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8일 금요일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붙드십시오

우리에게 갈등, 중압감, 시련이나 전쟁이 없다면 우리는 수동적이고 미온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퇴락하고 폐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쟁취한 영토를 치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우리를 빼어 내고자 합니다. 그의 목표는 우리에게서 모든 싸움을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할 힘과 원수를 압도하는 능력 등과 같이 영적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 발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그분은 우리에게 밝혀주실 것입니다. “지난번에 겪은 일을 기억하느냐? 또 그 지독한 전투에서 겪은 일도? 그 모든 일을 통해서 네가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아라. 모두 네가 승리했던 전투를 통해서 확보했던 것이다.”

사실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보물을 인간의 몸속에 두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그분의 영이 거하시는 집, 즉 성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성전을 유지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이 게으르고 무관심해져서 정기적인 기도, 하나님의 말씀 먹기, 성도들과의 친교와 같이 필요한 보수 작업을 방치해두면 퇴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완전히 폐허로 남게 되고 말 것입니다.

내 자신의 오십년간에 걸친 사역을 돌이켜 볼 때,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쉬웠던 때가 여러번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주님, 이번 공격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언제 끝날 것 입니까?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러한 시련들의 열매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원, 힘, 영적 부요와 같은 그 열매는 그 외의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었을 정도로 나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당신에게 촉구합니다. 믿음으로 당신의 시련을 붙들고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더욱 강하게...사탄으로부터 노획물을 탈취하도록 돕기 위해...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분께 영광이 되도록 성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잇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7-8).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2008년 11월 27일 목요일

절대 위축되지 않기

당신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지속적으로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든지, 어느 때든지, 어떤 마귀 권세에게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마귀의 권세들에게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보섬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귀신들이 방해하려 했습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행13:6-8).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 또는 “빛의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은 대적하는 마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습니다.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 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행13:9-12).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모든 흑암의 권세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이 당신을 훼방하려는 시도에 대해 마음 상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방해를 받다, 괴롭힘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날을 그대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바울 안에 성령이 충만해 졌고 마귀 권세에게 외쳤습니다. “이제 그만하라. 그만하면 충분하다! 예수의 이름으로 떠나가라!”(행16:16-18 참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마귀로부터 지나치게 많이 수용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만 됐다.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명하노니 떠나가라!”고 대적해야만 할 때가 옵니다.

우리가 권위를 행사하여 마귀에게 떠나라고 명령할 때, 사탄은 그의 무기고에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당신을 치러올 것입니다. 사도행전 16:16-18에서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마자 사탄이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군중들을 자극하여 바울과 실라를 대적하게 함으로써 일순간에 그들은 엄청난 위기에 빠졌습니다!

관리들이 그들에게 매를 치고 투옥시켰습니다. 회초리가 그들의 등을 내려칠 때마다 나는 마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니? 나의 부하들을 쫓아내고 내 권위 위에 서겠다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하나님의 종에게 매를 치면 칠수록 그에게서 더 한층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자아내게 됨을 마귀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를 위기 가운데 던져 넣고 문제꺼리들과 괴로움으로 결박해 놓으면 그는 노래하고 외치고 예배드릴 것입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려고 한다면 사탄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진을 일으키셔야만 해도 상관없습니다. 바울을 위해 정확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6).
사탄은 당신이 이제까지 직면했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두려운 유혹이나 시련을 쏟아 부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이 죄의식, 정죄와 자기 성찰의 수렁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성령 안에서 일어나서 당신의 주변 상황과 속박으로부터 눈을 떼어야만 합니다. 그 모든 것의 해결책을 생각해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찬양하고 노래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2008년 11월 26일 수요일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의 더 높은 의미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집나간 나귀들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사환 한명을 데리고 사울은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찾았습니다. 결국 그는 의욕을 잃고 찾는 일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그의 사환이 선견자 사무엘에 대해 말하며 그분이라면 어디서 나귀들을 찾을지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성령의 한 유형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길을 가르쳐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심중에 무언가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하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데 일역을 담당하도록 선택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도착했을 때 사무엘이 했던 첫 번째 일은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삼상9:19). 이것은 정확히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의 식탁에 앉아서 따로 질 높은 시간을 가지며 그분의 마음을 들으며 섬기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서로 교제할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정결케 할 것을 청했습니다.(삼상9:20-25). 사무엘은 “이제 나귀를 찾는 길을 묻는데 집중하기 말라. 모두 해결되었다. 바로 앞에 더욱 중요한 일이 놓여 있다. 너는 하나님의 마음,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제의 밤이 지난 후 사무엘은 얼굴을 맞대고 친밀한 시간을 나누기 위해 사울에게 사환을 방에서 내보내도록 청했습니다. (삼상9:27; 10:1 참조).

하나님이 여기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네가 진정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기 원한다면, 네가 진정으로 나의 기름 부음받기를 원한다면, 너는 나에게 길을 묻는 것 그 이상의 것을 구해야한다. 너는 내 임재 속으로 들어와 나의 마음, 나의 소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나는 너를 나의 왕국에서 쓰기 위해 기름 붓기 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길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이제 모든 것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성령이 하나님의 깊이 감추어진 것들을 당신에게 가르치도록 허용 하십시오. 그분의 임재 속에 가만히 서서 그분이 주님의 심중을 당신에게 보여주시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의 가장 최상의 형태입니다!

주님의 존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길 잃은 세상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낙심하지 아니하고......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고후4:1-2).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진리이심을 압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가 예수님을 나타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눈에 보이도록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빛을 발함”으로 어떤 것을 명확하고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알려지고 이해되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각 개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그 성품과 닮은 모습이 빛나야만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에 대한 개념을 더 한층 승화시킵니다. 그는 우리가 실제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3:2-3). 우리의 삶은 성령이 쓰신 편지이며 길 잃은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주위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읽혀지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우리가 세상에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들이 됩니까?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예수님의 바로 그 형상을 새겨주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있는 이 형상을 늘 다듬어 가십니다. 성령의 임무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장 진실 되게, 정확하게 빚어내는 것으로 이는 실제로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게 될 것입니다.

2008년 11월 25일 화요일

어떻게 하면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을까?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은 단지 소수의 초특급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1. 당신안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이 행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먼저 성령께 당신의 안 내자와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만약 당신이 구원 받았다면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분이 당신을 인계해주시기 구하고 그분께 항복하십시오. 마음으로부터 그분이 당신을 인도하고 안내해 주시기를 원한다고 결단해야만 합니다. 모세는 훗날에 대해 말하며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4:29) 고 했습니다.

2. 성령을 알고 듣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문제와 유혹으로부터 눈을 떼십시오. 바울, 실라와 디모데가 만일 자신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눈물 과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실패에 초점을 둡니다. “지난 날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지금 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을까?”라고 말하며 우리의 패배를 거듭해서 되뇌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십시오! 그 피가 모든 것을 덮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것도 잊어 버리십시오. 오직 주님만이 앞일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대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오직 성령에 집중하십시오.

3. 성령과 교제하며 질 높은 시간을 많이 보내십시오. 그분은 서두르는 사람에게 말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주님을 구하고 찬양을 드리십시오. 당신 귀에 속삭여대는 모든 다른 음성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십시오. 성령이 이것들 보다 위대하심과 당신이 속거나 눈이 어두워지도록 방치해두지 않으실 것을 믿으십 시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2008년 11월 24일 월요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들은 기꺼이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거듭 거듭 가책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책 하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성령이 그 사랑을 그의 영혼에 역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타임 스퀘어 교회에서는 의로운 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책망을 사랑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는 성령이 그의 감추어진 죄와 불신의 영역을 드러내는 것을 환영하도록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더욱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헌데, 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서 “주님 나를 계속 심판해 주십시오. 책망하시고 꾸짖어 주십시오,”라는 태도를 감지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찔림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뉴스레터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에서 이런 태도를 많이 접합니다. 내가 천둥 치는 듯한 심판의 메시지를 쓸 때, 엄청나게 긍정적인 답신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에 대하여 나누면, “당신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군요!”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이분들은 “당신이 꾸짖지 않으면 당신의 말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신자들은 성령의 위대한 사랑의 사역에 전혀 참여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 꼭 배워야만 하는 영역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그분이 행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일을 하시게끔 허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에 넘치게 부으시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66:13). 이사야는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사57:17)는 고집 센 하나님의 백성에게 쓴 것입니다.

말해보십시오. 조언을 듣기 거부하는 고집 세고 완고한 학생의 곁에 선생님은 얼마나 오래 있어줄까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 중에 가장 숭고한 이미지 중에 하나인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들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걸려 뉴욕주 북쪽에 위치한 감옥에 있는 아들을 방문하러 갑니다. 그녀는 단지 잠시 동안 아들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흉한 죄수복을 입은 아들을 쳐다보고, 고통어린 그의 눈을 보면서 매번 갈 때 마다 마음속으로 조금씩 죽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입니다!

이 같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갖고 계신 사랑이라는 것을 성령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언젠가 너희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렸다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을 그분께 드렸고 그분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제, 나도 너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을 하기위해 그분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고 계속 일할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 외에 이 세상에는 진정한 위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 한 분만이 어두운 밤, 따뜻한 침대에 당신을 누이시고 완전한 평강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고통과 슬픔의 때에 진정으로 당신을 안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위로는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영구한 것이다!”라고 당신에게 확신 시켜 주실 분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이점에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실망시킵니다. 그들은 기꺼이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거듭 거듭 가책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넘치게 부어주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책 하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성령이 그 사랑을 그의 영혼에 역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타임 스퀘어 교회에서는 의로운 자,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책망을 사랑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는 성령이 그의 감추어진 죄와 불신의 영역을 드러내는 것을 환영하도록 배웠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더욱 행복하고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헌데, 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서 “주님 나를 계속 심판해 주십시오. 책망하시고 꾸짖어 주십시오,”라는 태도를 감지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찔림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뉴스레터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에서 이런 태도를 많이 접합니다. 내가 천둥 치는 듯한 심판의 메시지를 쓸 때, 엄청나게 긍정적인 답신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에 대하여 나누면, “당신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군요!”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이분들은 “당신이 꾸짖지 않으면 당신의 말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신자들은 성령의 위대한 사랑의 사역에 전혀 참여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 꼭 배워야만 하는 영역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하여금 그분이 행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일을 하시게끔 허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그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마음에 넘치게 부으시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66:13). 이사야는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사57:17)는 고집 센 하나님의 백성에게 쓴 것입니다.

말해보십시오. 조언을 듣기 거부하는 고집 세고 완고한 학생의 곁에 선생님은 얼마나 오래 있어줄까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 중에 가장 숭고한 이미지 중에 하나인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들어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어머니는 하루 종일 걸려 뉴욕주 북쪽에 위치한 감옥에 있는 아들을 방문하러 갑니다. 그녀는 단지 잠시 동안 아들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흉한 죄수복을 입은 아들을 쳐다보고, 고통어린 그의 눈을 보면서 매번 갈 때 마다 마음속으로 조금씩 죽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아들입니다!

이 같은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갖고 계신 사랑이라는 것을 성령은 당신에게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는 언젠가 너희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렸다고 말했다. 너희의 사랑을 그분께 드렸고 그분은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제, 나도 너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을 하기위해 그분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고 계속 일할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 외에 이 세상에는 진정한 위안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분 한 분만이 어두운 밤, 따뜻한 침대에 당신을 누이시고 완전한 평강으로 당신의 마음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고통과 슬픔의 때에 진정으로 당신을 안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 위로는 단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영구한 것이다!”라고 당신에게 확신 시켜 주실 분입니다.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자존심을 버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성령은 사람들에게 가장 이례적인 방법으로 강림 하셨습니다. 그분은 건물을 뒤흔드셨습니다. 사람들의 혀는 새로운 언어로 그분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전적으로 통제하셨습니다!

오순절에 그분은 급하고 강한 바람과 함께 오셨습니다! 불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사물들이 진동하였습니다. (행 2:4, 4:31 참조).

세례 요한은 설교했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3:16).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오실 때 당신을 성령과 불로 세례주기 원하십니다! 성령은 불, 즉, 예수님에 대한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 을 가지고 오십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신자들이 일순간 뜨겁다가 곧 냉담해져서 결코 완전히 항복하지 않고 절대로 승복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일까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책망하시리라”(요16:8). 이 신자들이 성령을 그들 안의 합당한 자리에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책망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그분은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그리스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응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진정 이 면에서 그분은 우리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에 대해 책망하실 때 그것을 내어버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 위안인 것입니다!

성령은 절대로 당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일을 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강림하실 때 죄인들은 당신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할 만한 방법으로 오실지도 모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령이 너무 소란스럽고,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고, 지나치게 예측불허라고 생각하여 그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2008년 11월 20일 목요일

성령은 자신의 하시는 일을 아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신의 사역을 하시되 연결성이 없거나 계획성 없이 행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단순히 우리가 인생을 헤쳐 나가는 것을 돕거나 위기를 통과하거나 외로운 밤을 무사히 지내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들어 올려 힘을 조금 불어 넣은 다음 다시 경주를 계속 하도록 내려놓으려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이 오신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준비된 신부로 본향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그 임무에 일치하게 행동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도자, 우리의 보혜사, 곤고할 때에 우리의 힘이십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모든 구원 사역-우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모든 경우-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신부로서 합당하게 만드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이 세상에 단지 은사를 주시기 위해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모든 은사는 배후에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의 메시지를 갖고 계십니다. 그분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중심적인 진리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그분은 마치 오색찬란한 보석처럼 빛날지 모르지만 모든 진리의 빛은 우리를 오직 단하나의 진리로 이끌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결혼하도록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를 다른 모든 사랑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진리를 계시하도록 너희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진리가 모든 죄의 속박을 깨뜨리고 모든 불신을 처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신랑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을 향해 나아가고 그분의 결혼 만찬을 위해 준비되어 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고 나는 너희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너희를 흠 없고 그분을 향한 정열적인 사랑을 마음에 품은 자로 나타내고자 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사랑에 빠지도록 예수님을 교회에 드러내는 것,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2008년 11월 19일 수요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 성도들이여, 이 말씀은 당신의 믿음을 점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을 붙들어야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

당신은 하나님께 이 선물을 구했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간구하고 있습니까? 지속적으로 두드리고 있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단순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 성령 세례를 구하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마귀가 진노하여 나돌아 다니는 것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휘하의 모든 권세들을 풀어놓아 악한 세력의 군대들이 하늘을 대적하여 마지막 투쟁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믿음과 순종으로 행하는 의롭고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와는 맞설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성령을 소유한 신자를 내게 보여주면 나도 지옥의 군대가 쫓겨가도록 만든 사람을 보여주겠습니다.

하나님, 성령을 보내주십시오! 우리위에 강림하십시오! 강하게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이 시대에 승리하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사탄의 견고한 진을 대적하도록 우리를 파송하여주십시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이어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5:25)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전 생애를 통해 이 구절을 들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많은 신자들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게 말하지 못합니다. 이제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따라 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다”는 한 문장으로 정의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서 이루시려는 일을 우리 안에서 성령이 하시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성령을 보내셨는지 이해할 때 까지 당신은 성령이 그 일을 행하시도록 허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하나의 (오직 단 하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명과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일을 이해하기 전 까지는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의 실수를 저지를 것입니다. 하나는 그분의 사역 중의 작은 일부분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즉, 몇 가지 영적 은사들이 그분의 모든 것 인양 오해하여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는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놓치고 맙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이 신비하고 그분의 존재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믿음으로써 우리안의 성령을 소멸하여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치시고, 성화시키며 능력을 부어주시기 위해 당신과 내안에 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신부를 준비시키기 위해 이 세상으로 보냄 받았습니다.

믿는 자들과 성령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구약의 유형을 창세기 24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의 신부를 찾기 위해 자신의 가장 연로한 종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엘리에셀이란 이름은 “강력한 천상의 돕는 자”라는 뜻, 즉, 성령의 유형입니다. 이 강력한 돕는 자가 리브가를 이삭의 신부로 인도하여 돌아온 것이 확실 한 것처럼 성령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틀림없이 신부를 데리고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신부로 리브가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을 그녀에게로 곧장 인도하셨습니다. 이 종의 전적인 사명과 목적은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리브가를 이삭에게 인도하는 것,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삭에게 마음을 쏟고 그의 배우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브가의 부모가 엘리에셀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데리고 가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창24:50-51).

당신과 나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그리스도를 위하여 택함 받음-은 주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로 안전하게 본향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2008년 11월 18일 화요일

“아바, 아버지”

성령은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순하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이 구절은 아이를 입양하는 데 관한 성경 시대 동양의 관습에 대해 언급합니다. 입양하는 아버지가 입양 서류에 서명하고 날인할 때까지 아이는 이 사람을 단지 아버지로만 여깁니다. 아이는 이 사람을 “나의” 라는 의미인 “아바”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류에 서명을 하고, 등록과 날인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후견인은 그를 입양하는 아버지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아이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어린아이는, “내 아버지! 이제 더 이상 어떤 아버지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훈육하십니다. 당신을 아버지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신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서류를 날인했다. 너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다. 너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너에게는 이제 너를 지극히 사랑하고 부유하고 힘센 아버지가 계시다. 그분을 포옹하고 ‘내 아버지’라고 불러라. 나는 그분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분은 너를 사랑했고 너를 원했다.”

우리의 외침은 한없는 기쁨과 감사여야만 합니다. 우리안의 성령은 문자 그대로 외칩니다. “너는 상속인이다. 예수님이 쟁취하신 모든 것의 상속인이다.” 당신의 아버지는 온우주에서 가장 부요하신 분이니 당신의 유산은 얼마나 굉장하겠습니까! 그분앞에서 부끄러워 피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진노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가난에 찌들고 기쁨과 영적 승리가 결핍된 고아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버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분을 누리십시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동과 고통의 순간에도 성령은 우리와 함께 그곳에 계십니다.

성령의 임무는 신랑이 그 자리에 없을 때 그리스도의 신부를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14:26).

보혜사는 “고통과 슬픔의 때에 위로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고통과 슬픔을 누그러 뜨리고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안전하고 따뜻한 침대위에 눕혀주는 자”라는 희랍어 정의를 좋아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날 때 그분은 자신의 위로의 폭신한 침대위에 당신을 눕히시고 부드러운 손길로 위로해 주십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심으로 예수님은 절대 확실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백성이 불편하게 고통당하고 위로가 필요할 것이며 종말의 때에 그분의 백성들 간에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그분이 하나님의 내재적 속성에 속한 모든 능력을 가지고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이 때문에 당신은 “내 안에 계신 이가 온 세상의 모든 능력을 합친 것보다 크시다. 모든 마귀의 권세보다 위대하시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탄의 손아귀로부터 보호하기위해, 당신의 영의 사기를 진작 시키시고, 모든 우울함을 쫓아버리고 당신의 영을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하시려고 그분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시도록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3, 5).

2008년 11월 17일 월요일

하늘 맛보기

시식한다는 것은 미리 맛보거나 실감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Earnest(KJV. 나머지에 대한 보증으로 미리 주거나 행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4). 이것은 우리가 전부를 소유하기 전에 그 맛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기업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성령은 영원한 사랑과 그분과의 교통을 누리는 신부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미리 맛보게 하기위해 우리를 그분의 임재로 이끌어 갑니다.

바울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엡1:13) 하나님의 백성들을 묘사합니다. 이는 특별히 성령의 역사로 표를 받은 백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들 안에 특이한 표식 즉, 영광스런 내부적 역사를 통해 그들을 영원히 변화시킨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신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 두지 않고 하늘의 것에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사건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도리어 요지부동합니다. 더 이상 미적지근하거나 냉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밤낮없이 그들의 마음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성령은 이 신자들에게 무슨 일을 행하신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을 주님의 소유로 영원히 표시하고 인치셨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이것입니다. 성령은 그들에게 그분의 임재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하늘을 젖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의 더없이 위대하심에 대하여 초자연적인 현현을 체험했습니다. 우리의 식욕을 돋우어 하늘로 가도록 하기위해 “작은 하늘”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계시의 날에 당신은 성령이 어떠한 신부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리라고 생각합니까?
마음이 나뉘어진 사람일까요? 사랑이 미지근하거나 차게 식어버린 사람일까요? 예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원치 않는 사람일까요?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은 당신의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깨어있는 매 순간마다 그분이 임재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은 “그런 일은 내가 죽은 후에 일어날 것이다. 내가 천국에 가면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주님의 특별한 신부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망은 아무도 성화시키지 않습니다. 이 성령은 오늘 이곳에 계십니다. 그분은 살아계시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죽음 이전에 당신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정열적인 사랑이 솟아나도록.

로마서 8:26은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행하시는 가장 강력한 역사를 묘사해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탄식하다라는 말의 희랍어 의미는 “갈망하다”, 즉 그리스도를 더욱 더 열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하기에 그분의 존전에 앉아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깊은 탄식만 할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만이 이 세상에 있는 단 하나의 행복입니다. 나는 당신의 선하심을 맛보았고 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전부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의 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채워질 수 없는 갈급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그도 이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2008년 11월 14일 금요일

자정 일분 전

사무엘상 13장에서 우리는 사울이 모든 믿는 자가 결국에는 직면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인내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사울에게 이 중요한 순간은 이스라엘위에 불길한 전운이 감돌 던 때에 다가왔습니다. 블레셋사람들이 거대한 마병과 철병거, 그리고 최신 무기를 휘두르는 대군을 집결시켰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전 군을 통틀어 단지 두 개의 칼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사울왕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아들 요나단의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무로 만든 창이나 조야한 농기구를 임시변통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일주일 전 사무엘은 사울에게 전쟁에 임하기 전에 길갈에서 그를 기다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선지자는 주님께 합당한 희생을 드리기 위해 일주일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칠 일째가 되고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사울의 군대는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지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어떤 방식을 취했을까요? 사울이 굳게 서서 “사무엘이 도착하는데 팔 일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위에 설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까? 아닙니다. 사울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자신의 주변상황에 압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편리한 대로 조작하였습니다. 그는 사무엘이 부재중임에도 그곳에 있었던 제사장에게 희생을 드리라고 명령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을 거스르는 비통한 죄를 지었습니다(삼상 13:11-12 참조).

아닙니다 - 하나님은 절대로 늦지 않습니다. 주님은 사무엘이 길갈로 향하는 내내 모든 발걸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 선지자를 하늘의 운행 유도 시스템에 두시고 그의 도착 시간을 마지막 초까지 정확히 지정하셨습니다. 사무엘은 칠 일째 되는 날, 비록 자정 일분 전일지라도, 그날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대에 걸쳐서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백성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 하지말라”(삼상12:15 의역)는 명령을 순종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간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전적인 확신 속에 행할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듯이 보여도 우리는 두려움에 싸여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분의 말씀이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인내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사실인즉, 하나님은 거대한 블레셋 군대가 몰려들 때 사울 바로 옆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울이 처한 위기를 아셨고 모든 세부 사항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위기에 대해 자세히 주목하고 계십니다. 당신에게 몰려오는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상황이 매일 악화되는 것을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기도하며 평온한 믿음으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결코 진정한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당신의 모든 두려운 생각들을 아십니다. “나는 이 빚을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다....내 결혼 생활에 아무 소망이 없다....이 직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신에게 주시는 그분의 명령은 여전히 진실 됩니다. “두려워하거나 내 앞서 행하지 말라. 오직 기도만 하고 나를 의지하라. 나는 나를 신뢰하는 모든 자를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이 자신의 교회에게 하신 말씀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오 너희의 방패시로다”(시115:11).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불신은 치명적이고 그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시련을 통과하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대신 우리가 우리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비참한 결과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2008년 11월 13일 목요일

강력한 영적 피마자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쓰고 맛없는 약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삼켜야만 했던 피마자유처럼 치료하는 약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을 거스르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스며든 육의 정신을 역으로 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을 오직 다른 유대인들만을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악수를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옷자락이 외부인의 옷을 스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여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25:21-22)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공무원들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들, 낙태주의자들,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모든 사람의 죄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으로서의 그들-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돌아가신-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느 때라도 내가 어떤 사람 배후의 원리를 미워하지 않고 그 사람을 미워하다면, 나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곳 뉴욕시에서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를 본 적이 있습니다. 25만 명의 동성애자들이 다수가 반쯤 벗은 채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동성애자”라고 쓴 팻말을 들고 행진했습니다. 그들이 대열에서 벗어나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랑하십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크리스천에게 달려드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나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들 위에다 소돔에 내렸던 것과 같은 불을 명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보고 나서 내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불을 명하여 태워버리기 원했던 제자들과 같구나.”

동성애는 죄입니다. 간음도 죄입니다. 원한과 용서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당신의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방약무인하고 호전적인 죄인들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당신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합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십시오!

2008년 11월 12일 수요일

다니엘-다른 유형의 사람!

애통에 대해 말하는 다니엘은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다니엘 9:3-4). 한편, 다니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시대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다니엘 9:2).

다니엘은 어떻게 이와 같은 애통, 지식과 분별의 길에 이르렀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시작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말씀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말씀을 비장하고 있었기에 빈번이, 상세하게 인용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다니엘 9:13).

10장에서 이 경건한 선지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를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10:5-6).

나는 당신이 오늘 마음을 정하고 모든 근면과 결단으로 하나님을 구하기를 촉구합니다. 그리고나서 날로 늘어나는 사랑과 갈망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으로 가십시오. 애통에 대해 그분의 짐을 받기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성령이 당신에게 하늘의 복을 열어주시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내버리십시오. “다른 유형의 사람”이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가져옵니다. 다니엘이 증언했습니다.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다니엘 10:10). 여기서 어루만지다라는 말은 “강렬하게 휘어잡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그분의 손을 내게 얹었을 때 나는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그분의 어루만지심은 나의 전부를 던져 그분을 추구해야겠다는 긴박한 마음을 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인생을 어루만지실 때 마다 일어납니다. 그 사람은 무릎을 꿇게 되고 주님을 추구하는데 사로잡혀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는 종종 왜 하나님이 이같은 긴박함으로 특정한 사람을 어루만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어떤 종들을 그분을 굶주려 찾는 자들이 되고 반면에 다른 신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갈까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을 받은 종들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왜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안수하시고 그렇게 그를 어루만지셨을까요? 왜 다른 사람들은 듣거나 보지 못했던 것을 이 한 사람은 보고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선언합니다. “이 환상을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환상은 보지 못하였어도”(다니엘 10:7).
하나님은 자신의 메시지를 대언할 음성이 필요하셨습니다. 자신의 부름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기도하는 종을 원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 씩 경건하게 기도해왔습니다. 이제 그가 강을 따라 걸을 때, 그리스도가 자신을 그에게 계시하셨습니다(다니엘 10:7-9 참조).

하나님은 다니엘로 그분의 신탁을 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1. 다니엘은 결코 기도를 중지하지 않았습니다(다니엘 10:2-3 참조).
2. 다니엘은 사회와 교회의 영적 쇠퇴를 슬퍼했습니다(다니엘 9장 참조).
3. 다니엘은 죄를 비호하거나 은닉하기를 거부했습니다(다니엘 9:4-5).

2008년 11월 11일 화요일

당신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구원받은 지 몇 년 된 사람이 있고, 일 년 된 사람도 있고, 몇 개월 또는 몇 주 된 사람도 있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당신이 구원받아 참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휘하의 훌륭한 군병이 되려면 단지 구원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이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당신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 시대에 어떤 믿는 이들은 성령이 계신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사도행전 19:2). 이 사람들은 구원받았지만 성령 충만이나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우리가 성령의 권능과 사역을 통하여 구원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례를 주시고, 충만케 하시고 , 소유하신다고 성경이 말씀 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기 전까지는 세상으로 파송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분명 순전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그리스도를 전파하였고 개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그 이상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원하여 죽고자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위해서 세상으로 파송하는 데 그분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이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중의 어떤 것도 충분치 못했습니다. 분명히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진실로 성령을 원하십니까? 당신에게 성령이 임하여 불로 세례를 주시기 원합니까? 이것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성령의 권능과 인도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리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그분이 지금도 세례를 베푸시고, 지금도 그들의 몸을 소유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강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저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사도행전 2:38-39).

매일 매 시각, 전 세계의 많은 무리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이 약속을 읽었거나 설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청구하며 부르짖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세례는 특별히 말세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행 2:17-18). 구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하나님은 당신이 성령 안에서 살고 행하기 원하십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해 누군가를 찾으러 뛰어다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병든 자에게 안수하고 귀신을 쫓아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과 권능으로 충만한 증인들로서 부름 받았습니다.

2008년 11월 10일 월요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받음

그리스도가 최고의 통수권자로서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들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분에 의해 통치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사전에 의하면 통치하다는 “인도하다, 지시하다, 권위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과 행위를 통제하다”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모든 사고와 말과 행위를 포함한 모든 우리의 행동과 행실을 예수님이 통제하실 수 있도록 허용하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세상의 나라들을 통치하십니다. 성경은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시66:7)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시103:19).

속지 마십시오. 우리나라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또는 다른 어느 인간적 권위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월스트리트나 재벌들에 의해 통제받지 않습니다. 지상의 권력이든 초자연적인 권력이든, 어느 권력도 미국을 위시한 다른 나라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다스리십니다. 왕 중의 왕, 주 중의 주로 좌정하시고 그분의 하늘 보좌에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미국 전역에서 우리는 엄청난 도덕적 타락, 사교들의 출현, 만연한 성적 일탈, 격노하도록 방약무인한 무신론을 목격합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지옥의 무리가 우리나라를 서서히 잠식하며 사탄의 암흑 왕국을 세워나간다고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확신시켜 줍니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이사야14:5, 12, 15-16).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탄에 대해 추호도 불안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보듯이 악이 우리나라를 잠식하고 있는 것에 대해 초조해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탄은 영구히 사라져 영원토록 고통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왕국 즉, 그분이 자신의 백성의 심령가운데 구축하신 왕국에서 최상의, 최강의 통치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 우리 마음의 영역에서-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시고 치유하시고 우리의 행동과 행실을 통치하시며 최상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이사야 17:21). 이 구절은 예수님의 통치가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왕의 통치에 항상 더욱 더 순종하여야만 합니다.

당신은 매일 매일 당신에 대한 예수님의 통치가 증가되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더욱 더 그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있습니까?

당신은 의아해 할지 모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늘에 계셔서 아버지 우편에서 전적인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신다면 이 지상에 있는 그분의 왕국은 어떻게 통치 하실까? 히브리서에 그 답이 있습니다. 저자는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히 1:1-2 참조).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천상의 말씀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기록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성경은 우리 통치자의 규이며 이를 통하여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를 받은 사람의 증언을 듣기 원한다면 시편 119:11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05, 123, 133, 162절도 참조하십시오).

2008년 11월 7일 금요일

은혜 안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

에베소서 4:3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위해 우리 삶에서 제거해야할 요소들의 목록을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바울의 목록에 있는 요소들을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도는 우리가 은혜안에서 성장하려면 이러한 요소들을 절대적으로 직면해야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심령의 문제점을 무시해버린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 것입니다. 당신의 성장은 지체되고 당신은 영적 식물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바울의 목록 중 첫 세가지, 악독, 노함과 분냄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것들 입니다. 악독(bitterness, KJV)은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기 거부하거나 지난날의 원한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함은 복수하려는 의도를 품고 원한의 견고한 진을 쌓는 것입니다. 분냄은 격노를 말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분출되기도 하고 시간을 두고 서서히 타오르기도 합니다. 비방하는 것은 끌어 내리는 말로서 사람을 세워주거나 세워주는 말을 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비방하는 것은 악의가 있고 상처를 입힙니다.

떠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돌연히 격발하는 것으로 불필요한 소란, 목적 없이 요란한 소음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큰 문제를 야기 시킬 때 또는 돕거나 치유하려고 하기 보다는 소동을 일으킬 때 떠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록 중 마지막 요소는 악의입니다. 악의는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많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악의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하나님이 벌주시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으로 대부분의 경우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이 “너희는 이 모든 악들을 버리라”고 말할 때 일시에 고쳐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걸리는 성장의 문제로서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러한 악을 제거하는데 실패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속히 회개하고 사람과 화해하고자 결단할 때 차츰 이러한 문제점들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2008년 11월 6일 목요일

은혜안의 폭발적 성장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사람들을 세워 주려고 할 때 은혜 안에서 우리의 성장은 폭발적일 수 있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29-30).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덕을 세운다’는 말의 어근은 ‘집을 짓는 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의 어근은 ‘세우다’라는 어근에서 온 것입니다. 요약하면 덕을 세우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하여 세 가지 요점을 말합니다.
1.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야합니다.
2.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합니다.
3. 우리의 말로 성령을 근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영적 거인 몇 분의 전기를 읽으며 깊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 경건한 남녀들은 천상의 마음을 지녔고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이었고 자주 기도하고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헌신이나 기도의 강렬함뿐만 아니라 또한 이것들이 그들의 삶에서 맺은 경건한 열매들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는 이들 영적 거인들 사이의 공통적인 맥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주관심사가 거룩한 대화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순결한 마음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기로 선택할 때 은혜 안에서 성장합니다. 이 은혜안의 성장은 나의 가정에서 내 배우자와 내 자녀들에게 날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가정은 모든 문제와 모든 오해가 “항상 옳고자 하는 나의 시도”를 자진하여 포기함으로써 극복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터전이 되어야만 합니다.

옳아야만 할 필요가 결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어느 때 보다 더 누리도록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논쟁을 이기려고 애쓰기보다 서로를 세워주려고 노력할 때 모든 논쟁, 모든 소위 “옳다”는 것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모두 성장합시다. 은혜 안에서.

2008년 11월 5일 수요일

다른 유형의 사람들

구약에서 경건한 사람들의 용맹에 대하여 읽을 때, 내 심령에 불길이 일어납니다. 이 종들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명분을 위하여 큰 책임 부담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을 당혹시킬 만한 대단한 일들을 행했습니다.

이러한 옛 성도들은 바윗돌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한발작도 나아가기를 거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안의 타락한 상황을 보고 며칠 씩 울며 슬퍼하였습니다. 그들은 먹거나, 마시거나 몸을 씻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머리채와 수염을 쥐어뜯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 거리에 365일간 옆으로 누워 계속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성도들이 어디서 이러한 일들을 할 영적 권위와 힘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들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종들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그들과 그들의 여정에 대해 전혀 연관 지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그들과 전혀 다른 유형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나를 괴롭힙니다. 성경은 이러한 구약의 인물들의 용맹이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보여주기 위하여 또는 타락한 백성들을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본보기로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도들은 특별한 품종의 사람들 입니까? 이들은 예정된 운명을 지니고 우리 세대가 알지 못하는 초능력을 부여받은 슈퍼맨들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경건한 선조들이 당신이나 나와 똑같이 육체의 성정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야고보 5:17 참조). 사실인즉, 그들의 본보기는 우리가 따라 갈 수 있도록 한 모형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 위에 안수하시도록 만드는 어떤 것을 성품 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바로 이와 같은 성품을 찾으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에스라는 자신의 온 나라를 일깨웠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에스라가 증언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에스라 7:2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뻗어 에스라를 감싸고 그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에스라에게 이 일을 행하셨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에는 수 백 명의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동일하게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이 한 사람에게 그분의 손을 얹고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건축하기 위해 오만 명의 사람을 치리하도록 했을까요?

성경이 대답합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결심하였었더라”(에스라 7:10). 그것은 간단합니다. 에스라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준행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서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씀을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모든 것을 준행할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라에게 손을 얹기 오래 전부터 이 사람은 말씀을 부지런히 구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자신을 점검하고, 씻어내고 몸과 영혼의 모든 부정함을 정결케 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에 굶주렸고 그 안에서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말씀이 자신의 마음을 준비시키도록 그는 허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그분의 손을 에스라에게 얹으시고 기름 부으신 이유입니다.

2008년 11월 4일 화요일

하나님의 특전사

여러분은 미 육군 특전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고도로 훈련된 군대중의 군대로서 헌신된 장병들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입니다. 특전사는 모두 상관들의 눈에 띄어 발굴된 자원 전투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군들이 나약하고 비겁하며 산악 전투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탈레반이 미군들을 수치스럽게 귀향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미국의 특전사를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 용맹한 부대는 단 2천명의 군대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습니다. 수일 내에 모든 적진의 위치를 추적해 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영적 영역에서도 유사한 일을 하신다고 믿습니다. 기도 중에 나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이 천상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원 정예 부대를 구성하기 위해 자신의 정규군 중에서 물색하며 군대중의 군대를 양성하고 계십니다. 이 특전사는 대적과 전투하기 위해 그분이 감동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투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사병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삼상10:26).

오늘날 하나님의 특전사는 나이가 어린 사람, 중년 또 노인들조차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은밀한 기도의 골방에서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전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떤 영적 도형에서든지, 산에서든지 계곡에서든지 전투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중의 군대는 모든 국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는 암약 중 일지 모르나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으로 공훈을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편만하고 기근이 그칠 것입니다. 주님이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모든 것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다니엘11:32).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1).

2008년 11월 3일 월요일

우리는 가족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을 청구하는 것은 복잡하고 숨겨진 신학적 진리가 아닙니다. 내 서재에는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단 하나의 주제에 대해 쓴 책들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깊이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지나치게 심오하여 독자들의 머리 위로 지나가고 말 뿐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리는 아주 간단하여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그것은 마치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 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온전히 납득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이것이 사실일수 있을까 물으시겠지요?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은 예수님과 말씀하시고 그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구했던 모든 간구를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그분은 항상 내말을 들으셨습니다,” 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는 그분의 아들이 요구하는 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를 마치 그분 자신의 아들처럼 친밀하게 받아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와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어”(요17:21-23).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가족입니다 -아버지와 하나 되고 아들과 하나 된. 우리는 자녀로서 갖는 유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지닌 채 입양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능력과 자원이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공식이 아닙니다. 단순히 입 밖에 냄으로 능력이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이 우리의 간구를 지시고 자신의 공로로 인해 아버지 앞에 들고 가시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분은 변호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아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 능력이 있고 우리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완벽한 신실하심의 수혜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