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0일 금요일

하늘 맛보기

시식한다는 것은 미리 맛보거나 실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Earnest(KJV. 나머지에 대한 보증으로 미리 주거나 행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4). 이것은 우리가 전부를 소유하기 전에 그 맛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기업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성령은 영원한 사랑과 그분과의 교통을 누리는 신부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미리 맛보게 하기위해 우리를 그분의 임재로 이끌어 갑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엡1:13)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합니다. 이는 특별히 성령의 역사로 표를 받은 백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들 안에 특이한 표식 즉, 영광스런 내부적 역사를 통해 그들을 영원히 변화시킨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 두지 않고 하늘의 것에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사건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요지부동합니다. 더 이상 미적지근하거나 냉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밤낮없이 그들의 마음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성령은 이 신자들에게 무슨 일을 행하신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을 주님의 소유로 영원히 표시하고 인치셨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이것입니다. 성령은 그들에게 그분의 임재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하늘을 젖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의 더없이 위대하심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현현을 체험했습니다. 우리의 식욕을 돋우어 하늘로 가도록 하기위해 “작은 하늘”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계시의 날에 당신은 성령이 어떠한 신부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리라고 생각합니까?
마음이 나뉘어진 사람일까요? 사랑이 미지근하거나 차게 식어버린 사람일까요? 예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원치 않는 사람일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은 당신의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깨어있는 매 순간마다 그분이 임재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은 “그런 일은 내가 죽은 후에 일어날 것이다. 내가 천국에 가면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주님의 특별한 신부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망은 아무도 성화시키지 않습니다. 이 성령은 오늘 이곳에 계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죽음 이전에 당신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정열적인 사랑이 솟아나도록.

로마서 8:26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행하시는 가장 강력한 역사를 묘사해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탄식하다라는 말의 희랍어 의미는 “갈망하다”, 즉 그리스도를 더욱 더 열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하기에 그분의 존전에 앉아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깊은 탄식만 할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만이 이 세상에 있는 단 하나의 행복입니다. 나는 당신의 선하심을 맛보았고 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부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의 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채워질 수 없는 갈급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그도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자정 일분 전

사무엘상 13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모든 믿는 자가 결국에는 직면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인내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사울에게 이 중요한 순간은 이스라엘위에 불길한 전운이 감돌 던 때에 다가왔습니다. 블레셋사람들이 거대한 마병과 철병거, 그리고 최신 무기를 휘두르는 대군을 집결시켰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전 군을 통틀어 단지 두 개의 칼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사울왕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요나단의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무로 만든 창이나 조야한 농기구를 임시변통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일주일 전 사무엘은 사울에게 전쟁에 임하기 전에 길갈에서 그를 기다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선지자는 주님께 합당한 희생을 드리기 위해 일주일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칠 일째가 되고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사울의 군대는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어떤 방식을 취했을까요? 사울이 굳게 서서 “사무엘이 도착하는데 팔 일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위에 설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자신의 주변상황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편리한 대로 조작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부재중임에도 그곳에 있었던 제사장에게 희생을 드리라고 명령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을 거스르는 비통한 죄를 지었습니다(삼상 13:11-12 참조).

아닙니다 - 하나님은 절대로 늦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무엘이 길갈로 향하는 내내 모든 발걸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 선지자를 하늘의 운행 유도 시스템에 두시고 그의 도착 시간을 마지막 초까지 정확히 지정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칠 일째 되는 날, 비록 자정 일분 전일지라도, 그날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대에 걸쳐서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백성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 하지말라”(삼상12:15 의역)는 명령을 순종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전적인 확신 속에 행할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듯이 보여도 우리는 두려움에 싸여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분의 말씀이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인내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사실인즉, 하나님은 거대한 블레셋 군대가 몰려들 때 사울 바로 옆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울이 처한 위기를 아셨고 모든 세부 사항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위기에 대해 자세히 주목하고 계십니다. 당신에게 몰려오는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상황이 매일 악화되는 것을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기도하며 평온한 믿음으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결코 진정한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당신의 모든 두려운 생각들을 아십니다. “나는 이 빚을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다....내 결혼 생활에 아무 소망이 없다....이 직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에게 주시는 그분의 명령은 여전히 진실 됩니다. “두려워하거나 내 앞서 행하지 말라. 오직 기도만 하고 나를 의지하라. 나는 나를 신뢰하는 모든 자를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에게 하신 말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오 너희의 방패시로다”(시115:11).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불신은 치명적이고 그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시련을 통과하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대신 우리가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비참한 결과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2010년 7월 28일 수요일

강력한 영적 피마자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쓰고 맛없는 약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삼켜야만 했던 피마자유처럼 치료하는 약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거스르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스며든 육의 정신을 역으로 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을 오직 다른 유대인들만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악수를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옷자락이 외부인의 옷을 스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여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25:21-22)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공무원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 낙태주의자들,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모든 사람의 죄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으로서의 그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돌아가신-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느 때라도 내가 어떤 사람 배후의 원리를 미워하지 않고 그 사람을 미워하다면,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곳 뉴욕시에서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25만 명의 동성애자들이 다수가 반쯤 벗은 채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동성애자”라고 쓴 팻말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그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랑하십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크리스천에게 달려드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들 위에다 소돔에 내렸던 것과 같은 불을 명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고 나서 내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불을 명하여 태워버리기 원했던 제자들과 같구나.”

동성애는 죄입니다. 간음도 죄입니다. 원한과 용서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방약무인하고 호전적인 죄인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당신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십시오!

2010년 7월 27일 화요일

다니엘-다른 유형의 사람!

애통에 대해 말하는 다니엘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다니엘 9:3-4). 한편, 다니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시대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다니엘 9:2).

다니엘은 어떻게 이와 같은 애통, 지식과 분별의 길에 이르렀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시작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말씀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말씀을 비장하고 있었기에 빈번이, 상세하게 인용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다니엘 9:13).

10장에서 이 경건한 선지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를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10:5-6).

나는 당신이 오늘 마음을 정하고 모든 근면과 결단으로 하나님을 구하기를 촉구합니다. 그리고나서 날로 늘어나는 사랑과 갈망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으로 가십시오. 애통에 대해 그분의 짐을 받기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성령이 당신에게 하늘의 복을 열어주시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내버리십시오. “다른 유형의 사람”이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가져옵니다. 다니엘이 증언했습니다.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다니엘 10:10). 여기서 어루만지다라는 말은 “강렬하게 휘어잡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분의 손을 내게 얹었을 때 나는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그분의 어루만지심은 나의 전부를 던져 그분을 추구해야겠다는 긴박한 마음을 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인생을 어루만지실 때 마다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무릎을 꿇게 되고 주님을 추구하는데 사로잡혀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는 종종 왜 하나님이 이같은 긴박함으로 특정한 사람을 어루만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어떤 종들을 그분을 굶주려 찾는 자들이 되고 반면에 다른 신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갈까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받은 종들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왜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안수하시고 그렇게 그를 어루만지셨을까요? 왜 다른 사람들은 듣거나 보지 못했던 것을 이 한 사람은 보고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선언합니다. “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다니엘 10:7).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대언할 음성이 필요하셨습니다. 자신의 부름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기도하는 종을 원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씩 경건하게 기도해왔습니다. 이제 그가 강을 따라 걸을 때,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에게 계시하셨습니다(다니엘 10:7-9 참조).

하나님은 다니엘로 그분의 신탁을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1. 다니엘은 결코 기도를 중지하지 않았습니다(다니엘 10:2-3 참조).
2. 다니엘은 사회와 교회의 영적 쇠퇴를 슬퍼했습니다(다니엘 9장 참조).
3. 다니엘은 죄를 비호하거나 은닉하기를 거부했습니다(다니엘 9:4-5).

2010년 7월 26일 월요일

당신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구원받은 지 몇 년 된 사람이 있고, 일 년 된 사람도 있고, 몇 개월 또는 몇 주 된 사람도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아 참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휘하의 훌륭한 군병이 되려면 단지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이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 시대에 어떤 믿는 이들은 성령이 계신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사도행전 19:2). 이 사람들은 구원받았지만 성령 충만이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우리가 성령의 권능과 사역을 통하여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례를 주시고, 충만케 하시고 , 소유하신다고 성경이 말씀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기 전까지는 세상으로 파송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분명 순전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 이상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원하여 죽고자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위해서 세상으로 파송하는 데 그분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중의 어떤 것도 충분치 못했습니다. 분명히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진실로 성령을 원하십니까? 당신에게 성령이 임하여 불로 세례를 주시기 원합니까? 이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성령의 권능과 인도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분이 지금도 세례를 베푸시고, 지금도 그들의 몸을 소유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강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저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사도행전 2:38-39).

매일 매 시각, 전 세계의 많은 무리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이 약속을 읽었거나 설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청구하며 부르짖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는 특별히 말세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행 2:17-18). 구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하나님은 당신이 성령 안에서 살고 행하기 원하십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찾으러 뛰어다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병든 자에게 안수하고 귀신을 쫓아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과 권능으로 충만한 증인들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2010년 7월 23일 금요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받음

그리스도가 최고의 통수권자로서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들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분에 의해 통치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사전에 의하면 통치하다는 “인도하다, 지시하다, 권위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행위를 통제하다”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모든 사고와 말과 행위를 포함한 모든 우리의 행동과 행실을 예수님이 통제하실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의 나라들을 통치하십니다. 성경은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시66:7)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103:19).

속지 마십시오. 우리나라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또는 다른 어느 인간적 권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월스트리트나 재벌들에 의해 통제받지 않습니다. 지상의 권력이든 초자연적인 권력이든, 어느 권력도 미국을 위시한 다른 나라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다스리십니다.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로 좌정하시고 그분의 하늘 보좌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미국 전역에서 우리는 엄청난 도덕적 타락, 사교들의 출현, 만연한 성적 일탈, 격노하도록 방약무인한 무신론을 목격합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지옥의 무리가 우리나라를 서서히 잠식하며 사탄의 암흑 왕국을 세워나간다고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확신시켜 줍니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이사야14:5, 12, 15-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탄에 대해 추호도 불안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보듯이 악이 우리나라를 잠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초조해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은 영구히 사라져 영원토록 고통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왕국 즉, 그분이 자신의 백성의 심령가운데 구축하신 왕국에서 최상의, 최강의 통치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 우리 마음의 영역에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치유하시고 우리의 행동과 행실을 통치하시며 최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이사야 17:21). 이 구절은 예수님의 통치가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왕의 통치에 항상 더욱 더 순종하여야만 합니다.

당신은 매일 매일 당신에 대한 예수님의 통치가 증가되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더욱 더 그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당신은 의아해 할지 모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늘에 계셔서 아버지 우편에서 전적인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신다면 이 지상에 있는 그분의 왕국은 어떻게 통치 하실까? 히브리서에 그 답이 있습니다. 저자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히 1:1-2 참조).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천상의 말씀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기록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통치자의 규이며 이를 통하여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를 받은 사람의 증언을 듣기 원한다면 시편 119:11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05, 123, 133, 162절도 참조하십시오).

2010년 7월 22일 목요일

은혜 안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

에베소서 4:3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위해 우리 삶에서 제거해야할 요소들의 목록을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바울의 목록에 있는 요소들을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도는 우리가 은혜안에서 성장하려면 이러한 요소들을 절대적으로 직면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심령의 문제점을 무시해버린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의 성장은 지체되고 당신은 영적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바울의 목록 중 첫 세가지, 악독, 노함과 분냄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것들 입니다. 악독(bitterness, KJV)은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기 거부하거나 지난날의 원한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함은 복수하려는 의도를 품고 원한의 견고한 진을 쌓는 것입니다. 분냄은 격노를 말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분출되기도 하고 시간을 두고 서서히 타오르기도 합니다. 비방하는 것은 끌어 내리는 말로서 사람을 세워주거나 세워주는 말을 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비방하는 것은 악의가 있고 상처를 입힙니다.

떠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돌연히 격발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소란, 목적 없이 요란한 소음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큰 문제를 야기 시킬 때 또는 돕거나 치유하려고 하기 보다는 소동을 일으킬 때 떠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록 중 마지막 요소는 악의입니다. 악의는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많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악의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하나님이 벌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으로 대부분의 경우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이 “너희는 이 모든 악들을 버리라”고 말할 때 일시에 고쳐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는 성장의 문제로서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러한 악을 제거하는데 실패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속히 회개하고 사람과 화해하고자 결단할 때 차츰 이러한 문제점들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2010년 7월 21일 수요일

은혜안의 폭발적 성장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사람들을 세워 주려고 할 때 은혜 안에서 우리의 성장은 폭발적일 수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29-30).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덕을 세운다’는 말의 어근은 ‘집을 짓는 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의 어근은 ‘세우다’라는 어근에서 온 것입니다. 요약하면 덕을 세우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하여 세 가지 요점을 말합니다.

1.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야합니다.
2.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3. 우리의 말로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영적 거인 몇 분의 전기를 읽으며 깊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 경건한 남녀들은 천상의 마음을 지녔고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이었고 자주 기도하고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헌신이나 기도의 강렬함뿐만 아니라 또한 이것들이 그들의 삶에서 맺은 경건한 열매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는 이들 영적 거인들 사이의 공통적인 맥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주관심사가 거룩한 대화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순결한 마음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기로 선택할 때 은혜 안에서 성장합니다. 이 은혜안의 성장은 나의 가정에서 내 배우자와 내 자녀들에게 날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가정은 모든 문제와 모든 오해가 “항상 옳고자 하는 나의 시도”를 자진하여 포기함으로써 극복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터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옳아야만 할 필요가 결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어느 때 보다 더 누리도록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논쟁을 이기려고 애쓰기보다 서로를 세워주려고 노력할 때 모든 논쟁, 모든 소위 “옳다”는 것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모두 성장합시다. 은혜 안에서.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다른 유형의 사람들

구약에서 경건한 사람들의 용맹에 대하여 읽을 때, 내 심령에 불길이 일어납니다. 이 종들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명분을 위하여 큰 책임 부담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을 당혹시킬 만한 대단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이러한 옛 성도들은 바윗돌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한발작도 나아가기를 거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집안의 타락한 상황을 보고 며칠 씩 울며 슬퍼하였습니다.그들은 먹거나, 마시거나 몸을 씻기를 거부하였습니다.머리채와 수염을 쥐어뜯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예루살렘 거리에 390일간 옆으로 누워 계속 하나님의 임박한심판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에스겔서 4장 참조).

나는 이 성도들이 어디서 이러한 일들을 할 영적 권위와 힘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들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종들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과 그들의 여정에 대해 전혀 연관 지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그들과 전혀 다른 유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나를 괴롭힙니다. 성경은 이러한 구약의 인물들의 용맹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타락한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본보기로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도들은 특별한 품종의 사람들 입니까? 이들은 예정된 운명을 지니고 우리 세대가 알지 못하는 초능력을 부여받은 슈퍼맨들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경건한 선조들이 당신이나 나와 똑같이 육체의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야고보 5:17 참조). 사실인즉, 그들의 본보기는 우리가 따라 갈 수 있도록 한 모형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 위에 안수하시도록 만드는 어떤 것을 성품 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바로 이와 같은 성품을 찾으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에스라는 자신의 온 나라를 일깨웠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에스라가 증언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에스라 7:2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뻗어 에스라를 감싸고 그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에스라에게 이 일을 행하셨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에는 수 백 명의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동일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이 한 사람에게 그분의 손을 얹고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기 위해 오만 명의 사람을 치리하도록 했을까요?

성경이 대답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 그것은 간단합니다. 에스라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준행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서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씀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모든 것을 준행할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라에게 손을 얹기 오래 전부터 이 사람은 말씀을 부지런히 구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자신을 점검하고, 씻어내고 몸과 영혼의 모든 부정함을 정결케 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에 굶주렸고 그 안에서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도록 그는 허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그분의 손을 에스라에게 얹으시고 기름 부으신 이유입니다.

2010년 7월 19일 월요일

하나님의 특전사

여러분은 미 육군 특전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고도로 훈련된 군대중의 군대로서 헌신된 장병들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입니다. 특전사는 모두 상관들의 눈에 띄어 발굴된 자원 전투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들이 나약하고 비겁하며 산악 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탈레반이 미군들을 수치스럽게 귀향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미국의 특전사를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 용맹한 부대는 단 2천명의 군대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습니다. 수일 내에 모든 적진의 위치를 추적해 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영적 영역에서도 유사한 일을 하신다고 믿습니다. 기도 중에 나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이 천상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원 정예 부대를 구성하기 위해 자신의 정규군 중에서 물색하며 군대중의 군대를 양성하고 계십니다. 이 특전사는 대적과 전투하기 위해 그분이 감동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투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사병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삼상10:26).

오늘날 하나님의 특전사는 나이가 어린 사람, 중년 또 노인들조차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은밀한 기도의 골방에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전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떤 영적 도형에서든지, 산에서든지 계곡에서든지 전투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중의 군대는 모든 국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는 암약 중 일지 모르나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으로 공훈을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편만하고 기근이 그칠 것입니다. 주님이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모든 것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다니엘11:32).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1).

2010년 7월 16일 금요일

우리는 가족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을 청구하는 것은 복잡하고 숨겨진 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내 서재에는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해 쓴 책들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깊이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심오하여 독자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고 말 뿐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리는 아주 간단하여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그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온전히 납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것이 사실일수 있을까 물으시겠지요?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과 말씀하시고 그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구했던 모든 간구를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그분은 항상 내말을 들으셨습니다,” 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는 그분의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를 마치 그분 자신의 아들처럼 친밀하게 받아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어”(요17:21-23).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가족입니다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들과 하나 된. 우리는 자녀로서 갖는 유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지닌 채 입양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능력과 자원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공식이 아닙니다. 단순히 입 밖에 냄으로 능력이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이 우리의 간구를 지시고 자신의 공로로 인해 아버지 앞에 들고 가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분은 변호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아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우리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완벽한 신실하심의 수혜자들입니다.

2010년 7월 15일 목요일

은혜안의 성장은 저해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4:14). 당신은 아마 “이 구절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내 기초는 성경적으로 확고하다. 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하는 모든 새로운 복음의 유행이나 경박한 수법에 현혹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리고 기초를 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뒤이은 바울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4:14) 아마도 당신은 거짓 교훈에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당신이 아직도 다른 많은 문제로 인해 휩쓸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당신은 당신을 반대하는 자들의 사악한 계획에 의해 요동합니까?”라고 묻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다시 한 번 자신을 점검하라고 우리를 청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라고 스스로 호칭하면서 우리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울이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라고 명령할 때 그는 우리에게 “험담과 비방, 사기와 조작, 교활함과 간사함, 기만과 음흉의 수법을 사용하는 너희의 원수들, 그들은 모두 반역하는 자녀들이다. 그들은 교활하고 타락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악하고 유치한 게임에 농락당하지 말라. 그들은 자신들의 심술에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반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에게 유치함으로 응대하지 말아야 것이다.”

그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성숙을 향하여 전진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4:15). 그는 말합니다. “너희가 받는 경멸, 입은 상처, 너희에 대한 험담, 너희를 겨냥한 사기와 기만을 너희는 어찌 할 수 없다. 하지만 너희는 이것들을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이것들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기회로 삼아라. 온유한 심령으로 부드럽게 응대하라. 악의로 너를 이용하는 자들을 용서하라.”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지옥을 뒤흔드는 기도

다니엘서가 기록 되었을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6장에 이를 때 다니엘은 오랜 사역에 몸 바치고 여든 살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항상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노후에 이르러서도 기도 생활을 느슨히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다니엘이 지치고 낙심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반대로, 다니엘은 정작 시작하는 중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여든 살이 되었을 때에도 그의 기도가 마귀를 격분케 하며 지옥을 뒤흔들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그 땅의 최고위직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왕자들과 120개 도의 고관들을 총괄하는 세 명의 총리 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리오는 다른 두 총리들 보다 다니엘을 총애하여 정부 정책을 기안하는 일 그리고 궁정 관리들과 지식인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겼습니다(다니엘6:3).

다니엘은 무척 바쁜 선지자였음이 분명합니다. 분주한 스케줄과 시간을 요하는 회의들로 이 사역자가 받을 중압감을 나는 그저 상상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다니엘에게서 기도하는 시간을 앗아가지 못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가 수행해야할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추적인 직무였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주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도자로서 자신의 의무와, 부담, 요구사항으로부터 몸을 빼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모든 활동을 멈추고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무릎 꿇고 있는 동안 그가 가진 모든 지혜, 방향, 말씀과 예언을 받았습니다(다니엘 6:10 참조).

당신은 아마 지옥을 뒤흔드는 기도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의 나라와 교회가 죄의 나락으로 깊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신실하고 부지런한 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무릎을 꿇고 부르짖습니다. “주님, 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사악한 시대에 당신의 보전하시는 능력의 본보기가 되기 원합니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기도할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합니까? “나는 믿음으로 그저 감당할 것이다,”라고 말하십니까? 당신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아신다. 나는 하루 종일 생각으로 그분께 기도드린다.”

나는 주님이 우리와 단둘이서 질 높은 시간, 서두르지 않는 시간을 보내시기 원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단순히 탄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의 몸짓이 될 것입니다.

2010년 7월 13일 화요일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 청구하기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16:23). 그리고나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요. 이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떠나갈 것과 잠시 동안 그들을 보지 못하실 것을 경고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그분은 그들이 모든 하늘의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들을 두드리고, 찾고, 구하라는 예수님의 개인 교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모든 은혜, 능력, 힘과 같은 아버지의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2-14).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의 정곡을 찌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16:24). 이 말씀을 읽을 때 주님이 나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데이빗, 너는 내가 너에게 허용해준 능력을 청구하지 않았다. 그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된다.”

모든 육의 죄를 다 합한 것보다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비탄에 잠기게 하는 것이 여기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분의 약속에 대해 나날이 불신이 깊어가는 것, 그분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에 대해 날로 의심이 늘어가는 것,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점점 더 청구하지 않는 것을 애통해 하십니다.

당신이 아무리 많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구했다 해도 그분의 창고에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영적 지혜의 자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풍성하게 구하십시오! 지혜를 구하십시오.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계시를 구하십시오. 그러나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만 합니다.

2010년 7월 12일 월요일

당신의 예수님은 얼마나 크십니까?

요한복음 14장은 두 가지 장엄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14:12-14).

두 구절 지나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그리스도께서 “나는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주겠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이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두 가지 엄청난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끼어있는 한 구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이 말씀이 왜 이곳에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순종의 문제가 이 약속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 약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족되어야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청구하는 데 아무런 장해물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의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질책이라고 확신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크리스천들이 더욱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결국에는 단지 구원으로 만족합니다. 언젠가 천국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그리스도의 끝에 도달해 있습니까?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그리스도는 또 하루를 지탱할 만큼의 힘을 주시는 데서 끝납니까? 그분은 인생의 대부분을 사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당신에게 때때로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그 자리에서 끝나고 마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안의 이 모든 구절들은 “나의” 예수님은 나의 요청하는 것만큼만 크다는 것을 나에게 설득해 줍니다. 하지만 비통하게도 많은 믿는 자들이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무의미하고 무능력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의 그리스도가 제한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히려 나의 큰 요청으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 지옥의 온 마귀가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로부터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어느 때 보다 그분이 더욱 더 커지시기를 원합니다.

2010년 7월 9일 금요일

그분의 손에 당신의 이름을 쓰셨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권위가 주어졌는지요. 정확히 어떻게 우리는 이 권위를 사용합니까?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사용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을 두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나는 그분 안에 있으며, 나는 그분과 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취하셨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은 자신의 손바닥에 그 이름을 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이름하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이 단지 비인격적인 공식이 아니라는 이유를 아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과 함께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위입니다. 그리고 그 지위를 아버지께서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16:26-27).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너희의 요청은 마치 내가 구하는 것과 똑같은 능력과 효과가 아버지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기도는 마치 아버지 보좌 앞에서 예수님 자신이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병자에게 안수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마치 예수님이 병자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것처럼 우리를 보십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받기 위하여.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나는 가서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리스도안에서 택함 받은 자로 당신 앞에 섰습니다. 이제 나의 기쁨이 충만하기 위하여 풍성하게 구합니다.”

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했지만 내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이 믿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청구하려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더럽히는 어떤 죄를 허용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것들은 장해물이 되어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버릴 때까지 그분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나 냉담한 태도 때문에 막히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키는 의심에 눌려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는 경고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야고보1:6-7).

야고보는 분명히 말합니다. “흔들리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다.” 야고보가 사용한 흔들리다라는 단어는 “결정하지 않은”이란 뜻입니다. 사실은 이러한 사람들이 요청을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에게 응답하시면,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이 기도만 응답해 주시면 당신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언제 우리가 그분의 아들에 대하여 헌신을 결단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아십니다. 전적으로 그분께 맡기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2010년 7월 8일 목요일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느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이사야30:18-19, 21,29).

이사야는 말합니다. “너희가 단순히 주님을 의뢰하기만 하면, 너희가 다시 그분께 부르짖으며 돌이켜 그분을 신뢰하면, 그분은 내가 말했던 것 모든 것 그리고 그보다 더욱 너희에게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저 한마디 말씀만 하셔도 원수는 우리 앞에서 넘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이사야30:3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하실 일이 없으며 입술에서 나오는 단지 한마디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이기지 못하실 전쟁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거기에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이사야30:33)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을 신뢰해가는 이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최근 나는 이곳 뉴욕시에 있는 우리 교회의 건물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 구했습니다. “아버지 나는 이일에 대해 당신을 신뢰합니다. 나는 당신께 구했고 이일에 대해 평강을 누릴 것입니다.” 그분은 내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데이빗, 너의 부동산, 재정, 그리고 다른 물질적인 일에 대해 나를 신뢰할 수 있다니 놀랍구나. 그런데 너는 아직도 너의 건강문제에 대해서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내 나이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내 가족이 어떻게 될지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정곡을 찌르시는 말씀이 번개처럼 나를 쳤습니다. 나는 모든 물질적인 염려는 그분의 손안에 두었는데 영원한 염려는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주님, 당신은 내가 모든 것에 당신을 신뢰하기 원하시는군요, 그렇지요?”

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 당신의 건강, 가족, 미래. 그분은 당신이 모든 문제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고요함, 자신감, 안식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주님과 홀로 계십시오. 그분께 모든 것을 들고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약속하셨습니다.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믿음의 증거는 안식입니다. 신뢰하는 믿음의 귀결은 마음의 평강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믿음은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2010년 7월 7일 수요일

영적인 힘과 신뢰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의 손안에 내려놓고 그분의 권능을 신뢰할 때 성령은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룻은 이런 종류의 신뢰의 본보기가 됩니다. 남편이 죽은 후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살았습니다. 나오미는 룻의 행복과 장래를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부유한 보아스의 발치에 눕고 자신의 친족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기를 청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날 저녁, 곡식 까불리는 일을 마친 후 보아스는 “곡식 단 더미의 끝에”(룻3:7)누워 이불을 덮었습니다. 새벽에 보아스는 깨어나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누워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룻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당시에 통상적인 관습으로 부도덕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룻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3:9).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친척의 의무를 맡아주시겠습니까?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시겠습니까?” 실제로는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작해 꾸민 계략이 아닙니다. 룻과 나오미는 하늘의 질서를 따라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혈통이 룻을 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룻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나오미가 물었습니다.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룻3:16 KJV: Who art thou, my daughter? 내 딸아 너는 누구냐? ). 나오미는 다시 말해서 “너를 ‘약혼한’ 룻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아직도 ‘과부’ 룻이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자초지종을 고했습니다. 나오미의 경건한 충고를 들어보십시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아니하리라”(룻3:18). 나오미는 이일에 대해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며 기도했었고 하나님은 그녀에게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기업 무를 자에 대한 규례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전형이며 예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신과 룻이 할 바를 다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제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도록 그분을 신뢰할 시간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아, 이제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편안히 쉬고 잠잠히 있어라,”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집에 고요와 평강이 깃들었습니다. 아무도 손톱을 물어뜯으며 “하나님이 과연 하실까? 언제 이 일이 이루어질까?” 궁금해 하며 안절부절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신실한 두 여인은 편안히 쉬며 주님의 선하심을 노래하며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했습니까? 신뢰했습니까? 가만히 앉아 “주님의 구원을 볼”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분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2010년 7월 6일 화요일

기도의 사람 되기

예레미야 5장에서 하나님은 간청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예레미야5:1). 주님이 말씀하시는 요점은 “단 한사람이라도 나를 찾는 사람을 발견하면 내가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시절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서 그 한사람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주님은 그런 유형의 경건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신실한 종들을 찾습니다.

다니엘처럼, 그러한 사람은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이 다니엘에게 임했을 때 이 선지자는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을 계시하셨습니다. 계시가 임하자 다니엘은 기도할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다니엘9:3-4).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회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지자는 자신의 동료들의 죄를 맹렬히 비난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 타락을 자신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는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다니엘9:5,8).

하나님은 오늘날 자신의 백성에게 복주시기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마음이 이세상의 영으로 오염되어 있다면 그분의 복들을 받을 태세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말씀을 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내렸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달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얼굴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내리게 하셨사오니”(다니엘9:13-14).

하나님께 구하옵기는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자신의 삶을 점검하고 성령께서 우리가 타협하고 있는 부분들을 보여주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한 나라를 위하여 하는 기도보다 더욱 더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울부짖을 것입니다. “오 주님, 나의 마음을 수색해 주십시오. 내 영혼 속에 숨어든 모든 이세상의 영을 내 안에 드러내 주십시오.” 그 연후에 우리는 다니엘처럼 우리 가족, 우리나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2010년 7월 2일 금요일

영적인 힘의 비결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이사야30:15).

여기 영적인 힘에 대한 하나님의 비결이 있습니다. “잠잠하고 조용하여야 힘을 얻을 것”입니다. 잠잠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휴식”을 의미하고 휴식은 모든 불안으로부터 평온하고, 긴장을 풀고 자유하게 됨을 말하며, 고요하고 밑에서 받쳐줌으로 편안히 눕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잠잠함과 신뢰를 소유한 크리스천이 많지 않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광적으로 활동에 관여하고 부와 소유물과 쾌락을 얻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합니다. 사역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종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회의나 세미나, 베스트셀러 책들에서 답을 찾으려고 허둥댑니다. 모두가 자신의 영을 안정시키기 위한 안내와 해법, 그 무언가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찾기 위해 모든 출처를 뒤져보지만 정작 하나님은 제외합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그들에게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분을 자신들의 원천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노력은 애통과 혼동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서 무엇을 성취하기로 되어있는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이사야32:17). 우리가 진정으로 의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의 삶은 고요한 영, 잠잠한 마음, 하나님과 화목이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말과 병거에 의지하고 사람을 신뢰하여 애굽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사들이 오고갑니다. 지도자들이 긴급 전략회의를 주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우리가 어찌 할꼬?” 울부짖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확신을 주었습니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 너희의 타락에서 돌이켜라. 다른 것들을 신뢰한 반역을 회개하라. 주님을 의지하라 그러면 그분이 너를 평강의 이불로 덮어줄 것이다. 그분은 네가 당면한 모든 것 가운데서 너를 잠잠케 하시고 쉬게 하실 것이다.

2010년 7월 1일 목요일

마흔 한 번째 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시고 난 직후 마흔 한 번째 날에 그분을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분의 얼굴은 광채가 납니다.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셨기에 아버지를 찬양하며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과 자신감이 풍겨 나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이제 그분은 지옥의 권세를 상대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암흑가운데 처해있는 큰 도시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떠나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며 복음을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알며 병든 자들을 고칩니다.

한편 당신은 자신의 삶을 점검하며 정반대 상황을 봅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메마른 광야 체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탄의 불같은 공격을 견뎌낸 후 당신의 영혼은 낙심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나와 같은 시련을 겪지 않으셨다. 이것들 보다는 나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아마 믿음이 강해 보이는 사역자를 보게 될지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도 강하게 확신하는 것처럼 들려서 당신은 “그는 나 같은 문제를 겪어보지 않았을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나님이 이 사람을 말씀을 전파하라고 부르시고 그 후에 혹독하게 시험받게 하시려고 광야로 인도하셨을 때 당신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가 절망으로 낙심하여 한 없이 낮아졌을 때 당신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종 그의 가장 훌륭한 설교가 자신의 삶에서 받았던 시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다.

바울은 우리가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교하여 우리의 의를 측정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마흔 한 번째 날, 예수님이 길고도 험난한 시험에서 막 헤어 나왔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분에게서 본 그 영광이 사람들이 당했던 어떤 것보다도 더 험했던 고투에서 나왔던 것이라는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의, 그분의 거룩함에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에 똑같이 접속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시험의 때에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 자신의 영이 당신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 자신의 아들이 이미 그곳에 계셨었고 당신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분이 당신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신뢰를 쌓는 역사를 완수하시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자신감, 경건한 동정심과 남을 돕는 힘을 가지고 나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