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3일 토요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by Claude Houde

저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랐습니다. 단순히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을 알게 된 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처음 믿음 생활을 시작했을 때, 인내로 저를 가르치고 지도한 사람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사랑하는 저의 영적인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전도적인 교회의 사고방식에서 이러한 태도가 존재했습니다: 문제나 아픔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다; 머리를 들고 당당히 걸어라; 할 수 있다 어서 가라! 그리고 그 태도는 성경 구절과 결합하어 계속 강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항상 기뻐하라…모든 것에 감사하라… 눈을 들어보라… 머리를 들라… 너는 용사다! 앞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가 머리를 높이 들고 어깨를 펴고 눈을 하늘로 향하고 설 때, 하나님의 팔이 저희를 보호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광야에서 가뭄과 슬픔으로 우리의 눈이 땅으로 향하고 지치고 힘없을 때, 이렇게 성경은 쓰여있습니다. “영원한 주님의 팔 안에 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신다” (사 42:3).

이사야(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약속을 주는 그 사람)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둑에서 온종일 노는 아이들은 이 놀이를 알고 있습니다. 신중하게 갈대를 뽑아서, 입김을 불면 높은 소리의 플룻 같은 소리가 납니다. 아이들은 기쁨으로 크게 웃습니다. 연약한 갈대가 찢어져 소용이 없게 되면, 버리고 다시 새로 뽑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가 상해도 버리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요점은 하나님께서 “네 삶이 그 멜로디, 노래를 잃어버리고 기도와 찬양이 사라지고 밤마다 제단에서 침묵으로 소리 질러도, 나는 너를 회복시키겠다. 내 앞에서 찬양과 기쁨을 되찾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간에 너를 치유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단을 쌓아라 나는 너를 다시 세울 것이다. 아직 타고 있는 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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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월드챌린지(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6년 1월 22일 금요일

비밀한 곳에서 하나님을 찾기

다메섹에 사는 경건한 사람 아나니아에게 성령님이 찾아 오셨다. 성령님은 그로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 했다. 물론, 아나니아는 악명 높은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어떻게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맡겼는지를 보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도행전 9:11)

한마디로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날 것이다. 그는 네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그는 네 이름까지도 그리고 왜 네가 그에게 보내졌는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눈을 다시 뜨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 사울은 이 내면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는 이런 환상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이 순수한 말씀을 듣게 되었을까? 그것은 간절한 기도와 간청으로 얻게 된 것이다. 사실 아나니아를 향한 성령의 말씀들은 어떻게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은 사흘 동안 물과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과만 독대하고 있었다. 그가 원한 모든 것은 주님 뿐이었고, 무릎 꿇고 온종일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내가 신앙의 성장을 이루고 있던 시절에 나를 지도해 주신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길을 만들어 주신단다.” 주님께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로 이 부분을 나에게 가르쳐 주신 시간들이 있었다. 펜실바니아에 있는 젊은 목사님였던 나는 깊은 목마름이 올라와서 기도에 부지런을 내고 있었다.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금 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욱 섬기기 원합니다. 오 주님, 말씀대로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이기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울면서 기도했는데 마침내 주님께서는 나에게 뉴욕으로 가서 갱들과 마약 중독들자들을 위해 사역하라는 사명으로 나를 불러주셨다. 벌써 몇 십년 전 일이다.

하나님께서 뉴욕으로 다시 부르셔서 타임 스퀘어 교회를 시작하라고 하셨을 때도 나는 무릎 꿇고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데이빗, 나는 네가 나의 마음, 나의 생각들을 갖기를 원한다.”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것은 성경공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도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통해서 왔다. 만약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비밀한 곳에서 그와 보낸 시간 때문이다.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종교적인 야심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여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립보서 3:4-6)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전에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을 포함은 많은 나의 동료들은 나를 우러러 봤었습니다. 나는 바래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거룩한 자요, 율법의 능한 선생이었습니다. 나는 이 곳에서 꽤 유명했고 사람들의 눈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로 다가왔을 때,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나의 모든 노력들과 경쟁심 즉 나의 인생에 의미를 주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내 삶에 주님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한 때 자신의 종교적 야심, 열심과 경쟁적 마음과 모든 업적과 분주함, 이 모든 것들은 의로운 것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한 육체의 일들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성공과 인정을 위한 나의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린도 전서 9:19)

바울은 예수님 자신이 종의 인생을 사신 것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종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종의 마음을 가진 아들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종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 자신 또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안다. 그러나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종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빌립보서 2: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신학적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생각을 가지기 위해 우리 자신의 의지를내려놓는 것이다.

2016년 1월 20일 수요일

마음을 새롭게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고 담대하게 말했을 때, 그는 “나도 나의 모든 명예를 버렸습니다. 예수님처럼, 종의 역할을 택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7) 그리고 사도 바울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것을 권면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 (고린도전서 2:16)

여러분들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바울이 종이 되었단 말인가? 이전에 믿는자를 박해하던 자이자 살인의 마음을 가진 자가 언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단 말인가?

사도 바울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꼭 집어서 말 할 수 있을 듯하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언제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를 볼 수 있다. 다메섹 직가라는 곳에서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이다.

당시에, 바울은 사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옥에 가두고 고문하기 위해 작은 군대를 이끌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 앞에 나타나서 그를 눈멀게 하신 다음에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가게 하셨다. “그리고 사울은 거기에서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도행전 9:9)

그 사흘 동안, 사울의 마음은 새롭게 되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깊은 기도의 시간을 보냈었고, 그의 과거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 일들을 경멸하게 되었다. 그 때가 바로 사울이 바울이 된 순간이다.

그는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는 잘못된 열심으로 가득차서 지체 높은 종교지도자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셔서 그를 나 자신에게 보여주셨고 나는 나의 지난 삶을 버렸다. 더 이상 인간을 기쁘게 하지는 않고, 종교적 양식들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8)

2016년 1월 19일 화요일

예수님의 마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에베소서 4:23)

이 모든 말씀들은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 –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 – 이 너의 생각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가 구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자만,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 온 마음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곤한다. “나 자신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생각들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내 인생에 경험케 하는 모든 경험들을 통해 나의 모든 형상들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립보서 2:7)

예수님은 하늘에 계셨을 때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기로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는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기를 자처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이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제가 갑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은 진작에 이를 결심하셨다. “아버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나의 뜻을 내려놓습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음으로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들과 행위는 모두 당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당신 앞에 내려놓습니다.”

2016년 1월 18일 월요일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 by Gary Wilkerson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1-4)

“나에게 성화와 칭의 둘 다가 필요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 그 둘의 차이는 구속과 자유의 차이이다. 묵은 것에 묶여있는 것과 새로운 인생을 향해 걸어가는 자유함의 차이 같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은 당신의 죄와 유혹 그리고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이겨나가는 것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만약에 성화와 칭의 모두가 필요하다면, 둘 다 같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만약에 둘 다가 필요하다면, 둘은 같은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잠깐만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 모두는 칭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부터만 온다고 믿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성화는 인간에게서부터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만 나온다고 믿는다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거룩하게 살아내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입었지만 내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내가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님, 나를 의롭다 하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나를 의롭다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죄를 속하시고 내 죄를 대신하여 속량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자리에 대신 서시고, 내 죄를 대신 지셨음을 감사합니다. 나를 의롭게 하기 위해 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 보답으로 내가 이제 얼마나 나를 거룩하게 하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도록 하는 그런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그 분 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유일한 근원이 되십니다.

2016년 1월 15일 금요일

예수님으로 족하다라는 살아있는 증거

제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어디서부터 시작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통받고 가난하고 죄악에 억압된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을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누가복음 14:23).

전세계적으로 1100여개의 센터에서 마약/알코올 재활 사역을 하고 있는 틴챌린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많은 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고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사역을 하면서 구원의 기적을 목격한 수많은 사역자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확을 시작하셨던 지점에서 똑같이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은 바로 어린 양들이 있는 곳, 사로잡히고 상처받고, 감금되고, 나환자, 맹인, 가난한 사람 그리고 환난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 지점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잘아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말세에 직면하게 된 모든 일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어떤 세대보다 죄악, 스트레스, 외로움이 만연하며, 재정적 재앙, 걷잡을 수 없는 이혼, 공격적인 동성애, 타락 등이 30여년 전의 최악의 죄인들도 얼굴을 붉히게 할 정도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불로 연단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일꾼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바로 서서 이렇게 말할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사탄은 나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을 보십시오. 저는 불을 여러 번 겪고 반복적으로 연단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하고 극복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나누는 나의 삶의 얘기는 바로 예수님 만으로 족하다라는 살아있는 증거가 됩니다.”

2016년 1월 14일 목요일

수확의 때

모세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라고 말하였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수확의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얽매임에서 구원받을 때가 된 것입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5:2). 바로는 거짓 종교와 억압, 압제를 포함하는 사탄의 악한 계통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전에는 어두움의 권세가 흔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아홉 가지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재앙들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에 애굽 사람 모두를 비탄에 빠뜨리게 만드는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지도자부터 평범한 시민들에게 까지 닥친 이 재앙은 그저 자연 현상으로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사자를 보내시어 애굽 가정의 바로의 장자를 포함한 모든 장자는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수확이 심판 직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수 백 년 이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예수님께서 이미 심판의 때가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로마황제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백 만 여명의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도시 자체가 불에 타오를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 그 세대에 경고를 하신 것 이었습니다. “보통 수확 전 4개월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너희에게 수확의 때가 지금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큰 환난이 문 앞에 다가왔으니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집중하여야 한다. 이제 나의 일을 마치도록 너희를 보낼 것이다. 수확을 시작하는 때는 바로 오늘, 지금이다.”

예수님께서 다가 올 환난을 어떻게 묘사하셨습니까?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복음 24:21). 그러한 환난이 오기 전에, 우리는 수확의 때에 일을 하여야 합니다.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수확의 법칙

예수님은 번성하는 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인간의 마음을 알고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재난과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영원을 직면하게 됩니다. 고난과 두려움은 복음을 듣고 수용할 수 있게 합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마태복음 9:36-37).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그의 백성들에게 질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여 주셨고, 번성케 하고 땅, 푸른 초장과 젖과 꿀, 과실 등의 큰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너희가 번영하면서 하나님께 저항하고 불순종하였다. 너희의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버린것이다.”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신명기 32:15).

성경에 이스라엘이 그 이후에 고난을 겪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겪는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시편 107:6).

다윗의 간증도 생각해보십시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편 18:4-6).

고난, 역경 그리고 혼돈은 도움을 찾는 부르짖음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은 역사에 걸친 패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뉴욕의 쌍둥이빌딩이 무너진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기억해보십시오. 교회들은 굶주린 영혼들로 가득 찼습니다! 양키즈 경기장에서는 기도성회가 열렸고, 나라의 수도에서 국가 의회 지도자들은 기도하면서 “God Bless America”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동안, 온 국가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고난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찾게

2016년 1월 12일 화요일

수확의 준비

예수님께서는 말세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말세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시작되었고, 다시 돌아오실 때 마침표를 찍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더욱더 가까워진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세의 현상들을 알고 싶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대하여 기근, 지진, 환난, 국가들의 분리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타락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언급하기만 했다는 이유로 혐오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은 차갑게 식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 몇몇은 죄에 대해 무뎌짐으로써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누가복음 21:25-26).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묘사하는 것은 가장 불안하고, 우울하고, 스테레스로 지친 세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예언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대는 불안과 근심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태풍, 지진, 쓰나미, 산사태, 토네이도 등의 엄청난 재난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온 나라가 테러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첫 번째로 많은 사망원인은 심장발작입니다.

거짓 종교,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가 수많은 사람들을 타락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수 만 명의 사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이슬람 지지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국가들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흔들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저 의미 없는 부정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격변과 혼란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한복음 4:35).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혼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추수의 때라는 것을 믿고 수확하기 시작하여야 하는 때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수확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악한지는 상관 없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강력해 보이는지는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려운 장애물만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추수와 수확의 때가 다가왔노라.”

2016년 1월 11일 월요일

그리스도, 율법의 마침 by Gary Wilkerson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4).

우리 삶에서 내려놓아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죄, 습관, 그리고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 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부분들은 우리를 쉽게 지치고 곤하게 만듭니다. 모두 내려놓아야 할 삶의 일부입니다.

성령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에 대한 갈망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르는 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말입니다.

사탄의 죄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죄악 중에 살아가고 있으며 생각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죄악을 이기고자 하는 원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결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강렬한 의와 정결에 대한 갈망을 심어 주십니다.

로마서 10:3에서 나오는 “의” 라는 뜻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되고, 의로운 행동, 의로운 동기, 의로운 생각, 의로운 감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옳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의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저 옳은 일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은 동기로 옳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겉으로는 의롭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0:4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이고, 그로 인하여 예수를 믿는 자 마다 의롭게 된 것입니다.

2016년 1월 7일 목요일

하나님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으십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들고 어두운 시간 속에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1:3-7)

여러분은 여기 하나님의 목적이 보이십니까? 고통에 처한 우리를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극심한 고통속에 처한 다른 이들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일 입니다: 달련되 자들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위로해주시는 것 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통이 더욱 심해질수록,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위로가 더욱더 강력해 진다는 것 입니다.

저희 사역 우편물 수신자 명단에는, 이스라엘과 제시란 소중한 두 형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형제는 100살 이며, 제시는 102 살 입니다. 한 형제는 92세에 은퇴 했으며, 다른 형제는 97세에 은퇴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수년간 저희 설교를 받아 들어왔습니다.

이 두분은 혈육이며, 또한 주님안에서 형제 입니다. 두분 다 간증하기를, 일생의 시련을 통해, 그들안에 성령의 기쁨은 깊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한 세기의 참사 – 1930년 대의 대공황, 두번의 세계 대전, 무시무시한 가뭄 을 직접 목격해 오셨던 분 들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었던 시련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늦은 나이에도 그들은 전보다 더 웃으며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 이 모든 시간들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단 한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시련을 견뎌낸 그들의 간증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위로 입니다.

2016년 1월 6일 수요일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 입니다

헌신적이고 경건한 사도바울조차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게 쓴 서신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1:8)

여기서 사도바울이 그리스어로 쓴 “낙심”을 번역하면, “우린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었어요. 우린 살 소망이 끊어질 때까지 낙심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곧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린 죽고싶었습니다. 우리가 격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우린 죽고싶었습니다.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말들을 했을 거라곤 상상하기 힘듭니다. 어느 누가 사도바울 보다 더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어느 누가 바울보다 더 금식하고 기도하며, 더 많은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까? 이런 바울에게도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낙담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은 어땠을 까요?

몇몇 성경해설자들은 바울이 여러가지 시련을 통해 이렇게 낙담했을거라 믿습니다. 이 많은 시련들 중, 바울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배신으로, 그는 극심한 정신적 비통에 빠졌을 것입니다. 한때 가까웠던 이 친구들이 그를 배신하고 떠나며, 거짓증언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의 이름을 훼손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극심한 병으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번의 난파를 당하고, 그를 해치려는 자들의 음모도 여러번 겪었습니다. 이 모든 일 위에, 그는 많은 교회들을 살펴야 하는 근심도 있었습니다.

이 일들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련들을 합해도, 여전히 바울이 느꼈던 그 깊은 낙담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기록하기를, “ 나는 극심한 고통에 빠졌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거라 생각지 못 했습니다. 이 고통이 나를 죽일수도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사도바울은 그 고통속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곡적으로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 지긋지긋한 시간을 절대 잊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고후1:10)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셨고, 또 다시 우리를 구해주 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그분에게 두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2016년 1월 5일 화요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우울증을 격어본 적이 있습니까? 걱정 근심에 시달려 잠 못 이룬적이 있습니까? 너무 힘들고 침체되어, 그 어느 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까? 인생에 실패했단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적이 있었습니까?

저는 육신적인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정신적인 질병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아닙니다. 저는 이따금 뜬금없이 나타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크리스천들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입니다. 그들의 우울증은 어떤 한가지 이유보단 다양한 이유로 다가오게 됩니다. 때로는 모든 방면에서 공격이 이루어지며, 감당하기 너무 힘들어 절망외에는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윗 글에 공감 하신다면, 시편 77편은 여러분을 위해 집필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시편 77편은 여러분에게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레위 지파 출신인 아삽의 의해 작시되었습니다. 아삽은 찬양자 였으며,다윗의 성가대 지위자 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총11편의 시편을 작시했으며, 그의 시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관한 내용이었으며, 저에게 그는 설교하는 평신도와 같습니다.

아삽은 절망의 수렁에 빠진 뒤, 시편 77편을 작시 했습니다. 그의 상태는 너무 나빠져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위로해줄 수 없었습니다: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시77:2) 이 경건한 자는 너무 절망하여, 아무도 그의 비통에서 그를 건져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삽 자신도 어쩔줄 몰라 한마디 하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시77:4)

하지만 아삽은 기도하는 자 였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77:1)


제가 확신하기에는, 아삽은 아마도 비슷한 상황을 격었던 다윗의 증언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시편 34:15) 시편34편을 통해, 다윗은 이미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34:4,6)

2016년 1월 4일 월요일

그분은 우리안에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by Gary Wilkerson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은 – 그의 순정, 거룩과 전능 같은 우리와의 차이가 들어납니다. 그의 임재안에 거하는 천상의 생명체들도, 그를 장엄하고 분리된 자로 여깁니다. 지금도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임재안에 있으며, 밤낮으로 쉬지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멈추지 않는 찬양은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계5:12)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의 영향입니다: 그분은 모든 상황과 모든 순간 우리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십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르시기를, “세상은 나를 못볼지라도, 너는나를 볼지라.”

유태인 리더들은 하나님을 특별히 분리된 분으로 섬겼지만, 하나님의 다정함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을때, 그들은 분노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신성 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일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담대한 가르침을 한걸음 더 진보 시키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또 곧 너희 안에 거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14:23)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다락방 제자들 가운데 계셨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조와 똑같이, 하나님을 본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살아 남을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의로운 모세도 하나님의 한 부분만을 봤기에 살아 남을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때, 이렇게 생각 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야. 그분은 너무 거룩하시고, 또 엄청난 분이신데 어떻게 내 안에 거하실수 있겠어. 절대 그런일은 없을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두가지 진실을 맡기셨습니다 : 하나님은 정녕 거룩하시고 순전하시며, 그는 그의 창조물인 우리안에 거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이제 막 시작하신 교회에 주신 가르침을 생각해보세요. 그분은 우리를 위한 집을 준비하시기 위해 떠나셔야 한다는 말씀으로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절인 아름다움 입니다. –거룩하고 순전하며, 동시에 친밀하고 다정하십니다. 그는 우리 위에 계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찾을 수 없는 평화를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