭로하시고 하만은 자신이 세운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왕은 사형 명령을 반전 시켰을 뿐 아니라 요즘 시가로 수백만 불에 달하는 하만의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전리품은 단지 하만의 집뿐이 아닙니다. 성경은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존귀함이 있”(에8:16)었다고 말해줍니다. 이것들이 대적과의 전투에서 획득하는 진정한 전리품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시련은 영적인 부요를 가져올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강하고, 순결하게 계속 유지되도록 지켜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때 그분은 시련이 우리 안에서 금보다 귀한 믿음을 생산해 내도록 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호가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5).

예수님은 갈보리에서 마귀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탈취하시고 노략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승리의 부활을 하셨을 때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신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 값으로 사신 행렬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망에 대한 승리를 초월하여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삶에 관련된 놀라운 전리품들, 즉 은혜, 자비, 평강, 용서, 힘, 믿음, 승리하는 삶을 주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를 위해 획득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성령은 여기서 우리에게 경이로운 진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보고를 활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유지에 필요한 자원들은 우리 전투의 전리품으로부터 직접 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성전 유지가 가능하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가계로 입양하셨습니다. 그분은 성전의 주춧돌로 서 계시고 성전 전체를 성결케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우리는 이제 완전히 세워지고 완성된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반 쯤 완성된 전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성전은 완전합니다.
이 성전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항상 잘 정비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는 자원이 어디에 있는지 압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영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모든 전리품의 출납담당자입니다.
이 자원들은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보고 하나님과 협력할 때 방출됩니다.

이 협력은 우리가 시련 중에 있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의 자원은 전투에 몰두하는 중에 얻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입니다. 대적과의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들, 믿음, 성품인 것입니다. 전투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투로부터 선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