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31일 수요일

주님의 마음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모든 일은 깊고, 저의 인생을 변화시킨 예수님과의 만남으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1957년에 성령님께서 제 안에 애통하는 심령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저는 제 자유시간을 모조리 장악했던 텔레비전을 팔고, 일년동안 세상의 모든것으로부터 차단시키고 온전히 기도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게 고통중에 있는 세상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제게 뉴욕으로 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저는 순종했고, 뉴욕의 거리를 걷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갱단, 마약중독자와 술중독자에 대한 하나님의 무거운 마음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몇 년전에, 하나님께서 저를 더 깊은 교제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수 개월 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의 모든 것 계획, 야망 심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마져도 그의 발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한번 제게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은 오직 기도와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헛된 것입니다.

제가 8살이었을 때, 캠핑 수련회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캠핑장이나 크리스천 수련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텐트나 작은 오두막이 교회에서 부담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저와 그웬은 펜실베니아 주의 체리트리 지역에서 열린 “리빙 워터스 캠프”에 가곤 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극장에 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충만하여 캠프에 오곤 했습니다.

거의 매일 밤 이루어진 집회에서는 예수님께서 강력하게 나타내시어 모든 사람들이 주님앞에 달려가 무릎꿇게 하였습니다. 저는 한번 지푸라기에 무릎꿇고 하나님의 임재하심 중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전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너의 삶을 너의 생명을 나에게 주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으로 가득 찬 뜨거운 믿음으로 그 캠프 집회에 온 성도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지금 사역을 하고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고 저는 수 시간동안 울며 뛰며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섰을 때 저는 그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이 내 삶을 인도하시고 계셨고 그의 마음이 나의 영에 들어왔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의 마음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어깨위에 주께서 짊어지셨던 마음의 멍에를 짊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 짐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빛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부터 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사도행전 9:3-4).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임재하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그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에 바로 사도행전 9장 6절에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살아계신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을 때 당신은 전략이나 온갖 방법을 가르치는 세미나는 필요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거하시며 “언제… 이곳으로, 저곳으로, 이렇게 하거라”라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려주실것입니다.

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악한 인류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이 올때면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기 위하여 사람들은 바위와 산이 자신들에게 떨어져달라고 울부짖을 것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요한계시록 6:15-16).

타임스퀘어 교회에서는 죄에 관한 설교를 비교적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교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죄를 내려놓았더니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같지 않은 내 안의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합니다. 설교하는것 만으로는 죄를 미워하게끔 만들 수 없습니다.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하심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게 합니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자랑합니다. “심판의 날에 나는 엎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나쁜점들까지 모두 들고 당당하게 설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나타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1).

사도요한은 우리의 “형제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요한계시록 1:9)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거룩을 목격하였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몸을 돌이켜…보았는데…인자 같은 이가….그의 눈은 불꽃 같고…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말라”(요한계시록 1:12-19).

당신은 요한처럼 주님 안의 의롭고 많은 환난을 견뎌낸 형제요, 자매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 누구도 해처럼 빛나는 능력의 주 앞에서 바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글라스 없이 밝은 해를 바로 쳐다볼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얼굴을 바로 들고 쳐다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날에 우리를 만지시고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시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될것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다서 1:24).

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생명의 약속 by Gary Wilkerson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한복음 5:45).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데 소망을 둔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했을때 우리를 고소하는 모세의 목소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은 왜 율법에 소망을 두지?”라고 생각하고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크리스찬들은 항상 율법에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명령을 주셨으니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할때가 바로 크리스찬들이 율법에 소망을 걸 때입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잠언 13:12). 우리의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소망을 모세에게 걸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데 소망을 둔다면 우리는 참 소망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 생명의 약속입니다. 모세의 목소리로 “너는 거룩하지 않아”라는 고발을 당할 때 우리는 계속 개인의 노력으로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나 절망, 고발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믿음을 세우는 반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고발을 들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짓눌러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을 것입니다 ; “그 거짓말을 듣지 말아라.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한복음 8:11).

2014년 12월 27일 토요일

믿음의 조상 by Claude Houde

만일 당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기적과 신성의 삶을 갈망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아브라함에 대해 세밀하며 열정적인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는 단지 구약의 한 평범한 인물도 아니며, 명단에 기록된 한 이름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믿음의 조상”, 즉 우리의 표상이며 모형이자 다림줄이며 기준이 되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서 4:12 참조)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이 생동적 부르심을 선포했습니다.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이사야 51:1-4)

당신은 이 구절을 읽을 때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시사하고 있다는 감동을 받습니까? 예, 맞습니다. 학자이자 사도이며 탁월하고 영감에 넘치는 서필로,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세상을 뒤바꾼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로마서 4:16)

독자 여러분, 베일을 벗어버리고 보화를 발견합시다. 영원의 가치를 지닌 영적 금광인 부동의 믿음을 파헤치기 위해, 태초의 책인 아브라함의 믿음의 창세기로 들어갑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세기 12:1-3)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성품과 인생을 특징지었고 단정 지었던 이 부동의 믿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여러분이 방금 읽은 놀라운 언약에 대한 완벽한 성취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성서적 측면과 세계적 관점에서, 아브라함은 역사상 수백만 유대인들의 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믿음을 지켜온 모든 성도의 영적 조상이기도 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십억이 넘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성장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이 보배로운 각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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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클라우드 어드(Claude Houde) 목사님은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New Life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s의 주된 강사입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New Life Church는 소수 인원으로 시작해서 개신교 교회로서는 성공하기 힘든 캐나다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지금은 교인 수가 3,5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이것이 거룩입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거룩함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 (로마서 1:3-4) 진정한 거룩은 그 배후에서 그것을 운영하는 영이 있습니다. 그분의 백성 안에서, 또는 그들 가운데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곳마다, 당신은 그들 안에서, 순종보다 더 많으며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보다 더 많고, 경건치 못한 것들로부터의 차단보다도 더 많이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순종의 영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순종이란 단지 옳은 일을 행한다든지 그릇된 일을 회피한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너무도 즐기는 성도에게는, 그를 자동적으로 빛으로 인도하는 영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3:20-21)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 임재의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도 그는 눈부신 빛을 발산하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거룩의 영이 이렇게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숨겨진 것들이 드러내어 지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지구상의 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 종은 빛을 향해 달려나가며, 그가 순복할 때에는 그리스도 임재의 빛만이 그에게 순전한 영광이 됩니다.

그러한 영의 동기를 향한 거룩의 영의 언어를 들어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한일서 3:22) 헬라어 번역으로는 이 구절이 매우 강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며 큰 열정으로 그것들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교회에서 이 거룩의 영이 어떻게 역사하는지에 대해 제가 믿는 바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형제자매들은 정복자의 미소를 지으며 승리 안에서 당신의 교회에 나옵니다. 그들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저는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순종하며 흠 없이 걷는 것을 제 마음에 심어주고 계십니다.” 당신이 이것을 목격할 때 당신의 영은 기뻐하며 당신 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또 한 종이 그분께 기쁨을 가져다 드리는구나! 내 형제자매가 천국을 기쁘게 하는구나!” 당신의 기쁨은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자유마저 초월하고, 마귀의 권능으로부터의 우리의 구원을 넘어서 확산됩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어떻게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지를 우리가 배우는 지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의무감이나 비굴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순종의 영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쁨 안에서 즐거워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므로 즐거워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2014년 12월 25일 목요일

하나님의 임재

예수님의 임재에는 죄를 파쇄하고 쫓아내는 권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시편 68:1-2)

이것이 바로 당신이 기도 골방에서 홀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낼 때 일어나야만 하는 현상입니다. 그분의 경탄스러우며 명백한 임재는 욕정의 더러움과 매연을 폭풍처럼 날려보낼 수 있으며, 타오르는 불처럼 모든 강퍅함을 녹여내립니다. 사악함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소멸됩니다.

"산들이 주 앞에서 밀 같이 녹았도다." (시편 97:5) 이 시편에서 산들은 악귀의 요새와 완고함의 산들을 상징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친교하는 자들에게서 녹아 없어집니다. 우리는 지칠 때까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죄를 폭로하며 죄를 파쇄하는 당신의 권능을 우리 모든 교회에 보내주소서!” 그러나 그분의 임재를 성전 안으로 초청할 수 있는 순결한 마음을 지닌, 기도하는 거룩한 남은자들의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높임 받으실 때까지는, 그러한 기도가 아무 소용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점차 증가되는 죄에 대한 증오심, 즉 죄를 극복하지 못한 당신의 실패에 대한 날카로운 죄의식과, 우세하는 당신의 죄성에 대한 깊어지는 각성이 있기 전까지, 당신은 예수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지니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죄에 대한 부담감은 점차 줄어듭니다. 그분의 임재로부터 더 멀어질수록, 그들은 더 대담해지고 더 교만해져서 더욱 수월하게 타협하는 삶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함으로써 변화되고 정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누가복음 13:26-27)

그분 임재 안에서 먹고 마신 자들은 실제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가르치실 때 거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 입의 말로 인해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 아래 거했었다고 그들이 시인하지만, 그들이 변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도 자신들의 죄성과 강퍅함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눈이 멀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내게서 물러가라!” 그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강력히 드러내시어 그분의 영광과 임재를 발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하나님의 성도들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요. 마음의 질병인 죄의 추악함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치명적인가요! 당신은 주님께 감히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까? “저는 당신의 임재가 실제였던 교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당신의 거룩한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오히려 그분의 임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면, 그것이 당신께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 12월 24일 수요일

진정한 부흥

최근에 어떤 네 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지난해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을 때, 우리 교회는 죽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넷은 기도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했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위해 불타오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모임은 열 명으로 불어났고,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 집사님들과 목사님들을 우리 기도 모임에 초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진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진정한 부흥이란, 예수님을 향한 그러한 강렬한 사랑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려는 새로운 열망과,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나는 순종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태도에 의해 판정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부흥이란, 개인적으로 모든 죄를 자백하고 버리며, 오직 그리스도 임재의 통로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 의한 순종적 사랑으로의 귀환입니다. 부흥은 그러한 사람들 안에서 구현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임재를 그들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이 언제나 그들을 통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꼭 와서 보셔야만 합니다. 수천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어요. 우리 교회는 완전 만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찬양은 참으로 근사합니다.” 저는 이러한 몇몇 교회들을 큰 기대를 하고 방문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 모임에서 예수님의 실제적 임재를 감지하거나 경험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회중이 진정한 회개를 하는 것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만일 한 선지자가 앞에 나가 이혼, 간음, 사통, 그리고 그러한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악과 혼합된 음악에 대해 폭로했다면, 회중 절반이 걸어나갔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들은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 교회의 어떤 사역자는 약 오십 명의 사람들을 기도실로 초청한 후 판매 광고를 했습니다. 그는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그 교회에 등록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교회에는 그분 임재의 수단이나 통로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찬양과 찬송이라고 일컫는 것은 단순히 소음에 불과했고, 저는 그 무리가 소리쳐 오락을 구할 때가 곧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가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오직 스릴만을 원합니다. 제가 이러한 모임에서 나오면서, 저는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았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순종치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명백하기에, 그들은 진리 안에서 그분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을 사랑한다고는 말하지만, 그분께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요한복음 14:23)

2014년 12월 23일 화요일

그리스도 임재의 충만

“당신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어느 성도에게라도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그럼요, 당연하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말만 가지고는 그분 말씀의 거룩한 빛 안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확연히 드러내 줄 수 있는 두 가지에 대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 두 가지 증거가 당신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단지 말 뿐이며, 행함과 진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두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당신의 순종과 (2) 당신 삶에서의 그분 임재의 나타나심입니다.

이 구절은 그 모두를 설명해줍니다. “내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여기서 “나타내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비추다, 또는 터뜨리다”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그리스도의 임재를 발산시키는 도구 또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흔히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여, 당신의 임재를 우리에게 보내주소서. 저희 가운데 오시고, 저희에게 임하시어 행하소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소서!”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그렇게 단순히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임해서 회중을 놀라게 하거나 압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뿜어주셔서 제사장들이 서서 사역할 수도 없었을 만큼 구약의 성전을 가득 채웠던 영광의 구름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잊고 있으며, 그분의 영광이 임한다면 그것이 우리 심령에 드러나야 하며, 우리 몸을 충만케 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분위기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사실상 천국조차도 그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그분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리고 그분의 성전인 성화된 몸을 통해 나타내어집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6: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19) 왜 우리들의 교회에는 예수님의 임재가 아주 적거나 아예 없는 걸까요? 왜 그토록 많은 교회에 생명이 없을까요? 왜냐하면, 그곳의 목회자나 성도들, 또는 그들 모두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단체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생명이 없으며 기도하지 않는 목자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죽음이 번져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는 여전히 성전이므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과 그분 임재의 도구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은 각 성도의 책임입니다. 당신의 교회가 영적으로 죽어있다 할지라도, 당신은 그리스도 임재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2014년 12월 22일 월요일

은혜에 대한 갈망 by Gary Wilkerson

저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성경은 그것을 증명합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실 때,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누가복음 6:18)고 기록했습니다. 이 군중은 그들을 치유할수 있는 이 은혜의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누가복음 6:17) 이 고통 가운데 있었던 군중은 선생으로부터 더욱 분투하라는 설교를 듣기 위해 그토록 먼 거리를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하게 살려는 그들의 고투로 인한 낙심과 질병, 그리고 절망으로 이미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은 단지 “선한” 사람들만 모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생살이의 한계선에 달해 있었고, 그들 삶에서의 참담한 상황으로 인해 주위로부터 소외당했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들을 생명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이 목마른 무리에게, 은혜에 대한 예수님의 정평은 실제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분은 은혜에 대해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를 치유하심으로써 그것을 실증하셨습니다.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누가복음 6:19)

제가 어렸을 때는 겸손, 정결, 그리고 자비를 얼마나 잘 실행했는지에 의해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정도를 가늠했습니다. 만일 저 자신이 도전적으로 변해가면, 저는 “나는 더욱 겸손해지고 온유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제게 음란한 생각이 들어오면, 저는 “어떻게 해야만 내가 항상 정결한 마음을 유지할수 있을까?”라고 자문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처럼, 저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자비로운 언약을, 제 힘으로 지켜보려는 율법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만일 제가 팔복을 잘 “준수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리, 너는 축복받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뒤바뀌었고,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군중을 보셨을 때, 그분은 이미 그들 심령이 가난했으며, 겸손으로 무릎 꿇었고,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선한 삶을 살려는 노력으로 탈진되어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분은 그들에게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주께서 깊은 흑암의 공허에 창조를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피폐한 죄인들과 삶의 무게로 녹초가 된 사람들에게 신성한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이렇게 위로하셨습니다. “너희는 애통 가운데 이곳에 왔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하나님 보시기에 축복받았다고 말한다. 너희 가정이 축복받았고, 너희의 수고가 축복받았으며, 너희의 깊은 영혼이 축복받았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혁신적인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그들은 오직 구약의 말씀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희는 저주받았다! 너희는 신명기의 율법에 따라 살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너희 삶이 축복받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정 반대의 말씀을 그들에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내게 예배를 드리거나 고백하기 전에, 나는 이미 너희를 축복했단다!”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용서의 씨앗 by Nicky Cruz

저는 우리 가족이 체험했던 기적을 당신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저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우리가 어렸을 때 살았던 환경과의 차이와 다른 점을 당신이 느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 저는 제 형제자매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서로 대화하는 것보다 제가 더 원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제 고향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를 방문하는데, 그것은 저의 가장 소중한 추억들 중 하나입니다. 제가 집에 갈 때면, 저는 더이상 전도사나 연사인 니키 크루즈가 아니고 단순히 형제입니다. 저는 그저 가족의 한 구성원일 따름이고,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사실상, 제 두 형제는 푸에르토리코에서 목회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번도 제게 그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제가 집에 갈 때마다 그저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압니다.

제게는 가족과 함께 늦은 밤까지 먹으며, 웃으며, 담소하며, 기도하며, 울었던 수많은 기억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새벽 한 시까지 깨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는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기쁨을 나눕니다. 그것은 마치 큰 축제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행복하고 서로에게 스스럼없으며 서로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으로 들어오셨을 때, 그분은 폭발과도 같은 사랑을 갖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자비와 용서의 폭포수를 여셨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과거의 많은 아픔이 있으나, 어느 누구도 분노의 감정을 지니고 있거나 원한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차간에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후회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분은 장래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가족들을 보는 것은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형제자매들은 오래전의 비통함과 분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과 행위로 인해 상처받은 남편과 아내들은 그 아픔이 점점 커져 곪아 터지게 하며, 암세포와도 같이 그들을 좀먹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심령에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을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마음속에 거하기 위해 오실 때, 그분은 용서 이상의 것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용서의 씨앗을 남기십니다. 초자연적 씨앗은 죄를 지울 뿐 아니라 죄가 가져다준 고통까지 지워줍니다.
저는 우리 가족을 위해 예수님께서 해주신 것에 대해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가져다주신 용서와 자비, 그리고 은혜는 우리를 다시 화합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와 똑같은 것을 여러분의 삶에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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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니키 크루즈(Nicky Cruz)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사이자 저작가입니다. 그는 1958년 뉴욕에서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을 만난 후, 폭력과 범죄의 삶으로부터 예수님께로 돌이켰습니다. 그의 극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는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저서 “The Cross and the Switchblade (십자가와 칼)”에서 처음 알려졌으며, 그 후에 발간된 그의 베스트셀러 자서전 “Run, Baby, Run (달려라 니키)”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2014년 12월 19일 금요일

가엾이 여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오미는 마지막으로 룻에게 집으로, 모압땅으로 돌아가도록 권장하지만 룻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룻은 그를 붙잡았더라”(룻1:14). 이 구절은 마치 여종이 주인의 허리를 붙잡고 절대로 놓지 않겠노라하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룻은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룻이 유다 땅으로 넘어가자마자 그녀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표지판은 없었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는 축복의 장소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다음 끼니는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들이 도착한 지역은 수확의 시기였습니다.

룻은 무일푼이었고,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덕목있고 선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여인이었습니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기 2:2). 정말 몹시 가난한 사람들만 그런 일을 하던 때였습니다. 법적으로 땅의 주인들은 가난한 사람들도 수확도 하며 남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땅의 모퉁이에서는 수확을 하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 19:9-10).

룻의 헌신은 고향을 떠나 시어머니의 땅으로 오게하고 그녀로 하여금 최저임금 직업의 일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가난 이하의 빈곤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자세히 보십시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당신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죽기까지 짊어진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악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린도전서 4:9-13)

그러나 여러분, 룻을 측은하게 여기거나 가엾게 여기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그녀는 그리스도를 곧 영접할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014년 12월 18일 목요일

경계를 건너는 것

룻기 1장에서 나오미, 오르바 그리고 룻은 모압과 유다의 경계지역에 도착하여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좇아 온전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선택할 것인가? 그들의 이름의 뜻에서 우리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이름은 은혜, 오르바의 이름은 고집센, 그리고 룻의 이름은 친구, 동료 라는 의미입니다.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의 약속을 시험하기 위해 대면을 합니다. 그들에게 유다로 간다는 것은 정이나 몇마디 말로는 표현 못하는 여러가지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보상이나 큰 뜻을 보장받지 못하지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유다로 시어머니와 함께 끝까지 동행하거나 다시 모압으로 돌아가는 두가지의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안락함과 번영과 성공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기 보다는 고생과 가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이나 물질적인 부에 대한 보장은 없고 오직 믿음으로 걷는 길만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사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권하고 있었습니다.(룻기 1:8-9 참조)

오르바와 룻은 이 얘기를 듣고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룻기 1:9-10). 오르바의 이름에서 온 의미에서부터 우리는 그녀가 울며 통곡하며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강하게 말하였지만 그녀는 포기하고 우상숭배의 모압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녀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저는 나오미가 오르바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오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여운 아이구나! 완전하신 하나님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의 쾌락에 더 마음이 있구나. 나와 함께 간다고 하여도 늘 후회하면서 슬퍼하겠지..”

그리하여 나오미는 “돌아가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르바는 마음의 결정을 내립니다. “저는 모압으로 돌아가서 저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섦기겠습니다. 저는 일단 제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저의 과거를 청산할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맞추되”(룻 1:14). 이 구절의 원어를 보면 문장의 마지막에, “돌아갔더라” 라고 더해져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몇몇 분들은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에게 입을 맞추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속의 무언가 이를테면 예전의 세상적인 친구들 또는 옛 사랑들이 당신을 끌어당기고 있습니까? 

나 오미는 오르바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룻기 1:15). 이같이 어떠한 우상이 당신의 마음에 자리잡아 있습니까? 여러분의 과거 속에서 당신이 내려놓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2014년 12월 17일 수요일

기근의 끝

나오미는 유다 땅에 기근이 멈추고 하나님께서 양식과 축복을 더하여 주셨다함을 듣고 과거에 영혼을 채워주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거룩한 곳,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모압과 그의 우상숭배, 죽음 등이 지겨워진 상태였습니다.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하여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룻기 1:6-7)

나오미의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그들의 부모님과 친지,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을 만나주시는 유다로 떠났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민족을 다시 한번 만나주십니다! 다시한번 기근의 끝이 왔습니다! 우리 타임스퀘어 교회와 전 세계의 교회들에서는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을 만나주실 때에는 “그들에게 양식을 주십니다.”

말씀의 마지막 기근이 있을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모압인, 육신적인 것, 나태, 냉담, 쾌락 그리고 성공으로 떠났을 때 거룩한 하나님의 민족 또한 견디어냈습니다. 그들은 자화자찬하는 텔레비전 방송용 설교자들과 하나님의 집을 휩쓴 추악한 음행 그리고 강대상 위의 어리석은 목회자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크리스천들의 비웃음 등 모두를 인내를 갖고 견뎠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중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의 민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타임스퀘어 교회가 왜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로 가득차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소문이 납니다. 기근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양식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그 양식을 맛보지 못하였다면 지금 바로 모압을 떠나 하나님께서 그의 민족을 만나주시는 곳으로 달려가십시요!

그것이 바로 나오미와 그의 두 며느리가 한 것입니다. 그들이 모압으로부터 유다로 향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았고, 하나님께서 그 땅의 민족을 만나주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수 천명의 사람들이 얕고 가벼운 번영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자기자신의 욕망을 위한 믿음과 세상속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의 갈등 속에서도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 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2014년 12월 16일 화요일

룻기

룻기는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 여자가 자신이 섬기는 주인의 마음을 얻은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는 룻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예언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영접할 때 룻이 보아스의 마음을 얻은것과 같은 과정을 겪어야하기 떄문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린도전서 10:11). 바울은 이렇게 성경 속의 이야기가 그저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룻기1:1).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이스라엘인 엘리멜렉,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유다를 떠나 모압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엘리멜렉은 그곳에서 죽었고, 나오미의 두아들은 오르바와 룻이라고 하는 모압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모압에서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런데 모압은 악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우상숭배의 나라였습니다. 모압족속은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모압이라는 이름은 간음, 사통,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민족을 유혹하여 결국에 24,000명을 전염병으로 죽게 만든 것도 모압 족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압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명령하였습니다.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열왕기상 11:2).

영 적인 시각으로 볼때에 하나님 말씀의 기근이 있을 때 똑 같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민족들은 세상으로 향하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가고 세상적인 사람들과 혼합되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의 기근은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세상적인 것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차가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진실한 영적인 양식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가지만 듣는 설교는 얕고 가볍습니다. 즉 적절한 영양소, 생명의 물이 없고 즐길만한 엔터테인먼트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들에 불륜, 이혼, 세상적인 음악, 비성경적인 철학, 뉴에이지 가스펠이 급속히 퍼지고 있는 이유고, 우리 청년들은 마약을 사용하며 점점 성적으로 난잡해 지는 것있니다. 교회안에서 말씀의 기근은 믿는이들을 우상숭배의 장소인 모압으로 몰아가버렸습니다. 모압은 나오미의 아들이 일찍이 죽었듯이 청년들이 죽는 곳입니다.

2014년 12월 15일 월요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축복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by Gary Wilkerson

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마음 속 깊이-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하기엔 너무 좋아 의심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신이 의로운 그리스도인임을 보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로마서 6:15-17).

바울이 이 설교에서 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속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전처럼 계속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7:4).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우리는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함과 평강 그리고 기쁨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얽매임에서 풀려나고, 다윗처럼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시편 40:8)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굶주린 영혼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어있는 어떤 것에서 생명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안의 죽고 시들어진 영혼에 부활과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사람의 지혜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바울이 언급한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구절처럼 – 슬픔과 상처로 애워싸인 당신의 삶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축복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은혜중에 주신 새 생명 안에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의 삶에 축복과 은혜를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받으십시요!

2014년 12월 13일 토요일

그날이 올 것입니다 by Jim Cymbala

사도 바울은, 어느 날 우리의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나리라.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3-14) 나무, 건초, 밀짚들이 불타 없어질 때, 금과 은, 그리고 보석들은 견뎌내고 남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일의 양으로 시험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출석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일의 질에 모든 초점이 맞춰질 것입니다.

시카고 무디 교회(Moody Church) 목사였으며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라디오 방송의 연사였던 워렌 워스비(Warren Wiersbe)는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 사역자들에게 이 구절에 대해 그의 흥미로운 관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물질들에 있어서, 물론 한 그룹은 불연성이고 다른 그룹은 그렇지 않다는 것 외에 서로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저는 나무, 건초, 밀짚들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집 문만 열면 있는 것들이고, 아니면 기껏해야 몇 마일 거리 밖에 있습니다. 어떤 숲에도 어떤 농장에도 그것들은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금과 은, 그리고 보석들을 원한다면 땅을 파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은 많은 노력을 쏟아야만 그것들을 찾을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무 데나 굴러다니지 않습니다. 당신은 땅속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게는 이 말이 심오하게 들립니다. 나무, 건초, 밀집을 사용하는 영적 “공사”는 쉽습니다. 그것은 고생도 산고도 없는, 약간의 노력과 약간의 열심만으로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척척 쌓아서 잠깐동안은 그럴듯하게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심판 날에 견딜수 있는 것을 세우기를 원한다면, 그 일은 더 많은 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 날에는 당신 주위의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케팅 담당자가 어떠한 권고를 하는지도 중요치 않습니다. 당신과 저는 “불같은” 눈을 가진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전략이 얼마나 근사했었는지를 말씀드림으로써 그분의 호의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불타는 응시를 대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담대하며 신실했는지를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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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뉴욕의 한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건물에서 이십명도 채 못되는 성도들과 함께 브루클린 테버네클(Brooklyn Tabernacle)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태생이며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 그리고 게리 윌커슨 목사님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2월 12일 금요일

순종의 선을 넘어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누가복음 22:31-32)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걷고 계셨을 때, 그분은 험악한 세력의 맹렬함에 대해 잘 알고 계셨으며, 사탄이 주님의 제자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지옥의 온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공격해 오는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지금 영적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분쟁의 갈등을 알거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와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굳힌 성도들을 파멸하기 위해 사탄이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여정에서 우리는 어떤 선을 넘게 되는데, 저는 그것을 “순종의 선”이라고 칭합니다. 그것은 지옥의 모든 경종을 울립니다. 당신이 절대 돌아서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의 결단을 내리며, 그 선을 넘어 순종의 삶과 예수님을 의존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어둠의 왕국의 위협이 되며 정사와 권세의 표적이 됩니다. 거룩을 추구하고 예수님과의 더 깊은 동행을 갈망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로 돌이키는 모든 성도의 증언은, 기이하며 극심한 문제들, 환란, 시험 등이 그들의 삶에 급작스럽게 돌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당신이 한때는 파트타임 제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했으나 영적으로는 태만했습니다. 당신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성도가 아니었거나, 영적인 것들을 제한했습니다. 당신은 광신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당신의 삶에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마귀는 당신을 그다지 귀찮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당신 삶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당신께 살아 역동하고, 당신은 기도하고 울며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닥친 시험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은 바뀌었습니다. 당신이 체험한 이 심령의 변화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순종의 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순종의 선을 넘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누가복음 22:32)

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마지막 건넘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강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강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 강을 건너니라." (여호수아 3:13-14, 17)

요단 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자유로 들어가는 것을 은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 자신 안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항상 우리를 무언가로부터 끌어내십니다! 사탄의 능력으로부터 탈출하여, 속박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여기서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영적 전쟁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놀라운 승리와 기쁨, 즐거움, 그리고 충만함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까지 왔을 때는, 더이상 낮의 구름 기둥과 밤의 불 기둥에 의해 인도받지 않았고 (출애굽기 13:21), 대신 언약궤에 의해 인도받았습니다. 우리는 요단 강으로 들어가는 언약궤 (예수님의 표상), 죽음으로 그 자신을 몰입시키며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언약궤를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분 안에서 세례를 받도록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요단 강을 나오면서 이스라엘 자손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상징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길갈에 진을 치매…" (여호수아 4:19) 이 시점에서 그들은 보혈로 인치심 받았고 원수의 능력으로부터 구원받았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 땅 안에서의 새 생명으로 부상했습니다.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당신은 주님의 마음을 얻었습니까?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8)

당신은 주님의 마음을 얻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가 과거의 삶을 포기하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사로잡혔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어”야 했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 사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계셨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을 얻기로 작정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울의 온 존재—그의 사역, 그의 인생, 그의 모든 삶의 목적은 오직 그의 주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쓰레기였습니다! 바울이 결혼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 “주께 속한 일들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하려는” (고린도전서 7:32) 시간을 더 많이 드리기 위해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성도들에게도 그처럼 하도록 권고했습니다. “너희가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골로세서 1:10)

그와 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성경적일까요? 어쨌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아닌가요? 사실상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은 온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유형의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나 있을 수 있는 친밀한 사랑을 말하며,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솔로몬의 아가서에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그분의 신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낫구나." (솔로몬의 아가서 4:9-10) 그분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6:5) 그분의 신부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7:10)

저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그들의 주를 너무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고, 지극히 순종적이며 다른 모든 사람과 너무도 구별되는, 그분의 마음을 황홀케 하는 거룩한 자들로 구성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구절에 사용된 단어 “ravish”는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단 한 번 보는 것으로 그분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솔로몬의 아가서 4:9) 그 한 번 보는 눈은 그리스도 한분께만 집중된 일편단심입니다.

2014년 12월 9일 화요일

애굽의 수치

여호수아 5장에서의 이스라엘은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며, 영광과 권능의 극치에 달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그들 원수의 마음은 녹아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더이상 정신이 없었더라.” (여호수아 5:1) 2절은 “그때에”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승리와 축복,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의 때였고, 그들이 들어가 막 땅을 차지하려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동을 거셨습니다. “모든 것을 멈추어라! 문제가 있다. 더 큰 승리가 눈앞에 있고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으나, 한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너희 마음속에 아직도 애굽의 수치가 남아있는데, 그것은 잘려지고 버려져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너희의 타락과 불평,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너희의 탐욕에 대해 끈기있게 참아왔다. 너희 아비들은 광야에서 열번씩이나 내 화를 돋웠으나, 나는 그 모두를 용서했다. 애굽의 철 용광로에서 핍박당하고 있는 너희를 발견했을 때, 나는 너희를 씻겨주었고 보혈로 감싸 보호했으며, 너희 원수들로부터 너희를 구원했다. 그러나 너희는 그동안 내내 마음속에 숨은 죄를 간직해왔다. 너희는 너희 마음속에 견고한 진을 치고 있는 우상을 내려놓는 일을 거부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그들 마음속에 우상숭배를 갖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희생물과 헌물을 내게 드린 적이 있었느냐? 오히려 너희가 너희의 몰락의 장막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너희 신의 별을 가지고 다녔나니…” (아모스 5:25-26) 그 수치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축복, 그리고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 마음속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으나, 또 다른 신이 그들 내면의 동기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선조들의 우상을 그들 짐보따리에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거룩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경탄스러운 음성조차도, 애굽에서 가져온 그들의 금 신상들과 신당들을 포기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상들에게 의존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계속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그때까지는 인내하셨으나 이제는 그들에게 최후통첩을 하셔야 했습니다. “이제 나는 오직 거룩한 자들과만 함께 갈 것이다. 너희 앞에 기쁨과 평강의 삶이 기다리고 있으나, 너희가 그 수치를 지니고 있는 한 이제는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을 잘라내라! 칼을 갈아라! 지금부터 육은 허용되지 않는다. 우상숭배를 그쳐라! 정욕을 쫓지 말라! 비밀스러운 그 수치를 버려라!”

2014년 12월 8일 월요일

은혜의 축복을 받으라 by Gary Wilkerson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삶이 의의 저울인 양 생각합니다. 저울의 한쪽은 그들의 모든 경건한 행위들이고, 다른 한쪽은 커져만 가는 죄와 실패 더미입니다. 만일 그들의 삶이 실패 쪽으로 많이 기울어가면, 그들은 기도를 더 해야 하고 성경 말씀을 더 공부해야 하며, 교회에 더 잘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한 행실들이 아무리 증가한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만들어놓은 의의 저울을 공평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최근 저는 운전석에서 주문하는 패스트푸드점 창구의 장면을 찍은 비디오 클립을 보았습니다. 운전석에서 한 고객이 주문을 마쳤을 때, 창구 직원이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원하시나요?” 이 말에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 그 고객은 감자튀김을 주문에 첨가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창구에서 같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하세요?” 순간적으로 당혹한 나머지 그 고객은 디저트까지 주문했습니다. 그런 후에도 또 그 직원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리고요?” 마침내 그 고객은 운전석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뇨, 아뇨, 아뇨! 더이상 ‘그리고요?’는 제발 그만하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력으로 나아갈수록, 우리는 끝내 이렇게 외치는 순간에 이르게 됩니다. “저는 ‘그리고요?’를 더이상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왜 그토록 탈진을 느끼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그들의 노력을 “죽은 행실”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방법은 절대 의나 기쁨을 산출해내지 못하고 오직 피곤함과 고통을 자아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 없고 오직 죽음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로마서 5:17) 만일 죽음이 당신의 삶을 지배한다면—만일 당신이 죄의 끊임없는 비난의 무게를 느끼며, 당신이 행하는 어떤 일에도 만족하지 못한다면—당신은 아담 성향의 퇴색된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당신의 정체성과 상반되는 그러한 오랜 성향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육적 시도가 태동합니다.

바울은 같은 구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은 (아담의 범죄를 초월하여) 더욱 위대하다.” 우리가 어떻게 이 의를 취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모든 선물을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을 넘어선 승리 안에서 살 것이다." 우리는 모든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끔 되어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고 예수님 한 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너희 자신이 만든 저울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지 아니하느냐? 나는 절대 나를 기쁘게 하라고 너희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한 가지를 하라고 너희를 불렀다. 그것은 내 은혜의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다.”

2014년 12월 6일 토요일

주님의 칼 by Carter Conlon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명이 이경 초에 진영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사사기‬ ‭7‬:‭19-21)‬

온 적군은 기드온과 그의 삼백 군사 앞에서 도망갔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나팔을 불며 손에 들었던 항아리를 부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논리와 모든 인간의 나약함, 모든 자기 비하와 무가치의 관념을 깨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다 깨부수고, 그 항아리 안에 있었던 하나님 권능의 상징인 횃불을 들어올렸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이 하나님의 증언이 가리워지는 것을 거부하며 공공장소에 서기를 결심한다면, 하나님은 기드온과 그의 군대에 하셨던 일을 당신에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적군 진영에 혼동을 가져올 것입니다! 성경은 미디안 군사들이 돌아서서 서로 싸웠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가시적 증거가 땅에서 다시 부상했기 때문에 적의 혼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승리가 오늘의 당신과 저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승리는 어떤 한 사람이, 또는 열명이나 스무명, 또는 오십명이나 백명의 사람들이 일어서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변화시키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그분이 내 마음에 긍휼을 주셔서 이 세대를 향한 목소리가 되도록 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내 부족함 속에서도 그분을 믿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드릴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리라 믿습니다.”

지금도 저는 여러분과 제가 이러한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원수가 알기에, 온 지옥이 흔들리는 것을 상상합니다!



저자 약력: 카터 칸론(Carter Conlon) 목사님은 Times Square Church의 창립 목사이신 데이빗 윌커슨(David Wilkerson) 목사님의 초청으로 1994년에 Times Square Church의 부목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2001년에 담임목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인하며 열정적인 지도자로서, 그는 세계 전역에 걸쳐 World Challenge에 의해 주최되는 Expect Church Leadership Conference의 주된 강사입니다.

2014년 12월 5일 금요일

날카로운 검

요한은 아시아 일곱 교회의 목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계시로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감추어진 죄를 보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이신 계시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요한계시록 1:5).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와 제사장”(6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팔소리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0절). 예수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입에서 날선 검이 나오고..”(16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피의 값으로 산 교회에게 날선 검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행실이 아무리 착하고, 열심으로 일하며 사랑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하는 계시가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인내를 갖고 열심으로 일하였으며, 악한자들의 행위를 용납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첫 사랑을 잃고 나른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요한계시록 2:5).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결코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거짓되고 악한 교리가 점점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요한계시록 2:16).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이웃을 섬기고, 믿음, 인내를 가진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에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새밸의 영이 침투하였습니다. 두아디라교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요한계시록 2:22).

사데 교회의 교인들은 살아있는 교회로 잘 알려졌었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나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모임이 생명으로 가득차 넘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동행하는 자만이 현실에서는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날선검으로 나타나셔서 그의 날카로운 말씀앞에 우리 모두를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2014년 12월 4일 목요일

이집트에 대한 책망을 제거하는 것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여호수아 5:2-3).

저는 지금 할례에 대한 신학적인 논평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오래된 과정은 오늘날의 교회에 큰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언약의 징표로 날카로운 칼로 포피를 제거해야 하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겠습니까!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황야에서 태어나 할례를 받아본적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 후에 그들은 수 일간 약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칼로 할례를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날카롭고 예리한 말씀에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히브리서 4:12). 말씀은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쪼갭니다 :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사도행전 5:33).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에도 :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사도행전 7:54).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할례시켰다고 합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로마서 2:29). “또 그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로새서 2:11).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이집트의 책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적인 것이므로 모두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안의 정욕과 마귀에게 지배받았던 모든 것을 쪼개고 제거하시는 성령님의 수술이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사 성령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설교가 교회에 전해질 때 날카로운 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여호수아들에게 피로 산,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날선 검 아래 세워 우상숭배와 타협의 흔적까지도 모두 제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마지막 떄의 씨뿌리는 자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기쁨으로 씨를 뿌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줄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태복음 25:20-34).

저는 지금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울며 신음하며 일하러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진실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악한 무리에 의하여 불구가 되거나 짓밟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세력에 의하여 약해지거나, 혼돈하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수확을 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세명중 두명의 종들이 심판의 때에 가득찬 열매와 완전한 기쁨으로 큰 수확물을 거둬 올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거나 간신히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두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죽은 믿음을 가지지 않을것입니다. 그들은 우울하거나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비유에서 타국으로 갔다가 오랜 후에 종들에게 돌아온 주인입니다(마태복음 25:14, 19 참조). 우리가 바로 그 종들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그 달란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예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계시를 나가서 나누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예수님의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크기에 상관 없이 모두가 나누고 씨를 뿌려야만 합니다.

2014년 12월 2일 화요일

活出基督的生命

「太初有道, 道与神同在, 道就是神。这道太初与神同在, 道就是神。…‧道成了肉身, 住在我们中间(我们也见过祂的荣光, 正是父独生子的荣光)。」(约1:1,14)

有多少的道成了肉身?全然如此!「因为神本性一切的丰盛, 都有形有体的居住在基督里面。」(西2:9) 那麽, 我们要如何靠著祂口里所发的每一句话来活呢?我们要以纸笔来一一记录主的诫命,自律遵行, 直等到它们易如反掌吗?蒙爱的信徒啊,即使经过多年来的传道後, 我还是不懂得主许多宝贵的诫命!

在我看来,讨主喜悦惟一的办法就是:把你的身体献给祂(把「己」挪开), 且让主在你里面活出祂的生命。保罗说:「现在活著的, 不再是我, 乃是基督在我里面活著。」(加2:20) 这并非在心灵上神祕的属灵生活。不!保罗透过同一节经文继续说:「我如今在肉身活著,是因信神的儿子而活…」。

神正在引领我们进入那充满奶、蜜、油和酒的美地, 即神为我们所预备在基督里种种的属灵福份。当我们的身体死亡、被钉、受辱和倚靠时, 主就得著它, 在我们里面和透过我们活出祂的生命。神必不透过肉体, 甚至「良好」的肉体而动工!祂惟有透过圣子耶稣而动工!

保罗是个「好」人, 也就是说, 他既圣洁无瑕, 又持守神的诫命。然而, 这「好」保罗必须灵里天天死亡, 好让主能成就祂的圣工, 且在他里面活出祂的生命。然而, 我们许多人都不想活出基督; 我们只想把祂当作一套衣服, 方便时穿上, 又脱下来!

活出基督并不複杂。首先, 你必须一心一意要得著祂的生命。然後, 你不要背逆神, 乃要把一切交託给祂, 相信祂必全然得著你。最後, 你必须相信, 你倒空自己, 祂就必亲自充满你!

2014년 12월 1일 월요일

진짜 믿음 by Gary Wilkerson

구약성서에 보면, 다윗이 성전의 거룩한 곳에서 경험한 후에 쓴 시편은 오늘날 우리도 많이 암송하며 은혜를 받는 시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편 91:1).

율법으로는 다윗은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었으나 그는 들어갔고, 들어간 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성경에서 나오는 수 많은 인물들이 어려운 상황들을 온전한 믿음으로 견뎌냈고, 열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응답을 받아냈습니다.

그 인물들 중 하나는 바로 예수님께 귀신들린 딸 아이를 치유해 달라고 간청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마태복음 15:22). 이 여자는 예수님께 큰 소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의 딸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15:23).

이 가나안 여자는 보내버리자고 하는 제자들과 아무 말씀이 없으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끊임없이 애원하였습니다. 성경 이야기에 익숙한 여러분이라면, 예수님께서 끈질기게 구하는 사람들의 비유를 수 차례 하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 “끊임없이 두드리라. 끊임없이 구하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믿음에 응답하실 것이다.”

이 여자가 포기를 일찍이 하는 것이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끈질기게 구하였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5:26). 이 말씀의 의미는 이방인에 비해 우선권을 가진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저는 이 여자의 반응이 더욱 놀랍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15:27). 그녀는이렇게 말하고 있던 거십니다.”예수님, 천국의 능력에 대한 갈급함이오니,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충분합니다.”

그녀가 옳았습니다. 이 땅에서 필요한 것을 충족하기에는 하나님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께서 딸을 완전히 구원해 주실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소심하게 간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작은 부스러기만한 믿음 만으로도 기적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간청하였습니다.